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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나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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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이춘우(李春雨)가 시골서 돌아온지 사흘이 지났다. 그는 자 기 집 건넛방 자리 속에 누워서 두눈을 깜작깜작 하며 담배 만 피우고 있다.

아침 해가 동향한 미닫이에 뜨겁게 쬐는데, 벌써 먼 곳에 서는 이슬 흐르는 잎사귀 밑에서 시원히 노래하는 매미 소 리가 들리게 부엌에서는 아침밥을 짓는지, 솥뚜껑 열었다 닫는 소리와 소반위에서 떨어지는 숟가락의 울리는 소리가 춘우의 귀에 다시 가정에 돌아온 맛을 느끼게 한다.

춘우는 담배를 재떨이에 아무렇게 비비고, 팔로 깍지를 껴 서 그 위에 머리를 얹고, 천장위만 물끄러미 처어다보고 있 다가, 다시,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는 듯이 눈을 감았다. 춘 우의 조그만 눈속은 얇은 눈껍질 사이로 스미어드는 광선으 로 말미암아 어두려 하는 저녁도 같고, 밝으랴 하는 새벽과 같이 어두움에 약간의 광명이 섞이여 무한대(無限大)의 공간 을 펴놓았다. 모든 환상(幻想)을 지었다가 그리었다 차려 놓 았다. 집어 치었다. 뛰놀게 하다가 사라지게 하기에 아무 거 칠것이 없는 큰 무대이며 끝 없는 마당이며 네 귀퉁이를 헤 아릴 수 없는 캔퍼스(畵布)다. 지금에 그는 지금 그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려는 환상의 활동을 거기에 전개시키려 한다.

그믐칠야에 은하(銀河)를 가로질러 흐르는 운성(隕星)과 같 은 별이 찬란한 광채를 내고서 그 복판을 지내가더니, 공중 으로 솟아 올랐다가 한꺼번에 터져 천갈래 만갈래로 헤어지 는 것도 같고, 고요한 푸른 물에 은가루를 뿌린듯한 수만의 별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또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도 같 았다. 그러더니, 동쪽 수평선에서 솟아오는 살림포의 팔구비 같은 둥근 달처럼 영숙의 얼굴이 그 속에서 웃는다. 열대지 방 어두운 밤중에 깜깜한 삼림을 통하여 바라보는 장경성 (長庚星)과 같기도 하고, 성 소피아 사원(寺院) 신단(神壇) 앞에 켜놓은 은은한 두줄기 촛불같은 그의 눈, 동쪽에서 서 쪽으로 몰려가기만 하고 한번도 밝아보지 못한 암흑(暗黑)보 다도 더 까만 기다란 머리, 서산으로 넘으려는 초승달 같이 깜찍하게도 그린듯한 눈섭, 예쁘게 담은것이 도리어 사람의 속태우게 할듯이 성난듯한 입술, 루비 보석을 우유에 갈아 서 찍어 버린듯한 그의 두 뺨이 그 속에 보이더니, 그 무무 한 공간 위로 그의 몸을 일으키기 시작하며, 후리후리한 키 에 윤곽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듯한 것이 천천히 띄워 놓 는 걸음걸이가 이리 주름지었다. 저리 주름지었다. 물결같이 울렁거리는 얇은 옷 속으로 비치며, 반뼘이 오히려 길다할 예쁜 발을 게으른 듯이 띄어 놓는 것이 보인다. 춘우는 눈 을 감고 뜨지 않으려 하였다. 깜박깜박 피의 고동으로 눈꺼 풀이 떨리여 그 환영(幻影)의 극히 미세한 곳이 빛이 얇아지 기도 하고 선(線)이 가늘었다 굵었다 하는 것까지 애석하여, 그는 죽은 사람처럼 터럭끝 하나 꼼작거리지 않고 누워 있 다. 그러고, 속으로

『영숙!……영숙!』

없는 이의 이름을 두어번 불러 보더니, 다시 아무 생각없 이 있었다. 『영숙』이라는 음조가 피아노의 바음을 두 번 울린 것 같이, 온 몸과 영(靈) 속에서 미묘한 선율(旋律)을 일으키더니, 연기 위에 비친 그림처럼 사라졌다.

머릿속은 혼탁하여 졌다. 영숙의 그림자는 안개속으로 보 이는 동상처럼 희미한 윤곽만 보이더니, 동에서 모여 들었 다 서로 사라지고 천리 밖에서 달려 왔다. 만리 저쪽으로 달려가는 천가지 만가지의 뜻하지 않든 연상(聯想)이 번개와 같이 꼬리를 잇고 인화(燐火)와 같이 사라지는 것이 밀리고 휩싸이어 간 곳 모르게 없어지었다.

춘우는 다시 영숙의 환영을 찾아 내려고 안공(眼孔)에 펼쳐 있는 무한한 황야를 방황하듯 한 생각으로써 헤매였으나 다 시는 찾아낼 수가 없고 구름을 손가락으로 잡으려는 것처럼 잡힐 듯 하고도 자세히 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일어나우.』

하는 동생의 소리에 그의 눈은 번쩍 떠지었다. 선명한 광 선이 안공으로 기어들고, 찬란한 세계가 다시 눈 앞에 있으 나, 감았던 그 속에 비하여 거북할만치 좁고, 영숙의 환영이 꿈같이 사라지고 놓여있는 세간과 걸려있는 옷이 눈 앞에 있어 똑똑한 반영을 그의 눈속에 비출때 그의 마음을 섭섭 과 무미함으로 찼었다.

『으응.』

대답은 하였으나, 일어나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도 생각의 나머지가 그의 몸을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실로 잡아때 놓 은 것 같았다.

춘우는 다시 어제 저녁이 눈에 보인다. 어제 저녁 자기 친 구 박창하(朴昌夏)의 집에 갔을 때, 그는 십년이나 잊어버렸 던 영숙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가 주인과 작별을 하고 일 어서려 할 때 누군인지 마침 사랑으로 들어서는 사람 둘이 있었다. 산뜻한 양복에 채프린 수염을 기르고 자랑스러운 어조로 주인에게 농담 비슷하게 인사를 붙이는 젊은 신사의 뒤를 이어 들어오는 사람이 십년 전에 자기와 함께 소학교 에 다니던 영숙이었다. 머리를 쪽 지어 비취 옥 비녀를 꽂 고, 발에는 반쯤 지루 신은듯한 버선에 미색 마른신을 신었 다. 힐끗 이것을 바라보는 춘우의 머리 속에는 십년이나 끊 어졌던 기억이 다시 이어지는 듯하여, 한참이나 영숙을 바 라보았다. 영숙은 춘우가 쳐다 보는 얼굴에 기억이 있는지 잠깐 곁눈으로 유난히 살피려다가 춘우의 시선과 자기의 시 선이 마주칠 때에 그는 얼굴을 돌리었었다.

춘우는 주인과 문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인사를 하고 집으 로 오려다가, 다시 돌아서서 물었다.

『그게 누군가?』

『웨 그러나?』

『글세 말일세.』

『미인이지?』

『괜찮아, 대관절 누구야?』

『남자는 우리 친척되는 사람인데, 전라도 부자지, 그 여자 는 그의 첩이라네.

『그런데 어찌 왔나?』

『응, 그것은 오늘 저녁에 나하고 활동사진 구경을 가자고 약속을 하여놓기 때문에 그래 왔나보이.』

『활동사진? 무슨 좋은 사진이 왔나? 나도 한몫 끼세 그 려?』

춘우는 실없는 말로 물었다.

『그러게 그려, 어려울 것 무엇 있나.』

『하지만, 그만두겠네. 여자 꽁무니를 쫓아 가는것 같아서, 그 남편도 좀 미안히 생각할 터이고 내 인격에 관계가 되 네. 미인 아내 가진 사람의 불안한 심리라니……』

『하하, 그렇지만, 자기는 누구에게던지 자랑을 하려고 애 를 쓴다네, 같이다니면 어깨가 으쓱하여지는 모양야.』

『집은 어디라노?』

『관철동 ○○번지에다가 치가를 하였지.』

『언제든지 동거를 하나?』

창하는 춘우가 너무 자세히 묻는 것이 의외의 일이요, 여 자의 본성을 구지여 알고 싶어 하는 것도 남자의 특성인 것 을 알기는 알지마는, 별로 남의 일을 길게 물어보지 않던 춘우가 이상하게도 길게 물어보는 것이 이상하여,

『그것은 왜 그렇게 자세히 묻나.』

하며 수상히 여기는 눈으로 춘우를 보자, 춘우도 샅샅히 묻고는 싶지마는, 너무 길게 물으면 창하에게도 쓸데없는 의심을 받을가 해서

『글세 말야.』

하고 슬쩍 말을 모호하게 얼버무려 버리고, 다시 모자 챙 을 만지는 체 하며,

『자 그러면, 내일이라도 또 만나세.』

인사를 한 뒤, 집으로 향하여 온다.

여름 밤, 후틋한 바람이 이슬에 젖어, 온 종일 뜨거운 볕에 탈듯하던 길에 깔린 모래를 적시고, 멀고 가까운 곳에 우뚝 우뚝 서 있는 높다란 나무들은 은가루를 뿌린듯 한 푸른 하 늘의 별들을 비질하듯이,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한다. 그는 안동의 별궁 앞 넓은 뜰에 나섰다. 그가 영숙을 본 뒤부터 웬일인지 세상이 또다시 꿈같다. 생각하면, 지금으로부터 십 여년이란 긴 세월이 그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가 소 학교 삼년급에 다닐 때 영숙은 같은 학교 여자부 이학년에 다니었었다. 지금은 자기 남편과 같이 내지로 유학을 가고 있지 아니한 자기 누님과 함께 날마다 학교에 갈 때면 언제 든지 같이 가고, 또 학교에서 돌아올 때에도 같이 오는 사 람은 영숙이었다. 그리고, 일요일이나 혹은 경축일에도 빠지 지 않고 자기집을 찾아오는 사람도 영숙이었다.

춘우는 토막토막으로 생각나던 옛 기억을 눈앞 허공에다 그리면서, 전동 길로 나려 간다.

춘우는 어느때든가 외조모가 오시었다가 춘우와 영숙이가 방안에서 노는 것을 보시고, 자애스러운 웃음을 띄우시고, 가만히 춘우 곁으로 오시더니, 춘우의 귀에다 대시고 『너 영숙이에게 장가가련』하시던 말이 생각나고 그 말을 듣고 는, 웬일인지 온 전신에 피가 끓는 것도 같고, 모두 한꺼번 에 식어 버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얼굴이 술취한 사람 같이 화끈화끈 하여지며, 부끄러워서 그대로 할머니 무릎 아래 아무말 없이 어리광처럼 딩구던 생각이 난다.

또 그러다가는 어떤 날 영숙이가 누님을 찾아 왔다가, 셋 이서 뒷동산에 돋자리를 펴놓고서, 놀 때 영숙이가 누님을 바라 보며, 댕기가 풀어진 머리를 땋느라고 불처럼 빨간 제 비부리 새댕기를 매면서,

『그런데, 저 우리 어머니가 어저께 저녁에 우리 아주머니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나를 공부나 잘 시켜서, 돈 많은 집 으로 시집을 보낸대?』

하고, 철없는 생각에 말은 하였으나, 그래도 시집가는 것이 부끄럽던지 얼굴빛이 조금 불그레 하여지든것이 생각난다.

그때의 춘우 마음은 이상하게 비어지는듯 하였다. 그 말 한 마디에 자기 가슴 속에 있던 무엇을 영숙 어머니가 뺏어가 는것 같고 자기 가슴 속에 찼던 영숙의 무엇이 도루 영숙에 게로 가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영숙이가 누님더러

『나는 공부는 더 했으면 좋겠지마는, 다른데로 시집가기 는 싫여.』

하고, 수연한 얼굴로 한참 있다가, 다시 말을 이어

『나는 언제든지 나의 집에서 살고 싶드라, 너의 집에는 돈이 없니?』

하던 말이 지금 춘우의 가슴을 새삼스럽게 찌리는 듯 하는 옛날 기억이다.

그것도 벌써 십년이라는 옛날로 돌아가고 말았다. 지금 그 것을 붙잡으려는 것도 바닷가에서 무지개를 쫓는 어린애와 같고, 벼개 위에 꿈을 따라가려는 것과 같이 허무하다. 옛날 은 시간을 타고 무한한 영겁으로 돌아가고 오늘에 있는 것 은 몽롱한 옛 기억이 조그마한 뇌막(腦膜)에서 비치었다 살 아졌다 할뿐이다.

춘우는 다시 종로 네거리를 가로질러 황금정 통으로 내려 왔다. 더위를 못 이기여, 교의들을 길거리에 놓고서, 부채질 을 하고 앉았는 사람, 길거리 위에는 이쪽에서 저쪽, 저쪽에 서 이쪽으로 흘러갔다. 흘러오는 길가는 무리들이 여름의 환락장인 경성 시가에 찼다. 공중에서 공중으로 물 묻은 왕 굴을 아기를 매어 놓은듯한 전기선 줄은 불빛에 번쩍거리 며, 왔다가는 가고 갔다가는 오는 전차는 그 입으로 사람의 무리를 삼키었다 뱉았다 한다. 황금정 모퉁이에는 새로이 카페가 생기었다. 얼굴에 분칠을 하고, 앞에다 하얀 앞치마 를 입은 여자뽀이들이 문간에 나와서 유행하는 노래를 부르 고 있다. 춘우는 더위를 못이겨 갑갑한 가슴을 식혀 불가 하여, 그 카페로 들어가서, 맥주를 청하였다.

춘우는 두어병을 혼자 마시었다. 뱃속에서 혈관으로 스며 드는 술기운은 춘우의 마음을 짜르르 하게 하는 듯 하기도 하고, 눈 같이 녹이는 듯 하기도 하다가, 갑자기 정신이 나 게 꽉 찌리는 것 같기도 하였다. 눈앞에 있는 것이 모두 아 지랑이가 끼어 보이고 공중에는 오색 무지개가 서서 모든 것을 아롱지게 한다. 그 눈앞에는 다시 영숙이가 보인다. 몸 에 찬란한 보석으로 꾸민 얇은 옷을 입고, 창부와 같이 사 람을 미혹시키는 듯한 웃음을 생긋생긋 웃으면서, 자기를 보는 영숙이가 눈앞에 보였다가 다시 가까이 와, 그의 몸에 보들보들한 살과 자기 살 사이에서 구김살지었다. 사근거리 였다 하는 얇은 옷 하나만 가린 두 육체를 서로 대는듯 하 기도 하였다. 그는 갑자기 분개한 생각이 난 듯이 입술로만 비쭉 웃고,

『남의 첩이 되었다?』

하며, 손을 테블위에 탁 놓으면서

『첩! 돈만 주면 딸도 팔고 부모도 팔만치, 세상은 타락을 하였다!』

하고는, 사방을 돌아다보며, 누가 자기의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사람이 있나 하였다. 그는 다시 벌떡 일어나, 셈 을 하여 주고, 문밖으로 나왔다. 그는 오던 길을 다시 종로 로 향해갔다. 종로 네거리에는 야시로 법석이요, 휘황하게 켜있는 전등불 빛이 암흑한 공기를 울리면서 멀리멀리 연극 장의 초객하는 군악 소리가 들려온다.

센티멘탈한 그라리넷 소리가 유난히 자기의 술기운 서린 가슴 속에 애상의 정서를 스며들게 하는 듯 하고, 분으로 탈들을 쓰고, 먹으로 그린듯한 얼굴에 힘없이 흐늑거리는 몸들이 정처없이 밀려 다니는 듯한 무리 틈에 섞인 자기도 끝없는 침륜(沈淪)으로 흘러가는 듯하였다. 그의 발은 자기 도 모르게 자기를 이끌어 단성사(團成社) 문 앞까지 갔다 놓 았다. 광고를 써붙인 현판과 그림을 그리어 놓은 간판이 서 있는 앞에 자기가 섰을 때, 입장권을 사는 무리틈을 끼여, 저쪽 정문속 깜깜한 극장 안에서는 길을 찾고, 얌전하게 새 여나오는 영숙의 향기가 자기의 혼을 이끌어다가, 어디인지 는 알 수 없으나, 자기 머리 속에서 추상되는 그 영숙의 앉 은 자리로 끌어다 놓은듯 하였다. 그는 입장권을 사가지고 문앞에 앉은 문지키는 이에게 그 표를 내어줄 때 그의 입 가장자리에는 알 수 없는 웃음이 나타났다. 그의 웃음은 자 기를 비웃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는 속으로

『부끄러움 모르는 놈.』

이라는 생각이 나며,

『내가 아까 창하더라 무엇이라 하였나? 여자 꽁무니를 쫓 아다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 하였지.』

그러나, 그는 들어갔다. 벌써 사진을 영사하는 중이었다.

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이리갔다 저리 갔다 하며 얼핏 사진 이 끝나기만 기다릴 때 한번 나타났다 한번 바꾸이는 사진 의 마디와 마딧 사이 몇분 안되는것이 말할 수 없이 지루하 여지는 듯 하였다. 그는 사진은 보지도 않으면서 다만 머릿 속으로 수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변하였을까? 지금 자기가 얼마나 만족을 가지고 있고 어떠한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갈까.』

하다가, 갑자기 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며,

『내가 미친 사람이지, 인생관이 다 무엇이냐. 그에게 허영 과 또는 음일(淫逸)을 만족하게 하는데 제일 무기(武器)인 돈이 자기를 지배할 뿐이다. 우리 인생이 모두 그런것 같이 자기가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돈이 자기를 부리는 것이다.

그에게 무슨 진실이 있고 정의감(正義感)이 있고 뜻이 있고 기운이 있으랴. 취생, 몽사, 타락의 저 밑에서 가는 생명의 꼼지락 거릴 뿐이겠지?』

할 때, 초인종이 요란히 울면서, 넷째권과 다섯째권이 갈리 었다. 춘우는 또다시 생각하였다.

『돈은 결코 전능한건 아니다. 우리 사람에게 불완전한 곳 이 있기에 돈에게 노예가 되는 것이다. 옛날 영숙은 반드시 오늘이 있었을 것을 아지 못하였을 것과 같이 또한 장래에 닥쳐올 것이 어떠한 것을 아지 못하리라.』

그는 활동사진 한가지가 끝이 나고 불이 켜지며 암흑이 끊 어지고 광명이 이어질 때 수백의 머리가 눈앞에서 움즉거리 며 기침 소리, 웅얼대는 소리가 담배 연기 자욱한 극장에 가득히 찬 것을 들었다. 그는 기둥을 가려 서서 이등에 앉 아 있는 영숙을 보았다. 영숙은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조금도 움직거리지 아니하고, 무대위에 켜 있는 굳 센 광선이 비추이는 전깃불 하나만 내려다 보고 앉았다가, 때때 그의 둘째 손가락과 셋째 손가락에 끼었던 담배만 한 모금씩 피울뿐이다.

춘우는 유심히 영숙을 쳐다보다가, 다시 안보는 척 고개를 돌리고서 발로 땅을 파면서,

『재가 여태까지 기억할까? 물론 나를 기억하기는 어려울 일일테지. 그러나, 어디 한번 만나 보고 말을 들어보는 것도 좋기는 좋은 일이야?』

할 때, 다 시종이 울며 불이 꺼지고 사진이 비치었다. 그때 그는 그 곳에 들어와 선것이 우습게 무미한 것을 깨닫고서, 얼른 밖으로 나가지 하고, 집으로 향하여 왔다.

[편집]

춘우가 자리 속에서 이렇게 어제 일을 생각할 때, 관철동 영숙의 집 안방 미닫이가 열리며,

『어멈, 세숫물 놓게!』

하는 소리가 마당에 묵직한 돌멩이를 떨어뜨리는 것 같이 똑똑히 들린다.

영숙은 다시 누우면서, 허리에 깔린 홋이불을 한발로 탁 차서 다리 위에 걸치게 하고, 다리 하나를 세웠다. 한참이나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멀거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때,

『세숫물 놓았어요.』

하는 소리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두 눈만 깜박깜박 하고 누웠는데, 그의 기억에는 또 다시 어제 저녁때 만났던 춘우 가 타오르는 담배 연기 모양으로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십 오년이나 떨어졌었다. 만나는 영숙의 마음이 어렸을 때 마 음이 아니련마는, 그의 마음은 그리운 옛날로 돌아가, 재미 있던 그때를 다시 생각하니, 그때가 그리운 동시에 또한 그 때에 똑 같이 그 재미있는 때를 누리던 춘우가 한번 만나보 고 싶었다.

영숙은 다시 하인의 재촉하는 소리에 몸을 이르키려고 홋 이불을 걷고, 고쟁이 바람으로 미닫이에 기대 앉아, 흐트러 진 머리를 두 손으로 모두어 아무렇게나 쪽지고서, 두 다리 를 쭉 뻗고 옆에 놓인 담배를 끌어 잡아 붙여 물더니 밖을 두어번 살피고 아무 소리 없이 앉았다가,

『나리께서 어디 가신다고 나가셨니?』

하고, 마루를 훔치는 계집애 종년에게 묻는다.

『제가 압니까. 어디 가신 것을!』

걸레를 손에 든채 계집애는 댕기를 고개 넘어로 마룻 바닥 에다 질질 끌면서, 대답을 한다.

『아무 말씀도 없이 나가셨어?』

『네, 별 말씀 없어요.』

『언제 들어오신단 말씀도 없어?』

『곧 다녀 오신다나봐요.』

『제동 가신다지 않든?』

『박주사 나리 댁에요?』

『그래.』

할 즈음, 안방에서 나이가 한 오십 되어 보이는 목소리로 그의 어머니가 말꼬리를 붙여서,

『그래, 창하에게 갔나 보다. 서울 오면 그집 밖에 가는 곳 이 없으니까……』

『무엇이라 하고 갔이요?』

『난들 알 수 있니. 잠간 다녀오마 갔으니까.』

영숙은 다시 앞치마를 두르더니, 수건을 들고서, 마루 앞으 로 나와서 세수를 시작하였다. 햇빛에 번쩍번쩍 하는 놋대 야에 남긴물이 눈이 부시도록 울멍줄멍 하는 그속에 영숙은 매끈한 두 손을 잠그고서, 한참이나 아무 말도 없이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때 영숙의 머릿속에는 어제저녁에 본 춘우 의 그림자가 다시 나타나며, 그 머릿속에 있던 그림자가 대 얏속에 비치는 듯 하였다. 뜨거운 혈관 속으로 스미어 드는 차디찬 물 기운이 정신을 새롭게 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서 물 한번을 떴다. 가냘픈 손 사이로 흘러 새는 물을 옥으 로 만든 표주박 같은 손에다 들고서 들여다 볼 때, 그 속에 도 춘우가 있어 자기를 바라라보는 듯 하였다. 그러나, 그것 을 오래 들여다 볼 수 없게 모두 흘러 새려 하자 영숙은 그 대로 자기 얼굴에 갖다 대었다. 석경에 비친 그림자가 그 석경이 깨어져 부서질 때, 없어지는 것 같이 얼굴에 닿인 물이 방울이 되고, 줄기가 되어 대야에 떨어질 때 , 춘우의 그림자는 없어지고 말았다. 자기의 눈에 닿고 코에 닿고 또 입에 닿았을 때, 춘우는 사라지었다.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서 경대 앞에 앉아, 머리를 풀고 빗질을 한 뒤에, 다 시 머리를 쪽지고, 분을 바른 후 단장을 곱게 하고, 손을 씻 었다. 그러고는 옷을 갈아입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안방에는 자기 어머니가 담배를 피워 물고 아랫목에 앉아 있고, 윗목에서는 침모가 옷을 짓는다. 영숙을 본 어머니는 치마 앞을 휩싸고, 옆으로 자리를 비키고서 아랫목 한가운 데로 자리를 옮기니까, 영숙은 앉으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무엇이 그리 갑갑한지, 입김을 한번 후 내쉬더니,

『에그, 더운데 마루로 나가 앉어야지.』

하고, 다시 마루로 나와서, 뒤창에 기대 앉는다. 그러자, 문 간으로부터 사내들의 목소리가 나며 들어오는 사람은 영숙 의 남편과 박창하였다. 남편되는 사람은 단장을 두르면서 마당 한 가운데로 들어서며,

『에 더워.』

하고, 웃옷을 벗으니까, 영숙은 마루 끝으로 나와서, 웃옷 을 받아서 안방으로 전하고, 다시 창하에게 향하여 능난한 말소리로

『어서 오셔요. 어제저녁에는 왜 그렇게 먼저 가셨어요?』

하고, 웃음을 머금으니까, 박창하도 싱긋 웃으면서,

『제가 먼저 갔습니까. 두분이 나중 오셨지. 웬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하셔요. 한참 기다리다 못하여 그대로 와버렸 습니다.』

하며, 다시 안방에서 나오는 영숙의 어머니를 보고 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

영숙의 어머니는 두어개 빠진 앞니를 두 입술사이로 내어 보이며,

『어서 오시우, 그동안에는 왜 그렇게 한번도 오지 않았단 말요. 어서 올라와요.』

『네, 올라가죠. 자연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는 일이야 없지마는, 공연히 분주해서……』

하며, 마루 끝에 올라섰다. 영숙의 남편 되는 사람도 올라 와 앉으며,

『오늘 날이 퍽 덥소, 우리 배나 타러 한강으로 갈까?』

하고, 와이셔츠 가슴을 손가락으로 집어 훌훌 터니까, 계집 애종이 부채를 들고, 뒤에 가서 부친다. 창하는 두다리를 세 우고 앉으면서,

『한강? 좋지 좋와, 하지만, 지금 같아서는 꼼짝도 하기 싫 으니, 자네 집에서 술이나 좋은 놈으로 한잔 주게.』

『그러죠. 그거야 못하겠소만, 대관절……』

하고, 고개를 돌이키어 영숙을 보며,

『아침 먹었소?』

하는 목소리에 정이 묻었다.

『네, 아직 먹지 않았어요.』

하고, 단정한, 부끄러워하는 듯한 그의 태도에 영숙의 독특 한 아릿따운 점이 있다.

이말 하는 틈을 타서 박창하는 주인 노파를 다시 보며,

『마나님께서는 저에게 중매를 들어 주신다 하더니, 여태 까지 웬일이십니까?』

하고, 빙글빙글 웃는다. 노파도 양껍질로 만든 주발북을 뚜 드리는 듯이 입속에서 울려나오는 웃음을 웃으면서,

『하하하, 나같은 옛날 사람이 어떻게 당신같은 신식 양반 의 중매를 할 수가 있겠소, 옛날 계집애는 물론 싫으실 터 이니까, 마음에 드는 여학생이나 하나 얻어 사시구려, 시방 세상에는 부모가 일이 없어, 계집애나 사내나 모두 저 좋으 면 사는 것이지.』

『마나님도 그런 줄을 아십니다 그려. 그렇지만, 저는 여학 생도 싫고 들어앉은 여자도 싫고 아무것도 싫습니다. 저는 웬일인지, 마음에 드는 여자는 아직까지 한사람도 없어요.

정말 저를 알아주는 여자만 있으면, 어떤 여자라도 좋지요, 여학생들은 별다른 사람인가요.』

『저런 말 좀 보게, 남들은 저의 처하고 이혼들까지 하고 여학생들과 살려고 애들을 쓰는데, 그래, 여학생이 싫단 말 요. 지금은 옛날과 달라서, 딸들의 덕을 보는 세상애요. 딸 공부만 시켜놓으면 그 덕에 먹고 살수 있는 세상이라우 ……』

창하는 껄걸 웃으며

『덕 보는 것도 좋지만 사람들이 돼야죠. 제생각 같아서는 딸 덕 보려고 공부시키지는 않겠습니다. 』

하고, 다시 말꼬리를 돌려서,

『여보게, 철수(喆壽), 아침 주마고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 으면, 밥을 주던지 술을 주던지 하게, 사람 배고파 못 견디 겠네……』

하며, 영숙의 남편을 본다. 철수는 무슨 궁리를 하는 사람 처럼 멀거니 앉았다가,

『그러죠.』

하고, 다시 영숙을 보며,

『밥상을 좀 차려 오구려. 그러고 술도 가져오구.』

하며, 점잔을 빼듯이 두 다리를 뻗는다. 이 말을 들은 영숙 은 다시 자기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부엌을 향하 여 소리를 지르며,

『얘, 상가져오너라.』

하고, 일어서더니, 반침 속에서 술을 꺼내어 주전자에다 따 라 놓는다.

창하는 주인을 다시 보며,

『그래, 자네가 오늘 한강 뱃놀이 한턱을 낼 거란 말인 가?』

하니까, 주인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내죠, 내요.』

하고, 무릎을 쓰다듬는다.

『그런데, 자네 내외분이 노는데, 참 참례하기가 어렵네 그 려. 나야말로 무슨 재미가 있어야지.』

이말을 들은 영숙은 손에 들은 태극선을 마루 위에 놓으면서,

『왜요?』

하고, 생긋생긋 웃으며 묻는다.

『나도 얼른 장가를 들던지 해야지……』

말이 끊어지기도 전에 철수는 고만 창하의 말을 끊어서

『왜, 좋아하는 기생하나 불러가지고 가십시다 그려. 기생 허구 잘 노시죠!』

『기생! 또 기생 이야기가 나오는군! 그렇지만, 기생허고 자네 내외허고 같이 놀수야 있나 나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자네들에게……』

할 즈음, 하인이 상을 갖다 놓았다. 철수와 창하는 겸상을 하고, 영숙은 외상을 받았다.

식사가 시작되기 전에 술이 두어순 돌았다. 술 잘 먹지도 못하는 창하가 술을 좋아는하여 달라기는 하였으나, 몇잔 먹지 않아서 얼굴이 빨개지었다. 그러더니 잔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창하는 언제던지 철수의 귀에 듣기 싫은 소리를 잘하는 사람이라, 또 꼭꼭 꼬집는 말이 나온다.

『자네는 참 행복스러운 사람일세.』

철수는 언제든지 듣는 소리지만, 들을 적마다 듣기가 싫은 것을 억지로 참느라고 얼굴을 찌푸린다.

『무엇이요, 행복에요. 제가 행복에요?』

『그럼, 행복이 아니고 무엇인가? 집에 많은 재산이 있겠 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겠다, 또는 영숙씨 같은이가 계시겠다.』

『듣기 싫소. 그것은 아저씨가 나의 마음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지, 정말 나는 불행한 사람이라우, 나같이 불행한 사 람이 다시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소리 말게. 자네가 그러면, 이 세상에 다른 사람들 은 벌써 죽었겠네. 자네는 아직 세상 경험이 적어. 나도 그 렇지만, 아직 고생을 몰라. 참 세상맛을 모르는 사람야.』

『기가 막혀. 세상에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야죠. 참으로 나의 마음아픈 것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요.』

말이 떨어지려 할 즈음 밭곁에서 영숙의 딸을 업은 계집애 가 들어와서 마당 앞에 서니까 등에 업힌 영숙의 딸이 토실 토실한 손을 버리고 모란꽃잎 같이 붉은 입을 벌리고 벙긋 벙긋 웃으면서

『엄마, 엄마.』

하고, 달려들려 한다. 마루에 앉았던 사람들은 모두 청아 (靑兒)를 바라보자, 창하는 젓가락 든 손으로,

『어꾸, 청아야 청아, 어디 어디.』

얼를때마다 벙긋벙긋 웃는데, 영숙도 두 손벽을 탁 치고 활짝 벌리며 안을듯이 얼른다. 청아는 그것을 보더니, 한층 더 발버둥질을 치며, 자기를 업은 계집애 등에서 빠져나가 려고 야단이다. 이것을 보고 영숙의 어머니는

『이리 오너라. 어미 밥좀 먹게.』

하고, 두 손을 내미니까, 계집애는 어린애를 업은채 영숙의 어머니 편으로 향하여 갔다. 청아는 자기를 업은 계집애가 저의 할머니 편으로 데려가지 않고 할머니 편으로 가는 것 이 싫다는 뜻인지, 소리를 내어 운다. 어린애 우는 소리를 듣고서, 영숙은 자기를 따르는것이 귀여워 그랬든지, 얼른 청아편으로 가며,

『오 이리 온. 울지 말고……』

하며, 받아서 안고, 다시 상 앞자리로 와 않았다. 철수는 영숙이가 어린애를 안고 앉은 것이 자기 생활에 만족함을 주는 듯이 재미 아는 눈으로 한참 바라보다가,

『저 코 좀 바라. 씻어라, 씻어.』

하며, 청아를 들여다 본다. 영숙은 청아이 코를 씻기고 아 를 번쩍 들며

『자, 아버지에게 가 보아라.』

하고, 내미니까 청아는 이마앞에 내리가린 머리털을 팔랑 팔랑하며,

『해해』

웃고 아버지에게로 달려든다.

철수는 자기 말을 팔위에 안고 까불까불 하며,

『어디 보세. 애, 참 이쁘다. 내가 누구냐?』

하니까, 청아는 아버지의 두 뺨을 손으로 문지르면서,

『아빠!』

하며, 재롱을 부린다. 이 소리를 들은 집안사람은 모두 웃 었다. 더구나 안방 문앞에 앉았던 할머니는

『저것 좀 봐. 그래도 아버지를 알아 보네.』

하며, 깔깔거린다. 철수는 어린애를 가슴에다 안으며, 기막 히는 듯한 말로.

『네가 네 아범을 알아보니, 다행이다.』

하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영숙은 다시 어린애편으로 손을 내밀면서,

『이리 온, 자, 젖 주께, 젖.』

하니까, 청아는 다시 안기었던 아버지를 때 밀치고, 어머니 편으로 왔다. 영숙은 청아에게 젖꼭지를 물리고서 다시 밥 먹기 시작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난 것처럼 박창하를 보면서

『참 어제 저녁때 댁에서 만나본 그 어른 성함이 이춘우씨 아니요?』

하며, 주인 한번 보고, 창하의 대답을 기다린다. 창하는 신 기하다는 듯이 영숙을 바라보며

『그것은 어떻게 아십니까?』

『글쎄이춘우씨죠?』

『그래요, 맞았어요.』

『어려서 같이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그것을 몰라요?』

박창하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네, 그러셔요.』

영숙은 다시,

『그이 누님이 있지요?』

『있죠.』

『지금 무엇 하나요.』

『시집가서 자기 남편하고 동경 유학갔지요.』

『동경요? 그러고, 이춘우씨 그이는 무엇해요.』

『하는 것 별로 없어요, 집에서 놀죠. 그동안 시골 다녀 왔 지요.』

『네, 참 오래간만에 만나뵈었어요. 어렸을 적에 그의 집 동산에서 소꿉질하던 생각이 여태까지 환하게 나는데, 저는 벌써 자식까지 났으니. 그이는 장가나 드셨나요.』

『장가가 다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동경서부터 장가 안가 기로 나하고 동맹을 하였는데요.』

『그것은 왜요?』

『다 까닭이 있지요. 요다음에 길게 이야기 하지요.』

할 때, 변소에를 갔었는지, 뒤창 밖으로 들어오던 그 어머니가

『누구 이야기를 그렇게 하우. 춘우라니 많이 들은듯한 이 름이야?』

하며, 두 사람을 본다. 영숙은 얼른 반가운 사람의 소식을 전하려는 듯이,

『왜 어머니 춘우라고 나 학교 다닐 때 놀러 다니는 사람 몰르시우, 우리 석다리(石橋)살제.』

어머니는 눈을 끔적끔적 하고 한참 생각하더니,

『오, 옳지, 옳지, 그 누이가 있겠다. 그래, 그애가 어떻게 되었단말야.』

『그이를 어제 이 어른 댁에서 만났어요.』

하니까, 늙은이 마음에도 옛사람이 그립던지,

『박주사는 그애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고, 여전히 옛날로만 알고, 그애 그애 한다.

『동경 있을 때부터 친했어요. 아주 친형제처럼 지냈는데요.』

『동경 계실 때부터, 응 그것참 한번 만나 보았으면 좋겠 군. 한번 놀러 오라시우. 저 석다리께 살던 김의관 집이라면 알터니까, 퍽 자랐을걸.』

하니까, 영숙은 깔깔 웃으며

『퍽 자란게 무엇에요. 나이가 몇인데 나보다도 두 살이 위가 아네요. 어머니는 여태까지 어린애로 생각을 하시는구려.』

『내게 대면 어린애지. 참 못 본지가 십년이나 되네……』

하며, 담배를 담는다.

철수는 술기운이 올라와 익어가는 자두빛 같은 얼굴로 뒷 문 밖을 내다보면서 한없이 담배만 피우고 있다.

창하는 영숙 어머니 말에 대답을 하면서 젓가락으로 상에 있는 반찬을 집어 씹는다.

『데리고 오죠. 나는 그런 줄을 몰랐습니다 그려, 그러세요.』

하고, 젓가락을 상에다 놓으면서 밖에만 내다보는 철수를 돌아보더니

『이 사람아 밥 먹다 말고 무엇을 그렇게 보나! 어서 한강 뱃놀이나 나가세. 내가 「뽀트」도 잘 젓지, 그 대신 술이나 많이 사내게.』

하며, 기염을 토한다. 철수는 비웃는 듯이 꺼먼 수염난 입 술을 빙긋하면서,

『한잔만 먹어도 새빨개지면서 술은 퍽 사달래우, 염려 말 우, 그만한 술은 얼마든지 사드리께.』

하며, 상을 물리고 벌떡 일어나며,

『옷 입으슈.』

하고, 영숙을 보며 양복조끼를 아래로 잡아다린다.

[편집]

세사람이 문밖으로 나섰다. 뜨거운 볕이 내리쪼여 땅바닥 에 깔린 하얀 모래에 반사되는 것이 몹시도 눈부시게 한다.

청년회를 거치어, 종로 네거리에서 전차를 타고 신용산을 향하여 나간다. 전차 속에는 별로 사람이 적고, 동쪽에 볕을 가리는 「뿔라인드」가 닫혀 있는 대신에 서쪽은 문을 모조 리 열어놓아 전차가 달아날적 마다 시원한 바람이 옷속으로 기어 들고 머리위에 달린 손잡이는 비틀거리는 사람들을 거 꾸로 매어 단것처럼 이리 흔들 저리 흔들한다.

철수는 두 손을 단장위에 모우고서 정신없이 창밖을 내다 보고 영숙은 그 옆에 앉아서 가끔 가끔 입가를 수건으로 씻 으며 두 눈을 또렷또렷하게 굴린다. 그리고, 창하는 맥고모 자를 뒤로 제치고 그 두 사람 앞에 손잡이에 손을 걸고 섰다.

전차는 또 다시 속력을 내어 달아나다가 섰다. 전차가 황 금정 네거리에 섰을 때 저쪽 광화문 쪽에서 오는 전차가 닦 아 와서 영숙의 전차와 나란히 섰을 때, 영숙은 앉았던 몸 을 갑자기 일으키려다가, 다시 얼른 앉으며, 손가락으로 그 쪽 차를 한번 가리키더니, 이채가 도는 눈으로 무엇을 의뢰 하는 것처럼 창하의 얼굴을 치어다 보았다. 그때 고개를 그 쪽으로 돌린 창하는

『여보게 춘우!』

하고, 저쪽 창으로 가까이 가서 소리를 지르며,

『어디 갔다 오나?』

하였다. 저쪽 차에 탔던 춘우는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벌 떡 일어나서, 세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어디 가나. 나는 수철리 좀 다녀오는 길일세.』

할 때, 전차는 땡땡하는 신호를 치었다. 땡땡 하는 소리를 들은 영숙은 애석한듯이 춘우만 바라보고 앉았는데, 창하는

『여보게 여보게, 이 차로 좀 오게. 내가 할 말이 있으니』

하며, 서두르는 손짓으로 춘우를 불렀다. 춘우는 어느덧 저 쪽 차에서 이쪽 차로 옮겨 탔다. 영숙이 마음은 기다리던 좋은 소식을 전하는 편지 봉투를 뜯으려는 사람처럼 마음 속의 의심과 기쁨이 자기 가슴을 채우고 춘우가 자기 앞에 설 때, 이상하게도 무슨 중대한 문제가 이 시간에 발생되는 것 같았다.

청하는 와서 선 춘우를 보더니,

『수철리는 왜 갔다 오나.』

하며, 손에 들었던 부채로서 자기 얼굴을 부친다.

춘우는 반가운 사람을 옆에 두고 말을 하지 않으나, 자기 몸의 영숙에게 향한 편에는 영숙이 기운이 비오려는 난 연 기가 땅으로 기어가는 것처럼 서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억 지로 기운을 진정하고,

『어머니 산소에.』

『응 산소에, 그렇겠지. 삼년이나 서울 있지 않았으니까.』

하고, 그러라는듯이 고개를 끄덕어리었다. 춘우는 주고 받 는 말로

『자네는 어디 가나?』

하고, 고개를 무의식하고 옆으로 돌리어 영숙과 철수를 보 고 다시 고개를 돌리었다.

『한강에 놀러 가네. 자네도 같이 가세 그려.』

『한강!』

춘우는 눈을 크게 뜨며, 유탕 기분이 자기 마음속에 반짝 하고 불이 켜진 것처럼 녹는듯한 웃음을 띠우며,

『좋이 그려, 그러나, 나는 싫으이』

눈치를 챈 창하는 선뜻 몸을 돌려 철수를 보더니,

『참, 인사하게.』

하고, 다시 춘우를 가리킨다.

춘우와 철수는 비로소 인사를 교환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인사를 하는 것을 보는 영숙의 마음은 춘우가 자기에게로 가까이 오는 걸 창벽을 하나 제쳐놓는 것 같았 고, 목욕하려는 사람이 맨 마지막 옷을 벗은 것 같았다. 그 와 반대로 철수가 춘우를 볼 때 공연한 질투의 마음이 생기 며 자기 첩 영숙의 행동이 때려주고 싶도록 야속한 듯 하였다.

철수는 점잖은 어조로 춘우를 가끔가끔 흘겨 보며,

『참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

하고, 엉덩이를 들었다 놓았다.

춘우도 따라서

『천만의 말씀……』

하고, 입속에다 말을 넣고 어물어물하여 버린 후

『댁이 시골이라시죠?』

고 말 끝을 채치는데는 정이 똑똑 묻어 떨어지는 듯 하였다.

『예, 본집은 시골이고……』

한 후 말이 없다. 전차는 조선은행 앞을 지내놓고, 남창미 정(南倉米町)에 다달으려 할때, 춘우는 무엇을 버리고 온 사 람처럼 전차 밖으로 나가려 하며,

『여기가 어딘가. 나는 내리겠네.』

학사 수와 창하는 이구동성으로

『아니요. 같이 가시지요. 별로 바쁘시지 않으셔요?』

하며, 창하는 춘우의 옷을 잡으며,

『같이 가세. 가야 할 일 없을 터이니.』

『별로 할 일은 없으나……』

『할일 없거던 가! 조금도 어떻게 생각지 말고……』

춘우는 못이기는 것처럼 그대로 섰었다. 네 사람은 한강으 로 가기로 결정이 되었을 때, 비로소 자리가 잡힌 듯이 입 들을 다물고 앉았었다. 춘우는 저쪽에 가서 영숙과 마주보 고 앉았게 되었다.

오늘 아침 자리 속에서 눈 감고 보던 영숙의 실물이 자기 앞에 앉아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낄 때, 그녀의 아릿다운 몸, 부드러운 살, 그 여자의 모든 아름 다운 것을 혼자 차지한 철수를 부러운 듯한 눈으로 보게 되 는 동시에 또는 조소하는 웃음이 입가장자리에 돌았다.

『너는 죄인이다. 사랑을 돈으로 산 사람이다.』

하는 생각이 나자, 갑자기 심사가 아니 날 수가 없었다.

신용산에서 내리어 네 사람은 「뽀트」한척을 얻었다. 그 때까지 영숙은 누구에게던지 말한마디를 한일이 없었다. 다 만 속으로 옆에 있는 이는 나의 남편 또 한 사람은 남편에 게 일가 되는 창하, 또 한 사람은 옛날에 같이 놀던 춘우, 이러한 생각 뿐이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다만 춘 우가 자기를 옛날에 같이 놀던 사람으로 아나 모르나 하는 의심과 알았으면 더욱 친절한 옛 친구를 다시 얻겠다는 생 각이 있을 뿐이었다.

네 사람은 배위에 올라갔다. 춘우와 창하는 노를 잡고 저 어나갔다. 한강 중류에 배를 띠우고 푸른 공단결 같은 물위 로 배를 쭉쭉 밀어 갈 때 마다 찢어지는 듯한 물결은 다시 합하여 평평하여진다. 영숙은 쪼이는 볕을 가리기 위하여 파라솔을 펴서 어깨에 걸고 힘없이 빙빙 돌리면서 푸른 산 을 바라보며 수도회사의 연기가 나는 굴뚝을 보다가 해가 춘우의 얼굴에 비칠 때 그는 가만이 파라솔로 볕을 가리워 주었다. 춘우와 창하는 신이 났다.

『엿샤.』

『엿샤.』

춘우가 한번 잡아다니었다가 놓고, 창하가 한번 잡아다니 었다 늦출 때 두 사람의 입에서 장단이 맞아 「엿샤」소리 가 나온다. 「뽀트」는 속력을 내어 간다. 철교 밑을 지내서 여의도 편으로 가다가 다시 한 바퀴 돌다가는,

『자, 고만 젓게. 그대로 띠워놓고 놀세.』

하는 창하의 소리에 춤추는 듯 하던 노는 정지하였다.

『참, 오래간만일세. 한강 뱃놀이도.』

춘우는 먼 곳을 둘러 보며, 옛날을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 로 말을 한다. 배는 힘없이 둥실둥실 떠나가다가, 다시 머리 를 돌린다. 창하와 춘우는 뱃머리의 도는 것을 막으려고 노 를 슬근슬근 저으면서 멀리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에 넥 타이와 머리카락을 날리인다.

『그 동안에 어디 다녀오셨어요?』

철수는 심심함을 깨뜨리기 위하여 말을 꺼내었다. 춘우는

『네?』

말대답을 하고서, 수연한 눈으로 먼 곳을 보더니 다시 웃 음을 띠우며 철수를 보았다. 공작을 털과 같이 윤기가 있는 까만 머리, 둥글고 약간 수척한 듯한 얼굴, 숱한 눈썹, 콧날 이 서지 못한 전형에 말할 때마다 실웃음을 치는듯한 작은 눈이 그때 철수의 눈속에 비추인 춘우이었으며, 먼저 춘우 가 철수의 마음을 풀어주듯 하는 것이 춘우의 폐부에서 울 려나오는 웃음과 심장을 적당하게 쓸어 빚는 듯한 두 입술 손으로 하얗게 비추이는 것이었다.

『어디를 갔다 오셨어요?』

『시골요.』

『어느 시골!』

『경상도 좀 다녀왔습니다. 공연히 돌아다녔죠.』

하며, 그것은 알아 무엇하느냐는 듯이 빙긋 웃으니까, 철수 도 따라 웃으며,

『무슨 일로요.』

할 때, 옆에 앉아서 이 말을 듣는 영숙도 춘우를 치어다보 며, 방글방글 웃는 것이 「나를 몰라보느냐」는 듯 하였다.

창하는 담배를 피우다가,

『압니다. 밥벌이 갔었다네.』

하고, 춘우와 철수를 웃는 눈으로 번갈아 본다. 말이 중단 되었다.

다시 춘우와 창하는 배를 젓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뱃머 리를 돌려서 인도교 아래로 향해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춘 우는 여러 사람의 뜻을 물으려고,

『어느 쪽으로 갈까요?』

하며, 젓던 노를 그치고 대답을 기다릴 때, 영숙은 얼핏

『저리로 가시죠.』

하며, 수건 든 손가락으로 한강신사(漢江神社) 아래쪽을 가 리키었다. 그러고는 춘우와 맨 처음으로 말을 교환하게 된 것이 우연하게 된 일이었으나, 가슴이 무거워진 듯하고, 하 기 어려운 일을 망설이다가, 이를 악물고 해버린 것처럼 가 슴을 문질러 내려앉히었다.

『저리로 가요.』

춘우도 대답을 하기는 하였으나, 바늘에 실꿰기 경주하는 아이가 바늘에 실을 꿸 것 같이 어렵고도 신기한 듯한 생각 이 났다. 그러면서 일층 힘이 나서 배를 저어간다. 열댓간 나갔다. 춘우의 팔은 이상하게도 끓는 피가 모여들고, 온 몸 에 힘이 얽히는 듯 하였다. 그는 종이조각을 저어가는 듯이 배가 가벼웠다.

『이 사람아 조금 천천히 젓게.』

창하는 이쪽 노를 저으면서 소리를 지른다.

『왜 그러나?』

춘우는 고개도 돌이키지 않으며 이렇게 대답을 한다.

『배가 돌아, 배가.』

창하는 젓던 노를 그치며 춘우의 등을 때린다.

『배가 돌아?』

춘우는 앞뒤를 돌아다보며 팔의 힘을 늦추고, 실없이 웃었 다. 창하도 빙그레 웃고 영숙도 방싯 웃는다. 다시 팔을 나 란히 하여, 천천히 저어나갈 때 영숙의 입에서는 노래가 나 온다.

배가 한 바퀴 산기슭 밑으로 돌고, 다시 녹음이 우거진 나 무 속을 지나갔다. 그래서, 햇빛이 가리인 바위 밑에 배는 닿았다.

『고만 쉬죠.』

영숙은 창하에게 말은 하면서 보기는 춘우를 보았다.

『그럴까요. 여기서 점심이나 잡숫죠.』

하는 말을 들은 철수는

『여기서 점심을 어떻게 먹나. 저리 올라가서 편안히 앉아 서 먹죠.』

하며, 등뒤에 솟아있어 보이지 않는 용금루(湧金樓) 요리집 을 가리킨다. 창하는

『글세, 자네 맘대로 하게 그려.』

『그럼 배를 그쪽으로 대슈.』

춘우는 노로 언덕을 짚어 배를 내밀고, 창하는 노를 들어 방향을 정하였다. 다시 두 노는 나래처럼 저어서 그쪽을 향 하였다.

네 사람은 배에서 내렸다. 춘우는 노를 강가에 꽂아 배를 거기에 매어놓고 맨 뒤에 그 뒤를 쫓아갈 때, 영숙이 창하 를 향하여

『그 어른이 전보다 몰라뵙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 얼굴 모습이 여태까지 있기는 있으나 얼굴이 여위고, 또 웬일인 지 눈 가장자리에 침울하고도 슬픈 기운이 돌아요.』

하며, 십여보 뒤떨어진 춘우를 잠간 돌아다 본다. 춘우의 눈과 마주치니까, 얼른 고개를 돌리었다.

창하는 단장으로 언덕을 짚으며,

『그 사람은 얼마전까지도 그렇지 않았는데, 근래와서 무 슨 생각을 하는지, 퍽 침울해 보여요. 사람은 너무 마음이 약해 걱정이지. 참 좋습니다. 또 재주도 있고요.』

할 때, 춘우가 뒤에서 급하게 뛰어올라오니까 두 사람의 말은 끝이 났다.

네 사람이 용금루에 올라 자리를 정하고 앉았을 때 춘우의 마음엔 삼년전 생각이 다시 난다.

『여보게 창하!』

춘우는 상하 좌우를 훑어보며,

『옛날 생각이 나네 그려.』

창하는,

『옛날……』

하고, 고개를 기웃하더니,

『옳지 생각도 나겠네.』

할 때, 춘우의 눈앞에는 지금으로부터 삼년 전에 이 자리 이 난간에 기대어 앉았던 미인하나가 생각된다. 자기가 시 골을 떠난다고 여러 친구들이 마지막으로 술 몇잔을 나누기 위하여 오기 모였을 때, 나이 어린 설성월(雪城月)이 처음에 는 자기 무릎에 손을 얹고서,

『인제 가시면 언제 오셔요?』

하며, 얼굴에는 눈물 어린 웃음을 억지로 웃더니, 그 다음에는

『가시지 마시지요. 여러 친구들과 그렇게 자별하게 노시 더니, 어떻게 혼자 떠나셔요. 여러 친구들도 섭섭히 여기시 는데.』

하다가는, 한참이나 푸른 강물을 내려다보더니, 난간에다가 고개를 숙이면서,

『저는 오늘 선생님을 마지막 보이는 것 같아요. 가지 않 으시지는 못하겠어요? 선생님.』

하고, 어린 두 눈에 진주같은 눈물을 흘리던 것이 생각된다.

그러나 춘우는 시골을 갔었다. 가고싶은 길을 떠난 것이 아니었지마는, 벌써 삼년이라는 시간을 지내는 오늘에 이 자리에 와서 보니, 난간에 떨어졌던 그의 눈물은 찾을 길이 없고, 그는 지금에 충청도 어디로 그의 정든이를 따라갔다 한다.

창하는 가만히 앉았다가 무엇을 깨달은 것 같이 춘우를 보 더니,

『참 여보게.』

하고, 부르다가 다시 영숙의 편을 향하여,

『왜 모르십니까? 아까 아침에 말씀까지 하시구.』

하니까, 춘우와 영숙 두 사람은 일제히 허리가 구부러지고, 누가 자기네를 간질이는 것 같이 부끄러운 웃음을 띠우며,

『왜 모르기는요.』

하고, 서로 치어다 보았다. 영숙은 가슴 속에 뭉쳐 있던 무 엇이 풀어진 사람처럼 얼굴에는 사람 좋은 웃음을 띠우고,

『참 오래간만에 뵈입니다. 그전 석다리께 살적에 같이 학 교 다니던 생각을 하셔요?』

하며, 잠간 길음한 속눈썹이 눈을 깜작깜작 할 때마다 미 력 있는 안채를 체질한다.

춘우는 두 손으로 깍지를 껴서 무릎 위에 놓으며,

『생각하고 말고요. 어머님께서 안녕하셔요? 퍽 늙으셨을 걸요.』

영숙은 얼굴에 동정과 연민의 정을 어리면서,

『그럼요. 이제는 아주 전만 못하셔요. 그러지 않아도 아까 저 어른이 춘우씨 말씀을 하시니까, 한번 보고 싶다고 그러 셨어요.』

하고, 영숙은 창하를 가리킨다. 춘우는 여태까지 나를 생각 하여 주는 것이 고맙다는 마음과 또 창하가 무슨 말을 하였 는 것이 이상하여 창하를 보며,

『무슨 말을 하였는데……』

하고, 미심한 듯이 말을 들으려 한다.

『아까 아침에 영숙씨가 날더러 말일세. 어제 저녁에 우리 집에 왔던 이가 누구냐 하시기에 자네라고 하지 않았겠나.

그랬더니, 자네와 어렸을 때 같이 학교에 다니시고 같은 동 리에 살았다고 하신단 말야……』

춘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저를 기억하셨어요. 저도 어저께 잠간 뵙고 알았어 요. 그렇지만 인사를 여쭙기도 무엇하고…… 그래서 그대로 있었습니다……』

할 때, 술상을 보아 들여왔다. 약간의 안주와 맥주 몇 병을 갖다놓고 세 사람은 마시기를 시작하였다.

[편집]

일주일이 지나갔다. 오늘 춘우는 창하의 집으로 와서, 함께 영숙의 어머니를 만나보러 가기로 하였다.

춘우가 영숙의 남편이 시골로 내려간 틈을 타서 영숙 어머 니를 찾아보러 가는 것이 일부러 그리한 것이 아니지만, 춘 우의 마음에는 그의 남편이 옆에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좋 았다.

춘우는 창하와 함께 영숙의 집 문간에 와 섰다. 영숙 어머 니를 십여년 후에 만나는 것도 반가운 일이 아닌게 아니지 만, 이주일 전에 만났던 영숙을 다시 만나는 것이 더 반가 운 것 같았다.

창하의 인도로 그 집에 들어서자, 집안에서는 가는 여자의 목소리가 머리카락 얼크러지듯, 그윽하게 들리인다. 거기에 는 영숙의 목소리도 섞이어 있었다.

모자를 벗고 마당 한가운데 섰을 때 마루에 앉았던 영숙이 반가이 나오며,

『어서 오십쇼.』

하고 맞아 주더니, 다시

『올라오시지요.』

하고 뒤로 물러선다.

옆에 앉았던 어머니는 내외나 하려는 듯이 일어서 들어가 려하며, 영숙을 보며, 두레두레하고,

『누구냐?』

하며 묻는다. 영숙은 핀잔이나 주는 듯이,

『왜 모르셔요, 석다리께서 같이 살던……』

하며, 춘우를 보고 반기는 웃음을 준다. 영숙의 어머니는 한참 생각하더니, 갑작스럽게 놀래면서

『응.』

하고, 벌떡 일어나, 춘우의 손목을 잡으며,

『이런 참 이게 누구야. 에그 퍽도 자랐네. 나는 정신이 없 어서 알아보지를 못했군. 그래 어머니도 안녕하시고, 또 누 님도 잘 있소?』

반말에 허우에 되는대로 말을 하는데, 눈에는 반가운 눈물 이 고이었다.

『자, 어서 좀 앉어.』

하고, 손목을 이끌어 앉힌다. 춘우는 인사를 하려하다가, 인사 한마디 하지 못하고 그저

『네, 네, 네.』

할 뿐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일전에 저 박주사에게 말을 듣고, 한번 보려고 하였더니, 잘 왔소.』

하고, 자기 아들을 어루만지듯 하며,

『엑, 벌서 수염이 다 꺼뭇꺼뭇하이.』

하며, 손도 만져보고, 등도 어루만져 보니까, 마루에 있던 영숙?창하?종년?침모가 모두 웃었다.

『모두 꿈 같소. 우리같은 사람은 늙지를 않는구려.』

하고,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춘우는 처창한 웃음을 띠우고 앉았으며, 영숙은 창피히 여 기는듯이,

『글쎄, 왜 그러시우. 우시기는 왜 우셔요.』

하며, 책망하듯이 눈을 흘긴다.

『생각하니까 모두 꿈 같기도 하고.』

하면서 수건으로 눈물 한번 씻고, 다시 목메이는 소리로

『자연히 눈물이 나는구나.』

하며 다시 눈물을 씻는다.

자리를 정한 후 춘우는 영숙 어머니를 건너다 보며,

『그동안 시골로 내려가셨다더니 언제 올라오셨어요.』

노파는 먼 산을 바라보며

『여기 온지가 한 삼년 돼요.』

하더니, 다시 말을 돌리어,

『참, 우리가 떠날 때에는 작별도 못했지. 그 때 영숙은 당 신이 보고 싶다고 시골 가서도 몇 번이나 말을 했는지, 알 수 없고, 어느 때는 늘 동무는 없고, 쓸쓸해서 자꾸 서울로 다시 가자고 하였었다우. 그러다가, 이럭저럭 삼년이 지났는 데, 지금 이 집 주인이 자꾸 혼인을 하자고 해서 불시에 정 혼을 하여 놓았으나, 구차한 살림에 무엇이 있겠소. 그대로 몸뚱이만 내 주었지요.』

하며, 담뱃재를 털고, 다시 말을 이어,

『그렇지만, 누가 알았겠소. 혼인을 떡 해놓고 보니까, 본 마누라가 시퍼렇게 살아 있지요. 기가 막힙디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우. 이왕 몸을 허락할 바에 세상에 없는 일도 아 니겠고…… 그래서 언제던지 딸에게 청원을 들지요.』

하니까, 춘우는 그 청원 듣는다는 말이 영숙의 마음 속에 도 이런 생활이 행복스러운 생활이 아니요, 자기 가슴 속에 남 모르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부연하는 듯하여, 알수 없 는 고마운 생각이 났다.

『그러고는 나허고 가끔가끔 싸우죠. 하지만, 당신도 젊은 사람이니까, 제 말을 곧이 듣지 않겠지만, 제가 오늘 이 주 인에게 시집만 안 갔더라면 정말 이렇게 이 늙은이 하나 먹 여 살렸을는지 몰라요.』

하고서, 자기 가슴을 제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이 말을 듣 던 영숙은 어머니에게 눈살을 주며,

『글세 좀 고만 두셔요. 언제던지 만나는 이마다 그 소리 는 퍽도 하시우.』

하고, 춘우와 자기가 이야기가 하고싶은 것을 자기 어머니 가 가로맡아 하는 것을 어떻게해서던지 떼버리려고,

『어서 가신다고 하시던데 가보셔요.』

하며, 벽에 걸린 시계를 한번 치어다 보더니,

『벌써 두시가 넘었는데요.』

하니까, 어머니는 손으로 영숙의 발밑의 치맛자락을 홱 뿌 리더니,

『왜 이러니, 오래간만에 이야기 좀 하게 가만 있거라.』

하고, 다시 춘우의 무릎을 쭈글쭈글하여진 손끝으로 툭 건 드려 자기 말을 정성껏 들어달라는 뜻을 표한 뒤에,

『그런데 누님은 시집갔소?』

춘우는 고개를 영숙 어머니에게 다시 돌리면서,

『갔어요.』

『언제?』

『벌써 이태가 되었는지요.』

『지금 어디 살우. 한번 보았으면.』

『동경엘 갔어요.』

『동경? 혼자?』

『안요. 둘이 갔어요.』

『새서방허고?』

『네.』

영숙의 어머니는 영숙에게 한번 핀잔을 당하고, 버티어 볼 생각을 하였으나, 말에는 벌써 한풀이 죽었다. 그래서 얼굴 에는 일부러 버티어보려던 생각과 속으로 슬며시 일어나는 늙은이의 약속이 그의 얼굴에서 싸우는 빛을 보인다. 그러 다가는 다시 말을 이어,

『그렇지만, 어머니가 일직 돌아가시기 때문에 두 남매가 오즉 외롭게 지냈다. 참 외할머니를 잘 만나서, 가끔가끔 와 서 봐주셨기에…… 어렸을 때에 울기도 많이 하고, 남매가 서로 우애도 지극하더니…… 지금 외할머니는 어디 계시 우?』

춘우는 영숙의 어머니가 자기 외할머니의 말을 하는 것을 들으매, 바로 요 며칠 전, 수철리 어머니의 산소에 갔던 것 이 생각나며, 어렸을 적에 뵈옵던 자기 어머니가 눈앞에 보 인다.

십여년 동안 가장 즐거울 소년 소녀시대를 춘우 남매는 어 미 없는 자식으로 살아왔다. 그의 생활이 달이 비치지 않는 세상이었으며, 어리광 부리지 못한 생활이었다. 그의 어미낙 돌아간 것은 춘우 남애에게 지으려하나, 지을 수 없고, 다시 어떻게 할 수 없는 비참한 사실중의 하나이었다.

춘우는 숙이었던 고개를 들고,

『그저 거기 사셔요.』

하는 대답을 할 때, 먹물을 칠한 듯한 두 눈자위에는 수녀 의 검은 옷자락의 그림자 같은 비애가 비치어 보인다. 영숙 의 어머니는 다만

『에그 한번 만나 보았으면 좋겠어. 퍽 늙으셨으렸다.』

하며, 춘우의 할머니가 자기 앞에 앉았는 것처럼 공중을 물끄럼이 보면서, 옛날에 보던 그이와 이야기 하듯이 얼굴 에 웃음을 빙글빙글 나타낸다.

『늙으시고 말고요. 이제는 아주 전만 못하셔요. 지금은 지 팽이를 짚으시고도 별로 나다니시지를 못하셔요. 전에야 우 리 집에를 날마다 다니시다시피 하시고도 아무 일이 없으셨 지요. 참, 그 할머니야말로 우리에게 좀 고맙게 구셨습니까.

언제든지 어미 없는 자식 어미 없는 자식 하시면서, 누가 그렇게 걸어주셨겠습니까. 세상에, 무슨 정 무슨 정 해도 어 머니의 정밖에는 없다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모든 행복의 근원으로 생각해요. 세상은 여자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예 수 믿는 사람들은 말을 하지만 그 대신에 어머니가 아니면 세상은 구하지 못할 줄로 믿습니다.』

영숙 어머니는 반신반의하는 말로

『그런 것을 알아주니, 고맙기는 하오마는 세상에야 어머 니 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없어. 이건 별별 고생을 다해서 길러놓으면 모두 제가 저절로 자란줄들 만 알지요. 실상 아버지야 그저 대범하기만 하지 정말 깊은 정은 어머니에게 있지요. 그렇구말구. 어머니에게 있지.』

춘우는 다시 말을 받아서

『그렇지만, 자식이 어머니를 보양할 의무가 있는 동시에, 부모는 또한 자식을 기르고 공부시킬 의무가 있으니까요.

결코 부자간이나 모녀간에는 권리라는 것이 없어요.』

여태까지 두 사람의 말하는 소리들만 듣고 앉았던 영숙이 그 말 끝에 쑥 나서며,

『그래요. 그럼요.』

하며, 말을 끄낸다. 춘우는 모든 것을 파탈한 좌석처럼 다 리를 다시 도사리고 편히 앉으며 조금 흥분된 어조로

『그렇지만, 사랑만 있으면 우리가 여기서 권리니 의무니 논난할 것 까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랑으로 써 원만히 해결할 수가 있겠지요.』

할 때, 입에서 담배를 쑥 잡아빼는 창하가 고개를 내흔들며,

『아닐세, 그 말도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지만 지금 세상 에는 돈일세, 돈야.』

하고,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쑥 내밀면서,

『돈야, 돈만 있으면 제왕(帝王)도 살수 있는 것일세. 비록 달과 같이 자애로운 부자의 사랑이라도 태양과 같이 힘있는 돈의 세력 밑에는 무색하여지는 것일세. 인류의 역사가 맨 처음에 지금에 이런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저 다른 방향으 로 흘렀을 것 같으면, 혹시 사랑이 제일 세력있고 모든 것 을 해결하는 무엇이 되었을는지 모르지마는, 우리인류의 역 사가 지금의 이 방향으로 전해 나가는 이상, 우리에게 태양 이 없으면 살수 없는 것처럼 돈이 없으면 못 사는 것일세.

못살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그것으로 시작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일세. 지금이라도 지금 이 방향으로 흐르는 인류 의 역사를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는 위대한 힘이 있어 한번 에 방향을 변해 놓는다 하면 모르거니와 아직까지는 그 무 서운 세력, 돈의 힘을 모든것을 가지고도 이기지 못할 걸세.

아! 아까운 것은 우리의 역사를 이 방향으로 틀어놓지 말고 다른 무슨 방향으로 우리 선조가 틀어놓았으며, 오늘의 우 리가 이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을 그랬지』

하며, 다시 시침이나 떼는 듯이 옆으로 아무 말 없이 물러 앉아, 담배만 후후하고 피운다. 춘우는 이 말을 듣더니,

『허허.』

하고, 조롱 같고 비웃는 것도 같고, 또는 동감이라는 듯이 한번 돌아다 보더니,

『자네 말은 아주 철학자의 말 같으이 그려.』

하고, 엄연한 얼굴로 딴데만 보는 창하를 들여다 본다. 옆 에서 이 말을 듣던 영숙이 다시 말을 끄내어,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아저씨 말씀이 잘못얘요. 돈이 다 무엇얘요. 돈으로 사랑은 살수 없는 것요……』

하며, 목소리가 높아가며 날카로워 진다.

『사랑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고도 살수 없는 것이야요.

비록 그것을 산다 하더라도 한때죠. 결코 영원치는 못할 것 얘요.』

창하는 그 말을 듣고만 있다가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옳은 말씀이지요. 옳은 말얘요. 그렇지만 돈없는 사람들 이 사랑을 해 보십쇼. 그것은 영원히 계속될줄 아십니까. 돈 으로 사랑은 살수는 없을지라도, 돈 없는 사랑은 사랑까지 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인생의 전부가 아닌 이상 사람마다 사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지는 않겠지요.

영숙씨는 아직까지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쓰리고 아픈지를 모르십니다. 세상은 뜨거운 것을 차디차게 만들고, 맵던 것 을 싱겁게 할 뿐이지요. 사람이 나이 먹어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서운 힘을 가진 뜨거운 열정이 북빙양에서 천만년 녹지 않는 얼음덩이처럼 차디차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나는 나의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불길, 청춘의 뜨거운 정열을 얼 마던지 식지 않게 하려 애썼으나, 모두 쓸데 없었읍니다. 나 는 이 세상에서 모든 행복과 모든 희망을 단념하였습니다.

다만 녹지 않는 얼음덩이 모양으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사람입니다. 나에게는 깜깜한 암흑과 가슴속이 텅비어 버리 는 듯한 쓸쓸함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기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칠월 칠석에 칠석할머니와 칠석할아버지가 만나는 것보담도 더 귀한 일이겠지요. 사랑 하는 이는 눈물로 만나서 눈물로 만나서 눈물로 헤어지는 법입니다. 참 정말 영원한 사랑이 이 세상에 있다고 하면, 그는 이 세상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젊은 사람 셋이서 사랑이나 무엇이니, 귀에 생소한 말만 듣던 앉았던 어머니는 슬며시 말없이 물러 앉고, 젊은 사람 셋이서만 이야기가 어우러진다.

창하는 다시 냉소하는 듯한 웃음을 띠우며,

『사랑이 무엇이야! 이 세상은 절망의 세상이다. 단념의 세 상이다. 단념하는 것처럼 괴로움을 가슴 속에 박아주는 것 은 없을 것이다. 춘우 자네도 말하지 않았나? 인생은 나이 먹을수록 장애물 경주를 하는 것 같고, 낮이 있다가 밤이 있는 것 같다고, 한번의 광명이 왔다가 다시 암흑이 올 때 우리는 피곤하여 세상을 모르고 잘것일세. 우리 앞에 닥치 는 암흑-실망과 낙심, 기막히는 괴로움-그것을 뚫고 나서 면, 광명이 생기고, 희망이 보이고, 믿음이 생기네. 그러다가 는 다시 암흑, 또 광명 이것이 엎치었다 뒤쳐졌다하는 동안 에 어느 틈에 우리를 무덤으로 끌어 가려는 상엿군이 우리 집 문간에서 방울을 흔드는 것일세.』

춘우는 창하의 이 말을 듣다가, 빙긋 웃으며,

『옳은 말일세. 사람이란 죽음으로 가는 길 위에서 서로 보고 웃고 울고 하는 것일세. 우리의 길은 무덤에서 막을 것일세. 그런데, 우리 조선 청년의 일생은 꽃 피지 못한 산 길과 같애.』

말도 채 그치지 못해서, 창하는

『옳은 말일세. 조선 천지는 그와 같이 황량하이. 오늘에 조선 청년이 타락을 한다 하면 그 원인은 정치상으로나 또 는 가정상으로나 무엇무엇 여러가지의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 등한이 할수 없는 것은 남녀가 서로 교제하는 것일세.

여자는 남자를 그리워하고, 남자는 여자를 생각하는 것은 성(性)을 가진 사람인 이상 당연한 일일세. 남녀가 교제할 기회가 없는 것은 조선 청년을 타락시키는 첫째 원인일세.

타는듯한 애욕(愛慾)을 가슴에 품은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그 상대자를 찾기 위하여 헤매는줄 자네는 아는가? 그 헤매 는 끝에는 가는 곳이 화류계일세. 불란서 사람이 음란한 말 을 잘하고, 로서아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하기를 좋아한다 하면, 조선 청년은 기생집에 다니는 일밖에는 없겠지.』

할 즈음에 영숙의 어머니는 상에다가 냉면 두 그릇을 바쳐 들고 오면서,

『오래간만에 온 손님을 이렇게 푸대접을 해서.』

하며, 춘우의 앞에 놓았다.

『이것은 무엇 사오셨어요.』

춘우는 상 두구퉁이를 붙잡아 놓으며,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니까, 영숙은 주인이라는 어조로

『변변치 못한 것이나마……』

하고는, 젓가락 들기를 권하였다. 춘우와 창하는 냉면을 먹 으면서 두어마디 말을 하려다가 그대로 아무 말이 없었다.

냉면 먹는 것을 보던 영숙의 어머니는 안방으로 들어가더 니, 옷을 바꾸어 입고 나오며, 춘우를 보고,

『천천히 노다 가시우.』

하고, 댓돌 아래로 내려선다. 젓가락을 입에서 떼는 춘우는 영숙 어머니의 얼굴을 치어다 보며,

『왜 어디를 가셔요?』

할 때, 그의 마음은 공연히 시원하고 다행한 생각이 났다.

『네, 어디 좀 다녀올께, 천천히 노다 가시우.』

영숙의 어머니는 흰 우산을 들고서, 영숙을 보며,

『다녀 오마.』

하였다. 영숙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얼핏 오셔요.』

하고, 다시 앉았다. 어머니가 나가자, 상을 물렸다. 그러고, 젊은이 셋만 있게 되니까, 이상한 풋기운이 세 사람을 애워 싼다. 아무 거북한 것도 없고 조심되는 것도 없이 세 사람 은 마음대로 웃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을 각각 속으로 기뻐하였다.

춘우는 마루 뒷문에 기대앉으면서,

『벌써 십 여년이나 되나요?』

무심히 나오는 말로 말을 끄내니까, 영숙도 그 말을 따라서,

『그런가 봅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그때 지나던 일이 역력 히 생각나요. 참 그때를 생각하면, 제가 오늘 이렇게 될지는 몰랐지요. 저는 그전에 같이 노던 이를 만나면 부끄러워서 인사도 하지 못하고 길을 피해 다녀요. 저의 사촌 오라비 하나 있는 것도 저의 집에를 일체 오지 않는답니다.』

울음이 나올듯한 어조에 쓸쓸한 웃음을 섞어서 말을 한다.

『오라버니라뇨?』

춘우는 생각하는 눈으로 옆을 흘겨보며 물었다.

『왜 모르셔요? 저하고 학교 다니실 때 가끔가끔 놀러 오 던 애 말얘요.』

『네, 알겠습니다. 영식이 말이지요. 그애 지금 몇 살입니까.』

『열 아홉 살얘요.』

『장난도 몹시 하더니.』

『지금은 아주 점잖아졌어요. 그리고 어린애 마음에도 어 떻게 자존심(自尊心)이 많은지요. 남에게 조금이라도 듣기 싫은 소리를 안들으려 한답니다.』

『어렸을 적에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쌈 잘하고 남 때려주 기 잘했지요.』

『그래서 제가 혼인을 한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집에와 야단을 쳤는지, 집에서도 모두 혀를 내둘렀어요.』

『왜요?』

춘우는 아까 영숙 어머니의 말이 지금 영숙의 말과 모순되 는 것이 있는 것을 보고, 일부러 분명히 물었다.

『글쎄, 남의 집 첩으로 간다구요.』

춘우는 다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말을 하면 결국 욕과 비난이 나올 뿐이므로 말없이 거북 웃음을 웃을 뿐이었다.

[편집]

춘우는 영숙의 집에서 온지 닷새만에 편지 한 장을 받았 다. 그것은 영숙에게서 온 것이었다. 춘우가 이 편지를 받았 을 때, 그의 가슴과 손은 돈을 훔치려는 사람처럼 떨리었다.

피봉을 이리 보고 저리 보다가, 그는 다시 책상 위에 놓고, 고개를 기우리고 생각하였다.

『저 속에 무슨 말을 썼을가?』

그러다가는 다시 들어 봉한 것을 뜯고서, 속의 편지를 펴 들을 때, 그의 가슴은 이상하게 두근거리었다. 그의 두 눈에 서는 경이(驚異)의 광채가 나서, 그 광채가 편지 글씨를 점 과 선마다 그대로 뚫을 것 같았다.

춘우씨에게 두어마디로 아룁니다. 옛날의 영숙이가 아닌 저로서, 춘우씨를 만나보이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춘우씨는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실터이지 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오는 일요일 하오 두시 에 청량리로 와 주셔요. 제가 춘우씨에게 꼭 한 말씀을 할 것이 있으니까요. 긴 말씀은 하지 못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칠월이십오일 영숙 올림 춘우는 이 편지를 들고 한참이나 눈앞에 있는 시계가 돌아 가는 것을 들여다 보고만 있었다. 새발향(丁香)의 그윽한 냄 새가 도는 영숙의 편지를 한 손에 움켜쥐고서 눈 하나 꼼짝 거리지 않고 앉았을 때 그의 가슴은 공연히 괴로웠다. 그는 혼잣말로

『사랑이냐?』

하다가, 다시 혼자 냉소하듯 웃음을 나타내고, 편지를 들여 다 보며,

『아니지!』

하여 보았으나, 그는 「아니지!」하는 말이 채 떨어지기 전 에 그의 가슴은 알수 없는 비애로 찼었다. 그는 편지를 다 시 읽으면서,

『나를 사랑한다하면 내가 어떻게 할터이냐!』

혼자 생각을 하다가, 그 대답으로

『사랑은 아니겠지!』

할 때, 그는 편지를 내던지고, 팔 위에 고개를 얹고서 아무 말 없이 자는 사람처럼 있었다.

『사랑이냐? 아니냐?』

자기 가슴 속에는 타는 사랑이 영숙에게도 있을리는 없을 줄 알았던 춘우가 영숙의 편지를 받아들고 생각할 때 헤매 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영숙은 나에게 이런 편지를 하였을고? 얼마나 대 담한 일이냐! 만일 자기가 참으로 만나고 싶고, 한때라도 이 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편지를 하였다 하면, 나는 이 편지 를 도루 보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영숙은 남편있는 사람이다. 만일 영숙이가 나로 말미암아 죄를 짓는다 하면, 그 죄는 내가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죄를 지으 면 지을지라도 남에게 죄를 짓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편지를 뜯은채로 다시 피봉에다 넣었다. 그래 가지고, 겉봉을 쓴후 책상 머리에 놓고, 자리위에 누웠다. 그러다가 는 다시 고개를 내저으면서,

『만일 사랑이 아니고 다른 일이라하면?』

뒤빕어 생각을 하여 보고서,

『나는 영숙의 옛날 동무가 아니냐? 나의 가슴속에 영숙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영숙이가 나를 생각하는 줄로 오 해를 하는 것이지.』

춘우는 설합을 열고 편지를 집어넣었다.

일요일이 되어 춘우는 청량리 정거장에서 내렸다. 청량리 어디란 말도 모르고 막연한 목표를 향하여 춘우는 걸어간 다. 바람에 휘말려서 춤추는 녹음은 땀나는 얼굴에 시원한 바람을 실어오고, 진하고 엷고 누르고 푸른 풀들은 멀리 산 밑 언덕을 옷입혔다. 서늘하게 우는 매미는 높은 가지에서 첫 가을을 노래하고, 두 나래를 벌린 잠자리는 물결 위에 뜬 배 모양으로 높았다 낮았다 한다.

춘우는 웃옷을 벗어 들고, 수건으로 땀을 씻었다. 푸른 비 단을 땅 위에 깔고, 그 위에 하얀 줄을 아무렇게나 쭉 그은 듯한 길 위에는 풀냄새와 섞이어 한적한 공기 위에 떠돌고 맨발을 벗고, 다리를 걷어올린 어린아이는 손에다 거미줄친 잠자리채를 들고서 나무 밑으로 살금살금 기어든다.

춘우는 청량리로 발을 들여놓고, 비로소 막연함을 깨달았 다. 넓은 청량리에 어디서 만나자는 말인가?

춘우는 절로 들어섰다. 이 초막 저 초막 길 위로 올라섰다, 다시 길 아래로 내려섰다. 이 집에도 고개를 기웃, 저 집에 가서도 발을 머뭇, 그러나, 영숙을 보지는 못하였다. 여자의 신이 놓인 곳을 살펴보고, 파라솔이 있는 곳에서 물었으나, 모두 아니었다.

그는 다시 소나무 틈을 이리 꿰뚫고 저리 꿰뚫어 모래가 미끄러지는 산등에 올라서 아래로 내려 살피었다. 먼 곳에 서는 전차 가는 소리가 가늘게 바람을 따라 들려 올 뿐이 요. 나무 사이에는 돌아가는 사람의 옷자락이 보이었다. 살 아지었다 할 뿐이었다. 춘우는 모래 위에 앉아서 멀리 서울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사면이 적막함을 따라 그의 마음은 잿물 속에 들어간 빨래 처럼 씻어지는 듯하고, 혼탁하던 머리가 무엇으로 걸러놓은 것처럼 밝아지는 듯 하여 올 때, 그는 혈관 속으로 무슨 새 생명이 스미어드는 듯 하여 두 팔을 들었다 놓았다, 가슴을 벌리었다 좁히었다 하였다.

삼십분이 지나갔다. 쉬임 없는 시간은 사십분, 오십분, 한 시간이 넘었다. 춘우는 산위로 올라갔다, 우물가로 내려갔다 하였다. 그러고는, 속으로 홀로 어디가 들어 앉아 기다릴까 하였다. 그러다가는 다시 의혹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웬일일까?』

하고, 그는 한번 생각하고, 주머니에서 편지를 또 다시 꺼 내어 들고 자세히 살펴본 후,

『나를 공연히 속이지는 않았으렷다.』

하다가는, 다시

『그렇지만, 어째서 여기서 만나자고 하였을까?』

안개 같은 감정이 그의 가슴에서 이리 서리고 저리 엉클어 진다.

『나를 만나서 무엇 하려는가?』

춘우는 다리로 기어드는 개미를 골난 사람 모양으로 탁탁 털더니, 다시 걷기를 시작하였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기는 싫었다. 알수 없는 의혹 속에서 한밤중 먼 촌에서 반짝거리 는 불빛 같은 희망이 그의 가슴 속에서 탔다 살아졌다 할 때, 그는 정처없이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러다가는 어디서던 지 영숙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는 옛적 홍릉 쪽을 향하여 갔다. 구부러진 길가에는 원 추리(宣男草)가 고개를 쳐들고 노란 웃음을 띠우고 있고, 철 잃은 할미꽃은 고개를 숙이고 말 없이 있는데, 창부의 입술 같은 꽃잎 속에는 노란 이가 보이었다. 범나비가 오른쪽 숲 속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며 나오더니, 춘우의 허리 옆을 스 치고, 다시 왼쪽 숲속으로 들어가 버리었다.

춘우는 목이 몹시 마름을 깨닫고 약물터로 향하는 좁은 길 로 들어섰다. 집을 넘는 옆에 나뭇가지 들이 뺨을 때리고 얼굴을 긁어 잡아 다닌다. 그러고는 피다가 스러지는 이름 모를 꽃들이 춘우의 발 밑에 무참히 을크러지고, 발등에선 푸른 메뚜기 송장메뚜기가 재주를 부린다. 춘우는 저도 모 르게 돌아다닌다. 물가에 가서 손으로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한 후, 그 자리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물 먹으러 온 사람 무엇이 아무 말 없이 물만 먹고, 두던 위로 올라가 버리었다.

춘우는 마음을 놓고 물묻은 수건으로 얼굴을 씻을 때, 누 구인지 자기 뒤에 서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더니, 가는 기 침 소리가 들리며, 자기가 미처 고개를 돌리기 전에

『춘우씨.』

하는 목소리는 꿈에 듣는 듯한 영숙의 소리였다. 춘우는 반가웠다. 그러다가 원망스러웠다.

벌떡 일어난 춘우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 때, 영숙은 어 깨에 걸었던 파라솔을 접으며

『퍽 오래 기다리셨지요?』

할 때, 춘우의 눈에는 조금도 서둘르고 주저하고 부끄러워 하는 점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춘우의 가슴은 공연히 물결 치고 가늘게 떨렸다.

『아뇨, 별로.』

그의 말은 기다리고도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오셨기에 이리 오셨어요?』

두 사람이 말하는 가운데에는 알 수 없는 근질근질함이 있 었다. 춘우는 그 근질근질함을 없애고 싶어서, 그곳을 떠나 려 하여 모자를 쓰며,

『더워서 물을 좀 먹으러 왔어요.』

하고, 저리로 가려 하니까, 영숙은

『그러면 저도 물 좀 먹구요.』

하며, 파라솔을 땅 위에 놓고서 우물로 가까이 갔다.

『바가지가 없습니다.』

춘우는 제집 우물이 아니건만 말할 수 없이 미안하였다.

『없으면 어때요. 손으로 먹지요.』

하며, 매끈하고도 하얀 두 팔을 걷고서 두 손을 모아 물 속에 넣더니, 손가락을 좁히어 표자를 만들었다. 그러고 물 을 퍼서 먹을 때 춘우의 눈에는 상아로 만든 표주박으로 무 슨 경장을 마시는 님프와 같이 보였다. 영숙은 한숨을 쉬고 두 손을 수건에 씻더니, 붉은 입술을 적신 수정 같은 물방 울을 씻었다.

물을 다 먹더니, 다시 양산을 들고서 언덕으로 올라섰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서서 걸어갈 때, 영숙은 가 끔 입속으로 노래를 웅얼거리는 것이 아주 마음 편한 사람 같았다. 춘우는 그와 반대로 가슴 속이 무엇을 기다리는 사 람처럼 거북하였다. 춘우는 영숙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 기를 기다리고, 또 이 자리까지 자기를 부른 뜻을 알고 싶 었다.

얼마 가다가 영숙은 아카시아 그늘 속을 지날 때 비로소 처음으로 춘우를 보고 무슨 말을 할 듯이 서 있었다. 영숙 의 입술은 잠간 떨리더니, 말이 새어 나오는데,

『춘우씨가 저의 말을 꼭 한마디 들어 주시겠어요?』

하고, 사면을 살피더니, 저쪽에 누가 있는 듯 하니까, 다시 양산만 빙글빙글 돌리면서 걸어간다. 춘우는 그 뒤를 따라 가면서,

『무슨 말씀얘요?』

영숙은 대답이 없었다. 춘우는 자기 말에 대답이 없으므로 무색함을 이기지 못하여 얼굴이 은근히 더워지는데, 영숙은 옆에서 푸르륵 나는 방아깨비를 치어다 보며,

『에그, 저것 보게 하늘로 자꾸 올라갑니다 그려. 저것이 무엇이어요?』

춘우도 그것을 바라보며 힘없는 소리로,

『방아깨비 아닙니까?』

영숙은 또 말이 없었다. 갑자기 침울한 얼굴로 땅을 내려 다 보면서, 열댓 걸음 걸어가더니, 무엇을 결심한 사람처럼 쓱 돌아서며,

『우리 저쪽 큰길로 가시지요.』

하며, 손가락으로 큰 길을 가리킨다. 춘우는 다만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영숙의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듯이 큰 길 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오던 길을 다시 가던 영숙은 팔뚝에 감긴 시계를 보더니,

『벌써 네시가 넘었네.』

하고, 깜짝 놀래었다. 그리고는 걸음을 재빨리 걸으면서

『여기서 전차 정류장까지 몇분이나 걸릴까요?』

춘우는 영숙이 황망해 하는 것을 보고서,

『왜 무슨 약조하신 것이 있습니까?』

영숙은 약간 고개를 숙이더니

『아뇨, 별로. 약조한 것은 없지만, 너무 늦으면 집에서 기 다릴 터이니깐 말씀얘요.』

하며, 양산 끝으로 땅을 판다. 춘우는 겨우 말을 가다듬어,

『그런데 아까 제게 말씀하시겠다는 것은 무엇이십니까?』

『그것요?』

영숙은 영롱한 눈으로 춘우의 얼굴을 쳐다볼 때, 그의 눈 에는 애원하는 듯한 빛이 있었다.

『춘우씨는 저의 십년 전 친구지요? 저를 아무 허물 없는 누이처럼 생각해 주시지요?』

『그런 말씀은 다시 하실 것이 없지요. 저는 영숙씨에게 다시 없는 친구며 오라비가 되기를 원하니까요.』

『그러면 춘우씨는 저의 지금 형편을 동정하시겠지요?』

춘우의 입에서는 나올 말이 없었다. 무엇이라고 대답하기 가 싫었다. 영숙은 말을 계속하여

『저는 참으로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저의 일생은 쓸쓸한데서 시작하여 쓸쓸한 곳에 그칠 것 같아요. 저는 춘 우씨에게 그것을 동정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하고 싶어요.』

하더니, 두 눈에 비애의 그림자가 끼이며, 한참이나 기운 없이 있다가, 잠꼬대같은 소리로

『그러나 그러나.』

하고 고개를 흔들면서,

『저 같은 여자가 춘우씨의 동정을 구하는 것도 과분한 일 이겠죠.』

춘우는 고개를 들고 힘있는 어조로,

『동정해 드립니다. 저의 모든 정열(情熱)과 정성을 다하여 동정해 드립니다. 나는 영숙씨의 비애를 알고, 번민을 압니 다. 영숙씨! 우리는 옛날 어렸을 적으로 다시 돌아갈 수 가 있을 것입니다. 영숙씨가 만일 우리 집 뒷동산에서 하시던 말씀을 잊어버리시지만 않으셨으면, 우리는 귀여운 옛날의 순결하고 때묻지 않은 우리를 다시 이을 수 있을 것이지요.

우리는 옛날로 돌아가시지요.』

영숙도 흥분된 말로

『압니다. 어렸을 적에도 저의 친구는 춘우씨 하나 밖에 없었고, 오늘에도 춘우씨 한분밖에 없습니다. 춘우씨는 저 를……』

하고 아무 말이 없다.

『그러면, 오늘부터 반가운 동무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가슴 속에 있는 무엇이든지 서로 말하는 친구가 되었지 요?』

춘우의 가슴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정열의 물결이 치고 영 숙은 자기 몸을 누구의 팔에 맡긴 듯 하였다. 두 사람의 얼 굴에는 은반(銀盤)에 비친 불볕 같이 번득거리는 희망이 비 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송림 사이로 들어섰다가, 다시 모래 톱으로 내 려섰다가, 물가로 거닐다가, 다리를 건느고 잔디 위에 앉기 도 하였다.

영숙은 다시 춘우를 이끌고 절로 들어가 밥을 사먹고 나니 까 날로 저물었다.

여드렛날이 바다와 같은 하늘 위에 떠 비뜨름히 두 사람을 내려다 볼때, 이슬 묻은 축축한 바람이 영숙의 치맛자락을 살짝 날리게 한다. 우뚝 선 장승은 머리 위에서 흔들흔들 하는데, 풀 사이 나무 틈에서는 이름 모를 벌레들이 제가끔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암흑에 싸인 숲들은 새파란 하늘 빛 과 흐르는 달빛 속에 점점 그 빛이 진해간다. 먼 하늘에는 감았던 눈을 뜬 것처럼 하나씩 둘씩 금강석 같은 별이 반짝 인다. 끼었던 안개는 사면으로 흩어지어 한폭의 장막을 휘 두르는 듯이 좌우 산허리에 잠겨 있고, 땅 우에는 달에 비 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넓지 못한 산길을 가로질렀다.

두 사람이 길을 걷는대로, 영숙의 부드러운 살을 가린 한 겹 모시 적삼이 춘우의 양복 입은 살 위에 닿다가 떨어지었 다 할 때마다 두 사람의 혈관 속에 가득 찬 정열은 식었다 더웠다 하는 듯하였다. 춘우의 코에는 영숙의 머릿기름 냄 새와 얼굴에 바른 분 내음새가 이슬묻은 공기와 함께 콧 속 으로 스미어들 때 무슨 마취제(痲醉劑)를 마시는 듯이 흥분 됨을 깨달았다. 자박자박 마른 신 신은 발이 모래 위로 걸 어가는 소리까지 춘우의 가슴 속에 행복의 노래를 부르는 노래의 박자를 맞추는 듯 하였다. 춘우는 흥분이 변하여 대 담하여 졌다. 그는 끝이 떨리는 손을 들어 영숙의 손을 잡 았다. 영숙은 균일하게 걷던 발을 딱 멈추더니, 춘우의 얼굴 을 쳐다 볼 때, 그의 두 눈은 불과 같이 번득거리었다. 그리 고는, 잡은 손을 송충이나 떨어버리는 것처럼 홱 뿌리치며,

『이게 무슨 짓이셔요.』

목소리는 날카롭게 떨리었다. 춘우는 자기 얼굴이 불같이 타는 것을 깨닫고, 꿈 속에 선 사람처럼 말 없이 섰었다. 영 숙은 고개를 숙이고,

『춘우씨는 저의 친구얘요. 오라버니얘요. 저의 손목을 잡 으실 수 없는 몸얘요.』

하고, 돌아섰다. 춘우는 두어 발자국 물러서며,

『잘못 했습니다. 친구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영숙 씨는 모든 것을 용서하시지요?』

『용서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다시는 그런 일은 하지 말아 주셔요. 저는 남편이 있는 사람얘요.』

『알았습니다.』

춘우는 갑갑해 못 견디는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 뜯고 싶은 듯한 팔짓을 하며

『알았어요. 세월은 못 속입니다.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 습니다. 나는 우리가 옛날로 돌아갈 수가 있을 줄 알았더니, 그것은 할 수 없는 것인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절대로 못 돌아 갑니다. 우리가 옛날로 돌아가자 하는 것은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우리는 다만 꿈 속이나 생각으로는 옛날로 돌아갈 수가 있을지라도 분명하 고 똑똑한 현실로는 옛날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영숙은 다만 아무 말 없이 서 있다.

춘우는 성이 나서 돌아선 영숙의 뒤로 달려들 듯이 허리를 구부리고 서서, 모든 것을 자백하는 듯이 뜨겁고 힘있는 목 소리로,

『영숙씨! 저는 당신에게 참으로 무례한 사람입니다. 저는 저의 마음으로 벌써 당신에게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숙의 고개는 갑자기 돌려지며 놀래는 사람처럼 춘우를 보고 다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춘우는 뒤를 따 라갔다. 그러면서,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기만 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무엇을 받으려하지는 않습니다.』

영숙은 달아날 듯이 걸음을 급히하며,

『그런 말씀은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일 그런 말씀을 하시려거든 저를 따라오지 마셔요. 저는 그런 말을 듣기 싫 어하는 사람얘요. 그러고 만일 그 말씀이 참말이시거든, 춘 우씨는 마땅히 단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단념하십쇼. 그러 고, 이제부터는 우리 집에 오시는 것과 저와 만나시는 것을 고만 두어 주셔요. 당신을 나쁘게 인정하고 이런 말씀을 하 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하더니,

『자, 아무 염려 마시고 댁으로 돌아가십시오. 저는 혼자 갈터이니.』

하고, 혼자 걸어간다. 춘우는 황망한 듯이,

『아니 전차 정류장까지 바라다 드리지오.』

하며 따라가니까

『아네요. 아무 염려 마셔요. 저 혼자 가도 아무것도 무서 울 것이 없어요.』

『그렇지만, 호젓한데.』

『호젓하지 않아요. 저는 저의 믿음이 있습니다. 어디던지 갑니다. 』

하더니, 성낸 얼굴에도 탄식하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뜻밖에 만났다가 그런 말씀 때문에 쉽게 떨어지 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매, 참으로 섭섭은 하지만 하는 수 없는 일이지요.』

춘우는 이 말을 듣더니,

『그러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가 없을까요?』

『그렇죠. 춘우씨의 가슴 속에서 그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는 언제까지든지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영원히 못 만나게 될지라도……』

『영원히요?』

영숙의 말소리는 중단이 된다.

『그래요.』

또 다시 한참 있다가,

『그것이 영원토록 당신의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으신다면 영원토록 이기겠지요. 그러나 내일이라도 그 마음이 사라지 신다 하면, 내일이라도 만나뵐 수가 있는 것이니까요.』

춘우의 가슴은 거북하였다. 영숙을 사랑하면 영원히 못 만 나고, 사랑하지 않으면 만날 수 있다. 아아, 세상은 모순이 었다.

영숙은 따라오는 춘우를 괴로운 듯이 돌아다 보며,

『자, 나를 위해서 이 자리에서 가 주십시오. 먼저 가셔요.

그러고 영원토록 만나뵙지 않게 해주셔요.』

춘우는 한참이나 장승처럼 서 있다가

『가지요. 그리고 영원토록 만나뵙지 않지요. 그러면 안녕 히 계셔요.』

하고 두 팔을 양복 주머니에 찌르고서 힘 없는 걸음을 내 어놓을 때, 한참이나 있던 영숙은 춘우를 다시 부르며,

『춘우씨!』

하고, 그 자리에 섰다. 춘우도 고개를 돌리었다. 영숙은 춘 우의 대답이 있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춘우는 참으로 영숙 의 목소리로 자기를 불렀는지 의심이 나는 것처럼, 다시 영 숙이 부르기를 기다리었다. 그러나 아무 말이 없음을 듣고, 다시 돌아서 가려 하였다. 영숙은 돌아가는 춘우를 보더니,

『춘우씨, 춘우씨!』

부르면서 두어 발자국 나서더니,

『춘우씨!』

하며, 다시 부를 때, 그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소리였다. 춘 우는 돌아선 채, 영숙의 오는 것에 바라보고만 있었다.

『춘우씨, 내일 다시 만나 게하여 주셔요. 춘우씨가 나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다 내버리시더라도 내일 다시 만나뵙게 만 하여 주셔요. 다시 만나뵈어야 하겠어요.』

춘우는 굳세고 엄한 소리로

『저는 그렇게 가볍고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다시 만나 뵈올 수가 없어요. 한번 만나 뵈옵 두 번 만나 뵈옵고는 그 짧은 시간을 위하야 저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 는 영원한 생명인 사랑을 내버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가죠.

그리고 영원히 당신을 뵈옵지 않죠. 사랑은 고통에서 고통 에 끝나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발길을 돌리어 저쪽으로 걸어갈 제, 영숙은 그 뒤를 따라 가며,

『참말 영원히 가시렵니까? 영원히 만나뵙지 못할까요.』

춘우는 하늘만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이 섰다가,

『내가 가죠. 나 하나만 가면은 모든 것은 해결될 것입니 다. 나 하나만 괴로우면, 나 하나만 아픈 가슴을 쥐고서 쓸 쓸한 가운데서 지내면 모두 다 행복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두쪽 수풀 속에서는 푸른 빛 하는 반딧불이 요리 지나고 조리 흐른다. 때때로 흔들리는 나뭇잎에서는 달빛에 번득거 리는 이슬이 풀 위에 떨어지어 굴른다. 사면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다만 두 사람을 보는 것은 씻은 듯한 하늘에 은 반 같은 달 뿐이었다. 영숙은 춘우의 가슴을 붙잡았다. 그러 고 고개를 그 위에 실었다. 춘우는 나무때기 모양으로 꿋꿋 이 서 있을 때, 영숙은 눈물 섞인 목소리로,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일지라도, 춘우씨의 말 하 나만 참말이 되게 하여 주셔요. 지금에 이 자리가 꿈도 아 니고 환영도 아닌 참말이 되게 하여 주셔요. 그러고 알 수 없는 괴로운 경우에서 저를 끌어 내어 주셔요. 네! 춘우씨!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

하는 영숙은 몸을 탁 춘우의 가슴에 실었다. 춘우는 두 팔 로 자기에게 실리는 영숙을 끼어 안으며,

『고맙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는 것은 고맙습니다. 그러 나, 영숙씨가 나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영숙씨는 다른 이 를 사랑해 주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

하고, 고개를 숙여 자기 팔에 안긴 영숙의 얼굴을 내려다 볼 때, 옥 같이 흰 얼굴에는 달빛이 비치어 한층 창백해 보 이는데, 그린듯한 눈썹만 분명하게 까맣다. 그리고 섬세한 머리털이 이마 위에서 헛날리고, 담은 입술이 말 할 수 없 이 예뻤다. 영숙의 허리를 두른 자기 팔이 영숙의 가슴 밑 을 지낼 때, 힘 있게 뛰는 심장이 춘우의 팔을 흐르는 혈관 과 부디치어 그 고동을 자기 심장에 전하고, 그 여파가 다 시 전신에 퍼진다. 춘우는 술 취했을적과 같이 태탕한 기운 이 얼굴에 올라왔다.

영숙은 고개를 내저으며,

『아네요. 아네요. 없어요. 참으로 참으로 없어요. 저는 여 태까지 참으로 남의 사랑을 받아보지도 못하였고, 주어보지 도 못하였어요. 춘우씨! 그렇지만 저는 춘우씨를 사랑하지 못할 사람야요? 춘우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예요.』

『그런 말이 아니지요. 나는 결코 당신의 사랑이 완전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을 압니다. 영숙씨는 영숙씨의 주인이 있습니다. 』

『없어요. 나의 몸의 주인은 있어도 나의 영(靈)의 주인은 없었어요. 저는 이제 그 영의 주인을 얻었어요.』

『영의 주인을 얻었다구요?』

춘우는 팔에다 힘을 주며,

『그 주인이 참으로 주인 노릇을 할 수가 있을는지 의문입 니다. 』

『아네요. 저는 그 주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무슨 짓이던지 하겠습니다.』

춘우는 꿈꾸다 일어난 사람처럼 영숙을 보더니,

『천천히 가시면서 말씀하시지요.』

하고, 팔에 실린 영숙을 이끌어 가지고 걸어간다.

『모두 다 알았습니다. 꿈 같이 받은 은혜가 또한 꿈 같이 사라질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꿈 같은 은혜를 받지 않는 것도 무정한 사람이겠죠.』

『저를 의심하지 마셔요. 꿈이 아닙니다. 참말입니다. 저는 새로운 세상에서 참으로 사람다운생활이 하고 싶어요. 저는 아직까지 사람답게 살지를 못해요. 저는 물건이나 장난감에요.』

[편집]

영숙은 자기 집에 돌아왔다. 문간을 들어서는 영숙은 아까 자기 집에서 나갈 때의 그 영숙이가 아니라, 참으로 행복을 가슴에 실고서 돌아온 영숙이었다. 영숙의 눈에도 자기 집 이 아까 나갈 때의 그 집 같지가 않고 모든 것이 변하여 보 이었다.

마루에 불이 켜 있고, 장독대에는 대림질한 빨래가 널려 있으며, 하인은 대뜰 위에서 불을 붙이고 있었다.

『마님 계시냐?』

영숙은 마당 한 가운데 서서, 하인에게 말을 붙인 그의 가 슴은 이상하게도 물결치었다.

『예.』

하고, 하인은 대답을 한 후, 다시 불을 두어번 붙이더니

『안방에서 주무셔요.』

하였다. 영숙은 공연히 죄지은 사람 같았다. 집에 있는 사 람들이 자기의 죄를 미리 아는 것처럼 그들의 눈이 자기를 책망하는 듯 하여 모든 사람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갈 때도 전같이 큰소리를 할수가 없었다. 어머 니를 부르고 싶었으나, 어머니가 일어나면, 자기에게 꾸지람 이 나릴 것 같았다. 옷걸이에 옷을 벗어 걸고, 버선을 바꾸 어 신은 후, 다시 건너방으로 건너갔을 때, 그의 눈앞에는 평화롭게 잠이 들은 청아가 자기를 기다리는 듯이 누워 있 었다.

영숙은 한참이나 청아를 내려다 보다가 그 옆으로 가까이 가 앉았다. 나팔나팔한 머리에 예쁜 입을 다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서 쌕쌕 코고는 자기 딸을 볼 때, 영숙은 여태까 지의 모든 거북한 생각을 잊어버릴 수가 있었다.

영숙은 자기 입을 청아의 따끈따끈한 뺨에 문질렀다. 새큰 한 젖냄새가 코에 스미어 들고 부드러운 살은 자기의 마음 까지 녹히어 주는 듯하였다. 세상의 모든 평화를 모아다가 작은 얼굴에 부어놓은 듯한 것을 볼 때, 영숙은 자기가 다 시 옛날의 소녀시대로 돌아간 듯하였다. 영숙은 자기 딸에 게서 얼굴을 떼고 방안을 돌려다 볼 때, 그의 눈에는 문갑 위에 놓인 자기 남편의 사진이 보이었다. 영숙은 깜짝 놀래 었다. 자기 남편은 자기를 보고서 꾸짖는 것처럼 엄한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 같았다. 영숙은 청아를 내려다 볼적의 평 화롭던 마음이 다시 괴로워 지었다. 그는 그 사진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었으나, 저쪽 미닫이틀 위에는 또 남 편의 초상화가 보이었다. 자기 남편의 초상화는 또 자기를 꾸짖는 듯 하였다.

『너는 나를 배반하였지?』

영숙은 일어섰다. 그러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자기 어머니는 쭈굴쭈굴 이맛살이 잡힌데다가 팔을 비고 누워서 잠이 들었다. 그는 코를 골았다. 까맣게 삭은 이가 입술 밖으로 내밀었다. 허리 매무시는 쭈굴쭈굴한 허리에 아무렇게나 걸리어 있고, 엄지발톱이 빠진 발을 새우 같이 꼬부리고 있었다. 가끔가끔 떨리는 한숨을 쉬기도 하고, 고 개를 장판 위에 부디칠 것처럼 꼬빡꼬빡 하였다. 영숙은 벼 개를 들어 자기 어머니의 머리에 얹어 주었다. 그리고는 한 참이나 들여다 볼 때, 그는 자기의 어머니가 말할 수 없이 원망스러웠다. 자기를 돈에 팔아 그것으로 먹고 입고 지내 고 또 자기를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는 자기 어머니가 미웠다.

조금 있다가, 어머니는 눈을 떴다. 핏기 있는 눈망울을 광 채 나게 뜨고서 한참 있더니 손으로 입을 씻으며,

『언제 왔니?』

할 때, 영숙은 자기 어머니 목소리에서 생각하던 바와는 다르게 자애로움을 느끼었다.

『온 지 얼마 안돼요.』

어머니는 잠에 취한 듯이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몇시나 되었니, 어서 건너가서 자려므나.』

하는 어머니의 말을 들을 때 자기 가슴은 따뜻한 봄 볕에 눈 슬 듯이 녹는 듯 하였다.

어머니는 다시 잠이 들었는지 아무 말이 없는데, 영숙은 다른 때와 달리 근지러운 자애를 깨닫고, 다만

『네.』

하고서, 건넌방으로 다시 건너가서, 펴 놓은 자리에 누웠 다. 방안은 쓸쓸하였다. 초가을에 나무 잎을 부스스 떨어뜨 리는 것 같이 적적하였다. 옷걸이, 반닫이, 머리맡의 문갑이 전기불 빛에 차디찬 기운이 도는 듯이 번덕거리었다.

모기장을 치었다. 물 속에 켜 놓은 듯한 불빛이 영숙의 얼 굴에 풀물을 들여놓은 듯 하였다. 영숙은 침침한 것이 싫었 다. 무엇으로 자기 가슴을 누르는 듯하여 고개를 모기장 바 깥으로 내놓고, 신문지를 들고서 소설을 읽고, 잡지를 보았 으나, 한마디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눈 앞에 는 녹음이 우거진 청량리가 보이고 뿌연 달빛이 눈 앞에 어 리이니, 춘우가 보이었다. 그러고 자기가 춘우의 가슴에 고 개를 기대로 있었던 것이 생각나며.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던 소리가 제 입에서 나가 서 제 귀에 들리는 듯 할 때, 그의 눈을 얼핏 떴다. 그리고 자기가 부끄러운 듯이 제 얼굴이 뜨거워 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내가 그이에게 그런 말을 하였을고? 내가 처음에 그 이가 손을 잡을제, 영영 거절을 하며, 버티었드면 좋았을 걸!』

하고, 자기가 자기의 한 짓이 부끄러운 중에도 허무한 듯 하여 혼자 웃었다.

[편집]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갔다. 푸른 빛이 가지가지마다 철철 흐르는 하던 녹음도 이제는 쌀쌀한 바람을 받아 빛이 여위였고, 몸이 마르게 되었다. 슬어지는 듯한 벌레의 숨모 는 소리가 나무 틈에서 난다.

바람이 한번 불면 하늘과 땅에 모든 수분(水分)이 번개치듯 쭉쭉 말라들어, 구름은 걷히고, 이슬은 마른다. 또 다시 가 을이 왔다.

춘우는 여름 옷을 벗고 가을 옷으로 바꾸어 입었다. 그리 고, 집에서 나오기는 아침 여섯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조급 한 마음으로 총총히 걸음을 걸어서 계동 박창하의 집으로 향하여 갈 때, 그의 마음은 영숙을 보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가득 찼었다. 그저께 만나본 영숙을 오늘 만나는 것이 퍽 오랜 것 같고 잊어버릴 것 같았다.

춘우가 박창하의 집에 들어서 사랑 문을 열었을 때, 방안 에는 아무도 없고, 창하가 보던 책이 방바닥에 펴 놓은 채 아무렇게나 허틀어져 있었다. 옷 거는 못에는 모자도 없고, 옷도 없었다. 쓸쓸하기 그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든 구두를 끄르고 방으로 들어갔다. 모자를 벗 어던지고 두 다리를 뻗고서, 우연히 책상 위를 보니까, 거기 에는 연필로 아무렇게나 갈긴 글발이 있었다.

그것은 창하의 편지였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기를 바라네.』

춘우는 한 옆으로 비스듬이 누워서 천정을 바라보며, 창하 오기를 기다리었다. 시계가 일곱시를 치고, 삼십분이 넘어도 창하는 오지 않았다. 춘우의 마음은 조여오기 시작하였다.

석쇠 위에 얹어 놓은 간어이 모양으로 오그라들기 시작한 다. 창하를 만나고 싶은 그것보다도 창하를 만나야 영숙의 기별을 알수 있으며, 영숙을 만날 수 있음이었다.

춘우는 일어나서 또 다시 문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캄캄한 길거리로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창하를 기다리었다. 동리 집에서 은은히 들리는 시계소리가 아홉 번을 운다. 그는 계 동 넓은 길로 모자도 쓰지 않고, 다섯 번을 오르락 내리락 하여 보았다. 그래도 창하의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다시 창하의 집 사랑으로 들어가서 방바닥 위에 사지를 쫙 펴고 죽은 사람처럼 있었다. 그러고 눈을 감고서, 나는 죽은 사람 이라는 생각을 하여 보았다. 캄캄한 무덤 속에 누워 있다고 상상해 보았다. 구데기와 땅두더쥐가 자기 몸을 파먹고, 척 척한 샘물이 자기 얼굴에 떨어진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리 고, 자기가 사랑하는 예쁜 영숙도 자기와 같이 이렇게 죽은 사람이 언젠가는 한번 그렇게 되고야 말 것이리라 .사람은 누구든 어느 때인가는 한번 죽는다 하는 생각을 할 때, 그 의 가슴에서는 불같이 뜨거운 힘이 생기는 듯 하였다. 사람 은 언제든지 죽는다. 죽기 전에 힘있게 살아보자, 무슨 짓이 든지 하여 보자, 무서울 것이 없다, 하는 생각이 나며, 피가 끓고 새 힘이 나는 듯 하였다.

영숙은 영원히 내 물건을 만들고야 말터이다. 영숙은 내것 이다 하고 입속으로 중얼거릴 때, 영숙은 영원한 자기 것이 된 것 같고,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세상의 명예와 지위와 부귀를 내던지드라도 영숙은 내던질 수 없다는 것 이, 그 때 춘우의 가슴 속에서 또 다시 한번 일어나는 뜨거 운 결심이었다.

춘우는 잠간 잠이 들었다. 어느 틈엔지 모르게 몽롱한 가 운데로 스미어 들어버렸다. 안개 끼인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고, 시계 소리가 꿈 속에 듣는 것인지 생시에 듣는 것인 지 모르겠더니, 깜박 정신이 없었다.

몇 시가 되었는지 모른다. 누구인지 춘우의 옆에 와서 부 르는 사람이 있었다.

『춘우!』

밤 기운에 적신 목소리가 춘우의 꿈 기운에 잠긴 몽롱한 정신을 반쯤 깨었다. 다시 한번

『춘우 자나.』

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춘우는 벌떡 일어났다.

『응, 창하.』

그리고 사면을 둘러 볼 때, 창하는

『웬 잠을 그렇게 자나. 매우 기달렸지?』

하며 반갑지 않은 얼굴로 춘우를 볼 때의 창하의 눈에는 즐겁지 않은 소식을 가지고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춘우는 눈을 비비며

『고만 깜박 잠이 들었어!』

하고, 우선 영숙의 소식을 물으려 하였으나, 창하의 입에서 먼저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하는 옷을 벗고,

『몇 시에 왔나?』

하고, 자리에 앉는다.

『여섯시에.』

『무엇야? 여섯시!』

하고, 창하는 놀래면서 시계를 바라 보더니,

『벌써 저렇게 되었나. 열한시 이십분일세. 이건 아주 미안 하이 그려.』

춘우는 참다 못하여,

『관철동에 가 보았나?』

하고, 고개를 들었다.

『갔었어!』

『만나보았나?』

『보았어.』

『내가 한 말을 전하였나?』

『전했지.』

『그러니까 무엇이라던가?』

『오늘은 할 수가 없는 형편이네.』

『왜?』

춘우의 눈에는 의아스러운 빛이 돌았다.

『오늘 자기 남편이 시골서 오기 때문에 올 수가 없다고 하더군.』

『남편 왔어?』

『응.』

『그래, 자네도 만나 보았나?』

『그래서, 지금에야 왔다네. 저녁을 먹고 가라고 붙잡아서, 그대로 올 수가 있던가. 그런데 저녁을 어떻게 늦게 했는지 먹은지가 얼마 되지 않아.』

춘우의 가슴에서는 쓸데없는 질투의 마음이 칼날로 자기 전신을 어이는 듯 하였다. 즐겁게 지나던 두달 동안의 꿈같 은 행복은 순간에 끊어지고 말았다. 악착스런 운명은 춘우 와 영숙의 정성껏 꾸며 놓은 사랑의 생활을 짓밟고야 말려 한다. 잔잔한 바다에 비친 달빛을 한덩이 검은 구름이 가리 어 버리고 듯하고도 뜻하지 못한 맹렬한 폭풍우는 지금에 어디서든지 닥쳐올 것이다. 물결이 솟고 배가 깨지고, 굳세 고 무서운 소리가 들린 연후에야 다시 고요하여 질 것이다.

춘우와 영숙은 그 수선스럽고 처참한 가운데를 꿰뚫고 나가 지 않고는 평화로운 저쪽 언덕에 올라 설수가 없을 것이다.

저쪽 언덕의 평화로운 나라를 찾아가지 못하면 깨지고 조각 이 나는 파멸을 당할 수밖에 없는 거룻배다. 종이로 만들어 바다에 띄워 놓은 배와 같이, 지금에 이르러 무서운 꼴을 당할 때는 오고야 말았다. 춘우는 한참이나 말이 없이 앉아 있을 때, 창하는 친구를 위하여 충고를 한다는 어조로 등대 같이 번득거리는 두 눈에 광채를 내며,

『자네는 지금 자네 일생의 크나큰 분기점에 서 있네. 지 금 자네의 한번 마음 먹는 것과 한번 발길을 내놓는 것이 자네의 일생에 총 결산을 할 때, 반 이상의 원인을 만들어 놓은 것일세.』

하며, 침중한 얼굴로 말을 하였다.

『아네, 모든 것을 아네. 내가 하고 싶은 것도 알고, 내가 해야할 것도 아네. 나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도 나, 다 벌써 부터 알고 있네, 그러나, 나는 한가지 나의 마음으로 알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네……』

『알겠네. 그것은 애인을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심리이겠지! 그러나, 자네에게 장차 닥치어 올 운명이 결코 행복스럽지 못할 것을 나는 지금 단언까지 할 수 있는 것일 세. 자네는 비 같이 쏟아지는 눈물을 흘리고, 바닷물을 마시 고 고래 같이 술을 마시고도 자네의 조그마한 가슴 속은 타 고 또 타고 해서 맨 나중에는 차디찬 잿덩어리가 되고야 자 네 얼굴에 웃음이 있을 것일세. 그러나 나는 자네의 그 웃 음을 보기를 원하지 않네.』

『자네의 청춘도 벌써 다 가고 말았는가? 청춘에는 어디까 지든지 청춘으로 지내야 할 것이다. 뱃속에서 갖나온 어린 애를 보고서, 그애가 늙어 죽은 뒤에 땅 속에 묻힌 백골을 생각하는 철학자 모양으로 자네는 너무 늙고 영리하여졌네.』

『아니, 나도 청춘을 아끼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청춘을 아끼지 않고 어떻게 하겠나. 될 수만 있으면 청년이나 만년 이나 청춘대로 살고 싶으이, 그렇지만, 맵고 날카로운 세상 은 나를 벌써 늙게 하였네. 아름다운 여자를 볼 때, 나의 가 슴이 타오르기는 고사하고, 그 분바르고 연지 칠한 피부와 살 속에 묻힌 앙상한 뼈다귀가 먼저 들여다 보이는 것을 어 찌하나. 여자의 웃음이 그 붉은 입술 위에 벌어질 때, 나는 그 웃음 때문에 가슴이 무너지어 버린 수없는 청춘남자를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네. 나는 결코 여자를 사랑할 수가 없어.』

『그러면 자네는 이 세상에 엄연한 사실로 존재한 사랑을 부인하나?』

『아니지 그렇지 않지. 나의 친구인 자네도 지금 사랑으로 써 행복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속을 조이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 사랑은 있지, 그것은 부인하지 못하지. 그렇지만 현 대에 생존한 모든 인류가 사랑을 할 수 없을 만치 병적(病 的)으로 되어 버리었다는 말일세. 지금의 이 세상을 깨뜨려 부수기 전에 결코 사람들이 사랑을 하지 못하지. 현대 사람 들은 너무 참지 못할 고민과 비애를 지내 왔네. 너무 약아 지었네. 너무 의심이 많으이, 너무 자기를 위하게 되었네.

그렇지, 하늘에 비행기가 나르고 땅으로 기차가 달음질하고, 물속으로 잠항정이 다니고, 우리가 열흘에 다니던 길을 편 안히 앉아서 하루 안에 간다는 것이 반드시 생활조건(生活 條件)이 아닐 것일세.』

춘우는 감동한 듯한 눈으로 한참이나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다가,

『오늘 밤에 내 가슴 속에 있는 것과는 자네 말하는 것이 너무 거리가 멀으이. 나는 나의 할 것이 있으니까, 사랑하는 자기 희생(自己犧牲)이야. 자기를 희생할 수 없는 사랑은 결 코 사랑이 아니니까……』

창하는 껄걸 웃으며,

『하여 보게. 해보다 그만두지는 말게. 나도 자네를 위하여 힘있는 데 까지는 다 해 보겠네. 나는 자네와 영숙의 사랑 을 완전히 이룰 수가 있다 하면 「갈릴리」바다로 예수가 걸어간 것 보다도 더 이상의 기적(奇蹟)을 행한 줄로 알 것 일세.』

춘우는 간원하듯이

『창하.』

하고, 잠깐 가까이 앉으며,

『자네는 참으로 나를 위하여 힘써 주겠나?』

하고, 손을 쥘 듯 하였다.

『조력 하지, 나는 그 기적이 보고 싶네. 만일 그 기적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 하면, 나는 이 세상이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것을 깨닫겠네. 무슨 광명을 찾아내겠네.』

『그러면, 나는 한가지 힘을 더 얻겠네. 나는 모든 것을 내 버리고 자네가 말하는 그 기적을 꼭 실현해 보겠네……아니 지 기적이 아니자, 으레히 될 일이지.』

『나는 자네에게 말하여 두네. 첫째로 자네는 자네 가정을 떠나고, 둘째로 자네는 자네 몸을 제단 위에 올려 놓게.』

『알았네.』

『그러고, 자네는 주고서 받기를 원하지 말게. 만일 자네가 완전히 나의 지금 한 말을 실행할 수가 있다 하면 자네에게 는 그래도 무엇이 남을 터이니까……자네가 지나간 두어달 을 꿈 속에 지나 왔지만, 그 꿈을 깨게 된 때가 온 오늘에 자네는 참으로 세상을 알 수가 있을 것이지.』

[편집]

그날 저녁 영숙의 집 공기는 매우 엄숙하여 졌다.

시시덕거리는 하인들의 얼굴들은 주인이 오자, 성난 사람 들처럼 입들을 다물고, 소리를 높이어 이야기 하던 안잠자 기는 무슨 말 한마디 하려도 뒷구멍으로 수근거린다. 영숙 의 어머니는 담뱃대만을 들고서 멀거니 앉아 있고 영숙의 얼굴에는 숨길수 없는 괴로운 빛이 시들픈 웃음과 함께 떠 돈다.

건넌방 아랫목에 영숙의 남편이 다리를 뻗고 누워 있고, 영숙은 그 옆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잡짓장을 뒤적어리고 있다. 영숙의 가슴은 답답한 기운으로 내리 눌리듯 한데, 영 숙의 남편은 무슨 큰일을 생각하는 것처럼 침중한 얼굴에 둥근 눈만 껌벅어리고 있었다. 영숙은 다만 가벼운 기침으 로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려 하였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영 숙의 남편은 더 참을 수 없어서 말을 꺼내는 것처럼

『여보,』

하고, 영숙을 불렀다. 영숙은 고개를 돌리어

『네.』

하고, 자기 남편을 볼 때, 남편의 얼굴은 거짓말한 사람 모 양으로 여전히 엄연할 뿐이었다. 영숙은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왜 그러세요?』

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방바닥에 있는 잡지 그림만 내려 다 보았다.

『당신이 나의 마음을 얼마나 알아주는지, 나는 언제든지 한번 물어보리라고 벼르었으면서도 여태까지 물어보지를 못 하였는데, 얼마나 영숙은 나를 생각해쥬?』

하며, 고개를 이쪽으로 돌린다. 영숙은 퍽이나 부끄럽게 대 답하기가 어렵다는 듯이, 다만 웃음만 웃고 아무 말이 없을 뿐이다.

『대답을 좀 해봐요.』

하고, 철수는 영숙의 얼굴을 뚫어지듯이 본다.

『무슨 대답을 해요?』

『내가 말한데 대하여 말야?』

『그런 말씀을 지금 나에게 물어보실 것이 무엇얘요?』

『아니, 나는 말로서 그 대답이 듣고 싶으니까 말요.』

『대답하나 아니하나 벌써부터 아시겠지요.』

『무엇을?』

『무엇이 무엇얘요?』

하고, 매무시를 잠깐 고쳐 매다가 암상스러운 얼굴에도 참 지 못해서 나오는 웃음이 입 가장자리에 새여 나온다.

철수는 무참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어 돌아누우면서,

『나는 모르겠소. 물어보는 내가 잘못이지.』

하니까, 영숙은 다시 철수의 어깨를 끌어 잡아다니며

『왜, 돌아드러누셔요. 내가 그렇게도 보기 싫으세요. 보기 싫은 사람의 집에를 무엇하러 오셨어요?』

철수는 열이 난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듯이 돌아 누웠다. 영숙은 강짜나 올리는 듯이,

『왜, 말씀을 않으시지요. 대답 좀 하십쇼. 사람의 말이 말 같이 않습니까? 』

철수는 팔꿈치로 지근덕어리는 영숙의 팔을 뿌리치며,

『듣기 싫어, 내가 대답을 아니했어?』

하고, 흘긴 눈으로 영숙을 본다.

『그러면, 누가 말대답을 아니한 사람이 있어요?』

『그는 모르겠소. 그러나 저러나, 오늘은 내가 소문을 들으 니까 좋은 소문이 들립디다. 날더러 보기 싫여한다 합디다 마는, 영숙이야말로 내가 그렇게 보고싶지는 않으리다.』

하며, 다시 너하고는 말하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린다.

영숙의 가슴은 뜨끔하였다. 새파란 기운이 날 듯 하던 그의 목소리는 어디로인지 쑥 들어가 버린 듯 하였다. 그러나,

『소문이 무슨 소문얘요?』

하고, 철수를 떡덩어리 반죽하듯 꽉꽉 주무르며 말을 한다.

『대답하셔요. 왜 말을 안 하셔요. 그 소문이란 무슨 소문 얘요?』

하고, 재쳐 묻기는 하나, 으례 언제든지 한번 있고야 말 이 일이 갑작스럽게도 아무 준비가 없을 때, 철수에게서 먼저 시작된 것이 영숙에게는 의외일뿐 아니라, 기선(機先)을 눌 린 것 같아서 그녀에게는 더욱 견딜수 없는 부끄러움과 억 지가 생기게 되었다.

철수는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그것은 들어서 무엇하료. 내 입으로 말하기는 싫소. 나는 이제야 나의 몸이 불쌍한 것을 알았소.』

『무엇이 불쌍해요? 왜 말을 못하셔요?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얘요?』

『불쌍하지 불쌍해.』

『무엇이 불쌍해요? 당신은 남부럽지 않은 재산이 있지요.

또 아내가 있지요. 자녀가 있지요. 무엇이 불쌍해요.』

『그렇겠지. 남들은 날더러 팔자 좋은 사람이라 하겠지. 그 렇지만, 나같이 불쌍한 사람이 없어, 나는 재산이 있기 때문 에 불행해. 아내가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 나의 마음보다도 나의 재산을 위하여 나를 위하는 사람 뿐이야. 만일 나에게 재산이 없어진다 하면, 나를 따라 올 사람은 하나도 없을 터이지. 나도 내 가하고 싶어서 영숙을 이렇게 내버려둔 것 은 아니요. 영숙은 언제든지 어머니께 시집 잘못 보내 주었 다고 원망하는 말을 내가 한두번 들은 바가 아니오. 그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참으로 섭섭한 마음이 생기고 당신이 야 속합디다. 나도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비애를 모르는 바가 아니요.』

영숙의 마음은 변동이 생기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춘우가 보이었다가 다시 눈 앞에 있는 자기 남편이 보이었다. 영숙 의 마음 속에는 춘우도 그립지 않은 바가 아니지만, 지금 자기에게 애원 비슷하게, 원망 비슷하게 말을 하는 자기 남 편이 한편으로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서 인정이 일어날 때 의리가 생겨나는 듯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와 같이 살고 어여쁜 딸을 낳고, 또는 자기 어 머니와 자기를 살리는 자기 남편을 자기가 배반하는 것은?

하는 생각이 날 때, 그녀의 가슴에는 괴로움이 있었다. 춘우 의 따뜻한 사랑을 내버릴까? 자기 남편을 의리로 말미암아 쫓을까? 여기에 비로소 영숙은 두 남자를 저울질하게 되었 다. 영숙은 어느 편이든지 저울 추가 기울어지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제가 불만족하게 하여 드린 것이 무엇얘요?』

영숙은 말을 낮추어서 애원하는 듯 하기도 하고, 또는 위 로하는 듯한 어조로 말을 하였다.

『당신이 나에게 불만족을 준 것은 하나도 없소. 도리어 내가 당신에게 불만족을 준 것이 말할 수 없이 많지.』

『무엇이 그리 많아요?』

『무엇이라고 꼭 말을 하리까?』

『하셔요.』

『내가 첫째로 당신에게 나의 사랑의 전부를 주지 못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말할 수 없이 죄악이요. 내가 나 한몸뚱 이로서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것이 절대로 죄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 내가 내 몸에서 나 자식들을 볼적마다 도리어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소. 그러나 사랑 은 언제든지 하나인 것이요. 결코 둘이 아니오. 오늘에 나는 형식으로는 두 여자를 데리고 살지만, 나의 참사랑 이가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는 것이요. 당신은 남의 첩 된 것을 언 제든지 불만족으로 생각하고 비관까지 하나 봅디다만, 사랑 이라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형식을 초월한 것이요. 무엇이 든지 좋소. 어떠한 지위도 좋을 것이요.』

영숙은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조금 불그레하여지며

『저는 조금도 그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이 아네요. 그렇지 요, 당신이 나를 어떠한 지위에 두시든지 나는 완전한 사랑 이 받고 싶어요.』

『완전한 사랑?』

철수는 한참이나 가만히 생각하고 있더니,

『그렇겠지. 누구든지 완전한 사랑을 받고 싶겠지? 그러나, 당신은 참으로 나에게 완전한 사랑을 주는 사람이요? 당신 은 참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나를 사랑하오?』

영숙은 대답하기를 주저하였다. 참으로 말하려면, 자기가 자기 남편을 참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숙이 자기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보다는 정리로써 그를 따르고 의 리로써 그에게 일생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숙은 그 자리에서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는 없어서

『그러면 나의 사랑을 의심한다는 말씀이지요?』

하고, 도리어 자기 남편을 반박하였다. 철수는 시들스럽다 는 듯이 한번 픽 웃으면서,

『의심하지는 않소. 결코 의심하지는 않소. 그러나 나는 당 신에게 조금도 불만하게 한 일이 없는 것을 나는 단언할 수 가 있다는 말은 하고 싶소!』

『불만족하게 한 일이 없다구요? 흥! 좋은 말씀입니다. 그 렇지만 나는 당신에게 그런 말씀을 할 수는 없어요.』

[편집]

춘우는 자기 집을 향하여 간다. 새로 한시가 넘어서 서대 문밖 넓은 길로 향하여 갈 때, 그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비애로 가득 찼다. 하늘을 치어다보면, 심심한 듯 말 없이 번쩍거리는 별들이 스러지어 가는 촛불처럼 힘 었이 번뜩거 리고 땅에는 두 줄기 전차 궤도가 엉금엉금 기어왔다. 또 다시 기어가는 듯이 깔리어 있다. 길거리에 켜 있는 전등불 은 꼭꼭 닫힌 빈지를 비치고 저 쪽에서는 술 먹은 사람이 비척거리며 이쪽으로 온다.

컴컴한 정동(貞洞) 길을 지내놓고, 옛적 서대문 마루턱에 올라섰을 때, 그는 다시금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발길을 떼 어 놓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에는 적적한 전기등 켠 한간 방이 자기를 기다릴 것을 생각할 때 그의 가슴에는 찬 바람 이 지나가는 듯한 공허(空虛)를 깨달았다. 그러고 다시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하여, 자기 기억(記憶)속에 감추어 두었던 영숙의 환영을 끌어내어 자기 눈앞에 갖다 놓은 후, 자기 마음대로 끝없는 공상으로 그 빈 것을 채우고, 또 취하여 보았다. 두달 동안 지나던 즐겁던 과거를 생각하고, 또는 장 래의 행복을 그리어 보았다. 그의 눈 앞에는 주마등(走馬燈) 과 같이 달아나는 모든 환상이 파노라마와 같이 나타났다가 살아지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현실(現實)로 돌아와 길 위 에 서서 걸어가는 자기를 찾아내었을 때, 자기의 손에는 무 서운 듯이 끌려오는 단장이 땅 위 모래에 곡선을 그리고 있 을 뿐이었다. 여태까지 자기와 이야기하고, 서로 웃고 즐기 는 듯 하던 영숙은 멀리 멀리 공중 위로 달아나, 자기의 힘 으로는 끌어낼 수 없는 철수의 품 안에 안기어 고단한 꿈나 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는 춘우의 마음은 이 세상의 주인이 과연 어 느 곳에 따로이 존재하였다 하면 그의 몸을 붙잡고 몸부림 이라도 하고 싶을만치 무정하였다. 자기의 가슴을 이렇게 쓸쓸하게 하고, 자기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듯한 것은 영숙 자신의 사랑이 박약함도 아니요, 당당히 그렇게 할 권리를 가진 영숙의 남편도 아니라, 그것은 알 수 없는 수단을 부 리는 이 세상의 주인이었다.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사람이건 공통된 특성 이다. 영숙이가 비록 마음을 다하여 자기를 사랑한다 하더 라도 지금에 영숙은 자기의 것이 아니다. 앉고 서고, 오고 가고, 웃고 우는 것이 모두 다 자기의 것이 되지 않고는 참 으로 영숙이 자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영숙이 나를 보고 웃던 얼굴로 철수를 보 고 웃으며, 나의 가슴에 안겨 울던 눈물을 철수의 가슴에서 도 울을 터이지, 내 손을 잡았던 손으로 철수의 손을 쥐었 을 것이며, 모든 애정을 다하여 말하던 그 붉은 입술이 철 수의 얼굴을 치어다보고 방싯거리어 질터이지, 할 때 춘우 는 캄캄한 밤중 넓은 길 가운데 발을 딱 멈추고 서 있었다.

그의 가슴은 시기와 분함과 더러움으로 찼었다. 그러다가 다시 그 부드러운 영숙의 몸이 철수의 팔에 안기었고 또는 철수가 하고 싶은대로 자기의 욕망을 채우렷다, 할 때 그는 목구멍에 납을 끓여 붓는 듯 하였다. 그러고는, 혼잣말로

『가려거든 영원히 가버려라. 나의 기억에서 영숙이란 두 글자를 빼어가거라.』

하고는 한참이나 서서 공중을 치어다 볼 때 그는 영숙을 영영 잃어버린 듯하여 섭섭한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그러 고는, 자기 혼자 속타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야속하였다.

한참이나 서 있다가 춘우는 굳은 결심을 한 것처럼 발길을 내놓으며,

『아니다. 어서 가지. 세상을 잊어버리고, 가서 자는 것이 상책이다.』

하고는, 서대문 우편국을 돌아섰다. 길 옆에는 구루마가 나 란히 놓여 있고 옆의 선술집에는 술군 두서넛이 젓가락을 들고서 빙빙 돈다. 침침한 감옥 출장소를 지나올 때, 그는 문득 옛날생각이 났다. 자기가 어렸을 때 붉은 옷 입고 쇠 사슬 차고 똥통구루마를 끌고 가는 전중이가 저희들끼리 이 야기를 하며, 무슨 기쁜 일이 있는 것처럼 빙글빙글 웃는 것을 보고, 그때 춘우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당한 듯이 며칠을 궁리하다가 흐지부지한 일이 있었다.

『전중이가 웃는다.』

『전중이가 무슨 즐거움이 있어 웃으랴!』

어린애 때에는 참으로 알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자기가 이 자리에서 울고 모든 것이 비애로 가득차 있지마 는, 언젠가 후에는 웃을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감옥속같이 쓸쓸한 조선인 사회에서 사랑하 는 애인의 사랑까지 잃어버린 듯한 생각을 가진 춘우도 웃 을 때가 있는 것이다.

춘우는 꿈길을 걸어가는 사람처럼 자기 집 문간에 와 서서 대문을 밀었다. 문은 힘없이 열리었다. 그러나 그 문이 결코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문은 아니었다. 자기를 기다리기 위 하여 열어놓은 것은 아니었다. 늦게 들어오는 자기에게 일 일이 문을 열어주기 귀찮으니까 그대로 열어두는 것이었다.

문을 닫아 건 후에 자기 방으로 들어가 보니까, 아까 아침 자리 속에서 보다가 놓고 나간 책이 그대로 책상에서 주인 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는 펴놓았으나, 방에서는 적적한 기운이 돌 뿐이다.

춘우는 자리 위에 그대로 쓰러져 고단한 다리를 펴려하여 두 다리를 쭉 뻗히었다. 그의 머리는 혼탁한 피가 몰려 갔 다 몰려 와 똑똑한 의식과 분명한 감정을 찾아낼 수가 없었 다. 조금 있다가 아버지의 큰 기침 소리가 안방에서 들리었 다. 그리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리었다. 춘우는 자기 아 버지가 약주 취하신 것을 알았다. 또 다시 불유쾌한 생각이 나며, 공연히 귀찮은 생각이 났다. 춘우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돌아간 어머니 생각이 나며,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 다 어린 동생이 생각났다. 어머니의 돌아간 것이 자기 아버 지와 자기와 자기 동생에게 불행을 준 것은 사실이다. 자기 아버지의 가슴에 굵다란 못을 박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리 고 자기의 행복을 하나 뺏아간 간 일평생 잊을수 없는 사실 이다. 그리고 자기의 어린 동생 인우(麟雨)를 생각할 때마다 춘우는 말할 수 없이 불쌍하였다. 자기는 날마다 아침이면 인우를 데리고 옛날 이야기도 하고, 창가도 가르쳐 주었다.

자기가 시골서 돌아온 후, 가장 귀여운 친구중에 인우는 뺄 수가 없었다.

자기 동생과 같이 노래를 할 때, 그는 비로소 세상에도 낙 원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오늘도 춘우는 자기 방으로 인우를 부르려 하였으나 너무 늦게 돌아온 자기로서 깊이 잠이 든 동생을 부르는 것이 도리어 인우를 괴롭게 할 것이 요, 또 안방에서 주무시는 아버지가 깨실까 하여 그대로 누 워서 잠을 자리라 하였다. 잠은 조금도 오지 않았다. 갑갑한 심사가 자기 누워있는 자리 밑에 가시로 방석을 만들어 깔 아 놓은 것 같이 찌르는 듯 하여 이리 돌아 눕고 저리 뒤치 게 하여 조금도 편하지 못하다. 일부러 눈을 감고서 잠을 청하려고 애를 썼으나 가슴 속에 공연한 비애와 불만이 가 득차서 녹아지지 않으므로 잘수가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 이 두 손을 머리맡으로 뻗어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책을 다시 들어 읽었다. 그러나 까뭇까뭇 하고 꼬불꼬불한 글자 가 글자대로 눈에 비칠 뿐이요 의미는 하나도 알 수가 없었 다. 막연한 무엇이 머리 속에 비치었다가 사라질 뿐이다. 다 시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전신의 피곤한 근육이 어떤 때 는 저 혼자 불불 떨리기도 하고, 몰려다니는 피가 쏠려갔다 쏠려오는 듯 하기도 하였다. 눈감은 춘우의 눈 속에는 다시 영숙이가 보였다가 사라지고, 다시 철수가 보이었다. 영숙이 가 보일 때에는 그래도 자기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주고, 무슨 희망이 가슴에 차는 듯 하였으며, 철수가 보일 때에는 자기 마음 한 가운데에 조소하는 생각과 또는 멸시하는 생 각이 자기의 우월감과 함께 일어났으나, 영숙과 철수 두 사 람이 한꺼번에 생각이 날 때에는, 그는 그 두 사람이 모두 보기가 싫고 밉고, 질투스러웠다. 철수는 영숙을 빼앗아간 것 같고, 영숙은 자기를 배반한 것 같았다. 그러한 생각을 할 때마다 컴컴한 밤이 몹시도 싫었다. 쉿덩이 같이 무거운 암흑이 자기의 전신을 내리 눌르는 것 같아서, 그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오늘 자기가 만나자고 약조한 곳에 오지 않은 것을 생각할 때 불길 같은 의심이 더럭 일어나기 시작 하였다. 영숙은 절대로 자기를 사랑하여 주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만일 그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한다 하면, 자기의 남 편이 왔거나 무엇이 왔거나 반드시 자기를 찾아와 주었을 것이다. 자기의 처지를 반성하는 동시에 또한 영숙을 의심 하게 되었다. 자기는 인물도 잘 생기지 못했고, 학식과 재주 와 또는 재산도 없는 불쌍한 가운데도 더 불쌍한 사람이다.

그와 같은 사람을 다만 옛날에 함께 학교에 다니었다는 박 약한 조건으로써 사랑한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자기 가 남의 첩이 되어 세상에서 죄 있는 사람처럼 인정하는 것 이 싫어서 자기의 사회상 지위를 다시 하기 위하여, 나를 사랑한다 하면, 그것은 너무나 천박한 생각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만일 자기가 이 세상 모든 조건을 떠나서 참으로 나 라고 하는 사람 하나를 사랑한다 하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고 자기의 허영적 명예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나를 한낱 이용물로 쓰겠다 하는 생각이라면, 오늘부터라도 아주 끊어 버리고, 만나보지 않는 것이 가장 옳은 도리라고 생각하였다.

춘우는 다섯시 치는 소리가 꿈속에 들은 것인지 모를만치 혼수상태에 빠지었다가, 어느 덧 눈을 떠보니까, 날이 환하 게 밝았었다. 그는 자리 속에 누어 있는 것이 갑갑하여, 다 른 날보다 유달리 일찍 일어났다.

인우가 두 눈에 눈꼽이 덕지덕지한 채, 방문을 열고 건너 왔다. 춘우를 보는 인우의 얼굴은 또 무슨 불안한 소식을 가지고 온 것 같이 주저주저하는 표정이었다. 인우는 슬며 시 옆으로 와서 춘우이 눈치를 살피더니, 무슨 말을 할 듯 이 잠깐 가까이 앉으려 하다가, 다시 뒤로 물러섰다. 춘우는 찌뿌두두한 얼굴을 비비며, 인우의 이상스러운 꼴을 보고서,

『거기 앉아라.』

하고 앉기를 청하였다. 인우는 비스듬히 쓰러지는 것처럼 춘우의 무릎에 기대앉으며,

『저-』

하고 말을 끄내려 하였다. 춘우는 인우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춥지 않으냐?』

하고서 다시 무릎 위다가 끌어 앉히며,

『어제 밤에 아버지가 약주 취하시지 않으셨든?』

인우는 손가락을 입에다 물고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부끄 럽다는 듯이 몸을 비비꼬며 고개만 끄덕끄덕 하면서, 얼굴 에는 웃음을 띠우고, 참아 입밖에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응.』

하였다. 춘우는 그 부끄러워 하는 것이 몹시 귀여워서 맞 웃음을 치면서,

『주정하시든?』

하니까, 인우는 또 끄덕끄덕 할 뿐이더니,

『저!』

하고, 저 소리를 길게 빼어 말을 했다.

춘우는 그 「저」소리를 받아서,

『그래.』

하였다.

『아버니가 밤새도록 우셨어.』

『어제 낮에 돈 달라고 오는 사람이 있었지? 그 돈 달라고 오는이 말야 그이가 와서 돈달 라하고 떠들고 간 뒤에, 아 버지가 약주를 잡숩고 오시더니, 자꾸 우셨다누!』

그 돈 달라고 온다는 사람이란 말할 것도 없이 빚쟁이다.

춘우는 자기 아버지가 울었다는 말이 어린 인우의 순결무구 한 감정으로 한번 체질하듯이 걸러지어서 귀여운 입을 거치 어 나온 것을 들을 때, 무슨 알수 없는 정서(情緖)가 자기 가슴 속에서 머리를 번쩍 들더니 그것이 온 전신으로 확 퍼 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말끝이 나온 인우의 입에서는 자 꾸 자꾸 꼬리를 이어 나온다.

『그러구 언니! 인제는 우리 집안 식구가 모두 죽는대.』

철모르는 인우의 입에서도 「죽는대」라는 말소리가 나올 때에는 얼굴빛에 엄숙하고도 근심스러운 빛이 보이었다. 사 람이 본능적으로 타고 나온 관념 중에 가장 극단과 극단 가 는 두 가지 관념은 죽는다는 것과 살겠다는 것이다. 이 두 관념 중에 죽는다는 것은 가장 비참한 것을 대표한 것이요, 산다는 것은 가장 행복스럽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어린 인우의 가슴 속에서도 죽는다는 말을 할 때에는 그 가장 비 참하다는 관념이 자기가 당해보지 못한 그 어떠한 사실을 일으키게 하는 듯하였다.

춘우는 인우의 말을 듣고서, 어저께 일어난 무슨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자기 집은 지금 파산을 당하게 되었다. 날 마다 찾아오는 이가 반갑지 못한 채귀(債鬼)들이요, 덜미를 누르는 것은 무서운 생활 난이다. 오늘 이렇게 자기 집을 영락시킨 원인은 자기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자식의 전도를 생각하여 다시 아내를 얻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였다. 자 식의 전도를 생각하여 다시 아내를 얻지 않겠다고 하였으 나, 전에는 입에다가 대지도 않던 술을 마시기 시작하더니, 집안 일을 돌아보지 않고, 세상을 엄벙덩하는 가운데 보내 게 되었다. 그러더니 아무리 자기 아내를 얻지 않는다고 맹 세는 하였으나, 성욕을 가진 그로서 여자와 조금도 관계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방탕계에 발을 들 여 놓게 되더니, 그 때부터는 돈을 물 쓰듯 하기 시작하였 다. 춘우의 할아버지가 원깨나 다닐 때 모아 놓은 볏 백이 나 하던 재물은 떡덩어리 떼어 먹듯, 무척무척 없어지더니, 지금와서는 재산과 부채를 따져보면 집간 남은 것하고 땅뙤 기 나남저지를 모두 팔아도 빚을 갚으려면 몇 곱절이 더 있 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알면서도, 질질 끌리어 진흙의 구렁에로 들어간 춘우의 아버지는 지금에 가정(家政)을 만회 할 길이 없어지니까, 다시 타락에 빠지게 되었다. 친구의 권 고와 일가의 주선으로 아내라고 하나 갖다 놓기는 놓았으 나, 그 아내의 애정이 깊이깊이 속이 썩은 춘우의 아버지와 마음을 바루 잡아 놓기에는 너무 힘이 약하였다.

그래서 춘우의 아버지는 어느 곳에 하소연할 곳이 없고, 의논 한마디 할 곳이 없어졌으나, 그래도 믿을 곳은 춘우 밖에 없어서, 춘우에게 집안 살림을 떼어 맡기려고 하나, 몇 해 전에 춘우의 아버지가 한참 방탕히 지낼 때, 춘우가 여 러번 간한 일이 있었으나, 춘우 아버지는 춘우의 말을 듣지 않고, 어느 때 한번은 춘우에게, 너는 내 자식이 아니란 말 까지 한 일이 있었다. 춘우는 그 말 한마디를 들을 때에, 원 통함이 골수에 사무치는 듯 하였다. 그래서 몇해동안 시골 과 내지로 돌아다닌 일이 있다가, 다시 경성에 돌아온 것이 다. 경성에 돌아와 보니까 자기의 책임이 무거워 지었다. 한 집안의 큰 자식으로 자기 아버지가 진 빚을 갚지 않을 수 없다. 빚은 고사하고 당장 오늘부터라도 나가서 일을 해야 어린 동생을 굶기지 않을 지경이다. 그러한 책임감을 가지 고 있는 데다가 이제 와서는 춘우의 아버지도 정식으로 춘 우에게다가 집안 일을 맡아 보아라. 늙은 아비를 먹여 살려 라, 남의 자식된 직책을 지켜라 하고, 날마다 때마다 만나는 대로 그 말에 머리를 셀 지경이다. 그러나 춘우의 힘으로는 그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디 가서 자기 밥벌이 하 나 할 수 없는 처지에 그러한 무거운 짐까지 지기에는 춘우 의 힘이 부족하다. 때때로 자기를 번민시키는 책임관념, 어 린 동생에게 향하는 본능적 애정, 부모에게 대한 뗄수 없는 의리가 가슴 속에서 불같이 일어날 때마다 춘우는 땅을 치 고 울거나, 가슴을 두드리고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 다가, 그것이 극도를 지나가면 자기의 피가 모두 얼음장 같 이 식어버린 듯이 냉정하여 지고, 자기의 몸을 아무렇게나 내던지어서 죽거나 살거나 되는대로 지내리라 하는 생각이 나며, 아버지도 밉고, 모든 것이 모두 미웠다. 그러나 어린 인우 하나는 언제든지 잊을 수가 없었다. 인우는 자기의 친 구요, 애인이요, 모든 행복을 주는 사람가운데에 하나이었 다. 인우를 볼 때나 생각할 때마다 가슴 속에서 몰려나오는 연민의 정을 아무리 하여도 그 어린 동생을 자기에게서 떠 나게 할 수 없었다. 지금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인우는 벌써부터 그 따뜻한 유년시기에 외로움과 처량함으로 차디 차고 쓸쓸한 세상맛을 보게 된 것을 생각할 때 다만 조금이 라도 그 천진난만한 어린 시기를 그대로 지내게 하여 주고 싶었다. 사람이 그러지 않아도 나이 먹음을 따라서 모든 괴 로움을 맛보지 아낳지 못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애석한 일 인데,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에 차디찬 서리가 내리는 것 같 이 흠 없는 어린 마음이 일즉이 시들어 버릴 것을 생각하 매,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이 가끔가끔 춘우의 두 눈에 눈물 을 머금게 하였다.

춘우의 아버지는 춘우와 마음이 맞지 않은 후부터는 인우 까지 미워하였다. 더구나 아버지 되는 자기보다 형되는 춘 우를 인우가 더 따르는 것을 볼 때, 알수 없는 질투의 마음 이 생기며, 인우를 냉담하게 굴었다. 공연한 꾸지람과 핀잔 을 주기도 하고, 쓸데없는 트집을 잡아서 때려주기도 하였다.

어제 저녁에도 자기다 늦게 돌아와서 알지는 못하나, 필연 코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었을 것이요, 공연히 부대낀 것 이 틀림 없다. 숙성한 인우가 비록 말로는 하지 않으나 그 표정을 보아서 어제 저녁 일을 추측할 수가 있다.

춘우는 다시 인우의 손목을 쥐면서,

『어제 저녁에도 꾸지람 들었니?』

하니까, 인우는 안방 쪽을 향하여 보다가, 고개를 돌리면서 조심스러운 듯이

『응.』

말하였다.

『무엇이라 하시든?』

『형님허구 나하고는 어디로 가라구 그리셔.』

하는 말을 그친 인우는 손가락으로 춘우 무릎에 있는 실밥 을 뽑으며,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춘우는 이 말을 듣고 서 울분이 납덩이 같이 가슴을 누르는 듯 하였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서 벙어리가 된 것 같이 멀거니 앉아 있을 뿐 이었다. 인우는 다시 춘우의 얼굴만 살피더니, 최후에 용기 를 내는 것처럼

『언니! 우리는 딴데 가서 삽시다. 날마다 아버지는 걱정만 하시니……딴데 가서 살아도 괜찮우? 나는 언니허구 살면은 어디든지 좋아!』

춘우의 가슴은 무엇으로 찌르는 듯 하였다. 그러나, 어린 동생까지 타락을 시켜서야 될 일이냐? 아무리 부모가 자기 에게 잘못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부모를 거역하리라고 동생에게 가르킬 수는 없었다.

『그런 소리 말아. 아버지가 다 너를 예뻐서 잘 하라고 그 러시는 것이지, 미워서 그러시는 것은 아냐. 가기는 어디를 가니, 우리 집을 내버리고……너 다른데 가면은 밥 먹을 곳 이 있니? 옷 입고 뜻뜻하게 잘 곳이 있니. 집에 있으면, 아 버지가 밥도 먹이고, 옷도 입히고, 뜻뜻하게 자게도 하여 주 지 않니! 아버지는 우리를 귀여워하시나, 화가 나시니까 그 러시는 것이지. 아버지 없는 아이가 되어 보아라, 얼마나 불 쌍하였겠나.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어서, 얻어 먹으러 다니는 거지가 되었는지도 모르지.』

인우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등을 어루만지는 춘우의 말소 리에는 아침 동산에 어리인 안개같은 우수와 비애가 섞이었 다. 인우는 자기 형의 말을 알아듣기는 듣지만, 그래도 항상 자기 마음 한 구퉁이가 언제든지 비어 있는 것을 무엇으로 채울는지 몰라서, 적적하고 외로움을 느낄 대마다 자기 형 을 보고 언제든지 묻는 것처럼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어머니 있는 사람이 되우! 남들은 어머니가 버선도 해주고, 어디 갔다 오면 과일도 사다 주던 데, 나도 어머니가 있었는지 좋겠어! 우리 어머니(서모)는 어째 우리 정말 어머니 같지가 않아! 나는 정말 어머니가 있었으면 좋겠네! 정말 나를 귀애해 주는 어머니 말야? 나 는 언제나 정말 어머니가 생기우?』

춘우는 울고 싶었다. 무엇이라 말할 수가 없었다. 너의 어 머니, 정말 어머니는 다시 오지 못하실 곳으로 영영 가버리 셨단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또 다시 오신다고 말할 수도 없다. 어머니가 그리운 것은 너뿐이 아니다. 나이 먹어 철이 난 나도 어머니가 이렇게 그리웁거든, 나어린 너로서야 아 니 그리울 리가 있겠느냐? 춘우는 다시

『인제 오신단다. 네가 내 나이만큼 먹고, 어른이 되면은 그 때는 네가 너의 어머니가 어디 계신 줄도 알고, 참말 어 머니가 오시게 된단다.』

인우는 비웃는 듯이 형을 치어다보며,

『정말요? 거짓말! 막동네 아지머이(이웃집 여자)가 그러는 데 우리 어머니는 죽었다는데, 죽었으니까 다시 오지 않는대.』

춘우는 옆의 집 여자를 원망스러운 생각이 났다. 어린애에 게 부질없는 소리를 하여 서글픈 생각이 나게 할 것이 무엇 이냐?

『아니, 그렇지만, 다시 오시지는 않는 것이 아니라, 네가 아니 먹으면, 어머니 계신 곳에 갈 수도 있고, 또 어머니가 너에게 오실 수도 있단다. 내 말을 믿어라. 나는 너에게 거 짓말을 하지 않으이.』

『그러면, 언니는 어머니 한테 가끔가끔 가시우. 또 어머니 도 가끔가끔 언니에게 오시구 그러면 왜 나한테는 오시지 않아?』

이러한 경우에 춘우는 양심의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어 린 아이의 마음을 위로하고 믿음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 거 짓말을 아니 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린 아이를 보기 에 부끄러운 생각이 났다. 그러나, 이것이 소위 사람이 살아 가는데 없지 못할 것이라고 수단이었다.

『요사이는 오시지 않는단다. 차차 겨울이 되면 날이 추워 지니까 오실 수가 없지 않겠니? 그러니까 내년 봄에는 눈이 녹고 날이 따뜻하여 질 때 오시게 되지, 꽃도 피고 나비도 날아 다니고 할 때 말야.』

『그러면 그 때가 오려면 며칠 밤을 자야 하우?』

『인제도 여러 백날을 자야 하지.』

『어이구, 왜 그렇게 많아? 그러면 그 때는 꼭 오시지?』

『암, 오시지.』

『그러면, 나는 그 때까지 기달리고 있을 터이야.』

『그래, 기달려라! 그런데, 우리 창가 한마디 할까?』

『창가? 무슨 창가?』

인우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몸을 비비 꼬더니

『언니가 먼저 하우.』

이 때에 안방에서는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서모가 놋대야에 세숫물을 떠다가 마루 끝에 놓고, 인우를 부르더니

『인우야? 언니 세수하시라구 그래라.』

하고 소금 그릇을 갖다 놓았다. 춘우는 인우 대신

『네.』

대답을 하고서, 둘이서 병창하던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려 문밖으로 나왔다.

세수를 다 하고 석경을 들여다 보며, 수건질을 할 때에 자 기 얼굴이 수척하여 진것을 발견하였다. 꺼뭇꺼뭇한 수염이 거칠거칠하게 나고, 가뜩이나 내민 광대뼈가 우묵하게 들어 간 두 뺨과 두 눈 사이에 우뚝하게 솟아다. 그러고 우물 속 에서 하늘 빛을 반사하는 불빛같이 음침한 두 눈방울이 힘 없이 굴러다니는 것이 자기가 자기 눈을 보는 춘우에게도 무서움이 생길 듯하게 한다. 말이 없이 다문 입과 잠간 찌 프려진 듯한 이맛살이 영원토록 웃지 않는 사람과 같이 보 인다. 비석 위에 때때로 쏟아지는 비가 어느 틈인지 그 글 자를 흐려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끄집어 말할 수 없는 불행의 인상이 어느덧 춘우의 얼굴에서 핏기 있고 생 생한 젊은 기운을 깎아버린 듯 하였다.

춘우는 석경을 들여다 보며, 쓰디 쓴 웃음을 웃어 보았다.

시꺼먼 입속에서 윤기가 나는 하얀 이가 나타나 보일 때 춘 우는 그렇게 초최하여 진 얼굴에서 그렇게 희고 윤기있는 이를 발견한 것이 기적과 같았다.

어떻든 자기가 나이보다는 더 늙은 것이 사실이다. 다만 한때라도 더 젊은 몸으로 더 청춘을 누리어 보았으면 좋겠 다 하는 것이 사람의 통성이 되어, 늙은 몸에도 향수를 뿌 리고 분을 바르고 단장을 하여 젊게 보이려 하거든 젊은 사 람으로서 늙게 보인다는 것은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일평 생에 다시 돌아 올수 없는 청춘시기를 어디까지든지 청춘으 로 지내 보겠다. 뜨거운 정열을 가진 사람으로 생기있게 살 아 보고 싶다는 것이 그 때 춘우의 전신의 피를 살르는 듯 한 욕망이었다.

그는 빗을 들어 더부룩한 머리를 빗은 후, 화나는 사람처 럼 책상에다가 탁 내던지었다. 춘우는 공연히 몸부림 하고 싶고 어디에다가 화풀이라도 하고 싶었다. 어제 저녁에 영 숙을 만나보지 못한 섭섭하고 야속한 질투가 뒤섞여 용솟음 치는 감정의 나머지가 아직까지도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 는데다가 어린 동생의 애처로운 말소리를 듣게 되니, 버티 어 놓은 석경을 깨뜨려 부수거나 무슨 굉장한 사실이 당장 에 발생하여 자기의 지금 생활을 그 어떠한 다른 생활로 바 꾸어 좋았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났다. 그 다른 생활이라 는 것이 지금 이 생활보다도 더 비참하여도 좋았다. 어떻든 지금의 이 생활에 실증이 난 그는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이 맛보고 싶었다. 새로운 생활! 그것이 더 달거나 쓰거나 그것 은 관계할 것이 없이 어떻게 새것이 맛보고 싶었다.

아침을 먹으려고 안방으로 건너갔다. 아버지는 이제야 일 어나 앉아서 점복에 실백을 싸서 먹고 앉았다. 실백을 싸 먹는 것이 아버지의 가장 좋아하는 음식 도락이다. 그의 주 머니 속에는 어느 때든지 신문지에다 점복과 실백을 싸가지 고 다닌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날 때나 잘 때는 으래 한번 씩 먹어야 하고, 또는 심심할 때와 남허고 이야기 할 때는 빼놓지 않고 내놓는다. 본래가 궁굼한 것은 모르고 지내던 사람이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남도 좋아하려니 하고, 싫다고 하여도 남에게 권한다. 그 대신 담배를 먹지 않으므 로 남이 담배 먹는 대신 그것은 먹는다. 지금도 한쌈을 싸 서 입에다가 들어뜨리더니, 두 손끝을 탁탁 털고 싹싹 비빈 후, 움질움질 씹다가 방바닥에 떨어진 잣 알멩이를 집어 먹 으며,

『점복이 벌서 다 없어졌나!』

하고, 식성에 차지 않고 부족하다는 듯이 뒤로 물러 앉는 다. 춘우의 서모라는 이는 상을 춘우 앞으로 가까이 놓으면 서, 영감의 대답을 핀잔 비슷하게 꽉 쥐어지르는 소리로,

『벌써가 다 무엇요? 그동안 적게 자셨소? 생각을 좀 하여 보시구료?』

하니까,

『글세 먹기로도 무던히 먹었지마는, 그럼 또 좀 들여 오 래야겠군!』

『여보, 누구더러 들여 오랜단 말요? 이젠 점복에 진절머 리도 나지 않는단 말이오? 온 점복을 그렇게 허구한 날 자 신단 말이요. 어물전에도 갚을 돈이 여러 십원이 있는데, 돈 두 주지 않고 들여 오라고만 하면 누가 준답디까?』

할 말은 없으나 여편네에게 말 한마디라도 지는 것이 위신 상 부끄러운 듯이 사내의 억지를 부려서

『압다, 별 걱정 다 하네. 언제든지 주기만 하면 고만이지.

그까짓 것이 무서워 먹을 것도 먹지 못한단 말. 야? 공연히 식전부터 남의 맘을 글컹거리거든!』

여편네 된 꽁한 마음에 오른 말하는데 듣지 않는 것이 분 해서,

『누가 마음을 글컹거린단 말이오. 내가 조금인들 그른 말 하였소? 빚쟁이는 날마다 와서 조르는데, 그 비싼 점복만 먹고 앉았기만 하면 심평이 핀답디까?』

『압다, 퍽두 앙앙거리네. 식전부터 여편네가 왜 이 모양이 야. 집안이 가뜩이나 망하여 가는데.』

이 말을 듣는 춘우의 서모는 갑작스럽게 두 눈썹이 짱긋 일어서는 듯 하더니, 두 눈에서 독살스럽게 광채가 번개불 같이 일어났다. 본래 자기가 남의 소실이 되어, 자격지심이 언제든지 사라지지 않고, 가슴 한 구퉁이에 숨어 있는데, 자 기 남편이 자기는 조금도 긁는 말 한것이 없는데, 자기 때 문에 집안이 망한다란 말을 듣고서는 그대로 참을 수가 없 었다.

『무엇이 어째요? 집안이 망해요? 나 때문에 집안이 망한 것이 무엇요? 집안을 망해놓은 사람이 누구요? 내가 당신 집에 와서, 집안을 망해논 것이 무엇이요? 내가 당신 집 온 후로 당신이 나를 호강 한번을 시켜 주었단 말이오. 몇 천 석 추수를 떼어 놓았단 말이오? 왜 걸핏하면 날더러 집안이 망하느니 흥하느니 하고 여러 말요?』

이 꼴을 젓가락 끝으로 밥알을 골르면서 듣던 있던 춘우는 불쾌한 생각이 나서, 얼핏 두어술 뜨고, 밖으로 나가 이 꼴 을 보지 않으리라 하였다. 영감은 자기 말이 잘못 나가서 듣는 사람은 오해하게 되었다. 하는 생각이 들기는 들었으 나, 본래 고집이 세고, 또 자기가 홧김에 말은 그리하였으 나, 본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내내 뻣뻣하게 나간다.

『압다, 언제 내가 마누라 때문에 집안이 망했댓나? 아침 부터 남의 심사를 건드리니까 말이지, 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야단이야.』

인우는 자기 형과 겸상하여 밥을 먹고 앉았다가, 숟가락을 든채, 두 눈이 똥그래 지어서 두 사람의 눈치만 보고 앉았 다. 춘우는 인우가 겁이 나서 밥도 먹지 않는 것을 보고서,

『밥 먹어라! 어서 밥 먹고 나가 놀아라.』

하니까, 인우는 그 때야 밥그릇에 숟가락을 꽂으며, 고개만 끄덕끄덕 하고 춘우에게서 무슨 위안을 얻은 듯이, 다시 고 개를 이쪽 밥상 편으로 돌리었다. 춘우 서모는 다시 두 눈 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여지며,

『아무리 내 팔자가 사나워서 영감 집에 살기는 하오마는, 내가 도척이 아닌 이상에 남의 집을 망해놓려 하지는 않는 다우.』

『웬 잔소리야, 엥.』

하며, 본래 평시에는 말 한번 없는 사람이라 공연한 역정 을 내기는 했으나 뒷말 감당을 못하여 속에서 답답한 울화 만 치밀어 올라와서 손끝만 맞 비비며, 얼굴빛이 푸르락 누 르락 하여 엥엥거리고만 있다. 춘우와 서모는 밥도 먹지 아 니하고, 그렁그렁 하였던 눈물이 찔끔 나와서 그것을 감추 지 못하고, 춘우 있는 것이 부끄러웠던지 행주치마로 그것 을 씻으면서 바깥으로 나가더니, 훌적훌적 소리를 내어 운 다. 우는 소리를 듣는 방안에 앉은 세 사람의 얼굴에는 쓸 데없이 비참한 빛이 들면서 조상하러 온 사람들 모양으로 엄숙하고도 슬픈 얼굴로 말 없이 앉아 있다. 춘우 아버지는 말로는 춘우의 서모를 위로하거나 타일르거나 꾸짖을 만한 수단이 없고 속으로 답답한 생각만 나서, 빙충마진 소리로

『압다, 쪽쪽 울기는 왜 울어!』

하고서, 받았던 상을 홱 내는 바람에 숟가락과 젓가락이 방바닥에 땡그렁하고 떨어졌다.

춘우는 밥을 먹으면서 어서 바삐 창하의 집에 가서, 영숙 의 안부와 동정을 들어보고 싶은 생각으로, 어제 저녁에 만 나보지 못한 섭섭한 감정, 또는 머리쌀 아픈 세상을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아지 못하는 성가신 마음으로 밥 두어술을 뜨고서, 일어서 나오려고 할 때 그의 아버지는 풀리지 못한 화풀이를 다시 춘우에게 하려고,

『어디를 가니?』

하며, 몹시 마땅치 않다는 듯이 치어다 본다.

『문안 가요.』

『문안은 왜?』

언제든지 아침만 먹으면 나가는 줄 알건마는 공연히 물어 본다.

『누구 좀 볼 일이 있어서요.』

『누구를 본단 말이냐. 누구냐 누구?』

『창하의 집요.』

『응. 창하의 집.』

하고, 한참 말없이 창만 내다보더니,

『날마다 너는 하는게 무엇이냐?』

이 말을 들을 때에 춘우는 불같은 감정이 또 다시 가슴 속 에서 치밀어 올라왔다. 아버지는 말을 이어서,

『너도 나이가 스물이 넘었으면 철이 좀 나야지! 대강이가 커단 것이 날마다 빈들빈들 하면서 아비의 밥 얻어 먹기만 하면 제일이란 말이냐? 너 하는 것이 무엇이냐? 대관절 ……』

춘우는 꿀꺽 참고 그대로 들으리라 하였다.

『너는 네 아비가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아지 못하니? 날 마다 빚쟁이에게 졸리는 것을 너는 알지, 먹고 살 것이 없 는 것도 알지 않니.』

춘우는 이 말을 한두번 들은 것이 아니오, 머리 속에 굳게 박히고 박히어 인제는 당연한 일로 가끔 듣지 않으면 도리 어 기적이 될 것 같이 되었다.

『오늘부터라도 너 먹을 벌이는 그가 할 것이 아니냐? 어 린 동생도 생각해야지. 사람의 자식이 아무리 철이 없고 생 각이 없고, 미련하기로 그런 생각을 못해?』

춘우는 이 소리를 듣고서, 불꽃 같이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무엇이 있었다. 철이 없고 생각이 없고, 또는 어리석다고 하 는 말은 아무리 자기 아버지라도 그대로 들을 수 없는 모욕 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무엇이라고 탄하여 말을 하랴. 또는 말대답을 하는 것은 동양윤리에 거슬려지는 것이라는 관념 을 아직까지도 머릿 속에 보존한 그는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라오는 화를 참고서 장승같이 서 있었다.

『너는 인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이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말한 것과 같이 인제는 너 할 직책을 지켜야 하지 않겠니?

대답 좀 하여라. 네 소견은 어떠한 소견을 가지고 있니? 그 것 좀 들어보자.』

춘우는 공연한 혐의로 검사에게 취조를 당하는 것처럼 속 이 거북하고, 괴롭고, 귀찮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아예 대답을 하지 않으리라. 그러면, 아버지도 자기 출몰에 고만 두리라 하였다.

『………』

『어디 대답 좀 들어보자 응? 대답을 좀 해라.』

그래도 말이 없다.

『엥, 망할 자식 갑갑하다. 이렇다든지 저렇다든지 대답을 해. 그렇지 않으려거든 오늘부터라도 내 눈앞에 보이지를 말아라.』

이 말을 들을 때에 춘우는 자기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하거 나 세여볼 여지가 없이 가장 분한 마음이 치밀어 올라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분한 것은 떼려하나 뗄수 없는 정리를 그 어떠한 한쪽에서 스스로 떼려 하는 것이다. 춘우의 입은 어 느덧 떨어지더니,

『아버지 앞에 오지 말라고 그러시면은, 언제까지든지 오 지 않겠습니다.』

비장한 목소리는 힘있게 떨리었다. 지금까지 참았던 모든 울분이 막혔던 보가 터져 나오는 것 같이 목구멍을 찢을 듯 이 뭉텅이가 되어 나온다.

『아니 오죠! 얼마든지 아버지 앞에 오지 않죠.』

하는 얼굴은 우는 듯 하기도 하고, 무서운 결심을 하는듯 하였다.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이와같은 엄숙한 장면이 눈앞 에 나타날 줄은 아지 못하였다. 또는 자기 아들은 언제든지 자기의 명령을 복종하며, 자기의 의견과 자기의 하는바를 절대로 이행하며, 순종할줄만 알았다. 그래서 오늘 춘우의 한마디 말이 춘우 아버지에게 이 세상에는 어디 가든지 들 어보지 못할 말로 알게 되는 동시, 춘우의 행동을 괴상하게 여기게 되어, 혹시 정신이 이상하여 지지나 아니한가 하고 한참 물끄럼이 바라보게 되었다.

『가라고 하시면 가지요! 아버님께서는 언젠가 절더러 아 들이 아니라고 하신 일이 있지요? 아버지 입으로 저를 자식 이 아니라고 하신 일이 있지요? 그러시더니, 오늘은 저더러 가라고 하시지요? 제가 여태까지 아버지 앞에 있기는 있었 으나, 아버지의 밥과 아버지의 옷을 입어보지를 못하고, 먹 어보지를 못했습니다. 또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습 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들을 아들이 아니라고 하시고, 또 나중에는 나가라고까지 하시였지요! 이 집안을 망하게 한 사람이 누굽니까? 그것이 아버지시지요? 제가 여태껏 먹 고 살아온 것은 아버지의 힘으로 장만한 것이 아니라, 할아 버지가 우리에게 물려주신 재물이 아닙니까? 아버지는 그재 물을 모두 없애버리셨지요. 그러고는 할아버지의 손자요, 아 버지의 아들을 아들이 아니라 하시고, 또 나가라고까지 하 시었지요. 가라고 하시면 얼마던지 가겠습니다. 가지오 ……』

하고서, 문을 홱 열어재치고 나갈 때,

『언니!』

하고, 인우가 따라 나오며, 옷깃을 잡고,

『나 허고 가!』

하며 매달려 운다.

춘우. 어머니의 마음은 갖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때에 춘 우의 감정은 이 세상에 가장 완악하고 악착스러운 악마 같 은 마음으로 변하였다. 그래서 달려 나오는 인우를 뿌리치 어 마룻바닥에 엎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어린 인우가 철석 꺼꾸러질 때, 연약한 살과 약한 뼈가 문지방에 부딪히는 소 리를 듣고서, 찌리는 듯 하고, 저리는 듯한 감정이 가슴에 울려 오지 않을바이 아니지마는, 그는 뒤퉁그러진 입술을 찌푸리며

『너는 다 무엇이냐. 동생이 다 무엇이냐.』

혼자 중얼거리며, 건너방으로 건너갔다.

인우는 아픈 것도 잊어버리고, 정강이를 비비면서 건너방 으로 춘우를 따라 건너갔다. 춘우는 두루마기를 집어 입고 모자를 눌러 쓰고 마루 끝으로 향하여 내려왔다.

인우는 종종걸음을 치면서,

『언니, 언니.』

하고 춘우의 두루마기 자락을 부여 잡고,

『가려거든 나하구 가!』

하며, 구슬같은 눈물이 얼굴에서 비오듯 한다. 춘우는 아까 방에서 나올 때에는 그렇게 매정하게 뿌리쳤으나, 이번에는 뿌리칠 수가 참 없었다. 다만 물끄럼이 우는 인우를 바라보 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는 또 다시 자기 마음 속 에서 불같은 노여움이 솟이 오르고, 누가 옆에서 소리를 질 러 일러주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정처없이 떠돌아 다닐 터이다!』

하는 생각이 다시 날때 그는 자식이 매달리는 것을 매정하 고 악착스럽게 뿌리치는 독부처럼 인우를 다시 뿌리치었다.

『나는 동생도 없다.』

술취한 사람처럼 모든 것을 깨뜨려 부수고 모든 거추장스 러운 것을 끊어버리려 하는 마음이 온 전신에 팽창한 그는 조금도 틀림없는 악마이었다. 사람의 본능(本能)가운데 어느 구퉁이엔지 숨어 있는 잔인포악한 악마성(惡魔性)이 여지없 이 발휘되었다. 그는 옷고름이 풀어져 사자의 갈기처럼 휘 날리고 두루마기 구김살이 독수리의 나래같이 번득거리는 것을 휩싸들고서, 대문간으로 뛰어나갔다. 마루 끝에서는 어 린 인우가 느껴가며 언니를 부르며 우는 소리가 들린다.

一○

[편집]

춘우는 창하의 집에 왔다. 창하의 집 문을 열고 사랑 마당 에 들어서는 춘우의 가슴은 얽히고 뭉친 무엇으로 가득찬 듯하여 그것을 풀어줄 사람이 너 하나 밖에 없다는 듯이 방 문을 열었다. 열한시나 되어 황금빛 태양볕이 한가로이 창 에 비치었다. 창하는 세상을 잊은 듯이 자리 위에서 자고 있었다. 너무 고요한 것이 도리어 비애가 섞인 적막을 춘우 의 가슴에 부어주는 듯 하였다.

『창하!』

하고, 춘우는 창하의 어깨를 흔들었으나, 창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창하, 창하, 일어나게. 웬 잠인가?』

그러나, 창하는 춘우와 사이가 너무 가깝고 허물이 없는 탓으로 팔꿈치를 뿌리치며

『잠간만, 잠간만.』

하고, 다시 돌아누워 말이 없다.

『일어나.』

하고, 다시 말을 하는 춘우의 마음은 섭섭하였다. 마음이 본래부터 강하지 못하고 약한 춘우는 창하까지 야속한 듯 하였다. 자기를 찾아 나의 가슴속에 서린 것을 하소연하러 온 것을 이렇게까지 냉대하나 생각이 나서, 그는 공연히 약 속한 생각이 나며, 세상이 미덥지 못하였다.

그러자, 창하는 겨우 기지개를 켜고서,

『오늘은 척 일르이 그려!』

하며, 겨우 눈을 비빌 때, 엄숙한 창하의 얼굴에는 다정스 럽고 그리운 빛이 보인다.

『일어나게, 내가 할 말이 있으니……』

『무슨 말이? 자네 말야 언제든지 그 말이지!』

『아니야, 글쎄 일어나, 일어나서 이야기해.』

하며, 춘우는 덥고 자던 이불을 벗기였다.

창하는 춘우의 얼굴 빛이 잿빛같이 된 것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면서,

『자네 얼굴이 왜 저 모양인가?』

하며 이불자락을 주섬주섬 걷어서 발치로 내던지고, 머리 를 극적극적하면서 일어나 앉아 춘우를 들여다 보았다.

춘우는 자기의 얼굴에 잿빛 같이 된 것은 몰라도, 자기 가 슴 속에 괴로움은 알았으므로 창하의 그 말을 듣고 자기 마 음을 헤아리며 자기 얼굴빛도 그리 좋지는 않으리라 생각되 었다. 그러나 말대답은 자기의 가슴이 괴롭다고 얼른 할 수 가 없어서,

『내 얼굴야 언제든지 그렇지 않은가? 내 얼굴은 언제든지 요 모양일줄도 아니까!』

하며, 자기 얼굴이 왜 이 모양으로 파리하고 보기 싫게 되 었냐는 듯이 각(角)이 진 볼다구니 껍질을 집어서 심통사납 게 한번 잡아다려 보다가, 그래도 자기 살이요 자기 몸의 껍질이라 해서, 아끼는 듯이 잡아다니던 손을 펴고 두어번 쓰다듬었다.

『무슨 좋지 못한 꼴을 보고 왔나? 몹시 놀랐나? 아마 영 숙에게서 또 무슨 편지가 왔나 보이 그려.』

하며, 창하는 춘우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만 기다리느 라고 멀거니 입만 바라보며 앉아서 재쳐 묻는다. 춘우는 무 슨 명상이나 하는 듯이 멀거니 앉아서 고갯짓만 하면서,

『아니.』

하고 늘어지게 대답을 한다.

『그럼 왜 저 모양이야. 왜 이렇게 멀거니 앉았나. 말이나 좀 하게, 갑갑해 못견디겠네……』

하며, 왈칵 일어나서 이불과 요를 활활 털어 개켜놓더니, 다시 대님을 치고 고름을 매고 앉아서,

『무슨 일인가? 말을 하게.』

창하의 생각에는 필연 영숙이에게서 무슨 실망될만한 편지 가 춘우에게 간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그 일에 들어서는 지금까지 자기가 뒤를 보아주던 일이오, 자기가 없이는 그 일이 성립되지 않았으리라는 자신과 책임관념이 있음으로 춘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떠한 것을 보아서 두 사람 사 이를 조정하여 보리라는 마음이 생긴 까닭이었다.

춘우는 얼마 있다가, 두 눈에 결심하였다는 듯한 광채가 돌며,

『여보게, 오늘부터 나는 우리 집에 들어가지를 않을터일세.』

하며, 창하를 볼 때 그의 태도는 마치 패전한 군사가 마지 막 전선에서 적군의 창검 앞으로 돌진하려는 것 같이 비장 한 용기가 있어 보이였다.

창하는 이 말 한 마디에 모든 것을 알았다. 오늘 춘우가 전부터 말해 왔던 것을 실행하고 나온 것을 알았다.

『그러면 자네 아우는 어떻게 되었나?』

『나의 아우!』

춘우의 눈에서는 핏빛 같이 붉은 빛이 돌더니,

『다 모르는 것이 좋아. 생각지 않는 것이 좋아. 애정이라 는 것이 도리어 나의 마음을 괴롭게 할 뿐야. 나는 다정한 사람이 되려는 것보다도 몹시 매정한 사람이 되고, 얼음같 이 차디찬 사람이 되는 것이 나를 위하여서는 가장 좋은 도 리야.』

할 때, 춘우의 가슴은 과도의 열기로 말미암아 터지는 듯 이 지독하게 쪼깨지는 듯하며, 뜨거운 눈물이 두 눈에 괴었 다. 그 눈물은 마치 불상(佛像), 박아놓은 구슬 모양으로 뺨 에 곱게 반짝어리었다. 사면은 몹시 고요하여 장엄한 전각 속 같았다. 춘우는 자기 눈에 뜨거운 눈물이 괴었을 때는 아무 말이 없이 있다가, 그것이 자기 뺨 위에 떨어져 구를 때, 다시 자기가 눈물있는 사람이 된 것을 몹시 원망스럽게 생각하는 듯이 손목으로 눈물을 씻어 화난 사람처럼 뿌려버 렸다.

『일평생 눈물 없는 사람으로 살터일세. 쫓겨난 사람에게 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는 것이야. 또는 눈물이 없어야 하지. 나는 우리 집에서 쫓겨나고, 또는 애정이라는 천국에 서 쫓겨남을 받을 사탄이야.』

창하는 이 말을 듣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춘우를 보며,

『어디 얼마나 그러나 보세. 자네는 여태까지 속일 수 없 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모르는 모양일세 그려. 사람이 모든 다른 것은 속일 수가여 있는지 알 수 없어도 나이는 못 속이는 모양일세 그려. 자네는 지금 인생의 모든 희망과 즐거움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청춘이며, 자네 혈관 속으 로 돌진하는 피는 인생의 열정의 교향악(交響樂)을 아뢰는 줄을 모르나? 자네가 지금 이러한 말을 하였지만, 새벽 첫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를 모른다고 한 베드로 모양으로 그 누구 앞에서 지금 나에게 한 말을 잊어버리고 다시 올 때가 있을 것을 나는 단언하네.』

사람의 감정은 물결과 같다. 다만 일순간이라도 그 감정을 그대로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이 적다. 어떠한 경우에 그것 이 살아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다른 형체로 나타나 거나, 또는 아주 변해버리기도 하며, 극단에서 극단으로 뒤 집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춘우가 지금 창하의 집에서 나온

「그 누구」라는 말이 여태까지 가슴에 품었던 무섭게 힘있 고 분노한 마음을 차차 부드럽고 연하게 하기에 가장 힘이 있었다. 마치 금에다가 초산(硝酸) 방울을 떨어뜨린 것 같 이, 춘우의 굳고 무디던 감정을 녹일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지, 나는 결심하였어.』

하고 춘우도 자기가 자기 마음을 의심하였다.

밀리어 가기만 하고, 다시 뒷걸음질 할 줄 모르는 시간이 어느덧 한시간이 지나니, 오정을 치렀다.

자기 집에서 아침을 먹고, 대문을 나선 영숙은 걸음을 박 창하의 집으로 향하지 않으리라 하였으나, 엄숙한 섭리(攝 理)의 신은 사람의 미묘한 감정까지 간섭을 한다.

어제 저녁 자기 남편에게 모든 것을 자백한 영숙은 자기도 어째서 자기가 지금 춘우를 만나러 창하의 집에를 가는지 알지 못하였다.

걸음걸음 띄어 놓을 적마다 자기 남편이 자기의 귀에다 대고서

『내가 네게 부족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너를 냉 대한 것이 무엇이냐 너의 생활에 불만족하게 하여준 것이 무엇이냐? 무엇이든지 가리지 말고 이야기하여 다오!』

하며, 처음으로 자기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울던 것이 역력히 보인다. 그러다가는, 또다시

『나는 몇 만번 저버려도 좋다! 나는 내버리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너의 자식은 내버리지 말아 다우.』

하던 말을 들을 때 영숙의 가슴 저린 아픔을 깨닫게 했다.

다시 자기 남편에게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셔요.』

하고, 벼개에 엎드려 울던 생각을 할 때에는 다시는 춘우 를 만나보지 않으리라 굳은 맹세와 결심을 한 것은 어느덧 어디로인지 사라지고, 지금은 또다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 리어, 영숙은 춘우를 만나보러 가는 것이다. 가야 옳으나, 아니 가야 옳으냐. 아니 가야 옳다. 만일 다시 간다고 하면, 신의 없는 여자요, 절개 없는 여자가 되며, 자기 남편에게 죄인인 동시, 자기 딸에게도 죄인이다. 그러나 영숙의 생각 속에는 뾰로통하게 싻이 돋아 올라온 그 무슨 자각(自覺)은 오늘에 와서 과거의 모든 것을 부인해 버리고서, 새로운 길 을 밟아 나가겠다는 것, 자기도 남의 차지한 도덕상 권리 의무와 또는 법률상 권리 의무를 남과 똑같이 차지하여 가 지겠다는 뜨거운 욕망이 그 무슨 반동적 충동에서 일어난 까닭이다. 자기는 남의 첩이다. 자기의 남편이 자기에게 주 는 모든 조건이 아무리 완미하다 하더라도, 여기와서는 사 람으로써 참지 못할 치욕이 있다는 것이 피상적으로 인생을 관찰한 현대 여성의 부르짖는 소리다. 인생의 길고 깊은 내 면적 생활이 없는 영숙의 가슴속에서도 이와 같은 부르짖음 이 나온 것도 무리라 할 수는 없을것이며, 더구나 다정한 남자의 따스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젊은 영숙이 이러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얼마든지 동정할 여지가 있다. 영숙은 창하의 집 앞에 와서, 십 여분 동안이나 들어가기를 망서리 었다. 춘우가 와서 있기를 바라는 욕망이야 물론이겠지만, 와서 있어 자기와 만나면 무슨 말을 하랴? 하는 떨리는 걱 정이 있었다.

모든 것을 우리 두 사람은 단념합시다, 옛 일은 잊어버립 시다 하자니, 춘우의 가슴이 아플 것은 고사하고, 그런 생각 만 하여도 자기 가슴이 아프다. 그러면, 모든 것을 오늘 해 결합시다. 나는 나의 생활을 이 자리에서 바꾸어 예전 생활 을 헌신짝 같이 벗어버리고, 살거나 죽거나 당신과 같이 하 겠오 하자니, 자기 어머니와 자기 딸에게 대한 애정과 여태 까지 살아온 안일한 생활에 미련이 남아 있다.

이러기도 어렵고, 저러기도 난처한 영숙은 지금 기로에 방 황하고 있다.

어떻든 문을 열었다. 가는 기침을 하고서, 마당에 들어섰을 때, 사랑문 여는 사람은 춘우였다.

『어서 오셔요.』

하며 엄연한 태도로 내다보는 춘우의 얼굴을 보는 영숙의 마음은 무슨 죄가 지은 것 같이 두근거리었다. 다만 고개만 숙여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마루 앞에 섰을 때, 영숙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번에 자기 발 하나 잘 들여놓고 못 들여 놓는데 자기의 운명이 판단이 되며, 자기 의 남편과 춘우 두 사람중에 누구 하나를 취하게 되고, 누 구 하나를 내버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자기의 오는 것을 맞아들이는 이 춘우도 그 사람이 택함을 입을 사람인지, 내 버림을 당할 사람인지, 알지 못하였다. 영숙의 마음은 지금 에 균형(均衡)을 잃은 저울대 모양으로 이리 기울었다가 저 리 기울었다. 춘우의 가슴에 자기 가슴을 맞대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때는 춘우가 자기것이요 가장 미더우며, 자기 남편의 자리 속에 누웠을 때에는 자기 남편이 자기 것이다.

이리하여 지금 춘우의 앉아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때는 춘 우에게로 자기가 완전히 기울어지기가 쉬운 것을 자기도 알 기는 아나, 그것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이리 내려 앉구료.』

춘우의 다정한 목소리는 방안의 흐리터분하던 공기를 한번 에 씻어버리는 듯 하더니, 갑갑하고 심사가 나던 영숙의 마 음도 한껏 정하여지는 듯 하였다.

『괜찮아요.』

『아니, 거기는 차요. 이리 이 아랫목으로 내려 앉아요.』

하며 치마 자락을 잡아다녀 앉히니, 영숙도 못 이기는 듯 이 내려앉았다.

『주인은 어디 가셨어요?』

『안에 들어갔다우, 세수를 하나봐.』

『그런데, 어디가 불편하셔요? 신색이 아주 전만 못하십니다.』

『아니, 별로 아픈 데는 없어.』

『그러나, 어저께는 대단히 미안합니다.』

춘우는 대답이 없다.

『왜 대답을 아니하셔요.』

『나는 그런데는 대답하지 않아요.』

『말이 말 같지 않으셔요.』

영숙은 늘리먹는 듯이 생긋생긋 웃으면서 지근덕거리었다.

『생각해보구려.』

『생각이 무슨 생각얘요? 저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생각이 나지 않아요? 생각이 날리가 있소. 나같은 사람 에게는 미안합니다 하는 말 하나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될터이니까……』

이렇게 서로 정에 겨워 비꼬고 앉았을 때 창하는 두루마기 를 입고 부리낳게 나오더니 문을 홱 열어젖히다가, 영숙이 가 와 앉은 것을 보더니,

『언제 오셨어요.』

하고 인사를 하고 춘우에게

『잠간 다녀옴세, 집안 심부름 좀 하고 올께.』

하며 황황히 뛰어나간다.

춘우와 영숙은 창하가 뛰어나가는걸 보고 똑 같이 가슴이 근질근질함을 깨달았다. 조용한 방안에 단 두 사람이 앉아 있으매, 먹은 마음이 한꺼번에 벅차 오르는 듯 하여 침들만 삼키며 한참이나 가만히 앉았었다.

영숙은 두어번 기침을 한 후에 곁눈으로 춘우의 동정을 살 피는 듯 하더니, 목이 조금 메이는 듯 하는 소리로

『춘우씨……』

를 불렀다. 방안은 너무 고요하다. 삼엄한 침묵이 이 세상 모든 잡념을 떠나 공정한 재판이 내리는 천당이나 아니면 지옥에 간듯이 엄숙한 느낌을 두 사람에게는 주는 듯하였 다. 이번에 영숙의 입에서 나온 『춘우씨……』라는 말이야 말로 두 사람의 앞길을 좌우하는 열쇠이었다. 영숙의 입에 서는 무슨 말이 나오랴? 춘우와 결심한 것을 어디까지던지 이루고 말자는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자리를 한해 서 두 사람은 떠나자는 말이냐, 영숙의 마음 속에 있는 저 울 추가 어디로 기울어질 것이냐.

『네.』

하고 대답을 하는 춘우의 눈은 전보다도 이상하게 광채가 났다.

『제가 이 말씀을 여쭈어 보는데 대하여서는 춘우씨의 양 심에 조금이라도 거리끼지 않는 대답을 하여 주셔요.』

『무슨 말이던지 저는 양심대로 대답하지요.』

『만일 제가 지금 춘우씨를 영영 떠나지 않으면 안될 사정 이 있어 춘우씨에게 마지막 인사를 여쭙지 않아서는 안될 일이 있다고 하면 그 때 춘우씨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춘우는 이 말을 듣고서 사금파리로 생선의 배를 가르듯이 가슴 한복판을 어이는듯 하였다. 그러고서 자기의 입으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하였다. 일순간, 다만 일순간 에 춘우의 가슴에는 이상한 불이 붙어 올라오며, 그 불이 제단 앞에서 타오르는 향불을 놓은 것 같이, 그것을 앞에 두고서 그 뒤에 무슨 사상(事象)을 보는듯 하였다. 루벤스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리는 예수』의 그림을 마지막으로 본 플란데스의 우유 장수 어린 아이와 같이 영숙의 입에서 그 말 한마디가 떨어질 때에는 무슨 신엄(神嚴)한 사실이 자기 앞에 전개된 것을 알았다.

『그 말은 왜 물으시오?』

말은 하였으나, 그 말이 목구멍으로 나올 때에 그는 겨자 를 그대로 삼킨 것 같이 거북하였다.

『글세 말씀얘요.』

하는 영숙은 자기 눈속에 비치어 있는 장차 닥쳐올 사실을 들여다보는듯이 고개를 숙이고 길고도 떡가락처럼 툭 찍어 놓은듯한 매끈한 손가락으로 방바닥만 긋고 앉았다.

『나는 그런 대답하기 싫소. 대답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요.

그와 같은 대답은 일평생 하지 않는 것이 좋을듯 해요.』

『그렇지만 그와 같은 대답을 아니하실 수 없는 경우에는 춘우씨도 가부간 무슨 대답을 하시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 러면 우선 춘우씨는 우리 두 사람 사이가 어느 때까지 이대 로 계속할 줄 아십니까?』

『물론 어떠한 난관을 거쳐야 할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든지 한번은 거쳐야 할 그 난관을 빠르게 거 쳐야 할 것이 아닙니까? 춘우씨나 저나 이대로 만일 이 후 에 더 오래 계속을 한다 하면, 우리에게 반드시 불행한 일 이 닥쳐 올 줄로 저는 생각해요.』

춘우는 할 말이 없었다. 자기를 희생하여 영숙을 차지하였 다. 그러나 영숙을 완전히 자기 것을 만들고 자기가 독차지 하려면 그의 사랑의 상대자 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자기와 영숙의 사 랑, 그것에는 펑 뚫어진 결함이 있는 것을 찾아내게 되면 영숙을 독점하려면 자기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자기 의 의무를 이행한 연후에 영숙의 사랑을 차지할 권리가 있 는 것이다. 지금 춘우는 영숙의 사랑을 차지하였는지는 모 르나, 영숙이란 그것은 자기 것이 아니다. 여기에 비애가 있 고 비극이 생기는 것이다. 영숙과 춘우는 무서운 비극이 닥 쳐올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 그 앞으로 하루바삐 속하게 걸 어가려고 무슨 이상한 힘에 끌려가는 중이다.

춘우는 다시 영숙을 쳐다보았다. 무슨 괴로운 생각이 영숙 이 가슴 속에서 영숙을 못살게 구는 듯이 그는 얼굴빛이 이 상하였다. 마치 월경을 순하게 하지 못한 여자의 아랫배를 앓을 때에 나타나는 괴로운 빛이 보였다. 춘우는 영숙의 손 을 쥐고서

『왜 그런 말을 오늘 갑자기 하오? 무슨 생각을 하신 일이 있소? 그렇지 않으면 내게 무슨 부족한 것이 있소?』

영숙은 고개만 내저었다.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요?』

영숙은 한참이나 무엇을 궁리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할 말 이 있어도 할수가 없는것처럼 고개만 기웃하고 있다가 춘우 가 재촉하는 말로 의아하는듯이 쳐다보는 것을 보고서,

『여태까지 춘우씨에게 말씀한 일은 없지마는, 춘우씨와 사귄지도 벌써 두달이 되는지요.』

춘우는 이 말을 듣고서 비로서 깨달은 것은 아니지만, 영 숙의 말하는 뜻이 어느 곳에 있는 것을 알았다.

영숙의 몸이 지금까지 춘우 자신의 것이 아닌 동시에, 춘 우는 남자로서 영숙의 애인될 책임을 다 하지 못하였다. 영 숙의 입에서 나의 몸을 완전히 당신의 것을 만들라 하기 전 에 춘우는 마땅히 먼저 영숙을 철수에게서 뺏어 올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하나 지금껏 그것을 이행하지 못한 것은 춘우의 열의가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도, 그에 대한 애정의 정도가 얕아서 그리한 것이 아니요, 다만 그에게 어떠한 세 력을 대표하는 금전이라는 게 없는 까닭이다.

춘우도 한참이나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무슨 결심을 한 듯이

『알았소! 당신의 말을 듣기 전에 나는 벌써부터 안 일이 있어? 그러나, 그것을 당신은 그렇게까지 염려하시오? 내가 당신을 믿고 당신이 나를 믿기만 하면 어느 때던지 우리의 승리는 있을 것이며, 또는 나와 당신이 뜨겁고 무겁고 힘있 는 사랑으로써 나간다 하면 언제든지 우리의 사랑을 완성할 날이 있을 것이 아니요? 물론 나는 당신의 괴로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며, 나로써 지켜야 할 나의 책임도 모르는 바가 아니오.』

영숙은 춘우의 뜨겁고 힘있는 말소리에 지금까지 자기 마 음 가운데에서 이리 기울었다 저리 기울었다 하는 마음의 저울추가 거의 춘우 편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무슨 큰 힘을 얻는 듯하였다. 그는 다만 만족에 가까운 즐거움으로 춘우 의 말을 들을 때에는 그 소리와 음조가 나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두려워 하지 않겠다는 지사(志士)의 비장한 목소리 같이 들리었다. 그는 춘우의 말소리가 일언반사 어느것이 자기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 것이 없으며 정당하지 않는 것 이 없었다.

춘우는 말을 꺼내기 시작하더니, 꼬리에 꼬리를 잇고 힘에 힘을 더하여 말을 한다.

『알았습니다. 나는 오늘 당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내 버렸습니다. 나의 가정도 내버리고 나의 어린 동생까지 뿌 리쳤습니다……』

할 때 춘우의 마음은 거북하였다. 사실은 춘우가 오늘 집 에서 싸우고 나온 것은 원인이 결코 영숙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심리의 세미한 부분에는 영숙에게 그 원 인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 이 자리 영숙의 앞에서는 자기가 가정에서 뛰어나온 것의 원인 전부가 영숙에게 있는 것 같이 말을 하게 된것이다. 사람이 흥분이 되면 사소한 감정이나 또는 사소한 이유가 전적(全的)으로 그 결과가 나 타나는듯한 일이 있다. 여기에 춘우는 거짓말을 하게 된 것 이다.

영숙은 번쩍 고개를 치켜들며

『왜? 댁에서 나오셨어요?』

하며 경이의 눈으로 춘우를 치어다보자, 춘우는

『네, 아주 나왔어요.』

이 말을 들은 영숙은 춘우의 결심이 그렇게까지 굳은 것과 자기를 그렇게까지 위해 준것과 또는 그렇게까지 미덥고 굳 센 용사(勇士)를 자기의 애인으로 한것이 자기에게는 더 말 할수 없는 굳은 힘이 되는 듯하였다.

춘우와 영숙과의 두 사람 마음 가운데에는 이 순간이 무슨 공통되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으니, 장차 두 사람은 어떠한 형식으로라도 완전한 부부가 되리라는 막연한 느낌이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실터입니까?』

춘우는 이제부터 자기 생활에 무슨 큰 변환이 있을 것을 생각하자, 한편으로 생신한 마음이 도는 동시에 또는 자기 의 책임이 무거운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부터요?』

한참 말이 중단되었다가,

『이제부터는 자유스럽게 살려오. 이왕 집에서 뛰어나온 이상, 다시 집에 들어가지는 않겠지요. 어떠한 괴로움 어떠 한 어려움이 있든지 나는 나대로 살아가 보려해요. 영숙!』

영숙의 손을 쥐면서 끼어 안듯이 힘을 주어 영숙의 팔을 잡아다니며,

『영숙씨도 나처럼 모든 것을 내던지고 나와 같이 어려움 과 슬픔과 기꺼움 즐거움을 똑같이 나누면서 함께 살아갈 생각은 없소? 만일 영숙씨가 나를 떠나지만 않는다 하면, 나는 무슨 짓이라도 할 터이오. 두 다리 두 팔이 있는 이상 당신이 내 그 두 다리 두 팔에 굳센 힘을 부어 줄줄 믿소.

응! 영숙씨 나는 당신이 지금 철수와 떠나지 않고 이대로 있다하면 참으로 몸이 괴로워 못 살겠소. 도리어 모든 것을 딱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영숙은 이 말을 되고 몹시 부끄러웠다. 어제 저녁에 자기 남편에게 맹세까지 한 것이 지금와서는 후회가 된다. 그는 춘우의 이 말을 듣고서 다만 차거운 핏속에 감격의 떨림이 있을 뿐이다.

『춘우씨! 저도 벌써부터 그러한 생각을 먹지 않은 것이 아냐요. 춘우씨의 마음도 제가 몰라 드리는 것이 아냐요. 춘 우씨의 마음이 괴로우신 것보다 몇배 이상 저의 마음도 괴 롭읍니다.』

하는 영숙은 몹시 감사함과 또는 어제 저녁 일을 뉘우치는 눈물이 검정눈, 긴 눈썹 위에 이슬같이 맺히었다.

『춘우씨!』

영숙은 춘우의 무릎에 그대로 엎드러지며,

『모든 것 용서하여 주셔요. 제가 약한년입니다. 모든 것을 저는 잘못했어요.』

하고 느끼어 운다. 춘우는 영숙의 등에 손을 대이고

『왜 이러우, 울기는 왜 울어.』

하며 타이를 때 어쩐지 자기의 마음도 공연히 비상(悲傷)하 여져서 눈물이 핑돌아 영숙의 윤곽이 흐릿하여 보인다.

『저는 참으로 춘우씨에게 무엇이라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요. 춘우씨는 저의 잘못은 무엇이든지 용서하여 주시 죠?』

춘우는 지체 없이

『우리에게는 무엇이든지 가리움이 없고 꺼리는 것이 없으 며, 언제든지 용서가 있을 따름이며, 서로 믿을 뿐이죠.』

『그러나, 춘우씨?』

말을 하려다가, 영숙은 다시 고개를 내흔들며 느끼는 목소 리로 운다.

『왜 이러우, 우지 말아요. 남이 듣더라도 부끄럽지 않아요.』

영숙은 속이 시원할 만치 울더니

『저는 참으로 춘우씨에게 죄를 지었어요. 저의 애아버지 에게 이제부터는 춘우씨를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였어요.』

춘우의 가슴은 쓰리었다. 날더러 자기를 사랑하여 달라고 하던 예쁜 입술은 어제 저녁의 자기 남편에게 나를 배반하 겠다고 그의 벼개 밑에서 속살거리었을 것을 생각하자, 사 탄의 독 묻은 입술과 같이 영숙의 입술도 무서워 보이었다.

그러나, 지금 영숙은 모든 것을 자백한다. 자백자에게 또 다시 무슨 허물이 있으랴. 도리어 그가 측은하고 가련할 뿐 이다.

춘우는 다만 우는 영숙을 타일러

『우지 말아요. 내 모든 것을 용서할터이니, 우지 말아요.』

하고 영숙의 고개를 쳐들어 그의 눈물을 씻겨주었다. 영숙 은 옆으로 자리를 정하고 앉으며 힘없는 한숨을 가슴이 무 너지도록 쉬더니, 느끼는 목소리로

『이제부터는 저도 모든 것을 내버리고 춘우씨와 함께 어 디던지 가려해요. 춘우씨는 저를 어느 곳으로든지 데리고 가셔요.』

『그러죠. 어디든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떨어지지 않도록 하죠. 모든 것을 이기고 싸워보죠.』

할 즈음 창하가 바깥에서부터 뛰어들어오는데, 그의 손에 는 과자와 과일을 잔뜩 들었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다가, 춘우를 향하여

『이것이나 먹게.』

하고 손에 들었던 것을 내놓으며, 구두를 끌르고 들어와서 영숙을 보고 속으로는 또 어린애들 모양으로 쪽쪽 울었구나 생각이 나서,

『눈이 왜 저렇게 붉을가요?』

하고 영숙의 대답이 굳이 듣고 싶다는 듯이 대답이 나오기 를 기다린다. 영숙은 부끄러워서 말을 하지 못하면서, 입만 몽긋몽긋 하고 있으려니까, 춘우도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 지 몰라서 영숙의 입만 보고 말나오기를 기다린다.

『안질이 나셨나요?』

창하의 지귄게 묻는 것은 놀려먹자는 수작이다.

『아뇨?』

영숙은 창하가 알면서도 그러니까 거짓말을 할수 없고, 그 렇다고 울었다고 할 수도 없어 아니라고 하기만 한다.

『그러면, 무엇이 들어갔나 봅니다 그려.』

하니까, 민망한 춘우는

『압다, 그것은 그렇게 알아 무엇하나! 어서 이것이나 먹게.』

하고 과자를 집어 준다.

해는 넘어갔다. 오전 열두시가 되기도 전에 집을 나간 영 숙이가 해가지고 저녁밥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를 아니하였다.

다른 때 같으면 늦게 돌아오더라도 그렇게 기다리지도 않 았을 것이지만, 청아의 아버지 철수가 서울 와서 있는지라 영숙의 어머니는 초조한 생각이 나서, 담배를 담았다 떨었 다 하며 일어났다 앉았다 한다.

『얘, 저녁 다 되었니? 김치는 새것을 헐어라. 그 중항아리 에 해 넣은 것 있지 않느냐. 나으리 올라오시면 드리려고 해 넣은 것 말야. 그러고 간은 본래 싱겁게 잡수시니, 찌개 같은 것도 정신을 좀 차려 간을 마치고……』

이렇게 하인과 찻집에서 분부를 하며, 문간에서 바람이 지 나가는 소리만 나도 창문을 열고 내다보고 문소리가 삐걱하 기만 하여도

『얘, 어멈이냐?』

하며 헛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영숙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얘가 웬일일꼬? 어서 오지 아니하고 애아버지 들어오면 또 말듣겠군. 에이, 한번 나가면 돌아올 줄을 모르니까 다른 때와 달라서 제 남편이 왔으니, 좀 정신을 차렸으면 좋으련 만……』

처음에는 이제는 오려니 기다리던 마음이 나중에는 가슴에 서 화가 치밀어 올라와서 당장에 영숙이가 있으면 화로라도 들어서 그대로 태질을 치고싶다.

『빌어먹을! 또 거기를 간 것이지!』

거기라는 곳은 즉 창하의 집이니, 눈치빠른 영숙의 어머니 는 춘우 사이를 대강은 짐작한다. 그러니까, 영숙의 어머니 에게는 영숙의 정조보다 철수의 돈이 더 귀하고 철수를 위 하는 것보다 철수의 재산을 더 위한다. 그래서, 철수의 눈을 가리고 철수의 마음을 사서 그의 재산만 취하여 편안한 생 활을 할수있으면 만족하다.

젊은 여자가 남의 첩이 되었으면 그 여자의 몸 가지는것은 추측하여 알 것이니, 다른 남자와 다소간 관계가 있드라도 눈감아 넘겨 주는 것이 그리 과히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것 이 영숙 어머니의 생각이다.

그렇다. 돈만 날 구멍이 있어 먹고 입을 것이 있기만 하면 젊어 청춘에 마음에 드는 남자의 재미있는 정을 받아보는 것도 그리 죄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돈이 나올 구멍을 틀어막게 되는 경우에는 자기 딸 아니라 무엇이라도 사생을 결단하고 덤빈다.

영숙의 어머니도 청춘시기를 지내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음 들고 뜻에 있는 남편허고 일생을 지내는 것이 마땅히 사람으로써 해야할 일들인 것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 나, 청춘에서 떠나온지 벌써 그 세월이 너무 오래고 감정이 차디찬 바위 같이 식고 무디디 무딘 그는 영숙의 보고 느끼 고 깨닫는 세상과는 그 거리가 너무 멀다.

영숙은 지금 새로 피어오르는 불길 같은 감정이 뜨거운 핏 속으로 흐르는 중이요, 영숙의 어머니는 퍼다버린 잿더미 속에서 댈그럭거리며 굴러다니는 차디찬 골탄 같은 이지(理 智)가 그의 시들시들한 껍데기와 함께 무덤 길을 재촉할 뿐 이다.

뜨거운 것과 찬것, 무딘것과 연한것이 한꺼번에 융화가 되 고, 뭉텡이가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이치다.

나지막하게 입속으로만

『애가 오지 않나?』

하던 소리가

『빌어먹을 년, 나가면 집에 돌아 올줄을 모르니, 어디로 그렇게 돌아다니노? 행길귀신이 씨었나?』

하며 욕지거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다시 시계를 치어다보며,

『벌써 여섯시 반이 넘었네.』

일곱시 십분 전이라도 영숙의 어머니는 여섯시 오십분이라 는 소리를 몰라, 여섯시 반이 넘은 것으로 계산을 한다.

『벌써 밥먹으러 들어올 때가 되었는데, 들어오기 전에 오 지 않고 빌어먹을 어디가 퍼더버리고 앉아서 집에 올 생각 은 하지 않노! 또 주인의 성품을 거슬러 놓고 아무일도 안 되게 할 작정이지. 이번에 올라온 길에 달래야 쓸 돈이 이 삼백원 되는데, 계집년이 뻔히 성미를 알면서도 고 모양이 야! 에이, 뱅충 맞은 년, 똑 속이 썩을 대로 썩어.』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전깃불이 들어오니까, 불을 떼 어 창 앞으로 가까이 갔다가 걸어놓고

『얘, 청아 재지 말아라 아버지 상 앞에서 떨어지면 섭섭 히 아는데, 저녁이나 잡숫거든 재고.』

하며 애 보아주는 계집애를 부른다. 그러자, 대문 소리가 삐걱하고 나며 누구인지 마당으로 들어온다.

『인제 오나보다.』

하고 영숙의 어머니는 창 밖으로 내다보았다. 그 들어오는 사람은 영숙이가 아니라, 철수였다.

『에헴.』

두어번 잔기침을 하고 마당에 들어서자, 갑작스럽게 집안 은 쑤근쑤근 하면서 엄숙한 빛이 돈다.

『어서 올라오.』

영숙의 어머니는 마루로 나오면서 철수를 맞아들이면서도 무슨 죄나 지는 사람처럼 공연히 쭈삣쭈삣 하여진다.

철수는 마당에 선채 마루 끝에 서 있는 영숙의 어머니를 보면서,

『애어멈 어디 갔어요.』

하고 엄연한 얼굴로 묻는데, 그의 얼굴에는 숨길수 없는 괴로움과 분노가 은연히 나타나 있다. 영숙의 어머니는 무 엇이라고 말을 해야 좋을는지 몰라서 조금 어름어름 하다가,

『동무집 간다고 갔는데, 거의 올걸……올라와서 옷이나 좀 벗구려. 곧 올 터이니.』

철수는 단장 끝으로 마당을 두어 번 파보더니 고개를 들어 서 하늘을 한번 치어다보고나서는

『네, 괜찮습니다. 그런데, 언제쯤 나갔어요.』

하고 묻자 영숙의 어머니는 또 한참이나

『저……』

하고 생각을 하는 체 하더니,

『다섯시 쯤 해서 나갔어.』

여기에 거짓말이 나왔다.

『왜 마당에 가셨어, 어서 올라와요.』

하며 영숙의 어머니는 다시 철수의 비위를 맞추려고,

『얘, 청아야! 청아야!』

하며 청아를 찾는다.

『얘 어디갔니? 이뿐아!』

하고 마루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왔다갔다 하며 어린애 업 어주는 애를 불러댄다.

『얘 이뿐이더러 아기 데리고 들어오라고 해라.』

이번에는 하인에게 하는 말이다.

『고 배라먹을 년이 어디로 갔노! 해가 저물었으면 돌아 올 줄을 모르고, 그렇게 일러도 말을 들어먹어 주어야 지……』

하다가 계집 하인이 문밖으로 나가니까,

『얘, 나으리 들어오셨다고 청아 얼핏 데리고 들어오래라.』

『네.』

하고 하인은 젖퉁이를 디룩디룩하며 문밖으로 나아간다.

철수는 마지못해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벗고 앉아서 당초 에 말이 없다.

『얘, 상 가져 오너라.』

영숙의 어머니는 부엌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조금있다가 하인이 들어오더니,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하고 댓돌 위에가 서있다. 영숙 어머니는 이 소리를 듣더 니, 비단을 찢는 듯한 소리로

『무어냐. 그럼, 어디를 갔단 말이냐. 어서 더 자세히 찾아봐.』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는 걸 어떻게 합니까? 저 큰길에까 지 나가보고 갈만한 곳은 다 가보았는데요.』

『그럼 어디를 갔단 말이냐? 다시 한번 나가 보아라 어 서!』

다시 부엌을 향하여

『어서 상 가져와! 그러고 숭늉 좀 따근히 데고.』

하니까, 여태까지 양미간에 가릴 수 없는 내천자를 그리고 있던 철수는

『고만 두셔요. 있다 먹겠습니다.』

하니까, 영숙 어머니는 펄쩍 뛰면서,

『왜 고만 두기는! 조금 들어요, 점심도 일즉 자셨는데.』

하며, 미안하고 또는 죄송스러운 듯이 어쩔 줄을 모르고 서있다가,

『얘는 무엇하러 여태까지 있노. 얼핏 올 생각을 하지 않 고. 얘! 이뿐이 여태까지 찾아오지 못했니? 청아도 밥을 먹 어야 할 터인데.』

할 즈음 철수는 무슨 생각을 한 듯이 모자를 쓰며 일어서서

『애어멈 보고 할 말이 있는데요.』

하고 무슨 궁리하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다가

『오늘 밤차로 집엘 내려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고 가방을 끄집어낸다. 영숙 어머니는 속으로

『에쿠 큰일났구나.』

하고서

『그게 웬일요. 왜 그렇게 내려가우. 그렇게 급한 일에 아 니거던, 하루 쉬고 내일이나 떠나지. 애어멈도 보지 않고!』

영숙 어머니의 머리 속에서는 영숙과 철수 사이의 이어있 는 그 무슨 줄이 끊어지는 것보다도 이번에 청구하려던 몇 백원 돈이 없어질 것이 더 애석하였다.

철수는 문밖으로 나왔다.

영숙의 어머니는 문밖까지 쫓아 나오면서 철수를 만류하였 으나, 영숙의 어머니는 철수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기에 아 무 힘도 없었다.

『그 애가 곧 올터이니, 들어와 앉았다가 보고 가요. 하인 을 보내서 불어올 터이니.』

애걸을 하다시피 하였으나 철수는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아네요. 급해요. 며칠 있다가 올라와서 만나보지요.』

하고 초연히 가버리려 한다. 너무 철수의 결심이 굳은 것 을 안 영숙 어머니는 더 다시 철수를 붙잡을 수가 없어 말 이 없이 서서 문앞 골목으로 나아가는 철수의 뒷 모양만 바 라보고 서 있었다. 철수는 골목을 돌아서 사라지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안으로 들어온 영숙 어머니는 제 화에 못 이 기어 집안사람이 조금만 무엇하면 트집을 잡아서 화풀이를 하려고,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먹고 입는 것이 주인 공인 철수가 저녁도 먹지 않고 떠난 것을 볼 때 공연히 죄 지은 사람들 모양으로 전전긍긍할 뿐이다.

이런 일이 있는 줄 모르는 어린애 업은 애는 작난으로 피 곤한 몸에 청아를 업고서 저녁을 먹으려고 집으로 들어왔다 가, 집안 사람들이 수군수군 허둥지둥하는 것을 보고 이상 한 생각이 나서 눈치만 살피려고 부엌문간 앞으로 가서, 계 집하인에게

『아씨 오셨소?』

하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계집하인은 아까 찾으러 다니던 생각을 하고 마님께 꾸지람 들었던 일이 분하여 가자미눈을 해가지고 흘겨보면서,

『』이런 경칠년! 옳지 이게 마님께 야단만났다. 어서 마님 께 가봐라. 아까 나리가 들어오셔서 아기를 불러 오라셔서 찾다못해 나리께서 역정이 나셔서 저녁도 안 잡숫고 시골로 가셨어. 어서 가봐! 마님께.

가슴이 덜렁한 이뿐이는 갑자기 겁이 나서 어쩔 줄을 모르 나, 본래 성미가 다라진 애라 겉으로는 그런 기색이 조금도 없이

『왜 옆의 집에서 놀았는데.』

하고 자기 변명을 시작한다.

『옆집이 무슨 옆의 집야. 내가 두 번이나 가 봤는데.』

『두번이나 왔었으면 왜 나를 보지 못해.』

『없으니까 못 보았지.』

『누가 없어, 와보지를 않았으니까 못 봤지.』

하인도 여기에는 불복이다.

『누가 안 가봐, 네가 없었지 내가 안 갔어!』

『그럼, 왜 안방에서 내려놓고 놀았는데.』

하고 서로 변명하느라고 목소리가 높았을 때 계집하인은 소리를 버럭질러서,

『없었거든, 없었다고 그래. 다른데 가서 실컷 장난치고 와 서 옆의 집에 있었다고……』

『다른데서 노는 것을 봤어. 찾아보지도 않고 그러거든.』

하니까, 계집하인은 손에 들었던 부지깽이로 이뿐이를 탁 치며,

『내가 안 찾아봤어!』

하니까, 이뿐이는 분이 난데다가 얻어맞고서,

『왜 때려 왜 왜 어린애니까 만만해.』

하고 옆에 있던 쪽박을 계집하인에게 내던졌다. 계집하인 은 이것을 피하며,

『요것 좀 보게. 누구를 때린다.』

하고 그 쪽박을 다시 집어던진다는게 마당 가운데가 떨어 지며, 반에 쩍 쪼개졌다.

이뿐이는 분한 생각이 툭 터지면서 그대로 소리를 질러 울 음이 나오며,

『왜 때려, 이 육시를 할 년. 어디 또 때려봐라.』

하고 울며 덤빈다. 소리를 들은 영숙의 어머니가 안방 미 닫이를 벼락치듯 열면서,

『이년들 웬 야단이냐.』

하며 호령이 나린다. 이 때 계집하인이 먼저 나서면서,

『아니랍니다. 어디 갔다 인제 오느냐니까 그런답니다.』

하고 변명이요, 이뿐이는 눈물을 씻으면서,

『그렇지 않답니다. 부지깽이로 사람을 막 때린답니다.』

하나 동정은 어린 이뿐이에로 가지 아니하고 나먹은 어멈 에게로 간다.

『이년 어디 갔다 인제 와서 울기는 왜 쪽쪽 우니. 아기 이리로 가져 오너라. 너는 네 생각만 하지 아기 배고파 할 생각은 하지 않니, 이리와!』

어린애로 받더니 닷자곳자로 손에 들었던 담뱃대로 이뿐이 를 후려갈기며,

『요 배라먹을년! 어디 갔었어!』

하고 갈라지는 소리로 소리를 지르니 이뿐이는 애개개 소 리를 지르며 그대로 꼬꾸러져 운다.

『말 안할터이냐!』

하며 두어 번 더 힘을 주어 갈기자.

『옆에 집에 있었어요, 에구구.』

하자 영숙 어머니는

『옆에 있는 년이 찾으러가도 없었어. 바로 대! 바로 대지 않을 테야.』

하며 이번에는 얼르기만 한다. 이뿐이는 울음이 섞이어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정말에요. 응응.』

할제, 계집하인은 옆에 섰다가, 잘쿠선이라는 듯한 눈으로 흘겨보며,

『뭐 정말야. 딴데가서 놀았지.』

할제, 문밖에서 영숙이가 황망히 들어오다가, 이 꼴을 보고 서 눈이 뚱그래지며

『이게 웬일들이야.』

하며 어머니를 보았다.

영숙의 어머니가 영숙과 춘우 사이를 알기로 오래고 또는 묵인을 하여주기는 주었지만, 이번에는 그대로 둘수가 없는 지 막 내놓고 야단이다.

영숙의 어머니는 영숙이가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어안이 벙벙한 사람 모양으로 한참이나 아무 말없이 서 있다.

집안은 잠간 무슨 파란이 일어나려는 것 같이 엄숙하고 고 요하다.

『어린애를 왜 이렇게 때려 주시우. 말로 이르거나 그러시지.』

하고 영숙은 모녀싸움의 단서를 끄집어내었다. 이 말을 들 은 영숙의 어머니는 당장에 왜가리 같은 목소리로

『무엇이야? 이년 어린애가 잘못하니까, 꾸짓느라고 그러 는 것이지. 내가 그래 때리고싶어 때린다드냐. 이년 네 어미 는 네 눈갈 속에는 눈꼽만도 있지 않니?』

영숙은 어머니의 소리 지르는 것이 너무 송구스러워서

『웬 소리를 그리 지르시우, 그 말 한번 했기로 남 듣기에 는 무슨 일이나 난 것 같게.』

하고 방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으려 하니까 청아가 어머니를 보고서,

『엄마 엄마.』

하면서 따라온다.

『가만 있거라. 옷 갈아 입고……』

하며 치마를 벗으려할 때,

『무엇이 네가 소리를 질렀니. 계집년이 제 남편은 생각지 도 아니하고, 온종일 나가 있다가, 남편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르는 것은 그것이 정당한 옳은 일이고, 내가 어린애를 좀 잘못했다고, 때려준 것이 잘못한 일이야.』

영숙은 그 말 가운데 무슨 뜻이 포함된 것을 알아채고,

『누가 남편이 가고 오는 것을 몰라요?』

『누군 누구야. 네가 집안을 잘되게 하는 수작이냐. 못되는 하는 수작이냐. 너는 할 것이 네 남편 섬기는 일 밖에 없지.』

『누가 남편을 섬기지 않는댔어요?』

『그럼, 네가 남편을 무엇으로 섬기는 모양이냐? 남편이 저녁을 먹으러 들어왔다가, 도루 나가게 만드는 것이 남편 섬기는 법이라고 누가 하든!』

『어머니는 공연히 생트집을 잡아가지고 그렇게 크게 떠들 것이 무엇이란 말요.』

하고, 영숙도 맞서기를 시작한다.

『무엇이 어째!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무슨 일이 그렇 게 바쁘냐, 이 화냥년 같으니.』

영숙의 어머니는 홧김에 이 말 한마디를 내어놓더니,

『이년! 그래 너 날마다 가는 곳을 내가 모르는 줄 아느냐.

동무의 집 갑네 하고서 재동을 날마다 무슨 까닭으로 가 니?』

『내가 재동을 가거나 어디를 가거나 어머니가 알아 무엇 하시료. 나 갈 일이 있으니까 가는 것이지.』

『알아서 무엇하시료? 응 이년, 내 춘우인지 빌어먹다 턱 이 떨어질 녀석인지 그 녀석을 날로 삼켜버릴 터이다. 그 녀석 때문에 될 일도 안돼.』

영숙은 갑작스럽게 입끝이 쫑긋하여지며 두 눈에 독이 오 르더니,

『무엇이 어째요. 춘우가 어쨌단 말요? 춘우가 어머니더러 밥을 달랍디까. 옷을 달랍디까. 춘우가 될 일을 못되게 한 것이 무엇이오. 왜 걸핏하면 애꿎은 춘우를 쳐들어 가지고 야단요. 야단을 알 수가 없으니!』

『무엇이야. 춘우가 그럼 네게 무엇이 그렇게 긴해서 꽁무 니를 따라다니니. 네 밥을 주니, 옷을 주니, 네가 춘우를 따 라다녀서 네게 이로울 것이 무엇이냐?』

『해로울 것은 무엇이오. 따라다니는 것도 내가 좋아서 따 라다니고 싫은 것도 내가 따라 다니기 싫은 것이니까. 어머 니가 간섭할 것이 못돼요.』

『어째 내가 간섭을 할 수가 없니! 어미가 간섭을 하지 않 고 어떤 빌어먹을 년이 간섭을 한단 말이냐?』

『어머니가 간섭해서 되는 일 하나 없습디다.』

『무엇이 안 된 일이냐? 어미가 간섭해서 안 된 일이 무엇 이냐?』

이 소리를 듣던 영숙은 어머니를 눈이 뚫어지도록 들여다 보더니,

『어머니는 생각도 못하셔요.』

하고 무섭게 바라보고 서 있다.

『모른다. 무엇이냐? 어디 말 좀 해봐라.』

『몰라요. 나를 이렇게 만들어준 사람이 누구요. 나를 이렇 게 만들어준 사람이 어머니가 아니고 누구얘요. 어디 어머 니도 입이 있었거든 말을 좀 해봐요.』

어머니의 가슴속에도 양심의 찔림이 있었든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입만 벌리고 서 있었다. 이 말 한마 디는 언제든지 영숙의 최후 무기다. 모녀간에 무슨 일로 다 투든지 이 말 한마디만 하면, 영숙의 어머니는 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양심으로는 자기의 잘못으로 영숙의 비운(悲 運)을 가엾게는 생각 한다하더라도 다시 한번 둘러 생각을 할 때에는 자기가 그렇게 하지 않았든들, 오늘날에 이 편하 고 걱정없음이 있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영숙의 어머니는 다시 말대꾸를 시작하여,

『무엇야! 내가 잘못해서 요 모양을 만들었어. 그래, 네가 나 아니면 꿈에나 이렇게 살아볼 줄 알았드냐? 네가 무엇이 부족하냐! 네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 그 래 내가 간섭을 해서 너를 못된 구덩이로 쓸어넣었다 하면, 너는 하는 짓이 무엇이냐. 그저 들어온 복도 박차 던져내지 를 못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어미가 아무리 도 척 같다 하더라도, 그래 너를 조금이라도 잘되라 할 터이지, 못되라고 할 빌어먹을 년이 있드란 말이냐. 다 너 좋고 너 편하자고 한 일이지.』

『나 좋게 한 일이 무엇이요. 나는 아무것도 싫어요. 당장 에 쌍가마를 탄다 해도 나는 싫으니, 어머니 혼자 그렇게 좋거든 이 집이나 지키고 있소. 그렇게 편하고 좋은 집을 내버릴 수가 있단 말이요. 나는 나 혼자 갈데로 갈 터이니, 어머니 혼자 가고 싶거든, 가고 싶은 대로 맘대로 가고, 있 고 싶거든 있고 싶은 대로 맘대로 있어요. 나는 나갈데로 갈터이니, 아무러기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산 입에 거미줄 칠 터이오. 하루 세끼 먹기는 사람마다 매일반이지.』

하고 다시 벗었던 옷을 주섬주섬 집어 입는다.

어느덧 한옆에 쓰러져 잠이 들었던 청아가 눈을 부스스 뜨 더니 칭얼대고 울기를 시작한다.

『엄마.』

하고 보챈다. 이 소리를 듣던 영숙의 어머니는 눈만 흘겨 서 슬그머니 청아를 보더니

『흥, 으아.』

하고, 소리를 더 높여 우니까,

『요 배라먹을년 같으니, 왜 자지 않고 울어.』

하고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자, 청아는 그 소리에 놀라서 더 높이 소리를 지르며 운다.

『너도 팔자가 사나워서 태나기를 잘못 태났다. 고생은 잔 등이에다 새기고 나왔지.』

하고 다시

『울지 말아 요년, 울기는 왜 빽빽 우니.』

하고 청아에게로 달려들어 누워있는 애를 자기 쪽으로 굴 려서 두 겨드랑이를 쳐들으니까, 청아는 어머니가 아니라고, 억지를 쓰며 몸에 목을 놓고 두 다리를 버르적거리며 목구 멍이 찢어지는 듯이 운다.

한참이나 추슬려고 애를 쓰던 영숙의 어머니는 가뜩이나 화가 나고 분한데다가, 어린애까지 야단이니까, 그대로 방바 닥에 홱 내던지면서,

『에, 나는 모르겠다. 울거나 말거나.』

하는데는, 늙은 할머니와 젊은 어머니 사이에는 어린 아이 를 가운데다 두고서 일종의 질투가 일어났다. 더구나 늙은 할머니는 젊은 어머니를 질투하는 경향이 있다.

방바닥에 곤두라진 청아는 바늘로 찌르는 듯이 운다. 이것 을 본 영숙은 쏜살같이 달려들어 어린애를 끼어안으며, 마 치 고양이가 잡아먹으려는 쥐새끼를 노려보는 듯한 눈으로 자기 어머니를 노려보더니,

『어린애가 무어라고 그랬소. 방바닥에다 내던지게. 화가 났으면 났지 화풀이를 왜 어린애에게다 한단 말이오.』

하고 목줄띠에 핏줄이 서도록 소리를 지른다. 그러고,

『우지 마, 우지 마.』

하고 청아를 달래는데, 다른 때 같으면 청아가 울기를 시 작하면 반드시 자기 어머니에게다, 떼어맡기던 것이, 오늘은 모녀 싸움 끝이라, 그전보다도 더 애정이 있어서 그리한 것 은 아니지만 어머니를 더욱 윽쥐어박으려고 청아에게 전에 없이 인정을 보인다.

가슴에 안기더니, 말이 없이 눈을 감고 편안히 잠이 드는 청아를 들여다보는 영숙의 마음은 공연히 처량하여진다.

인생의 무상이라는 문자는 모르더라도, 한없는 무상을 느 끼었다. 자기가 지금의 자기 팔에 안고 앉아있는 것이 자기 의 딸이요, 또는 철수의 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거기에는 무슨 위대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끊으려하면, 끊을 수도 있지만, 자기의 힘을 가지고는 끊을 수는 없는 무슨 큰 힘이 청아를 통하여 철수와 자기를 얽어놓은 것 같았다.

마치 유리통 속에 갇혀 있는 날벌레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그것을 꾀뚫으려하면 이마를 부딪쳐 나갈 수가 없는 큰 무 슨 장벽이 자기의 청아와 철수를 가두어 놓은 듯하였다.

청아는 가끔가끔 떨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으로 어머니의 젖을 만지었다.

영숙의 품이 천당이나 낙원 모양으로 절대(絶對)의 안식(安 息)을 한다.

영숙은 한참이나 이 잠자는 청아를 내려다 볼 때 이 청아 를 자기 품에 안았을 때는 언제든지 맛보는 것이나 마찬가 지로 모녀의 따뜻한 애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왈칵 분한 기운에 발길을 돌리어 자기 집에서 나가려던 마 음이 다시 주저앉게 한 이가 그 누구이냐?

그것은 자기의 어머니도 아니요, 자기의 남편도 아니요, 자 기의 세간도 아니요, 그것은 자기가 어머니 노릇을 하는 말 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청아이다.

이 세상에 절대(絶對)의 사랑이 어느 것이냐 하면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남녀간 부부간의 사랑은 현대인으로 반 드시 상대적(相對的)이나 더 싫으면 나도 싫고 네가 사랑하 지 아니하면 나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소위 연애이지만 어머니의 모든 사랑은 그렇지가 않다. 자기 자식이 아무렇 게나 괴롭게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일 것이다.

영숙의 가슴에는 또 다시 번민이 일기 시작하여 얼굴빛이 푸르러지기를 비롯한다. 그리고 말이 없이 앉아 있자, 구곡 간장에 새어나오는 원통한 듯한 비애가 마디마디를 녹이는 듯하여지고 두 눈에서 눈물이 핑 돈다. 그리고, 그것이 방울 이 되어 뚝뚝 낙수 떨어지듯이 두 뺨에 떨어지는 것은 마치 두어개 점을 찍어놓은 듯 하였다.

눈물이 나오자, 한숨이 나온다. 그러더니, 눈물이 다시 비 오듯 한다.

이에 영숙은 또 다시 결심을 하였다. 모든 것을 당장 결단 하고 튀어나가리라. 모든 것을 잊으리라. 그리고 새로운 생 활을 하여 보리라.

그러나 영숙의 몸은 무거운 무엇이 누르는 듯 하였다. 그 것은 산도 아니요, 집도 아니요, 돈도 아니라 석자 혀에 되 지 않는 청아이다.

청아야말로 두 사람 사랑의 결정이냐, 그렇지 않으면 죄악 의 씨냐, 또 그렇지 않으면 업원이냐, 그것은 어떻게 된지를 영숙은 모른다. 그것을 알려고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자기 남편은 버릴 수가 있으나, 청아는 차마 버릴 수가 없는데, 어찌하랴?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무슨 힘이 가련한 인생을 꼭꼭 동여매 놓았다.

영숙의 마음에는 차라리 청아가 아주 죽어 없어서 영원한 단념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모르거니와 살아있는 동안에 나 가고 너 가거라, 떨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영숙의 속에는 몽글몽글한 청아의 살이 따뜻하게 만져지고 편안히 잠이 들어 쌔근쌔근하는 콧소리는 마치 향기를 토하 는 듯하다.

그 때 영숙의 마음은 괴로웠다. 어찌해야 옳으냐, 청아를 두고 가랴, 데리고 가랴. 데리고 갈 수도 없고, 내버릴 수도 없고, 다만 답답한 것은 가슴 뿐 이다.

그는 울음소리를 내어 울었다. 고요한 밤중에 젊은 여자의 울음 소리는 가늘고 곱게 떨려서 캄캄한 밤중을 처량하게 흔들어 놓는다.

『듣기 싫다. 울기는 왜 우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영숙의 어머니의 눈에도 눈물이 괴 였다.

입으로 소리는 지르나 그의 가슴도 쓰리지 않는 것은 아니 었다.

자기도 안다, 영숙의 눈물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라는 것 에 지금까지 질질 끌려와, 얼마 아니 있으면 무덤이란 것에 자기 몸이 툭 집어던져지고 뚜껑을 턱 덮어버릴 날이 멀지 않은 그는 다만 보지 않고 느끼지 않고, 생각지 않고, 백지 (白紙)같이 있다가 백지 같이 죽고 싶은 마음 뿐 이었다.

그래서, 영숙을 볼 때마다 보지 말고, 생각지 말고, 느끼지 않으리라, 하고 다만 소리만 지르고 야단만 칠 뿐 이다.

『우지 말어.』

소리를 지르는 것은 실상은 영숙이가 불쌍해서 나오는 것 이지마는 그것이 곱고 부드럽게 타이르는 말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귀찮고 보기 싫은 생각에 소리만 꽥꽥 지르게 되는 것이다.

영숙은 대답도 없이 한참 앉아 울다가, 무릎이 저려서 청 아를 내려뉘고, 다시 옷장의 문을 열고 한참이나 문앞에 서 있다가 옷을 주섬주섬 주어입고 문 밖으로 나가려 하자,

『어디를 가?』

하며 어머니가 내다본다.

『어디 가는 것은 알아 무엇하셔요. 나 가고 싶는데, 내 발 가지고 나가는데……』

하며 홱 나가버렸다.

어디까지 쥐 죽은듯이 가만히 있던 찻집, 하인, 침모할 것 없이 모두 안방으로 기어들면서

『이 밤중에 어디를 가실까요. 제가 좀 따라가 볼까요.』

계집하인이 엉거주춤하고 엎드려 물어본다.

『고만 두어라. 고 성미에 하고 싶은 것은 하고 마니 까……그러나, 나으리가 정말 갔나?』

하고 눈을 끔벅끔벅하고 있다.

『글세 올시다. 가시기야 했겠습니까. 인제 들어오시겠지요.』

그러나, 밤이 새도록 영숙도 돌아오지 않고, 철수도 들어오 지 않았다.

一二

[편집]

그 날 저녁 철수는 시골로 가리라는 마음이 불현듯 일어나 기는 났었으나, 영숙의 집을 나와서 다시 생각할 때에는 자 기가 어쩐지 어리석은 듯한 생각이 나서, 그대로 아무 말 한 마디도 없이 시골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그는 전동 어 떠한 여관에다가 주인을 잡아 놓고, 다시 문밖으로 나왔었 다. 그러고는 발길 내키는 대로 안동 별궁앞까지 걸어갔다.

그래가지고 또 다시 발길을 돌리어 안동 고개를 넘어갈 때 에는 어디까지 자기가 느껴보지 못하던 슬픔이 가슴에 가득 하여 공연히 눈물이 날 듯 하였다.

『사람이 그럴 수가 있담.』

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한참 생각을 하다가, 다시

『배은하는 계집이지.』

하고는 무심히 하늘을 치어다보면서

『내가 제가 무엇이 부족한고, 내가 제가 그렇게 잘못한 일은 없는 것 같은데, 계집의 마음이란 언제든지 믿지 못할 것이지마는 그야말로 나로서는 모를 일이야. 어떻든 만나보 고서 되든지 말든지 최후 담판을 해보고서 결말을 내어버려 야지.』

하고 그는 무슨 결심을 한 듯이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길 옆 잡화상에 나란히 버티어놓는 석경 속에는 여러 개의 자기 그림자가 비추었다 없어졌다 한다. 인력거가 지나가고 자전거가 다가온다. 그는 이리저리 피하면서 길 한옆으로 걸어간다. 그러다가는, 다시 온 전신에서 피가 한꺼번에 끓 는 듯 하더니, 그의 집에서는 튀어나가듯이

『춘우……』

라는 이름이 나왔다.

『춘우! 춘우가 영숙을 뺏었느냐? 영숙이 춘우에게로 갔느 냐? 어떻든 그 죄가 두 사람 가운데 누구에게 있는지는 모 를 지라도, 나의 원수일 것이다.』

강렬한 자극제를 먹은 것 같이 철수의 얼굴과 등골에는 땀 이 흘렀다. 춘우나 영숙이 그자리에 만일 있었다 하면, 철수 는 사람의 성품을 떠나 들에서 뛰어다니는 야수와 같이, 그 들을 물어 뜯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땀을 씻고서 창하의 집을 향하여 갈 때, 또 다시 떨 리는 것을 깨달았다.

『창하가 잘못이지. 창하로서는 그렇게 하지 못할 터인데.』

하고 눈에서 피 묻은 광채가 난다.

『먼저 창하에게 물어 보아야지, 창하가 내게는 첫째가 되 는 원수야.』

철수가 창하의 집에 들어가서,

『아저씨 계십니까?』

할 때에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사랑문을 열어도, 방안에는 전기불만 켜있고 아무도 없는데 방바닥에는 과일 껍데기와 과자봉지가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다.

이것을 보는 철수의 가슴과 눈에는 뜨거운 피가 올라오고, 질투와 분노가 거의 사람을 반이나 미치게 한다.

저것이 영숙과 춘우 두 사람이 달콤한 사랑--아니라, 음란 한 쾌락을 누리던 자리라는 생각을 하며, 그야말로 승흥(昇 汞)을 먹은 것 같이 오장이 썩어나는 듯이 괴로웠다. 그는 미닫이가 깨어지도록 탁 닫아버리고 안으로 들어가며,

『아저씨 안 계셔요.』

하는 목소리가 갑자기 탁 잠겨버렸다. 두어번 기침을 하여 소리를 가다듬으려 하였으나 점점 더 갑갑해갈 뿐이요, 입 에서는 뜨거운 김이 나온다.

안에서는 창해의 안해가 나오면서,

『오셨소! 지금 막 나가셨는데, 못 보셨소!』

『못 보았는걸요.』

『지금 막 나가셨는데--』

『혼자 나가셨어요?』

『아니, 저 누구허고 같이 나갔어.』

『누구허구요?』

『누구인지는 몰라도 어떤 여자하고 남자허구 하루 종일 놀다가, 간지가 얼마 되지 않는데요.』

『여자 허구요.』

『………』

철수는 알아채었으나,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문 밖으로 나 왔다.

『알았다. 춘우 허고 영숙이겠지. 그러하면 지금쯤은 집에 가서 앉았을 터인즉, 집으로 가서 볼가, 아니야. 내 그 집에 는 당초에 들어가지를 않을 터이야. 지금 막 나갔다니까, 얼 핏 쫓아가면 만날는지도 모르지. 어떻든 얼핏 쫓아가 보자.』

하고, 한걸음 걸을 것을 두세 걸음씩 간다. 그리고, 앞에 여자 같은 사람과 청년 두서넛이 섞이어 가는 것만 보아도 앞으로 바짝 가서 보았다.

그는 온 몸이 후끈후끈하도록 달음질을 하다시피 하여 종 로까지 왔다가 종각 뒤로 영숙이 집 들어가는 골목 앞에 섰 을 때, 철수는 들어갈 수도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는 들어가자니 자기의 결심이 약한 듯하여 들어가지도 못하 고, 안 들어가면 영숙을 만날 수도 없다. 그래서 잠간 망설 이다가 그는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그대로 돌아서서 자기 여관을 향하여 다시 걸어갔다.

여관으로 돌아온 철수는 벼개를 비고 누었다가, 다시 일어 나 서성거리다가 앉았다가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누 었다가,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다시 눈을 감고 생각을 시작 하였다. 철수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허무하기도 하고, 또는 기가 막히기도 하여, 세상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으며, 이와 같은 일을 당하는 사람이 또 있으랴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자기가 여숙과 그동안 여러 해를 비록 정식 안해는 아닐지 라도, 정답게 지내오다가 오늘에 자기를 배반하고 춘우를 따라간다는 것은 그것이 춘우의 잘못은 아니라 할지라도 영 숙이가 남편인 자기를 모욕한 것은 사실이다. 남편을 배반 하는 여자가 영숙이 한사람은 아닐지라도, 지금까지 자기의 사랑을 다하고, 또다 자기의 재력(財力)을 기우려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저를 위하여 주없는데, 지금와서 이렇다 저렇 다 말 한마디 없이 헌신짝 벗어버리듯 버리고 가는 것은 은 덕을 모르는 여자요, 의리 없는 여자이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고, 자기에게 부족케 한 것이 있다면, 나를 붙잡고 말 한 마디라도 해야 자기의 도리일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머리도 없고 끝도 없는 토막토막 끊어 져 나오는 일전의 일이 생각이 눈앞으로 지나갔다 닥쳐왔다 한다.

그리다가, 일전에 영숙이 자기 팔에 엎드리어 눈물을 흘려 가며 모든 것을 자백하고 사과하던 것이 생각나며, 또한 자 기도 진정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여 준 것이 생각난다.

이 생각이 나자, 그는 눈을 번쩍 뜰 때, 두 눈에서는 번개 불 같은 광채가 일어났다.

『에, 간특한 계집! 제가 나를 속여! 농락을 해! 고것에게 속은 것을 생각하면 분해, 참 분해!』

하고, 다시 벌떡 일어나서,

『얘, 냉수한 그릇 가져오너라.』

하며, 한 대접의 냉수를 쭉 들이키더니, 다시 팔을 괴이고 앉아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결심을 하고 또 결심을 한 끝에 그는 최후의 무서운 웃음을 웃었다.

『옳지, 이제부터는 나도 네게 다시 속지 않는 사람이 될 터이다! 네가 그리하면 나도 할 일이 있다. 어디 보자!』

할 때, 그이 입 가장자리에는 비통한 웃음이 있었다.

『나는 너의 생활을 이제부터 보장해 줄 수 없다고 할 터 이다. 나는 돈으로써 지금까지 너를 내것으로 만들었다. 이 제부터도 나는 돈의 힘으로 너를 영원히 내것을 만들터이 다. 너의 사랑이 나의 돈에 지나, 나의 돈이 너의들 결심에 게 지나, 나는 어디까지든 해볼터이다.』

할 때에는 무슨 믿음이 가슴 속에 가득하여 지는 듯 하였 다. 그리고 만족한 웃음이 그 비통한 웃음 대신으로 얼굴 전체를 환하게 하였다.

그는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서,

『청아가 불쌍하지. 저것을 어떻게 처치를 해야 좋을가! 시 골로 데려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미에게는 물론 주어서 는 안 될 것이며……』

할 때, 대범한 아버지 가슴에도 뜨거운 인정의 물결이 치 면서 불쌍한 생각이 전신에 스며드는 듯 하였다.

『불쌍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제 팔자지! 에, 모든 것을 생 각할 수도 분해! 그러면 자기의 할머니에게나 맡겨서 키워 달라 하고, 생활비나 대여주지! 그러고 나는 춘우와 싸움을 시작할 터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으로 닭이 여러 번 울도록 잠이 들 지 못하였다가, 어느 틈에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세상 이 벌써 환하게 밝았다.

一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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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빠르다는 것이 그 어떤이에게는 거짓말이 되는 때 도 있지마는, 대개 지내놓고 생각하면 몹시 빨라 보이는 것 이다. 그렇게 춥던 겨울도 어느덧 지나가고, 지금은 봄이 되 었다고 물오른 버들가지는 미친 듯 봄바람에 네활개를 벌리 고 춤을 추고, 앞뒤 언덕 금잔디는 비단방석을 깔아놓은 듯 하다.

눈어름에 잠겨 있던 시냇물은 다시 은방울을 흔드는 듯 졸 졸 흐르기를 시작하고, 땅 속에 잠들었던 각종 곤충은 새로 이 새 생명을 얻어서 넓은 천지에 살길을 구하기 시작한다.

봄이 오는 곳에 반드시 평화와 즐거움이 있는 것은 아니지 만, 여기에는 세상에서 딴 사람은 그와 같은 평화와 즐거움 을 맛보는 이가 없으리라고 무한한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끝없이 행복을 느끼는 두 사람이 있다.

남대문에서 전차를 타고 관왕묘(關王廟)를 옆에다 두고서 전차 정류장 두서넛을 지나가면 연병장(練兵場) 앞 정류장이 된다. 거기서 전차를 내버리고 구룡산 가는 기차 길을 따라 한 정류장을 가면 선린상업학교(善隣商業學校) 앞 정류장이 있으며, 거기서 조금 비슷하게 서쪽을 향하여 뚫어진 골목 이 있으니, 그로 향하여 들어가면 효창원(孝昌園)이 나선다.

이 효창원은 내지 사람들이 공원을 만들려 하는 곳인데, 아 직 경성 시중에 생활하는 사람에게 너무 등한히 내버려 두 게 되어 장충단(? 忠壇) 남산공원(南山公園)에는 많이 다니 어도 이 효창원에는 발길을 던지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아, 아직까지 한가하고 유한한 송림이라든지 서강(西江) 마포(麻 布)를 동에서 서로 구비쳐 흐르는 한강물을 격하여 여의도 (汝矣島)와 영등포(永登浦)의 넓은 벌판을 내다볼 때, 흉금 이 열리는 듯한 맛을 보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 그 두 사람이라는 이는 춘우와 영숙이다. 춘우는 새 로 지은 봄 양복을 입고, 영숙은 초록색 「파라솔」에 「오 페라빽」을 손목에 걸었다.

영숙은 따듯한 볕이 아직 칠홉 하늘에 솟아있는 것을 반쯤 상을 찌프려 치어다보면서,

『날이 퍽 좋지요.』

하자, 춘우도 역시 구름 한점 없이 개인 하늘을 치어다보며,

『참, 택일은 잘했지, 내가 하자고해서 잘못되는 것 무엇 있었나.』

영숙은 농담 비슷 코웃음을 치는듯 마는듯 하면서,

『왜 안 그렇겠소. 그래서 그저께 저녁 활동사진 구경갈 적에는 남의 갓 지어입은 옷을 소르르 흐르도록 비를 맞게 하였담.』

『아따, 내가 그랬어. 그 날 그러기에 내가 가지 말자고 해 두 자꾸 가자구 재촉을 하더니, 그 모양을 당하였지.』

『그것 큰일 나겠네. 제가 그랬어요. 그러게 당신이 가지 말라고 단단히 붙잡지를 않았으니까 그렇지요.』

『허허, 그것 큰일나겠네. 그것은 어떻든지간에 우리 오늘 내친 걸음에 인천 구경까지 다녀옵시다 그려.』

『인천요?』

『그래, 그전부터 인천 구경가자고 그리하지 않았소. 또 나 올 기회를 만들기가 그리 쉽지 않을 터이니, 아주 다녀서 오는 것이 좋지 않소. 오후 차에 갔다가 저녁 막 차에 돌아 옵시다 그려.』

영숙은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걸음을 천천히 걷고, 고개를 숙이고있더니, 뺨 위에 와서 부딪치는 꿀벌을 피하 여 손에 든 수건을 흔들면서,

『에구머니, 벌! 벌!』

하고, 옆으로 물러서니, 춘우는

『무섬도 퍽 타네.』

하고 쫓아버리고서는 언덕 위로 올라섰다. 옆의 선린상업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무엇인지 소리 내어 읽고 있는 소리가 들리었다.

『글세요, 늦지 않을까요.』

하고, 팔둑시계를 보더니

『벌서 열 한시 인데요. 오늘은 여기서 놀다가 요 다음에 일찍이 떠나서 하루 종일 놀다가 오지요. 그러는게 어때 요?』

하며, 춘우에게 동의를 청하는 듯이 곁눈으로 쳐다본다.

『글세, 내가 알우. 마음대로 하구려.』

하고, 손에 든 단장으로 길에 떨어진 돌멩이를 탁 쳐서 앞 으로 굴려보내었다.

『어디로 갈가.』

『글세, 경치 좋은 데로 가요.』

『경치 좋은데?』

『네.』

『그러면, 우리 저리로 갑시다. 저기 저쪽에 큰 바위가 있 는데, 그 바위 위에 올라 서면 가문들, 서강, 마포, 용산, 또 노량진, 영등포가 모조리 보이는 데가 있어.』

『강물도 보입니까.』

『그럼, 강물도 보이고 말고. 그렇게도 강물이 좋소.』

『웬일인지, 저는 강물이 퍽 좋아요.』

하고, 아까보다도 걸음을 더 급히 하여 빠르게 걸어간다.

춘우는 그 뒤를 따라가며,

『이렇게 급하게 갈 것이 무엇이오. 천천히 갑시다.』

『빨리빨리 가서 얼핏 좀 봐요.』

『강물이 그렇게 좋단 말이요. 자, 여기 이 솔나무 사이를 걸어가는 재미는 어떻소.』

『에구 참, 소나무가 크기도 하이, 여기는 무엇하는 곳입니 까?』

하고, 골프 운동장을 가리킨다.

『골프라는 것이 무엇얘요?』

『운동하는 것이야.』

『어떻게 하나요.』

『길다란 몽둥이 끝에 주걱 같이 파진 것이 있는데, 그것 으로 새알 같은 것을 치는 것이야.』

『응, 알겠어요. 언젠가 활동사진에서 하는 걸 본 일이 있군.』

『그래, 그래.』

이렇게 말을 하며, 효창원 송림을 향하여 가느라고 청파사 계(靑坡四契) 촌가를 지내간다. 짚더미를 쌓아 놓은 곳에서 겨껍질을 까먹느라고 새 세끼들이 종알종알 하면서 재재거 리고 옆에 집 담모퉁이 양지쪽에서 잠이 들었던 검정 고양 이가 두 사람 발자국 소리에 놀라서 깡충 뛰어 지붕으로 올 라간다. 저 건너 공청에서는 늙은이들이 모여 앉아 장기들 을 두느라고 왁자지껄하는데, 그 건넌 집 동산에서는 새 색 씨의 다홍치마 자락이 울타리 사이로 보이는 듯 마는 듯 하 는데, 저만 새 버들을 꺾어서 힘있게 내부는 피리소리가 풍 편에 들리는 듯 마는 듯 하다. 길 옆에 난지 얼마 아니 되 는 냉이 소루장이의 상긋한 냄새는 야릇한 봄기운에 두 사 람을 취하게 하고, 건넌 산 아지랑이를 두어번 건드리고 불 려오는 연한 바람은 사랑에 취하여 따겁게 타오르는 두 사 람의 뺨을 핥고서 지내간다.

소나무 사이에 들어섰다. 유황이나 몰약을 사르는 듯이, 태 평한 기분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사면은 비인 듯 적막한데, 다만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적막을 깨뜨리고 자박자박 할뿐 이다.

춘우는 영숙의 손을 쥐였다. 그리고 힘있게 눌렀다. 영숙도 아무 말 없이 춘우의 손을 따라 쥐었다. 그리고 정의 광채 가 넘쳐 나오는 두 눈으로 춘우를 보았다. 그리고, 만일 세 상의 즐거움이 있고, 행복이 있으면 이것일 것이라는 만족 한 생각이 그의 두 사람 가운데에 넘치고 또 넘치었다. 아 무 것도 숨김이 없이 하늘이 주신 자기의 생명을 조화의 섭 리로 길러 가는데, 자연 속에서 또한 아무것도 꺼리김 없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을 끓는 청춘의 피 속에 느낄 때 그들 은 참으로 진정한 삶을 사는 듯 하였다. 그리고 부드러운 입김과 보조맞는 발자취와 맥박이 서로 통하는 피부를 서로 대고 산골자기에 새로 흐르는 샘물과 같이 달고도 청렬한 사랑에 취하였을 때, 그들은 참으로 살아있던 것이다.

말 없이 굴리고 말없이 건네는 두 사람의 빛나는 두 눈동 자는 번개와 같이 마주치고 번개와 같이 피할 때에 그들은 자기의 애인의 견디기 어려울 만치 가슴 속에서 뛰노는 사 랑의 고동을 볼 수가 있었으며, 가슴에서 영원히 타는 사랑 의 불길을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어느덧 끼어안고 걸어갈 듯이 가까이 섰다. 영 숙의 틀어얹은 머리 앞에서 미친듯이 나부끼는 긴 머리카락 이 춘우의 뺨을 지근덕거리듯이 간지린다. 그리고 때때로 영숙의 손이 춘우의 손 속에서 무엇을 더욱더욱 고조(高調) 시키는 듯이 더 힘있게 쥐어졌다.

『우리 저리로 갑시다.』

『어디로요?』

『저기 보이는 저 넓은 마당이 있지 않소.』

하며, 춘우는 맨 앞을 곧장 가리키면서,

『저 곳을 지나서 저리로 저 언덕을 올라가면, 또 여기처 럼 소나무가 있소. 그곳을 지나 나가면, 영숙이 보자고 하던 그 강이 보이는 곳이야.』

할 때, 그들은 바위 위 풀 밑으로 종알거리며 흘러가는 시 내 하나를 당도하였다.

『에그머니.』

영숙이가 건너뛰기에는 조금 넓다고 할수 있고, 그대로 건 너가기에는 징검다리가 없었다. 영숙은 두 손을 맞 모으고 종종걸음을 걸으면서,

『에그, 나는 못 건너 가겠네. 이를 어쩌면 좋아.』

사면을 돌아보니, 앞에도 언덕, 뒤도 언덕, 위도 송림, 아래 도 송림이요, 그 가운데를 이물이 흘러간다.

『무엇을! 그까짓것 하나 건너오지 못하구.』

하고, 춘우는 먼저 성큼 건너 뛰어가서 영숙에게 손을 내 어밀었다.

영숙도 손을 맞 내밀어 보더니

『에그, 나는 무서워 못 건너가겠어. 이를 어쩌나.』

하고, 먼저 건너간 춘우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흘기어 보았다.

『에그 자,』

껑충 다시 건너와서 춘우는 자기 두 팔 위에 영숙을 선뜻 안았다. 영숙은 춘우 가슴에 힘없이 안겨 부끄러운 듯이 잠 간 발버둥질을 치다가, 춘우가 물 건너갔을 때에, 그는 비로 소 아무 말 없이 부끄러운 듯이 춘우에게 안겨 있었다.

춘우가 영숙을 땅에 내려 놓았을 때, 그들은 피들이 얼굴 로 올라와 무안해 하는 사람들처럼 시빨갛다. 영숙은 춘우 를 보더니, 부끄러움을 못 견디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었다 가 다시 누가 보지나 아니하였나 하고 사면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다시 언덕을 넘어섰다. 그리고 앞이 탁 터진 넓 은 풀밭을 지내서 다시 두덩을 올라섰다.

『우리 이렇게 한적한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어.』

영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글세 서울 안은 너무 복잡하니까, 몸에 퍽 해로워. 이런 데다가 조그마하게 집이나 짓고 집 앞에 화원이나 꾸미고, 뒤에는 과수나 몇 개 심고, 그리고 지나는 것이 아주 이상 적일 터이지. 나도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많이 하였지 만……』

『저두요. 언제든지 한번 그러고 살아보리라는 결심까지 한 일이 있었어요.』

『이 근처는 땅값도 헐할걸.』

『싸겠죠. 얼마나 가지면 될고?』

『글세 돈 천원만 가지면 되겠지.』

『천원요? 그렇게 싸요.』

『싸다니, 그것도 땅 나름이지만 천원이면 넉넉할 것 같애.』

『그렇지만, 그렇게 맘에 드는 곳이 있을까요.』

『땅이 있겠지만 돈이 없지.』

두 사람은 서로 보고 웃었다.

그것도 두 사람이 머릿 속으로만 향락할 수 있는 공상이었다.

『그러면, 우리 이 근처에 있는 집 한 채를 세내서 들어있 을까요. 창하씨에게 너무 미안하지 않아요. 또 그 집이 청아 아버지의 일가집이 되어서 더욱 불편한 일이 많아요. 어떻 게 해서든지 그 집에서 나올 변통을 좀 해야 하겠어요.』

『글세 나도 그렇게 생각이 없지 아니하지만, 지금 형편 같아서는 그리 할 수도 없고.』

『글세요.』

하고 영숙은 아무 말이 없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말을 이어,

『그러면, 전세 집 하나 얻으려면, 얼마나 주면 될까요.』

『문안 같으면 모르지만, 아마 이삼백원만 있으면 조그마 한 집 하나는 얻을 수가 있겠지.』

『이삼백원요?』

『그래.』

『그러면, 우리 하나 얻어보십시다.』

『돈이 있어야지.』

『그것은 제가 어떻게든지 만들어 놓을 터이니.』

『어떻게 만들어.』

『글세, 어떻게 만들든지간에 당신은 이 근처에 있는 집으 로 얌전한 것 하나만 얻어보셔요.』

『얻기야 어려운 게 아니지만, 어떻게 돈을 만든단 말이오.』

『글세, 그것은 왜 자꾸 물으셔요.』

『또 못 물어볼 것이 무엇이오.』

『그것은 나중에 말씀을 할터이니, 집만 얻으셔요.』

『안 될 말야. 그것을 알아야 얻든지 마든지 할터이야.』

『퍽두 그러시네. 제 몸을 판줄만 아십쇼 그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영숙이가 몸을 판 돈으로 산 집에 내가 살아 있을 것 같소.』

『어떻든지요. 그것은 집 얻는 날 말할 셈치고요. 집만 얻 으셔요.』

『그러면, 우리 둘이 다니며 얻읍시다 그려, 내 맘에 드는 것이 영숙의 맘에 들지 않을는지도 모르고, 영숙의 맘에 드 는 것이 내 맘에 꼭 들는지도 모르니까. 아마 내 맘에 드는 것이 영숙의 맘에 안 들는지는 몰라도, 영숙의 맘에 드는 것이 내 맘에는 으레 들 터이지……』

『그와 반대겠죠.』

『반대야 그럴 리 없지. 내 말이 꼭 들어맞을 터이니, 두고 보구려.』

『어디 보아요. 그러면, 우리 둘이 다니며 얻어볼까요.』

『그럽시다.』

『대관절, 저는 무슨 직업을 구할 수가 없을까요.』

『직업이라니?』

『돈 벌대 말에요.』

『집안 일은 누가 보고.』

『집안 일이 무엇이 그리 많아서요.』

『그래도 할 일이 많지. 영숙이 돈 벌 일을 하지 않아도, 내 영숙이 하나 넉넉히 해주지는 못할지언정, 굶기지는 않 을 터이니, 그런 염려는 하지도 말우. 그러면, 내 영숙이 세 간 하는 값으로 다달이 월급을 주리다.』

『얼마씩이나요?』

『글세, 많이는 줄 수가 없는데.』

『조금 주시면 저는 받지 않을 터얘요.』

『그러면 사직을 하겠단 말요.』

하고, 둘은 서로 농에 겨운 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저러나 창하씨가 이리로 오신다고 하셨지요.』

『글세 온다고 했는데, 찾지를 못해서 못 만나나, 어떻든 서로 기다리기로 하였으니까, 오기만 하면 만나겠지.』

이리 걸어오는 동안에 마포 다니는 전차 소리가 들리었다.

『저게 어디 가는 전찹니까.』

『삼개 나가는 전차야.』

『저기 저 벽돌집은요.』

하고, 영숙은 소나무 사이를 가리킨다.

『그것은 경성감옥.』

『에그, 참 전중이들이 많으이.』

다시 그들은 앞을 내다보고,

『자, 저것이 한강이오. 영숙이 좋아하는 강야.』

『참말로 돛단배가 다니네.』

『저기 저 시뻘겋게 쇠로 얽는 것이 있지 않소.』

『그것이 한강 철교죠?』

『맞았어. 자, 저기 기차가 가지 않소.』

멀리서 목늘여 길게 우는 촌닭의 소리가 꿈 같이 들려 오 고, 한 마리 흰 나비가 두 사람 앞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며 지나간다.

두 사람은 바위 위에 올라섰다. 동에서 서로 흐르다가 다 시 남으로 구부러져 남에서 또다시 서로 흐르는 한강 물이 용산 나루를 비스듬이 거쳐서 삼개로 돌아드는 거울 같은 물위로 누른 돛, 흰 돛을 훨씬 높이 달아 매고 미끄러지는 듯이 흘러가는 배들은 혹은 산구비를 돌아가기도 하고, 다 시 나타나기도 한다. 멀리 강가에 깔리어 있는 하얀 모래들 은 봄볕에 비치이어 저녁에 하늘을 쳐다볼 때, 반짝반짝하 는 별보다도 더 곱고 예쁘게 반짝거린다. 탁 터지게 개인 하늘은 다만 멀리 보이는 아득한 산 윤곽이 경계선이 되어 사방으로 둘러 쌌을 뿐이요, 왜청을 엷게 풀어 물들인 듯 하다.

『잠간 앉어요. 나는 다리가 아파.』

어리광 비슷 간원하듯이 영숙은 한 손으로 춘우의 팔에 매 어 달리며, 한 손으로는 치마를 휩싸고 바위 위에 앉았다.

『나도 좀 앉아볼까.』

춘우도 그 옆에 가 앉더니,

『벌써 몇 달이 되었나. 우리가 저기 저 다리 밑에서 뱃놀 이하던 때가……』

『글세요.』

영숙은 고개를 다소곳하고 생각을 하더니,

『벌써 열달이 되었나요. 열 한 달이 되었나요.』

『그 때는 오늘 우리가 이렇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었지.』

『그러믄요. 하지만 그 때 처음으로 뵈울 적과 또는 창하 씨에게 말씀을 들을 적에 저는 어찌나 반가운지 몰랐어요.』

『나도 퍽 반가웠어. 그 때 보니까, 영숙이가 어렸을 적 보 다 더 이뻐졌습디다.』

『무어요? 예뻐요? 참 별말씀을 다 듣겠네. 내가 예쁘면 세상에 미인이 썩어나겠습니다. 나는 나처럼 못생긴 여자가 없을 줄 아는데요.』

『어디가. 나는 영숙이가 이 세상에서는 가장 예쁜 사람 같은데 그려.』

『그러면 당신의 눈이 틀리셨거나 잘못 보셨지요.』

『참, 나는 영숙이 눈에 고만 마음이 끌렸어.』

하고, 영숙의 눈을 정이 엉킨 눈으로 들여다 보자, 영숙은 춘우의 무릎을 꼬집어 뜯으며,

『아이, 난 싫어요. 왜 그렇게 보셔요. 부끄럽게.』

하며, 무릎을 때리었다.

『이거 왜 이래 아파. 부끄럽긴 내 앞에서 부끄러울게 무 엇이람. 못난이 같으니.』

『에그, 잘난 어른 좀 보게, 내 앞에서 당신이 잘났어요.

똑 어린애 같으면서도.』

『내가 어린애 같애. 영숙이가 내 앞에서는 모두항복을 하 고 말면서.』

『그렇죠. 누가 항복을 해요. 저는 항복해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이 제게 항복은 많이 하였어도.』

『잘도 그렇겠다. 좀 생각을 해보아요.』

영숙은 생긋 웃더니,

『듣기 싫어요. 이것이나 자셔요.』

하고, 주머니에서 뽕뽕과자를 꺼내서 춘우의 입 앞으로 내 밀었다. 춘우는 그것을 받아 입에다 넣으며,

『어디 요담부터 두고 볼까, 누가 항복을 하나.』

『두구 봐야 내가 이기지요.』

『그 과자 주머니나 이리 좀 주. 그것은 혼자만 먹으려고 사가지고 온 것이지요.』

『제 주머니에 있는 것이니까, 내 맘대로 하지요, 자, 제가 드리는 대로 잡수시오. 제 명령대로요.』

한두개 주는 대로 받아먹던 춘우는

『그것 어디 갑갑해 견디겠나, 이리 내우.』

뭉텡이째 빼앗아, 앞에다 확 펴놓으면서

『자, 이렇게 쭉 놓고 같이 먹읍시다.』

할 때, 누가 위에서

『그 무슨 쌈들을 그렇게 하나?』

하는 사람은 창하였다.

『야 어서 오게. 그러지 않아도 기달렸어. 이리 앉게.』

창하는 그대로 서서,

『아닐세, 바람좀 쐬고, 참 좋다, 시원한걸.』

하고 앞을 내다본다. 영숙은 창하를 치어다 보더니,

『그런데 왜 인제 오셔요.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오실 줄 알았는데요.』

『왜 인제는요. 어떻게 달음질을 해왔는지, 등에 땀이 다 났는데요. 참 거기 좋군. 저기 보이는데가 노량진이고, 또 저 굴뚝이 우뚝 서 있는데가 영등포지!』

세 사람은 모두 그곳을 보았다. 춘우는

『그런가 보이!』

창하는 잊어버렸던 것을 깨달은 듯이

『아 참! 여보게 내 오늘 전차 안에서 철수를 만나지 않았나.』

영숙의 가슴은 이 말 한마디에 이상하게도 뛰었다.

『그래, 인사하든가.』

춘우는 말소리도 그리 순조로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인사하데, 그러고 영숙씨도 잘 있느냐고 하면서 무슨 이 상한 말 한마디를 하는데, 그것은 요 다음에 하지.』

영숙은 눈을 뚱그랗게 뜨고서,

『무슨 말인데요. 지금 하시지요. 물론 나를 욕하는 말이겠 죠. 언제든지 저는 나를 다시 제것을 만들고야 만다고 하니 까요.』

『아니요, 그런 말도 아니요, 차차 이야기를 하지요.』

『그런데, 어째 올라왔대요?』

『서울서 무슨 경영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다 결정이 되어서 인제는 아주 서울 있겠다고 그러드군요.』

『응, 그 회사인지 무엇인지 그것이 된 모양이로군.』

하며 옛 생각 지금 생각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그의 머 리 곳으로 파고들어 시름없이 먼 산만 바라보고 있을 때, 춘우는 고만 파흥이 되어, 그 흥을 다시 일으키려고,

『무슨 생각을 이렇게 해.』

하고, 영숙을 어루만지며,

『자, 일어나서 우리 또 걸어다닙시다.』

『어디로요.』

『저기 저리로 우리 개나리나 꺾으러 갈까?』

창하는 두 사람의 풀이 죽은 것을 보더니,

『허허, 내가 공연히 그런 말을 하였군. 그저 나는 언제든 지 앞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탈이야, 대관절 몇시인가.』

시계를 보더니

『벌써 이렇게 되었나, 한시나 되었네. 가서 점심이나 좀 먹어야지. 이 근처에 먹을 것이 변변해야지. 큰 길에나 나가 야 내지 사람 음식이나 있을까.』

혼자 죽 늘어놓더니,

『자, 가세.』

하고, 앞장을 서서 활개를 치고 모자를 뒤로 제켜썼다.

一四

[편집]

일주일이 지나서 창하는 철수를 길거리에서 만나 철수에게 끌려 어떤 서양 요리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철수는 창하를 속으로 몹시 원망하는고로, 만일 자기와 친 척 관계가 되지 않으면 당장에 절교라도 하고, 무슨 일이 났었을 것이나, 본래 일가와 친척이 많지 않은 그는 그리 쉽게 그를 떼버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친척이라 함보다도 다정한 친구 이상으로 할 말 못할 말 다하고, 지내던 터이 요, 또한 영숙을 창하가 춘우에게 꾀어 보낸 것이 아니요, 다만 친구의 편의를 보아주었을 따름이므로, 철수 역시 일 개 여자로 하여 친척간에 서로 반목을 하는 것은 사내스럽 지 못한 일이라 해서 모든 것을 너그럽게 생각하고 있는 터 이다.

『여보게, 자네가 여태까지 영숙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네 의 잘못으로 아네. 나는 자네나 영숙이나, 또는 춘우 세 사 람 중 누구 한 사람을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하지는 않네. 그 러나,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본래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 요, 또는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자네가 지금 무슨 짓 을 하여서든지 영숙을 도로 찾아오겠다고 하지만, 이왕 간 영숙을 자네가 찾아오면 무엇 하나? 자네는 돈 가진 사람이 요, 그 두 사람은 물론 돈이 없어. 그러나 그 돈으로 자네가 영숙의 마음을 살 수가 있을 줄 아나? 하필 영숙의 마음뿐 아니라, 아마 자네가 이 세상 사람의 누구의 마음이든지 돈 으로는 살 수가 없을 줄 아네. 설령 자네가 영숙을 다시 끌 어 온다고 하세, 그 때에 자네는 영숙이란 사람의 몸뚱아리 를 사온 것이지, 영숙의 마음까지는 사오지 못할 것이니, 그 점을 생각해야지. 영숙이의 몸뚱아리를 살 마음이 있으면 이 세상에는 영숙이 몸보다도 더 젊고, 어 예쁜 몸뚱아리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음식이 거의 끝나갈 때, 창하는 철수에게 충고 비슷 하게 말을 하였다.

『아니지요. 그것은 너무 이상(理想)으로만 달아나시는 말 씀입니다. 우리는 태고적 사람으로 있었다 하면 기운 많은 사람이 그 기운으로 능히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얻을 수 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에는 돈을 가지면 능히 사 람의 마음까지 살 수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구나 여자는 그의 손가락에 끼이는 금강석 반지 하나만 사주면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살 수가 있는 것얘요. 말씀하신 것과 같이 돈이든지 명예든지 아무것도 다 싫고 다만 사랑을 위하여 살겠다는 여자가 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을 합 니다. 영숙이도 지금은 자기가 멋모르고 일종의 호기심으로 저와 같이 지내겠지요마는, 내 생각 같아서는 단 일년이 못 되어 내게로 다시 돌아올 것을 단언이라도 하라면 하겠습니다.』

『글세, 그거야 자네가 날더러 언제든지 하는 말이지만.』

하고, 창하는 접시의 고기를 입에다 넣으면서,

『그것이 자네가 언제든지 잘못하는 일이야. 일년이 못되 어 설령 자네에게 돌아온다 하여 보세. 그 사람의 마음까지 오는 것은 아니거든. 아까도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몸만 오 면 무슨 일이 있나, 마음이 와야지. 그러니까 이 뒷일은 어 떻게 될는지 나로서 단언은 못하겠네 마는 자네는 모든 것 을 단념하는 것이 좋을 듯이 하이. 나로서 이러한 권고를 하는 것은 말하는 나도 미안한 일이요, 듣는 자네도 괴로운 일이지만, 만일 자네가 기어코 영숙을 찾아온다 하면 그 결 과로 남는 것이 무엇이겠나? 춘우나 영숙이나 자네 세 사람 은 모두 불행해질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게, 자네 생각 같아서는 분한 마음에 원수라도 갚고 싶겠지만 그런 생각은 의리 있는 사람으로는 갖지 못할 것이니까.』

『아니죠. 누가 의리가 없을까요? 나는 어디까지 해볼 것 입니다. 영숙을 내가 못 뺏어온다 하면, 그 때에는 내가 나 의 재산을 있는대로 다 없애서라도 춘우와 싸워볼 것입니 다. 지금에 나는 세상에서 조소를 받고, 집안에서 못난이 소 리를 듣고, 모든 부끄러움-남자로서 당하지 못할 모든 모욕 을 당하고 있읍니다. 나는 이 모욕을 씻어버리려고 그동안 두서너달 두고 모든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자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해요.』

『허허, 그렇게 격분해 할 것이 아닌데 그러네 그려. 때가 무슨 땐가. 제삼자로서 냉정한 생각을 가지고 자네를 보고 나로서는 도리어 자네의 서두르는 것이 일을 그르치기 쉬울 줄 아네. 그러나, 철수 자네는 한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네.』

『무엇이요?』

『자네가 만일 영숙이와 자네 사이를 다시 이으려 하면 거 기에는 돈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요, 다만 자네의 딸 청아 밖에 없을 것이야. 나 역시 춘우와 영숙이 지금 저렇게 지 나기는 지나나, 얼마 아니 가서 적지 않은 비극이 있을 것 을 알지마는, 다 되는대로 내버려 두고 보기만 하지 어찌하 나. 어떻든 자네네 세 사람은 한 사람도 행복스러운 사람이 없는 것을 나는 이제 단언할 수가 있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던 그날 저녁 때이다. 춘우는 자기 가 다니는 회사에서 나오는 길에 진고개를 들러서 아침에 나올 때 영숙에게 부탁을 받은 사기그릇 몇 개와 양철 냄비 한 개를 사가지고 다시 양말과 속적삼을 산 후에 과자가게 에 들러서 영숙이가 좋아하는 과자 몇 봉지를 사가지고 전 차를 타고서 새로이 세를 얻은 선린상업학교 뒤 자기 집으 로 향하여 갔다. 춘우는 지금처럼 자기가 행복을 느끼는 때 가 없었다고 생각하였다. 전차 안에 탄 사람이 전에는 모두 다 시들어져 가는 것처럼 생기가 없어 보이는 것 같더니, 오늘에는 모두 생기가 있어 보이고, 혼인 잔치에 치하하러 가는 사람들처럼 즐거움으로 찬듯 하였다. 만일 세상에 불 행한 사람이라고 자기 스스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오늘날에 춘우에게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할만치 춘우는 행복스러워 졌다. 춘우의 마음은 어저께보다 오늘, 아까보다 지금이 다르게 그 마음이 가라앉아지기 시작한다. 공중에 뜬 것 같이 이리 불리고 저리 흔들리던 춘우의 마음이 점점 안정이 되어 갈수록 그는 더욱더욱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 끼게 되고, 또는 그의 마음이 점점 냉정(冷靜)하여 질수록 그 가운데에서 무한한 흥취를 찾아 낼 수가 있었다. 그리하 고 그의 머리 속에서 어수선 산란하게 돌아다니던 모든 죄 악의 잡념이 구름 개이듯 사라지고, 청청한 하늘에 다만 해 가 있고 달이 있는 것 같이 자기와 영숙이라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영숙과 자기는 한아(閒雅)하고 그의 피는 무슨 정혈제(淨血劑)로 씻어버린 듯이 깨끗하여 진것 같고, 다시 향수로 목욕을 한것 같이, 자기는 남에게 가도 꺼리울 것이 없고 향내나는 몸과 같다.

그에게는 질투라는 것이 없고 절망이라는 것이 없고 속임 이 없고 또는 간음이 없게 되었다.

그는 다만 청정무구한 세상으로 돌아온듯 하였을 뿐이다.

저녁을 하여 놓고 자기를 기다리는 영숙을 생각만 하여 보 아도 천사와 같이 아름다웠다.

아침이면 자기를 전송하고 낮이면 빨래라든지 바느질이라 든지 뜰앞 화원에 김매기라든지 양지짝에서 병아리 모이 주 기라든지 이와 같이 한가하고 단아한 생활 가운데서 춘우와 영숙은 꿈같은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다.

춘우는 전차에서 내려 반찬 가게에서 쇠고기와 왜파와 다 른 양념거리를 사서 들고 자기 집으로 향하여 갈 때, 자기 의 팔이 조금 아프고, 또는 전같으면 점잖은 사람이 창피해 서 어떻게 무엇을 들고 다니노 하고 하였을 터이지만, 오늘 에는 부끄러움도 잊어버려지고, 다만 영숙이 반갑게 맞아주 는 웃음이 그에게는 모든 용기를 주고 말았다.

그는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영숙!』

하고 부르매, 부엌에서 숯불을 피우느라고 부채를 들고 눈 물을 흘린 영숙이 툭 튀어나오며,

『에구 무엇을 그렇게 많이 사가지고 오시우.』

하고, 행주치마에 손을 씻고서 주섬주섬 받아 놓는다.

춘우는 받아 놓는대로 가만히 서서

『울기는 왜 울어. 그래 한나절을 못참아 그렇게 보고 싶 드람.』

하고, 조롱을 하자, 영숙은

『울기는 누가 울어요. 불 피우느라고 내워서 그랬지.』

하며, 눈물을 씻고 빙긋 웃는다.

『그렇다면 모르거니와……자, 이것 좀 받으우.』

하며,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 주니까, 영숙은 그것을 받아 서 펴 보더니, 제 입에 하나 넣고, 춘우 입에 하나 넣어주었 다. 춘우는

『저만 알지 남편은 모르는 군! 제 입에부터 집어넣으니.』

영숙은 무의식중에 한 일이라 잘못된 것을 깨닫고,

『그럼, 내 입에 넣은 것하고 당신의 입에 있는 것하고 바 꿉시다 그려.』

춘우는 옷을 벗어 영숙에게 맡기고

『대관절 밥이 어떻게 되었소. 시장해 못 견디겠으니.』

『장작이 굵어서 뗄 수가 있어야지. 쌀은 앉혀놓고 여태까 지 불을 지피지 못했어요.』

『그거 안 되었구려 내가 좀 패지.』

하더니, 동리 집으로 가서 도끼를 빌려가지고 오는데, 동리 떡거머리가 따라와서 춘우의 장작패는 것을 신기한 듯이 들 여다본다. 춘우는 도끼를 들고 장닥을 팰 때, 도끼가 손에 붙지를 않고, 제 멋대로 여기가 놓이고 저기가 놓인다.

그는 두서너 번 도끼를 들었다 놓았다 하더니, 겨우 한조 각을 쪼갰는데, 장작이 젖어서 짓이겨 놓았다. 춘우는 그것 을 손으로 쪼개느라고 얼굴에 핏대를 올려가며, 잡아다니어 겨우 반에 갈라 내던지다가,

『에쿠!』

소리를 지르고 엄지손가락을 입에다 대고 훅훅부니까, 부 엌에 있던 영숙이 달음질해 뛰어 나오다가, 화로에 놓았던 찌개를 발길로 질러서 재가 푸하고 일어났다. 이 소리를 들 은 춘우도 화로로 뛰어가서 찌개 그릇을 바루 잡아 놓으려 다가, 뜨거워서 마당 한가운데다 내던져 뚝배기가 산산조각 이 났다.

영숙은 기가 막히고 우습기도 하여 한참이나 깨어진 뚝배 기만 내려다 보더니, 허리가 부러지게 웃고만 있으니까, 춘 우는 가시백인 손이 또 찌개 그릇에 데어서 쓰라리고 아파 서 못 견디겠는데, 영숙이가 자꾸 웃기만 하니까, 열얼 벌컥 내어

『압다, 남은 아파 죽겠는데 웃기는 왜 웃어.』

하며, 원망스럽게 흘겨 본다.

영숙도 그제야 웃음을 그치더니,

『남이 애써 해놓은 찌개를 한꺼번에 태질을 치고 무슨 큰 소리요. 어디 손이나 좀 봅시다.』『고만 두, 내가 태질을 치려해서 쳤소. 영숙이가 먼저 친 것을 바루 잡으려다 그리 하였지.』

『그것도 내가 치려 해서 쳤소. 당신이 손 다친 것 보러 나오다 치마에 휩싸여 그렇게 되었지.』

이렇게 내외가 말다툼 시작하는 것을 보고 있던 총각녀석이

『고만들 두십쇼. 대관절 손이나 많이 다치지 않으셨어요.

제가 장작을 패드리지요.』

하고, 장작을 툭툭 쪼갠다.

두 사람은 저녁상을 마주앉아 밥을 먹었다.

풍로에서는 고기가 익고 밥상 위에는 상긋한 나물이 놓였 다. 전 같으면 한 두어잔 술을 마셨으면 좋을 춘우는 오늘 와서는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였다.

『조금 싱겁지 않소.』

하고, 젓가락으로 이리 뒤적 저리 뒤적하니까, 숟가락을 입 에서 떼는 영숙

『간장을 좀 더 칠까요.』

하며, 장병을 집는다.

『내일은 일요일이니, 전에 말한대로 인천을 가볼까.』

춘우가 영숙에게 의향을 묻자, 영숙은 어째 시원하지 않는 어조로,

『글쎄요.』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똥그란 눈을 아래로 깔고 끓는 고 기만 내려다 본다.

『왜 시원히 대답을 하지않소.』

『아마 내일은 내가 어디를 좀 다녀와야 할까 보아요.』

이 소리를 듣고 춘우는 젓가락질을 딱 끄치며,

『어디를 가?』

『꼭 가봐야 할 데가 있는데, 당신이 허락을 하실지 몰라요.』

하고 영숙은 춘우의 기색을 살핀다.

『갈만한 곳이면 가지, 내 허락 여부가 어디 있단 말이요.』

『당신이 들으시면 당신이 좋아하지 않으실 곳얘요.』

『내가 좋아하지 않을 곳?』

하고, 고개를 기웃하고 생각을 하더니,

『내가 좋아하지 않을 곳이 어디 있나. 그럼 영숙이는 좋 은 곳이요? 영숙이가 좋은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는 것이 좋 지 않소.』

영숙은 잠간 주저하다가,

『저도 가기를 즐겨하는 곳이 아네요.』

『그럼?』

『다만 책임상 안 가볼 수가 없어요.』

『대관절 어디란 말이오.』

영숙은 입을 다물고 한참이나 말이 없이 가만이 있었다.

『어서 진지나 잡수셔요. 이따 이야기 하지요.』

『있다가 이야기할 것 지금 말못할 것이 무엇 있단 말이 요. 말하구려 답답하우.』

『말해야 당신 마음이 아프실 것이니까요.』

『글쎄, 아프든지 제리든지 갑갑하구려.』

『공연히 그런 말을 했군.』

『말할 것은 해야지, 속에다가 혼자 넣어두면 못쓰지.』

영숙은

『그런게 아니라요.』

하고, 벌떡 일어나 설합을 열더니 편지 한 장을 꺼내어 춘 우를 준다.

춘우는 편지 봉투를 보았다. 거기에는 서투르디 서투른 필 적으로 영숙의 이름을 쓰고 그 뒤에는 영숙의 어머니 이름 이 씨어 있었다.

『어머니께서 편지 하셨구려. 어머니께 가보겠단 말이지.

그것이 그렇게 쓰리니 아프니 할 것이 무엇 있소?』

『아네요. 속을 보셔요.』

춘우는 다시 속을 끄집어 내어 본즉 그 사연에는 오래동안 너의 안부를 듣지 못하여 궁금하고 보고싶은 마 음이야 무엇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일래 몸 성이 잘 있느냐. 늙고 불쌍한 너의 모는 죽지 못하여 모진 목숨을 그럭저럭 부지하여 간다. 그런데 다른 말이 아니라, 수일 전 부터 청아가 병이 들어 지금은 거의 위태할 지경에 이르렀 는데, 요사이는 헛소리마다 너를 부르니, 차마 옆에서 그 꼴 은 그대로 보기가 어렵다. 어린 인생이 죄가 있으랴. 너도 어미된 인정을 저버리지 아니하려거든 한번 와서 보고라도 가기를 바란다. 아마 춘우도 그것은 용서할 줄 안다. 하루바 삐 다녀가기를 바란다.

하였다. 춘우의 마음은 무슨 감격으로 떨리는 듯 하였다.

편지를 척척 집어 영숙을 다시 주고는 국을 한숟가락을 뜨 더니 말이 없다. 영숙은 춘우의 입에서 어떠한 최후 명령이 내릴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말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춘우는 영숙을 보낼 의무는 자기에게 있지 않다고 생각하 여 보았다. 지금에 완전한 영숙을 자기 것을 만들어 놓은 이상, 또 다시 철수의 딸인 청아의 병을 보러 보낼 필요는 없을 것이라 하여 보았다. 청아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으랴.

영숙이가 내어버린 청아를 지금에 다시 보게 한다는 것은 도리어 춘우에게 위태한 일일는지 모른다. 조금 몰인정한 일 같지만 잊어버린 것은 영원히 잊어버리고 내버린 것은 다시 돌아보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가고 싶소?』

춘우의 말에는 적지 않은 불평이 들어있었다. 그러고, 영숙 을 보는 눈에는 시기의 빛이 보였다.

『가지 말라고 그러시면 저도 가지 않을 터얘요.』

영숙이가 대답은 이렇게 하기는 하였으나, 그 표정에는 숨 기지 못할 괴로운 빛이 보였다.

『나는 가거라 말아라 할 수는 없소. 영숙이 마음대로 하 구려 내가 여기에 간섭할 수는 없소.』

『그러면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시죠.』

『나는 좋다 싫다 말을 하지 않을터이요. 내가 되어서 가 지 말라 하면 너무 아량이 없는 사람이 될 터이요. 또 가라 고 한다 하면 가지 말라는 말보다 좀 거북한 말이니까 ……』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가지 않지오.』

딱 잘라서 말을 하는 영숙의 얼굴은 새침하여졌다.

『공연히 그런 말씀을 해서 퍽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온 별말을 다하는구려. 숭늉이나 한 그릇 가져 오구려.』

숭늉을 가질러 간 뒤에 춘우는 혼자 앉아 생각을 했다. 공 연히 말을 그렇게 했구나 하였다. 퍽 가지고 싶은 것을 내 가 가지 말래서 못 간다 하면, 그것은 공연히 원망을 사는 것이요, 또 비록 지금은 남이지만 자기 자식을 보러간다는 것을 막는대서야 자기도 남의 자식이 된 이상에 너무나 몰 인정한 일이 아닌가 하고 후회하는 생각이 났다.

숭늉을 들고 들어 온 영숙의 눈치만 살피는 춘우는 대접을 갖다가 밥상위에 놓을 때 밥그릇과 맞 부딪치는 소리까지 심상히 보이지 않고, 영숙의 불평이 손 끝에 까지 미치는 것 같아서 퍽 불쾌하였다.

밥상을 물린후 전 같으면 서로 앉아서 이야기를 하든지 하 다 못해 팔뚝맞기 화투라도 하였을 것이지마는 두 사람은 서로 말이 없이 앉아 있었다. 춘우는 잡짓장을 뒤적뒤적하 고 영숙은 돌아앉아서 손에 잡히지 않는 바느질을 시작하였 다. 웬일인지 두 사람은 서로 눈치만 보는 것 같애서 콧잔 등이 간질간질하고 시선이 마주 칠 때마다 서로 피하느라고 애를 쓴다.

그와 같이 쓸쓸하고 부스러지는 것 같고 긴장하지 못한 공 기가운데 몇십분이 지나갔다. 춘우는 공연히 두 사람이 싸 움이나 한 것처럼 이렇게 있는 것이 어째 싱겁기도 하고 또 는 우습고 어리석은 듯하여 말을 꺼내려고,

『그 양말이나 좀 꾀매 주구려. 지금 신은 것이 벌써 구멍 이 뚫리게 되었으이.』

하고, 제 발바닥을 만져서 영숙을 보이며 말을 하자, 두 눈 썹만 깜박깜박하고 앉아있던 영숙은 보려고도 하지 않으며 여전히 바늘만 움직이며,

『아직 괜찮이 않아요. 내일이라도 꾀매죠. 그리 바쁘지 않 은데.』

하고 불복이다. 춘우는 전 같으면 반드시 당장에 『네』소 리가 나왔을 터인데, 지금 이렇게 불복을 하는 것은 반드시 영숙의 가슴속에 못마땅한 것이 있어서 그리하는 것을 알고 서 속으로 무안도 하고, 또는 분한 생각도 나서,

『지금 못 꾀맬 것이 무엇이란 말이요. 자, 보우.』

하고 조금 우락부락한 소리를 지르며 구멍이 뚫어지려고 빨간 발이 내다보이는 발뒤꿈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지금 꾀매면 지금 신고 어디를 가신단 말요. 내일 아침 에 신고 나가시게만 하면 고만이지요.』

『그럼, 진작 그렇게 말을 하지. 당초에 꾀매 주지 않을 것 같이 말을 하니까 그렇지.』

『누가 안 꾀매드린댔어요?』

『아까 무엇이라고 했소. 그래 꾀매 주마고 했소.』

『눈으로 보시면서 그러시우. 지금 하는 것이 있으니까, 당 장에는 해드릴 수가 없댔지. 누가 당초에 안 꾀매 드린댔어요.』

한참을 말다툼을 한 뒤에 두 사람은 모두 입들이 뾰죽해 앉아서 아무 말이 없다.

마음이 좁은 여자인 영숙이 도무지 입을 다물고 말이 없 자, 춘우도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적다. 그뿐 아니라, 이 불쾌한 감정을 두 사람 마음 가운데 이르킨자는 여기 있는 이 두 사람이 아니라, 저 멀리 있는 영숙의 전 남편의 딸인 청아라는 제삼자(第三者)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뭉친 감 정을 풀기가 어렵다.

더구나 춘우에게는 이 뜻밖에 일어난 조그마한 감정 문제 가 크게 확대되려던, 두 사람의 치명상(致命傷)이 될 가능성 (可能性)을 충분히 가진 것이므로써 그는 그리 쉽게 지나가 는 희롱으로는 생각되지 아니한다. 다른 때 같으면 두 사람 이 겨드랑이 한번 간지리는 것으로 능히 해결할 수 있을 것 이지마는 이번 일은 인륜(人倫)의 관계와 애정의 관계가 서 로 세로 놓이고 가로 놓인 것이므로, 조금 냉정한 생각으로 해결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는 자리에 누워서도 생각하매, 무슨 불행을 예약(豫約)하는 무슨 암시(暗示)가 그 가운데 있는 듯하였다.

자기는 아랫목 벽을 안고 누웠고 자기 아내인 영숙은 등을 꼬부리고 웃목을 향하여 누워있는 것을 보자, 한방에 누웠 어도, 자기가 바라보는 방향과 영숙이 바라보는 방향이 서 로 서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정반대 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몸에 스며드는 듯한 쓸쓸함을 느끼 었다.

그는 머리를 냉정히 하여보려고 애를 썼다. 될 수 있는대 로 자기 하는것을 벗어버리고 제삼자가 되어 자기와 영숙과 또는 거기에 얽힌 사실을 멀리 놓고 관조(觀照)하리라 하였다.

부모나 자식 사이의 애정이라든지 정리와 남편과 아내 간 의 사랑이나 의리가 어떠한 곳에서 일치하는 수는 있을는지 모르지만, 결코 똑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영숙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청아를 사랑하는 것과 는 다를것이며, 내가 갖지 못한 그 어떠한 사랑을 영숙은 또 하나 더 가졌다. 세상에 가장 행복스러운 사람이 누구이 냐 하면 그것은 남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점에 들어서 영숙은 자기보다 하나 더 행복스러운 것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러므로, 자기는 영숙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때에 비애를 느 낄는지 알지 못하나, 영숙은 청아를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 하지 못하게 되면 그는 무한한 적막과 비애를 느끼는 것이다.

엘렌?케이 여사가 말하기를, 구주 전쟁 당시에 전선에 나가 서 나라를 위하여 용감스럽게 싸우던 용감한 남아들이 불행 히 몸에 부상을 당하여 야전병원 침대 위에서 조용히 최후 를 마칠 때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어머니!』라는 말 이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절대(絶對)다. 상대(相對)가 아니다. 언제 인가 춘우가 창하와 함께 처음으로 영숙을 찾아갔을 때, 이 세상 인류를 죄악의 구렁으로 쓸어넣은것이 예수 믿는 사람 의 말대로 하면, 우리의 선조의 아내되는 이브라 하면, 오늘 에 다시 세상을 구해낼자는 또 우리의 어머니가 되리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춘우와 창하는 무심한 가운데 그런 말을 하였지만, 오늘 춘우가 생각할 때, 그 때 그 말이 자기 에게 무슨 암시를 준것 같았다. 가장 약한 가운데 가장 큰 힘이 있는 것이다. 너는 약한 자이다, 너의 이름은 여자이다 하고, 옛날에 섹스피어가 함리트를 시켜서 자기 어머니를 꾸짖게 한 말이 있지마는, 그와 같이 약한 여자에게도 강하 다고 거만한 체하는 남자를 정복하는 힘이 있는 동시에 그 반면에 또한 자기 어머니의 사랑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으 랴! 누가 자기 어머니 앞에 고개를 숙여 그 무한히 인자하 고 어머니로서의 고마움을 사례하지 않는이가 있으랴! 어머 니는 자식에게 들어서 천사이며 피란처이다.

이와같은 생각을 하는 춘우의 마음은 다시 자기의 몸으로 돌아왔다. 자기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돌아간 어머 니의 애정을 생각하고, 자기와 인우를 생각하여보았다. 거룩 한 어머니가 오늘에 계셨다면 하는 그리운 비애를 느낄 때, 그는 다시 영숙의 마음을 살필 수가 있었다. 자기의 어머니 가 자기를 사랑하여 준 것이나, 자기가 자기 어머니를 지금 껏 그리워하는 것이나, 영숙이 자기 딸 청아를 생각하는 것 이나, 청아가 자기 어머니인 영숙을 찾는 것이, 어머니와 어 머니, 자식과 자식의 정리와 애정에 무엇이 다를 것이 있느냐.

자기의 어머니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그 어떠한 힘 이 끌어가고 말았고, 영숙은 또한 자기와 자기 사이에 어떠 한 힘으로 말미암아 청아에게서 영숙을 자기에게 뺐어온 것 이다 하였다. 그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할 때, 두 눈에서는 가 리울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내리었다. 그는, 나이가 이만큼 먹은 나로서도 돌아간 어머니의 환영(幻影)을 끄집어내어 그 의 품안에 안기려 한다. 아마 이 생각은 내가 죽을때 까지 사라지지 않을 터이지. 그런데, 청아가 살아 있는 어머니의 젖꼭지를 찾는 것이 어째 무리라 하랴. 여기에 만일 참으로 공정한 진리가 있다 하면, 청아는 반드시 영숙에게로 돌아 가야 할것이다.

춘우는 이렇게 생각, 하다가, 어느덧 잠이 든 영숙을 돌아 다 보았다. 두손을 가슴위에 가만이 놓고서, 잠이 든 그의 머리 속으로는 지금 반드시 청아의 꿈을 꿀것이라 하였다.

그렇다. 나는 나의 사소한 질투심을 내버려, 큰 진리를 위 해야 할것이다. 영숙은 청아에게로 보내야 할것이다. 여기에 사람으로서 나의 의무가 있는 것이다.

어느덧 첫 닭이 울었다. 춘우도 그럭저럭 잠이 들었다. 이 튿날 아침 두 사람이 자리 속에 깨었을 때, 서로 반대 방향 으로 누웠던 것이 서로 가슴을 향하여 따뜻하게 끼어앉고 있는 것을 찾아내었을 때, 그의 가슴 속에 뭉쳐 있던 감정 은 봄눈 녹듯 사라졌었다.

一五

[편집]

아침볕이 머리맡 창에 금빛 같이 쬐었다. 춘우가 다시 눈 을 뜰 때에는 벌써 마루위에 상보는 소리가 들리면서, 아침 공기를 울리는 신선한 소리로

『어서 일어나시우! 공일이라, 이렇게 늦도록 주무시우.』

하는 영숙의 깨우는 소리에 그는 비로소 기지개를 켰다.

『벌써 이렇게 들었나.』

하품을 한 뒤에 이불을 걷어 젖히고,

『세숫물 좀 놓우.』

두 팔을 걷은 후에 마루로 세수 수건을 걷어들고 나왔다.

앞 뜰 푸른 풀 위에는 아침 이슬이 진주 같이 어리어 햇빛 에 눈동자 같이 반짝거리다가. 다시 풀 잎 한복판을 대구루 굴러서 땅 위에 떨어지기도 하고, 밤새도록 이슬에 젖은 흙 의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모란과 작약은 죽었던 옛 가지와 옛뿌리에서 새로운 삯이 뾰루퉁하게 솟아나고, 채송화 꽃은 입을 벌인 듯이 노랗고 빨갛다.

멀리서 늦은 밭을 가는 소가 메인 쟁기 소리를 따라 늙은 농부의 어디엇 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다. 양지쪽인 마루에 놓여있는 세숫물은 햇빛에 비치어 오색 무지개가 서 며, 그것이 또 다시 웅멍줄멍하여진다.

부엌에서는 뜸들이는 밥이 솥 속에서 소리 없이 김만 내 고, 영숙은 부엌바닥을 수수비로 정성껏 쓸어서 아궁이에 넣는다.

춘우는 어제 저녁에 쓸쓸하던 마음은 어느덧 사라지고, 즐 겁고 청신한 마음이 가슴에 찼다 넘치는 듯 하였다.

『아까요?』

영숙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귀여운 웃음을 띠우고 춘우 앞 으로 가까이 가며,

『나물장수가 들어왔길래 싱검초나물을 좀 샀더니 퍽 싸요.』

하며, 퍽도 신기한 것처럼 말을 하더니,

『그래서 그것을 조금 묻혔지요.』

춘우의 귀에는 그리 신기롭지 않지만, 영숙의 뜻을 받아주 느라고,

『얼마나 샀는데, 그것 좋은 것 샀구려. 내가 퍽 좋아하는 것인데, 그러나 저러나 오늘 아침 반찬이 무엇이 좋은 것 있소?』

『어저께 사오신 고기가 좀 남았길래, 그것을 지졌지요.』

『그것만 하면 고만이지, 더 잘 먹을수 있소. 우리 살림 에……』

하고 수건질을 하니까, 영숙은 대야의 물을 갖다가 내버리 더니,

『오늘은 아무데도 가지 않으실터이요?』

『글세, 나는 집이나 보지.』

『집이나 보시다뇨?』

하는 대답을 할 때 영숙의 마음은 기뻤다.

옳지, 날더러 청아를 보러 어머니에게로 가라는 말이로구 나 할 때, 춘우가 고마운 동시에 미듬스럽고 또는 사랑스러 운 동시 어젯 저녁에 성미를 거스리는 것이 후회가 났다.

『오늘 어디를 가면서 그러우.』

하며, 춘우는 「가거라」하고직접 말을 하지 않지마는, 승 낙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로 영숙에게 가라는 뜻을 보였다.

『그럼, 혼자 계시기 심심하지도 않으시겠어요?』

『무얼, 오늘이 일요일니까 창하도 나올 테니까, 같이 이야 기나 하고 놀지. 점심이나 많이 만들어놓고 가구려.』

『점심야 염려 없어요. 그렇지만, 그 어른이 오시면 또 약 주 잡숫자고 하시게.』

『내가 술 끊은줄 아니까, 이제는 먹자고 그러지를 않아.

일전에도 같이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날더러 술을 먹지 말 라고 제가 먼첨 그러던데……』

『그이는 사리를 짐작하고, 또 무던한이니까, 조금 믿을 수 가 있지만, 그래도 어떤 때 객증이나 나면…… 나는 사내들 이 왜 술을 먹는지 아무리해도 모르겠어.』

『다 먹는것도 까닭이 있어 먹는 것이겠지. 공연히 먹을라구.』

『까닭이 무슨 까닭이람.』

『영숙은 아직도 그 까닭을 몰라.』

아침밥을 두 사람은 재미 있게 먹었다. 영숙이 상을 대강 대강 치워놓고 옷을 입고 나섰을 때 춘우를 향하여

『얼핏 다녀 올 것이니, 집 잘 보고 계셔요.』

하고 점심밥은 어디 있고 반찬은 어떻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일러주었다.

『몇시쯤해서 오료.』

춘우는 나가는 영숙을 보며 물어보았다.

『글세요. 저녁 안에 오지요. 와서 저녁을 해야 할 것이 아 녜요.』

『그럼 얼핏 다녀 오오.』

영숙은 다리가 땅에 닿지 않게 줄달음질을 하다시피 자기 어머니 집을 향하여간다. 전차 정류장까지 오는데 몇번이나 발을 헛디디어 놓았는지도 몰랐다.

동대문을 향하여가는 전차를 바꾸어 타고 남대문을 지나갈 때, 그는 몹시 흥분이 되었었다.

몇달 전에 자기 어머니에게 최후의 선고를 하고 나올 때에 는, 당초에 어머니를 다시 만나지 않으리라 하였던것이, 오 늘에 자기 어머니를 보러 간다고 할 때, 그의 마음은 기쁘 고 반가운 중에도 또는 부끄럽고 거북하였다.

『어머니를 만나뵈옵는다.』

얼마나 좋은 일이랴. 자기를 길러준 어머니, 자기의 모든 뒤치다꺼리를 하여주던 어머니 자기의 잘못을 모두 용서하 고 가리워주던 어머니, 그리고 모든 화풀이와 핀잔을 달게 받던 어머니를 뵈오러가는 영숙은 또 다시 그의 혈맥에 윤 기(倫紀)의 뜨거운 피가 흐르기를 시작하였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하셨으랴.』

이 소리를 혼자 속으로 중얼거릴 때, 그는 감격과 인정에 서 나오는 뜨거운 눈물이 두 눈에서 핑그르 돌았다.

그러고, 또 다시 철모르는것이라고 그대로 떼버리고 온 청 아를 생각하여 보았다. 그때 자기가 자기 품에 앉고서 젖을 먹일 때에는 귀찮은 생각도 많이 났었고, 또는 귀여운 생각 도 적지 않아, 몹시 굴기도 하고, 울기도 많이 하였으며 어 떤 때는 예쁘고 귀여운 김에 깨물어 먹고 싶을만치 사랑스 러운 때도 많아서, 모든 것이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요, 그 러할 일이려니 하였던 것이, 지금 생각을 하니, 그 모든 것 은 한낱 꿈으로 사라지고, 다만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없는 자식이 불쌍하다는 것뿐이었다.

전차가 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 앞 정류장에 서자, 영 숙은 전차에서 내려 연동 골목으로 들어 경신학교와 공업전 문학교 의학전문학교를 다 지나서 골목 하나를 이리 돌고 저리 돌더니, 돌다리 건너 어떠한 초가집으로 들어섰다. 대 문간 행랑에는 쟁가비와 대접, 숟가락 나부랭이가 어수선하 게 허트러져 있고, 마당을 들어서 건너방을 보자, 옹숱 하나 가 걸린위에 바가지를 엎어 놓았는데, 뚫어진 창구멍으로다 눈 하나가 내다본다.

『청아 있니!』

부르는 말소리는 주저하는 중에도 반가움이 넘치었다.

『그 누구!』

하며 방미닫이가 열리며, 안 경쓴 두 눈이 쑥 내다보더니,

『이게 누구냐?』

하며 영숙의 어머니는 곤두박질치듯 뛰어나왔다. 영숙도 따라서 달려들며,

『어머니!』

하고 모녀는 두 손을 맞잡고 어쩔 줄을 몰랐다.

『어서 오너라. 그러지 않아도 혹시 오지나 않나 하고 기 다렸지, 이리 올라와.』

『청아가 앓는다죠?』

하고, 방으로 들어가니, 아랫목에 청아를 포대기로 덮어서 누였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옛날의 청아같이 토실토실한 뺨이라든가 몽글몽글한 손, 나팔나팔하는 머리, 반짝반짝하 는 눈, 새빨간 입술은 그 그림자도 볼 수 없고 가시덤불 같 았다. 땀에 젖어 앙상한 이마에 달라붙어 있고, 두 뺨은 깎 고 저며낸 듯이 수척하였으며, 입술은 지지리 타고 하다 못 해 푸르며 눈은 죽은 사람처럼 쑥 들어갔는데, 다만 꽁꽁하 고 안간힘을 쓰는 소리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하 고 있다.

『좀 봐라, 그렇단다.』

영숙은

『청아야, 청아야, 엄마 왔다. 엄마, 응 청아야.』

하고 불러보았으나, 그는 들리지 않는 듯이 대답이 없이 다만 안간힘만 쓸뿐이다.

『청아야, 엄마!』

또 다시 불러보다가, 대답을 하지 아니하자, 하는수 없이 청아를 끌어 안아보니, 전에는 묵직하게 무슨 금덩어리나 안은 듯 하던 것이 지금은 백지장을 드는것 보다 더 가볍다.

『며칠이나 되었어요.』

『며칠이 무엇이냐. 벌써 달포가 넘었는데, 처음에는 감기 처럼 몸이 덥고 기침을 하길래 나는 그저 감기로 알았더니, 비찍 돋히는데, 하는 수가 있더냐. 약국에 가서 이약 저약 이야기만 하고 먹이니, 그것이 어디 맞아주어야지. 제 아비 에게 편지를 해도 그저 오늘 올라 간다 내일 올라간다 하는 것이 한달을 넘어 끈더구나. 그래 며칠 전에 왔다고 하기에 찾아가 보고 그런 말을 하니까, 돈 십원을 주면서 약이나 지어다 먹이라고 하니, 약은 아무리 먹어도 조금도 풀리는 기색이 보이지 않고 그저 저 모양대로 있으니, 죽거나 살거 나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고 앓을적에는 들려다보지도 않 다가,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청원은 나혼자 들을 터이니, 너를 부른 것도 내 성미에 여간해서 안 부를터이지만, 너도 생각을 해보아라. 네 자식 네가 죽이는 것은 아무 말도 안 하겠지만, 내가 애꿎은 소리를 들을게 무어 있으랴 해서 너 를 불러온것이니까, 네 생각대로 해라. 죽이려거든 죽이고 살리려거든 살리고……』

한참 말을 하다가, 끝에는 화를 낸다. 영숙은 다만 다소곳 이 듣고만 있다가

『죽기야 할려고요!』

하며, 다시 청아를 토닥토닥 두두려 주었을 때 청아는 다 시 꼼지락꼼지락하더니,

『엄마! 엄마!』

하고 헛소리를 한다.

『왜! 엄마 여기있다. 자 청아야, 엄마 엄마.』

하고 얼르고 불러보고 흔들어 보았으나, 여전히 말이 없다.

청아는 엄마가 자기를 안고 있는 줄도 알지 못하고, 참말로 부르는지 거짓말도 부르는지 엄마를 부르기는 하나 대답은 할줄 모른다.

영숙의 가슴은 터지는 듯 하였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하며,

『자 청아야, 너의 엄마가 여기 왔다. 』

하고 흐느끼어 가며 울 때, 청아는 너는 나를 내버린 어머 니니까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듯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 아주었다. 영숙은 순결하고 흠 없는 어린 청아에게 무슨 죄 나 지은 듯이 고개를 틀어박고 뺨을 대이고 입을 맞추고 미 친사람처럼 울었다. 뜨거운 눈물이 떨어져 어린애의 얼굴에 폭포같이 흐르도록 울었으나, 그 눈물만을 가지고, 자기 어 머니가 자기를 내버린 허물은 용서할 수가 없다는듯이 아무 말도 없이 안간힘만 쓰면서 자고 있을뿐이다.

영숙의 어머니도 눈물을 떨어뜨리며 그 옆에 앉아서, 치마 끈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씻고 있다. 조용한 방안은 슬픈 빛 으로 가득하여 어두운 빛은 그방을 휩싸고 도는듯 했다.

영숙은 속마음으로 청아에게

『모든 것을 용서하여다구. 내가 모두 잘못했다.』

하고 빌고싶었다. 그리고,

『너만 몸이 다시 성하여 즐겁게, 아무 근심없이 잘 자라 는것을 보기만 하면 나는 모든것을 내버려서 네게 바치마.』

하고 싶었었다.

아주 순결하고 아주 정한 모녀의 애정이 그의 가슴에 찼다 가 넘칠 때, 그는 눈물을 흘리는 그 가운데에 또 다시 없는 희열을 느끼었다.

『그렇다, 모든 것을 버리자. 나는 다만 청아 하나를 위하 여 살아보자. 내가 청아를 위하여 없어져야 한다면 없어지 기라도 하자.』

하는 것은 그때 영숙의 영혼 속에서 부르짖는 결심의 부르 짖음이었다. 그는 춘우에게 대하여서도 이와 같은 절대의 결심을 하여본 일이 아직 없었다.

그는 눈물어린 눈을 바로 들고서 또 다시 생각하여 보았다.

그는 춘우와 정이 들자, 그에게는 아무것도 꺼리울것이 없 이 자유로운 생애를 일평생 누릴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한지 가 몇달이 지나지 못하여, 그에게는 또 다시 사람으로서는 참아 볼 수 없으며 참아 당할 수 없는 비참한 사실이 어느 덧 자기몸에 얽히인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찾아내게 되어 의아하고 놀라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행복스러운 그 이면에는 그 행복스러운것만치 불행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었다. 자기가 오늘에 모든 부자유한것과 허위와 또는 매음적(賣淫的) 안일한 생활을 일조에 벗어던지 고 자유롭고 깨끗하고 신선한 생활을 하여가는줄 알았더니, 벌써 자기가 알지도 못하고, 의식(意識)하기 전에 자기 신변 에는 장차 올 비극의 준비를 하고 있는 청아가 있었던 것이다.

춘우는 그리웠다. 잊을 수가 없었다. 잊는다고 하는것을 한 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영숙은 오늘 청아를 자 기 무릎에 다시 안고 죽고 사는 지경에서 배회하는것을 볼 때 청아를 자기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청아는 자기의 딸이 아니요 자기의 것이 아니다.

청아는 벌써 자기와 떨어진지가 오래이다. 자기가 스스로 청아를 내버린지가 오래이다. 내버릴 때에도 어찌 섭섭함이 없었으랴 마는, 그래도 가장 큰 힘으로 자기를 잡아가는 힘 이 최고조(最高潮)에 이르렀을 그때에는 능히 청아를 버릴 수가 있었지만, 오늘의 청아는 다시 버릴 수가 없었다. 사람 이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 아래 섰을 때에, 모든 세상의 죄 악은 사라지고, 신성한 인간의 본능과 양심이 동하는 것이다.

버림을 당한 청아가 자기를 내버린 어머니를 부르며 신음 할 때, 비로소 영숙의 피속에서 꿈틀거리는 모성(母性)의 사 랑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청아를 자기 가슴에다가 꼭 끼어 안아보았다. 조금 잠이 들어서 쌕쌕 콧소리를 하는 그의 작은 몸이 자기 흉곽 (胸廓)을 누르고 그 속에서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누를 때,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감정을 한꺼번에 짜내여 절 대한 힘이 다시 나는듯 하였다. 마디마디와 끝과 끝에 그 힘이 차지 않는 곳이 없으며, 찌르지 않는데가 없는것같았다.

눈물이 겨우 그치고, 영숙과 영숙 어머니가 서로 마주 앉 을 때, 영숙의 어머니는,

『그런데, 애가 저 모양이 되었는데, 애아버지는 한번 들여 다보지를 아니하니 어떻게하니!』

영숙은 자기 전 남편 철수를 박정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못 하였다. 그에게도 그만한 가슴 아픈 일과 또는 그만한 비애 번민이 있을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필 남을 청원할 것이 무엇이랴. 다만 몇해라도 같이 살던 그를 원수로 알것 은 아니다.

『오지 않으면 어때요.』

『어떻다니, 의원 한번도 보이지 아니하고 생사람을 고대 로 죽인단 말이냐?』

『저도 오고 싶지는 않겠지요.』

할 때, 영숙은 싱거운 웃음을 웃었다.

『글세, 오고싶든 오고 싶지 않든 말이다. 사람이 죽고 산 다는데 모르는 체하니, 그런 일이 어디 있니.』

『저도 생각이 있으면 와보겠지요.』

『어느 천년에 사람이 다 죽은 뒤에 말야. 대관절 내가 송 구하고 맘이 조려서 못살겠다.』

『그러면 내가 갖다가 병구원을 할게. 어머니는 아주 염려 마시구려.』

『네가 갖다가? 얘, 말은 좋다마는 누가 남의 자식 좋다구 한다드냐. 더구나 다 죽어가는 것을!』

이 말에 영숙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당연한 말이다. 춘우가 비록 나는 사랑한다 할지라도 철수의 자식, 자기의 원수의 자식을 갖다가 같이 죽는 꼴이든지 사는 꼴이든지 보자고 할런지가 의문이었다. 춘우가 그렇게까지 성인은 아닐 것이다.

영숙 어머니는 또 다시

『그러고, 네가 왔다갔다는 말만 들어도 천길 만길 뛸터인 데, 거기다가 딸을 찾아갔다고 해보아라. 당장에 무슨 변이 나고 말 것이니.』

『그러면, 아이가 죽어도 모르고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을 어떻게 해요. 죽으면 살려놓을 재주가 있답디까?』

『사람의 맘이 어디 그래야지. 제 고집만 세우고 제 욕심 만 채우면 고만이지. 제 자식 제가 죽이든지 살리든지 맘대 로 한다면 어떻게 하니?』

『무엇요?』

영숙은 소리를 질렀다 .그때 그 마음 속에서는 불같은 덩 어리가 올라오며,

『뉘자식애요? 저만 자식이고 내게는 자식이 못된답디까.

낳기는 누가 낳고 기르기는 누가 길렀는데요.』

하며 혼자 화가 나서 날뛴다.

『압다, 그렇게 소리 지를 것야 무엇있니? 내가 무엇이라 고 했니? 서로 의론하는 말이지!』

영숙 어머니는 한참 생각을 하더니,

『그러나 저러나 저것을 살려놓고 보아야지, 잘 태어났든 지 못 태어났든지 살은 인생을 죽으라고야 할 수 있니? 그 러니, 좀 어려운 말이다만 네가 내 말을 좀 들어라.』

『무슨 말을요.』

『그래도, 몇해간 살던 정리도 있고 또 그 사람이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니, 네가 좀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해보아 라. 내가 가는 것보다 네가 가면 들을 터이니……』

『내가 가요! 어머니는 나중에 별소리를 다하시는구려. 내 가 또 애아버지를 만나 보아요! 나는 싫소.』

『싫으면 어떻게 하니? 내가 널더러 다시 살라는것도 아니 오, 가서 어린 것을 위하여 말을 좀 하라는데, 그렇게 못 가 겠다고 잡아뗄게 뭐냐.』

『글쎄, 지금 무슨 낯으로 또 다시 본단 말이오? 더구나 내가 내 발로 먼저 찾아가는것을.』

『그러면, 네가 가기 싫어서 가지를 않는다 하면 어린것은 누가 구해줄 것같으냐. 그야 당초에 보지도 않으랴 하던 사 람을 또 다시 찾아가서 귀찮은 말하는 것이 누군들 하고 싶 어 하는 것이겠니만, 그렇다고 잠깐 창피한 것--창피할 것 도 없지마는--자기가 싫다고 가지 않으면 그 가기 싫은것 까닭에 생 목숨 하나를 끊게 한단 말이냐!』

영숙의 어머니는 영숙을 권고하기에 힘을 들인다. 혹은 위 협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였다.

『자, 그러지 말고 가보아라. 네가 너 먹을 돈이나 양식을 다시 대달라는것도 아니요, 제 자식 제가 약 쓰고 살리라는 말하러 가는 것이 무엇이 그리 싫단말이냐? 이 악한 사람은 재판질까지 해서 자식을 찾느니 양육비를 청구하느니 한다 더라.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가서 보고 사정의 이야기를 하여보아라.』

『그것야 그렇지만.』

『어쨌단 말이냐. 나는 고집할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을 것 같다.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가보아라.』

『가서 무엇이라고 한단 말요?』

『무얼 무엇이라고 하니? 참 딱한 애도 많다. 어린애가 명 재경각에 이르렀으니 어린애를 데려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의원을 대서 고치든지, 양단간에 어떻게든지 하라고 하지.』

『데려가라고요?』

영숙은 이 말을 하면서, 눈이 뚱그래지고, 어린애를 다시 더 힘껏 끼어안았다. 마치 당장에 자기 품에서 어린애를 누 가 빼앗아가려고 하는것 같이 그리고 가슴을 무엇으로 꽉 찌리는 듯이 선듯하여지면서 죽어도 철수에게 청아는 주지 않겠다는 결심이 그 순간에 번개불 같이 일어났다.

『줄 수는 없어요.』

하며 어머니를 쏘는 듯이 바라볼 때 어머니는 속마음으로 코웃음을 치며 무슨 승리의 만족을 느끼는 듯 하였다. 네가 청아를 내버리고 간지가 단 몇 달이 못되어, 또 다시 청아 에게로 돌아올줄은 나도 벌써 짐작해두었었지마는, 만일 네 가 청아에게로 돌아오려면은, 또 다시 철수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리라는 생각을 하고서, 시덥지 않는 콧대답으로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이냐?』

『무얼 어떻게 해요. 청아는 내가 데러갈테얘요.』

『무엇야! 네가 데려가?』

『예, 제가 갔다 죽이든지 살리든지 할 터에요.』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

이말을 듣고서 영숙은 답답하였다.

『청아를 네가 데려가면 네가 나 먹을 것을 주어야 할것이 요, 나 먹을것을 주지 못할것이요, 나 먹을것을 주지 못할것 같으면 청아는 데려가지를 못한다. 나도 몸이나 늙지 않았 으면, 그것야 어떻게든지 남의 집 드나 들어서라도 하루 밥 셋끼야 못 얻어먹겠니마는 지금 같아서는 나는 달리 무슨 도리가 없지않으냐, 너도 어미를 어미로 생각을 하면, 그런 생각 저런 생각을 다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영숙의 어머니 마음 속에서는 새로이 어떠한 계획의 싹이 솟아났다. 영숙이 청아를 참아 놓지 못하는것을 볼 때, 그에 게서는 야심 하나가 생기기를 시작하였다. 영숙이 청아를 가운데에다 두고서 다시 철수에게로 돌아간다 하면, 옛날의 호화로움과 옛날의 안일한 생활이 다시 자기에게까지 돌아 오리라. 그리하여 영영 춘우가 손을 다시 끊게하는 무슨 계 략을 생각하기 시작하였으니, 그것은 결코 자기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일도 아니었으나, 영숙의 행복과 청아의 행 복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행복을 돈에다가 결착 시킬줄 밖에 모르는 그는 그것이 오히려 세상에 살아가는 첩경으로 생각함이다.

영숙은 한참동안 아무 말을 못하였다. 그에게는 만가지 계 교가 궁하였던것이다. 어찌할 도리가 얼른 눈앞에 생각이 돌지 않았던 것이다.

영숙 어머니는 다시 말을 이어

『그리고, 네가 청아를 데리고 간다 하나, 너는 데려가고싶 어도 춘우가 너의 자식까지 받고 싶어할리는 만무하지 아니 하냐? 설령 춘우가 너를 위하는 맘으로 청아를 받는다고하 자, 그러면 춘우나 네게 무슨 그리 넉넉한 돈이 있어서 어 린것을 구하겠니? 만일 청아가 무슨 불행한 일만 있을 것 같으면, 그때에 그 청원은 누구에게 돌아갈듯싶으냐? 그러 지말고, 지금이라도 애아버지에게로 가서, 어떻게 처치를 하 여달라고 하여 보아라. 그저 내 말이 옳으니라 범연할 말이 아니야.』

영숙의 마음은 괴로웠다. 이 갈래 저 갈래로 사방에서 자 기몸을 찢는듯 하였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럴수도 없었다.

영숙은 다시 춘우의 마음을 헤어보았다. 춘우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 그러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나의 딸을 자기 도 또한 사랑하여주어야 할 것이다. 물론 사랑할것이다. 내 가 사랑하는 청아를 춘우도 사랑하여 주어야 할것이다라고 생각해 보기도 하다가, 다시 어제 저녁에 자기가 어린애를 보러 가겠다고 할때에 춘우의 기색이 좋지 못하던것을 본것 을 생각하자 다시 낙망이된다. 자기가 자기 마음을 헤어보 든지 또는 세상 사람의 적지 않은 실례를 들어보더라도, 데 리고 들어온 자식이나, 그렇지 않으면 전실소생을 그렇게 사랑까지 하는 사람은 없을것 같았다. 다만 의리로 하는 수 없이 부모니 자식이니 하고 ,지나기는 지나지 마는, 항상 질 투의 미워함이 가슴속에 있어서 그것을 제지하느라고 적지 않은 노심과 괴로운 마음으로 지나가게 되는것이 사실인것 을 생각하면, 자기가 자기를 위하여 청아를 데려다가 춘우 의 마음을 거북하고 괴롭게 할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거의 죽음이 임박한 불쌍한 청아를 내버려두고, 그대로 일어서 늙은 어머니에게 무한한 신고를 남겨주는것 도 어머니와 자기, 자기와 청아의 관계를 보아서 인정상으 로라도 차마 할수는없는 일이요, 그렇다고 다시 철수에게 내주기도 싫었다.

적지않은 번민으로 얼마를 앉아있다가 영숙의 마음속에서 는 결심이 생기었다.

그래도, 나는 이것을 의논할 사람은 춘우밖에 없다. 가장 자기의 모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호의적으로 의논하고, 또는 지도하여 줄 사람은 춘우가 그 중에 제일 믿음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렇다, 춘우가 듣지를 않는다 하더라도 한번 의논은 하 여 보리라. 그래서 안 들어주면은 그만이지, 만일 들어주지 를 않는다 하면은 그때는 애아버지에게 담판을 가리라.』

이렇게 맘먹은 영숙은 어머니를 대하여

『그러면, 나는 우선 집에 가서 춘우에게 그 이야기를 하 여줄터이오. 그리하고 들으면 고만이지만, 만일 듣지 않거든 애아버지에게라도 가서!』

영숙 어머니는 코웃음을 치면서,

『흥, 어림없는 소리도 하고 앉았다. 내가 사내가 되어도 어붓자식은 안 데려들어 오겠다. 거기다가 성하지도 않고 저렇게 거의 죽게 된것을 어디 가서 말을 얼마든지 해봐라 마는, 될성스럽지 않다. 』

하고 빈정거리며,

『그럼, 저렇게 잊지 못할 자식을 왜 내버리고 갔더냐. 내 버리고 딴 서방 따라갈 적은 언제고, 지금 와서 못 놓겠다 는 것은 언제야.』

영숙은 공연히 울분이 생기며, 속에서 반역할 마음이 일어 났다.

『내가 딴 서방을 했거나 화냥년의 짓을 했거나 어머니가 지금 와서 자꾸 되거퍼 말할 것이 무엇이요. 그러고, 내 딸 내가 찾아간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요. 나는 죽어도 철수에 게는.』 하고 얼굴이 파랬다 붉었다 하며, 톡톡 쏘는 포독한 소리로 말대꾸를 한다.

『네 자식이냐. 네가 데려간다구? 말은 좋다. 네가 아무리 내자식 내 자식해도 아마 네 맘대로는 데려지를 못하리라.

어디 재주 이떻든 데려가보렴.』

『왜 못 대려가요. 누가 못 데려가게 해요. 못 데려가게 할 놈이 누구얘요.』

『얘, 이러다가는 욕하기 쉽겠다. 글쎄 생각을 해봐라. 그 게 낳기는 네가 낳았더라도 씨는 누구집 씬데 그러니? 나중 에 애아버지가 와서 자식을 내놓으라 하면, 네가 무엇이라 고 할 터이냐? 그것을 생각해봐야지. 그래, 내버리는 것이나 데려가는 것이나 모두 네 맘대로 해? 얘 싹 상했다. 그렇게 세상 일이 쉬우면 나는 벌써 쌍가마라도 탔겠다. 공연히 용 렬한 소리 말고 내 말대로 해.』

『다 듣기 싫어요. 나는 나 하고싶은대로 할 터이니, 내가 청아를 못 데려가면 내가 죽고 제가 죽는한이 있드라도 무 슨 요정을 내고야 말터이니……』

『말야 무슨 말을 못해! 어디 죽거나 살거나 네 맘대로 해 보기는 해라마는 좀 어려울라.』

하고, 담뱃대에 담배를 피어뭘고 말이 없이 두 눈만 끔벅 한다.

영숙은 벌떡 일어나면서,

『자, 다녀올터이니, 그런줄 아시우. 있다래도 어린애를 데 리러 올 터이니.』

하며 문을 연다. 영숙 어머니는 일어서려하지도 않고,

『흥, 허락을 맡으러 가는구나. 허락을 맡아오나 보자.』

하고, 영숙의 뒷그림자만 치어다본다. 영숙은 신을 신고 문 밖으로 나가버리었다. 벌써 세 시간 넘어 네시가 되어간다.

그는 다시 전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여갔다.

영숙이가 자기 집에 돌아왔을 때는 춘우와 창하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벌써 다녀오?』

하고, 춘우는 이제는 영숙의 일이 끝났으려니 하는듯이 말 한마디를 던지고 창하와 이야기를 하였다.

영숙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머뭇머뭇하여 마루에 앉으면서,

『언제 오셨어요.』

하고 창하에게 인사를 하니까, 창하는 그 인사를 받아서,

『예, 벌써 왔습니다. 그러나, 청아가 대단히 앓는대죠?』

이 말을 들을 때, 영숙의 심장은 공연히 울렁울렁하였다.

자기가 어머니집에서 나올 때에는 춘우에게 청아를 데려오 자고 눈 딱 감고 말을 하려던것이, 지금 춘우를 앞에다 앉 쳐놓고 보매, 어쩐지 춘우는 벌써 자기가 말하려는 것을 미 리 알고 앉았는것같고, 또 그의 말이없이 다문 입이 당초에 그런 말에 대답을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한 입 같았었다. 그 는 가까스로

『대단하다 뿐얘요. 아마 죽을가봐요?』

하고, 까만 눈썹을 아래로 깔적에는 애수(哀愁)의 빛이 온 얼굴에 가득히 찼다.

『어떻게 어디를 앓게.』

춘우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몰라요. 내가 가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자꾸 엄마만 부르 고 안간힘만 쓰는데 참아 볼 수가 없게 되었어요.』

『의사가 무슨 병이라고 하지도 않는단 말이요.』

『의사요? 의사가 다 무엇이오. 여태까지 약 한번을 변변 히 쓰지를 못하였다는데.』

창하가 이 말을 듣더니, 눈을 뚱그렇게 뜨며,

『그게 웬일일까요. 애아버지도 서울에 와있는데.』

『제가 압니까.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았다는데요.』

『그거 야단났군. 오늘이라도 가서 권고를 해야 하겠군. 사 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데 그게 무슨 짓이람.』

영숙은 기침을 한번 하고 온 전신에 힘을 주어 결심을 하 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요, 두 분께서 다 들어주셔요. 저는 청아를 이집으 로 데려 오겠어요. 춘우씨는 물론 싫어하실 줄 알겠지마는, 청아를 데려다가 죽이든지 살리든지 결말을 내기는 제가 날 터얘요. 창하씨 생각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다고 생각 하십니까?』

『글세요. 내야 이러거나 저러거나 간섭할 일이 못되니까, 말하기가 거북합니다.』

영숙은 다시 춘우의 기색을 살피었다.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어요? 저는 참말이지 죽 어도 애아버지에게로 어린것을 돌려 보낼 수는 없어요.』

춘우는 말이 없이 앉았었다. 어제 저녁에 자기 마음이 괴 롭던 것을 자기가 생각해 보자 과연 청아에게 자기가 죄를 짓지 않고 자기집에 두게 할는지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춘우는 또 다시 오늘 아침에 영숙이를 보낼 적에 자기의 결심을 생각할 때 그것을 허락지 않는다 는 것은 너무 의리 인정이 없는 사람 같기도 하였다.

그는 한참이나 궁리를 하다가,

『데려 오구료. 내게 물어봐서는 무엇하오? 남의 자식도 불쌍하면 거두어 기르는 일이 있는데.』

하며 억지로 웃음을 띠웠다.

『정말요?』

영숙은 거짓말을 듣는 듯이 다시 다짐을 한다.

『언제 내가 거짓말을 합디까?』

『그러면, 오늘이라도 제가 데리러 갈터얘요.』

『데려 와요. 데려다가 병이 나으면 우리들이 기릅시다 그려.』

영숙의 마음은 몹시 즐거워서 ,당장에 뛰어다니며 춤이라 도 추고 싶은 그 반대로 춘우는 몹시 마음이 괴로운 것을 알아주는 이가 별로이 없었을 것이다.

두서너 시간이 지났다. 창하는 작별을 하고 춘우의 집에서 나와 전차를 타고 경성으로 들어와서 찾아가는 곳은 철수가 유숙하는 여관이었다.

창하는 철수와 영숙이와 춘우 세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모 든 사실을 냉정한 머리로 관찰하여 보매, 차차 그들에게는 참담한 비극의 막이 열리기 시작하는 듯 하였다. 자기가 언 제든지 생각하는 바나 일반으로 청아는 세 사람 사이에 있 어,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서는 장해물이다. 그들에게는 청아 가 있는 것이 도리어 불행한 것인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는 그는 속 마음으로는 청아가 죽는 것이 오히려 다행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진 한 일이 있었다.

창하가 철수의 여관을 막 들어서려 할 때, 영숙의 어머니 가 나아가는 것과 마주치었다.

『아!』

하고 영숙의 어머니는 그대로 발을 멈추고 한참이나 놀란 사람처럼 말이 없이 서 있다가, 겨우 입을 열어서,

『오래간만 이시구려.』

하고, 인사를 한다. 창하는 노파의 행동이 수상한 점이 있 는 것을 발견하고,

『예, 안녕하십니까?』

하고, 다시 한번 아래 위를 보았다. 그러고,

『누구를 보고 가십니까?』

하고 재쳐 물으며, 황당한 꼴로 영숙 어머니는

『저 애아버지 좀 보고 가요.』

하고 그대로 꽁무니를 빼려 하매,

『청아가 대단히 앓는다지요? 청아는 어떻게 하고 오셨습 니까?』

『예. 말 마시우. 여간 대단해야죠. 그래 애아버지에게 그 말을 이르러 왔다 가요.』

『철수가 안에 있어요.』

『예. 있어요.』

창하는 영숙 어머니가 자기를 몹시 미워하는 것을 알므로 그래서 이렇게 주저하는가 싶어서,

『어서 가 보시지요.』

하고 안으로 들어갈 때 마음 속에는 어쩐지 영숙 어머니가 자기를 만난 것이 꺼리어 하는 듯하여 보였다.

철수의 방으로 들어가서 앉았다. 철수는 마침 어디를 가려 는 것처럼 옷을 갈아 입으면서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하고, 넥타이를 맨다.

『어디 좀 다녀서 집으로 가는 길에, 자네 좀 보려고 왔네.

할 말도 있고……』

『무슨 말씀얘요. 지금 어느 친구와 만나자고 해서 거기를 가는 길인데요.』

『뭐 길지 않은 이야기야. 대관절 청아가 대단히 앓는다네 그려.』

『예, 그렇대요. 나는 바빠서 가보지 못하였지만, 걔 외조 모가 와서 그러는데요.』

『그러나 저러나 말을 들으면, 자네가 약 지어 먹일 돈도 주지 않고, 의사도 보이지 않는다니, 그 말이 정말인가?』

철수는 눈이 둥그래지며,

『무엇요? 그럴 리가 있나요, 지금도 돈을 무엇한다 무엇 한다 하고 삼십원이나 가져갔는데요.』

『삼십원?』

『네, 그애 외조모가 와서 약값 줄 것이라고요.』

『그랬나. 어떻든 그러면 다행일세, 내가 잘못 들었나 보 이, 그런데, 내가 하겠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오늘 영 숙이가 청아를 보고 왔다네 그려.』

『영숙이가요?』

하고 왈칵 흥분이 되며

『무엇하러 청아를 보고 왔어요?』

『무엇하러 간 것이랴 두 말할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와서 하는 말이 청아를 자기집으로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철수는 소리를 높이어

『안될 말입니다. 왜 제 집으로 데려가요. 당당한 내 자식 에요. 제가 내버리고 갈적은 언제고 지금 또다시 찾아갈 적 은 언젭니까? 모두 제 멋대로 저하고 싶은 대로만 하자는 말이지요.』

청하는 말을 더 느릿느릿이

『글쎄, 내 말을 좀 듣게, 자네가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 이야. 어린 것이 지금 당장에 죽네 사네 하는데, 어머니 품 에서 병을 고치는 것도 어린애에게 좋은 일이요, 또는 어머 니된 사람으로 그러한 마음이 있는 것도 인정이니까, 이왕 춘우도 허락한 일이니, 앓는 동안만 갖다가 치료를 시켜서 낫거든 다시 찾아 오기라도 하게 그려.』

『싫어요. 내가 내 자식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주지 않을 작정입니다.』

『압다 그렇게 고집할 것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려. 생사 람 하나 죽이는 것보도 잠깐 권도도 쓰지 못한단 말인가.』

『나는 권도도 쓸줄 모르고, 이왕 어미없는 자식 죽는다 하면 팔자 좋지요. 세상에 살아서 고생하는 이보다.』

『그저 속을 좀 펴지 못해. 왜 그렇게 마음이 좁은가. 좀 너그럽게 생각을 하여 보게.』

철수는 화가 나는 듯이 탁탁 털고 일어서며,

『저는 그 말 한마디는 결단코 들을 수가 없어요. 다시 제 게 그런 말씀은 하지도 마시우.』

하고 웃옷을 떼어 입고, 모자를 쓴다. 창하도 하는 수없이 따라 일어서며

『그럴 것이 아닌데 그러네 그려. 오늘 저녁에라도 혼자 조용히 생각을 해보게.』

두 사람은 똑 같이 마당에 내려서 문밖으로 나왔다.

그 날 저녁이었다. 춘우는 밤이 늦도록 영숙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었다. 그러나, 열한시가 넘도록 오지를 아니하였다.

초조한 마음에 일어나 앉았다 들어누웠다 담배도 피었다가 책도 보았다 하였다.

남산 등머리 소나무 수풀 사이로 살그머니 넘기어다보던 달이 어느 결에 공중에 불끈 솟아 백지로 바른 머리창에 처 마 그림자를 반쯤 비추어 놓은 것이 차츰차츰 위로 올라가 서는 어느덧 방안까지 환하게 비추어 놓았다.

영숙을 기다리던 마음은 어느덧 변하여, 영숙을 의심하는 마음이 되었다. 의심하는 마음과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은 질투였다. 영숙이 청아를 데리러 갔다가, 철수를 만나지 아 니하였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생길 때에 그는 몹시 불안 한 생각이 나서, 문을 열고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달을 바라 보고 담배만 피어물고 있었다. 저 건너 양철지붕이 이슬에 젖어서 달빛에 뻔지르 하게 빛이나 보고 동릿집 머슴이 아 리랑 아리랑을 흥에 겨운 목소리로 길게 뽑으며 지나갔다.

화단에 심은 꽃이 촉촉하게 젖은 향기를 실바람에 옮겨다가 얼굴을 스치고 지내갈 때, 입속에서는 달리 단꿀맛이 나는 듯하였다.

춘우는 이와 같이 한적한 달밤에 외로이 앉아 영숙을 기다 릴 때, 그는 외국에 간 사람이 고향 생각하는 듯한 그리웁 고 외로운 정조를 느끼는 듯하였다.

그는 혼자 콧소리도 하여 보고 또는 입속으로 노래도 불러 보았다. 하늘에는 누가 부르는 듯이 박쥐 한 마리가 이쪽으 로 날아 오려다가, 다시 저쪽으로 달아났다. 멀리서 신용산 행의 전차소리가 들리었다 사라졌다 하였다. 때로 뻐국새가 뒷산 소나무 새에서 구슬프게 울었다.

『어째 오지를 않나?』

혼자 중얼거리다가 문간을 내다볼 때, 누구인지 흰옷 입은 사람이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에 영숙이가 아닌가 하고, 자 세히 보았으나 영숙은 아니요, 촌 여자였다.

그는 일이 있어도 늦게 오겠지 하고 관대한 생각을 먹어도 보고, 또 다시 철수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나보다 하고 의심 도 하여 보았다. 그의 마음은 마치 용수철 모양으로 줄어들 었다가 늘어졌다 하는 것같이 동요가 생겼었다.

그는 마당에 내려서서 팔짱을 끼고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다가, 문밖으로 나가서 영숙이 오는 것을 맞아주려 하였다.

그러나, 기다리는 영숙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그는 조금 높은 곳에 올라서서 멀리 달 그림자로 영숙의 오는 것을 보 리라 하였다. 그러나 오지 않았다. 저쪽 기차길 넘어서 벌써 빨간 불을 단 전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는 덜컥 걱정이 생겼다.

『벌서 막차가 나가는데, 웬일고?』

하고 궁금증이 났다. 오다가 무슨 일이 났다? 그렇지 않으 면 늦어서 자고 오나? 마중을 가자니 집이 비고 궁금해 못 견디겠네.

하는 생각이 나며, 집을 내려다 보며, 갖 이은 초가집이 가 라앉은 듯이 조용히 있다.

기다리던 마음이 화로 변하고, 화가 변하여 영숙을 책망하 는 마음이 되었다.

『어린앤지 무엇인지 데려오려거든 얼른 데리고 오든지, 밤중이 되도록 오지를 않으니, 기다리는 사람 생각은 해주 지를 않는단 말인가?』

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려고 자기집 모퉁이를 돌아설 때 영숙이 숨이 턱에 찬 것 같이 땀을 흘리며 문간으로 들어서 려는 것과 마주쳤다.

『왜 인제 오?』

춘우는 책망하려던 생각이 영숙을 보자 풀어져버리고 반갑 고 시원해서 부드럽게 물었다.

『에그, 나와 계셨어요. 나는 퍽 기다리실가 봐서 뛰어오느 라고……』

하고는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갔다.

『그런데, 어린애는 왜 데리고 오지 아니하였소.』

하고 춘우는 방안으로 들어가, 전기불에 비치니 얼굴을 보 자, 눈가장자리에 분바른 것이 어룽이지고 눈물 자국이 그 대로 있는 것을 보고 또 한번 속으로 놀라는 동시의 의심이 생기었다.

『옳지, 철수 앞에서 울었구나.』

할 때 춘우의 마음은 쓰리었다.

『애요?』

영숙은 대답을 채 다하지 않고 옷을 화난 사람처럼 활활 벗을 때 그에게는 어쩐지 당황한 빛과 침착하지 못한 사람 같았다. 마치 죄지은 사람이 쫓겨온 것 같은 기색이 있었다.

옷을 벗고 앉은 영숙은 무엇이라 대답할는지 몰라서 한참 주저하다가,

『병이 너무 중해서 바람을 쏘이고 데려올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그대로 두고 왔어요.』

춘우는 곧이들었다.

『그렇게 중하드란 말요.』

『아마 죽을가봐요.』

영숙은 『죽을가봐요.』하는 말에 힘을 주었다.

춘우는 영숙이 청아를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 속으로 다행 하였다. 그리고 무슨 사정이든지 생기어 영영 아니 데려오 기를 가만히 기대하였다.

『그런데, 막차가 나가는데, 무슨 차를 타고 왔소?』

영숙은 조금 있다가,

『그 차를 타고 왔어요.』

하는데는, 아무리 보아도 무슨 근심이 있거나 무슨 생각이 있어 보인다.

『왜 어디가 불편하우! 또 어머니허고 싸웠소?』

『아뇨!』

영숙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왜 그러고 앉았소?』

『무얼 누가 어째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하고 억지로 태연히 꾸미려하나, 그 꾸미려는 고통이 나타 나 보인다.

영숙의 가슴에도 무슨 비밀이 감추어 두었는지 모르나, 춘 우는 몹시 의심스럽고, 또는 갑갑한 동시에 불유쾌하였다.

『그럼, 어린애는 아주 데려오지 않으료?』

『글세요. 시방 형편 같애서는 데려올 수가 없어요.』

『무슨 형편이란 말요?』

영숙은 반짝반짝하는 눈으로 전기불만 들여다 보더니,

『아니 별다른 형편이 아니라요.』

하고, 말을 늦추어 가며,

『애가 너무 심하게 앓으니까요, 하는 말얘요.』

『그렇다고 할머니한테만 혼자 내버려두면 어떻게 하우?』

영숙의 마음은 괴로웠다. 춘우가 제발 그런 말을 좀 물어 주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였다. 무슨 무거운 납덩이가 그 말 할 적마다 자기 가슴 위에 와서 부딪치는 것 같았다. 그리 고는 자기가 오늘 지낸 일을 모조리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하였다. 나중에는 청아가 이 시간에 얼핏 죽어버려서 이꼴 저꼴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도리어 나을것 같았다.

영숙은 춘우에게 오늘 지낸 이야기를 할까? 하지 말까? 하 지 않자니 자기는 춘우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요, 하자 니 춘우의 마음은 아플 것이다. 차라리 모든 비밀을 자기 입속에 삼키어 두고 춘우의 마음을 괴롭지 않게 할 지언정, 그 말을 입밖에 내어 자기가 정직한 사람이 될수는 없었다.

『그러면, 영숙이가 날마다 가보아야 하겠구려.』

『글세요. 틈있는 대로 가보지요.』

『그것 대단히 어려운 일이 생겼군. 그렇지만 아니 가볼수 는 없지.』

춘우는 혼자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리었다 두사람은 길게 말을 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서 잠이 들었었다. 달은 어느덧 넘어가 머리창에 검은 그림 자가 덮히어 버리고, 돌 틈에서 벌레우는 소리만 고요하다.

춘우가 언제인지 불안한 꿈을 깨었을 때에 그의 귀에는 이 상한 소리가 들리었다. 그는 실눈을 뜨고서 가만이 방안을 살펴보자 껏던 전등이 다시 켜지고 누웠던 영숙이 일어나 앉아서의 장문을 열어 젖히고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상자에 서 끄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일가? 춘우는 눈을 크 게 뜨고 힘있는 광채로 그것을 건너다 보다가 다시 눈을 감 은채 하였다. 그러고 코를 골고 자는체 하였다.

영숙은 이것 저것 백지와 비단 헝겊으로 꽁꽁 뭉친 것을 하나씩 둘씩 펼 때, 적적한 방안 전기둥 밑에서는 금과 눈 이 부딪치는 소리가 땡그렁 땡그렁 일종 신비의 소리를 내 인다.

춘우는 속으로 놀래이고 또는 신기하였다. 영숙은 두 손가 락에서 그것 중에서 하나를 접어들 때, 별같은 광채가 나며, 금강석을 박은 반지가 춘우의 눈에 띠었다.

영숙은 그것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춘우가 혹시 잠을 깨어 보지나 않는가 조심하듯이 살피더 니, 그것을 자기 손에 끼고서, 아까운 듯이 물끄럼이 보더 니, 또한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입속으로

『하는 수 없지.』

하며 한탄을 하였다.

춘우는 그것을 볼 때, 그는 모든 일을 알아 채렸다. 여기 자기가 있는 이 집 세전을 얻어낸 것도 저 상자 속이요, 여 태까지 지내올 때 그리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하여 오게 한 것도 저 상자 속에서 나온 것이요, 오늘에 청아가 죽을 지 경에 있어서 약을 쓰며 의원을 부르게 되기도 저 상자 속에 서 나올 것이 있는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영숙의 저 상자 속에 있는 것은 그것이 영숙의 힘 들여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철수의 주머니 밑에 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생각 할때 , 자기가 지금 이 집 이 자리에 누워 있는 것도 던적스럽고, 부끄러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영숙이 저렇게 그것을 아까워 하는 기색을 볼 때, 그에게서는 자기의 자부심이 얼마간 손상되는 듯 하였다.

자기가 남의 남편이 되어서 그 아내가 존중히 여기는 패물 까지 남편 몰래 팔아서까지 자기를 위하고 자기 자식을 위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너무나 남의 남편될 자격과 힘이 부치는 것 같이 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 그 때의 춘우의 가슴은 쓰리고 저리었다. 그러고 혼자 얼굴에 피가 끓어올 라 오는 듯이 부끄러웠다.

영숙은 다시 그것을 종이에 똘똘 뭉치더니 상자를 장 속에 집어넣고 반지는 자기 손가방 속에 넣은 후에 자리로 다시 들어왔다.

춘우는 안오는 잠을 자는듯 눈을 감고 누워서 영숙의 거동 만 살핀다.

불을 끄더니, 영숙은 잠이 오지 않는지 부스럭부스럭하며 몹시 번민하는 사람처럼 이리뒤쳐 누었다. 저리 뒤쳐 누웠 다 한다.

영숙은 그러더니, 다시 느끼어가며 우는 소리가 나며, 고개 를 벼개에 틀어박고, 춘우에게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기 에 몹시 애를 쓰는듯 하였다. 그러나, 벅차서 나오는 울음은 점점느끼는 소리를 높일 뿐이요, 나중에는 듣거나 말거나 울고싶은 대로 운다는 듯이 소리까지 내어 울었다.

춘우는 이 우는 꼴을 보고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아 까부터 이상한 눈치를 발견한 그는 그 울음속에 반드시 무 슨 수수께끼가 포함되어 있으리라. 그러고 여태까지 우는 것은 고사하고 참새나 제비처럼 유쾌하고 즐겁게 행동을 갖 고 얼굴에는 행복의 빛이 나던 영숙이가 무슨 까닭으로 저 와 같이 울까, 청아가 죽게 되었다니까, 그것을 불쌍히 생각 하여 우나! 어머니의 몸이 되어 자식을 내버리었다가, 그 자 식이 지금 최후에 임하였다니까, 그것을 뉘우쳐서 우는 것 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슨 다른 사실이 그 속에 잠재하여 있는 것인가? 물어볼까 하다가, 춘우는 덮었던 이불을 제치 고 팔을 내밀어 어깨를 흔들었다.

『여보, 여보.』

손이 어깨에 다을 때 영숙은 잠깜 놀라는 듯 하더니, 대답 이 없이 더 소리를 높여 울었다.

『영숙! 영숙! 왜 이래? 응.』

춘우는 더 가까이 가서, 영숙을 자기 팔위에 안고 얼굴을 들여다 보려 하였으나, 창에 비추인 미약한 달빛의 반사로 는 자세히 볼수가 없어 불을 켰다.

『왜 그러우? 말을 해요.』

영숙은 고개를 내저으며,

『아네요. 아무것도 아네요.』

하고, 대답 없이 울기만 한다. 춘우는 답답하여 영숙의 몸 을 잡아 흔들며,

『내게 말 못할 것이 무엇이오? 무슨 일요? 대관절 말이나 좀 해요. 갑갑하구려.』

목메인 소리로 영숙은 대답을 하는 말이

『당신에게는 말씀 할수 없는 일얘요. 그러니, 그저 그렇게 만 알아두셔요.』

하매, 춘우는 일부러 노한 목소리로

『그러면, 영숙이가 나를 전만큼 생각하여 주지 않는다는 말이로구려. 전에는 영숙이가 내게 하지 않은 말이 없었지?

무슨 일이든지 같이 의논하였지! 그러고, 무엇이든지 날더러 물어보고 하지 않았소. 그러던 영숙이가 지금 와서는 날더 러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전처럼 나를 생각지 않 는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요?』

『아네요.』

영숙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으면서

『내가 당신을 더 생각하는 까닭에 이 말을 못한 것입니 다. 이 말을 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애요.』

『더 생각을 하면 무슨 말이든지 해주는 것이 좋지 않소.

영숙의 일어나 나의 일이면 죽어도 한다 하지 않았소. 이 일이 죽는 것보다 더 큰일이라 할지라도 내게 말을 해주어 야 할 것이 아니오.』

『왜 그렇게 들으려고 그러셔요. 저의 마음이 괴로운 것을 당신은 몰라주십니까?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영숙을 못 믿는 것도 아니요, 의심하는 것도 아니요. 영 숙이 괴로워 할때 나도 괴롭고, 영숙이 울고 있을 때 나도 눈물이 나는 것을 영숙은 알지 않소. 자 무슨 일인지 이야 기나 하우.』

『이야기를 해요?』

눈물 방울이 속눈썹에서 이슬 같이 반짝인다. 춘우는 수건 을 들러서 그것을 씻어주며

『응? 말을 해!』

『말을 하기는 하지요.』

영숙은 결심한 듯이 눈에서 광채가 나더니, 한참 있다가,

『그렇지만 여보셔요. 먼저 말을 하여 둘것은 섭섭히 생각 하지 마십시오. 그러고 저를 책망하여 주지 마셔요.』

『글쎄, 그런 말은 하지 말라니까, 그러는구료. 어서 말을 들어봅시다.』

『그러면 말을 하지요.』

하고, 영숙은 입을 열어 말을 시작하였다. 춘우는 가만이 그 말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영숙은 머리를 손가락으 로 쓰다듬더니, 깊은 한숨을 한번 쉬었다.

『저는 춘우씨를 속이었어요. 속이었다고 하는 것보다 어 느 정도까지는 배반하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춘우 씨더러 언제인가 일평생 애아버지와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 한일이 있지요. 그 맹세를 오늘 저는 저버리고 다시 애아버 지를 만나보았어요.』

말소리가 점점 떨려나오며 힘이 있어 간다. 춘우는 말이 꼬리를 이어서 엉크러진 실이 풀려나오는 것을 정성껏 듣고 있다가, 이 말 구절에 와서 눈동자가 영숙의 얼굴로 돌아갔 다. 그의 가슴에는 의심과 불쾌스러운 생각이, 녹은 촛농이 편편한 대로 떨어지는 것처럼 슬그머니 일어났다.

영숙은 다시 침을 삼키고 말 꼬리를 이어

『애아버지를 만나보게 된 것은 내가 일부러 보고 싶어서 그리한 것도 아니요, 나의 정이 다시 그이에게로 가서 그리 한 것도 아니요. 다만 어린 것 하나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 을 수가 없게 되어서 그리된 거얘요. 아까도 말하였거니와, 청아가 그렇게 앓는것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그 애를 데려오려고 어머니 집을 가지 않았어요. 가보니까, 어 느 틈에 어머니는 애아버지에게 그 말을 가서 하지 않았겠 습니까. 가보니까, 애아버지가 이 소리를 듣고서 노발대발하 여 청아가 죽어도 내놓지 않겠다 하고 야단을 치지 않았겠 어요.』

『누구를 제가 원망하겠습니까. 어머니 하나 잘못 만난 탓 으로 이 모양이 되어서 남과 같이 사람다운 생활을 하지 못 하는 것이지요. 모두가 팔자라하면 팔자일는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저는 맨 나중 결심으로 애아버지를 찾아가려 하 였습니다. 제가 당신께 말씀한 것도 있지마는 그것을 저버 리는 것인줄은 알면서도 저는 애아버지를 찾아갔어요.』

할 때, 영숙의 눈에서는 새삼스러운 눈물이 흐리기 시작하 였다. 목소리는 메어 나온다. 그러고 고개를 춘우 무릎 위에 숙이고,

『춘우씨 당신은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시겠지요? 제가 애아 버지를 보러가려 할 때처럼 마음이 괴로워 보기는 처음이었 어요. 저는 당신을 믿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사죄를 하면 반 드시 용서하여 주시리라는 마음으로 그리하였어요.』

춘우도 이 말을 들을 때 운모원반(雲母圓盤) 위에서 일어나 는 감응전기가 자기 몸에 닿는 듯이 저린듯 하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영숙의 손을 잡았다. 그럴 때 그는 『마돈 나』의 순결하고 성(聖)스런 손을 쥐인 것도 같았고, 예수가 물을 청하는 사마리아의 매음녀의 손을 쥔듯도 하였다. 그 러다가, 다시 막달레아마리아에게 향기로운 기름으로 발을 씻겨 받고 그 머리터럭으로 다시 훔침을 당하는듯 하였다.

가장 신성한 감정과 가장 죄악의 마음이 자기의 전령혼 속 에서 움직이는 듯 하였다.

영숙은 울어가면서 말을 계속하였다. 엄숙한 밤 공기가 정 적을 만들어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데 영숙의 울음섞인 말소리가 그것을 바느질하듯 복판을 뚫고 나갈 뿐이다.

『그래서 애아버지에게로 갔지요. 간즉, 나를 보고 반기는 지 마는지, 그것은 제가 알바가 못되지마는 어떻든 옛 정리 를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하면, 인사 한 마디라도 해줄 것 이 아네요. 본체만체 앉았다가, 제가 인사를 시작하니까, 마 지못해 왔느냐는 말뿐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저를 보고싶어 간것도 아니겠고, 무엇을 얻으러 간것도 아니겠는데, 그렇게 까지 매정스럽게 하는 것을 볼 때 저는 참으로 원통하였어 요. 』

『그것은 어찌 되었는지, 첫째 청아를 어째 못주겠느냐 한 즉, 내자식 내가 내 맘대로 하는데 네가 무슨 관계가 있느 냐. 전같으면 모르겠다마는, 오늘은 네가 청아의 어미가 아 닌 이상에야 단연코 내줄수가 없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나는 하는수 없이 청도 해보고 간원도 해보고 또는 빌어도 보고 떼도 써보았으나, 그는 돌멩이처럼 까딱도 하지 않겠 습니까. 』

『그러한 아비에게 어린 청아를 맡겨둘 일을 생각하면 참 으로 모골이 송연해요. 생각할 때마다 불쌍하고 속에서 피 가 식는 듯해서, 못 견디겠어요.』

『그래, 거기서 싸움을 하다 못하여 다시 어머니께로 간즉, 어머니와 애아버지와 무슨 내통이 있었는지 어머니마저 청 아는 데려가지 못한다고 놓고 내주지를 않읍니다 그려. 그 래 하는수 없이 데리러 갔던 청아는 데려오지도 못하고, 당 신에게 죄만 짓고 왔어요.』

느끼어가면서 영숙은 말을 끝내고 엎드려 운다.

춘우는 이 말을 다 듣고나서, 무엇이라도 말할수가 없었다.

다만 무엇이라고 꼭 집어내어 말할수 없는 감정이 그의 가 슴 위를 지질러 놓았을 뿐이었다.

우리의 시조 때부터 몇 만년을 통하여 내려왔고, 또 우리 의 자손에게 몇만년을 이어서 내려갈 절대의 문제를 눈앞에 놓고 그것을 내다볼 때, 우리의 팔이나 손이나 몸으로는 어 떻게 할 수 없는 진리가 하나 있다.

그 자식이 있으면 그 어버이가 있는 것은 정한 이치니, 이 것을 어떠한 자가 있어 그렇지 않게 만들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자식이 그 어버이를 저버리는 것은 있어도 어버이 가 그 자식을 내버리지 않다는 옛말도 있지마는, 그것이 사 실로 거꾸로 되는 때도 간혹 없는 바가 아주 아닌 것은 아 니다. 앞의 말보다 뒤의 말이 더욱 진리에 가까운데야 어찌 하랴 복잡하고 착종한 우리 인류사회에서 나서, 또한 복잡 하고 다난한 생애를 보낼 때에 우리의 피란처와 우리의 낙 원은 두가지가 있다. 그것은 어머니 품속과 애인의 품속이 다. 조물주가 춘우라는 인간과 영숙이라는 사람을 만일 숙 명적(宿命的)으로 이렇게 얽어 놓았다 하면 그 허물은 단순 하게 그리고 돌리어 보내겠지마는, 만일 그렇지 않다하면, 그 허물은 어디로 돌아가랴.

여기에 우리가 풀려고 애써도 풀수 없는 그 무엇이라는 것 이 남아 있는 것이다.

영숙은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가진 동시에 또한 남의 애인 으로서의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서로 뭉치고 반죽이 되고, 또는 순탄한 길로 평행이 된다 하면, 그리 어려운 문 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보다 임을 사랑한다는 가장 귀한 감 정을 가진자로서 즐거운 생애를 보낼 수 있겠지마는, 그것 이 부스러지고 서로 떨어지지 않을수가 없고, 또는 서로 얽 히는 곳에 영숙에게는 고민이 있고 불행이 생기는 것이다.

마치 금광석을 치는 것과 같이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과 또는 남의 애인의 애정이라는 그 사랑은 다 아름다운 감정 이지마는, 이것이 서로 부딪칠 때, 둘은 위대한 운명을 면하 지 못할 것이다. 그 어느 것이 완성하고, 또는 보전하려면 그 어느 것을 희생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춘우의 마음은 아직까지도 단순하였다. 너무 이상적이요.

너무 착하였다. 영숙의 이와같은 말을 듣고서, 그는 조그마 한 의심과 또는 생각이 없이 모든것을 용서라는 것으로 해 결하여 버리려고 하였다. 영숙의 마음에는 벌써 틈이 장차 벌어지게 하는 그윽한 그림자가 비친 것은 어찌 되었든지, 춘우는 영숙을 동정하고 전보다도 더 많이 사랑할 수만 있 으면 있을만큼 사랑하여 주기를 노력하려 하였다.

『영숙! 고만 울우!』

타일러가며 위로하여 가며, 자기의 마음을 늦추어 가며, 이 번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해서든지 칠판에 그리어 놓았던 그림을 지워버리듯 지워버려 자기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하 고 싶었다.

『고만 울우, 우지 말아요. 내가 영숙을 용서할 권리는 없 지마는 나는 그것을 잊어버릴터이오. 영숙도 이제는 잊어버 리면 고만 아니요.』

영숙은 그래도 울음을 계속한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영숙 의 눈속에는 죽어가는 청아가 자기를 부르며 발버둥치는 것 이 보인다. 그것이 옆에 있어서 자기를 위로하는 것보다도 더 자세하게 보일 때가 오히려 많았다. 자기의 머리 속에 비추이는 환상(幻像)이 옆에 앉은 정체(正體)인 춘우보다도 더 분명하고 똑똑하게 보이고 들리는 것은 무슨 까닭이랴.

여기에 그 무겁고 가벼운 것을 알 수가 있다고 할까? 아니 다. 마치 한옆에 무거운 것을 실어놓아서 그것이 가만이 기 울어져 있을 때에 또 다른 옆에 갑자기 다른 그만한 것을 갖다 놓으면 그것이 그쪽으로 기우는 저울과 마찬가지로 영 숙의 마음은 이제 적지 않은 동요가 생긴 것이다. 지금 어 느 쪽이든지 한쪽에 약한 점만 보인다 하면 그것은 기울어 지고 말 위태한 지경에 있는 것이었다.

영숙은 툭 터놓고 마음껏 울었다. 그 울음은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었다. 마치 상식을 지내는 며느리가 자기의 시아 버지나 시어머니를 생각하여 우는 것보다도 자기가 시앗 본 것이 더 설어서 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울음의 동기는 청아 의 앓는데서 얻어가지고 그것이 변하여 자기의 신세타령과 또는 세상에 모든 울분이 울적하게 쌓였던 것을 자기 애인 에게 말로는 못하는 울음으로 하소연하다시피 하는 것이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다시 잠이 들었다.

그 이튿날 영숙은 밥지으러 나오는 시간이 전보다 많이 늦 었었다.

일주일 가량이 지나서 영숙과 춘우사이의 화평과 행복은 다시 예전처럼 회복되었다. 흔들렸던 행복의 잔은 다시 가 만이 고요하게 놓여있고, 그 위로는 사랑의 샘물이 한량없 이 찼다가 넘쳐흐르게 되었다. 다시 웃음과 노래가 그의 가 정을 둘러싸게 되었다.

그러나, 춘우가 알수 없는 것이 한가지 있었다. 영숙의 눈 에는 언제든지 수심이 가득한 것이었다. 자기를 보고, 웃고, 자기와 서로 이야기를 할 때에 모든 경쾌한 동작이든지 표 정이 전과 틀림이 없지마는, 말이 없이 있을 때에 영숙은 몹시 수심에 쌓여 있어 보이었다.

혹간 영숙은 애조를 띠운 소리를 입속으로 혼자 군소리처 럼 하는 때도 있고, 멀거니 먼산을 바라볼 적이 있을 때 춘우는

『무슨 근심이 있소?』

하고 물어보면,

『아뇨.』

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유쾌한 얼굴을 지어 그 수심 의 빛을 지워버린다.

춘우는 어디 가든지 이 문제를 풀기에 고심하였으나, 자기 의 힘으로는 도저히 풀수가 없었다. 어떠한 때에 춘우는 다 시 영숙에게,

『청아 때문에 그러우?』

하고 위로하듯 물어본 때도 있었으나, 영숙은 역시 고개를 내저으며,

『청아요?』

하고 되집어 물으며,

『청아는 벌서 잊어버렸어요. 생각을 해 보십시오. 다시금 청아를 생각하는이 보다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 습니까? 저는 아주 청아의 일은 단념하여 버렸어요. 저는 당신 한 분을 위한다 하면 무엇이든지……』

하고 채 말을 마치지 않던 일도 있었다. 이 말을 들을 때, 춘우는 다시 영숙을 권하였다.

『나를 위하여 청아를 내버릴 것이 무엇이오. 내가 혹시 영숙이가 철수와 가까이 하는 것을 싫어할까 하여 그와 같 은 일을 일부러 한다 하면 그것은 영숙이가 나를 사랑하면 서 나를 몰라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오. 만일 참 정말 나 를 안다 하면 영숙은 그렇게까지 청아를 단념할 것은 없는 것 같소.』

하고 여러 가지로 타일렀으며 나중에는

『영숙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영숙이 마음 속에 있 는 것을 모조리 말해주지 않는구려.』

하고 성까지 내보았다.

그러나 만일 다른때 이러한 말을 하면은 원통히 여길터인 영숙이가 이번에는 도리어 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그렇지 않다고 할때 춘우의 마음은 그 울음으로써 원통함을 하소연 할 때보다 그 웃음으로써 자기를 위로하려는 것이 몹시 싫 었다. 그 가운데는 기만과 사흘이 섞이여 있는것 같아서 마 음이 서운해지는 듯 하였다.

그러자 하루는 춘우가 몸이 불편하여 전보다 서너시간 일 찍이 집에 돌아와 본즉, 영숙이가 보이지 않았다. 문을 밖으 로 잠근 것을 보면 필연 멀리 간 것이 분명하였다.

『어디를 갔을가?』

춘우의 생각으로는 알길이 없었다. 어찌하였든 자기가 가 진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요를 내려깔고 누웠으려니까, 낮부터 신열이 나던 것이 더욱더 심하여지며 온 전신이 불 덩이 같이 더워온다. 가뜩이나 오히려 몸이 괴로워서 편안 히 누워있으리라 하고서 집에 돌아온 것이 와서 본즉, 영숙 이가 없자 마음이 불편하고 또는 화가 나서 공연히 몸이 더 욱 불편해지는 것 같았다. 어찌하였든 돌아올 때까지 기다 려 보기나 하리라 하고서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으나, 조금 도 마음이 가라 앉지를 아니하고 마음이 조이어 못 견디겠다.

한 시간이 지나갔다. 천정에 붙어있던 파리가 앵하고 날아 오더니, 얼굴에 와서 앉는다. 춘우는 나련한 기운 속에 근지 럽게 기어가는 파리를 쫓고 다시 몽롱한 가운데 잠이 들었 다 말았다 하였다. 다시 목이 말라서 물을 먹어볼가 하고 눈을 떴을 때 벌써 시계는 다섯시를 쳤다. 그러자, 문소리가 황망히 나면서 들어오는 이는 영숙이었다.

『누구요?』

다만 반갑기만한 마음에 춘우는 제 힘껏은 목소리를 높여 서 불렀다.

『나에요.』

마당에 들어선 영숙의 목소리는 풀이 죽었다.

『어디를 갔다오? 나는 몸이 좀 불편해서 일찍 왔지.』

『어디가 편하지 않으셔요?』

『저, 신열이 나고 두통이 나며 몹시 거북해서.』

영숙은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죄 지은 사람처럼 조심 스럽게 춘우 앞에 와서 앉아 춘우의 머리를 짚어 보았다.

『에구 대단합니다.』

『글세 웬일인지 알 수가 없어. 그런데 어디를 갔었소?』

영숙은 이 말에 또 한번 말이 없이 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무슨 생각인지 한참하고 있다가,

『저 그전에 학교에 다니던 동무가 찾아와서 놀러 갔다 와요.』

하며 또 그 언제든지 웃는 웃음으로 말끝을 마치며 웃었다.

『그러면 집을 잠그고 나간단 말요. 내가 온 뒤에 가도 좋 지 않소. 이렇게 적적한 집을 비어 놓고 다니면 위험하지 않소.』

『글세, 그런 줄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자꾸 뒷솔밭에 놀 러 가자고 재촉을 하는 것을 어떻게 해요.』

『그럼, 그이는 어디로 갔단 말요.』

『먼첨 들어갔어요.』

『왜 그렇게 총망하게.』

『집에 볼일이 있어서요.』

춘우는 웬일인지 영숙의 말 가운데는 구석이 지어보이고 또 그가 말을 채 끝내지도 않고 외면을 하며 말을 피하려는 기색이 있는 것을 보아서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정말 같이 보이지는 아니하였다.

그러고 그러한 생각을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마 는, 그러한 생각이 자연히 들어갈 때에는 자기가 자기를 책 망하는 생각이 나며, 또는 양심상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영숙이가 비록 무슨 일이 있어서 자기를 속이고 어디를 갔 다왔다 하드라도, 그것은 자기와 영숙의 두 사람을 위하려 함이요, 결코 자기에게 향하여 반기(反旗)를 들려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하고, 지금까지 영숙이 자기에게 하여 내 려온 것을 보아서도 영숙을 의심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 이 들어서 자연히 자기 감정 가운데서 솟아 일어나는 것이 지마는, 그것을 부인하고 그것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마때 흙 틈에서 새어나오는 물처럼 막으려하면 또 다시 새어나오고 막으려하면 또다시 새어나오는 그의 의 심은 오늘에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요, 벌써 그 단서가 잡 힌지가 오랜 것이다. 춘우는 장래할 미래의 그것이 어느 한 모퉁이를 문지르고 나갈 때가 있을 것을 미리 생각할 때 그 는 몹시 무서운 생각이 났다. 그는 그의 마음을 누르려는 노력과 또는 그 누르는 것을 억지로 터뜨리고 쏟아져 나오 려는 그 무슨 미묘한 감정과 싸우기에 몹시 가슴이 괴로웠다.

춘우는 또다시 영숙에게 묻지를 아니하였다. 그러하나, 그 가 일과나 마찬가지로 하루 한번씩은 의레이 말을 하여두는 말이 있으니, 그것은 자기의 마음이 얼만큼 괴롭기는 하나, 자기가 자기의 의무로 아는 것이니,

『청아에게는 정말 가보지 아니하료?』

하고, 한번씩 채쳐두는 것이다.

영숙은 이 말을 듣고서,

『청아요?』

하고, 무슨 죄악의 현장이나 발견된 사람처럼 눈을 크게 뜨고 반문을 하였다.

『청아에게는 무엇하러 가요? 당초에 가지 않겠어요.』

하는 말이나 얼굴이 몹시 냉담해 보였다.

춘우는 또 다시 생각하였다. 영숙이 만일 나를 위하여 청 아를 버린다 하면 그것은 나 한사람만 위함이요,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보다 자기가 순교자(殉敎者)의 고행 (苦行)과 같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터이니, 또한 나로서는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는 일이니, 그대로 내버려 둔다 하면 그것은 내가 영숙을 사랑하는 본의가 아닐 것이 요, 그렇지 않고 영숙이 참으로 나라는 사람을 생각하여 아 니라, 사랑이라는 그것보다도 색정에 취하여 청아라는 자식 을 내버렸다 하면 그의 피는 뱀의 피와 같이 찬 여자이니, 어느 때든지 또한 나를 내버릴 날이 있을 것이다. 하는 생 각을 하면서, 영숙을 쳐다볼 때 어쩐지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 날은 그대로 지나갔다. 그 후 며칠 후에 춘우는 평양에 출장을 갈 일이 있어서 사흘만에 돌아온 일이 있었다. 돌아 와서 창하를 길거리에서 만났다.

『어디 갔다 오나?』

『평양 좀 다녀오네.』

『평양은 왜?』

『회사 일로.』

『그런데 나는 몰랐어. 그러지 않아도 내가 자네 집을 갔 었지.』

『집에 왔다면서 내가 어디 간 줄을 모른단 말인가.』

『글쎄 그러게 말일세 내가 자네 보고서 할 말이 있으니까 말일세.』

『무슨 말을?』

『이리로 오게, 조용히 앉아서 말을 하세.』

어느 『카페』로 두 사람은 들어가 조용한 이층으로 올라 갔다.

『무엇을 먹으려나?』

『나는 식당차에서 저녁을 먹어서 별로이 먹고 싶은 마음 이 없는데.』

『그러면 술이나 한잔 들려나?』

『언제 내가 술 먹든가 미친 사람일세 그려, 대관절 무슨 말이나 좀 하게.』

창하는 자기 먹을 음식을 시켜놓고 천천히 입을 열어

『이 말을 들었다고 조금이라도 어떻게 생각은 하지 말게.

그러나 내가 이 말을 자네에게 하지 않을수가 없어서 나는 자네의 친구된 의무로 말을 하는 것이야.』

이 말 한마디가 벌써 춘우의 머릿 속에 암시를 주는지 알 아낼수가 있었다. 그의 마음은 무엇으로 찌르는듯하더니, 돌 아서서 가는 영숙이가 눈앞에 보이는듯하였다.

『어서 말이나 하게.』

『그런 게 아니라.』

말하기가 몹시 거북한 것처럼 맥주 한컵을 마시고서,

『영숙씨 말일세.』

하는 소리에 춘우는 얼굴에 뜨거운 피가 올라오는것을 깨 달았다. 창하는 다시 말을 계속하여

『요사이 나의 눈으로 보아서는 퍽 무슨 고민이 계신 모양 이야.』

하니까 춘우도

『글세 나도 그러한 생각을 가졌어. 지난번에 철수에게 다 녀온 후부터는 웬일인지 기색이 좋지가 않아서 나도 퍽 의 심을 하는 중이야. 이번 평양을 가서도 이삼일간 더 묵어올 것이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속하게 왔는 걸.』

『글세 나도 일전에 자네 집을 가지 않았겠나, 그러니까 문을 잠그고 아무도 없드란 말이야.』

이 말을 듣고 춘우는 고개를 끄떡하고,

『음!』

하고 무엇을 알아챘다는 듯이 가만이 창하의 계속하는 말 만 듣고있다.

『그러고 또 어저께는 내가 철수의 있는 여관에를 다녀오 다가 힐끗 보니까 그녀가 그 여관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든 가?』

춘우는 무의식 적으로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탁 치며 벌떡 일어서며,

『응! 무엇야?』

하고 실신한 사람처럼 서있었다. 그리고는 번개불 같이 지 나간 일이 연상되며,

『옳지, 알았다. 모든 것을 이제야 알았다.』

춘우는 흥분이 되어 먹지 않던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비록 독하지 않은 맥주라 할지라도 한동안 먹지를 않았던 까닭에 몹시 취해 왔다.

그리고, 춘우는 몹시 흥분이 되어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여 러 생각을 할수록 그의 마음은 분하고도 또 한옆으로 생각 하면 자기가 어느점까지 부족한 점이 있는까닭에 이러한 일 이 생겼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지난번에 자기가 생각한바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몹시 감정적인것을 자기도 생각하였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 아서, 그것을 천명(闡明)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고, 술잔을 거푸 들이키기 시작할수록 그의 마음은 자 꾸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이번에 창하의 말을 듣 고나서 지난번 자기가 생각한 마음을 어느 정도까지 믿기 시작하였다.

영숙이가 문을 닫고는 어디를 갔다는것과 또는 철수를 만 나 보았다는것을 들을 때, 그의 마음이 찔리는 것은 더할것 도 없지마는, 또 한옆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자기를 내버려 서라도 영숙의 사랑을 완전히 하고 싶었다.

물론 영숙이가 자기를 내버리고 철수를 따라간다 하면, 어 느 정도까지는 자기의 마음이 괴로울 뿐아니라, 자기를 모 욕하고 자기를 내버리는 그 울분한 감정을 억제하기도 어려 웠지만, 또 한옆으로 생각할 때에 자기에게 그만한 부족이 있는 까닭에 그와같은 일이 발생한 것을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다.

춘우는 다시 말을 이어

『그와 같은 일은 벌써 알았네. 자네가 그런 말을 하지 않 드라도 나는 벌써 알고 있으니까.』

사실로 말을 하면 진정한 사실을 자기가 인정하기는 오늘 이 처음이지마는, 지금 춘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또한 춘우가 이 말을 듣고서, 자기의 감정 속에는 이러한 말이 있는 것을 미리 알고는 있었지마는, 그것이 입으로 나 오는 말이나. 또는 그의 마음 깊이 그것을 느낀 것은 오늘 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춘우는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하여 생각할수록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 흥분이 되어오며, 한두잔 입에 대이기 시 작한 술이 자꾸자꾸 잔을 거푸하기 시작하였다.

『여보게.』

창하는 술이 조금 취하여 이 말을 듣고서는 자기가 이 사 실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춘우에게 무조건으로 동정하기 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춘우가 한번 노하고 한번 성내는것 이 자기가 한번 노하고 한번 성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춘 우에게 마음이 끌리어 이런 일을 자기가 당한 듯하였다.

물론 이런 일이 멀지 않은 장래에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으 나, 오늘에 정말로 이 일을 당하고 보니, 그것이 정말 같지 않고 거짓말 같으며, 또는 이런 일이 이 세상에 정말로 있 는지 의심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보게 내가 이러한 말을 한다고 어떻게 생각 은 하지 말게. 내가 이 말하는 것이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그것을 확실이 알기 전에는 자네나 나나 알수가 없을 것이 니까.』

『자네가 말하기 전에 나는 벌써 알고 있었네. 자네 말이 거짓말이 아닌 것은 나는 벌써부터 증명하지마는, 나 역시 이것을 생각할 때 어느 정도까지 짐작한 것이 있으니까.』

『글세 짐작을 하든지 마든지, 그것은 나는 모르겠네만, 그 것이 정말이 아니기를 나는 바라네. 그것이 나의 눈으로 보 아서 정말인것을 어떻게 하나.』

창하는 어느 때까지든지 냉정한 생각으로 말을 하였다.

두 사람은 거기서 나왔다. 그러고, 전차를 타고서 춘우의 집으로 향하여 갔다. 춘우가 자기 집으로 갈 때에 지금같이 허무한 일을 당해본 일이 없었다. 허무할 뿐만 아니라, 이것 이 거짓말 같아보이기도 하고, 또는 이것이 거짓말이 되었 으면 좋겠다고까지 속으로 생각하였다. 자기가 여태까지 그 러지 않아도 의심까지 하여보다가, 창하에게 그 말을 듣고 서 신경이 착란하여지며, 머리가 혼탁하여져서 눈앞이 보이 는것이 바로 분명히 보이지 않고 흐릿하여 보이며, 모든 것 이 꿈같이 보이었다.

영숙이가 자기를 생각하여 준것이 각별하였기 때문에 지금 영숙이가 자기를 다시 내 버리고 철수에게로 사실로 간다 하면 어찌하랴. 아니 간다하는이보다 사실로 갔다하면 장차 자기에게 어떠한 운명이 닥쳐오랴?

그러고, 창하가 이런 말을 나에게 일러준것이 친구의 도리 로는 그러할는지 알수 없지마는 이런 말을 하여 주어서, 자 기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괴롭게 하여주는이보다 아무 말도 하여 주지 않아서 그것을 아지 못하는 가운데 영숙이에게 속아지내는것이 도리어 자기를 위하여서는 좋을것 같았다.

그것을 생각하면, 창하가 어느편으로는 고맙기도 하고, 또는 원망스러웁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창하가 말이 없이 가만이 앉아있는 것을 볼 때, 그의 가슴속에 무슨 계책을 품고서 그리 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나기를 하였으나, 그것은 곧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자기 집에 가서 영 숙이가 없다 하면 어찌하랴. 그러다가, 내가 가서 한참 초초 한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영숙이가 들어온다 하면, 속에 숨 어있던 울분한 감정이 터져나와서 어떠한 짓을 할는지 자기 를 믿지 못하는 까닭에 지금 자기 집으로 가는 것이 위태한 것 같았다.

더구나 오래간만에 그쳤던 술을 먹은 까닭에 그것이 자꾸 자꾸 올라와서 얼굴이 덥고, 또는 같이 타오르는 감정을 자 기가 억제할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점에 들어서 자기가 혼자 자기 집으로 가는것보다 창하 를 데리고 가는것이 퍽 필요하고 든든하였다.

사흘이라는 날짜를 서로 보지 못하였던 까닭에 보고싶지 않은 것도 아닌게 아니지마는, 만일 영숙이가 집에 있어 자 기를 기다려 주지 않고 도리어 없는것이 자기나 영숙 두 사 람을 위해서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집에 왔다. 사흘전에 나갈 적이나 별로이 다를 것이 없었 다. 영숙은 무엇인지 마당에서 서성거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는 섬사하게 흐트러진 것을 아무렇게나 틀어얹고 가므스름하기 때문에 저고리치마가 아무러한 일도 없는것을 말하는것 같았다.

춘우의 돌아오는 것을 보고 영숙은 비둘기 같이 반가워하 였다. 그러고, 그 언제든지 웃는 웃음을 지어서 춘우를 맞아 주다가 춘우가 말이 없이 눈치만 살피며 또는 얼굴에 전에 보지 못하던 술기운이 있는것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놀랐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늘이 무슨 간격이 생기는 것을 춘우가 먹지 않던 술을 먹은 것으로 영숙도 짐작하게 될 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렇게 속히 오실 줄은 몰랐어요.』

영숙이가 자기 남편이 속히 온것이 좋아 그랬는지 꺼리는 일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마는, 춘우의 귀에는 모든 것이 의심쩍게만 들린다.

『왜 그러우? 내가 일찍 온 것이 영숙에게 방해되는 일이 있소?』

영숙은 춘우의 말을 듣고 속으로 에쿠하였다.

『왜 말씀을 그렇게 하셔요.』

영숙은 도리어 성내는 체하며 말을 하였다.

『전에 하시지 않던 말씀을 하시니, 그러고 약주가 웬일이 셔요.』

『나는 술 먹을 기회가 영영 오지 않을 줄 알았더니, 다시 술 먹을 기회가 와서 좋게 되었소.』

『그게 무슨 좋은기회입니까, 그러나 저러나 어서 들어가 서 진지나 잡수셔요.』

창하는 두 사람의 눈치만 보고 앉아서 아무 말이 없을 때 속으로는 영숙이가 얄미운 생각이 나서 자꾸 눈이 찡그러진다.

『밥먹을 마음 없소. 그러나 요사이 소문을 들으니까, 영숙 이가 대단히 바쁜 일이 많다고 합디다 그려.』

『일이 무슨 일얘요.』

하며, 영숙도 이제는 춘우가 그것을 알았구나 하며, 곁눈으 로 창하를 보았다. 이 일을 만일 안다고 하면, 그것은 창하 의 입에서 밖에 나올 데가 없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며, 창하가 몹시 미운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춘우와 자기 사이 에 들어서 모든 것을 주선하여 주어서 창하같이 고마운 사 실이 없더니, 지금 와서는 창하처럼 밉고 또는 무서운 사회 가 없었다.

본시 마음이 굳지 못하여 남을 꼬집어 뜯고싶어도, 그렇게 아프게 꼬집어뜯지 못하고, 그렇다고 마음 속으로 집어만넣 고 꿍꿍 앓기만 하는 춘우로서 비록 영숙이가 사실로 자기 를 배반만 하였다 할지라도 상당한 증거가 없이는 그것을 책망할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어서 마음만 혼자 괴로웠다. 그러고 영숙이가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나 자기가 영숙을 알아준것이 너무 완선완미한 편이 있 으므로 그것의 반동적으로 일어나는 질투와 또는 미운 마음 이 속에서 용솟음을 쳐서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춘우보다 창하가 더욱 면난한 점이 많고 또는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 있기가 어려워서,

『자, 나는 그대로 집으로 가겠네.』

하며, 일어서려한즉, 춘우도 갑갑한 생각에 그대로 있기가 거북하여

『그러면, 나하고 같이 가보세. 갑갑도 하고 그러니.』

하고, 모자를 떼어쓰려한즉, 영숙이가 난처한 눈으로 춘우 를 보며

『지금 또 나가시기는 어디를 나가셔요. 고단하신데, 그대 로 주무시지.』

하며, 만류하기를 시작한다.

『아니 잠간만 다녀와야 하겠소.』

예전의 영숙의 말을 듣기 잘하는 춘우도 오늘에 와서는 어 디까지 반항하기를 시작한다. 춘우는 다른 말이 그 자리에 서 일어나서 창하와 함께 문밖으로 나왔다.

一六

[편집]

영숙은 혼자 자리에 눕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있어 전후 일 을 생각하여 보았다. 자기가 자기 마음을 헤아려볼지라도, 아무 그른 것이 없고 또는 죄 될만한것이 없는데, 오늘 창 하나 춘우의 행동이든지 기색을 보면 자기를 몹시 의심하는 듯한 것이 야속하였다. 물론 속을 아지 못하는 춘우로서 그 와 같은 마음을 가지는것도 그렇게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 지마는, 자기가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춘우가 자기를 믿어주 지 않는 것도 또 한옆으로 서러운 생각이 났다.

자기는 입이 있다. 이 입을 가지고 춘우에게 무슨 말이든 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하지 못하는 것 은 무슨 까닭이냐. 여기에 고민이 있고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만일 영숙이 춘우를 사랑하지 않았 으면 이런 말 저런 말을 하였을 것이지마는, 그 말을 하지 못하는 것도 영숙이가 춘우를 생각하는 까닭이요, 이 말을 들으면 춘우의 가슴이 아플가 하여 말을 하지 않는 것인데, 도리어 춘우가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지 아니하고, 그렇게하 기 시작을 한다는것을 생각할 때 자기의 머리를 자기가 쥐 어뜯을만큼 갑갑하였다.

그는 몹시 마음으로 방황하였다. 춘우에게 이 모든 사정의 말을 하여버릴까 그렇지 아니하면, 아주 비밀로 덮어버릴까, 말을 하자니, 자기의 처지가 곤난하여질 것이요, 말을 하지 않자니 춘우를 잃어버릴것이다.

그러자, 영숙은 복바쳐올라오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혼자 그 자리에 쓰러져 자꾸 울었다. 운다 한들 속시원한 것은 없겠지마는, 자기는 춘우의 가슴에 안기어우는것이나 다름없는 감정으로 울어보기도 하였다가, 또는 모든 세상일 을 단념하고, 춘우도 단념하고 청아도 단념하고, 모든 것을 단념하고 자기의 팔이나 다리에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것같이 훌훌 단신이 된 마음으로 혼자 나서려는 마음을 먹 어보기도 하였다.

지금 영숙은 십자가 길거리에선 사람 모양으로 어느 길을 밟아야 옳을는지 알수가 없었다.

춘우의 사랑이냐,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의 본분이냐, 여기 에서 헤매일 때 그의 마음에는 허트러짐이 있고 또 얽혀지 는 것이 있었다.

시계는 자꾸 가는데, 춘우는 돌아오지 않는다. 방안에 혼자 앉아 애끈이는 생각을 하는 영숙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춘우는 열두시가 넘어도 돌아오지를 아니한다. 영숙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마음을 태우다가, 어느덧 잠이 들었다.

닭이 첫 번 울었다. 그러나, 춘우는 오지 않았다. 영숙은 여러 번 춘우가 집에 들어온 꿈을 꾸다가, 닭 우는 소리에 잠이 깨어 그것이 꿈인 것을 알 때 몹시 마음이 섭섭하였 다. 그러다가, 눈꺼풀 위를 내리누르는 잠으로 말미암아 다 시 혼몽히 잠이 들었다. 영숙의 꿈 속에는 청아도 보였다가 어수선 산란하여 단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 며칠이라는 날짜가 지나갔다. 저녁때 일정한 시간에 자 기 집으로 돌아오던 춘우는 날마다 술이 취하여 자정이나 새로 한시에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전에는 당초에 말이 없 던 사람이 날마다 잔말을 늘어가며 어떠한 때는 손으로 영 숙을 때리기까지 하였다. 그리고는 공연히 트집을 잡아가며 영숙을 괴롭게 하기에 모든 수단을 다부렸다. 그럴 때마다 영숙은 춘우 앞에서 울었다. 그래서, 애원하는 목소리로

『여보셔요! 당신이 저를 그렇게 미워하시는 까닭을 말씀 하여 주셔요, 저를 왜 그렇게 못 믿어주십니까, 당신의 행동 을 보면 아마 내가 여자로서 하지 못할 짓을 하는 줄 아시 는 것 같지마는, 그것은 결코 잘못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당 신은 언제든지 서로 의심하지 말자, 영원히 믿자고 말씀하 신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요사이는 이렇다 저렇다 는 말씀한마디 해주지 않으시고 날마다 약주만 잡수시니, 몸도 돌보셔야 할 것이 아네요.

저는 당신을 위한다 하면 무슨 짓이든지 하겠다고 하지 않 았어요. 왜 당신은 저를 그렇게 까지 알아 주시지를 않으셔요.』

하면, 춘우는 다만

『나는 아무 것도 몰라. 내게는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다.

내가 한번 사랑에 취하였을 적과 같이 술에 취해볼터이야.

그 사랑이 오늘에 나를 파멸하는 구덩으로 끌어넣으려는 것 이 되는것이나, 일반으로 이 술이 또한 나를 파멸로 끌어넣 을 것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야. 인생의 운명이란 하늘이 정한것도 아닌 동시 또는 자기 일개인이 만드는것도 아니 다. 다만 흘러가는 물 위에 떠있는 부유(  )와 같아서, 힘 있게 누르는 운명의 힘은 조그마한 우리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어.』

할뿐이었다. 이렇게 날이 갈수록 정신적으로 가정이 깨져 가는 것은 물론이요 물질적으로도 자꾸 부서져 가기를 시작 하였다. 그리할 때마다 영숙은 설합을 열고 상자 속에 넣어 두었던 패물낱을 들고 나갔다. 하루는 춘우가 몹시 얼굴 빛 이 좋지 못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말한마디 없이 혼자 꿍꿍 거리고 있는 기색을 영숙이가 살피고서,

『왜 무슨 걱정이 계시우.』

하고, 다정히 물어주었다.

춘우는 말을 할듯할듯 하다가, 다시 딱 멈추며

『아니, 별로 큰일은 아니나.』

하며, 채 말끝을 다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시 영숙은

『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말씀을 하셔요.』

춘우는 이 말을 듣고서 속으로 몹시 미안하나, 그렇게 지 성으로 물어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생각이 우연히 생겨서 부끄러운 웃음을 한번 웃고 또는 미안한 걱정을 나타내며

『그런 게 아니라, 돈을 한 사십원 갚아야 할 일이 있는데, 지금 같아서는 속수무책이야.』

『그것은 무엇에다 쓰신 것인데요?』

『무엇에 썼느냐구?』

『예.』

춘우는 이 말 대답을 하기는 몹시 부끄러웠다. 실상은 그 동안에 술 먹고 영숙을 괴롭게 하기에 소비하려고 남에게 얻어쓴 돈이었다.

『그것까지 말하기는 싫소.』

『왜 말씀을 못하셔요. 저는 벌써 짐작을 하였는데요.』

『무슨 짐작을 했단 말이요?』

『약주 잡숫고 계집의 집에 다니시느라고 쓰신 것이지요.』

할 때, 그는 보복을 하는 독부의 눈처럼 샐룩한 눈으로 춘 우를 보았다. 그러고, 분풀이를 하는 쾌감을 느끼기까지 하 였다.

『누가 술 먹느라고 빚을 졌단 말요? 아지도 못하는 소리 를 하는구려.』

하고, 그것은 말로는 부인하려 하였으나, 어째 힘이 없고 싱거웠다.

『그러면, 그렇게 걱정만 하시면 어떻게해요? 변통을 하실 도리를 생각해 보아야죠.』

『글쎄, 어떻게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려. 이번 월급은 거의 다 갖다 썼구.』

영숙은 고개만 기웃하고 있다. 저녁을 치루고 춘우는 갑갑 하다는 핑계로 다시 집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창하를 만나서 의논이라도 하여 보리라고 하고 그의 집을 갔었으 나, 창하가 없으므로 하는 수없이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그는 우연히 황금정통에서 지나가는 전차를 치어다본즉, 분 명히 자기 집에 있던 영숙이가 그 속에 탄 것을 보았다. 이 상한 생각에 가슴이 선듯하여, 그대로 그 뒤를 따라서 가본 즉, 그는 철수가 묵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춘우는 문깐에 서서 영숙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시간이 되거나 두시간이 되거나 어떻든지 만나보고야 말리라 하였다.

만일 이 세상 사람들 사이를 이상하게 가려놓은 장벽이 없 다 하면, 그는 당장에 영숙의 뒤를 좇아 들어가서, 철수와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눌러 죽여 버리거나, 영 숙의 검은 머리를 한 팔에 휘휘 감아들고 그대로 태질을 친 다 하여도, 그의 울분한 마음은 풀릴 것 같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숙의 뒤를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불같이 타오르는 질투의 마음으로는 당장에 무슨 일이든지 내고야 말 것 같았다. 들어 갈까하고 발길을 그쪽으로 향하 였다가는 멈추고, 멈추었다가는 다시 들어가려 하였으나, 그 몹시 뜨거운 피가 조수밀리듯이 밀렸다가 내렸다가, 더웠다 가 식을 때마다 그의 발은 또한 앞으로 내놓아졌다가 다시 뒤로 물러섰다.

고요한 하늘에서 조그마한 별들이 작게 움직이고 시커먼 어둠이 춘우가 서있는 골목을 휩싸고 있는데, 군데 군데 둥 그런 전깃불이 한 개 두 개 검은 포장에 누른 점을 찍은 듯 이 켜 있을 뿐이다.

한시간이 지났다. 그래도 영숙은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춘 우는 지금 철수와 영숙이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것을 눈앞에 상상하여 볼 때, 그의 전신은 떨리었다. 그러고, 그 것을 생각지 말아서 자기의 아픈 가슴을 진정하려 하였으나 그것을 생각지 말려고 하나 아니 할수가 없었다.

그러면, 자기가 이곳에 서있어서 영숙을 기다리는 것이 도 리어 어리석지 아니 할까. 영숙은 이미 자기를 떠나 옛날 그 사람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면, 자기가 나를 버렸는데, 내가 그에게 더 무엇을 요 구하려고 이 곳에 서 있는가!

내버리는 것이 누구에게든지 자유이면 내버림을 당하는 것 도 그만큼 자유스러워야 할 것이다. 내가 영숙을 차지하였 을 때, 영숙이 철수를 내 버리었고 철수가 영숙을 다시 차 지하게 되자, 또한 나를 내버리는 것이 그 무슨 인과(因果) 가 아닐까?

그러나, 철수나 나나 두 사람은 다 한번씩 영숙에게 내버 림을 당한 사람이다. 지금 내가 이 아픈 가슴을 움키어잡을 때, 맛보던 감정을 전일에 철수도 맛보았을 것을 사실이다.

그때 내가 승리자(勝利者)의 자랑스러움을 느끼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로 지금에 철수도 또한 그러한 것을 느끼었을 것이 다. 이 점에 들어서 철수나, 자기가 똑 같을 것이요. 또는 동감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 이 모든 것의 책임을 만린 돌려보낸다 하 면, 그것은 영숙에게 있는것이요 철수나 자기에게 있다고 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지금 이렇게 생각을 하기는 하면서, 불붙듯 타오르는 질투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내 가 영숙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것이 있기에 이런 질투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고 하면 이런 질투가 있을 리 없 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이리저리로 왔다 갔다 할 때 그의 마음은 조금 가라앉는 듯 하였다.

『고만두고 가서 자자. 그러면, 자기도 돌아올 터이지.』

하고, 돌아섰다가도 그는 다시 발을 멈추고서,

『그래도, 다시 더 기다려보자.』

하고, 머뭇머뭇하는 동안에 어느덧 길거리가 조용하여지고 가끔가끔 전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그래도, 영숙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몇시나 되었는지 신발 소리가 저벅저벅 나더니 누가 나왔다.

춘우는 적지 아니한 반가운 생각을 가지고서 그 나오는 사 람을 맞으려 할 때, 그의 추측은 완전히 틀려버리고, 그 나 오던 사람은 찌걱하는 문소리와 함께 대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었다. 그는 그 대문이 자기의 마음과 문을 틀어막는듯 이 답답하였다. 그 문을 자기의 손으로 열 수가 없었다. 그 는 문을 닫는 사람이 영숙이가 아니요 철수가 아니지마는, 어쩐지 미운 사람은 영숙이와 철수같이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춘우의 마음을 슬그머니 복수(復讐)까지할 마음으로 변하 여지며, 어디까지든지 영숙이 나오기를 기다리리라 생각하 였다.

먼데서 닭이 운다. 옷이 이슬에 젖어서 축축하여지며 풀이 죽어온다. 그러나, 아직까지 영숙은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어데까지 나오기를 기다려보리라고 결심까지 하였던 춘우 는 시간이 갈수록 자기의 결심이 어리석은 것 같아서, 에, 고만두어라 하고 단연히 발길을 돌리었다.

여관 앞을 나와서 큰 길거리로 거러올 때에 사람 하나 지 나다니는 이 없고, 다만 길 양편에 켜있는 전등불만 졸린듯 이 죽 켜있을 뿐이다. 그러고, 먼 곳에서 울려오는 야경(夜 警)의 딱딱하고 나무때기 두드리는 소리가 한층 더 세상에 적막한 느낌을 전해준다.

일종의 비애, 즉 가졌던 것을 잃어버린 듯한 슬픔과 자기 를 내버린 원망과 또 질투의 마음을 분기도 하였다가, 또는 모든 것을 부셔버리고 싶은 생각이 났다. 울고싶은 것은 자 기가 얼마든지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것이지마는, 모든 것을 때려붓는다는 것은 그리 쉽게 되지 않는 것이다. 거기 에는 반드시 반항이 있고 투쟁이 있는 것이다.

그 반항과 투쟁에서 능히 이길 수 있다 하면, 그는 굳센 사람이며 세상의 승리자라 할수 있으나, 대개는 그것을 이 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싸움도 하기 전에 자기가 자기 몸 을 스스로 깨뜨리는 사람이 흔하다. 지금에 춘우도 그 모든 것을 부셔 버리고 싶고 초인간적(超人間的)으로 살아보리라 하였으나, 자기가 거기에 손을 대기도 전에 벌써 자기는 자 기가 약한 것을 깨닫아 알았다. 그것이 자기의 힘으로 되지 않을 것을 짐작하였다. 그렇다고 그는 지나간 일을 한번에 잊어버리고 다시 새로운 길을 밟으려고 굳은 결심을 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마치 납(納)으로 만든 사람과 같아서 녹기 쉬운 성질을 가지었다.

『모든 것을 나는 모른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슨 행복 이 있으랴. 행복은 차지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다.』

하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들 때, 그는 에이는 듯한 감정 에서 샘같이 솟아나는 눈물을 금할 수가 있었다. 그는 길거 리로 걸어가며 울고 싶은 대로 마음껏 울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자기 집 문앞에 당도하였다. 닫혀있을 터인 대문이 방싯이 열리어 있고 방 안에는 불이 켜 있다.

『에그, 이게 웬일인가?』

그는 마음이 두근거려지며 머리 속에는 도적이라는 것까지 연상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틈에 누가 들어와서 무엇을 가져가지나 아 니하였나?』

다소간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소리가 삐 걱 나자, 방문을 열며,

『이제 오시우?』

하는 사람은 분명한 영숙이다. 춘우는 꿈 같은, 생각 가운 데 넋 잃은 사람처럼 멀거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영숙은

『왜 그렇게 서 계시우? 또 약주 잡수셨소?』

하며, 문을 열고 나올 때 춘우는 나오는 영숙을 똑바로 쳐 다보며, 정말 이것이 영숙인가 나의 신경이 찬란하여져서 환상(幻像)이 나타난 것이나 아닌가 의심하는 생각까지 났다.

영숙이 가까이 와서 춘우의 입을 맡아보더니

『약주도 자시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정신나간 이 같이 서 계시우?』

춘우는 영숙의 손도 쥐어보고, 목소리도 듣고, 그의 온 전 신을 살핀 뒤에 그것이 정말 영숙인 것을 깨달아 알고나서 그는 무엇이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냐 아냐.』

그대로 있자 하며 영숙은 춘우를 이끌어 방으로 데리고 들 어가며, 언 듯 생각하기는 옳치 춘우가 어떠한 곳에 새로운 애인을 두고 그 집에를 갔다가 늦게 돌아오니까, 할말이 없 어서 주저 주저하고 말도 못하는구나? 하고, 가슴속에서는 또 맹렬한 질투의 생각이 불일 듯 일어났다.

웃던 얼굴은 성낸 얼굴로 변하고 따뜻하던 손은, 차디차지 며 목소리가 날카로워간다.

『대관절 어디를 갔다가 인제야 오셔요?』

『어디?』

『네, 어디 갔다 오신 것을 말씀하시지 못할 것이 무엇얘 요?』

춘우는 괴롭고 답답하였다. 영숙에게 지금 무엇이라고 말 을 해야 좋으냐. 자기가 철수의 여관 앞에서 영숙이가 나오 기를 기다렸다 하면, 그것은 자기가 영숙을 못 믿는다는 것 을 증거함이요, 또 그렇지 않고 다른 말을 하면, 그것은 그 영숙을 속이는 것이며, 영숙은 속이지 아니하자니 영숙은 나를 의심할 것이다. 그는 다만 말 한마디 없이 앉아 있을 뿐이다.

『왜 말씀을 못하셔요?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고 내가 그만 한 것을 짐작하지 못할 것도 없겠구요. 또 그만한 것을 짐 작해 안다 하여도 모두 저의 탓이지요. 당신을 원망할 것도 없겠지요. 그렇지만, 당신이 그렇게까지 하신다는 것은 저를 위해서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하여 걱정 이 된다는거얘요.』

『무슨 짐작을 하였단 말이오? 그 짐작이라는 것을 좀 알 아봅시다.』

『생각해 보시면 알 것이지요.』

『생각이 무슨 생각이란 말요.』

『무슨 생각이 무엇얘요? 전에는 약주나 잡수신다고 핑계 를 하고 늦게 다니셨지마는, 오늘은 약주도 잡숫지 않고 전 보다도 훨신 늦어 들어오셔서 어디 갔다오셨느냐고 여쭈어 보아도 아무 대답도 못하시니, 그것이 무엇을 증명하는 말 얘요? 계집의 집에 갔다가 오셨거나 그렇지 않으면 나같이 다 썩은 년은 고만 쓸데가 없으니까 내버리시고 다른 여자 를 생각하시는 것이겠지요.』

『글쎄 왜 그런 말을 하우. 무슨 일이 있어서든지 조금 늦 게 돌아왔기로, 그렇게까지 말을 하면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요.』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씀얘요. 그만한 일을 저에게 속이 셔요? 당신이 알 것이지요.』

『무엇을 내가 속이었단 말이요 내가 영숙을 속인 것이 무 엇이요.』

『속이지 않으시고 무엇이얘요? 왜 오늘 밤에 어디 갔다 오신 것을 말해주지 않으셔요. 말씀하시는 것이 즉 속이는 것이지요.』

『내가 그 말은 참으로 영숙에게 할 수 없소. 영숙이가 어 떠한 오해를 할지라도, 나는 그 말을 내 입으로 할 수 없다 는 말이요.』

춘우는 간원하듯이 이 말을 하였으나, 영숙에게는 그 간원 하는 것이 도리어 거짓을 꾸미는 것처럼 밖에 보이지 아니 하였다.

『고만두세요.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는데, 제가 더 무엇이 라고 말할 수는 없읍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마음을 저는 믿 지요. 무슨 거짓말을 하시더라도, 저는 당신의 말씀이라 하 면 정말로 알터입니다. 혹은 다른 사람이 이러한 말을 들으 면 저를 어리석다 하겠지마는, 저는 지금껏 당신을 위하여 살아왔다고 생각조차 하니까요,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것도 다 사랑하여 드리는 것을 더 즐거움으로 생각하니까요.』

『물론 그런 말을 여기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말할 것은 되 지 못하지마는, 나도 영숙의 지금까지 얼마나 나를 위하여 힘써준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오. 그러나, 이번 일 하나는 나의 입으로 영숙의 앞에서 말할 수가 없소. 그것은 나를 용서하여 줄 수밖에 없소.』

이 말을 들은 영숙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해 드리지요. 모든 것을 용서해드리겠습니다. 그러 나, 용서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 것은 잊어버리지 말아 주셔요.』

하고, 그대로 엎드려 느껴 운다.

『고맙소.』

춘우는 이 말 한마디를 입밖으로 내보낼 때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끼었다. 그의 눈에도 은연히 눈물이 핑 돌았다.

『잊지 않지, 나는 영숙이 나를 믿어준다는 것과 같이 나 도 영숙을 그렇게 믿어줄 터이요.』

이 「믿을터이요」하는 소리가 영숙의 귀에는 무슨 의미인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에는 무사히 잠이 들어 잘 자고 났다. 아침에 춘 우는 어제 저녁에 된 일을 생각하기에 몹시 머리를 썩히었 다. 전찻속에서 본 것이 분명히 영숙이었고, 철수의 여관으 로 들어간 것도 분명한 영숙이었으며, 내가 그 여관 앞에서 나오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남겨놓지 않고 모조리 보았으 나, 문 닫힐 때까지 영숙이가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영숙이가 자기보다 먼저 자기 집에 와있다는 것은 아무리해 도 알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의문을 풀기도 전에 자기가 영 숙의 앞에서 영숙을 믿겠다고 진정을 다해서 말을 하다시피 한 것으로 말을 하드라도, 지금 냉정한 머리로 생각하면 어 리석고도 또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자기가 자기의 감각(感覺)을 전부 부인하기 전에는 어저께 일을 그대로 덮어버릴 수가 없으며, 또는 어젯 저녁의 자기 가 영숙에게 취한 태도가 너무 약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기의 허위(虛僞)를 비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밥은 먹을 때, 영숙의 거동이 전보다 더 친절하고 민첩하게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너무 꾸미고 거짓 같아서 도리오 불쾌함을 느끼게까 지 하였다. 춘우가 마루에 내려설 때 영숙은

『잠깐만 기다리셔요.』

하고 방으로 뛰어들어가더니, 손에 무슨 종이쪽에 싼 것을 들고 나왔다.

『저.』

한참이나 말읠 못하고 있더니, 그것을 내밀면서,

『그것을 오늘 갖다 갚으셔요.』

춘우는 그것을 받아든 그 찰나에 그 속에 돈이 든 것을 알 았다.

『이것이 웬것이요.』

하고, 영숙을 보았다.

『글세 갖다 갚고 오셔요. 지금 장황히 어떻게 말씀을 합 니까.』

『출처나 알아야 할 것 아니오.』

『글세 있다 저녁에 조용히 말씀하지요.』

『나 그러면 아니 가지고 가겠소.』

하며 도루 내미니까.

『글세 퍽도 그러시우. 벌써 시간도 다 되고 하였으니, 어 서 가지고 가셔요.』

춘우도 얼덜김에 주머니에 그 돈을 받아 넣고 문밖으로 나 왔다.

나오면서 생각을 하매, 그 돈이 수상하기도 하고 의심적기 도 하며, 또는 미안하기가 짝이 없다. 그러고, 또 한옆으로 는 고마운 생각도 났다.

춘우는 그날 하루 종일 사십원이라는 돈을 주머니에 집어 넣어 놓고 영숙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 온 것을 연구 해 내기에 몹시 고생을 하였다.

어제 저녁에 자기가 영숙이 뒤를 분명히 따라가기는 갔었 는데, 그것이 수수께기와 같이 풀기 어려운 것이 되버린것 과 아울러서 또 오늘 아침에 자기에게 내어준 사십원 돈이 라는 것도 알 수가 없다. 얼마 되지는 않는 돈이지마는, 만 일 이것을 얻어온 수단이 자기를 위하여 상서롭지 못하며, 그것을 받는 것이 자기에게 혹시 부끄러운 일이나 아닌가 하고, 그는 그것을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다시 그대로 가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까 그 돈이 어디에서 난 것이요.』

춘우는 들어가 옷을 벗고 앉아 영숙에게 물었다.

『빚은 갚으셨어요.』

하며 영숙은 되짚어 물었다.

『글세 돈의 출처나 좀 가르쳐주구려.』

『글세 갚으셨거든 갚았다고 그러시고, 아니 갚으셨거든 아니 갚으셨다고 그러셔요.』

『그것은 어떻든지 내 말 대답부터 해줘요.』

『난 싫어요. 그 말씀을 해주셔야죠.』

춘우는 영숙의 말이 나오는 것을 듣기 위하여

『갚았어.』

하고 일부러 거짓 대답을 하였다. 그것은 그렇게 해야 그 가 참말로 대답을 할 터임이었다.

대답을 들은 영숙은 말이 나오지 않는 듯이 한참 머뭇거리다가

『그것은 요담에 아실 날이 있어요.』

하고 춘우의 환심을 사려는 듯이 상긋 웃었다.

춘우는 이 말을 듣고 속에서 분이 치밀어 올라왔다. 아무 리 여자는 요사하다 하지마는, 당장에 말을 하마 하고, 그것 을 금시에 고치는 것은 너무나 간특해 보였다.

『무엇야? 어째서 이 당장에 말을 하지 못한단 말이오. 그 럼, 진작 말할 수가 없다든지 그렇게 말을 할 것이지. 지금 말을 하였다가, 또 말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무슨 까닭이 오?』

『말할 수 없는 까닭이 있으니까 그렇지요.』

영숙도 약간 얼굴에 피가 올라오며 목소리가 올라간다.

『그 까닭이란 대관절 무엇이오. 그 까닭 좀 압시다.』

『까닭을 아르켜드릴 테면 말씀을 하는 것이 났지요. 그 까닭을 알으실 건 없어요.』

『그러면, 당초에 말을 못하겠단 말이오?』

『못해요. 어제 저녁에 당신이 늦게 돌아오셔서 제게 그 까닭을 조금도 말슴하실 수 없다는 것이나 똑 마찬가지로 저는 그 말을 당신에게는 할 수 없습니다.』

춘우는 이 말에 입이 막히었다. 얼마간 입을 벌려 말을 하 지 못하다,

『그렇지만, 만일 그렇다 하면, 자 도루 가져가시오. 여기 있소.』

하고, 돈을 끄내서 영숙의 앞에다가 내던지며,

『나는 그렇게 까닭 모르는 돈을 쓰기가 싫소. 비록 영숙 이가 주선하여 준 것이라 할지라도, 그 까닭 모르는 돈을 쓰기도 싫소.』

하고 그대로 옷을 띠어 입고 문밖으로 나왔다. 영숙은 아 무 말 한마디 없이 앉아있는체 가만이 있었다.

一八

[편집]

근자에 춘우의 동료 사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아다니었다.

『춘우가 요사이는 퍽 침울하여졌어?』

『글세 나도 퍽 이상하게 보는 중야.』

『그 까닭을 자네들은 모르나?』

『모르지.』

『허허, 실련야, 실련.』

『조금 같이 지내는 여자가 있지 않은가?』

『그래, 그 영숙이 말이지?』

『옳지!』

『그것이 왜 그만 냄새가 난다고 한 모양일세 그려.』

『어떻든 세상은 돈 있어야 하겠네. 사랑의 마지막 승리는 돈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고 말데.』

『그것을 인제야 알았나!』

『인제 안 것은 아니지마는, 언제든지 진리인 것을 어찌하나.』

『그럼, 그 승리자란 대관절 어떤 사람야.』

『그 승리자 말인가. 전라도 부자로 년전까지 같이 지내다 가, 춘우에게 영숙을 빼앗겼었지 그러다가 다시 지금 얼려 붙기를 시작한 모양이야.』

『이름이 무엇이람?』

『압다 이 사람아, 일전에 내가 교동 모퉁이에서 자네더러 자세 봐두라고 그러지 않든가?』

『응응.』

『그 사람야 바로.』

『옳지, 윗수염 까맣고 얼굴이 둥근 그 사람 말이지.』

『그래.』

『그렇지만 춘우가 돈은 없어도 사람은 퍽 얌전하고 귀염 성스러운데.』

『얌전하고 귀염성스러우면 무엇을 하나? 돈이 있어야지.』

이처럼 만나는 대로 춘우의 친구들은 춘우와 영숙의 소문 으로 서로 찧고 까불제, 춘우는 벙어리 모양으로 말이 없이 자기가 일보는 회사 책상 앞에서 자기의 맡은 일반 볼 뿐이 었다.

붓을 잡는 것도 시덥지 않고, 남과 이야기 하는 것도 귀찮 아서, 다만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앞만 내다보고 앉아 있을 뿐이다.

그는 몹시 고적함을 느끼었다. 자기의 주위에서 모든 것을 누가 빼앗아 간것 같이 그는 적적하였다. 그러할수록 그에 게는 공포(恐怖)의 마음이 생기었다. 자기가 어떠한 깊은 산 이나 넓은 들에서 혼자 지내가는 듯이 외롭고도 무서웠다.

그 무슨 무거운 것이 자기이 머리에서도 누르고 가슴에서도 누르는듯 하였다. 그러고, 미끄러지지 않으려 하나, 아니 미 끄러지지 않을 수 없는 수렁가장자리로 자기가 차차 들어가 는 것을 느끼었다.

영숙과 자기의 힘으로는 헤쳐버릴 수 없는 구름을 만지려 하나 만질 수도 없고 보려하나 분명히 볼 수도 없이 가리어 있는 것을 생각하자, 다만 안타까울 뿐이었다.

예전에 즐겁던 날을 생각하고, 오늘에 이것을 헤아리매, 알 수 없는 사람의 살림살이가 더 한번 알 수가 없었다.

한강이 뽀트놀이며 청량리에서 처음 만나 꿈 같은 사랑의 마음을 서로 속삭일 때와 효창원의 봄놀이, 짧으면 짧다 할 수 있으나 일생의 잊지 못할 새로운 살림살이의 즐겁던 것 이 오늘에 거품을 쥐는 것이 사라지려하는 것을 생각하며, 눈물까지 흘리지 않을 수 없이 감개가 무량하다.

나의 사랑이 엷어졌느냐! 영숙의 사랑이 식었느냐! 영숙을 잊어보려고 하여 보기도 하였으나, 잊으려고 하면 더 생각 이 나고, 보지 않으려면 할수록 더 보고 싶은 것은 사람의 힘으로 풀수 없는 수수께끼며, 밉고 질투스러울 때마다 더 마음이 어찌하여 타는지, 그것을 알려주는 열쇠를 아직 조 물이 우리 사람에게 주지를 아니한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이러하고 저렇게 생각하면 모 든 것이 저런 것 같은 것이 사랑이요, 믿으면 눈이 딱 감고 믿어지며,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카락 하나가 움직이는 것을 보아도 수상하여 보이는 것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사 랑의 빛깔이다.

오늘에 춘우는 영숙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마는 속 이 공연히 타고, 영숙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이 보 이지 않는 것이 아니지마는 공연히 의심스럽다.

춘우는 혼자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영숙을 의심하는 것이 사실이니, 영숙에게 그 모든 의심스럽게 여기고 믿고 하든 바를 모조리 이야기하여 버린 후, 모든 것을 잊어버려 버릴 가! 그렇지 않으면, 영숙의 마음을 떠보고 모든 것을 탐지하 여볼가. 만일 내가 의심하는 바 또는 창하가 내게 일러준 것이 거짓말이라 하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고 그것이 사 실이라 하면 어찌하랴. 그 때 춘우는 남자의 자부심이 몹시 상하여지는 듯 하였고, 또는 우열승패를 다투는 장사가 적 에게 몹시 모욕을 당할 때 그 마음과 같이 분함을 느끼었다.

『옳다.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속에다가만 넣고 우물쭈물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천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 의 태도는 마치 채무나 채권을 가진 자들이 서로 앉아 청산 을 하여 받으려면 받고 탕감하는 것이나 똑같은 태도를 취 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피차의 권리 의무가 있는 부채인 까닭이다.』

하고는, 첫째로 영숙이가 철수나 청아를 다시 보지 않겠다 고 맹세까지 하고서 어찌하여 철수에게 다니는 것, 둘째로 어찌하여 근자에 와서는 퍽 침울하여졌느냐 하는 것, 셋째 로는 그 돈 사십원의 출처를 어찌하여 말하지 않는 것, 이 세가지이다. 그러면 나도 내가 생각하였던 것은 모조리 말 을 하여 버리리라 하였다.

그날 저녁때 춘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말썽꾼인 친 구 몇 사람과 만났다.

그중에 나이 어리고 인물 예쁘장한 사람이 먼저 춘우의 손 을 잡고

『어디 가나?』

하며 새브렁거리는 말소리로 묻는데, 입에서 술냄새가 난다.

『집에 가네. 한잔들 했네 그려.』

하며 침울한 웃음과 함께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바꾸었다.

그중에 몸짓이 뚱뚱하고 로이드 안경을 버틴 친구 하나가 배창자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로

『집에 가서 와이프하고 재미있게 저녁을 먹는 것도 좋기 는 좋은 일이지마는, 우리같은 친구들하구 같이 먹는 것도 그리 무미할 것은 없겠지.』

『자, 가서 한잔 내게.』

하며 그 말을 받아서 말썽을 끄내는 사람은 그 중에 얼굴 이 가장 까맣고 술을 그리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다.

춘우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사람들을 떼어 보내려고 나오 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웃어가면서

『글쎄 좋기는 좋은 말이지만은, 돈이 있어야지.』

하며 두손을 펴보았다.

『옳지, 핑계가 좋으니. 그렇지만, 자네가 정 사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 같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술 한잔 내지 못하 겠나.』

하는 사람은 로이드 안경 쓴 사람이다.

『암 그렇구 말구. 그렇지만, 그런 말 말게. 춘우가 그럴 사람이 아니니. 낼 마음이 있으면 우리가 내라고 하기 전에 먼저 내는 사람이니까.』

서로 찢고 까부는 사애에 서서, 춘우는 어쩔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애원이나 하는 듯이

『정말 돈이 없네. 돈만 있으면 자네네들이 말하기 전에 내지.』

『거짓말 말게.』

『정말일세. 자, 보게.』

하고 지갑까지 끄내보였다.

사달라는 말을 먼저 끄낸 사람이

『정말가?』

하고 한참 섰더니, 머리에 얹었던 팔을 뚝 떼며,

『가세, 내가 한잔 내지.』

하고 일행을 잡아끈다. 춘우는 돈 없는 핑계나 해서 거기 에서 모면을 하려하였으나, 이 경우를 당하여서는 조금 난 처하였다. 그러나, 술 낸다는 친구가 술을 많이 먹을 줄 모 르는 사람인 까닭에 잠깐 먹고 얼핏 나오려 하고 그 뒤를 힘없이 휘우적거리며 따라갔다.

『어디로 갈까?』

『글쎄.』

『맥주나 한잔 먹어보세 그려.』

『맥주? 그까짓 것을 먹어야 취해야지 위스키나 브란디가 아니면 주량이 차지를 않을걸.』

자니네끼리 의논이 분분하다. 춘우는 그저 새끼에 맨 돌멩 이처럼 어디든지 가자는 대로 가리라 하고서 구경만 한다.

술 낸다는 친구는 돈푼이나 있고 놀기를 좋아하나, 원래 술은 먹을 줄 모르는 까닭에, 그 대신 여편네를 좋아한다.

그래서, 술집에 가자면 반드시 계집애를 보러 가는 것이며 술을 먹으러 가는 것이 아니요, 요리집에 가서 논다 하면 기생 없이는 놀지를 않는 사람이라, 지금도 자기의 애인의 볼 마음이 불현듯 나서 춘우 술 사준다는 핑계로 애인을 보 러 가는 것이다.

『요리집으로 가지.』

하며 로이드 안경에게 물어보았다.

『아직 일르지 않을까?』

『이르기는 무엇이 일러. 일직 가야 기생도 맘대로 부르지.』

『자네야 판에 박아논 기생이 있으니까 언제는 못 만나보 겠나.』

할 때 옆에서 이 말을 듣던 춘우가 만일 요리집에를 간다 하면 시간이 너무 늦어질 터인즉, 그리하지 말고 간단히 어 디 가서 술이나 몇잔 먹고 헤어지리라 하고서,

『요리집에는 가서 무엇을 하나 어디 청요리집에 가서 저 녁이나 먹지.』

하며 만류를 하려한즉 또 그 새부렁거리는 친구도 속심은 단단하여

『그러이, 그래. 돈 많이 들이고 그리로 갈 것 없네. 어디 가서든지 간단히 먹지.』

그러나, 그 말이 모두 성금이 서지 못하였다. 네사람은 명 월관지점으로 갔다.

방 하나를 치우고 들어앉아 있을 때 춘우의 마음은 술 먹 을 것이나 또는 놀 마음은 조금도 없고 다만 오늘 저녁에 자기 집에 돌아가서 어떻게 사랑의 셈을 따질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자기가 돈을 가지고 대금업자나 또는 이해타산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지 못한 것이나마 한가지로, 사 랑에 들어서도 그리 타산적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을 자기가 자기를 알므로 여간한 결심을 하지 않아서는 아니될 것이라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나 춘우는 다 만 한옆에 우두커니 앉아서 속만 혼자 조리고 앉아 있었다.

조금있더니, 기생이 들어왔다. 그 기생을 볼 때 춘우의 눈 은 뚱그래지며 가슴이 설렁하였다. 당장에 대들어서 손목을 보여주고 인사라도 하고싶었으나, 춘우는 그렇게까지는 단 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기생이란 옛날에 춘우더러 선생 님 선생님 하고 친하게 따랐으며, 자기가 시골로 갈제 용금 루 난간에서 눈물까지 흘려주던 설성월이었다. 기생 역시 춘우를 보기는 반갑고 놀라는 눈으로 보았으나, 고개를 다 른 곳으로 돌리어버렸다. 다른 기생이 또 하나 와서 술을 먹기 시작할 때는 벌써 방 안이 어둠침침하여질 때였다.

술들이 얼근히 취하더니, 서로 취기가 술잔이 왔다 갔다 한다. 로이드 안경은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기생을 더 럽게 건너다보며 잡담을 하고 앉았는데, 설성월은 그때까지 별로 이 말이 없이 좌석 주인 옆에 앉아 있다. 그는 무슨 난처한 일이나 있는 듯이 유쾌하지 못한 표정으로 술만 따 른다.

춘우는 술 먹을 생각보다도 집에 갈 생각이 더 많아서 여 내 시계만 꺼내보고 있을 때 깐죽깐죽하는 친구가 춘우를 보더니,

『시계는 왜 그렇게 보나?』

하며 옆으로 다가 앉아서 술잔을 주며,

『한잔 들게. 그러고, 나 한잔 주게.』

하며 술을 권한다.

『자네가 전에 일본 있을 때는 그렇게까지 술을 잘 먹더 니, 요새 와서는 한동안 끊었었다지?』

『그랬었지!』

『예끼, 미친 사람. 술을 왜 끊나? 술처럼 좋은 것이 없데.

열정이 없는 사람이 향내나는 술을 먹으면 그저 가슴에서는 불보다도 더 뜨거운 열정이 솟아오를 것이요,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하는 사람이 한번 마약(痲藥)같은 술잔에 입을 대이면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잊어버릴대로 잊어버릴 것일세. 울고싶거든 먹어보게, 맘껏 울것이요. 웃고싶거든 먹어보게, 폐부가 터지도록 웃을 수가 있는 것일세. 거기에 는 거짓이 없어지고 흉허물이 없어지고 세상의 모든 얼기설 기한 그물을 벗어나 초연한 경지에서 놀 수가 있단 말일세.』

한참이나 술 철학 강의를 하고 나더니, 다시

『그러나, 여자는 사귈 것이 아닐세. 영원한 「스핑쓰」라 고 말한 사람도 있지마는, 여자는 못사귈것이야.』

『그러면, 여자가 남자를 볼 때 역시 영원한 「스핑쓰」로 보는 것은 자네는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야.』

춘우는 옆에서 권하는 술을 사양하다 못해 주는 대로 받아 먹어서 얼근하게 취해 온다.

그러는 동안에 옆에 있던 설성월이가 보이지를 아니하였 다. 술이 들어가서 돌기를 시작하는 대로 춘우의 마음이 누 그러지기 시작하더니, 다시 자기의 손으로 자기에게 술을 권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술을 먹는 것이 자기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하는 말이 술 먹은 사람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이요, 옛날부터 오늘에 그렇지 않아 본 일이 없는 진리지 마는, 어찌하여 먹으며 무슨 까닭에 먹은 지도 알지 못하고, 술잔을 입에서 떼지 못하는 것은 그 가운데 사람의 어떠한 약점이 있는 까닭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기는 하면서, 춘우도 술을 마시고싶은대 로 마시었다.

『이춘우씨 전화 받으셔요.』

뽀이가 들어오더니, 춘우에게 눈짓을 한다. 일동은 모두 그 편을 보았다. 춘우는 전화할 사람이 없는데 이상하다는 듯이

『전화? 누군가?』

하고 밖곁으로 나갔다. 그런즉 뽀이가

『이리 오셔요.』

하더니, 다른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누구야?』

하며 필연 다른 방에서 자기를 불러 가느라고 속인 것인가 보다 하고 뽀이를 따라가본즉, 거기는 설성월이가 빈 방에 서 혼자 앉아 있었다.

『오!』

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춘우의 다리는 벌써 술기운에 바로 놓여지지를 아니한다.

『참 오래간만야.』

하며 설성월의 손을 잡는 춘우는 설성월의 웃는 낯을 치어 다보며,

『그래 언제 서울 왔어.』

『온지 두서널달 돼요. 선생님 말씀은 제가 모두 듣고 있 었지요. 그래 안녕히 계셨어요.』

『잘 있었지.』

『부인도 안녕하시구요.』

『부인? 하하 잘 있어. 내가 아내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담.』

『그것을 몰라요. 모두 다 알아요. 그러나 저러나 아까는 매우 실례를 했어요.』

『무엇을?』

『인사를 여쭙지 않아서요.』

『응 그것야 나도 하지 않았으니까 마찬가지지.』

『그런데, 선생님 퍽 변하셨어요.』

『무엇이 변했어?』

『글쎄 무엇이라고 꼭 집어서 말씀은 할 수 없어요. 어떻 든 이상해지셨어요.』

하며, 다시 춘우를 신기한 듯이 들여다본다.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러는게지.』

『참 웬 약주를 그리 많이 잡수셔요. 저는 오늘야 첨 뵈었 어요.』

『술 먹는 사람이 공연히 먹는 줄 아는 게지.』

『사내 어른이 약주를 너무 아니 잡수셔도 빽빽하고 융통 성이 없어서 안되겠지마는, 너무많이 잡수실 것도 아네요.』

『하지만, 먹게 되면 어디 그런가.』

설성월은 무슨 말을 할듯말듯 입을 버릴듯 하다가, 나중에 결심한 듯이 입을 열면서

『선생님, 부인의 이름이 영숙씨죠?』

춘우는 고개를 번쩍 들면서,

『그래.』

『또 전 남편되시는 이는 철수씨고.』

『응, 그것은 어떻게 그렇게 자세 아누.』

『자세히 알지요.』

할 때 옆의 방에서

『성월이-』

하고 소리를 질러 부른다. 그러자, 뽀이가 와서 재촉을 한다.

『가만이 있어, 곧 갈터이니.』

춘우는 뽀이를 보내고서

『어디서 보았나.』

그 대답은 하지도 않고,

『또 그 딸이 지금 앓지 않아요.』

『그래.』

『선생님이 지금 약주를 아니 잡숫다가 다시 잡숫는 것이 며, 또는 침울하게 계신 것이며, 전보다 몹시 변한 것을 저 는 그 원인이며 어떻게 해서 그러한 것까지 모조리 알고 있 어요.』

하고 일어서며, 춘우가 다시 그립다는 듯이 어깨에 매달려 보며

『저의 집에 내일 한번 오셔요. 그러면, 선생님을 위해서 말할 것이 있으니까요.』

『무슨 말을?』

『무슨 말이든지요.』

『가지.』

『꼭요.』

동명과 번지를 가르켜 저러고 설성월은 먼저 나아갔다.

춘우는 다시 한번 신기러운 중에도 의아한 생각이 나서 천 천이 난간으로 배회 하며 생각하였다.

옛날에 놀던 사람을 다시 만나자 옛 회포가 다시 새롭기도 새롭거니와 그렇게 까지 자기의 사정을 자세히 아는 것이 이상하였다. 그리고 옛날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서 까 지 사랑하리라 하던 설성월이도 오늘에 와서 퍽 많이 범연 하여 진것을 생각하여 보고 또 자기 가슴에 있는 정열이 옛 날의 그것 보다 얼마나 식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때 사 람의 살림살이가 그만큼 간사한 것을 깨달았다.

옛날에는 자기가 없으면 못살겠소 하고 눈물을 흘리던 설 성월이도 오늘에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기생의 생애가 죽 어도 싫다던 사람이 오늘에는 또 다시 웃음을 지어 웃으며 목소리와 단장을 일부러 만들어 남자의 피를 긁으랴 한다.

그것이 억지로 질질 끄을리어 그리하는 것인 것은 누구나 거짓말이 아니라 하겠지마는 자기 혼자만 질질 끄을리어 세 상살이를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부귀나 영화를 누릴 때로 누리는 사람도 제가 사람의 새끼인 어상에는 인간고(人間苦) 를 떠나지 못하였을 것이며 제아무리 지지하천의 미천한 사 람이라도 사람인 이상에는 또한 그것을 변치 못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기생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은 그 뒤에 사회의 결함이 있으 므로 그 결함을 저주하는 반동으로 나오는 동정이요, 여자 라는 성적(性的)으로 보아서 동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기디 까지든지 여성이란 여성은 면치 못할 것이므로서 남자 의 반목과 질시가 끊일수가 없을 것이며, 애착과 사모가 있 을 것이다. 다만 이 사회상(社會相)을 떠나서 본점에 있어서 기생도 다른 여성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을 것이다.

춘우는 이렇게 종작이 없는 생각을 하고 왔다 갔다 하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술을 먹었다.

춘우는 인력거를 타고서 정신없게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영숙은 춘우를 맞아서 전과 같이 자리에 눕히었다.

춘우가 눈을 떴을 때에는 그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에 왔을 리가 없는 자기가 집에 와서 누워 있는 것은 기 적이었다.

여러 친구와 지껄이고 떠들며 기생들과 희롱하던 장면이 딱 끊어지고 자기의 아내인 영숙앞에 누워있는 장면이 너무 급하게 이어진 것이 춘우에게는 이상한 감흥을 이르킨다.

그는 이제 자기가 친구들에게 끌려가기 전에 하루 종일 고 민해야 내려온 그 사랑의 부채의 청장을 어찌하였는가? 하 는 생각은 할 때, 그는 자기가 너무 무슨 일에 등한하고 성 의가 없어 보이었다.

자기의 일생을 지배하는 큰일이라도 결심에 결심을 하였던 일이 술과 설성월로 말미암아 계획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하 면 그것은 너무 가벼운 일이다.

그러나 춘우는 어저께 밤에 설성월이가 자기에게 일러준 일을 생각하였다.

지금에 영숙과 자기 사이의 중대한 문제를 청장 하려는 이 때에 자기와 영숙과 또는 철수나 청아의 관계를 자세히 안 다 하며, 또는 거기에 대하여 내게 말하여 준다는 것을 그 대로 지내 쳐버린다는 것은 또 한번 생각하여 볼 일이다.

하루를 연기해서라도 설성월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어제 맘먹은 대로 청장을 하리라 비록 기생인 설성월의 입 에서 나오는 말이라도 내게는 참고가 될는지 알 수 없다고 춘우는 하루를 연기하기로 하였다.

그날 저녁때 춘우는 설성월을 찾아갔다. 기생집에 발들여 놓은지가 하도 오래인지라, 그는 서먹서먹하여 얼마간 주저 하였다.

남들이 설성월이를 약하여 성월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춘우도

『성월이!』

하고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다시 목소리를 높이하여 불 렀다. 그때야 안에서

『누구야?』

하는 소리가 나며 나오는 사람은 설성월이었다.

『에그 오셨어요.』

춘우는 설성월이 몹시 난처해하는 눈치를 보고서

『손님이 계시우?』

하며 설성월의 말을 미리 해주었다.

『예.』

『그러면……』

하고 한참이나 춘우는 말이 없이 있다가,

『어떻게 할까?』

『글세요.』

춘우는 무엇을 깨닫듯이

『옳지, 내가 부를 터이니 기다려줘.』

『예, 그러셔요. 오래간만에 모처럼 오신걸 들어오시지도 못해서 미안합니다.』

『천만에.』

춘우는 요리 집에 앉아 인력거를 보내었다. 얼마 아니하여 설성월은 왔다.

자리가 정한 후로 춘우는 설성월의 말문을 열리게 하기 위 하여 그 동안에 어떻게 지냈으며 서울로 다시 오게된 사정 이야기를 물었다. 설성월은 자못 감구의 회포가 있는 표정 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나의 사정을 아나.』

춘우는 혼자 맥주를 들며 물었다. 설성월은 고개를 잠깐 숙이고 상긋 웃어서 자기가 그만한 것을 아는 것이 자랑스 러운 듯이 입을 연다.

『그것을 몰라요. 선생님이 지금에 어떻게 괴로우신 마음 을 가지고 있는 것도 저는 아는데요.』

『무슨 괴로운 맘을 나는 조금도 괴롭지 않아. 언제든지 유쾌한 마음으로.』

『듣기 싫어요. 그렇게 거짓말을 하신다고 제가 속을 줄 아십니까.』

춘우는 속으로는 그 말을 인정하며 겉으로는 억지로 웃음 을 나타내면서,

『내가 속이기는 무엇을 속인단 말이야. 그 속지 않는 이 야기를 좀 들려 주어.』

『속지 않는 이야기요. 저는 그 말씀을 선생님께 말씀하기 는 싫어요. 그것이 조금도 선생님께서는 이롭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롭거나 해롭거나 그것은 성월이가 내게 친절함을 보이 는 것이니까, 무슨 이야기든지 해주어야할 것이 아닌가. 내 게 이롭다고 이야기를 하고, 이롭지 않다고 이야기를 하여 주지 않는다 하면 그것은 의리 있는 사람들이 하지 못할 일 이니까.』

『의리요? 제가 무슨 의리가 있겠읍니까. 의리가 비록 있 다 하드라도 그 의리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우리들이니까.』

하고 말이 없다가, 갑자기 나지막한 소리로

『선생님!』

하고 춘우를 부르더니,

『아까 저의 집에 있던 이가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몰라.』

『그이가 바로 청아의 아버지얘요.』

이 말을 듣고 춘우는 자기도 모르게

『응?』

소리를 냈다.

『그 사람이 철수야.』

춘우는 당장에 철수가 옆에 있는 것처럼 주먹을 쥐고 벌렸다.

『아 나의 행복이라면 어디서 어디까지 깨뜨려 부수려하는 악마다.』

이럴 때 옆에 방에 어떠한 손님이 들어오더니, 춘우와 설 성월의 이야기를 남겨놓지 않고 듣는 사람이 있었다. 설성 월과 춘우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렇게 노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그러나, 김철수 가 우리 집에 오는 것을 가지고 노하실 것은 없을 것 같읍 니다. 우리 집에는 누구든지 올 수가 있는 것이 아네요. 그 렇다고 오는 이를 가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 저의 직분이니 까요.』

설성월은 춘우에게 철수의 말을 한것이 여러가지로 자기와 춘우 사이의 관계를 소원히 하게되는 동기나 되지 아니할까 하여 철수와 자기 관계를 춘우가 의심하거나 오해하지 않게 하려고 극력으로 변명을 하였다.

『철수가 성월의 집에 다닌지는 얼마나 되나?』

『얼마 되지 아니해요. 한 서너달 되는지요.』

『그러면, 성월이도 철수를 생각하는 게지?』

『안요.』

고개를 내흔들며

『그저 여러번 놀았을 뿐에요.』

춘우는 얼굴에 엷게 올라온 술기운에 조금 흥분이 되어

『그야말로 나를 속이려고 하는구나. 그렇게 나도 쉽게 속 으려하는 사람은 아니야!』

하고 조소하듯이 웃음을 웃었다.

『그거 참 기막히네. 그것야 제가 변명을 한다고 곧이들이 시지 않으시면 곧이듣지 않으실 터이오. 변명하지 않드라도 저의 양심은 있는 것이니까요.』

춘우와 성월의 이야기가 잠깐 머리를 딴데로 돌리었다가, 춘우가

『그러나 저러나 어저께 이야기하여 주마 한 것을 이야기 해 주어야지.』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머리를 바로잡게 되었다.

『어저께 하겠다는 말씀요?』

『응.』

『그것은 말씀을 해드릴 터인데요.』

『그래.』

『저의 요구 조건도 하나 들어주신다 하면 말씀을 하여 드 리지요.』

『무슨 요구 조건?』

설성월은 잠깐 웃음을 띠우더니 부끄러운 듯이 얼굴빛이 불그레하여진다.

『무슨 요구든지 제 요구면 언제든지 들어주시지요.』

『내 몸으로나 내 마음으로 할 수만 있으면.』

『그러면, 다음에 다른 말씀을 하시지 못합니다.』

『그래, 한입으로 두말할가.』

『그러면, 이야기하지요. 선생님의 부인이 지금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은 선생님이 모르실것입니다. 영숙씨 만큼 선생 님을 사랑하는 이가 없어요. 선생님이 지금 영숙씨를 의심 하는 것도 나는 알아요. 그러나, 그 의심하시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까 요. 그렇지만, 영숙씨는 지금도 예전과 다름없이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이 말을 듣는 춘우는 속으로 비웃었다. 「네가 무엇을 안 다고,」그러나, 겉으로는 웃음을 지우면서,

『그것은 무슨 증거로?』

『증거요? 증거는 얼마든지 있지요. 영숙씨가 선생님에게 맹서까지 하고서 철수씨에게는 가지 않겠다 하였지요.』

『그래.』

『그러고도 영숙씨는 철수씨에게 아니 갈 수가 없게되어 선생님의 눈을 기이고 다닙니다.』

『그것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람. 한 번 내게 맹세를 한 것을 지키지 않는다하여도 그것이 잘한 일이 못 될 터인데, 두 번씩.』

『글쎄요. 얼핏 생각하면 그래요. 그렇지만, 만일 영숙씨가 선생님을 위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렇게 선생님을 속일 리가 없지요. 가야 하기는 가야 할터인데, 선생님이 그것을 아신 다 하면 선생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아마 좀 좋지 못하시겠지요.』

『그것야 그렇겠지.』

『또 선생님이 군색하실 때에 영숙씨가 철수씨와 사실 때 에 장만하였던 패물을 팔든지 그렇지 않으면 철수씨의 주머 니서 나온 금전을 갖다 드린다 하면 그것을 선생님이 받으 시겠습니까?』

『물론 받지 않겠지.』

『그러니까 말얘요. 영숙씨가 선생님을 속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얘요.』

춘우는 설성월에게 이 말을 듣고서 비로소 지나간 일을 한 가닥 두가닥씩 풀 수가 있었다. 그와 같은 말을 듣고서 춘 우는 영숙의 일동일정을 모두 이해할 수가 있었다.

문을 닫고 다니는 것이며, 돈을 변통하여가지고 와서 자기 에게 말을 하지 않은 것이며, 영숙의 얼굴에 전에 없던 근 심 빛이 있는 것을 춘우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만일 설성월이 말이 참말이라 하면, 나는 도리어 영숙에 게 죄를 지었으며, 그만큼 영숙을 알아주지 못한 사람이다.』

하고 속으로 뉘우치는 생각과 또는 감사한 생각이 핏속에 스미어드는 듯이 느끼었다.

『그렇지만 선생님!』

설성월은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선생님이 영숙씨를 사랑하시는 것도 제가 알고 영숙씨가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도 저는 압니다. 그러나, 선생님과 영 숙씨의 장래가 반드시 불행에서 끝날 줄을 저는 알아요. 선 생님이나 영숙씨의 사랑은 반드시 영구히 계속되지 못할 것 입니다.』

춘우는 이 말을 들을 때 가슴이 서운함을 느끼었다.

『왜?』

『왜요? 그것은 청아라는 아이 때문이지요. 선생님은 사내 양반이시니까 자세히 모르실는지 알 수가 없겠지마는, 여자 는 자식을 내버리고 그 남편을 따라가는 일이 없다고 해도 가합니다. 만일 자식을 내버리고 애인을 따라 간 여자가 있 다 하면 그것은 음부거나 사랑이 아니라 색정이겠죠.』

『그러면, 자식이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 머니가 자식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이지.』

『어느 편이든지 마찬가지지요.』

『그러면, 청아를 우리 집으로 데려오면 고만이지.』

『글세 딱한 말씀도 하시네. 청아를 그애 아버지가 내줄지 말이지요. 애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영숙을 잊지 않고 자기 것을 만들려고 별별 수단을 다 쓰는데요.』

『그것은 내 생각 같아서는 영숙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원수를 갚으랴 하는 것이겠지. 만일 참으로 영숙 을 사랑한다 하면 얼핏 청아를 내놓으면 얼마나 영숙이가 즐거워할 것이냐 말야.』

『그것은 선생님이 바꾸어 생각을 하여 보셔요. 선생님도 그런 일을 당하시면, 아마 그대로 계시지를 않으실 터이지요.』

춘우는 속마음으로 얼마간 설성월의 말을 옳다고 생각한 점이 있었다.

『자, 술 한잔 먹지 않을 터이야.』

『술요? 선생님이 주시는 술이면 한잔만 먹지요.』

얼마간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설성월은 핏빛 같은 포도주를 따라서 한모금 마시고 입맛 을 다시려고 입술을 벌리었다가 다칠 때 옥 같은 이에는 선 지 같은 포도주가 묻었다 사라진다. 술기운이 어린 눈으로 설성월을 보는 춘우의 눈에는 옛적에 자기를 위하여 눈물을 흘려주던 설성월이의 고아(高雅)한 듯하고 순진한 듯한 그림 자는 어느덧 사라지고 깜직하고도 그 미력에 끌려 들어갈듯 한 빛이 보였다.

마치 여자마술사(女子魔術師)를 대한 듯이 뻔히 그런 줄 알 면서도 그리로 끌려가지 않을수 없게 되는 듯하였다.

설성월은 속눈썹이 긴 까만 눈동자를 수정 같이 번쩍이며 입을 꼭 다문채 한참이나 뚫어지게 춘우를 보더니,

『선생님! 선생님의 요구하시는 대로 제가 할것은 다 해드 렸으니까, 저의 요구도 선생님이 들어주셔야죠.』

하며 목마른 사람처럼 포도주를 마시었다.

『참 무슨 요구인데, 들을 만하면 들어주지.』

『들을만 하면 들어주셔요?』

『그래.』

『그러면, 들어주실만 하지 않으면 못 들어주시겠다는 말 이지요?』

『그것야 다시 말할 것도 없겠지.』

『첫째 선생님은 영숙씨를 단념하세요. 그러신다 하면, 또 제가 말씀할 것이 있으니까요.』

『그것은 지금 그렇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일이니까 천천 히 대답하지.』

『제가 이런 말씀을 하면 선생님이 저를 고약하고 또는 몰 인정한 사람이라 하실는지 모르겠지마는, 선생님을 위하여 저는 말씀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오늘 이 자리에서 단념 을 하시지 않는다 하면 도리어 선생님이 후회하시게 될 것 입니다. 영숙씨는 벌써 철수씨에게로 돌아간지 오래니까요.』

춘우의 마음은 에이는 듯이 아팠으나, 그러한 내색은 조금 도 밖으로 내보이지 아니하며,

『영숙이가 철수에게로 돌아갔거나 그것은 그 당자의 할 일이요, 내가 단념을 하거나 말거나 그것은 또 내가 할 일 이니까……』

설성월은 허리가 부러질 듯이 웃으면서,

『사내양반들은 저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야. 그래도 잊지를 못하셔서 입으로 말씀은 저렇게 하시지만, 속으로는 영숙씨나 철수씨를……』

『아니.』

춘우는 설성월의 말을 중단시키어,

『조금도 그 사람들을 원망을 하거나 또는 원수로 알지는 않아. 영숙에게나 철수에게 운명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있 으니까.』

춘우의 말에는 애조가 흘렀다.

설성월은 이 말을 듣더니, 반쯤은 그러하다고 춘우의 말을 긍정(肯定)하는 듯도 하고, 또 반쯤은 춘우의 가슴속을 들여 다보아, 그 괴로운 것을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고 감추려하 는 것을 비웃는 듯이 코웃음 비슷한 웃음을 웃다가,

『그럴가요? 그러는지도 모르지요.』

하며 춘우를 다시 뚫어지도록 들여다보더니,

『그런데요.』

하고 다시 말을 이으며 분결같은 손으로 타는 듯이 새빨간 능금을 들었다 나타났다 고양이가 방울 작난하듯하다가, 다 시 그것을 놓고

『선생님! 선생님이 옛날의 설성월이를 잊어버리신지가 오 래시지요?』

하며 의미가 깊은 눈초리로 본다. 춘우는 그의 표정으로서 성월의 맘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때의 춘우는 무엇이라 고 말할 수 없는 아픈 감정이 설성월의 말을 통하여 얼마간 녹아 버리는 듯함을 느끼었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아직까지도 옛날의 성월을 생각하 는 그 마음을 고대로 가지고 있는데.』

하는 말을 춘우는 자기가 자기의 입을 의심할 만큼 옛날의 순진한 마음이 없어진 것을 부끄러워 하였다.

『선생님도 거짓말을 하실 줄 아시게 되었습니다 그려.』

『내가 무슨 거짓말을 해.』

『정말로 저를 옛날과 똑같이 생각하여 주셔요?』

『그럼.』

『그럼요? 저도 그 동안에 선생님보다 더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런 까닭에 남이 거짓말하는 것인지 아 닌지를 잘 분간할 수가 있게 되었답니다.』

『그것야 그럴는지 모르지마는, 내가 거짓말한 증거가 무 엇야?』

『하하 증거요? 증거야 지금 당장의 선생님 가슴에 손을 대어 보십시오. 그 심장이 얼마나 높이 뛰나, 영숙씨 때문에 고민을 하신다는 것은 즉 저를 잊어버리셨다는 증거니까요.』

『그것이 어째서?』

『그래도 못 알아들으시겠어요? 영숙씨와 꿈 같은 사랑을 속살거리실 때나 선생님의 팔위에 영숙씨를 끼어 안으셨을 때 아마 설성월을 한번도 생각이나 해보신 때는 없으셨을 터이지요.』

춘우는 말이 없었다. 성월은 어느 틈에 춘우 곁 가까이 가 앉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춘우의 귀를 간지렀다. 그의 입 향 기가 춘우의 코에 미치었다. 검다못해 푸른 눈동자가 그의 마음을 모두 빨아들일 듯이 춘우의 얼굴 위에서 굴러다니는 듯 하였다. 그의 연지 바른 입이 가까이만가도 불같이 뜨거 워 춘우의 피를 태울듯하였다.

부드러운 손이 춘우의 다리 위에서 산 뱅어처럼 꼼지락거 릴 때 춘우는 무엇에 홀리는 줄 모르게 홀리었다. 춘우의 팔이 설성월의 허리를 감고 가슴과 가슴이 닿고 뺨과 뺨이 문질러졌다. 그러다가는, 입과 입이 다았다 떨어질 때 그들 은 서로 부끄러웠다. 이것이 설성월과 춘우에게는 처음 있 는 일이다. 옛날에 두 사람은 이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사랑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또는 반드시 유탕기분에 서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을 서로 경계하기는 두 사람이 똑 마찬가지지마는, 또는 정과 정을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옛날과 다른 것이 그들의 가슴을 둘 이 서로 헤치는 것이 너무 쉽고 또는 너무 빨라 어느 것이 진정인지 그것을 두 사람까지도 분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성월은 지금에 춘우의 약점을 안다. 춘우의 속이 몹시 원 망과 분노와 또는 비애로 찬 것을 안다. 더구나 세상에 혼 자 선것 같이 쓸쓸함을 안다. 이것을 속히 알아챈 성월은 춘우의 마음을 얼핏 사로잡기 쉬운 것을 안다.

『선생님! 제가 아까 단념하시란 말씀을 여쭌것이 몹시 잘 못된 말이지요?』

춘우는 다시 단정한 태도로 말을 끄내었다.

『천만에 그 말에도 일리가 있겠지.』

『글쎄요. 그렇지만 제 생각 같아서는 선생님이 영숙씨를 단념하지 않으시고 만일 고집을 세우신다 하시면, 네 사람 이 불행해 질터이고요. 그렇지 않으시면 한 사람이 불행해 지겠죠……아니 그렇지도 않죠. 도리어 다섯 사람이 행복스 러워질는지도 몰라요.』

『다섯 사람이라니? 또 한 사람은 누구야?』

『그것은 생각해 보셔요. 그런 사람이 저기 어디에서 선생 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터이니까요.』

춘우는 알아챘으나, 그를 일부러 모르는 체하였다.

『그렇게 모르신다 하면 차차 제가 아르켜 드릴 때가 있겠 지요.』

「인생은 영원한 단념이다」이 말이 새 말이 아니지마는, 춘우에게는 다시 진리를 말하는 것 같다.

『단념! 단념!』

단념이라는 것은 하려다가 할 수 없으니까, 고만 두고 내 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목숨을 단념한다고는 할지라도, 이것을 단념 할 수가 있을까?』

춘우는 그대로 그 자리에 엎드리어 울었다.

『안돼! 안돼! 영원히 단념은 못할 것이다.』

춘우는 고개를 비벼가며 울었다.

『내가 한 사람이 행복스럽기 위하여 세상 사람이 다 죽는 다 하더라도 나는 단념을 할 수 없다.』

『아 안돼! 누가 어떠한 말을 하든지 나는 영숙을 놓을 수 는 없다.』

하며 춘우는 다시 일어서서

『성월! 너와 나와는 다시 만나지 말자. 오늘 내가 네게 한 것도 내가 영숙에게 대하여서는 일종의 부정(不貞)이다. 죄 악이다. 자 얼핏 헤어지자.』

춘우는 시뻘겋게 피가 오른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는 설성 월을 돌아다보며,

『잘 가거라. 서로 깨끗하게 잊어버리자. 다소 만나지 말자.』

하고 나오려하매 설성월은 생긋 웃으며, 춘우의 소매를 잡 고 귀에다 입을 대고 나지막한 소리로

『그렇지만 내일 이맘때가 되기 전에 만나뵙게 되겠지요.』

하고는 자기도 나왔다. 설성월이 춘우를 보내고 막 돌아서 려할 제, 뒤에서 탁 달려드는 사람하나가

『재미가 좋구려. 두분이.』

놀려먹는 어조로 말을 하는 사람은 철수였다. 설성월은 무 슨 원수나 만난 듯이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앗 언제 오셨어요?』

하고 달려들려하며,

『나 온 것은 알아 무엇하료?』

하고 역시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춘우는 혼자 경성 시가를 헤메였다. 꿈 같은 생각이 가슴 을 눌러서 느긋한 감정이 안개같이 전신을 싸고 돌뿐이다.

달아나는 어머니의 차맛자락에 매달렸다가, 뿌리침을 당한 것 같이 그는 적적함과 무서움과 외로움이 있었다. 벌써 서 로 갖다가 붙이려하나, 붙일수 없이 깨어진 것 같이 영숙과 자기 사이에는 파탄(破綻)이 생긴것을 알 때에 그는 광야에 홀로 선것 같았다.

그에게 다시 불행과 불운이 닥쳐 올 것을 깨달을 때 그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에서 끓어 올라와서 눈물이 뜨겁 게 두 눈에서 솟을뿐이다. 그는 정처 없이 돌아다니었다. 가 는 곳 오는 곳마다 영숙과 자기의 옛날 사랑을 이야기하는 기억의 흔적이 아닌 곳이 없으며 행복의 기념이 아닌 것이 없었다. 옛날에 길거리를 거닐 때에는 반드시 영숙이 자기 옆에 있어 희망과 즐거움이 가득 찬 얼굴로 서로 쳐다보았 으나 오늘의 자기는 혼자 넓은 길거리를 외롭게 걸어간다.

그는 나침반(羅針盤)을 꺾어뜨린 배 모양으로 지향없이 이 리저리 돌아다닐 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옛날의 어머니가 자기를 강보에 싸서 들고 푸지한 것을 두발로 장단맞춰 밟 으시며,

『자장 자장.』

하시던 어머니가 보이더니, 또 다시 자기의 손목에 이끌리 어 길가를 헤매이는 인우가 보인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자 기와 자기 동생의 우애는 그것으로 인하여 더욱 깊었으며 아내를 잃어버린 아버지는 그것으로 인하여 지금의 타락을 깊은 구렁에서 신음하는 것이다.

『만일 어머니가 계셨드면?』

이러한 소리로 부르짖은 것이 하루에도 몇 번인지 알지 못 하였었으나, 오늘 같이 어머니 없는 서름을 느끼어 본적이 드물었다.

모든 불행의 원인(遠因)을 찾아 올라가서 그것이 귀착되는 곳은 어머니 없는 그곳이다. 춘우는 불현듯이 인우가 보고 싶었다. 혼자 남아 있는 인우를 생각할 때 내버리고 온 자 기가 너무 무정한 듯하였다. 데려오려하나 주지 않는 아버 지의 심사도 책망할 수도 없거니와, 혼자 내버려둔 자기가 부끄러울 만큼 죄악같았다.

『그렇다. 오래간만에 인우나 만나보자.』

그는 과자가게에 가서 과자를 샀다. 그리고 다시 서대문을 향하여 갔다.

『아버지가 보시면 꾸중을 하시겠지 문에서 내쫓으시겠지.』

『그렇지만 간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간다. 탕자가 돌아 오는 것을 맞는 부자집 아버지 같이 너를 맞아주지는 않을 지라도, 나는 인우를 위하여 가볼 것이다.』

춘우가 집에 들어설 때에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반가웠다.

마당에서 마루 끝으로 올라설 때에는 아버지가 마루까지 뛰 어나왔다. 인우가 지다가 울면서 반가워 벗은 채 뛰어나왔다.

『춘우냐?』

『언니!』

『예. 오냐.』

단 네마디가 세 사람을 울릴만큼 감격이 있었다.

춘우의 아버지의 입끝과 코가 씰룩씰룩하고 떨리도록 감격 이 복바쳐서 말을 못하고 그저 울 듯 웃을까 하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니? 너도 집엥올 날이 있구나.』

『언니 인제 가지 않소?』

인우는 과자를 먹으며 춘우를 어머니 어루만지듯 어디를 어루만져야 좋을지 몰라서 팔다리를 더듬기도 하고, 고개를 대고 비벼보기도 하면서 좋아하였다.

『그래 그래.』

춘우는 무엇이라 대답 할지 몰라서, 그저 그래 그래 할 뿐 이었다.

『인제 언니가 왔으니까, 나는 퍽 좋아, 당최 가지 말우, 나는 퍽 보고 싶었어.』

『그 동안에 창가 많이 했니?』

『창가? 누구허고 해? 같이할 사람이 있어야지. 언니가 간 뒤에는 같이할 사람이 없어 못했어.』

인우는 몹시 수척하여졌다. 보지 않았드면 좋으리 만큼 여 위고 못되었다. 그것도 춘우에게 어머니 없는 탓으로 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언니!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나허구 갑시다.』

그는 애원하듯이 춘우의 팔에 실리며 말을 하였다.

『같이 가지. 어디든지 데려다주지.』

춘우는 울고 싶기만한 감정으로 그 말을 하였다. 인우는 춘우를 보더니, 꺼칠꺼칠한 수염을 만져 보면서,

『이게 뭐요. 수염 좀 깎구. 전에는 아주 예쁘더니, 흉해.』

춘우도 아는 바지만, 인우도 자기의 얼굴이 못된 것을 알 아주고 동정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언지!』

『응!』

인우는 무슨 말을 할 듯 하더니, 아버지의 눈치를 살핀다.

『왜 그래. 말을 해라.』

아까까지는 절대의 권위자는 아버지였으나, 지금은 자기의 후원자를 얻은 인우는

『저.』

하고 다시 입을 답치면서

『아버지께 또 꾸중들게.』

아버지는 눈을 흘겨보며 자기의 죄악을 폭로시키려는 인우 를 무섭게 흘겨본다.

『말해라. 내가 들어보아서 꾸중 안 듣게 해주께.』

춘우는 인우를 끼어안고 타일렀다. 인우는 그때 말 아니할 수 없는 듯이

『언니가 지난번 겨울에 날더러 꽃이 피면 어머니가 오신 다 하더니, 어디 어머니가 오시우? 벌써 꽃이 다 떨어졌는데』

춘우는 인우를 끼어안고 그대로 울고 싶었다. 자기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인우의 어린 가슴을 태우게 하였는가?

『어머니 그렇게 보고 싶으냐?』

『보고 싶고 말고, 나는 어머니가 얼핏 와서 다른 애들처 럼 귀애해주었으면 좋겠어.』

『인제 네가 나만해지면 오시지.』

『또 더 있어야 해?』

『그래.』

二○

[편집]

춘우는 그날 저녁을 인우에게 끌려 자기 본집에서 잤다.

어제 저녁에 어린 인우가 자기에게 한 말이 뼈 속에 사무칠 듯하여 잊을 수가 없었다.

어린 동생이 그렇게 어머니가 보고 싶어할 것은 춘우가 생 각지 못한 바가 아니지마는, 진정으로 이렇게 피속에까지 그것을 느끼어 보기는 드물었다.

지금에 자기가 실연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어떠한 운명의 번롱을 받아서 그렇게 사랑하던 영숙과 서로 떨어지지 않으 면 안되리라는 가슴 아픈 사실을 앞에다 두고, 또는 어린 인우의 불쌍한 꼴을 볼 때 그는 어찌 가슴 속에서 물 끓듯 용솟음치는 느낌과 깨달음이 없었으랴.

춘우는 직감적으로 어머니가 어떠한 것을 알았으며 다시 생각할 여지가 없이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웠다.

춘우는 어린 인우를 그대로 남겨 두고서 나올 수가 없었다.

『언니 나허구 가.』

하고 옷고름을 입에다 물고 눈물 망울이 어린 눈으로 자기 를 치어다볼 때, 그는 어린 인우의 따르는 마음을 이끌어다 가 자기를 반성하여 보았다.

『네가 그렇게 무정한 사람도 아닌데.』

할 적에는 모든 원망과 저주의 마음이 가슴 한복판에 모여 들며 하늘을 우러러 실컷 울고 싶은 것외에는 아무것도 없 었다.

춘우는 거기에서 바로 자기의 회사로 갔다.

가는 길에서도, 앉아서도, 서서도, 무엇을 먹으면서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은 오늘 아침에 인우가 밥을 먹으면서 자기를 향하여

『언니, 어머니가 오시지를 못하시거든, 나를 데려가라고 해주지를 못하겠오?』

하는 말이다.

아아, 데려를 가달라는 곳이 어린 인우는 어느 곳이며 어 떠한 곳인지 모르고 하는 말일가, 거기에는 무슨 암사가 있는 듯하였다. 어머니만 올수 있으 면 어디든지 간다. 그곳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곳일지라도.

그는 인우의 경우를 다시 청아와 영숙에게 갖다 대보았다.

옛날에 어머가 자기와 자기 동생에게 하시던 것을 생각하여 보고 영숙이 청아에게 할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자기 어머 니는 자기에게 한것이 반드시 그렇게해야 할 일이 되어서 그렇게한 일도 아니겠고, 자기가 어머니에게 사랑을 반드시 받을 만한 무엇이 있어서 받은 것도 아니다. 절대의 모성의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 영겁으로부터 영겁에 그것이 흘 러내려가는 것이니, 그것은 이해관계나 채권과 채무가 있어 따질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와 자기 어머니와 사랑을 만일 여기에 누가 있어서 저 해하였다 하면, 아니라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이 그것을 벌 써 저해하여 지금 자기와 인우를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었으 며 자기는 하늘과 운명을 저주하는 것이다. 만일 단념하지 않으랴 아니할 수 없는 목숨이 자기의 행복을 저해하지 아 니하고, 그 다른 것이 있어서 저해하였다 하면, 얼마나 자기 는 그것을 미워하고 원수로 알았으랴? 이것을 보면 영숙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또한 영숙을 사랑은 하지마는 청아야 또한 어떠하랴. 자기 어머니를 빼앗은 나를 얼마나 원망하 고 저주하랴.

『만일 어제 설성월의 한 말이 정말이라고 하면? 영숙이가 참으로 철수에게로 돌아갔다 하면 그의 마음이 아니요 몸일 것이며, 이성(異性)의 사랑이 아니라, 모성(母性)의 사랑일 것일가?』

『그러나, 그것을 누가 믿으랴? 내버림을 받은 나는 언제 든지 내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것이 다만 육체상뿐이 라고 하드라도.』

『그러하면, 지금에 영숙이 그렇게까지 다시 철수에게로 돌아가기를 승낙하였다 하면 어찌하여 나에게 그와 같은 말 을 하고 용기있고 또는 말쩡하게 얼핏 자기를 아니하고 미 지근하고 해명무실하게 질질 끌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 며, 또는 그런 기색을 알리지 아니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일 까?』

『만일 그래도 사랑이 나에게 남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 나머지 사랑을 쓸어가지고 가는 것이 옳으며, 그렇지 않고 나에게 사랑의 전부가 그대로 조금도 이지러진 곳이 없이 남았다 하면, 그 때에는 다시 나에게 오는 것이 옳을 것이 어늘, 벌써 가기를 승낙한 그로서 그것을 결단하지 못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이 모든 생각을 하여가면서, 춘우는 잡았던 붓을 책상 위 에다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는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오정 친 때 일을 고만두고 회사 문밖으로 나왔다.

전 같으면 으레이 발길이 자기 집으로 향하였을 터이지마 는, 오늘에는 발길이 그리로 돌아서지를 아니한다. 어제 저 녁에 설성월이 앞에서 큰 소리로 하던 것이 오늘에는 어느 덧 풀어져 버리고 힘이 죽었다.

그저께는 사랑의 셈을 따지려고 자기 집으로 가는 길에 친 구에게 끌려 술 먹으로 갔다가 설성월을 만나 그것을 중지 하였고, 어저께는 어린 인우를 만나느라고 그것을 고만두었 더니 오늘은 춘우 가슴에 이상한 감개가 있어서 또 허락하 지 않게 되는 모양이다.

춘우는 나오기는 나왔으나, 발 내놓을 곳이 없었다. 그는 길거리에 한참 서서 어디로 가야 좋을까, 그것을 생각할 때, 자기가 비로소 넓으나 넓은 세상에 몸 하나를 붙일 곳이 없 이 외롭게 된것을 느끼었다.

춘우의 발길은 다시 창하의 집으로 돌려졌다.

자기가 자기 혼자 해결하지 못할 이 일을 같이 의논할 사 람이라고는 창하밖에 없다.

창하는 마침 문밖으로 나오다가 춘우를 보고서,

『이게 웬일인가? 오늘이 일요일도 아닌데.』

하며 이상스럽게 본다.

『오늘은 몸이 좀 아파서 일찍 나왔네.』

『어디가 그렇게 아프단 말인가. 또 어제 저녁에 너무 먹 은게지?』

『아냐, 먹지도 않았어. 대관절 어디로 가는 길인가?』

『별로이 정한 곳은 없네.』

『그러면, 내가 의논할 일이 있어 왔는데.』

『무슨 일?』

창하는 돈이나 꿔달라는 줄 알고, 속으로 변통할 궁리부터 하였다.

춘우는 잠깐 아무 말이 없다가,

『어쨌든 천천히 걸어가며 말하지.』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걸어온다.

『그런데, 여보게 그저께 명월관지점에서 설성월이를 만나 지 않았겠나?』

『성월이?』

하고 창하는 눈을 크게 뜬다.

『그래?』

『무엇이 그래야. 만났다니까.』

『퍽 컸지?』

『크기도 퍽 컸거니와, 사람도 아주 변했데. 인제는 아주 기생야.』

『그럴테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지 않은가.』

『무엇이?』

『그 애가 나와 영숙과의 일을 여간 소상히 알지를 않데 그려.』

『어떻게? 아마 조사를 해본게지.』

『조사가 다 무엇이야. 철수가 그 집에를 다니데 그려.』

『무어야?』

하고 창하는 춘우의 얼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그래 아마 내 이야기와 자기 사이를 모조리 말한 모양이야.』

『그러고, 어저께는 내가 성월이에게 여간 훈계를 받지 않 았네.』

『무엇이라구?』

『날더러 영숙을 단념하고 저하고 지내잔 그 말야.』

『빌어먹을년, 기껏 그런 소리밖에 모른담. 어쨌든 자네는 팔자 좋아.』

『무슨 팔자가 좋아? 여보게, 말 말게, 팔자 좋은 사람이 계집에게 내버림을 당해.』

『누가?』

『누구 누구야, 영숙의 일 말이지.』

창하도 거기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여보게 내 생각 같아서도 영숙이와는 암만해도 손을 끊는 것이 옳을 것 같으이.』

춘우는 조금 침울한 빛으로 말을 하였다. 창하는 다만 앞 만 내다보며 걸어가면서,

『글세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하고 확실한 대답은 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영숙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것도 아냐. 그렇지만 그에게는 청아가 있으니까.』

『청아가 있으니까, 어떻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내가 인정이 없는것 같네.』

『무슨 인정이 없단 말인가. 영숙이 청아를 떼치지 못해서 그러하는 것은 혹 어머니된 도리에 그러할는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생각을 해보게. 맨 처음에 자네를 따라올적에는 청아를 그렇게 내버리고 와서는 천년 만년같이 살자 하던 여자가 갑작스럽게 자식 생각을 한단 말인가. 여자라는 그 래서 사귀기가 어렵다는 것이야. 처음에는 여러가지 밖의 유혹과 또 자기 유혹 즉 자기가 공상도 하여보고 희망도 하 여보아 자연히 거기에 끌려 넘어가는 그러한 유혹에 빠져서 자네하면 자네에게 왔다가 그것이 싫증이 나고 또는 부족하 여 다시 가는 것이지.』

『그러면, 어떤 다른 남자를 따라간다는 것은 모르지마는, 왜 전엔 싫다고 내던진 사람에게로 가느냐 말야.』

『압다, 딱두하지. 생각을 좀 해보게. 자네는 돈이 없지 않 은가. 자네허구 살려면 자연히 고생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지 않겠나. 그러니까, 당장에 딴 남자 구하려 할수 없고 또 구한다 하드라도 그만큼 돈 있는 사람이 없을 듯하니까, 사람은 조금 부족하드라도 청아를 핑계삼고 다시 돌아가는 것이지. 저도 그만하면, 철이 날 때가 되었으니까, 그럴 것 아닌가. 인제는 그저 덮어놓고 사랑 사랑 할 때 가 아니거든.』

춘우는 창하의 말이 옳다고는 하면서도 듣기에 좋지는 아 니하였다.

『그러면, 왜 얼핏 가지를 아니하고 그러고 있어.』

『그것은 또 이유가 있지. 만일 제가 그대로 단결에 획 뿌 리치고 가보세. 세상에서 누구를 욕하겠나. 그러니까, 자연 히 정의가 버스러지거든, 그 책임을 자네에게 둘러싸고, 자 기는 곱다랗게 빠져가잔 그 말이거든. 그래서 철수에게 몰 래 다니며 내용은 다해놓고, 자네가 물러서기를 기다리는 것이란 그 말야. 내 말이 옳으니. 그래 애당초에도 내가 자 네더러 그러지 않았나. 옛날에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예수 를 세 번 속인 것처럼 자네도 나를 속인다고.』

춘우는 처음 창하를 찾아올 때 그래도 속으로는 창하가 자 기와 영숙을 다시 얽어매는 무슨 좋은 방법을 가르쳐주기를 바랐더니, 지금 너무 냉연한 태도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 고서 속으로 섭섭한 마음까지 났으나, 또한 그 말이 그럴듯 도하여 춘우의 마음은 동요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사람이 그럴수야 있나. 영숙이가 어데로 보는 지 그런 사람은 아니든데.』

『자네 눈에야 왜 아니 그렇게 보이겠나? 미운데도 예뻐보 일터이지. 그렇지만 내 눈으로 본다든지 내 생각 같아서는 그리 영숙의 일을 찬성은 할 수가 없네.』

춘우는 몹시 창하가 야속한 것 같았다. 어떤 때에는 이 사 람이 무슨 혐의로 자기와 영숙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렇게까지 친구를 의심하는 마음이 나기까지 하였었으나, 춘우는 그것을 얼핏 제어하고 아무리기로, 창하가 내게 그 렇게까지 할 리가 있을리는 없지 하고, 얼른 마음을 돌려먹 었다.

그러면, 내가 영숙을 아주 단념해버리는 것이 옳을가. 만일 그랬다가 도리어 두 사람에게 더 큰 불행이 돌아온다 하면 어찌할가. 춘우는 여러가지로 걱정을 하며 마음의 결정을하 지 못하는중, 어느덧 종로에 두 사람은 왔다.

네거리에서 두 사람은 사면을 훑어보며,

『어디로 갈가?』

하고 서로 얼굴만 치어다본다.

『글세.』

춘우는 도리어 창하ㅣ 얼굴을 치어다 보았다.

『저 성월의 집에 가보세, 어딘가.』

춘우는 창하의 입에서 이 말이 떨어질 때, 그는 번개와 같 이 어제 저녁에 자기가 한 말이 생각되며, 또 성월이가 자 기에게 웃으며 하는 말이 『내일 이맘때가 되기 전에 만나 뵈옵지요.』하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어저께 주먹을 쥘 때의 춘우만큼 힘이 스러진 지금의 춘우는 성월에게 마음이 끌리어 가는 줄 모르게 끌려가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난다.

『성월의 집?』

『그래.』

『거기는 무엇하러 가나?』

『오래간만에 만나보니 말야.』

『나는 가기가 거북한걸.』

『왜?』

『어제 저녁에 술이 취하여 다시는 만나보지 말라고 그랬어.』

『하하, 그것은 취담으로 알겠지. 어서 가보세.』

창하는 춘우의 소매를 끌어잡아다닌다.

『나는 집만 가르쳐주겠네.』

춘우는 마지못해 끌려가는 듯이 따라갔다.

『압다, 공연히 그러네 그려. 가고싶거든 국으로 가지 잔말 이 무슨 잔말야.』

『정말야, 들어가지는 싫어.』

『염려 말게. 내가 끌고 왔다고 해줄터이니.』

춘우는 고개를 쳐들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두 사람이 설성월의 집에 들어서서 성월을 찾았을 때는 마 침 목욕을 하러 갔으므로, 만나지를 못하였다. 춘우는 가슴 을 내려앉히고 적이 홀연하였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뭇내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어떻게할가? 갈 곳이 있어야지.』

『글세 화나는데 술이나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술? 술 먹기야 쉽지. 어디 가서든지 한잔 해볼가?』

『하지만, 너무 일러서……』

『일르면 어떤가, 아늑한 곳에 가서 먹세 그려.』

두 사람은 다시 아늑한 곳을 찾아서, 문밖으로 나왔다. 절 에서 술을 시켜서 먹을 때 춘우는 옛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올라서 실없이 처량한 생각이 난다.

『여보게.』

춘우는 창하를 술이 취하여 거슴츠레한 눈으로 보면서 애 조가 깃든 목소리로

『나는 자네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믿지않나? 그렇지만, 오 늘 자네가 내게 한 말은 아무리 하여도 믿을 수가 없네 그 려. 자네가 오늘 이 자리에서 내 말 하나만 들어주겠나?』

『무슨 말을.』

『나는 영숙의 일을 아주 못 믿을 수도 또 아주 믿을 수도 없네. 그러니까, 나는 이것이 죄악일는지는 모르되, 영숙의 마음을 한번 시험해 볼 터이야.』

『어떻게 시험을 한단 말인가?』

『그것은 내가 성월에게 사랑을 옮긴 것처럼 하여보이겠 네. 그래서, 자기가 나를 성월의 말과 같이 참으로 사랑을 하여 그런 말을 하였다. 하면 내가 행복자인지 모르지마는, 그렇지 않고 자네 말과 같다 하면, 나는 그대로 있을 수가 없네. 또 영숙이가 참으로 청아를 위하여 부득이 나를 떠나 간다 하면, 나는 나를 희생하는 수밖에 없어. 그 점에 들어 서는 나는 절대로 양보할터일세. 나는 그 자식을 위하여 자 기의 애인에게 대한 사랑을 희생하는 그 고상한 생각과 또 는 성자(聖者)의 난행(難行)같은 행동을 저해하려하지 아니 하네. 거기에 얼마나 고통과 번민이 있는지 그것은 나의 몇 백배일터이지.』

창하는 억지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그는 거기에 어디까지든지 후원을 하여보마 하였다. 뜨거운 손을 서로잡고 맹서하였다.

『자네의 일이면 어디까지든지 힘써보지.』

시험을 할만큼 춘우가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영숙 에게 더 할수 없는 사랑을 받고, 또는 더 할수 없는 사랑을 영숙에게 줄 때에는 다른데 마음이 끌릴때가 없었으나, 자 기의 가슴이 지금 공허(空虛)함을 느낄때에 그는 어디로든지 잡아다니는데가 있으며, 그리로 기울어지기가 쉽다. 아무리 분별이 있고 이지(理智)에 강하다하드라도, 춘우의 온 몸에 는 뜨거운 피가 흐른다. 자기가 자기를 믿을 수 없는 청춘 이다.

그날 저녁부터 춘우는 집에 들어가는 것을 고만두었다. 그 리고, 설성월에게 가서 날마다 파묻혀 있다시피 하였다. 여 기에서 독자의 의혹을 풀기 위하여 한마디 말하여 둘 것은 춘우가 설성월의 집에 다닐 때에 반쯤은 마음이 끌리어 애 인처럼 대접하고, 반쯤은 순전히 기생처럼 대하였다고 하여 둔다. 설성월도 역시 춘우를 미덥고 그리우나 그 반면에는 어디까지든지 기생으로서 기생노릇을 한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하여둔다.

사흘이 지내었다. 영숙은 홀로 사흘 밤을 자고 나서 창하 를 찾아왔다.

『창하씨! 어떻게 해서든지 춘우씨를 집으로 돌아오도록 권고를 해주시지 못할가요?』

하고 울면서 청을 하였다.

『내가 친구를 위하여 애는 써보죠. 그러니 책임은 질 수 가 없어요.』

하며 냉정하고도 원망하는 어조로 간단히 대답을 할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한번 만나보게만 하여주셔요.』

하는 영숙의 마음에는 몹시 후회하는 정이 생기었다.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때, 살필 결코 춘우를 내버리려 한 것은 아니요, 지금 어찌할지 몰라서 가로에서 헤매일때, 춘 우가 저렇게 타락하여 가는 것을 보고 그대로 참을수는 없 다는 의협심이 불덩이 같이 솟아올랐다.

『예! 어떻든지 한번만 만나보게만 해주실수 없을가요. 영 숙이 함께 것을 회개하고 옛날과 같이 기다린다고 좀 데려 다주셔요. 제가 춘우씨를 만나뵈옵고 모든 것을 자백하겠다 고 말씀을 하시고, 집으로 데려다 주셔요.』

졸르는 말에 창하는 어디까지 엄연한 태도로

『영숙씨가 철수의 집에 발을 들여놓지를 않는다면, 언제 든지 돌아가마고 말을 하였읍니다.』

영숙의 가슴에는 가시를 박는 것 같이 찔리는 말이다.

『누가 그런 말을 춘우씨에게다가 했어요. 제가 애아버지 에게 다닌다는 말을 누가 했어요.』『누가 한 것은 아실 것 이 없겠지요. 지금 세상에서는 춘우더러 실연자라고 하니까요.』

『실연자요?』

『예, 실연자요. 영숙씨가 춘우를 내버렸지요.』

영숙은 무서웠다. 세상이 무서운 것을 비로소 알았다. 자기 의 마음은 알지도 못하고 춘우를 실연자를 만들어준 것은 무서운 세상이다.

『그럴 리가 없지요. 저는 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이 춘우 씨를 사랑합니다. 결코 변할리 없어요.』

창하의 귀에는 그 소리가 가증하게 들릴뿐이다.

『그러면, 그 증거를 분명하게 보이지를 않으시고, 세상의 의심을 살만한 행동을 하시나요? 이런 말을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마는, 친구의 부인이라는 것을 떠나서 나의 친구나 또는 누님이라는 생각으로 충고를 하는 것이니까, 어떻게 알아주지는 마셔요.』

『예, 저 역시 언제든지 오라버니와 같이 믿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창하씨의 말씀을 들어 왔어요. 또는 저를 위하여 귀찮게 군때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세상에서 그렇게 떠든 다는 것은 오해겠죠. 어쨌든지 춘우씨를 만나지 않고서는 말씀하지 않으려고 해요.』

『춘우를 만일 영숙씨가 만나겠다고 하면, 춘우는 도리어 만나지 않으려고 애를 쓸터이지요. 춘우의 마음은 아직까지 도 영숙씨를 잊지 못하니까요. 그 사람이 지금 세상에서 말 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쉽게 타락할 사람이 아닌 것은 내가 보증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일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억지로 영숙씨를 단념하려고 애쓰는 춘우겠지요. 그러고 정 을 딴데로 옮기어 자기의 괴로움을 잊어버리려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너무 나를 믿어주지 않는 까닭이 아닐가요?』

『아니지요. 춘우는 너무 영숙씨를 믿었지요. 너무 믿었던 까닭에 오늘에 이일이 생긴 것이지요.』

『그렇다고 하면, 춘우씨를 절대로 다시 돌아오게 하지 못 할가요.』

『그것은 영숙씨가 하시기에 있지요.』

『어떻게요?』

『어떻게요? 그것은 영숙씨가 지금이라도 그 동안에 하신 것을 분명하게 춘우에게 말씀을 하시고, 춘우에게 사죄하셔 야죠.』

『사죄요?』

영숙은 속으로 기가 막혔다. 사죄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사죄할 만큼 내가 춘우에게 부족히 한 것이 무엇이냐. 한옆 으로 분한 생각까지 나서, 그대로 일어서 나오고 싶은 생각 까지 났으나, 그는 아서라 하고 마음을 돌려먹었다.

『사죄하죠.』

목소리를 덜렸다.

『춘우씨를 다시 돌아오시게만 하면 무슨 짓이든지 하겠습 니다. 그러니, 어떻든 만나 뵈옵게 말하여 주셔요.』

『그러면, 내가 권고를 하여보겠습니다. 그러면 댁에 가서 기다리십시오.』

『아뇨, 여기서 기다리지요. 다녀오셔요.』

창하는 춘우에게 이 말을 전하여주려고 설성월의 집으로 갔다.

춘우는 술이 몹시 취하여 설성월의 방에 누워서 잠이 들었 었다. 설성월은 마루에 나와서 하인을 데리고 무슨 일인지 하고 있었다.

창하는 누워자는 춘우를 흔들었다.

『왜 이래 잠도 못 자게.』

『나야 날세. 웬 잠을 이렇게 자나?』

『귀찮아.』

춘우는 손으로 창하를 후려친다.

『내 말 좀 듣게.』

『허 저리 가.』

『이게 웬 술을 이렇게 먹었누.』

설성월도 들어와서 흔든다.

『여보셔요. 선생님. 박선생님 오셨어요.』

『무엇야. 창하가 왔어.』

이제야 조금 정신이 든 모양이다.

『어디.』

하고 고개를 쳐들어보더니, 다시 누우며,

『웬일인가, 식전참에.』

하며 다시 씩씩하고 자려한다.

『고만 좀 일어나세 내 말을 좀 듣게.』

『무슨 말.』

『글세 일어나.』

설성월도 빽 지르는 목소리로

『글세 일어나셔요. 박선생님이 하실 말이 있다고 하시니.』

『할 말이 있거든 해. 내 귀로 들을터이니.』

『그런게 아니라 여보게.』

창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영숙이가 오늘 집에 왔어.』

춘우는 숨소리를 죽이고 가만이 들으며

『왜?』

『왜가 무엇야. 자네가 사흘이나 안 들어온다고 날더러 데 려다달라고.』

『나는 데려다 무엇을 해?』

『누가 아나. 울며불며 모든 것을 잘못하였다고, 자네만 만 나면 사죄를 하겠다고 하네.』

『사죄? 흥 무슨 사죄야. 제가 내게 잘못한 것이 있나? 사 죄를 받을 아무것도 나는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모두 자기가 잘못하였으니, 지난 일은 모두 용서 하고 돌아와 달라고 하데.』

설성월은 춘우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과 또는 그 행동이며 표정만 살피고 있다.

『가거든 이렇게 말이나 하여주게. 영숙과 나와는 다시 만 날 기회가 영원히 없으리라고. 그러고 철수에게로 돌아가서 행복스럽게 살기만 하면 나는 더 만족한 것이 없다고. 그러 고 춘우라는 사람은 일평생 죽을 때까지 영숙을 잊지 않겠 다는 말을 하더라고 하여주게.』

춘우는 눈을 감고 군소리하듯이 말을 하였다.

『그러나, 꼭 한번만 만나면 모든 자세한 말을 하겠다고 하니, 가보는 것도 좋지 아니한가?』

『안 될 말.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춘우는 아직 세상에 나 지를 않았다고 말하여 주게. 그동안 내게 하여준 고마운 마 음은 진정으로 감사를 한다고 그러고, 옛날과는 아주 다른 춘우가 지금 영숙을 만날 필요는 없다구 그래.』

하며 성월의 손을 잡으며,

『내게는 설성월이라는 애인이 있다고 하여주게. 나의 마 음은 시냇물 같이 설성월에게 홀렸다고 하여주게.』

하고 한참 말이 없다가,

『흥, 그러나 성월에게도 충고다. 어느 날 어느 때에 나의 마음이 다시 또 다른 곳으로 흐를는지 나도 알지 못하니까 성월 너도 아주 믿지는 말라는 말야.』

성월은 다만 코웃음 비슷한 웃음을 띠웠다.

창하는 더 권해야 쓸데없는 것을 알아채었다. 그래서 그 대답을 하여 주려고 자기 집에 있는 영숙에게로 가고, 춘우 는 다시 잠이 들었다.

창하가 간지 두서너 시간이 지나서 어떠한 사람 하나가 설 성월의 집으로 춘우를 찾아왔다. 그는 얼핏 보기에 시골 농 촌에서 농사를 하는 사람 같은데, 와서 춘우를 찾았다.

『여기 이춘우씨라고 계시죠?』

『어데서 오셨어요?』

설성월은 의아해서 주저주저하며 시원히 대답을 하지않았다.

『저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어디서요?』

『그 어른 부인에게서요.』

『부인?』

하며 편지를 달래서 앞뒤를 뒤적거려보다가.

『예.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안 계신데요.』

『언제나 오시나요.』

『있다 저녁때쯤 오시겠죠.』

『그럼, 그 편지를 두었다가 드려주십시오.』

『그렇게 하셔요.』

설성월은 그 편지를 받아 들고 몹시 마음이 좋지 못했다.

일변 질투의 마음이 생기며 그 편지를 당장에 찢어버리고도 싶었다.

그러나, 다시 편지를 들여다보다가,

『이 속에 무엇이라고 씌어있누.』

뜯어서 먼첨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며 편지 든 손이 떨린다.

『아니다. 남의 편지를 뜯어보아서는 안된다는데.』

하다가도, 누가 들어오는 기색만 있으면 얼핏 그것을 감추 었다.

물김에 봉한 것을 눅이어 떼어보려고 하기도 몇 번인지 몰 랐으나, 그래도 참아 그것을 그렇게 하지는 못하였다.

그날 저녁에 설성월이 놀이에 다녀와 두시 가량해서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 보니까, 춘우가 와서 자리를 깔고 혼곤이 잠이 들 어 잔다. 옷을 갈랑 입은 설성월은 춘우를 깨웠다.

흔들어 깨는바람에 춘우는 눈을 뜨고 치어다보더니,

『어느 틈에 왔어?』

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성월의 허리를 끼어 안으려 하니까, 성월은

『왜 이러셔요. 가만이 계셔요.』

하고 팔을 떠밀치며,

『오늘 나으리께 반가운 것을 하나 드리려고 하는데, 그것 이 무엇인지 알아 마치시면 용치.』

『무슨 반가운 것을?』

『글쎄 무엇이든지 알마 마쳐보셔요.』

『무엇을 알아마쳐. 아닌밤중에 홍두깨도 분수가 있지.』

『그러면, 그것을 드릴 텐데요. 내 청하나를 들어주실 터입 니까?』

『또 무슨 청야.』

『글쎄 들어주실테얘요?』

『청야 벌써 들어주지 않았나.』

『아니 난 싫어. 그런 소리만……』

『그럼 또 무슨 청야, 말을 해.』

『싫거든 고만두시구려. 나도 드릴 것을 드리지 않으면 고 만이지.』

『대관절 준다는 건 무엇야?』

『무엇이 무엇얘요. 당신 애인에게서 온 것이지.』

『내 애인이 또 누구람, 생트집을 잡아도 분수가 있지.』

하고 말도 하기 싫다는 듯이 돌아들어 눕는다.

『그렇게도 보기 싫으셔요? 보기 싫으시기도 하겠지. 누구 시라구, 척척 편지를 보내는 여자가 있으니까. 장하시우.』

『편지가 또 무슨 편지야. 그거 사람 미치겠네.』

『고만 두셔요.』

『무얼 고만두어?』

『성월쯤야 어디 선생님같으신 이가 눈이나 떠보실테얘요.』

『농담도 오래하면 재미 없어. 잠이나 자.』

하고 이불을 뒤집어 쓴다 설성월은 혼자 떠들다가, 춘우가 대꾸를 해주지 아니하니 까 싱거워서 설합 속에 편지를 꺼내서 머리맡에다 내던지며,

『자, 이것 좀 보셔요.』

하였다. 춘우는 무엇인가 하고 그것을 집으려하니까, 설성 원은 그것을 재빨리 다시 집으면서,

『혼자는 못 보실걸.』

하고 주지를 않는다.

『어디서 온것야. 피봉이나 잠깐 봐.』

『자요.』

하고 멀찌거니 들고서 피봉만 보인다.

춘우는 그것을 보더니, 와락 달려들어 빼앗으려하며,

『그것이 언제 왔어.』

하니까, 설성월은 다시 손에다가 움켜쥐고

『왜 이러셔요. 그렇게 쉽게요. 한번 내 손에 들어온 것인데.』

춘우와 설성월은 편지 하나를 중심으로 씨름이 시작되었다.

춘우는 빼앗으려고, 설성월은 아니 빼앗기려고, 서로 끼고 서 온 방안을 뒹굴었다. 나중에는 떠다놓은 자리끼가 엎질 러진 것도 불계하고, 서로 간질이고 꼬집고 어기고 비틀었 으나, 설성월은 눈물을 흘려가면서도 놓지 않았다.

『엥.』

춘우는 화가 났다.

『앙시기도 하지.』

하고 요우에가 쓰러지며

『그놈의 편지 안 보아도 괜찮아.』

하고 숨이 차서 펄떡거린다.

『그렇게 쉽게.』

성월은 걸레로 방바닥을 훔치며 춘우를 노려본다.

『글쎄,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한다는 것야?』

『남 무엇을 하든지간에 상관하실게 무엇얘요.』

『왜 상관이 안돼. 내게 오는 편지를 가지고 안 내놓으니 까 말이지.』

『누가 안 드린대요.』

『그럼.』

『나고 같이 보시잔 말얘요. 내 손으로 내가 들고 같이 보 셔요.』

『그럼 진작 그러지.』

『누가 진작 안 그랬어요. 남의 손을 모두 비틀어 놓으시구.』

분한 듯이 손을 들여다보다가

『에끼.』

하고 달려들어 춘우를 꼬집어 뜯는다.

『이게 무슨 짓야 아파. 자, 같이 봐, 같이.』

성월은 어느덧 춘우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나란히 엎드려 편지를 뜯어서 둘이 보기를 시작하였다. 이 아래 쓴 것이 그 편지의 전체이다.

당신이 나가시던 날 저는 공연히 섭섭한 생각으로 하루 종 일 울고 지냈습니다. 그랬는데 정말 그날 저녁에 당신이 돌 아오시지를 않으시지요. 혹시 어디가 약주나 잡수시고 실수 나 하시지 않으셨나 하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기다 렸어요. 춘우씨! 사흘동안을 이때나 오시나 저때나 오시나 하고 기다리기는 하였으나, 반가운 춘우씨가 오시기는 고사 하고 춘우씨가 다른 여자에게로 마음을 옮기시고 저는 돌아 보지 않으신다는 소문을 듣고서 얼마나 제가 낙담을 하였는 지, 그 때의 저의 마음은 만척이나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것이 제게는 더할수 없는 행복이며, 감사할일이요, 다시 당신에게 내버림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 것은 운명이 그렇게 시키는 것이니까, 누구를 원망하고 허 물을 할 것은 없을줄 압니다.

그러나, 오늘 창하씨에게 말씀을 들으니까, 당신이 저를 의 심하시며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하시더란 말을 듣고서, 저는 눈물이 쏟아져 흐르는 얼굴로 글자가 흐려 보이지 않 는 붓을 잡고, 모든 일의 자세한 것을 말 대신 여쭈워 드리 려 하는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또는 장래 가 똑 같을 것입니다. 차라리 더욱 더욱 깊어가기는 할지언 정 조금이라도 빛이 여위거나 엷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에 당신에게 이와 같이 오해를 받게 된 것도 제가 당 신을 사랑하는데서 나온 일이 도리어 당신의 노여우심을 사 게 되었고, 마음을 아프게 하여드리어 그것은 무엇으로써 사함을 받아야 좋을지 저는 알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오늘 그와 같이 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또 는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까닭이 아니신것도 저는 압니다.

다만 죄 많은 몸이 어려서 부모를 그릇 만난 죄인지, 철모 를 제 시집을 잘 가지 못하여 남의 첩의 몸이 되어 거기에 서 죄악의 씨라고 하올는지, 청아라는 계집애 하나를 낳아 서 어머니 노릇을 하게 된것이, 오늘에 저를 참으로 사랑하 여 주시고 참으로 사람답게 알아주시는 당신까지 그렇게 괴 로우시게 하여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두번 당신을 속였습니다. 아니지요. 두번뿐이 아닙니 다. 다시 애아버지하고 만나지 않겠다고 제가 스스로 맹세 를 하여 놓고 그것을 맹세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두번이 오며, 또는 그 두 번 죄를 짓는 것에 따라서 수없이 당신의 눈을 가리우게 하였습니다.

춘우씨! 그것이 죄인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을 속이고 청아 의 병을 위하여 애아버지에게 다니는 것이 죄인 것을 모르 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그 말을 제 입으로는 당신에게 말씀 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제가 제 가슴에다 독약 묻 은 화살을 박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그렇다고 어미된 마음에 청아를 잊지 않으리라고 여간 노력을 하였사 오나 그것도 저의 힘으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천륜 이 되어 그러한지 무정하게 어린 것을 떼어버릴 수는 없었 어요. 여기에 저는 몹시 고민하였습니다. 당신이 절더러 무 슨 근심이 있느냐고 물어보실 때마다 저는 가슴이 저리는듯 하였어요.

어머니 되랴, 남의 애인이 되랴? 저는 참으로 헤매였습니 다. 어머니가 되자면 애인을 내버려야 할터이요, 애인이 되 려면 어린것을 잊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된다 하 면 그것은 일평생 사랑 없는 남편 밑에서 유모와 같이 쓸쓸 한 세상을 지내야 할터이요.. 그렇지 않으면 애인을 따라야 할것이라는 생각을 할제, 어느 정도까지 동정하여 주셔야 할만한 고민을 느끼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죄라 하겠지마는, 어떠한 때에는 당신을 잊자 하고 굳은 결심을 하고서 애아버지에게 다시 돌아가겠다고 승낙까지 하였다가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후회를 하고 운 일까지 있었어요.

춘우씨! 참으로 괴롭고 무서운 세상얘요. 어쩌면 좋을지 모 를 세상얘요.

당신은 저를 원망하시겠죠. 원망도 좋습니다. 또 책망하신 다 하면, 그것을 받지요. 당신이 이 괴로움을 없이하여주기 위하여 저를 죽여주신다 하면, 그것도 달게 받겠습니다.

아아, 그런데 춘우씨! 돌아오십시오. 모든 것을 단념하고 잊어버리고 다만 홀로 깨끗한 마음으로 저는 당신을 기다리 고 있습니다.

다시 효창원에서 꽃을 따며 노래하던 그때로 돌아가셔요.

그때의 그 잊을수 없는 즐거움을 지금에 다시 생각할 때에 춘우씨가 새삼스럽게 그리운 듯 합니다.

즉일 영숙 춘우는 편지를 읽다가 그대로 엎드려 울었다. 설성월도 웬 일인지 눈물이 나서 고개를 돌리었다.

『내가 잘못야.』

눈물은 베개 위에 시내처럼 흐른다.

『고만우셔요.』

한참 우도록 가만해 내버려두던 설성월은 춘우의 어깨를 흔들면서 울음을 그치라고 위로를 한다.

『내가 생각한 것이 옳지.』

춘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었다.

『눈물이나 씻으셔요.』

설성월의 그때 감정은 자기가 영숙이가 되어서 춘우의 뜨 거운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는 것을듣는 듯이 춘우에게 동정 이 갔었다. 그는 눈물을 씻기며 어린애 어루만지듯이 어루 만지면서, 『그렇게 우실 것이 무엇얘요? 선생님께서는 다 시 옛날의 행복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동정은 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다시 질투의 불길이 타올라 오기 시작하여 말하는 어조마다 비꼬아 말을 한다.

『선생님이 지금은 눈물을 흘리실 때가 아네요. 지금이라 도 기다리고 계신 영숙씨에게로 가시지요.』

춘우는 설성월의 이 말을 듣고 속으로 비웃었다.

『내가 다시 영숙에게로 가?』

『그럼요.』

『아니지 가지 못하지.』

하고 춘우는 다시 눈물이 두 눈에 핑그르 돈다.

『왜 못하셔요.』

설성월은 거짓말이라는 듯이 춘우를 본다.

『그것은 성월이는 모를것이야. 어떠한 일이 있든지 나는 영숙에게로는 다시 가지를 않을 터이니까.』

『거짓말 마셔요. 왜 가시지를 않으셔요. 그렇게까지 모든 것을 자백하고, 또 그렇게까지 결심을 하고 있는이에게.』

『안 가지. 내가 그만큼 영숙을 못 믿거나 또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숙이가 나를 사랑하는 까닭에 말을 하 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나도 영숙을 사랑하므로 가지 않는 것이야.』

『그렇지만, 선생님이 참으로 진정으로 사랑을 하신다 하 면, 남이 가지 마시라고 해도 가실터인데, 일부러 선생님 자 신이 안 가신다는 것은 어디까지든지 선생님 마음 가운데 영숙씨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부족하신 까닭이시겠지요.』

춘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을 할는지도 모르 지. 그렇지만, 내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는 것을 나는 어떠한 경우에 슬퍼하는 때도 있어. 벌써 나의 마음은 그렇 게 열정적이 아니요, 그렇게 단조하지가 않으니까.』

『그렇지만, 가보셔야죠. 가보시지 않고 어떻게 합니까. 젊 은 부인이 혼자 계실 터인데.』

『영숙의 몸을 보호할 사람은 나외에 또 있으니까. 그것이 걱정할 것이 없지. 그러나, 마음을 보호하여 주는 사람은 아 마 일평생 없을터이지. 그의 마음의 성벽은 이미 무너졌으 니까.』

설성월은 춘우의 이 말을 믿을 수가 없기도 하고, 또 한편 으로는 춘우가 영숙에게 향하는 정이 벌써 식어버렸는지도 알수가 없어서 춘우의 마음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애를쓴다.

『그러면, 장차 어떻게 하실터얘요?』

춘우는 이 말을 듣고나서,

『장차? 장차는 성월이허고 결혼이나 하고 살까?』

하고 실없는 말이라는 의미인지 씽긋 웃었다.

설성월은 속마음으로 그렇게 되면, 자기에게는 만족한 일 이어서 독으로는 좋았으나, 기생이나 그와 같은 사회에 있 는 여자들이 거의 공통으로 가진 자포자기와 또는 동경할만 한 단념의 관념에서 나오는 말로

『피 듣기 싫어요.』

하며, 저도 웃음에 붙여버린다는 듯이 말대꾸도 하지 않으 려한다. 그러나, 또 다시 말문이 열리며

『정말 어떻게 하실 터얘요. 아주 영숙씨허고는 헤지실터 입니까?』

하고 지근덕거린다.

『그렇다니까 그러네. 일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지낼 마음야.』

『듣기 싫어요. 어디 두고 보셔요. 영숙씨와 만나지 않으신 다는 말도 거짓말이요,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도 거짓말얘요.』

어느 틈에 닭이 울더니, 두 사람은 눈 위에 잠이 내리눌리 어 어느덧 잠이 들었다. 춘우는 영숙과 만나매, 그 편지를 한일도 없고 또는 영영 자기를 내버린 것을 속 못채리고 찾 아가서 영숙의 냉대에 받고 분한 마음에 영숙을 죽이고 자 기가 죽으려고 덤비려하니까, 그 뒤에서 철수가 나타나서 사냥총으로 자기의 뒤를 향하여 놓으려하는 것을 어쩐 일인 지 설성월이가 난데없이 뛰어나와 그것을 가로막다가 가슴 을 맞고, 그대로 쓰러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니, 그것이 꿈인 것을 알고 옆을 보니까, 성월이가 머리를 허트린채 곤 하게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가슴을 문질러 내려앉히 고 날이 밝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二二

[편집]

그 이튿날 저녁때이다. 서쪽 하늘에는 넘어가는 저녁 해가 핏빛 같이 보기에 무섭고 지긋지긋한 광선을 난사하여 온 세상을 그 빛으로 세례를 주려는 듯이 내려 붓는다.

산 중턱에 걸리어 무서운 눈방울을 꿈벅거리는 해는 웬일 인지 세상과 하직하는 것을 주저하는 듯 하다. 해를 보내자, 다시 달이나 별을 맡기는 몇만년 전 사람이나, 또는 몇 만 년 후 사람이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나, 그때나 이때나 그 것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나 유의식적으로나 가슴속에 뭉클 한 비애를 느끼는 것은 우리 인류의 비애이다.

날이 가고 달이 바꾸이매, 나고 죽는 것은 우리 인류가 자 꾸 되풀이하는 평범한 사실이다. 언제든지 면하지 못하는 것은 이 비애이다.

수구문 밖에는 수철리라는 공동묘지가 있다.

넘어가는 해가 이 산 비탈 위에 앞산그림자를 끌어다가 비 추인 산길 위로는 춘우가 어린 인우를 이끌고 서울을 향하 여 돌아온다.

『아까 보던 것이 어머니 산소요?』

인우는 오던 길을 다시 돌아다보며 물었다.

『그래.』

『그런데, 왜 거기 계시우. 그러고, 내가 왔는데도 나와 보 지도 않으시고……』

춘우의 마음은 천갈래 만갈래 흩어질 대로 흩어진데다 인 우의 이 소리를 들으매, 가슴이 터져서 피가 솟는듯 하다.

춘우는 어린 인우에게 죽음이라는 것을 아니 가르쳐 줄 수 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 속에서 주무시느라고 나오시지를 않으신단 다. 아직 잠을 깨실 때가 되지를 않아서.』

『그렇지만 왜 흙 속에 누워계셔?』

『그 흙 속에는 훌륭한 집이 있고 뜰이 있고 물이 흐르고 언제든지 꽃이 피는 곳이 있으나 우리는 어머니처럼 착하지 가 못해서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같에서 돌아다니다 가만 온단다.』

『그럼, 우리도 어머니 같이 착한 일만 하면 어머니께로 가게 되지.』

『그렇지.』

『그러면, 어머니도 나를 귀애하고 언니도 귀애하고……』

『그래, 그런데 내 이야기하나 하여주랴?』

『응.』

『너 누에라고 하는 벌레 알지.』

『누에? 몰라, 누에가 무엇요.』

『누에라 하는 것은.』

말을 끄내면서 따라오는 인우를 구름이 낀 눈으로 내려다 본다.

『저 면주실을 입으로 뽑아내는 벌렌데, 그 실로 우리의 옷을 짜는 것야. 그런데 그것이 처음에는 알에서 까지면서 굼벙이 같은 벌레가 되어 뽕나무 잎을 먹으면 손가락 같이 굵어진단다. 그래 그것이 굵을대로 굵으면 제 입에서 실을 토해서 그것으로 제 몸을 칭칭 감아서 집을 만든 후 그곳에 서 죽어버린단 말이지.』

인우는 춘우를 보며

『제가 죽아?』

하며 신기히 여긴다.

『그래, 제가 죽은 뒤에는 번데기라는 것이 되어, 그 속에 들어 있다가, 또 얼마가 되면은 다시 그 속에서 나비가 되 어서 그 전에는 기어다니던 것이 나래를 펴고 펄펄 날아다 니게 되는 것이란다.』

『응, 그러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그렇지.』

『그래, 그와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저렇게 땅 속에 계시더라도, 나즉에 더 좋게 되어 인우를 보러 오실는 지도 모르는 것이야.』

춘우는 이러한 이야기로 인우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면서 도, 그것이 너무 현실적이 아닌데 저도 홀로 속으로 부끄러 웠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그러한지, 언니가 없 으면 쓸쓸해서 못 견디겠어. 인제부터는 언니가 집에 있고 아무데도 가지 말아요.』

『그러지, 집에 있지. 인제는 언제든지 집에서 너와 같이 있자.』

춘우는 인우에게로 돌아가기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춘우에게는 인우에게로 돌아가기 전에 또 한가지 할 일이 있는 것을 잊어버릴수가 없다.

자기가 짧다고 하면 짧으나, 또 값으로는 한이 없는 영숙 과 자기 사이의 사랑의 역사를 눈딱 감아 버리고 자기가 이 제 상처난 가슴을 어린 인우의 사랑으로 바꾸려할 때, 그에 게 어찌 무량한 감개가 없으랴. 그러나, 괴로움을 견디어 이 긴 뒤에 즐거움이 그의 가슴에도 얼마 아니하여 그의 가슴 에 넘쳐흐를 것은 기대하지 않고 자연히 돌아올 것이다.

지금 그에게는 마지막의 괴로움이 꼭 한가지 남아 있으니, 그것은 영숙에게 최후로 마지막 말 한 마디를 하는 것이니, 그것은

『잘 있으라.』

하고 짧고도 기막힌 말이었다.

인우를 처음으로 어머니 산소까지 데리고 왔던 춘우는 다 시 마지막으로 영숙을 만나보려 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기는, 자기의 마음을 안다 자기가 영숙을 눈 딱 감고 보 지 않으면 모르거니와, 다시 그의 얼굴을 보고, 다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의 웃음을 본다 하면 그는 지금까지 결심하였던 것이 눈같이 녹아버릴것을 자기는 안다.

만일 다시 만난다 하면, 그 일순간에 또 다시 자기는 거짓 말을 하게 될터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은 그 순간을 다시 지내는 때에 또 다시 비극의 원인을 이룰 것이다.

『그래도 가서 말이나 한마디 하여 볼까?』

하고 왈칵 발길을 그쪽으로 향하였다가도,

『아니 안 된다. 나를 의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좋다.

나를 너무 매정한 사람이라고 해도 좋다. 내가 나의 굳은 신념(信念)아래 행하는 일이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든지 좋 다. 나는 결코 주고서 다시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날 창하는 기뻐 뛰며 춘우를 찾아왔다.

『야, 춘우 춘우.』

그는 춘우의 손목을 잡아 흔들며,

『고마워 고마워, 자네에게는 옛날의 행복이 다시 돌아왔네.』

하고 치하하였다.

춘우는 하도 이상하여

『무슨 옛날 행복이란 말인가.』

하고 냉연한 태도로 창하에게 물었다.

『지금 영숙씨가 또 내게 오셨어?』

『그래.』

『그런데, 지금껏 생각한 것이 모두 잘못이 되었네 그려.

내가 너무 지나치게 생각을 해서 영숙씨를 믿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도 자네에게 미안하게 되었네.』

『자네가 의심한 것이 무엇인가.』

『압다 어서 가세. 지금 내가 기여이 자네를 데리고 가야 하겠네.』

『나는 갈수가 없네.』

『왜!』

『자네의 말도 나는 벌써 자세히 알고 있네, 자, 자, 이것 을 보게.』

춘우는 주머니에서 영숙의 편지를 꺼내주었다.

창하는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숨에 읽고 나서 두 주먹 을 마주 치며,

『글쎄 이것야, 이것. 내 말도 이 말이란 말이야.』

하고 혼자 좋아한다.

『그렇지만, 나는 갈수가 없네. 내가 세상에서 어떠한 욕을 먹드라도 가지는 않을터이야.』

『압다 공연히. 좋거든 그냥 좋다고 그래. 어서 잔말 말고 가.』

하며 춘우의 손목을 잡아끈다.

『나는 아주 장담을 하고 왔네. 자네를 데리고 갈터이니, 집에 가서 기다리시라고.』

춘우는 도리어 귀찮은 기색을 뵈이면서,

『이거 왜 이러나 놓게.』

하며 손을 뿌리친다.

창하도 춘우의 기색이 너무 거짓말 같지 않으므로 무색하 기도하고 이상하기도 하여

『정말인가?』

하고 춘우를 둥그런 눈으로 치어다 보았다.

『정말이지, 거짓말인가. 실없이 할 일도 따로 있지.』

춘우는 침착한 태도로 대답을 하였다.

창하는 불가사의한 일을 당한 듯이 고개를 수긋하고 앉아 있다가,

『왜 그러나? 내 생각 같아서는 자네가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나는 결심한 것이 있어.』

『무슨 결심을?』

『당초에 이제부터는 영숙과 만나지를 않으려고.』

『그것은 또 무슨 까닭야. 나는 자네 마음을 알수가 없네.

어느 때는 날더러 어떻게 하면 다시 만나게 하겠느냐고 하 더니, 지금 일이 다 해결이 되니까, 또 만나지를 않겠다고 하니 이번에는 자네가 한번 버티어보는 셈인가?』

『아니지, 이번 일을 그렇게 술 먹는 사람의 장난처럼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럼 왜 그래. 영숙씨도 모든 일을 자백하였고 또 철수 나 청아를 단념하고 다시 자네게로 온다고 하였는데.』

『단념?』

춘우는 반쯤 코웃음 같이 말을 하며,

『철수는 단념하려면 그것은 될는지 몰라도, 청아는 단념 하지 못할 것이니까. 내게 청아를 단념하는 것보다도 청아 를 데려온다 하면 내가 갈는지 모르지마는 그 외에는 내가 갈 수가 없네. 만일 내가 지금 간다 하면 얼마동안은 다시 옛날같이 지낼수가 있을 터이지. 그러하나, 영숙은 또 다시 나를 속이지 않으려 하나, 아니 속이지를 못하게될 것이며 그 맹세를 몇백번 몇천번 거듭하고라도, 그 맹세를 이기게 될터이지.』

『그렇지만, 이 사람아 그런 일이 세상에 아주 없는 일이 아닌게 아닌데. 그까짓것을 가지고 그럴 것이 무엇인가?』

『그렇지만, 나는 벌써 나의 어린 아우에게 맹세를 하였네.

나는 다시 너를 떠나가지 않겠다고.』

그날 밤이다. 낮부터 하늘 위로 떠돌아다니던 구름장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이리 쌓이고 저리 쌓이더니, 해가 넘어간 뒤로는 반짝거리야 할 별들도 눈을 감았으며, 떴다 가 사라져야 할 초생달도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를 숨기었다.

경성의 둘레를 빙그르 돌은 산 위에는 시커먼 구름들이 산 위에다가 다시 산을 쌓은듯이 메뿌리가 보이지 않도록 쌓여 있고, 괴물이 지내가는 듯이 바람에 불리어 공중을 달려가 는 무서운 구름장만 컴컴한 가운데 움직일 뿐이다.

마치 지구라는 큰 자연 뭉텅이가 지금에 운명을 한 듯이 칠같이 검은 어둠이 그 위를 내리 덮으며, 무엇인지 원혼을 하소연하는 귀곡새가 효창원 송림 위로 울면서 지나간다.

장례식을 하는 듯이 바람 한번이 지나가면 소나무가 이리 굽히고 저리 흔들리는대로 몸 속으로 스며드는 으스스한 소 리가 사람을 웅숭그리게 한다.

밤 열시가 넘었다. 모래가 깔린 길이 분명히 보이지는 아 니하나, 희미한 가운데로 이리 구부러졌다. 저리 펼친 것이 은은히 보이는데, 영숙의 집을 향하여 걸어오는 사람이 있 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조심스럽게 영숙의 집문간 앞에 가까이 와 선 사람은 춘우였다.

며칠되지 않건마는 자기 집문간에 와 서있자 몇해를 지낼 것 같이 그립다. 깜깜한 밤이지만 모든 것이 대낮에 보는 것보다는 더 소상하다.

춘우는 문틈으로 안을 살피었다. 고요정적한 가운데 백지 한 장을 통하여 영숙이가 앉아 있어 가끔가끔 가늘은 기침 을 하는 소리가 그 적막을 깨뜨리는 소리이다.

춘우는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아니하고, 앞대문을 돌아서 뒤 창으로 갔다.

춘우는 결코 영숙을 의심하여 그것을 엿들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영숙을 안보리라 안 보리라 입술을 깨물어가면서 결심을 하려하였으나 그의 발은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이곳 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는 들창에 귀를 기울이고 방안의 공기를 들여다보았다.

영숙의 숨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게 고요하고 아무 말이 없다. 그러자, 다시 창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영숙은 책상 앞에 앉아서 무엇인지 뒤적거리며 열심히 읽고 앉아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옛날에 자기가 영숙에게 보내였 던 편지이다.

영숙은 그것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가는 그것을 춘우나 만난 듯이 자기 가슴에다가도 대여보고 또는 뺨에다가도 대 여보았다.

나중에는 그 편지에 엎드리기라도 하듯이 입속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셔요.』

하며 보기도 하였다.

춘우는 이것을 볼 때 그대로 뛰어들어가 끼어안고 싶었다.

그리고, 도리어 자기가 영숙에게 사죄를 하고싶었다.

그러나, 그는 끓어나오는 마음을 억제하고 한참이나 멀거 니 서있었다.

다만 벽 하나 창 하나가 두 사람은 천리나 만리를 격한것 처럼 지척에 두고도 서로 알지 못하며 서로 만나지 못하며, 또는 서로 말을 하지 못하게 한다.

누가 말을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요, 누가 만나지 못하 게 한것도 아니요, 누가 서로 알지 말란것도 아니지마는, 그 무슨 신의 섭리(攝理)가 두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생각하면, 모든 것이 애닮을 따름이다.

춘우는 시커멓게 흐린 하늘을 쳐다보고 섰을 때, 가슴에서 치밀리는 슬픔이 눈물이 되어 두 눈에서 흐를 뿐이다.

애닲음과 또는 섭섭함이 춘우를 미치게 할 듯 하다. 그는 속으로

『아아 영숙! 영숙은 내가 여기 서서 우는 것을 아는가 모 르는가?』

그러나, 영숙의 방안은 언제까지든지 고요할 뿐이다.

소나무가 우수수하기를 시작하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 작한다. 신선한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리고 지내갈 때마다 처끈처끈한 물기운이 춘우의 전신을 적셔준다.

춘우에게는 어둠도 없고 비도 없고 추움도 없다. 그의 눈 앞에는 산천초목이 모두 없고 다만 영숙을 떠나가는 슬픔이 그의 가슴에 찼을 뿐이다.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다.』

하고 것을 생각할 때, 그는 그대로 담에 기대어 울었다.

비는 소리를 치며 쏟아진다. 어느덧 낙수가 머리 위에 떨 어진다. 그는 온몸이 젖어 쥐어짜게 되었어도 그 자리에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는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집 한바퀴 를 휘 돌았다.

빗방울 떨어지는 장단을 맞춰서 바로 옆에 집에서는 다다 미질을 한다.

그는 다시 문간에 와 섰다. 무슨 결심을 한 것처럼 그는 우뚝 서더니, 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끄내어 우편함(郵便 函)에다가 그것을 넣었다. 그러고는, 발길을 도리키어 다시 그 길로 내려올 때 그는 몇번인가 돌아다보았는지, 한걸음 이 한번, 두걸음에 한번, 어두컴컴한 가운데 집 그림자의 윤 곽이 사라질 때까지 그는 돌아다보았다. 그는 전차 궤도 앞 으로 올 때까지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를 않았다. 비는 여전히 퍼부었다.

하루 저녁을 쏟아지던 비가 새벽이 되자 어느덧 개고 왜청 가루로 물들인 듯한 하늘에는 아침볕이 웃는 듯이 솟아올랐다.

영숙은 하룻 밤을 홀로 새고나서 아침문을 열어할제, 그의 눈에는 이상한 편지 한 장이 우편함에 있는 것이 보였다.

언제 우편배달부가 두고 간 것인가 하고 피봉을 보자, 거 기에는 자기 이름이 씌어있고, 그 뒤에는 춘우의 이름이 씌 어있다.

우표를 붙이지 않은 것을 보면은 필연 누가 갖다둔것인데, 춘우씨가 갖다 놓고 가신 것인가, 그러면 왜 들어오시지를 아니하셨을까?

피봉을 뜯고 속의 사연을 보니까, 사랑하는 영숙! 영숙의 편지는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는 지 알 수가 없소. 나는 그 편지를 읽고 감사한 마음과 또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울었소. 마음으로 다시 사죄하는 바이요.

그러나, 우리의 운명은 여기에 두 사람을 서로 떠나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우리는 그 운명에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 는 것이요.

영숙! 영숙은 지나간 짧은 세월에 일평생 잊지 못할 사랑 을 내게 부어주었지요. 그러나 그것이 오늘에 꿈같이 사라 질 것을 알았다면, 오히려 그 행복을 처음부터 취하지 않았 을 것을 이것도 신이 아닌 사람의 하는 일이니까 그러할는지!

영숙은 영숙의 직분이 있는 것을 알아주시오. 나의 사랑보 다도 더 큰 사랑이 있는 것을 알아 주시오. 나는 지금에 모 든 것을 잊어버리고 정처 없이 갑니다.

영숙은 남의 어머니로서의 직분을 지켜주기를 바라오.

영숙은 그대로 엎드려 울었다. 만일 세상에 가장 슬픈 일 이 있다 하면 이것이라고 결정을 하도록 기가 막혀 울었다.

二四

[편집]

그 후부터는 춘우의 행적이 어디로인지 사라졌다. 아무도 춘우의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자, 한달이 지내어 창하 는 춘우를 만났다. 그는 춘우가 거의 시골사람 같이 된 것 을보았다.

『이게 웬일야.』

창하는 농부의 손 같이 된 춘우의 손을 잡으며 반갑게 물 었다.

『그 동안에 시골 좀 다녀왔어. 그래 지금 서울로 들어오 는 길이야.』

『그러면, 편지도 한 장 아니해.』

『편지는 해 무엇하나.』

춘우는 짚신 신은 발로 땅을 긁으며 말을 하였다.

『그럼 어디어디로 다녔단 말인가.』

『각처로 다니었지.』

『걸어서?』

『그럼 빌어먹어 가면서.』

춘우는 웃음을 평생 웃지 않을 사름 모양으로 얼굴이 엄연 하여졌다.

『그 동안에 영숙은 시골로 갔지.』

창하는 춘우가 불쌍한듯이 쓸쓸한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일은 그렇게 돼야 할 것이지.』

영숙은 춘우가 시골을 떠난 후, 며칠이 못되어 자기 어머 니, 청아 또는 철수를 따라 철수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옛날과 같이 마찬가지가 되었다. 영숙과 춘우가 만나기 전이나 헤여진 오늘이나 무엇이 다르랴. 그러나, 산 과 산을 격하여 남쪽과 북쪽에 나누여 있는 두 사람의 가슴 속에는 옛날의 애끈이는 흔적이 남아있다. 한사람은 다시 순진한 사랑을 하여보지 못할만큼 마음에 병이 들었고, 또 한 사람은 일평생 남의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느낄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태양은 서산을 넘는다. 아아 어디선지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이어온다.

춘우는 창하를 이끌고 가며 말했다.

『오래 간만에 술이나 한잔 먹세.』

行者付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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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終

이 소설은 시작할 때부터 신문소설(新聞小說)로 예정하고 쓴 것이요, 또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끝을 너무 속하게 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실로 용두사미가 된것은 작자도 모르 는 바가 아니다.

독자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작자의 사정을 사정으로 양해 하여주시고, 작자가 예술적 양심이 박약하여 그리된것으로 알아주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7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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