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무공순신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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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忠武公은 서울서 나고 시굴서도 지냇스니 저긔 보이는 芳華山 밋 牙山 뱀밧에 公의 故宅이 傳하며 銀杏 나무 아레 활터 말마당을 어제일가치들 일러 나려온다. 三千里 어느 구석이 이 한분 心血의 遺痕이 아니리요마는 이 溫泉 附近은 公의 故鄕의 門戶일 아니라 南쪽길이 여긔를 거치게 되니 壬辰前 四年 宣祖 己丑 二月에 이 압흐로 全羅道를 간 것이 장차 닥쳐올 大難을 막어 내일 그 거름이었다. 처음은 軍官이다가 助防將으로 井邑縣監으로 이내 全羅道에 있다가 辛卯年에 左水使가 되었다. 이때에 누가 난리 걱정이나 하였으랴. 公은 홀로 將卒를 헤아려서 刱意로 龜船을 만들고 天地玄黃等의 字號를 갖인 大砲와 勝字長銃과 그밧게 갓가지 猛烈한 火箭들을 만들어서 秘密히 여러번 試驗을 하고 바다목을 건너지르는 鐵鎖를 치고 望臺를 쌓었다. 壬辰 四月에 倭難이 나니 公이 물샐 틈 없는 戰備를 맞추고 五月四日 麗水 서 떠나 全羅左水軍의 區域을 넘어 慶尙道 바다로 들어섰다.

그동안 倭賊은 저의 오는 길에 거칠 것이 업게만 알더니 어찌 뜻하얏으랴 玉浦 바다에서 거북 같이 된 빠른 배들이 다닥치면서 우루룰 우루룰 꽝 꽝 꽝 賊이 걸어 볼 사이도 없이 깨여지면서 타오르니 바다가 불이요, 물결이 벌건 피였다. 忠武公의 戰勝이 이 싸움부터다. 연하야 泗川에서 唐浦에서 唐項浦에서 賊을 보는대로 뭇질러서 한달 동안에 賊船을 깨트린 것이 百餘隻이라, 上陸한 賊은 뒤가 끈치고 오는 賊은 陸地에 부틀 길이 없었으니 만일 公 한분이 아니었던들 그때 일이 어떠하였었을 것은 생각해볼 餘地도 없다. 申砬 같은 분은 水軍을 없애고 陸戰에 힘을 뫃으자 하고 公은 둘의 하나도 없앨 수가 없다 하여 한참 海戰에 바쁜 가운데에도 陸軍의 말이 없을 것을 걱정하고 突山 興陽等地에 길러둔 말들을 가저다가 타도록 하고 求禮의 石柱와 陶灘과 光陽의 豆恥는 모다 陸의 要害라 하야 義憎과 鄕兵을 聯絡하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玉浦에서 大駕播遷 기별을 듣고 唐項浦 싸움이 끝난 뒤 賊이 자못 뜨끔할 것을 생각하고 저 湀入하는 무리로 하여금 잠간이라도 멈웃거리게 하리라 하야 戰艦 數萬을 거느리고 某月 某日 곧 日本을 치러 가나이다 하는 狀啓를 써서 軍官을 시키어 서울 가는 길에 떨어트리어 賊의 눈에 뜨이도록 하였다.

七月에 固城 見乃梁에서 大隊인 賊船을 만났다. 見乃梁은 좁으니 넓은 데로 끄러내이리라 하고, 部下를 約束하였다. 한참 交戰하다가 우리 戰船 一部가 쫓기니 賊의 全隊가 勝勢를 타서 急히 쫓아 오더니 閑山島 압헤 미처 우리 將船에 旗가 솟고 북소리 크게 나자 쫓기던 배들이 도라서면서 一時에 鶴翼陣이 되어 賊을 끼고 砲火를 퍼부었다. 이때에 賊船 부서진 것이 七十餘隻이 요, 賊의 말로 九千이 넘우 죽었다 한다. 殘賊 얼마가 海岸에 배를 부치고 도망함으로 우리 避難民에게 害가 미칠가 염려하여 빈배 하나는 남겨두고 물러나와 밤을 지내고 새벽녘에 그 배가 과연 나오는 것을 처서 태웠다. 軍士들이 賊의 首級을 드리는 것을 보고, 죽은 머리 하나를 베일 동안에 여러 賊을 더 쏘아 죽여라, 네 功은 내 눈에 있고 賊의 首級에 있지 아니하다, 이러한 말슴이 全軍中의 科條規模가 되어 나중에 古今島에서 明將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우리의 功을 그에게 넘기어도 모다들 기쁘게 公의 뜻을 따랏다. 龍船은 鐵甲을 입힌 배다. 등 덮은 뚜껑에는 빈틈없이 鐵尖이 도치고 아래로는 여러 櫓가 左右에 벌려 내어밀고 周圍로는 砲穴이 있어 砲機를 걸되 배압 龍의 머리에 건 것은 가장 크다. 우리가 바깥은 보아도 밖에서 우리를 볼 수가 없다. 세찬 櫓軍들이 一時에 저음으로 風潮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周圍의 砲火가 한꺼번에 터짐으로 密集한 賊 가운데로 들어가도 하나로 四方을 칠 수 있고 通體가 堅固함으로 敵彈이 뚫치 못한다. 그럼으로 賊을 만나면 龜船이 앞서 들어가고 板屋船이 뒤를 따랐다. 閑山島 앞에서 賊을 全滅하고 나서 釜山에서 賊船들을 부시고 또 水陸으로 어울러 쳐서 無數한 賊을 무찌르니 이 뒤부터는 賊 오는 것이 렴려 아니라 다라나는 것이 걱정이었다. 閑山島를 本陣으로 하고 海上을 控制하려 하던 차에 三道統制의 命을 받았다. 거죽으로 보기에는 公은 三道水軍의 總師라 一切를 마음대로 펴볼만한 듯하되 실상인즉 빈 이름뿐이요, 軍粮 하나 器械 하나 버태여 준 것이라고는 허무하였다. 海島 몇군대에 屯田을 하고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고고, 질 오 지점까지 만들어서 내어 팔고 사드리고 별별가지 애를 다 써서 겨오 軍士들을 먹이고 입히었다. 鍮鐵을 모아 銃筒을 만들고 밤이면 손수 화살을 다듬었다. 避亂民들을 살리려고 종용한 섬을 가리어서 農土를 마련하여 드려보내고 軍士들더러 賊을 죽이는 것만이 功이랴, 賊에게 잡혀간 우리 사람을 救해 내는 것도 功이니 賊船을 붙드러 불을 지를제 或 우리 사람이 없나 먼저 살피어 보라고 至誠으로 일러서 救해 오는 대로, 다 살게 하여 주었다. 泗川 싸움에 賊丸이 어깨를 뚫은 채로 해 지도록 全軍을 指揮하고 對戰할 때마다 언제나 前頭에 서니, 모다 부축하여 드시라 하면, 내 목숨은 하늘을 믿는다 어찌 너의더러만 賊鋒을 當하라 하랴 하였다. 어느해 閑山島에 癘疫이 돌아 당신께도 옮았으나 죽지 아니하면 누을 수 없다 하고 열 이틀을 두고 한결같이 軍務를 보았다.

公은 孝子다. 壬辰以後 日記를 보면 그 어머니가 그리워 한때라도 잊지 못하고 밤이면 흔히 앉어서 새웠으니 어머니의 安否가 얼마나 동동하였을 것인가. 牙山의 山川이 公의 눈속에 어리었을 것을 생각하면, 이 압길, 이 어름이, 다 그 어리는 가운데 딸리어 들었었을 것이니 땅이 아름이 있다면 지금까지도 늦거워할 만하다. 賊이 여러번 慘敗를 當하고 나서는 公 한분이 있고서는 朝鮮을 걸어 보지 못할 것을 알아 公을 모함할 꾀를 내이고 慶尙右水使 元均은 公을 猜忌하야 기어이 미러 내이려고 하였다. 거기다가 黨派 다툼이 한참 盛한 때라 賊의 間言을 憑藉하여 公을 죽이고 元均을 내세우려고 하는 무리가 많았다. 柳西厓는 公의 薦主라 公이 잡히여 오는 것을 보면서도 救하다가는 도로혀 禍를 더하지 아니할가 하여 속만 태우고 李完平은 李某를 갈 수 없고 元均을 맡길 수 없다고 다투었으나 아모 도움이 되지 못하는 한편에, 南以信 같은 者는 公의 일을 廉探하러 갔다가 와서 말하기를 그동안 倭將 淸正의 배가 巖嶼에 걸려서 일헤를 지낸 것을 李某가 알고도 거저 두었다고까지 하였으니 만일 西厓의 同志 鄭判府事 琢의 伸救가 아니었더면 公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白衣從軍이란 名目으로 權元師 陣中으로 가는 길에 牙山 先山을 들렀다. 丁酉年 四月 초생이다. 數日 머물면서 그동안 全羅道에 가서 머물다가 水路로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기다리던 차에 그 어머니 公의 당한 일에 놀래어 병환이 더치어 배에서 도라간 줄을 알았다. 喪行을 맞이한 뒤 伴行하는 禁府官員에게 墾乞하여 겨우 사흘을 지내고 나흘 되던 날 떠났다. 이날 溫陽 金谷으로 天安 寶山院으로 公州 日新驛에서 밤을 지낸 것이 日記에 적히었으니 이 길에 또 이 앞을 지났었을 것이다.

七月에 賊船이 大擧하여 들어와 水軍이 慘敗하고 元均은 다라나다가 죽었다. 별안간 朝廷이 물끓듯하더니 公을 다시 統制使로 任命하였다. 마침 晋州에 머물러 있다가 書를 받고 卽時에 떠났다. 順天을 거쳐 寶城 지나 會寧浦에 오니 軍船이라고 겨우 열이다. 깨어진 나머지를 뫃아서 龜船 두 隻을 더 만들었다. 朝廷에서 公을 맡기기는 하고도 어찌할 수 없으려니 하여 다시 陸地로 오르라고까지 하는 것을, 公은 만일 바다를 버리면 賊은 바로 漢江에 다을 것이니 어찌하릿가 남은 배가 아모리 적어도 臣이 죽지 아니하였으니 賊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오리다고 곧 狀啓하였다. 그러나 殘船 열둘을 가지고 바다로 드러서는 것을 보고 누가 구슲으지 아니하였었으랴. 珍島 碧波津에서 보름 동안이나 지내다가 右水營 앞으로 陣을 옮기었더니 九月 十六日 새벽에 賊船이 數없이 들어온다는 探報를 듣고 戰船을 거느리고 中流로 나아가 기다리더니 賊船 三百餘隻이 삼킬듯이 덤비었다. 形勢가 하도 危殆함으로 몇몇 將領은 제각각 回避할 마음을 먹고 右水使 먼저 아득하게 물러섰다. 公이 急櫓로 賊船 앞으로 달려들면서 怯내지들 말고 쏘거라 어서 쏘거라. 砲火가 벼락치듯 하니 賊이 抵當하지 못하나 包圍 이미 여러 겹이요 도라보니 戰船 얼마는 멀리 떨어졌다. 곧 螺角을 불리고 急히 中軍令旗를 꽂고 다시 누이니 죽어도 이 아래를 못 떠난다는 軍令이오 또 招搖旗를 꽂이니 가장 森嚴한 命令의 表示다. 이제야 中軍將 金應諴의 배가 점점 닥아오고 巨濟縣令 安衛의 배가 앞을 섰다. 公이 친히 나서서 安衛야 軍法에 죽으려느냐. 다라나면 살까. 安衛가 겁결에 賊船 사이로 들어섰다. 金應諴아 너는 中軍으로서 大將을 救하지 아니하니 그 罪를 벗을까. 賊船三隻이 安衛 배에 덤비어 오르려 하니 公이 배를 돌리어 그리로 닥치며 砲火를 퍼부어 三隻이 다 부시었다. 어느덧 回避하려던 배들도 기운을 내어 地玄字砲聲이 바다를 뒤집을 듯하며 賊船 三十餘隻이 연이어 부서졌다. 이지음은 早潮가 빠지려하여 右水營앞 울두목 물살이 무서웁게 세일 때라 賊船이 모다 急流에 들어 돌이킬 겨를이 없이 좁은 목으로 넘어 나려갔다. 미리 물밑으로 鐵鏁를 건너 매였던지라 넘는 족족 걸리어 아레로 엎어지는데 목 아레는 턱이 甚하여 안에서 밖이 보이지 아니함으로 연다라 엎어지면서도 뒷배들은 장차 西海로 나아가는 것인 줄만 여기었다. 이리하여 賊船 三百三十餘隻이 十餘隻 以外에는 다 부서졌다.

알고보면 公이 여기서 潮流를 利用하여 賊을 全滅하려고 짐짓 머물러 賊船이 들어오도록 하고 부러 包圍中에 들어서 苦戰하면서 時間을 기다렸던 것이니 이렇듯 따로 있는 정도 計晝은 部下에게 다 알리지 아니하였었던 것이다. 이때 公은 밤에도 갑옷을 벗지 아니하고 북을 벼개로 비어 쉴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차마 설어서 肉味를 대이지 아니하고 粥飮도 겨우 몇 목움씩을 마시었다. 陣을 寶花島로 옮기었다가 이듬해 二月에 古今島로 本營을 定하니 公을 의지하려고 뫃여든 民戶가 數萬이 넘었다. 놋과 구리를 뫃아 大砲를 붓고 나무를 비어드려 배를 짓고 모든 戰具를 次第로 만들어 마지막 露梁海戰에는 龜船만이 數百隻이었었으니 다른 것을 헤아릴 만하다. 公에게는 괴로운 일도 넘우나 많았다. 明將 劉綎은 바다로 古今島에 오니 陣璘의 粗暴함으로도 公에게는 휘였다 하나 둘이 다 賊과 通하고 陣은 그래도 公에게 꿀리나 劉는 심하였다. 울두목 싸움 뒤에는 賊 스사로 完全히 失敗함을 自認한데다가 大酋 豊臣秀吉의 死報를 받고는 卽時로 撤歸하고저들하여 十一月에 小西行長等이 順天으로부터 나오려 하다가 海上을 지키는 우리 水軍에게 敗하여 도루 물러가서 泗川 昆陽等地에 있는 强敵 島津義弘等의 全軍應援을 求하였다. 十八日 밤 泗川 昆陽으로부터 賊船 五百餘隻이 南海 앞바다로 들어오니 露梁을 넘으면 順天이다. 公이 順天서 나올 賊路에 伏兵을 느리고 몸소 마조나와 들어오는 賊을 露梁에서 만났다. 그 밤에 달이 밝았다. 이 원수가 없어진다면 죽어 恨이 없나이다. 하늘을 울어러 빌고 나서 賊船 三百餘隻을 무찌르는 동안에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한참 督戰하는 가운데 賊丸이 左掖으로 박히어 쓰러지면서 쌈이 急하다 나 죽었다고 말하지 마라 하고는 그만 숨이 끊치였다. 公의 아들 薈와 조카 莞이 옆에 있었다. 그대로 旗를 두르고 북을 쳐 한낮이 다 되기 전에 賊船이 거의다 깨여졌다. 만일 明軍의 內通이 없었던들 順天 있던 賊마저 살아가지 못하였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이 지난 뒤는 여러 군대의 賊이 한번에 씻은 듯이 없어져서 일곱 해 만에 뭍과 바다가 처음으로 맑았다. 지난해 어머니를 여의고 울면서 이 앞길을 지나던 公이 八道老少男女로 하여금 당신을 울게 하면서 喪輿로 이 앞길을 접어 들었더니라. 뒷사람들이야 붓그러웁다. 露梁 달밤에 公이 마지막으로 무엇을 빌었었길래 三百年을 얼마 넘지 아니하여 나라일이 어떠하였었던가. 그렁성 最近 몇 十年 우리의 겪은 것은 차마 公의 일을 적은 글 속에 넣고저 아니하거니와 寇賊이 물러간 뒤 忠南道內에서 公의 遺跡을 表하려고 知事 李寧鎭, 産業局長 鄭樂勳, 學務局長 申求永의 發起로 記念事業 委員會를 만들고 國庫金과 道費를 얻고 官公更員 中小學生 및 一般民衆들의 정성을 뫃아 文化課長 金亮鉉의 荃督으로 溫泉驛 앞에 碑를 세우기로 하는 것을 보고 나는 거듭 옛일을 늣거워하였다. 公은 名將보담도 聖者다. 그 神妙不測이 오직 至誠惻怛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公은 聖者임으로 名將이다. 누구나 公을 닮으려거든 먼저 國家民族 앞에 一身의 私이 없어야 할 것을 알라. 저 故宅을 바라며 이 앞길을 보라. 나도 한번 따러 보리라는 마음이 나지 아니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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