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권10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권 10 응신천황(應神天皇) (예전천황(譽田天皇))

(즉위전기(卽位前紀)) 예전천황(譽田天皇)(응신천황(應神天皇))은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 (중애천황(仲哀天皇))의 넷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기장족희존(氣長足姬尊)(신공황후(神功皇后))이다. 천황(天皇)은 (신공(神功))황후(皇后)가 신라(新羅)를 정벌하던 해인 경신년(庚辰年)(중애천황(仲哀天皇) 9년) 겨울 12월에 축자(筑紫)의 문전(蚊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사물을 깨달아 보는 것이 깊고 원대하였으며, 하는 행동은 절도가 있었고 성스러운 모습은 남다름이 있었다. 황태후(皇太后)가 섭정한 지 3년 되던 해에 황태자(皇太子)가 되었다[그 때 나이가 3세였다]. 처음 천황이 뱃속에 있을 때, 하늘과 땅의 신이 삼한(三韓)을 주었다. 태어났을 때 굳은살이 팔뚝 위에 나 있어서 마치 그 모양이 화살통(병:ほむた)과 같았는데, 이것은 황태후가 남장(男裝)을 하고 화살통을 매고 있던 모양과 비슷하였다[초(肖)는 우리말로 아예(阿叡)라 한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예전(譽田)(ホムタ)천황(天皇)이라 하였다[옛날 사람들은 병(화살통)을 「포무다(褒武多)」라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처음에 천황(天皇)이 태자(太子)가 되었을 때 월국(越國)에 가서 각록(角鹿)의 笥반대신(飯大神)에게 제사하였는데, 그 때 대신(大神)과 태자(太子)가 서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래서 대신(大神)을 거래사별신(去來紗別神)이라 부르고, 태자(太子)를 예전별존(譽田別尊)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므로 대신(大神)의 본래 이름은 예전별신(譽田別神)이고, 태자의 원래 이름은 거래사별존(去來紗別尊)이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나, 다른 데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잘 알 수 없다].

391 (3년) 이 해101) 백제(百濟)의 진사왕(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貴國)(일본(日本))의 천황(天皇)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102), 기각숙(紀角宿)禰・우전시대숙(羽田矢代宿)禰・석천숙(石川宿)禰・목(木)菟숙(宿)禰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百濟國)에서는 진사왕(辰斯王)을 죽여 사죄하였다.103) 기각숙네(紀角宿)禰 등은 아화(阿花)를 왕으로 세우고104) 돌아왔다.

395 7년 가을 9월 고려인(高麗人)・백제인(百濟人)・임나인(任那人)・신라인(新羅人)이 함께 래조(來朝)하였다. 그 때 무내숙네(武內宿)禰에게 명하여 여러 한인(韓人)들을 이끌고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때문에 이 연못을 이름하여 한인지(韓人池)105)라 불렀다.

396 8년 봄 3월 백제인(百濟人)이 래조(來朝)하였다[『백제기(百濟記)』에는, “아화왕(阿花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貴國)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106) (일본(日本)이) 우리의 침미다례(枕彌多禮) 및 현남(峴南)・지침(支侵)・곡나(谷那)・동한(東韓)의 땅107)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直支)108)를 천조(天朝)(일본조정)에 보내어 선왕(先王)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397 9년 여름 4월 무내숙네(武內宿)禰를 축자(筑紫)에 보내어 백성을 감찰하게 하였다. 이 때 무내숙(武內宿)禰의 동생 감미내숙(甘美內宿)禰는 형을 폐하고자 천황에게, “무내숙(武內宿)禰는 항상 천하를 엿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축자(筑紫)에 있으면서 비밀리에 모의하여, ‘홀로 축자(筑紫)를 나누고 삼한(三韓)을 불러들여 나에게 조회하도록 한 다음 장차 천하를 지배하겠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라고 참소하였다. 이에 천황은 즉시 사자를 파견하여 무내숙(武內宿)禰를 죽이게 하였다. 그러자 무내숙(武內宿)禰는 탄식하며·····.

402 14년 봄 2월 백제왕(百濟王)이 봉의공녀(縫衣工女)를 바쳤다. 진모진(眞毛津)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오늘날 래목의봉(來目衣縫)의 시조(始祖)이다.

402 (14년) 이 해 궁월군(弓月君)109)이 백제(百濟)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臣)은 우리나라 120현(縣)의 인부(人夫)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인(新羅人)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加羅國)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을 파견하여 궁월(弓月)의 인부(人夫)를 가라(加羅)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403 15년 가을 8월 임술(壬戌) 초하루 정묘(丁卯) 백제왕(百濟王)이 아직기(阿直伎)110)를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곧 경(輕)111)의 산비탈 부근에 있는 마굿간에서 길렀는데, 아직기(阿直伎)로 하여금 사육을 맡게 하였다. 때문에 말 기르는 곳을 이름하여 구판(廐坂)이라고 한다. 아직기(阿直伎)는 또 경전(經典)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太子)인 菟도치랑자(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때 천황(天皇)은 아직기(阿直伎)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왕인(王仁)112)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상모야군(上毛野君)의 조상인 황전별(荒田別)과 무별(巫別)을 백제(百濟)에 보내어 왕인(王仁)을 불렀다. 아직기(阿直伎)는 아직기사(阿直岐史)의 시조(始祖)이다.

404 16년 봄 2월 왕인(王仁)이 왔다. 태자(太子) 菟도치랑자(道稚郞子)는 스승으로 모시고 왕인(王仁)에게서 여러 전적(典籍)들을 배웠는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른바 왕인(王仁)이라는 사람은 서수(書首)113) 등의 시조(始祖)이다.

404 (16년) 405 이 해 백제(百濟)의 아화왕(阿花王)이 죽었다. 천황(天皇)은 직지왕(直支王)114)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동한(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동한(東韓)은 감라성(甘羅城)115)・고난성(高難城)116)・이림성(爾林城)117)이다].

404 (16년) 8월 평군목(平群木)菟숙(宿)禰・적호전숙(的戶田宿)禰를 가라(加羅)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조(詔)를 내려, “습진언(襲津彦)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반드시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新羅)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목(木)菟숙(宿)禰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新羅)의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新羅王)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자복(自服)하였다. 그래서 궁월(弓月)의 인부(人夫)를 거느리고 습진언(襲津彦)과 함께 돌아왔다.

420 420 25년 백제(百濟)의 직지왕(直支王)이 죽었다. 곧 아들 구이신(久爾辛)118)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나이가 어리므로 목만치(木滿致)119)가 국정(國政)을 잡았는데, 왕의 어머니와 서로 정을 통하여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천황(天皇)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불렀다[『백제기(百濟記)』에는, “목만치(木滿致)는 목라근자(木羅斤資)120)가 신라(新羅)를 칠 때에 그 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낳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공(功)으로 임나(任那)에서 전횡(專橫)하다가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귀국(貴國)(일본(日本))에 갔다가 돌아와 천조(天朝)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의 국정을 잡았는데, 권세의 높기가 세상을 덮을 정도였다. 그러나 천조(天朝)에서는 그의 횡포함을 듣고 그를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423 28년 가을 9월 고려왕(高麗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121) 그리고 표(表)를 올렸는데, 그 표(表)에 “고려왕(高麗王)은 일본국(日本國)에 교(敎)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 때 태자(太子)인 菟도치랑자(道稚郞子)는 그 표(表)를 읽고 노하여 고려(高麗)의 사자를 꾸짖었다. 그리고 그 표문(表文)이 무례하다고 하여 표(表)를 파기하였다.

426 31년 가을 8월 여러 신하들에게 조(詔)를 내려, “관선(官船) 가운데 고야(枯野)라고 하는 것은 이두국(伊豆國)에서 바친 배이다. 그런데 이 배는 썩어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관용(官用)으로 쓰인 공(功)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하여야 그 배의 이름이 끊이지 않고 후세에 전해지도록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조(詔)를 받고 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그 배의 재목(材木)을 땔감으로 하여 소금을 굽게 하였다. 그래서 500광주리(롱(籠))의 소금을 얻어 여러 나라에 두루 나누어 주고는 배를 만들게 하였다. 이에 여러 나라에서는 한꺼번에 500척의 배를 만들어 바쳤다. 그것을 모두 무고(武庫)의 수문(水門)에 모아 놓았다. 이 때 신라(新羅)의 조공 사신이 모두 무고(武庫)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신라(新羅) 사신의 숙소에서 갑자기 불이 나 모아 놓은 배에까지 번져 많은 배가 타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인(新羅人)을 책망하였다. 신라왕(新羅王)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즉시 뛰어난 장인(匠人)을 바쳤다. 이들이 저명부(猪名部) 등의 시조(始祖)이다·····.

37년 봄 2월 무오(戊午) 초하루 아지사주(阿知使主)・도가사주(都加使主)122)를 오(吳)나라123)에 보내어 봉공녀(縫工女)를 구하게 하였다. 아지사주(阿知使主) 등은 고려국(高麗國)을 지나서 오(吳)나라로 가고자 하여, 먼저 고려(高麗)에 도착하였으나 (오(吳)나라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길을 아는 사람을 고려(高麗)에 구하니, 고려왕(高麗王)은 구례파(久禮波)와 구례지(久禮志) 두 사람을 딸려 보내어 안내자로 삼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오(吳)나라에 이를 수 있었다. 오(吳)의 왕은 공녀(工女) 형원(兄媛)・제원(弟媛)・오직(吳織)・혈직(穴織) 등 4명의 여자를 주었다.

39년 봄 2월 백제(百濟)의 직지왕(直支王)124)이 누이 신제도원(新齊都媛)을 보내어 섬기게 하였다. 신제도원(新齊都媛)은 7명의 여자를 이끌고 와서 귀화하였다.



1) 素(소)잔鳴尊(명존) : 거친 男神(남신) 혹은 出雲國(출운국) 飯石郡(반석군) 및 紀伊郡(기이군) 在田郡(재전군)에 있는 須佐(수좌)라는 곳의 主神(주신)이다. 신화에 의하면, 伊(이)장諾尊(락존)의 아들로 根國(근국)을 다스리라는 아버지의 命(명)을 어기고 高天原(고천원)에서 난폭한 짓을 일삼았기 대문에 추방되어 出雲國(출운국)에 내려와 八岐(팔기) 大蛇(대사)를 물리치고 草艸(초초)+雉劍(치검)을 얻어 天照大神(천조대신)에게 바쳤다고 한다.

2) 脚摩乳(각마유).手摩乳(수마유) : 出雲國(출운국)의 神(신)으로 奇稻田媛(기도전원)의 부모이다.

3) 韓(한)서劍(검) : 十握劍(십악검)이라고도 한다. 명칭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전래된 小刀(소도)로 보인다.

4) 草(초)치劍(검) : 天照大神(천조대신)이 내려주었다는 3種(종)의 神器(신기) 중의 하나이다. 본래 이름은 天叢雲劍(천총운검)이었는데, 이는 素(소)잔鳴尊(명존)이 죽였던 큰 뱀이 있는 곳 위에 항상 구름이 덮혀 있었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다. 景行天皇(경행천황) 때에 日本武尊(일본무존)이 이 칼을 휴대하고 東國(동국)을 정벌하던 중, 駿河(준하)의 燒津(소진)에서 적군의 火攻(화공)을 이 칼로 풀을 잘라내어 위기를 모면했으므로 草(초)치劍(검)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日本武尊(일본무존)이 원정에서 돌아오던 길에 尾張國(미장국) 熱田(열전)에 두었으므로 이후에는 그곳에서 보관하고 제사를 받들었다고 한다.

5) 出雲國(출운국) : 지금의 島根縣(도근현) 동부에 해당하는데 동쪽으로는 鳥取縣(조취현), 남쪽으로는 廣島縣(광도현), 서쪽으로는 島根縣(도근현) 서부, 북쪽으로는 동해에 접해있는 지역이다.

6) 파川(천) : 仁多郡(인다군) 般通山(반통산)에서 발원하여 島根縣(도근현) 동쪽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흘러가 肉道湖(육도호)에 흘러 들어가는 지금의 非(비)+文伊川(문이천)이다.

7) 千座置戶(천좌치호) : 신에게 잘못을 빌기 위하여 많은 祭物(제물)을 바치고 속죄하는 것으로, 千位置戶(천위치호)라고도 한다.

8) 曾尸茂梨(증시무리) : 신라의 옛 이름인 徐伐(서벌)과 같은 뜻으로 지금의 경주 지방이라는 견해와 牛頭州(우두주) 즉 강원도 춘천지방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9) 鳥上峯(조상봉) : 島根縣(도근현) 仁多郡(인다군) 般通山(반통산)의 옛 지명인 듯하다.

10) 筑紫(축자) : 지금의 .... 筑前(축전),筑後(축후)를 합한 지역의 옛 명칭이다. <<萬葉集(만엽집)>>에는 都久紫(도구자), 都久志(도구지)로 표기하였다.

11) 大八洲國(대팔주국) : 伊(이)장諾尊(락존)과 伊(이)장염尊(존)이 만들었다고 하는 8개의 큰 섬으로 일본 전국을 가리킨다.

12) 紀伊國(기이국) : 현재의 和歌山縣(화가산현) 전부와 三重縣(삼중현) 일부 지역으로 산과 나무가 많아 木國(목국)이라고도 한다.

13) 韓鄕(한향)의 섬에는 金銀(김은)이 있다 : 韓鄕(한향)은 신라, 가야지역을 의미하는 듯하다. <<三國志(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진한에 철이 많이 난다고 하며, <<古事記(고사기)>> 와 <<日本書紀(일본서기)>>에서 “金銀彩色(김은채색) 多在其國(다재기국)”, “西方有國(서방유국) 金銀爲本(김은위본)”, “金銀之國(김은지국)”, “金銀蕃國(김은번국)”이라 하여 신라를 金銀(김은)의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신라의 國號(국호)인 徐伐(서벌) 혹은 徐羅伐(서라벌)과 金官加耶(김관가야)의 異稱(이칭)인 須那羅(수나라)가 이 지방의 金銀(김은) 혹은 철생산과 관련시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末松保和(말송보화),<<任那興亡史(임나흥망사)>>,1949.138쪽)

14) 熊成峯(웅성봉) : 紀伊國(기이국)과 出雲國(출운국)에 ‘구마나리’란 지명이 있으며, 우리나라의 熊津(웅진)도 ‘구마나리’로 칭하여졌다. 素(소)잔鳴尊(명존)의 행적에 관한 이설이 많기 때문에 그가 살았다는 熊成峯(웅성봉)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15) 任那國(임나국): 금관가야 또는 가야연맹체의 異稱(이칭)이다. 임나라는 말이 가장 먼저 보이는 우리나라의 자료는 廣開土王陵碑(광개토왕릉비)인데 ‘任那加羅(임나가라)’라 하였고, 『三國史記(삼국사기)』 권46 列傳(렬전)6 强首傳(강수전)에 의하면 강수가 ‘臣本任那加良人(신본임나가량인)’이라 하였다. 한편 鳳林寺眞境大師碑(봉림사진경대사비)에는 “俗姓新金氏(속성신금씨) 其先任那王族(기선임나왕족) ··· 遠祖興武大王(원조흥무대왕)”이라 하였다. 『日本書紀(일본서기)』欽明天皇(흠명천황) 23년(562) 봄 정월조에 의하면, “통털어 말하면 임나라 하고, 따로 말하면 加羅國(가라국)·安羅國(안라국)·斯岐國(사기국)·多羅國(다라국)·卒麻國(졸마국)·古嵯國(고차국)·子他國(자타국)·散半下國(산반하국)·乞飡國(걸손국)·稔禮國(임례국)이니 합하면 10국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가야국의 명칭은 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加耶(가야)를 사용하나, 각종 저술에서는 伽倻(가야), 伽耶(가야), 加羅(가라), 伽羅(가라), 迦羅(가라), 呵羅(가라), 加良(가량), 駕洛(가락), 伽落(가락)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16) 蘇那曷叱知(소나갈질지):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에 의하면 都怒我(도노아)(쓰누가)는 都怒賀(도노하) 혹은 都奴加(도노가)로 되어 있는데 모두 蘇那曷(소나갈)(소나가)의 同音異寫(동음이사)이다. 蘇那(소나)를 都怒(도노)·都努(도노)·都奴(도노)로 표현한 것은 이마에 뿔(일본어로 쓰노)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데서 윤색한 것이다. 정말 뿔이 아니라 머리에 쓴 것이 뿔과 같이 보인 때문인데, 낙동강 연안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새 깃털 모양의 冠(관)을 쓴 弁辰(변진)·가야 계통의 首長(수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曷(갈)과 都怒我阿羅斯等(도노아아라사등)의 我(아)는 加夫都(가부도)(가후도)에 해당하는 말로서 冠帽(관모)를 뜻하는 韓語(한어) 갈(kar), 갓(kat)의 寫音(사음)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한편 叱智(질지)는 三韓(삼한)의 渠帥(거수)의 이칭인 臣智(신지)·秦支(진지)라고 이해되고 있다(李丙燾(이병도),「蘇那曷叱智考(소나갈질지고)」, 『韓國古代史硏究(한국고대사연구)』, 博英社(박영사), 1976, pp. 339-350).

17) 筑紫國(축자국): 지금의 大阪(대판) 부근인데, 筑前(축전)과 筑後(축후)를 합한 지역의 옛 명칭이다. 『萬葉集(만엽집)』에서는 都久紫(도구자)·都久志(도구지)로 표현하였다.

18) 北阻海(북조해): 임나의 북쪽이 바다로 막혀있다는 것은 『日本書紀(일본서기)』 찬자의 잘못인 듯하다. 한편 이 구절을 근거로 임나를 오늘날의 對馬島(대마도)로 비정하는 예도 있다(田溶新(전용신), 『 完譯(완역) 日本書紀(일본서기)』, 一志社(일지사), 1990, p. 104).

19) 鷄林(계림): 신라를 가리킨다. 원래는 慶北(경북) 慶州(경주)시 교동에 있는 신라 경주 김씨의 발상지이다. 『三國史記(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脫解尼師今(탈해니사금) 9년 춘3월조에 의하면 흰 닭이 울고 있던 나무 위에 걸린 금궤에서 작은 아이가 태어났는데 閼智(알지)라 이름하고 성은 김씨라 하였으며, 始林(시림)을 鷄林(계림)이라 이름을 바꾸고 국호로 삼았다.

20) 越國(월국): 古代(고대) 國郡制(국군제) 시행 이전의 北陸(북륙)지방의 범칭이다. 현재의 福井(복정)·石川(석천)·富山(부산)·新潟(신석)의 4현을 가리킨다.

21) 笥飯浦(반포): 福井縣(복정현) 敦賀市(돈하시) 氣比神社(기비신사) 부근이다.

22) 意富加羅(의부가라): 意富(의부)를 ‘오호’로 音讀(음독)하여 大(대)의 뜻으로 풀이하여 대가야를 지칭한다고 보기도 한다(李丙燾(이병도), 앞글, p. 340).

23) 都怒我阿羅斯等(도노아아라사등): 阿羅(아라)는 于斯岐阿利叱智干岐(우사기아리질지간기)의 阿利(아리)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閼川(알천)·閼智(알지)의 閼(알), 廣開土王陵碑(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阿利水(아리수)의 아리와 상통하는 말로 大(대)를 뜻하는 것으로 추측된다(李丙燾(이병도), 앞글, p. 345).

24) 于斯岐阿利叱智干岐(우사기아리질지간기): 干岐(간기)는 干(간)(khan), 汗(한)(han)으로, 삼한사회에서는 帥長(수장)을 칭하였으며 동북아시아 민족 사이에서는 군주를 부르는 공통어로 쓰였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서는 旱岐(한기)라고도 칭했다.

25) 日本國(일본국): 『日本書紀(일본서기)』 찬자의 윤색인 듯하다. 『三國史記(삼국사기)』 권6 文武王(문무왕) 10년(679) 12월조에는 “倭國更號日本(왜국경호일본) 自言近日所出以爲名(자언근일소출이위명)”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新唐書(신당서)』 東夷傳(동이전) 日本條(일본조)의 “日本(일본) 古倭奴也(고왜노야) ··· 咸亨元年(함형원년)(670) 遣使賀平高麗(견사하평고려) 後稍習夏音(후초습하음) 惡倭名(악왜명) 更號日本(갱호일본) 使者自言國近日所出以爲名(사자자언국근일소출이위명)”이라 한 기사에서 비롯한 것으로, 일본국이라는 국호가 이 무렵에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26) 穴門(혈문): 古代(고대) 國郡制(국군제) 시행 이전에 지금의 山口縣(산구현) 지방에 있었던 나라로, 畿內(기내)와 筑紫(축자)를 연결하는 內海(내해)교통의 요충이었다.

27) 御間城(어간성): 일본음으로 미마끼. 任那(임나)(nima-na)를 mima-na로 발음한 것으로, 고대 우리말에서 n과 m이 서로 넘나드는 음운법칙에 따른 것이다.

28) 難波(난파): 현재의 大阪市(대판시)이다.

29) 豊國(풍국): 豊前(풍전)·豊後(풍후)를 합한 지역의 古稱(고칭)으로, 『古事記(고사기)』의 大八島生成神話(대팔도생성신화)에서는 筑紫島(축자도)가 筑紫國(축자국)·豊國(풍국)·肥國(비국)·熊曾國(웅증국)의 넷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풍국이라는 명칭은 고대 國郡制(국군제)의 성립과 함께 소멸하고, 대신 풍전국·풍후국으로 칭해졌다.

30) 國前郡(국전군): 후일의 豊後國(풍후국) 國埼郡(국기군)으로, 지금의 東國(동국) 東部(동부)·西國(서국) 東部(동부)·豊後高田市(풍후고전시) 및 杵築市(저축시)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31) 天日槍(천일창) : 『古事記(고사기)』 應神天皇條(응신천황조)에는 天之日矛(천지일모)라고 이르고 있는데 귀화의 동기와 경로 등은 위의 기사와 차이가 있다. 즉 “又昔(우석) 有新羅國主之子(유신라국주지자) 名謂天之日矛(명위천지일모) 是人人蔘渡來也(시인인삼도래야) 所以人蔘渡來者(소이인삼도래자) 新羅國有一沼(신라국유일소) 名爲阿具奴摩(명위아구노마) 此沼之邊(차소지변) 一賤女晝寢(일천녀주침)‧‧‧姙娠生赤玉(임신생적옥)”이라 하고, 그녀가 일본으로 도망하자 찾아나서 그녀가 숨어있는 難波(난파)(지금의 大阪(대판) 지방)에 도착하였으나, 神(신)의 저지로 多遲摩國(다지마국)(但馬國(단마국))에 정착함으로써 인삼을 전래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일면 『日本書紀(일본서기)』 垂仁天皇(수인천황) 2년조 都怒我阿羅斯等(도노아아라사등)에 대한 일설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기원전 무렵 辰韓人(진한인)의 일본 이주설화로 풀이하거나(李丙燾(이병도), 『韓國史大觀(한국사대관)』, 1964, p.64 ; 金錫亨(금석형), 『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 三品彰英(삼품창영),「天之日矛歸化年代攷(천지일모귀화년대고)」,『日鮮神話傳說(일선신화전설)の硏究(연구)』, 1943), 『三國遺事(삼국유사)』 延烏郞(연오랑) 細烏女(세오녀) 설화와 비교하여 태양신화의 이동 전설로 보기도 한다(蘇在永(소재영), 「延烏郞細烏女說話考(연오랑세오녀설화고)」, 『국어국문학』 36, 1967 ; 李寬逸(이관일), 「延烏郞細烏女說話(연오랑세오녀설화)의 한 硏究(연구)」, 「국어국문학』 55-57, 1972).

32) 神籬(신리) : 『日本書紀(일본서기)』 권2, 神代(신대) 下(하) 9段(단)의 高皇産靈尊(고황산영존)의 勅(칙)에 ‘天尊神籬(천존신리)’가 보이는데, 이는 屋內外(옥내외)에 특별히 만든 곳으로서 神(신)이 강립하는 장소를 뜻한다. 여기에서 天日槍(천일창)이 가지고 왔다는 神籬(신리)는 신이 강림하는 장소에 까는 일종 돗자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33) 七物(칠물) : 『古事記(고사기)』 應神天皇條(응신천황조)에는 「玉津寶(옥진보)』에 근거하여 “珠二貫(주이관) 又振浪比禮(우진랑비례)‧切浪比禮(절랑비례)‧振風比禮(진풍비례)‧切風比禮(절풍비례)‧ 又奧津鏡(우오진경)‧邊津鏡(변진경) 幷八種也(병팔종야)”라 하고, 이들은 但馬國(단마국) 出石郡(출석군) 出石鄕(출석향)에 있는 伊豆志坐神社(이두지좌신사)의 八前大神(팔전대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34) 但馬國(단마국) : 지금의 兵庫縣(병고현) 북부지방.

35) 播磨國(파마국) 肉粟邑(육속읍) : 지금의 兵庫縣(병고현) 播粟郡(파속군).

36) 日本國(일본국) : 『日本書紀(일본서기)』 찬자의 윤색인 듯하다. 『三國史記(삼국사기)』 권6, 문무왕 10년(670) 12월조에는 “倭國更號日本(왜국갱호일본) 自言(자언) 近日所出以爲名(근일소출이위명)”이라 하였는데, 이는 『新唐書(신당서)』 東夷傳(동이전) 日本條(일본조) “日本(일본) 古倭奴也(고왜노야)‧‧‧天智死(천지사) 子天武立(자천무립) 子摠持立(자총지립) 咸亨元年(함형원년)(670) 遣使賀平高麗(견사하평고려) 後稍習夏音(후초습하음) 惡倭名(악왜명) 更號日本(갱호일본) 使者自言(사자자언) 國近日所出(국근일소출) 以爲名(이위명)”의 기사에서 비롯한 것으로서 日本國(일본국)이란 국호가 이 때에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37) 菟道河(도하) : 지금의 宇治川(우치천)을 일컬음.

38) 近江國(근강국) : 지금의 滋賀縣(자하현) 坂田郡(판전군) 近江町(근강정) 箕浦(기포) 부근.

39) 吾名邑(오명읍) : 지금의 滋賀縣(자하현) 蒲生郡(포생군) 龍王町(룡왕정) 綾戶(능호)의 蒲生郡(포생군) 長村(장촌) 神社(신사) 부근으로 추측됨.

40) 若狹國(약협국) : 近江國(근강국)의 북부지역.

41) 鏡村(경촌) : 지금의 滋賀縣(자하현) 蒲生郡(포생군). 한때 鏡宿(경숙)으로 일컬었는데 鏡村谷(경촌곡)은 鏡山(경산)의 동쪽 기슭에 있다.

42) 陶人(도인) : 토기를 제작하는 사람. 鏡村谷(경촌곡)이 있는 鏡山(경산) 가까이에 須惠(수혜)란 곳이 있는데, 5세기 무렵 한반도에서 전래된 陶質土器(도질토기) 須惠器(수혜기)는 이곳의 이름과 관련된 듯하며, 天日槍(천일창)을 따라와 鏡村谷(경촌곡)에 도착하였다는 陶人(도인)도 그러한 관련에서 기록에 전승된 것으로 짐작된다. 須惠器(수혜기)의 일본 전래에 대해서는 崔鍾圭(최종규), 「美術上(미술상)으로 본 韓日關係(한일관계)-陶質土器(도질토기)와 須惠器(수혜기)-」,(『古代韓日文化交流(고대한일문화교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참조.

43) 太耳(태이) : 『日本書紀(일본서기)』 권6, 垂仁天皇(수인천황) 88년 7월조에는 ‘前津耳(전진이)’‘前津見(전진견)’이라 하였다.

44) 田道間守(전도간수) : 垂仁天皇(수인천황) 3년 일본에 귀화한 신라 왕자 天日槍(천일창)의 高孫(고손). 『日本書紀(일본서기)』 권6, 垂仁天皇(수인천황) 3년조에 ‘天日槍(천일창)-但馬諸助(단마제조)-但馬日楢杵(단마일유저)-淸彦(청언)-田道間守(전도간수)’의 家系(가계)가 보인다.

45) 常世國(상세국) : 속인이 왕래할 수 없는 理想鄕(리상향)으로서, 사물이 변하지 않고 사람들이 不老(부로) 不死(부사)하는 樂土(락토)를 일컫는다.

46) 8竿(간) 8縵 : 『延喜內膳式(연희내선식)』 新嘗祭供御料條(신상제공어료조)에 “橘子卄四蔭(귤자입사음) 鉾橘子十枝(귤자십지)”라고 보이는데, 竿(간)은 꼬챙이로 꼽은 모양을, 縵은 줄 같은 것으로 이은 모양을 나타낸 것으로 짐작되므로, ‘8竿(간) 8縵’은 田道間守(전도간수)가 가지고 온 橘(귤)의 수량을 일컬은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47) 弱水(약수) : 신선이 살고 있는 곳에 있다는 강으로, 기러기 털도 가라앉을 정도여서 가죽으로 만든 배만이 이를 건널 수 있다고 한다.

48) 三宅連(삼택련) : 『古事記(고사기)』에도 “三宅連之祖(삼택련지조) 名多遲麻毛理(명다지마모리)”라는 구절이 보이며, 신라 왕자 天之日矛(천지일모)로부터 내려오는 家系(가계)를 전하고 있다.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 右京諸蕃(우경제번)‧同攝津諸蕃條(동섭진제번조)에도 “新羅國王子天日(신라국왕자천일)鉾命之後也(명지후야)”라 하였으며, 同族(동족)으로서 橘守(귤수)‧糸井造(정조) 등이 있다.

49) 熊襲(웅습); 오늘날 九州(구주) 남부의 日向(일향)‧大隅(대우)‧薩摩(살마) 지방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50) 寶國(보국); 신라를 가리켜 寶國(보국)이라 한 듯하다.

51) 杼衾新羅國(금신라국); 杼는 白布(백포)를 말하며 衾(금)은 寢具(침구)를 의미하는 말로, 이는 신라의 産物(산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52) 新羅役(신라역); 神功(신공) 攝政(섭정) 前紀(전기)의 이른바 신라 정벌을 가리킨다.

53) 財寶國(재보국); 신라를 가리킴.

54) 松浦(송포); ‘마쯔라’라고 읽는데 梅豆邏(매두라)는 ‘메즈라’라고 읽으므로 이와 音(음)이 비슷했으므로 松浦(송포)에 比定(비정)한 듯하다.

55) 西征(서정); 서쪽 정벌이란 곧 신라를 정벌하겠다는 뜻.

56) 橿日浦(일포); 福岡市(복강시) 香椎(향추).

57) 財國(재국); 신라를 가리킴.

58) 斧鉞(부월); 원래 형벌의 도구로서 중국에서는 天子(천자)가 정벌할 때 大將(대장)에게 주어서 誅殺(주살)을 마음대로 하게 했다고 한다.

59) 흰 끈을 목에 건다는 표현은 곧 自殺(자살)하고 싶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항복을 뜻하는 것임.

60) 圖籍(도적); 토지의 도면과 인민의 호적으로 이를 封印(봉인)하여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토지와 인민에 대한 지배권의 상실을 의미함.

61) 飼部(사부); 말을 기르고 훈련시키며 馬具(마구)와 말먹이 등을 관장하는 부서인데 飼部(사부)가 되겠다는 표현은 항복하여 비천한 일을 하겠다는 뜻으로 곧 신라가 일본의 복속국이 되겠다는 의미.

62) 馬梳(마소) 馬鞭(마편); 말의 털을 빗는 솔과 말채찍인데 말을 기르는데 필요한 도구로서 이를 바치겠다는 것은 곧 비천한 일을 自任(자임)하는 것임.

63) 阿利那禮河(아리나예하); 경주의 閼川(알천) 또는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백제 도성하의 阿利水(아리수)로 보기도 하는데 막연히 강을 일컫는 보통명사로 보기도 한다.

64) 波沙寐錦(파사매금): 波沙(파사)는 『삼국사기』의 신라 5대 婆沙尼師今(파사니사금)과 이름이 같지만 동일인이라고 볼 수는 없을 듯하며 寐錦(매금)은 광개토왕비와 智證大師碑(지증대사비) 등에도 보이는데 尼師今(니사금)과 같은 왕호의 일종이다.

65) 微叱己知波珍干岐(미질기지파진간기); 微叱己知(미질기지)는 제15대 奈勿王(내물왕)의 아들인 未斯欣(미사흔)(또는 美海(미해))을 일컫는 것이라 생각되며 波珍干岐(파진간기)는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 4위인 波珍飡(파진손)(또는 波珍干(파진간), 海干(해간))이라 여겨진다. 5년 3월 조에는 微叱許智(미질허지) 伐旱(벌한)이라고 보이며 欽明(흠명) 21년 9월 조에는 신라 使人(사인)으로 彌至己知(미지기지) 奈末(나말)이 보이는데 同名異人(동명이인)이라 생각된다.

66) 高麗(고려) 百濟(백제) 二國王(이국왕): 고려는 물론 高句麗(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이며 『日本書紀(일본서기)』에 고구려의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神功皇后(신공황후) 攝政前紀(섭정전기) 仲哀(중애) 9년 이른바 신라 征討(정토)기사의 맨끝에 나오는 것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으며, 事實(사실)을 기재한 것은 雄略紀(웅략기) 20년(478)의 고구려의 백제 공격기사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 보고 있다. 백제의 이름이 『日本書紀(일본서기)』에 처음 보이는 것은 고구려와 동시인 神功皇后(신공황후) 攝政前紀(섭정전기) 仲哀(중애) 9년의 이른바 신라 征討(정토)기사의 맨 끝에 나오는 것이며 이어서 神功皇后(신공황후) 攝政(섭정) 46년에 斯麻宿(사마숙)禰의 傔人(인)이 백제에 도착했다는 기사이다. 이 46년조의 기사를 『日本書紀(일본서기)』의 紀年(기년)을 120년 뒤로 내려서 丙寅年(병인년)(366)의 일이라고 한다면 일본과 백제의 최초의 교섭기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67) 內官家屯倉(내관가둔창); 미야게의 말뜻은 御宅(어택) 즉 屋舍(옥사) 倉庫(창고)에 대한 敬稱(경칭)인데 『日本書紀(일본서기)』에서 말하는 屯倉(둔창)은 국가제도로서의 미야게를 일컫는 것으로 大化(대화) 前代(전대)에는 朝廷(조정) 직할의 농업경영지 또는 直轄領(직할령)이라고 할 수 있다. 官家(관가)는 屯倉(둔창)과는 별개의 것으로 欽明紀(흠명기) 등에 보이는 用例(용례)는 모두 백제나 任那諸國(임나제국)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군사기지라기 보다는 일본 朝廷(조정)에 대한 貢納國(공납국)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68) 速狹騰尊(속협등존)이라는 말은 하야사아가리라고 읽을 수 있는데 天照大神(천조대신)을 천상으로 보내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하늘에 오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므로 곧 천황이 어찌 속협등이라 하는가라고 비난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는 速狹騰(속협등)을 하야사아가리라고 읽을 수 있는데 사는 神稻(신도)를 뜻하고 아가리는 죽음을 뜻하므로 神稻(신도)가 枯死(고사)한다는 의미가 되어 천황의 급작스런 죽음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한다.

69) 宇流助富利智干(우류조부리지간); 신라왕이라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5 列傳(렬전)에 나오는 于老(우로)가 아닐까 한다. 이에 의하면 于老(우로)는 奈解尼師今(나해니사금)(196-229)의 아들로 舒弗邯(서불감)의 관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宇流助富利智干(우류조부리지간)이라 표기한 듯하다.

70) 이는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5 昔于老傳(석우로전)의 于老傳說(우로전설)에는 이와는 달리 우로의 妻(처)가 왜의 使臣(사신)을 醉(취)하게 하여 불태워 죽임으로써 남편의 원수를 갚자 倭人(왜인)들이 분노하여 金城(김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71) 毛麻利叱智(모마리질지);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5 朴堤上傳(박제상전)에 박제상을 혹은 毛末(모말)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으므로 毛麻利叱智(모마리질지)가 곧 박제상을 지칭한 것으로 보고 있다.

72) 微叱許智伐旱(미질허지벌한); 신공황후 攝政前紀(섭정전기) 仲哀天皇(중애천황) 9년 10월조에는 微叱己知波珍干岐(미질기지파진간기)로 나오는데 奈勿王(나물왕)의 아들 未斯欣(미사흔)(또는 美海(미해), 未叱喜(미질희))을 가리킨다. 미사흔이 왜에 볼모로 간 시기는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實聖王(실성왕) 원년(402)으로 되어 있고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奈勿王(나물왕) 36년(390)으로 되어 있다.

73) 鉏海(해)의 水門(수문); 막연히 신라 방면의 바다를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대한해협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대마도 北端(북단)의 鰐浦(악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74) 蹈(도)鞴津(진); 오늘날의 부산 다대포가 아닐까 추측됨.

75) 草羅城(초라성); 오늘날의 梁山(양산)지방인 듯.

76)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5 朴堤上傳(박제상전)에 의하면 堤上(제상)이 미사흔을 왜에서 탈출시킨 후 제상은 木島(목도)에 유배되었다가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으며 미사흔은 신라로 돌아오자 6부의 환영을 받았다고 하였다. 實聖王代(실성왕대)의 倭兵(왜병) 침입기사는 4년 4월, 6년 3월에 보이며 7년 2월에도 왜의 침공에 대비한 기사, 14년 8월에 왜인과 風島(풍도)에서 싸워 이긴 기사 등이 보인다.

77) 卓淳國(탁순국); 欽明天皇(흠명천황) 5년 3월조에는 㖨淳(순)이라고 나오는데 대개 오늘날의 大邱(대구)로 비정되어 왔으나 최근 경남 창원지방에 있었던 가야연맹의 한 小國(소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탁순국은 6세기 전반에 高靈(고령)의 대가야국을 주축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에 소속되어 있다가 534년에서 541년 사이에 신라에 복속되어 멸망하였으며 欽明紀(흠명기)에 나오는 阿利斯等(아리사등) 또는 己能末多干岐(기능말다간기)는 창원 탁순국의 마지막 지배자로 추정된다고 한다.

78) 莫古(막고);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24 近仇首王(근구수왕)의 즉위 이전에 즉 近肖古王(근초고왕) 24년(369) 고구려 故國川王(고국천왕)이 백제를 침략하자 태자인 近仇首王(근구수왕)이 나가 싸웠는데 근구수왕이 계속 진격하자 장군 莫古解(막고해)가 道家(도가)의 말을 빌어 중지할 것을 요청한 적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이 동일인이 아닐까 추측된다.

79) 肖古王(초고왕);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23에 보이는 肖古王(초고왕)이 아니라 권 24에 보이는 13대 왕인 近肖古王(근초고왕)(346-375)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80) 沙比新羅(사비신라); 신라의 歃良州(량주)가 있던 오늘날의 梁山(양산)지방을 가리키는 듯하다.

81) 百濟記(백제기); 『日本書紀(일본서기)』에 인용되어 있는 百濟係(백제계) 史書(사서)의 하나로 神功紀(신공기)에서 雄略紀(웅략기)에 걸쳐 인용되어 있다. 따라서 『백제기』의 내용은 주로 백제 近肖古王(근초고왕)에서 蓋鹵王(개로왕)에 이르는 시기의 기사로서 백제 前期(전기)의 사실이 인용되어 있어서 『百濟本紀(백제본기)』보다는 앞서 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서기』에 인용되어 있는 『백제기』의 내용은 설화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평가되며 細註(세주)에 뿐만 아니라 본문에 인용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나 倭(왜)를 貴國(귀국)으로 표현하는 등 백제계 史書(사서)로서의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82) 木羅斤資(목라근자); 木羅(목라)는 木(목)劦이라고도 쓰는데 백제의 8姓大族(성대족)의 하나이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 木(목)劦不麻甲背(부마갑배), 木(목)劦眯淳(순), 木(목)劦今敦(금돈), 木(목)劦施德文次(시덕문차) 등이 보이며 木羅斤資(목라근자)의 아들로 木滿致(목만치)가 보이는데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25 蓋鹵王(개로왕) 21년(475)조에 “文周與木(문주여목)劦滿致(만치) 祖彌桀取(조미걸취)(木(목)劦 祖彌皆複姓(조미개복성) 隋書以木(수서이목)劦爲二姓(위이성) 未知孰是(미지숙시)) 南行焉(남행언)”이라는 기록에 나오는 木(목)劦滿致(만치)와 木滿致(목만치)는 동일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83) 沙沙奴(사사노)跪; 未詳(미상)

84) 7國(국); 7국의 위치에 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나와 있는데 우선 比自(비자)㶱은 경남 창령지방을 가리키는 듯한데, 眞興王巡狩碑(진흥왕순수비) 가운데 하나인 昌寧碑(창령비)(561년 건립)에 比子伐(비자벌)로 나오며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4 地理志(지리지)에 나오는 比自火郡(비자화군)(또는 比斯伐(비사벌))이 곧 比自(비자)㶱과 같은 곳으로 믿어진다. 南加羅(남가라)는 곧 낙동강 河口(하구)인 金海(김해)에 있던 本加耶(본가야)를 지칭한 것으로 믿어지는데 본가야는 532년에 신라에 정식으로 병합되었다. 南加羅(남가라)의 명칭은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1 金庾信傳(금유신전)에 인용되어 있는 庾信碑(유신비)에 ‘則南加耶始祖首露(칙남가야시조수로)’라는 기록이 보인다. 㖨國(국)은 㖨己呑國(기탄국)과 같은 것으로 大邱(대구) 부근의 慶山(경산)지방으로 추정해 왔으나, 최근 이를 경남의 靈山(령산), 密陽(밀양) 일대의 한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6세기 전반까지 가야연맹을 구성하고 있던 小國(소국)으로 529년을 전후한 2-3년 사이에 가장 먼저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한다. 安羅(안라)는 경남 咸安(함안)으로 보고 있는데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4 지리지에 咸安郡(함안군)을 阿尸良國(아시량국)(또는 阿那加耶(아나가야))이라 하였고 『三國遺事(삼국유사)』 권 1의 五伽耶(오가야)조에는 阿羅(아라)(또는 耶(야))伽耶(가야)를 당시의 咸安(함안)이라고 하였다. 多羅(다라)는 경남 陜川(합천)지역에 있던 가야 소국으로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4 지리지 江陽郡(강양군)조에 본래 大良(대량)(또는 耶(야))州郡(주군)인데 경덕왕 때에 이름을 바꾸었으며 지금의 陜州(합주)라고 하였다. 卓淳(탁순)은 대개 오늘날의 大邱(대구) 부근으로 보아 왔으나 이를 경남 창원지방에 있던 가야 소국으로 보는 새로운 견해가 있다. 加羅(가라)는 경북 高靈(고령)지방에 있던 大加耶(대가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7국 平定(평정)의 주체는 왜가 아니라 百濟軍(백제군)의 가야지역에 대한 작전을 기록한 것으로 이 때 가야 여러 나라는 백제의 세력권 속에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85) 古奚津(고해진); 古奚(고해)는 『三國志(삼국지)』 東夷傳(동이전) 馬韓(마한)조에 보이는 狗奚國(구해국)으로서 오늘날의 전남 康津(강진)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狗奚國(구해국)을 전남 海南(해남)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86) 忱彌多禮(미다례); 應神天皇(응신천황) 8년조의 百濟記(백제기)에도 보이는데 『隋書(수서)』 등에 耽羅(탐라)로 기록된 오늘날의 제주도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앞의 古奚津(고해진)의 중심되는 부락으로서 康津(강진) 일대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87) 貴須(귀수); 近仇首王(근구수왕)을 가리킨다.

88) 4邑(읍); 4邑(읍)의 위치에 관해서는 대개 이를 전라도 지방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布彌支(포미지)와 辟中(중)은 각각 오늘날의 羅州(라주)와 寶城(보성)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이는 백제 近肖古王(근초고왕)(346-375)이 馬韓(마한)을 멸하여 전라도 남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천관우는 比利(비리) 등 4읍을 比利(비리)‧辟中(중)‧布彌(포미)‧支半(지반)‧古四(고사)의 5읍으로 읽어 이를 각각 扶安(부안)(保安(보안))‧金堤(금제)‧井邑(정읍)‧扶安(부안)‧井邑(정읍)(古阜(고부))에 비정하였다.

89) 意流村(의류촌); 백제의 始祖(시조) 溫祚(온조)가 도읍을 정했던 尉禮城(위례성)과 音(음)이 비슷하므로 백제국의 聖地(성지)로서 王都(왕도) 漢城(한성)을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90) 辟支山(지산); 백제의 옛 지명으로 오늘날의 전북 김제로 비정된다. 『三國志(삼국지)』 魏志(위지) 東夷傳(동이전)에 보이는 馬韓(마한)의 한 국가인 辟卑離國(비리국), 『南齊書(남제서)』 百濟傳(백제전)에 보이는 辟中(중),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보이는 辟城(성)‧碧骨(벽골)과 같은 곳으로 짐작된다.

91) 古沙山(고사산);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6 지리지에 古阜郡(고부군)을 본래 백제의 古(고)眇(沙(사)의 잘못인 듯)夫里郡(부리군)이라 하였으므로 古沙山(고사산)도 오늘날의 전북 古阜(고부)지방으로 비정하고 있다.

92) 多沙城(다사성); 蟾津江(섬진강) 河口(하구) 부근의 오늘날의 河東(하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4 지리지에 河東郡(하동군)을 본래 韓多沙郡(한다사군)이었다고 하였다.

93) 七枝刀(칠지도); 7개의 가지가 달린 칼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백제에서 바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제의 近肖古王(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 일본 奈良縣(나양현) 天理市(천리시) 石上神宮(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이른바 七枝(칠지)(支(지))刀(도)가 바로 이것이라고 믿어지는데 이 刀面(도면)의 양쪽에 모두 69자의 銘文(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에 의하면 이 칼은 泰和(태화) 4년에 백제왕이 倭(왜)의 侯王(후왕)에게 下賜(하사)할 목적으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당시 백제와 倭國(왜국)과의 친교관계를 짐작케 해주는 것이다. 이 泰和(태화) 4년을 일본 학계에서는 東晉(동진)의 太和(태화) 4년(369)으로 보고 있는데 이에 대해 北魏(북위) 太和(태화) 4년(480)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銘文(명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94) 七子鏡(칠자경); 보름달과 같이 둥근 형태의 거울인 듯한데 七曜紋(칠요문)이 있는 거울 또는 七鈴鏡(칠령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藝文類聚(예문유취)』의 天部(천부) 梁(양) 簡文帝(간문제)의 望月(망월)의 詩(시)에 “形同七子鏡(형동칠자경) 影類九秋霜(영류구추상)”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奈良時代(나량시대)까지의 거울은 일반적으로 圓形(원형)이므로 七子鏡(칠자경)도 원형 거울로 추정된다.

95) 谷那鐵山(곡나철산); 당시 백제 王都(왕도)가 오늘날의 서울 부근이었고 나라 서쪽에 江(강)이 있다고 한 기록의 강은 臨津江(임진강), 禮成江(예성강)으로 추정되므로 谷那(곡나)는 이 두 강의 상류에 있는 황해도 谷山郡(곡산군)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96) 枕流王(침류왕); 『三國史記(삼국사기)』에 의하면 枕流王(침류왕)은 近仇首王(근구수왕)의 元子(원자)로서 384-385년 2년간 在位(재위)하였고 元年(원년)에 불교를 수용하였다.

97) 가야사에서 가야의 국왕이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혹 근초고왕대의 백제가 가야 서부지역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98) 加羅(가라); 여기에 나오는 加羅(가라)가 구체적으로 김해의 본가야를 일컫는 것인지 아니면 고령의 대가야를 일컫는 것인지 또는 다른 가야 소국을 가리키는지는 잘 알 수 없다.

99) 貴須王(귀수왕)은 『삼국사기』의 近仇首王(근구수왕)(375-384)을 일컫는 것으로 믿어지는데 이에 의하면 근구수왕은 近肖古王(근초고왕)의 아들로서 王太子(왕태자) 시절부터 父王(부왕)인 近肖古王(근초고왕)의 정복사업을 크게 도왔으며 즉위 후에도 父王(부왕)의 사업을 착실히 계승하여 3년(377) 10월에는 그 자신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한 일도 있었는데, 사기에는 10년(384) 4월에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近仇首王(근구수왕)을 이어 즉위한 枕流王(침류왕)(384-385)은 近仇首王(근구수왕)의 元子(원자)로서 母(모)는 阿(아)尒夫人(부인)이며 아버지를 이어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100)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25에 辰斯王(진사왕)에 관하여 近仇首王(근구수왕)의 仲子(중자)이며 枕流王(침류왕)의 아우인데 침류왕이 죽자 太子(태자)가 어렸으므로 叔父(숙부)인 辰斯(진사)가 즉위했다고 하였다. 王子(왕자) 阿花(아화)는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백제 제 17대 왕인 阿莘王(아신왕)(또는 阿芳(아방))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즉 『三國史記(삼국사기)』에 阿莘王(아신왕)(392-405)은 침류왕의 元子(원자)였는데 父王(부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으므로 叔父(숙부)인 辰斯(진사)가 즉위했으나 辰斯王(진사왕)이 在位(재위) 8년만에 죽자 阿莘王(아신왕)이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日本書紀(일본서기)』에는 진사왕이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되어 있고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왕위 계승이 순조로웠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 것이 다르며, 또 『日本書紀(일본서기)』의 年代(년대)는 120年(년)을 내려야 『三國史記(삼국사기)』의 辰斯王(진사왕) 卽位年代(즉위년대)와 일치하게 된다.

101)是歲(시세) : 이 해는 壬辰年(임신년)이다. 그러나 百濟(백제)의 阿花(아화)(莘(신))王(왕)이 즉위한 해는 392년 壬辰年(임진년)이므로, 書紀(서기) 紀年(기년)을 2巡(순)을 수정하면 『三國史記(삼국사기)』의 기사와 일치하게 된다.

102)百濟(백제)의 辰斯王(진사왕)이····예의를 잃었으므로 : ‘貴國(귀국)에 예의를 잃었다’는 표현은 應神紀(응신기) 8년조 注文(주문)을 통하여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百濟(백제)가 日本(일본)의 半島政策(반도정책)에 따르지 않을 때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이 기사의 경우는 百濟(백제)의 對高句麗(대고구려)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즉 당시 辰斯王代(진사왕대)은 高句麗(고구려)의 南下政策(남하정책)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죽던 해인 辰斯王(진사왕) 8년 7월에는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에 “高句麗王德談(고구려왕덕담)(廣開土王(광개토왕)) 帥兵四萬(수병사만) 來攻北鄙(래공북비) 陷石峴等十餘城(함석현등십여성) 王聞德談能用兵(왕문덕담능용병) 不得出拒(부득출거) 漢水北諸部落(한수북제부락) 多沒焉(다몰언)”이라 되어 있는 바와 같이, 高句麗(고구려) 廣開土王(광개토왕)에게 漢水(한수) 以北(이북)의 諸城(제성)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103)이로 말미암아····사죄하였다 : 辰斯王(진사왕)의 죽음에 대하여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 辰斯王(진사왕) 8년조에는 “王田於狗原(왕전어구원) 經旬不返(경순부반) 十一月(십일월) 薨於狗原行宮(훙어구원행궁)”이라고 되어 있다. 이 문장의 표현형식으로 미루어 辰斯王(진사왕)이 불시에 고의적으로 죽임을 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書紀(서기)에 보이는 이 기록은 그 진상을 전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辰斯王(진사왕)의 즉위에 대하여는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에 “太子(태자)(阿花(아화))少(소) 故叔父辰斯卽位(고숙부진사즉위)”라고 되어 있고, 書紀(서기) 神功皇后條(신공황후조)에 “王子阿花年少(왕자아화년소) 叔父辰斯奪立爲王(숙부진사탈립위왕)”이라고 되어 있어서, 즉위에 이르기까지 조카 阿花(아화)와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辰斯王(진사왕)의 죽음은 이와 같은 왕위계승상의 문제 및 당시 百濟(백제)의 對高句麗(대고구려)정책과 그에 따른 日本(일본)의 대응 등과 크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104)阿花(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 阿花王(아화왕)에 대하여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에는, “阿莘王(아신왕)[或云(혹운) 阿芳(아방)] 枕流王之元子(침류왕지원자)·····王薨時年少(왕훙시년소) 故叔父辰斯繼位(고숙부진사계위) 八年薨(팔년훙) 卽位(즉위)”라고 되어 있고, 『三國遺事(삼국유사)』 王曆(왕력)에는, “第十七阿莘王(제십칠아신왕) 一作河芳(일작하방) 辰斯子(진사자) 壬辰立(임진립) 治十五年(치십오년)”이라고 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阿花(아화)와 阿莘(아신)・阿芳(아방)・河芳(하방)을 비교해보면, 花(화)와 芳(방)은 뜻이 통하고, 音(음) 또한 비슷하다. 그러나 莘(신)은 花(화)와 음이나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莘(신)은 華(화)의 誤字(오자)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阿花(아화) 또는 阿華(아화)라 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阿花王(아화왕)의 즉위에 이르는 사정은 辰斯王(진사왕)의 즉위 및 죽음과 관련하여 이미 설명한 바 있다. 阿花王(아화왕)의 재위 15년 동안에는 중국에 조공사신을 보낸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에는 同王代(동왕대)에 高句麗(고구려)와 해마다 전쟁이 계속되었고, 倭(왜)와의 교섭도 여러모로 행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105)韓人池(한인지) : 『古事記(고사기)』 應神段(응신단)에, “亦新羅人參渡來(역신라인삼도래) 是以建內宿(시이건내숙)禰命引率(명인솔) 爲役之堤池(위역지제지) 而作百濟池(이작백제지)”라는 비슷한 기사가 있다. 韓人池(한인지)와 百濟池(백제지)는 모두 歸化人(귀화인)에 의하여 축조된 것이라는 점에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百濟池(백제지)는 奈良縣(나량현) 北葛城郡(북갈성군) 百濟村(백제촌)의 땅에 비정되고, 韓人池(한인지)는 奈良縣(나량현) 磯城郡(기성군) 川東村(천동촌)의 唐古池(당고지)에 비정되기도 한다. 이하 應神(응신)・仁德(인덕) 兩紀(양기)에는 이와 같은 治水土木(치수토목)・土地開發(토지개발) 등 농업관계 기사가 많이 보이는데, 일본에 있어서 이와 같은 治水土木(치수토목)의 성행은 半島(반도)에서 歸化人(귀화인)이 많이 渡來(도래)해 오던 시기와 맞물려, 이들이 새로운 농업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歸化人(귀화인)에 의한 農耕(농경)의 발전은 일본 大和朝廷(대화조정)의 경제적 능력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06)阿花王(아화왕)이····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無禮於貴國(무례어귀국))’고 한 것은 앞서 살펴본 辰斯王(진사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高句麗(고구려)에 대한 굴종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高句麗(고구려)의 공격에 대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던 辰斯王(진사왕)을 제거하고 즉위한 阿花王(아화왕)은 당연히 高句麗(고구려)에 대하여 강경책을 취하였다.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 阿莘王(아신왕) 2년 가을 8월 기사에, ‘王謂武曰(왕위무왈) 關彌城者(관미성자) 我北鄙之襟要也(아북비지금요야) 今爲高句麗所有(금위고구려소유) 此寡人之所痛惜(차과인지소통석)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이경지소의용심이설치야) 遂謀將兵一萬(수모장병일만) 伐高句麗南鄙(벌고구려남비)····’라 되어 있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즉위 직후부터 阿花王(아화왕)은 高句麗(고구려)에 빼앗긴 漢水(한수) 以北(이북)의 諸城(제성)을 되찾기 위하여 北進(북진)을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同王(동왕) 3년과 4년에 계속적으로 高句麗(고구려)와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廣開土王碑文(광개토왕비문)의 丙申(병신)년(396) 기사에 의하면, 阿花王(아화왕) 5년 고구려의 廣開土王(광개토왕)은 대규모로 南進(남진)하여 百濟(백제)의 王都(왕도)를 공략하고 百濟王(백제왕)을 臣伏(신복)시켰다.‘無禮於貴國(무례어귀국)’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과 관련이 깊다. 바로 이 때문에 百濟(백제)는 王子(왕자) 直支(직지)를 日本(일본)에 보내게 되었다.

107)峴南(현남)・支侵(지침)・谷那(곡나)・東韓(동한)의 땅 : 4개를 각각 별개의 지역으로 보는 설이 있고, ‘峴南(현남)・支侵(지침)・谷那(곡나) 등 東韓(동한)의 땅’이라고 하여, ‘東韓(동한)의 땅’이 위의 세곳을 총칭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후자는 應神天皇(응신천황) 16년 是歲條(시세조) 分注(분주)에, 「東韓者(동한자) 甘羅城(감라성)・高難城(고난성)・爾林城是也(이림성시야)」라고 되어 있는 것을 취한 해석이다. 즉, 峴南(현남)을 甘羅(감라)에, 支侵(지침)을 爾林(이림)에 그리고 谷那(곡나)를 高難(고난)에 비정한 것이다. 그 각각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 지 잘 알 수 없지만, 대체로 峴南(현남)은 全北(전북)방면이 아닐까 추정되며, 支侵(지침)은 忠淸南道(충청남도) 洪城(홍성)・大興(대흥) 부근, 谷那(곡나)는 全羅南道(전라남도) 谷城(곡성)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08)直支(직지) :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腆支(지), 『宋書(송서)』에는 映(영)이라고 쓰여 있다. 直支(직지)를 日本(일본)에 보낸 사실은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 阿莘王(아신왕) 6년 5월조에도, ‘王與倭國結好(왕여왜국결호) 以太子(이태자)腆支爲質(지위질)’이라 기록되어 있어, 書紀(서기)의 기사와 일치한다. 그는 阿花王(아화왕)의 사후 百濟(백제)에 돌아오 왕위를 계승하였다(應神天皇(응신천황) 16년 是歲條(시세조) 참조).

109)弓月君(궁월군) :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에는 “太秦公宿(태진공숙)禰 秦始皇帝十三世孫(진시황제십삼세손) 孝武王之後也(효무왕지후야) 男功滿王足仲彦天皇八年來朝(남공만왕족중언천황팔년래조) 男融通王(남융통왕)[一云(일운) 弓月王(궁월왕)] 譽田天皇(예전천황) 十四年來歸(십사년래귀) 率百二十七縣百姓歸化(솔백이십칠현백성귀화) 獻金銀玉帛等物(헌김은옥백등물)····”이라 하여, 弓月君(궁월군)을 秦始皇帝(진시황제)의 후예라고 기록해 놓았다.

110)阿直伎(아직기) : 『古事記(고사기)』에서는 阿知吉師(아지길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吉師(길사)는 族長(족장)을 나타내는 敬稱(경칭)이다.

111)輕(경) : 奈良縣(나량현) 橿原市(원시) 大輕町(대경정) 부근.

112)王仁(왕인) : 『古事記(고사기)』에서는 和邇吉師(화이길사)라고 하였다. 書紀(서기)에는 그가 阿花王(아화왕) 말년경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하여, 『古事記(고사기)』에는 百濟(백제) 近肖古王(근초고왕) 때의 사람으로 되어 있어 전후 30~40년간의 차이가 있다. 『續日本紀(속일본기)』 延曆(연력) 14년 4월 8일조에는, “漢高帝之後曰鸞(한고제지후왈난) 鸞之後王狗(난지후왕구) 轉云百濟(전운백제) 百濟久素王(백제구소왕)(貴首王(귀수왕))時(시) 聖朝遣使徵召文人(성조견사징소문인) 久素王(구소왕) 卽以狗孫王仁貢獻(즉이구손왕인공헌) 是文武生等之祖也(시문무생등지조야)‘라고 하여, 王仁(왕인)을 중국계 王氏(왕씨)의 인물로 기술하였다. 王仁(왕인)은 阿直伎(아직기)와 더불어 百濟文化(백제문화)를 일본에 전해줌으로써 일본의 고대문화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우리나라 문헌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석상을 비롯하여, 王仁(왕인)이 독서하였다는 왕인책굴 등이 있다. 王仁(왕인)의 무덤은 日本(일본) 大阪(대판)과 京都(경도)의 중간지점인 枚方(매방)에 있다.

113)書首(서수) : 文首(문수)라고도 하며, 東文氏(동문씨)에 대하여 西文氏(서문씨)라고 하기도 한다. 文筆(문필) 전문의 姓氏(성씨)로서, 河內(하내)에 거주하는 史姓諸氏(사성제씨) 가운데 중심적 지위를 점하였다. 天武(천무) 12년 9월에 連(련), 同王(동왕) 14년 6월에 忌寸(기촌), 延曆(연력) 10년 4월에 일부가 宿(숙)禰라고 改姓(개성)하였다.

114)直支王(직지왕) : 阿花王(아화왕)의 長子(장자)로서 阿花王(아화왕) 8년에 인질로 日本(일본)에 와 있었다.

115)甘羅城(감라성) : 全羅北道(전라북도) 咸悅(함열)에 해당한다는 설이 있다.

116)高難城(고난성) : 應神天皇(응신천황) 8년 3월조 分注(분주)에 보이는 谷那(곡나)(全羅南道(전라남도) 谷城(곡성))로 비정하는 설이 있지만 잘 알 수 없다.

117)爾林城(이림성) : 忠淸南道(충청남도) 洪城(홍성)・大興(대흥)(옛날 명칭은 任城郡(임성군))에 비정하는 견해와 全羅北道(전라북도) 金堤郡(금제군) 利城(리성)(옛날 명칭은 乃利阿(내리아))에 해당한다고 보는 두가지 설이 있다.

118)久爾辛(구이신) :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 久爾辛王(구이신왕) 元年條(원년조)에, ‘腆支(지)(直支(직지))王長子(왕장자) 腆支王薨(지왕훙) 卽位(즉위)’라 되어 있고, 同王(동왕) 8년조에, ‘冬十二月王薨(동십이월왕훙)’이라 되어 있다.

119)木滿致(목만치) :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 蓋鹵王(개로왕) 21년조에 보이는 木(목)劦滿致(만치)이다. 劦은 리의 잘못인 듯하다. 木(목)리는 百濟(백제)의 複姓(복성)으로 木(목)・木羅(목라)와 같다.

120)木羅斤資(목라근자) : 百濟(백제) 近肖古王(근초고왕), 近仇首王(근구수왕) 때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神功皇后攝政(신공황후섭정) 49년 3월조에 보인다. 比(비)자伐(벌)・南加羅(남가라)・啄國(탁국)・安羅(안라)・多羅(다라)・卓淳(탁순)・加羅(가라) 등의 가야지역과 新羅(신라)를 공격 또는 회유하여 선린관계를 맺는 한편, 百濟(백제)의 동남부 강역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관한 日本書紀(일본서기)의 전승은 百濟(백제) 近肖古王代(근초고왕대)의 영토확장 과정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121)高麗王(고려왕)이····조공하였다 : 이 기사는 사실인가 의심스럽다. 이 시기의 高句麗(고구려)는 廣開土王(광개토왕)・長壽王(장수왕)의 치세 때로서 日本(일본)과는 항상 적대관계에 있었으므로 일본에 朝貢(조공)사신이나 表(표)를 보냈다고 보기 어렵다.

122)都加使主(도가사주) : 應神天皇(응신천황) 20년 9월조에 倭漢直(왜한직)의 조상인 阿知使主(아지사주)와 그 아들 都加使主(도가사주)가 17縣(현)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歸化(귀화)하였다고 되어 있다.

123)吳(오)나라 : 중국 江南(강남)지역을 가리킨다. 이 해는 丙寅(병인)으로 干支(간지)를 2巡(순) 수정하면 426년 丙寅(병인)이 되는데, 이시기 중국의 江南(강남)은 南朝(남조) 宋(송)의 시대이다.

124)直支王(직지왕) : 應神天皇(응신천황) 25년 기사에 直支王(직지왕)이 죽었다고 되어 있는 것과 모순이다.

125)韓國(한국) : 三韓(삼한)(馬韓(마한)·辰韓(진한)·弁韓(변한))의 총칭으로 표시되나 시기적으로 보아 高句麗(고구려)·百濟(백제)·新羅(신라)·加耶(가야) 등을 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