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이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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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빈 李汝馪 (1556년 ~ 1631년) |
참고 생애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우계(羽溪), 자(字)는 덕훈(德薰), 호(號)는 취사(炊沙) 또는 감곡(鑑谷).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합격, 임진왜란 때 김개국 의병장 휘하의 장수로 활동하였다. 그뒤 부친상을 마친후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벽사도찰방(碧沙道察訪)에 임명됐으나 1년 만에 사직하고 영천 도촌으로 돌아왔다. 1610년(광해군 2) 성균관전적으로 등용되었으나 정인홍, 이이첨, 김개시 등의 국정농단에 반대하여 사퇴하였다. 이듬해 모친상을 당해 3년상을 마쳤다. 이 때 정인홍 등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양선생변무소를 지어 올려 정인홍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1614년 칠서의 변이 일어나 영창대군 사형론과 인목대비 폐비여론이 나오자, 홀로 위험을 무릅쓰고 전은소를 지어올려 폐모살제의 옳지 못함을 상소하고 7일 동안 합문(閤門) 앞에 엎드려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18년(광해군 10)안동향교(安東鄕校)의 제독관(提督官)이 되고, 동년 겨울 상주향교 제독관(尙州鄕校 提督官), 1619년(광해군 11) 진주향교 제독관(晉州鄕校 提督官)을 지내기도 했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감곡(鑑谷)에 은거하여 후진 교육에 힘을 쏟았다. 1715년(숙종 41) 순흥 견일사에 제향되었다. |
저작
[편집]저서
[편집]- 취사문집
- 영주지
작품
[편집]- 명정암 기문(酩酊巖 記文)
시
[편집]- 나는 왜 매미처럼 한여름 뜨거운 날씨에 나대로 놀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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