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몽/8장
먼 산에 월색은 몽롱하고 필육을 마전하여 고운 잔디밭에 널어놓은 것 같은 대동강 흐르는 물은 적적히 잠들어 있는 것같이 잔잔(潺潺)한데, 일엽편주로 고기 낚는 배는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어 완연히 해중(海中)에 있는 섬과 다름이 없다. 달 아래에 흐르는 물결은 금결 같은 물결이 영롱히 비치는데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은 이 세상에 애원을 기별하는 것 같다.
반공에 솟은 듯한 을밀대(乙密臺) 옆으로 한 줄거리 좁은 길이 소나무 사이로 양의 창자같이 얽히었는데 그 길로 좇아 영명사(永明寺)를 지나 부벽루(浮碧樓) 앞으로 내려오는 남녀 두 사람이 있으니 한 사람은 이수일이요, 또 한 사람은 심순애러라.
『나는 단지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아서 말 한마디 할 수 없소.』
하며 오륙 보나 걸어오도록 말이 없다가 순애는 간신히 입을 열어,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시구료.』
『지금 와서 잘잘못이 어디 있단 말이요. 대체 이번 일은 그대의 어머니 아버지가 마음에 있어서 그렇게 된 일인지, 또는 그대가 하고자 해서 그리 된 일인지 그것만 알았으면 그만이요.』
『………….』
『여기 내려올 때까지라도 나는 정말 믿고 있었지, 그대야 설마 그런 생각을 먹으랴 하고…… 실상으로 말을 하면 믿느니, 아니 믿느니 말할 것인가, 부부간인데. 어제 저녁에 어르신께 자세한 말씀은 들었소. 말씀만 하실 뿐이 아니라 처음 겸 마지막으로 청하는 것이니 제발 나더러 들어달라고 하시는구료.』
흐르는 눈물에 수일의 목소리는 벌벌 떨린다.
『큰 은혜를 받은 어르신 내외분 말씀인데 처음 겸 마지막으로 내게 청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어찌 아니 들을 수가 있소? 어르신네 내외분께 은혜 받은 생각을 하면 내 몸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양치 아니할 터인데, 물에라도 들어가라 하면 들어갈 것이요, 불에라도 들어가라 하면 들어갈 몸이오 그려. 그러나 물불에는 들어갈지언정 이 청은 진정 내가 들을 수가 없소. 이 말씀은 나더러 물이나 불에 뛰어 들어가라는 말씀보다 더욱 심하신 말씀이오구료. 너무도 억지의 말씀을 하시니까, 황송한 말이지마는 어르신네를 은근히 내 속으로 원망하였소. 그리고 하고많은 말에 달리라도 좋은 말이 많이 있을 터인데, 이 청을 들어주면 학비를 대어주어서 동경(東京)으로 유학을 시켜주겠다고 하십디다. 아…… 아…… 아무리 이수일이가 돈 없고 못생기고 무의무탁한 거지 자식일망정 계집 판 돈으로 동경 유학 갈 생각은 못하겠소.』
수일이는 부벽루 기둥에 의지하여 강물을 향하고 체읍(弟泣)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순애는 그때야 비로소 수일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서 손목을 붙들고 얼굴을 들여다보며,
『용서하여 주시오. 모든 일은 내가 잘못하였으니 용서하여 주시구료.』
수일의 손을 붙들고 고개는 수일의 어깨에 대더니, 순애도 또 느껴 울고 있다.
물결은 양양(漾漾)하여 길게 흐르고 월색은 조용하여 산과 물이 한가지로 희었는데, 다만 함께 붙들고 묵묵히 서서 있는 두 사람의 그림자는 먹물을 갈아 부은 듯이 땅에 비추인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만 생각을 하였지 그려. 집에서는 어르신네가 나를 달래고 순애는 모친께서 달래려고 억지로 이곳까지 데리고 온 줄로 알았소. 어르신네 내외분 말씀이 내 몸 되어서는 못 들을 것 없소. 무슨 말씀이든지 녜 녜 하고 순종 아니 하지 못할 몸이지마는, 순애로 말을 하면 아무리 부모의 말씀이라도 아니 들으려 하면 안 들을 수가 있으니까, 순애만 아무리 하여도 듣지 못하겠다고 하면 이번 혼약(婚約)은 파의가 되고 말 터이니…… 그리고 내가 옆에 있으면 순애를 꾀어서 일을 방해할까 의심하여서 이렇게 먼 지방으로 데리고 와서 꾀이려고 하는 것인 줄 알고 보니까, 속으로 어떻게 염려가 되는지 몰라서 어제는 밤새도록 한숨 자지 못하였소. 천만 번이라도 그러한 일은 없겠지마는 십벌지목(十伐之木)이 없단 말과 같이 하도 여러 번 들으면 여편네의 약한 마음으로 차마 못하겠다는 말을 못하고 만일 허락을 하게 되면 어찌 하리 하는 생각에 집에서는 학교에 가는 모양으로 나와서 바로 이리로 내려온 길이요. 못생기고, 못생기고, 또 못생겼다 하기로 수일이 같이 크게 못생긴 놈은 이 천지간에 다시 없을 터이야. 나는 이렇듯 자기가 못생긴 줄은 스물세 살 된 오늘까지도 모…… 모…… 몰랐지.』
순애는 두려움과 비창한 마음이 일시에 흉중으로 좇아 일어나며, 느껴가며 소리쳐 운다.
분기를 참고 있던 수일의 음성은 점점 어지러워지며,
『응, 순애, 너는 사람을 이렇게 속인단 말이냐?』
순애는 몸만 벌벌 떨고 있다.
『의원 보러 이리로 온다 하더니 김중배를 만나보려고 한 일이지…….』
『그런 소리는 하지 마오. 참 애매…….』
『흥, 그 소리는 애매하다?』
『그런 말씀은 자격지심이야. 아무리 이런 사람이기로 그렇게 과한 말씀을…….』
느끼며 말을 이르지 못하는 순애의 얼굴을 수일은 눈꼬리로 흘겨 보며,
『너도 그 말이 과한 줄로 아니? 내가 한 말을 심하다고 생각하여서 야속하여 이렇게 울 것 같으면 이 못생긴 수일이는…… 수일이는…… 수일이는 피눈물을 흘려도 시원치가 못하겠다. 네가 만일 마음이 없는 일 같으면 이래로 내려올 제만 하여도 내게 그런 말 한 마디를 할 일이지, 별안간에 떠나느라고 말을 하지 못하였으면 와서라도 편지로 자세히 기술을 하는 것이 정이지, 별안간에 집에서 떠나갈 뿐 아니라 떠나 내려온 이후로는 일자 소식이 없는 것을 본즉 처음부터 김중배하고 만나자는 약조를 하였던 것이 분명하고 혹은 함께 내려왔는지도 알 수 없지. 순애야, 이년, 너는 간부(奸婦)다. 외인(外人)과 간통한 계집이야.』
『어쩌면 그런 소리를 하시오. 아무리 밉기로 그런 소리를 어찌 하시오.』
하며 순애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느껴 울면서 몸을 수일에게 의지코자 하는 것을 수일은 손을 뿌리쳐 순애를 물리치며,
『몸을 더럽힌 계집이 간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응』
『언제 내가 몸을 더럽힌 것을 보았소?』
『아무리 이수일이가 못생기고 천치기로 제 계집이 몸 더럽히는 옆에 앉아서 보고 있을까? 이수일이라 하는 역력(歷歷)한 서방을 두고 있는 계집이 그 서방을 내버리고 다른 사나이와 함께 시골 와서 있으니 간통하지 아니하였다는 증거가 어디 있누?』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말이 없지요마는, 김중배라 하는 이하고 약속한 일도 없고 만나자고 한 일도 없는데 그런 억지의 말씀은 모두 그럴 듯이 짐작하고 말씀이지, 그이는 우리가 여기 온 후에 왔다는데.』
『가령 네 말대로 그러하다 할 지경이라도 그 사람이 너를 무슨 까닭으로 찾아온단 말이야, 응? 글쎄.』
순애는 그 입술에 거멀못을 한 것같이 다시는 입을 열지 아니한다. 수일이가 이와 같이 달래고 꾸짖으면 그 여자는 반드시 허물을 뉘우치고 죄를 자복하여 그 몸은 고사하고 그 목숨까지라도 수일의 지휘를 받고, 어기지 못하리라고 믿었더라. 가령 믿지 아니하더라도 마음으로는 그윽히 그리하기를 바라고 있었더니 어찌 하리요! 순애는 조금도 뉘우치는 기색은 없고, 산천은 변할지라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으리라 하였더니, 태산을 위태타 하던 마음이 이제는 물 위의 거품이라, 삽시(霎時) 동안에 순애의 마음이 변함을 보매 수일은 기가 질려 말을 이루지 못한다.
순애는 나를 저버렸고 나는 나의 아내를 남에게 빼앗겼도다. 나의 목숨보다도 더욱 사랑하던 사람은 나를 원수같이 미워하는도다. 한은 뼈에 사무치고, 분은 가슴을 에이는 것 같아 거의 몸과 세상을 잊어버린 수일은 간부의 살을 씹고 피를 마셔 철천지한을 품고자 하는 고통에 견디다 못하여 정신없이 뒤로 벌떡 자빠진다.
순애는 수일의 땅에 주저앉는 모양을 보고 깜짝 놀라 황망히 나아가서 두 손으로 수일의 고개를 받들어 일으키니 일은 바른 팔은 땅을 짚고, 몸은 순애의 가슴에 의지하였는데, 눈을 감았으나 좌우로 넘쳐흐르는 눈물은 혈색 없는 양협을 적시며 조로한 월광은 그 얼굴을 비추인다.
순애는 수일의 몸을 뒤로 끼어 앉고 흔들면서 말을 하고자 하나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아니한다. 목소리를 다시 가다듬으려 하면 가다듬을수록 소리는 점점 느껴진다.
『이게 웬일이요? 여보, 글쎄, 별안간에 이게 웬 일이야요? 저…… 정…… 정신을 차리시오.』
수일은 간신히 손을 들어 순애의 손을 잡는다. 순애는 눈물에 어린 수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수건을 내어 눈물을 씻겨주고 있다.
『아, 순애, 순애와 나와 이렇게 함께 있는 것도 오늘 저녁이 마지막이요, 순애가 나를 이렇게 붙들어 주기도 오늘 저녁이 마지막이요, 내가 순애더러 말하는 것도 오늘 저녁이 마지막이다. 오늘은 음력으로 삼월 열 나흗날이니 순애가 자세히 기억하여 두어라. 먼 후년 이달 이날 이 밤에는 이수일이가 어디서 이 달을 다시 볼는지, 후년 이달 이날… 십년 후 이달 이날, 한평생 두고서 이달 이날은 내가 잊지 아니할 터이다. 죽더라도 내가 이날은 안 잊어버릴 터이야 응, 순애. 오늘이 삼월 열 나흗날이야. 내년 삼월 십사일 저녁 이때가 되거든 내 눈에서 나오는 피눈물로 이 달을 흐리게 하여놓을 터이니 보아라, 응? 순애, 만일 내년 이 날에 이 달이…… 달이…… 이 달이 흐리거든 이수일이가 너를 원망하고 어디서 오늘 저녁 같이 울고 있는 줄로 알아다고.』
순애는 수일을 붙들고 몸부림을 하며 목을 놓고 체읍한다.
『그렇게 공연히 남의 심사 돋아놓지 마오. 나도 생각한 일이 있으니까, 분하시더라도 다 용서해 주시오. 나는 내 속에만 두고 말 못할 일이 더 많이 있으니까 앞으로는 다 말할 수 없어도 다만 한 마디 쉽게 말씀할 것은 내가 평생을 두고 죽는 날까지라도 당신을 잊어버릴 리가 없어요.』
『응, 그런 말은 나는 다 듣기 싫어. 잊어버리지 아니한다는 계집이 나를 내버리고 갈까?』
『그러기에 누가 당신을 버리고 간댔소?』
『그러면 무엇이야? 나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다른 데로 시집을 갈까? 이 못된 년, 그러면 너는 서방을 둘씩 데리고 살자는 말이냐?』
『글쎄 너무 이리하시지 말고 얼마 동안만 내가 하는 것을 보시구료. 보시면 알 일을, 내가 이후까지라도 당신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는 증거를 보여드릴 터이니.』
『응, 그만둬. 어색하니까 되지 않게 꾸며대지도 말고. 배가 고파서 몸을 팔게 되었니? 무엇이 부족하여서 김중배에게로 가려고만 하느냐? 세상에 알 수 없는 일이 많지마는, 이와 같이 알기 어려운 일은 아마 없을까 보다. 너의 집안으로 말하더라도 굶어 죽을 형세는 아니오, 나도 지금은 아무리 너의 집에 붙여서 괴로움을 끼치지마는 금년에 학교를 마치고 나면 나도 한 사람 몫 구실은 할 터인데, 무엇이 부족하여서 기어코 김중배를 따라가려고 하는지, 필연코 까닭이 있는 일이지 그럴 리가 있나? 서방감이 부족하여서 그리하느냐? 부잣집으로 시집이 가고 싶어서 그리하느냐? 이 두 가지 외에는 없을 터이니 까닭이나 자세히 들어보자. 이 지경에 이르러서 체면 볼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으니, 속에 있는 대로 썩썩 말을 하여라. 어려서부터 정하였던 서방을 버리는 염치없는 년이 이런 말을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할 것이 무엇이냐?』
『내가 다 잘못하였으니 용서하여 주시구료.』
『그러면 서방감이 네 마음에 부족한 것이로구나.』
『여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오? 그렇게 나를 의심할 터이면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발명은 하고 날 터이야.』
『서방은 부족하지 않다, 그러는 말이지? 그러면 김중배는 부자니까…… 옳지, 그러면 이번 혼인은 돈 욕심에 된 일이로구나. 나는 돈이 없으니까…… 부모의 말씀에 어찌하지 못하여서 할 수 없이 너도 허락한 일 같으면 내가 어떠한 수단이라도 써서 이 혼인을 아니 되게 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네 마음만 어떠한지 알 것 같으면 내가 내 수단껏은 한번 써서 볼 터이나, 순애의 마음도 역시 그리로 갈 생각이 간절하지?』
수일의 눈은 일신의 정신을 모아서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순애의 얼굴을 뚫어지도록 바라본다. 한 걸음을 가고 두 걸음을 가고 다섯 걸음, 열 걸음을 걷는 동안까지도 순애는 대답이 없다. 수일은 하늘을 우러러 길게 한숨짓는다.
『응, 알겠다, 알아. 네 마음을 자세히 알겠어.』
수일은 다시 말하여도 유익함이 없으리라 하여 물끓듯하는 가슴을 진정치 못하며 강물을 향하여 정신없이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가 오히려 참지 못하고 무슨 말을 또 하려는지 순애를 향하여 돌아보니, 순애는 그 옆에 있지 아니하고 육칠 간 동안 되는 탑 아래에 주저앉아서 몸은 탑에 의지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느껴가며 울고 있다.
근심에 싸인 몸은 달에 비추이며 바람에 불리어 거의 꿈속에 보는 사람 같은데, 잔잔히 흐르는 대동강수가 언덕에 고요히 부딪치는 물결 소리는 다만 애원(哀怨)한 심사를 도울 뿐이라 일은 분기도 잊었으며 원망도 없어지고 잠시 동안 천지의 자연(天地之自然)과, 그림 같은 경치에 마음을 빼앗기고 황홀히 서서 있다.
다시 이 세상을 생각하며 가장 사랑하던 여자가 이제는 나의 아내가 아니라 하는 생각을 하니 지금 서 있는 곳이 꿈이 아닌가 의심한다.
『아, 꿈이로구나 꿈이야! 길고 긴 꿈을 내가 꾸었구나.』
수일은 고개를 드리우고 발끝 향하는 곳으로 걸어가는 데 순애는 눈물을 씻으며 수일을 향하여 걸어온다.
『순애, 무슨 까닭으로 울어? 순애는 조금도 설울 일은 없는데, 아마 가짜 울음인 게지.』
『아…… 아…… 암 그렇지요. 가…… 가짜 울음이야요.』
하는 목소리는 울음에 섞여 간신히 말을 이룬다.
『이애 순애야 내가 너와 함께 어려서부터 오늘날까지 자라날 동안에 나는 네 마음도 내 마음과 같은 줄만 알고 믿었더니, 지금 보니까 네 마음속에도 욕심이 가득하게 들어앉았구나. 돈이 잔뜩 들어앉았구나. 아무리 이 세상은 돈이라 하기로 너무도 심하다. 그래도 네 마음은 편하냐? 너는 가서 이 세상에 호강도 하겠고 영화도 받겠다마는 돈 하나가 없는 까닭으로 네게 소박맞아 쫓겨가는 이놈의 마음도 좀 생각을 하여 보아라. 분하다 할는지, 슬프다 할는지, 원통하다 할는지, 내 마음대로 하면 너 같은 것은 이 자리에서 한 칼로 찔러 죽이고 나도 그 칼로 죽을 마음이 불현듯 하다마는, 그 마음을 억지로 억지로 서리어 담고 제 계집을 남에게 뺏기면서 가만히 보고 있는 놈의 마음도 좀 생각하여라. 그 마음이 어떠하겠니? 어떻게 하여 너만 잘 되면 남은 아무렇게 되더라도 상관이 없니? 도대체 이수일이라 하는 놈은 네게 어떻게 되는 사람이냐? 한집안에서 자라날 제 무슨 약조로 지내왔는지 너는 모르느냐? 나는 아무리 심택의 집에 신세 지고 있는 비렁방일지라도 네게 대하여서는 남편이 아니냐? 그런데 너는 명색이 남편을 한 놀림감으로 알고 있었느냐. 어찌하면 헌신 벗어버리듯 하느냐. 평일에 너의 하는 모양이 일상 서어하기에 이상히 알았더니, 네 마음이 본래부터 그러하였던 줄은 몰랐구나. 진정으로 향하는 정은 없고 잠시간 나는 네게 놀림가마리가 되었었구나! 이 못생긴 놈은 그런 줄은 알지 못하구서 내 몸보다 네 몸을 더 사랑하고, 너 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다시 낙이 없는 줄로 알고 있었더니, 이렇듯 네 몸을 알아주는 이수일이를 어찌하여서 너는 헌신같이 내버리느냐?
돈 한 가지로 말을 하면 나하고 김중배하고 당초에 비할 수가 없지. 김중배는 유명한 재산가요, 나는 미실미가한 일개 서생(書生)이로구나, 응? 그러나 여보소, 순애, 너도 학교에 다녀 보았고 나이 지금 지각이 있을 나이니, 자세히 좀 생각하여 보게. 사람의 행복이라 하는 것은 결단코 돈으로는 사지 못하는 것이라. 네 사람의 팔자와 돈은 딴 물건이야. 돈만 많으면 팔자가 좋은 줄 아는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 때에 제일로 구할 일은 집안이 평안해야지 하는 것인데, 집안이 평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다른 것이 아니라 부부가 서로 깊이 사랑하는 것이 제일인데 순애를 깊이 사랑하기는 김중배가 백이 오더라도 내 마음의 십분 일을 따라오지 못하리라. 만일 제가 돈으로 자랑을 하면 그것은 내가 꿈에도 따라가지 못하겠지마는, 나는 정으로 사랑할 수가 있네. 부부간의 행복이라 하는 것은 전혀 애정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 애정이 없으면 부부라고 말할 것이 있나?
내 몸보다도 순애를 더 사랑하는 이수일이를 내버리고 부부간의 행복은 고사하고 도리어 해롭게 되기 쉬운 재산을 목적하여 가지고 결혼을 하려 하니, 여보소, 순애, 그 마음이 무슨 마음인가? 애달아 못 견디겠네.
그러나 돈이라 하는 것은 원래부터 사람의 마음을 미혹(迷惑)케 하는 물건이라 영웅호걸과 현인군자(賢人君子)라도 돈에 당하여서는 항용 비루(卑陋)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아니하니까, 지금 순애가 잠깐 마음이 변하여서 욕심내기도 쉬운 일이야. 그러니까 내가 깊이 책망하는 것은 아니로되 단지 한 번만 다시 잘 생각을 하여 보라 하는 말일세……. 그 돈이, 김중배 집의 재산이 김중배와 순애 사이에 얼마나 효력이 날는지 좀 생각을 하여 보란 말이야.
참새가 쌀을 쪼아 먹는데 간신히 열 알이나 스무 알이면 족하지, 섬으로 놓았다 하더라도 한입에 다 먹을 수는 없는 법이라. 아무리 내가 못생겼기로 열 알이나 스무 알 쌀이 없어서 너 하나 굶겨둘 놈은 아니다. 만일 잘못되어서 열 알이나 스무 알 쌀을 변통을 못한다 할 지경이면 그때는 나는 먹지 아니할지언정 너는 배고프게 내버려 두지 아니할 터이다, 응? 순애, 나는…… 나는 이렇듯 너를 생각하는데…….』
수일은 흐르는 눈물을 씻는다.
『네가 김중배에게로 가면 돈이 많으니까 잘 먹고 잘 입고 살 줄은 안다. 그렇지마는 김중배의 집 재산은 다만 너 하나를 위하여서 모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생각지 못하여서 어찌하나? 서로 애정이 없는 부부간에 잘 먹고, 잘 입는 것은 무엇이냐? 이 세상에는 좋은 인력거나 마차를 타고 기구가 놀랍게 다니는 사람도 얼굴에는 수심이 펴일 날이 없는 사람도 있고, 자기의 처자를 인력거에 태우고 자기가 친히 끌고 화유하러 다니는 인력거도 있는 법이야. 김중배의 집으로 가면 돈 있는 사람의 집안이라, 자연히 변화하여 괴로운 일도 많고, 근심되는 일도 많을 터이니 그 집안에 들어가서 마음을 놓지 못하면서 사랑하여 주지도 아니하는 남편하고 무슨 재미로 살 터이냐? 그 고생을 하고라도 참고 있으면 나중에는 그 재산이 모두 네 게 될 줄 아느냐? 재산가에 아무개댁 아씨라고 하면 남들이 모두 앙시하는지 모르겠다마는, 네가 먹는 것은 지금 말과 같이 참새가 쌀을 열 알이나 스무 알 먹는 데서 지나지 못할 것이요. 가령 그 재산이 모두 네 것이 된다 하더라도 계집의 몸으로 몇십만 원이나 몇백만 원이 있으면 무엇에 쓸 터이냐? 몇십만 원 돈을 여편네 손으로 적당하게 쓸 듯하냐? 참새더러 한 섬 쌀을 한꺼번에 먹으라 하는 말과 마찬가지지. 여편네의 팔자는 남편에게 매었다 하는 말이 있는데, 그 여편네 남편 되는 사람이 몇백만 원의 재산이 있다 하기로 남편이 남편답지 못하면 그 여편네의 팔자는 오히려 제 인력거에 태워가지고 꽃구경 다니는 인력거군의 계집된 자만 못하지 않으냐? 내가 들은즉 김중배의 어른은 여기저기다가 첩을 사오 인씩 두고 돌아다닌다 하니 돈냥이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 짓을 하고 정말 아내라 하는 위인은 볼모로 명색이 아내라고 하였지 실상은 소박데기 마찬가지야. 소박은 맞아서 남편에게 사랑은 받지 못하고 한편 구석에 있더라도 자기의 직책은 중하고, 고생 근심으로 이 세상을 마치고 마니, 너도 김중배에게로 가면 처음 얼마 동안은 알 수 없다마는 그 사랑이 오래가지 못하리라. 돈이 있으니까 다른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그러다가 다른 데로 마음이 쏠리면 너도 역시 한 주체군이 될 터이니 그때가 되면 네 마음이 어떠할 듯하나? 그 근심을 김가의 집 재산으로 능히 없이하여 줄 듯하냐? 집에 돈만 많이 있으면 남편에게 소박을 맞고 뒷방 마누라 노릇을 하여도 너는 마음에 즐겁겠니? 마음에 좋아? 내가 지금 하는 말은 너를 내가 남에게 빼앗기니까 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십여 년을 같이 자라나던 정리로 말하기로, 이때에 바른말로 권고 한마디를 어찌 아니하겠니? 네가 삼 년을 채 다 지내지 못하여서 후회할 날이 있을 줄은 내가 확실히 안다. 네 마음이 변한 것으로 보면 분하기가 한이 없지마는, 서로 지내던 정리로 말하여도 너무 가엾어서 내가 진정으로 하는 말이다. 네 마음에 나는 남편감이 부족하고 김중배는 위인이 얌전하여서 사람을 바라고 가려 하는 것 같으면 내 몸은 어찌하였든지 원통은 하더라도, 네 몸 하나만 위하여서라도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가서 잘 살라고 보낼 터이다마는, 너는 사람을 보고 남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보고 남편을 구하니, 그것이 무슨 지각없는 생각인지 사랑이 없는 내외간은 후일에 반드시 후회하느니라. 네 일평생에 고락은 오늘밤 이 자리에서 네 생각 하나에 달리었다. 순애, 순애, 너도 네 몸을 위하려거든 한 번 다시 생각하여 보아라. 나도 며칠 아니면 학교를 졸업할 터이요, 학교를 졸업하면 동경으로 유학도 갈 터이니 지금부터 이삼 년만 지나면 나도 내 힘으로 벌어서 김중배 재산은 부럽지 아니하게 살 터이니, 그때에는 우리가 단란한 가정을 만들어서 평생을 지내면 그 위에 더 좋을 일이 어디 있니? 어렸을 때부터 굳게 맺은 언약을 오늘 와서는 잊어버리느냐? 이수일이를 이렇게 잊어버린단 말이냐? 전에 나를 사랑하던 마음이 이렇게도 매정하단 말이냐?』
수일이는 순애의 일시 미혹한 마음을 다시 돌이키고자 하여 순애의 허리를 끼어 안고 월하에 비치는 백설 같은 목 뒤에 뜨거운 눈물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듣는데 몸은 바람 앞의 나뭇잎같이 벌벌 떨린다. 순애도 수일의 옷자락을 더위잡고 머리는 수일의 가슴에 안겨 느끼고 있다. 수일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지향 없이 중천을 우러러 한숨짓는다.
『아, 나는 어찌하면 좋단 말이요? 여보시오, 내가 만일 갈 것 같으면 당신은 어찌하실 터이요? 그 말씀을 좀 하여주시구려.』
그 말 한마디에 수일은 순애의 몸을 두 손으로 떠밀치며,
『그러니까 아무리 하여도 너는 김중배를 쫓아가겠다 하는 말이로구나. 이토록 누누히 알아듣도록 말을 하여도 듣지를 않는다 하는 말이지? 아무리 못생긴 년이기로 이년, 내가 너 같은 간부하고 말하는 내가 도리어 그르다.』
하며 수일이는 다리를 들어 순애의 허리를 걷어찬다. 순애는 땅 위에 모로 쓰러져서 다시 일어날 생각도 아니하고 모래 위에 엎디어 울고 있다. 수일은 엎드러져서 있는 순애의 모양을 보고 분기 탱중한 목자로 내려다보며,
『순애야, 이년, 순애야, 이년, 너의 마음이 이렇게 변한 까닭으로 이수일이라 하는 놈은 낙심되는 끝에 발광하여 일평생을 그르치는구나. 학문이 다 무엇이냐? 오늘 저녁으로 마지막이다. 이 한으로 하여 이수일이 한 놈은 살아서라도 아귀가 되어서 너같은 년의 고기를 씹고 피를 마실 터이다. 김…… 김…… 김중배 부인, 다시는 평생에 너와 나와 보지를 아니할 터이니 얼굴을 들어서 아직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수일의 얼굴을 한번 자세히 보아두어라. 십여 년 동안을 두고 큰 은혜를 받은 심택씨 내외분께 잠깐이라도 뵈옵고 그간의 은혜를 감사하다는 말이나 여쭐 터이나, 그렇지 못한 사단이 있어서 이수일이는 길게 하직을 하니 안녕히 곕시사고 네가 두 분께 잘 말씀을 여쭈어라. 만일 이수일이는 어디로 갔느냐고 물으시거든 그 못나고 병신 같은 놈은 삼월 십사일 밤에 별안간에 미쳐서 대동강 부벽루 아래에서 부지거처가 되었다고…….』
순애는 약한 몸을 간신히 일고자 하나 시진한 근력이 몸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쓰러지는 것을 간신히 두 팔을 뻗치어 수일의 다리를 붙잡고, 말소리인지 울음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여보, 가…… 가…… 가면 어디로 가겠다고 그러시오?』
그때에 눈결 같은 팔에는 피가 뚝뚝 듣는다. 수일은 팔에 상처 났음을 보고,
『응, 팔을 다쳤구나.』
『그까짓 것은 조금 다쳤어도 관계치 아니해요. 그러나 이 밤에 어디를 간다고 그러시오? 오늘은 꼭 할 말이 있으니 같이 주인 잡은 데로 같이 내려갑시다. 제발 덕분에.』
『이야기 있으면 여기서 하지.』
『예서는 하지 못해요.』
『예서 못할 말을 이따가는 어찌하누? 공연히 그리하지 말고 이 붙들고 있는 팔이나 떼어.』
『나는 안 놓을 터이야.』
『응, 공연히 말을 아니 들으면 또 발길로 찰 터이야.』
『채여도 관계치 않아요.』
수일은 기운을 다하여 두 팔을 뿌리치니 순애는 다시 땅에 엎어진다.
『여보, 여보, 잠깐만…….』
수일이는 벌써 몇 간 동안을 나갔는지라 순애는 죽을 힘을 다하며 몸을 일고자 하나 전신이 걸려서 얼른 일어나지 못하고 목소리만 내어,
『여보, 그러면 다시 내가 붙잡지는 아니할 터이니, 내 말 한마디만 듣고 가시오.』
드디어 다시 엎어져 체읍하는 순애는 돌아갈 근력도 없고 다만 울음 섞인 목소리로 수일을 부르고 있을 뿐이라. 월하에 점점 멀어 가는 이수일의 그림자는 벌써 소나무 사이를 따라 을밀대 아래로 달음질하여 올라간다.
순애는 더욱 수일을 부르기를 마지 아니한다. 수일의 검은 그림자는 을밀대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하다.
순애는 다시 소리를 높여 수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순애는 몸을 반쯤 일어나 목을 길게 하며 사방을 살펴보나 검은 그림자도 사라진 것같이 없어지고, 다만 적적한 공간에 소나무 그림자만 우뚝우뚝 서서 있고 대동강변에 흐르는 물결 소리만 슬프게 들리는데, 삼월 십사일 밤 교교한 달빛은 근심을 가득히 머금었더라.
순애는 세 번째 수일의 이름을 부르나 그 소리는 산에 울려 다시 순애의 귀에 들릴 뿐이요, 그 소리도 그치매 다시 부벽루는 적적한데 수상(水上)으로 좇아 내려오는 일엽편주는 노젓는 소리가 삐걱삐걱하더니 반공에 솟아 나는 수심가(愁心歌) 한 곡조라.
『부벽루야, 너 잘 있거라. 너와 나와 오늘밤이 영별이로구나. 모란봉이야 변하여서 대동강수 될지라도 너와 나는 변치 말자 맹세하였더니, 세태야 이렇듯 무정하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