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문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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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편집]

슬프다! 우리 한국의 수백 년 이래에 외국을 대한 역사를 볼진대 동방에서 한 작은 무리의 도적만 들어와도 전국이 창황(蒼黃)히 망조(罔措)하며, 서편에서 한마디 꾸지람만 와도 온 조정이 당황 질색하다가 그럭저럭 구차로이 지내어 부끄러움과 욕이 날로 더하여도 조금도 괴이히 여길 줄을 알지 못하니, 우리 민족은 천생이 용렬하고 약하여 능히 변화치 못할까?

무애생이 가로되,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내 일찍이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의 사적을 읽다가, 기운이 스스로 나고 담(膽)이 스스로 커짐을 깨닫지 못하여, 이에 하늘을 우러러 한 번 불러 가로되, 그러한가 참 그러한가? 우리 민족의 성질에 이 같은 자가 있었는가? 이 같은 웅위한 인물의 위대한 공업(功業)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할 데가 없으니, 우리 민족의 성질이 강하고 용맹함이 과연 이러하던가 하였노라. 전에는 이 같이 강하더니 이제는 이같이 약하며, 전에는 어찌 그리 용맹스럽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둔한고?

슬프다! 용의 씨가 미꾸라지 되고, 범의 종자가 개로 변하여 신성한 인종이 지옥으로 떨어지니, 이것이 과연 어떤 마귀의 희롱한 바이며, 무슨 겁운(劫運)으로 지어낸 바인가?

슬프다! 아깝도다, 자세히 궁구하면 그 근인을 가히 알기 어렵지 아니하니, 몇백 년 이래로 오활한 선비의 손으로는 붓을 들면 망령되어 써 가로되, “무공(武功)이 문치(文治)만 같지 못하다”하며, 몇십 대의 용렬한 대신의 입으로는 말을 내면 어리석게 지껄여 가로되, “어진 자는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긴다”하여, 정책은 위미하고 퇴축함으로써 주장을 삼고, 백성의 기운을 꺾고 압제함으로써 일을 삼으며, 지난 일은 굳센 뜻을 굴하지 아니한 것을 숨기고, 옛사람은 썩은 선비와 오괴한 자를 존숭(尊崇)하여 다만 가히 부끄럽고 우스운 일과 지리하고 관계없는 말로 우리 한국의 4천 년 신성한 역사를 더럽히며, 웅위한 영웅을 매몰케 한 연고이로다. 그런고로 혹 용같이 다투고 범같이 싸우던 인물이라도 농부, 시골 늙은이의 옛이야기로 겨우 한두 가지 사적을 전할 뿐이며, 혹 신명이 놀라고 귀신이 곡할만한 업적이라도 초동 목수의 노래로 두어 마디를 전파할 뿐이오. 지어 전래하는 사적은 몇 글자를 얻어 볼 수가 없으니 그런즉 그 외에도 성명까지 매몰하여 전치 못한 대영웅이 또 몇몇인지 어찌 알리요?

이 몇 줄 역사가 오히려 유전하였으니 다행하도다. 을지문덕이여! 또한 다만 이 몇 줄 되는 역사만 유전하였으니 불행하도다. 을지문덕이여! 무릇 역사의 전하고 전치 아니함이 그 사람에게야 무슨 손익이 있으리요마는, 다만 한 나라 강토는 그 나라 영웅이 몸을 바쳐서 위엄이 있게 한 것이며, 한 나라의 민족은 그 나라 영웅이 피를 흘려서 보호한 것이라 정신은 산악같이 특립(特立)하였으며 은택은 강해같이 넓었거늘, 그 나라 영웅을 그 나라 사람이 알지 못하면 그 나라가 어찌 나라가 되리요? 그런고로 사마천의 사필(史筆)로 영웅의 참 면목을 그려내며, 두보의 시부(詩賦)로 영웅의 큰 공덕을 찬송하고, 향을 사르고 제사를 올려서 영웅의 하강함을 기도하며, 옥으로 집을 짓고 금으로 섬돌을 놓아 영웅의 내림함을 기다려서 영웅이 없으면 마음속으로 영웅, 영웅하며, 영웅이 있거든 입으로 영웅, 영웅하여야 영웅이 날 것이거늘 이에 우리 나라는 영웅을 존숭하는 심성이 어찌 그리 박절한지 고금에 짝이 없는 진정 영웅은 용렬한 사필 끝에 초초히 매몰하고, 그 혹 영웅이라 칭도한 자는 사슴을 가르쳐 말이라 함과 다름이 없으니 형제간에 불목하는 악습으로 동족이 서로 잔해하는 자도 영웅이라 칭하였으며, 어진 자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긴다는 주의로 외국 구적에게 아첨하는 자도 영웅이라 칭하였으며, 심지어 적국의 창귀가 되어 본국을 도리어 해하는 자도 영웅이라 칭하여 인간의 입에 오르내리고, 서적에 자취를 남긴 사람이 많으니, 내 이러므로 영웅이라 하는 두 글자를 위하여 한 번 통곡할만하도다.

원나라 장수 범문호(范文虎)가 일본을 침노할 때에 풍랑에 배를 엎지르고 육지에 내린 자가 3만 명에 지나지 못하였으니, 일본의 승첩한 것이 또한 족히 기이할 것이 없거늘, 저희는 수백 년이 지나도록 역사에 칭송하며 소설로 전파하여 노래하고 읊어서 대대로 잊지 않게 하거늘 우리 나라는 한 손으로 독립 산하를 정돈하고 한칼로 백만 강적을 살퇴(殺退)한 참 영웅의 자취를 이렇듯 말살하니, 이것이 두 나라의 후세 강약이 현저하게 다른 원인이 아니리요, 이제 이것을 개탄하여 지나간 영웅을 기록하여 장래의 영웅을 부르노라.

제1장 을지문덕 이전에 한국과 중국의 관계[편집]

우리 성조(聖祖) 단군이 중국 당요씨로 한때에 나신 이후로 한국과 중국의 두 나라 민족이 요동 땅 동녘과 서녘에 있어서 우리가 강하면 저희가 침노함을 받으며, 저희가 강하면 우리가 핍박함을 입어서, 두 나라가 항상 서로 침노함을 말지 아니 하였으니 고려 이전 역사를 보면 그 땅에 연나라 변방 요동 등지에는 문득 비린 피와 누른 티끌로 천여 년을 지내었으니, 그 경쟁의 혹열(酷烈)함을 가히 헤아려 알지로다.

그러나 저희는 춘추전국 때로부터 대륙의 형세가 점점 통일하여 가고, 우리 한국은 마한(馬韓)의 말년과 삼국이 일어나던 처음까지 오히려 통일이 되지 못하여 무수한 작은 나라들이 땅을 찢어 점령하여 피차에 자웅을 다투며, 서로 간과를 쉴 날이 없었으니 무슨 겨를에 외국과 다툴 힘을 저축하였으리요? 그런 고로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가 그 위엄을 날려서 몽념의 군사가 만리장성 밖에까지 멀리 행하였으며 양복(楊僕)의 전선이 위만(衛滿)의 도성을 함락하기에 이르렀더니, 삼국 중년에 이르러 모든 작은 나라들이 점점 서로 합병이 되어 통일할 기틀이 가까우매 가락, 가야, 부여, 옥저, 예맥 등이 모두 삼국의 통합한 바가 되고, 그 외에 삼한(三韓)이 나누어 점령하였던 수백의 작은 나라들이 또한 다 삼국의 군현(郡縣)이 된 지라. 이에 우리 민족의 실력이 원만하게 팽창하는 지경에 달하매, 신라의 군사는 멀리 바다 밖에 힘을 펴서 일본을 3번이나 정벌하였으며, 백제는 말갈(靺鞨)을 여러 번 쳐서 지경을 개척하고, 고구려는 사군을 회복하여 전일 수치를 갚으며, 요동 땅을 취하여 판도를 확장하였는데, 각각 지방이 천 리에 지나지 못하고 인구가 백만을 넘지 못하되, 바다와 육지로 대항하는 강적을 싸워서 이기기를 많이 하고 패하기를 적게 하였더라.

비록 그러나 신라의 대적은 일본이요, 백제의 대적은 말갈이라. 저희는 다 지경이 멀고, 또한 작은 나라들인 고로 그 서로 침노한 경황을 볼진대, 다급히 부는 바람과 급히 오는 비와 같이 잠깐 왔다가 잠깐 돌아갈 따름이오. 굉장하여 가히 놀랄만한 큰 전쟁은 없어서 《사기》를 짓는 사람의 붓을 놀릴 만한 곳이 없거니와 고구려의 대적은 강대하고 토지가 연접한 중국이라. 아침에 꾸짖는 말이 나면 저녁에 군사가 지경을 범하여 가끔 뜻밖에 화가 별안간에 이르는 고로, 정사(政事)를 잡은 자는 정신을 허비하며 군사를 거느린 자는 피를 뿌려서 나라를 강하게 하고, 도적을 방어하는 일에 매양 분주하였으니, 대개 시조 동명왕(東明王) 때로부터 영양왕(嬰酪王)때까지 그 동안에 우리 군사가 중국을 침노한 것이 수십여 차례요, 중국의 군사가 우리 지경을 침범한 것이 또한 십수 차례더라.

영양왕의 즉위하던 때는 곧 단군 기원후 2720년(387년)이라. 이때에 이르러 한국과 중국 두 나라 민족의 감정이 더욱 심하여 피차 함께 서지 못할 형세가 되었으니, 을지문덕은 이 시대에 났더라.

제2장 을지문덕 시대에 고구려와 수(隋)나라의 형세[편집]

(1)은 수나라의 강성함이요, (2)는 고구려의 태도이요, (3)은 을지문덕의 조우(遭遇)라

황천(皇天)이 우리 민족의 능력을 시험코자 하심인지 적국의 세력을 편벽되게 이 나라에 더하여, 중국의 강남 진나라와 강북 주나라가 수나라의 통일한 바가 되니, 토지의 광대함과 군사의 많음이 중국 역대 중에 제일이요, 또 백성이 풍족하고 국고가 충만하였는지라. 자래 강한하기로 유명하던 흉노(匈奴)와 돌궐(突厥)도 들어가 조회하며, 소식도 상통하던 남만과 서역이 연속하여 들어와 조공하니 당시 수나라 황제의 기세를 가히 알리로다.

이때를 당하여 마침내 강경한 태도를 잡아 독립을 유지하고 중국과 더불어 대적한 자는 오직 고구려 한 나라이라. 몇 백 년을 형제의 예로 대항하였으며, 자웅의 형세를 다투다가 어찌 저의 강대함을 보고 즐겨 굴복하리요?

영양왕이 즉위하던 원년에 수나라가 강남 진씨(陳氏)를 멸하고, 곧 국서(國書)를 보내어 거만한 말로 위협하여 가로되,

“요수(遼水)의 넓기가 장강(長江)과 어떠하며, 고구려의 인구 많음이 진나라와 어떠하뇨? 짐이 만일 귀국의 죄를 책망할진대 한 장수를 명하여 보낼 따름이오. 여러 말을 기다릴 것이 없다.” 하였으니 그 교만하여 무례함이 이 같을지라. 고구려의 군신(君臣)이 부끄러움을 알고 화를 경계하여 곡식을 저축하며 군사를 연습하여 전쟁 준비를 하였더라.

그러나 당시에 인군(임금)을 만나서, 도를 행하여 내정을 베풀며 백성을 가르치며 군사를 교련하여 밖에서 엿보는 것을 막으며, 사면으로 대적을 받는 요충지대에 있어서 나라의 영광을 나타나게 한 자가 그 누구뇨?

전래하는 글에 가로되, “을지문덕은 고구려 대신(大臣)이라”하였으니, 대신이라 함은 그때에 대대로(총리대신)를 이름인지, 막리지(군부대신)를 이름인지, 그렇지 아니면 좌보(左輔) 우보(右輔)(국무대신)를 이름인지, 이 몇 가지에 지나지 아니하리니, 대저 고구려의 전국 힘이 온전히 을지문덕에게 있었음을 의심할 것이 없으며, 또 살수싸움은 한 나라의 흥망이 달렸거늘, 을지문덕이 싸우고자 하면 전국이 다 싸우고, 을지문덕이 물러가고자 하면 전국이 다 물러가며, 을지문덕이 거짓 항복하고자 하면 전국이 다 그 거짓 항복하고자 함인 줄을 의심치 아니하였으니, 대저 인군의 믿음이 전일함과 백성의 의뢰함을 깊이 함이 이러한 즉 그 밖에서는 , 대장이 되고 안에서는 정승이 되어, 안으로 정사를 닦고 밖으로 적국을 방어하는 계책을 강구하여, 한 나라의 편안하고 위태함이 그 한 몸에 매여 있었음을 의심할 것이 없거늘, 후세 사람이 그 몇 구절 못되는 《사기》만 믿고 을지문덕은 살수에서 한 번 싸움에 와서 한마디 복음을 전하고 바람과 번개같이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간 상제의 천사와 같이 그 전에도 을지문덕이 없고, 그 후에도 을지문덕이 없는 것 같이 아나, 그러나 《사기》를 상고하고 그때의 사상을 궁구하면, 단군 2731년(398년)에 영양왕이 싸우던 이후와 살수싸움 이전 일은 모두 을지문덕의 일에 속한 것이 의심이 없도다.

오호라! 한 나라가 3분하였으며, 밖의 대적은 정히 강성한 때에, 풍운조화를 운전하고 때의 기틀을 이용하여, 강대한 대적을 어린아이같이 조정하였으니, 천 년 후에 그 위인을 생각하면 베개를 밀치고 뛰어 일어남을 깨닫지 못하리로다.

제3장 을지문덕 시대에 열국(列國)의 형세[편집]

가히, 아깝도다! 그때에 열국의 행동이여. 북제(北齊)가 수에게 망하고 진씨(陳氏)가 수에게 멸망한 이후로 수나라는 가장 크고 가장 강하였으며 열국은 다 작고 다 약하였으니, 허다한 약하고 작은 자의 힘을 합하여 저를 항거할지라도 오히려 이기지 못할까 두렵거든, 하물며 합하기만 어려울 뿐 아니라 모두 스스로 낮게 하고 스스로 굴복하며 서로 침노하고 서로 경알서로 다투며 삐걱거렸다하여 수나라의 부용국남의 나라에 딸리어, 그 보호와 지배를 받고있는 나라 되기를 달게 여겼도다.

신라와 백제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찰 근심을 생각지 아니하고, 고구려를 침벌(侵伐)하라는 사신이 연속하여 수나라에 왕래하며 고구려의 동정을 정탐하는 간첩이 사방에 늘어섰으니

2731년(398년)에 백제가 수나라의 요동 침노함을 듣고, 장사(長史) 왕변나(王辨那)를 보내어 향도관 되기를 청하였으며,

2740년(407년)에 백제가 좌평(佐平) 왕효린(王孝隣)을 수나라에 보내어 고구려 치기를 청하고, 또 그 동정을 정탐하여 수나라에 보고하였으며, 2741년(408년)에 신라가 승 원광(圓光)을 수나라에 보내어 고구려 침벌하기를 간걸하였으며 2744년(411년)에 백제와 신라가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동하는 기약을 청하였더라.

슬프다! 형제가 집안에서 다투는 혐의로 밖의 도적을 청하여 보복하는 것은 진실로 애석한 일이며, 또 돌궐은 본래 강한(强悍)한 민족이로되, 수나라의 절제를 받아 복수함을 부끄러워 아니하고 심지어 고구려에서 온 사신을 잡아 가지고 수나라 인군께 아첨하였으니

2740년(407년)에 고구려가 돌궐, 가한(可汗), 계민(啓民)에게 사신을 보내었더니, 마침 그때에 수양제 양광(楊廣)이 그 장막 가운데 있는지라. 계민이 감히 숨기지 못하고 잡아다가 수양제께 뵈었더라.

슬프다! 수나라를 두려워하여 이웃나라의 사신을 잡으니 또한 그 무례함이 심하도다, 심하도다. 그런즉 그때에 천하대세로 보아도 수나라만 그렇게 강성할 뿐 아니라 곧 그 이웃에 가까이 있는 각국들이 모두 수나라를 도와서 고구려를 해롭게 하는 자들이거늘 우리의 절대영웅 을지문덕이 그 사이에 특별히 독립하여 국가 위엄을 떨어뜨리지 아니하니, 오호라! 구라파 세계에서는 나폴레옹이 있으매, 온 구라파가 꿈쩍을 못하는데 홀로 대적하고 항거하던 자는 영국 한 나라뿐이오. 동양 천지에서는 수양제가 있으매, 온 동양이 벌벌 떠는데 홀로 대적하여 제어하던 자는 오직 고구려 한 나라뿐이라. 2천 년 전 고구려는 곧 18세기의 영국과 다름이 없으니, 저 고구려는 4천 년 동국 역사상에 제일 유명한 기념할만한 나라이며, 저 을지문덕은 억만세 동양 사람의 제일 본받을 만한 표준이 되리로다.

제4장 을지문덕의 굳센 정신[편집]

나라의 크기가 저보다 10배나 미치지 못하며, 인민의 많음이 저보다 100배나 미치지 못하는 고구려로서 저를 대적코자 하니 그 기운은 비록 장하다 할지나 그 일은 심히 위태하니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들려 한다”하는 국외 방관자의 평론을 면치 못할 것이거늘, 을지공은 홀로 그 평론을 못 들은 체하고, 능히 항거하니 이는 무엇을 믿어 그러하였느뇨? 가로되, 다만 독립정신 한 가지니라.

혹이 이르되, 고구려가 그때에 전쟁을 아니하고 평화를 주장코자 하면, 또한 그 도리가 있었겠느뇨? 가로되, 땅을 버리고 고을을 바쳐 그 욕심을 채우는 것이 그 첫째 계책이요, 말씀을 나직히 하고 폐백을 후하게 하여 전일 죄를 사과하는 것이 그 둘째 계책이니라.

그 첫째 계책은 나라를 파는 적신(賊臣)들이 자기의 부귀만 탐하고 일시에 구차로이 지내는 것을 편히 여기는 자의 하는 바이니, 을지공 같은 영웅에게 말할 바가 아니요, 그 둘째 계책은 군사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며, 백성 하나도 수고롭게 아니하고 일개 사신만 보내어 무릎을 꿇고 간곡한 정성을 표하면, 저 수나라 군신들의 욕심이 이에서 지나지 못하니 필연코 흔연히 기뻐하여, 전일 혐의를 아주 잊어버리고 약조를 다시 정하여 두 나라 사이에 전쟁하는 일은 전혀 없어질 것이거늘, 저 을지문덕은 이 일을 아니하였으니, 이는 난을 좋아하고 화를 즐겨하는 망령된 사람이라 칭할 만하지 아니한가?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다. 천리 밖에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옛사람의 조롱하던 바이요, 싸우지 아니하고 스스로 굴복하는 것은 지사의 부끄러워하는 바이라. 만일 한때에 고식지계를 달게 여겨 비루한 정책을 쓰면 무식한 사람은 반드시 가로되, “외면으로 작은 치욕을 당하는 것이 실제상 권리에야 무슨 손익이 있으리요?”할 터이나, 이것은 국가의 명예를 떨어뜨리며 국민의 하늘이 주신 천리를 능멸함이니, 그러하고 보면 비루하고 용렬한생각이 마음에 박혀 있어서 만겁을 지내어도 회복할 길로 인도할 가망이 없을 뿐이니라.

말씀에 이르되, “그 아비가 단 술로 만년(晩年)에 자양하면, 그 아들은 술을 취하고 행패함으로 일을 삼으며, 그 아비가 바둑을 두어 긴 날을 소견(消遣)하면 그 아들은 잡기로 가산을 탕패한다”하니, 이는 배울만한 격언이로다. 내가 오늘날 한 흉악한 사람을 만나매, 마음으로는 분명히 그 도적인 줄을 알지라도 일시 화를 면하기 위하여 부끄럽고 욕됨을 불계하고, 입으로만 아비라 할아비라 억지로 부르고, 그 앞에 한 번 무릎 꿇으면 나의 자손은 또한 아비와 할아비로 대접하여 처음에는 부득이하여 억지로 부르던 아비와 할아비가 되리니 소가죽을 오래 쓰면 필경에 본래 면목을 아주 잊어버리며, 남의 노예 노릇을 오래하면 필경 그 사람에게 매를 맞아도 달게 여겨서, 비록 불공대천의 원수라도 그 힘만 강하면 아비라 할아비라 하는지라.

고려 중년에 원나라로 더불어 맹세를 정할 때에 어찌 그 마음에 기뻐하고 성심으로 복종하여 그 맹세를 정하였으리요? 다만 끓어 올라오는 피를 참으며 솟아나오는 눈물을 가리우고 정한 맹세이며, 웃는 가운데 은근히 칼을 품고 정한 화친이건마는 10년, 20년을 지내고 보니 피와 눈물이 스스로 거두어지며, 품은 칼이 스스로 풀리어 전국 신민이 원국을 조상으로 아는 지경에 함께 빠지느니, 그러므로 오늘 홀필렬(忽必烈)에게 굽실거리던 습관으로 내일에 주원장(朱元璋)에게 굽실거렸으며, 또 내일에 누르하치(奴爾哈齊)에게 굽실거려, 늙은 기생이 정든 낭군을 열력(閱歷)함과 같이 이 사람이 가면 저 사람을 맞아들이고, 저 사람이 가면 이 사람을 영접하여, 습관이 성정에 젖어서 부끄러움을 부끄러운 줄 알지 못하니, 어찌 애석치 않으리요?

구라파주에 있는 네덜란드는 한 작은 나라이라. 그 나라 백성이 30년을 전쟁하는 동안에 간뇌(肝腦)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지경을 당하여, 차라리 바닷물을 도성으로 대어 조상의 분묘와 있는바 재산을 용궁에 쓸어 넣고, 독립의 이름을 몇 척 못 되는 구구한 함대 위에서 보전할지언정 적국에는 머리를 숙이고 항복하기는 즐겨하지 아니한 것이 이를 먼저 안 것이 아니뇨?

그런고로 나의 권리가 떨어지기 전에는 칼과 피로써 그 권리를 보호할 따름이요, 나의 권리가 이미 떨어지거든 칼과 피로써 그 권리를 찾아 올 따름이며, 또 설혹 형극 속에 비참한 일을 당하여 회계에 부끄러움을 잠시도 참지 못할 경우를 당하면 마땅히 날마다 섶에서 자고 때때로 쓸개를 맛보아 칼과 피로 전국 인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인가 하거늘, 저 비루하고 용렬한 자들은 매양 이르되, 조용하고 서서히 하여 항복을 구하며 온유하고 굴복하여 기회를 기다리라 하느니, 이는 나의 날카로운 기대를 스스로 멸하고 양심을 스스로 속임이니 천하의 생령을 해롭게 할 것은 이 말에서 지나는 것이 있으리요? 슬프다! 어찌하면 을지문덕 같은 사람이 다시 나서 이런 무리들을 쓸어버릴꼬? 당시에 수나라의 멸시함이 날로 이르고, 수나라에 붙쫓는 모든 나라들의 유인함이 또한 날로 이르는데 굴하지도 아니하며 흔들리지도 아니하고 더욱 힘을 가다듬어 필경에 큰 전쟁을 일으킨 것은 그 뜻이 깨달은 바가 있지 않느뇨?

제5장 을지문덕의 웅도 대략[편집]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대적하며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항거할 제, 그 일하고 획책하는 것은 그 지경을 지키는 데만 전력을 하여도 오히려 넉넉하지 못할 염려가 있을 것이거늘, 저 을지문덕의 행한 일을 볼진대, 그 웅장한 목구멍은 중국의 구주(九州)를 한 번에 삼킬 듯하며, 그 활발한 걸음은 만리장성을 뛰어 넘을 듯하여, 만일 어떤 사람이 문을 닫고 지경이나 지키는 것이 양책이라 하는 자가 있으면, 곧 그 얼굴에 침을 뱉을 기개가 있는지라. 금년에 몇 천 군사를 거느리고 아무 땅에 들어가 웅거하며, 명년에 몇 만 군사를 거느리고 아무 성을 빼앗으며, 또 명년에 몇 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아무 나라를 엄습하여, 땅 위에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다 나의 우로(雨露)에 젖으며, 공중에 있는 한 벌레와 한 새라도 다 나의 호령을 두려워하게 하여, 세계 열국이 모두 고구려의 정삭을 봉행케 할 뜻이 있으니, 당시 고구려 《사기》가 후세에 전하지 아니하였음으로 을지문덕의 운용하던 정략을 상고할 곳이 없으나, 다만 수나라 《사기》를 상고하여 볼진대, 2734년경 고구려의 동을 침노하고 서를 노략하던 일을 오히려 가히 알겠도다. 그런고로 수양제가 와서 침노할 때에 국중에 고시한 글이 순전히 고구려의 자주 침노함을 견디지 못한 모양이 현저하도다. 그 고시에 가로되, “고구려가 연해변에 지킨 군사를 멸하였다”하고, 또 가로되, “고구려가 강토를 점점 먹어 들어온다”하였으니, 이로써 볼진대 을지문덕의 살수싸움은 다만 을지문덕의 전쟁하던 역사의 한 작은 부분에 지나지 못한 것임을 가히 알리로다.

슬프다! 이것이 이른바 덕과 힘을 헤아리지 못한다 함이 아니며, 이것이 이른바 작은 자의 강한 것이 큰 자에게 사로잡힌다 함이 아닌가? 조선 한 지경만 가져도 또한 족히 스스로 즐기고 놀 만하거늘 무슨 연고로 이웃나라의 원망을 짓고 군사의 화를 맺어서 상하 인민이 편히 쉬지 못하게 하였느뇨?

하늘이 우리로 하여금 가운데 처하여 옮김이 없음을 허락하지 아니하여, 나아가지 못하면 반드시 물러가고, 물러가지 못하면 반드시 나아가게 하신지라. 그런고로 옛 노래에 가로되,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오늘날에 아니 가면 다시 갈 날 전혀 없다”함이, 곧 우리의 경쟁하는 세계에 넉넉한 자는 이기고, 부족한 자는 패하는 공변된 이치를 밝혀 가르친 말이라 할 만하도다. 삼국의 산천이 곧 오늘날 산천이며, 풍물도 곧 오늘날 풍물이며, 인종도 곧 오늘날 우리 무리의 조상이거늘, 어찌하여 후세에는 밖으로 경쟁하는 힘이 이 같이 부족한고? 이것은 구하는데 있으니, 나아가고 물러감을 구하는데 효력이 다른 까닭이니, 강함이 불가하다하여 스스로 약함을 구하며, 큰 것이 불가하다 하여 스스로 작은 것을 구함으로 다른 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대국이라, 강국이라 하고 자기 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소국이라, 약국이라 하여 말씀을 나직히 하고 폐백을 두터이 하여, 이것으로 나라를 보전하는 방책을 삼으며, 경서를 읽고 시를 읊는 것으로써 무비(武備)를 대신하여 동으로는 대마도를 빼앗기고, 서로는 압록강 서편을 모두 잃어서 일개 작은 나라가 되어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니, 어찌 날마다 쇠약함을 면하리요?

이러므로 을지문덕의 주의는, 적국의 크고 강하며 사납고 용맹함을 따지지 않고, 반드시 앞으로 나아가되 한 걸음 물러가면 등에 땀이 젖으며, 한 터럭이라도 사양하면 창자에 피가 끓어서 이로써 자기를 경계하며, 이로써 동료를 권하고, 이로써 전국 인민을 고동(鼓動)하여 죽고 사는 것을 반드시 조선으로서 하며, 먹고 쉬이는 것을 반드시 조선으로서 하게 한 까닭에 필경 여진(女眞)부락이 다 나의 식민지가 되고, 강대한 중국 황제가 거의 나의 손에 사로잡힐 뻔하였으니, 오호라! 토지의 광대함으로 그 나라가 큰 것도 아니요, 인민이 많음으로 그 나라가 강한 것도 아니라. 오직 스스로 크게 하고 스스로 강하게 하는 자라야 그 나라가 크고 강하나니 을지문덕의 주의는 진실로 흠앙할 만하도다.

을지문덕주의는 무슨 주의인가? 이는 곧 제국주의이라.

제6장 을지문덕의 외교[편집]

이제 가로되, “을지문덕이 싸움하는 전략에는 신통한 영웅이라”하면 다 가로되, “그렇다”할지며, 또 가로되, “을지문덕은 내정을 잘 다스리는 현명한 신하라”하면, 또한 혹 가로되, “그렇다”할 터이나 다만 그 외교의 민활하고 심원한 것은 아는 자 없도다. 대저 이때를 당하여 고구려를 위하여 계교할진대, 다만 싸움하는 도량만 가지고 나라의 영광을 나타나게 하겠느뇨? 가로되, 넉넉지 못하다. 내정만 잘하면 나라 기초가 공고하겠느뇨? 가로되, 이도 넉넉지 못하다. 고구려의 지형을 볼진대 동남으로는 신라, 백제가 있고, 서로 수나라가 있으며, 북으로 거란, 말갈, 돌궐, 선비의 나라들이 있어서, 무슨 높은 산과 큰 물의 막힘도 없고, 그 지경이 서로 연접하여, 사면으로 대적을 받는 자리에 처하였고, 또한 이때에는 수나라의 기세를 볼진대, 열국들이 습복치 아니하는 자가 없어, “좌”하라 하면 “좌”하고, “우”하라 하면 “우”하는 이 시대라.

그런즉 신라도 수나라이요, 백제도 수나라이요, 거란, 말갈, 돌궐도 또한 다 수나라이라. 수나라를 위해 일을 하고, 수나라에 종노릇하는 자가 사방에 나열하여 수의 천자의 명령만 기다리니, 만일 을지문덕이 어림없이 수나라와 싸움을 시작하면, 아침에 신라의 군사가 오고, 저녁에 백제의 군사가 오며, 오늘은 거란, 말갈의 군사가 오고, 내일에 돌궐, 선비의 군사가 와서, 이 군사가 가면 저 군사가 오고, 저 군사가 가면 이 군사가 와서, 동서남북 사면으로 응접할 여가가 없을 터이니 군사는 대적을 응하기에 피폐하고, 백성은 업을 편안히 못할지며, 정치가가 조정에 가득할지라도 와해된 민심을 안돈하기 어렵고, 서로 침노하는 적병을 막아내기 쉽지 못할 것이거늘, 오호라! 기이하다, 을지문덕의 외교수단이여. 한 번 손뼉을 치고 칭찬할 만하도다. 필경은 말갈과 거란도 나에게 쓰임이 되었으며, 함께 치기를 날마다 청하던 백제도 관망만 할 따름이오. 돌궐이 수나라를 두려워하여 고구려의 사신을 잡아 보내기까지 하였으나, 수나라 군사를 도와 함께 치지는 아니하였으니, 저간에 사신을 부려 교제한 비밀한 계교는 역사상에 전한 바가 없으나 한 모퉁이에 있어서 참담한 수완으로 적국 당(黨)을 와해케 함을 상상하면 가히 알지니 오호라! 영웅이로다.

제7장 을지문덕의 무비(武備)[편집]

이때 중국에 제(諸)나라도 이미 멸하였으며, 진(陳)나라도 이미 망하였고, 돌궐과 선비가 이미 항복하였으매, 사면 돌아보아도 수나라의 뜻을 감히 거역할 자가 없은즉, 이때를 당하여 역대 제왕들이 큰 난리를 평정하고 천하가 무사하면 백성의 기운을 압제하고 관리의 싹을 끊기 위하여 궁중에 숙위병 몇 만 명만 두고, 모든 장수의 병권(兵權)을 일시에 거두며, 각 지방에 쇠를 모와 금 사람 열둘을 만들어 다시 병기가 천하에 절종이 되게 하는 풍습을 본받을 때가 아닌가. 그러나 저 수양제는 이를 아니하고 도리어 군사를 더욱 힘써 권장하니, 그 뜻이 고구려에 있지 아니하면 어디 있으리요?

슬프다! 고구려가 눈이 밝고 수족이 빠르지 못하여 ‘저는 저요, 나는 나다’하는 어리석은 소견만 지키고, 태평가를 부르고 있었으면, 강남 진씨(陳氏)의 후정화의 전철을 밟기는 의심 없는 일이거늘, 다행히 저 눈이 밟고 지혜가 민첩한 을지문덕이 있어서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로 일층 더 경계하여 무비(武備)의 정책을 급급히 한 고로, 군사 백만이 있었으며(수나라 《사기》에 가로되, 고구려의 군사가 백만이라 하였더라), 인민을 무휼(撫恤)하여 화평케 한 고로 부세(賦稅)를 중히 거두어 군사를 공급하여도 원망이 없었으며(수양제가 가로되, 고구려의 부세를 받는 것이 많고 무겁다 하였더라), 장수와 관리는 인재를 택용한 고로, 후일에 대적이 지경에 임하여도 한 사람도 항복한 자가 없었으며(《사기》에 가로되, 수나라 군사 이르는 곳에 고구려의 모든 성을 다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하였더라), 성곽을 수축하여 싸우고 지키는데 적당하게 하였으니(우문술 등이 평양성 아래에 이르러 “성이 험준하여 공격하기 어렵다”하였더라), 각간(角干) 김유신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함과 충무공 이순신의 왜적을 미리 헤아림과 제갈무후의 농사를 힘쓰고 무비를 강구함과 카부르의 백성을 달래고 부세를 더함과 이성의 성첩을 수축하고 곡식을 저축하던 그 열성과 그 충성심과 그 근로함을 을지문덕은 그 마음에 모두 겸하여 품었으며, 그 몸에 모두 겸하여 겪었도다.

제8장 을지문덕의 수단 밑에 적국[편집]

외교에도 부족한 바가 없으며, 내치(內治)에도 흠절이 없으매, 이에 그 큰 칼과 넓은 도끼를 운동하여 큰 전쟁에 출현할새, 혹 군사를 보내어 말갈의 복색을 바꾸어 입고, 그 내지에 들어가 정탐도 하며, 그 변방도 침노하고, 혹 거란을 유인하여, 그 연해변에 있는 군사를 쳐서 파하기도 하며, 혹 말갈을 이용하여 잠깐 쉬다가 분주불가케 하고(2731년(398년) 고구려의 왕이 말갈 병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정벌하였더라), 혹 수나라는 신라와 백제로 더불어 교통하는 길을 끊어서 그 혼란을 재촉도 하며(수주의 조서에 다르면, 수나라에 오는 왕인(王人)을 거절하였더라), 또 침노하는 수나라의 어지간한 군사는 바람 앞에 가벼운 티끌같이 순식간에 쓸어버리고(2731년(398년) 6월에 수양제가 한왕(漢王), 양왕(諒王), 세적(世績), 주라후(周羅睺) 등을 보내어 군사 3십만을 거느리고 바다와 육지로 진격케 하여 평양에 이르렀다가 9월에 크게 패하여 돌아갔는데, 십에 팔, 구가 죽었다더라) 수나라 지경을 점점 침탈하니, 저는 수만 리 지방에 여러 억만 인구와 몇백만 강병(强兵)이 있는 강대한 나라이라. 동방 한 모퉁이에 있는 작은 나라로 멸시하던 고구려에게 기운을 꺾이고 군사를 패하며 토지를 침탈하는 부끄러움을 당하니, 그 한 번 크게 오기는 과연 의심이 없도다. 그러나 그 온 것은 실로 을지문덕의 충동함을 당하여 옴이로다.

제9장 수(隋)나라의 형세와 을지문덕[편집]

요동 지경에 이르러 수양제가 군사를 헤아리고, 시신(侍臣)을 돌아보며 자랑하여 가로되,

“산을 옮기고 바다를 뒤집는 것은 오히려 쉽게 여기거든 하물며 고구려같은 작은 나라를 멸하기 무엇이 어려우리요?”

하던 교만한 말은 《사기》를 보다가 한 번 웃을 만하나, 그러나 그때에 수나라 기세를 볼진대 이 한마디 교만한 말을 한 것도 족히 괴이할 것이 없도다.

10여 년 동안을 조련한 군사를 거느리고 물밀듯 동으로 향하여 올 때에 군함이 3백 척이요,

2743년(영양왕 22년, 410년)에 수주 양광이 유주총관(幽州總官) 원흥사(元興嗣)를 파견하여 동래(東萊) 해구로 가서 병선 3백 척을 제조하라 하였더라.

병거(兵車)가 5만 승이요,

수주가 탁군(涿郡)에 직접 가서 병거 5만 승을 제작하여 옷과 갑옷을 실었더라.

군사가 2백만 명이며,

동 44년(영양왕 23년, 411년)에 수주가 전국의 군사를 모두 징발하여 탁군(涿郡)에 모두 모아 좌 12군은 누방(鏤方)ㆍ장잠(長岑)ㆍ명해(溟海)ㆍ개마(蓋馬)ㆍ건안(建安)ㆍ남소(南蘇)ㆍ요동(遼東)ㆍ현도(玄菟)ㆍ부여(扶餘)ㆍ조선(朝鮮)ㆍ옥저(沃沮)ㆍ낙랑(樂浪) 등의 길로 출동하게 하고, 우12군은 점선(黏蟬)ㆍ함자(含資)ㆍ혼미(渾彌)ㆍ임둔(臨屯)ㆍ후성(候城)ㆍ제해(提奚)ㆍ답둔(踏頓)ㆍ갈석(碣石)ㆍ동이(東暆)ㆍ대방(帶方)ㆍ양평(襄平) 등의 길로 출동하게 하여 평양으로 일제히 달려들었으니, 모두 113만3천8백 명으로, 대략 2백만이라 하였고, 그 수송을 맡은 자는 또 곱절이 되었다더라.

깃발이 1천 리요,

기병(騎兵)은 40대(隊)인데 10대가 단(團)이 되고, 보졸(步卒)은 80대인데 5대가 단이 된다. 그 갑옷과 깃발은 매 단마다 빛깔이 달랐다. 하루에 한 영(營)을 출발시켰는데, 40리의 거리를 두고 한영씩 이어 차례로 진군시켰으므로 40일만에야 죄다 출발하니, 머리와 꼬리가 이어지고 북소리 뿔피리 소리가 서로 들렸으며 깃발은 960리에 이르렀더라.

장수(將士)는

모두 24개 군단으로 나누어 좌익위대장군(左翼衛大將軍)에 우문술(宇文述), 우익위대장군(右翼衛大將軍)에 우중문(于仲文),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에 형원항(荊元恒),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에 설세웅(薛世雄),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에 신세웅(辛世雄), 우어위장군(右禦衛將軍)에 장근(張瑾), 우무후장군(右武侯將軍)에 조효재(趙孝才), 탁군태수좌무위장군(涿郡太守左武衛將軍)에 최홍승(崔弘昇), 우어위호분랑장(右禦衛虎憤郞將)에 위문승(衛文昇) 등이 나누어 통솔하고 수군(水軍)은 좌익위대장군(左翼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통솔하였더라.

모두 촉을 평정하고 제나라를 평정하던 지용이 겸전한 장사들이라. 저 수양제의 마음에 생각하기를, 고구려 같은 작은 나라를 멸하기에 무엇이 어려우리요 하였으리로다. 압록강은 한 채찍을 던져 끊을 듯하고, 평양은 한 발로 밟아 평지를 만들 듯한 기세를 품었다가 불행히 을지문덕을 만나서 제1차에 요수(遼水)에서 대패하였고,

수나라 군사가 요수에 이르매, 우리 군사가 물을 막고 지키더니 수나라 사람이 떼를 타고 건너올새, 이편 물가에 미치지 못하여 우리 군사가 높은데서 급히 내려치니 대적의 죽은 자가 태반이요, 그 장수 맥철장(麥鐵杖)과 전사웅(錢士雄)과 맹금차(孟金叉) 등이 다 죽었더라.

제2차에 요성(遼城)에서 크게 곤욕을 당하였으며,

대적의 군사가 요동에 이르매, 지키는 장수가 성벽을 굳게 지키어 대적이 에워싸고 치다가 능히 이기지 못하였더라.

제3차에 평양성에서 크게 패하였고,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을 영솔하고, 바닷길로 나아오니, 배가 천리에 연속하였는지라. 대동강으로 들어와서 성 밑에 다다른지라. 우리 군사는 나곽성 중 빈 절에 매복하여 내호아를 유인하여 성중에 들어온 후에 복병이 일어나며 크게 싸우니 주검이 뫼같이 쌓이고, 내호아는 겨우 몸을 피하여 단기로 도주하였더라.

필경에는 살수에 이르러 크게 패함을 당하였으니, 슬프다! 국가의 강하고 약한 것은 영웅이 있고 없는데 있고, 장수와 군사가 많고 적은데 있지 아니함을 가히 알리로다.

제10장 용 같이 변화하고 범같이 용맹한 을지문덕[편집]

규중처녀와 같이 지키고 있다가 함정을 벗어난 범과 같이 뛰어 나오며, 산과 같이 고요하다가 천둥같이 동하니, 을지문덕은 어찌 다만 영웅이라고만 하겠느뇨? 곧 천신이라 할지라.

요동과 갈석(碣石) 서편으로 조수같이 밀고 들어오는 것이 모두 적국의 군대요, 패수 아래로 구름같이 모인 것은 모두 적국의 군함이며, 위로 하늘을 가리운 것은 다 적국의 깃발이요, 아래로 땅을 진동하는 것은 다 적국의 북소리이라. 군사의 많음과 위엄의 장함이 고금에 처음이니, 곁에서 보는 자도 고구려를 위하여 두려워하는 바이거늘, 을지문덕은 다만 그 제장(諸將)만 지휘하여 요해처만 지키게 하고 웃고 말하는 사이에 나곽성 중 빈 절에 매복하였던 군사로 저 수로로 오는 군사를 진멸하고, 자기는 편안하고 무사하게 높이 누어서 적국이 도망하면 저의 도망하는 대로 두고 교만하면 교만한 대로 두었다가 적군의 대진(大陣)이 압록강 서편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비로소 옹용히 단기로 그 진중에 들어가서 그 허실을 탐지하고 또 그 신묘불측한 수단으로 무양하게 벗어 나왔더라.

적장 우문술과 우중문 등이 대병을 통솔하고 압록강 서편에 모이었거늘, 을지문덕이 적진에 가서 거짓 항복하였다가 우중문을 속이고 나왔더니 중문이 홀연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상의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하거늘 을지문덕은 들은 체 아니하고 압록강을 달려 건너오니라.

중중첩첩한 천라지망을 베풀어 놓고, 저 대적을 죽을 땅으로 유인하여 들어오게 한 후에 시구를 화답하여 그 마음을 더욱 교만하도록 하기 위하여 무한한 칭찬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사람이 분수에 차면 그만두는 것이 가할 줄로 풍간(諷諫)하였으니, 슬프다! 이때에 이르러 우중문 등이 분수를 알고 그만두고자 한들 공이 어찌 허락하리요? 그런즉 영웅이 사람을 잘 속인다 함도 또한 허언이 아니로다.

을지문덕이 속이고 돌아옴을 알고 우문술 등이 대노하여 쫓아오거늘, 을지문덕이 대적하여 싸우다가 적군이 주린 빛이 있음을 보고, 피곤하게 할 계책으로 조금 싸우다가 문득 달아나니 적장이 하루에 일곱 번을 이기고, 크게 교만하여 동으로 살수를 건너서 평양성에서 30리 되는 데 진을 치거늘, 을지문덕이 글 한 수를 지어 보내니, 그 글에 가로되,

신통한 꾀는 천문(天文)을 궁극히 하고, 묘한 계교는 지리를 궁진히 하였도다.

싸움을 이기매 공이 곧 높았으니, 분수를 알거든 원컨대 그만 두라.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신책구천문 묘산궁지리 전승공기고 지족원운지

하였더라.

오호라! 대저 일개 을지문덕의 몸으로 천억만 을지문덕의 몸을 지어, 홀연 사신으로 적국에 왕래하며, 홀연 장수가 되어 전장에 임하고, 홀연 시객이 되어 글귀를 읊으며, 홀연 재상이 되어 묘당에 높이 앉았고, 홀연 정탐객이 되어 적진의 사정을 정찰하며, 홀연 외교가가 되어 인국과 교제를 친밀히 하고, 당당한 충신이 홀연 반신(叛臣)인 체하며, 쾌쾌한 명장으로 홀연 패장이 되고, 홀연 왔다가 홀연 가며, 홀연 가깝다가 홀연 멀고 홀연 일어나다가 홀연 잠복하여, 저 양양한 의기로 요동을 천답하여오던 적국의 군신이 일시에 그 자유를 잃고 을지문덕의 술중에서 놀았도다. 오호라! 《사기》를 읽는 자들은 을지문덕의 사적이 부족함을 한하지 말지어다.

이 두어 줄에 그 신통한 광채를 가히 볼지니라.

제11장 살수 풍운의 을지문덕[편집]

진을 굳게 하고 들을 고요하게 한 평양성 아래에서 두어 달을 지내매, 양식이 이미 핍절하고, 노략할 곳도 없는지라. 부득이 하여 군사를 돌리거늘, 을지문덕이 그제야 군사를 나와 사면으로 치며 살수에 이르니, 가련하다! 음릉(陰陵) 어둔 밤에 항우의 오추마(五鵻馬)가 가지 아니하고 행상 악한 바람에 서전국 군함이 쓰러진 것과 같았도다.

고구려의 군사가 우리 일진 군사만 못하다 하고, 의기 대담하던 수양제의 의기가 이때를 당하여 어디로 갔던고? 큰 강이 앞을 막았는데, 쫓는 군사가 뒤에 가까우니 날고자 하여도 날개가 없는 저 수나라 군사가 절명일을 당하매, 24진의 대군이 한 배를 두고 서로 먼저 오르기를 다투다가, 중류에 다 못 가서 우리 군사가 뒤를 엄습하여 급히 치니, 산천이 뒤집히고 천지가 진동하며, 후군장(後軍將) 신세웅(辛世雄)을 베고, 더욱 분격하여 수백만의 적병을 일시에 물고기 뱃속에 장사하고, 살아 돌아간 자가 2천7백 명에 지나지 못하고, 수억만의 재력으로 모든 기계가 일시에 운공수류로 돌아갔으니, 이때는 단군 2744년(411년) 고구려 영양왕 23년 6월이요, 지금 1297년 전인데, 태사관이 붓을 잡고 크게 써 가로되, “모년 모월 모일에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사를 방어할새, 살수 위에서 크게 파하니 수양제 양광이 도망하여 갔다”하였더라.

무릇 동서양 각국에서 고금의 《사기》와 소설을 볼진대, 그 중에 허다한 싸움이 있으나, 능히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 치기를 을지문덕 같은 자가 있으며, 한 나라의 대신으로 백만 병 적진에 출입하며 정탐하기를 을지문덕 같이 한 자가 있으며, 외로운 성에 약한 군사로써 사면을 엿보는 강국 가운데 특립하여 능히 흔들리지 아니하기를 을지문덕 같은 자가 있으며, 여러 번 강한 도적을 그림자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어린아이라도 그 위엄을 듣고 울음을 그치며 초목도 그 이름을 알고 두려워하기를 을지문덕 같은 자가 있으며, 안으로 정사와 교화를 닦으며 밖으로 강한 대적을 방어하여 한 몸에 장수와 정승의 직책을 겸하였으되, 동정이 편안하고 한가하여 음성과 안색이 변치 아니하기를 을지문덕 같은 자가 있으며, 성은 좁고 사람은 적은 나라로 군사를 여러 번 일으켜서 싸움을 쉬지 아니하되 백성의 마음이 감복하여 하나도 원망하는 자가 없고, 일신골육을 우리 상공(相公)께 바친다 하게 하기를 을지문덕 같은 자가 있는가? 그 후 사람된 자는 그 털끝만치만 방불하여도 그 나라의 독립을 가히 보전할 것이요, 그 흘린 침만 수습하여도 나라의 역사를 가히 빛낼지니, 을지문덕은 우리 동국 4천 년 동안에 제일 유명한 사람만 될 뿐 아니라, 또한 온 세계에도 그 짝이 드물 만하리로다. 적국의 사관도 오히려 흠선(欽羨)함을 말지 아니하고, 특별히 찬송하여 가로되, “고구려에 대신 을지문덕이라 하는 자가 있어서 침잠하고 맹렬하며, 또 지혜가 있다”하였도다.

그 후 780여 년 만에 본조 창업 공신 조준(趙浚) 씨가 명나라 사신 축맹(祝孟)씨와 안주(安州) 백상루(百詳樓)에 올라서 청천강(청천강은 곧 살수)을 굽어보며, 글 한 수를 지어 을지문덕의 공을 자랑하며, 수나라 군신의 하잘 것 없는 것을 조롱하였으니, 그 글에 가로되

살수의 흐르는 물결이 탕양하니 薩水湯湯漾碧虛[살수탕탕양벽허]

수나라 군사 백만이 모두 화하여 물고기가 되었도다. 隋兵百萬化爲漁[수병백만화위어]

지금까지 초동목수의 유전하는 말이 있으니 至今留得漁樵話[지금유득어초화]

일개 군사의 웃음거리에 지나지 못 하도다. 不滿征夫一唒餘[불만정부일주여]

축씨가 이 글을 보고 부끄러운 빛이 있으며, 감히 그 글을 화답도 못하였더라.

제12장 성공 후 을지문덕[편집]

나는 삼국사를 읽다가 살수싸움하던 이듬해 2745년 요동싸움과 그 이듬해 2746년 비사성(卑沙城) 싸움 사적을 보고, 홀연 무엇을 잃은 듯 주저함을 깨닫지 못하며, 차탄(嗟歎)함을 말지 아니하였으니, 무릇 살수싸움 한 번에 수나라가 용맹한 장수와 정예한 군사 백만 명을 모두 함몰하였으며, 재물과 기계 수억만을 다 잃었으니 저가 비록 부강하나 다시 올 힘이 어찌 있으리요.

그러나 두 번 오기는 고사하고 세 번을 왔으니, 그 재물은 어디서 났으며, 그 군사는 어디서 왔느뇨? 부세를 중히 거두어 군수전을 억지로 채우고, 호미를 들고 소를 몰던 농부와 저자에 앉아 물건 파는 상민을 억지로 모아 융복을 입히고 창과 방패를 붙들려서 죽을 땅으로 몰아 온 것이니, 이는 다 조련 없는 오합지졸이요, 잔학한 조정을 원망하는 군사이며, 내란이 있다는 소식(수양제가 두 번째 왔을 때에 양현감(楊玄感)이 낙양에서 반하여 수나라를 배반한다는 소식이 왔더라)을 듣고 마음을 정치 못하는 군사이니, 반드시 이길만한 것이 한 가지요. 형세로 의논하면, 나는 주인이며 저는 객이요, 사리로 말하면, 나는 지키며 저는 곡하고, 그 나라 정사를 살피면, 저는 방장 어지러운 때며 나는 방장 다스리는 때요, 군사의 기운을 보아도 저는 여러 번 패한 후요, 나는 여러 번 이긴 끝이니 반드시 이길 만한 것이두 가지요, 저 부강의 근본이 이미 흔들리고 승평한 때가 장차 기울어지니,스스로 망하는 것도 미처 어찌할 수 없을 터이거늘 무슨 겨를에 이웃집과 시비를 다투리요?

그런 고로 처음에 고구려 치기를 권하던 배구는 입을 열지도 못하고, 곽영은 머리를 두드리고 간하였으니, 이는 그 신하가 싸우기를 원치 아니 하였으며, 내호아는 주저만하고, 우문술은 관망만 하였으니, 이는 그 장수들이 싸우고자 아니하였으며, 팔륜거를 짓지 못하고 비루를 이루지 못하였으니(수양제가 고구려를 칠 때에 팔륜거와 비루를 만들었더라), 이는 그 군사가싸우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며, 애곡하는 소리는 도로에 연하였으며, 요동을 향하지 말라 속절없이 죽기만 하리라는 노래(수양제가 잇달아 패배하고 잇달아 동병하니 수나라 인민들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무향요동낭사가 를 지었더라)가 산과 들에 편만하니, 이는 그 백성이 싸우기를 원치 아니함이라. 전국에 군사와 백성과 장수와 정승에 싸우고자 하는 자는 도무지 없고, 싸우고자 하는 자는 오직 욕심 많은 수양제 한 사람뿐이니, 우리 전국 군사의 힘을 가지고 저 한 사람으로 더불어 싸우는 것이니 반드시 이길 만한 것이 세 가지라.

우리가 이 세 가지 반드시 이길 만한 것을 가졌으니, 저와 열 번 싸워도 열 번 이길 것이요, 백 번 싸워도 백 번 이기어서, 작으면 목전에 적병을 소탕하여 남아돌아갈 것이 없게 할 것이요, 크면 수나라의 중심을 쳐서 파하고 중국으로서 조선을 만들기가 어렵지 아니하거늘 어찌하여 한 모퉁이 외로운 성을 의지하여 이것으로 명맥을 삼고 저희가 오면 감히 나서지 못하고 저희가 가도 감히 쫓지 못하여(양현감이 배반한다는 소식이 이르매, 수양제가 크게 놀라 급히 돌아갈새 군기와 제물을 모두 버리고, 대오가 산란하여 가는데, 고구려의 군사는 성을 지키고 감히 나가지 못하다가 이튿날 오후에 비로소 성 밖에 나와서도 오히려 속을까 의심하다가 이틀 만에 비로소 뒤를 쫓아 군사 수천 인을 죽였더라), 천고 후에 《사기》를 읽은 자로 하여금 한탄하는 마음을 품게 하니, 어찌 그리 피폐하였느뇨? 2744년(411년) 살수싸움에 1백13만1천8백 되는 적병을 모두 쳐 멸하던 을지문덕이 어디로 갔던고?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제우는 일찍이 죽고, 석저장사(石底將士) 김덕령은 무죄히 잡혔으니, 군사를 나와 싸움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는 것은 천고 뜻있는 지사의 가장 탄식하는 바이라. 이때에 을지문덕이 파직을 당하였는지, 혹 참소를 만났는지, 늙어서 죽었는지, 도무지 상고할 곳이 없으나 적국을 멸하지 못하고 조국을 영결(永訣)하여, 이 두 사람과 같이 그 회포를 다 펴지 못함은 의심이 없으니, 회포라 함은 무엇을 이름이뇨? 강토를 개척하는 주의니 이 주의가 아니면 십여 년을 군사 기르는데 진력할 리가 없으며, 이 주의가 아니면 적국을 격노하여 재물을 허비하고 싸움을 돋울리가 없을지라. 이 주의를 행하는 날은 곧 살수싸움 이후에 두 번 싸우던 날이라.

만일 이때에 을지공이 오히려 있었던들 마땅히 한 번 크게 소리를 질러 가로되, ‘때를 만났도다!’하여 돌연히 떨치고 일어나서 순암 안정복의 소론과 같이 신라 백제와 화친을 결하고 말갈의 군사를 이용하여, 그 뒤를 쫓아서 의려(醫閭)에 웅거하여 그 죄를 성토하면, 저희 원망하던 백성도 내게 붙을 것이요, 배반한 장사도 내게로 돌아올 것이니, 적국의 황제를 사로잡기가 손바닥을 뒤집기보다 쉬울지라. 큰 대적을 꺾음도 이때에 있고, 나라를 빛나게 함도 이때에 있으며, 강토를 확장하여 동방에 큰 제국을 세움도 이때에 있거늘, 이것만 능히 못할 뿐 아니라 피곤하여 힘이 없는 적국을 두려워하고 피하여 전일 대국의 풍도(風度)가 없어졌으니 슬프다, 을지문덕이여! 어찌 그리 일찍이 갔는고?

그러나 수양제가 이번에 패함을 지낸 후로 백성이 가난하고 군사가 피곤하여, 안에서 원망하고 밖에서 배반하여, 그 몸은 흉인에게 죽음을 당하고 나라가 망하였으니 이 살수싸움이 아니라면 왕세충과 두건덕이 비록 사나우나 수나라의 부강한 것을 어찌 멸망케 하였으며, 이연과 이세민이 비록 영걸하나 수나라의 강대한 것을 어찌 능히 취하였으리요? 그런고로 을지문덕이 갈아놓은 밭에 이세민이 추수하였으며, 을지문덕이 수고한 힘으로 이세민이 그 복을 누렸다 하여도 가하도다.

슬프다! 한 번 싸운 힘으로 만승(萬乘)의 나라를 멸망케 하고, 해외 열국으로 하여금 두려워 항복케 하였으니, 비록 재기 회포는 다 펴지 못하였을지라도 동국 남자의 성명은 이미 나타났도다.

제13장 옛날 《사기》지은 사람의 좁게 본 을지문덕[편집]

옛 시대에 《사기》를 지은 사람들이 소견이 좁아서 능히 을지문덕의 진상을 드러나게 한 자가 없으나, 이따금 그 적은 의논이라도 가히 그 전체를 미루어 알만한 곳이 있기로, 이제 그 대강을 모아 저술하며 그 외에 잡록에 있는 것도 이에 기록하노라.

《삼국사》에 이르되,

“을지문덕은 침잠하고 용맹하며 권변과 모략이 있고 겸하여 글짓기를 잘한다.”

하였고, 또 가로되,

“수양제가 요동에 출사할 때에 군사의 성함이 전고에 없거늘, 고구려가 한편에 작은 나라로 대적하여 능히 자국을 보전할 뿐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다 진멸하였으니 이는 문덕 한 사람의 힘이라”하였고,

《동국통감》에 가로되,

“부진이 백만의 무리로 진나라를 치다가, 사현이 강을 건너 한 번 싸움에 일패도지 하여 (一敗塗地) 낙양에 이르매, 무리가 겨우 십만이라 하더니, 이제 수나라는 부진의 한 모퉁이에 웅거함과도 같지 아니하여, 그 부강함이 부진보다는 십 배나 되며, 그 군사는 또한 부견보다 갑절이요, 고구려는 땅이 강좌(江左)의 서릉(西陵) 같은 데가 없으며, 군사가 또한 사안 왕도의 오래 조련한 군사와 같지도 못하고, 또 주서(朱序)같이 발간하는 자도 없거늘, 을지문덕이 평양에 한 무리 외로운 군사로 저 2백만 대군을 항거하여 온전히 이기었으니, 사현에게 비하면 문덕이 우승하다 하였고, 또 가로되, 수제의 기세가 천하에 진동하는데, 을지문덕이 조용히 획책을 운용하여, 저2백만 군사가 모두 압록강과 살수에 귀신이 되고,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2천7백 인에 지나지 못하매, 수양제가 크게 패하여 천하에 웃음거리가 된지라. 그 후로부터 당태종 같은 영웅으로도 안시성(安市城)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으며, 요(遼)와 금(金)ㆍ몽고 같은 강한한 나라로도 능히 저의 마음을 행치 못하였고, 금산(金山)과 금시(金始)와 합단(哈丹)과 홍구(紅寇)의 군사가 모두 우리나라에 초멸된 바가 되어, 천하가 모두 우리 동국을 강국이라 하여, 감히 가벼이 범하지 못하니, 어찌 을지문덕의 끼친 공이 아닌가?”하였고,

《동사강목(東史綱目)》에 이르되,

“영양왕이 을지문덕 같은 모든 신하를 써서 능히 한 번 이긴 기회를 타서 저 수양제를 쫓아 토죄하지 못하였으니 가석하다!”하였고,

《동국명장전(東國名將傳)》에 가로되,

“을지공이 몸소 대난을 진정하여, 공이 삼한에 제일이라.”

하였고, 또 가로되,

“을지문덕은 평양 석다산(石多山)사람이라”하였고,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가로되,

“안주(安州) 청천강은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사를 쫓아 크게 파한 곳이라.”하였더라.

이상에 나열한 바는 모두 옛적 《사기》에 평론한 것으로 대강 거두어 기록하였거니와 어찌 그리 많지 못한지 애석한 일이며, 이외에는 고금 문사들이 이따금 을지공을 동국 시 짓는 사람의 시조로 높이 받들어 《대동풍아(大東風雅)》라 하는 책을 펴매, 제1장에 반드시 공의 시를 먼저 기록하였으니, 이는 조담약의 장약은 잊어버리고, 다만 거문고를 잘 타는 사람이라하며, 김취려의 기개는 감추고 술을 잘 먹는 사람이라 찬송함과 같으니, 을지공이 만일 신령이 있으면, 한 번 웃을 만하나, 그러나 또한 이를 인하여 그 덕의 전체를 의론한 외에 작은 일까지라도 가히 미루어 헤아리겠도다.

제14장 을지문덕의 인격[편집]

을지문덕의 사람 된 품격을 평론한 것은 오직 침잠하고, 용맹하고, 권변있고, 모략있다는 네 가지뿐이랴. 이 네 가지는 원래 수나라 《사기》에 평론한 바를 우리나라 역대 《사기》에도 인습한 바이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을지문덕의 전체를 다 살핀 말인가? 무릇 전장을 임하고 대적을 대하매, 지휘하기를 실수 없이 하며, 편안하고 한가한 의기로 적진에 들어가서 노련하고 사나운 적장을 손바닥에 공기 놀리듯 하였으니, 침잠·용맹·권변·모략이라 일컫는 것이 이것을 말미암아 이름을 얻음이로다. 비록 그러나 나로서 을지문덕을 볼진대, 침잠 용맹은 없지는 아니하나 을지문덕을 침잠·용맹으로만 을지문덕이 되었다 함은 불가하며, 권변 모략이 없는 것은 아니로되, 을지문덕을 권변·모략으로만 을지문덕이 되었다 함은 불가하다 하노라.

그런즉 을지공은 어떤 사람이라 할꼬? 가로되, 공은 진실한 사람이요, 강하고 굳센 사람이요, 특립(特立)하여 의지 아니하는 사람이요, 험한 것을 피치 아니하는 사람이니 진실하고 성실한 고로 군신이 덕을 함께 하여 10여 년을 마음이 상합하여 이간하는 말이 없었으며, 장수와 정승이 서로 일심이 되어, 내정을 닦으며 외적을 물리치고 서로 권면한 결과로, 그 군사는 강국의 군사가 되고, 그 백성은 강국의 백성이 되어 천 리 되는 작은 나라로 동서 횡행하였으며, 강하고 굳센 고로 수나라의 맹렬한 기세로, 물결과 산악같이 몰아올 제, 군함은 바다에 개미같이 모였고, 철기(鐵騎)는 들에 구름같이 둔치고, 사신을 보내어 위협 공갈을 자주 하되, 태연히 앉아서 굴하지 아니하고, 흔들리지도 아니하는 정신으로 옹용히 응접하고 대적하였으며, 특립 불의하는 고로 당시에 수나라의 기세를 각국이 두려워하고 항복치 아니하는 자가 없어서 가까운 나라는 신라와 백제가 꼬리를 흔들고 애걸하는 태도를 보이며, 먼데 있는 나라는 돌궐과 거란도 무릎을 꿇고 복종하여 열국 중에 이것을 부끄러워하는 대장부 하나 없는데, 공이 홀로 팔을 뽐내고 수단을 내어 저의 강한 것도 물리치며, 저의 약한 것도 물리쳐서 함께 서지 아니하기를 맹세하고, 자웅을 겨루기로 작정하였으며, 험한 것을 피치 아니하는 고로 평하고 험한 것도 돌아보지 아니하며, 죽고 사는 것도 생각지 아니하고, 단기로 호혈에 들어가서 범의 새끼를 얻었거늘, 이제 그 한편으로만 보고 침잠 용맹 권변 모략이 있는 자라 하면 어찌 가할까?

공 같은 자는 진실로 우리 선조 중에 제일 모범할 만한 사람이로다.

제15장 무시무종의 을지문덕[편집]

식견이 좁은 자들과 망령되이 평론하는 무리들은 혹 가로되,

“을지문덕이 김춘추만 같이 못한 것이 을지문덕은 너무 강맹하여 시세를 알지 못하고 적국의 노함을 망령되이 격동한 고로 그 죽은 후 몇 십 년이 못 되어 고구려가 필경 외국의 망한 바가 되었고, 김춘추는 문무(文武) 겸전하여 시국을 깊이 알고, 강한 이웃 나라의 힘을 이용한 고로 필경 삼한을 통합하여 신라 9백 년 기초를 공고케 하였으니, 두 사람의 우열은 이에 가히 볼 것이라.” 하느니, 이는 그렇지 아니한 것이 김춘추는 한 때에 어진 인군이라, 그 사업이 신라와 함께 없어질 뿐이니, 혁거세의 왕통이 끊어지매, 김춘추의 정신도 또한 따라서 민멸하였다 하여도 가하거니와 을지문덕은 실로 영양왕 때의 을지문덕이 아니라 단군의 자손 을지문덕이며,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아니라 조선 민족의 을지문덕이며, 한때의 을지문덕이 아니라 동국 만만세의 을지문덕이니 주몽(朱蒙)의 왕통은 망하였으되 을지문덕은 망치 아니한 자이며, 김춘추는 죽었으되 을지문덕은 죽지 아니한 자이니, 그 혁혁한 정신이 만고에 항상 있어서 회원진(會遠鎭)에서 화친을 의논하던 무명씨의 활이 되어 수나라 황제 양광의 가슴을 놀래었으며, 안시성 싸움에 양만춘의 살이 되어 당나라 황제 이세민의 눈을 상하였고, 윤관의 말이 되어 만주를 측답하며, 강감찬의 칼이 되어 여진의 난을 토평하고, 수십 척의 왜선을 불사르던 정지(鄭地)의 화약도 되며, 풍신수길의 강병을 함몰하던 이순신의 거북선도 되어,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말라도 공의 능력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거꾸러져도 공의 혼백은 무너지지 아니하니, 오호라! 대저 지금까지 그 나라를 가로되, 대한국(大韓國)이라 하며, 그 백성을 가로되, 대한 백성이라 하여, 여기서 나서 여기서 늙으며 놀고 일하고 즐기고 노래하는 것을 모두 여기서 하는 것이 혹 을지공의 공열이 아닌 바가 있는가?

대개 을지공은 우리 국가를 창조하신 영웅이며, 우리 민족을 기르신 시조이며, 우리 후인의 속에 독립심을 넣어주신 성신(聖神)이니, 비록 몇 십 대의 용렬한 정치에 그 광채가 어두워졌으며, 몇백 년 오활한 선비의 붓끝에 그 성명이 매몰하여, 진정 영웅의 본래 면목은 찾아보기 심히 어려우나 그러나 이제 풍운이 점점 변하여 고통함이 날로 심하니 위급함이 털끝만치 걸린지라. 나는 생각컨대 필연 을지문덕의 죽지 아니한 정령이 수천 년 된 무덤 속에서 뛰어나와 당년에 타던 안장에 다시 앉아서 장부의 칼을 한 번 시험하여 표토르대제 워싱턴으로 더불어 6대주에 함께 횡행하며, 넬슨, 비스마르크로 더불어 천백 년에 같이 빛나서 독립 기초를 정돈할 날이 있으리라하거늘 누가 을지문덕을 김춘추에게 비하느뇨?

결론[편집]

내 일찍 중국에 유람하고 온 사람에게 들은즉,

“만주의 봉천과 길림성과 여순구 등지를 다녀 본즉, 이따금 우리나라 선대의 제도로 지은 궁실도 오히려 많으며, 또 어떤 촌은 고려촌이라 하는데, 이는 옛날에 고구려 사람이 개척하고 살던 바이며, 어떤 성은 고려성이라 하는데, 이는 옛날에 고구려 사람이 성곽을 쌓고 수호하던 바이라. 지금에 비록 천백 년을 지내어 인물이 변하고, 성상이 바뀌었으며, 언덕이 없어지고, 골짜기가 생겼으나, 옛적 우리 조상이 장창대검으로 거두고 취하여, 성을 굳게 하고, 군사를 강하게 하여 지키던 옛땅을 오늘날 필마 행장으로 유람하는 길에 지나 보니, 고금의 변천한 감회가 마음을 자주 감동하더라.” 하니, 무애생이 가로되, 오호라! 이는 을지문덕 제공의 경영하던 옛 자취로다. 그때에 피와 땀을 흘리며, 제물을 허비하며, 신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얻어서 지키던 기업을 후세 자손이 불초하여,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다 돌려 보내었도다.

을지문덕은 이미 멀고, 개소문이 또 죽으매, 인재가 묘연하여 오직 서희 씨 한 사람이 거란의 사신 소손녕을 대하여 이르되, 귀국의 동경도 또한 옛적 우리 강토라는 말을 한 번 발하였을 뿐이오. 진실로 참담한 수단으로 외국과 형세를 다투려 하는 사람은 기린과 봉황같이 희귀하고, 중간에 오직 고려 태조 왕건 씨가 중국을 배척하며, 거란의 사신을 거절하고, 강토를 개척할 큰 뜻을 품었더니, 하늘이 그 수를 빼앗아 일찍이 그 위를 버리매,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후로는 우리나라 인물의 국량이 점점 협착하여, 동방의 지도가 이같이 적어졌도다.

그러나 지금은 한 폭 금수강산이 파쇄가 되어 단군 이후에 4천 년을 전래하던 중심 기지까지 남에게 사양하여, 우리 집 형제들은 발을 디딜 곳이 없으니, 어느 겨를에 압록강 서편을 생각이나 하여 보리요? 슬프다! 20세기 새 대한에 을지문덕의 탄생이 어찌 그리 더디뇨?

무애생이 가로되, 당시에 고구려가 비록 강대하나 그 침노하고 노략하여 얻은 토지와 인민을 제하고, 내지의 너비와 인구를 통계하면, 지금 경기,평안, 강원, 함경 등 몇 도와 충청도에 있는 몇 고을이니, 토지는 천리가 못되고 인민은 수 백만에 , 지나지 못하니, 한 모퉁이에 작은 나라가 될 뿐이거늘 이 토지와 이 인민을 잘 써서 압록강 밖으로 만여 리 되는 땅을 취하여 그 언어도 같지 아니하고, 그 풍속도 다른 몇 백만 다른 민족을 이거하며, 강약도 현수하고, 대소도 같지 아니한 중국같이 큰 나라를 점점 먹어서,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앗으며, 지키면 굳게하고, 편안할 때에는 서로 권면하여 우리 한국과 중국 간에 서로 교섭한 이래로 제일 크게 싸운 명예가 우리 민족에게로 모두 돌아오더니, 어찌하여 역대의 군신들이 잔약하고, 나타한 악한 사업으로 만백성에게 심어 주며 조금이라도 밖으로 진보하는 사상은 극력으로 막았느뇨? 고로 본조 중년에 외국 난리의 소식이 한 번 오매, 전국 상하가 방어할 계책이 없어서 도적의 칼날이 이르는 곳마다 어떻게 혹독한 화를 당하였던지, 지금까지 산촌 관솔불 아래 백발 늙은이들이 두서넛 모이면, 흔히 임진년 일을 이야기하고, 마음과 뼈가 오히려 떨리느니, 슬프다! 만일 다른 나라의 진보 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진대, 중고 시대에 그렇게 강한하던 민족이니, 지금 당하여 세력이 마땅히 세계에 으뜸이 될 것이거늘, 무슨 연고로 그 타락한 경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느뇨? 내 이제야 알 괘라. 그 나라 인민의 용맹하고 나약함과 넉넉하고 용렬함은 전혀 그 나라에 먼저 깨달은 한두 영웅이 고동하고 권장함을 따라서 진퇴하는 바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