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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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난, 직업난으로 수년을 시달려 왔다.

이 공포 속에서도 값없는 생활―---무위한 생활로부터 흘러나오는 권태는 질질 흐른다. 공황의 한 재를 넘으면 권태. 또 한 재를 넘으면 권태.

생활(먹고 사는 일)이라는 줄에 마소 모양으로 정신없이 끌려가다가도 곤한 잠을 깨치고 성난 눈을 번쩍 뜨듯이 지지한 자기의 꼴을 휙 돌아다볼 때,

"이게 다 무슨 생활이란 것이야? ……네가 참으로 생활다운 생활을 하려면 지금 네 생활을 저렇게 값없이 만드는 현실―---그 속을 정면으로 파고 뚫고 들어가서 냅다 한번 부딪쳐 보든지 어쩌든지, 밤낮 그 늘어진 개꼬리 모양으로 질질 끌고 가는 생활의 꼴이란 것은 참 볼 수 없다. 차라리 망골 편으로 기울어지려면 데카당이 되거나 위로 올라붙든지 아래로 떨어지든지 할 것이지 여름날 쇠불알 모양으로 축 늘어져 매달린 생활!"

이 모양으로 폭백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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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만에야 능참봉(陵參奉) 하나 얻어 걸렸다'는 격으로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겨우 얻어 가지고 '이제는 생활 걱정의 짐은 좀 벗으려니' 하였으나, 또한 마찬가지로 생활난은 앞에 서서 가고 권태는 뒤서서 따른다.

열한시가 지나서 신문사 입문 댓돌 위에 무거운 발을 턱턱 올려 놓았다. 오늘도 또한 오기 싫은 걸음을 걸어왔다.

힘없는 다리로 이층 층대를 터벅터벅 올라가 편집실 문을 떠밀고 쑥 들어섰다.

"에헤 이것 봐! 묵은 진열품들이 벌써 와서 쭉 늘어앉았네. 어제나, 오늘이나, 그저께나, 내일이나 멀미나게 언제나 한모양으로…… 그런데 이 물건이 제일 꼴찌로 왔구나!"

자리에 가 궁둥이를 터덕 붙이고 앉아서 휘― 한번 돌아보았다.

맞은편 경리부원 가운데에도 가장 특색 있는 한 사람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키가 작고 체가 앙바틈하고 눈, 코, 입이 다다구다다구 붙은 것이 조선 사람으로 대면 뒷짐지고 딱 받치고 서서 기침을 '아헴 아헴' 하는 시골 구석의 골 생원님이요, 서양 사람으로 대면 작은 키에 큰 갓 쓴 '멕시코' 사람이요, 짐승으로 대면 고슴도치요, 물건으로 대면 장방울이다. 장방울로 일생을 대굴대굴 굴러가는 것도 갑갑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바른편 정치부 의자에 앉은 부장―---장이란 글자부터 밉다―---어쨌든, 신수가 멀끔하고 살이 부둥부둥 찌고 미련한 눈찌, 투미한 두 볼과 입―---이것도 도야지다. 도야지 가운데에도 땟물 벗은 귀족―---자작이나 남작의 지위쯤 되는 도야지다. 도야지로 세월을 먹어 가는 일도 기막힌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밖에 또 누구 누구…….

문 여는 소리가 빠드득 나며 영업국에 있는 부원이 하나 들어온다. 딱 벌어진 어깨, 새까만 얼굴, 홀쪽한 키 맵시에 깡똥깡똥하는 걸음체가 마치 두 손을 마주 치며 '띠라따따 띠라따따' 하고 깡총깡총 뛰노는 사람 같다. 아마 이 사람이 그런 것도 가끔 하는 것 같다. 아니, 그보다도 마음씨가 늘 그 모양으로 깡총깡총하는 듯싶다. 소반 위에서 재주 넘는 인형이 아닌 담에야 '띠라따따'로 언제나 이 대지 위에서 뛰기만 하는 것도 딱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누구 누구. 네모난 상자 속 같은 이 방 안에서 우물우물하는 것들.

'모두 왜 이 모양들이여…… 수채에 내어던진 썩은 콩나물 대가리 같은 것들이…….'

'이 시대 이 사회는 수채일까? ……더구나 이 신문사 안이…….'

그러나 이 콩나물 대가리들도 기발한 경우 기특한 일을 하게 할 때는 썩은 콩나물 대가리가 아니고 펄펄 뛰는 훌륭한 창조, 아니 인간이 될 것이다.

'때는 이때! 우리에게 자유와 행복을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다오!' 하는 호령 밑에 '나아가라, 자유, 평등을 위해, 앞으로!' 할 때가 된다면, 아, 이 인간에게도 영광의 피가 끓으리라! 이네들의 앞에도 갠 하늘이 열리리라!

또는 '넓고 갠 봄, 들 위에 햇빛이 널릴 때걸랑은, 이해 없이 모이자꾸나, 봄잔치 하러 모이자꾸나. 봄 춤을 추러 모이자꾸나' 할 때에는 '동무여, 내 손은 너 잡아 다고, 네 손은 내가 잡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속에는 권태가 흐른다. 괴는 술 모양으로 들떠서 '부글부글 피―' 하는 소리가 난다. 냄새가 난다. 어찌하여 이 모양으로 되나?

여기에는 생활이 없다. 생활의 기초적 조건이 되는 경제가 사회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파멸이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다른 생활도 파멸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땅의 지식계급―---외지에 가서 공부깨나 하고 돌아왔다는 소위 총준 자제들 나갈 길은 없다. 의당히 하여야만 할 일은 할 용기도, 힘도 없다. 그것도 자유롭게 사지 하나 움직이기가 어려운 일이다. 그런 가운데 뱃속에서는 쪼로록 소리가 난다. 대가리를 동이고 이런 곳으로 디밀어 들어온다. 그러나 또한 신문사란 것도 자기네들 살림살이나 마찬가지로 엉성하다. 봉급이란 것도 잘 안 나온다. 생활난은 여전하다. 사지나 마음이나 다 한가지로 축― 늘어진다. 눈만 멀뚱멀뚱하는 산 진열품들이 축― 늘어앉았다.

오늘도 월급이 되네 안 되네 하고 숙덕숙덕들 한다. 월급이라고 맛본 지가 서너 달 되나 보다.

간부통인 기자 하나가 앞으로 서슴서슴 걸어오며,

"오늘도 월급이 안 되겠다네!"

일할 마음도 없이 조는 듯 생각하는 듯하던 나는 이 소리에 정신이 펄쩍 났다. 무의식적으로 얼른 그 사람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낙망이 와서 가슴을 지긋이 누른다. 집 일이 눈앞에 휙휙 지나간다. 사실 오늘 아침에도 시덥지 않은 연극을 한바탕 치르고 온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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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나 사는 집 문간에는 야단이 났다. 그 야단이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뻔히 사람이 안방 건넌방에 꽉 들어서 사는 집에 난데없는 이삿짐이 떠들어온다.

"사람 들어 있는 집에 온다 간다 말 없이 이삿짐이 웬 이삿짐이란 말이오. 안 되오, 못 들어오."

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오려는 이삿짐을 막았다.

"집주인이 가라니까 왔는데, 남의 집에 사글세로 들어 있는 사람이 무슨 큰소리란 말이오?"

"큰소리? 사글세로 들어 있든지 어쨌든지 내가 들어 있는 담에는 안 되오."

"어디 봅시다."

하고 이사 올 사람은 어디로 달려간다.

조금 있다가 집주인 노파쟁이가 성난 상바닥을 하여 가지고 쫓아 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남의 집을 세들어 가지고, 넉 달 치나 세를 떼먹고…… 낯짝이 뻔뻔하게, 들어오는 이삿짐을 막다니…… 이런 수가 있나? 이런 도적의 맘보가 있담?"

"아, 여보, 당신이 경우를 타서 말을 순순히 한대도 내 맘 돌아가는 대로 할 터인데 그렇게 고약만 떨면 일이 잘될 듯싶소?"

"무엇 어째? 내 맘대로……? 그것부터 도적의 맘보가 아니고 무엇이냐?"

이 말끝을 마치 기적의 끝소리 내어 뽑듯 길게 지르며 악을 쓰며 내게로 달려든다.

대번에 발길로 질러 죽이고 싶은 생각이 펄쩍 나다가도 소위 교양있다는 문화인이라는 가면 아래에서 이 인조 병신은 속을 꿀꺽꿀꺽 참고 있다가,

"여보, 나는 내 맘대로 할 터이니 당신은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오."

하고 대문을 닫아걸고 들어와 방에 누웠다.

대문짝이 왈칵 자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옆에 섰던 우리집 여편네하고 집주인 노파하고 싸움질이 나는 모양이다. '이년, 저년' 소리까지 들린다. 나는 건넌방에서 꼼짝 아니 하고 누워 있었다. 이삿짐은 들어온다. 안방으로, 마루로 그뜩 쌓인다. 안방에 누워 있던 병모는 건넌방으로 쫓겨 나온다. 우리집 여편네는 달려들어 망신당한 분풀이를 내게 하려 든다.

"사내라고 돈을 얼마나 때깔 좋게 벌어들이면 여편네를 이런 고생살이 끝에 망신까지 시킨단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민망한 생각이 나던 터에 이 말에는 그만 역증이 난다.

"에끼, 망할계집년, 사람의 속을 몰라도 분수가 있지. 소새끼 같은 계집년! 이렇게 하고 사는 것도 호강인 줄만 알아라!"

저쪽의 발악은 더하여 간다. 참다못하여 그만 발길로 한번 걷어질렀다. 자빠지며 하는 소리다.

"계집을 굶기고 헐벗기는 대신에 밟아 죽이려 드는구나!"

계집의 잔 사설, 세 새끼의 울음 소리, 어머니의 걱정 소리, 아우성판이다.

나는 그만 밖으로 나오며 혼자 한 말이다.

"에끼…… 이 조선 땅 젊은 놈의 썩는 속은 누가 알까? ……저기 가는 저 소나 알까?"

"이것도 권태를 조화시키는 한 흥분제인가?"

말하자면, 처음에는 이 따위의 씁쓰름한 가난살이 맛도 자기 생활의 훌륭한 체험이요, 또는 정신상의 무엇을 얻는 것도 같아서, 고통의 주먹이 와서 때릴 때마다 그것을 신성시하고 경건한 마음씨로 대하여 나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찌들기만 하니까 나중에는 그만 몸과 마음이 까부러져 가기만 할 뿐이다. 이러다가는 큰일났다! 이 까부러져 가는 권태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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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때 태평통 긴 거리로 걸어나오는 나의 주머니 속에는 돈 삼십 원이 들어 있다. 석 달 만에 탄 월급이 이것이다. 한 달 분 사십오 원씩 석 달 치를 합하면 백삼십오 원. 이것을 가지고 묵은 방 빈대 구멍 틀어막듯 하여도 가량이 없는데, 게다가 삼십 원이다. 비틀어진 생각이 그저 풀리지 않는다. 아까도 그 돈을 손에 받아 들 제 그 자리에서 그만 찢어 내어던져 버리고 싶은 생각도 났었다.

"빈주먹에 단돈 일 원이라도 들어온 것만 다행이니 우선 이것을 가지고 가서 급한 불이나 끌까?"

주린 개떼가 주둥이들을 한데 모으고 제 주인 올 때만 기다리듯 하는 집 식구들의 꼴이 눈에 확 지나간다.

"가자 가자, 어서 집으로 가자!"

"방을 하나 얻어서 집을 옮기고, 양식과 나무나 좀 사고……."

"그리고 나면 또 무엇 해? ……밤낮 되풀이하는 그 지지한 생활의 꼬락서니……."

언제인가, 밥 먹고들 앉아 있는 집 식구들 꼴을 혼자 우두커니 바라다보고 있다가 속으로,

'저 몹쓸 아귀들! 내 육신과 정신을 뜯어먹는 이 아귀들!'

하며 염오증이 왈칵 나던 생각이 다시 난다.

'아― 인제 그 꼴들 보기도 참 싫다! 그 시덥지 않은 생활을 되풀이하기도 참 멀미난다!'

자하골을 바라다보고 가던 나의 걸음은 황토마루 네거리에서 그만 종로를 향하고 꺾어서 걷고 있다.

"에끼…… 내가 그만 이 돈을 쓰고 들어갈까 보다."

어머니의 한숨, 여편네의 눈물, 아이들의 짜증―---이 돈 삼십 원.

"어디 내가 좀 집 식구들의 눈물을 짜서 먹고 견디어 보리라…… 내 가슴속이 얼마나 튼튼한가 좀 시험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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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나는 영추문 앞길로 발을 자주 놀려 올라올 때, 코에서는 아직도 덜 깬 술 냄새가 물씬물씬 남을 깨닫게 한다. 우리집 골목을 접어들며 나는 발소리를 숨기고 귀를 자주자주 재게 된다. 대문턱에 이르러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모두 죽었나? 죽지는 아니하였어도 굶어 늘어져서들 누웠나?'

쑥 들어가 보니, 늘어지기는커녕, 멀쩡하니 지껄이고 앉아 있다. 다만 여편네란 사람이 의심난 눈으로 나를 훑어본다. 간밤에 어디서 자고 왔느냐는 의미인가 보다.

주머니 속을 뒤져 보니 쓰고 남은 돈이 얼마 들어 있다. 내가 밖으로 쫓아 나가 쇠고기 두 근 사서 들고, 쌀 한 말을 사서 들리고, 아이들 줄 과자도 좀 사가지고 들어왔다.

"왜? 쌀은 그렇게 적게 팔고 고기는 많이 샀어?"

하고 말하는 여편네는 기쁜 빛이 얼굴에 넘친다. 아마 내가 돈이 많이 생긴 듯싶어서 그러는 모양이다. 이때껏 칭얼대기만 하였으리라고 했던 아이들도 새로운 활기를 얻어 방 안에서 뛰논다.

'꿀꺽꿀꺽', '후룩후룩' 참 잘들 먹어 댄다. 고깃국 맛이 매우들 좋은 모양이다. 이것을 보고 나는 한번 빙그레 웃었다. 두가지 세가지 빛으로 섞은 웃음을 보는 일도 근래에 처음인 듯싶다.

갑자기 나는 멜랑콜리한 기분에 싸여 갑갑한 가슴을 안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바깥은 날이 몹시 흐리었다. 후텁지근하다. 거리에 걷는 사람도 모두 후줄근하여 보인다.

"어― 참 갑갑하다!"

이 거리에, 이 사람들 위에 어서 비가 내리지 않나!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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