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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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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五色燈[오색 등]

[편집]

채 정주는 석란에게서 크리스마스 카아드를 받았다. 결혼식 청첩을 받은 이후 처음으로 접하는 석란의 소식이었다. 결혼식을 거행한 날 밤 동래로 신혼여행을 떠났다는 말은 풍문에 듣고 있었으나 그 후의 소식은 정주는 통 모르고 있었다.

석란은 학교에도 나오지 않았다. 대개가 그렇듯이 결혼을 하고 났으니 석란도 학교를 집어치우려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석란의 그 왕성한 현실주의적인 의욕을 정주는 내심 얕잡아 보고 있는 참에 크리스마스 카아드가 날아 왔다.

카아드에는,

『정주 언니, 보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예요. 내일 명동 B다방에서 언니를 기다리겠어요. 언니는 화가 나서 와 주지 않런는지 모르지만 나는 열 두 시부터 쭉 기다리고 있을 테야요. 언니와 단 둘이서 크리스마스를 축복하고 싶어요. 꼭 와요. 꼭 ——』

그런 말이 적혀 있었다.

석란이가 갑자기 자기를 보고 싶어하는 심경의 변화가 다소 기이하기는 했으나 정주에게는 석란을 만나고 싶은 의욕이 별반 들지 않았다.

석란의 그 개방적인 다변은 지운과의 신혼생활을 익살맞게 보고함으로써 정주의 자존심만 건드려 줄 것이 분명했다, 뿐만 아니다. 이날 저녁은 유 민호의 집에서 인숙이와 함께 가정적인 단란한 만찬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연히 석란에게 붙잡혀 상처 받은 자기의 마음을 건드리고 싶지는 정녕 않았다.

오늘 저녁의 만찬회는 성탄제 축하라는 명목하에 유 민호가 특별히 채 정주를 위해서 여는 잔치였다. 그리고 이 만찬회는 유 민호에게 있어서 채 정주의 의사를 최후적으로 타진하는 기회가 될 것이며 따라서 채 정주로서도 유 민호의 성실한 구혼에 대하여 그 이상 더 끌어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을 의미하고 있었다.

『제 애정의 방향이 이미 뚜렷해진 이상 나는 도저히 결혼식을 그대로 진행시킬 수가 없었읍니다. 나는 용기를 냈읍니다. 나는 오늘 나의 결혼을 손수 파괴시키고 왔읍니다.』

오 영심과의 결혼이 틀어진 날 저녁, 유 민호는 그러면서 오 영심의 손가락에 끼워졌던 약혼 반지와 두 개의 순금 목걸이를 정주 앞에 조용히 내보였다.

『채선생이 만일 이렇듯 절실한 제 생각을 끝끝내 물리친다면…… 그리고 그것은 제게 대한 애정의 결핍을 말하는 것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저는 일생을 두고 다시는 결혼할 생각은 안 하겠읍니다. 제게 대한 채 선생의 애정이 움틀 때까지 저로서는 그 저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수 밖에 별도리가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유 민호는 끝끝내 대답이 없는 채 정주 앞에서 약혼 반지와 두 개의 목걸이를 케이스에 넣어 테이블 설합에다 간직하고 쇠를 잠갔다.

『이 설합을 제가 다시금 열게 되는 날을 저는 조용히 기다리겠읍니다.』채 정주의 마음의 동요를 면밀히 계산하며 유민호는 한 달 이내에는 이 설합이 반드시 열릴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사실 유 민호의 계산대로 정주의 마음은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기를 위하여 사흘 후에 박두한 결혼식을 파괴한 사나이의 심정이 정주에게는 그지없이 송구하고 믿음직 했다.

그 인간적인 신뢰감만이 오늘의 채 정주의 자존심을 구제할 오직 하나의 길이었다. 인간적인 성실의 발판이 없는 단순한 애정의 취약성(脆弱性)을 뼈아프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유 민호와의 결혼은 이미 결정적인 것으로 정주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거리가 걷고 싶어서 집을 나선 것은 정오가 거의 가까운 무렵이었다. 크리스마스래서 번화할 줄 알았던 거리가 여느때보다 도리어 한산하다.

집을 나설 때까지도 석란과는 만나지 않을 작정이었던 정주였다. 그러던 것이 역 앞으로 해서 남대문을 지날 무렵에 정주는 후딱 석란을 만나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분명히 유 민호라는 하나의 발판이 정주의 마음속에서 정주를 굳세게 붙들고 있다는데서 부터 생긴 심경의 변화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운에게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차차 아물어 가 있다는 증거 같기도 했다.

석란의 입으로부터 신혼생활에 대한 보고를 한번 들어봐도 무방할 것 같은 안정된 심경이 점점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주는 명동 입구로 자연스럽게 발을 들여 놓았다. B다방은 시공관 좀 못 미친 곳에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서면서 정주는 석란의 얼굴을 찾았다. 들창가에서 청년 하나와 마주 앉아있던 석란이 냉큼 몸을 일으키며,

『언니!』

하고 정주를 불렀다.

정주의 곤색 외투에 비해서 무척 화려한 짙은 밤색 오우버를 석란은 입고 있었다.

『아이, 언니가 어쩌면 와 주셨네!』

석란은 정주의 손길을 한 번 꼭 쥐어 보며,

『난 정말 안 올 줄 알았어.』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석란은 부렸다.

『여전히 석란은 귀엽지!』

마음에 여유가 생긴 탓인지, 정주는 석란의 어리광을 그대로 받아주며 석란의 옆에 가만히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청년이 빙글빙글 웃었다.『미스터 박, 인제 자리 좀 내 줘요.』

『에?』

박 준모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기다리던 사람이 왔으니 자리 좀 비켜 달라는 말이예요.』

『허어, 이건 상당한 푸대접인걸!』

박 준모는 히쭉거리며 그냥 버티고 앉아 있었다.

『괜찮습니다.』

정주는 송구스러워 그런 말을 했다.

『아냐요, 언니 이 청년 보기에는 한국서 제 일류급의 신사 같지만 알고 보면 악인이라고요. 그러니까 언니도 주의해요.』

무슨 영문인지, 정주는 물론 알 수가 없다.

『허어, 악인……』

박 준모는 일부러 표정을 크게 써 보았다.

『동래 온천에서 만난 청년인데, 오늘 또 우연히 여기서 만났어요. 나를 보고 자기 애인이라는 거예요. 후훗……』

석란은 한두 번 쿡쿡 웃고 나서,

『다소 뻔뻔하고 싱거운 데가 있기는 하지만 춤은 곧잘 추어요. 이 청년 때문에 내 결혼은 깨끗이 노우로 돌아갔지요.』

말귀를 알아듣고 정주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지운 선생의 충고가, 이 청년은 악인이라고요.』

『이 청년에게 대항해 나가기에는 내 인생이 다소 어리다고요.』

『무슨 소리야.』

『언니, 인제 다 이야기할께……나 언니를 붙들고 한번 실컨 울어 보고 싶어요.』

그러면서 이번에는 좀 날카로운 어조로 쏘아붙였다.

『미스터 박? 일어나지 않음 우리가 갈 테야요.』

석란은 정주의 팔을 끼고 홀랑 자리서 몸을 일으켰다.

『허어, 이건 다소 하무한 감이 없지 않은 걸!』

이런 여성을 경험하는 것은 박 준모로서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도 그만한 관계가 있고 보면 다소의 미련 같은 것을 남겨 놓는 것이 보통일 텐데.

박 준모의 경험이 울상을 짓는 것이다.

『아직도 내 수련이 부족한 모양인가?』

닭 쫓던 강아지 모양으도 층계를 내려가는 석란의 뒷모양을 박 준모는 멍하니 바라보았다.석란은 정주를 데리고 시공관 옆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영업 장소와는 검은 널판자 담장으로 막아 놓은 석란의 온돌방에서 석란과 정주는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마담로우즈가 특별히 차려다 준 크리스마스 오찬이었다.

『왜 한 번도 놀러오지 않고……석란이가 얼마나 정주를 보고 싶어 했기에……』

마담로우즈는 팔소매를 걷어 붙이고 정주에게 이것 저것을 자꾸만 권했다.

『어머니는 어서 나가 주세요.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담장 너머 마담의 방에서도 연회가 벌어져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해서 밤새도록 노는 판이라고 마담은 유쾌히 웃어댔다.

『마담, 어디 갔소?』

손님들의 목소리가 담장 너머로 날아왔다.

『어서 가 보세요.』

석란은 몰아치는 듯이 어머니를 쫓았다.

『그럼 많이 먹고 많이 놀다 가요.』

마담은 이윽고 사라졌다.

『그런데 말이야.』

어머니가 사라지자 석란은 정주를 쳐다보며,

『언니, 그 후 누구 좋은 사람 생겼소?』

새우 튀김을 집다가 정주는 돌이돌이를 하며 조용히 웃었다.

『지운 선생을 지금도 생각하슈?』

정주는 또 돌이돌이를 했다.

석란은 잠자코 젓가락만 놀리다가,

『지운 선생은 나보다도 언니를 좋아했을 거야. 언니 지금이라도 지운 선생과 결혼할 생각 없수?』

『어마?』

정주는 놀라며 석란을 바라보았다. 이전에도 석란은 뜻밖의 이야기를 곧잘 했었다. 그렇지만 오늘의 이 한 마디는……

『무슨 뜻이야, 석란?』

『나 결혼 생활을 중지했어요.』

『결혼 생활을 중지하다니 무슨 말이야.』

『그만 두었어요.』

『그만 두었다고? 아니, 결혼한 게 언젠데?』

『사흘만에 이혼했어요.』

『어마나?……』벌렸던 입이 좀처럼 닫혀지지가 않는다.

석란은 거기서 지난 일을 쭉 이야기하고 나서,

『문제는 아까 그 청년에게 재수없이 걸려든 내게 있지만요. 아무리 사과를 해도 들어 주지 않아요. 결국 서로가 다 애정이 탐탁하지 못했던 탓인가 봐요.』

정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자꾸만 설레어 견딜 수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빨리 온 두 사람의 불행이었다.

『석란도 철없는 노릇을……』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결국 언니의 손에서 지운선생을 빼앗은 내가 잘못이에요. 별반 이렇다할 굳센 애정도 없으면서……언니, 용서해요!』

석란은 젓가락을 놓고 정주의 품으로 자꾸 기어 들어왔다.

정주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나는 이제 결혼은 하지 않아요. 결혼을 한다는 건……결혼을 한다는 건 여성의 불행을 의미하는 거예요. 나는 언니의 품 안이 제일 좋아! 남자들은 건방져요. 쓸데 없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지요. 남성들 앞에서 여성들은 열등감(劣等感)을 가져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잖아요? 그 열등감을 가져 주지 않는다고 그것이 남자들에게는 불만인가 봐요. 누구가 그런 결혼을 해 준대요?』

석란은 몸부림을 치며 운다.

석란의 고백을 듣고 있는 정주는 지난날 지운과 최후의 작별을 하던 남대문통의 저녁 무렵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결혼을 한다면 실은 정주씨와 할 생각으로……』

있었다는 지운의 한 마디를 정주는 골똘히 회상하고 있었다. 자기의 자존심을 문질러준 사나이라고 생각만 해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던 지운이었다.

그 지운이가 지금 정주의 마음속에서 차츰차츰 애정의 심볼인 양 소생하고 있었다.

『언니, 나 자꾸만 울고 싶어요. 언니 품 안이 제일 좋아!』

정주는 흐느끼는 석란의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며,

『그랬음 됐지, 울긴 왜?』

『자꾸만 슬퍼요. 난 이제 처녀가 아냐요. 그것이 자꾸만 슬퍼요. 내가 지녔던 모든 긍지는 이미 없어지고 말았어요. 임 지운이가 뭐가 그리 잘났기에 아주 뻗대는 거예요. 내 실수에 대한 남성들의 비판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말이예요. 나를 용서 못 하겠다는 임 지운의 감정은 임 지운 개인을 떠난 뭇 남성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거지요. 그것이 분해요. 내 행동에 대한형벌이 너무 가혹해요.』

뭐라고 말을 하여 석란의 비애를 위로해 주고 싶었으나 정주는 적당한 말을 고르지 못했다. 남녀의 확집(確執)에서 궁극의 피해를 받는 것은 여성들이라고, 그 점만은 정주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결국은 애정 문제일 거야. 둘이가 다 애정의 끄나풀이 박약했던 탓이야?』

『언니!』

『응?』

『이제도 늦지 않아요. 지운 선생을 한 번 만나 보세요. 언니가 그런 실수를 했다면 지운선생은 용서 했을는지 몰라요.』

『아니야!』

정주는 또 돌이돌이를 하며.

『만나 볼 필요는 인제 없어졌어.』

『그만큼 착실한 사람도 쉽지 않아요. 언니 꼭 한 번 만나 봐요. 만나서 불행했던 결혼을 언니가 좀 위로해 드려요.』

정주는 쓸쓸히 미소를 지으며,

『어린애 같은 소리는 그만해요.』

『어른들은 별것 있어요? 연애니 결혼이니 하고들 굉장한 것처럼 떠들어 대지만…… 결국은 소꿉장난이지 뭐예요? 뭐가 신비로워요?』

결혼이라는 하나의 인간 행동에 대한 자기류의 감상을 석란은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공연히 미화해서 하는 말들이지 결혼이라는 인간 행동처럼 추하고 살풍경한 것은 없을 거예요. 그게 사랑이예요? 그게 행복이예요?』

인간의 한낱 당연한 절차에서 지나지 못하는 결혼에 대하여 지나치게 시적(詩的) 표현을 꾀하여 준 문학자에게 석란은 지금 항의를 제출하고 있는 것이다.

『석란은 결혼에 실패를 했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성공을 했담 그 이상 뭐가 있다는 말이예요?』

정주는 경험이 없기에 대답을 못했다. 그 이상의 무엇이 정주에게는 꼭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한 편 정주는 석란의 말처럼 그것은 뭇미 혼처녀가 지닌 아름다운 환영인지도 모를 일이라고, 석란의 경험을 소중히 여겨보기도 했다.

유 민호와 마담 로우즈와의 관계는 그 후에도 쭉 계속되어 왔다. 정주가석란의 이혼담을 듣고 있는 동안 유 민호는 마담의 방에 있었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유 민호와 정주는 서로 대면하는 챤스를 갖지 못한채 그날 저녁의 만찬회에 참석하는 몸이 되었다.

웃방 양실에 식탁은 준비되어 있었다. 하얀 상보를 씌운 식탁 한 가운데 앉은뱅이 매화 화분이 연분홍 꽃을 다닥다닥 붙이고 있었다.

이날 저녁의 요리는 유 민호가 특별히 아는 그릴에서 쿡 한 사람을 불러다가 채린 호화판의 양식이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칠면조를 먹어야 한대서 미군 부대로 들어가는 놈을 쿡이 가로채 왔다고 했다.

식탁 옆에는 크리스마스 츄리가 흰 솜을 담뿍 이고 있었다. 그 위에다 오색이 찬란한 조그만 전등을 주룽 주룽 달아 놓았다. 이것은 어제 저녁 인숙을 데리고 정주가 손수 꾸며놓은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이다.

오일 스토오브가 한 편에서 이글이글 불 길을 먹음고 있었다. 인숙은 좋아라고 손벽을 치며 정주 옆에 앉아서 이것저것 요리에다 손을 댔다.

정주와 마주앉은 유 민호는 특별히 주문해 온 칠면조니 많이 자시라고 점잖게 권하면서

『오늘이야말로 가정적인 단란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깨달을 수가 있읍니다. 채선생, 많이 자시고 즐겁게 놀아 주시요.』

『네, 많이 먹어요.』

정주는 식사를 하면서 쭉 지운의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늘 석란만 만나지 않았던들 유 민호의 호의를 좀 더 탐탁하게 받았을 는지 몰랐다고 멀지 않아 튀어 나올 유 민호의 최후의 다짐을 정주는 갈팡질팡 하는 불안정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유 민호는 맥주와 위스키를 섞어서 마시며,

『채선생이 인숙의 엄마가 되어 주셔서 매일처럼 이렇게 단란한 식사를 할 수 있다면.』

나올 말이 마침내 튀어나왔다.

『오늘은 저로 하여금 저 굳게 잠근 설합을 열게 해 주시요.』

상당히 오랜 시일을 끌어 온 문제이기에 어쨌든 응분의 대답은 있어야만 하겠다고 정주는 시선을 들고 얼굴을 붉히며,

『저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 보았어요. 제게는 분에 넘친 호의라고……』

대답을 하면서도 정주는 연방 지운을 생각하고 있었다. 온갖 자존심을 버리고 지운을 찾아만 가면 될 것이 아니냐고, 자기의 대답 하나로서 일생의 운명이 결정될 것을 생각하니 무섭기 짝기 없다.『무슨 말씀을……』

유 민호는 거의 낙착점에 도달한 사실을 재빠르게 눈치채고 끝끝내 점잖게 대해온 자기 자신을 내심 칭찬하고 있었다.

정주는 기를 쓰고 자기의 망설임에 최후의 종지부를 찍기 위하여 대담하게 얼굴을 들고 유 민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믿음직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아까 오전 중까지도 성실의 발판이 없는 애정의 취약성을 생각하던 정주가 이 순간에 있어서는 그와 정반대의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애정의 발판이 없는 성설이 과연 자기의 결혼 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가 있을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석란과 지운선생의 경우가 바로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조금이라고……』

『한 시간 동안만……』

그 한 시간 동안에 정주는 자기의 운명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내릴 작정이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감정의 흐름을 극력 배척하고 있는 채 정주를 눈앞에 바라보며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냉철한 계산가(計算家)라고, 유 민호는 한 걸음 더 떠서 정주의 계산을 계산하고 있었다.

레코오드는 『다뉴브 강의 물결』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다 준 커다란 불란서 인형을 안고 인순은 미닫이를 활짝 열어젖힌 온돌방에서 축음기를 틀고 있었다.

약속했던 한 시간은 이미 지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유 민호와 정주는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정주는 차를 마시면서 마음의 키를 잡지 못한 채 초조한 기분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임 지운과 유 민호를 정주는 골돌히 저울질 하고 있었다. 애정과 성실 —— 이 두개의 요소가 여성들의 결혼 생활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정주의 무경험은 좀처럼 단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주씨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생각이 너무 지나 친다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은 아니지요.』

정주는 찻잔을 들며 가만히 웃었다.

『여자들은 옷감을 뜰 때 너무 고르다가 뒤 고르는 수가 많다지만……』

정주의 마음속을 빤히 들여다 보는 것 같은 한 마디를 유 민호는 했다.

순간, 크리스마스 츄리를 장식한 다섯 가지의 아롱진 색등(色燈)이 파도속의 해초(海草)인양 정주의 시야에서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 인숙이가 조는 군요.』

그 해초와도 같이 흔들리는 마음의 동요를 숨기기 위하여 정주는 얼른 일어서서 아랫목으로 내려갔다.

자리를 깔고 피곤으로 말미암아 졸고 있는 인숙을 안아다가 눕협다. 눕히면서 정주는 어쨌든 그이는 내 자존심을 문질러 준 사나이가 아니냐고 애정의 끄나풀을 자존심의 칼날로써 끊어버리고 있었다.

인숙을 눕히고 있는 동안, 유 민호는 테이블로 가서 오랫동안 잠가 두었던 설합을 열고 순금 목걸이와 다이야반지가 들은 두 개의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그 이상 정주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를 유 민호는 느끼질 않았다. 지나치게 점잖다가는 기회를 놓지는 수가 많다. 익을대로 익었으니까 적당히 밀고 나가는 힘이 남성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그것을 또한 여성들 편에서도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유 민호의 풍부한 경험이 자신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건 정주씨에게 드리는 크리스마스 프레젠트.』

정주와 나란히 소파에 걸터앉으면서 한 캐럿 반의 다이야 반지를 케이스에서 꺼냈다.

레코오드는 멎고 방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정주씨, 그 손을 제게 주시요.』

유 민호는 정주의 왼편 손을 집어다가 자기 무릎 위에 소중히 올려 놓았다.

빨강이, 오렌지, 노랑이, 파랑이, 초록빛…… 오색의 장식등이 또 한번 정주의 눈앞에서 격렬히 흔들리었다. 그 흔들리는 조그만 불빛을 무심하게 세어 보고 있는 동안 왼쪽손 장지에 약혼 반지는 이미 끼워지고 있었다.

끼워진 손등에 유민호의 입술이 왔다.

『영원히 갔다!』

자기 가슴속에 꽃 피어 있던 임 지운은 인제 영원히 사라져간 것이라고, 그것을 마음속으로 장송(葬送)하고 있는데 순금 목걸이가 다시금 턱 밑에서 채워졌다.

유 민호는 가만히 정주의 상반신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도깨비 불인 양 크리스마스 츄리의 오색 등이 우쭐우쭐 정주의 눈 앞에서 또 한 차례 춤을 추었다.

유 민호의 품 안에서 정주는 보살과도 같이 표정이 없는 얼굴을 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정주씨는 제 행복의 심볼이었지요.』

최상급의 사랑의 말이 지극히 엄숙한 토음을 지니고 유 민호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엄숙성과는 정반대의 헤실픈 유 민호의 얼굴이 정주의 어깨 위에서 희쭉하고 웃고 있었다.

『이처럼 참된 행복이 바로 제 옆에 있는 줄은 모르고 하마트면 불행한 결혼을 할뻔한 내 운명을 생각할 때, 유 민호의 호흡이 차차 거세졌다. 유 민호의 입김이 정주의 목덜미에서 점점 더워왔다.

『인숙의 어머니를 그처럼 생각하신다면서……』

정주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 그건……그건 정주씨를 만나기 전까지의 일이고……정주씨를 만나고 난 후부터는 곱게 잊어버릴 수 있는 인숙이 엄마였지요.』

정주는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정주의 어깨 위에서 유 민호의 얼굴이 계속적으로 희쭉희쭉 웃으면서 하등의 반항도 없고 반응도 보이지 않는 정주의 부동 자세를 문득 생각했다.

차다. 대단히 차다. 이미 약혼반지를 낀 이상 다소의 반응은 있을 줄로 믿었던 유 민호의 경험이 당황을 하며,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차거움을 녹여버릴 자신이 자기에게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때, 정주는 자기 목덜미에 유 민호의 젖어 있는 입술을 느끼고 몸부림을 쳤다.

『인제 그러지 마세요.』

말과 함께 정주의 상반신이 조용한 항거를 꾀했다.

『정주씨!』

유 민호의 얼굴이 정주의 눈앞에서 입술과 함께 희번득거리고 있었다.

『약혼을 했는데……내 애정을 못 받을 리가 없지 않아요?』

남성의 완력이 이처럼도 완강한 줄은 정녕 모르고 있던 정주였다. 유 민호는 마침내 점잖음의 가면을 대담하게 벗어버리고 있었다.

그 돌연하고도 대담 무쌍한 변모가 정주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애정보다도 성실의 발판위에서 취해 온 오늘의 행동이었기에,

『결혼할 때까지……결혼할 때까지』

를 정주는 조용히 애소하였다.

그러나 오 영심에게 손을 덴 유 민호로서는 그런 위장한 태세만을 취할 수는 없었다.정주의 반항이 앞에 놓인 소탁자를 찻종지와 함께 방바닥에 쓰러뜨렸다.

쓰러지는 소리에 인숙이가 반짝 눈을 떴다.

『아빠, 선생님을 왜 때려요?』

험상 굳게 희번득거리던 유 민호의 얼굴이 홱 돌아서며 정주의 허리에서 유 민호의 팔힘이 쑤욱 빠져 나갔다.

어린애처럼 울상을 짓고 있는 유 민호의 얼굴을 정주는 적지않게 미안한 생각으로 바라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용서하세요.』

『아, 아닙니다. 정주씨의 행복을 위해서 나는……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지요.』

미닫이를 닫치지 않았던 것이 유 민호에게는 천추의 한이었다.

『고맙습니다. 인제 저는 돌아가야겠어요. 돌아가서 아버지께 말씀드려야겠어요.』

『암 드려야지요. 결혼식은 빨리하는 것이 좋겠지요. 새 달 초순 경에……』

『네, 그런 말도 전하겠어요. 제 말이라면 아버지도 기쁜 마음으로 승낙해 주실 거예요.』

인숙의 볼에다 입을 맞추고 정주는 총총히 유 민호의 집을 나섰다.

『올해는 어째서 이처럼 성적이 나쁠까……』

오륙 일만 지나면 액년은 간다.

『신년에는 복이 오겠지!』

찻종지 하나가 깨져 나갔다. 쓰러진 소탁자를바로 세워놓고 푸르럭거리는 손길로 남은 찻종지에다 캐나디안 위스키를 유 민호는 팔팔팔팔 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