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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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편집]

따뜻한 봄 어느 토요일 오후이다.

나날이 포근하여지는 봄볕은 이 날도 따뜻이 평화롭게 비치어 붉으락 푸르락 꽃 피려는 시(詩) 같은 산 밑 동리가 꿈 속 나라 같이 고요히 있어, 봄볕에 빛나는 양(樣)이 마치 가늘한 소리로 양춘(陽春)의 곡을 주(奏)하고 있는 것 같다. ─ 모두가 봄이다! ─

─ 4행 삭제 ─ [1]

무악(毋嶽)재 고개 좌편 인왕산 꼭대기 성벽 끝(굽은 성) 위에 세 사람 청년 남녀가 천사같이 서서 양춘이 온 것도 알지 못하고 갑갑한 속에서 지내는 형제를 위하여 높이 부르는 위안의 노랫소리였다.

망향가도 마치고 이제 악몽이라는 애연한 옥중가를 마치자 혜숙이는 수건으로 눈물을 씻었다.

들고 섰던 수첩을 접어 양복 주머니에 넣으면서 중식(重植)이가,

“오늘은 그만 내려가지…….”

하고 돌아가기를 재촉하니까 혜숙이가 수건을 접으면서 팔장을 끼고 서서 산 밑 붉은 담을 힘없이 보는 동호(東昊)를 향하여,

“내려가시지요.”

하고 자기는 중식의 앞에 서서 내려간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팔짱을 끼고 산 밑 담 안을 들여다보며 잠잠히 섰던 동호는 말없이 발을 돌려 두 사람의 뒤를 따라 내려간다.

혜숙이는 스무 살이 못 되어 보이는 흰 얼굴이 둥글고 눈이 시원하게 생긴 여자로 현금 어느 고등 학교에 통하는 학생이고 중식이는 그 오라비로 ○○ 전문 학교 법과에 통하는 청년이다. 그리고 동호는 중식의 가장 친한 신우(信友)이니 어느 법학교에 통하는 청년이다.

키만큼씩 자란 소나무 사이로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성을 끼고 내려오는 세 사람은 모두 잠잠하다.

앞에 선 혜숙이가 두 손을 들어 낯을 스치는 솔가지를 이리저리 헤치어 가면 꼭 그대로 중식이는 뒤를 따르고 동호는 중식이의 발자국을 그대로 디디려는 듯이 따를 뿐이다.

한참이나 잠잠하게 내려가다가 이때껏 말없이 있던 동호가,

“그 수건을 흔들던 사람이 아마 신우석(申禹錫)이지…….”

하니까, 중식이가,

“그 많은 사람 중에 어떻게 알 수가 있나?”

“글쎄, 사람은 많지만은 방이 그 방이니까.”

“바로 그 방인가?”

“응, 그 방이지…….”

하고는 잠깐 후에,

“그 방에 지금 셋이 있나 둘이 있나 그렇지…….”

다시 잠잠하여졌다. 세 사람은 벌써 선바윗재를 훨씬 지나왔다.

잠잠히 오던 혜숙이가,

“에그, 벌써 저녁 차입(差入)들을 하고 와요.”

하는 소리에 본즉 성 바깥 언덕 길을 넘어 은행나무 밑을 지나 터진 성길을 밟아 부인네가 이삼인씩 차입 식기를 들고 올라온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면서 중식이가 양복 앞자락을 헤치고 시계를 꺼내보더니,

“에그, 벌써 네 시 오분 전인걸…….”

한다.

이제 얼마 아니 있어 오늘도 저물었다. 감옥 굴뚝에 무럭무럭 쏟아지던 검은 연기도 지금은 조금씩 조금씩 흘러나온다.

세 사람은 성 터진 곳 사직골과 독립문의 분기점인 성길에 이르렀다. 중식이와 혜숙이는 성 밖 행촌동(杏村洞)으로 동호는 성 안 도렴동(都染洞)으로 세 사람이 헤어지려면 이 곳에서 헤어질 곳이다.

세 사람은 할 말은 없으면서 무엇인지 할 이야기가 남은 것 같아서 머뭇머뭇하다가 길 옆 성돌 위에 우뚝 섰다. 모두 성 밖을 향하여…….

금화산(金華山) 위에 가까워 온 석양이 세 사람의 그림자를 부드러운 풀밭 위에 비스듬이 길게 던졌다.

봄날은 저물기도 평화롭게 저문다.

어디서인지 따뜻한 남국을 노래하는 듯한 버들피리 소리가 봄소리답게 느리게 들려오고 무악재 비탈길에 삿갓 쓴 나무꾼들이 소와 함께 한가히 넘어간다. 세 사람은 성벽 위에 서서 원근(遠近)의 춘경(春景)을 바라보고 있다.

“저기 저 허연 것이 무얼까요?”

오빠하고 혜숙이가 손을 들어 남대문 정거장 편을 가리킨다.

“어디?”

하고 중식이가 그 손끝이 향하는 곳을 주시한다. 남대문 정거장 그 너머 동막(東幕) 벽돌 만드는 큰 굴뚝 옆에 무슨 집인지 양철 지붕이 있고 그 뒤는 푸른 수목이 있고 그 푸른 수목 뒤로 무엇인지 허연 것이 보인다.

“그게 무슨 기(旗) 아니게?……”

“거기 무슨 그렇게 큰 기가 있겠어요.”

“글세, 그래도 기는 기야……”

이러한 판에 옆에 묵묵히 섰던 동호가,

“그게 기가 아니라 돛입니다. 거기서 물이 아니 보여 그렇지 한강일 것입니다. 배에 돛 달린 것이야요. 저것 보세요. 그 동안에 벌써 이 아래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 배는 벌써 저만큼 갔습니다.”

딴은 돛인 것이 분명하다. 돛이 아니면 저렇게 모르는 동안에 위치가 변할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빠는 기라고…….”

“그럼 왜 자기는 몰랐던가?”

셋이 다같이 웃었다. 그러나 중식이의 웃음만은 그리 쾌활치 아니한 쓴웃음이었다. 동호는 다시,

“세월의 흐름이 저렇게 속한 것입니다. 저 배가 모르는 동안에 위치가 변해진 그만큼 세월이 모르는 동안에 지나간 것입니다. 따라서 사업을 잃을 기회라는 것도 저렇게 모르는 동안에 지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지금 우리의 이 잠시 동안도 이렇게 무의미하게 보낼 것이 아닌가 해요. 이러고 있는 동안에 어떠한 기회 어떤 세월이 모르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네 정말 너무나 세월 가는 게 무정해요.”

혜숙이가 이렇게 말하고 고개를 조금 돌리면서 숙인다.

“그야 세월 가는 것이야 속하지. 그러나 그것은 세상 전체의 일이지 그중에 어느 누구에게만 한해서 그렇게 속한 것이 아니니까. 이 세상 이 지구에 생존하는 사람으로서 인력으로 어찌하지 못할 그런 것을 개탄해서야 효용있나? 세월 가는 것이 속한 것만 개탄하랴서야 잠도 못 자고 쉴 새도 없을 것 아닌가? 그러면 그렇게 쉬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세류(歲流)와 함께 병행한다 하면 며칠 가서 그 육신이 파괴될 것이냐 말이지…….”

중식의 이 말에 동호는 잠자코 서서, 대답을 하려고도 않으며 그는 강 너머 관악산을 바라보고 있고 혜숙이는 어쩐 일인지 숙인 채로 있는 얼굴이 붉으레해졌다.

세 사람은 다시 잠잠히 섰다. 해는 산 윗선과 닿았다. 하늘이 점점 붉으레해 온다.

행촌동 송월동 옥천동 관동 일대에 저녁 연기가 오르고 은행나무 밑 잔디에 온종일 널었던 유지(油紙)를 노인 두 분이 거두기 시작한다.

이윽고 동호가 먼저 성길로 내려서면서,

“자 ─ 이제 그만 내려갑시다.”

하니까 중식이가,

“가지.”

하면서 따라 내려서며, 혜숙이는 고개를 숙인 채로 시원히 들지도 아니하고 중식이의 뒤를 쫓는다.

“집에 아니 다녀 갈려나?”

“바로 가지! 때 늦었는데……. 모레 학교에 그것 가지고 갈 터이지? 주의해 하게…….”

“염려 말게 우리 학교는 염려 없네.”

“혜숙 씨! 만만 주의해 하실 줄 믿습니다.”

“네 ─ 감사합니다.”

허리를 잠깐 굽혀 인사하였다.

“야 ─ 그러면…… 내일 또 나올 터이지? 내가 들어갈까……”

“내가 나오지 오후에.”

이렇게 하여 중식이와 혜숙이는 성 밖으로 동호는 성 안으로 헤어졌다.


<중>[편집]

중식이는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다.

롱펠로의 시집은 손에 들었지마는 그 시책(詩冊)을 펼 생각도 없이 멀건히 걸어서 은행나무 밑에 이르렀다. 무엇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산보하러 나온 것도 아니다. 다만 아무 생각없이 머리가 무겁고 갑갑하므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밖으로 나와도 머리가 흐리고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시 걸어서 성 위로 올라가서 반반한 성돌 위에 앉았다.

경성 시가의 찬란한 전등이 굉대(宏大)한 일류미네이션과 같이 눈 앞에 보인다. 아 ─ 이 시가 이 속에 움직이는 몇십만의 인물, 그 속 그 틈에 섞이어 남 모르는 큰 활동을 나는 동호와 함께 시작한다. 그렇다. 그것은 과연 장쾌하고 용감하고 가치 있는 활동이다.

이렇게 생각하여 오면 잠시나마 모든 번민을 잊어 버리고 정신과 원기가 새로워지고 마치 눈 앞에 보이는 굉대한 시가가 자기 것같이 자기의 손에 좌우될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아 ─ 그 협력자인 동호는 지금 저 도렴동에 있다. 이 사람으로 간주할 수없는 사람 많은 세상, 자기의 일을 방해하고 자기를 침해하려는 인물 많은 세상에서 다만 하나 믿고 의논하고 손목 쥐고 끝까지 일할 친우 동호…… 그러나, 아 ─ 그러나 혜숙에게 대한 자기의 마음이 만일 연(戀)이라 하면! 애(愛)라 하면! 유일한 친우인 동호는 연의 적이다.

아아 대의를 위하여 생사를 같이할 친우를 연적으로 보게 되는 비열한 마음! 이런 마음을 가지고도 그래도 무엇을 하겠다고…….

아니다. 아니다. 혜숙이는 나의 동생이다.

그는 몇 번이나 이렇게 부르짖었으나 그러나 동호의 편지가 혜숙에게 있는 것을 본 후부터는 동호의 말에 혜숙이가 찬동하고 혜숙의 말에 동호가 귀를 귀울일 때마다 좋은 심기(心氣)는 갖지 못했다. 금(禁)하려고 해도 금치 못할 일종 질투의 마음을 아무리 해도 누르는 수가 없었다. 동호 같은 매부를 갖게 되면 혜숙이도 얼마나 행복될지 모르고 나도 얼마나 안심되고 기쁠지 모른다. 가장 사랑하는 혜숙이를 가장 믿는 친우에게 맡기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아 ─ 그러나 지금 와 보니까 자기의 혜숙에게 대한 연착(戀着)의 염(念)도 남의 아무것보다도 지지않는 것이었다. 혜숙이 혜숙이……. 내가 이렇게 혜숙이와…….

이렇게 헤매이는 중식이의 머리에는 지금 자기집 안방 전등 밑에서 책 보고 있을 혜숙의 모양이 떠돈다. 그리고 뒤미쳐 어렸을 적 일이 꿈속같이 생각난다.

지금부터 꼭 십삼 년 전 중식이가 일곱 살이고 혜숙이가 여섯 살 되던 해 꽃 지고 앵두 익던 첫여름 어느 날이다.

집 안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이 홀로 되신 어머니 한 분 손에 귀엽게 길리는 중식이가 어머니 상 앞에서 늦게야 아침을 먹고 뒷동산에 올라가 홀로 놀고 있는데 일전에 새로 이사해 온 옆집 동산에서 혼자 풀잎을 하나씩 둘씩 따고 있던 계집아이가 철망을 붙들고 넘겨다 보며,

“이애 너 그거 뭘 하니……”

하고 물으므로,

“이거? 깜팽이 돈 만든다. 똥그랗게 개뜨려서…….”

하고 대답하느라고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건 만들어 무엇 하니?”

“많이 만들어 돈 치지…….”

“이애 그것 그만두고 이리 와 비사치기 하자 응? 여기서 말 만들어 가지고…… 싫으냐?”

“그럼 네가 이리 넘어오너라. 우리 집 동산이 앵두도 많고 넓지…….”

“나는 싫다. 그까짓 앵두만 많으면 좋은가. 꽃도 없으면서……. 네가 이리 넘어오너라. 내 철망을 들어줄게 ─”

“싫으면 그만두어라. 그까짓 비사잡기 아니하면 죽나? 나는 돈이나 치겠다…….”

하고 중식이가 돌아서니까 그 소녀는 그만 섭섭한 듯이,

“이애 나는 가려도 우리 어머니가 꾸중하실까봐 그래…….”

“꾸중은 뭐 조금 놀다 가면 괜찮지, 온종일 노나? 내 말 만들어 줄게. 이리 넘어오너라. 응? 어서.”

하면서 중식이가 밑의 철줄을 발로 밟고 그 위의 철줄을 손으로 번쩍 들고,

“자 어서 넘어오너라.”

하니까 소녀는 주저주저하다가 필경은 넘어왔다.

그래서 두 아이는 의좋게 놀았고 점심때가 되는 줄도 모르는데 뒤꼍 장독대에 고추장 푸러 오신 중식의 모친이,

“이애 점심 먹어라.”

하시며 소녀를 보시더니 이앤 웬 애냐고 물으시므로 이웃집 아이라고 했더니 귀여우신지 같이 와서 점심 먹고 놀아라 하신다. 소녀는 더러워진 손바닥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어머니가 꾸중하세요.”

한다.

“아니다. 괜찮다. 내가 너의 어머니 보고 말해 줄 터이니 중식이하고 같이 먹고 같이 놀아라 응?”

“싫어요. 매 맞아요.”

“아니야. 내가 이따가 너희 어머니 보고 말하면 매 안 맞는다. 어서 오너라.”

이렇게 모친은 소녀를 데리고 와서 상추쌈에 점심을 먹이시면서 기꺼운 듯이 웃으며 보고 계셨다.

조금 후에 뒤꼍에서 소녀 찾는 큰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듣고 소녀는 손에 들었던 상추를 도로 놓고 그리고 얼른 일어나지는 않고 앉아 있다.

그 때 중식이 모친이 뒤꼍으로 돌아가니까 울타리 저쪽에서 부인 하나이 넘겨다보며,

“거기 우리 집 계집애 안 갔어요?”

한다.

“네! 왔습니다. 와서 놀기에 불러서 지금 점심을 좀 먹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귀엽게 생겼어요…….”

이렇게 하여 또 모친과 모친이 사귀었다. 그래서 알고 보니까 새로 이사 온 그 소녀의 집도 과부의 집이라 부인 홀로 외로이 소녀 하나를 귀엽게 기르며 지내는 집이었다. 그래서 사귄 지 열흘쯤 될 때, 울타리 하나를 격하여 사는 과부와 과부는 서로 형제의 의를 맺고 살림까지 같이 하다시피 되었다. 따라서 소녀와 중식이도 남매가 되어 육 세인 소녀가 칠 세인 중식이를 오빠로 부르게 되었다. 그 소녀가 혜숙인 것이다.

이렇게 같은 경우에 있던 두 집은 한집 속같이 되어 사이의 울타리까지 터놓고 혜숙의 모친은 중식이를 자기 친아들같이 믿고 중식이 모친 역시 혜숙이를 자기 딸로 알고 귀엽게 기르게 되었다.

그렇게 두 집안이 가장 화목하게 지내는데 불행히 두 해 후에 혜숙이 모친이 풍병으로 세상을 버리매 혜숙이는 아주 중식의 집에 있기로 된 것이다.

친오빠로 믿고 친동생으로 알고 하여 한집 한 어머니 아래서 길리우기를 십여 년이나 하여 장성한 지금까지 아무 변태없이 지내 왔는데…….

작년 봄에 옥에 들어가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지나간 2월에 나온 동호와 일을 의논하게 되자 동호와 혜숙의 교제가 점점(漸漸) 가까워짐으로 인하여 내가 새로운 번민을 가지게 되었으니 아무리 생각하여도 이 때까지 내가 혜숙에게 대한 마음이 오라비가 누이동생에게 대하는 그것뿐만 ─ 아니었던 것이다.

아! 무서운 연착의 염! 비열한 속정(俗情)!

그 때문에 내가 동호의 의견과 배치(背馳)가 되었다매…….

아아, 아니다. 아니다. 혜숙이는 나의 누이동생이다. 동호는 나의 신우이다.

오오, 내가 이런 마음을 먹는 것도 두 사람에게는 죄이다. 죄인이다.

이 마지막 삼인이 모일 적마다 내가 자주 동호의 의견에 반의를 표하는 것을 보고 질투심의 발동인 줄을 혜숙이도 깨달은 모양이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는 동호 앞에서는 입을 다물려는 모양이고 어느 때는 피하기까지 하는가보다.

아아 동호와 나와의 우의(友誼)가 벗어질까 하여 혜숙이는 그렇게까지 하는데…… 아! 나는 나는 생사를 같이하려는 친우를…… 연적으로 보게 되었구나, 아아.

중식이는 무거운 고개를 들었다. 시원한 바람이 턱 밑을 스쳤다.

밤은 벌써 깊어간다. 눈 앞에 전개하여 있는 불야(不夜)의 성은 역시 찬란히 휘황하다. 중식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무엇 때문에 그리 번민을 하느냐 하는 듯이 조그만 별들이 천연스럽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는 망연(茫然)히 창천(蒼天)을 보고 앉았다. 나오는 줄 모르게 그의 입에서 표박가(漂泊歌)의 일절이 새었다.

   나아갈까 돌아갈까 북극광(北極光)의 아래를
   아라사는 북쪽 나라 가이 없도다.
   서쪽에는 해가 지고 동쪽에는 날이 밝아
   오종(午鐘) 소리 들립니다. 저 중천(中天)에
   울기에는 너무 밝고 가기에는 어두워
   먼 촌(村)에 등잔불이 끔벅거리네.
   ……………………………………………………

무슨 마음으로 부르는지 애연한 노래 소리는 춘야(春夜)의 부드러운 야암(夜暗)을 새어 멀리 음파(音波)를 전하는데 하늘은 적적 세상은 고요한 속에 밤은 조금씩 조금씩 깊어간다.


<하>[편집]

필 듯 필 듯하던 꽃이 이제는 활짝 피었다. 흰 것은 살구꽃, 누른 것은 개나리, 붉은 것은 철쭉이다.

개나리와 복사꽃 봉오리 진 가지를 꺾어 들고 지나가는 사람을 흔히 보게 되었다.

동호는 학교에서 나와 책보를 그대로 던져 두고, 집을 나서서 사직골 도정궁(都正宮) 앞 한적한 너멍골로 꽃구경을 하며 거닐며 고성(古城)의 턱에 이르러 흥화문(興化門) 대궐의 경계인 구석진 잔디 위에 앉았다.

구석진 곳이니까 성 너머 다니는 행인도 아니 보이고 그 근처로 오는 사람도 없어 고요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성벽 위라 거기 앉아도 성 밖 성 안이 눈 앞에 보인다. 더구나, 곱게 아름답게 꽃 피고 버들 푸른 시(詩) 같은 곳곳이 잘 보이는 것이 동호의 마음을 만족케 한다.

원래 침묵성인 동호는 집을 나설 때부터 이 때까지 입 한 번 벌리지 아니하고 역시 잠잠히 잔디 위에 앉았다.

성 안과 성 밖을 두루두루 보았다. 여염집 담 안에 한 나무, 두 나무 섰는 것이 외롭게 고요히 꽃 피어 있는 것이 더욱 흥취가 있었다. 한참이나 보다가 다시 시가를 내려다본다. 모두가 봄이다. 시가도 봄에 싸여 있다.

아아 어디서인가 봄 왔다고 느리게 부는 호드기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동호의 일신(一身)도 봄다운 느낌에 싸였다. 아! 세상은 봄이라고 떠들지마는…… 내일은 종로 모퉁이에서 또 몇 백의 몸이 얽히겠구나…….

이렇게 중얼거리던 동호는 다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중식이와 혜숙의 모양이 한 데 어울려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렇다. 분명히 중식의 태도가 때때로 변할 듯이 되는 것은 혜숙이 때문이다. 혜숙이와 중식이는 어렸을 때부터 친형 친제(親弟)로 알고 자랐다. 이십이 넘은 이 때까지! 그러나 중식이가 혜숙에게 대하는 마음에는 중식이 자신도 인식치 못하는 별다른 애(愛)가 숨겨 있던 것이다. 그것이 당자 자신도 모르고 있다가 제삼자인 내가 자주 오게 된 때부터 아니 내가 혜숙이를 사모하게 될 때에 이 때까지 숨겨 있던 그 애(愛)가 비로소 발동된 것이다.

그래서 근래 중식이는 그 마음을 억제하려고 무한 고민하는 중인가 보다.

아아! 대의를 위하여는 생명을 불원(不願)하는 의기 있는 중식이도 애라는 것 때문에는 그렇게까지 속을 태우는구나……. 그러하리라. 지극한 열정가인 그는 으레 그러할 것이다. 대사를 계획하는 우리 사이에 다른 파란은 일으키지 말아야겠고 그렇다고 혜숙에게 대한 마음은 제(制)하려야 제할 수도 없고 그는 고민할 대로 고민할 것이다.

아아 대사를 앞에 둔 우리가 이런 일로 가슴을 태우니 참으로 세상이라는 게 우습다. 무슨 일로 조물주가 사람을 낼 제 정(情)이라는 것을 넣었던가. 사랑의 본질인 정! 그것 때문에 이런 때 이런 일로 번민을 하게 되나.

사람이 세상에 난 것이 이미 죄라고 한 말이 과연이다.

아! 중식 군과 혜숙 씨, 혜숙 씨와 나!

눈치를 안 혜숙 씨도 이즈음 퍽 괴로워하는 모양이다. 나와 중식이와의 우의를 상(傷)치 않게 하려 하여 고민하는 것이다 ─. 남 모르게 다 각기 속태우는 번민! 이것으로 인하여 세 사람의 사이는 조금씩 벌어져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나는 이 동호는 중식이 남매의 사이를 벌개한 자이다. 나로 인하여 친남매보다 더 의좋게 살아가던 생활이 파괴된다면 아! 나는 죄인이다.

아아 나는 가리라, 중식이 남매의 파란 없는 생활을 위하여 또 한편으로는 중식이와 나와의 영원한 우의를 보존하기 위하여 세 엉킈 중에서 내 몸을 빼이리라.

나의 일생의 기념일 풋사랑인 이 애를 희생하여 그 남매의 진정한 애를 살리리라. 그리고 아무것으로도 바꾸지 못할 신우(信友)를 잃지 말리라.

그는 부르짖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여 애인의 옆에 있어서 그를 사모하는 정을 금할 수 있으랴.

아! 세상은 죄악이다. 정은 죄악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속에서 헤매이는구나…….

그는 고개를 들고 양복 웃옷 단추를 빼고 그리고 힘없이 일어섰다.

시가의 소연한 소리는 역시 멀리 와글와글 들리고 남산턱 뾰죽집의 서편 유리창이 석양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게 번득이고 있다.

동호는 다시 돌아서서 성 밑 행촌동을 내려다보며 중식이와 혜숙이를 생각하더니 한숨을 쉬며 또 다시 돌아섰다.

내일 내일은 또 큰 소리가 나고 또 몇이 얽히겠구나. 그래서 또 철창 생활을……. 오오, 옳다. 내일부터 내몸을 내맘대로 어쩌지 못하게, 오오 그렇다. 다시 그녀와 만나지 못하게……. 아아, 내일은 내가 앞장을 서야겠다. 그렇다. 그렇게 하자. 그러면 중식의 남매의 애(愛)도 살리고, 신우(信友)를 영원히 잃지 아니하겠다.

이렇게 결심한 동호는 다시 잔디에 털썩 주저앉았다.

해는 이미 산 뒤에 숨고, 붉으레하던 여홍(餘紅)이 차츰차츰 사라지며 조금 조금씩 희미해 온다.

동호가 다시 고개를 들어 저물어가는 하늘을 쳐다볼 때에는 일찍 뜬 별 하나가 깜박깜박 빛나고 있었다.

………………………………………….

그 날 아홉 시, 중식의 집 건넌방에서 램프불 하나를 에워싸고 칠팔인의 학생이 내일 일을 의논하는 중이다.

“어찌했던가, 내일 오후 두 시에 맨 먼저 나서서 소리 칠 사람이 있어야겠소. 물론 미리 각오하고…….”

이 소리에 의외에 ─ 으레 남아 있어서 뒷일 할 ─ 동호가,

“그것은 염려 마시오. 내가 하리다.”

“아니 동호 씨는 남아 있어야 뒷일을…….”

“아니오, 뒷일은 여러분이 계시니까 나는 안심하고 내일 들어갈 터이올시다.”

“아아니 동호 씨는 반드시 남아 있어야…….”

“아니오. 내가 내일은 하기로 결심하였으니까 이제 그것은 다시 의논 맙시다. 다른 것 또 의논할 것 없나요?”

“인제 다른 것은 별로 의논할 게 없지마는…….”

“그러면 헤어지십시다.”

이렇게 대강 의논을 마치고 일시에 헤어지기도 주의가 되어 한 사람씩 두 사람씩 드문드문이 대문을 나서서 컴컴한 골목 속으로 몸을 감추고……하여 갔다.


한 이십 일 후이다.

거드럭거리던 봄철도 이제는 늙기를 시작한다.

꽃으로는 복사꽃이 한창이고 개나리와 살구꽃은 시든 지 오래였다.

토요일 오후이다. 세 사람이 토요일마다 가던 굽은 성 위에 가서 중식이와 혜숙이가 노래를 부르고 내려오는 길이다.

“동호가 그저 종로에 있는지 이리 넘어왔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벌써 넘어왔지, 이때껏 있겠어요?”

“수부(受付)에 가서 이런 사람 넘어왔느냐 하니까 모른다던걸. 종로에 가 물어 보면 일체 모른다고…….”

“에잇 깍정이 같은 놈들…….”

이렇게 동호의 안부를 몰라하는 중식이와 혜숙이는 어느덧 성 터진 곳에 이르렀다. 전 같으면 늘 이곳에서 동호와 작별하던 곳이라 이 곳 성 위에서 한참이나 머물다가 갔지마는 오늘은 벌써 해질 때가 되니까 그대로 서서히 내려가기로 하였다.

성 밖 길로 내려서서 두 사람은 좁다란 풀밭길로 행촌동 자기네 집을 향하여 가며 안부 몰라 궁금한 동호의 이야기를 하는데, 그녀가 천천한 걸음으로 은행나무 밑에 이르를 제 해는 산머리에 반이 걸려 자못 낙일(落日)의 경(景)이 장관이라 중식이와 혜숙이는 발을 멈추고 섰다.

이 때, 지금 두 사람이 지나 내려온 성벽 위에 우뚝이 서서 은행나무 그늘에 두 사람의 나란히 섰는 양을 보고 빙그레 웃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지금도 두 사람이 이야기하던 동호이다. 들어간 지 이십일 만에 설유(設諭)받고 나온 것이다.

그러나 동호는 자기가 무사히 나온 기쁜 소식을 두 사람에게 고할 수가 없었다. 나온 줄 알면 또 자주 만나게 되겠고 자주 만나면 또 세 사람 가슴 속에 번민이 생기겠으니까…….

이렇게 하여 사랑으로 사랑을 구한 동호는 모른 체하고 성 위에 서서 은행나무 그늘 푸른 잔디 위에 자못 화목하게 나란히 섰는 그들을 보고 말없이 빙그레 웃고 섰는데…….

걸쳤던 해는 아주 숨고 하늘에는 여홍(餘紅)이 붉으레하여 보랏빛을 이루었다.

평화로운 만춘! 동리마다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고 세상은 저 끝에서부터 조금씩 어두워 온다.


<1920년 6월 18일 밤>

  1. (謝告에 따르면 일제 당국의 기휘(忌諱)로 삭제했다고 되어 있으며 비어 있다. 삭제되기 전 압수 원본이 발견되었으므로 삭제된 부분을 싣는다.)
    산도 봄 물도 봄이고 사람도 봄이고
    공기까지도 봄 공기이다 그 부들업고 다사한 봄바람에
    섯기어 가장 유창(流暢)하고 가장 평화로운 노래소리가
    독립문 전체를 싸고 돈다 그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