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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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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黃昏[인생 황혼]

[편집]

교문 옆에 코스모스가 한 무더기 만발해 있었다. 문을 나서면서 임 교수는 무심중 손을 뻗쳐 코스모스 한 송이를 꺾어볼 생각이 들었다. 흰 꽃은 자기 머리털 같아서 싫었고 보라나 자주는 지나치게 요염해서 탐탁하지 않다. 그래서 임교수는 연분홍을 골랐다.

날은 아직 저물지는 않았으나 해는 노고산 마루턱을 향하여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자기 인생도 마치 이 늙은 시어머니 산으로 터벅터벅 걸어내려가고 있는 기울어진 햇발과도 같다고 임교수는 생각한다.

『멀지 않아 황혼이 온다! 이 들에도……내 인생에도……』

마음속으로 임교수는 그런 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황혼이 오기 전에 ……황혼이 채 다가오기 전에……』

남이 들으면 무슨 소린지 알아 듣지 못할 마음의 비밀을 임교수는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씨부려 보았다.그렇다. 오 십 삼 세를 인생의 황혼이라고 부르기는 아직도 싫다. 머리는 비록 반백이 되었으나 젊은이들처럼 마음은 젊다. 옛날 같으면 오 십의 고개를 노경으로 쳤지만 요즈음처럼 주위가 다 화려한 시대에는 십년쯤은 인공적으로라도 젊어질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때까지 임교수는 나이보다 젊게 보이려는 것 같은생각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인격의 의장(擬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여성들이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고 하는 것을 임교수는 무척 경멸하여 왔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와 소박성을 카무프라쥬하는 인격의 사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임교수는 인격의 부당이득(不當利得)이라고 멸시하여 왔다.

『없으면 없고 있으면 있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다가 죽자!』

이것이 임교수의 인생 철학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철학 위에서 영위되어 온 오십 삼년 동안의 임교수의 생활은 소박과 성실과 겸양과 근엄과 극기(克己)의 도덕률 밑에서 지배되어 왔다.

그러던 것이 팔 · 일오 육 · 이오 전란으로 말미암아 전 민족의 생활의 기반이 뒤흔들리고 따라서 일반 대중의 생활의 기반이 뒤흔들리고 따라서 일반 대중의 생활 신조에 커다란 변모(變貌)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변모의 근본적인 원인은 철학의 빈곤에 있는 것이라고 임교수는 생각하였다.

인생의 의미를 구명하여 일반 대중에게 지도 정신을 부여하는 철학 자체가 오늘날에 있어서 빈곤과 혼란을 면치 못하거늘 어찌 국민 대중에게 갈곳을 가리키고 할바를 알려 주어 대중으로 하여금 생활의 귀추를 자각하게 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날 그날을 향락하려는 사치의 물결은 도도히 흐르고 거리 거리에는 사상적 룸펜이 가득차 버렸다. 대중은 생활의 신조를 잃어버리고 철학자는 철학을 상실하였다.

이리하여 임학준 교수도 자기의 인생 철학을 점점 잃어버리기 시작한 철학자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황혼이 오기 전에……』

임교수는 연분홍 코스모스를 물끄러미 들여다 보면서 흙 냄새가 후각에 그윽한 시골길을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누르퉁퉁한 콩밭을 지나고 청청히 푸른 배추밭을 지나서 완만한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는데 저녁 바람을 타고 등뒤 멀리서 학생들의 노래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들은……산골짝 마다 울려 나오고…… 여름은가고 꽃은 떨어지니……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

이 학교의 강좌를 맡으면서 교실이나 또는 울창한 수목 사이에서 임 교수는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영국 민요「목동의 노래」였다.

임교수는 명상에서 깨어나 문득 뒤를 돌아다보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잔디밭 위에서 열 두 개의 구두창으로 자기에게 경의를 표해 주던 바로 그 장난꾸러기 일행이었다.

임교수는 며칠 전, 철학 강의 시간이 거진 끝날 무렵쯤해서 낯설은 학생 하나에게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 그러니까 결국 한 마디로 말해서 인생이란 무언인가요?』

그것이 바로 깜정 리봉의 학생이었다.

그 마치 대들듯이 물어온 물음이 너무 돌연하고 당돌하고 조잡했었기 때문에 임교수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며,

『자아, 나도 잘 모르겠읍니다. 오늘은 시간도 없으니 다음으로 밀고……』

그러면서 교탁 앞에서 물러 나려는데,

『선생님도 그걸 모르신담 확실히 사고는 사고야요.』

했다. 그래서 학생들도 웃고 임교수도 웃었다. 웃으면서,

『허허, 사고?……사고란 무슨 뜻입니까?』

이 사고라는 어휘가 가진 뜻을 임교수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깡패들을 위시해서 젊은이들이나 소년들 사이에 요즈음 급작스레 늘어가는 이 사고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임교수의 생리는 구역질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반문을 했더니 깜정 리본은 한두번 쿡쿡 웃음을 깨물면서,

『그것두 모르신담 정말로 사곤데요!』

했다. 학생들이 또 으와하고 웃었다.

그러나 임교수는 이번에는 웃지를 못했다. 이 깜정 리봉이 배앝은 처음 한 마디에서는 여전히 그 어휘가 지닌 나중의 불량성과 조잡성 때문에 기분을 상했던 임교수였다. 그러나 두 번째 같은 말이 같은 입에서 다시금 튀어 나오는 순간, 임교수는 그 「사고」라는 어휘가 가진 참다운 아름다움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깜정 리봉의 그 발랄하고 명랑한 현대적 기질과 일분의 오차(誤差)도 없는 정확한 표현이었던 사실을 임교수는 발견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자기의 창백한 관념을 포기하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한 생각과 그러한 눈으로 다시 한 번 바라 보니, 시대의 감각을 정확하게 섭취하고 있는 깜정 리봉의 그 펄떡펄떡 뛰노는 은어와도 같은 신선한 젊음에서 오십 삼 세의 자기의 연령을 망각하는 황홀한 일순간을 임 교수는 향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의 주인공인 깜정 리봉이 오늘 다시금 구두창의 경의와 노래의 향연으로서 임교수를 환송해 주고 있는 것이다. 버스가 거의 움직이려는 무렵에 여섯 명의 학생이 우르르 차에 올라 탔다 설 자리는 많았으나 앉을 자리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임교수가 어물어물하고 서 있는데,

『선생님, 여기 앉으세요.』

석란이가 얼른 임교수의 팔 하나를 붙들면서 시골부인네와 남자 대학생이 앉아 있는 틈 사이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 틈 사이는 다소의 간격이 있기는 하였지만 누가 보든지 사람 하나 들어 앉을 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아, 괜찮소.』

하고 임교수가 사양을 하면서 후딱 깜정 리봉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랬더니 깜정 리봉의 매서운 시선이 남자 대학생의 얼굴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지 않은가,

『아, 정말 괜찮소.』

보기가 다소 민망해서 임교수가 또 사양을 하는데, 남자 대학생은 그만 석란의 시선에 질렸는지 훌쩍 일어서 버렸다.

『자아, 선생님, 앉으세요.』

그러면서 석란은 임교수의 상반신을 두 손으로 모시듯이 하여 자리에 앉히었다.

『미안합니다.』

임교수는 남자 대학생에게 머리를 조금 숙여 보였다. 그러나 그 남자 대학생은 대답 대신 석란의 얼굴을 핥는 듯이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미리 일어섰음 감사하다는 말이나 듣지?』

좀 들으라는 듯이 석란은 툭 한 번 내쏘고 나서 임교수와 시선을 맞추며 방긋하고 웃었다.

요염에 가까운 깜정 리봉의 웃음이었다. 임교수도 싱긋이 웃었다. 웃으면서 임교수는 자기의 웃음이 상당한 복잡성을 지니고 있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으로 저으기 당황해 하였다.

『학생, 무슨 과지요?』

당황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임교수는 무슨 말이든 씨부려야 했다.

『선생님이 들으심 웃으실 거예요.』

『내가 웃는다고요?』

지금까지에 임교수가 알고 있는 행동에 있어서도 그랬었지만 이 학생은 한마디 한 마디의 대화까지도 그 어떤 수수께끼 같은 신비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하나의 매력이 되어 상대편에서 강렬한 호기심을 던져 주면서 앞으로 앞으로 이끌어 나가는 효과를 조성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도 않겠지만, 선생님 만큼은 웃으실 거예요!』

『무슨 관데요?』

그랬더니 깜정 리봉은 두어 번 혼자서 쿡쿡 웃더니만,

『정치외교과 ─』

하고 대답을 하고는 임교수의 표정의 움직임을 말똥말똥 들여다보다가,

『보세요! 웃으셨죠?』

했다. 과연 임교수는 씨무륵하고 웃었던 것이다.

『계집애들이 치맛바람을 피면서 정치외교는 해서 무얼 하느냐고, 그런 말씀이시죠?』

『음 ─』

하고 임교수는 깊은 신음 소리를 내며,

『학생은 대단한 심리학자요.』

했다. 그 말에 석란도 입술을 깨물며,

『후후훗 ─』

하고 웃었다.

동료들도 따라 웃었다. 남자 대학생도 씨익하고 웃으면서 석란의 명랑성에 도리어 호감을 느낀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신개지의 언덕 고개를 버스는 넘어 시내를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기우러져 가는 햇발이 쏟아지듯이 들창으로 들여 쪼이고 있었다.

학생들이 하나 둘 인사를 하고 내렸다. 서대문을 지나 광화문에 멎었을 때, 남자 대학생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바라보는 석란의 얼굴에다 눈 하나를 싱긋이 감아 보이며 내렸다. 그래서 석란은 홱 얼굴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학생은 집이 어디요?』

『명동이예요?』

『아, 명동 다방이 많은……』『선생님, 다방에 잘 나가세요?』

『웬걸요.』

『서재에만 너무 들어앉아 계시지 마시고 좀 나오세요. 그래야 사고란 말씀 알아 들으시잖아요?』

『음 ─』

그러나 임교수의 얼굴은 석란의 그것처럼 명랑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자아, 선생님, 여기서 내리셔야죠, 안국동이시니까.』

버스가 종로 네거리에서 멎었다. 석란은 임교수를 부축하듯이 하면서 두 사람 분의 대금을 치르고 앞장을 서서 차에서 내렸다.

『내가 안국동 사는 줄은 어떻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임교수에게 있어서는 이 깜정 리봉의 학생이 하나의 신비로운 존재가 점점 되어 가고 있었다.

『선생님에 관한 일은 제가 죄 다 알고 있는 걸요. 선생님이 성실한 애처가라는 것까지도……』

『허허……』

겸연적게 임교수는 웃으며,

『그런 걸 다 어떻게……?』

『저는 선생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어요. 저리……저리 가셔서 선생님 차 한잔 드시구 가세요.』

나이 찬 딸이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리듯이 석란은 임교수의 팔 하나를 붙잡고 네길어름에 있는 꽃집으로 자꾸 끌고 들어갔다.

백화가 만발한 꽃 터널을 애인처럼 팔을 끼고 들어간 맨끄트막에 아담한 다방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 이름이 뭐지요?』

『이 석란……돌석, 난초란 ─ 이름만은 좋죠?』

『오허, 왜 이름만 좋겠소?』

『사람도 괜찮겠어요?』

『오허, 석란양은 참으로 명랑한 표현주의자(表現主義者)요.』

그것이 현대의 젊은 세대들이 지닌 하나의 생활 형식인 것 같아서 임 교수는 마음의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그러니까 명실(名實)이 상부하지 않아서 걱정이예요. 이름은 무척 청조하고 고상하지만……』

『오허, 허 허……』

임교수의 젊은 시절에는 마음속의 표정을 적당히 감추는데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석란에게서 보는 것과 같은 마음속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데서 또한 하나의 명랑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임학준 교수로 하여금 인생을 관조(觀照)하는 태도에 있어서 하나의 변화를 일으키게 하고 있었다.

임교수는 홍차를 마시고 오랜지쥬우스를 빨았다.

교실이나 교정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없는 하나의 검소한 복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석란은 곤색투우피이스가 이처럼 다방에 턱 마주앉아서 바라보니 사지가 발달할대로 발달한 이석란의 성숙한 육체를 장식하는 하나의 화려한 사교복처럼 임교수의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후훗 ─』

임교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쥬우스를 빨던 석란의 입술이 화판인 양 쿡쿡 웃었다.

매혹적인 시선이요 웃음이었다. 임교수의 심장이 호닥닥 놀래며,

『석란양은 참 잘도 웃는군. 뭐가 그리 우습소?』

『선생님의 젊었을 때 모습이 제게는 빤해요. 그럴듯하셨겠어! 후훗……』

『아, 하하핫.』

화려한 기분이 임교수의 혈관 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석란은 확실히 존경과 호의 이상의 것을 자기에게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구나 칠십 삼세의 괴에테와 십 칠 세 소녀의 교제를 진실하고 아름다운 연애라고 찬양하던 석란을 생각할 때, 괴에테보다 이십 년이나 젊은 자신의 연령을 마음속으로 몰래 축복하였다.

『선생님, 요다음 한 번만 저와 만나 주시겠어요. 선생님께 저녁을 한번 대접해 드리고 싶어요.』

『저녁을……』

임교수는 그 순간, 집에 있는 아내를 생각했다.

쓴 고개, 단 고개를 같이 손을 이끌고 넘어 온 삼십 년 동안의 보배로운 아내였다. 그 아내에게는 하늘 아래 땅 위에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몸이었다. 그러한 자기가 지금 젊은 여성과 더불어 명일의 만찬을 약속하려는 것이다.

임교수는 일종의 죄악감을 느꼈다. 석란과의약속은 확실히 자기 아내의 권위와 체면과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일종의 배신 행위이기 때문이다. 임교수가 이내 대답을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데,

『요다음 연애 강좌 날, 그러니까 내일 모레 다섯 시에 여기서 선생님을 기다리겠어요. 꼭, 꼭, 꼭이예요. 선생님!』

『아, 그런데……』

그러나 그때는 이미 석란은 레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찻값을 치르고 나오다가,

『아, 참 선생님, 꽃 좋아하시지요. 아까 코스모스를 한 송이 꺾으시는 걸 봤는데……』

석란은 그러면서 꽃집 주인에게,

『조그맣게 한 다발……국화, 그라디어러스, 다리아, 그리고 코스모스를 적당히……』

그러한 자기의 사소한 행동까지를 죄 감시하고 있는 이석란의, 그 빈틈 없는 배념이 ()시 한 번 임교수의 마음을 쳤다.

『선생님 들구 가시기가 거북하실테니까, 보이지 않게 깨끗한 납지로 좀 싸 주세요.』

『네네 ─』

이윽고 둘이는 꽃집을 나섰다.

『자아, 선생님댁, 서재에 갖다 꽂으세요. 그 곰팡내 나는 철학 서적 옆에 ……』

응부의 여유도 없이 임교수는 꽃다발 하나를 안기워 버렸다.

『그럼 선생님, 안녕히……모레 다섯 시에 꼭요! 네?』

손 하나를 내저으며 석란은 이윽고 인파를 헤치면서 명동쪽으로 감실감실 사라져갔다.

임교수는 꽃다발을 안고 해 저문 저녁 거리를 안국동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걸어가면서 임교수는 싱글벙글 웃었다. 임교수는 지극히 기쁜 것이다.

결혼 생활 삼십 년 동안에 임교수는 다른 여성들과의 깊은 교제를 손수 피해 왔었다. 비록 교제를 맺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멎을 줄을 알고 있었다.

그 적당한 선이란 말할 것도 없이 한 사람의 아내로서의 자존심과 체면을 손상케 하지 않는 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십 년 동안의 그러한 행동의 결과가 그로 하여금 애처가라는말을 듣게 하는 동시에 판관이라는 말을 감수케 하였다.

그러나 임교수는 그런 말을 조금도 쑥스럽다거나 또는 거북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 또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가장 영예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여성에 대한 애정의 지속을 의미하는 동시에 한 사람의 인간에 대한 신의의 지속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심입명(安心立命)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그것이 임 학준 교수의 실천 철학이었다. 분에 넘침을 안다는 것은 곧 천명을 받음이다. 한 사람의 여성을 동시에 한 사람의 인간을 배반해서도 될 만한 자격과 가치를 갖지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임교수는 명확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는 순간에 서서 자기의 일생을 돌이켜 볼 때 인간적인 의미에 있어서 부끄럼을 느끼지 않을 심경을 가질 수 있는 인생!』

그것이 임교수의 오직 하나요 최고의 기원이었다.

그러한 임교수의 심경이 요즈음에 이르러서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육 · 이오 동란을 겪는 동안에 흰 머리털이 부쩍 늘면서부터였다.

과연 임교수의 과거에 인간적인 과오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무엇인가 한 줄기 공허 같은 것이 마음속 한 편 구석에 도사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식구가 단출하여 남처럼 의식주의 단련을 받지 않아도 좋은 평화스런 가정 이건만 어딘가 메꾸어지지 못한 한 구석이 차차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과거 삼십 년 동안에 걸친 성실한 가정 생활에 하나의 반동인 것 같았다. 오랜시일에 걸쳐 긴장했던 정신력이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면서부터 풀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임교수는 무슨 조그만 변화 같은 것을 자기 생활에 바라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가끔 중얼거려 보기 시작하였다.

『죽음의 무덤 앞에까지 다달아서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볼 때, 한 번도 인간적인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기는 하다. 아아, 그러나 쓸쓸한 인생이여!』

그 쓸쓸함이 그 훌륭함보다 앞장을 설 때가 가끔 가다 있다는 사실을 임학준 교수를 위하여 슬픈 일인지 기꺼운 일인지를 알 바가 없다.

철학이여, 대답을 하라! 그리하여 성실한 인격자요! 근엄한 철학자인 임학준 교수로 하여금 갈바를 가르쳐 주라! 그는 지금 한 무더기의 꽃다발을 안고 안국동 네길어름에서 지향을 잃은 어린 양인 양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황혼이 오기 전에……』

임교수는 마음의 비밀을 다시 한 번 소리내어서 중얼거리다가 후() ( )을 닫치고 무서운 얼굴로 자기의 헤실펐던 표정을 감추어 버렸다.

임교수의 스무 간짜리 집은 안국동으로 조금 올라가다가 왼편 골목 어구에 있었다.

폭탄 세레는 면했으나 손을 볼 데가 많은 어수선한 집이다.

『아이머니나! 어쩐 셈이유? 꽃다발을 다 사들고 오시구……』

복순이라는 열 아홉 살짜리 계집애와 저녁상을 보고 있던 임교수 부인이 주방에서 뛰쳐나오며 남편의 손에서 우선 가방부터 받아 들었다.

『결혼 삼십 주년 기념으로 특별히 당신을 위해 사 갖구 왔소.』

『아이구, 황송도 하지! 당신도 이젠 제법 개명을 하셨구려.』

그러면서 부인은 가방을 대청에 던지고 상장을 받는 소학생들처럼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두 손으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히히히힛……』

주방에서 저녁상을 차려 가지고 나오던 복순이가 하마터면 밥상을 뒤집어엎을 뻔하였다

『오허, 허, 헛……복순이가 웃으워 죽겠답니다요.』

그러나 부인은 정말로 기쁘다. 잔주름이 많이 잡힌 오 십 세의 얼굴이었으나 젊었을 적의 어여뻤던 모습은 그 단정한 얼굴에 그냥 남겨 가지고 있었다. 부인은 납지를 헤쳐 꽃다발을 알맹이로 가슴에 안아 보며,

『아아, 이뻐요, 이 그라디어러스!』

소녀처럼 부인은 기뻐하며,

『결혼식 한 번 더 해보고 싶어요. 꽃다발을 이렇게 안구, 그리구 이렇게……』

남은 손 하나로 남편의 팔고비를 끼고 천천히 대청으로 올라가면서,

『딴 ─ 딴딴딴……딴 ─ 딴딴딴……』

웨딩 마아치를 웃음과 함께 부인을 불렀다.

『여보, 애들이 웃소, 웃소!』

그러는데 저녁상을 들여놓고 안방에서 나오던 복순이가 그만 행주치마로 입을 막으면서『해해해햇……』

하고 이번에는 마음을 놓고 마구 웃어댔다.

『저것 보우, 복순이가 이제 대청마루를 대굴대굴 굴참이요.』

『그 앤들 인제 며칠 남았다구……? 틈만 있으면 얼굴에 분만 줘 바르는데……』

『어마, 사모님두!』

정말로 대굴대굴 굴듯이 복순은 부엌으로 뛰쳐 들어갔다.

건넌방에서 임교수가 양복을 한복으로 갈아 입고 있는 동안에 부인은 뜰 아랫방으로 들어가서 아들의 책상머리에서 청자기 화병을 들고 나왔다. 그 화병에도 시들어빠진 그라디어리스가 몇가지 축 늘어져 있었다.

부인은 그것을 뽑아 버리고 남편이 가져온 꽃다발을 심었다.

『그렇지만 너무 일찌감치 사 오셨어요. 결혼 기념식날은 아직도 열흘이나 남았는데……』

대청 소탁자 위에다 화병을 갖다 놓면서 부인은 다소의 불평을 말하고 있었다.

『응……?』

세수를 하던 얼굴을 임교수는 조금 들다가 휙 다시 숙여 버리며,

『아, 괜찮을 테지. 그맛 쯤……』

아내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의식을 임교수는 다시 한 번 새롭히고 있었다.

동시에 눈을 지긋이 감고 세수를 하고 있는 임교수의 캄캄한 망막 속에 한떨기 아름답고도 신선한 눈치울 꽃(瞼花[검화])이 요염하게 피어 있었다.

『선생님, 한 번만 더 저와 만나 주세요, 네?……꼭이예요, 꼭!……』

그리고 나불나불 인파 속으로 사라져간 깜정 리봉의 청신하고도 발랄한 모습!

『내 인생에 무슨 커다란 위기 같은 것이 올는지도 모른다!』

대단히 불길하면서도 한편 지극히 감미로운 인생의 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