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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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에 "인자(仁者)는 요산(樂山)하고 지자(智者)는 요수(樂水)"라 하였으니, 내 일찍이 인자도 못 되고 지자도 못 되었으니 어찌 산수를 즐길 수 있는 풍격(風格)을 갖추었으리요만, 무릇 사람이란 제각기 분수에 따라 기호나 애완(愛翫)하는 바 다르니 나 또한 어찌 애완하는 바없으리요. 그러나 연기(年紀) 장자(丈者)에 이르지 못하고 덕이 고인(古人)에 미치지 못함에 항상 신변쇄사(身邊鎖事)를 들어 사람에게 말하길 삼갔더니, 이에 외람되게 내가 인(印)을 사랑하는 이유를 말하면 거기엔 남과 다른 한가지 곡절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印)이라고 해도 요즘 사람들이 관청이나 회사엘 다닐 때 아침 시간을 맞춰서 현관에 썩 들어서면 수위장 앞에서 꼭 찍고 들어가는 목각 도장이나, 그렇지 않고 그보담은 한결 행세깨나 한다는 친구들이 약속수형(約束手形)에나 소절수(小切手)쯤에 찍어 내는 상아나 수정에 새긴 도장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 사람들같이 제법 수령방백(守令房伯)을 다녀서 통인 놈을 데리고 다니던 인궤(印櫃)쪽이 나에게 있을 리도 만무한 것이라 적지않게 고이하기도 하나, 그보다도 이놈 인이란 데 대한 풍속 습관도 또한 여러 가지가 있었으니, 우선 먼 데 사람들을 쳐보면, 서양 사람들은 사인이란 것이 진작부터 유행이 되었는 모양인데, 그것이 심하게 발달된 결과는 소위 사인 마니어가 생겨서 유수한 음악가, 무용가, 배우, 운동 선수까지도 거리에 나서면 완전히 한 개 우상이 되는 것이지마는, 내가 말하려는 본의가 처음부터 그런 난폭한 아희(兒戱)가 아니라 그렇다고 중국 사람들처럼 국제간에 조약을 맺고 '첨자(籤子)'를 한다는 과도히 정중한 것도 역시 아니다.

일찍이 이 땅에는 '수결(手結)'이란 형식으로 왼편 손에 먹을 묻혀서 찍은 일도 있고, '착함(着啣)'이라는 그보다 매우 발전된 양식으로 성자(姓字)밑에 자기 이름자를, 대개는 어조(魚鳥)의 모양으로 상형화해서 그리는 법이 있었는데, 이것은 가장 보편적으로 쓰였고 장구하게 쓰였으니 이것보다도 앞에 쓰여지고 또한 문한(文翰)하는 사람들에게만 쓰여진 것 중에 '도서(圖書)'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글씨나 그림이나 쓰고 그리면 그 밑에 아호를 쓰고 찍었고, 친우간에 시를 지어 보낼 때도 찍는 것이며 때로는 장서표(藏書表)로도 찍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도서는 각수(刻手)나 도장장이에게 돈을 주고 새기는 게 아니라 시서화(詩書畵)를 잘하는 사람들이면 자기 자신이 조각을 한 개인의 여기(餘技)로 하는 것이었으며,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정교한 조탁(彫琢)을 하는이도 있었고, 또 이런 것이라야 진품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 시대에는 이런 풍습이 유행하기를 마치 구주(歐州)의 시인들이 한 가지 여기로써 데상 같은 것을 그리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풍습이 성행하게 되면 될수록 인재의 선택이 매우 까다로왔다. 흔히 박옥(璞玉)이라는 것이 많이 쓰였으나 상아나 수정도 좋은 것이고, 아주 사치를 하려면 비취나 계혈석(鷄血石)이나 분황석(芬皇石)같은 것이 제일 좋은 것인데, 이것들 중에도 분황석은 가장 귀한 것으로 조선에서는 잘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시골 살던 때 우리 집 사랑 문갑 속에는 항상 몇 봉의 인재가 들어 있었다. 그래서 나와 나의 아우 수산(水山)군과 여천(黎泉)군은 그것을 제각기 제 호(號)를 새겨서 제 것을 만들 욕심을 가지고 한바탕씩 법석을 치면 할아버지께서는 웃으시며 "장래에 어느 놈이나 글 잘하고 서화 잘하는 놈에게 준다"고 하셔서 놀고 싶은 마음은 불현 듯 하면서도 뻔히 아는 글을 한 번 더 읽고 글씨도 써보곤 했으나, 나와 여천은 글씨를 쓰면 수산을 당치 못했고 인재는 장래에 수산에게 돌아갈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글씨 쓰길 단념하고 화가가 되려고 장방에 있는 당화(唐畵)를 모조리 내놓고 실로 열심히 그림을 배워 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12세의 소년으로 하여금 그 인재에 대한 연연한 마음을 팽개치게 하였으니 내가 배우던 중용,대학은 물리니 화학이니 하는 것으로 바뀌고 하는 동안 그야말로 살풍경의 10년이 지나 갔었다.

그때 봄비 잘 오기로 유명한 남경(南京)의 여관살이란 쓸쓸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나는 도서관을 가지 않으면 고책사(古冊肆)나 골동점에 드나드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얻은 것이 비취 인장(翡翠印章) 한 개였다. 그다지 크지도 않았건만 거기다가 모시 칠월장(毛詩七月章) 한 편을 새겼으니 상당히 섬세하면서도 자획(字劃)이 매우 아담스럽고 해서 일견 명장(名匠)의 수법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얼마나 그것이 사랑스럽던지 밤에 잘 때도 그것을 손에 들고 자기도 했고, 그 뒤 어느 지방을 여행할 때도 꼭 그것만은 몸에 지니고 다녔다. 대개는 여행을 다니면 그때는 간 곳마다 말썽을 부리는 게 세관리(稅關吏)들인데, 모든 서적과 하다못해 그림 엽서 한 장도 그냥 보지 않는 녀석들이건만 이 나의 귀여운 인장만은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내 고향이 그리울 때나 부모형제를 보고 싶을 때는 이 인장을 들고 보고 칠월장을 한번 외도 보면 속이 시원하였다. 아마도 그 비취인에는 내 향수와 혈맥이 통해 있으리라.

그 뒤 나는 상해(上海)를 떠나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언제 다시 만날는지도 모르는 길이라 그곳의 몇몇 문우들과 특별히 친한 관계에 있는 몇 사람이 모여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을 같이하게 되었는데, 그 중 S에게는 나로부터 무엇이나 기념품을 주고 와야 할 처지였다. 금품을 준다 해도 받지도 않으려니와 진정을 고백하면 그때 나에게 금품의 여유란 별로 없었고, 꼭 목숨 이외에 사랑하는 물품이라야만 예의에 어그러지지 않을 경우이라,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귀여운 비취인 한 면에다 " 贈 S, 1933. 9. 10. 陸史"라고 새겨서 내 평생에 잊지 못할 하루를 기념하고 이 땅으로 돌아왔다.

몇 해 전 시골을 가서 어릴 때 문갑 속에 있던 인재를 찾으니 내 사백(舍伯)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것은 할아버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길 너들 중에 누구나 시서화를 잘하는 놈에게 주라 하셨으나 너들이 모두 유촉(遺囑)을 저버렸기에 할수없이 장서인(藏書印)을 새겨서 할아버지가 끼쳐 주신 서적을 정리해 두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아우 수산은 그동안 늘 서도에 게으르지 않아 '도서(圖書)'를 여러 봉 장만했는데, 그중에는 자신이 조각한 것도 있고 인면(印面)도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고 새긴 것과 '오거서일로향(五車書一爐香)'이라고 새긴 큰 인은 거의 진품에 가까운 것이 있으나, 여천(黎泉)이 가졌다는 몇 개 안되는 인은 보잘것없어 때로 내형(乃兄)의 것을 흠선은 해도 여간해서는 제 소유로 만들 가망은 없는 것이고, 나는 아무것을 흠선도 않으려니와 여간한 도서개(圖書個)쯤은 사실로 내 눈에 띄지 않는 것이나, 화가 H군이 가지고 있는 계혈석에 반야경(般若經)을 새긴 것은 여간 탐스러운 바 아니었지마는, H군으로 보면 그것은 세전지보(世傳之寶)라 나에게 줄 수도 없는 것이고, 나는 상해에서 S에게 주고 온 비취인을 S가 생각날 때마다 생각해 보는 것이다. 지금 S가 어디 있는지 십년이 가깝도록 소식조차 없건마는, 그래도 S는 그 나의 귀여운 인을 제 몸에 간직하고 천대산(天臺山) 한 모퉁이를 돌아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강으로 강으로 흘러가고만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나는 오늘밤도 이불 속에서 모시 칠월장이나 한 편 외보리라. 나의 비취인과 S의 무강을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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