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권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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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9 기장족희존(氣長足姬尊) 신공황후(神功皇后)

9년 봄 2월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중애천황(仲哀天皇))이 축자(筑紫)의 橿일궁(日宮)에서 죽었다. 이 때 황후는 천황이 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다가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고 신의 재앙임을 알아 재물이 많은 보배로운 나라53)를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군신(群臣)과 백료(百寮)들에게 명하여 죄를 빌고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고 소산전읍(小山田邑)에 齌궁(宮)을 다시 지었다.

여름 4월 임인(壬寅) 초하루 갑진(甲辰) 북으로 화전국(火前國) 송포현(松浦縣)에 이르러 옥도리(玉嶋里)의 작은 냇가에서 식사를 하였다. 이 때 황후가 바늘을 구부려 낚시바늘을 만들어 밥알을 미끼로 하고 치마의 실을 풀어서 낚시줄로 하여 물 가운데의 돌 위로 올라가 낚시를 던지고 “짐은 서쪽의 재국(財國)을 얻고자 합니다. 만약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면 물고기가 낚시를 물게 하소서”라고 빌었다. 인하여 낚시대를 드니 비늘이 잔 고기가 걸려 있었다. 이 때 황후가 말하기를 “보기 드문 것이다.”[희견(希見)은 우리말로 매두라지(梅豆邏志)라 한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 곳을 매두라국(梅豆羅國)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송포(松浦)54)라고 하는데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 나라 여인이 매년 4월 상순에는 물속에 낚시를 던져서 은어(銀魚)를 잡는 것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남자는 비록 낚시질을 하더라도 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이미 황후는 신의 가르침이 징험이 있음을 알아서 다시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몸소 서쪽을 치고자55) 하였다. 이에 신전(神田)을 정하여 이를 경작시켰다. 그 때에 나하(儺河)의 물을 끌어다가 신전(神田)을 기름지게 하고자 하여 도랑을 팠는데, 적경강(迹驚岡)에 이르러 커다란 바위가 막고 있어 도랑을 팔 수 없었다. 황후가 무내숙(武內宿)禰를 불러 칼과 거울을 받들고 하늘과 땅의 신에게 기도하여 도랑이 통하기를 구하게 했다. 그러자 천둥과 번개가 쳐 바위를 깨뜨려 물을 통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 도랑을 열전구(裂田溝)라 하였다. 황후는 橿일포(日浦)56)에 돌아와서 머리를 풀고 바닷가에서 “나는 하늘과 땅의 신의 가르침을 받고 황조(皇祖)의 영(靈)을 힘입어 창해(滄海)를 건너가 몸소 서쪽을 치고자 합니다. 그래서 머리를 바닷물에 씻는데 만약 영험이 있다면 머리카락이 저절로 양쪽으로 나뉘도록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곧 바다에 들어가 씻었더니 머리카락이 저절로 나뉘어졌다. 황후는 나뉘어진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었다. 인하여 군신에게 “무릇 군대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이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이다. 안위(安危)와 성패는 반드시 여기에 있다. 지금 정벌할 곳이 있는데 이 일을 여러 신하들에게 맡겨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죄가 그대들에게 있게 되므로 이는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다. 나는 부녀자이고 부초(不肖)하지만 잠시 남자의 모습을 빌려 웅대한 계략을 일으키고자 한다. 위로는 하늘과 땅의 신의 영(靈)을 힘입고 아래로는 군신(群臣)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일으켜 험한 파도를 건너 선박을 정돈하여 재물이 많은 땅57)을 얻고자 한다.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그대들과 함께 공(功)을 얻게될 것이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에게만 죄가 있게 될 것이다. 이미 이런 뜻이 있으니 이를 함께 의논하자”고 하였다. 군신(群臣)이 모두 “황후가 천하를 위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고자 하고 또 죄가 신하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시니 머리를 조아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가을 9월 경오(庚午) 초하루 기묘(己卯) 여러 나라로 하여금 선박을 모으고 군사를 훈련하게 했다. 이 때 군졸(軍卒)들이 잘 모이지 않았으므로 황후가 “반드시 신의 마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대삼륜사(大三輪社)를 세우고 칼과 창을 바치자 군중(軍衆)들이 저절로 모였다. 이에 오옹(吾瓮)의 해인(海人) 오마려(烏摩呂)로 하여금 서해(西海)로 나가서 나라가 있는지 살펴 보도록 했다. 돌아와서 “나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기록(磯鹿)의 해인(海人) 명초(名草)를 보내어 살펴보게 했다. 며칠 뒤 돌아와서 “서북쪽에 산이 있는데 구름이 띠처럼 두르고 있었습니다. 대개 나라가 있는 듯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길일(吉日)을 점쳐서 출발하기까지 며칠이 남았는데, 이 때 황후가 친히 부월(斧鉞)58)을 잡고 3군(軍)에게 명령하기를 “징과 북소리가 절도가 없고 깃발이 뒤섞여 어지러우면 곧 사졸(士卒)들이 정돈되지 않는다. 재물이 많기를 탐하고 사사로이 처자(妻子)의 일을 생각하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이다. 적이 적더라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되며 적이 강하다고 해서 굴복해서도 안된다. 폭력으로 부녀자를 범한 자를 용서하지 말고 스스로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 전쟁에 이기는 자는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요, 도주하는 자는 당연히 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후 신(神)이 가르치기를 “화혼(和魂)은 왕의 몸에 붙어서 목숨을 지킬 것이고, 황혼(荒魂)은 선봉이 되어 군선을 인도할 것이다”라 하였다[화혼(和魂)은 우리말로 이기(珥岐)瀰다마(多摩)라 하고 황혼(荒魂)은 우리말로 아라(阿邏)瀰다마(多摩)라고 한다]. 신(神)의 가르침을 얻고나서 배례(拜禮)하고, 의망오언남수견(依網吾彦男垂見)을 신에게 제사지내는 주재자로 삼았다. 이 때 마침 황후의 산달이었는데 황후가 돌을 들어 허리에 차고 빌며 “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날 이 땅에서 낳게 해주소서”라고 빌었다. 그 돌은 지금 이도현(伊覩縣)의 길가에 있다. 이리하여 황혼(荒魂)을 군(軍)의 선봉으로 하고 화혼(和魂)을 청하여 왕선(王船)에 모셨다.

겨울 10월 기해(己亥) 초하루 신축(辛丑) 화이진(和珥津)으로부터 출발했다. 이 때 바람의 신은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의 신은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다 속의 큰 고기가 모두 떠올라 배를 도왔다. 곧 큰 바람이 순조롭게 불고 배는 물결을 따라 갔으므로 노젓는 데 힘들이지 않고 바로 신라에 도착하였다. 이 때 배를 실은 물결이 멀리 나라 가운데까지 미쳤으니 곧 하늘과 땅의 신들이 모두 도왔음을 알겠다. 신라왕은 이에 두려워 떨며 몸둘 바를 모른채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신라의 건국 이래 일찍이 바닷물이 나라에 넘친 일을 듣지 못했다. 만약 천운(天運)이 다했다면 나라가 바다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가 바다에 가득차고 깃발들이 햇빛에 빛났다. 북과 나팔소리가 나니 산천이 모두 떨었다. 신라왕이 멀리서 바라보고 심상치 않은 군대가 장차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것으로 여겨 두려워하며 싸울 뜻을 잃었다. 잠시후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어니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日本)이라고 하며 성스러운 왕이 있어 천황(天皇)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니 어찌 병사를 일으켜 막을 수 있겠는가”라 하고 곧 흰 기를 들고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흰 끈을 목에 걸어 항복하고59) 도적(圖籍)60)을 봉인하여 왕의 배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인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지금 이후로는 하늘과 땅과 같이 길이 엎드려 사부(飼府)61)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틈없이 봄 가을로 말의 털을 씻는 빗과 말채찍62)을 바치겠습니다. 또한 바다가 먼 것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조(調)를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거듭 맹세하여 “동쪽의 해가 다시 서쪽에서 떠오르지 않는다면, 또한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63)가 오히려 거꾸로 흐르고, 냇돌이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봄 가을의 조공을 거르고 빗과 채찍을 바치지 않거나 게을리하면 하늘과 땅의 신이 함께 토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은 “신라왕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황후는 “처음에 금은의 나라를 주겠다고 한 신의 가르침을 받들고 3군(軍)에 호령하여 ‘스스로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 이미 재국(財國)을 얻었고 또 사람들이 스스로 항복했으니 죽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항복의 결박을 풀고 사부(飼部)로 삼았다. 드디어 그 나라안에 들어가 보물 창고를 봉하고 도적문서(圖籍文書)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후가 가지고 있던 창을 신라왕의 문에 세워 후세의 증거로 삼았다. 그래서 그 창은 지금도 신라왕의 문에 서있다.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64)은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65)를 볼모로 하여 김(金)‧은(銀)‧채색(彩色)‧능(綾)‧라(羅)‧縑견(絹)을 배 80척에 싣고 관군(官軍)을 따르게 했다. 이리하여 신라왕은 항상 80척의 조(調)를 일본국(日本國)에 바쳤는데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이 때 고려(高麗)와 백제(百濟)의 두 나라 국왕66)이 신라가 도적(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세(軍勢)를 살피도록 하였다.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군영(軍營)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약하여 “지금 이후로는 길이 서쪽 번국(蕃國)이 되어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67)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이다. 황후가 신라로부터 돌아왔다.

12월 무술(戊戌) 초하루 신해일(辛亥日) 예전천황(譽田天皇)을 축자(筑紫)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낳은 곳을 우(宇)瀰라고 불렀다.[일설은 다음과 같다.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이 축자(筑紫) 강일궁에 머무르고 있을 때 신이 사(沙)麽현주(縣主)의 조(祖)인 내피고국피고송옥종(內避高國避高松屋種)에게 신탁하여 천황에게 “천황이 만약 보배의 나라를 얻고자 한다면 실제로 주리라”고 깨우쳐 주었다. 다시 말하기를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황후에게 바쳐라”고 하였다. 곧 신의 말을 따라 황후가 거문고를 탔다. 이에 신이 황후에게 신탁하여 가르쳐주기를 “지금 천황이 바라고 있는 나라는 비유하면 사슴의 뿔과 같아서 실속이 없는 나라이다. 지금 천황이 타고 있는 배와 혈호직천립(穴戶直踐立)이 바친 수전(水田), 즉 대전(大田)이란 것을 폐백으로 하여 나에게 제사를 잘 지내면 미녀의 눈썹과 같은 김(金)‧은(銀)이 많은 눈부신 나라를 천황에게 주리라”고 하였다. 이 때 천황이 신에게 “비록 신이라고 하지만 어찌 거짓말을 하는가, 어디에 나라가 있다는 말인가, 또 내가 탄 배를 신에게 바치면 나는 어느 배를 타야하는가, 그러나 어떤 신인지도 모르니 그 이름을 알고 싶다”고대답 하였다. 이 때 신이 그 이름을 일컫기를 “표통웅(表筒雄), 중통웅(中筒雄), 저통웅(底筒雄)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세 신의 이름을 일컫고 또한 거듭하여 “나의 이름은 향(向)匱남문습대력오어혼속협등존(男聞襲大歷五御魂速狹騰尊)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 천황이 황후에게 “듣기 거북한 말을 하는 부인(婦人)이다. 어찌 속협등(速狹騰)68)이라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 신이 천황에게 “왕 그대가 이같이 믿지 않으니 반드시 그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지금 황후가 임신한 아들이 얻게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밤 천황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 그 뒤 황후가 신의 가르침을 따라 제사지냈다. 즉 황후는 남자의 복장을 하고 신라를 정벌하였다. 이 때 신이 (황후에게) 머물며 인도하였으므로 배를 따라 파도가 일어 멀리 신라까지 미쳤다. 이에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69)이 나와서 맞이하여 무릎을 꿇고 왕의 배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신(臣)은 지금 이후로 일본국에 있는 신의 아들에게 내관가(內官家)가 되어 조공을 끊지 않겠습니다”라 하였다. 또 일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왕을 사로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서 왕의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서 기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목베어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머물게 하여 신라의 재상으로 삼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왕의 처가 남편의 주검을 묻은 곳을 몰라서 혼자 재상을 꾀일 생각을 하였다. 곧 재상을 유인하여 “당신이 왕의 주검을 묻은 곳을 가르쳐 준다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고 또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재상이 속이는 말을 믿고 주검을 묻은 곳을 몰래 알려 주었다. 그러자 왕의 처가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여 재상을 죽이고 또 왕의 주검을 파내어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 이 때 재상의 주검을 왕묘의 밑에 묻고 왕의 널을 들어 그 위에 얹고 “높고 낮음의 순서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천황이 듣고 다시 매우 화가 나 크게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군선(軍船)이 바다에 가득차서 나아가니, 이 때 신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 서로 모여 함께 의논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70).

이에 군대를 따라갔던 신 표통남(表筒男)‧중통남(中筒男)‧저통남(底筒男) 세 신이 황후에게 “우리 황혼(荒魂)을 혈문산전읍(穴門山田邑)에서 제사지내도록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 때 혈문직(穴門直)의 조상인 천립(踐立)과 진수련(津守連)의 조상인 전상견숙(田裳見宿)禰가 황후에게 “신(神)이 머물고자 하는 땅을 반드시 받들어 정하여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천립(踐立)을 황혼(荒魂)을 제사지내는 신주(神主)로 삼고 혈문산전읍(穴門山田邑)에 사당(祠堂)을 세웠다. 신라를 친 이듬해 봄 2월에 황후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혈문풍포궁(穴門豊浦宮)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천황의 널을 거두어 바닷길로 서울을 향했다. 이 때 麛판왕(坂王)‧인웅왕(忍熊王)이 천황이 죽고, 또 황후가 서쪽을 정벌하고 천황의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5년 봄 3월 계묘(癸卯) 초하루 기유일(己酉日) 신라왕이 汙례사벌(禮斯伐)과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71) 부라모지(富羅母智) 등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전에 볼모로 와 있던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72)을 돌아가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허지벌한(許智伐旱)을 꾀어 “사신 汙례사벌(禮斯伐)과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등이 나에게 ‘우리 왕이 제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에 연루시켜 처자를 모두 종으로 삼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라건데 잠시 본토에 돌아가서 그 사정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요”라 속이게 하였다. 황태후가 곧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을 딸려 보냈다. 함께 대마(對馬)에 도착하여 鉏해(海)의 수문(水門)73)에 머물렀다. 이 때 신라의 사신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등이 몰래 배와 뱃사공을 나누어 미질한기(微叱旱岐)를 태우고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그리고 풀을 묶어 사람 모습을 만들어 미질허지(微叱許智)의 자리에 두고 거짓으로 병든 사람인 채하고 습진언(襲津彦)에게 “미질허지(微叱許智)가 갑자기 병이 들어서 죽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습진언(襲津彦)이 사람을 시켜 병자를 돌보게 했는데, 속인 것을 알고 신라 사신 세 사람을 붙잡아서 우리 속에 집어넣고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신라에 나아가 도(蹈)鞴진(津)74)에 이르러 초라성(草羅城)75)을 정벌하고 돌아왔다76). 이 때 사로잡힌 사람들이 오늘날의 상원(桑原)과 좌(佐)糜‧고궁(高宮)‧인해(忍海) 4읍의 한인(漢人) 등의 시조이다.

46년(366) 봄 3월 을해(乙亥) 초하루 사마숙(斯摩宿)禰를 탁순국(卓淳國)77)에 보내었다.[사마숙(斯麻宿)禰는 어떤 성씨(姓氏)의 사람인지 모른다] 이 때 탁순왕말금한기(卓淳王末錦旱岐)가 사마숙(斯摩宿)禰에게 “갑자년(甲子年) 7월에 백제인 구(久)氐‧미주류(彌州流)‧막고(莫古)78) 세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이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한 나라가 있음을 듣고 우리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 조공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여기에 왔습니다. 만약 신들에게 길을 통하도록 가르쳐 준다면 우리 왕이 반드시 군왕(君王)에게 덕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때 구(久)氐 등에게 ‘전부터 동쪽에 귀한 나라가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 왕래한 적이 없어 그 길을 알지 못한다. 바다가 멀고 파도가 험하여 큰 배를 타야 겨우 통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길을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그러자 구(久)氐 등이 ‘그렇다면 지금은 갈 수 없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가려면 다시 돌아가서 배를 갖춘 뒤에 가야 하겠습니다’라 하고 ‘만약 귀한 나라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도 알려 주십시요’라 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에 사마숙(斯摩宿)禰는 종자(從者) 이파이(爾波移)와 탁순인(卓淳人) 과고(過古) 두 사람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였다. 이 때 백제 초고왕(肖古王)79)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다섯가지 빛깔의 채견(綵絹) 각 1필과 각궁전(角弓箭) 및 철정(鐵鋌) 40매(枚)를 이파이(爾波移)에게 주었다. 또 보물창고를 열어 여러가지 진기한 것들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에는 이같은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있다. 귀한 나라에 바치고자 하나, 길을 알지 못하여 마음만 있을 뿐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사자(使者)에게 부쳐서 바친다”고 하였다. 이에 이파이(爾波移)가 일을 받들고 돌아와서 지마숙(志摩宿)禰에게 보고했다. 바로 탁순(卓淳)으로부터 돌아왔다.

47년(367) 여름 4월 백제왕이 구(久)氐‧미주류(彌州流)‧막고(莫古)를 보내어 조공하게 했다. 이 때 신라국의 조사(調使)가 구(久)氐와 함께 왔다. 이에 황태후와 태자 예전별존(譽田別尊)이 매우 기뻐하며 “선왕이 바라던 나라 사람들이 지금 와서 조공하니, 천황에게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 슬프도다”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두 나라의 공물을 조사하였더니 신라의 공물은 진기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백제의 공물은 적고 천하여 좋지 않았다. 이에 구(久)氐 등에게 “백제의 공물이 신라에 미치지 못하니 어찌된 것이냐”고 물었다. “우리들이 길을 잃어서 사비신라(沙比新羅)80)에 이르렀는데 신라인들이 우리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 달이 지난 후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 때 구(久)氐 등이 하늘을 향하여 저주하였더니 신라인들이 그 저주를 두려워하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물을 빼앗아 자기 나라의 공물로 하고 신라의 천한 물건을 우리 나라의 공물로 바꾸었습니다. 또 우리들에게 ‘만약 이 일을 말하면 돌아가는 날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久)氐 등은 두려워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리하여 겨우 천조(天朝)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이 때 황태후와 예전별존(譽田別尊)이 신라 사신을 책망하고 천신에게 기도하여 “누구를 백제에 파견하여 일의 사실 여부를 조사시키며, 누구를 신라에 파견하여 그 죄를 물으면 좋겠습니까”라 하였다. 천신이 “무내숙(武內宿)禰로 하여금 의논하도록 하고 천웅장언(千熊長彦)을 사자로 삼으면 소원대로 될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었다[천웅장언(千熊長彦)은 어떤 성씨의 사람인지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일설에는 무장국인(武藏國人)이니 지금의 액전부(額田部) 규본수(槻本首) 등의 시조라고 한다. 『백제기(百濟記)』81)에 직마나나가비(職麻那那加比)跪라고 한 사람은 대개 이 사람인 듯하다]. 이에 천웅장언(千熊長彦)을 신라에 보내어 백제가 바치는 물건을 훔친 것을 질책하였다.

49년(369) 봄 3월 황전별(荒田別)과 녹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구(久)氐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沙白)‧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요”라 하였다. 곧 목라근자(木羅斤資)82)와 사사노(沙沙奴)跪83)에게[이 두 사람은 그 성(姓)을 모르는데 다만 목라근자(木羅斤資)는 백제 장군이다] 정병(精兵)을 이끌고 사백(沙白)‧개로(蓋盧)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比自)㶱‧남가라(南加羅)‧㖨국(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의 7국84)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85)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忱미다례(彌多禮)86)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87)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比利)‧辟중(中)‧포미지(布彌支)‧반고(半古)의 4읍88)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왕 부자(父子)와 황전별(荒田別)‧목라근자(木羅斤資) 등이 의류촌(意流村)89)[지금은 주류수기(州流須祇)라 한다]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천웅장언(千熊長彦)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辟지산(支山)90)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古沙山)91)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아서 백제왕이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년 만년 영원토록 늘 서쪽 번국이라 칭하며 봄 가을로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구(久)氐 등을 딸려서 보냈다.

50년(370) 봄 2월 황전별(荒田別) 등이 돌아왔다. 여름 5월 천웅장언(千熊長彦)과 구(久)氐 등이 백제로부터 이르렀다. 이 때 황태후가 기뻐하며 구(久)氐에게 “바다 서쪽의 여러 한(韓)을 이미 너희 나라에 주었는데 지금 무슨 일로 이리 자주 오느냐”고 물었다. 구(久)氐 등이 “천조(天朝)의 큰 은택이 멀리 우리나라에까지 미쳤으므로 우리 왕이 기쁨에 넘쳐 그 마음을 가눌 수 없어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지극한 정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비록 만세까지라도 어느 해인들 조공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황태후가 명령하여 “너의 말이 훌륭하구나. 이는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라 하고 다사성(多沙城)92)을 더 주어 오고 가는 길의 역(驛)으로 삼게 했다.

51년(371) 봄 3월 백제왕이 또 구(久)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에 황태후가 태자와 무내숙(武內宿)禰에게 “내가 백제국과 교류하여 친하게 지내는 것은 하늘이 이르게 한 것이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진기한 물건들은 전에는 없었던 것인데 해를 거르지 않고 늘 와서 바치니 이런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기쁘다. 내가 있을 때처럼 은혜를 돈독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 해에 천웅장언(千熊長彦)을 구(久)氐 등에게 딸려 백제국에 보냈다. 큰 은혜를 내려 “나는 신의 징험한 바를 따라 처음으로 길을 열고 바다 서쪽을 평정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지금 다시 두텁게 우의를 맺고 길이 은총을 내리리라”고 하였다. 이 때 백제왕 부자(父子)는 함께 이마를 땅에 대고 “귀국(貴國)의 큰 은혜는 하늘과 땅보다 무거우니 어느 날 어느 때인들 감히 잊을 수 있으리요. 성스러운 왕이 위에 있어 해와 달같이 밝고 신이 아래에 있어 산악과 같이 굳세니 길이 서쪽 번국(蕃國)이 되어 끝내 두 마음이 없을 것이오”라 아뢰었다.

52년(372) 가을 9월 정묘(丁卯) 초하루 병자일(丙子日) 구(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와서 칠지도(七枝刀)93) 1자루와 칠자경(七子鏡)94) 1개 및 여러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백제왕의) 계(啓)에 “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곡나철산(谷那鐵山)95)으로부터 나옵니다. 7일 동안 가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멉니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에 길이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손자 침류왕(枕流王)96)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천은(天恩)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토물(土物)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 일러두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이후로 해마다 계속하여 조공하였다.

55년(375) 백제 초고왕(肖古王)이 죽었다.

56년(376) 백제왕자 귀수(貴須)가 왕이 되었다.

62년(382)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이 해에 습진언(襲津彦)을 보내어 신라를 쳤다[『백제기(百濟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오년(壬午年)에 신라가 귀국(貴國)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귀국이 사지비(沙至比)跪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신라인은 미녀 두 사람을 단장시켜 나루에서 맞아 유혹하게 하였다. 사지비(沙至比)跪는 그 미녀를 받아 들이고 오히려 가라국(加羅國)을 쳤다. 가라국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아수지(阿首至)‧국사리(國沙利)‧이라마주(伊羅麻酒)‧이문지(爾汶至) 등이 그 인민(人民)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하여97) 오니 백제는 후대하였다. 가라국왕의 누이 기전지(旣殿至)가 대왜(大倭)로 가서 “천황이 사지비(沙至比)跪를 보내어 신라를 토벌하게 했는데 신라 미녀를 받아 들이고 (왕명을) 저버리고 토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와 인민들이 모두 유리(流離)하게 되어 걱정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으므로 와서 아룁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목라근자(木羅斤資)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라(加羅)98)에 모여 그 사직(社稷)을 복구시켰다고 한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사지비(沙至比)跪가 천황이 노한 것을 알고 몰래 돌아와 스스로 숨어 있었다. 그 누이가 황궁에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비(比)跪가 몰래 사인(使人)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릴지 어떨지를 물어 보았다. 누이는 꿈에 가탁하여 “오늘 밤 꿈에 사지비(沙至比)跪를 보았습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비(比)跪가 어찌 감히 오느냐”라고 하였다. 누이가 천황의 말을 전하였더니 비(比)跪는 면할 수 없음을 알고 바위굴에 들어가서 죽었다].

64년(384) 백제국 귀수왕(貴須王)이 죽었다. 왕자 침류왕(枕流王)이 즉위하였다.99)

65년(385) 백제 침류왕이 죽었다. 왕자 아화(阿花)가 어렸으므로 숙부 진사(辰斯)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100)




69) 宇流助富利智干(우류조부리지간); 신라왕이라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5 列傳(렬전)에 나오는 于老(우로)가 아닐까 한다. 이에 의하면 于老(우로)는 奈解尼師今(나해니사금)(196-229)의 아들로 舒弗邯(서불감)의 관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宇流助富利智干(우류조부리지간)이라 표기한 듯하다.

70) 이는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5 昔于老傳(석우로전)의 于老傳說(우로전설)에는 이와는 달리 우로의 妻(처)가 왜의 使臣(사신)을 醉(취)하게 하여 불태워 죽임으로써 남편의 원수를 갚자 倭人(왜인)들이 분노하여 金城(김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71) 毛麻利叱智(모마리질지);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5 朴堤上傳(박제상전)에 박제상을 혹은 毛末(모말)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으므로 毛麻利叱智(모마리질지)가 곧 박제상을 지칭한 것으로 보고 있다.

72) 微叱許智伐旱(미질허지벌한); 신공황후 攝政前紀(섭정전기) 仲哀天皇(중애천황) 9년 10월조에는 微叱己知波珍干岐(미질기지파진간기)로 나오는데 奈勿王(나물왕)의 아들 未斯欣(미사흔)(또는 美海(미해), 未叱喜(미질희))을 가리킨다. 미사흔이 왜에 볼모로 간 시기는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實聖王(실성왕) 원년(402)으로 되어 있고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奈勿王(나물왕) 36년(390)으로 되어 있다.

73) 鉏海(해)의 水門(수문); 막연히 신라 방면의 바다를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대한해협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대마도 北端(북단)의 鰐浦(악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74) 蹈(도)鞴津(진); 오늘날의 부산 다대포가 아닐까 추측됨.

75) 草羅城(초라성); 오늘날의 梁山(양산)지방인 듯.

76)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5 朴堤上傳(박제상전)에 의하면 堤上(제상)이 미사흔을 왜에서 탈출시킨 후 제상은 木島(목도)에 유배되었다가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으며 미사흔은 신라로 돌아오자 6부의 환영을 받았다고 하였다. 實聖王代(실성왕대)의 倭兵(왜병) 침입기사는 4년 4월, 6년 3월에 보이며 7년 2월에도 왜의 침공에 대비한 기사, 14년 8월에 왜인과 風島(풍도)에서 싸워 이긴 기사 등이 보인다.

77) 卓淳國(탁순국); 欽明天皇(흠명천황) 5년 3월조에는 㖨淳(순)이라고 나오는데 대개 오늘날의 大邱(대구)로 비정되어 왔으나 최근 경남 창원지방에 있었던 가야연맹의 한 小國(소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탁순국은 6세기 전반에 高靈(고령)의 대가야국을 주축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에 소속되어 있다가 534년에서 541년 사이에 신라에 복속되어 멸망하였으며 欽明紀(흠명기)에 나오는 阿利斯等(아리사등) 또는 己能末多干岐(기능말다간기)는 창원 탁순국의 마지막 지배자로 추정된다고 한다.

78) 莫古(막고);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24 近仇首王(근구수왕)의 즉위 이전에 즉 近肖古王(근초고왕) 24년(369) 고구려 故國川王(고국천왕)이 백제를 침략하자 태자인 近仇首王(근구수왕)이 나가 싸웠는데 근구수왕이 계속 진격하자 장군 莫古解(막고해)가 道家(도가)의 말을 빌어 중지할 것을 요청한 적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이 동일인이 아닐까 추측된다.

79) 肖古王(초고왕);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23에 보이는 肖古王(초고왕)이 아니라 권 24에 보이는 13대 왕인 近肖古王(근초고왕)(346-375)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80) 沙比新羅(사비신라); 신라의 歃良州(량주)가 있던 오늘날의 梁山(양산)지방을 가리키는 듯하다.

81) 百濟記(백제기); 『日本書紀(일본서기)』에 인용되어 있는 百濟係(백제계) 史書(사서)의 하나로 神功紀(신공기)에서 雄略紀(웅략기)에 걸쳐 인용되어 있다. 따라서 『백제기』의 내용은 주로 백제 近肖古王(근초고왕)에서 蓋鹵王(개로왕)에 이르는 시기의 기사로서 백제 前期(전기)의 사실이 인용되어 있어서 『百濟本紀(백제본기)』보다는 앞서 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서기』에 인용되어 있는 『백제기』의 내용은 설화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평가되며 細註(세주)에 뿐만 아니라 본문에 인용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나 倭(왜)를 貴國(귀국)으로 표현하는 등 백제계 史書(사서)로서의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82) 木羅斤資(목라근자); 木羅(목라)는 木(목)劦이라고도 쓰는데 백제의 8姓大族(성대족)의 하나이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 木(목)劦不麻甲背(부마갑배), 木(목)劦眯淳(순), 木(목)劦今敦(금돈), 木(목)劦施德文次(시덕문차) 등이 보이며 木羅斤資(목라근자)의 아들로 木滿致(목만치)가 보이는데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25 蓋鹵王(개로왕) 21년(475)조에 “文周與木(문주여목)劦滿致(만치) 祖彌桀取(조미걸취)(木(목)劦 祖彌皆複姓(조미개복성) 隋書以木(수서이목)劦爲二姓(위이성) 未知孰是(미지숙시)) 南行焉(남행언)”이라는 기록에 나오는 木(목)劦滿致(만치)와 木滿致(목만치)는 동일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83) 沙沙奴(사사노)跪; 未詳(미상)

84) 7國(국); 7국의 위치에 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나와 있는데 우선 比自(비자)㶱은 경남 창령지방을 가리키는 듯한데, 眞興王巡狩碑(진흥왕순수비) 가운데 하나인 昌寧碑(창령비)(561년 건립)에 比子伐(비자벌)로 나오며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4 地理志(지리지)에 나오는 比自火郡(비자화군)(또는 比斯伐(비사벌))이 곧 比自(비자)㶱과 같은 곳으로 믿어진다. 南加羅(남가라)는 곧 낙동강 河口(하구)인 金海(김해)에 있던 本加耶(본가야)를 지칭한 것으로 믿어지는데 본가야는 532년에 신라에 정식으로 병합되었다. 南加羅(남가라)의 명칭은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1 金庾信傳(금유신전)에 인용되어 있는 庾信碑(유신비)에 ‘則南加耶始祖首露(칙남가야시조수로)’라는 기록이 보인다. 㖨國(국)은 㖨己呑國(기탄국)과 같은 것으로 大邱(대구) 부근의 慶山(경산)지방으로 추정해 왔으나, 최근 이를 경남의 靈山(령산), 密陽(밀양) 일대의 한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6세기 전반까지 가야연맹을 구성하고 있던 小國(소국)으로 529년을 전후한 2-3년 사이에 가장 먼저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한다. 安羅(안라)는 경남 咸安(함안)으로 보고 있는데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4 지리지에 咸安郡(함안군)을 阿尸良國(아시량국)(또는 阿那加耶(아나가야))이라 하였고 『三國遺事(삼국유사)』 권 1의 五伽耶(오가야)조에는 阿羅(아라)(또는 耶(야))伽耶(가야)를 당시의 咸安(함안)이라고 하였다. 多羅(다라)는 경남 陜川(합천)지역에 있던 가야 소국으로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4 지리지 江陽郡(강양군)조에 본래 大良(대량)(또는 耶(야))州郡(주군)인데 경덕왕 때에 이름을 바꾸었으며 지금의 陜州(합주)라고 하였다. 卓淳(탁순)은 대개 오늘날의 大邱(대구) 부근으로 보아 왔으나 이를 경남 창원지방에 있던 가야 소국으로 보는 새로운 견해가 있다. 加羅(가라)는 경북 高靈(고령)지방에 있던 大加耶(대가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7국 平定(평정)의 주체는 왜가 아니라 百濟軍(백제군)의 가야지역에 대한 작전을 기록한 것으로 이 때 가야 여러 나라는 백제의 세력권 속에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85) 古奚津(고해진); 古奚(고해)는 『三國志(삼국지)』 東夷傳(동이전) 馬韓(마한)조에 보이는 狗奚國(구해국)으로서 오늘날의 전남 康津(강진)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狗奚國(구해국)을 전남 海南(해남)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86) 忱彌多禮(미다례); 應神天皇(응신천황) 8년조의 百濟記(백제기)에도 보이는데 『隋書(수서)』 등에 耽羅(탐라)로 기록된 오늘날의 제주도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앞의 古奚津(고해진)의 중심되는 부락으로서 康津(강진) 일대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87) 貴須(귀수); 近仇首王(근구수왕)을 가리킨다.

88) 4邑(읍); 4邑(읍)의 위치에 관해서는 대개 이를 전라도 지방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布彌支(포미지)와 辟中(중)은 각각 오늘날의 羅州(라주)와 寶城(보성)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이는 백제 近肖古王(근초고왕)(346-375)이 馬韓(마한)을 멸하여 전라도 남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천관우는 比利(비리) 등 4읍을 比利(비리)‧辟中(중)‧布彌(포미)‧支半(지반)‧古四(고사)의 5읍으로 읽어 이를 각각 扶安(부안)(保安(보안))‧金堤(금제)‧井邑(정읍)‧扶安(부안)‧井邑(정읍)(古阜(고부))에 비정하였다.

89) 意流村(의류촌); 백제의 始祖(시조) 溫祚(온조)가 도읍을 정했던 尉禮城(위례성)과 音(음)이 비슷하므로 백제국의 聖地(성지)로서 王都(왕도) 漢城(한성)을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90) 辟支山(지산); 백제의 옛 지명으로 오늘날의 전북 김제로 비정된다. 『三國志(삼국지)』 魏志(위지) 東夷傳(동이전)에 보이는 馬韓(마한)의 한 국가인 辟卑離國(비리국), 『南齊書(남제서)』 百濟傳(백제전)에 보이는 辟中(중),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보이는 辟城(성)‧碧骨(벽골)과 같은 곳으로 짐작된다.

91) 古沙山(고사산);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6 지리지에 古阜郡(고부군)을 본래 백제의 古(고)眇(沙(사)의 잘못인 듯)夫里郡(부리군)이라 하였으므로 古沙山(고사산)도 오늘날의 전북 古阜(고부)지방으로 비정하고 있다.

92) 多沙城(다사성); 蟾津江(섬진강) 河口(하구) 부근의 오늘날의 河東(하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4 지리지에 河東郡(하동군)을 본래 韓多沙郡(한다사군)이었다고 하였다.

93) 七枝刀(칠지도); 7개의 가지가 달린 칼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백제에서 바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제의 近肖古王(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 일본 奈良縣(나양현) 天理市(천리시) 石上神宮(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이른바 七枝(칠지)(支(지))刀(도)가 바로 이것이라고 믿어지는데 이 刀面(도면)의 양쪽에 모두 69자의 銘文(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에 의하면 이 칼은 泰和(태화) 4년에 백제왕이 倭(왜)의 侯王(후왕)에게 下賜(하사)할 목적으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당시 백제와 倭國(왜국)과의 친교관계를 짐작케 해주는 것이다. 이 泰和(태화) 4년을 일본 학계에서는 東晉(동진)의 太和(태화) 4년(369)으로 보고 있는데 이에 대해 北魏(북위) 太和(태화) 4년(480)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銘文(명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94) 七子鏡(칠자경); 보름달과 같이 둥근 형태의 거울인 듯한데 七曜紋(칠요문)이 있는 거울 또는 七鈴鏡(칠령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藝文類聚(예문유취)』의 天部(천부) 梁(양) 簡文帝(간문제)의 望月(망월)의 詩(시)에 “形同七子鏡(형동칠자경) 影類九秋霜(영류구추상)”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奈良時代(나량시대)까지의 거울은 일반적으로 圓形(원형)이므로 七子鏡(칠자경)도 원형 거울로 추정된다.

95) 谷那鐵山(곡나철산); 당시 백제 王都(왕도)가 오늘날의 서울 부근이었고 나라 서쪽에 江(강)이 있다고 한 기록의 강은 臨津江(임진강), 禮成江(예성강)으로 추정되므로 谷那(곡나)는 이 두 강의 상류에 있는 황해도 谷山郡(곡산군)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96) 枕流王(침류왕); 『三國史記(삼국사기)』에 의하면 枕流王(침류왕)은 近仇首王(근구수왕)의 元子(원자)로서 384-385년 2년간 在位(재위)하였고 元年(원년)에 불교를 수용하였다.

97) 가야사에서 가야의 국왕이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혹 근초고왕대의 백제가 가야 서부지역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98) 加羅(가라); 여기에 나오는 加羅(가라)가 구체적으로 김해의 본가야를 일컫는 것인지 아니면 고령의 대가야를 일컫는 것인지 또는 다른 가야 소국을 가리키는지는 잘 알 수 없다.

99) 貴須王(귀수왕)은 『삼국사기』의 近仇首王(근구수왕)(375-384)을 일컫는 것으로 믿어지는데 이에 의하면 근구수왕은 近肖古王(근초고왕)의 아들로서 王太子(왕태자) 시절부터 父王(부왕)인 近肖古王(근초고왕)의 정복사업을 크게 도왔으며 즉위 후에도 父王(부왕)의 사업을 착실히 계승하여 3년(377) 10월에는 그 자신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한 일도 있었는데, 사기에는 10년(384) 4월에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近仇首王(근구수왕)을 이어 즉위한 枕流王(침류왕)(384-385)은 近仇首王(근구수왕)의 元子(원자)로서 母(모)는 阿(아)尒夫人(부인)이며 아버지를 이어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100)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25에 辰斯王(진사왕)에 관하여 近仇首王(근구수왕)의 仲子(중자)이며 枕流王(침류왕)의 아우인데 침류왕이 죽자 太子(태자)가 어렸으므로 叔父(숙부)인 辰斯(진사)가 즉위했다고 하였다. 王子(왕자) 阿花(아화)는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백제 제 17대 왕인 阿莘王(아신왕)(또는 阿芳(아방))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즉 『三國史記(삼국사기)』에 阿莘王(아신왕)(392-405)은 침류왕의 元子(원자)였는데 父王(부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으므로 叔父(숙부)인 辰斯(진사)가 즉위했으나 辰斯王(진사왕)이 在位(재위) 8년만에 죽자 阿莘王(아신왕)이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日本書紀(일본서기)』에는 진사왕이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되어 있고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왕위 계승이 순조로웠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 것이 다르며, 또 『日本書紀(일본서기)』의 年代(년대)는 120年(년)을 내려야 『三國史記(삼국사기)』의 辰斯王(진사왕) 卽位年代(즉위년대)와 일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