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즈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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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지나고 농후한 여름을 기다릴 때에 우리 앞에 겨울이 나타나면, 우리는 저퍼하지 않을 수 없다. 비빔밥같이 농후한 사랑에서 외로움의 세계로 쫓겨난 이같이 불행한 이가 다시 없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극도의 저픔과 외로움과 슬픔을 맛 본 사람이다. 그와 같은 뜻으로 끝까지 돈을 즐기던 향락주의자가, 재산이라는 왕국에서 쫓겨날 때에 받는 불행과 슬픔도 적지 않은 것이다. 따뜻하고 가볍던 옷을 생각하고, 맛있던 좋은 음식과 좋은 담배를 생각하며, 사고 싶은 수없는 물건을 생각하며, 아직 늙어죽기까지에 남아있는 햇수를 비교할 때에 그는 자살할 용기가 없는 자기를 비웃지 않고는 두지 않게까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나도 그 불행한 사람의 하나이라고 안할 수 없다. 많지는 못하였으나 내 일생에는 풍족하던 재산은 몇 해 동안의 끝 모르는 방랑에 볼 나위 없이 줄어지고 말았다. 큰 땅은 팔리어 적은 땅이 되고, 적은 땅은 팔리어 빚 때문에 나가고, 이리하여 마침내 나에게는 가장 신성하던 저택까지 인제는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평양 성내에 주택지로는 한 군데밖에 없는 곳에 사백여 평을 점령하고 있던 그 커다란 저택. 아버지가 짓고, 내가 자라고, 결혼하고, 내게는 가장 보배인 한 아들과 한 딸을 얻은 그 집도 ‘공연히 커다란 집을 쓰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체재 좋은 핑계 아래 영구히 내 손에서 떠났다. 엿새 동안을 병원에 가는 길에 무심히 그 집에 다시 들어가 보니 이전에는 아내라도 허투루 못 들어오던 나의 서재이던 방에 동리 아이들이 그림 종이를 얻노라고 와글와글하고 있었다. 세 마리의 개가 나흘 동안을 굶으면서 비인 집을 지킨 것도 한 비극이라 할 수 있겠지. 자기 좋은 기회에라도 자기의 자라난 집을 팔면 서럽거든 할 수 없이 판 나는 어떠하였을까. 이사 온 지 한 달이나 되는 지금도 마음이 낫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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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댓 달 전, 집을 팔기로 계획한 그 때부터, 나의 머리는 얼마간 변하였다. 그 전까지는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밸이 세고 교만하고 자아에 강하던 나는, 차차 ‘남’이라는 사람을 안중에 두게 되었다. 지금 나는 삼년 만에 조선 옷을 입으나, 이것도 이상한 겁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어떤 날 어디로 가노라는데, 나와 마주오던 학생 몇이 픽픽 나를 보고 웃는 것을 보았다. 그 뒤에 어디를 지날 때에 부랑자 같은 사람이 몇이 서 있다가 ‘멋쟁이로다’ 하는 것을 들었다. 그 뒤부터는 길에서 사람이 웃는 것들을 보면 나를 보고 웃는 것 같아서, 젊은이 특별히 학생(남을 놀리기 좋아하는)을 보면 돌림길을 하여서라도 피하고, 큰 길로 다니던 나는 작은 길을 취하게 되다가 마침내 양복이 나쁘다는 결론에 이르러, 조선옷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길에 웃는 사람은 차차 많아 가면 많아 가지 없어지지는 않는다. 사람이라는 것이 무서워 온다.

토이기 모자(土耳其帽)를 쓰고 종로로 활보하던 나는 어디가고, 삿부채를 들고 큰 길을 거닐던 나는 어디 갔는지. 지금은 사람만 보면 할 수 있는 대로 피하려는 나밖에는 찾아내일 수 없다. 나를 유심히 보는 사람이 있으면 ‘무얼, 쑥은 끝까지 삼을 몰라보아’라고 비웃던 나를 나는 옛날의 소설이라도 읽는 마음으로 회상하게 되었다.

순사(그들은 우리를 식물인지 광물인지 구별치 못한다)가 무섭다. 물론 아무라도 죄인으로 보려는 그들의 눈이 나쁘기는 하지만, 파출소 앞을 지날 때는 나는 정대한 사람이라는 표적을 보이려고 힘쓰지 않으면 그들이 고함칠 것 같아서 무섭다. 팁쓰 주사를 맞으라고 온 순사를, 나는 문틈으로 겨우 내다본다. 그와 함께 바늘과 칼이 무섭고, 큰 길이 무섭고, 작은 길이 무섭고, 맑은 날이 무섭고, 흐린 날이 무섭고, 말하자면 나 자신밖에는 온갖 것이 무섭다.

떨리는 마음은 나로 하여금 차차 우울에 빠지게 한다. 벗이 생각나는 때도 있으며 위로하여 주는 애인이 없는 이 세상을 (몰래)저주하고 싶은 때도 많다.

그동안에 언제 움돋았는지 모르지만 한 가지 생각이 나의 마음속에 성장되었다. 가르되 ‘우리는 어찌하면(혹은 ’언제면‘이라도 좋지) 불망이 없는 삶을 살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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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밤 나는, 생각하였다. 나는 약자다. 그리고 불행한 자이다. 그런 나는 한 번 무서운 권세를 잡아보고 싶다. 이 세상은커녕,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이 우주의 통할권을 잡아보고 싶다. 사람의 생살여탈권은 바람의 최소한 부분이요 일기와 별의 운동에까지 및는 큰 권세를 잡아보고 싶다. 이 위에 통쾌한 일은 다시없으리라. 그것이면 나도 만족하겠다고…….

그러나 그것으로 과연 만족할까, 나는 다시 생각하였다. 체험이 없으니 즉답할 수는 없으나, 희랍 신화에서 제우스가 만족치 못한 것과 구약성서에서 여호와가 때때로 노여워한 것을 보면 역시 ‘만족’에서는 거리가 먼 듯싶다.

그러며 나는 수십의 애인(수백이라도 괜찮다)을 가져보고 싶다. 이 세상에서 애인과 같이 마음을 위로하여 주는 자가 다시 있을까. 벗이 죽는다.

“죽은 이는 할 수 없지요. 이제부터는 저를 벗으로 알아주세요.”

그는 말한다.

재산이 없어진다.

“돈? 그것이야 다시 벌면 되지요. 돈보담 귀한 것은 사랑이에요.”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모든 근심과 걱정은 봄눈과 같이 사라질 테다. 아아, 이보다 즐겁고 아리따운 삶이 어디 다시 있을까. 만족 ‘만족한 삶’은 거기 있었다.

그러나 영리한 나는 역사상에 백천(百千)의 미희를 두고도 아직 부족타 한 제왕을 찾아내고, 또 ‘계집 가운데 사랑스러운 자들이 있으니 하나는 이미 죽은 자이고 하나는 시방 구하는 자이라’는 속담 말을 발견할 때에 다시 생각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돈, 돈, 돈이다. 삼십억―이면 부족하다. 백억만 있으면, 백억으로는 능히 온갖 호강을 할 수 있다. 돈으로는 권세를 살 수가 있다. 돈은 사랑의 중매의 가장 귀한 다리다. 그것만 있으면…… 나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곧 나는 그것을 부인하였다. 돈으로 능히 길에서 웃는 못된 학생들을 제지할 수가 있을까. 그들의 웃음은 나를 죽이는 무기이다.


모든 것은 틀렸다. 권세로 만족을 살 수 없고 사랑도 능히 부족을 쫓지 못하고 돈으로도 만족을 못한다하면 우리는 마침내 무지개를 잡으러가는 아이같이 찾고 부르짖기만 하다가 말아야 하나. 이것은 너무도 야속한 일이다. 이러고야 ‘사람’이라는 보람이 어디 있을까. 미칠 듯 싶다.


……

이 때에 나는 화닥닥 놀랐다.

미치광이, 미치광이, 그것이다.

작년(벌써 재작년이던가) 겨울 어디를 가노라고 기차를 탔는데 그날을 바깥은 대단히 추웠지만 스팀으로 말미암아 차실 안은 오히려 더운 편이었었다. 나는 눈에 덮여서 희게 된 벌을 특별히 보는 곳 없이 눈을 걸치고 있노라니까 뺨이 근질근질 하기에 보니 내 맞은편에 아까는 누워 자던 사람이 어느덧 일어나서 내 뺨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만약 미남자이었다면 그가 내게 홀렸다고 생각되리만큼 그는 황홀한 눈으로 마치 꿈꾸듯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백철테 안경 속에 있는 커다란 눈은 열 일여덟에 난 처녀의 눈같이 빛을 내이고 나를 본다. 그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좀 시간이 지났지만) 나를 봄으로 나는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보았다. 그는 유명한 골상학자로서 나의 두개골의 발달된 것(나도 모르지만)을 보고 있다고.

그러고 또 좀 지났지만 그는 그냥 내 얼굴만 보므는 나는 부끄러워져서 머리를 좀 치웠다. 그러나 무슨 일이냐, 그 눈이 내 머리를 따라오리라 하였더니 나의 존재를 온전히 무시하는 듯이 나의 머리가 있던 자리만 보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불만과 불평을 깨닫고 신문을 들고 보기 싫은 것을 좀 보다가, 다시 그를 보니 그는 그때야 나를 처음으로 본 듯이 나에게 어디까지 가느냐 묻는다. 나는 거기 대답하매 한참동안 꿈꾸는 듯한 눈으로 내 가슴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내게 부자가 되고 싶지 않냐 묻는다.

되고 싶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이 대답을 듣고 제 뜻과 같다는 듯이 희색이 만면하여 지금 세상은 껌과 셀로이드로 변하여 간다. 이제 남보다 먼저 셀로이드 공장을 하나 시작하면 불원간 큰 부자가 되리라. 자기는 팔왕자에 십만 평을 잡고 큰 셀로이드 공장을 세웠노라. 또 지금 세계는 온갖 빛과 동력과 열을 석탄과 석유에서 얻던 것이 차차 전기로 변하여간다. 이제 큰 발전소를 세우고 아주 싼 값으로 전기에 대한 권리들을 사두면 큰 이를 보리라. 자기는 어떠 어떠한 발전소가 있노라 운운.

나는 그의 플래티넘 시곗줄과 안경을 백철로 본 둔한 눈을 비웃으면서 그의 말을 근청하였다. 도도히 설명한 그는 곤하여졌는지 눈을 감음으로 나는 다시 다본 신문을 좀 보다가 그를 보니 그는 마치 어린애와 같이 곱게 잠이 들어있었다.

그때에 그 공장주의 곁에 앉았던 사람이 씩 웃으면서 내게 재미있게 들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재미뿐 아니라 존숭에 가까운 마음으로 들었노라고 하니까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람(공장주라 자칭하는 사람)은 과대망상광인데 지금 내가 보호해 가지고 본국으로 가는 길이외다.」

사건은 이것으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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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과대망상광. 그 사람뿐이 아무런 불만한 일이라도 만족히 알고 아무런 일에 처하여도 불평을 모르는 사람이다. 따귀를 맞고 안마로 아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고, 조팝을 파리 최상등 레스토랑의 요리로 아는 사람도 그이뿐이고, 공상의 재산과 권세를 참으로 믿는 사람도 그이밖에는 없다. 이 불평과 불만뿐의 세상에 살면서 일호의 괴로움을 모른 뿐 아니라, 이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과대망상광밖에는 없다. 제우스가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고 여호와가 자기를 배반하는 무리를 노여워하고 보나파르트가 웰링턴 때문에 떨매도, 그는 꿈꾸는 듯한 눈으로 태연히 있었다. 노아 시대의 홍수와 베스비오스의 폭발의 장엄한 광경을 정시하고 관상한 사람은 그 사람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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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나는 어찌하였을까? 먼저 백과사전을 폈다. 그 뒤에 정신병학을 폈다. 그러나 과대망상광에 대한 설명과 치료법은 있었으나, 과대망상광이 되는 방법은 없었다.

그 뒤에 의사에게 묻고 여기저기서 종합한 것으로, 염치없는 공상을 많이 하면 마침내는 과대망상광이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 뒤로부터 매일 저녁 전등만 오면 곧 불을 끄고 드러누워 나는 공상으로 세월을 보냈다.

―내게는 백억의 재산이 있다. 아차, 그보담 먼저 백억 원의 유래가 있어야겠다. 나는 어디 유학 갔다 올라오는 길에 파선을 하여(로빈슨과 같이) 어느 고도에 표착한다. 나는 거기(C군이 내게 권하는 바) 방갈로―식으로 간단히 집을 짓고 온갖 기구를 깨어진 배 부스러기로 간단하게 만들고 거처를 한다. 우연히 그 섬에 금강석광(크기가 주먹 같은)을 발견한다. 사금과 플래티나며 루비나 에메랄드 같은 것은 암만이라도 있고. 바닷가의 언덕에 부딪치는 물결의 힘으로 쌀을 찧는 방아를 만들고 (이 설계는 아직 책상 서랍에 있다) 섬 북쪽의 폭포에서 수력전기를 얻고. 이리하여 몇 해 사는 동안에 미국(영국이라도 불관) 어떤 큰 회사에서 그 섬을 발견하고 그 섬에 대한 전 권리를 백억에 매수한다. 대략 이렇게 백억이 된 뒤에.

나는 그 돈을 쓸 것을 생각하였다. 단 만원을 한꺼번에 써본 적이 없는 내게는 백억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의 힘은 무서운 것이라) 두 달 동안을 생각하매, 이제는 백억이 오히려 적은 듯한 생각이 있다. 그러고 (역시 사람의 힘은 무서운 물건이라) 이제는 때때로, 가 아니라 열 시간에 여섯 시간은 (처음에는 항상 비웃으면서 생각했지만) 백억이라는 돈이 마땅히 내게 올 것 같이 생각되게까지 나의 머리는 진보(혹은 퇴보)하였다. 길에서 때때로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며칠만 기다리라는 마음이 생긴다.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아직 남아있는 신용으로) 돈을 꾸어서라도 덜컥 산다. 그리고 ‘좀 있으면 부자가 될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백억은 지금은 나의 마음에 단단히 백인 신념으로서, 나는 통상시에는 무조건으로 맹신한다. 이것을 거짓말이라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그의 자유지만 나는 나의 명예(반 광인에게라도 명예가 있다면)를 두고 맹서라도 할 수 있다. 또 반 광인이 된 나를 동정하여주는 사람이 있다하면 그것도 그의 자유지만 나는 오히려 그를 동정하며 동시에 하루바삐 전 광인이 되기를 바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겨준 금전이, 형에게는 늘고 아우에게서는 그냥 있고, 내게서는 없어졌으되, 없이한 나는 가장 금전을 향락한 사람이다. 공자는 청빈을 즐기라고,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 하되 배금종인 나는 탁빈도 즐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돈을 남용한 탓으로 과대망상광이 될 수만 있거든, 나는 이를 감수할 뿐만 아니라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르겠다. 온갖 고로와 불만을 일소하고 아편의 꿈과 같은 안락을 얻을 수만 있거든 나는 온갖 것을 희생하여라도 이를 취하겠다. 원만한 ‘만족’을 얻는 길은 이것밖에 없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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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대망상광.

만약 이만 공상으로도 능히 과대망상광이 될 수만 있거든, 하루바삐 나로 하여 그 경지에 들어 돈이나 사랑으로 말미암아 애타는 사람들을, 꿈꾸는 듯한 눈으로 들여다보게 하라. 그리고 또 나로 하여금, 온갖 것에 기뻐하고 온갖 것에 만족하는 사람으로 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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