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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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집]

××여학교 3년급생 정숙은 새로 한 점이 넘어 주인집에 돌아왔지만, 여름 밤이 다 밝지도 않아 잠을 깨었다. 이 짧은 동안이나마 그는 잠을 잤다느니 보다 차라리 주리난장을 맞은 사람 모양으로, 송장같이 뻐드러져 있었다. 뒤숭숭한 꿈자리에 가위 눌리고만 있었다. 물같이 흐른 땀이 입은 옷과 이불을 흠씬 적시고 있었다.

어째 제 주의 모든 것이 변한 듯싶었다. 그는 의아히 여기듯이 이리저리 시선을 던지었다.

새벽 빛은 허여스름하게 미닫이에 깃들이고 있다. 맞대 놓인 두 책상 위에 세워 있는 책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제 곁에는 깊이 잠든 정애의 까만 머리가 흰 베개 위에 평화롭게 얹히어있다. 이불이고, 요이고, 베개이고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있던 그대로 있었다. 변해진 것은 제 자신이었다.

그는 어젯밤에 겪은 일을 생각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경과는 부연 안개에나 가린 듯이 흐리멍텅하였다. 몹쓸 악몽을 꾸기는 꾸었으나 모두 어떠한 것이든지 회상할 수 없는 모양으로.

그러나 문득 어슴푸레한 박명 가운데 빙그레 웃는 K의 얼굴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 웃음은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듯한, "흥, 네가 인제는 내 것이로구나."하는듯한 모욕과 조소가 몰린 신랄한 그것이었다.

그는 무서워 못 견디는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마자, 제 당한 일이 또렷또렷하게 가슴에 떠나오기 비롯하였다.

정숙은 사피(辭避)타 못하여 K의 강권(强勸)하는 포도주 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달코한 붉은 물을 조금씩 오래오래 마시었다. 그때에는 어지럼증도 걷히고, 하녀가 가져다 놓은 덴뿌라소바의 뜨신 국물이 따스하게 정숙의 창자에 흐르고 있을 적이었다. "그것 보시오. 내말이 거짓말인가. 설탕같이 달지 안하오."

K는 수없이 반복한 제 말을 증명이나 하는 듯이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정숙은 포도물이 발그레하게 젖은 입술로부터 컵을 떼면서 그 말을 시인하는 것처럼 빙그레 웃었다.

"저는 인제 고만하겠습니다. 얼굴이나 붉으면 어쩌하게요."

정숙은 두 컵에 새로이 꽃물이 펑펑하고 쏟아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미리 거절하였다.

"이것은 술이 아니래도 또 그러십니다그려. 얼굴이 붉을 리야 조금도 없지요."

라는 K는 확신 있는 어조로 또 재우쳤다.

"아니야요. 고만두십시오. 정말 못 먹겠습니다."

하고 정숙은 K의 들어주는 술잔을 밀치었다.

"괜찮아요. 설령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한들 밤에 어디 보입니까?"

"그래도……."

"그래도 어떠하단 말입니까? 내 말만 믿으시오. 이것은 술이 아닙니다."

하고 K는 그 잔을 정숙의 입에 들이대었다.

"에그, 인주셔요."

정숙은 옷에 쏟칠까 염려하여 그 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무슨 쓴 약이나 먹을 때같이 얼굴을 찡기고 있다.

"그냥 쭉 들이마십시오."

K는 잔을 단숨에 들이마시고 또 한번 재촉하면서 앞으로 다가들었다. 붉은 액체는 조금씩조금씩 빨리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사나이의 거친 숨결이 계집의 얼굴에 서릴 만치 그들의 거리는 좁았다.

"그것 잡숫기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라고 K는 조급히 부르짖을 사이도 없이 안을 듯이 한 팔을 정숙의 어깨 너머로 돌리며, 한 손으로 입술에 댄 컵을 밀었다. 정숙은 몸에 불이 흐름을 느끼었다. 기계적으로 열린 목구멍으론 달콤한 물이 쏟아져 넘어갔다. 야릇하게 흥분된 애젊은 육체는 부들부들 떨었다. 심장의 미친 듯한 고동이 귀를 울리었다.

정열에 띠인 네 눈은 서로 잡아먹을 듯이 마주보고 있었다. 정숙의 뺨은 화끈화끈 타는 듯하였다.

"정숙 씨!"

란 말이 떨어지자마자 정숙은 회오리 바람같이 가슴에 앉히는 남성을 느끼었다. 녹신녹신한 가냘픈 허리는 새깍지 같은 팔 안에 들고 말았다. 그럴 겨를도 없이 뜨거운 두 입술은 부딪쳤다. 이 열렬한 키스는 양성(兩性)의 육체를 단 쇠끝같이 자극하였다. 그것은 온전히 정신이 착란한 찰나이었다…….

일 분 뒤에 정숙의 풀린 머리는 베개 위에 흩어져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여기는 동물적 본능이 제대로 지배하고 있었다.

얼마 후, 정신이 든 정숙은 검게 빛나는 K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쇠뭉치같이 등을 돌리고 있는 남성의 팔을 느끼자 제 몸을 빼려고 애를 썼다.

K는 감았던 팔을 슬며시 풀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이야말로 악마의 웃음 그것이었다. 정숙은 소름이 쪽 끼치었다. 그제야 모든 것을 알았다. 그는 다시 헤어날 수 없는 구렁에 깊이 빠지고 말았다. 눈물이 샘솟듯 눈초리에 넘치었다. 그는 공포로 하여 울었다. 절망으로 하여 울었다. 목숨보다 더한 순결을 잃은 것이 슬펐었다.

꽃다운 처녀를 길이 작별함이 슬펐었다.

그것은 남성에게 짓밟힌 여성의 속절없는 눈물이 있었다.

2[편집]

정숙은 더할 수 없이 흥분한 머리 가운데 무섭게도 분명하게 또 한번 그 최후의 찰나를 경험하였다.

잠이 그의 뺨 위에 그린 장미꽃 빛은 어느 결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 대신 죽은 사람의 얼굴에만 볼 수 있는 납빛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어제 저녁은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찌는 해는 드디어 불볕을 거두고 말았다. 눈빛 같은 구름이 봉오리 봉오리 하늘가에 피어올랐다. 밝은 달이 그 신비롭고 서늘한 빛을 온 누리에 펼치었다. 이런 밤에 뭍을 떠나, 사람을 떠나 애인과 단둘이 일엽편주에 몸을 실리고, 귀 없고 눈 없는 수국(水國)으로 헤맴은 얼마나 시적(詩的)이랴! 미적(美的)이랴!

어제 저녁에 정숙은 이 시경(詩境)에 취할 수 있었다. 이 미미(美味)를 맛볼 수 있었다. K와 단둘이 꿀 같은 사랑을 속살거리면서 돈짝만한 배로 한강의 흐름을 지키고 있었음이다. 달빛 깔린 푸른 하늘은 꿈결같이 물속에 가로 누워 있었다. 그 위를 지나가는 배는 마치 제애(除涯)도 없는 명랑한 공간에 일렁대는 듯하였다.

뛰이, 하는 기적이 맑은 공기를 뚫자 우루루우루하며 철교를 지나가는 바퀴 소리도 음악적이었다.

서늘한 강바람이 좌르룩 하며 불기도 한다. 엷고 가는 외겹 모시적 삼 속에 든 정숙의 살은 선득선득하기도 하였다. 물결이 철썩 하고 뱃머리를 때리기도 하였다. 은가루 같은 수연(水煙)이 눈 앞에 흩어지며 선체가 비틀거리었다. 두 몸은 슬쩍슬쩍 닿았다. 그 자릿자릿한 접촉이 정숙을 얼마나 황홀케 하였으랴!

정숙은 무한한 행복을 느끼었다. 마침내 바람머리를 앓을이 만큼 언제든지 이 행락(行樂)을 누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으면 은하수 끝까지라도 저어가고 싶었다.

배를 내린 그는 어질어질하였다. 전차에 흔들리매 속이 뉘엿뉘엿하여 견딜 수 없었다. 간신히 남대문까지 와서는 K의 권고로 전차를 내리었다 진정을 해야 된다는 구실 밑에 거기서 멀지 않은, K가 머물고 있는 이 일본 여관으로 끌려 갔었다.

행복의 절정이 절망의 심연이 될 줄이야!

정숙은 어젯밤에 지낸 일이 꿈이라 하였다. 암만해도 있을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았다. 하나, 뒤미처 제 가슴을 누르고 있던 불덩이 같은 남자의 몸뚱아리를 생각하고, 괴로운 한숨을 내어쉬는 수밖에 없었다.

방안은 점점 밝아온다. 정확하고 분명한 아침 빛이 조으는 듯한 잿빛을 쫓고, 구석구석으로 희게 퍼졌다.

그는 문득 갈고리에 걸린 제 치마를 보았다. 오랫동안 습관이 저도 모를 사이에 그것을 저기 걸었음이리라. 모시 치마는 짓부비어 놓은 듯이 구기어 있었다. 그 구김살 하나하나가 무서운 일의 가지가지를 설명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는 불현 듯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벗기자, 소리가 아니 나도록 가만가만히 구김살을 펴기 시작하였는데, 정애의 이부자락이 움질움질할 때마다 차디찬 빗발이 온 몸에 흩뿌리는 듯하였다.

정애는 눈을 떴다. 일어나 앉은 정숙을 보더니,

"어젯밤에 어데 갔던?"

이라고 묻는다.

정숙의 가슴은 방망이질하였다. 대답할 말이 없어 머뭇머뭇하다가, 돌차간( 嗟間)에 이렇게 꾸며 대었다.

"저어…… 청년회 음악회에 갔었지."

이 최초의 거짓말이 입에서 떨어지자, 청정하고 순결하고 자랑높던 처녀는 그림자를 감추었다. 영원히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았다. 그와 반대로 허위에 싸인 비열하고 추악한 별다른 생물이 정숙의 속에 꾸물거리고 있었다. 정애가 옷을 입고 세수를 하는 동안 정숙은 맑은 눈에 정신을 모아 그의 하는 양을 살피었다. 문득 제 동무는 옥이나 구슬같이 깨끗하고 영롱하거늘, 자기는 짓밟힌 지렁이 모양으로 구역이 날 듯이 더러운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정애의 움직이는 곳에만 일광(日光)이 비치어 밝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건마는, 저 있는 데는 먹장같이 검고 암흑이 휩싸고 있는 듯도 하였다.

정애가 이렇게 정숙의 눈에 보임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정애는 얼굴이 검고 맵시도 없는 여자이었다. 그 위로 치어오른 코와 쪽 빤 볼은 정숙의 오묘한 그것과 불그레한 뺨 모습과는 야릇한 대조이었다. 또 재주를 말하여도 정숙의 그것이, 정애의 따르랴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한 학교 한 연급(年級)에 다니며 한 주인에 있으면서도 정숙은 노상 그를 업수이 여기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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