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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령기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해가 쪼이면서도 바다에서는 안개가 흘러 온다. 헌칠한 벌판에 얕게 깔려 살금살금 기어오는 자주빛 안개는 마치 그 무슨 동물과도 같다. 안개를 입을 교장 관사의 푸른 지붕이 딴 세상의 것 같이 바라보인다. 실습지가 오늘에는 유난히도 넓어 보이고 안개 속에서 일하는 동물들의 모양이 몹시도 굼뜨다. 능금꽃이 피는 시절임에도 실습복이 떨리리만큼 날씨가 차다.

쇠스랑으로 퇴비를 푹 찍어 올리니 김이 무럭 나며 뜨뜻한 기운이 솟아오른다. 그 속에 발을 묻으니 제법 훈훈한 온기가 몸을 싸고 오른다. 학수는 그대로 그 위에 힘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그 속에 전신을 묻고 훈훈한 퇴비 냄새를 실컷 맡고 싶었다.

「너 피곤한가부구나.」

맥없는 학수의 거동을 바라보고 섰던 문오가 학수의 어깨를 치며 그의 쇠스랑을 뺏아 들고 그대신 목코에 퇴비를 담기 시작하였다.

「점심도 안 먹었지.」

「…………」

「(중략)……배우는 학과의 실험이라면 자그마한 실습지면 그만이지 이렇게 넓은 땅을 지을 필요가 있나. (중략)……」

혼잣말같이 중얼거리며 문오는 퇴비를 다 담고 나서,

「자, 이것만 갖다 붓고 그만 쉬지.」

학수는 힘없이 일어나서 목코의 한 끝을 메었다.

제삼 가족의 오늘의 실습 배당은 제이 온상(溫床)의 정리였다. 학수는 온상까지 가는 길에 한 시간 동안에 날른 목코의 수효를 속으로 헤어 보았다. 열 일곱번째였다.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퇴비를 새로 만드는 온상에 갖다 붓고 나니 마침 휴식의 종이 울린다.

「젖 먹은 힘 다 든다.―실습만 그만 두라면 나는 별일 다 하겠다.」

옆에서 새 온상의 터를 파고 있던 삼학년생이 부삽을 던지고 함정 속에서 뛰어 나온다. 그도 점심을 못 먹은 패였다.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받아 뿌리면서 물을 켜러 허둥지둥 수도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사면의 실습지 구석구석에 퍼져서 삼백여 명의 생도는 그 종적조차 모르겠더니 휴식 시간이 되니 우줄우줄 모여 들어 학교 앞 수도를 둘러싸고 금시에 활기를 띠었다.

온상을 맡은 가족은 그곳으로 가는 사람이 적고, 대개 그자리에 주저앉아 땀을 들였다. 학수도 문오도―같은 사학년인 두 사람은 각별히 친밀한 사이였다.―떨어지지 아니하고 실습복 채로 땅 위에 주저앉았다.

「능금꽃이 피었구나.」

확실한 초점 없는 그의 시야 속에 앞밭에 능금나무가 어리었다. 흰 꽃에 차차 시선이 집중되자 「능금꽃」의 의식이 새삼스럽게 마음속에 떠올랐다.

「―아니, 마른 가지에.」

보고 있는 동안에 하도 괴이하여서 학수는 일어서서 그곳으로 갔다. 확실히 마른 가지에 꽃이 피어 있다. 그 알 수 없는 힘의 성장을 경탄하고 있을 때에 등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그는 뒤로 돌아섰다.

남부농장에서 실습하던 같은 급의 창구가 온상 옆에 서 있다.

「꽃구경 하고 있다.」

싱글싱글 웃으며,

「능금꽃 필 때 시집가는 사람은 오죽 좋을까.」

괭이자루를 무의미하게 두드리고 앉았던 다를 동무가 문득 생각난 듯이,

「아, 참. 금옥이가 쉬이 시집간다지.」

창구가 맞장구를 치며,

「마을의 자랑거리가 또 하나 없어지는구나. 두헌이가 ×으로 넘어갔을때 우리는 마을의 자랑거리를 하나 잃었더니 이제 우리는 마을의 명물을 또 하나 잃어버리는구나.―물동이 이고 울타리 안으로 사라지는 민출한 자태도 더 볼 수 없겠지.」

「신랑은 ××사는 쌀장수라지. ―금옥이네도 가난하던 차에 밥은 굶지 않겠군.」

「우리도 섭섭하지만 정 두고 지내던 학수 입맛이 어떤가.」

싱글싱글 웃으면서 창수는 학수를 바라본다. 비인 속에 슬픈 기억이 소생되어 학수는 현기증이 나며 정신이 흐려졌다.

「헛물만 켜고 분하지 않은가.―그러나 가난한 학생에게는 안 준다니 할 수 없지만.」

창구의 애꿎은 한 마디에 학수는 별안간 아찔하여지며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핏기 한 점 없는 해쓱한 얼굴로 뻣뻣하게 쓰러지는 학수를 문오는 날쌔게 달려와서 등뒤로 붙들었다. 창구가 달려와서 그의 다리를 붙들었다.

「웬일이냐.」

보고 있던 동무들이 우르르 모여 들었다.

「―가끔 빈혈증이 일으키니.」

「주림과 실습과 번민과―이 속에서 부대끼고야 졸도하기 첩경이지.」

그 어느 한 편을 부축하려고 가엾은 동무를 둘러 싸고 그들은 우줄우줄하였다.

「공연히 실없는 소리를 했더니 야유가 지나쳤다부다.」

창구는 미안한 생각을 금할 수 없어서 몇번이나 사과하는 듯이 말하면서 문오와 같이 뻣뻣한 학수를 맞들고 숙직실로 향하였다.

다른 가족의 동무들이 의아하여 울레줄레 따라왔다. 감독선생이 두어 사람 먼 데서 이것을 보고 좇아왔다.

숙직실에 데려다 눕히고 다리를 높이 고였다. 웃통을 활짝 풀어헤치고 물을 축여 가슴을 식히고 있는 동안에, 핏기가 얼굴에 오르면서 차차 피어나기 시작한다. 십분도 채 못되어 의사가 달려왔을 때에는 학수는 회복하고 눈을 떴다. 의사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반잔쯤 마시고 나니 새 정신이 들었다. 골이 아직 띵하였으나 겸연쩍은 생각에 학수는 벌떡 일어났다.

「겨우 마음 놓았다. 사람을 그렇게 놀래니.」

창구는 정말 안심한 듯이 웃으며,

「실없는 말 다시 안하마.」

「감독선생께 말할 터이니 실습 그만두고 더 누워 있어라.」

문오는 학수 혼자 남겨 두고 창구와 같이 실습지로 나갔다.

숙직실에 혼자 남아 있기도 거북하여 학수는 허둥지둥 방을 나와 마음 편한 부란기(孵卵器) 당번실로 갔다. 훈훈한 비인 방에 누워 있으려니 여러가지 생각과 정서가 좁은 가슴속을 넘쳐 흘러 나왔다.

(병아리만도 못한 신세!)

윗목 우리 속에서 울고 돌아치는 병아리의 무리―, 그보다도 못한 신세라고 학수는 생각하였다. ― (병아리에게는 나의 것과 같은 괴로움을 없겠지.)

창밖으로는 민출한 버드나무가 내다보였다. 자랄대로 자라는 밋밋한 버드나무― 그만도 못한 신세라고 학수는 생각하였다. 아무 생각없이 순진하게 자라야 할 어린 그에게 너무도 괴로움이 많다. 그 가지가지의 괴로움이 밋밋하게 자라는 그의 혼을 숫제 무지러뜨린다. 기구한 사정에 시달려 기개는 꺽어지고 의지는 찌그러진다. 금옥이―서로 정을 두고 지내던 그를 잃어버리는 것은 피차에 큰 슬픔이었다. 성 밖 능금밭에서 만나던 밤, 금옥이도 울고 그도 울었다. 그러나 학수의 괴로움을 학교에 와도 괴롭고, 가난과 부자유―이것이 가지가지의 괴로움을 낳고 어린 혼의 생각을 짓밟았다.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두 눈에는 더운 것이 넘쳐 나왔다. 뒤를 이어 자꾸만 흘러 나왔다. 웬만큼 눈물을 흘리면 몸이 가쁜하여 지건만 마음속에 서러운 검은 구름이 풀리지 않는 이상, 눈물은 비 쏟아지듯 무진장으로 흘러 내렸다. 흐릿한 눈물 속으로 학수는 실습을 마치고 들어온 문오의 찌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너무 흥분하지 말아라.」

어지러운 그의 꼴이 문오의 눈에는 퍽도 딱하였다.

「……금옥이 때문에?」

「보다도 나는 학교가 싫어졌다.」

「학교가 싫어진 것은 지금에 시작된 일이냐? 좋아서 학교 오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기계가 움직이듯 아무 의지도 없이 맹목적으로 오는 데가 학교야. 그렇다고 학교에 안 오면 별수가 있어야지.」

「즐겁게 뛰노는 곳이 아니고 사람을 ××하는 곳이야.」

「흙과 친하라고 말하나 (중략) 흙과 친할 수 있는가.」

「어디로든지 먼 곳으로 가고 싶어.」

「가서는 어떻게 하게? 지금 세상 가는 곳마다 다 괴롭지, 편한 곳이 어디 있겠니?」

「너무도 괴로우니 말이다.」

「가버리면 집안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니. 꾹 참고, 있는 때까지 있어 보자꾸나.」

「…………」

「오늘밤에 용걸이한테 놀러나 갈까.」

문오는 학수를 데리고 당번실을 나갔다.

아침.

조례시간에 각학년 결석 보고가 끝난 후, 교장이 성큼성큼 등단하였다.

엄숙하게 정렬한 삼백여 명의 대열이 일순 긴장하였다. 교장의 설화가 있을 때마다 근심 반 호기심 반의 육백의 눈이 단 위로 집중되는 것이다.

「다달이 주의하는 것이지만……」

깨어진 양철같이 울리는 첫마디를 들은 순간 학수는 넉넉히 그 다음 마디를 짐작할 수 있었다.

「번번이 수업료 미납자가 많아서 회계처리에 대단히 곤란하다……」

짐작한 대로였다. 다달이 한번씩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학수는 마치 죄진 사람같이 마음이 우울하였다. 다달이 불과 몇원 안되는 금액이지만 가난한 농가의 자제에게는 무거운 짐이었다. 교장의 설유가 있을 때마다 매맞는 양같이 마음이 움츠러졌다.

「이번 주일 안으로 안 바치면 단연코 처분할 터이니……」

판에 박은 듯한 늘 듣는 선고이지만 학수의 마음을 아프고 걱정되었다.

종일 동안 마음이 우울하였다.

때도 떳떳이 못먹는 처지에 그만큼의 돈을 변통할 도리는 도저히 없었다. 달마다 괴롭히는 늙은 아버지의 까맣게 끄스른 꼴을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저렸다. 가난한 집안을 업고 가기에 소나무같이 구부러진 가련한 꼴이 그림같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일년 동안이나 공들여 길렀던 돼지는 달포 전에 세금에 졸려 팔아버렸다. 일년 더 길러 명년 봄에 팔아 감자밭을 몇고랑 더 화리맡으려던 아까운 돼지를 하는 수 없이 팔아버렸다. 그만큼 세금이 재촉이 불같이 심하였던 것이다.

그날 일을 학수는 지금까지도 잘 기억하고 있다. 면소에서는 나중에 면서기가 「술기」를 끌고 나왔다. 어머니는 그것이 소용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욕지거리를 하였다. 아버지는 뜰앞에 앉아 말없이 까만 얼굴에 담배만 푹푹 피웠다. 밥솥을 빼어 실은 「술기」가 문 앞을 굴러나갈 때, 어머니는 울 모퉁이까지 따라나가며 소리를 치며 울었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다음날 아끼던 돼지를 없애고 어머니는 세 때나 밥술을 뜨지 않았다. 그때 일을 학수는 잊을 수가 없다.

(돼지도 없으니 이달 수업료를 어떻게 하노.)

걱정의 반날을 지우고 집에 돌아갔을 때 밭에 나간 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호미를 쥐고 뜰앞 나물밭을 가꾸고 있는 동안에 아버지가 돌아왔다. 그러나 피곤하여 맥없는 그 꼴을 볼 때, 귀찮은 말로 그를 더 괴롭힐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난한 저녁상을 마주 대하고 앉았을 때, 아버지 쪽에서 무거운 입을 열었다.

「요사이 학교 별일 없니?」

「늘 한 모양이지요.」

「공부 열심히 해라. 졸업한 후 직업에라도 속히 붙어야지, 늙은 몸으로 나는 더 집안을 다스려 갈 수 없다.」

그것이 너무도 진정의 말이기 때문에 학수는 도리어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였다.

「날씨가 고약해서 농사는 올해도 또 낭패될 것 같다. 비료도 몇가마니 사서 부어야겠는데 큰일이다. 작년에도 비료를 못쳤더니 땅을 버렸다고 최직장이 야단야단 치는 것을 올해는 빌고 빌어서 간신히 한 해 더 얻어 부치게 되지 않았니.」

학수는 다시 우울하여져서 중간에서 밥숟갈을 놓아버렸다.

「암만 해도 돼지를 또 한 마리 사서 기를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닭을 쳐도 시원치 못하고 그저 돼지밖에는 없어. ―학교 돼지 새끼 낳았니?」

아버지는 단 한 사람의 골육인 아들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의논하였다.

그러나 농사일에 정신 없는 아버지 앞에서 학수는 차마 수업료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물을 마시고는 방을 뛰어나갔다.

밥이 이슥하였을 때, 학수는 울타리 밖 우물에 물 길러온 금옥이에게 눈짓하여 성 밖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달이 너무도 밝기에 따로따로 떨어져 학수는 먼저 성 밖으로 나가 능금밭 초막 뒤편에 의지하여 금옥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보름달이 박덩이같이 희다. 벌판 끝에 바다가 그윽한 파도소리 함께 우련한 밤 속에 멀다. 윤곽이 선명한 초막의 그림자가 무슨 동물과도 같이 시꺼멓게 능금밭 속까지 뻗혀 있고, 그속에 능금나무가 잎사귀와 꽃이 같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우뚝 솟아 있다. 달밤의 색채는 반드시 흰빛과 묵화빛만이 아니다. 달빛과 밤빛이 짜내는 미묘한 색채―자연은 이것을 그 현실의 색채 위에 쓰고 나타난다. 이것은 확실히 현실을 떠난 신비로운 치장이다. 그러나 달밤은 또한 이 신비로운 색채뿐이 아니다. 색채외에 확실히 일종의 독특한 향기를 품고 있다. 알지 못할 그윽한 밤의 향기―이것이 있기 때문에 달밤은 더한층 아름다운 것이다. 인류가 태고적부터 가진 이 낡은 달밤―낡았다고 빛이 변하는 법 없이 마치 훌륭한 고전(古典)과 같이 언제든지 아름다운 달밤!

그러나 괴롬 많은 학수에게는 이 달밤의 아름다운 모양이 새삼스럽게 의식에 오르지 않았다. 금옥이 생각이 달보다 먼저 섰던 것이다. 만나는 마지막 밤에 다른 생각 다 젖혀 버리고 금옥이를 실컷 생각하고 그 아름답고 안타까운 마지막 기억을 마음속에 곱게 접어두고 싶었다.

초막 건너편 능금나무 사이에 금옥이가 나타났다. 능금꽃과 같은 빛으로 솟아 보이는 민출한 자태와 달빛에 젖은 오리오리 머리카락―마지막으로 보는 이런 것이 지금까지 본 그 어느 때보다도 더한층 아름다웠다.

「겨우 빠져 나왔어요.」

너무도 밝은 달빛을 꺼리는 듯이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금옥이는 가까이 왔다.

「요새는 웬일인지 집안 사람들이 별로 나의 거동을 살피게 되었어요. 날이 가까웠으니 몸조심하라고 늘 당부하겠지요.」

학수는 금옥이의 손을 잡으면서,

「며칠 안 남았군.」

「그 소리는 그만 두세요.」

「그날을 기다리는 생각이 어떻소?」

「놀리는 말씀예요.」

「놀리다니, 내가 금옥이를 놀릴 권리가 있나?」

「그렇지 않아도 슬픈 마음을 바늘로 찌르는 셈예요.」

「누가 누구의 마음을 찌르는고!」

「팔려 가는 몸을 비웃으려거든 그날이 오기 전에 나를 어떻게든지 처치해 주세요.」

「아, 어떻게 하면 좋은가! 나같이 힘없고 못생긴 놈이 또 있을까!」

말도 끝마치기 전에 학수에게는 참고 있던 울음이 탁 터져 나왔다. 목소리가 높아지며 어린아이 모양으로 엉엉 울었다. 금옥이의 얼굴도 달빛에 펀적펀적 빛났다.

그는 벌써 아까부터 학수의 눈에 띠이지 않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든지 처치해 주세요.」

느끼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하고 얼굴을 학수의 가슴에 푹 파묻었다. 울음소리가 별안간 높아졌다.

「처치라니, 지금의 나에게 무슨 힘이 있고 수단이 있나? 도망―, 그것은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일이지. 맨주먹의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하노.」

학수는 가슴을 쥐어 뜯었다.

「그것도 할 수 없다면 두 가지 길밖에는 없지요. 불쌍한 집안 사람들의 뜻은 어길 수가 없으니 그날을 점잖게 기다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 한 목숨을 없애든지……」

금옥이의 목소리는 떨렸다. 며칠 동안에 눈에 띠우리만큼 여윈 것이 학수의 손에 다치는 그의 얼굴 모습으로도 알렸다. 턱이 몹시 얇아지고 손목이 놀라리만큼 가늘어졌다.

「어떻게 하면 좋은고.」

학수는 괴로운 심장을 빼내버린 듯이 몸부림을 쳤다.

「사람의 일이란 될대로 밖에 안되는 것 같아요. ―이것이 우리들의 만나는 마지막이 될는지도 모르지요.」

울음 속에서도 금옥이의 태도는 부자연스러우리만큼 침착하다.

아무 해결도 없는 연극의 막을 닫는 듯이, 달이 구름 속에 숨기고 파도 소리가 별안간 요란히 들린다.

눈물에 젖은 금옥이의 치맛자락이 배꽃같이 시들었다.

모든 것을 단념한 후의 무서운 괴로움과 낙망 속에 금옥이의 혼인날이 가까와 왔다. 능금밭 초막에서 만난 밤 이후, 학수는 다시 금옥이를 만나지 못한 채 그날을 당하였다.

통곡하는 마음을 부둥켜한고 학교에도 갈 생각 없이 그는 아침부터 바닷가로 나갔다.

무슨 심술로인지 공교롭게도 훌륭한 날씨이다. 너무도 찬란히 빛나는 햇빛에 학수는 얼굴을 정면으로 들기가 어려웠다. 한들한들 피어난 나뭇잎이 은가루같이 반짝반짝 빛났다. 굵게 모여 와서 깨뜨려지는 파도 조각에 눈이 부셨다. 정어리 냄새와 해초 냄새와― 그의 쇠잔한 가슴에는 너무도 세인 바다 냄새가 흘러왔다.

포구에는 고깃배가 들어와 사람들의 요란히 떠드는 소리가―생활의 노래가 멀리 흘러왔다. 사람 자취없는 물녘에는 다만 햇빛과 바람과 파도 소리가 있을 뿐이다. 끝이 없는 먼 바다의 너무도 진한 빛에 눈동자가―전신이―푸르게 물드는 듯도 하다.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학수는 모래를 집어 바다에 뿌리면서 금옥이와 같이 물녘에서 놀던 가지가지의 장면을 추억하였다. 뿌리는 모래와 함께 모든 과거를 바다 속에 묻으려는 듯이 이제는 눈물도 없고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빠직빠직 타는 속에 바닷바람도 오히려 시원찮았다.

주머니 속에 지니고 왔던 하이네의 시집을 집어냈다. 금옥이와 첫사랑을 말할 때 책장이 낡아버리도록 읽던 하이네를 이제 마지막으로 또한번 되풀이하고 싶었다. 그것으로서 슬픈 첫사랑의 막을 내릴 작정이었다.

수없는 사랑의 노래와 실망의 노래―아무 실감 없이 읽던 실망의 노래가 지금의 그에게 또렷한 감정을 가지고 가슴속에 울려왔다. 다음 시에 이르렀을 때 그는 그것을 두번 세번 거푸 읽었다. 그것은 곧 학수 자신의 정의 표시요 사랑을 묻은 묘의 비석이었다.

낡아빠진 노래의 가락 가락 음과
마음을 괴롭히는 꿈의 가지가지를
이제 모두 다 장사지내 버리련다.
저 커다란 관을 가져오너라……그리고 열 두 사람의 장정을 데려오너라.
쾨룬의 절간에 있는
크리스톱 성자의 상(象)보다도 더 굳세인 열 두 사람의 장정을.
장정들에게 관을 지워서 바다 속 깊이 갖다 버려라.
이렇게 큰 관을 묻으려면 커다란 묘가 필요할 터이지.

여기에서 그만 슬픔의 결말을 맺고 책을 덮어버리려다가 그는 시의 힘에 끌리어 더욱더욱 책장을 넘겨 갔다. 낮이 지나고 해가 기울었다. 연지 찍고 눈을 감은 금옥이가 채밑에서 신랑과 마주앉아 상을 받고 있을 때였다. 학수는 모래 위에 누운 채 몸도 요동하지 않고 시에 열중하였다.

가느다란 갈대 끝으로 모래 위에 쓰기를,
「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그러나 심술궂은 파도가 한바탕 밀려와,
이 아름다운 마음의 고백을 여지없이 지워버렸다.
약한 갈대여. 무른 모래여.
깨어지기 쉬운 파도여. 너희들은 벌써 믿을 수 없구나.
어두워지니 나의 마음 용달음치네.
억세인 손아귀로 노르웨이 숲 속에서
제일 큰 전나무 한 대 잡아 뽑아다
타오르는 에드나의 화산속에 담거,
새빨갛게 단 그 위대한 붓으로
어두운 하늘에 줄기차게 써 볼까.
「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학수는 두번 세번 거듭 여남은번 이 시를 읽었다. 읽을수록 알지 못할 위대한 흥이 솟아나왔다. 「아그네스」를 「금옥이」로 고쳤다가 다시 여러 가지 다른 것으로 고쳐 보았다. 「동무」로 해 보았다. 「이땅」을 놓아 보았다. 나중에는 「세상」으로 고쳐 보았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위대한 감격이 가슴 속에 그득히 복받쳐 올라왔다.

「백두산 꼭대기에서 제일 큰 참나무 한 대 뽑아다 이 가슴의 열정으로 시뻘겋게 달궈 가지고 어두운 하늘에 즐기차게 써볼까. 그 무엇이여,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고.」

모래를 차고 학수는 벌떡 일어났다. 저물어가는 바다가 아득하게 멀고 쉴새없이 날아오는 파도빗발에 전신이 축축이 젖었다.

그날 밤에 학수는 며칠 전 문오와 같이 찾아갔던 후로는 다시 만나지 못한 용걸이를 찾아갔다. 오래 전에 빌려온 몇권의 책지도 돌려보낼 겸.

독서에 열중하고 있던 용걸이는 책상 앞에서 몸을 돌리고 학수를 맞이하였다. 좁은 방에는 사면에 각색 표지의 책이 그득히 쌓여 있다. 그 책의 위치가 구름의 좌향같이 자주 변하였다. 책상 위에 펴 있는 두터운 책의 활자가 아물아물하게 검고 각테안경 속에 담은 동무의 열정이 시꺼멓게 빛났다. 열정에 빛나는 그 눈. 바다 같은 매력을 가지고 항상 학수의 마음을 끄는 것은 그 눈이었다. 깊고 광채 있고 믿음직한 그 눈이었다. 학교에 안가도 좋고 눈에 띠이게 하는 일 없이 그는 두 눈의 열정을 모아 날마다 독서에 열중하는 것이 일과였다.

그가 서울을 쫓겨 고향으로 내려온 지 거의 반년이 넘는다. 근 사년 동안 어떤 사립학교레서 공부하다가 작년 가을에 휴교 사건으로 학교를 쫓겨난 후 즉시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학교를 쫓겨났다고 결코 실망하는 빛 없이 도리어 싱싱한 기운에 넘쳐 그는 고향을 찾아왔다. 부끄러워하는 대신에 그에게는 엄연한 자랑의 티조차 있었다. 그 부끄러워하지 않고 겁내는 법 없는 파들파들한 기운에 학수들은 처음에 적지아니 놀랐다. 그들의 어둡고 우울한 마음에 비겨 볼 때 용걸이의 그 파들파들한 기운과 광채는 얼마나 부러운 것이던가. 같은 마을에서 같은 어린 시적을 보낸 그들을 이렇게 다른 두 길로 나누어 놓은 것은 용걸이가 고향을 떠난 사년 동안의 시간이었다. 사년 동안에 용걸이는 서울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하고 그의 굳은 신념은 무엇에서 나왔던가를 학수는 문호와 같이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동안에 듣고 짐작하고 배워왔다. 마을에서는 용걸이를 위험시하고 각가지의 소문을 내었으나 그는 모든 것을 모르는 체하고 싱싱한 열정으로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 늠름한 태도가 또한 학수들의 마음을 끌고 잡아 흔들었다.

「요사이 번민이 심하지?」

용걸이는 학수의 사정을 대강 알고 그의 괴로움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 오늘 잔칫날 아닌가?」

다시 생각하고 용걸이는 검은 눈에 광채를 더하여 숭굴숭굴 웃었다.

학수에게 아무 대답이 없으니 용걸이는 웃음을 수습하고 어조를 변하였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 번민은 누구에게나 한두 가지씩은 다 있는 것이네.」

이어서,

「가지가지의 번민을 거치는 동안에 차차 사람이 되지.」

경험 많은 노인과 같이 목소리가 침착하고 무겁다.

성공하지 못한 용걸이의 과거의 연애 사건을 학수도 잘 알고 있다. 근 일년을 넘은 연애가 상대자의 의사와 그 집안의 반대로 깨어지고 말았다. 물론 그들의 반대의 이유가 용걸이의 가난에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확실한 것이었다. 용걸이의 번민은 지금의 학수의 그것과 같이 컸었고 그의 생각에 큰 변동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는 이를 갈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배척 받은 열정을 정신적으로 바칠 다른 큰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개인적 번민보다도 우리에게는 전 인류적 더 큰 번민이 있지 않은가.」

드디어 이렇게 말하게까지 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도 오늘에는 개인적 번민을 청산하고 새로 솟는 위대한 열정을 얻었던 말이네.」

하고 학수는 해변에서 느낀 감격이 사라질까를 두려워하는 듯이 흥분한 어조로 그 하루를 해변에서 지낸 이야기와 하이네 시에서 얻은 위대한 감격을 이야기하였다.

「하, 그렇게 훌륭한 시가 있던가―읽은 지 오래여서 하이네도 이제는 다 잊어버렸군.」

하이네의 시를 듣고 용걸이도 새삼스럽게 감탄하였다.

「백두산 꼭대기에서 제일 큰 참나무 한 대 잡아 뽑아다 이 가슴의 열정으로 시뻘겋게 달궈 가지고 어두운 하늘에 줄기차게 써볼까. 짓밟힌 ×××이여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고.」

「백두산」의 구절이 조금 편벽된 것 같다고는 하면서도 용걸이는 학수가 고친 이 시의 구절을 두번 세번 감동된 목소리로 읊었다.

「용걸이 있나?」

이때에 귀익은 목소리가 나며 문이 펄떡 열렸다.

들어온 것은 성안의 현규였다.

「현균가?」

학수는 그의 출현을 예측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간만의 그를 반갑게 바라보고 있다.

「공부 잘하나.」

현규는 한껏 이렇게 대꾸하면서 학수를 보았다. 그만큼 그들의 관계와 교섭은 그다지 친밀한 것이 못되었다. 그가 들어왔기 때문에 학수와 용걸이의 회화가 중턱에서 끊어졌고 또 학수가 있기 때문에 용걸이와 현규의 사이도 어울리지 아니하고 서머서먹한 것 같았다.

현규― 그도 역시 용걸이와 같은 경우에 있었다. 학교를 중도에서 폐한 후로부터는 용걸이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났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람들의 눈에 역력히 띠이지 않게 교묘하게 하였다. 용걸이는 학수는 만나보는 것과는 또 다른 의도와 내용으로 현규와 만나는 것 같았다.

오늘밤에도 그 무슨 일로 미리 약속하고 현규가 찾아온 것이 확실하리라 생각하고 학수는 그만 자리를 일어섰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것을 가지고 가서 읽어 보게.」

나가는 학수에게 용걸이는 두어 권의 작은 책자를 시렁에서 뽑아 주었다.

그것을 가지고 학수는 집을 나갔다.

기울어지는 반달이 흐릿하게 빛났다.

좁은 방에서 으슥하게 만나는 두 사람의 청년― 그 뜻깊은 풍경을 학수는 믿음직하게 마음속에 그렸다.

무슨 새인지, 으슥한 밤중에 숲속에서 우는 새소리를 들으면서 희미한 밤길을 더끔더끔 걸었다.

이튿날 학수는 수업료 미납으로 정학처분 중에 있는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오후부터 학교에 나갔다. 그날 학우회 총회가 있는 것을 안 까닭이다. 학우회에는 기어이 출석할 생각이었다. 예산 편성 등으로 가난한 그들에게 직접 이해관계가 큰 총회를 철모르는 어린 동무들에게 맡겨 망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실습을 폐하고 총회는 오후부터 즉시 시작되었다. 사월에 열어야 할 총회가 일이 바쁜 까닭에 변칙적으로 오월에 들어가는 수 가 많았다.

새로 선 강당은 요란하게 불어 올랐다. 학생들은 하룻동안 실습이 없어진 그 사실만으로 벌써 흥분하고 기뻐하였다.

천장과 벽과 바닥의 새 재목빛에 해가 비쳐 들어와 누렇게 반사하였다. 그 속에 수많은 얼굴이 떡잎같이 누르칙칙하게 빛났다. 재목 냄새와 땀 냄새에 강당안은 금시에 기가 막혔다. 발벗은 학생이 많았다. 가끔 양말을 신은 사람이 있어도 다 떨어져 발허리만에 걸치고 있는 형편의 것이었다. 냄새가 몹시 났다. 맨발에는 개기름과 땀이 지르르 흘러 무더운 냄새가 파도같이 화끈화끈 넘쳐 밀려왔다.

여러 번 창을 열고 공기를 갈면서 회가 진행되었다.

교장의 사회가 끝난 후에 즉시 각부 예산 편성 결정으로 들어갔다. 학교에서 작성한 예산안 초안을 앞에 놓고 와글와글 떠들기 시작하였다. 부마다 각각 자기의 부를 지키고 한푼의 예산도 양보하지 않았다. 떠들고 뒤끓으며 별것 아니요 벌떼의 싸움이었다. 하다 못해 공책 한번 쥐어본 적 없는 아무 부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층의 학생들은 이 부에도 저 부에도 붙지 못하고 중간에서 유동하였다. 두 시간 동안이 지나도 각부의 예산은 결정되지 못하였다.

뒷 줄 벤취 위에 숨어앉은 학수는 무더운 화기에 정신이 얼떨떨하였다. 지지할 만한 또렷한 한 부에 속하지 않은 그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아니하고 싸우는 꼴들을 냉정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으로는 운동의 각부보다도 변론부, 음악부, 학예부 등을 지지하고 싶었으나 예산편성이 끝난 후 열을 토하고 ××지 않으면 안될 더 중대한 가지가지의 조목을 위하여 그는 열정의 낭비를 피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해마다 문제되는 스포츠 원정비의 적립을 철저히 반대할 일―(중략)

이것이 제일 중요한 조목이었다. 다음에 「학우회 기본금과 입회금의 적립반대, 가족실습의 수입 이익은 가족에게 분배할 일……」등등의 일반 학생의 이익을 위하여 싸워 뺏지 않으면 안될 여러 가지 조목이 그의 가슴속에 뱅돌고 있었다.

거의 네 시간이 지났을 때에야 겨우 예산이 이럭저럭 결정되고 선수 원정비 시비에 들어갔다.

서울과의 거리가 먼 까닭에 스포츠, 더욱이 정구와 축구의 원정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빈약한 학우회비만으로는 도저히 지출할 수 없는 까닭에 기와에는 기부금 등으로 이럭저럭 미봉하여 왔으나, 금년부터는 매월 학우회비를 특별히 더하여 원정비로 채우려는 설이 학교 당국에서부터 일어났다. 이 제의를 총회에 걸어 그 시비를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교장의 설명이 있은 후 즉시 운동부장인 ××이가 직원좌석에서 일어섰다. 개인개인의 산만한 운동보다도 규율있는 단체적 스포츠가 필요함을 그는 역설하고 그럼으로써 원정비 적립을 지지하라는 일장의 설화를 하였다.

학생들의 의견도 나기 전에 미리 뭇 의견의 방향을 결정하려는 그 심사가 괘씸하여서 학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첫소리를 쳤다.

「지금의 학우회비로서 지출할 수 없다면 원정은 그만 두자. 우리들의 처지로 새로이 회비를 더 내서까지 원정을 갈 필요가 있는가?」

회장이 물뿌린 듯이 고요하다.

어린 학생들은 대개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지를 몰라 갈팡질팡하는 때가 많다. 그것을 잘 아는 학수는 절실한 인상으로 그들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겠다고 그 자리에 선 채 말을 이었다.

「지금의 수업료도 과한 가난한 농군의 자식인 우리들에게는 다만 이 이십전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지금의 수업료조차 못내서 쩔쩔 매면서 이 위에 또 더 바칠 여유가 있는가. 철없는 맹동은 모두들 삼가자!」

그가 앉기가 바쁘게 다른 학년의 축구선수가 한 사람 일어서서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원정의 필요를 말한 후, 기왕에 원정가서 얻어 온 우승기― 그것을 영구히 학교의 것으로 만들 작정이니 원정을 후원하라고 거의 애걸하다시피 하였다.

우승기― 이것이 철모르는 눈을 어둡히고 이끄는 것임을 문득 느끼고 학수는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말하는 너부터 잘 생각해 보아라. 한 사람의 선수를, 한 사람의 영웅을 내기 위하여 이 많은 사람이 마음에도 없는 희생을 당하여야 옳단 말이냐. 한 사람의 선수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왔나, 우승기? 아무 잇속없는 한 폭의 허수아비에 지나지 못한다. 학교의 명예? 대체 무엇하는 것이냐. 그 따위 명예가 우리에게 무슨 이익을 갖다 주었나. 우승기, 명예―일종의 허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동무들아, 선수원정을 반대하자! 원정비 적립을 반대하자!」

「옳다!」

「원정비 반대다!」

동의의 소리가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일어났다.

××이의 얼굴이 붉어지고 직원석이 수물수물 움직였다.

하급생 좌석에서 어린 학생이 일어서서 수물거리는 시선과 주의를 일신에 모았다. 등뒤에 커다란 조각을 대인 양복을 입은 그는 이마에 빠지지 흐르는 땀을 씻으면서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었다.

「실습, 그것이 우리에게는 훌륭한 운동이다. 이 외에 무슨 운동이 더 필요한가. 알맞은 체육이면 그만이지 우리에게 그 이상의 기술과 재주는 필요하지 않다. 가난한 우리는 너무도 건강하기 때문에 배가 고픈데 이 위에 더 운동까지 해서 배를 골릴 것이 있는가?」

허리춤에서 수건을 뽑아서 땀을 씻고 한참 무주무주하다가 걸어앉았다. 그 희극적 효과에 웃음소리가 왁 터져나왔다. 수물거리는 당 안을 정리하려고 학수는 다시 자리를 일어서서 목소리를 더한층 높였다.

「옳다―(30자 생략) 괴로와하는 집안 사람들은 이위에 더 괴롭힐 용기가 있는가. 수업료가 며칠 늦으면 담임선생이 불러들여 학교를 그만두라고 은근히 퇴학을 권유할 때, (25자 생략) 우리는 우리들의 처지를 생각하여야 한다.」

같은 형편과 생활에서 나온 절실한 실감이 동무들의 가슴을 뒤집어 흔들었다.

「그렇다.」

「원정비 적립을 그만 두자.」

찬동의 소리가 강당을 들어갈 듯이 요란히 울렸다.

「학수, 학수!」

요란한 가운데에서 별안간 날카로운 고함이 들렸다. 직원좌석이 어지럽게 동요하고 그 속에서 ××이의 성낸 얼굴이 학수를 무섭게 노렸다.

「학수. 너는 당장에 퇴장하여라. 수업료도 안 내고 가만히 와서 총회에 출석할 권리가 없다.」

그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났던 듯이 시치미를 떼고 천연스럽게 집으로 돌아갔다. 정주에서 어머니가 뛰어나왔다.

「학수야.」

끄스른 얼굴과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학수는 황당한 어머니를 보았다.

「학수야. 금옥이가……」

어머니는 달려와서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금옥이가……」

어머니의 눈에 그렁그렁하는 눈물을 보고 학수는 놀래서,

「금옥이가 어떻게 했단 말예요?」

「―떠났단다.」

「예?」

「바다에 빠져서.」

「금옥이가 죽었단 말예요? 금옥이가……」

「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냐. 혼인날 종일 네 이름만 부르더니 밤중에 신방을 도망해 나갔단다.」

「그래 지금 어디 있어요? 지금 어디.」

「금옥이네 집안 식구들은 지금 모두 바다에 몰려가 있다―아까 포구 사람이 달려와서 시체를 건졌다고 전했단다. 지금 모두 해변에 몰려가 있다.」

「바다― 금옥이.」

학수는 엉겁결에 허둥지둥 뛰어나갔다. 바다로 향하여 오리나 되는 길을 줄달음쳤다.

며칠 전에 학수가 사랑을 잊으려고 하이네를 읽으며 하루를 보낸 바로 그 자리를 금옥이는 마지막의 장소로 골랐던 것이다. 가지가지의 추억을 가진 그곳을 특별히 고른 그 애처로운 마음을 학수를 더한층 슬피 여겼다.

물녘에는 통곡소리가 흘렀다. 집안 사람들은 시체를 둘러싸고 가슴을 뜯으면 어지럽게 울었다.

얼굴을 가리운 시체― 보기에도 참혹한 것이었다. 사람의 몸이 아니고 물통이었다. 입에서느 샘 솟듯 물이 흘러나왔다. 혼인날 입은 새 복색 그대로였다. 바다에서 올린 지 얼마 안 되는지 전신에서 물이 지어서 흘렀다. 그 자리만 모래가 축축이 젖어 있다.

미칠 듯한 심사였다.

학수는 달려들어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수건을 벗기고 얼굴을 보았다. 물에 씻기운 연지의 자리가 이지러진 얼굴에 불그스레하게 퍼져 있다. 흡뜬 흰 눈이 원망하는 듯이 학수를 보았다.

「금옥이……」

얼굴이 돌같이 차다.

「왜 이리 빨리 갔소.」

가슴이 터질 듯이 더워지며 눈물이 솟았다.

「학수, 어쩌자고 이럭해 놓았소.」

금옥이의 어머니가 원망하는 듯이 학수를 보며 들고 있던 한 장의 사진을 주었다.

「학수의 사진을 품고 죽을 줄이야 꿈에나 생각했겠소.」

받아 보니 언제인가 박아준 그의 사진이었다. 학수 대신에 영혼 없는 사진을 품고 간 것이다.

겉장을 벗기니 물에 젖어 피어난 글씨가 흐릿하게 읽혔다.

학수 나는 가오. 태산같이 막힌 골짜기에서 나는 제일 쉬운 이 길을 취하였소. 당신에게만 정을 바친 채 맑은 몸으로 나는 가오. 혼자 간다고 결코 당신을 원망하지 않으리다. 공부 잘해서 가난한 집안을 구하시오.

「결국 내가 못난 탓이지…… 그러나 이렇게 쉽게 갈 줄이야 몰랐소.」

학수는 시체를 무릎 위에 얹고 차디찬 얼굴을 어루만졌다.

「금옥아, 학수 왔다. 금옥아, 눈을 떠라.」

어머니는 마주 앉아서 찬 수족을 만지면서 몸을 전후로 요동하며 울었다.

「학수, 생사람을 잡았으니 어쩌잔 말이오. 그러면 그렇다고 혼인 전에 진작 말이나 해 주었더면 좋지 않았겠소? 금옥이가 갔으니 어떻게 하면 좋소.」

통곡하는 소리가 학수의 뼈속을 살근살근 갈아내는 듯하였다.

「집으로 데리고 갑시다.」

학수는 눈물을 수습하고 일어났다.

「금옥아, 이 꼴을 하고 집으로 다시 들어오려고 나갔더냐?」

금옥이의 아버지가 시체를 일으켰다.

「내가 업지요.」

들것에 메우기가 너무도 가엾어서 학수는 시체를 등에 업었다. 돌같이 무거웠다. 중량밖에는 아무 감각이 없는 무감동한 육체였다. 똑똑 떨어지는 물이 모래 위와 길 위에 줄을 그었다.

조그만 행렬이 길 위에 뻗쳤다.

어두워가는 벌판에 통곡소리가 처량히 울렸다.

짧은 그의 생애가 너무도 기구하여서 학수는 금옥이의 옆을 떠나지 않고 그를 지켰다.

피어오르는 향불의 향기― 일전에 능금밭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맡은 달밤의 향기와 너무도 뼈저린 대조였다.

촛불에 녹은 초가 눈물과 같이 흘러 내렸다.

(이 소설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중간에서 6회치를 생략하고 오늘로서 최종회를 내어 끝을 막겠읍니다 ―편집자)

금옥이의 장삿날이 왔다.

진한 안개가 잔뜩 끼어 외로이 가는 어린 혼과도 같이 슬픈 날이었다.

너무도 짧은 장사의 행렬이었다. 빨리 간 그의 청춘과도 같이 너무도 짧은― 시집에서는 배반하고 나간 그의 혼을 끝까지 돌보지 아니하였고 장례는 전부 친가에서 서둘러 하였다.

상여 뒤에는 바로 학수가 서고 그뒤에 집안 사람들이 따라 섰다.

짧은 행렬이 건듯하면 안개 속에 사라지려 하였다. 외로운 영혼을 남몰래 고이 장사지내 버리려는 듯이.

앞에서 울리는 요령소리조차 안개 속에 마디마디 사라져 버렸다.

학수의 속눈썹에도 안개가 진하게 맺혀 눈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어린 초목의 잎이 요령소리에 떨리는 듯이 안개 속에서 가늘게 흔들렸다.

산모롱이를 돌아 행렬은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묘지까지 이르렀을 때에 상여는 슬픔과 안개에 푹 젖었다.

주검을 묻는 것이 첫경험인 학수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끔찍한 짓같이 생각되어 뼈를 긁어내는 듯도 한 느낌이었다.

젖은 흙 속에 살이 묻혀지는 것이다. 사람의 의식(儀式)으로 이보다 더 참혹한 것이 있는가. 퍼붓는 눈물이 흙을 적시었다.

(너도 같이 가거라.)

학수는 지니고 왔던 하이네 시집을―해변에서 금옥이를 생각하며 읽던 그 시집을 금옥이의 관 위에 같이 던졌다. 금옥이를 보내는 마지막 선물로 그의 관 위에 뿌려줄 꽃 대신으로 생전에 같이 읽던 노래를 던져 주었다. 그것은 동시에 그의 슬픈 과거를 영영 장사지내 버리는 셈도 되었다. 그는 장사지내는 하이네 시집속에서 「백두산 꼭대기에서 제일 큰 참나무 한대 뽑아」의 위대한 열정을 얻은 것과 같이 금옥이의 죽음에서도 슬픔만이 온 것이 아니랄 말할 수 없는 일존의 힘이 솟아 나왔다.

(그대의 혼을 지키면서 나는 나의 힘이 진할 때까지 일하고 싸워 보겠다.)

시집과 관이 흙속에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 학수는 그 위에 다시 흙을 뿌리며 피의 눈물과 말의 슬픔으로 그 조그만 묘를 다졌다.

어느덧 황혼이 짙어 안개가 더 깊었다.

(나도 떠나겠다.)

어느 때까지 울어도 슬픔은 새로와질 뿐이지 한이 없었다.

학수는 시에서 얻은 열정과 죽음에서 얻은 힘을 가지고 묘 앞을 떠났다.

그러나 뒷걸음질하여 마을 길로 돌아서지 아니하고 고개를 향하여 앞으로 앞으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어디로 가오?」

금옥이네 식구들이 물었다.

「고개너머 먼 곳으로 가겠소.」

「먼 곳이라니.」

「이곳에서 무엇을 바라고 살겠소?」

대답하고 학수는 속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용걸이가 걸은 길을 밟도록 먼 곳에 가서 길을 닦겠소이다.」

그들과 작별하고 학수는 고개로 향하였다.

고개너머 정거장에서 기차를 타고 어디로든지 향할 작정이었다.

(어디로? 너무도 막연하다.― 그러나 항상 막연한 데서 일은 열리고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막연한 모험과 비약― 이것이 없이 큰 일을 할 수 있는가.)

고개 위에 올라서니 거리가 내려다보이고 그 속에 정거장이 짐작되었다.

(아버지는? 집안 사람은?)

고향을 이별하는 마지막 순간에 그에게는 여러 가지의 생각이 한꺼번에 솟아올랐다.

(내가 학교를 충실히 다닌다고 아버지와 집안을 근본적으로 건질 수 있을까? 차라리 이제 가서 장래의 큰 길을 닦는 것만 같지 못하다.)

중얼거리며 주먹을 지긋이 쥐었다.

(아버지여. 금옥이여. 문오들이여. 고향이여―다 잘 있으오. 더 장한 얼굴로 다시 만날 날이 있으오리.)

눈물을 뿌리고 학수는 고향을 등졌다. 한 걸음 두 걸음 고개를 걸어 내려가는 그의 마음속에서는 결심이 한층 더 새로와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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