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이 푸르러 가시던 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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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푸르러 가시던 님이

백석이 흩날려도 아니오시네

이것은 강원도 농군이 흔히 부르는 노래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산골이 지닌 바 여러 자랑 중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화창한 봄을 맞아 싱숭거리는 그 심사야 예나 이제나 다를리 있으리까마는 그 매력에 감수感受되는 품이 좀 다릅니다.

일전 한 벗이 말씀하되 나는 시골이, 한산한 시골이 그립다 합니다. 그는 본래 시인이요 병마에 시달리는 몸이라 소란한 도시생활에 물릴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허나 내가 생각건대 아마 악착스러운 이 자파姿婆에서 좀이나마 해탈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본의일 듯싶습니다. 그때 나는 그러나 더러워서요, 아니꼬워 못사십니다, 하고 의미 몽롱한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너무 결백한, 너무 도사류인 그의 성격에 나는 존경과 아울러 하품을 아니 느낄 수 없었습니다. 시골이란 그리 아름답고 고요한 곳이 아닙니다. 서울 사람이 시골을 동경하여 산이 있고 내가 있고 쌀이 열리는 풀이 있고······이렇게 단조로운 몽상으로 애상적 시흥에 잠길 그때 저쪽 촌뜨기는 쌀 있고 옷 있고 돈이 물밀 듯 질번거릴법한 서울에 오고 싶어 몸살을 합니다.

퇴폐한 시골, 굶주린 농민, 이것은 자타없이 주지하는 바라 이제 새삼스레 뇌일 것도 아닙니다마는 우리가 아는 것은 쌀을 못 먹는 시골이요 밥을 못 먹는 시골이 아닙니다. 굶주린 창자의 야릇한 기미는 도시 모릅니다. 만약에 우리가 본능적으로 주림을 인식했다면 곧바로 아름다운 시골, 고요한 시골이라 안 합니다.

시골의 생활감을 절실히 알려면 그래도 봄입니다. 한겨울 동안 흙방에서 복대기던 울분, 내일을 우려하는 그 췌조悴操, 그리고 터무니없는 야심, 이 모든 불온한 감정이 엄동에 지질려서 압축되었다 봄과 맞닥뜨려 몸이라도 나른히 녹고 보면 담박에 폭발되고 마는 것입니다. 남자란 워낙 뚝기가 좀 있어서 위험이 덜 합니다. 그것은 대체로 부녀 더욱이 파랗게 젊은 새댁에 있어서 그 예가 심합니다. 그들은 봄에 더 들떠서 방종하는 감정을 자제치 못하고 그대로 열에 띄웁니다. 물에 빠집니다. 행실을 버립니다. 나물 캐러 간다고 요리조리 핑계 대고는 바구니를 끼고 한번 나서면 다시 돌아올 줄은 모르고 춘풍에 살랑살랑 곧장 가는 이도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붙들리면은 반쯤 죽어날 줄을 그라고 모르는 바도 아니련만······.

또 하나 노래가 있습니다.

잘 살고 못살긴 내 분복이요

하이칼라 서방님만 얻어주게유

이것도 물론 산골이 가진 바 자랑의 하나입니다. 여기에 하이칼라 서방님이란 머리에 기름 바르고 향기 피는 매끈한 서방님이 아닙니다. 돈 있고 쌀 있고 또 집 있고 이렇게 푼푼하고 유복한 서울 서방님 말입니다. 언뜻 생각할 때 에이 더러운 계집들! 에이 우스운 것들! 하고 혹 침을 뱉으실 분이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좀 덜 생각한 것입니다. 임도 좋지만 밥도 중합니다. 농부의 계집으로서 한평생 지지리 지지리 굶다 마느니 서울 서방님 곁에 앉아 밥 먹고 옷 입고 그리고 잘 살아 보자는 그 이상이 가질 바 못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임 있고, 밥 있고 이러한 곳이라야 행복이 깃듭니다.

내가 시골에 있을 제 나에게 봄을 제일 먼저 전해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술상의 다래입니다. 나는 고놈을 매우 즐깁니다. 안주로 한 알을 입에 물고물고 꼭꼭 씹어보자면 매낀매낀한 그리고 알싸한 그 맛, 이크 봄이로군! 이렇게 직감으로 나는 철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봄에 몸 달은 큰 애기, 새댁들의 남다른 오뇌를 연상케 됩니다. 나물을 뜯으러 갑네 하고 꾀꾀틈틈이 빠져나와 심산유곡 그윽한 숲속에들 몰려 앉아서 넌지시 감춰 두었던 곰방대를 서로 빨아가며 슬픈 사정을 주고받는 그들은-차마 못하고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울적한 그 심사를 연상케 됩니다. 그리고 그 노래를······.

잎이 푸르러 가시던 님

백설이 흩날려도 아니오시네

그러다 술이 좀 취하면 몇 해 후에는 농촌의 계집이 씨가 마른다. 그때는 알총각들만 남을 터이니 이를 어째나! 제멋대로 이렇게 단정하고 부질없이 근심까지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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