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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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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그 있다고 믿는 것까지 빼앗느니라’
─ 누가복음 8:18 ─

○는 이번 전람회에 출품하려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얼마 동안(그로 하여금 그 그림에 온힘을 쓰게 하려고)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날은 너무 갑갑하고도 궁금도 하여 참다 못하여 찾아갔다.

인젠 다 그렸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그의 화실을 들어서서 보매, 그는 그림은 그리지 않고 캔버스 앞에 머리를 수그리고 앉아 있었다. 누가 들어오지는 나가는지도 모르고…….

“○.”

나는 가만히 그를 찾았다.

그는 펄떡 놀라면서 천천히 머리를 들어서 나를 보고 교자를 손가락질 한다.

“다 그렸나?”

“네.”

“어디, 몸이 편찮은가?”

“머…….”

그는 대답하기도 시끄러운 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하얗게 된 그의 낯에서는 고민과 괴로움과 미움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의 머리를 짚어 보았다. 즉 그는 시끄러운 듯이 내 손을 밀어 버리고, 머리를 저편으로 돌리고 말았다.

“○! 왜그래!”

나는 다시 그를 찾았다.

그는 힐끗 곁눈으로 나를 보더니, 곧 일어서서 쾌활히,

“에, 머리 아파!”

하면서, 담배를 꺼내어 내게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거짓 쾌활임을 알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확실히 어떤 괴로움이 있었다.

“이 그림 좀 봐 주십쇼.”

그는 나를 이끌고 그림 앞에 가 섰다. 그러나 나는 그림을 보는 순간 마치 무엇으로 얻어맞은 것같이 멈칫 섰다.

그의 그림은 예수가 사십 일 동안을 광야에서 단식을 할 때에 마귀가 떡을 가지고 와서 꾀는 , 그 신 ─ 이었다. 사람으로서의 극도의 주림과 괴로움과, 및 그것을 쳐 물리려는 경건한 넋을 ○는 그려보려 하였다. 극도의 추(醜)이면서도, 또한 극도의 미(美)인, 그 순간의 예수의 표정을 그려보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그림 속에 나타난 예수의 표정은 어떠하였나. 고민은 확실히 나타나 있었다. 괴로움도 확실히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경건하고 참되고 굳세어야 할 예수의 표정에 의심과 증오와 악독함을 볼 때에, 나는 오히려 놀랐다. 나는 얼빠진 것같이 잠깐 그것을 바라보다가 두말 없이 나아가서 붓을 들고, 거기 흰 기름을 발라서 그 예수의 얼굴을 지워 버렸다. 그리하여 그 그림에는 악독함과 간사함의 권위인 마귀와(머리 없는) 예수와 뒤로 멀리 보이는 요단강 및 거기 점철되어 있는 양의 무리만 남아 있게 되었다.

○는 맥없이 나를 보다가 다시 교자에 주저앉으며 머리를 숙여 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는 기 ─ 다란 한숨이 나왔다.

나는 교자를 끄을어 그의 앞에 갖다 놓고 앉아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머리를 숙인 대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좀 뒤에 나는 내 손 잔등으로써 그의 눈에 떨어지는 눈물을 깨달았다. 그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이 빨리 머리를 돌려 버렸다.

“○! 웬일이야!”

그러나 그는 역시 대답이 없었다. 그의 다리는 무섭게 떨리기 시작하였다.

즉 다음 순간 그는 벌떡 일어서서 다른 방으로 가 버렸다.

나는 웬 셈인지 몰랐다. 어떠한 사건, 어떠한 일이 그로 하여금 이렇듯 슬픔에 빠지게 하였을까? 그에게는 과연 ‘불만’이라 하는 것이 있었을까.

그는 육신상의 만족으로 아무 일이라도 할 만한 재산이 있는 사람이었었다.

아무 데를 가든 머리를 휘두를 만한 명예도 있는 사람이었었다. 게다가 작년에 나의 중매로써 결혼한 사랑하는 아내까지 있는 사람이었었다. 그에게 만약 불만함이 있다 하면 그것은 만족함에 겨운 사람의 헛소리로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었었다. 그러한 ○의 오늘 태도에는 나는 무어라고 원인을 찾아 낼 수가 없었다…….

나는 마침내 그의 아내에게 물어 보려고, 그 방을 찾아갔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어이없고 우스움을 겨우 감추고 나오게 되었다. 그의 아내도 ○와 같이 뚱뚱 부어 앉아 있었다.

“부처 싸움이로군.”

나는 그 집 문밖에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참지 못하여 한번 웃은 뒤에 나의 여관으로 돌아왔다.

이삼 일 뒤에 나는 어디 좀 여행을 할 일이 생겨서 떠났다가 한 달쯤 지나서야 돌아왔다. 돌아와서 곧 ○를 찾아보았다.

그의 화실에 들어가 보매, 그림은 벌써 다 그려서 틀에 넣어 두었다.

나는 그 그림 앞에 서는 순간, 뜻하지 않고 모자를 벗어 들었다. 오오, 그 예수의 표정. 거기는 사람으로서의 가장 경건한 순간의 어떤 표정이 똑똑히 나타나 있었다. 가장 괴롭고 쓰라린 딜레마의 순간에 사람이 받는 고통과 회의(懷疑)와 아픔과 그것을 쳐 물리려는 순간의 경건한 용기가 멀리 보이는 요단강을 배경으로 뚜렷이(두드러져 있는 듯이) 나타나 있었다. 그 그림 속의 예수는 살아 있었다. 그 그림 속에 나타난 예수는(○가 그리려던) 인신(人神)의 예수가 아니고 오히려 신인(神人)인 예수이었었다.

한참. 정신없이 서 있던 나는 문득,

“데까시다!(でかした, 잘 되었다)”

고함 치고 두어 걸음 물러서서 겹지 않고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그림을 한참 이리 보고 저리 보는 동안에 나는 그 그림 속 예수의 얼굴에 아직껏 남아 있는(오히려 감추여 있는) 시기를 보았다. 물건의 그림자와 같이 예수의 얼굴 뒤에 감추여 있는 희미한 시기의 그림자를 보았다.

“○!”

못 볼 것을 본 것같이 온몸에 소름이 쪽 끼치며 나는 주인을 찾았다. 그러나 아직껏 그림에 정신이 팔려서 몰랐지만 ○는 방에 없었다.

나는 그를 찾으러 온 방을 다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는커녕 그의 아내까지 없었다.

“동부인하고 산보인가?”

나는 한번 씩 웃은 뒤에 그 집을 나서서 ○의 돌아오기까지 그 근처를 산보라도 할 양으로 뒷대문으로 나가서 성 밖으로 가는 길로 향하였다. 이리하여 얼마 걸어서 거반 성 안을 벗어나게 되었을 때에 나는 거기서 뜻하지 않은 ○를 만났다. 처음은(꼭 그는 부부서 함께 산보나간 줄 알므로) 혼자 오는 그를 보고 몰라보고 그저 지나려 하였으나 그가 먼저 나를 보고 찾았다 ─.

“언제 오셨습니까?”

“오오, 혼자인가?”

“혼자?”

그는 억지의 웃음을 웃었다.

한 달 동안에 그는 이렇게까지 여웠나? 마치 이리이었었다. 주린 이리가 이를 가는 것같이 그의 뺨은 여위고 눈은 쌍커풀이 지고, 복스럽게 똥똥하던 코와 뒤는 마치 송곳과 같이 되었다. 그가 먼저 나를 찾았기에 그를 알아보았지 그렇지만 않았더먼 ‘모습이 비슷한 딴 사람’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때에 나는 걸핏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와 그의 사랑하는 아내의 새에 무슨 문제가 일어난 것이었었다. 한 달 동안에 이렇게 여윈 그를 보며 그림의 예수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시기와 고민을 생각할 때에 나는 이렇게 안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등떠 볼 작정으로 물어 보았다.

“부인도 잘 계신가?”

“부인? 우리 처요?”

그는 이렇게 말한 뒤에 머뭇머뭇 하다가 머리를 저편으로 돌리고 말았다.

나는 그의 뒷목이 떨리는 것을 보고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알았다.

좀 있다가 그는 저편을 향한 대로 말하였다.

“좌우간 집에 들어가시지요.”

“외려, 돌아서서 산보하세.”

나는 성 밖으로 향하여 걸었다. 그도 말없이 따라왔다.

우리는 먹먹히 걸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떨어지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를 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은 듯이 머리를 푹 수 그리고 걷고 있었다.

서늘한 ─ 이라는 것보다 오히려 추운 바람이 성 밖에는 불고 있었다. 남쪽과 북쪽에 막혀 있는 뫼들도 푸른 빛을 다 잃고 인제는 갈색 잡풀이 찬가을 바람에 거울거릴 뿐이다. 뫼 중동에서는 불을 때는지 피우는지 푸른 내가 남쪽으로 헤어지면서 하늘로 퍼지고 있었다. 시야를 한 평면이라 하면, 그 뫼의 땅들은 모두 그 평면에서 뚫어져 나와서 만약 무서운 힘으로 그것을 떠밀면 다시 그(시야라는) 평면 위에 합할 것 같았다. 그리고 눈으로 보는 경치로는 평범하달지 모르지만, 한 폭의 그림으로서는 구하기 힘든 경치였었다. 나는 이것을 두루 살피다가 돌아서면서 지팡이로써 경치를 가리키 며 ○을 찾았다 ─.

“○, 그림 안 되겠나?”

그러나 ○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 대답 없이 내 곁으로 빠져서 지나가 버렸다.

“어때?”

나는 또 다시 찾았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은커녕 내 존재도 모르는 듯이 먹먹히 걸어간다. 만약 그대로 버려 두면 그는 원산(元山)까지라도 걸어 갈 듯이 아무 데도 살피지 않고 머리를 숙이고 걸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한참 그의 등만 바라보다가 뒤에 가서 가만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펄떡 뛰며 소리까지 내며 놀라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 정신 차리게.”

“네?”

그는 히끈 하면서 부르짖었다.

“저리로 좀 들어가서 쉬세.”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산 아래 조그만 곁길로 들어서 한 여남은 걸음가서 있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그런 뒤에 그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떨어지겠지 하고 잠자코 기다렸다. 잠깐의 잠잠한 시간은 흘렀다. 마침내 ○는 나를 찾았다.

“형님.”

형이 없는 그는 나를 형으로 알고 있었지만 자존심이 많고 남에게 머리를 숙이기를 싫어하는 ○는 나에게 형이라고 부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었다.

“난, 아직껏 확증을 잡기 전에는 이 일을 아무한테도 감추려 했어요.”

나는 말없이 머리를 끄덕이고 그의 말의 뒤를 기다렸다.

그러나 좀 기다렸으나 그의 말의 연속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눈을 치뜨고 맞은편 뒤의 어떤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눈을 따라서 그곳을 보았지만 거기는 갈색 잡풀이 무성하여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미치지나 않았나, 그는 무엇을 보고 있나, 그는 시작하였던 말을 잊어버리지나 않았나, 나는 잠깐 기다리다가 드디어 채근하였다 ─.

“그래서.”

“네? 네, 네 ─ 형님, 비 ─ 비밀이외다.”

“알겠네.”

“저…….”

이뿐, 그는 다시 입을 닫고 말았다. 내가 아까 짐작하였던 바와 같은 일인지 어떤지 그것은 똑똑히 모르지만 어떻든 ○에게는 차마 입밖에 내기 힘든 부끄러운 일임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잠깐 얼굴을 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

“돌아가고 마세.”

그는 말없이 일어섰다.

우리는 아까 걷던 길로써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의 집 근처까지 와서는 나는 인력거를 두 채 불러서 ○도 태워 가지고 앞으로 달렸다. ○는 물론 어디로 가는지는 모를 터이지만 아무 말없이 올라탔다. 이리하여 한 반 시간쯤 뒤에는 우리는 어떤 지나 요릿집, 조용한 조그만 방에 마주 앉게 되었다.

나는 술로써 그를 취케 하려 한 것이었다.

술을 그리 먹을 줄을 모르던 그가 어찌도 이렇게 많이 먹나, 마치 고래와 같이 마셨다. 말 한마디 없이 이삼십 분 동안에 그 혼자서 다섯 홉이나 먹은 뒤에 숨찬 기운을 연하여 내어 뿜었다.

나는 간간 한 잔씩 마시면서 그의 차차 취하는 모양을 호기심으로써 바라보았다.

“취했구만.”

“네? 흥 취했어요? 어, 뽀 ─ 이, 야, 야 ─, 뉘 ─ 야.”

그는 팔을 두르면서 고함쳤다. 요릿집 사환애가 왔다.

“술! 술!”

“하이.”

뽀이는 술을 가지러 갔다.

“○, 취했네, 이젠 그만두게.”

“그만두어요? 그만두…… 술 없이는 난노 오노레가 사쿠라가나다(伺[사]のオルが(櫻 [앵])かなだ ─ 술 없이는 무슨 재미냐라는 뜻). 형님, 술, 조금만 더, 조금만. 이제 두 홉만 더 먹고는 또 다시는 다시는…….”

“술 잘 먹네그려!”

“잘? 내가……어, 늬 ─ 야, 술 가져와!”

그는 유쾌한 듯이 한번 웃었다. 사환애가 술을 가져왔다.

“형님, 한 잔 받으세요.”

“받지.”

“그 잘하던 솜씨에 왜 오늘은 안 잡숩니까? 자 술을 안 먹는단 ─.”

“바보인가?”

“그럼요. 히히히히, 형님도 오늘은 바보외다.”

나는 그의 잔을 받았다.

“그렇지 ─ 내가 술을 먹기 시작한 거이.”

그는 뜨거운 기운을 연하여 토하면서 이렇게 지껄여 오다가 뚝 그쳤다. 그리고 팔굽으로 상을 집고 턱을 손으로 고인 뒤에 얼빠진 것같이 물끄러미 술병을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그에게는 술을 먹기 시작하게 된 동기가 생각난 것이었었다. 여기까지 오면 그 뒤는 나의 성공에 다름없었다.

술로써 그를 권한 뒤에 그의 마음의 비밀을 끄을어 낸다는 것은 좀 자미 없는 짓이지만 이것도 그를 위함이라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 술 먹게 된 동기는?”

즉, 그는 펄떡 놀라면서 힐긋 나를 본 뒤에 자기 팔에 머리를 푹 묻고 말았다 ─.

“형님, 분하외다. 그년이…….”

“그년이란?”

“우리 처인가 하는 년이…….”

그는 그 뒤는 차마 말하기가 어려운지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말의 길을 인도하였다 ─.

“좌우간, 품행이 나쁘다는 하는 말이 아니겠지?”

“품행? 사람에게 품행이고 무엇이고 있지. 그 짐승 같은 것에게…….”

“○! 말을 주의하게!”

“형님, 분해요.”

그는 이를 악물었다.

“○, 머리를 정돈시켜 가지고, 말을 순서 있게 하게. 자네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네 ─ 그러면 자네 처의 품행이 그르단 말인가?”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잠깐 생각한 뒤에 입을 열었다.

“그것이 만약(만약 말이네) 사실이면 이혼하지.”

“이혼할 만한 증거는 없어요.”

“없으면, 의심을 그만두거나…….”

“의심할 만한 증거는 있습니다.”

그는 갑자기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나는 마치 어린애같이 나의 팔에 매어 달려 우는 그를 내어다보면서, 잠깐 생각한 뒤에 그를 흔들었다.

“○!”

“네.”

그는 잠깐 뒤에야 대답하였다.

자네의 “ 의심이 한낱 의심에 지나지 못하면 어쩌겠나?”

“그럴리는…….”

“없다고 단언 못하지. 증거가 있기 전에는……. 좌우간 사실 무근이면 어쩔 텐가?”

“어쩌단 ─ 어쩔 것 ─ 없지요.”

“그럼 만약 사실이면?”

“연놈을 죽이지요.”

그는 벌떡 일어서서 무서운 눈으로 나를 흘겼다. 마치 내가 제 원수인 듯이…….

나는 한참을 말을 못하였다. 이런 경우를 당한 ○를 위로를 하나 선동을 하나 그것은 쉽게 판단할 수가 없는 일이었었다.

“○, 자네 언제부터 의심했나?”

“두 달 전.”

“그럼 ○, 내 말 듣게.”

“네.”

“자네 취했나?”

“네, 아니 말씀만 하세요. 정신은 똑똑하니깐.”

“○, 자네는 벌써 두 달을 참지 않았나? 그처럼 얼마만 더 참게. 문제는 모두 내게 넘기고 내가 얼마 동안을 각 방면으로 알아보아 가지고 그것이 사실이면 내가 자네 대신으로 그 두 사람을 넉넉히 벌하마. 만약 사실이 무근 일 것이면, 자네의 의심을 넉넉히 풀 만한 반증을 얻어 오마. 자네는 왜 곧 내게 이야기하지 않고 두 달 동안을 의심과 시기로만 보냈나?”

“…….”

그는 또 다시 입을 잠그고 말았다. 그러나 기껏 취한 그의 얼굴에는 분함과 살기가 방안을 서늘하게 할 만치 떠돌고 있었다…….

좀 뒤에 그를 인력거로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잠깐 여관에 돌아왔다가 나는 곧 다시 나섰다. 그것은 ○에게서 ○자기에게 아내의 품행이 나쁜 것 같다고 가르쳐 준 사람이 A씨임을 들었으므로 A씨를 찾아가서 좀 구체적으로 알아보려 함이었었다.

그러나 전차로써 의주통(義州通)까지 이를 동안에 나는 A씨 방문을 그만두기로 하였다. 아직 알지도 못하는 A씨를 찾아가는 것도 싫지만 그것보다도 씨에게 그런 일을 묻는 A 것은 ○의 인격을 무시함과 같아서 재미없는 일이다. 이제○의 취할 길은 그 사건을 남에게 절대로 비인(非認)을 하여 얼마간이라도 남의 의심을 덜게 하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까지 제 아내의 품행을 의심한다는 것은 ○의 명예를 위하여 결코 취할 길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 후막(後幕)에 숨어서 결코 ○의 명예를 손상치 않게 사건을 해결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전차를 내려서 곧 돌아서서 벗들과 약속하였던 ××극장에 가서 그때 갓 조직된 어떤 극단의 연극을 구경하고 돌아와 자버렸다.

그러나 이튿날 조반 뒤에는(평생 아무런 큰 일이라도 그리 중대시하지 않던 나로도) 머리를 움켜쥐고 어제 맡은 사건을 어찌 해결하여야 할지 생각하여 보았다.

나는 탐정이 아니다. 그런지라 그 사건을 어떤 곳부터 탐정하여 나아가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의 아내보다도 먼저 ○를 어떻게든 하여야 할 것은 알 수가 있었다. ○와 같은 사람은 아무런 비경(悲境)에 빠질지라도 자살할 만한 용기는 없는 사람이다. 그러매 그 같은 사람으로서 그 같은 경우에 빠지게 되면, 마치 피를 뱉기까지 우는 뻐꾸기와 같이 어쩔 줄 모르고 다만 헤맬 밖에는 도리가 없는 것이었었다. 그러다가는 마침내 정신이 타락경(墮落境)에 떨어져서 그의 모든 아까운 재주와 지혜는 간지(奸智)와 몹쓸 수단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었었다.

○의 아내? 그런 변변치 않은 여편네 하나는 죽든 살든 아무 관계없으되, 아까운 재조를 품은 ○뿐은 결코 타락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 일을 어쩌나?”

나는 담뱃내를 내어 뿜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생각하려고 들어붙었던 나는 담배를 겨우 여섯 꼬치 피운 뒤에 벌써 해결의 초보는 얻었다.

우리 친구 가운데 호떡이라는 별명을 가진 가람이 모레 동래 온전(東來溫情)으로 좀 가 있겠단 말을 어제 들은 것이 생각나므로, 나는 ○를 그에게 위탁하여 같이 가서 얼마 동안 몸과 마음을 쉬게 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동안에 나는 어떻게 하여든지 그의 아내의 몸 위에 생긴 모든 의심을 해결하여 보려 하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곧 호떡을 찾아가서 말하여 보매, 그는 쾌히 ○를 맡겠다 하였다. 그러나 놀란 것은 호떡도 ○의 아내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점이었 었다.

그래서 나는 곧 물어 보았다.

“자네 봤나?”

“무얼?”

“대저, 어떤 점이 수상한가?”

“나두 보진 못했어. A씨에게 들었지.”

어제는 ○에게 오늘은 호떡에게 A씨라는 이름을 들었지만 나는 아직 A씨가 누군인지는 몰랐다.

“그 A라는 사람이 누구야?”

“A씨를 몰라?”

“사내 ─ ㄴ가, 여편네 ─ ㄴ가?”

“○군의 와이프 육촌오빠야. 오빠가 누이에게 무근지설로 훼방은 안할 테지.”

이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머리는 번개같이 빨리 움직였다. 나는 문득 고함쳤다.

“알겠네, 그럼 호떡.”

“그만두게, 호떡이 뭐야.”

“○(그의 본 이름도 ○이었었다), 알았네. 그 와이프가 처녀 적에 A씨가 러브를 던져 본 일이 있는데 그때 거절했단 말을 ○의 와이프에게서 들은 일이 있네. 그러니깐 훼방일세.”

호떡은 반신반의의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러나 나의 얼굴이 참말 같으므로 그는 머리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 말은 나의 지어 낸 말에 지나지 못하였다. 온전한 증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나는 모든 일을 덮어두려 하였다. 나는 다시 한 번 그에게 ○를 부탁한 뒤에 그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 뒤는 부러 여러 벗들을 찾아 다니면서 방패막이를 하여 두었다.

─ 자네 A라는 사람 아나? ○의 와이프의 육촌오라비 말이네. 고약한 사람이야. 육촌누이에게 러브를 하다가 소박맞고 그 뒤는 만날 누이 험구에 분주하다네…….

대개 이런 말로써 혀끝을 놀려서 그들을 등떠 보았지만, 놀랄 일은 그들 모두가 A씨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것이었었다. 그런지라 마지막에는 내가 지어 낸 말을 나 스스로가 믿게까지 되었다 그리고 그들도 얼마간 나를 신용하던 터이라, 나의 말을 절반은 곧이들었다.

이리하여 우리 친구들 가운데서는 ○의 아내에 대한 의심이 얼마간 덜어졌다.

호떡이 여행 떠나겠다는 날 아침에, 나는 화가 ○를 찾아가서 그를 끄을고 나의 여관으로 왔다. 그리고(아직 아침밥을 못 먹은) 그를 설렁탕을 한 그릇 먹인 뒤에 나의 조그만 손가방 속에 간단한 여행 용구를 넣어 가지고 정거장으로 나왔다. 호떡은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야 아무 영문도 모르고 눈이 휑하니 끌려 나온 ○는 잠깐 두리번두리번 하다가(오늘 아침 철로는 처음의) 이야기 비슷한 말을 하였다.

“어디 여행 떠납니까?”

“내가 가는 게 아니라 자네가 가네.”

나는 가장 천연한 태도로 ○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을 엿보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는 이상한 듯이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가,

“어딜요?”

하고 근심스러이 물었다.

“동래온정이네. 호떡 군이 좀 가 있겠다기에 자네도 같이 며칠 가 있으라고 오늘 데리고 나온 길이네. 가지?”

나는 거반 명령적 태도로 그에게 물었다. 그는 잠깐 머리를 수그렸다가 대답 없이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가서 교자에 앉아 버렸다. 내가 가령 언제쯤 ○를 찾아가서 내일 여행을 떠나라고 하였대면, 그는 무론 이러니저러니 하며 가지 않을 성격의 사람이었었다. 이러한 그의 심리를 유리와 같이 꿰어 들여다보는 나는 오늘 아침과 같은 고압적 태도로써 그를 여행을 떠나게 하려 한 것이었다.

나는 차표를 사서 교자에 걸터앉아 있는 ○를 주고 그의 곁에 걸터앉아서, 이제 그가 떠나 있는 동안에 모든 시끄러운 문제를 다 바로잡아 줄 것이니 마음놓고 가 있으라고 여러 가지로 위로를 한 뒤에, 개찰구에서 표 찍기를 기다리고 있는 호떡을 찾아가서 ○를 지배하는 수완이며 방법을 똑똑히 일러 주고, 그들이 차 타는 것은 보지 않고 돌아와 버렸다. 그것은 ○가 가기 싫다는 의사를 내게 나타내기 전에 그를 피하려 함이었었다…….

원래 나는 아무런 일이든지 낙관을 하는 사람이었었다.

어떤 대단한 시끄러운 문제가 생겨서, 이것 야단이로다 하고 비관을 하고 있노라면 며칠 뒤에는 저절로 그 사건이 바로 펴여서 추호도 시끄러운 문제가 아니고 한 경험만 가지고 있고, 소위 ‘절체절명(絶體絶命)’이란 경우를 당하여 보지 못한 나는 아무런 일을 만날지라도 다만 어물어물 하여버린다. 그러면(내 경험으로는) 얼마 뒤에는 문제가 정로(正路)로 들어서고 하였다. 어디 물어주어야 할 빚이 있는데, 손에 돈이 한푼 없다 야단이다 하고 걱정하노라면 어떤(주머니 속에 돈 넣은) 친구가 찾아오고, 오늘은 꼭 ×씨를 만나 보아야 할 텐데 비가 와서 야단이다 하고 있노라면, 그 ×씨가 찾아오고…… 과연 근 삼십 년의 나의 생활사는 다시 말하자면 광의(廣義)의 성공사(成功史)에 다름없었다. 보나파르트가 ‘세상의 옥편 가운데서〈할 수 없다〉라는 글자를 없이하여 버려라’고 선언한 것을 유명하게 말 하지만, 나도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그만한 선언은 할 수가 있다.

그런지라 내가 ○를 동래온정에 보낸 것은 특별한 깊은 계획 아래서가 아니다. 다만 쓰라린 마음으로써 만날 괴롭게 날을 보내는 ○를 한가스러운 온정에 보내어 두면 절로(라면 좀 말이 별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사건의 모든 비밀이 내게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의심은 한낱 ○의 꿈에 지나지 못하고 그런 일은 당초에 없는지도 알 수 없다, 이러한 박약한 개념의 아래서다.

그러나 막상 ○를 떠나보낸 뒤에는 나의 마음속에 책임관념이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알아보아야지.’ 나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은 이런 것이었었다.

그러나 어찌할까? 형사와 같이 변장을 하고 ○의 아내의 뒤를 밟아다닐 수도 없는 일이요, 그렇다고 ○의 아내에게 직접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첩경이 있기는 있다. A씨를 찾아가서 똑똑히 물어 보면 혹은 어떤 단서를 얻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왜 그런지 아직 보지도 못한 A씨라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싫어서 만나 볼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싫어도 ○를 위함이라 꾹 참고 A씨를 찾아보나? 나는 몇 번 이렇게 생각하여 보았지만 한번 A씨를 찾아가기보다는 나는 오히려 십 년 동안을 절간에 들어가서 중이 되는 것을 고맙게 알겠다.

‘대체 어쩌면 좋은가?’ 나는 캠퍼를 한 덩어리 집어삼키면서 생각하였다

마침내 나는 하는 수 없이 형사와 같은 노릇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점심을 먹은 뒤에 ○의 집 근처까지 가서 ○의 집에서 전차 길까지 나오는 길에 있는(내가 아는) 어떤 잡화점에 들어갔다. 나는 그 집에서 ○의 아내의 나오는 것을 보려 함이었었다.

몸집이 조그만 잡화점 주인은 반갑게 나를 맞았다.

“○씨한테 가십니까?”

“아니, 저 잉크 한 병 사려구…….”

“잉클 사시랴 예까지 오세요?”

하면서 그는 일어서서 잉크를 한 병 가져왔다.

“자, 워터 ─ 맨.”

나는 주머니 속에서 돈을 꺼내어 준 뒤에 그의 회계상 앞에 걸터앉아서 가끔 길가는 사람들을 주의하면서 흥정이 어떠냐, 날이 꽤 추워졌거니, 이런 이야기로 한 반 시간 동안을 보냈다. 그러나 이야기의 가옴이 다 끝난 뒤에는 나는 곤란한 경우에 빠졌다. 이제 여관으로 돌아가기도 싱겁고 핑계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나는 그에게 장기를 둘 줄 아느냐고 물었다.

“장기 말씀이에요? 잘은 못 둡지요만 본시 좋아는 합니다.”

“그럼 한 판 놓아 볼까요?”

“네 저 ─ 여보게 △△, 저 댁에 가서 장기판 좀 얻어 오게.”

우리들 앞에 장기판은 놓였다. 나는 길로 향한 편에 자리를 잡고 장기 쪽을 벌여 놓은 뒤에 때때로 길 가는 사람을 주의하면서 승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 한참은 길을 주의하면서 두었지만 장군 멍군 ‘차(車)’가 떨어지고 ‘포(包)’가 위태하게 도리 때에는 길이고 ○이고, 모두 내 머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친구딴의 생명보다는 장기판 위에서 뛰노는 조그만 ‘병(兵)’의 생명이 내게는 더 큰 문제로 변하였다. 우리의 모든 작고 큰 문제는 모두 장기판 밑에 들어가 숨어 버리고 내 머리는 다만 어쩌면 저 얄밉고 성가신 ‘차’와 ‘마(馬)’를 죽여 버리노 하는 생각만 북 끓게 되었다.

결국의 승리는 내 것이 되었다. 그러나 몇 번을 이기는 긴장된 너덧 시간 동안에 나의 품고 온 목적은 헛데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리하여 전등불이 어둑신한 마가을의 거리를 장식하게 될 때야, 나는 펄떡 정신을 차리고 한번 싱겁게 씩 웃은 뒤에 내일 또 오마 하고 나의 여관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열 시쯤 거기를 가서 곧 장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첫 켸를 시작하여 거궁(居宮)이 겨우 끝났을 때에 문득 밖을 보매 ○의 아내가 성장을 하고 오페라 빽을 두르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갔다. 나는 한순간 뜻하지 않고 일어섰으나 다시 태연히 주저앉아서 모른 체하고 그 판을 어름어름 허투로 끝을 내어 버렸다. 그런 뒤에 시계를 한번 꺼내어 보고 어디 급한 일이 있다고 한 뒤에 그 집을 나섰다.

무론 이제부터 ○의 아내를 따라가려던 작전은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가 나간 뒤에까지 그 집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이러니깐 오늘도 할 수 없다.’ 나는 나 스스로를 속이는 듯한 마음 상으로 생각한 뒤에 한번 씩 웃고 전차길로 나와 버렸다.

며칠 동안을 그와 비슷비슷한 일 때문에 ○의 아내를 보면서도 그냥 넘겼다. 그러나 그동안에 깨달은 것은 ○의 아내는 매일 아침 열한 시쯤은 어디로 간다 하는 점이었었다.

그리고 그 이튿날은 거의 열한 시가 되어서 그 잡화점을 찾아가서 부리나케 장기를 시작하자는 주인에게 오늘은 긴한 일이 있어서 장기를 못 두겠다고 말하여 둔 뒤에 바깥을 내어다보면서 잡담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나는 앞을 지나가는 ○의 아내의 가벼운 걸음을 보았다. 나는 그가 두세 집쯤 더 지나갔을 때를 짐작하여 곧 시계를 꺼내어 본 뒤에 그 집을 작별하고 나서서 그의 뒤를 밟았다.

그는 전차길까지 나가서는 전차를 기다리려고 정류장에 섰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어떤 담배집에 들어가서 담배를 한 갑 사서 천천히 성냥을 그 어서 붙여 가지고 역시 천천히 정류장을 향하여 걸었다.

이때에 전차가 한 대 와 닿으며 ○의 아내는 파라솔을 접고 전차를 타 버렸다.

나는 문득 담배를 떨어뜨리고 얼빠진 것같이 ○의 아내를 태워 가지고 달아나는 전차를 바라보았다.

이제라도 무론 뛰어가서 그 전차를 잡아타려면 못 탈 바는 아니다. 그러나 탐정소설에 나오는 탐정과 같이 변장을 못한 나는 ○의 아내 모르게 같은 전차 안에 함께 탈 수는 없는 바이었다. 그렇다고 이 모양대로 그를 미행한다는 것은 마치 그에게, ‘나는 그대를 미행합니다.’ 하고 통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서 또한 할 수 없는 바이었었다.

나는 다만 저편으로 달아나는 전차를 원망스러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탐정 노릇도 못해 먹을 게다.”

나는 마침내 억지의 웃음을 웃고 돌아섰다.

그 날 밤에 곰곰 생각하여 보았지만, 이러한 일로써는 ○의 아내가 어디를 다니는지는 십 년이 지날지라도 알 길이 없었다. 어찌하여서든 한번 그와 같은 전차를(우연히 된 것같이 보이게)타고, 그가 어디로 가는지를 뒤를 밟아 보아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실패의 역사를 거푸 하는 것에 지나지 못할 뿐 아무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튿날 나는 ○의 아내가 전차를 타는 다음 정류장에 가서 전차의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차는 저편 끝에서 한 대 이리로 향하고 달아온다. 나는 똑똑히 정신을 차리고 ○의 아내가 늘 전차를 타는 정류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차는 그 정류장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내리는 사람도 오르는 사람도 없이 다시 떠났다. 나는 나의 앞에까지 와서 머무른 전차를 한번 힐긋 본 뒤에,

“음, 용산행이로군.”

마치 의주통(義州通)으로 가려는 듯이 이렇게 중얼거리고 물러섰다. 전차는 싱거운 듯이 다시 달아났다.

의주통으로 가는 전차는 다시 이르렀다. 그러나 ○의 아내를 보지 못한 나는 용산행 전차를 기다리는 듯이 다시 물러서고 말았다. 이리하여 전차가 서너 대 그저 지나가 버린 뒤에 문득 ○의 아내의 화려하게 차린 모양이 그 정류장에 나타났다.

‘나왔구나.’ 나는 씩 웃은 뒤에 머리를 딴 편으로 돌리고 말았다. 전차는 웅 ─ 하는 소리를 내며 달아왔다. ○의 아내의 있던 정류장을 바라보니 그는 벌써 없어졌다. 이 전차를 탄 것이었었다. 나는 서슴지 않고 전차를 올라탔다.

그러나 놀란 것은 올라타고 보매 거반 전차가 만원으로 ○의 아내는 내게서 한 자의 상거도 되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이었었다. 나는 첫눈에 그에게 들켰다. 나는 그래도 모른 체할 양으로 다른 편을 향하여 돌아섰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매, 인젠 벌써 그에게 들켰는지라 그에게 모르게 그의 뒤를 밟는다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었었다. 설혹 그는 그런 일은 뜻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연히 자기 뒤를 따라오는 나를 발견하면 그는 필연 경계를 할 것이었었다. 전차가 종로에 이르렀을 때에 나는 그를 내어버리고 전차를 내리고 말았다.

‘오늘도 실패인가?’ 나는 저편 앞으로 북을 치면서 지나가는 구세군들을 무심히 바라보면서 씩 웃고 나의 여관으로 향하였다. 미행에 대하여 그리 큰 기대는 품고 있지 않았던 나는 그리 낙심도 되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내일 할 행동에 대하여서는 적지 않게 노심하였다.

나는 그 이튿날 다시 한 번 방침을 바꾸어서 미행을 하여 보려고 생각하였다 의 아내의 늘 타는 . ○ 정류장 앞을 지나가는 전차는 대개는 만원이었었다. 나는 ○의 아내의 타는 정류장에서 한 정류장 전에 가서 그의 나오는 것을 보아서 미리 전차에 올라 복판 가운데 사람들 틈에 숨어서 그의 행동을 엿보려 하였다. 전차가 만원만 되어 있으면 이것에는 실패를 안 할 것이었었다.

나는 정류장에 우두커니 서서 전차가 지나갈 때마다 다음 정류장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먹고 있었다. 한 대가 지나갔다. 두 대가 지나갔다. 세 대가 지나갔다. 다섯 대, 여섯 대 하며 열 대가 지나갔다. 그러나 ○의 아내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열한 시 사십 분.

‘오늘은 안 나오나? 벌써 갔나?’ 나는 조급하여져서 아직껏 먹고 있던 담배를 땅에 힘껏 내어던지고 다음 정거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차는 또 지나갔다. 또 한 대, 두 대, 세 대, 여섯 일곱…… 열두 시도 벌써 지나 버렸다.

전차는 또 한 대 지나갔다. 승강대에 빈틈이 조금 있을 뿐, 미리 올라타서 가운데 숨어 있기에는 가장 적절한 전차였었다. 나는 혀를 한번 차고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물었다. 그 전차는 ○의 아내의 타는 정류장 앞에서 잠깐 멎었다가 다시 떠났다. 그러나 한 간을 나아가지 않아서 그 전차는 다시 멎었다. 나는 무심히 먹기 시작한 담배를 내어던지고 그편을 향하여 돌아섰다.

샛골목에서 반만큼 접은 파라솔과 함께 어떤 여편네가 전차를 향하여 뛰어와서 올라탔다.

○의 아내이었었다.

“또, 졌다. 공연히 담배만 한 꼬치 먹지도 않고 내어던졌군.”

역시 나는 탐정은 못 될 재료로다 생각하면서 ○의 집에 가는 골목에 있는 잡화점으로 장기라도 둘 양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가는 동안에 나는 ○의 집으로 가 보려고 마음을 돌이켰다. ○의 아내가 나간 다음에는(몸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행랑방에 귀머거리 할멈 하나밖에는 그 집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서 마음대로 의 아내의 물건을 ○ 찾아보면 어떤(나의 찾으려는) 것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었다.

굳게 닫긴 행랑방에서는 귀머거리 할멈의 기침소리가 연하여 들렸다. 나는 그 앞을 그림자 안 띠게 지나가서(인젠 잎이 다 떨어진) 파골라를 지나서 몸채 문을 가만히 열고 들어섰다. 그러나 들어서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면서 나의 귀를 의심하였다. ○의 아내의 화장실 근처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린 것이었었다.

그것은 여편네의 발걸음 소리이었었다.

나는 빨리 거기 있는 병풍 뒤에 숨어 섰다.

누구이었을까? ○의 아내는 집에 안 있을 것이고 할멈은 아까 행랑에 있는 것을 기침소리로 알았다. 뿐만 아니라(그 발소리는 구두를 신은 것이었는데) 할멈은 구두를 안 신을 터이다.

‘어디, 보자.’ 나는 호기심으로 병풍 뒤에서 나와서(이제 누가 나오면 숨을 자리를 미리 보아 두면서) ○의 아내의 화장실로 향하였다.

그러나 화장실까지 채 및지 못하여서 나는 우뚝 섰다. 화장실 안에서 분주히 왔다갔다하던 발소리는 멎고 작으나마 똑똑한 노랫소리가 울리어 나왔다 ─.

내 스위트 하트를, 더욱 사랑.

엎디어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스위트 하트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그것은 ○의 아내의 소리이었었다. 나는 마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눈이 훼 ─ ㅇ하니 화장실 문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것이 어쩐 일인가? ○의 아내가 두 사람이 되었다는 이상한 일이 여기 돌기(突起) 되었다. 그러면 아까 그것은 그와 비슷한 딴 여편네이었던가.

이렇게 설명하면 이 일은 해석된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대저 어떤 것인가. 예수교 학교의 출신인 그가 찬미를 한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찬송가에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이라고 하였지만 ‘내 스위트 하트’라고는 안 하였다. 대저 그 스위트 하트는 누구인가?

즉 내 온몸의 힘은 차차 주먹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스위트 하트가 무엇이냐? 사랑이 무엇이냐? 그에게는 ‘○’ 라고 하는 가장 착하고 귀엽고 재조 있고 훌륭한 그 지아버니가 있지 않냐? 어디를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가장 그를 사랑하여 주던 ‘○’ 라는 사람이 있지 않냐. 스위트 하트? 대저 스위트 하트는 누구란 말인가.

나는 차차 충혈되고 흥분되어 오는 머리를 우쩍 눌렀다.

‘가만! 모든 일은 좀더 알아본 뒤에.’ 나는 아까 보아 두었던 숨어 있을 자리로 들어가서 숨었다. 흥분되었던 것이 좀 내려앉았을 때에 내 가슴이 무섭게 들썩거리는 것을 나는 발견하였다. 나로서 가령 보통 사람만큼만 자제심이 없었더면 ○의 아내는 벌써 내 쇳덩어리와 같은 주먹을 먹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을 것이다.

내가 숨어 있는 자리는 라디에타의 곧 앞이었었다. 불을 얼마나 피웠는지, 온수(溫水) 라디에타에 꼭 등을 대고 있는 나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수없이 맺히었다. 가뜩이나 마음속이 북 끓을 때에 이 더위는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참다 못하여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서려 할 때에 화장실 문이 덜컥 열리며 입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가 나왔다.

이전에 세상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그대.

다만 비는 말, …… 찬미는 그가 문밖으로 나서면서 안 들리게 되었다. 나는 곧 일어서서 그가 저편 대문 밖으로 스러지는 것을 똑똑히 본 뒤에 그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는 분내와 향수내가 머리 아프도록 차 있었다. 본시 분이나 향수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곧 샤쉬를 열어 버린 뒤에 그리로 머리를 내어밀고(더위와 향내와 흥분으로) 어지럽게 된 머리를 좀 식히려 하였다.

좀 뒤에 흥분된 것을 다 삭이고 나는 문을 도로 닫은 뒤에 교자를 하나 끄을 어다가 방 안 복판 가운데 놓고 거기 앉아서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물고 이제 방안을 뒤져볼 순서를 순서 있게 머리 속에 분류하여 놓고 모두 뒤적여 보려고 다시 일어났다.

화장탁 세면대 그 밖 , , 서랍이라는 서랍은 다 꺼내어 보고, 그의 옷주머니까지 다 뒤적여 보았지만 편지 같은 것이나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다. 쓰레기통에도 없었다. 그러나 쓰레기통에서 나는 ○의 아내의 글씨로 A씨의 이름뿐을 여러 십 개 쓴 종이 조각을 하나 얻어내었다.

우연이고 또한 무심히였었다. 그러나 나의 눈은 그 종이 조각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A씨? 그의 몇 촌 오빠이고 또한 그의 품행이 나쁘다고 온갖 곳에 돌아다니면서 퍼쳐 놓은 A씨는 이 사건의 후막에 숨어 있는 가장 큰 광대의 한 사람이 아닐까. ○의 의심을 받지 않고 그의 집에 자유로 드나들 수 있는 A씨. 아무래도 언제든 발각될 사실을 ○의 의심을 다른 편으로 돌리기 위하여 자네의 아내의 품행이 나쁘다고 비웃어 주는 것은 어떤 성격의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호떡의 말에 의지하면 A씨는 자기의 아내를 자기의 누이라고 하고 딴 집에 시집을 보내었다 한다.

이때의 나의 머리에는 ○의 아내의 소위 ‘스위트 하트’는 A씨임을 의심치 않고 긍정하였다.

‘A씨를 찾아 보자.’ 나는 곧 그 종이 조각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은 뒤에 그 집을 나섰다.

이전에 호떡에게 들어 두었던 A씨의 집은 아주 찾기가 쉬웠다.

대문간에서 안을 잠깐 엿보았지만 중대문에 가리워서 안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나는 안에서는 들리지 않을 만한 작은 소리로 ‘이리 오너라’ 찾았다. 행랑에서 한 오십 살쯤 나 보이는 코메디안 같은 사람이 꺼벅거리면서 나왔다.

“A씨 계신가?”

“네. 저…….”

“저…… 안손님이 오셨단 말인가?”

나는 웃으면서 그의 말을 미리 넘겨짚었다. 그는 연하여 눈을 꺼벅거리며 씩 웃었다.

“안손님은 젊은이인가?”

“네.”

“하이칼라지?”

그는 또 씩 웃었다.

“이즈음 매일 오지?”

“네. 만날 와서 말씀하시다가는 자정에야 가시지요. 히히히.”

“일가 되는 이가 아닌가?”

“전 몰라요.”

그는 또 한 번 히히히 웃고 말을 계속하였다.

“일가면은, 대단히 가까운 일가입디다.”

“왜?”

“왜란 ─ 히히히히 좌우간 우린 늙은이니깐 젊은 어른의 속사정을 몰라요.”

“그럼 이따가 안손님 간 뒤에 또 오마.”

나는 돌아섰다.

“아침 일찍이 오셔야 안손님 안 계신 때 만나십시다.”

그는 돌아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들어가 버렸다.

사건의 내용은 다 알았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그와 A씨의 관계가 생겼는지 그것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와 A씨의 새에 더러운 관계가 있는 것은 인제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짐승이다.”

나는 침을 탁 뱉으면서 소리까지 내어서 중얼거렸다.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다.”

10

[편집]

카페 ─ 로얄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나는 남산으로 올라갔다. 날이 꽤 서늘한 까닭인지 꼭대기에는 사람이 없었다. 저 ─ 편에 보이는 잎이 다 떨어져서 답살비를 거꾸로 세워 놓은 것 같은 포플러는 바람에 남쪽으로 기울거리고 있었다. 뫼 아래로 보이는 빈민굴에서도 겨울이 이르렀다고 새로 하얀 종이를 바른 문을 굳게 닫고들 있었다.

나는 어떤 벤치에 가서 고즈너기 걸터앉았다. 머리가 천 근이나 한 것 같이 무거웠다.

○의 아내가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참으로 뜻도 안 하였던 일이었었다. 과연 나의 천려(千慮)의 일실(一失)이었었다.

작년 ○가 한창 마음에 들떠서 어떤 이성(異性)을 자기의 아내로 삼으려고 야단할 때에 이 여자이면 ○에게 맞으리라고 내가 발견하여 온 것이 그이었 었다. 교만하면 극도로 교만한 것은 괜찮지마는 교만하고도 마음이 약하고 의심 많고 시기 잘하고 감격되고 눈물 흘리기 쉬운 ○는 임시로는 이성의 사랑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영속적 사랑은 결코 받지 못할 종류의 사람이었 었다. 그러나 그로서 한번 실연(失戀)이라는 괴로운 자리에 떨어지게 되면 그는 또한 사람으로서 다시 일어서질 못할 만큼 큰 타격을 받을이만큼 마음이 폐로운 사람이었었다. 이러한 ○를 그래도 겹지않고 영구히 사랑할 만한 여자, 나는 그것을 구하려고 나의 아는 온갖 여성을 다 마음속으로 점검하여 보았다. 그리하여 그 가운데서 얻어 낸 것이 그 ─ 였었다. 좀 바보 ─ 천치에 가깝고도 애교 있고 온순하고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였다는 명색을 가지고 게다가 한 가지 일에 늙어 죽도록 겨움증이 안 생길 만한 성격을 가진 그뿐이 ○라 하는 말째인 그 지아버니라도 사랑하기만 시작하면 끝까지 연속할 사람이었었다.

그들은 결혼하였다. 좀 바보인 듯한 아내의 모양이 ○에게는 한없이 이뻤다. 아내는 남편을 그리 사랑하는 것 같게는 안 보였지만,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그동안에 몇 번을 그에게 이렇게 말하려 하였다.

─ 자네는 자네 아내를 좀 미워하는 듯한 양을 보이게. 너무 미워하는 듯 하면 그는 자네를 원수로 알 테지. 그러나 알맞추 미워하면 더욱 자네를 사랑하고 자네를 잠시라도 놓지 않으리…….

그러나 온 하늘을 얻은 듯이 기뻐하는 ○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늘날 이런 결과를 이룬 것이었었다.

이때에 나는(탐정적 흥미에 취하여서 거반 잊어버렸던) ○를 생각하고 벌떡 일어섰다. ○의 아내의 사건을 알아보는 것도 나의 의무의 하나이지만 불붙는 시기를 마음속에 품고 동래온정에 가 있는 ○를 어떻게든 하는 것이 더 긴하고 급한 일이었었다.

나는 곧 시가를 향하여 내려왔다.

11

[편집]

‘호떡에게 ○의 동정을 물어 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집에 돌아와서 호떡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 .

이 편지는 ○ 안 보는 데서 혼자서 보게.

웃음 낙단으로 세월을 보내려는 자네이매, 그 새 잘 있었나 어쨌나 하는 인사는 하지도 않고 곧 부탁할 말을 쓰네.

○는 지금 어떻게 지내나? 아침에 깨서와 낮에와 밤 잘 때의 ○의 모양을 똑똑히 알게 하여주게. ○는 웃을 때도 있나? 늘 성을 내어 가지고 있나?

자기 아내 이야기라도 간혹 하나? 음식 잘 먹나? 가끔 탕(湯)에 들어가나?

자네와 싸우지 않나? 서울로 돌아오겠다지 않나?

그리고 ○에게 나한테서 편지 왔단 말을 하지 말게. 자네의 회답을 기다리 네.

서울 ○○는 그러나 편지는 써 놓았지만 보내는 것은 난처한 일이었었다. 호떡에게 오는 편지든 무엇이든 보내는 사람이 나일 것 같으면 ○가 먼저 받으면 먼저 뜯어볼 것이었었다. 우리 친구들 새에는 서로 비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우리의 불문율(不文律)이라 ‘요친전(要親展)’ 이라고라도 쓰면 ○의 의심과 시기의 불에 기름을 부읏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로서 오히려 더욱 그가 뜯어보는 동기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다가 나는 호떡의 아내에게 가서 봉투를 써 달라려고 작정하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곧(벌써 저녁때였지만) 호떡의 집을찾아가서 ‘마님’을 찾았다. (이전 처녀 적에 한때 나를 퍽 러브하여 본)호떡의 아내는 나와서 나를 보고 얼굴이 새빨갛게 되며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잠깐 무슨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노라니까 그는 얼굴을 더욱 붉히며 들어오라고 자기의 방으로 인도하였다.

“○군(호떡)한테서 편지나 옵니까?”

“하, 한번 왔어요.”

그는 숨찬 듯한 소리로 대답하였다. 자기가 이전 한때 대단히 사모하였지만 그때는 안 체도 안하던 사람이 지금(남편이 어디 가 있는) 갑자기 혼자서 찾아온 것이 그의 마음을 대단히 격동시킨 듯하였다.

“자미있게 지내노랍디까?”

“네, 퍽 자미나다구요. 선생님은 왜 안 가셨에요?”

“나요?”

나는 그의 얼굴을 피하여 방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대답하였다.

“가면 무얼 합니까? 온정 안가도 몸이 철석(鐵石) 같은데……. 신혼생활이 재미가 어때요?”

즉 그는 이제라도 얼굴에서 피가 쏟아질이만큼 새빨갛게 되며 머리를 수그리고 말았다 . 나는 자미스러워서 한마디 더 보내어 보았다.

“○군은 비길 데 없이 재미난다는데요.”

그의 머리는 더욱 수그러졌다. 머리를 넘어서 보이는 목까지 새빨갛게 되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에서는 부끄러워서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것까지 알았다. 나는 이 사기 없고 사랑스러운 어린 여인을 너무 부끄럽게 한 것을 깨닫고 곧 나의 요구를 말하였다.

“그런데요, 오늘 갑자기 와서 뵌 것은 좀…… 이상한 청구를 하려구 그랬는데요…….”

“네 ─ .”

좀 있다가 모깃 소리만 한 그의 소리가 들렸다.

“○군, 호떡한테 보낼 편지 봉투 하나 써 주십쇼. 딴 친구에게 뵈지 않아얄 ○군과 내 비밀 편지가 있는데, 봉투에 내 이름이나 내 필적으로 보내면, 함께 있는 친구가 뜯어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는 내 말을 채 듣지도 않고 머리를 수그린 대로 돌아앉아서, 문갑에서 꽃봉투를 하나 꺼내어, 예쁜 필적으로 하나 써서 나를 주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가지고, 한 두어 마디 이야기를 더 하고 곧 일어섰다.

“큰 수고는 아니겠지만 폐 끼쳤습니다. 곧 나가서 편지를 부쳐야겠습니다 ─ 애라(愛羅)씨는 참 행복이외다. ○군(호떡)도 행복이고……. 좋은 그 지 아버니와 좋은 그 지어머니를 맞고……. 결혼한 뒤에 후회 안하는 사람이 쉽지 않은 가운데…….”

나는 말을 중도에서 끊고 그 집을 나섰다.

12

[편집]

이틀 뒤에 호떡에게서 회답이 왔다 ─ 간단하지만 요령을 얻을 만한 편지 이었었다. 그 편지에 의지하면, ○는 깨어 있을 동안은 온갖 애를 다 써서 쾌활한 듯이 보이려 하고, 무론 웃기도 하나 성도 잘 내어서, 여관 하녀들은 그를 무서워한다 하며, 밤에는 대게 잠을 잘 못 자며, 음식도 잘 못 먹고,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어떻게 보면 없는 듯하고, 어떻게 보면 있는 듯하여 알 수가 없고, 간혹 아내의 이야기가 나오면 무섭게 성을(예를 들자면, 어떤 날 호떡이 우연히 그 이야기를 하매, 그는 두말 없이 앞에 놓였던 다완(茶碗)을 호떡에게 던진 일이 있다) 잘 낸다 한다…….

나는 이 편지를 보고, ○의 성격으로는 그럴 듯한 일이다 하였다.

13

[편집]

나는 의 아내도 ○ 동래온정으로 보내려 하였다. ○에게 물어 보면, 무론 싫다고 할 일이었었다. 아내가 가 있으면 무론, 그는 그 꼴은 보기도 싫다고 할 것이었었다. 그의 아내로서, 만약 간부(奸婦) 타입으로 태어나서, 그에게 잘 아양을 부리면이어니와, 성나는 일이 있으면 같이 우둘거리는 아내가 같은 온정에 있다는 것은 ○에게는 역정나는 일에 다름없을 것이었었다.

그러나 아내를 서울에 내버려 둔 뒤에 혼자 받는 시기와 괴로움에 비기건대 오히려 그편이 참을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아내는 A씨에게서 때려는 것도 목적의 한 가지이겠지만, ○ 그를 무서운 시기의 불길에서 증오의 권내(圈內)로 구원하여 올리는 것이 더 급한 일이었었다. 한 사람을 사람의 증오의 대상물이 되게 하려고 한다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은 잔혹한 일이라 할 수 있지만, 한 귀한 사람을 구원키 위하여 한 변변치 않은 사람을 희생하는 것은 결코 그른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더구나 ○를 이와 같이 아프게 한 것은 그의 아내 그가 아닌가.

나는 곧 ○에게 편지를 썼다 ─ 자네의 아내를 만나니, 그는 자네 있는 온정에 데려다 달라네. 자네는 그를 미워하는 모양이나 그가 자네의 안부를 들어 물을 때에 나는 눈물까지 흘렸네. 불쌍하지 않나? 근거 없는 공연한 시기로서 자네는 몇 달을 그를 괴롭게 하였나. 게다가 온다간다 말도 없이, 혼자서 외딴 데 가 있으니깐, 그 ─ ㄴ 오죽 마음이 아프겠나. 내일 데리고 갈께 잘 사랑하여 주게 서울 ○○는

14

[편집]

이튿날 아침에 나는 첫째로는 ○의 아내가 나가기 전에, 둘째로는 차 시간에 꼭 맞게 찾아가려고 아홉 시쯤 그 집을 찾아갔다.

아침밥을 방금 끝낸 그는 놀라는 듯한 수줍은 듯한 얼굴로 나를 맞아서 ○의 이전의 화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는 교자에 앉지도 않고, 곧 그에게 지금 ○가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모르겠어요. 며칠 전에 선생님과 나가신 뒤엔 일절 소식도 없고…….”

“지금 동래온정에 가 있습니다. 오늘 봉선 씨(그의 이름) 좀 온정으로 보내어 달라고 전보가 왔어요. 아마 혼자서 외로운 모양이지요.”

나는 그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을 하나도 넘기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의 이쁜 .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나타나지 않고, 눈만 껌적껌적 하고 있었다.

“온정 가 있기 좋지요. ○군도 기다리는 모양이니깐 가 보십시오.”

“이심 일 내로 가게 되면 가지요.”

그는 방긋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삼 일 내? ○군한테서 편지가 아니고 전보로 한 걸 보면 이제 곧 떠나는 편이 좋지 않나요? 한 시간쯤 뒤에 남행차가 있는데, 그 차로…….”

“그래도…….”

“그래도 일이 있단 말씀이어요? 여행 준비를 못했단 말씀이어요? 일이 있으면 내가 대리로 맡으리다. 여행 준비는 뭐 손가방에 화장구나 하고, 옷이나 한 벌 더 가지고 가면 그뿐이지요. 자, 손가방.”

하면서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 틈이 없이, 저편으로 가서 ○의 자그마한 손가방을 갖다가, 그의 앞에 벌여 놓은 뒤에 차시간이 바쁘다고 그를 부리나케 재촉하였다.

그는 내가 덤비는 바람에 정신이 절반은 빠져나간 모양이었었다. 아무 대답이 나 반항 없이 저편 방으로 가서 향수라 분이라 그런 것들을 무슨 낡은 곽에 담아 가지고 왔다. 나는 그것을 빼앗듯이 하여 차례로 손가방에 넣은 뒤에,

“자, 옷 갈아입고 가지고 갈 옷도 한 벌 가지고 오십시오.”

하였다. 그는 다시 나갔다. 나는 그의 뒷모양을 보고 스스로 한번 씩 웃고 속으로는 중얼거렸다 ─ .

‘어때? 음?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지? 서울을 떠나기가 싫어?’ 좀 뒤에 그는 옷을 갈아입고 한 벌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옷을 받으려고 내가 손을 내어 밀 때 그는 손을 훔치며 또 시작하였다.

“참말, 오늘은.”

“오늘은 못 떠날 일이 있어요? 이전에 ○군은 제게 가장 긴한 일을 내게 늘 위탁하고 했습니다. 난 결코 남의 비밀을 누설치 않는 사람이어요. 봉선씨는 ○군만큼 날 신용치 않습니까? 그렇진 않아요? 그렇지 않으면 왜 모든 뒷일은 내게 위탁하고 곧 떠나시려 안 합니까? ○군이 기다릴 생각도 해야지요. 자, 옷 이리 주십쇼.”

나는 그의 옷을 받아서 가방에 넣은 뒤에 그에게 모든 열쇠를 받아서 각 문을 다 채운 뒤에 가방을 들고 그와 함께 그 집을 나섰다.

우리는 하마터면 기차를 못 탈 뻔하였다. 부리나케 표를 사 가지고 기차 안에 들어가 앉을 때에, 기차는 벌써 고동을 틀었다. 나는 안심의 한숨을 짚은 뒤에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를 보았다. 이쁘기는 하지만 아무 표정도 없는 그의 눈은 뜻없이 나의 어깨에 향하여 있다.

‘내 천려(千慮)의 일실(一失)이로다. 내가 너를 잘못 보기 때문에 나의 가장 사랑하는 ○를 오늘날 이렇듯 괴로운 경우에 빠지게 하고, 또 너까지 한 희생물이 되게 하누나. 너도 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나는 고즈너기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꼬치 꺼내어 붙여 물었다.

15

[편집]

밤이 들어서 기차는 부산에 닿았다.

○의 아내는 기차를 내리면서 매우 싱거운 웃음을 한번 씩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힐긋 그를 본 뒤에, 그의 눈을 피하여 머리를 돌리고 앞서서 정거장 밖으로 나왔다. 온정 가는 손님을 기다리는 자동차가 서너 대 어두운 정거장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끄을고 그 자동차 가운데 한 대에 올라탔다. 자동차는 몇 사람을 더 태운 뒤에 부산 정거장을 떠났다.

이리하여 우리들의 자동차가 ○와 호떡이 묵어 있는 B관? 앞에 이른 때는 여관의 손님들은 벌써 자는지 대단히 여관은 조용하였다. 나는 먼저 자동차를 뛰쳐 내려서, 맞으러 나오는 하녀들을 밀어 버리고 달음박질하다시피 ○가 묵어 있는 구호실(九號室)로 갔다. ○는 이불 속에 드러누워서 눈만 껌쩍 껌쩍 하고 있다가, 제 방으로 안내도 없이 뛰쳐 들어오는 어떤 침입자를, 펄떡 놀라며 돌아보았다.

“○, 나일세.”

“응? 아! 언제 오셨습니까?”

“시방 오는 길이네. 내 편지 봤지? 자네 부인도 동행이네……. 일어나서 부인이나 맞게.”

그는 히끈 머리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의 눈은 대단히 낭패한 듯이 한 군데 머물러 있지 않고, 담벽에서 천장으로, 천장에서 후스마로 왔다갔다하였다.

“우리 처요?”

“음.”

잠시도 한 군데 머물러 있지 않고 왔다갔다하던 그의 눈은 잠깐 담벽과 천장의 모퉁이에 머물렀다가, 고즈너기 나에게로 구을러왔다.

“무얼 하러?”

“무얼 하러? 아내가 남편께로 왔는데 무얼 하러?”

나는 정다운 듯하고도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흘겼다. 그의 눈은 다시 낭패한 듯이 저편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그의 그 눈에 나타난 분노의 불덩어리를, 나는 그저 넘기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각각으로 나타나며 변하는 표정은 모두 내가 미리 생각하였던 바와 같은 것이었었다. 시방 그의 얼굴에 나타난 노여움은 결코 나의 행동이나 혹은 아내의 동래 출현에 대한 노여움이 아니었었다.

“이맘 때, 무슨 면목으로!”

그의 성난 눈은 이렇게 소근거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 눈 속에 감추어 있는(작으나마) 안심의 빛을 또한 발견 하였다.

“여기외다.”

나는 호 ─ ㄹ 로 향한 장지를 열고, 저편에서 하녀의 인도로 이리로 오는 ○의 아내에게 손짓을 하였다. 그는 전등불 빛에 눈을 가리며 저퍼하는 듯한 양으로 ○의 방 앞에까지 와서 머물렀다.

“○, 일어나서 환영하게. 자, 들어오시지요.”

○의 아내는 얌전한 태도로 읍하고 들어왔다. ○는 한순간 힐긋 제 아내의 얼굴을 본 뒤에, 눈을 감아 버렸다. 그냥 드러누운 대로…….

그들의 침묵의 연극은 잠시 동안 연속되었다. ○의 숨소리도 자못 높았으나, 그의 아내의 숨소리도 또한 고즈넉치는 않았다. ○는 자기의 아내에게 원망의 한마디라도 하고 싶은 듯하였다. 그의 여윈 눈꺼풀 아래서는 눈알이 방향 없이 구을고 있었다.

나는 잠깐 그들의 행동을 엿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 앉으시지요. 피곤하실 텐데……. ○도 일어나 앉게. 그리구 호떡은 어느 방에 있나?”

“여기 있네.”

내 말이 떨어지자 곁방에서 응얼거리는 호떡의 소리가 들렸다.

“결혼 일주년 기념 여행? 좋지.”

나는 그들에게 들리도록 중얼거리고, 호떡의 방으로 건너갔다.

16

[편집]

사흘 지나서 나는 그들 부처를 남겨 두고 호떡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것으로 나의 임무는 다 하였을까?

대단히 아파하는 병인에게 아편 주사를 하는 것은 고식적 치료법은 될지라도 결코 온전한 치료법은 안 된다. 임시로 아픔뿐을 멈춘단들 무엇하랴. 그 뒤에 다시 일어날 아픔은 결코 덜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 부처를 온전히 A씨라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생활케 하면 모를 일이려니와, 그렇기 전에는 그들 새에 잠겨 있는 병의 뿌리는 언제까지든 남아 있을 것이었었다.

A씨와 ○의 아내의 관계가, ○와 아내가 결혼한 뒤에 생겼는지, 혹은 그 전부터 있었는지 그것은 그리 탐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좀 천치에 가까운 ○의 아내로서 보드랍고 나약하고 애상적인 ○의 사랑에 만족치 못하였을 것은 짐작할 수가 있다. 그로서 만약 한때라도 자기의 그 지아비인 ○를 사랑하였었다 하면 무엇이든 한번 시작한 뒤에는 결코 겨움증이 안 생기는 성격의 주인인 그인지라, 어떤 장해와 괴로움이 있을지라도 결코 마음 변할 리는 없을 것이었었다.

그와 동시에 그 반대의 경우도 또한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한 ○의 아내를 A씨에게서 떼어서 ○에게 보낼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다.

그러면 어떤 방책을 쓰나?

‘봉선이를 죽여 버릴까?’ 무론, ○을 이렇듯 괴롭게 한 그의 아내를 죽여 버리는 것은 한 보수는 되겠지만, 그것이 과연 얼마나 중한 일일까. ○의 마음속에 찍히어 있는 시기와 노여움은 영구히 사라질 길조차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피어오르려던 젊은 순을 잘라 버린 ○의 아내는, 그 잘라 버린 순이 다른 곳으로라도 뻗어 나아갈 길을 만들어 놓을 의무가 있다. 그를 그 길을 닦아 놓기 전에 죽여 버리면은 도저히 안 된다…….

‘그럼, A씨를 죽일까?’ 더욱 안 될 일이었었다. 만약 A씨가 불의에 죽어 버리면, 그(○의 아내)는 만날 소복하고 A씨의 무덤에 가서 울기라도 할 만치 어리석고도 정직한 계집이다. 그러면 그것은 아직껏 확실히 알지 못하던 ○에게 자기의 아내의 사랑하는 사람이 A씨임을 가르치는 일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내와 계집을 다 죽이나.’ 그러나 그것은 무엇할까. 그것 또한 ○의 머리에 영구히 ‘의심’을 남겨 두는 재미없는 일에 지나지 못한다.

‘그러면 어쩌나? 이 일은 내게는 넘치는 일인가?’ 나는 온갖 경우를 생각하여 보았지만, 온갖 경우에 다 해결할 길을 얻지 못하였다.

17

[편집]

내게 만약 아내라는 것이 있고, 내가 지금 ○의 처지에 이르렀다면 나는 그 일을 처치하여 나아갈 여러 가지의 방책을 쓸 수가 있다.

‘암도야지는 숫도야지에게로 가라.’ 이 한마디로, 이혼하여 버리는 것도 한 방책이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지혜와 재간을 다 부려서, 아내의 마음을 애부(愛夫)에게서 떼어서 내게로 돌리게 한 뒤에 아내가 마음껏 나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에 한 발로 아내를 차 던지는 것도 한 방책이다.

이렇듯 나는 이러한 경우를 당할지라도 결코 걱정이 없으되, ○는 그렇게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를 위하여 걱정하였다. 언제든 잠들려는 마음으로 드러눕기만 하면, (그것이 아침이든 낮이든 저녁이든) 마음대로 잘 수가 있던 나도, 지금은 때때로 밤에도 잠이 못 들 때가 있었다. 모든 몸의 피곤함이 눈에 모여서 깜빡 잠이 들려다가도, ‘○’ 한마디가 번쩍 생각나면서 그냥 잠이 깨어서 세 시간 네 시간을 담배를 피우면 눈을 껌벅거리는 일이 간간 생기게 되었다. 음식을 먹다가라도 젓가치를 쥔 대로, 눈이 멀거니 한참씩 앉아 있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전차를 탈지라도 내릴 정류장을 그저 넘기는 일이 흔히 있게 되었다.

나는 나의 양심이며 ○을 위하여서뿐 아니라, 나의 건강을 위하여서도 하루바삐 ○의 일을 어떻게든 바로 펴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어찌할까. 백 가지고 천 가지로 생각하여 보았지만, 나의 힘뿐으로써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에게 자네의 아내의 러브가 A씨라고 가르치면 어찌될까. 나는 그 뒷일을 틀리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다. 아직껏 자기의 아내의 품행이 나쁘다는 온전한 증거를 그가 잡지 못하였기에 여망이 있지, 그것만 그가 알 것 같으면 그는 다시는 여망 없는 바보가 될 것이다.

그를 가장 안전하게 이 무서운 시기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릴 방책은 과연 어떤 것일까. 나의 머리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18

[편집]

동래서 서울로 돌아올 때에, 나는 그 B관(館)의 그 중 영리하게 보이는 하녀를 하나 몰래 찾아서, 돈 십 원을 내어 주고 ○부처의 지내는 모양을 간간이 통기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 편지가 오늘 이르렀다. 그 통기에 의지하면 그 부처는 그리 이야기도 서로 안하고 뚱뚱 부은 듯이 지낸다 한다. 그리고 ‘생소한 사람들끼리와 같이 서로 밥을 권하며, 목욕도 각각(가족탕에서 하지 않고) 따로 한다’ 하였다.

‘한동안은 마음을 놓을 수가 있지.’ 나는 그 편지를 봉투에 집어넣으면서 씩 웃었다.

19

[편집]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어떤 날이었다. 나는 이 날 책방을 보는 T군에게 돈을 좀 물어 줄 것이 있으므로, 은행에 잠깐 들러서 돈을 찾아 가지고 T군의 책사로 갔다.

들어가서 점원에게 T군을 찾으니, T군은 손님과 같이 안방에 들어갔다 한다.

“손님? 누구요?”

“A씨세요.”

“A씨?”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A씨를 만나기가 싫어서 도로 나가려 할 때에, 안에서 T군의 소리가 들렸다.

“그럼, A씨. 이따가 저녁이고, 내일 아침이고 다시 한 번 들러 주세요.”

“네, 꼭 부탁합니다. 자, 인젠 추운데 들어가시지요.”

나는 이 굵은 소리에 뜻하지 않고 돌아보았다.

‘화장(火葬) 가마에 들어가서 한 절반은 타져 나온 얼굴.’ 이것이 이전 호떡이 A씨의 얼굴을 형용한 말이었었지만, 어두운 곳에서 쑥 나오는 A씨의 얼굴은 그 호떡의 형용이 오히려 부족하다는 느낌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몸이 여섯 자에 가까운 대남자(大男子)로 얼굴이 끝까지 검고 우들투들하고, 그 시꺼먼 얼굴 가운데 하얗고 커다란 두 눈이 빛을 받아서 어른거린다. 전설에 나오는 ‘거인’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 나는 아직껏 어떠한 사람 앞에서든 우월감을 느꼈지만, 위압감(威壓感)은 받아 본 적이 없지만 이 A씨 앞에서는 나의 어깨가 저절로 쭈그러지는 것을 깨달았다. 좀 바보인 듯한 ○의 아내와 같은 여편네가 ○의 센티멘탈한 부드러운 품에서 이 힘있고 의지할 만한 거인의 굳센 품으로 돌아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힘있는 . 발자국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양을 몰래 돌아보았다.

“아, ○○씨. 언제 오셋어요?”

A씨를 보낸 T군은 나를 보고 찾았다. 나는 목례를 하고, 그와 함께 그의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그이가 A씨지요?”

나는 앉으면서 곧 주인에게 물어 보았다.

“네.”

“어이구, 무서워!”

나는 엄청스럽게 몸을 한번 떨었다.

“밤에 외딴 길에서라도 만나면 상길 하겠는걸.”

“하하하하하.”

주인은 쾌활히 웃었다.

“A씨와 오래 전부터 아셨습니까?”

“녜, 한 삼사 년 전부터여요.”

“간간 여기 옵니까?”

“자기 일이나 있으면 매일도 오고, 그렇지 않으면 수 삭을 안 올 때도 있고…….”

“그럼, 오늘은 일이 있는 모양이외다그려.”

“네, 뭐, 돈이 좀 쓸데 있다나요.”

“돈? 그런 사람에게 돈의 필요가 있을까. 밤중에 길모퉁이에 서 있기만 하면 지나가는 사람이 저 혼자서 돈을 놓고 달아날 터인데.”

“하하하하.”

주인은 또 쾌활히 웃었다.

“뭐, 기생의 해우채라도 준답디까?”

“옳은 말씀이외다. 그 비슷한 데 쓸 모양입디다.”

“그럼, 그 준비금인가요?”

“아니, 온정을 간다나요.”

“온정?”

나는 갑자기 얼굴에 솟아오르는 핏기운을 억지로 누르면서 물어 보았다.

“네, 동래인가를 간답디다.”

“기생이라도 데리고?”

“하하하하, 우습지요. 어떤 가련한 여자를 구원하러 간다나요.”

“하하하하, 구원?”

“네, 남편한테 학대받는 어떤 가련한 여자를 구원 간다고요. 좌우간 A씨의 일이니깐, 어떤 유부녀와 관계나 하여놓고, 그 여편네가 온정에 가 있으니깐, 뒤쫓아가는 모양이지요. 돈 백 원만 꾸라구…….”

“품행이 그리 나쁩니까?”

“A씨 말이에요? 뭐 더 말할 수는 없는 사람이지요. 여편네라기만 하면 친구의 아내구, 친척의 아내구, 혹은 여학생이구 과부구 구별을 안하지요. 지금까지도 몇 번 문제가 났었는데 ─ 어떻든 주변은 좋은 사람이에요.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면서 운동해서 매번 슬쩍 삭이고 말지요. 천재 연애 기사(技師)라고나 할까요.”

“네게도 그런 천재가 좀 있으면…….”

나는 머리로는 딴 생각을 하면서, 입으로만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이제 A씨가 덤벙 동래로 뛰쳐갈 것이면, 그야말로 만사는 끝나고, ○는 다시 일어서지 못할 사람이 되고야 말 테다. 나는 어떻게 하여서든 A씨와 ○의 아내를 당분간 ○의 눈앞에서 만나지 않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나는 머리를 돌이키고 T군에게 물었다.

“온정은 언제 간답니까? 나도 좀 가 있을 생각이 있던 차에 가게 되면 A씨와 같이 가서, 희극의 한 막이라도 구경했으면 좋겠는데요.”

“오늘 저녁이구, 내일 아침이고, 돈만 생기면 갈 모양입디다.”

“돈 주셨습니까?”

“손에 돈이 없어서 저녁에 오라고 그랬지요.”

나는 뜻하지 않고 안심의 한숨을 내어쉬었다.

“저, 그 돈은 나한테 받으시면 주실 작정인가요?”

“뭐, 그뿐두…….”

T군의 말은 ‘그뿐도 아니라’지만, 나는 그의 눈치로서 내게 받은 돈으로써 A씨에게 꾸어 주려던 것을 알았다.

“만약, 나한테 받은 돈으로 주실 작정이었더면,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내게도 돈이 오늘은 꼭 될 줄로 믿었더니, 하루가 연기돼서 내일이 아니면 안 되게 됐습니다. 뭐, A씨한테 하루만 더 기다리라지요.”

나는 천연스러이 머리를 들고 T군을 바라보았다.

“그럼요, A씨두 하루야 기다리겠지요. 그럼…….”

“내일은 꼭 됩니다. ─ 가만 계십쇼, 내일 내가 직접 A씨한테로 백 원만 보내지요. 네? 천만에, 수고는 무슨 수고요. 이리로 가져오거나, A씨에게로 가지고 가거나, 가져가기는 일반이니깐요. 그럼 이따가 A씨가 오거든. 내일 아침 꼭 아홉 시에 내가 A씨 댁으로 돈을 가지고 갈께 어디 출입하지 말고 기다려주면 좋겠다고 말씀 좀 드려 주십시오. 그런 호걸과 이야기도 한번 해볼 겸…….”

“하하하하, 호걸? 참 호걸이에요.”

나는 T군과 이야기를 몇 마디 더 한 뒤에 그 책방을 나섰다.

20

[편집]

‘전보를 하나, 편지로 하나?’ 나는 T군의 집을 나서면서 생각하였다.

○를 어떻게 하나? 무론 A씨의 동래행을 막지 못할진대 ○부처를 서울로 데려라도 와야겠다. A씨가 서울서 기차를 타는 동시에, ○부처는 부산서 기차를 타게 해야겠다.

‘무얼, 무대 감독이 이 나인데……. 여러분, 이 무대 감독 ○○씨가 지휘하는 일장의 희극을 보아주십시오. 사건이 교묘하게 끝이 막거든, 박수갈채를 원합니다. 닭 쫓던 개 모양으로 지붕만 쳐다볼 A씨, 무의식히 일장의 희 활극(喜活劇)을 연출할 ○. 자, 어떻습니까?’ 나는 입으로 휘파람을 불면서 우편국으로 향하였다. 십여 분 뒤에는 동래 ○에게 나의 병이 위급하니 부인 동반하여 오라는 말과 떠날 때에 내게 전보를 내놓으라는 전보를 종로 우편국에 들여뜨렸다.

21

[편집]

이튿날 아침, 벌떡 일어나면서 사환에게 어디서 전보가 안 왔느냐고 물으니, 아무것도 없다 한다. 나는 그를 방안에 불러 들여서 이제 A씨라는 손님이 오시거든, 나는 ‘어디 돈 갚을 곳이 있어서 나갔다’고 하라고 부탁을 한 뒤에 조반을 먹었다.

A씨는 기다리다 못하여 열한 시쯤 왔다. 나는 문틈으로 사환애와 이야기하는 A씨를 내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사환에게서 돈 갚으러 갔단 말을 듣고, A씨는 곧 돌아서 나갔다. 나는 담배를 붙여 물고 A씨의 뒤를 밟았다.

무엇하러 밟았는지 나도 모른다. 나는 다만 호기심으로 그의 뒤를 보이지 않을이만큼 따라갔다.

A씨는 잠깐 자기 집에 들러서 행랑아범과 두어 마디 이야기를 하더니, 다시 길로 나섰다.

‘흥, 이번은 T군의 책방이로구나.’ 나는 모른 체하고 A씨의 집까지 가서, 이리 오너라고 찾았다. 이전에 한번 본 일이 있는 아범이 눈을 껌벅거리며 나왔다.

“A씨 계신가?”

“방금, 조, 조리로 가셋지요.”

“어디루 가셌는지 모르겠나?”

“그건 모릅지만요. 쫓아가시면 만납니다.”

“응, 돈 좀 갚으러 왔더니……. 오후 두 시에 다시 오마.”

나는 돌아섰다.

나는 곧 여관으로 돌아와서, 전보 온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역시 아직 안 왔다 한다.

어떤 셈인가. 옳게 생각하자면 어제 저녁에 떠난다는 전보가 이르렀어야 될 것이었다. 그것이 오늘 아침은커녕 아직 안 온 것은 어쩐 셈인가? A로 하여금 오늘 오후 두 시까지는 나의 돈을 기다리게 하여 놓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내가 그를 피하면, 그는 나의 돈을 믿지 않고 다른 곳에서 변통하여 가지고 오늘 밤차로 내려갈지도 모르겠다. ○로서 만약 그때까지 부산 있기만 하면 모든 나의 계획은 틀려 버린다.

‘○! 왜 안 떠나! 바보엣 자식!’ 나는 다시 담배를 한 꼬치 피워 물고, 힘껏 성냥을 땅에 던지면서 여관을 나섰다.

원래 낙관적으로 생기고 무슨 계획이든 하여 놓기만 하면 성사되는 경험뿐을 가지고 소위 ‘불성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던 나는, 이러한 불가항력이라도 옳을 만한 착오를 만나 놓으면, 어찌 처치하여야 할지 머리가 섞바뀌고 만다. 어떻게 할까? 나는 정처 없이 본정으로 명치정으로, 명치정에서 황금정으로, 남문통으로, 또 다른 곳으로 헤매었다. 체부는 편지며 전보를 돌리고들 있다. 그러나……. 나는 전동전화에 뛰쳐 들어가서, 여관에 전보가 안 와 있느냐고 물었다. 아직 안 왔다 한다. 낮 열 두 시…….

한 시가 되었다. 전보는 아직 안 왔다.

나는 어떤 자그마한 카페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고 또 전화로 물어 보았다.

아직 안 왔다. 나는 카페에서 나왔다.

‘바보! 바보! 너는 너 스스로 자멸의 길을 취하나? ○! 어서 떠나라!’ 아침부터 흐리던 날은 마침내 눈을 퍼부읏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는 A씨에게 들킬까 봐서 여관에도 못 돌아가고 거리거리를 헤매었다.

두 시가 지났다. 세 시도 이르렀다. 즉, 그때에 나는 내 여남은 간(間) 앞에 묏더미와 같이 커다란 몸집을 분주히 움직여 가는 A씨를 보았다. 나는 담배를 내어던지고(마치 퍼부웃는 눈을 피하려는 듯이)모자와 외투목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의 뒤를 밟았다.

벌써 세 시라고, 저편에 보이는 한성은행도 덧문을 닫으려 하고 있었다.

그 앞까지 분주히 가던 A씨는 뛰어가서 그(덧문을 닫으려는) 급사를 밀었다. 급사는 반항하였다.

‘어서 닫아라! 닫아라!’ 나는 거반 소리까지 내며 급사에게 손짓을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A는 은행 안으로 들어갔다.

“아아.”

나는 실망의 탄성을 내었다. 무슨 불행이냐. 모든 일이 순서대로 되어 나가는데, 마지막에 이르러서 이런 불행이 어디 있나? 일 분, 그렇다. 그 마지막 일 분이 이런 불행을 낳았다.

나는 얼빠진 듯이 은행 모퉁이에 서 있었다.

잠깐 뒤에 A씨는 나왔다. 나는 눈을 딱 바로 뜨고 A씨의 얼굴을 보았다.

실망이냐, 기쁨이냐, A씨의 태연히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의 얼굴에는 실망이며 기쁨의 아무 표정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묏더미와 같은 몸집을 움직여서 가는 A씨의 얼굴은 다만, 이 흐리고 눈 오는 날이 성가신 듯할 뿐이었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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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물면서 아직껏 오던 눈은 보스럭비로 변하였다. 전등도 인젠 모두 켜졌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여관에도 안 돌아가고, 거리거리를 헤매었다. 무론 어디든 들어가서 쉴 곳이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설렁거리는 마음을 잠시도 쉴 수가 없이 몸을 끄을고 다녔다.

여섯 시도 지났다. 나는 인젠 전보 일도 단념하고 ─ 아니, 바로 말하자면 ○의 일도 온전히 잊어버리고, 다만 무슨 커다란 ‘실패’에 넘겨진 것 같은 무거운 마음으로 머리를 수그리고, 비를 맞으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무겁고 피곤한 다리를 무교다리에서 쉬었다. 비는 그냥 보스럭보스럭 내린다. 비 때문에 젖은 난간에 팔을 의지하고, 나는 정신없이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보, 바보! 이 세상에, ○와 같은 바보는 다시 없으렷다.’ 그러나 이 나로 말하더라도 어지간한 바보이었었다. 자기의 역량을 너무 심하게 믿은 나는, 이 세상에는 나의 힘으로도 당치 못할 ‘되어가는 대로의 힘’ 이라는 것을 몰랐다. ○의 아내와 A씨가 만나게 되어? 그런 일은 제 이의 문제이다. 첫째로, 나는 나의 계획이 모두 깨어져 나간다는 파천황의 일을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동시에 나의 자존심은 모두 부스러져 나갔다.

즉, 나의 자존심은 다시 분연히 머리를 들었다.

‘무얼? 내 계획이 깨어져 나가? 그런 바보엣 소리가 어디 있어. 이 세상의 모든 다른 힘을 짓부수고 내가 성공의 무대에 올라서는 것을 보아라. 오늘 밤 A씨가 부산으로 간다면 나도 따라갈 뿐이다. A씨가 ○일행과 만날 때는 나도 또한 ○일행과 만날 테다. 지금이 몇 시인가?’

“난 모르겠시다. 해해해해.”

뒤에서 황해도 여인인 듯한 대단히 젊은 소리가 날카롭게 나며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나의 뒤를 달아난다. 동시에,

“지랄할 것, 달아나깅 와 달아낭고?”

하면서 그 여편네를 따라가는 미투리의 소리가 질벅질벅 났다.

‘되지 않은 것. 모르긴 무얼 몰라. 난, 모든 것을 다 안다. 맨 마지막의 성공자는 암만하여도 이 나 밖에는 없을 것을 ─ 전보가 왔으렷다.’ 나는 난간을 떠나서 바삐 여관으로 돌아왔다. 나의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에, 사환애가 전보를 한 장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내일 아침 출발.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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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그리고 곧 A씨를 찾아보려 우산을 가지고 다시 나섰다. 만약 A씨가 정거장으로 갔으면 곧 돌아서서 정거장까지 나가 볼 작정으로…….

A씨는 아직 떠나지 않고 집에 있었다. 초대면은 인사가 끝난 뒤에 그는 시커먼 눈을 휘두르며 나를 흘겼다.

“여보, 하루 종일 기다렸소.”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어느 친구네 집에를 갔다가 트럼프를 시작하기 때문에 그만 거기 정신이 팔려서 잊었습니다.”

“당신의 도박 때문에 하루를 공연히 허비했소. 허허허, 어이가 없어 …….”

아까 “ , 뉘 말을 들으니깐, 은행에서 돈을 마련하였다구요?”

“마련? 두 분 늦었다구 못했소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A씨를 주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서 헤어보지도 않고 주머니 속에 잡아넣었다.

“세 보시지요.”

“뭐…….”

“오늘 밤 떠나십니까?”

그는 시계를 꺼내어 보았다.

“내일 아침…….”

“네, 그러면 평안히 다녀오시지요.”

나는 그의 집을 나섰다. 내일 A씨가 떠난다 하면, ○와 서로 중도에서 기차가 어길 것이었다. 그러나 만에 일 기차가 어기는 데서 서로 만난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걱정이 없는 일이었다. ○의 아내가 반갑게 A씨에게 웃음을 던진단들 기차의 어기는 데서 만난 육촌 오누이의 인사가, 어찌(시기로) 마비된 ○의 신경을 자극하랴. A씨는 역시 닭 쫓던 개일 밖에는 수가 없을 것이었었다.

나는 씩 웃으면서 우산을 폈다.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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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저녁에 ○의 부처가 왔다. 나는 잠깐 관격으로 앓았노라고 핑계를 대었다.

또 이틀 지나서 닭 쫓아갔던 개인 A씨가 서울로 돌아왔다.

○는 잠시도 나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잠잘 때만 할 수 없이 집에 가서 자고는, 깨기만 하면 곧 내게로 오고 하였다. 나도 또한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같이 있을 동안은 설혹 그의 아내와 A씨가 ○의 눈앞에서 만난다 할지라도(나를 두려워하여) 마음놓고 덤비지 못한다. 그러므로 ○가 나와 같이만 있으면 제 아내의 수상한 점은 당분간 발견치 못할 것이었었다. 더구나 슬픔으로 말미암아 온갖 기관이 마비된 그로서는 조그만 수상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저 넘길 처지이니까…….

그러나 나의 눈으로서는 그는 너무도 참혹한 사람이었었다. 언제든 정신 없는 듯이 눈이 멀진멀진하며, 묻는 말에도 뚱딴짓 대답을 하기가 예사이며, 불쌍하도록 모든 말을 순종 잘하는 사람이 되었다.

“거리에나 나가 볼까?”

“네.”

그는 눈을 내리뜬 대로 대답한다.

“뭐, 추운데 그만둘까?”

“네.”

“갑갑하니 무엇이나 하자나?”

“…….”

“응?”

“네? 그저 형님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란? 자네 말하게.”

“그럼(하면서 그는 눈을 휘둘러본다) 저기 저 트람프라도…….”

이전의 그는 결코 이러한 순종 잘하는 청년이 아니었었다.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A씨와 ○의 아내에게 어떻게든 원수를 갚아야겠다는 결심은 나날이 굳어 갔다.

그러나 옛적과 같이 일문(一門)이 몽치를 들고 나서서 두 연놈을 쳐죽일 수도 없는 바이며, 그들의 간통의 증거를 잡아서 검사국에 고소를 하자니 그것도 또한 ○의 명예를 위하여 못할 일이 아닌가.

아니 원수는 그만두고라도 ○를 이전과 같은 어린애로 다시 만들 수가 있다 하면, 그것뿐이라도 하여야겠다……. 나는 ○의 상심한 여윈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언제든 그 뒤에서 비웃는 A씨와 ○의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 .

‘○, 기다리게. 하나님은 옳은 자를 구원한다네. 설혹 하나님이 못 구원한다 할지라도 이 ○○는 꼭 구원해 줄께. 마음놓고 기다리게. 다만 시기네. 시기야. 엑, 짐승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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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바뀌었다.

새로운 해를 맞은 이 도회는 잠깐 기쁨으로 욱 끓었다. 그러나 ○의 상심한 얼굴에서는 조금의 빛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어떤 날 아침, ○는 나를 찾아와서 머뭇거리다가 이런 말을 물었다.

“형님, 바로 말씀해 주세요. 우리 처가 어떻습니까?”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담배를 주었다. 그런 뒤에 대답하였다.

“왜?”

“이런 생활을 이제 석 달만 더 하래면 죽는 편이 낫겠세요.”

“자네,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었나?”

그는 잠잠하였다. 그러나 잠시 지나서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밤 A씨가 왔는데 잔뜩 술에 취해서, 날 들여다보면서 씩씩 웃고 있어요. 형님 왜 웃었을까요? A씨는 무얼 아는 것 같아요.”

“하하하하.”

나는 나의 눈물 나오는 얼굴을 그에게서 돌리면서 별한 소리로 웃었다.

“○! 나는 아직껏 자네의 부인의 품행이 온전한 줄 믿네. 내가 모르는 걸 A씨가 어찌 알아. 나만 믿게. 나는 사내네. A씨보다 영리하고 지혜 있고 지식 있는 사람이네. 나만 믿게.”

“그래도…….”

“그래도 뭐야. 날 못 믿겠단 말인가?”

그는 다시 머리를 수그리고 말았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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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도 지나갔다.

나의 ○에게 맡은 책임은 그냥 그 자리에 있어서 한 걸음도 진척 못 되었다.

나는 ○를 다시 온양온정으로 보내었다. 비통한 ○의 얼굴을 만날 눈앞에 보는 것은 사실 나로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었다.

(있으나 없으나 일반이겠지만, 그래도 조금 구속되던) ○가 온양으로 떠난 뒤에 ○의 아내의 행동은 더욱 못되게 되었다. A씨의 행랑아범의 말에 의지하면, 이쁜 아찌 한 분이 A씨의 집에 묵어 가면서 즐겁게 논다한다. ○의 집을 찾아가면 언제든 행랑할멈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잘들 놀아 두어라, 짐승들. 그러나 너희들이 잊어서는 안 될 점은 사람이 짐승보다 지혜가 더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 승리자는 사람일 밖에는 없다는 점이다 ─ 나는 침을 탁 배앝으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하였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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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도 절반이나 간 어떤 날, 나는 책방 보는 T군을 찾아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A씨가 티푸스에 걸려서 위독하게 되어서 입원하여 있단 말을 들었다.

‘이것이 시기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머리를 지나간 생각은 이런 것이었었다.

조금이라도 그들(A씨와 ○의 아내)의 생활 상태의 변동이 생기기만 하면 그것을 기회로 아직껏 그 자리에 있던 나의 책임을 다하려 하던 나는, 우연히 이른 이 기회를 그저 넘기지 않으려 하였다.

나는 곧 B의원에 전화로 A씨의 모양을 물어 보았다. 그리고 ‘힘 써는 보겠지만……’ 이라는 대답을 얻은 나는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한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무론 A씨나 ○의 아내나 같은 사람인지라 이 기회를 그저 넘긴다 할지라도, 언제 다시 새로운 기회가 이르겠지만 차차 타락경으로 빠져들어가는 ○를 생각하면 한 기회를 업수이 여길 수가 없었다.

하룻밤을 담배 여섯 갑으로 새우면서 나는 이제 연출될 일장의 비극을 복안하여 놓았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온양 ○에게 곧 서울로 돌아오라는 전보를 놓았다.

이튿날 ○가 돌아왔다. 나는 ○의 아내에게 ○가 오늘 온양서 돌아온다는 기별을 한 뒤에 정거장에 나가서 ○를 맞아서 곧 어떤 카페로 데리고 갔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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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어지간히 취한 뒤에, 나는 ○의 어깨를 흔들었다.

“○, 내가 왜 갑자기 자네를 전보로 데려왔는지 알겠나?”

그는 힐긋 나를 보았다.

“알잖고요. 우리 처의 못된 짓을 발견하셌지요?”

“○, 흥분하지 말게. 아직 똑똑히는 모르지만, 좀 아야시이(ァヤシイ─ 수상한) 한 점이 뵈데. 자세히 듣게. 아직은 똑똑히는 모른단 말이야.”

그는 또 다시 힐긋 나를 보았다. 그런 뒤에 다시 술을 잔에 부었다.

“○, 꼭 내 말을 듣고, 내 명령을 복종하겠나? 흥분하지 않고 꼭 내가 말한 대로 실행할 수 있나? 있으면 맹서하게.”

“…….”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자네 가서 부인을 만나 보게!”

“예?”

그는 소리까지 내며 놀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낭패한 빛이 떠돌았다.

“못하겠나?”

“그깻년을 만나서 무얼 합니까?”

그는 벽력같이 고함쳤다.

“흥분치 말래도 그냥 흥분하나?”

나는 그에게, 그가 이제 아내를 찾아가서 하여야 할 일을 천만 어로써 일러 주었다 ─ 이제 아내를 찾아가서 잡담 제지하고 첫말로, 모든 일은 다 증거가 나타났으니 자백하여 버리란 말과 공연히 여러 소리를 하든지 흥분을 하든지 하면 모든(실행하려던)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테니까, 정신 차려서 흥분치 않도록 힘쓰라는 말을 열 번 스무 번 거푸 일러 주었다.

“자네에게, 다른 일은 시키지 않으마. 그 대신 그 일 하나는 책임 맡아 가지고 해야 하네. 자, 용기를 내어 가지고 해보게. 자네의 일을 펴기 위해서 자네의 몫에 가는 야쿠와리(역할 ─ やくわり)는 자네가 책임 맡아 해야 하지 않나?”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 못하겠나?”

나는 잠깐 기다리다가 물었다. 그에게서는 역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 똑똑히 말을 해! 하겠나 못하겠나?”

즉, 그는 이번은 내 말이 채 끊어지기 전에 고함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가겠습니다 ─ 가서 그년에게 물어 보고, 대답이 변변치 못하면 이년을 죽이리라…….”

“하하하하, 흥분하지 말게. 흥분했다가는 일을 그릇되게 하네. 자 나한테 맹서하게. 흥분하겠……”

“놓아주세요.”

그는 나를 뿌리치고 나가려 하였다.

“○, 자네 바보네. 바보야!”

“형님!”

그는 갑자기 내 팔에 늘어지면서 엉엉 울기 시작하였다.

“형님, 이런 분할 일은 내 평생 처음이외다. 이런 수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형님, 어이구 분해, 분해. 참 이런 분한 일이…….”

“나도 알겠네. 나도 알기에 내 침식까지 잊고 자네 일을 돌보아 주지 않나? 정신 차리고 내 말대로만 해보게. 자, 흥분하지 말고 가서 부인을 만나 보게. 자, 알겠나?”

“네.”

그는 목멘 조그만 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럼 잠깐 다녀오게. 그리고 가서 아까 말한 대로 하고 오늘 저녁 일곱 시에 식도원(食道園)으로 오게. 내 먼저 가서 기다릴께 꼭 잊지 말고 와서 경과를 다 내게 알게 해주게. 식도원 말이네. 그럼 가보게.”

나는 그를 내어보낸 뒤에 곧 전화실로 가서 전화로 ○의 아내를 불러내었다. 그리고 목소리를 앓아 죽어가는 A씨처럼 하여 가지고, ‘이제 ○가 가서 무슨 일을 묻더라도 모른다고만 하라’는 것과 ○는 아무 똑똑한 증거는 못 잡았다는 말과 지금 ○○(즉 나)가 이 병원 간호부를 매수한 모양이니, 결코 병원으로 전화를 걸거나 찾아오지를 말 일과 한 일주일 이내로 퇴원할 수 있단 말을 ○의 아내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나는 한번 씩 웃고, 휘파람을 불면서 그 집을 나섰다.

‘여봅시오. 이제 전개 될 ○○씨의 각색하고 감독하는 일장의 연극을 보아주십시오. 희극이 될까. 비극이 될까. 활극이 될까는 미리 말하고자 아니 합니다. ○와 그의 아내와 A씨 세 명광대가 출연하는 이 연극은 마지막 막이 열렸습니다.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아침으로는 이 일장의 큰 연극은 결말을 맺겠습니다. 결말이 상쾌하게 맺어지거든 박수갈채를 원합니다.’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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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시쯤 하여 나는 호떡을 찾아가서, 오늘 밤 일곱 시에 식도원에서 ○와 만날 약속을 하였지만, 나는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인천을 잠깐 다녀와야겠으니, 내 대리로 식도원에 가서 ○와 좀 있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 열 시 차에는 꼭(개백정 치고) 올께, 그때까지만 어떤 일이 있든 ○를 좀 식도원에 붙들어 두어 주게. 자네도 아는 바와 같이 지금은 ○를 잠시라도 내버려 둘 수가 없어.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네. 일곱 시부터 열시까지 세 시간 동안만 붙들어 둬 주게. 부탁일세.”

“범사(凡事)는 개재오지흉중야(皆在吾之胸中也)라. 술값은 자네가 내야 네.”

“무론. 아까 식도원에 부탁했어. 칠호실이네. 기생도…….”

“하하하하, 내대신(內大臣)이 무서운가? 그럼, 부탁하네.”

나는 호떡과 작별하였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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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시쯤 하여 나는 ○의 집 근처에 있는 잡화점을 찾아가서, 거기서 ○가 식도원으로 향하여가는 것을 본 뒤에 ○의 아내 혼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의 아내는 자기 방 교자에 한심한 듯이 걸터앉아 있었다. 나는 말없이 외투를 벗어 던지고 그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그는 뜻하지 않은 때에 나그네에게 놀랐는지, 잠깐 머리를 들었다가 대단히 예쁜 웃음을 한번 씩 웃고 인사를 한다. 아직껏 나는 그때 일을 생각할 때는, 그 웃음을 눈앞에 볼 수 있도록 그 웃음은 요염한 것이었었다. 나는 뜻하지 않고 눈을 한번 흘긴 뒤에 담배를 꺼내어 붙여 물었다.

한 분, 두 분, 오 분, 십 분, 나는 아무 말 없이 뚫어지도록 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과 머리는 차차 낭패하여 둘 곳이 없는 듯이 좌우로 왔다갔다 하게 되었다. 그의 숨소리는 차차 높아갔다. 즉 그는 다시 한번 머리를 돌이키면서 방긋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아래 고여 있는 어지러운 눈물을 나는 발견하였다. 나는 고즈너기 입을 열었다.

“A씨가 세상 떠났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건보다도 뜻하지 않은 나의 발언(영구의 침묵으로 알았더니)에, 그는 놀란 듯하였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말을 외었다.

“A씨가 세상 떠났습니다.”

“오해시지요. 한 주일쯤 뒤에는 퇴원…….”

그는 방긋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하하하, 아까 그 전화를 믿으십니까. 그 전화는 내가 건 것이에요. 놀랐습니까? 놀랄 만한 일이지요. ‘왜?’ 봉선 씨의 눈은 ‘왜 그런 전화를 걸었느냐’고 묻습니다그려. 대답하오리다. 아니, 거기 대해서는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봉선 씨와 A씨의 새의 일은 인젠 나는 전부 다 안다는 말씀뿐은 드려야겠습니다. 가만, 가만 계십쇼. 내 이야기가 다 끝난 뒤에 말씀하십쇼. 봉선 씨가 아무리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는 다 알았에요. A씨를 동래로 오라고 한 일이며, ○군이 동래와 온양온정에 가 있는 동안 봉선 씨가 밤낮을 할 것 없이 A씨의 집에 가 있던 일이며, 다 나는 압니다. 하니깐 아니, 그런데 내가 오늘 밤 ○군의 출타를 뒤를 타서 온 것은 봉선 씨의 변명을 듣자고 온 것이 아니고 ─ 무얼?”

나는 말을 뚝 그치고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증오의 표정이 불붙듯 피어올라 있었다. 나의 주먹은 뜻하지 않고 힘있게 쥐어졌다 ─ 그러나 나는 다시 주먹을 놓았다.

“내가 밉지요? 나도 또한 봉선 씨가 날 미워하느니 만큼 봉선 씨가 밉습니다. 그러나 이봅쇼. 봉선 씨. A씨는 인젠 세상 떠났습니다. 의심나거든 자, 지금 나가서 전화로 병원에 물어라도 보십시오. 탈이 완쾌될 여망이 어제는 있었는데 ─ 그 사람의 버릇이라 좀 낫는 것 같으니까 그곳 얼굴 빤빤한 간호부와 희롱을 하다가 그 때문에 아까 여섯 시쯤 세상 떠났습니다.”

나는 힐긋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불붙는 시기를 본 뒤에 말을 계속하였다.

“봉선 씨, 이보십쇼. 그러니깐 인제는 봉선 씨는 ○군에게까지 신용을 잃으면, 이 너른 세계에 외로운 홀몸이 되지 않겠습니까? 홀몸도 괜찮다고 속으로 생각하실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과 현실과는 온전히 달라요.

사고무친이란 말이 말로는 쉬울지 모르나, 나도 경험한 바이어니와 ─ 견디기 힘듭니다. 게다가 나 같은 사내와도 달리 젊은 여인의 홀몸이라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개밥에 도토리입니다. 시집? 가령 봉선 씨가 정당한 일로 ○군에게 버리웠으면 모르겠지만, 이런 향기롭지 못한 일로 버리운 뒤에 누가 그런 여편네를 아내로 데려갑니까? 자, 내 말을 명심해서 들으십시오. A씨가 세상을 떠난 것이 사실이며(하며 나는 힐긋 그를 쳐다보았다) 다시 말하자면, 하늘과 같이 믿고 땅과 같이 믿던 A씨까지 세상을 떠났으며 이제 봉선 씨가 취할 길이 두 가지 밖에는 없습니다. 한 가지는 A씨의 순사(殉死)를 하든,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돌이켜서 ○군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든……. A씨와 봉선 씨의 새의 일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깐 만약 이제 봉선 씨가 마음을 돌이키겠노라고만 할 것 같으면 손가락 한번 움직이기보다도 더 쉽게 ○군의 마음을 돌아서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대신 ─ 봉선 씨가 머리를 가로 저을 것 같으면, 나는 곧 ○ 군에게 온갖 증거를 다 제공해서 봉선 씨를 검사국에 고소하게 하겠습니다.

자,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 길을 어느 것이든 뽑으십쇼. 어느 것을 뽑으시겠습니까?”

그는 머리를 수그린 대로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다 타진 담배를 내어 던지고, 다시 한 꼬치 꺼내어 붙여 물으면서 그의 대답을 재촉하였다. 그는 역시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었다.

31

[편집]

천만 어를 다하여 몇 번을 말한 결과, 그는 마침내 머리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서는 커다란 눈물이 떨어졌다.

‘회오(悔悟)일까? 분한 눈물일까? 부끄러움일까?’

“봉선 씨, 알았습니다. 그러면 인제부터는 마음을 다시 먹고 ○군을 섬기시겠단 말씀이지요?”

그는 대답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나는 좀 뒤에 다시 말을 꺼내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결코 사념을 품지 않고 ○군뿐을 섬길 수 있다고 맹서도 할 수 있습니까?”

그는 또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면 ─ .”

나는 앞에 놓인 책상 귀사기를 만져 보았다. 그리고 책상 다리를 만져 보았다. 그 뒤에 내 바지를 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유서를 쓰십시오.”

“네?”

그는 튀어나듯 벌떡 교자에서 일어섰다.

“아니, 자살하시란 말씀이 아니외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갑자기 ○군의 마음을 돌이키려니 어떻게 돌이킵니까. 한 가지 길은 봉선 씨가 유서를 쓰시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유서 ─ 당신이 너무 의심을 하니 제 마음을 알리고자 죽습니다 ─ 고 유서를 한 장 써서 집에 둔 뒤에 어느 시골에 든지 한두 달 몸을 피해 있으면, 그동안에 내가 ○군의마음에 후회하는 생각이 나는 것을 보아 가지고 다시 봉선 씨를 서울 ○군께로 데려오지요.

그 뒤에는 소위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이요, 사방무일사(四方無一事)라는 격이 아닙니까? 이러니 저러니 할 것 없이 봉선 씨는 내 말만 꼭 들읍시오.

아아, ○군이 봉선 씨의 품행이 단정한 줄을 알고 보면 얼마나 기뻐할까.

자, 어서 쓰십시오. ○군이 돌아오기 전에 어서 ─ 나도 아우와 같이 사랑하던 ○군이 하루 바삐 기운이 돌게 되는 것이 기달키웁니다. 자 ─ .”

그는 먹먹히 앉아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서서 편지 종이와 잉크, 펜들을 그의 앞에 갖다 놓았다.

“자 붓 잡으시오. 부릅니다. 사랑하는 그 지아버님께……. 왜 붓 안 잡으십니까?”

그는 붓을 잡았다.

─ 당신이 너무 의심하시니, 이 제 마음을 보이기 위하여 젊은 목숨을 끊노라고, 그는 내가 부르는 대로 이쁜 필적으로 써 놓았다.

“봉투에.”

나는 작은 소리로 말한 뒤에 돌아서서, ○의 가운의 허리띠를 몰래 뽑아 가지고 그의 뒤에 서서 어깨 너머로 그를 보았다. 그는 편지를 맵시나게 접어서 봉투 속에 넣은 뒤에 겉봉에 ○의 이름을 썼다.

그러나 봉투의 ‘氏[씨]’ 자가 끝이 나자마자, 나의 손에 쥐고 있던 가운의 허리띠는 힘있게 그의 목에 얽히었다.

한 이십 분쯤 뒤, 나는 ○의 아내의 하 ─ 얗게 식은 몸을 내려다보면서, 방안을 좀 정리한 뒤에 ○를 만나러 식도원으로 향하였다.

미완(未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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