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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 묘산경매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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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오주(寰球五洲)에 어느 땅을 무를 것 없이 그 민족의 대난(大難)을 막고 대재(大災)를 구(救)하야 병요(炳耀)한 공렬(功烈)이 있는 선민(先民)을 추모, 건봉(虔奉)함은 다 같은 것이라 그의 유적(遺跡)의 방불(髣髴)함만 부쳐볼 수 있으면 이를 보귀(寶貴)하게 알고 이를 신중하게 두어 천추(千秋), 만세(萬歲)를 기(期)하야 지키고자 하나니 척이(隻履), 단검(斷劒)도 민족적으로 숭앙을 받으려든 하믈며 체백(體魄)의 전거(奠居)하는 묘소이야 그 중함을 말로 이를 것이랴. 영국인으로서 나옹을 극획(克獲)한 제독의 영역(塋域)을 성축(成築), 화구(華構)하는 것이나 중국인으로서 올목(兀木)을 구축(驅逐)한 장군의 구농(邱壟)을 굉장하게 봉조(封造)하야 논 것이 그 민족이고서는 그렇지 아니할 수 없는 민족전체의 정신의 발현이다. 조선의 선민으로서 우리의 추모와 건봉을 받으실 이 유사이래(有史以來) 몇 분이 있으되 그중에도 그가 없었더면 국가가 없고 민족이 없었을 다시 말하면 그 한 분의 힘으로 국가라고 있것고 우리의 노유남녀(老幼男女)가 존전(存全)하게 된 이만한 대공(大功), 성렬(盛烈)을 이루신 분은 일인(一人)이 계실 뿐이다. 이만 만하야도 조선인은 다 알리라. 이제 우리 이충무공의 묘소를 뵈올 때 비각은 문짝이 없고 병풍석은 틈이 벌어 어근버근하고 묘위(墓圍)나 묘계(墓階)나 모다 때때로 수치(修治)하지 못한 것이 드러난다. 묘소ㅣ 이러할 적에야 유물의 보존이 장엄치 못할 것은 무론이니 친필일기가 한낱 금복(錦袱)에 쌔이지 못하고 금대(金帶) 담은 목함(木函)이 별손(獘損)된 채로 있고 유검이구(遺劒二具)가 두렷한 함독(凾櫝)에 담기지 못하얐다. 우리 이를 개연(慨然)히 알아 어찌하면 추모, 건봉의 실(實)을 만일(萬一)이라도 나타내 볼까 하얐었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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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전보(遺物傳寳)할 방법의 강구는 여사(餘事)이다. 묘소의 수치도 오히려 제이간제(第二間題)로 돌아간다. 지금 동일은행(東一銀行)으로부터 묘소 기신 산판(山坂)을 고택, 제전(祭田)과 함께 방장 경매에 부치게 되었다. 듣건대 충무공사손종옥(忠武公嗣孫種玉)이 충무묘산을 은행에 전질(典質)하야 넘길 수 없는 빚 기한이 넘으매 은행으로서 규례대로 이행하는 절차를 하게 된 것이라 한다. 첫째도 사손(嗣孫)된 자ㅣ 마땅이 그 건구(愆咕)를 알지니라. 선조의 체백을 뫼신 그 땅을 요용(要用) 때문에 무란히 전질하는 그 소위 사손으로서 감행할 바일까. 선조로도 충무 같으신 어룬은 일가, 일족의 숭봉(崇奉)만에 한할 배 아니니 민족적으로 형식 갖춘 위탁(委託)을 받지 아니하얐다 할지라도 소중함이 전조선으로써임을 모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로도 수치까지는 걱정하야 오든 바이지만 사손이라구 있어 묘산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할 것은 처음 생각도 미치지 못하든 것이다. 이 일은 이씨일문(李氏一門)의 대변(大變)만이 아니라 조선의 변고이며 수치(羞耻)이라 통한이 인인(人人)에 사못 나니 사계(嗣係)의 이 일은 마땅히 민족적으로 징벌할지며 성죄(聲罪)할지며 또 진(進)하야 이씨의 종문을 문책코자 하노니 사손은 이왕 그르쳤다 하자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도록 두었다 함은 여하한 사정이 있다 할지라도 전조선을 향하야 변해(辨解)치 못할 것이니라. 그러나 우리끼리인지라 사손된 이를 꾸짖고 후예(後裔)들 일절(一切)로 나무라는 것이나 만약 외국인으로서 본다 할 것 같으면 우리 다 같이 추모를 모르고 건봉을 저버린 불초후인(不肖後人)이라 자손타인(子孫他人)의 분변할 배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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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으로서는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전질물(典質物)의 과한(過限)한 것을 경매하는 일이 어찌 당연치 아니하랴. 정규(定規)를 밟고 정례(正例)에 의하는 것이라 여기에 다른 의논(議論)이 부를 수 없다. 부질없이 전연(展延)을 용인하야 선산(先山)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손으로 하야금 그 돈은 요용에 자(資)하고 그 산은 관한(寬限)에 고식(姑息)됨으로써 자편(自便)함을 얻게 한다는 것도 한편으로 불초의 보호에 가깝다 할 수도 있다. 다시 생각하야 보자. 은행은 정규가 있다. 정례가 있다. 이 규(規)와 이 예(例)는 반드시 이행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규야 이충무묘산을 모르지만 예야 이충무묘산을 모르지만 규ㅣ 자행(自行)치 못하고 예ㅣ 자용(自用)치 못하는 것이라 규를 행하는 예를 용(用)하는 자ㅣ 있지 아니한가. 이가 영국인이나 독일인이나 중국인이라 할지라도 한 민족의 대공을 세운 천고일인(千古一人)의 묘산을 경매함에 이르러는 행하는 손 용하는 팔이 얼마쯤 지의(遲疑)함이 없을 수 없는 것이라 설사 왕시(徃詩)에 있어 이해은원(利害恩怨)의 피차ㅣ 서로 달다 하더라도 공의(公義)로써 이를 누르게 되야 같은 지의가 있으려든 하믈며 동일은행은 조선인의 은행이라 여기에 규를 행하고 예를 용할 이 다 조선인임에랴. 은행이 차라리 조선인의 은행이 아니더면 싶다. 백전(百戰), 천투(千鬪), 고심(苦心), 혈성(血誠)으로 경대(經大), 위세(緯世), 선건(旋乾), 전곤(轉坤), 가풍편정(駕風鞭霆), 보천(補天), 욕일(浴日)의 재조를 다하야 구우(區宇)를 재조(再造)하야 놓았다가 오늘날에 이르러 구구(區區)한 일편묘산(一片墓山)까지 경매장에 호물(呼物)이 될 뿐 아니라 더욱이 당시위난중(當時危難中)에 웅기종기 그 등의 매어달려 그의 혈한(血汗)으로써 목숨을 부치든 그네들의 후손의 손으로 이 일을 차마 하게 되는 것이 어찌 애닯지 아니하랴. 충무로 말씀하면 해상유환(海上流丸)이 가슴을 뚫을 때까지 진췌(盡瘁)하실 뿐이라 더구나 금일에 있어 재천영령(在天英靈)이 항상 묘산의 존망을 뜻에나 두시랴마는 조선인의 손으로서 이 경매를 하게 된다 함을 우리로서 차마 들을 수는 없다. 그러나 조선인의 은행인 것이 다행이다. 빚 기한은 물론 넘을 수는 없는 철한(鐵限)이라 은행으로서 넘게 할 수 없으나 민족적천양(民族的天良)의 자발(自發)하는 의심(義心)도 또한 드디고 넘을 수 없는 대방(大防)이니 이로써 저를 비겨보고 저로써 이를 대여보아 마츰내 지의보다는 지나는 현의(懸議)까지도 있을 줄 안다. 부끄럽다. 액수가 많은 것도 아니다. 삼천원내외(三千圓內外)의 금액으로 인하야 이 의심을 가지고도 해결의 도경(道徑)이 얼마까지 미망(迷茫)하단 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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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의 묘산을 보존하는 책임은 조선인의 공동으로 부하할 것이라 은행에만 추탁(推託)할 수 없으나 은행이라고 이 책임권(責任圈)에 제외할 수는 없는 것이며 보전하야 논 뒤라도 구사(舊事)를 징(懲)하고 후래(後來)를 도(圖)하야 사손은 무론이어니와 이씨종문에도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니 마땅히 전조선적으로 공수(公守)하여야 할 것이나 일인(一人)이라도 다 각기 이책(已責)으로 알지 아니하고는 정신의 융결(融結)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번 일을 기괄(機括)로 삼아 충무에 대한 추모와 건봉을 서로서로 욱려(勗厲)하자. 일기(日記), 금대(金帶), 유검(遺劍) 등의 보귀(葆貴), 진습(珍襲), 묘위(墓位), 묘계(墓階), 병풍석(屛風石), 비각(碑閣) 등의 수즙개치(修葺改治) 이보다 진(進)하야 엄식(嚴飾)할 여러가지의 일까지 속행(續行)하여야 한다. 미세한 곳까지라도 추모와 건봉이 있어야 할 것을 깨달으라. 묘산경매문제가 얼마나 중대함을 더한층 감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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