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우울증에는 여러 가지 정의가 있다. 이 병은 인간을 짐승의 종류에까지 퇴화시키는 악병이라고도 하고 뇌세포 중앙부의 병이라고도 하고 혹은 주요 기능의 타락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보통 열은 없다. 원인 없이 공포와 비애를 상반하는 노쇠의 일종이라는 것이 가장 통례 적 정의다. (중략) '에라스무스'는 이 병에 걸리지 않는 인간으로 백치를 들고 있다. 그들은 야심도 없고 공포, 수치, 질투, 비애, 등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로버트 바튼
1
[편집]커튼을 내리지 않은 창틈으로 바깥 거리의 붉고 푸르고 한 광고등 불빛이 굵은 줄을 지어 어두컴컴한 벽에서, 마룻장 위에서 어른거리고 있다. 아무렇게나 한군데 쌓올린 의자와 테이블이 구슬프게 커다란 그림자를 던지고 있어서 희멀쑥한 텅 비인 방안은 마치 무슨 달밤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불빛 속에 버티고 서서 홀 구석구석을 유심히 바라본 후 길게 기지개를 펴고 나서
"자아 이걸루 하나는 끝장이 났다 만은……"
한숨 섞어 입 밖에 내어서 중얼거리고 가만히 저고리 속주머니에 든 100원짜리 지전 뭉치를 만져보았다-아무 별다른 느낌도 없다.
오늘은 대체 어디서 자야 하나, 오늘 하루만은 꾹 참고 더 이 어두컴컴한 가게 방에서 자야 할까-그러자 나는 문득 10여 일 전에 아무 말도 없이 홀연히 집을 나간 안해를 생각하였다. 안해를 생각하자 지난 1년 동안의 안해와의 썩어진 생활이 일순 굉장한 속도로 머릿속을 스치며 지났다. 안해가 황해도 산골에서 나를 믿고 나를 따라 쫓아 올라 온 것은 이 다방을 시작한 지 한 달도 못 되어서였다. 생각도 안 했던 안해가 뜻밖에 내 품으로 뛰어들자 나는 전부터 의가 맞지 않던 늙으신 어머니와 성년한 누이와 아주 의를 끊다시피 하고 이 어두컴컴한 가게방 속에 둘이서만 처박히고 말았다. 그리하여 안해의 품속에서만 완전히 1년-나는 가족들뿐 아니라 세상과도 완전히 인연을 끊고 지내왔다. 그 안해가 무슨 때문인지 표연히 종적을 감춘 지 열흘-이나 열하루, 그 밖에 안 되는 오늘 나는 이 다방을 어떤 시골 청년에게 그대로 넘기고 만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 같이는 생각되지 않고, 역시 안해와 무슨 인연이 맺어진 듯만 싶어, 그러면 역시 내 마음 속에는 아직도 부정한 안해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어 그 때문에 안해의 채취가 배어 있는 이 다방을 내 옆에 남겨놓고 바라보기가 싫어, 헐값으로 허둥지둥 팔아버린 것이라고 두 번 고쳐 생각해도 그런 마음이 잠재해 있는 것으로만 꼭 그렇게만 생각되어 나는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었고, 누가 옆에 있다 치더라도 마음속까지야 설마 들여다보랴마는 누구에게 들려나 주려는 듯이 자조의 빛을 뚜렷이 나타내고 혀를 끌끌 차보는 것이나 그래도 그것을 전연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어서 나는 쓰디쓴 일종의 쾌감조차 느끼며 몇 번이고 그 생각을 몰래 되풀이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이것으로 하나는 끝장이 난 셈이다마는 앞일을 생각하면 까마아득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면 좋을지, 예산도 서지 않거니와 생각해볼 엄두도 나지 않았고, 그뿐 아니라 그런 것을 자꾸 생각하고 있노라면 요사이의 비뚤어진 사고는 금시로 이대로두 살아가야 옳은지 또는-하고 그런데까지 단숨에 비약하여 어쩔 줄을 몰랐고, 그 다음엔 어리석게도 허덕허덕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어 나는 억지로라도 잠들고 마는 것이다. 요사이의 내게는 잠자는 것이 무엇보다도 낙이었다. 잠자는 동안은 이그러진 사고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때로는 아직도 너는 안해를 생각하고 있느냐고 스스로 제 자신을 꾸짖고 욕하는 것이나 도리어 생각하면 그것은 꼭 내가 안해 앞에 손을 집고 절하고 있는 것만 같아 더욱 제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고달파 보이어-안해가 내 옆에 있는 동안은 아무리 무지하고 보잘 데 없는 안해였으나 적어도 내가 절망만은 느끼지 않았었다고 이때나 저때나 불치의 병과 비뚤어진 사고에 변함은 없어도 안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안해 옆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때는 그렇게도 마음 가볍게 하여 나는 순간순간 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었으나 -그렇다고 물론 달아나서 아까운 안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렇거니와-문득 나는 이제에 이르러 안해 일을 생각하는 것은 사내답지 못한 일이라고 어느 사이에 이렇게 몸도 마음도 약해졌느냐고 혼자서 안타까워해보고 분해보는 것이나…….
그러나 말이다-나는 다시 한번 홀 안을 빙 둘러보고 전차길 저쪽의 무슨 독이나 담긴 듯한 네온의 강렬한 색채를 어지럽다 생각하며 문득 창 아래를 내려다보니 언제부터 그렇게 시름없이 서 있었는지 박군이 담배를 문 채 물끄러미 창 너머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언제든지 한 번은 안해도 저 모양으로 태연하게 다시 내 옆으로 돌아오리라-박군의 얼굴을 바라보자 나는 문득 또 그런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만약 정말이라면 나는 안해를 어떻게 대접하고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가, 얼른 그런 것을 머릿속으로 혜아려보면서 바보 천치, 아직도 너는 그 부정한 안해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냐고 자기의 의외에 고집 센 마음에 몸서리까지 치는 것이나 다음 순간 박군이 지금의 자기의 공허한 고독을 구해줄 것만 같아, 나는 얼른 고쳐 생각하고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띤 후 금시로 가벼워진 마음과 목소리로
"자네 웬일인가."
진심으로 반기며 최근 4,5일, 거의 매일같이 만나던 박군과도 적조했던 것을 생각해내고 무엇인가 미안한 듯한 느낌을 얻어 얼른 닫아 걸은 문을 따주며
"입때 안 죽었었나."
자기에게 들려주는 것도 박군에게 들려주는 것도 아닌 것을 나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집어쳤네그려, 거 션허게 잘 집어 없앴네."
약간 주기를 떤 얼굴로 박군은 빠안히 내 얼굴을 쳐다보며 멈칫하고 어두운 홀 문어귀에 서서
"왜 이 사람 울상을 하고 있나."
그러면서 빙글빙글 웃고
"이 사람아 불이나 좀 켜놓게. 컴컴허길래 난 벌써 떠나간 줄만 알었네. 온 이거 갑갑해 살 수 있나."
그러면서 제 손으로 쌓올린 가구 속에서 덜그럭덜그럭 의자를 끌어내려 창 옆에다 갖다 놓고 털석 자리 잡아 앉는 것이다.
"잘 왔네. 지금 혼자서 얼이 빠져서 있는 판일세."
별안간 밝아진 홀 한가운데다 나도 따라 의자를 갖다 놓고 앉으며
"추운데 방으루 들어갈까."
"방이래야 마찬가지지, 불 안 땠지?"
"왜 어저께 밤에 땠지."
"그만두게. 넓은 것만이라두 이쪽이 났지."
말투는 여전하나 박군은 두리번두리번 홀 안을 둘러보며 그 소조한 풍경에 자기도 마음이 무거워지는지, 그리고 그것이 박군의 버릇이기는 하나 때때로 암울한 표정을 지으며 얼마 동안 입을 열지 아니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무의식중에 한 일일 것이나 박군은 거의 1 년을 두고 매일같이 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의자를 내놓고 앉았는 것이다. 나는 문득 그것을 발견하고 결코 내 마음도 즐거울 수 없었다.
"자네 얼굴만 보면 술이 먹구 싶어."
"이상한 얼굴이지. 이 얼굴 빠아에서 사가지 않나."
"빠아에 갖다 놀 얼굴을 못 돼. 기껏해야 선술집이지"
"선술집? 선술집은, 좀 슬픈데."
"응, 나두 사실은 좀 슬프긴 허이."
슬프다는 그 말이 정말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나는 혼자 속으로 끄덕이며
"웬일인지 꼼짝하기 싫군 그래. 그나마두 손을 끊구 보니까 그런지 별안간 주위가 텅 비인 것 같애서 -주머니엔 100원짜리가 들었는데두 술 먹을 생각두 안 나구-사실은 지금부텀 자네나 찾어 나갈까 허든 판일세."
"그래두 무슨 애착을 느끼는 모양인가. 시원헐 것 겉은데."
그러다가 별안간 박군은 정색을 하고 내 얼굴을 똑바로 건너다보며.
"여보게, 나하구 같이 동경에 안 가겠나."
"동경?"
"응, 나는 결심했네, 금년 안으루 장사를 그만두구 내년 봄엔 다시 동경에 갈 작정일세. 자네두 인제 마음의 방랑을 웬만침 해두구 정신채려야 헐 때 아닌가, 지금이 찬스일세. 나 허래는 대루 허지 않을 텐가."
"……"
"오늘 아침에 사실은 자네 매씨를 만났지."
"순흴?"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응. 그래서 자네 얘길 다 들었지‥‥‥ 왜 순희씨가 뭐 어쨌나?"
"순희가 입때 경성에 있었나?"
"경성에 있었나라니?"
"응, 아니."
아차-속으로 나는 외치고 가늘게 말없이 얼마 동안 박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의 일이라면 10년 후까지도 빠안히 내다보면서 제 일엔 왜 저렇게 돼지같이 둔감할고, 순희는 이미 자네 마음 곁에서 사라진 지 오래여. 광년으루 계산해두 미치지 못할 만큼 머언 거리가 생기고 만 것일세. 순희의 자네에게 대한 호의는 결국 오라비의 동무라는 점뿐이었다네. 자네는‥‥‥ 그러나 말끝을 흐리는 것쯤으로 이 말초신경 덩어리 같은 박군을 속일 수는 없으리라 생각하고 나는 마치 내 자신이 무슨 중대한 선고 앞에 선 양으로 오들오들 마음을 떨며
"순희는 사랑을 위해 몸을 바치겠단다네, 내게는 그저깨 밤차루 신경으루 떠난대드니……"
처음 박군은 뜨끔한 듯이 얼굴빛까지 변하더니 다음 순간 억지로 냉정을 가장하고 내가 말을 계속하는 동안 여전히 얼굴을 쳐들고 있었으나 떨리는 손으로 담배틀 꺼내어 언제까지든지 주무르고만 있었고 입에 물려하지 않는 것은 역시 마음에 커다란 격동이 일어난 증거 일 것이다.
"……나는 눈 딱 감어뒀네, 제 갈길 지가 찾아가겠지, 외로워할 사람은 늙으신 어머니허구……."
나는 거기서 말을 끊고 잠깐 고개를 떨어뜨렸다. 내가 무슨 죄인 것 같이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군은 그 이상 더 알려고도 안 하고 듣고 싶어도 안 하고 그것이 너무나 의외이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만 한 병 팔다 남은 '압생트' 병을 들고 나와 박군 앞에 내어밀고
"먹게."
"응."
"마지막 병일세, 혼자서 이거나 먹구 오늘은 여기서 얌전허게 잘 작정였지."
그러자 박군은 내가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고개를 번쩍 들고
"달아난 예편네 냄새나 맡으면서 말인가? 하하하하 자네에겐 원래 좀 과했으니까 분허기두 허겠지."
"뭐 어째. 겨묻은 개가 어떻다는 격으루……."
그러고나서 우리들은 소리를 맞추어 커다랗게 웃고 그 웃음소리가 앵앵 울리며 벽에 가 부딪치고 천장에 부딛치고 나중에는 몸속에까지 배어드는 것을 쓸쓸한 마음으로 얼굴을 맞대고 느끼며 어느 틈엔지 중도에서 종적을 감춘 동경 가자는 이야기는 다시 생각하려도 안 하 고 묵묵히 압생트의 잔을 기울이었다.
2
[편집]망막한 홀 속에서, 생각 속에서 압생트 반병을 다 먹고난 우리들은 얼마 동안 노곤해서 의자에 몸을 지니고 앉아, 술이 무서운 속도로 전신에 퍼져가는 것을 몽롱하게 의식하며 말도 안 하고 생각도 안하고 눈을 감은 채였다.
술잔을 손에 들고 있는 동안 우리들은 무엇인지 마음에 서로 거리끼는 것은 있었어도 다른 때와 같이 우스운 소리만을 주고받고 하였으나 그러나 이유 모를 애수를 싸고 돌아-아니 애수라는 그런 간단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체 모를 막연한 일점을 중심으로 빙빙 맴을 돌면서 그것을 건드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다가는 꼭 마음이 난데없는 방향으로 터져 나갈 것만 같아 감히 그 일점을 건드리지는 못하고 애써 자기 마음을 속여왔고 웃어왔었다. 그것에도 지치고 차차로 취해오자 우리들은 점점 말이 없어지고 이유 모를 불안을 느끼어 온몸이 근질근질하는 듯하여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몸과 마음의 혼란을 제어하지 못했다.
눈을 떠보니 박군은 가볍게 잠이 든 모양이다. 나는 별안간 추위를 느끼고
"박군, 박군, 좀 걷지 않을 텐가."
이대로 있다간 아무래도 얼어 죽고 말 듯싶다는 그런 난데없는 망상이 떠올라 좀더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여보게 나가세."
일어나서 박군을 흔들어 일으켰다. 박군은 보통 때보다 더 창백한, 나이에 비해서 늙어 보이는 여위고 갸름한 얼굴에 굵은 주름살을 잡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나 입밖에 내어 대답하려 하지는 않았다.
"여보게, 벌써 녹았나?"
내가 또 한번 옆치 듯하여 얼굴을 흔드니까
"녹긴‥‥‥어 림 없이."
의외로 힘차게 대답하고 벌떡 일어서는 박군의 얼굴에는 이미 우수나 쓸쓸함은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고 그것을 바라본 나는 겨우 숨을 돌리며 말없이 그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대로 우리들은 문도 닫아걸지 않고 어깨를 겨눈 채 밤늦은 거리로 굴러 나왔다.
언제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는지 진눈깨비가 상기된 얼굴에 선뜻선뜻 내려앉는다. 엷게 거리를 뒤덮은 눈 위로 자동차가 수없이 굵은 줄을 그리며 눈앞을 스쳐갔다. 섣달 대목이 가까운 때문인지 밤늦은 거리 에는 뜻밖에 행인들이 초저녁과 다름없었다. 생각나는 듯이 기생을 태운 인력거가 앞으로 뒤로 우리들 옆을 빠져 나간다. 인력거 위에서는 흰 얼굴이 내려 뿌리는 눈을 피하여 털목도리 속에 턱을 파묻고 있다.
우리들은 아무 목적도 없이 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다가 종로 네거리까지 와서 잠깐 주저한 후 동쪽을 향하여 이번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목덜미에 뺨에 부딪치는 눈이 상쾌할 만큼 시원했으나 술을 깨이지를 않고 잔뜩 흐린 머릿속을 더욱 어지럽게 할 뿐이다. 그럴 때 마다 우리들은 무엇에 쫓기기나 하는 듯이 걸음을 빨리 하고 문득 그것을 깨닫자 그렇게 걸음을 빨리 하는 것이 대단히 점잖지 못한 것만 같아 이번엔 일부러 또 걸음을 늦춰보는 것이다. 겨우 그런 것만을 생각할 수 있는 우리들은 너풀거리는 머리에 내려앉는 눈을 털 줄조 차 몰랐다.
별안간 박군이 컴컴한 골목으로 휘청휘청 걸어들어갔다. 나는 오줌을 누려는가보다고 그 힘없는 뒷모양을 공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발을 멈추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성냥불이 몇 번이고 바람에 꺼졌다. 나는 할 수 없이 한걸음 골목 안에 들어서서 벽에가 바싹 붙어 성냥을 켜려 했다. 그때 대여섯 걸음 내디디던 박군은 별안간 이상하게 고함을 지르고 돌쳐오더니 성냥을 들고 있는 내 바른팔에 매달리어
"알었네, 인제 알었네, 나는 순희씨를 사랑하구 있었어, 사랑하구 있었어."
숨을 헐떡거리며 넋두리하듯 말하는 것이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침울함에 나는 잠깐 놀랐으나 꺼지려는 성냥불 둥근 광륜(光輪) 안에 번뜩 나타났다 사라진 박군의 이그러진 얼굴은 울다 온 사람같이 슬프게도 경직되어 그 목소리 이상으로 나를 몸서리치게 했다. 그것은 보통 때의 수려한 박군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 세상 모든 고뇌 시달리고 지친 생기 없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나는 문득 늙으신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하였다. 그러자 의식치 못하는 사이에 여지없이 나까지 그 음울 속에 끌려 들어갈 것 같아 그것을 쫓아내느라고 나는 깔깔 소리내어 웃고 박군의 손을 이끌어 다시 밝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나는 순희씨를 사랑하고 있었어."
박군은 그것을 무슨 진언과도 같이 입안에서 중얼거리었고 나는 나대로
"그러니 어쩌란 말야. 이 사람아. 순희는 벌써 남의 안핸 걸……."
이유 없이 악을 쓰고 싶어 이렇게 외치니까 박군은 더욱 기세를 높여
"그런 게 아닐세, 내가 순희씨를 사랑하군 있었지만 사랑하려군 안 했지. 그런 걸 자네 같은 천치가 알겠나."
그러더니 그는 또 한번 내 손을 뿌리치고 혼자서 단숨에 어두운 골목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나는 알고 있다. 뛰어 달아날 제 박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불쌍한 동무는 넘쳐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쯤은 늘 다니던 '바 릴리'에서 순자를 앞에 앉히고 자기가 얼마나 순희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울며 이야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신파 비극이 아무리 생각해도 박군 하나의 것인 것 같지는 않아 나는 당황해서 박군의 뒤를 따르며 너와 함께 나도 울어보리라 라고 바 릴리의 문을 열어젖혔다.
요사이 부쩍 손님이 준 바 릴리에는 한편 구석 박스에 늙은이가 한 패 자리잡고 있을 뿐 아무리 둘러보아도 박군의 모양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잠깐 어리둥절하고 다음에 담배 연기와 방안 온기에 얼굴을 돌이키며 눈으로 가만히 순자를 불러
"박군이 왔을 텐데……."
"아아니 요새 통 못 보겠습디다."
"조금 있다 또 올 테니 박군 오거든 붙잡어둬."
응, 응,-끄덕이던 순자는 그렇지만 시간이 없수, 하는 것을, 나는, 알어, 알어, 고갯짓만 하고 박군에게는 순자같이 어딘지 거센 곳이 있는 여자가 알맞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것을 생각하며 박군 갈 만한 종로 뒷골목 바를 집집이 찾아다녔으나, 아무데도 박군은 있지 아니했다.
거진 한시가 가까웠다. 머지 않아 바들도 문을 닫을 것이다. 나는 약간 지쳐 힘없는 다리로 다시 바 릴리를 찾아들었다.
"어딜 찾어댕기는 거유, 벌써버텀 여기 와서 곯아떨어졌는데, 여간 취허지 않었어, 얼른 데리구 가요……."
하고 순자는 내 얼굴을 보자 구석 박스에서 뛰어나와서 테이블에 엎드리어 그대로 잠이 든 박군 쪽을 가리키며 상을 찌푸려 보이는 것이다. 아, 좀 재워두지 못해-나는 역시 여기였더냐고 가벼운 안도를 느끼면서, 왔으니 그냥 데리고만야 갈 수 있나, 한 잔 먹어야지-그렇게 말하며 박군 맞은편 의자에 털석 주저앉았다.
내가 왔다고 박군을 흔들어 깨우려는 순자를 나는 얼른 말리며
"그냥 둬, 그냥 둬, 울다 지쳐 잠들었는데 잠이나 들어야 맘이 편허지, 아무것도 생각한 허구……."
그렇게 말하자 순자는
"그렇다구 꿈두 안 꾸나……."
그러면서 눈을 동그랗게 떠보는 것이다.
"그럼, 꿈야 꾸지."
잠든 줄만 알았던 박군은 별안간 우리들 이 얘기에 참여하며 그러나 테이블에서 고개를 들려고는 아니했다.
"아아니 능청맞게 자는 줄 알었더니 어쩌면……."
하고 금방 박군의 어깨를 칠 듯이 하는 순자를 나는 힘껏 뒤로 잡아당기며,
"가만두래니깐, 꿈이라는두 실컷 꾸게. 순자 오늘은 나허구 술 먹어야 해-"
그러며 나는 흐트러진 박군의 머리와 아무렇게나 엎드려 자는 꼴을 친동생과도 같이 귀엽게 불쌍하게 생각하며 들여다보고,
"순자, 박군은 내 누이 순희헌테 실연을 했대."
그러나 박군의 정말 슬픔이나 우수가 그것에만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고 다만 그것이 한개의 스프링보드가 되어 박군 자신조차 깨닫기 전에 울적한 평소의 우민(憂悶)의 바닷속으로 껑충 뛰어든 듯싶었다. 잎가친척이라곤 없이 작은 몸엔 능히 다 담지 못할 커다란 야심 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야심을 채울 길이 없어 마음에 들지 않는 신문기자 생활을 다섯 해나 계속해온 박군이다. 동경엔 보다 남기고 온 꿈의 가닥이라도 있단 말이지 신문사 그만두고 동경 간다는 것이 입버룻같이 되어 있으나, 말대로 딱 끊어 실행을 하지도 못하고 아까운 재능을 게으른 그날그날의 생활 속에서 달리어 없애고 있는 터이다. 남 유달리 민감하나 약한 몸에는 가지각색의 번거로움이 무거운 짐이 되어 그를 타누르고 있으나 그러나 그것을 떨쳐 없애려고도 안하고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컴컴한 주위의 사벽과 연결시켜 제 자신에게 싸움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싸우기 전에 이미 숭폐 패는 너무나 명료하다.
"순자, 박군은 내 누이 순희헌테 실연을 했대."
박군이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순희가 아니고 순자였는지도, 순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희를 위하여 울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박군에게나 내게나 마음이 편할 것도 같다. 우리들의 말없는 우울 속에 어느 틈엔가 순자마저 휩쓸려들었음인지, 남자를 남자로 알지 않는 말괄량이 순자도 역시 말없이 기계 모양으로 술을 따르고 있다. 우리들 있는 자리만 남겨놓고 하나씩 둘씩 홀 안의 불이 꺼져갔다.
3
[편집]잠이 깨어보니 우리들이 자고 있는 곳은 어제 팔아치운 가게방 한 구석이었다. 저고리까지 그대로 입은 채 박군은 찬 방바닥에다 반신을 떨어뜨린 채 정신없이 코를 골고 있다. 나는 갈기갈기 찢어진 혓바닥 위에서 쓰디쓴 '카이다' 연기를 한참 동안 굴려보며 깊이 잠든 박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암만 잡아끌어도 일어나지 않으려는 박군을 떠메다시퍼 하고 우리들은 확실히 또 한 군데 어딘지 바를 찾아들어 곤드레만드레가 되도록 술을 먹은 듯싶다. 그러고 나서 또 서로 어깨를 끼고 눈 오는 거리로 비틀비틀 걸어 나온 것 같으나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여간 집에 올 생각이 난 것은 그리고 집에 와 자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기하고 희한한 일이어서 무엇에 끌렸는지 무엇에 홀렸는지 다른 때의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현대의 기적과도 같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하여보니 박군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은 역시 나인 성싶다. 박군은 어지럽게 변화하는 자기 마음을 걷잡지 못하여 넋두리 비슷한 불평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넌 모른다 넌 그런 건 몰라' 라고 잘 꼬부라지지도 않는 혀로 나를 욕지거리하면서도 한 편 어린애 응석같이 내게 매달리려는-그러한 박군의 심중을 나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어 '그래 네가 장허다. 네가 제일이다'라고 나도 연해 맞장구를 쳤으나 그러나 그렇게 둘이서 서로 부등켜 안고 있지 않으면 일시에 그 자리에 기진맥진하여 허덕허덕 쓰러질 것만 같아-그렇다, 그래서 우리들 두 사람은 다시 여기까지 맞붙어 돌아온 것일 것이다.
불 때지 않은 맨 방바닥 찬 줄도 모르고 박군은 여자같이 삐죽삐죽 울다가 그대로 잠들고 만 것일 것이리라, 나는 나보다도 훨씬 더 고적한 박군의 자는 얼굴을 언제까지든지 바라보며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언뜻 등 밑 아궁이에서 장작 타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 하였다. 요 밑에 손을 넣어보니 미지근한 온기가 차디찬 손끝에 따라 올랐다. 귀를 기울이니 방 밖에서 누구인지 사람의 기척이 나는 듯도 했다. 밖에서 누구인지 내 방에 불을 때어주고 있다. 얼른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꼼짝 않고 드러누운 채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문을 열어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나 생각만 할 따름으로 진정 열려고는 하지 않고 장작 타는 소리와 부지깽이 소리와 인기척 소리에 무심히 귀를 기울이면서 조용히 나는 눈을 감았다.
어느 틈엔지 나는 또 한번 잠이 들고 말았었다. 얼마 동안이나 또 그렇게 잤는지, 안해가 다시 돌아와서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고 그런 꿈을 꾸다가 나는 잠이 깨었다. 몸 전체가 훈훈하게 녹아서 이상스럽게 고달펐다. 충혈된 눈을 들어 나는 억지로 방안을 살폈다. 박군은 여전히 죽은 듯이 잠자고 있다. 머리맡에는 쪼그리고 앉았던 어머니가 약간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똑같은 경직된 표정으로 차디차게 내 얼굴을 내려다볼 뿐이다. 나는 깜짝 놀라 이불을 차고 일어나 말없이 한참 동안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순희가 만주루 달아났단다."
이윽고 어머니는 똑 끊어 더러운 것이나 내뱉는 듯이 입을 열었다.
"뭐요? 순희가?"
나는 깜짝 놀라는 듯이 펄쩍 뛰어 보이고 다음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예 가고 말았구나-나는 순희의 이번 행동에 대하여 적지 않은 불만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 꿋꿋한 일이라고 칭찬도 하고 싶고 마음속으로부터 행복 되게 되라고 축원 안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누구를 물론하고 무슨 일이고간에 이미 어머니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는 없는 것 같았다.
"그까진 기집애 죽든 살든 난 모르겠다. 식구가 하나 준 것만이 다행이다마는-"
어머니는 여기서 잠깐 말을 끊고 애처러운 듯이 방안을 둘러보고, 입때까지 밥이나 굶지 않은 것은 그래두 이 가게 덕택인데 어쩔 작정으로 팔았는지 모르겠다-고 틀림없이 그런 말을 하고 싶은 어머니였으나 감히 입 밖에 내지를 못하고
"집세를 좀 내줘야겠다. 엄동설한에 쫓겨날 수야 있니.
"집세두 집세지만 순희를……."
"졸대루 허려므나. 죽기야 허겠니. 그까짓 년버덤두 할머니가 불쌍허시다. 밤새두룩 순희를 찾으시며 한잠 안 주무시는구나. 니가 집이 오기 싫어허는 맘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노인이 계시니 사흘에 한 번씩은 좀 들르려므나 이 추운데……."
그러다 별안간 어머니는 마음이 변한 듯이 말을 맺지 않고 벌떡 일어서서
"오늘 안으루 집세나 좀 해주려무나."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어젯밤 쓰다 남은 돈을 꺼내 보았다. 10원짜리가 한 대여섯 장 쑤세미가 된 채 나왔다. 나는 그것을 말없이 어머니 손에 쥐어주고 내 가슴에 밖에 닿지 않는 어머니의 초라한 모양을 울고 싶은 마음으로 내려다보며
"어머니, 진지 잡수셨어요?"
"지금이 어느 때냐. 오정이 넘었다."
"그럼 저어, 점심 잡숫구 가시구려."
그것은 내가 기껏 표현할 수 있는 어머니에게 대한 무한대의 애정이었다. 어머니 손에 매달리어 거리를 걸어본 기억이라곤 철난 후로는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어머니와 점심이라도 같이 먹을 수 있다고 오래간만에, 나는 육친에 대한 애정을 느끼자 눈물이 나도록 그것이 반가워
"그럭허세요, 네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는 한마디로 그것을 거절하고
"별소릴 다 헌다. 집이 가면 나 먹을 밥쯤야 설마 없겠니."
나는 무거운 쇳덩이로 뒤통수나 맞은 듯이 정신이 아뜩하여 그 이상 더 말하기도 싫었고 어머니의 불쌍한 꼴을 보기도 싫었고 해서
"이따가라두 봐서 들르죠."
다른 때와 다름없는 죄죄죄한 어머니의 모양이 눈앞에 다시 떠올라 나는 바람과 같이 소리 없이 나가는 어머니를 다시 붙들려 하지 않고, 방 한가운데 선 채 오랫동안 허리 굽은 어머니의 뒷모양을 바라보다가 픽 쓰러지듯 다시 자리 위에 드러누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체로 잠이 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 박군은 부럽다 생각하며 뻐언히 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까 밀물같이 스며드는 참을 수 없는 적료에 사로잡혀 아무도 없는 이 어두컴컴한 방에 혼자 깨어 있는 것이 아이들같이 무서워져서 박군 박군 좀 일어나게, 일어나, 응 일어나-떨리는 목소리로 박군을 부르며 박군의 어깨를 무턱대고 흔들어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