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
일.
1935년을 맞이하는 중국국민당은 역시 동북문제와 싸벳트 중국이란 두통거리인 숙제가 국난이란 이름으로 조월(繰越)되어 당파로 이것을 해결하려하는 만큼 장개석(蔣介石)을 수반으로하는 독재조직의 급격한 발전을 볼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신년이 구경거리일 것이다.
중국에 있어서는 통치자는 매변계급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지나간 한해의 화려하던 공상과 그 통일운동은 그 약속을 도달할 희망조차도 없다는 것은 과거의 통일운동은 어느때나 통일운동을 파괴하여왔다. 그러나 민족자본은 늘 근대국가로서의 중국을 약속하고 통일을 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어찌했든 이 통일운동에 한 개주파를 만들려고 갖은 수단을 다하여 장개석(蔣介石)은 부심(腐心)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파는 국내자본외에 특히 [아메리카·인페리아리스트]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은 아메리카는 중국의 분할을 즐겨하지 않는다. 다만 [아메리카]가 바라는 바는 {중국재벌에 의하여 통일되게되고 다소 사실상 아메리카의 식민지로서의 독재 중국이 되기를} 빨가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삼민주의자들에 의하여 연출된 혁명 반혁명의 극은 장개석으로하여금 하야케도 하여보고 주석의 영예로 자리를 떠나게도 하여보았으나 그러나 그를 중심으로한 통일운동은 시종주파로서의 위엄과 실력을 잃지않고 행진하여왔다는 것만 보더라도 장개석은 행운인 것같다.
오늘날도 중국의 산업의 주력은 수공업이며 농업은 주대문화의 답습인 동시에 대중의 생활은 재생산의 용이한 원시적 생산방법에 의거해있다. 그래서 벼이삭을 밟어치우면 금시에 무배추가 시퍼렇게 올라오고 남편이 징발되어가면 마누라가 날품팔이를 하면된다. 이래서 지긋지긋한 통일운동에 민중의 생활이 잘도 부지하여온 것은 그들의 생활이 거의 재생산의 용이한 원시생활에 의거한 결과 파괴가 일시에 낫하나지 않었을 뿐인 것이다.
이.
{중국에는 자본가나 지주나 고력나 모두 피압박자다 따라서 국민당은 전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고 말하고 국민대중의 데모크라시-를 약속한 손중산(孫中山)은 동시에 선지선각의 특권과 무지무각의 절대피치자적 지위를 규정하여 데모크라시-를 말살하였다. 뿐만아니라 충실한 그의 후계자들은 국민당이 대표하는 전계급 인구로부터 노동자 농민만은 정식으로 제명하고 당파에 계급독재의 기초를 세웠다.
국민당은 전국 통일에 노력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노력은 한편으로 상대적 국내자본발전, 다른 한편에서는 매변통치에 의한 민생의 근본적 고난위에 행하여졌다. 뿐만아니라 선지선각의 계급독재는 개인독재의 형태중에서 발전했고 동시에 [이페리아리스트]의 대립은 [데모크라시] 옹호의 반개인 독재운동에 반영해서 내전을 지지해왔느니만치 국민당은 그 통일운동에 있어서 통일 대신에 상술한 두낫의 국난을 초치해온 것이다.
삼.
그러나 이 국난은 제너랄매변으로서의 중앙정부를 독재조직으로 전향하는 운동에 가장 유효한 원조가 되었다. 이전은 팟쇼운동은 당금으로 정면에 표현되지 못하고 음으로 서서히 행하여졌다. 즉 장개석은 근로계급에 대해서 준비된 당금으로써 반장파의 당하면서 [당치]와 [인페리아리스트]가 남미정권의 역할에 부여하는 [필요한 안정]과를 결합시켰다. 그러나 이 운동도 어느 정도에 발전하면 다시 말하면 그의 주족적 지위가 확립하면 종래의 당치주의는 도리어 그에게 질곡(桎梏)이 되었다. 보시 당파란 것은 [데모크라시]-라는 이름으로 너무나 약속한데다 많은 것이다. 그래서 당파주의를 팟쇼정권옹호의 이론으로 전화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며 충실한 삼민주의로서 독재가 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장(蔣)의 세력은 그 확대와 함께 그의 반대자 세력은 당파주의의 윤곽안엣 협착하게 되는 것이며 그들도 또한 [당파주의]를 반개인 독재주의의 무기로 만들 필요가 생긴 것은 9.18이후 각 방면으로부터 치타파의 요구가 공연하게 행하여진 것을 보아도 알수가 있다. 물론 그럴때마다 엄중한 당금하에 탄압되어온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한번 국민당의 수령들에게까지 지지되어온 것도 또한 사실이다. 조금 묵은 예로는 재야 당시의 왕조명(汪兆銘)이 국민구국회의 소집을 주장한 것이라든지 당시 행정원장 손과(孫科)가 국난회의를 발기한 것이나 호한민(胡漢民)이 [당외무당·당내무파]는 독재를 의미한 것이 아니고 대공당책으로서 결정한 슬로건이라고 성명한 것이라든지 그후 하야한 손과(孫科)가 다시 [당외유당당내무파]의 표어를 제출하고 삼민주의에 위반하지 않는 한(그의 의견은 공산주의 이외는 모두 합격) 결당결사는 자유이니 훈정기를 폐하고 헌정을 즉 행하라는 주장이나 거년의 복건정부는 차종의 한 구체적 표현인 동시에 최근의 양광을 중심으로한 서남파의 태도는 더욱더 이러한 색채가 명료한 것이다.
사.
그래서 지금은 당내당외에 당조직이란 일종유행이 되어있다. 이 중에서 중요한 몇가질ㄹ 헤아려보면 국민당 중앙위원 진과부(陳果夫)는 그의 금계립부(今季立夫)와 CC단을 (군인동지구락부) 조직하여 온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며 국모 송경령(宋慶齡)여사의 농공당과 진우인(陳友仁)의 비서이던 고승원(高承元)이 창시했던 사민당 [오포추니스트]의 대표 진계수(陳啓修)가 같은 종류의 것을 시작하고 손과가 둘러싼 태자파의 소장들이 [파(派)]를 [당(黨)]으로 발전하려 할 때 취소파의 총사 진독계(陳獨季)가 합류를 하였던 것도 진부한 사실이었지만은 국민당 고문 오패부(吳佩孚)와 이 또한 국민당의 불공대천지수인 진동명(陳 明)이 [취소당치회복민치]로서 국가주의의 중심에 추대되던 것도 케케묵은 넌센스의 하나이었다. 1931년 조직된 AB단(반공주의)은 지금은 사회민주당이 되어있으며 무한시대의 좌익군인, 팽술지등취소의 간부, 시존통 등 제삼당의 파편, 중앙대학해산으로 이름 높은 한때의 교육차장단석명 등 개조파의 잔유분자와 태자파의 유지 등등이 모여 국민당 중앙위원 진왕추를 총재격으로 떠맡고 있는가 하면 왕조명의 개조파도 국민당 좌파동지 통신처라던 신당준비기관을 집어치우고 손과 동양으로 AB단 사민당으로 진출하였으며 기독장구 풍왕상(馮王祥)까지가 진계수(陳啓修)와 좌익 낙오자의 대표 이행 등을 태산으로 모셔다가 사민주의의 하계강습을 받고 있던 것도 소문뿐이었지 지금 볼 것이 없다.
누가 무엇이라ㅗ해도 사병제도에 지배되는 중국인 만큼 당연히 진형제의 CC단이 가장 활기를 갖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남의사(藍衣社)로 변장을 하여 팟쇼의 기본조직이 되는 동시에 장개석의 독재를 위해서는 옛날의 원세개(遠世凱)의 견제운동을 방불케하는 활동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으니 근대중국의 책사로 자임하는 양영태 국민당 중앙위원 장군진 형제 황부 등등이 그 최고지도자이며 표면으로는 가리새풍제(賀裏塞 悌)(이 친구와 남의사와는 유명한 일화가 있으나 다음 기회로 미룬다) 증광정(曾壙情) 등 십삼명이 중앙간부회를 조직하여 있고 황포동창회주석 소문육(蘇文育)과 중국일보 주필로 있는 강택(康澤) 등이 별동대의 지도를 하고 있으며 전국운동의 기본 멤-버로는 황포군관(지금은 중앙군관학교) 출신의 사장군인을 중심으로 한 이천명과 그외에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교육총대, 단경반 등등이 공개적으로 훈련되어 이에 드는 경비가 매월 오십만원 이외에도 직접행동대로서 반역 잘하기로 유명한 고순장(顧順章)을 대장으로 한 철혈대의 존재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오.
남의사의 정강은 새삼스레 되풀이 할 것도 없으나 정치통일, 재정정리, 망기숙청, 산업건설, 노자쟁의의 절멸, 지권평균, 농촌경제의 진흥, 징병제와 국방완비 생산교육을 목표로 하는 의무교육, 남녀평등 등등의 달성인 것이다.
그런데 팟쇼운동이 가장 중국에서 문제되었을 때 천진대공보사의 공개질문에 蔣은 다음과 같은 회답을 하였다.
[국민당은 조직에 있어서나 방법에 있어서나 중국의 유일한 혁명당이다. 나는 모든 다른 조직에 반대한다. 나의 지원은 국민당을 부활하고 그 본래정신과 방법으로써 삼민주의를 실현하는데 있다……]고 그뿐은 아니다.
[총리제는 부활할 것이고 삼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파시스트조직은 오늘날의 중국으로는 필연적으로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탈리아의 그것과는 성질이 다르다]고 그들의 어용학자 양공달(楊公達)은 말한다. [금일의 훈정기는 아직도 십이년은 연기해야 한다고]는 고일국(高一國)씨의 성명이며 [미주집권이란 그 자체 파시스트적 민주정치를 말함]이라는 것을 보면 일세의 정치학자인 도희성(陶希聖)도 먹고 살기위해서는 모구멍이 포도청인 모양이니 문제는 없다.
蔣의 조직은 [중국 국민당 남의사]라고만 알면 그만이다. 다시 말하면 汪의 그것은 [중국국민당] 개조동지회 였던 것과 같이 장은 삼민주의자인 것이다. 그가 당치주의를 전환하는데 따라 국민당총리가 되거나 대통령이 되거나 그것은 그가 충실한 국민당원일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의사의 당장은 최초부터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삼민주의를 종지로 하고 삼민주의 신사회의 실현을 철저히 한다(제일선)][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민주집권을 거부하고 사장(蔣)은 독재를 주장함]이라고 한구의 행영(行營)같은데서 장을 만나더라도 [중국에서 파시즘을 실현할 수 있느냐]고는 신문기자가 아닌 사람은 아예 물을 것도 아니다. 가만히 두고만 볼 일이다.
육.
국민정부주석 임삼(林森)은 어찌하였든지 대통령격이다. 그러나 정치의 최고권은 중앙정치회의의 삼상위원회 즉 蔣·汪·호한민(胡漢民)에게 있다는 것은 신정부조직법에 규정되었던 것이다. 이 조직법이야말로 1931년말 蔣이 약1개월동안 손과에게 정권을 맡겨주었던 대상으로 얻은 것이며 지금 이 세사람 중의 한사람인 전당 호한민씨는 서남파를 조종하여 실속없는 이론으로만 영예있는 독립을 시키기에 분망하며 또 한 사람인 왕조명은 손과씨에게 얻은 선물로 행정원장이 되어 책임내각의 수반은 되었을망정 전국지방장관에 명령권은 가지지 못하였다. 그나마 전국지방행정장관의 이십사분의 이십일은 군인이다. 그래서 군인은 군사위원회밑에서 내각과는 전연 독립되어 있는 것이다. 무슨 행정원장의 존엄이 천하를 호령해 보지 못한 것은 그 유명하던 아편공매안의 결과만 보아도 알았던 것이지만 汪원장 본시 광동파의 진영을 반역하고 [손기전손 공도국난]이라고 대소개조파의 막료들과 관도에 부활은 하였으나 그의 역할도 역시 앞날의 손과 같은 모양으로 장의 발전을 위하여 말하는 도구로써 스스로 중앙에 궁박할 뿐인 것이다.
지방의 할거는 더욱 확대되고 리금은 공연히 회복되며 장강 연안의 수성을 제하고는 국고의 수입은 모두 지방에 몰수되며 아편공매의 통일은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지방당국으로부터 거부되고 재정의 궁핍을 호도할 일절의 공조차도 용서하지 않고 한갓 장개석을 중심으로 한 파시스트 운동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통일운동에 있어 주파로서의 위엄을 保持하고 발전해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인페리아리스트]의 대립이 어느때나 중국의 통일에 반영하고 있는 한 물론 장의 팟쇼운동도 [주파적] 세력이상에는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얼마나 국내자본이 통일을 희구하고 있어도 장의 팟쇼운동은 장 자신의 운명과는 하등 관계도 없이 세계자본의 또는 [인페리아리스트]들의 필요에 의해서만 보증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적군토벌과 강압을 통해서 [인페리아리스트]의 매노력, 공임이윤의 인하와 지불기한의 연장 ??세증가 상품에 대한 관세증률 폐양개원에 의한 예상수입으로의 고리차관 영미이 등 에 대한 경자배관의 [모라트리엄] 아메리카의 면맥차관 등 이러한 수입의 모두가 국난군사비의 명목으로 장개석의 팟쇼운동에 양념이 되었을 뿐이다.
칠.
한때엔 십구로군을 고립시킨 왕원장(汪院長)이 장학량(張學良)에 대해서 무리정사를 강요하여 장개석의 서강 및 화강의 세력을 견제하려고 애쓰던 것도 가을볕 같이 옅은 그의 배경에서 너무나 희박한 신세력이 그의 기도로 하여금 그 주관적 계립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반식민지 중국의 파시스트 통치형태는 어디까지나 [중국식]으로 그 과거의 역사가 그른 것같이 1935년이란 曠古 미증유의 세계적 위기를 앞두고 운명적인 노선을 가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어용학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금일의 중국에는 팟쇼운동이 필연적으로 이상의 조건밑에서 발전할 것이며 반장(反蔣)운동의 모든 파당들도 이 요구만에는 지배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