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시집/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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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仲父) 육사 선생이 북경 옥리에서 원서(寃逝)하신 지 이미 십년에나 또 새 해를 더한다. 종자(從子) 비록 유치한 때이나 다시금 세월의 덧없음을 한하면서 자욱마다 피 고인 신산한 공의 일생을 회고해 본다.

1926년 공이 두 번째 북경에서 대구에 도착하셨을 때 조선은행 폭탄사건이 돌발되었으므로 인하여 공의 과거 자취에 비추어 삼안(三雁)이 함께 체포된 바 왜놈들의 모진 채찍 아래 삼개 성상(星霜) 긴 세월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자 않았던가. 이때 대구형무소에 복역 중 감방 번호가 64번이었다. 그리하여 조석으로 놈들이 ‘육사’하고 부르는 인칭대명사를 스스로 ‘육사(陸史)’로 고쳐 아호(雅號)로 쓰시게 하고 여기에다 자위(自慰)하여 족하게 생각하신가 여겨진다.

이러한 실경(實經)에서 일제 폭악은 공으로 하여금 날로 조국과 민족에 대하여 애정을 불타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학청년이 아니었던 곳이 삼십 고개를 넘어서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해서 그처럼도 시를 좋아했던 것은 아마 공의 혁명적 정열과 의식이 그대로 타다 못해 터지는 폭백(暴白)을 시에다 빙자하여 풀어보려고 한 것이며, 또 매양 다하지 못한 꿈을 이루어 본 것이리라. 그러매 공의 천품이 초강(楚剛)한데도 또 관인온후(寬仁溫厚)한 성격의 소유자로 일제에게는 요시인(要視人)으로 감시를 받는 몸이 되었다.

진정 공의 생활이 「절정」에서 말하는 바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바로 그것이 모두다 생각하면 빈궁과 투옥과 풍찬노숙(風餐露宿)하는 나그네의 사십 평생에 짧고 긴 계절을 27회나 감방으로 드나드는 생활이 어찌 하루의 영일(寧日)이 있었으랴! 어쩌면 공은 시인으로 족하게 생각할 것이오나 바꾸어진 생명이 오히려 시인으로 본령을 삼았던들 스물 여 편의 시작으로야 만족할 수 있었으랴. 송의 또다른 수적(手蹟)을 찾아볼 수 없음도 간과할 수 없는 파탄된 생활의 소치임에 틀림이 없다.

돌이켜보면 8.15 이후 불비(不備)한 데로라도 공의 유고를 모아 간행된 시집이 6.25의 수난을 겪고 난 오늘날 일터에나 집안에서 더욱 공이 아쉽고 요구된다. 그리하여 공의 구교(舊交)와 향토문화인들의 정성으로 구고(舊稿)에다 「편복(蝙蝠)」과 「산사기((山寺記)」 2편을 더하여 간행케 된 것은 공의 체취의 향기를 가까이 하자는데 의의를 가지고 이에 임(臨)하여 서문에 청마, 그리고 범조사 김대현(金大顯) 씨, 향토 제씨에게 못내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눈물이 가려 하나를 건지고 백을 빠뜨린다.

육사선생(陸史先生) 역책후(易簀後) 13년 병신 일월 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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