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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 천주교 요리/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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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속량하셔서 영혼을 구원해 주시고 천당에 이를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을 보았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 즉 계명을 지켜야 함을 살펴봤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께 우리의 죄값을 치러주시고 우리에게는 성총을 얻어 주셨다. 당신이 얻어 주신 그 성총이 없으면 우리는 구원되지 못하여 천당에 이르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얻어 주신 성총에 참여하여 착한 생활을 살고, 죄를 없애며, 알려주신 계명을 착실히 지킬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신 방책을 고찰하는, 교리문답의 셋째 부분에 이르렀다. 그 방책이란 성사이다.


249. 성사란 무엇인가?

성사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 주신 내적인 성총의 외형적 표시로, 그로써 우리 영혼에 성총이 주어진다.
외형적 표시. 모든 성사에서는 정해진 예절이 거행되고, 예절이 거행되는 동안 경문을 분명한 소리로 외는데, 예절과 경문은 성사를 받는 사람의 영혼 안에 상응하는 효험을 나타낸다. 이를테면, 성세성사에서 외적인 예절은 어린이의 머리에 물을 부음이고, 경문은 “나 네게 세를 주되” 운운이다. 견진성사에서 외적인 예절은 성유로써 이마에 기름을 바름이고, 경문은 “나 네게 십자 성호로써 표시하되”이다(265번을 보라).
내적인 성총. 이는 외적인 예절과 경문을 욈으로써 영혼 안에 생기는 효험이다. 각 성사는 그 나름의 독특한 성총을 부여하는데, 그 성총은 외적인 예절로써 표시된다. 성세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고 영혼을 원죄로부터 씻어 준다. 따라서 성세성사에서 거행되는 예절은 씻는 예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 주신. 이는 성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어야 하며 그 밖의 것은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총은 그것을 주시는 천주께 속해 있어서, 천주만이 표시와 경문에 능력을 주셔서 영혼에 성총을 부어 주실 수 있다.
그로써 성총이 주어진다. 성사는 천주께서 우리 영혼에 특별한 성총을 주시고 계심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천주께서는 그로써 성총을 주기도 하신다.

250. 성사로써 항상 성총이 주어지는가?

받을 만한 이에게는 성사로써 항상 성총이 주어진다.
‘받을 만한이라 함’은 ‘그것을 받기에 적합한 상태인’이다. 천주께서는 당연히 당신이 주시는 성총을 받기에 합당할 것을 요구하신다. 예컨대, 죄인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고해하러 가는 경우에, 잘못했음을 통회하지 않으면 고해성사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251. 따라서 성사에는 성총을 주는 능력이 있는가?

성사에는 예수 보혈의 공덕에서 비롯되는 성총을 주는 능력이 있으며, 그 공덕은 우리에게 적용된다.

252. 성사를 받고자 하는 원의가 간절해야 하는가?

성사는 우리 구원의 주요 수단이므로, 성사를 받고자 하는 원의가 간절해야 한다.

253. 어떤 성사로써 영혼에 인호(印號)가 박히는가?

성세성사, 견진성사 그리고 신품성사로써 영혼에 인호가 박힌다.

254. 인호란 어떤 것인가?

인호란 영혼에 박히는 지워지지 못할 표시 혹은 도장으로, 인호가 박히는 성사는 두 번 다시 받지 못한다.
이미 말했듯이 어떤 성사이건 그로써 성총이 주어지지만, 위에서 거론된 세 가지 성사는 성총 외에도 특별히, 영혼에 대해 천주께 관련되는 도장이 영원히 박힌다. 성세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그리스도인, 천주의 자녀로서의 도장을 찍는다(따라서 이것을 그리스도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함). 견진성사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도장을 찍는다. 신품성사는 남자에게 도장을 찍어 천주의 사제가 되게 한다. 타당하게 성세성사를 받았다든지, 견진성사를 받았다든지, 신품성사를 받은 사람은, 또 다시 세례를 받지 못하고, 견진성사를 받지 못하며 신품성사를 받지 못한다.

255. 성사에는 몇 가지 있는가?

일곱 가지 있으니, 성세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종부성사, 신품성사, 그리고 혼배성사이다.
우리 천주교 신자는 무류한 교회의 권위에 바탕을 두고 이것을 믿는다. 16세기에 프로테스탄트 혁명가들은, 타당한 성사는 오직 두 가지, 즉 성세성사와 주님의 만찬(성체성사)만이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그들에게 있는 많은 오류들 중의 하나이며, 교리에 의혹을 품기 시작한 최초의 일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우리뿐만 아니라 9세기에 교황에게서 파문당한 동유럽의 교회(정교회라고 알려진)도 일곱 가지 성사가 있다고 믿어 왔다.
우리 주께서 성사를 일곱 가지만 정하신 아름다운 이유가 있다. 우리의 통상적인 육신 생활에는 어떤 단계 및 필요 조건이 있으니, 그것을 헤아리면 일곱 가지가 된다. 사람은 태어나서, 인격을 이루고, 양식을 먹어야 하고, 병에 걸리면 약으로 치료해야 하며, 죽어 갈 때에는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이는 다섯 가지이며 개인에게 관련돼 있다. 그러나 사람은 개인으로서의 자격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국가 혹은 민족의 구성원이 되기도 하고, 국가가 그 기능을 수행하고 국민을 단결시키기 위해서는 통치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국가 안에서 및 국가의 기초로서 더 작은 단위, 즉 인간 종족의 번식에 절대로 필요한 가족 사회를 이루도록 정해져 있기도 하다. 영혼과 육체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으로 인해, 영혼의 초자연적인 생활은 육신 생활의 모범이다. 그런 초자연적인 성총의 생활에도 역시 어떤 단계 및 필요 조건이 있으니, 그를 헤아리면 일곱 가지가 된다.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초자연적인 생명으로 태어나야 하며, 그런 출생은 성세성사로 말미암는다. 사람은 자라고 또 튼튼해져야 하며, 그런 강화는 견진성사로써 주어진다. 사람에게는 영적인 양식이 필요하고 그것을 성체성사에서 얻는다. 사람의 영혼은 죄로 말미암아 병에 걸릴 수 있다. 고해성사가 그 약이요, 임종시에는 특별한 보살핌과 위안이 필요한즉, 종부성사로써 그 위안이 주어진다. 이로써 다섯 가지의 개인적인 초자연적 필요 조건을 알았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영적인 사회, 교회의 구성원이기도 함으로 해서 교회에는 보살피고 다스릴 사람이 필요하다. 신품성사가 그런 성직자를 세워 준다. 마지막으로 국가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도 가족이 필요한데, 종족의 번식이 없으면 교회는 계속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 가족을 이루기 위해 마지막 성사, 혼배성사가 있는 것이다.
성사 중에서 두 가지, 즉 성세성사와 고해성사는 그 목적이 우리를 죄로부터 씻어 주는 것이고 중죄는 곧 영혼의 초자연적인 생명의 죽음이므로 죽은 자를 위한 성사라 한다. 다른 다섯 가지 성사는 영혼이 이미 성총지위에 있어서 그 성사를 받으면 초자연적인 생명을 얻고, 그럼으로 해서 그 목적이 영혼 안에 성총의 생명을 증대 강화시키는 것이므로 살아 있는 자의 성사라 한다.

성세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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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성세성사란 어떤 것인가?

성세성사는 우리를 원죄로부터 씻어 주고, 그리스도인, 천주의 자녀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게 해 주는 성사이다.
세례라는 말은 씻음을 의미한다. 칠성사 중에서 첫째 것으로서, 모든 이가 천주의 교회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문이다. 성세성사는 다른 성사를 받을 자격을 준다. 다른 성사가 성세성사를 받지 않은 자에게 주어지면 아무런 효험이 없다. 성세성사는 우리에게 성총을 줌으로써 원죄를 씻어 주고 천주의 자녀가 되게 해 준다.

257. 성세성사로써 본죄도 사해지는가?

본죄 있는 사람이 타당한 의향을 가지고 성세성사를 받으면, 그 성세성사로써 상응하는 모든 벌과 더불어 본죄도 사해진다.
때때로 한 가지 혹은 다른 원인으로 인해, 어떤 이는 명오(明悟)가 열리는 연령이 될 때까지 세례를 받지 못한다. 이는 보통 그리스도인이 되는 유데아인과, 전교 활동을 통하여 천주교 신앙으로 개종하는 외교인에게 해당된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수계범절에 의한 교육을 적절히 받아야 하며 성세성사를 받을 수 있기 전에 수계범절로써 신앙 행위를 해야 한다. 세례를 받으면 원죄뿐만 아니라 이미 범했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온갖 죄가 사해짐은 물론이요, 세례를 받지 않고 죽는다면 천주의 정의로 인하여 그 죄의 대가로 치러야 했을 온갖 벌이 사해진다. 그 영혼은 죄의 온갖 흔적에서 깨끗하게 되어, 성세성사를 받은 후에 즉시 죽는 경우, 곧바로 천당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본죄에 대한 통회가 없으면 성세성사로도 본죄를 없애지 못한다. 교리문답에 의하면, 천주께서 가르쳐 주신 신앙과 각자의 죄에 대한 통회는 개인에 속하는 요소이다.

258. 성세성사의 통상적인 거행자는 누구인가?

성세성사의 통상적인 거행자는 사제이지만, 사제를 구하지 못하면 비상시에는 아무라도 세(洗)를 줄 수 있다.
우리 주께서는, 성세성사는 구원에 반드시 필요하여 아기가 죽어 가고 있고, 사제를 제 시간에 모셔오지 못하겠거든 아무라도 세를 줄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 성세성사를 거행하는 이가 누구이건(비록 외교인이라도), 다음에 오는 질문에서 설명하는 바대로 타당히 행한다면 그리고 교회에서 요구하는 바를 행할 의향이 있으면, 성세성사는 유효하다.
여러 종류의 세례가 있고, 각자 그 교파의 성직자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 해서 어느 한 교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렇고 그렇게 세례를 받아서 성공회 신자 혹은 감리교 신자, 침례교 신자가 된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일이 간혹 있다. 한데, 참된 성세성사는 오직 하나뿐이다. “하나이신 주, 하나인 신앙, 하나인 성세성사”라고 성 바오로께서 말했다.(에페소 4,5) 그리고 하나인 성세성사가 아기로 하여금 하나인 참된 천주의 교회, 즉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며, 종도로조차 전해 내려오는 로마 교회의 구성원이 되게 하는 참된 성세성사는 오직 한 가지이다, 왜냐하면 다른 참된 교회란 있지도 않을 뿐더러 다른 참된 종교도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는 참된 그리스도교가 아님으로 해서 아기는 프로테스탄트로 세례받지 못한다. 감리교도, 침례교도, 기타 등등은 자기들이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말하더라도, 프로테스탄트이다. 성공회 신자도 역시 마찬가지다. 제대로 세례받은 아기라면 모두 다, 누구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든지 간에, 따라서 천주교이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구성원이다. 나중에 스스로 비가톨릭교의 구성원이라고 받아들이면, 천주교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은 중지된다.

259. 성세성사를 어떻게 주는가?

아기의 이마에 물을 부으면서 “아무(본명), 나 네게 세를 주되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인하여 하노라.”하고 똑똑히 외운다.
성세성사는 영혼에게서 원죄를 씻어 준다. 이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물이 피부 위로 흘러야 한다. 세를 주는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다. (1) 흘림 혹은 부음으로써, 이는 위에서 말한 방식이며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것으로 유일하게 인정된 방식이다. (2) 잠수 혹은 침수함으로써, 한 때 통상적으로 사용했고 동방 예식을 지키는 가톨릭 신자 및 정교회에서는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방식이다. (3) 성수 예절 혹은 흩뿌림으로써, 이런 경우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일이 자주 발생할 수 있으므로 유효성이 의심스러운 방식이다. 어떤 비가톨릭 성직자는 자기 손가락을 물에 담갔다가 아기의 이마 위에 십자성호를 긋는 식으로 해서 세를 준다. 이는 이마를 씻지 않고 물기를 적시기만 하여서 물이 정말로 흐르지 않으므로, 매우 의심스러운 방법이다.

260. 성세성사에서는 어떻게 하기로 약속하는가?

성세성사에서는 마귀와 및 그 모든 행실과 허식을 끊어 버리기로 약속한다.
즉, 대부 혹은 대모(오직 한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임)가 아기를 대신해서 약속해 주며, 그 아기는 충분한 나이가 되면 그것을 지켜야 한다. 새 부활전야 예식에는 성수를 축성한 후에 곧바로 신자들이 성세 때의 약속을 갱신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착한 생활을 살고 죄와 및 죄의 기회를 피하기로 약속하는 것이 그것이다.
대부모의 직책은 중요하다. 그는 부모가 그 문제에 있어서 자기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경우에, 혹은 아기가 아직 어린 동안에 죽는 경우에 아기의 수계범절 교육을 보살펴야 한다.

261. 성세성사가 구원에 필요한가?

성세성사가 구원에 필요하니, 그리스도께서 “나 진실히 진실히 네게 이르노니 아무라도 만일 물과 성신으로 다시 나지 아니면 능히 천주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나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세성사에 대해서는 아무리 주의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아기는 가능한 한 빨리 세를 받아야 한다. 혹 성세성사의 유효성에 대해 의심이 가면, 조건부로 세를 다시 받아야 한다. 그런 경우 사제는 “아무(본명), 너 만일 세를 받지 않았으면, 나 네게 세를 주되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인하여 하노라.”라고 말한다. 천주교 신앙으로 개종하는 이가 성세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조건부로 다시 세를 받는 일은 항용 있는 일이다.
물에 의한 성세(水洗)는 천당에 이르는 데 꼭 필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는 천당에 이르는 다른 방법 두 가지도 마련해 주셨으니, 물에 의한 성세가 실제로 불가능한 경우이다. 그것들을 혈세(血洗) 및 화세(火洗)라고 한다.
혈세는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실제로 성세를 받을 수 있게 되기 전 신앙 때문에 죽음에 부쳐지는 순교자에게서 일어난다. 순교의 구원적 가치에 대한 주님의 약속은 “나를 위하야 제 생명을 잃어버리는 자는 그 생명을 찾아 얻을 것이요.”(마두 10,39)라고 하신 말씀에 주어져 있다. 교회는 헤로데에 의해 죽음에 부쳐진 영해들까지도 성인으로 공경한다. 그들은 물론 물에 의한 성세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위해 대량으로 학살당한 것이므로, 순교의 고통을 당한 셈이다. 예식에서 말하듯이, 말함으로써가 아니라 죽음으로써 우리 주님을 고백한 것이다. 첨례일(저성영해)은 12월 28일이다.
화세는 성세성사를 받으려는 소망(적어도 암묵적으로라도)을 포함하되, 천주께 대한 완전한 사랑 혹은 완전한 통회(293, 294번을 보라)의 행위이다. 화세가 구원을 위해 유효함은 주님의 말씀으로써 보장되어 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성부께 사랑함을 받을 것이요 나도 저를 사랑하고.”(요왕 14,21) 그러나 혈세와 화세가 우리에게 성총지위를 얻어 주기는 할지언정, 그 인호를 박지는 못한다(253번을 보라). 성세성사만이 인호를 박는다. 그러므로 성세성사만이 우리를 교회의 구성원이 되게 하여서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게 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견진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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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견진성사란 어떤 것인가?

견진성사란 우리를 강화시켜서 완전한 그리스도인 및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도록 하기 위해, 성신을 받는 성사이다.
성세성사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견진성사로써는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굳건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성신께서는 성신강림일에 종도 및 제자들 위에 강림하신 것처럼 우리 영혼에 임하신다. 당신께서는 그 성사로써 영혼 안에 성총을 증대시켜 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사된 자로서의 인호를 새겨주신다. 그리고 일생 동안 자기 신앙을 공식적으로, 두려움 없이 고백하고 착한 생활을 사는 그리스도의 군사, 실질적인 천주교 신자로서의 용기를 지니는 데 필요한 성총을 받을 자격을 주는 인호(253, 254번을 보라)를 주신다. 그러니까 그것은 매우 필요한 성사이다. 그렇지만 성세성사 만큼 구원에 필수적이지는 않다. 그렇기는 해도 견진성사 받기를 소홀히 하는 것은, 특히 신앙이 약하다든지 환경으로 인하여 신앙을 거슬릴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에는 중죄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 주께서 부활과 승천일 사이의 어느 때에 견진성사를 세우셨다고들 추정한다. 종도들이 이 성사를 확인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종도들이 사마리아인들도 천주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루와 요왕을 저들에게 보내어 두 종도 온 후에 저들로 하여금 성신을 받기 위하야 기구하니 대저 저들 중 아무에게도 성신이 강림하시지 아니시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인하야 세만 받었음이러라. 이에 두 종도 저들 위에 손을 덮으매 곧 성신을 받으니라.”(종도행전 8,14) 그리고 다시 “또 바오로가 저들 위에 손을 덮으매 성신이 그 위에 강림하사.”(종도행전 19,6)

263. 견진성사의 통상적인 거행자는 누구인가?

견진성사의 통상적인 거행자는 주교이다.
그러나 교황이 사제에게도 견진성사를 행할 권한을 줄 수 있다. 모든 본당 사제 혹은 그와 동등한 자(그러나 보좌 사제는 안됨)에게는 그 직권에 할당된 영역 안에서 권한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신자가 질병으로 인하여 죽을 위험에 있고 또 주교가 부재중일 때에만 사용될 수 있다.

264. 주교는 견진성사를 어떻게 거행하는가?

주교는 견진자의 머리 위에 손을 덮어 성신께서 강림하시기를 기구한 후, 크리스마 성유로 견진자의 이마에 십자표를 그으면서, 주어진 경문을 소리내어 욈으로써 견진성사를 거행한다.
예절을 시작하면서 주교는 모든 견진자 위에 손을 펴고, 성신께서 그들 위에 강림하셔서 성총 및 그에 따른 은혜(성신의 은혜에 대하여 318번을 보라)를 주시기를 기구한다. 그런 후에 견진성사를 받는 각자는 다음 질문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경문을 소리내어 외면서 크리스마 성유로 각자의 이마 위에 십자표를 긋는 주교 앞에 무릎을 꿇는다. 성유는 주교가 특별히 축성하되 올리브 기름과 발삼 향유를 섞은 것이다. 그것은 매해 건립성체일(성 목요일)에 축성된다.

265. 견진성사에서는 어떤 경문이 사용되는가?

견진성사에서 사용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나 십자 성호로 네게 인을 치며, 구원의 크리스마로 너를 견고케 하되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인하여 하노라. 아멘.”
구원의 성유는 다음과 같다. 올리브 기름은 언제나 굳셈을 주고 보존해 주는 것이라 여겨져 왔으며, 영적인 굳셈이 견진성사의 효험이다. 발삼 향유는 방부제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성유는 영혼이 구원될 수 있도록 우리를 강화시키고 보호해 주는 것이다. 성세성사에서는 일생 동안 주보 및 모범으로 삼도록 천신 혹은 성인의 이름을 받는다. 같은 이유로 견진성사에서도 이름을 하나 더 택하는 일이 항용 있다.

성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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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성체성사란 어떤 것인가?

성체성사란 면주 형상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과 천주성이 함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성사에 이르렀다. 천주교 신자라면 주께서 천당에 실제로 계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성사 안에 몸과 피, 영혼과 천주성, 즉 우리 주님이 정말로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심을 믿는다. 천주교 신자는 그 실재에 대하여 절대로 갖가지 견해를 주장하지 않는다. 예컨대, 성공회의 교리문답집에서는 어린이에게 (주님의 만찬에 대해 말하면서) “성사의 내부 혹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주님의 만찬에서 신자들에 의해서 정말로 받아들여지고 영해지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답이 주어진다. 다시 말하면, 공동기도서에 있는 영성체 예식에서는 영성체가 있기 직전에, 성직자는 신자들의 이름으로 말하기를, “그러므로 인자하신 주여, 우리 죄 많은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깨끗하여지고 우리 영혼이 당신의 보혈로 말미암아 씻겨질 수 있도록, 친애하는 당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기를 허락하소서.” 성체를 분배하면서 성직자는 “그대에게 주어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그대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실지어다.”라고 말한다. 이 경문은 실재하심에 대하여 가톨릭적인 의미를 철저하게 품고 있다. 그러다가 바로 그 공동기도서 중 영성체 예식 가운데 끝 부분의 예배 규정(흑색 예배 규정으로 알려진)에서는 가톨릭적인 의미의 실재하심을 노골적으로 부인한다. 예배 규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라도 예의 장궤하는 것을 곡해하여 욕하지 않도록 영성체자는 장궤하면서 받아야 함이 규정된다. 그에 따라서 육체적으로 영해지는 성사의 빵이나 포도주에 대하여, 혹은 그리스도의 자연적인 살과 피의 육체적인 존재에 대하여 그 어떤 경배심도 품어서는 안 됨은 물론이요, 경배해도 안 된다고 선언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성사의 빵과 포도주가 바로 그 자연적 실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음으로 해서 자연적 실체인 빵과 포도주를 경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자연적인 몸과 피는 천당에 계시며 이곳에는 계시지 않다. 한 곳보다 더 많은 장소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자연적 몸에 관한 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설명을 함께 다루는 것으로 미루어, 그것들이 완전히 모순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라면, 성공회 신자에게 있어서 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몸이 존재하는 것이란 실제적 내지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영향력에 의한 존재, 일종의 영적인 방식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그들의 믿음에 의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빵은 빵으로 남아 있고 포도주는 포도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신약에 있는 우리 주님 말씀의 알기 쉽고 명쾌한 의미에 반대된다.
성 요한 복음에서(5장) 우리 주께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과, 당신께서 어떻게 바다 위를 걸으셨는지를 읽을 수 있다. 사람들에게 말씀해주신 그리스도의 긴 이야기는 다음과 같으며, 그 중 대부분이 성체성사에 대한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가파르나움에 돌아오신 후, 우리 주께서 사람들 곁에 계신 것이 발견된다. 당신께서는 그들을 크게 질책하신다. “나 진실히 진실히 너희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음은 영적을 본 연고가 아니요 오직 떡을 먹고 배부른 연고로다. 너희는 썩어질 음식을 수고들여 구하지 말고 오직 영생토록 보존하는 음식을 구하라. 이 음식은 인자 너희게 줄 것이니.”(26절) 여기에는 보통 음식을 훨씬 초월한 음식, 그들에게 영생을 줄 음식을 주시리라는 우리 주님의 약속이 있다.
유데아인들은 천주의 일을 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 대답에서 우리 주님은 당신께 대한 신앙을 알려 주신다. 주께서는 그들의 신앙을 요구하신다. 그들은 전날 행하신 기적을 잊은 채, 그 주장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 표시를 요구한다. 그들은 주님께 사막에서 얻었던 만나를 상기시켜 드린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라 일컬어졌었다. 우리 주님은 만나는 정말로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 아니며, 성부께서 하늘에서 내려 온 진짜 빵을 주시리라고 대답하신다. 매우 기뻐하면서 유데아인들은 하늘에서 내려 온 그 새로운 빵을 가질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한다. 그러자 예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35절)라고 분명하게 잘라 말씀하신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수수께끼여서, 원망하여 서로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이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우리가 저의 부모를 다 아는데 그러면 이사람이 어찌 이르되 하늘로조차 내려왔노라 하는고?” 예수께서 그들이 원망함에 대하여 부드럽게 질책하시고, 한 번 더 당신께 대한 신앙의 필요성을 강조하신 후, 아주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48절). “나는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조차 내려온 떡이매 하여금 누구든지 만일 이것을 먹으면 죽지 아니케 하나니 나는 하늘로조차 내려온 생활한 떡이로라. 누 만일 이 떡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요 또 세인을 살리기 위하야 내가 줄바 떡은 곧 내 살이니라.”
유데아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 들였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게 주어써 먹게 하리오? 우리 주께서는 그들에게 해주신 말씀의 뜻을 고치지 아니하신다. 주께서는 “너희는 내 말을 잘못 이해한다.”라고 말하지 아니하신다. 오히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반복하여 설명을 보강하신다. “나 진실히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또 그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고 나 또한 끝날에 저를 부활케 하리니 대저 내 살은 진짓 먹을 것이요 내 피는 진짓 마실 것이니.” 이 마지막 설명이 얼마나 자세하고 또 분명한지를 주목하라.
유데아인들은 당신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았다. 당신은 그들에게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질다 이 말이여 누 참아 들으리오?” 그들 중 많은 이가 당신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물러가매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게 버려 두셨다. 당신의 진정한 살과 피가 아니고 당신 살과 피의 형상만을 받게 하고자 하신 것이라면, 잘못된 의미로 인해 그들이 당신을 떠나게 버려 두지 않으셨을 것임에 틀림없다. 말씀이 잘못 이해될 것 같으면 직접 해명해 주시는 것이 주님의 관례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을 다시 불러들이지 않으셨다. 오히려 당신이 택하신 십이 종도들을 돌아보시며, 역시 물러가고자 하는지를 물으셨다. 마치 “내 말로 인해 내가 너희를 잃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내 말은 변치 않는다.”라고 말씀하시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종도들의 대표이면서 지도자인 성 베드로가 신앙의 행위를 했다. “주 영생의 말씀을 가지셨으니 우리 등이 뉘게로 가겠나이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천주성자심을 우리 등이 이미 믿고 알았나이다.”(69, 70절)
주께서는 가파르나움에서 약속하신 바를 최후의 만찬에서 이루셨다. 성 루가의 복음에서(22,9-20)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또 면병을 가지사 사례하신 후 저들에게 떼어 주시며 이르시되 ‘이는 내 몸이요 너희를 위하야 주는 것이니 너희는 나를 기억하기로 이 예를 행하라.’ 하시고 저녁을 잡수신 후에 또한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너희를 위하야 흘릴바 내 피로써 세운 신약이니라.’” 이제 성 바오로의 코린토인에게 보내는 첫 번째 서간으로 돌아가 보자(11,23-25). “대저 나 너희에게 전한바는 주께 받았나니 주 예수 붙이움을 받으시든 날 밤에 면병을 가지사 사례하신 후 이를 떼시며 가라사대 ‘너희는 받어 먹으라. 이는 너희를 위하야 바칠바 내 몸이니 너희는 나를 기억하기로 이 예를 행하라’ 하셨나니라. 저녁을 잡수신 후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가지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에 있어서의 새로운 언약이니 너희는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기로 이 예를 행하라’ 하시니라.” 성 마두도 마찬가지다(26,26-28). “너희는 받아 먹으라. 이는 내 몸이니라. 너희는 다 이것을 마시라. 이는 새로 언약하는 내 피니 많은이를 위하야 죄사하기로 흘릴 바니라.” 그리고 성 말구도(14,22-24) “이는 내 몸이니 받아 먹으라. 이는 새로 언약하는 내 피니 많은 사람을 위하야 흘릴 바라.” 이상은 건립성체에 관한 네 가지 이야기다. 여기에 성 바오로의 다른 말씀을 덧붙일 수 있다. “우리가 축성하는 축성의 잔은 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혈과 일체됨이 아니뇨. 우리가 떼는 면병은 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일체됨이 아니뇨?”(코린토전 10,6)
우리 주께서 그보다 더 분명하게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당신의 말씀은 명쾌하고 또 분명하다. 당신은 아주 단순하게 말씀하신다. “이는 내 몸이니라.” 다음과 같이 말씀하지 않으신다. “이는 내 몸의 형상(혹은 내 몸의 상징)이니라.” 당신이 말하고 계신 대상이던 종도들은 평범한, 즉 주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었다. 말씀을 글자 그대로 뜻하신 것이 아니라면, 주께서는 그렇게 말하셨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그들을 속이고 계신 것이며, 그들뿐만 아니라 당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 들여서 천주께만 드려야 할 흠숭을 성체께 드리는 사람들을 세세 대대로 속이고 계신 것이다. 천주이시므로 모든 것을 다 아셨던 당신이 사람들로 하여금 엄청난 우상 숭배를 하도록 허락하시거나, 오히려 유도하신 것이리라. 당신이 막 죽게 되시어 모든 것을 분명히 하고자 주의를 다 하셨을, 당신의 생애 중에서 가장 숭고한 그 순간에 말이다.
독일에서 혁명의 아비인 마르틴 루터 자신이 기술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너무나 분명하다. “헛되게도 나는 교황 절대주의자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괴롭힐 목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성체 안에 실재하심을 부인하고자 했지만, 그러나 내가 대담한 편법을 채택하려는 마음을 결코 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성경의 말씀은 너무도 분명하고 강력하게 신비의 편에 있었다.”(서한. 카르. 아미코-car. amico)
우리 주께서 “이는 내 몸이니라.”고 하셨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천주로서의 전능을 사용하셔서 빵을 당신의 몸으로 변화케 하셨다. 당신은 그 맛이나 질감 혹은 모양을 바꾸지는 않으셨다. 이는 우리가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형상은 그대로 남겨 놓으시고 빵의 실체를 당신 몸의 실체로, 물질 그 자체를 바꾸셨다. 당신이 말씀하신 후에도, 계속해서 빵처럼 보이고 또 빵의 맛을 지니고는 있되 내적인 본질에 있어서는 더 이상 빵이 아니고 당신의 몸인 것이다. 이렇듯 빵의 실체에 있어서 우리 주님의 몸의 실체로의 변화, 유례가 없는 변화를 우리는 성변화라고 한다. 바로 이미 말한 그 뜻이다. 그것만이 실재하심에 관하여 있을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해명이다. 그리고 헨리 8세는 미사와 실재하심에 관한 한, 확고한 신봉자여서 성변화를 부인하는 열교도들을 죽음에 부쳤다.

267.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가?

그 어느 것도 불가능하거나 어려울 것이 없는 천주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

268. 빵과 포도주가 언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가?

미사성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축성경을 사제가 소리내어 읽을 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
사제가 사용하는 축성경은 다음과 같다. “이는 내 몸이니라.”, “대저 이것은 곧 내 피의 잔이니라. 이는 새로 맺는 영원한 언약의 피니 너희 많은 이를 위하여 죄 사하기로 흘릴 바니라.” 이상은 복음사가 및 성 바오로의 기록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임을 주목하라. 온전하게 신품성사를 받은 사제가 첫 문장을 입 밖으로 소리내어 읽는 즉시, 빵의 실체가 우리 주님의 몸의 실체로 변화된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장을 소리내어 읽는 즉시, 포도주의 실체는 당신의 피로 변화된다. 첫 번째 경우의 경문은 오로지 몸에 해당되고, 두 번째 경우의 경문은 오로지 피에 해당된다. 그러나 성 바오로께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죽은 자 가운데로조차 부활하사 다시는 죽지 아니시며 다시는 죽음이 저에게 아무 권력도 가지지 못함.”(로마 6,9) 그러므로 축성경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는 당신의 몸과 함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성과 천주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성체성사로써 생활하신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다.

269. 그리스도께서는 어째서 성체성사로써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영혼의 생명과 양식이 되시기 위해서 성체성사로써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나를 먹는 자도 나를 말미암아 살리라.”,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왕 6,58·59)

270.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께서 전체로 온전히 영해지는가?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께서 전체로 온전히 영해진다.
열교도들이 우리를 반대하는 큰 반론 중 하나는 잔이 평신도에게는 주어지지 않으며, 그들에게 잔이 주어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축성 후에는 성체성사로써 온전히 생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빵의 형상 혹은 포도주의 형상 안에 존재하신다고 한 268번을 보았다. 그러므로 단형(單形) 영성체로 영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전체로 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론, 우리 주께서 직접 그렇게 하라고 명하시지 않는 한, 굳이 양형(兩形) 영성체로써 영할 필요가 없다. 우리 주님은 사실상 그런 명령을 하지 않으셨다. 최후의 만찬에서 몸과 피 둘 다를 종도들에게 주시면서, 피에 대하여 “너희는 다 이것을 마시라.”고 말씀하셨을 때, 당신이 말씀하고 계셨던 것은 사제들을 향한 것이었으니, 그 이유는 그 순간에 종도들을 사제로 삼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제들은 항상 자기가 미사를 드릴 때에는 주님 말씀에 따라서 양형으로 영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주님은 평신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으셨다. 성체성사를 약속하시면서 “누구든지 만일 이 떡을 먹으면”(여기서 잔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죽지 아니케 하나니”(요왕 6,51), 또 “세인을 살리기 위하야 내가 줄바 떡은 곧 내 살이니라.”(요왕 6,52)라고 말씀하셨다. 성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매우 분명하게 말했다(코린토전 11,27).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치 않게 이 면병을 먹거나 주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의 죄인이 되리라". 영국의 혁명가들은 영성체에 관하여 양형으로 하는 자기들 견해에 맞추기 위해서 이 구절에 있는 천주의 말씀을 인가된 성서 번역본에서 ‘먹거나 마시는’을 ‘먹고 마시는’으로 바꿔 놓았다. 개정판에서는 그것을 본래의 원본대로 바꿨다.
그러므로 잔을 사용하는 것은 교회의 결정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12세기까지는 양형으로 영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렇기는 해도 초대 그리스도교 때부터 예외가 있었다. 박해 동안에 그리스도인들은 성체를 자기 집에서 빵의 형태로 보관하고 또 서로 나누었다. 환자들은 때때로 빵의 형태로만 혹은 질병의 성격에 따라서 포도주의 형태로 영성체를 하였다. 어린이들은 성세성사 후에 포도주 한 방울의 형태로 영성체를 하였다.
상당한 이유로 인해 오래 전에 확립된 교회 예절에서는 평신도에게는 잔을 주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 상당한 이유란 다음과 같다. 흘림으로써 거룩한 성사를 모독할 위험-박약아 및 어린이로 인한 진짜 위험,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이 영성체하는 데 필요한 포도주를 충분히 얻어야 하는 어려움, 많은 이가 공동의 잔에서 마셔야 하는 것에 대해 가지는 혐오감, 기타 등등이다.

271. 거룩한 성사를 타당히 영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룩한 성사를 타당히 영하기 위해서는 성총지위에 있어야 하고 공심재를 지켜야 하되, 물은 공심재를 깨뜨리지 않는다. 이는 다음에 오는 질문에서 설명된다.

272. 성총지위에 있다 함은 어떤 것인가?

성총지위에 있다 함은 대죄가 없어서 천주께 맞갖은 상태이다.
성체를 타당히 영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육체에 관한 것으로, 공심재를 지켜야 한다. 1957년 3월 25일에 발효된 교령에 의하면, 공심재는 영성체하기 한 시간 전부터는 비알코올성 음료를, 영성체하기 세 시간 전부터는 고체 음식 및 알코올성 음료를 섭취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 밤중에 혹은 깊은 밤(四更)에 영성체하는 이는 세 시간을 꼭 지켜야 한다. 그러나 환자는 침대에 누워 있지 않아도, 영성체하기 전 아무 때나 비알코올성 음료와 액체로 되어 있든지 고체로 되어 있는 약을 먹을 수 있다. 새 교령을 반포하면서 교황 비오 12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신자들에게, 영성체하기 전에 옛날부터 잘 지켜져 온 형태의 공심재를 지키라고 열심히 권고했지만, 반드시 그렇게 할 의무는 없다. 교황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러니 이 특권을 이용하는 이는 모두 받게 되는 은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의 빛나는 표양으로써 그리고 우선적으로 고해성사 및 애덕의 행위로써 보답하기를 기원하노라." 옛날 형태의 공심재란 전날 밤부터 음식 및 음료(자연수는 제외됨)를 삼가는 것이었다.
아침에 영성체한 사람은 저녁에 다시 영성체하지 못한다.
병이 위중하여 영성체가 여행을 위한 양식을 의미하는 노자성체가 되는 때에는, 재를 지켜야 하는 모든 제한이 없어진다.
다른 조건은 영혼에 관한 것이다. 영혼에게 있어서 의식할 수 있는 대죄가 없어야 한다. 대죄 중에 있고 영성체하고 싶다면, 우선 고해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하며 그런 후에야 영성체할 수 있다.
얼마나 자주 영성체해야 하는가? 그 문제에 있어서 교회는 금세기 동안에 고대의 규범을 되살렸다. 이제는 누구든지 매일이라도 영성체할 수 있으며, 성총지위에 있고 영성체할 올바른 의향이 있으면 즉, 더 많은 성총을 얻고 착한 생활을 살려는 의향이 있으면 그렇게 하도록 권고한다. 허영심으로 인해 영성체하든지, 다른 이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 혹은 단지 습관적으로 영성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일용할 양식, 즉 주식(主食)의 형태로 자기를 주시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당신을 자주 영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의향임이 분명하다.

273. 대죄 중에 성체를 영하는 것은 중죄인가?

대죄 중에 성체를 영하는 것은 중죄인즉, “대저 합당치 않게 주의 몸을 먹고 마시는 자는 그 먹고 마심으로써 천주의 심판을 스스로 당하게 하는 것임이니라.”(코린토전 11,29)
대죄 중에 성체를 영하는 것은 거룩하신 천주로 하여금 그 순간에 당신의 원수인 영혼 안에 억지로 임하시게 하는 것이다.

274. 성체성사는 성사이기만 한가?

성체성사는 성사이기만 하지 않고, 제사이기도 하다.

275. 제사란 무엇인가?

제사란 천주가 만물의 대주재자이시라는 증거로, 사제에 의해서 천주께만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다음에 오는 질문을 보라.

276. 새 법의 제사란 어떤 것인가?

새 법의 제사란 미사성제이다.
우리는 성체를 성사로서 고찰했다. 성체는 주님 자신이므로 가장 위대한 성사이다. 이제 주님이 그것을 세우신 둘째 목적, 즉 그리스도인의 흠숭 행위에 이르렀다. 미사가 의미하는 것이 흠숭 행위이다. 천주는 항상 제사로써 흠숭받기를 원하신다. 인류 역사 초기에 카인과 아벨은 천주께 제사를 드렸다. 한 사람은 땅에서 난 곡식을, 다른 사람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제물로 드렸다(창세기 9장). 홍수가 있고 나서 노아는 방주 밖으로 나와, 천주의 명에 따라 제단을 쌓고 방주 안에 있던 새와 들짐승 가운데서 번제물을 골라 천주께 제물로 드렸다(창세기 8,20). 멜키세덱은 빵과 포도주로 제사를 드렸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천주를 섬기는 사제였다.”(창세기 14,18)
모세의 법에는 네 가지 종류의 제사가 있었다. 모두 천주께서 명하신 것인즉, 번제, 감사제, 속제 그리고 기원제이다. 이들 제사는 사람이 천주께 대한 네 가지 큰 의무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세워졌다. 번제(전부 태워서 드림)는 천주께서 최고의 주님이시면서 주재자이심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감사제(평화를 드림)는 천주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뜻으로 드리는 것이었다. 속제(진정시켜 드림)는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원제(청원함)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온갖 강복을 청하는 것이었다.
이들 제사에는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사제가 있었으며, 그 행위는 오로지 천주를 흠숭하고, 천주께 감사하며, 천주께 죄에 대한 보상을 드리고, 천주께 영육 간에 필요한 온갖 것을 청하기 위해서 천주께만 향해 있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물론 천주께 대하여 같은 의무가 있다. 천주는 그런 의무가 구약에서와 같이 제사로 채워질 것을 원하시며, 그리스도교의 제도에 있어서 지금도 그렇다. 유데아인의 제사는 앞으로 올 것의 형식이요, 형상이었다. 그래서 예언자 말라기아(1,10·11)는 유데아인의 제사가 폐지되고, 다른 제사(깨끗한 제물)가 그 자리를 대신하리라고 예언했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가 바치는 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나의 이름은 해뜨는 데서 해지는 데까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쳐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향기롭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깨끗한 곡식 예물을 바치고 있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내 이름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치고 있다.”
이상 예언자의 말씀은 채워져야 한다. 그리하여 현재 정결하고, 깨끗한 제물이 존재하게 되었다. 온 세상을 훑어볼지니 이방인을 포함한 이 세상에서 봉헌되는 것으로 그런 제사를 지적할 수 있을까? 지적할 수 있다. 그것은 천주교회의 흠숭 행위인 미사이다. 미사는 세계 곳곳 어디서든지 드려진다. 그리고 그것은 깨끗한 제물인즉, 이는 곧 설명하게 될 것과 같이 갈바리아의 정결하고 거룩한 제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피 흘림이 없는 방식으로 다시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277. 미사성제란 어떤 것인가?

미사성제란 제대 위에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해 천주께 드려지되, 면주의 형상 안에 실제로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제사이다.
우리 주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빵을 당신의 몸으로, 포도주를 당신의 피로 변화케 하시고는 종도들에게 당신을 기억하여 똑같이 행할 것을 명하시면서 미사를 제정하셨다. 그 때에 사용하신 말씀은 미사가 제사임을 나타낸다. “이는 내 몸이요, 너희를 위하야 주는 것이니”(루가 22,19),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릴바 내 피로써 세운 신약이니라.”(루가 22,20) 사람을 위해 드리게 될 몸은 사람을 위하여 제사로써 드리게 될 몸을 의미한다. 사람을 위해 흘리게 될 피(성 마두께서 그것을 기록했듯이 죄 사함을 위하여)는 천주께 대한 속죄의 제사를 의미한다.
우리 주께서 우리를 위해 실제로 당신 몸을 드리시고 당신 피를 흘리신 것은 바로 갈바리아의 십자가 위에서였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에서 행하셨던 것 및 우리에게 똑같이 행하라고 하신 명령으로써 당신은 결국 미사가 갈바리아의 계속, 즉 세세 대대로 도처에서 그 제사를 다시 드릴 것을 의도하셨다. 그리하여 미사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참말로 죽지 아니하시고 피를 흘리지 아니하시더라도, 마치 죽음을 당하시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시게 되니, 말하자면 축성경이 사제에 의해서 소리내어 읽혀진 후에는(이는 내 몸이니라, 이는 내 피의 잔이니),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서로 분리됨이요, 몸과 피의 분리되었다 함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 바오로는 “대저 너희는 주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면병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저의 죽으심을 보하리라.”(코린토전 11,26)고 쓰면서 그에 대해 언급한다.

278. 미사성제는 제사인 동시에 십자가의 제사와 똑같은 제사인가?

십자가 위에서 천상에 계신 당신 성부께 피흘리는 제물인 자기를 드리신 그리스도께서, 사제의 집전을 통하여, 제대 위에서 피흘림이 없는 방식으로 자기를 드리기를 계속하시는 까닭에, 미사성제는 제사인 동시에 십자가의 그것과 똑같은 제사이다.
십자가 위 및 미사에는 똑같은 제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다. 우리는 십자가의 제사로써 구속되었다. 미사의 제사로써는 영혼에 대하여 그런 구속이 적용되며 천주께 대한 네 가지 기본 의무를 충족시키는 수단을 제공해 준다(279번을 보라). 십자가 위 및 미사에는 또 똑같은 사제가 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드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미사의 제1봉헌자이기 때문에, 빵과 포도주의 제사가 성체성사를 상징했던 멜키세덱의 제도에 따라 영원토록 사제이시다(성영 110,4·헤브레아 5,5).
십자가와 미사 사이에는 차이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봉헌하는 방식이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주님은 정말로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 미사에서는 피를 신비적으로 흘리시며, 외형적으로 정말로 죽지는 않으시고 오직 신비적으로만 죽으시며, 외형적으로는 두 번의 축성에 의해서 당신을 죽음의 상태에 놓이게 한다.
한 마디만 더 해야겠다. 우리는 종종 영국의 열교 가운데서 제사의 양식과 같은 것을 찾는 헛된 일을 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친교의 예식이 있기는 하다. 한때 천주교였던 영국에서 그리스도인다운 흠숭 행위였던 미사의 유산인 것이다. 혁명가들은 미사를 폐지하고는 그것에 대해 불경한 우스꽝스러운 짓이라고 하면서도 그 자리에 아무런 흠숭 행위로도 바꿔 놓지 않았다. 제사가 없는 곳에는 사제가 있을 수 없으며, 제사도 사제도 없는 종교는 그리스도교일 수 없다. 영국 국교의 신자들은 지금 로마식 미사경본의 영어판을 사용하여 자칭 미사라고 하는 것을 봉헌한다지만, 공식적으로 그들이 성직자인 영국의 교회는 미사를 우스꽝스러운 짓이라고 한다. 삼백년도 더 전에 그들이 지금 자행하고 있는 일을 했다면, 그들은 우리의 천주교 사제들이 당했던 것처럼 교수형을 당하고 질질 끌려져 토막이 났을 것이요, 종교 당국은 그들의 머리를 런던교에 내걸었을 것이다.

279. 미사성제는 어떤 목적을 위해 드려지는가?

미사성제는 네 가지 목적을 위해 드려진다. 첫째 천주께 최고의 영예와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둘째 천주의 온갖 은혜에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셋째 우리의 죄에 대한 보속을 천주께 드리고 회개의 성총을 얻기 위하여, 넷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른 온갖 은총과 강복을 얻기 위해서이다.
질문 276번에서 유데아인에게는 네 가지 종류의 제사가 있어서 천주께 대한 인간의 네 가지 의무를 채웠음을 알았다. 미사는 그 모든 제사를 대신하며, 성부께 그리스도를 드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천주께 대한 네 가지 의무를 채우고도 남게 한다. 따라서 미사로써는 (1) 천주께 정말로 흠숭을 드릴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드림은 천주께 최고의 영예와 영광을 드리는 것인 바, 예수께서 우리의 흠숭을 받아 주시며 그것을 당신의 것에 합해 주시어 천주께 의합한 것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주께 의합한 감사를 드릴 수 있다. (3)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이용하여 자신의 죄에 대한 참된 통회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4) 다음과 같은 말씀에 따라서 주님을 통하여 온갖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너희가 만일 내 이름을 의지하야 성부께 무엇을 구하면 너희게 주시리라.”(요왕 16,23) 그리고 그것이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라고 하면서 기도를 끝마치는 이유가 된다.
이제 나는 죄의 고통 중에서 주일 미사 및 모모한 다른 날의 미사에 참례하라고 하는 이유를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천주를 경배하고 흠숭해야 하기 때문이며, 미사는 그런 목적을 위해 당신이 정해 주신 수단이기 때문이다. 미사에 참례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천주를 흠숭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용서를 청하며, 우리가 당신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280. 미사는 우리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이기도 한가?

미사는 우리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너희는 나를 기억하기로 이 예를 행하라.”(루가 22,19)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미사 동안에 축성경에 덧붙여 읽혀지는 경문(기도문) 및 사제가 여러 차례 긋는 십자성호는 정신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간직하게 한다.
언어, 미사에서 사용하는 라틴어는 비가톨릭 신자에게 수수께끼가 되는 일이 빈번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중대한 이유가 있다. 한 두 가지만 설명하겠다. 라틴어 및 그 어휘의 뜻은 변치 않는다. 예컨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언어를 보면, 경배라는 용어는 보통 천주께 대한 경배, 당신께만 드려지는 영예에 제한되고 있다. 그러나 한때 그것은 단지 존경 혹은 경의만을 의미했었으며, 현재 사용되고 있는 어떤 표현에서는 아직도 본래 의미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혼배 예식에서 신부는 신랑에게, “나는 내 몸으로써 그대를 섬기나이다”라고 말하며, 판사 및 시장에게는 각하라고 칭하기도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자가 해외에 갈 때면 자기 나라에서 드리는 미사와 똑같은 미사를 발견한다. 그가 방문하고 있는 나라의 언어를 한 마디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자기 교회에서와 같이 쉽게, 마음 편히 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 미사가 자기 나라의 언어로 드려진다면 어떤 혼란이 생길까!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종족의 갖가지 언어를 생각해 보라.
평신도더러 기도서와 개인용 미사경본을 사용하라고 점점 더 적극적으로 권장되는데, 원래 천주교 전통의 기도서 및 특히 평신도를 위한 작은 미사경본을 보면, 사제가 집전하고 있는 미사를 따라가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라틴어와 함께 옆옆이 자기 나라의 언어로 번역돼 있다.

고해성사

[편집]

281. 고해성사란 어떤 것인가?

고해성사는 대죄이건 소죄이건 성세성사를 받은 후에 범한 죄를 용서받는 성사이다.
죄사함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설명한 바 있으니, 잠시 되돌아가서 신경 중에서 제10요목 이하에서 말한 것을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 본죄(121번-127번), 즉 이미 세를 받은 사람이 범한 죄를 다루고자 한다. 성세성사는 두 번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세성사를 받은 후에 범한 죄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성사가 필요하다. 그 성사가 고해성사이다.

282. 고해성사는 영혼 안에 천주의 성총을 증대시키는가?

고해성사는 죄 사함 외에도 영혼 안에 천주의 성총을 증대시킨다. 그러므로 자주 자주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고해성사는 영혼에 대해 이중의 효험이 있다. (1) 물론 죄인이 타당하게 용서받으려는 의향이 있어야만 고해성사로써 죄가 사해진다. 그리고 (2) 고해성사는 특별한 성총을 주어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 준다. 이미 성총지위에 있는 사람이 고해하는 경우에는 죄에 대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특별한 성총과 더불어 더욱 많은 성총을 함께 받는다.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자주 받으면, 죄를 더욱 잘 뿌리치게 되어서 착한 생활을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교회에서는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고해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정말로 착한 생활을 살도록 돕기에는 충분치 않다. 하루에 식사를 한 끼만 한다면 조만간 건강을 해치게 될 것이다. 건강이 약해져서 질병에 걸리지 않으려면 규칙적으로 꼬박 꼬박 먹어야 하는 것이다.

283. 우리 주님은 언제 고해성사를 세우셨는가?

우리 주님은 종도들에 향하여 기운을 불고, “너희가 사람의 죄를 사한즉 사하여질 것이요.”(요왕 20,23)라고 이르시며 죄 사하는 권한을 주시면서, 고해성사를 세우셨다.
주님은 종도들에게 처음으로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이 성사를 세우셨다. “이에 다시 이르시되 너희는 평안할지어다, 마치 성부 나를 보내심같이 나 또한 너희를 보내노라 하시고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저들을 향하야 기운을 불며 이르시되 성신을 받으라. 너희들이 사람의 죄를 사한즉 사하여질 것이요 사람의 죄를 머무른즉 머물러 있으리라, 하시니라.”(요왕 20,21-23) 이상의 말씀으로써 우리는 죄를 사하는 명백한 권한이 종도들에게 주어졌음과 그들이 사한 죄를 당신께서도 사하시리라는 분명한 보증을 얻은 셈이다. 현세에서 죄인에 대하여 종도들이 언도한 구절을 천당에서는 주께서 실제로 증명해 보이시리라.
그런데 권한은 이중적이었다. 종도들은 사하여 주기를 거부(보류)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주께서 천당에서 실증해 주실 것이다. 물론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죄인의 태도에 달려 있다. 이상의 말씀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사함을 종도들의 손에 맡기셨으며, 종도들에게만 말씀하고 계셨던 까닭에 그 권한을 받는 사람에 제한을 두셨다. 다시 말해서 그런 권한은 누구에게나 있지 아니하고 종도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자로서 당신이 의도하신 이들, 즉 그 임무에 있어서 종도의 후계자들, 결국 천주교회의 주교 및 사제들에게 있을 것이었다.
주님의 그 말씀에 따라 죄인이 자기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그 죄를 사제에게 고명해야 할 의무를 부과하셨다는 것은 나중에 증명될 것이다(295번을 보라).

284. 사제는 어떻게 죄를 사하는가?

사제는 사죄경을 염해 주면서 천주의 권한으로써 죄를 사한다.

285. 사죄경은 어떤 것인가?

사죄경은 다음과 같다. “내가 네 죄를 사하되,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을 인하여 하노라.”
물론 사람으로서의 사제에게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 이미 보았듯이 권한은 천주께서 주시는 것인즉, 죄는 천주를 거슬러 위반하는 것이므로 권한은 천주에 의해 주어진 것이어야 한다. 신품성사때 사제는 사제로서의 권한 중 하나로서 죄를 사하는 권한을 받고, 서품식을 행하는 주교가 자기 손을 사제의 머리에 얹고, “성신을 받으라. 너희들이 사람의 죄를 사한즉 사하여질 것이요 사람의 죄를 머무른즉 머물러 있으리라.”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권한을 시행함에 있어서 사제는 영혼의 재판관으로서 행동하는 것이므로, 서품 때에 주어진 권한과 더불어 그 권한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주교로부터의 위임이 필요하다. 이는 재판권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야말로 필수적이어서 그것이 없으면 사제는 임종의 위험 중에 있는 이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죄인을 유효하게 사하여 주지 못한다. 황제의 재판관에게서 그와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황제의 재판관들은 여왕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가지고 사람을 질책하거나 석방했던 것이다.
재판관이 살인자를 죽도록 선고하거나 석방할 때, 그(재판관)는 그것을 실제로 행한다. 그는 “여왕이 그대를 석방하노라.”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그것을 행하노라.”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제는 사하여 주면서, “천주께서 네 죄를 사하노라.”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천주의 이름으로 및 당신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행해진다.
그러니 천주께서 죄인을 사하여 주시는 사죄경은 사제에 의한 선언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재판관으로서 행동하여 실제로 사하여 주는 사제의 행위이다. 성사를 세우실 때 주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당신의 서품으로써 사제가 사죄의 행위를 행하게 하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너희가 사람의 죄를 사한즉 사하여질 것이요.”

286. 고해자의 편에서는 사죄를 위하여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고해자의 편에서는 사죄를 위하여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한즉, 통회, 고명, 보속이다.
고해자는 고해성사를 받는 사람이다. 위의 세 가지 조건 중에서 첫 번째인 통회가 제일 중요하다. 정말로 중요해서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하찮은 죄라도 천주께서는 그 어떤 죄도 용서치 않으시려니와 용서하실 수도 없다.

287. 통회란 어떤 것인가?

통회란 정개하고자 하는 굳은 결의와 더불어, 자기 죄로 말미암아 그토록 착하신 천주를 거슬린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통한(痛恨)해 하는 것이다.
‘진심으로’는 ‘마음으로부터’, ‘진지하게’를 의미한다. 통회 혹은 죄에 대한 통한에 대한 천주교회의 교리는 “그것은 비통해 하는 마음이면서 동시에 앞으로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결심과 더불어, 범한 죄를 지겨워 함(혐오함)이라는 것이다. 그 통회에는 죄를 그만 두는 것뿐만 아니라 과거(의 죄)를 지겨워함이 포함되어 있다.”(트리엔트 공의회, 제14회기, 까논 4) 정말로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고 범죄하도록 유인하는 사람 및 장소와 같은 기회를 피하고자 하는 의향이 없으면 진정으로 죄를 뉘우쳐 아파함일 수 없다. 그러므로 죄를 끊으려는 결심을 하지 못하는 천주교 신자는 고해성사를 궐하게 된다. 그런 마음의 상태로 이 성사에 감히 다가간다면 그것은 천주를 시험하고 조롱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죄송하다고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자기 죄에 대하여 진정으로 유감스러워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죄를 뉘우쳐 아파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자주 현혹하는 것으로, 인간의 느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참된 통한, 즉 진심으로 죄를 뉘우쳐 아파하는 것은 정신 및 의지로써 죄를 지겨워하기만 하면 된다. 즉 천주를 거슬리는 것이 가장 극악한 죄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토록 착하신 당신을 거슬린 것에 대하여 진정으로 후회하면서 천주의 도우심을 힘입어 장차 죄와 및 죄의 기회를 피하기로 결심하면 되는 것이다.

288. 정개하고자 하는 굳은 결의란 어떤 것인가?

정개하고자 하는 굳은 결의란, 천주의 성총을 힘입어 죄 뿐만 아니라 죄의 위험한 기회까지를 피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굳은 결의란 단지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바람이나 소망이 아니라 더 좋아지고자 하는 실제적이고도 진지한 결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미 보았으되, 과거의 죄로 유인하는 것이면 어떠한 것이든 끊으려는 결심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죄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적어도 사제가 우리에게 그 죄의 기회가 덜 위험한 것이 되게 하라고 충고해 주는 것을 모두 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고해소에서 사제의 임무는 사죄경 뿐만 아니라 충고와 훈계를 해 주는 것을 포함하며, 늘 죄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찌 어찌 해야 한다고 말해 줄 수 있다.

289. 어떻게 해야 죄에 대한 진심어린 통한(痛恨, 죄를 뉘우쳐 아파함)을 얻을 수 있는가?

진심어린 통한을 얻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그렇게 되게 해 주는 동기를 이용함으로써 죄에 대한 진심어린 통한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이 언제나 진정으로 자기 죄에 대하여 후회하고 진정으로 죄를 뉘우쳐 아파함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지독한 술고래 혹은 정결을 거슬리는 죄에 빠져 있는 사람은 천주와 더불어 평화롭도록 그리고 새 생활을 시작하기로 결심함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기에게 그토록 필요한, 죄를 뉘우쳐 아파하는 심정을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기 시작해야 한다. 미사성제로써 우리 주께서 직접 그들을 위해 중재해 주시고, 또 미사성제를 드리는 동안에 천주께서 지극히 풍성하게 죄를 뉘우쳐 아파함의 은혜를 주심으로 해서 많은 이가 고해성사를 받기 전에 여러 번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기도에다가 죄가 영혼에 끼친 끔찍스런 손해에 대한 묵상을 덧붙여야 하며, 또 그것이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만들어 주신 천주를 얼마나 심하게 거슬린 것인지를, 그리고 죄중에 있을 때 죽음이 갑자기 덮쳐 와 심판관이신 천주를 마주 대해야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덧붙여야 한다. 교리문답은 다음에 오는 질문에서 그런 묵상거리를 마련해 준다.

290. 천주께 대하여 어떻게 생각함으로써 죄를 뉘우쳐 아파하게 되는가?

우리 죄로 말미암아, 본디 그리고 우리에 대하여 무한히 착하신 천주를 거슬렸다고 생각함으로써 죄를 뉘우쳐 아파하게 된다.
착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라면 어떤 일이든 거의 다 행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느끼며, 그들의 사랑을 잃었다고 느끼기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천주께 대하여 그런 우호적인 심정을 지닐 수 있는 경우에만, 죄를 뉘우쳐 아파하기 위한 최상의 동기를 얻게 된다.
그런 후에야 천주께서 우리에 대해 얼마나 착하신 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천주께서는 우리를 지으시고, 구속하셨으며, 천당을 약속해 주셨다. 가장 좋은 은혜 및 완전한 은혜는 모두 성 야고버께서 말하신 대로 성부께로부터 내려온다.

291. 구세주께 대하여 어떻게 생각함으로써 죄를 뉘우쳐 아파하게 되는가?

구세주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극악하게 범죄한 자들이 “천주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으며 또한 망신을 시키는 연고니라.”(헤브레아 6,6)라고 생각함으로써, 죄를 뉘우쳐 아파하게 된다.
이는 우리에 대한 천주의 착하심을 보여 준다. 우리 주님은 천주이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쓰라린 고통 속에 죽으셨다. 당신께서는 그 같은 고통을 겪으실 필요가 없었다. 당신이 흘리신 눈물 한 방울, 당신이 행하신 천주의 사랑의 행위 한 가지로도 능히 우리의 죄 및 억만 세상의 죄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주께서는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으셨는가? 오로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세상에 있는 그 제자들을 이미 사랑하시고 또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즉, 사랑의 끝까지).”(요왕 13,1) 당신이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으므로, 우리가 대죄를 범하는 것은 곧 당신의 고통을 조롱하고 그 호소를 거부함으로써 당신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292. 천당을 잃고 지옥에 가게 될 것으로 인해, 자기 지은 죄를 뉘우쳐 아파하면 고해성사를 받기에 넉넉한가?

천당을 잃고 지옥에 가게 될 것으로 인해, 자기 지은 죄를 뉘우쳐 아파하면 고해성사를 받기에 넉넉하다.
이는 죄를 뉘우쳐 아파함에 대한 세 번째 이유, 즉 천주 및 그 벌을 두려워 함, 천당을 잃고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함이다. 이 동기는 천주께 대한 덜 완전한 사랑을 포함하고 또 천주의 관심보다는 자신의 관심에 더 향해 있으므로, 이미 말한 것에 비해 덜 착하다. 따라서 천당을 잃고 지옥에 가게 될 것 때문에 두려워하는 통회를 불완전 통회 혹은 하등 통회라 한다. 그렇기는 해도 그것으로 고해성사를 받고 또 고해성사를 받지 않아도 되는 소죄의 사함을 받기에 넉넉하다. 질문 369번 이하의 소만과에 들어 있는 소회죄경에는 방금 설명한, 죄를 뉘우쳐 아파함에 대한 세 가지 동기가 모두 포함돼 있다.

293. 상등통회란 무엇인가?

상등통회란 순전히 천주를 사랑함에서 우러나는, 죄를 뉘우쳐 아파함이다.
천주를 위하여 천주를 사랑하는 것보다 뉘우쳐 아파함을 위한 더 큰 동기는 없다(290번을 보라). 그러므로 그런 통회는 완전하다.

294. 상등통회에는 어떤 특별한 가치가 있는가?

상등통회에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가치가 있으니, 고해성사를 받기 전이라도 그로써 죄가 즉시 사해진다. 그렇더라도 대죄인 경우에는 나중에라도 그 죄를 꼭 고명해야 한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성부께 사랑함을 받을 것이요(요왕 14,21)”라고 말씀하셨다. 성부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성총지위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바로 이 말씀 및 그와 유사한 말씀으로써 천주께 대한 완전한 사랑의 행위 혹은 천주께 대한 완전한 사랑을 전제로 한 뉘우쳐 아파하는 행위에는 고해성사를 받기 전이라도 대죄의 사함을 얻는 놀라운 효험이 있다고 보증해 주신 셈이다. 그래도 그 죄를 고명하고자 하는 소망 및 의향이 있어야 하며 다음 고해성사 때에 그 죄를 실제로 고명해야 한다. 그 근거는 우리 주께서 당신 교회의 성직자 손에 죄 사함을 맡겨 놓으셨고, 죄 사함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고해성사(적어도 의향으로라도)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죄 중에 있으면서 조난 혹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말미암아 죽음에 닥친 사람은 상등통회의 기도를 발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탈출에 성공하게 되면, 다음 고해 때에 상등통회의 기도를 발함으로써 사함을 받은 그 대죄를 고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상등통회의 기도를 알아 두라고 권할 만하다. 여기 짧은 기도문이 있다. “오 내 천주여, 네 지선하심을 인하여, 당신을 거스려 득죄했음을 통회하오며, 나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중죄로 이끄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하겠나이다.”
이 기도문에는 기회가 되면 고해성사를 받으려는 소망 및 의향이 표현되어 있지는 않다. 진정한 상등통회의 기도라면 기본적으로 천주께서 우리더러 행하라고 하시는 것이면 모두 다 행할 의향이 포함되어 있으며, 고해는 주께서 가르쳐 주신 바와 같이 행하라고 하신 것 중의 하나이므로, 그 의향을 반드시 공개적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다.

295. 고명이란 무엇인가?

고명이란, 주교에 의해 인정된 사제에게 자기 죄를 스스로 고하는 것이다.
우리 주께서는 사제들에게 죄를 맺고 푸는 권한, 다시 말해서 사람의 영혼에 관하여 판단하는 권한을 주셨다. 그러나 그들이 심판관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죄인이 어떤 일을 했는지 고명하지 않으면, 죄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죄인은 자기 비행(非行)을 스스로 고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야만 사제들이 죄를 맺거나 풀어야 할지, 죄의 정도가 어떠한지, 불의한 행동에 대한 보상이 필요한지 혹은 필요치 않은지 그리고 천주의 성총의 수단(죄 사함을 준비케 하는 기도문 및 뉘우쳐 아파함)을 더 사용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직책을 수행할 수 있다.
무엇을 고명해야 하는가? (1) 양심을 주의 깊게 성찰한 연후에 스스로 죄 있음을 알아내되 아직 죄 사함을 받지 못한, 고의로 범한 대죄. (2) 죄의 성질에 영향을 끼치어 그것을 다르게 하거나 혹은 더 중대하게 하는 연유. 예컨대, 많은 돈을 훔치는 것은 대죄이다. 그러나 천주를 섬기기 위해 교회에 주어진 돈을 훔치는 것은 더 중한 도둑질이 되어 신성 모독이 된다. (3) 할 수 있는 대로, 각 대죄를 범한 횟수. 소죄까지 고명할 필요는 없지만, 소죄를 고명하면 우리의 영혼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소죄만을 가지고 고해성사를 받는 경우에는, 적어도 그들 중 한 가지에 대하여 통회의 기도를 해야 한다.
혹자는 고해성사를 자주 받지 않아서 태만한 천주교 신자라는 인상을 주는 자가 있으면, 그에 대해서 고해성사를 믿지 않는 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그는 그것을 확실하게 믿지만, 고해성사를 받으러 갈 경우 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신의 생활을 고쳐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고해성사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성사를 믿는다는 증거이다. 그들은 고해성사를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제들이 고명을 듣는 일은 매우 잘 하겠지만, 자기들이 직접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사제도, 주교도 그리고 교황 자신도 다른 여느 천주교 신자와 마찬가지로 고해성사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인간이어서 죄에 떨어질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아니 오히려 다른 누구보다도 훨씬 더 많이 성사의 성총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매우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며 천주의 성총의 수단(기도와 성사)을 다른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이용해야 한다.

296. 고해성사 때에 대죄를 일부러 숨기는 것은 어떤가?

고해성사 때에 대죄를 일부러 숨기는 것은, 모고해를 함으로 인하여 성신께 거짓을 말하는 것이 되어 크나 큰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천주께 거짓을 말함으로써 그토록 거룩한 제도를 조롱하기보다는 차라리 성사를 받지 않는 편이 더 낫다. 사제를 속일 수는 있어도, 마음의 비밀을 읽으시는 천주는 속일 수 없다. 거짓된 겉치레에 대하여 사제로부터 사죄경을 얻어 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천주께서는 그것을 비준치 않으실 것이며, 그렇게 되면 무가치한 이상으로 악한 것(모고해)이 되는 바, 왜냐하면 사람의 죄가 아직 남아 있고 또 신성 모독의 죄까지 추가되기 때문이다.
수치스러움으로 인해 자신의 가장 악한 죄를 고명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왜 그렇겠는가? 그들은 그 죄를 범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에 자기 영혼을 영원히 잃을 위험을 향해 내달린 것이다. 그러니 겸손한 고해로써 그 죄를 씻고 다시 천주의 벗이 되기만 한다면이야, 어째서 그 죄를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겠는가?
“그러나 사제가 내 생활의 비밀을 알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절대로 더 나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고해자가 모든 것을 몽땅 털어놓고 고명할 용기를 가졌음에 대해 천주를 찬미할 것이다. 사제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는 가련한 죄인이 천주와 화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의 신성한 주재자를 위하여 정말로 중요한 무엇인가를 했다고 느끼게 된다.
사제가 자신의 고해자의 죄를 밝히는 것이 허락되는가? 절대로 아니다. 그는 가장 준엄한 법으로 말미암아 그 죄에 대하여 절대 침묵을 지켜야 하며 천주의 교회에는 그 죄를 알리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의 고통을 겪지 않은 사제가 하나도 없다. 사제들이 고해자의 죄를 밝히라는 명목으로 고발된 때가 많았지만, 밝힌 적은 결코 없다. 말하자면 고해의 비밀에 대한 완전한 신성함은 법정에서도 인정된 것이다.

297. 고명을 잘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명을 잘 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를 행해야 함인즉, 첫째, 훌륭한 고명을 하기 위한 성총을 얻도록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둘째, 양심을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한다. 셋째, 시간을 내서 착한 통회의 행위를 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넷째, 천주의 도우심으로 죄를 끊어 버리고 앞으로는 새 생활을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고해성사를 받는 일이 중요한 문제이다.
어떤 가톨릭 기도서에서든지 고명을 특별히 잘 하도록 돕는 기도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천주십계 및 성교규계에 관한 양심 성찰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성찰을 통해 이미 범했을 온갖 죄를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고해의 준비중에서도 셋째 및 넷째 부분이 제일 중요하다. 우리는 이미 고해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통회(정개하려는 굳은 결의와 더불어)임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고명이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나, 그것을 결코 무거운 짐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고명은 영혼의 안식을 위한 것이지 걱정거리가 아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고명을 잘 할 수 없다거나 몇 가지 죄를 잊어버린다거나 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사제는 고해 사제로서의 성무를 수행하기 위해 특별한 훈련을 받으며, 언제나 고해자를 도와서 일이 잘 되게 하려고 애쓴다. 혹 대죄를 잊었으면, 고해자는 다음 고해성사 때에 그것을 고명해야 한다. 그것을 고명하기 위해 일부러 빨리 고해성사를 받을 필요는 없지만 다음 기회에 반드시 고명해야 한다.

298. 속죄란 어떤 것인가?

속죄란 사제가 주는 보속을 행하는 것이다.
신자가 자신의 죄를 다 고명하면, 사제는 그의 생활 상태에 따라 특히 피해야 하는 죄가 어떤 것인지 말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는 사죄경을 염해 주기 전에, 보속으로써 어떤 기도를 드리거나 혹은 어떤 일을 행하라고 말해 준다. 그리고 나서 고해자는 통회의 기도를 드리며, 그러는 동안 사제는 사죄경을 염해 주어 고해자의 죄를 사한다.
연옥에 대해서 설명할 때(108번), 죄를 범한 후에 천주께서 그 죄성을 용서해 주셨더라도 보통 천주의 정의로우심에 따른 잠벌이라는 빚이 남으며, 현세에서 그 빚을 다 갚지 못하면 내세의 연옥에서 갚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현세에서 그 빚을 갚기 위한 방법은 고해성사 때에 사제가 주는 보속이다. 그리고 보속이야말로 아마 가장 효과적인 수단일 것인즉, 보속은 성사적이고 고해성사의 부분인 까닭에 그것에는 예수 보혈의 공로가 결합돼 있기 때문이다. 사제는 범해진 죄의 중한 정도에 따라 보속의 중한 정도를 맞춘다. 대죄에 대하여 타당한 보속이 부과되었는데, 그 보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고해자는 대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299. 사제가 주는 보속이 항상 죄에 대하여 완전한 속죄가 되는가?

사제가 주는 보속이라 해서 항상 죄에 대하여 완전한 속죄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보속 말고도 다른 선행과 나름의 보속을 더하여 대사를 얻도록 힘써야 한다.
특별히 권장되는 세 가지 선행은 기도, 대재 지키기 그리고 애긍시사(哀矜施捨)이다.

300. 대사(大赦)란 어떤 것인가?

대사란 교회에 의해 허락된 것으로, 죄성(罪性)이 용서된 후에도 보통 죄로 인해 남아 있는 잠벌을 사하는 것이다.
대사라는 말은 열교의 귀에는 매우 거슬리는 소리이다. 더 자세히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들은 대사에 대해서, 죄를 범해도 된다는 허락 내지는 특허쯤으로 믿는 것이다. 대사는 물론, 그런 종류가 아니다. 대사는 죄가 사해진 후에 남아 있는 잠벌 중 전체 혹은 일부를 사하거나 면제하는 것이다. 회개에 의해 죄가 용서될 때까지는 대사를 얻지 못한다. 죄에는 두 가지, 즉 그 죄성과 그 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107번을 보라).
죄인이 몇 가지 기도를 드리거나 선행을 행한다는 조건 하에서 대사가 허락된다. 교회 초기에 죄인들은 자기 죄에 대해 매우 심한 보속을 공식적으로 해야 했다. 예컨대, 도둑은 2년의 보속이라는 벌을 받았다. 배교자나 냉담자는 죄를 기워 갚기 위한 보속을 행하느라 여생을 다 보내야 했다. 이로써 당시의 죄에 대한 견해가 얼마나 진지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신앙 때문에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불쌍한 죄인에게서 보속 중 얼마를 면제해 달라고 주교에게 청원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항구한 순교에 대한 보답으로, 주교는 그 요청을 허락하곤 했다. 나중에 박해가 그치자, 다른 선행을 행하는 조건 하에서 보속을 면제해 주는 것이 통례로 남게 되었다. 이는 8세기와 12세기 사이에 통상적인 관례가 되었다. 그런즉 요크의 주교, 에그버트의 고해 규정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 “고해 규정서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대로 따를 수 있으되, 어쩔 수 없는 이를 위해 천주의 자비로운 권고를 주노라. 하루 내내 빵과 물만을 취하는 대신 장궤한 상태에서 50곡의 성영을 창하거나 혹은 장궤하지 않고 70곡의 성영을 창할지니라. 그러나 성영을 모르고 또 대재를 지킬 수 없는 이에게는 1년 동안 계속해서 빵과 물을 취하는 대신 시사(施捨)함으로 베풀되 26가지의 고형식을 주라고 할 것이요, 각 주간 평일 중에서 하루를 계속해서 9시과(課)까지 또 하루를 계속해서 만과(晩課)까지 대재를 지킬 것이요, 사순절 중 3주 동안을 자기가 받은 것의 반을 시사(施捨)함으로 베풀지니라.” 때로는 우리의 첫 순교자인 성 알바노 성당, 혹은 로마나 스페인의 콤포스텔라에 있는 성 야고버 성당을 향한 성지 순례가 보속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런 완화 및 속량이 대사의 형태인 동시에 대사의 역사적 발달의 일부를 이룬다고들 하지만, 엄격히 말해서 그것들은 우리가 뜻하는 그 대사는 아니다. 우리 식의 대사는 11세기의 교황에 의해서 허락되기 시작했다.
교회에 의해서 허락된 대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전대사(全大赦)와 한대사(限大赦)이다. 전대사는 죄로 인한 잠벌을 전부 사한다. 모든 죄 및 죄에 대한 애착에서 절대로 자유로워야 했으므로 전대사를 얻기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영혼에 죄성이 있는 한, 그에 따른 벌이 버티고 있으며 그 벌에서 떨어질 수 없다. 전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함과 동시에 교회에서 부과하는 다른 조건을 채워야 한다. 한대사는 죄로 인한 잠벌 중 일부를 사한다. 그것은 며칠 혹은 몇 년의 한대사라는 말로 표현되고 또 그런 의미로 이해됨인즉, 한대사를 얻으면 교회 초기에 부과한 그 숫자만큼의 날수 혹은 햇수의 보속을 행한 것만큼을 면제받게 된다. 한대사에는 전대사와 같은 완전한 조건이 필요치 않다. 한 대사 역시 우리 영혼에 대죄가 없어야 한다.
교회는 이토록 놀라운 힘을 누구에게서 얻어내는가? 설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얻는다. 당신은 성 베드로에게, “네가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맨 것은 하늘에서도 맬 것이요 네가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푼 것은 하늘에서도 풀리라.”(마두 16,19)라고 말씀하셨다. 그로써 당신은 성 베드로 및 그 후계자들에게 신자들이 천당에 가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것에서든지 벗어나게 해 줌으로써 천당에 이르도록 돕는 힘을 주셨다. 그것은 죄성 및 벌에 있어서의 죄에 대한 권한이니, 사람이 천당에 이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바로 죄이기 때문이다. 베드로 및 그 후계자들에게는 고해성사에서 주는 사죄경으로써 죄성 및 영벌을 사해 주는 권한이 있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대사라고 알고 있는 면제를 위한 허락으로써 잠벌에 대한 권한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당한 속죄를 천주께 드리지 않으면 죄의 벌은 대사로써 사해지지 않는다. 교황은 그 속죄를 교회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되, 사람이 되신 천주 예수 그리스도의 넘치는 속죄 및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누적된 속죄로부터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속죄는 무한하시니 천주이셨기 때문이요, 지극히 거룩하시고 무죄하신 고로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는 아무런 죄도 없으신 까닭에 전 생애를 통하여 천주께 드려진 축적된 속죄는 성모 마리아 자신에게는 전혀 필요치 않다. 성인들은 죄를 범하셨고, 그들 중 어떤 이는 회개하기 전에 큰 죄인이셨으나(예컨대, 성 아우구스띠노), 고행의 생활로써 천주께 드린 속죄는 자기에게 필요한 양을 채우고도 남는 것이어서 천주의 배려로 우리를 위해 사용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천주께 연결돼 있는 속죄가 한없이 모아져 있는 것이다. 그 한없이 모아진 속죄가 우리를 위해 이용될 수 있음은 성모 마리아, 성인들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리는 모두 성인의 통공으로써 결합되어 있다(102번, 기타 등등을 보라).
연옥에 있는 영혼들도 역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도 대사를 얻어 줄 수 있는 성인의 통공의 일부이다. 그러나 산 이를 위한 대사는 교황이 자신에게 있는 열쇠의 권능을 가지고 발휘하는 것으로, 벌을 없애는 직접적인 행위인 반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대사는 그들을 위해 교회가 제공하는 기도이다. 교황은 지상에서만 교회의 우두머리이므로,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는 교황이라 해서 면제의 권능을 직접 발휘하지 못한다.

종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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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종부성사란 무엇인가?

종부성사란 병자에게 경문을 외면서 성유를 발라 주는 것이다.

302. 언제 종부성사를 주는가?

병으로써 죽을 위험이 있을 때 종부성사를 준다.
천주교 신자의 병이 위중하면, 병에 대해 아직 모르는 경우라도 사제가 파견된다. 사제는 병자의 성유가 들어 있는 작은 병을 지참하고 병자에게 성체를 모시고 간다. 그런데 병자의 성유는 성목요일에 주교가 종부성사를 위하여 특별히 축성한 것이다. 사제는 우선 병자의 고명을 듣고, 죄를 사해 주며 그리고 나서 성체(이런 경우에는 노자성체, 혹은 천당을 향한 여행을 위한 양식이라 일컬음)를 영해 준다. 그때 사제는 병자에게 성유를 발라 주거나, 우리 식으로 말해서 종부성사(마지막 기름을 바름)를 준다. 사제는 기름을 바르되 “이 성유를 바름으로써 주는 자비를 베푸사, 봄으로써(들음으로써 등) 범죄한 바를 사하소서. 아멘.”이라고 하면서, 병자의 오관(눈, 귀, 콧구멍, 입술, 손, 그리고 발)에 성유를 가지고 십자성호를 긋는다. 이 성사는 병이나 사고로 죽을 위험에 있는 이에게만 주어진다. 교전 중인 군인은 죽을 가능성밖에 없다고 해도 종부성사를 받지 못한다. 그가 부상당해서 죽을 정도가 되면 그제서야 성사를 받을 수 있다.

303. 종부성사의 효험은 무엇인가?

종부성사의 효험은 영혼에 안식을 주고 굳세게 하며, 죄를 사하고 또 천주께서 타당하다고 여기시면 건강까지라도 회복케 하는 것이다.
칠성사에는 영혼에 대하여 각각의 특별한 효험이 있다. 종부성사는 죄로 말미암은 영적인 쇠약을 제거하여 죽어 가는 영혼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며, 그때야말로 영혼을 파멸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까닭에 끝까지 영혼을 무너뜨리려고 온 힘을 다하는 악마의 유혹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영혼에게 굳셈을 더해 준다. 이 성사는 또 이를테면 병자가 무의식 상태이고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 뉘우쳐 아파하고 있지만 고명을 할 수 없을 때에는, 대죄를 용서해 주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는 죽어 가는 이에게 천주의 안식을 가져다 주고, 영혼을 덕으로써 굳세게 하며, 유혹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죄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며, 천주께서 뜻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평화롭게 포기케 하는 성사, 자비로우신 천주의 놀라운 성사이다. 종종 기름 바름이 육신의 건강에 영향을 주기까지 해서 체력이 소생하도록 돕는 일도 있다. 병자 및 죽어 가는 이를 많이 다루어 본 사제라면 누구라도 성사의 그런 효험을 증명할 수 있다.

304. 성경에 있는 것으로 종부성사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

성경에 있는 것으로 종부성사에 대한 근거는 성 야고버 제5장에 있으니, 다음과 같이 말하여진다. “너희 중에 만일 앓는자 있으면 교회의 사제들을 저에게 오게 할 것이며 이에 저(=사제)들은 주의 이름을 인하야 저의 우에 기구하며 저에게 기름을 바를지니라. 이에 신앙의 기구는 병자를 가벼웁게 할 것이며 주께서는 그를 위안하실 것이며 저 만일 죄중에 있으면 용서하심을 받으리라.”
직전의 질문에서 살펴 본 성사의 효험이 전부 여기에 적혀 있다. 이는 병자, 즉 중하게 앓는 이에 대한 것으로, 희랍어 원본에서 분명히 밝히는 대로이다. 사제는 병자의 위에서 기도하고 또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준다. 효험은 그를 '구원하는' 것, 주께서 그를 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즉 그에게 영적인 굳셈과 위로를 주며, 천주께서 어여삐 보시면 육신 건강까지도 회복시켜 주신다. 그것은 또 병자가 정규의 성사(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을 때, 죄를 사해 주기도 한다. 여기에는 내적인 효험(성총으로써 안식을 주고 굳세게 하며 죄를 사하기까지 하는)을 가져오는 유형의 표시(경문 및 기름 바름)가 있고 이 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세우셨음으로 해서 이 예식이 성사임이 분명한즉, 천주만이 유형의 표시에 대해 성총을 부여하는 힘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천주교회가 얼마나 놀랍게, 죽어 가는 이를 도와 구원할 수 있는지를 알았다. 사제가 임종시에 할 수 있는 것과 비가톨릭 성직자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뚜렷한 대비점이 있다는 것은 비가톨릭인들도 자주 주목하여 언급하는 것이다. 병자가 죽었다고 의사가 선언한 후에도 영혼이 실제로 육체를 떠나는 것은 몇 시간 후에 이루어질 수도 있으므로, 그 같은 선고가 내려진 후라고 해도 여전히 종부성사는 행해질 수 있다.

사제는 죽음의 시간을 위한 종도적 강복, 즉 전대사를 전달하는 교황강복을 줌으로써 병자에 대한 성직의 임무를 완수한다.

신품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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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 신품성사란 무엇인가?

신품성사란 주교, 사제 및 교회의 다른 성직자들이 서품을 받아서 고유한 성무를 집행할 수 있는 권한 및 성총을 받는 성사이다.
우리 주께서 열 두 종도를 뽑으시고 천당으로 가신 후에도 영혼을 위한 사업은 계속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마치 성부 나를 보내심같이 나 또한 너희를 보내노라.”(요왕 20,21)라고 말씀하시고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죄 사하는 권(權)을 주셨다(요왕 20,23). 그 일은 주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신 날 저녁에 있었다. 수난을 당하시기 바로 전에는 미사성제를 드리고 빵을 당신의 몸으로 포도주를 당신의 피로 바꾸는 권을 열 두 종도들에게 주셨다. 그리고는 당신이 행하신 것을, 당신을 기억하기로 행하라고 명하셨다(루가 22,19). 승천하시기 얼마 전에는 복음을 강론하고 온 세상을 가르치며 세를 주라고 명하셨다(마두 28,19·말구 16,15).
그 같은 힘과 권은 교회에서 언제나 계속되어야 하기에 그 같은 권을 주심으로써, 주께서는 열 두 종도들에게 똑같은 사업을 하도록 다른 이를 서품하는 권도 주셨다(신품성사를 세우심으로써). 성 바오로는 성 티모테오에게 보내는 서간에서 이 성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에게 있는 성총을 등한히 여기지 말지니 그것(=성총)은 예언으로 인하야 사제들의 안수로써 그대에게 나린 바니라.”(티모테오전 4,14) “이런고로 내 손을 덮음으로 말미암아 그대 안에 있는바 천주의 성총을 치렬케 하기를 나 그대에게 권고하노라.”(티모테오후 1,6)
교리문답에서는 이 성사로써 주교, 사제 및 교회의 다른 성직자들이 서품을 받는다고 말한다. 주교는 사제직 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이다. 그들만이 사제를 서품하고 다른 주교들을 성성할 수 있다. 주교는 견진성사의 통상적인 거행자이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통치자로서 종도직을 계승한다. 그래서 교회가 주교 담당의 교구로 나뉘어 있는 것이다. 사제들은 다른 사제를 서품하거나 주교를 성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미 보았듯이, 사제는 견진성사를 거행할 권한은 받을 수 있어서 미사를 드리고, 고명을 듣고,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줄 권한을 주교와 함께 하기도 한다. 사제 및 주교들은 성세성사의 통상적인 거행자이기도 하다.
교리문답에서는 주교, 사제 및 다른 성직자에 대해서 말한다. 그 다른 성직자 가운데 주요한 것은 부제이다. 성신의 인도 하에 종도들은 최초의 부제들을 임명했다(종도행전 6장).
성공회의 서품. 지난 약 백년 동안 점점 더 많은 수의 성공회 성직자들이 촛불, 꽃, 제의, 기타 등등과 같이 예식에 더욱 공을 들여 밝은 분위기를 연출해 왔다. 적지 않은 수의 성공회 성직자들이 천주교회의 예식 및 예전을 취할 수 있는 한 더욱더 많이 취했다. 그들은 친교 예식 미사라고 하면서 로마 미사경본의 영문 번역본을 근거로 하여 그것을 거행한다. 그들에게는 죽은 이를 위한 기도문, 동정 성모 및 성인들을 공경하는 신심, 상본, 표제, 행렬, 기타 등등이 있다. 저들 성직자들은 스스로를 일컬어 타당하게 서품된 가톨릭 사제라고 주장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이 드리는 미사가 참된 미사이겠지만,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그들이 드리는 미사는 참된 미사가 아니다.
종교혁명의 시기에, 신교의 39개 조항이 작성되었을 때에는 미사가 거부되었다. 제31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 번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봉헌은 온 세상의 모든 죄, 원죄 및 본죄에 대한 완전한 속량, 화해 및 속죄이며, 그것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죄에 대한 다른 속죄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하여 고통과 죄의 사함을 얻기 위해 사제가 그리스도를 봉헌했노라고 통상적으로 일컬어지는 미사성제는 모독스러운 우스꽝스런 짓인 동시에 위험한 속임수이다.” 이로써 성공회의 가르침은 천주교의 미사에 대한 공식적인 가르침과 직접 반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미사를 드릴 것을 주장하는 성공회의 성직자들은 자기네 서품식에서 그런 공식적인 성공회의 가르침에 서명해 왔을진대 그들의 미사를 참된 미사라고 할 수 있을까.
종교혁명가들의 행동은 자신들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그들은 미사를 파괴시키고 제사 행위에 대한 관념을 없애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했다. 천주교의 사제들은 미사를 드리다가 잡히면 죽음에 부쳐졌다. 제대는 허물어뜨려지고, 그 위에서 미사를 드렸던 성석은 신성 모독적인 용도로 바뀌었다. 어떤 것은 난로 바닥의 돌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도록 교회의 포장 도로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링컨 샤이어의 이르남에 있는 성공회 교회에는 지금까지 한 개가 남아 있다. 천주교 제대의 자리에는 식탁이 놓였고, 거행자는 신자들을 등지는 대신 식탁 옆에 서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국 교회 당국의 가르침과 행위로 보아서 그 교회의 첫 번째 주교들에게는 사람을 사제로 삼고자 서품하려는 추호의 의향이나 관념조차 없었다는 명백한 확증을 가지게 되었으니, 사제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고 제사의 관념을 부인하는 것은 곧 사제의 본질적인 관념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로부터 서품식이라는 표현에는 주교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사제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게끔 꾸며졌다. 그런 식으로 해서 종도 전래라고 알려져 있던 것을 잃게 된 것이다. 성공회의 성직자들은 유효하게 서품된 것이 아니며, 그런 상태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성공회의 성직자라는 이들은 진짜 사제가 아니어서 참된 미사를 드리지 못한다. 그들이 자기네 힘을 믿음에 있어서는 신앙이 돈독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신앙이 돈독하다 하여 서품을 유효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닌즉, 천주교 신자들은 영국 국교의 성직자의 주장이나 영국 국교의 예식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혼배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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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혼배성사란 무엇인가?

혼배성사란 그리스도인의 혼인의 계약을 성화시키고, 그것을 타당히 받는 이들에게 특별한 성총을 주는 성사이다.
결혼은 천주가 인간 종족의 번식을 위해 세워주신 수단이다. 천주께서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즉 천주를 알아 사랑하고 공경하다가 나중에 당신과 더불어 천당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되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세상에 있게 하실 수단으로서 혼인이라는 것을 정해주신 천주께서 부모가 자기 영혼 및 자녀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필요한 온갖 도우심으로써 그것을 감싸주시리라는 것이 기대된다. 결혼 생활에는 자체의 어려움 및 시련이 있으니, 천주께로부터 오는 특별한 성총을 필요로 한다. 건전한 가족 생활은 국가의 안녕에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수계범절과 도덕성의 유지 및 장려에도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께서는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채우는 데 필요한 성총, 주님으로부터 오는 온갖 성총을 구할 권리가 있도록 혼인의 계약을 신성한 성사로까지 끌어올리신 것이다.
천주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혼배성사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되, 진실로 그리고 타당하게 새 법의 칠성사 중의 하나가 되지 못하고, 교회에서 사람이 고안한 것이어서 성총을 주지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누구라도 파문을 받을진저”라는 트리엔트 공의회(제26회기, 까논 1조)의 표현은 처음부터 항상 지켜져 온 것으로 고대 작가의 저서, 전례서, 및 몇 세기 전에 이미 교황의 권위를 거부했던 동방 교회들 사이에서도 발견되는 교회의 그르칠 수 없는 교리이다. 성경에는 혼배성사가 성사라는 표현이 그리 많지 않지만, 성 바오로의 서간은 그것을 아주 분명하게 함축하고 있다. 에페소서 5장에서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의 결혼의 신성한 특성을 지적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 사이에 경이롭고 깨질 수 없는 성총의 결합이므로 거룩하다. 그 같은 신성함으로 인해 혼배는 참된 성사임이 틀림없다. 성 바오로는 실제로 성사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증거를 짜 맞추어서 사용한 말이라기보다는 그의 일반적인 교리에서 나온 것이다. 성 바오로는 거기서 신비라는 뜻으로 성사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 사이의 결합은 위대한 신비, 즉 천주에 의해 계시된 위대한 진리이다. 이 단원의 결혼에 대한 성 바오로의 가르침은 주의깊게 읽어야 한다. 결혼은 그리스도와 당신 교회 사이의 결합의 상징이므로, 장부와 아내 사이의 관계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대하여 가지시는 사랑 안에서 및 교회가 당신께 드리되 사랑의 복종 안에서 그 이상을 찾는다. 그것은 종도께서 시작되어 성사로써 및 그 성사로부터 굳셈 및 영적인 분위기를 얻음으로써 강복받는 생활 지위를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할 정도로 너무나 고귀한 이상이다.
세(洗)를 받은 이 사이의 혼배 계약은 그 자체가 성사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 간에 장부와 아내로서 경문이나 표시를 주고받을 때, 약속하는 쌍방 당사자가 그 성사의 거행자이다(사제가 아님). 그러나 성교규계에 따라 혼배 및 성사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주교나 혹은 본당 사제 혹은 그 목적을 위해 타당하게 위임받은 사제와 두 증인이 필요하다. 결혼할 때, 쌍방이 다 성사의 거행자이므로 그리고 생활한 성사를 받는 자이므로 성총지위에 있어야 한다.

307. 혼배성사로써는 그것을 타당히 받는 이에게 어떤 특별한 성총이 주어지는가?

혼배성사로써는 그것을 타당히 받는 이에게 그들이 그 생활의 어려움을 견디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에게 충실하고, 또 천주께 대한 두려움을 안고 자녀를 양육할 수 있도록 특별한 성총이 주어진다.

308. 대죄 중에 혹은 성교규계에 불순종하면서 결혼을 서약하는 것은 신성 모독인가?

대죄 중에 혹은 성교규계에 불순종하면서 결혼을 서약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며, 유죄한 쌍방에 강복은 커녕 천주의 분노를 자초하는 것이다.
신성 모독은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것이다. 혼배는 성사이므로 신성하여 대죄 중에 서약하는 것은 신성 모독의 대죄이다. 그러나 혼배와 관련하여 쌍방이 성교규계를 따랐다면 유효하게 혼인한 것이다. 1908년 부활 주일 이후에, 천주교 신자가 이교의 교역자 앞에서 하는 결혼 및 사회식 결혼 후 일반 관청에 등록하는 경우의 결혼에 관하여 교회는 매우 중대한 변경을 행하였다. 변경이 있기 전에는 그런 결혼이 영국 및 다른 나라에서 유효한 것으로 인정되어도 그런 식의 서약은 항상 죄가 되는 것으로 간주됐었다. 그러나 변경이 있고 나서는 그런 결혼은 죄가 될 뿐만 아니라 무효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천주께는 참된 혼배가 아닌 것이다. 결혼에 대하여 유효하고 또 합법적이기 위해서는(외교인간의 결혼이건 쌍방 중에서 한 편이 천주교 신자인 사람의 결혼이건), 이미 말했듯이 주교나 본당 사제 혹은 타당하게 위임받은 사제 및 두 증인 앞에서 서약되어야 한다. 타당한 이유가 없는 한 결혼은 통상적으로 신부측의 본당 사제 앞에서 행해져야 한다. 쌍방이 다 결혼할 자유의 증서를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그들 각자는 상대방 외에 다른 누군가와 결혼한 상태가 아니어야 한다. 그들은 또 그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자유의지로 그러면서도 자발적으로 결혼하는 것임을, 그리고 천주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및 자기의 동의에 대하여 아무런 단서나 조건을 붙이지 않고 결혼을 서약하는 것임을 보증하는 혼전(婚前) 서약서에 서명해야 한다. 그런 문제에 있어서 있을 수 있는 여하한 어려움에 대하여 어떤 사제라도 온전한 충고를 해줄 것이다.

309. 외교인과 결혼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외교인과 결혼하는 것이란 천주교 신자와, 세를 받았지만 천주교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 사이의 결혼이다.
종교가 다르면 결혼에 대하여 장애 혹은 조당을 이루어 결혼을 불법한 것이 되게 한다.

310. 교회는 항상 외교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는가?

교회는 항상 외교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또 그것을 불법하고 치명적인 것으로 여겨 왔다.
외교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함에 교회의 지혜가 작용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결혼이 종신이어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결혼은 쌍방의 뜻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매여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종교의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일치가 약해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주교 신자의 미사 참례, 금요일의 소재, 기타 등등과 관련하여 싸움이 일어날 수 있다. 피임과 관련하여 천주교 신자에게는 중대한 도덕적인 어려움도 역시 생길 수 있다. 다음에는 자녀가 있다. 그들의 신앙은 그들 부모의 종교적 신념이 다름으로 말미암아 대부분 약해지기 일쑤이며, 천주교 신자인 쪽이 죽으면 자녀의 종교 교육은 위태로워질 수 있다. 교회는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고 그 경험으로 말미암아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강력한 입장이 옳다는 것이 입증된다.

311. 교회는 간혹 외교인과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기도 하는가?

교회는 간혹 매우 중대한 이유로 및 특별한 조건 하에서 관면을 줌으로써 외교인과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기도 한다.
적당한 천주교 신자인 짝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다든지, 특히 작은 마을이라든지 그리고 비가톨릭인 쪽에 해당하는 사람이 개종할 가능성이 있다든지 하는 것들이 주교가 관면을 주기에 넉넉하다고 여길 만한 이유들이다.
주교가 관면을 주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쌍방이 결혼한 후 쌍방의 자녀 모두 천주교회에서 세를 받게 할 것과 천주교의 지식 및 수계범절에 따라 교육시킬 것을 문서로써 엄숙히 약속할 것. (2) 천주교 신자가 아닌 쪽은 역시 문서로써 천주교 신자인 쪽과 자녀가 교회의 본분을 지킬 완전한 자유를 방해하지 말 것. (3) 천주교 신자인 쪽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특히 기도와 좋은 표양으로써 천주교 신자가 아닌 쪽을 개종케 할 것(역시 308번을 보라).

312. 사람의 힘으로 혼배의 결합을 풀 수 있는가?

사람의 힘으로는 혼배의 결합을 풀지 못하니, 그리스도께서 “천주 결합하여 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할지니라.”(마두 19,6)라고 하신 연고이다.
천주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심어 주셨고 또 자연법이라고도 하는 법은 몇 가지 이유로 이혼을 금한다. 혼배의 첫째 목적은 자녀의 출산 및 교육이다. 자녀는 정상적이면서도 안정된 가정 생활 및 남자와 여자의 상호 보완적인 속성을 나타내는 까닭에 자녀 양육에 영향을 주는 양친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쌍방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이혼의 기회는 그들 상호간의 사랑과 정절을 약화시키고, 인내하고 이해하는 동정심을 감소시키며, 섣부르고 잘못 권장되는 결혼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혼이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나라의 상황에 관한 실제적인 경험으로써 알 수 있듯이, 이혼으로 말미암아 공동선(共同善)이 헤살당하고 도덕성에 대한 일반적인 기준이 심각하게 저하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혼이 금지되면 여러 가지 어려운 경우가 있겠지만, 공동선은 개인적 유익에 우선해야 한다.
천주의 실정법에 자연법을 주입한 것은 개정된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셨듯이 천주께서는 유데아인의 마음이 완고해진 고로 그들 사이에 이혼을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천주께서 사람에게 세워주신 최초의 법은 이혼을 금했었다. 그 금지를 우리 주께서 회복시키셨다. 그리고 그 어떤 인간의 권위도, 교황조차도 세를 받은 자와 결혼한 자 사이에서 유효하게 계약된 혼배의 결합을 풀지 못한다.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는 사실상 혼배를 풀 권한이 전혀 없음에도 갖가지 이유로 혼배를 푸는 시늉을 한다.
이혼에 관한 법령은 무효에 관한 법령과 같지 않다. 그 용어들은 때때로 혼동되기도 한다. 무효에 관한 법령은 처음부터 부당한 두려움이나 강압으로 인하여, 자유의지에 의한 동의가 결여되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혹은 계약을 무효화시키는 조당이 있음으로 인해 혼배가 무효임, 다시 말해서 혼배가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다.

교리문답 해설 중에서 의도했던 부분, 즉 끝 부분에 이르렀다. 교리문답의 나머지는 다음과 같다. 그것을 읽으면 아마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목적은 천주교회에 대한 간략하고도 명쾌한 해설을 제공하여 아직도 그것에 대하여 남아 있는 편견을 없이 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소책자에서 거룩한 종교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제공한 관념, 아마도 여러분이 스스로 이루었거나 누군가가 제공해 주어서 아마도 그 진짜 가르침에 대해서는 아주 무지한 것과는 극히 다른 관념으로 말미암아 일격을 당했음에 틀림없다. 만일 여러분이 읽은 것 안에서 진리를 보았다면, 거기서 그치지 말라. 사제에게 그대를 소개해 줄 만한 천주교 신자인 친구를 구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사제를 찾아가서 그대의 고충을 설명하라. 어느 누구도 사제에게 다가가기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대에게는 구해야 할 영혼이 있음을 기억하라. 그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그것을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 천주께서는 영혼을 아주 확실하게 구할 수 있는 종교를 세상에 남겨 놓으셨다. 그 종교는 그리스도의 교회,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며 종도로조차 전해 내려오는 교회가 가르치는 종교이다. 그 종교를 받아 들여서 충실하게 실천한다면 심판의 날에는 모든 게 잘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