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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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집]

창호는 혼자 책상머리에서 《전설 로망스》란 책을 보다가 한참 있더니 매우 흥분하는 표정으로 눈을 가느스름히 감으며 “아, 현재의 삭막하고 단조한 생활에서 좀더 색채 있고 농후한 정조에 들어가 아름다운 시국(詩國)을 만들 수가 있다 하면 얼마나 행복할꼬. 옳아, 이 전설에 씌어 있는 바와 같이 옛적 사람들의 생활은 꽤 귀한 인정미에서 누구나 다 사랑의 감주를 맛보며 재미있게 살았건마는, 아, 현대 사람은 왜 이리 나부터 세기병에 신음하는가. 이는 확실히 인생의 타락이다. 이 고통과 타락에서 건져낼 대예술가가 없는가? 아니, 내가 하지, 예수는 천상에 낙원을 건설하였지마는 나는 지상의 낙원을 건설할 수가 있어….” 하고 창호는 혼잣말을 하였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돌연간 얼굴빛이 마치 민감함(델리킷)을 느끼는 처녀같이 붉어지며 ‘아, 어제 김 목사댁에서 만난 여학생은 참 사랑스러운 여성인걸. 만일 그가 장차 내 전 정신 전 영혼을 지배할 이가 된다면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야말로 나도 한 아름다운 전설에서 생활할 수가 있겠구나, 옳다. 그녀의 그 은근한, 더구나 나를 보고 이따금 방긋이 웃던 것과 말할 때에 의미 있게 모음(母音)을 붙이던 것이 다 나를 사랑함이나 아닐까….’ 하고 창호는 공상에 싸였다.

이창호는 지금 도쿄 게이오대학 문과에 재학 중이다. 그는 특별히 외국어에 재주가 있어서 동창생들이 ‘고가쿠 텐사이(어학 천재)’란 별명을 주었다. 그는 실로 어학뿐 아니라 시(詩), 회(繪), 서(書), 음악, 기타 예술적 천재를 다 가졌다. 그래서 조선 유학생 간에는 매우 물망(物望)이 있는 청년이다. 창호는 한참 동안 별생각 다 하다가 모자를 집어 쓰고 밖으로 나갔다.

고지마치 구(區) 흙제방에는 한앵(寒櫻)이 박홍(薄紅)의 입을 반쯤 열고 아리땁게 웃고 있다. 그리고 그 앵화(櫻花)의 처녀적인 향기가 이상하게 창호로 하여금 이국정조의 아름다운 것을 깨닫게 하였다. 이때껏 도쿄 생활이 재미없던 창호도 이제는 취미를 붙이게 되었다. 가로로 산보하는 사람들도 다 조선말을 알며 자기와 같이 조선을 사랑하나니 하고 퍽 반가워하였다. 창호는 무의식적으로 구단을 지나 조선교회당 근처에 와서 한참이나 주저주저하다가 최후에 용기를 가다듬어 김 목사댁을 찾았다.

가슴은 몹시 울렁울렁한다.

“선생님 계십니까?” 하고 목소리는 그윽이 떨리어 나왔다.

“창호 씨요? 어서 들어오오.”

창호가 문을 열고 들어선즉 목사의 따님 선비와 작일 인사한 여학생 순애가 있다. 창호가 얼굴을 붉히며 “어제는 실례 많이 하였습니다” 하고 순애더러 말한즉 순애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였다.

목사는 방금 어디를 갈 양으로 모자를 썼다가 벗으며 “아, 참 실례지마는 좀 기다려주시오. 곧 다녀올 터이니….” 하고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간다.

창호는 여자에 대하여 퍽 겁을 낸다. 더구나 말이 어눌한 창호는 어떤 말을 하여야 될는지 몰라 주저주저하다가 순애더러 “언제 도쿄에 오셨소?” 하였다.

“여태껏 교토에 있다가 한 일주일 전에 왔습니다” 하고 순애는 방긋이 웃었다. 그리고 선비더러 “여자미술학교 시험이 언젠가요?” 하고 물었다.

“그것은 저 창호 씨가 잘 안대요” 하고 선비는 순애의 시선을 피하며 비웃는 듯이 말하였다.

“네! 그것은 제가 잘 압니다. 나한테 규칙서까지 있는데요” 하고 창호는 순애를 정면으로 보았다. 그리고 다시 “내일이라도 가져다 드리지요” 하였다.

“네, 고맙습니다. 제가 내일 가뵈옵지요” 하고 순애는 선비를 보고 낯을 붉혔다. 순애는 다시 “하숙이 어딘지요?” 하고 물었다.

창호는 희열에 넘치는 표정으로 순애를 보며 "네! 저는 고지마치구 이십 번지 시미즈 방에 있습니다” 하였다. 창호의 생각에는 순애가 확실히 자기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2[편집]

창호와 순애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농후하여간다. 김 목사 집에서 만난 이후로 순애는 매일 창호한테 가서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혹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며 기타 현대 조선 사회의 남녀 문제를 토론도 하였다. 창호는 그때마다 사랑은 절대 신성한 것이며 동시에 사랑을 영원히 계속하려면 시적 회상이 있어야 한다는 말과 결혼은 인생을 생리적으로는 살리지마는 정신적으로는 죽인단 말, 이 세상의 대비극은 다 결혼 생활을 중심으로 일어난단 말을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순애는, 창호가 아마 자기 처가 있으니까 이혼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순애 자기의 사랑이 결혼적이나 아닌가 해서 미리 겁내는 말이지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순애는 혼잣말로 “용기 없는 사람이로군” 하였다. 그래도 순애는 말할 수 없이 창호에게 마음이 끌리었다. 그 희고 파르스레한 낯빛이며 정감이 풍부한 눈매며 신경질인 엷은 입술이 다 순애에게는 매력을 주었다. 그리고 창호의 천재 지식은 누구나 다 감복하고 있다. 더구나 어학으로 말하면 중국 사람한테 가서는 중국 사람 행세를 하고 일본 사람에게는 일본 사람 행세를 해도 될 만큼 매우 천재가 있다.

그래서 한동안은 리노이에 이치로(李家一郎)이라는 변명(變名)까지 하고 일인(日人)과 교제한 일도 있다. 순애는 물론 여기에 반한 일도 없지는 않다. 물론 누구나 다 자기 연인 되는 사람을 추어서 천재니 유식하니 하면 사랑이 더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일주 후에 창호와 순애는 도쿄에서 사십 리 거리 되는 다마가와에 벚꽃 구경을 가게 되었다. 신주쿠 종점에서 시외 전차를 탔다. 두 사람은 어깨와 어깨가 마주 부딪칠 적마다 신경줄이 잡아당기는 듯이 자릿자릿하였다. 순애는 정감에 못 견뎌하는 듯이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일부러 창호 어깨에 기대일 적마다 자기의 통통한 젖가슴의 섬유(鐵維)가 다 녹아서 창호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듯이 아찔아찔하였다.

순애는 혼잣말로 “아, 나는 행복스럽다. 인생의 길이 하나는 회색 길이요 하나는 도색(桃色) 길이라면, 나는 지금 도색 길을 밟는구나. 옳다, 도색을 감정적으로 분해하면 환락, 교염(嬌艶), 사모(思慕), 초연다정(初戀多情), 평화를 의미함이 되겠지” 하고 몹시 흥분하는 듯이 눈을 슬며시 감으며 “아, 나는 이 연기 냄새 나는 도쿄를 떠나서, 이해에 비등(沸騰)하고 비밀한 죄악이 남모르게 유행되는 이 도회의 소굴을 떠나서 멀리멀리 아름다운 사랑의 남국(南國)을 향하여 동경(憧憬)과 색채에 싸인 천국을 향하여 가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꼭 한 사람 창호 씨와 함께….” 하고 순애의 동경적 정조 동경적 정조는 말할 수 없는 농후한 색채에 안기어 공상이란 망망한 대해(大海)에 표박(漂迫)하여 다닌다.

창호는 속말로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 하지만 암만해도 예술이 자연을 모방할 곳이 많군’ 하고 일본말로 “저, 아리따운 사쿠라를 보세요” 하고 의미 얻은 눈으로 순애를 보았다. 전차 창으로 보이는 다마가와의 묘망(渺茫) 경치는 마치 사막에서 보는 신기루같이 아득하였다. 순애의 표정은 애곡(哀曲)에서 느끼는 쾌감 가운데서 미소짓는 과부의 낯과 같았다.

3[편집]

두 사람은 다마가와 종점에서 내려서 다실(茶室) 근처를 향하여 나간다. 창호는 과거며 형식이며 기타 사회의 제도를 뿌리치는 듯이 활개를 치며 다만 현재의 환락, 동경, 탄미에만 흥분하는 듯이 대담스럽게 순애의 손목을 잡으며 “순애 씨 이리 가까이 오시오” 하고 당기었다. 그리고 어깨를 기대이며 “여보 순애 씨, 나의 전 존재는 다 당신에게 매였습니다” 하고 손목을 놓았다.

순애는 하얀 얼굴을 창호 가슴에 묻으며 “저는 당신의 처 될 권리가 없어요…. 그리고 당신의 과거를 알 수 없어요….” 하였다.

창호는 돌연간 순애를 뿌리치며 “순애 씨, 당신은 사랑과 결혼을 혼동합니까? 아, 결혼은 인생의 타락인 줄을 몰라요? 즉 영(靈)이 육(肉)에 대한 패배인 줄 몰라요?” 하고 순애의 사랑이 너무 이기적이요 동물적임을 원망하였다.

순애는 깜짝 놀라며 “아니, 제가 잘못 말했습니다. 이것이 다 창호 씨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고 낯을 붉히며 머리를 숙였다. “아니아니, 그럴 것은 없어요. 결혼이 만일 정말 순애 씨의 소원이라면 제 처와 이혼이라도 하지요. 그리고 허위의 생활에서 하루라도 바삐 내 전 인격을 구제하는 것이 옳지요” 하고 창호는 다시 순애의 손목을 잡았다.

봄바람이 앵원(櫻園) 사이로 흐르고 사라질 때에, 뵈지 않는 음색, 소리 없는 진동이, 그리고 모호하고 망연한 주원(周園)의 공간과 분홍 커튼 같은 사쿠라의 그늘이 두 사람을 포옹하였다. 그리고 사쿠라 향기에서 장일(張溢)한 신선한 미풍이 두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두 사람이 침묵과 느낌에서 천천히 발꿈치를 다마교에 던질 때에 그 막막한 넓은 뜰을 비껴 흐르는 다마가와며 조용히 잠자는 솔밭 그림자며 엷은 구름이며 기타 묵화 같은 다마야마가 다 전설에 있는 시국이거니, 자꾸 창호는 반가워하였다.

다마가와에는 유객(遊客)들이 많이 있다. 젊은 남녀들이 보트를 타고 돌아다니거나 여학생 같은 처녀들이 사쿠라를 따서 입에다 씹으며 벚나무에 기대이고 있다.

순애는 자기 곁으로 다니는 사람을 자세히 보다가 창호더러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어째서 그런지 귀족 냄새가 나는데요.” 하고 방긋이 웃었다.

“별말 다 하는군. 귀족도 냄새가 나나요?” 하고 창호가 깔깔 웃었다.

“아이구 참, 홀아비 냄새가 나는데 귀족 냄새가 아니 날까요?” 하고 순애는 조롱하는 듯 말하였다.

“아니, 처녀 냄새는 알지마는 홀아비 냄새는 아직까지 모르는 걸요” 하고 창호가 미소하였다.

순애는 창호의 말을 듣고 불시에 낯을 붉히며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가슴은 몹시 두근두근거렸다.

“어디가 편치 않으십니까?” 하고 창호가 물었다. 순애는 한참 있다가 “네, 머리가 좀 아파서” 하고 더욱 낯을 붉힌다.

“그러면 저녁때도 거의 되었으니 저 찻집에 가서 좀 쉬다가 돌아가지요” 하고 창호는 순애를 인도하여 요리점으로 들어갔다.

방은 매우 조용하다. 창호는 저녁밥을 시키고 다시 순애더러 “아직도 아프시오?” 하였다.

“아니오. 이젠 다 나았습니다” 하고 순애는 방긋이 웃었다.

한참 있더니 요리가 들어와서 두 사람은 맛있게 먹었다. 창호는 서창(西窓) 문을 열었다. 석양은 황금 실말이같이 몹시 찬란하다. 창호는 손을 순애 어깨에 얹으며 아무 말 없이 순애를 쳐다보며 이마를 마주 대었다. 순애가 머리를 창호 가슴에 꼭 대며 그윽이 떨리는 소리로 무엇을 애원하는 듯이 “창호 씨....” 하고 말했다. 창호는 순애를 끌어안으며 오랫동안이나 입을 마주 대었다. 그리고 순애의 눈에는 수분이 가득히 괴었다. 창호는 문을 닫고 다시 순애를 포옹하였다. 아, 이 정열에 타는 동맥과 동맥이 서로 합하고 영과 육이 서로 포합(抱合)된 두 청년 남녀에게는 도덕과 정조의 위권(威權)도 다 티끌이 된다. 도덕을 원망하는 정욕은 지금 두 청춘에게 복수를 하고자 함이나 아닌가….

4[편집]

그후 한 달이 넘도록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 사랑하였다. 기실은 순애보다도 창호의 사랑이 더 열정적이요 헌신적이었다. 순애도 근화의 향기를 동경하는 호접같이 혹익(惑溺)과 환락에서 날을 보냈다. 순애는 자나 깨나 늘 환락과 포옹의 미주(美酒)를 들고 창호를 맞았다.

그러나 항상 순애가 번민하는 것은 창호의 이혼 문제가 아닌가. 연애가 적어도 여자의 전 존재라 할진대 어찌 대금의 영수증 같은 결혼을 무시하랴. 순애가 이혼을 요구할 때 창호는 늘 낯을 찌푸린다. 순애는 이럴 적마다 창호는 용기 없는 사람, 남자답지 못한 사람이라 하고, 창호는 순애의 사랑이 이기적 동물적이라고 원망한다. 그러나 창호는 말할 수 없이 순애가 귀여웠다. 창호는 순애의 요구대로 이혼한 후 순애에게 의심 없는 사랑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창호는 그후 하기(夏期) 방학만 오면 곧 귀국해서 이혼을 단행하기로 순애에게 약속하였다. 그리고 창호는 매일 간다구에 있는 순애의 거처에 찾아가 자정이 넘도록 둘이 소곤소곤하며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에는 장차 주부가 되어서 가정을 어떻게 처리할 것과 식당과 침실을 따로 한다는 것과 객이 오면 순애가 먼저 나가 접대한다는 말, 토요일 오후에는 공원 산보를 하고 일요일은 오전에 예배당에 갔다가 와서 극장에 간다는 말, 기타 창호는 매일 이른 아침 다섯 시쯤 해서 몸을 똥똥히 만든다는 말과 순애는 집 섬돌을 돌아가며 채송화 초화를 심는단 말을 한다.

순애와 창호의 사랑은 이같이 환락의 상상봉까지 올라갔다. 기실은 결혼 이상으로 영과 육의 만족을 얻었다. 아, 이 두 연인은 사랑이란 감주에 취하여 발을 뒤뚝하고 상상봉에서 떨어지지나 않을는지.

두 사람은 좀더 높은 데로 올라갈 양으로 둘러보았다. 그러나 창호의 눈에는 아니 보였다. 창호는 여기서 더 높은 데로 올라가지 아니할뿐더러 자기가 서서 있는 곳을 만족히 알았다. 그러나 순애의 맑은 눈에는 이보다 더 높은 환락의 상상봉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상상봉에 오르려면 지금 자기가 서서 있는 곳을 내려와야만 될 형편이었다. 아, 이 두 상사(相思)의 연인은 장차 어떻게 되려는가? 이 일을 하나님 이외에 누가 알 수가 있을까?

때는 유월 초순이었다. 창호는 초여름의 미풍을 반갑게 맞으며 고지마치구 흙제방 위에 앉았다. 사쿠라도 꽃이 다 떨어지고 파릇파릇한 새 잎이 퍽 길게 돋았다. 창호는 풀 위에 누우면서 ‘아, 자연은 꽃이 피면 떨어지는 것이 진리건마는 사랑은 이와 반대로 꽃이 피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진리가 아닌가. 이것을 보면 인간미가 확실히 자연미보다 승(勝)하군]’ 하고 창호는 쾌락을 느끼는 듯이 슬며시 웃으며 다시 ‘예술은 어떤가? 사랑이란 항구성(恒久性)을 주며 육적 쾌락을 시화(詩化)함이 아닌가’ 하고 창호는 과거의 기억을 불러냈다. 거기는 순애가 하얀 이마를 자기 가슴에 대던 것과 자기 팔과 다리가 순애의 보들보들한 섬유를 건드릴 적마다 신경줄이 자릿자릿하던 것과 전신이 뻣뻣 쌔근쌔근하던 것이 기억이 된다.

5[편집]

토요일 밤이었다. 창호는 제극(帝劇)에서 흥행하는 <카르멘>을 순애와 함께 구경 갈 뜻으로 여섯 시쯤 해서 순애를 찾아갔다. 창호가 문을 열고 순애 있느냐고 물은즉 주인 할멈 대답이 지금 어떤 손님이 와 있다 한다. 그래서 창호는 손님이라면 여자인 줄만 알고, 그냥 이층 위로 올라가 염려 없이 장지문 열고 본즉 의외에 한 이십오륙 세 되는 남자이다.

순애는 낯을 붉히며 “잘 오셨습니다. 이 어른은 저 교토 있을 때 망년회에서 한번 인사하였던 이예요” 하고 인사를 시킨다. 창호는 다소 불쾌한 마음을 억제하고 “네, 처음 뵈옵니다. 저는 이창호라 합니다” 하고 머리를 숙인즉 “네, 저는 최병창이라 합니다” 하고 명함을 내놓는다.

명함 옆에는 조선물산상회 주임이라고 씌어 있다. 창호는 속말로 ‘아, 도쿄에 엿 팔러 온 사람이군’ 하고 힐끗 쳐다보았다. 몸은 좀 뚱뚱한 사람이요 얼굴의 윤곽은 퍽 육욕적이다. 붉은 입술이며 두두룩한 눈자위가 다 야비하게 보인다. 창호는 속으로 이 사람이 무슨 일로 순애를 찾아왔으며 어떻게 순애의 거주를 알았는가 하고 퍽 의심스러운 생각이 난다. 혹은 인삼이나 팔러 오지 않았나 하고 방안을 둘러보아도 인삼 가방은 없다. 창호는 더욱이 의심이 나고 불쾌한 감정이 생겨서 종내 무슨 볼일이 있다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암만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창호는 담배를 피워 물고 만약 최가와 순애가 과거의 연애 관계였다면 어찌할꼬…. 아니다. 나의 사랑하는 꼭 한 사람 순애가 설마 그런 일이야 있으랴 하고 스스로 안심하고 있는 때에 돌연간 두 달 전 다마가와에서 자기가 순애에게 대하여 “나는 처녀 냄새를 아는데요” 하는 말에 순애의 표정이 불시에 이상하게 되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아, 순애는 왜 낯을 붉히었는가. 순애는 처녀가 아니었던가. 옳아, 확실히 순애는 최가라는 자에게 정조를 빼앗기었다. 아니다. 순애는 그럴 처녀가 아니야. 아니아니, 결코 그런 더러운 여자가 아니야. 내가 너무 신경과민이지. 내 전 존재를 다 바쳐 사랑하는 순애의 과거가 설마 그럴 수야 있나’ 하고 자기 잘못을 용서해달라는 듯이 “순애 씨, 순애 씨” 하고 불렀다. 동시에 순애가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나타나며 “네, 창호 씨. 저는 당신 꼭 믿어요….” 하고 사라진다. 창호는 낯을 붉히며 “네네, 나도 당신만 꼭 사랑해요” 하고 순애의 용서를 얻은 듯이 픽 웃었다.

방학은 한 일주일 후면 되게 되었다. 그래서 속히 방학해서 귀국한 후 이혼 수속할 것과, 순애와 이내 약혼한 후 행혼(行婚)은 명년 졸업 후에 하고 또다시 도쿄서 순애와 함께 공부할 것을 생각하고 퍽 기뻐하였다.

6[편집]

일주일 후였다. 창호는 이튿날 오후 네 시 차로 귀국하기로 하고 순애는 미술학교 추기(秋期) 보결생 모집에 응시하기로 하고 시 험 준비로 도쿄에 남아 있게 되었다. 창호는 귀국하기 전 순애와 한 번 더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할 일이 있는 고로 순애가 있는 집을 찾았다. 창호가 막 문에 들어서는데 순애가 문간에 서 있다.

“어디를 가세요?”

“아니오. 지금 창호 씨 댁에 가는 길이에요. 참 잘 오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하고 순애가 말하였다.

창호는 이층으로 올라간 후 내일 귀국한다는 말과 귀국해서 이혼 수속만 다 되면 곧 도쿄에 오겠다는 말을 하였다. 한두 시간 말하다가 창호는 내일 정거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튿날이 되었다. 정거장에는 창호가 순애와 또 창호의 친구 이동우가 나왔다. 오후 네 시가 되자 정거장 보이가 종을 울린다. 세 사람은 애수에 흐느끼면서 서로 이별하였다. 창호는 기차에 올라서며 눈물이 핑 괴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이 기적의 소리와 함께 순애를 이별하였다. 순애도 손수건을 내저으며 퍽 울었다.

창호는 이별의 아픔을 느끼는 애수 가운데 떠나간다.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시커먼 솔밭이며 창천을 틈 없이 덮은 회색 구름이 창호에게는 사(死)의 지옥같이 보였다. 창호는 마치 따뜻한 인정 그리운 사회, 사랑하는 친구도 다 떠나서 아주 암흑하고 색채 없는 사굴(死窟)로 가는 듯이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시모노세키에 이르기까지 눈물로 밤을 지냈다.

유월 십육일 이른 아침에 부산에 내렸다. 처음에 보이는 것은 반가운 조선 사람의 백의(白衣)이다. 여기저기에서는 지게꾼들이 생활난에 피곤한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조선말로 수군수군한다. ‘아, 인정과 사회는 변하되 조선말은 여태 남아 있구나. 아, 고마운 것은 충직한 조선말이다’ 하고 감개무량한 것을 억지로 참고 이내 봉천 향(向) 기차를 탔다. 말을 귀담아들으며 두루두루 자세히 보았다. 그들의 말은 다 지주(地主)의 폭악한 이기 수단을 저주하며 소작인은 도저히 살 수 없다는 불평이었다. 말끝마다 다 고통과 비관에 싸인 부르짖음이다. 창호는 ‘아, 조선 사람의 생활은 점점 더 비경(悲境)으로만 밀려나나’ 하고 퍽 슬퍼하였다.

창호는 침묵과 애수 속에서 경성을 지나 평양에 도착하였다. 평양은 창호의 고향이다. 정거장에는 맏누이님과 동생이 나와 있다.

“아, 저기 오빠 오십니다” 하고 창호의 동생 덕희가 형님한테 말한다.

창호는 덕희의 소리를 듣고 빨리 걸어나오며 “아이구 누님, 그간 편안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즉 덕희가 옆에 섰다가 손으로 오빠의 양복 자락을 잡아당기었다.

“오냐, 덕희야 잘 있었니?” 하고 손을 잡았다. 덕희는 너무 반가운 끝에 흐느낀다.

창호가 집에 온 후 한 2주 후였다. 창호의 부친 이 참봉은 창호의 이혼이란 말을 듣고는 집안에 패덕자가 하나 생겼다고 큰 야단이다. 그래서 창호는 매일 밥도 잘 먹지 않고 고통에 싸여 있었다. 모친은 며느리와 항상 뜻이 어긋난다. 그래서 창호 편을 들어 외아들을 죽인다고 두 내외가 매일 싸움판이다. 창호는 번민과 절망에 싸여서 혼자 모란대에 올라왔다. 능라도를 둘러싼 맑은 대동강은 창호로 하여금 일단 고통을 멈추게 하였다. 창호는 비탄과 애원 속에서 노래를 불렀다.


바라보니 보통벌은 잠들고
말하니 을밀대는 귀먹었네
대동강아 내 답답을 풀어서
천하에 소낙비가 되려무나
무정하다 강산아 나를 몰라
고독의 설움은 자연히 나네
무너진 옛 도읍을 바라보매
절망의 한숨은 더욱이 난다.


감정적인 창호는 노래를 부르고 한참이나 느끼다가 대동강 역으로 내려왔다. 쪼이는 양염(陽炎)은 백일몽같이 맑은 강수에 잠겨 있다. 그리고 처처한 녹초는 힘없이 노방에 자빠졌다.

“아,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모란대야…. 기억만 사령(死靈)의 눈물과 피를 다 거둔 대동강아…. 이 불행한 시인의 번민을 동정해다오” 하고 창호는 애수에 잠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7[편집]

한 달 후가 되도록 창호의 이혼은 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창호는 매일 잠 못 자고 밥도 끼를 건널 때가 많다. 얼굴은 점점 파리해가며 몸도 불건강하여간다. 그동안 순애한테서는 편지가 많이 왔다. 그러나 그 편지에는 이혼 요구는 조금도 없고 도리어 이혼은 인생의 큰 비극이니 그만두란 말과, 자기를 위하여 그리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 일주일 후에 창호의 친구 이동우한테서 편지가 왔다. 이 편지의 내용은 어떤가. 아, 창호의 운명을 좌우할 치명상이 아닌가….

펴본즉 천만의외에 순애가 모 학생과 연애에 빠져 지금은 동거까지 한다는 말이다. 아, 세상에 이같이 더 무정한 일이 있는가. 만일에 일이 사실이라면 순애는 매소부(賣笑歸)가 아닌가? 아니, 사랑을 위선한 매음녀가 아닌가? 아, 사회와 도덕과 인정은 사기 취재나 계약 위조를 벌하거늘 하물며 인간미의 절대 신성한 사랑을 위선한 자에게야 더욱이 용서할 수가 없지 않은가.

창호는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이지. 동우는 본래 친구에게 거짓말을 가지고 놀라게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이번에도 아마 농담이겠지. 설마, 내 전 존재를 다 희생하면서 사랑하는 꼭 한 사람 그녀가 그럴 수야 있나. 만일 사실이라면 순애는 나를 죽이는 사람이 아닌가. 아니아니, 결코 그럴 여자가 아니야. 순애는 마치 곡간(谷間)]에 핀 백합같이 정숙하고 청정한 처녀가 아닌가? 순애는 정코 나 오기만 기다리고 애수에 싸여 있을 것이다. 오냐, 나는 하루라도 빨리 사랑 없는 이 허위의 가정에서 벗어나 신성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하고 무슨 일을 결심한 듯이 주먹을 부르쥐며 ‘옳아, 나는 거듭나야만 된다’ 하고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갔다. 창호가 가는 데는 어딘가? 자기의 유일한 친구 변호사인 김태초이다.

8[편집]

창호는 태초한테 가서 전후 사정을 다 말하였다. 그리고 이내 이혼 청구를 재판소에 제출하게 되었다. 그후 일주일 후 태초 씨의 진력(盡力)으로 요행 이혼은 피차 원만히 되었다.

창호는 당장에 새 사람이 된 듯이, 그리고 자기의 전 인격을 사랑 없는 허위의 생활에서 구제한 듯이 기뻐하였다. 창호는 이미 이렇게 된 이상에는 하루라도 빨리 도쿄에 가서 순애와 약혼하리라 생각하고 그 이튿날로 평양을 출발하기로 하였다.

산산한 팔월 초삼일이다. 창호는 남대문 향 기차를 탔다. 일편으로 순애를 반갑게 만나는 것도 즐겁지마는 자기를 길러낸 고향을 떠나는 것도 퍽 슬펐다. 누구나 다 인생으로 생겨나서는 자기 난 향토에 대하여 애착성이 있는 것은 인정에 정한 일이다. 이 애착성이 가정을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하게 한다. 만일 이 애착성이 없는 사람은 인생으로 생겨나서 따듯한 인정미가 없는 냉정한(冷情漢)이 아닌가? 그리고 ‘자기 찬양의 희락과 존영과 자유와 희망을 모르는 짐승이 아닌가?’ 창호는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았다. 그러나 ‘그 도수장은 전제적(傳製的) 미신이 사(死)로써 미래의 정토와 영겁의 봄을 맞은 곳이었다’.

칠일 오전 여섯 시에 도쿄에 내렸다. 창호가 플랫폼을 두루 살피매 순애는 아니 나오고 동우 혼자만 나왔다.

“아, 여보게 동우 군. 그래 그간 도쿄서 재미 많았나?” 하고 창호가 동우의 어깨를 툭 치며 벙긋이 웃었다.

동우는 놀랄 듯이 “아, 이군, 편안히 왔나? 그래 본국은 어떻게나 되었던가?”

“산과 물은 아직도 그냥 있다네” 하고 한숨을 후 하고 내쉰다.

두 사람은 정거장에서 걸어나와 와세다 향 전차를 잡아탔다. 진보초에 와서 창호는 무슨 볼일이 있다 하고 자기 혼자만 내렸다. 그리고 그길로 간다구 사루가쿠초의 순애 집을 찾았다. 아, 순애는 거기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이 주일 전 우시코메 구로 이사하였다 한다.

창호는 이사한 집 번지를 적어가지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할수록 순애의 행실이 의심이 난다. 아, 동우 의 편지가 지금은 유력한 현실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창호는 직각적으로 인삼상(人蔘商)인 최가가 순애를 유혹한 줄 알았다. 아, 순애가 창호를 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아, 순애가 사랑을 위선한 매소부가 된 것도, 또는 창호의 전 존재를 파멸시킨 것도 사실이 아닌가.

창호는 그 이튿날 순애가 있다는 우시코메 구의 집을 찾았다. 현관에 들어선즉 생각하던 바와 같이 최가가 나와서 창호를 흘겨보며 일본말로 “어찌 오셨소?” 한다.

그래서 창호는 목이 메는 것을 억지로 참고 “순애 있소?” 하였다.

“순애 씨는 학교에 가고 없어요” 하며 말이 냉담하게 나온다.

창호는 기가 막혀 한편으로 분도 나는 고로 주먹을 부르쥐며 방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턱을 고이고 고통에 싸여 있다. 그는 순애를 원망하는 것보다도 사회를 더 원망하였다. 아, 사회와 인정은 창호의 모든 행복을 다 박탈하였다. 창호가 인간적으로 타락해서 최후에 자살까지 한대도 사회와 인정은 벌할 권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창호가 육적(內的)으로 자살하기 전에 사회와 인정은 벌써 창호를 죽여 놓았다.

아, 누구나 다 생을 동경하고 사(死)를 저주하되 그러나 이 불쌍한 어린 동무는 생을 버리고 사를 취하기로 되었다는 비감(悲感)의 폭발이 어찌 이성의 비평을 기다릴 수가 있나. 아, 창호는 여기에 인생을 사직하기로 결심하였다. 옛적부터 자살한 사람들은 다 극락과 환락에 싸인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죽었지마는 창호 하나는 암흑과 절망인 지옥을 목표로 하고 죽게 되었다. 아 독자여, 우리 불쌍한 동무를 위하여 동정하여주시고 그리고 눈물을 흘려주시오.

한참 있더니 순애가 들어오다 창호를 보고 깜짝 놀라며 머뭇머뭇하며 얼굴을 붉힐 때 창호는 이미 알아차리고 “상관없으니 들어오오” 하고, 순애가 일부러 아니 들어오는 것을 잡아당겨 방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거의거의 절망의 목소리로 “과거를 중히 여깁니까, 현재를 중히 여깁니까…” 하고 물었다. 순애는 여전히 묵묵하였다. 창호는 한 번 더 큰 소리로 대답을 재촉하였다. 아, 창호의 전 희망 생명은 이 한마디에 달렸다. 불쌍한 창호는 아직도 행여나 과거를 사랑한다면 현재의 모든 더러운 행실을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려 함이다. 그러나 순애의 무정(無情)은 어떤가. 최후에 마지못하여 “옛정도 좋지마는 새로운 정도 잊을 수 없어요” 하고 시치미를 딱 뗀다. 창호는, 순애는 이미 옛적 순애가 아닌 줄을 알고 단단히 결심한 후 순애의 손과 최가의 손을 서로 잡히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여호와시여, 우리는 항상 유혹과 허위와 질투에서 난광(亂狂)하는 비극적 동물이외다. 비옵나니 이 두 사람을 불쌍히 여기사 이러한 암굴에서 광명과 신성한 데로 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고 저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 두 분의 행복을 위하여 제 전 존재를 희생합니다. 아멘.” 순애도 창호의 그 정성스러운 사랑에 감동이 되었던지 흐느낀다. 그리고 창호의 손을 잡으며 “만사가 다 저의 잘못이외다. 아, 저는 과연 신성한 사랑을 위선한 도덕상 죄인이올시다” 하고 그냥 흐느낀다.

창호는 순애의 손목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 아, 우리 불쌍한 창호의 장래는 장차 어떻게 되려는가. 그리고 이 사랑의 위선자는 장차 어떻게 되려는가.


《매일신보》 1920년 3월 2일 ~ 6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