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만필/영웅 교향곡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에 관련된 음악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두 개가 있으니 하나는 베에토벤이 작곡한 〈영웅 교향곡〉이요, 또 하나는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서곡(序曲) 〈1812년〉입니다.
1802년 가을, 나폴레옹의 예나의 전쟁의 대승리를 했다는 소문이 세상에 퍼지자, 당시 도이칠란트의 대작곡가 베에토벤은 “내가 음악을 이해하느니 만큼 전술을 이해하지 못함은 대유감이다. 만일 전술을 이해하였다면 내손으로라도 적병을 일거 대파했을 것을….” 하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가 아무리 도이칠란트의 적이요, 또 베에토벤이 비록 도이칠란트의 핏줄을 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정다감한 이 악성의 심안(心眼)에는 대영웅 나폴레옹의 勇姿[용자]가 힘있게 비침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때마침 오스트리아의 서울 비엔나에 주재하던 프랑스 대사는 친우의 소개로 베에토벤과 교분이 두텁게 지내던 바, 그 대사는 어느 날 베에토벤을 보고서 나폴레옹의 위업을 찬미하는 의미로 교향곡을 지어 봄이 어떠냐고 권해 본 일이 있었읍니다. 원래 베에토벤은 나폴레옹이 자국의 악정(惡政)으로 인하여 도탄 속에 헤매는 프랑스 국민을 구출하여, 자유 공화제를 실시하리라는 확신 아래에서 나폴레옹의 인격을 은연히 숭배해 오던 터이라, 프랑스 대사의 권하는 대로 일대의 영웅을 기념하는 대교향곡을 지은 후, 그 악곡의 표지에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게 봉정한다는 뜻까지 부기(附記)해 가지고는 프랑스 대사의 손을 거쳐서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던 심산이었읍니다.
그러나 천만 의외에도 나폴레옹은 그 해에 자기 자신이 황제의 위(位)에 오르고 말자, 베에토벤은 노발대발하여 “이 놈도 역시 1개의 범부(凡夫)에 지나지 않았구나! 국민 전체의 복리를 유린하고서 자기의 사복을 채운 야비한 자이다.”하고 너무도 분개한 끝에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었던 자기 작품을 갈갈이 찢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후 17년 동안, 곧 나폴레옹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나폴레옹이란 말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시 이 곡조는 베에토벤의 역작 중의 하나로, 비록 나폴레옹은 자기의 흑심을 여지없이 탄로시켜서 일대의 대영웅으로부터 급전직하하여 일개의 범부가 되었다고 하지마는 이 곡조만은 그 존재를 없이 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와서 베에토벤의 친구들은 이 악곡을 갱생시키기 위하여 누차 작곡자에게 권고한 결과, 드디어 베에토벤은 그 악곡을 다시 정사(精寫)한 후 그 다음 해인 1805년에 이것을 출판할 때에는 단지 한 위인을 기념하기 위하여 작곡한 교향곡이란 표제를 붙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금일에〈영웅 교향곡〉이란 이름으로써 세상에 알려진〈제3 교향곡〉이니, 그 제2악장에 있는 장송 행진곡은 본시 전사한 장병을 장송하는 의미에서 작곡되었던 것이나 이때로부터 17년이 지난 후 나폴레옹은 센트 헬레나의 고도(孤島)에서 참혹한 최후를 마치게 되자 베에토벤은 “이 악곡의 제2 악장인 장송곡은 17년 전에 이미 영웅의 운명을 암시했던 것으로 이것은 전사자의 장송곡이 아니라 나폴레옹 자신의 장송곡이라”고 어떤 친구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만일 나폴레옹이 없었던들, 또한 이 명곡이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알 수 없을 것이나, 그보다도 우리는 〈영웅 교향곡〉에 이만한 일화가 숨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던히 흥미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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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나폴레옹에 관련된 음악으로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서곡 〈1812년〉은 1880년에 모스크바의 대사원(大寺院) 재건 축하의 제전에 연주하기 위하여 작곡된 것입니다.
이것은 일개의 표제악적(標題樂的) 서곡으로 서력 기원 1812년에 생긴 사실을 음악적으로 묘사한 것이니, 말할 것도 없이 1812년이라면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쳐 들어가던 해로 도처에서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도 여기서는 치명적 실패를 당하고야 말았으니, 말하자면 모스크바의 대사원은 국난을 면한 감사와 기념으로서의 재건이요, 서곡 〈1812년〉은 이 국가적 대축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서의 작곡일 것입니다.
이 악곡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최초에 정교도(正敎徒)의 찬미가와 기원(祈願), 국민의 고뇌, 군대의 도착과 전전(戰前) 정적(靜寂), 그 다음에는 보르디노의 전쟁의 처참한 광경이 전개된 후 러시아의 국가(國歌)가 프랑스 국가와 혼합하여 들려옵니다.
그 뒤에는 다시 완서조(緩徐調)로 악곡이 진행되어 모스크바의 대종(大鐘)이 높이 울리기 시작하며 감사와 기도의 소리가 대포의 우뢰 같은 소리에 싸여진 다음, 끝으로 승리의 행진곡이 들려오며 뒤미쳐 로(露)·불(佛) 양국의 국가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나 프랑스 국가는 점점 사라져 버리고, 드디어 러시아 국가만이 전원 총연주에 의하여 지극히 장대한 종결을 맺는 것입니다.
이 악곡이 처음으로 연주되던 때에는 악곡 중간에 대포를 발사하여 전장의 정경을 여실히 나타내었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입니다마는 그 후부터는 대포 대신의 큰 북을 대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악곡에 대하여는 한 두 가지 비난의 말이 없지도 않습니다.
로·불 양국의 국가를 교묘하게 편입한 점은 효과로 보아서는 매우 훌륭하나 이것을 역사상으로 본다면 큰 시대 착오가 여기에 있는 까닭입니다. 러시아 국가는 1812년보다는 훨씬 후에 작곡된 것이요, 또 나폴레옹의 군병이 공화(共和)의 노래 프랑스 국가를 불렀다는 것도 수긍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는 작곡 당시 로·불 양국민의 현행되는 국가를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임을 생각하여 일부러 이것을 악곡상에 편입했을 것인즉, 이러한 역사적 천착(穿鑿) 무용(無用)이라고 말하는 이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여간에 이 악곡이야말로 나폴레옹이 없었던들 생겨났을 까닭이 없었을 것이니, 프랑스 국민은 치욕으로 생각할는지 몰라도 그 외의 모든 타 국민들은 나폴레옹에게 감사를 들릴 만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1770년 12월 16일에 독일 라인 하반(河畔) 본 시에서 탄생하여, 1827년 3월 26일에 비에나 시에서 장서한 대악성으로, 음악 사상에는 『기악곡의 대왕』이란 위명을 남겼을 뿐 아니라, 어떤 점으로는 세계 최대의 악성이라고까지 일컷는 위인.
- 차이코프스키(Peter Llyitch Tschaikowsky)는 1840년 5월 7일에 워킨스크에서 나서, 1893년 11월 6일에 사망한 러시아의 대작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