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문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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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편집]

도회의 가을은 빌딩가에서 하염없이 신음하고 있는 가로수의 낙엽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니, 페이브먼트에 울리는 수심 많은 숫처녀들의 하이힐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독신주의자로 유명한 백장주(白章珠) 양-방금 잡지 <부인문예(婦人文藝)>의 기자로 있는 명랑시인 백 양이 어찌된 셈인지 교정의 붓을 들었다 놓았다, 창 밖에 신음하고 있는 플래터너스와 더불어 한숨짓기를 무려 한 시간에 일백스물다섯 번이니, 일 분간에 두 번, 삼십 초 만에 한 번씩 “후-우-웃” 하고 기다랗게 한숨을 짓는다고-이것은 백 양과 테이블을 사이에 끼고 마주 앉은 “샌드위치맨”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황달수(黃達秀)의 기록이니 만큼 그 정확성은 가히 믿을 만하리라고 생각한다.

달수는 “후위!” 하고 파문을 일으키며 테이블 위로 날아오는 백 양의 한숨이, 비록 머리는 수그리고 있으나 눈앞에 알알이 보이는 듯하다고, 그리고 그때마다 니코틴으로 말미암아 빨갛게 변색하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고, 그리고 그때마다 원고지 기슭에다 점을 한 점씩 꼭 찍어 놓는다고, 그리고 그것이 한 시간 모이면 일백스물다섯 개가 된다고, 그리고 그것을 퇴근 시에 전부 계산해보면 여덟 시간으로 치고 일팔은 팔, 이팔이 십육, 오팔 사십, 꼭 우수리 없이 일천 번씩 되는 날도 있고 조금 넘는 날도 있다고......

백 양은 금년 스물다섯인 “올드미스”였다. “올드미스”라면 누구든지 그의 순순치 못한 신세에 일말의 애수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상식적이건마는 명랑시인 백장주 양만은 실로 상식을 초월한, 그와는 정반대의 기특한 인상을 사람들에게 던져주었다.

백 양은 실상 종달새와도 같이 말하기를 즐겨하고 봄동산에 무르익은 꽃과 같이 웃기를 일쑤 잘하고, 게다가 이팔청춘 숫처녀와 같이 수줍어하는 버릇까지 가졌으니 이 만년처녀 백장주 양을 대할 때 누가 그를 우울의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으랴.

더구나 그의 동글납작한 얼굴과 뾰족한 코, 그리고 도톰도톰한 입술과 백설 같은 살빛, 키는 비록 큰 편은 못되나마 그의 얼굴과 몽실몽실한 몸집 전체에서 발산하는 눈부신 명랑성은 수많은 인텔리 남성들을 여사 옆에 물밀듯이 끌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냐! 찬란한 태양을 한아름 안고 창천을 우러러 한숨짓는 자는?”

한숨짓는 자를 싫어하고 하품하는 자를 미워하는 백 양은 사람들 앞에서 그러한 고함을 일쑤 잘 쳤다. 그러고는 실로 유쾌하다는 듯이 “하하하, 하하하......” 하고 웃는다.

백 양의 이 웃음은 항상 삼박자의 “하”의 리듬을 갖고 연발된다. 음량은 그리 크지는 못하나마 꾀꼴새처럼 밝고도 고왔다.

“누구냐! 친절의 가면을 쓰고 나의 하트에 추파를 보내는 자는?”

그리고는 또 “하하하, 하, 하, 하”를 계속한다.

이 친절의 탈을 쓰고 백 양의 하트를 엿보는 자가 바로 저 백 양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고 여신과 같이 흠모하고 있는 샌드위치맨 황달수임을 누구나 다 아는 바다.

사실여하는 단언키 어려우나 듣건대 백 양이 독신주의를 간판으로 물밀듯이 몰려드는 미남호남들의 신비로운 시선들은 “누구냐! 나의 하트를 엿보는 자는?” 하고 호명하며 툭툭 물리치는 데는 다음과 같은 흥미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샌드위치맨 황달수가 탐문한 바에 의하면 백장주 양은 바로 열여덟 살 먹던 해 가을, 모 전문학교 축구선수와 더불어 첫사랑을 속삭인 데까지는 괜찮았으나 일찍이 여고보 영어선생에게 배운 바 있는 “Love is holy(연애는 신성하다),” “Love is best(연애는 지극하다)”을 인생의 모토로 삼는 백 양에게 대하여 애인 축구선수 씨가 너무도 주책 없는 바바리즘을 발휘한 것이 도대체 잘못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어떤 날 오후, 연애장소를 XX제과 이층으로 정하고 장내는 그다지 혼잡하지는 않았으나 원래 비밀성을 좋아하는 연애인지라, 백 양과 축구선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여 한 모퉁이의 식탁을 끼고 마주 앉아서 이 행복한 한순간을 어떻게 즐겨야 할꼬...... 하고 생각하다가 백 양은 마침내 초인종을 눌러 보이를 불렀다.

“칼피스!”

“칼피스 두 잔입니까?”

“노오, 한 잔! 스트로 두 개!”

보이는 돌아서면서 픽하고 웃었으나 못 본 것이 다행인 백 양은 첫사랑을 상징한다는 칼피스를 둘이서 나누어 마시는 하도 간지러운 러브씬을 막질러 상상하고 방그레 웃고 있는데

“오마찌 도오사마.”

하고 한 잔의 칼피스가 식탁에 올려졌다.

“자아, 마십시다.”

하고 백 양은 조금도 어색한 빛을 보이지 않고 권하였으나 축구선수는 등 뒤가 몹시 간지럽고 뜨거워서 그만 힐끗 뒤를 돌아다보니 손님들의 시선은 겨우 피할 수 있었으나 보이들이 한데 모여 이 편을 바라보며 킥킥킥킥하고 있던 것이 “어데 내가 웃었나요?” 하는 듯이 목을 길게 뺀다.

그러나 축구선수는 경우가 경운지라 도저히 거절할 수 없어서 한 잔의 칼피스를 백 양과 함께 마시기를 시작하였으나 아아, 불행이로다, 스트로를 입에 물고 백 양의 콧잔등을 들여다보며 칼피스를 들이마시던 축구선수의 커다란 콧구멍이 서너 번 버룩버룩하고 경련을 일으키더니 마침내 벽력같은 “액췌!” 소리와 아울러 잔잔하던 칼피스잔 속에 일대 선풍이 일어났으니 덕택으로 백 양은 손 안 대고 칼피스로 세수하는 영광을 받게 되었다고......

그때부터 백 양의 “연애신성주의”는 일대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으나 그래도 이 신사답지 못한 축구선수를 애인으로 맞이하게 된 자기의 신세를 비관하는 한편 될 수만 있으면 그의 바바리즘을 개량시켜서 당당한 젠틀맨을 만들어보려는 비상한 각오를 한아름 품고 달빛이 고요히 나리는 어느 날 밤, 하여튼 오늘밤에는 약혼의 서약을 하리라고 생각하면서 백 양은 축구선수와 함께 한강 모래밭 위에 어깨를 나란히 한 적이 있었다고......

달빛은 없는 님도 있는 듯이 사람의 감성을 강요한다. 하물며 있는 님과 어깨를 가지런히 하고 단꿈을 꾸려는 데 있어서야 더 한층 유정하리라.

유정하신 달님이요, 이 살풍경의 표본과 같은 축구선수로 하여금 유정케 하시라!

“저 달을 쳐다보면 어쩐지 저는, 좀 고풍이지만 연해 이태백을 연상하겠지요. 어쩐지 그래요.”

“이태백이라니, 저 대국사람 말이요?”

“대국사람?”

하고 백 양은 불현듯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다음 순간 아아, 살풍경이로구나 축구선수요 하고 마음으로 외치면서 그래도

“네, 네, 대국사람 말입니다.”

하고 대답을 하니 축구선수는 머엉하니 둥근 달을 쳐다보며

“어째 그럴까? 전 저 달을 볼 때마다 한번 힘껏 차 던지고 싶은데요.”

그런데 전과 같으면 백 양은 금방 축구선수답다는 찬양의 말로 대했을 것이나 그때는 그럴 감정이 나지를 않았을 뿐더러, 이태백이가 바지를 추켜 입고 팔소매를 걷어매며 노상 신이 나서 축구연습을 하고 있는 일폭의 유모러스를 지난 아이로니칼한 광경을 눈앞에 환상하매 백 양은 불연 듯 부르르하고 온몸을 떨었다.

로맨티시즘은 연애에 있어서의 떼지 못할 한 개의 특징인지라, 환멸의 비애를 느낀다함은 이를 두고 말함인가. 백 양의 가슴속은 자못 만추의 황야였다.

그러나 시국은 일층 더 악화하였다. 백 양은 있는 힘을 다하여 깨진 로맨티시즘을 이 다시없는 러브씬에 부어볼 셈으로 가지각색의 달콤한 문구를 베풀어놓은 결과 축구선수도 어지간히 마음이 도취하여

“참, 지금 와서 생각하니 저도 저 달을 쳐다보면 그 대국사람을 연상할 것 같습니다.”

쯤 되었을 때, 물실호기(勿失好機)라고 생각한 백 양은 상반신을 반만치 축구선수에게 기대면서

“저는 연애를 무엇보다도 신성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애는 진선미의 구체화-이 이상 더 신성한 것이 어데 있어요? 저는 당신을......”

그 순간이었다. 축구선수는 자기 밑배에서 돌연 상스럽지 못한 생리작용이 일어남을 깨닫고 당황히 그것을 방지하려고 노력했으나 노력은 마침내 수포로 돌아가고, 장소가 바로 모래 위인지라 힘없는 한 방의 방사성(放射聲)은 드디어 이 신성한 러브씬을 가장 향기롭지 못한 독화사로 말미암아 영원히 더럽히고 말았다고, 그리고 그때부터 백 양은 연애신성주의를 영원히 저주한다고-

이상이 샌드위치맨 황달수 군의 보도였다. 참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으되-

제2장[편집]

그런데 명랑시인 백장주 양이 근일에 와서는 일쑤 잘 웃던 웃음도 끊어버리고 창밖의 가로수를 하염없이 내다보며 삼십 초마다 한 번씩 긴 한숨을 짓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양의 심장을 벌레가 물었다.” 하고 놀려먹는 것이었다. 그 벌레의 이름을 가로되 실연충(失戀蟲)이라고.

백 양이 실연을 당했다? 그것이 될 만한 이야긴가. 실연은 연애를 전제로 함이니 이 독신주의자인 올드미스가 걸었던 연애의 대상은 도대체 누구일까?

뉴스는 날개가 돋친 듯이 한 사람에게서 두 사람, 두 사람에서 세 사람-이리하야 저널리즘은 백 양의 가십을 과장하게 선전하기를 마지않았다.

샌드위치맨 황달수가 대체 무슨 이유로 남달리 예민한 신경을 가지고 백 양에 관심하는가는 그가 양의 심장을 엿보는 자 가운데 한 사람이란 것도 빼놓지 못할 이유러니와 그의 가십을 즐겨하는 성미와 아울러 그의 집이 백 양의 하숙과 지붕을 나란히 하고 서 있다는 사실도 계산에 넣어야만 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어떤 날 석양이었다.

“대체 장주 씨의 상대자가 누굽니까? 나는 장주 씨의 행복을 위하여 그를 설복해드리고자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을 테니-”

황달수는 백 양의 하숙집 마루에 걸터앉아 반만큼 웃음을 띤 낯으로 그렇게 물었으나 백 양은 도대체 함구불언이다.

“누구냐! 창천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자는?”

황달수가 양의 어투를 본받아 그렇게 고함을 쳤을 때였다.

대문 밖에서

“백장주 씨 우편이오!”

하고 배달부가 들어오면서 편지 한 장을 마루 위에 내던지고 나간다.

“윤세훈......?”

달수는 편지 겉봉을 얼핏 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 장주 씨, 윤세훈 박사는 언제부터 아시오? 허어!”

하고 감탄의 눈을 부릅뜨니

“뭐, 윤세훈 박사......? 그이가 무슨 편질까?”

여사는 발딱 일어섰다.

윤세훈(尹世勳) 박사에 관한 황달수의 지식을 대강 추려보면 박사는 금년 서른세 살, 백만장자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멀리 독일에 유학하여 영예스러운 음악박사라는 학위를 얻어가지고 금의환향한 것이 재작년 봄, 사파이어같이 파란 눈동자를 가진 독일여자를 데리고 온 그는 삼청동에다 굉장한 양옥을 지어놓고 매일과 같이 달콤한 사랑의 생활을 향락하고 있던 것이 불행히도 그해 가을, 안겔리카(독일여자)는 그만 폐병으로 말미암아 이역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 박사는 매일처럼

“안겔리카! 안겔리카!”

를 부르짖으며 사랑하는 아내의 영혼을 찾으려 이리저리로 헤매이기를 마지않았다고.

안겔리카가 죽은 후 윤 박사에게는 소위 저라고 떠드는 서울장안의 숙녀들로부터 거의 매일처럼 구혼의 프로포즈가 들어왔으나, 청이불문(聽而不聞)인 윤 박사는 다음과 같은 최후의 한마디로 그들을 죄다 물리쳐버렸다고 한다.

“당신이 안겔리카요?”

그와 같은 순정인 윤 박사로부터 올드미스 백장주 양에게 온 이 편지란 대체 어떠한 내용을 가졌는고?

“그이와 전부터 교제가 있었습니까?”

호기심이 황달수를 꽉 붙잡는다.

“없었어요. 아직 한 번도-”

“글씨는 아주 유치하구먼! 보통학교 사오학년 생도들도 이보다는 낫게 쓸걸!”

“어렸을 적부터 독일에서 자라났으니까 그런 게지요.”

백 양은 아무 감춤이 없다는 듯이 황달수 앞에서 편지를 뜯었다.

백장주 씨.

단 한 번 보고 사모하지 않으면 아니 될 기연이 저와 당신 사이에 서려 있을 줄이야 어찌 꿈엔들 상상하였으리까. 이를 가리켜 사람들은 전생의 인연이라고 불러왔습니다.

백장주 씨.

아직 한 번의 면식조차 없는 당신에게 돌연 이와 같은 서신을 씀을 넓히넓히 용서해주십시오.

재작일 아침(바로 주일날 아침입니다)-발코니에서 망원경으로 삼청동공원 일대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니까, 아아, 저의 집 담 밑으로 천사와 같이 아장아장 걸어가는 당신의 자태. 그리 크지도 않고 그리 작지도 않은 키, 동글고도 납작한 얼굴, 도톰도톰한 입술, 뾰족하고도 탐탁한 코, 개성미가 풍부한 프로필-저는 무엇보다도 프로필을 사랑합니다. 갈고 또 간 대리석과 같은 피부, 섬섬옥수에 반쯤 늘어진 손수건-그것은 틀림없이 내가 이즉이 안겔리카에서만 발견하던, 그리고 그 이상의 이상적 타입이었습니다.

아장아장 걸어와서 아장아장 걸어가던 그 몇 분 몇 초의 값진 순간이여! 아아,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이여, 황금도 명예도 생명도 귀하지 않으오니 단 한 번 저 천사를......

백의의 천사여!

저의 망원경은 드디어 하늘로 올라갈 줄을 잊은 듯한 땅 위의 천사가 살고 있는 소위 지상천국을 발견했습니다.

(필자 아룀-백 양의 하숙은 삼청동과 근접한 가회동 한 모통이) 그리고 저의 고상치 못한 취미를 꾸지람 마십시오. 불타는 가슴을 억제할 바 몰라 천사가 살고 계시는 지상천국으로 달려갔습니다. 번지와 성함을 알고저-

천사여!

저는 지금 중세기의 나이트와도 같은 열정과 성의와 용기를 가지고 당신께 구혼하노니 용서하시고 회신을 주옵소서!

윤 세 훈 올림

읽고 나니 백장주보다도 일층 더 놀란 것은 샌드위치맨 황달수였다.

“대관절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그 고집불통인 윤세훈 박사가 올드미스에게 잔뜩 반했다! 뭐, 섬섬옥수에 반쯤 늘어진 손수건? 우와, 우와, 우왓!”

백 양도 윤세훈 박사라는 데 어지간히 흥미를 느낀 듯하였으나 역시 귀찮다는 듯이 편지를 접어서 방 안 테이블 위에 툭 내던지면서 하는 말이

“별것이 다 사람을 희롱하는군!”

“별것이라니, 그래 윤세훈 박사가 아직 부족하다는 말씀이요? 아, 인물이 없나, 명예가 없나, 게다가 백만장자의 외아들이겠다...... 그래 뭐가 부족하다는 말이요?”

“흥! 윤세훈이면 윤세훈이지, 제가 대체 뭐길래- 세계적 음악가, 인기, 돈, 미남자...... 그래 그러면 그랬지!”

백 양은 자기를 과장되게 칭송한 것이 도리어 불쾌하다는 듯이, 그리고 무슨 크나큰 힘에 반항하려는 듯이 황달수를 한번 흘겨보며

“그런 부질없는 연문을 받고 좋아서 가슴이 뛰노는 그런 시절은 벌써 지났답니다. 사랑의 조건이 명예, 황금, 미남-그것만이에요?”

백 양은 그렇게 정면으로 똑 잡아떼고는 입맛이 쓰다는 듯이 아무 말도 없이 수심이 가득 찬 얼굴로 머엉하니 바깥만 내다보고 앉았더니 갑자기 일어서면서

“오케이! 회답을 해야지!”

하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책상서랍에서 원고지를 꺼내어 앞에 펴 놓더니 잠깐 두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음악박사 윤세훈에게 회답을 쓰기 시작하였다.

제3장[편집]

불량신사 윤세훈 씨.

저는 일찍부터 당신의 명성과 훌륭하신 연기에 도취하고 있던 팬의 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당신을 우러러보았으며 흠모의 마음을 금치 못하였던가. 당신은 바이올리니스트로 전 세계의 애인인 동시에 저의 애인이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당신은 멀리 이역에서 데리고 온 사랑하시던 부인 안겔리카를 위하여 일생을 독신으로 보내시겠다는 그 순정하신, 그 너무나 순정하신 당신의 성격을 얼마나 제 일같이 기뻐하였으며 감격하였으리오! 당신은 또한 사랑의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불량신사 윤세훈 씨.

당신은 마침내 저의 마음속에서 곱디곱게 타고 있던 환영의 불길을 여지없이 꺼버리고야 말았습니다. 당신이 보내신 이 러브레터로 말미암아-

윤세훈 씨여!

지금은, 그리고 우리 조선에서는 당신이 보내신 그런 유치하기가 짝이 없는 버터 냄새가 코를 찌르는 연애편지는 유행하지를 않습니다. 혹시 백림에서는 어떤지 헤아릴 수 없으나마-

윤 박사여! 당신의 글을 읽고 자뭇 두통을 금치 못하는 저를 눈감고 상상해보십시오. 그리고 좀 더 연애문 쓰는 법을 연습하시지요. 글씨도 유치하고-어떤 사람이 당신의 이 연문을 보고 보통학교 삼사학년 정도라고 평한 일이 있사오니 어떠하오?

세계적 예술가인 윤 박사여! 저는 당신이 마음껏 썼다고 생각하는 그 연애문에 사십 점이라는 낙제점수를 드리고자 결심하였사오니 별로 낙담하실 것 없이 한 이삼 년 동안 열심히 공부를 하신 후에 연애편지를 쓰기로 하시지요. 그것뿐이겠습니까, 후에 이르러 환멸의 비애를 느끼지 않도록 좀 더 리얼리스틱한 관찰의 습관을 얻으시지요.

납작코의 프로필이 어찌 좋을 리가 있으며 동양 사람의 피부를 어찌 대리석에다 비할 수 있으리요. 섬섬옥수에 반쯤 늘어진 손수건이 뭐 어쩌고 어째요? 칭찬만 하면 기뻐하는 것은 옛날 옛적의 처녀총각들-

불량 윤세훈 씨여!

당신이 밤잠도 못하고 쓰신 듯한 이 귀중한 연문을 동봉하여 드리오니 홍보청보(紅緥靑緥)에 찬찬히 싸두었다가 대대손에게 물려주옵소서.

백장주

“자아, 어때요?”

하고 백 양은 “하하하, 하하하”를 한바탕 웃어댄다.

“그래 이것을 보낼 테요?”

백 양의 대담한 뱃심에 황달수도 어지간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내면 어떠우?”

“아아, 이렇게 훌륭한 자리를 툭툭 차버리는 힘과 용기를 주신 장주 씨의 리베(‘사랑’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의 독일어-편집자주)이란 대체 얼마나 훌륭한 분인고?”

백 양은 한번 빙그레 웃고 나더니

“대체 서양서 자라난 사람처럼 맹물같이 싱거운 분들은 없겠다. 아아하하! 이 글을 읽고 난 윤 박사나리의 얼굴이 보고도 싶어. 하하하, 하아 하아 하아!”

그런 일이 있은 후 약 사흘이 지난 어떤 날-

열두 시 고동이 “으앙”하고 나자마자 백 양은 교정의 붓대를 놓고 황달수더러 따라 나오라는 윙크를 던진 후 밖으로 나갔다.

백 양과 마주 앉아 한 테이블에서 일을 본 지가 근 삼 년, 황달수가 그리도 양의 심장을 엿보고 있건마는 단 한 번의 윙크를 아직까지 받아본 적이 없는지라 가슴은 자뭇 풍전의 등화처럼 펄럭거렸다.

장황한 걸음으로 밖에를 나가보니 백 양은 맞은편 거리 다방 “오렌지” 앞에 우뚝 서서

“이리로 와요!”

하고 소리를 치면서 다방 안으로 들어간다.

대리석 식탁을 사이에 끼고 마주 앉으니 백 양은 묵묵히 한 장의 편지를 식탁 위에 내놓았다. 절수가 두 장 붙은 것을 보니 내용도 상당하리라. 순간, 윙크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구나!

“윤세훈, 하아, 그이한테서 또 왔구먼요.”

“내용을 좀 읽어보세요. 아아, 철면피, 철면피!”

백 양은 입맛이 쓴 모양이다.

“뭐, 철면피라니......? 내용도 상당히 많구먼요.”

“이 편에서 보낸 두 통의 편지까지 죄다 돌아왔답니다.”

“죄다 돌아왔다......? 음! 그런데 이것은 윤세훈의 필적이 아니로구만. 상당히 잘 썼는데 그래?”

“하여튼 읽어보세요.”

편지를 꺼내보니 저번에 윤 박사로부터 왔다고 믿었던 그 구혼편지와 그것에 대한 백 양의 회답 외에 다음과 같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서신으로나마 처음 보이겠습니다.

당신의 성함을 백장주 씨라고 그러셨지요.

그러면 백장주 씨!

먼저 저는 저를 가리켜 불량신사라고 불러주신 당신에 대하여 적지 않은 불쾌와 노염을 안 느낄 수 없었사오니 이에 대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은 저에게 사죄할 의무가 있다고 믿습니다.

대체 당신은 어떠한 분이길래 즐겨 사람을 모욕하기를 좋아하며 대체 어떠한 성격과 어떠한 신분을 가졌길래 스스로를 그리도 값비싸게 평가하고자 하시는지, 우둔한 소생의 신경으로는, 그리고 그리 넓지 못한 소생의 교제범위로서는 가히 추측하기 어려운 바 많습니다.

당신의 그 상스럽지 못한 편지를 받은 후 소생은 이에 대한 의문을 풀고자 친구 한 분에게 당신의 성명 삼자를 물은 바 있었더니 아아, 가경할 일이올시다! 그래도 당신은 우리 조선에선 그리 많지 않은 시인이라더군요. 미안한 바 짝이 없는 것의 하나는 당신이 소생의 예술을 칭송한 바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소생은 지금 당신의 예술을 칭송할 길이 없사오니, 이유는 상호간에 묻지 않고 대답하지 않는데 묘미가 있겠다고 우고(愚考)하는 바이나마 그래도 말씀해주시지요 하고 청하신다면 소생은 아직 당신의 그 훌륭하신 예술에 접한 적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네, 무척 미안하다고 생각하나이다.

뭐, 백장주 씨라고 부르셨지요?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백장주 씨여!

우고하노니 시인이면 시인다운 문장이 있을 것이며 여자라면 여자다운 어투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량신사이니, 사십 점이니, 이삼 년 동안 더 공부를 하라니 생각건대 시인치고도 좀 야비하신 편이 아니십니까? 네네, 잘 알았습니다. 듣건대 당신은 뭐 “명랑시인”이라던가요? “명랑”은 “무지”와 일맥의 공통성이 있다함도 잘 알겠습니다.

사실은 당신의 충고대로 청보홍보에 싸서 대대손손에 물려줄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았으나 만사를 묵묵히 무시해버리고 뒤지로라도 써볼까 하였습니다만은 서간지(書簡紙)란 원래 두터운지라 잘못하다는 몸에 상처를 받을까 싶어서 그대로 내버려두었던 것이, 문득 생각하니 사람을 가르침은 한길 같지 않다고- 말로 해서 들을 놈은 말로 일러주어야 할 것이고 두들겨서 들을 놈은 두들겨줘야 할 것이라고- 다행히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장을 써서 생업을 삼는 소생이 아님을 기회로 여기고 이 거추장스러운 글월을 당신 앞에 널어놓나니, 일류시인 백장주 씨여! 문장의 미추(美醜)는 가릴 바 없사오며 내용만이라도 넉넉히 양해하시면 다행이지요.

소생이 아직 그의 존재를 모르는 일류시인 백장주 씨여!

지금 소생이 쓰고 있는 이 글월의 서체(書體)와 전번에 소생이 드렸다고 당신께서 믿고 있는 그 유치한 필적을, 만일 당신이 졸리시거든 눈꺼풀 위에 얼음이라도 한 덩어리 사다 올려놓고 똑똑히 대조하여 보시옵지요. 그래도 그 러브레터의 발송인을 소생이라고 단언할 용기가 당신께 있는지 없는지?

소생이 겨우 그의 존재를 알게 된 일류시인 백장주 여사여! 생각건대 그 러브레터의 발송인은 퍽 순진한 청년인 듯싶습니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당신과는 좀 짝이 기울지나 않을까 저어함은 오직 소생의 편중된 평가일는지? 납작코의 프로필을 격찬한 것도 그 청년이 아니면 못할 찬사(讚辭). 그 점에 대해서는 거울과 한번 의논하시는 것이 어떨까 하오? 여사여! 이만하고 그만두기로 하겠습니다. 하여튼 이후에는 그러한 편지를 일체 거절하오니 그리 아시오.

윤세훈

제4장[편집]

편지를 읽고 난 황달수는 히쭉하고 한번 웃고 나서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하고 백 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요!”

하고 백양은 톡 내쏜다.

“뭐가 어떻게 되다니? 이 두 장의 편지를 대조해보니 필적이라든가 교양이라든가가 판이하질 않아요?”

“그럼 달수 씨는 이 러브레터의 발송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글쎄 말이지요. 그것이 지금 문제가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허어 참 기특한 일도 다 있구먼요! 분명히 삼청동 XX번지 윤세훈이라고 쓰여 있지를 않습니까? 그런데 대관절 지나간 일요일 아침, 삼청공원으로 산보가신 적은 있습니까?”

“네, 분명히 갔었어요.”

“그때 윤세훈 씨네 집 발코니에 누가 서 있는 것을 못 보았소?”

“못 보았어요. 아니 전 아직 윤 박사네 댁이 어딘지도 몰라요.”

“왜 삼청동 풀 옆에 커다란 양옥이 있지를 않습니까. 그게 윤 박사네-”

“아 글쎄 모른대도 그러세요!”

백양은 발깍 화를 내는 것이었다.

“뭐 그리 화내실 것은 없고…… 흥, 하여튼 이상한 일이로구먼요. 누가 이런 부질없는 장난을 했을까?”

“장난은 무슨 장난이에요!”

“그럼 누구가 이런 편지를……?”

그때 백 양은 핸드백 속에서 편지를 한 장 또 꺼내면서

“이것이 제가 어제 밤에 쓴 회답이에요. 좀 읽어보세요.”

황달수가 의아스런 눈치로 백 양이 내놓는 편지의 겉봉을 보니 역시 “윤세훈전”-이라고 뚜렷이 쓰여 있다.

“그러면 역시 윤세훈의 장난입니까?”

“하여튼 읽어보세요.”

면피치고도 좀 정도를 넘칠 철면피 윤세훈 씨. 오늘 아침 당신의 서신을 보았습니다. 그 젠틀맨식 아이로니는 가히 문학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우고하노니 이후부터는 바이올린을 던지고 펜을 잡으시오. 버나드 쇼 급(級)의 걸작은 아마 잠꼬대로라도 튀어나올걸요. 비겁하기가 짝이 없고 면피층(面皮層)이 남달리 두터우신 윤세훈 씨! 사실 저도 당신의 편지를 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음은 그래도 당시 찰나적임에 지나지 못하였으니 이제 그 이유를 말해보건대, 과연 맨 처음에 온 편지와 오늘 온 편지를 대조해보건대, 필적은 일견 상이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면 윤 박사여! 맨 처음에 온 그 러브레터의 발송인은 과연 누구겠습니까? 봉투에도 틀림없는 당신의 주소와 성명- 여기까지 생각해본 당신은 연방 용모를 가다듬어가지고 “그것을 어찌 나에게 다 물으시우……? 어떤 부질없는 사람의 장난편지를-”하고 도리어 저를 꾸지람하고 싶어 하시는 당신의 그 비겁한 가슴속이 마치 만리경 같은 것으로 어른어른 눈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아, 사나이답지 못한 자요. 자기가 저질러놓은 일에 대하여 좀 더 사나이답고 신사다운 책임과 신념을 가지시지요. 쏘았다 맞지 않으면 삼십육계 달릴 주(走)자부터 생각하니 이 어찌 비상시국에 처할 우리들 선량한 시민의 각오이랴?

그런 맘씨를 가지고는 연애는 못한답니다. 연애는 여성과 남성 사이에 사리어진 영원의 싸움- 마치 펜싱(劍道)에 있어서의 “기아이(‘기합’이란 뜻의 일본어-편집자주)”와도 같으오니 달릴 주자를 하트에다 붙이고야 어찌 감히 승리를 예상할 수 있으리오.

윤 박사여- 아니 주(走) 박사여! 맨 처음에 온 편지는 당신의 왼편 손이 쓴 것, 이번에 온 편지는 당신의 오른편 손이 쓴 것 - 어떻습니까?

그러나 윤세훈 씨여!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어떠세요......? 뉘우치는 자는 욕하지 말지어다. 그것을 당신은 도리어 저를 모욕했습니다. “명랑”은 “무지”와 일맥의 공통성이 있다느니 -

아아! 예수 크리스트로부터 영구히 미움 받을 윤세훈 박사여! 양심의 거울을 한시바삐 연마하시라!

백장주

“허어, 이것이야말로 유모어 소설 이상이로구먼요- 응, 하나는 왼손으로 쓰고 하나는 오른손으로 썼다! 그리고 그것이 삼십육계 달릴 주자를 의미한다고……”

“물론!…… 불성공시에 대한 도피공작(逃避工作)이지요,”

“음, 그럴듯한 걸-”

그런 일이 있은 지 또 이틀이 지난 날 - 바로 퇴근시각이었다.

사를 나오면서 황달수가

“그 후 무슨 소식이 없어요?” 하고 물었더니

“잠자코 저를 따라오세요.”

하길래 잠자코 백 양의 뒤를 따랐다. 양은 하이힐 소리도 높다랗게 낙엽진 보도를 한참 동안 걸어가다가 “오렌지”의 유리문을 어깨로 밀고 들어간다.

“아이스크림 두 개.”

를 주문한 백양은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만 좋아요? 어디 달수 씨의 탁견을 한번 들어봅시다. 참……”

“사건이 아직도 진전중인 모양이시로군요.”

“사건인지 뭔지…… 참 이상한 일도 다보겠어요. 끝끝내 제가 한 편지가 아니라고 잘라 떼겠지요.”

“그럼 또 편지가 왔다는 말씀입니다그려.”

“네, 이것 좀 보세요- 이 일을 참 어찌하나? 한번 만나서 망신을 시켜줄까 봐……”

여사는 가장 불유쾌하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면서 윤세훈으로부터 왔다는 서간을 내어준다.

백장주 씨.

저는 지금 노해야 할지 웃어야 할지를 분간치 못하나이다.

저는 사실 그런 아드리미 청년의 장난과 같은 연애편지를 쓴 적은 꿈에도 없습니다. 대체 당신은 무엇을 오해했기로 그리고 무엇을 증거로 그것이 저의 왼손 글씨라고 단언하시는고?

백장주 씨.

적어도 저는 쏘았다 맞지를 않으면 삼십육계 달릴 주자를 생각하는 그런 비겁한 연애를 하여본 적은 없습니다. 쏘아서 맞지를 않거든 일생을 두고, 아니 일생, 이생, 삼생을 두고라도 맞히도록 쏘아보겠다는 것이 저의 연애철학임을 아신다면 당신께서는 그런 근거 없는 도그마를 가지고 사람을 공연히 농락하실 용기를 감히 갖지 못하리라고 믿사오며 적어도 세상의 고락을 충분히 맛보신 듯한 노양(老孃)으로 하여금 그와 같이도 경박한 태도를 취하게 한 것은 실로 유감천만이라고 생각하는 바올시다.

백장주 씨!

이번에는 저로부터 한 가지 제언(提言)이 있사오니 다름 아니라, 만일 그것이 저의 왼편 손의 필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당신은 대체 무엇을 각오하고 계십니까……? 이와 같이 편지로만 가지고서는 사건이 더욱더욱 착잡성을 띠기만 하오니 어디선가 조용히 만나서 흑백을 정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는 당신의 눈앞에서 그것이 저의 왼편 필적인가 아닌가를 실증하여 드리고자 하나이다.

윤세훈

“그래 만날 테요?”

“글쎄 말예요. 그것을 달수 씨와 지금 의논하는 것이 아녜요?”

“음-, 만나도 좋고 안 만나도 좋고…… 둘 다 좋구먼.”

“어째 그래요? 만나서 한번 망신을 주는 것도 통쾌지사가 아녜요?”

“글쎄! 어느 편이 통쾌를 느끼고 어느 편이 망신을 당할는지, 거야 봐야만 알죠.”

“어째 그래요?”

“어째 그렇지 않담?”

“그의 왼손이 쓴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여자의 직감으로-”

“그럼 한번 만나보시우. 망신을 톡톡히 당할 각오를 가지고-”

그래도 백 양은 서간지를 꺼내어 다음과 같은 간단한 편지를 썼다.

윤세훈 씨.

당신은 어디까지든지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고 끝끝내 감출 작정입니다그려. 그래, 괜찮습니다. 만납시다. 만나서 그것이 당신의 왼손이 쓴 글씨란 것을 내 눈앞에서 증명시킬 테니. 그리고 저의 탐정안(探偵眼)에 틀림이 없을 때 저는 결코 잠자코 있지는 않을 겝니다.

그러면 명일 오후 다섯 시 삼십 분- 종로 “오렌지”까지 와주시기를-

백장주

제5장[편집]

사건은 거의 클라이막스에 다다른 것 같다. 러브레터는 대체 누구가 보냈던가? 그것은 독자제군과 같이 필자 자신도 가히 추측할 길이 없다. 단지 사건이 어떻게 발전할까를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이튿날 오후 다섯 시 삼십 분-

황달수는 백 양보다 먼저 다방 “오렌지” 한구석에 진을 치고 윤 박사와 백 양의 이상야릇한 인터뷰를 구경할 셈으로 멍하니 유리문 밖 보도를 내다보고 있노라니까 점잖은 신사 한 사람이 스틱으로 도어를 밀치고 들어왔다.

“윤세훈!”

황달수는 그가 음악가 윤세훈임을 잘 안다.

그는 점내를 한번 휘잉 돌아보더니 저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아이스크림을 청한 후에 팔뚝시계를 들여다본다.

오 분이 지났다. 윤세훈은 아이스크림을 또 한 그릇 청한다. 그때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백장주는 잠깐 동안 도록도록하더니 저편 구석에 앉아있는 황달수를 발견하고 방끗 눈으로 웃어버린 후에 또다시 도록도록하면서

“윤세훈 씨가 어느 분이에요?”

하고 새침을 딱 떼면서 손님들을 한번 휘둘러보았다. 손님들의 시선이 일시에 백 양께로 쏠린다.

“네, 제가 윤세훈입니다.”

하고 의자에서 일어서는 그를 향하여 백 양은 일순간 우두커니 서서 가장 날카로운 눈초리로 핼끗 쳐다보더니 그래도 다음 순간에는 숙녀다운 예의를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듯이 양이 가지고 있는 가장 애교 있는 제스츄어로 생끗하고 한번 웃으면서 구두소리도 높다라니 또박또박 윤세훈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황달수의 자리와 그들의 자리는 그리 떨어져 있지를 않음으로 그들의 주고받고 하는 대화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윤세훈이 착석을 권한다. 백 양은 서슴지 않고 앉는 것이다. 그리고는 초대면의 인사를 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바로 그 러브레터의 혐의자 윤세훈-”

그의 외국에서 자라난 제스츄어에는 다분의 유머와 여유가 있었다. 싱글싱글 웃는 것이다.

윤세훈의 그 여유 있는 태도가 백양의 머리를 누름인지 순간 얼굴이 빨개지는 양은 그에게서 받는 압박감을 좀체로는 처리할 수가 없는 것 같은 태도였다.

“호호호……”

하고 가장 수줍게 웃어버리는 것으로 ‘캄푸라-쥬(Camouflage)’할 계획이 아닌가?

“호호, 제가 바로 그 명랑시인 백장주- 윤선생의 말씀과 같이 좀 야비한 편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승부는 벌써 결정되었다! 설사 그것이 농담이라 할지라도 백 양은 스스로를 야비하다고 평하지를 않았는가……? 보라! 만물을 노려다보고 있는 윤세훈의 반석과도 같은 자태를! 아아, 약한 자여, 너희들의 이름을 가리켜 여자라고 부른 것이 그 어찌 셰익스피어의 전매특허이랴! 황달수는 마음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윤세훈은 어찌된 셈인지 좀체로 입을 열지를 않는다. 묵묵히 앉아서 백양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는 것이었다.

백장주의 얼굴은 무척 간지러운 모양이다. 약간 입술이 경련을 하는구나.

십 초, 이십 초, 삼십 초!

이렇게 되면 다음에는 의지와 의지의 싸움이다. 백 양도 지지 않을 만큼 윤세훈의 얼굴을 마주 쳐다본다.

사십 초, 오십 초, 육십 초!

그때 윤세훈은 만년필과 종이를 한 장 주머니에서 꺼내어 테이블에다 펼쳐놓으니 백양도 핸드백을 열고 문제의 러브레터를 꺼내놓았다.

윤세훈은 만년필을 왼손에 쥐고 가장 어색한 솜씨로 편지를 두어줄 코피한 후에 싱글싱글 웃으면서 그것을 백장주 앞에 내보인다.

“어떻습니까?”

순간 백 양의 양볼이 화끈 다는 모양이다. 정히 필적은 상이하였다.

“어떻습니까? 백 선생!”

하고 또 한 번 물었을 때, 백 선생은

“모든 것이 저의 패부입니다.”

하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일어선다.

“왜 돌아가시렵니까? 좀 더 이야기나 하시지요.”

“이 이상 더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저의 부질없는 독설을 용서해주세요.”

윤세훈은 백 양의 몽글몽글한 뒷모양을 머엉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제6장[편집]

이런 일이 있은 지 한 주일 후- 백양은 돌연 사직원을 제출하였으니 윤세훈 박사와 결혼한다는 것이 그에 대한 이유였다.

“아,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요?”

사직원을 제출하고 “여왕사”를 영원히 아듀하는 백 양의 뒤를 황달수는 황급히 따라오면서 물었다. 백양은 한참 동안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

를 연발하다가

“그것은 나의 연애비상전술(戀愛非常戰術)- 이것을 좀 읽어보세요.”

하고 윤세훈에게서 온 편지 한 장을 내준 후에 멍하니 서 있는 황달수를 한번 힐끗 돌아보면서

“황 선생, 참 미안합니다.”

를 한마디 쓸쓸한 페이브먼트 위에 남겨놓고 저물어가는 황혼의 거리를 댄싱 스탭으로 경쾌히 걸어간다.

백장주 씨!

어제 저녁 “오렌지”에서 소생은 당신의 눈앞에서 소생의 왼편 필적을 보여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러브레터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는 사실을 당신도 충분히 승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저질러놓은 일에 대하여 책임과 신념을 갖고 계시는 당신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백장주 씨. 소생은 지금 당신께 손해배상을 청구합니다. 약 십여 일간 소생은 당신의 번잡한 서간으로 말미암아 막대한 정신적 손상을 받았습니다. 소생은 직접 당신의 손으로 이 교란된 정신을 어루만져주시기를 바라는 바올시다. 그러려면 만사를 불고하고 소생은 당신과 결혼할 수밖에는 없사오니 이 이외의 배상의 방법을 소생은 절대로 용서치 않나이다.

백장주 씨.

작일 “오렌지”에서 단 한 번 본 당신을 이처럼 사모하지 않으면 아니 될 기연이 우리들 사이에 사리어 있을 줄이야 어찌 꿈엔들 상상하였으리요. 이를 가리켜 사람들은 전생의 인연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리 크지도 않고 그리 적지도 않은 키, 동굴고도 납작한 얼굴, 도톰도톰한 입술, 뾰족하고도 탐탁한 코(그런데 당신께서는 어째 납작코라고 자비하셨는지?), 개성미가 풍부한 프로필- 저는 무엇보다도 프로필을 사랑합니다. 갈고 또 간 대리석과 같은 피부, 섬섬옥수에 반쯤 늘어진 손수건이 보이지 않음은 이 어찌된 연고인고?

아아, 그것은 틀림없이 소생이 일찍이 죽은 아내 안켈리카에서만 발견하던, 그리고 그 이상의 이상적 타입이었습니다. 되뚝되뚝 걸어왔다 되뚝되뚝 걸어가던 그 몇십 분의 값진 순간이여! 황금도 명예도 생명도 귀치 않으오니……,

백장주 씨.

다음에 만나면 저도 한번 당신을 시험해보고자 하는 바 있사오니 그것은 소생이 보고 있는 눈앞에서, 문제의 러브레터와 똑같은 문구를 당신의 왼편 손이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윤세훈

“피해자 자신이 범인……!”

순간, 황달수의 입술이 해죽 하고 벌어진다.

“고런 깜찍한 년! 제가 제 왼손으로 쓴 편지를 제게 보내놓고-”

황달수는 그때야 비로소 삼십 초 만에 한 번씩 테이블 위를 날아오던 백장주 양의 한숨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던가를 짐작하고 백양의 연애비상술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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