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오성론/서론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1. 오성悟性에의 탐구, 즐겁고 유용함. 오성(understanding)은 저의 고귀함을 위해서라도, 탐구에 노력을 쏟기에 합당한 주제이다. 왜냐하면 오성은 사람을 다른 지각자知覺者의 위에 두는저, 사람이 갖는 모든 우위와 지배력을 부여키 때문이다. 오성은 안구眼球와도 같아, 다른 모든 것을 우리가 보고 인식하게끔 하는 반면, 저 자신은 주목하지 않는다. 오성에 거리를 두고 저를 자신의 대상으로 하는 데에는 기술과 수고가 요要하다. 그러나 이러한 탐구의 행로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를 그토록 어둠에 가두는 것이 무엇일지라도,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 흘려보낼 수 있는 모든 빛,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오성에 대해 얻게 되는 모든 지식은 매우 즐거울 뿐만 아니라, 다른 것에로 우리 사고를 인도하는데 있어서 큰 우위를 부여하리라고.
  2. 계획. 나의 목적은 이러하다. 인지人知의 기원, 확실성, 범위, 더불어 믿음(belief), 의견(opinion), 동의(assent)의 근거(ground)와 정도를 탐구하는 것. 현시점에서는 마음(mind)의 물리적 고찰을 다루지 않겠다. 또한, 마음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 · 어떠한 혼(spirit)의 움직임이나 몸의 변화로 인해, 우리가 기관器官에 감각(sensation)을, 혹은 오성 안에 관념(idea)을 갖게 되는가 · 그러한 관념의 형성에 있어서 어떤 혹은 모든 관념이 물질(matter)에 의존하는가 등을 검토하는데 수고하지 않겠다. 이는 아무리 흥미롭고 재미있다 하더라도 나의 계획의 행로에서 배제시켜 거절해야하는 사색이다. 저가 관여하는 대상에 대해 사용되는 사람의 인식능력을 고찰함이 나의 현 목적에 충분하리라. 또한 만약 내가, 이 역사적이고 평이한 방법으로 우리 오성이 우리가 갖는 사물의 개념(notion)에 이르게 되는 방식을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다면, 인지의 확실성에 어떠한 기준이라도 내릴 수 있다면, 사람들 중에서 보이는 신념(persuasion)―너무나 다양하고, 다르고, 전적으로 모순되면서도, 여기저기에서 확신과 자신을 갖고 주장되어서, 인류의 여러 의견을 일견一見하고, 그들의 대립을 관찰하고, 동시에 의견을 감싸는 맹신과 헌신, 의견을 유지시키는 결의와 열심을 관찰하는 자가, 진실이란 전무全無하거나, 아니면 인류가 그에 대한 일정한 지식에 이르기에 족할 방도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의 근거를 세울 수 있다면, 이 일에 대해 생각함으로서 스스로를 완전히 오용誤用했다고는 생각지 아니하리라.
  3. 방법. 그런고로, 의견과 지식 간의 경계를 찾아내고, 우리가 확지確知하지 못하는 것에 있어 어떠한 기준으로 우리 동의를 조정하고 신념을 완화해야 마땅한지를 검토하는 일은 유익하다. 순서대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행하고자 한다.
    첫째로, 사람이 관찰하고 그의 마음 내에 갖고 있음을 자각하는, 관념 또는 개념(또는 어떻게 부르길 바라던지)의 기원, 그리고 그러한 관념(개념)을 공급받게 되는 길을 탐구하겠다.
    둘째로, 그러한 관념에 의해 오성이 어떤 지식을 갖게 되는지, 또 그 지식의 확실성, 증거, 범위를 보이려고 시도하겠다.
    셋째로, 믿음(faith)이나 의견―즉 우리가 확지確知하지 못하는 어떤 주장의 진실성에 대한 동의―의 본질과 근거를 탐구하겠다. 또 여기서 동의의 까닭과 정도를 검토할 기회를 갖겠다.
  4. 우리 이해(comprehension)의 범위를 앎은 유용함. 이 오성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서 내가 오성의 여러 힘을, 그것들이 미치는 폭을, 그것들이 어느 정도든 어울리는(proportionate) 것들을, 또한 그들이 어디서 우리를 무력화無力化하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사람의 바쁜 마음을 설득해 저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을 다루는 데에 신중을 기하거나, 극의 극한에 달하거든 멈추거나, 검사를 통해 우리 역량의 범위를 초월한다고 밝혀진 것에 대해서는 조용히 무지한 채 머무르게 함에 유용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다면 우리는 보편적인 지식에의 열망으로 인해 무턱태고 의문을 던지거나, 우리 오성에 적합하지 않고, 어떤 명석 판명한 인식도 마음 내에 그릴 수 없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자주 일어났듯이) 아무런 개념도 없는 것에 대한 논쟁으로서 피아彼我 모두를 혼란케 하지 않으리라. 오성이 그 시야를 얼마나 넓힐 수 있고, 확실성을 얻기 위해 어디까지 능력을 지니고 있고, 어떠한 경우에 오로지 판단하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지 밝힐 수 있다면, 우리의 이 상태로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익힐 수 있으리라.
  5. 우리 역량이 우리의 상태와 관심에 적합함. 우리 오성의 이해가 사물의 광대한 범위에 한없이 못 미칠지라도, 그가 우리에게 내려준 우리의 이 저택의 다른 거주자보다 그토록 월등한 지식의 넓이와 정도로 인해 우리에게는 우리 존재의 후한 창조주를 찬미키에 족한 근거가 있겠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는 신이 그들에게 적합하다 생각한 것에 충분하게 만족할 이유가 있다. 신은 그들에게 (성 베드로가 말하듯) pana pros zoen kaieusebeian, 삶의 편이와 덕에 대한 정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었고, 이 삶을 위한 안락한 제공물(provision)과, 더 나은 상태로 이끄는 길을 그들이 발견할 수 있는 범위 내에 두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보편적이거나 완전한 이해에 저들의 지식이 얼마나 못 미치더라도, 그들에게는 저들의 창조주에 대한 지식에게로 인도할 빛이 있으며, 그들은 저들 스스로의 임무를 볼 수 있는 고로, 그 지식은 저들의 가장 큰 관심사를 보장한다. 저들이 대담하게도 자신의 구조(constitution)에 대해 시비를 가리려 들며, 모든 것을 움켜쥘 수 있을 만큼 크지 않다 하여 저들의 손에 내린 축복을 내던지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은 머리를 바삐 굴리고 다양성과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 저들의 손을 놀릴 수 있으리. 우리에게 쓸모가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정신은 대단히 적합한저, 그것에 대해서만 우리의 정신을 사용하면 우리 정신의 협소함에 대해 불평할 큰 이유가 없으리라.
  6. 우리 역량을 앎은 회의懷疑와 나태를 고침. 우리가 자신의 힘을 알 때, 성공의 희망을 품고 착수할 것이 무엇인가를 더 잘 알리라. 또 우리가 자신의 마음의 힘을 잘 살펴보고, 그것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를 얼마라도 어림칠 수 있을 때,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실망하여 묵좌黙坐한 채 생각을 전혀 작동시키지 않거나, 반대로 어떤 것은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을 의문시하고, 모든 앎을 부인否認치도 않으리라.


미완未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