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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決鬪記[결투기][편집]

목욕을 갔던 임 학준 교수가 돌아온 것은 지이프차가 떠난지 십분도 못되어서다. 복순에게서 사정을 듣고 임교수는 곧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안국동 네거리로 뛰어나와 택시 한 대를 불러 탔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임교수는 우선 명륜동 오 진국씨를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전번 영심의 결혼식날, 피로연을 마치고 명륜동으로 가서 오 진국씨와 저녁 무렵까지 술을 나눈 적이 있기 때문에 다행히 집은 알고 있었다.

허중령에게 숱한 매를 얻어맞고 결투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권총으로 결투를 한다고 밖으로 나갔다는 말을 복순은 했다.

그러나 임교수는 차를 몰면서 자기 아들이 최후로 남겨 놓고 간 한마디가 눈물겨울이 만큼 비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해다오. 지운은 결코 비겁한 인간은 아니었다고―』

자꾸만 뜨거워 오는 눈시울을 임교수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생전 만져 보지도 못한 권총으로 결투를 하러 떠난 아들의 심정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용하다! 내 아들 용하다!』

그러다가도 임교수는 후딱 정신을 차리며,

『안된다! 지운아, 죽어서는 안된다!』

삼대 독자가 마침내 아름답고 진실한 연애를 위하여 최후의 길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오늘 자기 아들에게 이러한 죽음의 길을 가르쳐 준 것은 오로지 임교수 자신의 책임이었다. 진실하라, 아름다워라, 참되라 하고 임 교수는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자기 아들 지운을 교육 시켜온 것이다.

『왜 좀더 재치있는 삶의 방도를 못 가르쳤던고……』

임교수는 후회가 났다. 그렇지 않아도 늙어가면서 마음이 차차 약해지는 임 교수였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제 어미가 이 일을 알면 기절을 할텐데……』이상과 현실의 상극면에서 철학자 임 학준 교수는 몸부림을 쳤다.

『총두 쏠 줄 모르는 애가……』

허중령의 탄환에 이미 피를 뿜으면서 쓰러졌을런지도 모르는 아들의 비장한 모습을 임교수는 불현 듯 머리에 그림 그리고 있었다.

『지운아, 용하다!……그렇지만 제발 죽지는 말아다오!』

그것이 얼마나 모순된 기원인지를 뻔히 알면서도 임교수는 그 한 마디를 마음속으로 수없이 부르짖고 있었다.

차가 명륜동에 도착했을 때, 오진국씨도 차비를 채리고 임교수를 만나러 안국동으로 떠나려는 참이었다. 허 정욱이 영심의 앞에 내던지고 나간 유민호의 편지를 오 진국씨는 이미 읽고 있었다.

『마침 잘 오셨소. 그렇지 않아도 임선생님을 좀 만나뵈려 가려던 참이요.』

오 진국씨는 몸이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미처 찾아 뵙지 못해서 송구스럽습니다.』

임교수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마주 앉았다. 영심은 미닫이를 닫은 아랫방에서 할머니 옆에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런 사실을 임선생이 아시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소만……다른 아아라면 또한 모르되 적어도 임선생의 아드님이고 보면 보고 들은 것만도……』

원체 성미가 급한 위인이라 앞뒤를 재어서 이야기할 여유가 마음에 없다.

『실은 그 일 때문에 이처럼 오선생을 뵈러 온 것입니다.』

임교수는 어디까지나 정중했다.

『임선생의 아드님이기에 나도 믿은 것이요. 그렇거늘, 책을 갖고 온답시고 찾아와서는 친구의 아내 되는 이를 꾀임수로 넘겨 가지고……대관절 임 선생은 무엇을 아드님에게 가르쳤다는 말이요? 이 귀로 분명히 듣고 싶소!』

『…………』

꾸중을 듣는 소학생처럼 임교수는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있을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공맹(孔孟)의 가르치심은 두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예수나 석가가 다 똑같은 수범(垂範)을 창생(蒼生)을 위해서 하셨소. 그처럼 절조를 지키려고 노력한 내 딸년이었소. 그것을 종시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꾀어내다가……

이것을 보시요! 이러한 패륜 탕자(悖倫蕩子)로 만들기 위하여 아드님을 하육시킨 임선생은 필연코 아니었을 것이라고 믿으오.』

그러면서 오 진국씨는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유 민호의 편지를 임교수 앞에 휙 내던져 주었다.

임교수는 묵묵히 편지를 읽기 시작하였다.

『임선생은 이 일을 대관절 어떻게 생각하시요?』

편지를 끝까지 읽고 난 임교수를 향하여 오 진국씨는 대들어 물어왔다.

『오선생님께 뵈일 낯이없읍니다. 모두가 다 불초 임 학준의 가르침이 부족한 탓이올시다. 관용이 계시기만 바라 마지 않습니다.』

임교수는 머리를 숙여 예의 범절을 깍듯이 채렸다.

『용서 여부가 문제가 아니요. 그 애의 남편이 이미 이 사실을 알았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만 임선생의 마음은 흡족하겠소.』

『실은 그 일 때문에 부랴부랴 달려 왔읍니다. 허군은 집으로 찾아와서 내 아들을 끌고 어디론가 나갔읍니다. 내가 목욕을 잠깐 다녀 온 틈에 일어난 일이지요. 집에 있는 계집애의 말을 들으면 권총으로 결투를 할 셈으로 어디론가 갔다는 것입니다.』

『결투라고요?』

그 한 마디에는 오 진국씨의 안색도 어지럽게 변했다.

『그렇습니다. 생사를 다투는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오오, 일은 마침내 커질대로 커지고 말았소!』

오 진국씨는 탁 무릎을 치며 비장한 음성으로 탄식을 하였다.

『그러나 오선생님, 제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요. 여기에 한 가지 비장한 사실이 있읍니다.』

『어서 이야기를 하시요.』

『결투를 승낙하고 따라나간 내 아들로 말하면 아직껏 권총이라고는 손에 잡아보지도 못한 아이올시다. 그 애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그 순간, 오 진국씨는 또 한 번 무릎을 딱 치며,

『아, 안됐소! 빨리 그들을 찾아야만 하겠오!』

그렇게 외치며 오 진국씨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자유롭지 못한 몸이라 다시금 펄썩 주저앉고 말았다.

『영심아! 영심은 어디 있느냐?』

오 진국씨는 커다란 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때, 미닫이가 홱 열리면서 영심이 대신 할머니가 대답을 했다.

『영심이가……영심이가 정신을 잃었구나!』

영심은 새하얀 얼굴을 하고 할머니의 팔에 안기워 있었다.

『얘야, 영심아 영심아!』할머니는 영심의 어깨를 연거퍼 흔들어 대며 영심을 자꾸만 불렀다. 임 교수는 뛰어가고 오 진국씨는 네 발 걸음으로 성큼성큼 기어갔다.

『술이 있거든 빨리……』

임교수는 오 진국씨가 먹다 남은 소주를 공기에 따라 영심의 입에다 부어 넣었다. 그리고는 식모더러 물수건을 가져 오래서 영심의 얼굴과 머리를 식혔다.

한참만에 영심은 헛소리를 했다.

『죽기 전에……죽기 전에 한 번 만나 본다지 않았어요?』

딸의 싸늘한 손길을 부여잡고 오 진국씨는 멍하니 임교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임교수는 양미를 찌푸리며 깨어나는 영심의 무심한 모습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영심의 그 헛소리를 듣는 순간, 임교수의 교육을 책망하던 오 진국씨 자신의 자세 교육이 후딱 머리에 왔다. 사나이의 꾀임에 넘어간 줄로만 믿고 있던 자기 딸이었다.

그 자기 딸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온 이 절실한 이 한 마디를 듣는 순간, 오진국씨는 자기가 지금까지 굳세게 지니고 오던 인생관의 붕괴를 느끼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영심은 이윽고 눈을 떴다. 그러나 어지러움이 심하여 일어나 앉을 수가 없다.

『자아, 그럼 오선생 저는 좀 나가 봐야겠읍니다. 그들을 찾아 봐야 겠읍니다.』

임교수는 훌쩍 일어나서 나왔다.

『선생님, 저두……저두 나가 보겠어요.』

그렇게 외치면서 영심은 일어섰다.

『안되오! 좀더 진정하신 후에……』

영심은 일어서다가 다시 주저앉았고 임교수는 부리나케 오 진국씨의 집을 뛰쳐나왔다.

외국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서는 결투의 장면을 읽기도 하고 보기도 했지만 실제로 결투의 광경을 본적은 허 정욱 자신도 물론 없었다. 그러나 결투의 정신만은 전적으로 찬양하고 있는 허중령이었다.

사나이와 사나이의 최후의 대결은 생명을 내걸은 결투에 있을 수 밖에 별다른 해결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운도 소년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 시절을 벗어나면서부터 결투의 무의미를 깨닫기 시작하였다.결투로서 최후의 체면을 세운 시대는 이미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 각국이 결투를 하나의 범죄로서 규정한 것도 오로지 그 때문이었다.

더구나 오늘, 두 사람의 결투로서 오 영심의 운명을 결정 짓는 다는 것은 확실히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기사도(騎士道)가 곧 정의를 의미했던 낡은 도덕일 따름이다.

그러나 지운은 그것을 승낙하였다. 결투로서 오영심의 운명을 결정 짓는 것이 아니고 지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으려는 비장한 생각에서였다.

두 사람을 실은 지이프차는 안국동 네거리로 빠져나왔다.

『창경원으로 장소를 정하는 것이 어떻소?』

허 정욱은 물었다.

『아무런 곳이나 좋습니다.』

지운은 대답하였다.

차는 일로 창경원으로 달려갔다.

『외국의 낡은 풍속인 결투에 대한 지식이 나에게는 없소. 입회인(立會人) 같은 것을 세웠다지만……』

『그때의 법률이 결투를 허용했었으니까 입회인을 세울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날에는 살인 방조죄에 걸리지요. 그런 의미에서도 창경원은 적당한 장소가 못될 것입니다. 결투에 이겨 봤댔자 살인범으로 곧 체포가 될 테니까요.』

『산으로 가요.』

『그렇지요. 깊숙한 산골짜기 같은 데가 좋겠지요.』

이리하여 차는 창경원 앞을 그대로 지나 동소문 고개를 넘었다.

『성북동으로 들어가!』

삼선교에서 차는 왼쪽 편으로 꺾어져 성북동 막바지를 향하여 개천가를 곧장 기어 올라갔다.

올라가는 동안 지운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영심의 소녀 시절의 해군복이 눈시울 속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오늘의 자기의 운명이 십년 전 그때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만 같았다. 「愛人[애인]」의 후편을 써 놓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약간 한스럽기도 했지만 이처럼 영심의 남편되는 사람의 손에 걸려서 쓰러지는 편이 제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는 다소 도의적인 죽음 같기도해서 세속적인 부채를 갚는 것 같기도 했다.

서로가 죽을 때는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영심의 최후의 한마디가 무척 마음속에 아쉬워 왔으나 그럴 겨를이 허용될 수 있는 허중령의 옆 얼굴이 못 되었다.

의분과 증오의 감정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흐를 것만 같은 무서운 옆 얼굴이었다. 싸움터에서의 전투심리가 그대로 아로새겨져 있는 결사적인 푸로필이었다. 진정으로 단념할 수 없는 단념을 지운은 하는 수 밖에 없었다.

『스톱!』

이상 더 올라갈 수 없는 계곡 막바지에서 차는 멈추었다.

『김중사!』

허중령은 차안에 그대로 버티고 앉아서 호위병인 운전수를 엄숙한 어조로 불렀다.

『총을 이리 줘.』

『네.』

왼쪽편 허리에서 허중령의 권총을 호위병은 내주었다.

『자네 것도 마저 이리 줘.』

『네.』

젊은 군인은 의아스런 표정으로 오른쪽 허리에서 또 하나를 내주었다.

『상관의 명령이다! 이제부터 하는 내 명령에 절대 복종을 맹세하라!』

조그만 반항이라도 있었다가는 권총뿌리로 내려 갈길것만 같은 무서운 표정이었다.

『네 복종하겠읍니다!』

호위병은 얼굴이 새파래 졌다.

『군이 오늘 보고 듣고 한 사실을 당장에 잊어버려라!』

『네……』

『군이 오늘 보고 들은 사실은 영원한 비밀이다!』

『네, 네 ―』

운전대에 앉아 있는 그대로의 자세로 젊은 호위병은 차렷을 했다.

허중령은 뒤이어 다시금 정확성을 띠인 명령을 운전수에게 했다.

『이 차는 남대문 덕흥상사를 떠난 후 어디로 갔는가?』

『안국동 임교수의 댁으로 갔읍니다.』

『아니다!』

『네!……』

『덕흥상사를 출발한 이 차는 아무 데도 들리지 않고 곧장 일선 연대로 간 것이다 알겠나!』

『네, 알겠읍니다!』젊은 군인도 그 무엇을 짐작하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여기서 잠깐 내린다. 요지음 이 산에 꿩이 많다는 말을 듣고 꿩 사냥을 가는 것이다.』

『네, 네.』

『총소리가 들린 후, 삼십분 이내에 두 사람중에 한 사람이 내려올 것이다.』

『네 ―』

『만일 내려온 사람이 여기 있는 임형인 경우에는……명륜동 사모님 한테로 정중히 모셔다 드려라.』

『네 ―』

『한 주일 후, 내 휴가가 끝나서 행방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오늘 덕흥상사를 떠나 일선으로 가는 도중, 삼선교에서 이유 없이 내렸다고만 하라. 그리고 반대로 내가 내려오는 경우에는 아까 말한 것처럼 곧장 일선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네.』

『혹시 우리 두 사람이 다 내려오지 않는 경우에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해도 무방하다. 알겠나?』

『알겠읍니다!』

『군의 총명만이 군의 생명을 보장할 것이다!』

『네!』

젊은 군인의 얼굴은 해말쑥하니 핏기를 잃고 있었다.

『김중사는 잠깐 내려. 우리는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

『네.』

운전수는 뛰어내려 저만치서 기다리고 서 있었다.

『서로의 신변을 보장하기 위하여 오늘의 결과가 자살이라는 유서를 쓰기로 합시다.』

『좋습니다.』

둘이는 각기 주머니에서 묵묵히 수첩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둘이가 다 잠시 그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유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공평을 기하기 위하여 유서의 내용을 서로 보이기로 합시다.』

『그럽시다.』

먼저 허 정욱이가 자기의 수첩을 지운에게 펼쳐보였다.

一九五四[일구오사]년 二[이]월 三[삼]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직전의 허정욱은 씀

도의는 완전히 허무러지고, 있는 것은 오직 난무하는 본능일 뿐이다. 자유 민주주의가 본능의 난무를 옹호하는 주의 주장일진대 차라리 그것은 우리 한국 민족에게 부여되지 않음만 같지 못하다. 한 민족의 정기를 위하여 나는 반생을 싸워 왔다. 그러나 아아, 본능의 옹호자들은 진실이라는 이름을 빌어 작게는 한 가정, 한 민족을 파괴하고 크게는 전 세계 전 일류를 좀 먹고 있다. 감미로운 것을 즐기는 자에게는 반드시 멸망이 오는 것이다. 아아 성심 성의, 내가 사랑하여 온 아내 영심! 그대는 마침내 본능주의자에 제물이 되려는가? 너무도 서글프고 원망스럽다!……』

『잘 읽었읍니다.』

그러면서 지운은 다음 자기 수첩을 허중령에게 내보였다.

내마음의 고향이던 영심씨!

죽기 전에 한 번 만나 뵙지 못하고 가는 이몸, 무한히 안타깝습니다. 작품 세계에서는 진실을 위하여 그처럼 용감했던 저도 현실에서는 역시 약한 사람 가운데의 하나로서 죽는 길을 택했읍니다. 노력을 하다가 진정으로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언제든지 찾아오고 찾아가자던 영심씨의 한 마디를 주옥처럼 소중히 알고 저는 먼저 갑니다. 제게 있어서 노력은 이미 불가능을 의미했읍니다.

끝으로 몸 조심하셔서 허중령의 심뇌를 덜어드리기 바라며 아직 하직하지 못하고 나온 제 아버지와 어머님께 저를 대신하여 위로의 말씀 전해주시기 비오며……

一九五四[일구오사]년 二[이]월 三[삼]일 ― 임 지운은 경건히 올림

『좋소. 자아 내립시다.』

수첩을 도로 지운에게 내주고 허 정욱은 차에서 뛰어내렸다. 지운도 내렸다. 운전수는 대신 차에 올랐다. 둘이는 묵묵히 눈이 쌓인 계곡을 끼고 올라갔다. 한참 걸어 올라가다가 앞장을 선 허중령이 왼쪽편 산비탈을 기어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눈길이 미끄러워 두사람은 연방 쓰러지면서 올라갔다. 소나무 가지를 붙잡고 올라갔다.

『노력이 불가능할 때는 언제든지 찾아오고 찾아가자.』

허중령의 심뇌를 덜어 주라는 말은 나쁘지 않았으나 영심의 입에서 이와 같은 말이 흘러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허 정욱의 피가 글자 그대로와글와글 끓었다.

둘이가 한참 위로 올라가는데 비교적 평탄한 넓이를 가진 언덕 하나가 나타났다. 그 언덕으로 둘이는 미끄러지면서 올라갔다. 눈은 바람에 날아갔는지, 발목 밖에는 차지 않았다.

『여기가 좋소.』

앞장을 섰던 허 정욱은 걸음을 멈추었다.

날씨는 흐렸다 개었다. 하였다 엷은 구름의 장막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신사적인 행동이 필요하오.』

걸음을 멈추며 허 정욱은 말했다.

『염려 마시요.』

간단한 대답을 지운은 했다.

『결투의 조건을 잘 모르니까, 우리는 우리 식으로 조건을 정합시다.』

『좋습니다.』

『거리는 삼십 미터로 정합니다.』

어지간한 사격의 명수가 아니고서는 삼십 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사람 하나를 쓰러뜨리기가 무척 힘든 줄을 허 중령은 알고 있었다.

『좋습니다.』

지운은 간단히 그것을 승낙하였다.

『시계를 꺼내시요.』

지운은 묵묵히 외투 소매를 걷어 보였다.

『끄르시요.』

지운은 시계를 끌러 주었다. 허 정욱도 자기 시계를 끌렀다. 크기가 꼭 같은 동그란 스텐레스의 시계였다. 허중령은 두 개를 한꺼번에 귀에 갖다 대고 한참 동안 초침(秒針)소리를 듣고 있다가,

『들어 보시요. 정확히 맞아 돌아갑니다.』

『들을 필요가 없읍니다. 나는 허중령의 인격을 존중하고 있읍니다.』

『그러면 초침을 맞추어 놓습니다.』

그러면서 허중령은 두 개의 유리를 떼고 꼭 같은 위치에다 초침을 돌려 놓았다. 그리고 또 한참 들여다 보았다. 초침은 꼭 같은 위치에 서서 정확히 맞아 돌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허중령은 시계를 도로 내주며,

『시각을 정합시다.』

『좋습니다.』

『어떻게할까요? 삼십 미터 거리에 마주 서서 초침이 영시(零時)를 가릴킬 때, 손을 들어 신호를 하지요. 그리고 그 신호가 있은지 일 분 후, 다시 말하면 그 초침이 다시 돌아와 영시를 가리키는 순간을 발사시각으로 정하면 어떨까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인격을 내걸고 신사 조약이 필요하지요.』

『그 점에 있어서는 나를 의심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요. 이 한마디는 임 지운과 아울러 오 영심의 명예를 위해서도 신사가 돼야만 하겠지요.』

그러면서 지운은 비로소 똑바로 허 정욱의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최후의 대결을 의미하는 무서운 응시가 그 곳에는 있었다.

『임형은 어디까지나 좋은 말만 잘하오. 대단히 좋은 말이요. 좋소!오 영 심의 명예를 위하여 신사가 되시요!』

허 정욱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된다면 되는 거요! 여러말 할 필요는 없소!』

이미 죽음을 원한 지운이었다. 발사 시각이 와도 지운은 사격을 하지 않을 셈으로 있는 것이다. 만져도 보지 못한 무기라도 방아쇠만 잡아당기면 탄환은 나가겠지만 그러한 의욕이 지운에게는 통 없다.

아니, 설사 자기의 그 서투른 탄환이 영심의 남편을 쓰러뜨리고 영심을 소유해 봤댔자 영심에게도 자기에게도 행복은 좀처럼 올 것 같지 않았다. 뿐더러, 이렇게 해서 허중령을 쓰러뜨리는데 지운은 조그만 흥미도 의의(意 義)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무의미한 살생(殺生)이었다. 한발의 탄환도 내보내지 않고 지운은 곱게 죽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좋소! 그러면 다음에는 무기를 자유로히 선택하시요.』

그러면서 허중령은 케이스에서 두 자루의 권총을 꺼내들었다. 두 개가 다 꼭 같은 미군용 포오티 파이브였다.

『탄환은 세 발로 한정 합시다.』

세 발을 연발하자는 것이다.

『좋습니다.』

허 정욱은 들어 있는 탄환을 일단 빼 놓았다가 다시금 세 발씩을 각기 장진(裝塡)하였다.

『아다시피 포오티 파이브의 유효 사거리(有効射距離)는 오십 미터 내외이니까, 삼십미터의 거리에서는 명중만 하면 소생의 희망은 절대로 없소.』

『알고 있소.』

사실 지운으로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십 미터만 떨어져 있어도 잘 맞아 주지 않는 권총의 기능조차 지운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자아, 마음대로 하나를 골라 잡으시요.』

허 정욱은 권총 두 개를 지운의 앞에 내밀었다.

지운은 잠자코 하나를 잡아 들었다. 예상 밖으로 무겁다.

모험 만화나 탐정 소설 같은 데서는 흔히 보아온 이 무기가 이러한 운명의 과정을 거쳐서 자기 손에 들어온 사실이 다소 허황하기도 했다.

『아, 위험……』

허 정욱은 휘청 몸을 비키면서 총을 든 지운의 손목을 탁 밀었다. 지운은 모르고 안전장치를 벗겨 놓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댄 채 들여다보느라고 총을 들었던 것이나 그 총뿌리가 허중령의 밑배를 겨누면서 드리댔기 때문이다.

『신사 조약을 잊어서는 안되오!』

허중령의 표정에 위험심 하나가 푸뜩 떠올랐다. 지운의 감정이 언제 어떻게 삐뚤어 질런지 믿을 수가 없다.

『염려마시요.』

총뿌리를 다시 아래로 내리웠다. 자기의 서투른 솜씨를 상대자에게 보여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허중령의 총뿌리도 땅을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겨 놓을 말은 없소? 남은 사람이 그 뜻을 전하기로 합시다.』

허중령은 물었다.

『벌써 유서에 썼으니까, 없소.』

그러다가 불현 듯 생각이 난 듯이 지운은,

『모르긴 하지만 내가 죽으면 멀지 않아서 영심씨도 내 뒤를 따를 것만 같소. 그 때는 내 무덤 옆에 영심씨의 무덤을 나란히 묻어도 무방하도록 허형의 관대한 처분을 바랍니다.』

『…………』

허중령은 이미 대답할 기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욕적인 언사 앞에 신사다운 결투가 다 뭐냐 말이다. 방아쇠를 잡아당겨 욱하고 치미는 분노의 덩어리를 그대로 내뿜으면 그만이다.

『좋소. 나란히 묻어 드리지요!』

무서운 표정을 하고 허중령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감사합니다!』

지운은 손을 내밀어 최후의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허정욱은 격분의 눈흘김 하나로 그것을 거절 하고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였다.『총뿌리를 아래로 내리우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요.』

자기 자신의 감정도 믿기 힘든 허 정욱으로서는 지운의 감정을 믿을 수가 도저히 없다. 그래서 뒷걸음질로 삼십미터를 측량하고 있는 것이다.

『염려 말고 돌아서서 가시요.』

인격적인 모욕을 느끼고 지운은 말했다. 그래도 허 정욱은 뒷걸음질만 눈 위에 치고 있었다. 뒷걸음질을 치면서 허 정욱은 이 싸움에 있어서 자기가 완전히 졌다는 것을 점차로 느끼기 시작하였다. 지운에게는 따라 죽어 줄 오 영심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에게는 그것이 없다. 호된 고독이 가슴을 쑤시기 시작했다.

이십 미터 쯤 뒷걸음 쳤을 때, 지운은 휙 뒤로 돌아서서 자기의 등골을 상대편에 내맡기면서 외쳤다.

『내 뒷통수에는 눈이 없소!』

무시 당한 인격을 지운은 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자 허 정욱은 안심을 하며,

『돌아서요!』

하고 고함을 쳤다. 지운은 다시 돌아섰다. 허 정욱도 돌아서며 약 삼십 미터의 지점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얀 눈 위에 둘이는 마주 섰다. 발목을 덮는 눈의 깊이였다.

『시계를 들여다 보시요.』

지운은 왼쪽 손에 잡았던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초침이 영시를 향하여 째각째각 걸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영시에 초침이 다달았을 때, 허 정욱은 권총 든 손을 번쩍 들며,

『준비!』

하고 고함을 쳤다.

육십 초 후, 초침이 다시금 영시를 가리키는 순간이 발사 시간이다.

왼 손에 든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지운은 권총을 잡은 오른 손을 들어 허정욱의 가슴팍을 향하여 곧장 총뿌리를 겨누었다. 총뿌리와 총뿌리는 마침내 삼십 미터의 간격을 두고 마주 섰다.

일 분 후에는 자기는 죽는 것이다. 지운의 눈앞에 후딱 어머니의 얼굴이 나타났다. 죽기는 오 영심 때문에 죽는 지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영심의 모습은 통 나타나지 않았다. 허 중령의 얼굴과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 겹쳐진 어머니의 가슴을 지운은 지금 노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도 없다. 그저 어머니의 얼굴이 지운의 시각에 들어 왔을 뿐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든가 가엾다든가 하는 의식조차 지운은 갖지 못했다. 완전한 무사무욕(無思無欲)의 순간이 온 것이다.

한편 허 정욱은 지운과는 정반대로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그 무서운 긴장 속에서도 지운을 쓰러뜨려야만 자기가 산다는 일념만이 불붙고 있었다.

지운을 따라서 죽을 수 있다는 영심을 생각할 때, 허 정욱은 뼈를 갉아내는 질투의 념과 함께 자기의 무참한 패배를 맛보고 있었다.

허 정욱은 권총에 대단한 자신이 있었다. 그러한 권총의 명수의 눈에 그때 이상한 사실 하나가 문득 뛰어 들어 왔다. 그것은 지운의 총뿌리가 일직선으로 자기의 가슴팍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이다.

삼십 미터나 떨어져 있는 거리에선 한 인물의 가슴을 뚫으려면 그 총뿌리가 곧장 그 인물의 가슴을 향하고 있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발사와 함께 총뿌리는 위로 튄다. 그 튀는 각도를 미리 계산에 넣지 않으면 총알은 허중령의 머리 위로 날아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계산에 넣은 것이 소위 조준기(照準器)였다.

『조준기 위에 허 정욱을 세워 놓는 총구멍은 자연히 그의 발뿌리 앞을 향하게 되는데 지운의 총뿌리는 일직 평행선으로 허정욱의 가슴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조준을 맞출 줄 모르는 사람이다.』

무기를 다루는 그 어색한 솜씨와 포오즈 조준을 정확히 맞출려면 한쪽 눈을 감아야 할텐데 지운은 두 눈을 말끄러미 뜨고 있는 것이다.

허중령의 표정이 후딱 어두워졌다.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삼십 초가 이미 지나고 있었다.

『권총에는 자신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전연 무뢰한이 확실하다. 사십 초가 지났다. 허 정욱의 결정적인 각오가 무섭게 흔들리었다. 그러나……

『모르는 척하고 그대로 쏘아 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적어도 결투의 형식을 밟은 이상, 자기의 비겁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있자! 저이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시계도 들여다 보지 않고 말끄러미 뜨고 있던 지운의 두 눈이 그 순간, 후딱 감기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십 초가 되었다. 무서운 혼란이 허중령에게 왔다, 쏘느냐, 마느냐, 쏘느냐 마느냐, 다음순간, 허중령은,

『결투 중지! 총뿌리를 내려라!』하고 무아 몽중으로 고함을 쳤다.

지운은 후딱 눈을 뜨고 총을 내렸다. 허중령이 성큼성큼 눈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총을, 이리 내요!』

다가서기가 바쁘게 허중령은 지운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 듯이 받아쥐자 케이스 속에 쑥 쓰러 넣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어안이 벙벙해서 지운은 물었다.

『당신은 사격의 경험조차 없는 사람이요. 당신의 자살 행위를 내가 방조할 수는 없소!』

『아닙니다!』

『내려가요!』

『결투를 중지한다는 말입니까?』

『여러 말 말고 빨리 내려가요!』

무서운 기세로 튀어나오는 군대식 명령이었다. 지운은 하는 수 없이 허중령의 그 폭넓은 완강한 어깨를 덤덤히 바라보고 미끄러운 눈길을 꿈결처럼 따라 내려갔다.

지이프차가 백 미터 밖에 바라보이는 지점까지 내려오자 허중령은 불현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뒤는 돌아보지도 않고 다시금 천천히 발을 옮기며 혼잦말처럼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려 보내 주어야만 하지요.』

지운은 문득 시선을 들어 허중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허중령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그리고 젖어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못 결투의 상대자가 사격의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천추의 한일 따름이요!』

『아, 허형!』

감격의 한마디를 지운이가 외쳤을 때는 이미 성큼성큼 절반은 달리듯이 걸어간 허중령이 휙하고 지이프차에 오르고 있었다.

『오늘따라 꿩은 한마리도 보이지 않았네. 출발!』

지운을 남겨 놓은 채 차는 이윽고 질풍처럼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