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대왕실록/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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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年 春正月[편집]

1月 1日[편집]

면복으로 군신을 거느리고 신정을 하례하다[편집]

○〔丙寅〕朔/冕服率群臣賀正。 群臣請獻壽, 上以太上王未還, 不許。

면복(冕服)으로 군신을 거느리고 신정(新正)을 하례하였다. 군신이 헌수(獻壽)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태상왕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나아가 헌수하다[편집]

○太上王至自觀音窟, 上率百官, 詣太上殿上壽。

태상왕이 관음굴(觀音窟)에서 이르니,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나아가 헌수(獻壽)하였다.


도평의사사가 근정전에서 헌수하다[편집]

○都評議使司獻壽於勤政殿。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근정전(勤政殿)에서 헌수하였다.


경연에서 권근이 《통감촬요》를 진강하다[편집]

○始御經筵。 知經筵事權近進講《通鑑撮要》曰: “人主之學, 不但讀其書而已, 必先正其心。 是以傅說對高宗曰: ‘惟學遜志。’ 遜者, 虛心之謂也。 心有所蔽, 則一言一事之應, 必不得其正。” 上然之。

비로소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지경연사(知經筵事) 권근(權近)이 《통감촬요(通鑑撮要)》를 진강(進講)하였다.

"인주(人主)의 학문은 글만을 읽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열(傅說)이 은(殷)나라 고종(高宗)을 대하여 말하기를, ‘오직 학문은 뜻을 공손히 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공손[遜]이라는 것은 마음을 비게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가린 것이 있으면, 한마디 말이나 한가지 일의 응(應)함이 반드시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임금이 옳게 여겼다.


1月 10日[편집]

햇무리가 겹으로 서다[편집]

○乙亥/日有兩珥, 上冠。

해에 양이(兩珥)와 상관(上冠)이 있었다.


경연에서 《통감촬요》를 강하다가 불교 및 유교에 대해 하윤과 문답하다[편집]

○御經筵, 講《撮要》。 至西域有神, 其名曰佛, 良久乃曰: “佛, 謂之神則非也。” 知經筵事河崙對曰: “五帝三王之時, 未有佛, 至漢明帝時, 其書始播。 其道以寂滅爲宗, 與鬼神無以異也。” 上曰: “鬼神之道, 不可謂之虛也。 寡人昔仕僞朝爲代言, 從僞主次長湍, 有妓五六人, 俱發腹病, 卽用酒肉享, 紺嶽以禱, 俄有神降于一妓, 顚倒踴躍, 不知羞赧。 若此者, 不可謂之虛也。 且佛氏以慈悲不殺爲道, 儒者之道, 亦有好生惡殺之理, 此則近似也。” 崙對曰: “儒者之道, 非好濫殺, 上以供宗廟, 下以侑賓客耳。 大抵西域之人, 皆暴戾無道, 故釋氏以慈悲不殺誘之, 以輪回報應刼之, 非人主所宜信也。” 上曰: “然。” 曰: “釋氏右脅誕生, 聖人何不書? 人死歸于地獄, 亦非歟?” 崙對曰: “此甚無理之言也。 豈有人生自脅者? 是以聖人不書。 且人受陰陽五行之氣以生, 死則陰陽散而魂升魄降, 復有何物歸地獄者哉? 此佛氏以未來未見, 誘惑愚民, 非人主所宜信。” 上然之。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촬요(撮要)》를 강하다가, ‘서역(西域)에 신(神)이 있으니 그 이름은 부처[佛]라’고 한 데에 이르러서,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부처를 신(神)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하윤(河崙)이 대답하기를,

"오제(五帝)·삼왕(三王) 때에는 부처가 없었고,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에 이르러 그 경서(經書)가 비로소 전파되었는데, 그 도(道)가 적멸(寂滅)을 종지(宗旨)로 삼아서 귀신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귀신의 도는 허(虛)라고 말할 수 없다. 과인(寡人)이 옛날에 위조(僞朝)에 벼슬하여 대언(代言)이 되어, 위주(僞主)[1]를 따라 장단(長湍)에 머물렀는데, 기생 5, 6명이 한꺼번에 복통(腹痛)이 났었다. 곧 술과 고기를 가지고 감악산(紺嶽山)에 제향하여 기도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신(神)이 한 기생에게 내려 전지도지(顚之倒之)하고 펄펄 뛰면서 부끄러운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런 것은 헛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 불씨(佛氏)는 자비 불살(慈悲不殺)로 도를 삼는데, 유자(儒者)의 도에도 또한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이치가 있으니, 이것은 비슷하다."

하였다. 하윤이 대답하기를,

"유자의 도는 함부로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위로 종묘(宗廟)에 이바지하고 아래로 빈객을 권하는 것뿐입니다. 대저 서역(西域) 사람들이 모두 포악하고 무도하였기 때문에, 석씨(釋氏)가 자비 불살(慈悲不殺)로 달래고, 윤회 보응(輪回報應)으로 겁준 것이니, 인주(人主)의 믿을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다."

하고, 말하기를,

"석씨(釋氏)가 우협(右脅)에서 탄생하였다는데, 성인(聖人)이 어찌하여 쓰[書]지 않았는가? 사람이 죽으면 지옥(地獄)에 돌아간다는 것도 거짓인가?"

하였다. 하윤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매우 이치 없는 말입니다. 어찌 사람으로서 옆구리에서 난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이 쓰지 않은 것입니다. 또 사람은 음양 오행(陰陽五行)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나고, 죽으면 음양이 흩어져서 혼(魂)은 올라가고 백(魄)은 내려가는 것이니, 다시 무슨 물건이 있어 지옥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이것은 불씨가 미래(未來)와 보지 못한 것으로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한 것이니, 인주가 믿을 것이 못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집현전을 고쳐 보문각이라 하다[편집]

○改集賢殿爲寶文閣。

집현전(集賢殿)을 고쳐 보문각(寶文閣)이라 하였다.


전 예문춘추관 태학사 한상질의 졸기[편집]

○前藝文春秋館太學士韓尙質卒。 尙質, 淸州人, 高麗相脩之子。 登庚申第, 性聰敏, 歷揚中外, 皆有成績。 國初, 奉命請國號, 受朝鮮之名。 訃聞, 命攸司禮葬, 贈諡文烈。 子起。

전 예문춘추관 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 한상질(韓尙質)이 졸(卒)하였다. 한상질은 청주(淸州)사람인데, 고려(高麗)의 상신(相臣) 한수(韓脩)의 아들이었다. 경신년의 과거에 올랐는데,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중외(中外)의 벼슬을 두루 지냈으나 모두 성적이 좋았었다. 국초에 어명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서, 국호(國號)를 청하여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받았었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유사(攸司)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고 시호를 문열(文烈)이라 하였다. 아들은 한기(韓起)이다.


경연에서 한나라 때의 삼로, 오경과 불교의 길흉화복, 사뢰 등에 대해 배중륜·하윤과 논하다[편집]

○御經筵, 問漢三老、五更之事, 侍講官裵仲倫對曰: “昔明帝尊三老、五更, 猶我朝尊國師王師也。” 知經筵事河崙曰: “殿下漸有惑佛之弊。” 上曰: “寡人之好佛, 非若他人之惑也。 然佛氏以禍福示人者, 非歟?” 崙對曰: “佛氏皆以未見未來, 眩惑人心, 不敢以坦然事應言之, 此聖人惡其似是而非也。 若以禍福言之, 則昔釋氏在世時, 有盜殺其一族甚衆, 釋氏何不預言, 俾免其禍乎? 禍福之設之非, 於此可見。” 上曰: “舍利, 何自而生?” 崙對曰: “此精氣所畜也。 人修練精神, 則皆有舍利。 海中大蚌有寶珠, 蛇有明月珠。 蛇與蚌, 豈物之善, 而獨有此乎? 但精氣所畜耳。” 上笑之。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한(漢)나라의 삼로(三老)·오경(五更)[2]의 일을 물으니, 시강관(侍講官) 배중륜(裵仲倫)이 대답하기를,

"옛적에 명제(明帝)가 삼로·오경을 높였는데, 마치 우리 국조에서 국사(國師)·왕사(王師)를 높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하윤(河崙)이 말하기를,

"전하가 점점 부처에게 혹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인이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미혹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불씨(佛氏)가 화복(禍福)으로 사람에게 보인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하윤(河崙)이 대답하기를,

"불씨(佛氏)가 모두 미견(未見)과 미래(未來)를 가지고 인심을 현혹(眩惑)시키기 때문에, 감히 평탄한 사응(事應)을 가지고 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성인이 그 옳은 것 같으면서도 그른 것을 미워한 것입니다. 만일 화복을 가지고 말한다면, 옛적에 석씨가 세상에 있을 때에, 도적이 그 일족(一族)을 심히 많이 죽이었는데, 석씨(釋氏)가 어찌하여 미리 말해서 그 화를 면하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화복의 말이 그른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리(舍利)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하니, 하윤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정기(精氣)가 뭉친 것입니다. 사람이 정신을 수련(修鍊)하면, 모두 사리(舍利)가 있는 것입니다. 바다 가운데 큰 조개가 보주(寶珠)가 있고, 뱀이 명월주(明月珠)가 있으니, 뱀과 조개가 어찌 물건의 착한 것이어서 홀로 이것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정기가 뭉친 것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웃었다.


풍해도에서 배에 머물러 있던 왜인이 몰래 그들의 섬으로 돌아가다[편집]

○豐海道留船之倭, 將四艘潛還其島。

풍해도(豐海道)에서 배에 머물러 있던 왜인이 배 4척을 가지고 몰래 그들의 섬으로 돌아갔다.


문하 시랑찬성사 이거이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다[편집]

○門下侍郞贊成事李居易辭, 不允。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이거이(李居易)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1月 20日[편집]

흥국사의 금부처가 땀을 흘려 중추원 사 최유경을 보내 기양 도량을 베풀다[편집]

○乙酉/興國寺金人出汗。 翌日, 遣中樞院使崔有慶, 設七日道場以禳之。

흥국사(興國寺)의 금인(金人)이 땀을 흘렸다. 이튿날 중추원 사(中樞院使) 최유경(崔有慶)을 보내어 칠일 도량(七日道場)을 베풀고 기양(祈禳)하였다.


문하부에서 각품의 고신은 반드시 대성에서 서경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편집]

○門下府上疏, 請各品告身, 必署經臺省, 不允。 疏略曰:

告身之法, 署經臺省者, 所以勵廉恥激士風也。 近當草創之時, 急於用人, 始爲官敎之法, 是一時之權也。 然躐等而冒受者, 比比有之。 庶司員吏, 官至四品, 卽受官敎, 略無謹愼, 瘝官廢職, 廉恥不興。 士風不美者, 蓋由此也。 今當國家已定, 當以激勵士風, 肅淸朝廷爲重。 伏惟特令一品以下告身, 皆署經臺省, 以勵士風。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각품(各品)의 고신(告身)은 반드시 대성(臺省)에서 서경(署經)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疏)는 대략 이러하였다.

"고신(告身)의 법에 대성에서 서경(署經)하는 것은 염치를 권하고 사풍(士風)을 격려하자는 것입니다. 요사이 초창(草創)한 때를 당하여 사람 쓰기에 급해서 비로소 관교(官敎)의 법을 행하였으니, 이것은 일시의 권도입니다. 그러나, 등급을 건너뛰어 모람(冒濫)되게 받는 자가 자주 있고, 서사(庶司)의 원리(員吏)가 벼슬이 4품(品)에 이르면 곧 관교(官敎)를 받아서, 조금도 근신하는 바가 없습니다. 관(官)을 병들게 하고 직사를 폐하여서, 염치가 일어나지 못하고 사풍(士風)이 아름답지 못한 것이 대개 이 때문입니다. 지금 국가가 이미 정해졌사오니, 마땅히 사풍(士風)을 격려하고 조정을 숙청하는 것으로 중심을 삼아야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특별히 1품(品) 이하의 고신(告身)은 모두 대성(臺省)에서 서경(署經)하게 하여, 선비의 기풍을 격려하게 하소서."


1月 23日[편집]

서쪽·북쪽·동쪽에 붉은 기운이 있다[편집]

○戊子/西北東有赤氣。

서쪽·북쪽·동쪽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1月 24日[편집]

햇무리가 서고 서쪽, 북쪽에 붉은 기운이 있다[편집]

○己丑/日冠。 西北有赤氣。

일관(日冠)의 현상이 나타나고, 서쪽·북쪽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


경연에서 전백영이 진강하다[편집]

○御經筵。 同知經筵事全伯英講畢, 啓曰: “今者冬煖春寒, 宜小心敬愼。” 嘉納之。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전백영(全伯英)이 강론을 끝마치고 아뢰기를,

"지금 겨울이 따뜻하고 봄이 추우니, 마땅히 조심하여 공경하고 삼가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서운관 등에서 재이를 불교의 힘으로 막을 수 없음을 아뢰다[편집]

○書雲觀上言: “災異之讉, 非禱於佛神而可弭。 願夙夜敬畏, 以答天變。” 知經筵事河崙曰: “佛者, 西域之胡神。 昔西土之人, 橫逆無道, 釋迦生於周康王時, 廣張禍福之說, 誑誘人民, 及漢明帝時, 其法流入中國, 自後人率崇信。 夫佛法, 非治國安民之道, 全以因果禍福爲說。 人之死生壽夭, 悉關於命, 佛氏豈能長短之哉? 況佛法未入中國之時, 文、武、周公, 年幾百歲, 其法入中國以後, 人多夭折, 佛法之無益, 良可知矣。 釋氏云: ‘生生不滅。’ 信如其言, 釋迦豈止七旬有九而死哉? 釋迦之從兄弟, 有爲盜所害者, 釋迦曰: ‘前因難避。’ 若實知前因, 則何不預說, 俾免其禍乎? 若前因難避, 則雖佛亦末如之何矣。 乃謂前因, 而坐視骨肉之患, 尙且不救。 況今千載之後, 君臣之禍福, 其能爲之乎? 祈禱佛神, 無益於國, 章章明矣。” 上曰: “然。 吾亦不盡心祈禱。” 又曰: “釋氏之道, 天下之人皆信之者, 是必以爲眞也。” 知經筵事權近曰: “人之受形以生者, 以有五行之理也。 五行之理, 在心爲五常。 五行盛衰, 以之知命, 五行失常, 以之知病, 此現然之明驗也。 釋家乃以地水火風, 受形以生爲說者, 妄矣。” 上然之。

서운관(書雲觀)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재이(災異)의 견고(譴告)는 불신(佛神)에게 빌어서 그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원하건대,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천변에 대답하소서."

지경연사(知經筵事) 하윤(河崙)이 말하였다.

"부처라는 것은 서역(西域)의 오랑캐 신[胡神]인데, 옛날에 서토(西土) 사람이 횡역(橫逆) 무도(無道)하므로, 석가(釋迦)가 주(周)나라 강왕(康王) 때에 나와 널리 화복(禍福)의 설을 떠벌려서 인민을 속이고 달래었습니다.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에 미쳐 그 법이 중국에 흘러 들어왔는데, 그 뒤부터 사람들이 대개 숭상하고 믿었습니다. 대개 불법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도(道)가 아니고, 온전히 인과(因果) 화복(禍福)으로 말을 합니다. 사람의 생사(生死) 수요(壽夭)가 모두 명수(命數)에 관계되니, 불씨(佛氏)가 어찌 능히 목숨을 길게 하고 짧게 하겠습니까? 하물며, 불법이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에는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이 나이 거의 1백 세이었는데, 그 법이 중국에 들어온 이후에는 사람이 일찍 죽은 사람이 많았으니, 불법이 소용이 없는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석씨(釋氏)가 말하기를, ‘낳고 낳아서 멸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진실로 그 말과 같다면, 석가가 어찌하여 79세만 살고 죽었겠습니까? 석가의 종형제로서 도적에게 해(害)를 당한 자가 있었는데, 석가가 말하기를, ‘전인(前因)은 피하기 어렵다.’ 하였으니, 만일 실지로 전인(前因)을 알았다면, 어찌하여 미리 말해서 그 화를 면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전인(前因)을 피하기 어렵다면, 비록 부처라도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인이라고 말하면서 골육(骨肉)의 환란을 앉아서 보고, 오히려 구원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지금 천년 뒤에 군신(君臣)의 화복을 능히 할 수 있겠습니까? 불신(佛神)에게 기도하는 것이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분명합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나도 또한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는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석씨(釋氏)의 도를 천하 사람이 모두 믿는 것은 반드시 참[眞]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니, 지경연사(知經筵事) 권근(權近)이 말하였다.

"사람이 형상을 받아서 태어나는 것은 오행(五行)[3]의 이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행(五行)의 이치가 마음에 있어서 오상(五常)[4]이 되고, 오행의 성쇠(盛衰)로 명(命)을 알고 오행의 실상(失常)으로 병(病)을 아니, 이것은 현연(現然)한 밝은 징험입니다. 석가(釋家)에서 지(地)·수(水)·화(火)·풍(風)으로 형상을 받아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무식한 것입니다."

임금이 옳게 여겼다.


대간이 상소하여, 각품의 고신을 대간에서 서경하는 법을 세울 것을 청하다[편집]

○臺諫上疏, 復請各品告身, 署經臺省之法。 門下府疏曰:

道有升降, 政由俗革, 故有國家者, 必因時立法, 以救其弊, 此三代聖王議禮制度, 不能無沿革之異也。 我朝出謝之法, 必署經臺省, 實精選人材之要道也, 今五品以下, 只令本府署出, 四品以上, 直受官敎。 用人一也, 而告身之法, 岐而二之, 恐非盛代經久之典也。 臺省, 人主耳目之官, 公論所在, 故凡依貼諡誄口傳等事, 必令臺省察之。 況除拜庶官, 實國家之所重, 四品以上, 位益高而責愈重, 豈可使耳目之官, 不加察哉? 臣等請條其不可。 庶官, 人主所與共天職者也。 四品以上, 直受官敎, 自謂公論所不及, 怠於職事者, 頗多有之, 事功何自而興乎? 其不可者一也。 守令近民, 尤不可不選。 今也僥倖之徒, 曾不更事, 夤緣雜職, 秩過四品, 則直受官敎, 挈家以行。 國家何知行實賢否, 家道善惡哉? 及其之任, 則不遵條令, 恣行貪汚, 貽害於民, 歸怨於上, 其不可者二也。 士出於農, 而工商不與焉, 今官敎之法一行, 而工商賤隷, 尙有冒進之意。 若因仍不革, 則必至於混雜朝廷矣, 其不可者三也。 凡在官者, 不畏公論, 則易陷於不義, 署經臺省, 實使人謹愼之至術也。 若不禁於未然, 則人不遷善, 而必至於犯義矣, 其不可者四也。 殿下以繼世之主, 當隆平之時, 宜以勵士風正朝廷爲務, 其施爲之法, 不可與草創之日同也。 伏惟殿下, 革官敎之法, 特令臺省, 署出一品以下告身, 以正百官。

司憲府疏曰:

設官分職, 所以熙庶政; 繩違糾慝, 所以正百官。 夫爵人於朝, 而苟以一人之所薦, 置諸朝廷之上, 不使臺諫考察, 則非所以勵士風正百官也。 古者, 詔勑用人, 如有不便者, 中書門下, 皆應論執駁正之。 是以官得其人, 而政無失擧。 前朝爵人, 必署經臺諫者, 用是道也。 恭惟太上殿下, 當開國經營之時, 人心離合之際, 卽用官敎之法, 以待勳勞之士, 斯乃取便一時, 非所以垂憲萬世也。 殿下當守成之運, 草創權宜之法, 在所當改。 苟以爲太上之制, 不敢輕改, 則其爲弊, 將有不可勝言者矣。 凡士飭身修行, 不敢縱肆者, 誠畏臺諫之議其後也。 若官敎之制行, 而署合之法廢, 則慢於官而怠於行者, 無所忌憚, 萬事以之而墮, 士風以之而不振矣。 況殿下維新之治, 苟有讜言, 所當採納, 以廣言路? 頃者, 諫臣以此列上, 殿下不卽兪允, 臣等竊爲殿下惜之。 願革一時之權制, 取前朝告身之法, 皆令署經臺諫, 然後各就其職, 則士風益勵, 庶績咸熙, 治平之化, 庶可期也。

上乃下二章于都評議使司, 擬議以聞。 使司啓曰: “臺諫狀申, 於理允當。” 上許之。

대간(臺諫)이 상소(上疏)하여, 다시 각품(各品)의 고신(告身)을 대성에서 서경(署經)하는 법을 청하였다. 문하부(門下府)의 소(疏)는 이러하였다.

"도(道)는 오르고 내리는 것이 있고, 정치는 풍속(風俗)으로 말미암아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를 차지한 자가 반드시 시대에 따라서 법을 세워 그 폐단을 구제합니다. 이것은 삼대(三代) 성왕(聖王)이 예제(禮制)를 의논하고 법도를 제정하여 연혁(沿革)의 다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국조의 출사(出謝)[5]하는 법이 반드시 대성(臺省)에서 서경(署經)하는 것은 실로 인재(人材)를 엄정하게 선발하는 요도(要道)입니다. 지금 5품(品) 이하만 본부(本府)로 하여금 서출(署出)하게 하고, 4품(品) 이상은 직접 관교(官敎)를 받으니, 인재를 쓰는 것은 한가지인데, 고신(告身)의 법은 나누어져 둘이니, 성대(盛代)의 오래갈 수 있는 법전이 아닌가 합니다. 대성은 인주(人主)의 이목(耳目)과 같은 기관이요, 공론(公論)이 있는 곳이므로, 무릇 의첩(依貼)[6]·시뢰(諡誄)[7]·구전(口傳) 등의 일을 반드시 대성으로 하여금 살피게 하는데, 하물며, 여러 관원을 제수하는 것은 실로 국가의 중한 일이요, 4품(品) 이상은 벼슬이 더욱 높고 책임이 더욱 중하니, 어찌 이목(耳目)의 관원으로 하여금 살피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청하건대, 그 불가한 것을 조목조목 말하겠습니다.

여러 관원은 인주(人主)가 더불어 천직(天職)을 같이하는 자들인데, 4품(品) 이상은 직접 관교(官敎)를 받으므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공론이 미치지 못하는 바라’ 하여 직사에 태만한 자가 매우 많이 있으니, 사공(事功)이 어디에서 일어나겠습니까? 그 불가한 것의 한 가지입니다.

수령(守令)은 백성을 가까이 하니 더욱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일찍이 일을 경험하지 않고, 잡직(雜職)을 인연하여 직질(職秩)이 4품(品)만 지나면, 곧 관교(官敎)를 받아 가족을 거느리고 부임하니, 국가에서 어떻게 행실의 어질고 어질지 않은 것과 가도(家道)의 착하고 악한 것을 알겠습니까? 임소(任所)에 가서는 조령(條令)을 준수하지 않고 방자하게 탐오(貪汚)를 행하여, 해(害)를 백성에게 끼치고 원망을 윗사람에게 돌리니, 그 불가한 것의 두 가지입니다.

사(士)는 농(農)에서 나오고 공(工)과 상(商)은 참여하지 못하는 것인데, 지금 관교의 법이 한번 행하여지니, 공상(工商)·천례(賤隷)도 오히려 모람(冒濫)하게 사진(仕進)하는 뜻이 있습니다. 만일 그대로 인습하여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조정이 혼잡하게 될 것이니, 그 불가한 것의 세 가지입니다.

무릇 관직에 있는 자가 공론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불의(不義)에 빠지기가 쉬우니, 대성(臺省)에서 서경(署經)하는 것은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근신하게 하는 지극한 술책입니다. 만일 미연(未然)에 금지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착한 데 힘쓰지 않아서 반드시 의(義)를 범하는 데에 이를 것이니, 그 불가한 것의 네 가지입니다.

전하께서 대(代)를 이은 임금으로 태평한 때를 당하였으니, 마땅히 사풍(士風)을 격려하고 조정을 바로잡는 것으로 일을 삼을 것이요, 그 시행하는 법은 초창기(草創期)와 같이 할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관교의 법을 고쳐 특별히 대성으로 하여금 1품 이하의 고신(告身)을 서출(署出)하게 하여, 백관을 바루소서."

사헌부(司憲府)의 소(疏)는 이러하였다.

"관사(官司)를 설치하고 직임(職任)을 나누는 것은 여러 정사를 빛나게 하자는 것이요, 어기는 것을 다스리고 간특한 것을 규찰하는 것은 백관을 바루자는 것입니다. 대저 사람을 조정에 벼슬시킬 때에, 만일 한 사람의 천거에 의하여 조정 위에 두고 대간으로 하여금 고찰하게 하지 않으면, 사풍을 격려하고 백관을 바루는 소이가 아닙니다. 옛날에 조칙(詔勅)으로 사람을 썼는데, 만일 온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에서 모두 한결같이 논집(論執)하여 박정(駁正)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관직에는 적당한 사람을 얻고 정사에는 잘못된 거조(擧措)가 없었습니다. 고려 때 사람을 벼슬시킬 때에 반드시 대간에서 서경(署經)한 것은 이 방법를 쓴 것입니다. 생각건대, 태상(太上) 전하께서 개국하여 경영(經營)하실 때는 인심(人心)이 이합(離合)하는 즈음이었으므로, 곧 관교(官敎)의 법을 써서 훈로(勳勞)가 있는 인사를 대접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때에 편의한 것을 취한 것이요, 만세에 법을 남기자는 소이는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수성(守成)하는 운수를 당하여 초창기(草創期)의 권의(權宜)의 법을 마땅히 고쳐야 합니다. 만일 태상왕의 제도를 감히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폐단이 장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선비가 몸을 경계하고 행실을 닦아 감히 방자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대간이 그 뒤를 의논하는 것을 두려워함입니다. 만일 관교의 제도가 행하여지고 서합(署合)의 법이 폐지되면, 관직에 태만하고 행실에 게으른 자가 거리낄 것이 없어서, 만사가 이로 인하여 무너지고, 사풍(士風)이 이로 인하여 진작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전하의 유신(維新)의 정치에 만일 곧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받아들여서 언로를 넓혀야 합니다. 지난번에 간신(諫臣)이 이것을 가지고 열거하여 올렸는데, 전하께서 즉시 유윤하지 않으시니, 신 등은 간절히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원하건대, 한때 권의(權宜)의 제도를 고치고 고려의 고신(告身)의 법을 취하여, 모두 대간에서 서경(署經)한 연후에 각각 그 직사에 나가게 하시면, 사풍이 더욱 권장되고 모든 공적이 모두 빛나서, 치평(治平)의 교화를 거의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두 소장(疏章)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내려 상량하고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니, 사사(使司)에서 아뢰기를,

"대간이 장신(狀申)한 것이 사리에 윤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문하부에서 봉상시 소경 김첨을 탄핵하다[편집]

○門下府劾奉常少卿金瞻。 瞻建議: “本朝國學, 遇春秋二丁, 祭文宣王, 僭用太牢, 未合於禮。 乞依至正條格, 諸郡縣品式, 只用羊三。” 然本朝用太牢久矣, 瞻欲輕改, 故劾之。

문하부(門下府)에서 봉상 소경(奉常少卿) 김첨(金瞻)을 탄핵하였다. 김첨이 건의하였었다.

"본조(本朝) 국학(國學)에서 봄·가을 두 정일(丁日)을 당하여 문선왕(文宣王)을 제사하는 데에 참람하게 대뢰(大牢)[8]를 쓰니, 예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빌건대, 《지정조격(至正條格)》[9] 제군현(諸郡縣)의 품식(品式)에 의하여 양(羊) 셋만 쓰소서."

그러나 본조에서 대뢰(大牢)를 쓴 지가 오래인데, 김첨이 경솔히 고치고자 하였으므로, 탄핵한 것이다.


1月 28日[편집]

29일까지 누른 안개가 사방에 끼다[편집]

○甲午/至乙未, 黃霧四塞。

29일[을미]까지 누른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


남재가 정안공을 세워 세자를 삼자고 하자 정안공이 듣고 크게 노하여 꾸짖다[편집]

○上卽位後, 南在於闕庭大言曰: “卽今當立靖安公爲世子, 玆事不可緩也。” 靖安公聞之大怒, 叱責之。 上無嗣, 時人皆心擬靖安公爲世子。

임금이 즉위(卽位)한 뒤에 남재(南在)가 대궐 뜰에서 크게 말하기를,

"지금 곧 마땅히 정안공(靖安公)을 세워 세자(世子)로 삼아야 한다. 이 일은 늦출 수가 없다."

하였으므로, 정안공이 듣고 크게 노하여 꾸짖었었다. 임금이 적사(嫡嗣)가 없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정안공이 세자가 되리라 생각하였다.


제2차 왕자의 난. 이방간을 토산에 추방하다[편집]

○放懷安公芳幹于兔山。 芳毅、芳幹及靖安公, 皆上之母弟也。 上無嫡嗣, 母弟當爲後。 益安性醇謹無他, 芳幹謂己以次當立, 然不學狂癡, 靖安公英睿夙成, 通經達理, 開國定社, 皆其功也, 故國人咸歸心焉。 芳幹深忌之, 謂妻姪判校書監事李來曰: “靖安公有猜於我, 我豈若匹夫徒死於人手乎?” 來驚曰: “公聽小人之讒, 欲害骨肉, 何可忍聞! 況靖安公有大勳於王室, 開國定社, 誰之力耶? 公之富貴, 亦由是耳。 公必欲如是, 則必得大惡之名, 而事且不成矣。” 芳幹忿然不悅曰: “助我者, 言不若此矣。” 宦者姜仁富, 芳幹妻之養父也。 跪而挼手曰: “公何爲發此言耶? 請勿復也。” 來, 禹玄寶之門生也。 詣玄寶第, 具道其言, 芳幹欲以是月晦日擧事。 且曰: “靖安公亦公之門生也, 宜速密諭。” 玄寶使其子洪富, 告于靖安公。 是夜, 靖安公與河崙、李茂等, 密議應變之策。 先是, 芳幹畜異謀, 邀公于第, 公欲往, 忽有疾不果。 異日, 芳幹與公, 偕詣闕謁上, 竝馬而回, 芳幹一不與語。 時三軍府令諸公侯, 獵禽以供纛祭, 靖安公將以明日出獵, 先令趙英茂, 領驅軍曉出于野。 芳幹子義寧君孟宗, 詣靖安公邸, 問獵所, 因曰: “我父, 今日亦出獵。” 靖安公遣人芳幹第, 偵其獵所, 芳幹軍士, 皆甲而奔集, 靖安公乃知有變。 於是, 義安公和、完山君天祐等十餘人, 皆會靖安公邸。 公欲以軍士自衛不出, 和、天祐直入寢室, 力請擧兵應之。 靖安公涕泣固拒之曰: “骨肉相殘, 非義之甚, 我以何顔應之乎?” 和、天祐等泣請不已, 亦不從, 卽使人於芳幹, 諭以大義, 請釋憾相見, 芳幹怒曰: “吾志已定, 何可更回!” 和白靖安公曰: “芳幹凶險已極, 事勢至此, 豈可守小節, 不顧宗社大計乎?” 公猶固拒不出, 和力挽公出于外廳, 公不得已, 呼奴小斤, 令出甲分與諸將。 公入內, 夫人卽提甲被之, 加以單衣, 據大義勸令擧兵, 公乃出。 和、天祐等, 擁逼上馬, 公使禮曹典書辛克禮, 聞于上曰: “宜命固守闕門, 以備非常。” 上未信。 俄而, 芳幹使其麾下上將軍吳用權啓曰: “靖安公謀欲害我, 我不得已起兵攻之, 請上勿驚。” 上大怒, 使都承旨李文和, 往諭芳幹曰: “爾惑聽亂言, 謀戕同氣, 狂悖甚矣。 爾其釋兵, 單騎赴闕, 予將保全之。” 文和未至, 芳幹已爲姻親閔原功、騎士李成奇等所激, 率孟宗及麾下數百人, 擐甲執兵, 道過太上殿, 使人啓曰: “靖安將害臣, 臣不可空死, 故發兵應變。” 太上王大怒曰: “汝於靖安, 異父乎? 異母乎? 彼如牛人, 何乃至此耶!” 芳幹行兵向內城東大門, 文和遇於善竹橋邊, 稱有旨, 芳幹下馬, 文和宣旨, 芳幹不從, 遂上馬陳兵于可祚街。 靖安公使盧閈, 告益安公曰: “兄病矣, 請嚴兵自衛毋動。” 又使李膺閉內城東大門。 承旨李叔蕃欲從公出獵, 行至白金反街, 閔無咎使人曰: “速具兵甲來。” 叔蕃乃奔詣公邸, 未至, 公已整兵而出, 過屎反橋駐馬, 諸軍士奔集馬前, 闌街不行。 叔蕃令軍士各歸本牌, 部伍旣定, 告公曰: “我先赴敵, 誓不奔北, 公宜速來。” 乃率武士數人先馳, 公曰: “我軍屯聚一處, 彼若射之, 則無一矢虛發矣。 嘗觀石戰, 忽有一二人, 從旁小洞, 叫呼突出, 則敵皆驚潰。 今小洞伏兵, 甚可畏也。” 乃命李之蘭, 分軍入闊洞上南山。 行至太廟洞口, 令和領軍上南山, 又把子反、注乙井、妙覺等諸洞, 皆遣兵備之。 叔蕃到善竹路上, 韓珪、金宇等所騎馬, 中箭退走。 叔蕃謂韓珪曰: “汝馬將死, 宜卽易乘。” 謂金宇曰: “汝馬不傷, 宜速還戰。” 叔蕃馳入兩軍間, 徐貴龍亦先入, 呼叔蕃曰: “欲立一處而射。” 叔蕃答曰: “此等時不宜呼名。 我欲立川中射之。” 公與韓珪馬, 令還赴。 上又遣大將軍李之實, 諭芳幹止之, 矢下如雨, 不得入而還。 芳幹自善竹到可祚街駐兵, 兩軍交戰, 芳幹步卒四十餘人, 立於馬井洞內, 又騎兵二十餘人, 出典牧洞口。 公麾下睦仁海面中箭, 金法生中箭卽死。 於是, 芳幹軍士爭射叔蕃, 叔蕃發十餘矢, 皆不中, 兩軍相對。 上聞芳幹拒命, 益怒, 且恐其見害, 乃嘆曰: “芳幹雖狂悖, 非其本心, 必爲奸人所賣耳。 不意骨肉乃爾!” 參贊門下府事河崙啓曰: “賜敎書以誘之, 可解也。” 卽命崙製敎書曰:

予以否德, 托于臣民之上, 庶賴宗室勳舊大小之臣, 同心戮力, 以致豐平。 不意母弟懷安公芳幹, 惑於無賴之徒讒間之言, 謀害骨肉, 予甚痛焉。 祇欲兩全, 以安宗社。 芳幹宜卽放散軍士, 歸於私第, 可全性命。 予不食言, 有如天日。 其一行軍士, 下旨之後, 不卽解散者, 予不敢宥, 竝以軍法處之。

命左承旨鄭矩, 齎赴軍前。 未至, 上黨侯李佇率所領慶尙道侍衛軍, 歷黔洞源。 過妙蓮岾, 公駐兵黔洞前路, 數使人戒前驅曰: “若見我兄, 勿發矢。 違者, 斬。” 和等登南山, 佇至妙蓮岾之陰, 竝吹角。 叔蕃射中騎士一人, 應弦而倒, 乃芳幹爪牙李成奇也。 孟宗素善射, 是日, 彎弓不彀不能射。 大軍吹角, 芳幹軍皆奔潰, 徐益、馬天牧、李柔等, 爲先鋒追之。 芳幹軍三人, 執槍叢立, 天牧擊殺二人, 又將殺一人, 公見之曰: “彼無罪, 勿殺之。” 益執槍追芳幹, 芳幹勢窮北走, 公呼小斤曰: “予恐無知人或害兄, 汝走疾呼, 勿令致害。” 小斤與高臣傅、李光得、權希達等, 走馬追之。 芳幹獨馳入妙蓮北洞, 小斤等不及見, 直馳過成均館, 遇自炭峴門來者問之, 皆曰: “無。” 小斤還馳上輔國西峴望之, 芳幹自妙蓮北洞出麻前岐路, 入輔國洞, 有帶鞍小騮馬隨來。 小斤等追之, 芳幹過輔國北岾, 入成均館西洞, 到古積慶園基, 下馬解甲, 棄弓矢而臥。 見希達等追至, 謂曰: “汝等爲殺我來耶?” 希達等曰: “是何言耶! 公勿懼。” 於是, 芳幹以甲與臣傅, 弓矢與希達, 環刀與光得。 謂小斤曰: “我更無所持之物, 故無以與汝。 我若得生, 則後必重報。” 希達等扶持芳幹, 騎小騮馬, 擁至成均館門外東峯下馬。 芳幹涕泣謂希達等曰: “我聽人言, 以至於此。” 鄭矩至, 宣讀敎書, 納諸芳幹懷中。 芳幹拜曰: “感上至恩。 臣初無不軌之心, 但怨靖安耳。 今敎書如此, 上豈紿我哉? 願丐餘生。” 時睦仁海所騎靖安公邸馬, 中箭逸走, 自來入廐, 夫人意必戰敗, 欲自赴戰場, 與公同死, 徒步而往, 侍女金氏等五人, 諫之不能得,【金氏, 卽敬寧之母也。】奴韓奇等遮路止之。 初亂方作, 和、天祐扶靖安上馬, 夫人召巫女鞦轡房、鍮房等, 問勝否, 皆曰: “必勝, 無憂。” 隣居號淨祀婆者名加也之亦至, 夫人謂婆曰: “昨夜之曉夢, 我在新敎舊宅, 見太陽在空。 兒莫同【今上兒諱】 正坐日輪之中, 是何兆也?” 婆判曰: “公當爲王, 常抱此兒之應也。” 夫人曰: “是何言也? 此事安可冀望也?” 婆遂歸其家。 至是, 婆聞捷聲來告, 夫人乃還。 公收兵駐馬于麻前岐路川邊塢上, 放聲痛泣, 大小軍士皆泣。 公召叔蕃曰: “兄性本愚直, 予意謂必惑人言而爲之, 果然。 汝往見兄, 問亂之由。” 叔蕃馳問芳幹, 芳幹不答。 叔蕃更問曰: “公已與希達言之, 何以不言? 公若不言, 國家必問之, 終能隱乎?” 芳幹不得已答曰: “前年冬至, 朴苞到吾家言曰: ‘今日大雨, 公知其應乎? 古人云: 「冬雨損道, 兵交於巿。」’ 我答曰: ‘如此之時, 安有交兵之事乎?’ 苞曰: ‘靖安公視公之眼, 有異矣。 必將生變, 公宜先手。’ 我聞之, 以謂不可空死於他人之手, 乃先發耳。” 叔蕃還告, 公遂還邸。 上遣右承旨李淑, 往謂芳幹曰: “汝以白晝, 動兵京都, 罪在不宥。 然骨肉至情, 不忍加誅, 從汝所願, 外方安置。” 芳幹請歸兔山村庄, 上命大護軍金重寶、巡軍千戶韓珪, 押芳幹父子, 安置兔山。 苞本是靖安公助戰節制使也。 其日稱疾不出, 中立觀變, 命下巡軍, 又下芳幹都鎭撫崔龍蘇及助戰節制使李沃ㆍ張湛ㆍ朴蔓等十餘人。 時, 益安公緣宿疾, 闔門不出, 聞變痛哭流涕曰: “上有明君, 下有令弟, 芳幹何爲乃爾!” 卽還上節制之印幷軍籍於三軍府。 先是, 書雲觀啓曰: “昨昏, 赤祲見于西北, 宗室中當有猛將出。” 士大夫皆屬目靖安公, 八日而亂作。

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을 토산(兎山)에 추방하였다. 방의(芳毅)·이방간(李芳幹)과 정안공(靖安公)은 모두 임금의 동복 아우였다. 임금이 적사(嫡嗣)가 없으니, 동복 아우가 마땅히 후사(後嗣)가 될 터인데, 익안공(益安公)은 성품이 순후(醇厚)하고 근신하여 다른 생각이 없었고, 방간은 자기가 차례로서 마땅히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배우지 못하여 광망하고 어리석었으며, 정안공은 영예(英睿)하고 숙성(夙成)하며 경서(經書)와 이치에 통달하여, 개국(開國)과 정사(定社)가 모두 그의 공이었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마음으로 귀부(歸附)하였다. 방간이 깊이 꺼리어서 처질(妻姪)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내(李來)에게 말하기를,

"정안공이 나를 시기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필부(匹夫)처럼 남의 손에 개죽음하겠는가!"

하니, 이내가 깜짝 놀라 말하였다.

"공(公)이 소인의 참소를 듣고 골육(骨肉)을 해치고자 하니, 어찌 차마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정안공은 왕실(王室)에 큰 훈로가 있습니다. 개국과 정사가 누구의 힘입니까? 공(公)의 부귀(富貴)도 또한 그 때문입니다. 공(公)이 반드시 그렇게 하시면, 반드시 대악(大惡)의 이름을 얻을 것이고, 일도 또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방간이 불끈 성을 내어 좋아하지 않으면서,

"나를 도울 사람이면 말이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환자(宦者) 강인부(姜仁富)는 방간의 처의 양부(養父)인데, 꿇어앉아서 손을 비비며 말하기를,

"공은 왜 이런 말을 하십니까? 다시는 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이내(李來)는 우현보(禹玄寶)의 문생(門生)이었으므로, 우현보의 집에 가서 그 말을 자세히 하고, 방간이 이달 그믐날에 거사(擧事)하려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안공도 또한 공의 문생이니, 빨리 비밀히 일러야 합니다."

하였다. 우현보가 그 아들 우홍부(禹洪富)를 시켜 정안공에게 고하였다. 이날 밤에 정안공이 하윤(河崙)·이무(李茂) 등과 더불어 응변(應變)할 계책을 비밀히 의논하였다. 이 앞서 방간이 다른 음모를 꾸며 가지고 정안공을 그의 집으로 청하였는데, 정안공이 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가지 못하였다. 다른날 방간이 정안공과 더불어 함께 대궐에 나가 임금을 뵙고 말[馬]을 나란히 하여 돌아오는데, 방간이 한번도 같이 말하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삼군부(三軍府)에서 여러 공후(公侯)로 하여금 사냥을 하게 하여 둑제(纛祭)[10]에 쓰게 하였다. 정안공이 다음날 사냥을 나가려고 하여, 먼저 조영무(趙英茂)를 시켜 모릿꾼[驅軍]을 거느리고 새벽에 들에 나가게 하였다. 방간의 아들 의령군(義寧君) 이맹종(李孟宗)이 정안공의 저택(邸宅)에 와서 사냥하는 곳을 묻고, 인하여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도 오늘 또한 사냥을 나갑니다."

하므로, 정안공이 사람을 방간의 집에 보내어 그 사냥하는 곳을 정탐하였는데, 방간의 군사는 모두 갑옷을 입고 분주히 모였었다. 정안공이 이에 변이 있는 것을 알았다. 이때에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완산군(完山君) 이천우(李天祐) 등 10인이 모두 정안공의 집에 모이었다. 정안공이 군사로 스스로 호위하고 나가지 않으려 하니, 이화와 이천우가 곧 침실로 들어가 군사를 내어 대응할 것을 극력 청하였다. 정안공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거절하기를,

"골육(骨肉)을 서로 해치는 것은 불의가 심한 것이다. 내가 무슨 얼굴로 응전하겠는가?"

하였다. 이화와 이천우 등이 울며 청하여 마지않았으나 또한 따르지 아니하고, 곧 사람을 방간에게 보내어 대의(大義)로 이르고, 감정을 풀고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방간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 뜻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어찌 다시 돌이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화가 정안공에게 사뢰기를,

"방간의 흉험한 것이 이미 극진하여 사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작은 절조를 지키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돌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정안공이 오히려 굳이 거절하고 나오지 않았다. 이화가 정안공을 힘껏 끌어 외청(外廳)으로 나왔다. 정안공이 부득이 종 소근(小斤)을 불러 갑옷을 내어 여러 장수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부인이 곧 갑옷을 꺼내 입히고 단의(單衣)를 더하고,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권하여 군사를 움직이게 하였다. 정안공이 이에 나오니, 이화·이천우 등이 껴안아서 말에 오르게 하였다. 정안공이 예조 전서(禮曹典書) 신극례(辛克禮)를 시켜 임금에게 아뢰기를,

"대궐문을 단단히 지켜 비상(非常)에 대비하도록 명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믿지 않았다. 조금 뒤에 방간이 그 휘하 상장군(上將軍) 오용권(吳用權)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공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내가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합니다. 청하건대, 주상은 놀라지 마십시오."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방간에게 가서 타이르기를,

"네가 난언(亂言)을 혹(惑)하여 듣고 동기(同氣)를 해치고자 꾀하니, 미치고 패악하기가 심하다. 네가 군사를 버리고 단기(單騎)로 대궐에 나오면, 내가 장차 보전하겠다."

하였다. 이문화가 이르기 전에 방간이 이미 인친(姻親) 민원공(閔原功)·기사(騎士) 이성기(李成奇) 등의 부추김을 받아, 이맹종(李孟宗)과 휘하 수백 인을 거느리고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태상전(太上殿)을 지나다가, 사람을 시켜 아뢰기를,

"정안(靖安)이 장차 신을 해치려 하니, 신이 속절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발하여 응변(應變)합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하였다. 방간이 군사를 행(行)하여 내성(內城) 동대문(東大門)으로 향하였다. 이문화(李文和)가 선죽교(善竹橋)가에서 만나서,

"교지(敎旨)가 있다."

하니, 방간이 말에서 내렸다. 이문화가 교지를 전하니, 방간이 듣지 아니하고, 드디어 말에 올라서 군사들을 가조가(可祚街)에 포진하였다. 정안공이 노한(盧閈)을 시켜 익안공(益安公)에게 고하기를,

"형은 병들었으니, 청하건대, 군사를 엄하게 하여 스스로 호위하고 움직이지 마십시오."

하고, 또 이응(李膺)을 시켜 내성(內城) 동대문을 닫았다. 승지(承旨) 이숙번(李叔蕃)이 정안공을 따라 사냥을 나가려고 하여, 가다가 백금반가(白金反街)에 이르렀는데, 민무구(閔無咎)가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빨리 병갑(兵甲)을 갖추고 오라!"

하였다. 이숙번이 이에 달려서 정안공의 저택(邸宅)에 갔으나, 그가 이르기 전에 정안공이 이미 군사를 정돈하여 나와, 시반교(屎反橋)를 지나 말을 멈추고, 여러 군사들이 달려와 말 앞에 모여서 거리를 막고 행(行)하지 않았다. 이숙번이 군사들로 하여금 각각 본패(本牌)에 돌아가게 하여 부오(部伍)가 정해지니, 정안공에게 고하기를,

"제가 먼저 적(敵)에게 나가겠습니다. 맹세코, 패하여 달아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은 빨리 오십시오."

하고, 무사(武士) 두어 사람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갔다. 정안공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가 한 곳에 모여 있다가 저쪽에서 만일 쏘면, 한 화살도 헛되게 나가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일찍이 석전(石戰)을 보니, 갑자기 한두 사람이 작은 옆 골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쳐 나오니까, 적들이 모두 놀라서 무너졌었다. 지금 작은 골목의 복병(伏兵)이 심히 두려운 것이다."

하고, 이지란(李之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활동(闊洞)으로 들어가 남산(南山)을 타고 행(行)하여 태묘(太廟) 동구(洞口)에 이르게 하고, 이화(李和)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남산에 오르게 하고, 또 파자반(把子反)·주을정(注乙井)·묘각(妙覺) 등 여러 골목에 모두 군사를 보내어 방비하였다. 이숙번이 선죽(善竹) 노상(路上)에 이르니, 한규(韓珪)·김우(金宇) 등의 탄 말이 화살에 맞아 퇴각하여 달아났다. 이숙번이 한규에게 이르기를,

"네 말이 죽게 되었으니, 곧 바꿔 타라."

하고, 김우(金宇)에게 이르기를,

"네 말은 상하지 않았으니, 빨리 되돌아가서 싸우라."

하고, 이숙번이 달려서 양군(兩軍) 사이로 들어가니, 서귀룡(徐貴龍)이 또한 먼저 들어가서 이숙번을 부르면서 말하기를,

"한 곳에 서서 쏩시다."

하니, 이숙번이 대답하기를,

"이런 때는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다. 나는 내[川] 가운데 서서 쏘겠다."

하였다. 정안공이 한규에게 말을 주어 도로 나가 싸우게 하였다. 임금이 또 대장군(大將軍) 이지실(李之實)을 보내어 방간에게 일러 중지하게 하려 하였으나, 화살이 비오듯이 쏟아져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방간이 선죽(善竹)으로부터 가조가에 이르러 군사를 멈추고, 양군이 교전하였는데, 방간의 보졸(步卒) 40여 인은 마정동(馬井洞) 안에 서고, 기병 20여 인은 전목 동구(典牧洞口)에서 나왔다. 정안공의 휘하 목인해(睦仁海)가 얼굴에 화살을 맞고, 김법생(金法生)이 화살에 맞아 즉사하였다. 이에 방간의 군사가 다투어 이숙번을 쏘았다. 이숙번이 10여 살을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양군(兩軍)이 서로 대치하였다. 임금은 방간이 명령을 거역하였다는 말을 듣고 더욱 노하고, 또 해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탄식하여 말하기를,

"방간이 비록 광패(狂悖)하나, 그 본심이 아니다. 반드시 간인(奸人)에게 매수된 것이다. 골육(骨肉)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니,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윤(河崙)이 아뢰기를,

"교서(敎書)를 내려 달래면 풀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곧 하윤에게 명하여 교서를 짓게 하였다.

"내가 부덕한 몸으로 신민(臣民)의 위에 자리하여, 종실(宗室)·훈구(勳舊)·대소 신하의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다함에 힘입어서 태평에 이를까 하였더니, 뜻밖에 동복 아우 회안공(懷安公) 방간이 무뢰(無賴)한 무리의 참소하고 이간하는 말에 유혹되어, 골육을 해치기를 꾀하니, 내가 심히 애통하게 여긴다. 다만 양쪽을 온전하게 하여 종사(宗社)를 편안하게 하려 하니, 방간이 곧 군사를 놓아 해산하고 사제(私第)로 돌아가면, 성명(性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식언(食言)하지 않기를 하늘의 해를 두고 맹세한다. 그 한 줄의 군사라도 교지를 내린 뒤에 곧 해산하지 않는 자들은 내가 용서하지 아니하고 아울러 군법으로 처단하겠다."

좌승지(左承旨) 정구(鄭矩)에게 명하여 교서를 가지고 군전(軍前)에 가게 하였는데, 이르기 전에 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가 소속인 경상도(慶尙道) 시위군(侍衛軍)을 거느리고 검동원(黔洞源)을 거쳐 묘련점(妙蓮岾)을 통과하였다. 정안공이 검동(黔洞)앞 길에 군사를 머무르고 자주 사람을 시켜 전구(前驅)를 경계하기를,

"만일 우리 형을 보거든 화살을 쏘지 말라. 어기는 자는 베겠다."

하였다. 이화 등은 남산(南山)에 오르고, 이저(李佇)는 묘련점(妙蓮岾) 응달에 이르러 함께 각(角)을 불었다. 숙번이 기사(騎士) 한 사람을 쏘아 맞혔는데, 시위 소리에 응하여 꺼꾸러지니, 곧 방간의 조아(爪牙) 이성기(李成奇)였다. 이맹종(李孟宗)은 본래 활을 잘 쏘았는데, 이날은 활을 당기어도 잘 벌어지지 않아서 능히 쏘지 못하였다. 대군(大軍)이 각(角)을 부니, 방간의 군사가 모두 무너져 달아났다. 서익(徐益)·마천목(馬天牧)·이유(李柔) 등이 선봉(先鋒)이 되어 쫓으니, 방간의 군사 세 사람이 창을 잡고 한 데 서 있었다. 마천목이 두 사람을 쳐 죽이고 또 한 사람을 죽이려 하니, 정안공이 보고 말하기를,

"저들은 죄가 없으니 죽이지 말라."

하였다. 서익(徐益)이 창을 잡고 방간을 쫓으니, 방간이 형세가 궁하여 북쪽으로 달아났다. 정안공이 소근(小斤)[11]을 불러 말하기를,

"무지(無知)한 사람이 혹 형(兄)을 해칠까 두렵다. 네가 달려가서 빨리 소리쳐 해치지 말게 하라."

하였다. 소근이 고신부(高臣傅)·이광득(李光得)·권희달(權希達) 등과 더불어 말을 달려 쫓으니, 방간이 혼자서 달려 묘련(妙蓮) 북동(北洞)으로 들어갔다. 소근 등이 미처 보지 못하고 곧장 달려 성균관(成均館)을 지났다. 탄현문(炭峴門)으로부터 오는 자를 만나서 물으니, 모두

"보지 못하였다."

고 말하였다. 소근이 도로 달려 보국(輔國) 서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방간이 묘련 북동에서 마전(麻前) 갈림길로 나와서 보국동(輔國洞)으로 들어가는데, 안장을 띤 작은 유마(騮馬)가 뒤따라 갔다. 소근 등이 뒤쫓으니, 방간이 보국 북점(北岾)을 지나 성균관 서동(西洞)으로 들어서서 예전 적경원(積慶園) 터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갑옷을 벗고 활과 화살을 버리고 누웠다. 권희달 등이 쫓아 이르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 오는구나."

하니, 권희달 등이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공은 두려워하지 마시오."

하였다. 이에 방간이 갑옷을 고신부에게 주고, 궁시(弓矢)를 권희달에게 주고, 환도(環刀)를 이광득에게 주고, 소근에게 말하기를,

"내가 더 가진 물건이 없기 때문에, 네게는 줄 것이 없구나. 내가 살아만 나면 뒤에 반드시 후하게 갚겠다."

하였다. 권희달 등이 방간을 부축하여 작은 유마(騮馬)에 태우고, 옹위하여 성균관 문 바깥 동봉(東峯)에 이르러 말에서 내렸다. 방간이 울며 권희달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남의 말을 들어서 이 지경이 되었다."

하였다. 정구(鄭矩)가 이르러 교서(敎書)를 펴서 읽고 방간의 품속에 넣어주니, 방간이 절하고 말하였다.

"주상의 지극한 은혜에 감사합니다. 신은 처음부터 불궤(不軌)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만 정안(靖安)을 원망한 것뿐입니다. 지금 교서가 이와 같으니, 주상께서 어찌 나를 속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여생(餘生)을 빕니다."

이때에 목인해(睦仁海)가 탔던 정안공 집의 말이 화살을 맞고 도망해 와서 스스로 제 집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부인은 반드시 싸움에 패한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싸움터에 가서 공과 함께 죽으려 하여 걸어서 가니, 시녀 김씨(金氏) 등 다섯 사람이 만류하였으나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 【 김씨(金氏)는 곧 경녕군(敬寧君)의 어머니이다.】 종 한기(韓奇) 등이 길을 가로 막아서 그만두게 하였다. 처음에 난이 바야흐로 일어날 즈음에 이화(李和)와 이천우(李天祐)가 정안공(靖安公)을 붙들어서 말에 오르게 하니, 부인이 무녀(巫女) 추비방(鞦轡房)·유방(鍮房) 등을 불러 승부를 물었다.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이길 것이니 근심할 것 없습니다."

하였다. 이웃에 정사파(淨祀婆)라는 자가 사는데, 그 이름은 가야지(加也之)이다. 역시 그가 왔기에 부인이 이르기를,

"어제 밤 새벽녘 꿈에, 내가 신교(新敎)의 옛집에 있다가 보니, 태양(太陽)이 공중에 있었는데, 아기 막동(莫同)이가【 금상(今上)[12]의 아이 때의 휘(諱).】 해 바퀴 가운데에 앉아 있었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하니, 정사파가 판단하기를,

"공(公)이 마땅히 왕이 되어서 항상 이 아기를 안아 줄 징조입니다."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한 일을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하니, 정사파는 마침내 제 집으로 돌아갔었다. 이때에 이르러 정사파가 이겼다는 소문을 듣고 와서 고하니, 부인이 그제서야 돌아왔다. 정안공이 군사를 거두어 마전(麻前)갈림길의 냇가 언덕 위에 말을 멈추고, 소리를 놓아 크게 우니, 대소 군사가 모두 울었다. 정안공이 이숙번을 불러 말하기를,

"형의 성품이 본래 우직하므로, 내가 생각하건대, 반드시 남의 말에 혹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으리라 여겼더니, 과연 그렇다. 네가 가서 형을 보고 난(亂)의 이유를 물어보라."

하였다. 이숙번이 달려가서 방간에게 물으니, 방간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이숙번이 다시 묻기를,

"공이 이미 권희달에게 말을 하고서 왜 말을 하지 않습니까? 공이 만일 말하지 않으면 국가에서 반드시 물을 것인데, 끝내 숨길 수 있겠습니까?"

하니, 방간이 부득이 대답하였다.

"지난해 동지(冬至)에 박포(朴苞)가 내 집에 와서 말하기를, ‘오늘의 큰비[大雨]에 대해 공은 그 응험을 아는가? 예전 사람이 이르기를, 「겨울 비가 도(道)를 손상하면 군대가 저자에서 교전한다.」 하였다.’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이 같은 때에 어찌 군사가 교전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니, 박포가 말하기를, ‘정안공(靖安公)이 공을 보는 눈초리가 이상하니, 반드시 장차 변이 날 것이다. 공은 마땅히 선수를 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공연히 타인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하여, 이에 먼저 군사를 발한 것이다."

하였다. 이숙번이 돌아와서 고하니, 정안공이 드디어 저사(邸舍)로 돌아갔다. 임금이 우승지(右承旨) 이숙(李淑)을 보내어 가서 방간에게 이르기를,

"네가 백주(白晝)에 서울에서 군사를 움직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골육지정(骨肉至情)으로 차마 주살(誅殺)을 가하지 못하니, 너의 소원에 따라서 외방에 안치(安置)하겠다."

하였다. 방간이 토산(兎山) 촌장(村庄)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대호군(大護軍) 김중보(金重寶)·순군 천호(巡軍千戶) 한규(韓珪)에게 명하여 방간 부자를 압령해서 토산에 안치하게 하였다. 박포(朴苞)는 본래 정안공의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였는데, 그날 병을 칭탁하여 나오지 않고 중립을 지키며 변을 관망하고 있었으나, 명하여 순군옥(巡軍獄)에 내리고, 또 방간의 도진무(都鎭撫) 최용소(崔龍蘇)와 조전 절제사 이옥(李沃)·장담(張湛)·박만(朴蔓) 등 10여 인을 가두었다. 그때에 익안공(益安公)은 오랜 병으로 인하여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었는데, 변을 듣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위에는 밝은 임금이 있고, 아래에는 훌륭한 아우가 있는데, 방간이 어찌하여 이런 짓을 하였는가?"

하고, 곧 절제(節制)의 인(印)과 군적(軍籍)을 삼군부(三軍府)에 도로 바쳤다. 이 앞서 서운관(書雲觀)에서 아뢰기를,

"어제 어두울 때에 붉은 요기(妖氣)가 서북쪽에 보였으니, 종실(宗室) 가운데서 마땅히 맹장(猛將)이 나올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사대부들이 모두 정안공을 지목하였는데, 8일 만에 난이 일어났다.


二年 二月[편집]

2月 1日[편집]

하윤 등이 정안공을 세자로 세우기를 청하니, 세자로 삼는다는 전지를 내리다[편집]

○丙申朔/參贊門下府事河崙等請曰: “夢周之亂, 若無靖安公, 大事幾不成; 道傳之亂, 若無靖安公, 亦安有今日乎? 且以昨日之事觀之, 天意人心, 亦可知也。 請立靖安公爲世子。” 上曰: “卿等之言甚善。” 遂命都承旨李文和, 傳旨都堂曰:

大抵國本定, 然後衆志定。 今者之亂, 正以國本未定故也。 予有稱孼子, 考其生之日月, 未協於期, 曖昧難知, 且又昏弱, 置之于外久矣。 向者, 偶入宮內, 今還黜外。 且古之聖王, 雖有嫡嗣, 亦擇賢而傳之。 母弟靖安公諱, 開國之初, 有大勳勞, 又於定社之際, 吾兄弟四五人, 得保性命, 皆其功也。 今命爲世子, 且令都督內外諸軍事。

右政丞成石璘聞命率庶司陳賀。 上命都承旨, 以立世子聞于太上王, 太上王曰: “長遠之計, 謀諸執政大臣而爲之可也。”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윤(河崙) 등이 청하였다.

"정몽주(鄭夢周)의 난에 만일 정안공(靖安公)이 없었다면, 큰 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이고, 정도전(鄭道傳)의 난에 만일 정안공이 없었다면, 또한 어찌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또 어제 일로 보더라도 천의(天意)와 인심(人心)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청하건대, 정안공을 세워 세자(世子)를 삼으소서."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등의 말이 심히 옳다."

하고, 드디어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도당(都堂)에 전지(傳旨)하였다.

"대저 나라의 근본이 정해진 연후에 민중의 뜻이 정하여지는 것이다. 이번의 변란은 정히 나라의 근본이 정하여지지 못한 까닭이다. 나에게 얼자(孽子)라 하는 것이 있으나, 그 난 날짜를 짚어 보면, 시기에 맞지 않아 애매하여 알기 어렵고, 또 혼미(昏迷)하고 유약하여 외방에 둔 지가 오래다. 지난번에 우연히 궁내에 들어왔지만, 지금 도로 밖으로 내보내었다. 또 예전 성왕(聖王)이 비록 적사(嫡嗣)가 있더라도 또한 어진이를 택하여[擇賢] 전위하였다. 동복 아우 정안공(靖安公) 【휘(諱).】 은 개국하는 초(初)에 큰 공로가 있었고, 또 정사(定社)하던 즈음에 우리 형제 4, 5인이 성명(性命)을 보전한 것이 모두 그의 공이었다. 이제 명하여 세자를 삼고, 또 내외(內外)의 여러 군사(軍事)를 도독(都督)하게 한다."

우정승 성석린(成石璘)이 명령을 듣고, 서사(庶司)를 거느리고 하례하였다. 임금이 도승지에게 명하여 세자를 세우는 일을 태상왕께 아뢰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장구한 계책은 집정 대신(執政大臣)과 모의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삼성(三省)에서 방간을 복주하기를 청하다. 박포를 국문하고, 연루자를 모두 처벌하다[편집]

○三省交章請誅芳幹, 上命河崙與臺諫刑曹交坐, 鞫問朴苞。 苞云: “去年冬至, 抵芳幹第爲博戲, 是日適有雨, 告之曰: ‘時令不和, 宜愼之。’ 至今年正月二十三日初昏, 天氣赤於西北, 明日又至芳幹第告曰: ‘天有妖氣, 宜愼處之。’ 芳幹曰: ‘何以處之?’ 苞曰: ‘不典兵謹出入, 整衣冠重行止, 如前朝諸王之例, 斯乃上策。’ 芳幹問其次, 苞曰: ‘逃入蠻荊, 如太伯、仲雍, 其次也。’ 又問其次, 苞曰: ‘靖安公兵强衆附, 且以上黨之弟爲壻。 公之兵弱, 危若朝露, 不如先擊以去之。’” 於是杖苞, 問其構煽之由, 苞曰: “我雖從靖安公, 共成定社之功, 然未幾貶我於外。 今雖用苞, 豈可保哉? 若立功於芳幹, 則可與長享富貴也。” 三省上疏曰:

君親無將, 將而必誅, 此《春秋》之大法也。 今芳幹以母弟至親, 爲宗室藩屛, 殿下以爲心腹, 授之兵柄。 芳幹誠宜盡忠竭力, 扶輔王室, 不此之顧, 私動軍兵, 以禦侮之寄, 爲傷恩之用。 儻不應卒, 則安知有不測之變哉? 宜將芳幹, 置之於法, 殿下只令安置私第。 此雖殿下友愛之意, 其於宗社大計何? 願殿下斷以大義, 以正大法。 自古亂臣賊子, 必有儻與, 今日之變, 豈無主謀而煽亂者乎? 伏望下令攸司, 將其連涉, 鞫問主謀者, 明正其罪, 以慰衆心。

上覽之慟泣。 中樞院副使李忱亡命, 自詣于獄。 三省會於演福寺, 召三省掌務, 宣旨曰: “昨日三省所上, 雖合於法, 予豈忍以骨肉之親, 置於刑戮哉? 今聞三省一會, 意其更請, 此事禁於未然, 其悉知之。” 掌務啓曰: “芳幹私自動兵, 欲害骨肉, 上初遣都承旨禁之, 不聽, 又遣李之實禁之, 亦不從, 以至發兵, 罪莫重焉, 宜置大法。” 上又諭之曰: “我寧被害, 豈忍使同母弟就戮哉? 更勿擧論。”

削朴苞職, 杖一百, 流之靑海; 流朴蔓、李沃于邊郡。 三省具芳幹儻與罪狀輕重以聞, 下旨曰:

朴苞, 今已削職杖流矣。 且兩度功臣, 不宜更加極刑, 只令籍沒家舍, 禁錮子孫。 前少尹閔原功說大語, 依律處斬; 檢校參贊門下府事崔龍蘇, 削職杖六十; 中樞院使李忱、前判事桓愉、前典書薛崇, 各笞五十; 護軍元胤, 杖六十; 朴寅吉、郭凡、金寶海, 各杖七十, 竝於遠方付處。 內官姜仁富、元尹伯溫、前典書任天年、右軍將軍金旰、將軍李蘭ㆍ李巨賢ㆍ黃載、前殿中卿姜昇平、宣略將軍李允良, 竝外方付處。 又將在逃吳用權、郭承祐、閔公生、閔道生、鄭承吉、鄭倫、金月下、金貴南、閔校、李君弼、金國珍, 分流遠方, 聽其自現, 各至貶所。 同知中樞院事張湛, 兩度功臣, 只令罷職; 承旨趙卿, 不干儻與, 特令放罪。

康有信、張思美、李君實、鄭升吉, 皆盡力於芳幹者也, 及公卽位, 皆任用焉。

삼성(三省)이 교장(交章)하여 방간을 복주(伏誅)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하윤(河崙)에게 명하여 대간(臺諫)과 형조(刑曹)와 더불어 교좌(交坐)하여 박포(朴苞)를 국문하게 하니, 박포가 말하였다.

"지난해 동짓날 방간의 집에 가서 장기를 두었는데, 그날 마침 비가 왔으므로, 고하기를, ‘시령(時令)이 온화하지 못하니 마땅히 조심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금년 정월 23일 해질녘에 천기(天氣)가 서북쪽으로 붉었으므로, 이튿날 또 방간의 집에 가서 고하기를, ‘하늘에 요기(妖氣)가 있으니, 삼가서 처신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더니, 방간이 말하기를, ‘어떻게 처신할꼬?’ 하기에, 포가 대답하기를, ‘군사를 맡지 말고 출입을 삼가며,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행동거지를 무겁게 하기를 고려 때의 제왕(諸王)의 예(例)와 같이 하는 것이 상책(上策)이다.’고 하였습니다. 방간이 그 다음을 묻기에, 포가 대답하기를, ‘도망하여 만형(蠻荊)[13]으로 들어가기를 태백(太伯)[14] ·중옹(仲雍)[15]과 같이 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 다음을 묻기에, 포가 대답하기를, ‘정안공은 군사가 강하고 중인(衆人)이 붙쫓으며, 또 상당후(上黨侯)의 아우[16]로 사위를 삼았는데, 공의 군사는 약하여 위태하기가 아침이슬과 같으니, 먼저 쳐서 제거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박포에게 장(杖)을 때리고, 그 날조하여 선동한 이유를 물으니, 박포가 말하였다.

"내가 비록 정안공을 따라서 함께 정사(定社)의 공을 이루었으나, 얼마 아니되어 나를 외방으로 폄척(貶斥)하였으니, 지금 비록 써 주더라도 어찌 보증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방간에게 공을 세우면, 더불어 길이 부귀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성(三省)에서 상소(上疏)하였다.

"임금의 지친(至親)에게는 장래가 없으니, 장래가 있으면 반드시 베는 것입니다. 이것은 《춘추(春秋)》의 큰 법입니다. 지금 방간이 동복 아우인 지친으로서 종실(宗室) 번병(藩屛)이 되어, 전하께서 심복(心腹)으로 여기고 군사의 권세를 주었습니다. 방간이 진실로 마땅히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왕실을 보필할 것인데, 이것은 돌아보지 않고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여 어모(禦侮)의 부탁을 상은(傷恩)하는 데 썼으니, 만일 급히 응변(應變)하지 않았다면, 불측한 변(變)이 있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마땅히 방간을 법대로 처치해야 할 것인데, 전하께서 다만 사제(私第)에 안치(安置)하게 하시니, 이것이 비록 전하의 우애의 뜻이나, 그것이 종사(宗社) 대계에 어찌되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는 대의(大義)로 결단하여 큰 법을 바로잡으소서. 옛부터 난신(亂臣) 적자(賊子)는 반드시 당여(黨與)가 있는 것이니, 오늘의 변(變)이 어찌 주모하여 난을 선동한 자가 없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유사(攸司)에 명령을 내려 연루된 자 가운데 주모자를 국문하게 하고, 그 죄를 밝게 바루어서 대중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임금이 소를 보고서 통곡하여 울었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이침(李忱)이 망명하였다가 스스로 옥으로 나왔다. 삼성(三省)이 연복사(演福寺)에 모였는데, 삼성의 장무(掌務)를 불러서 선지(宣旨)하였다.

"어제 삼성(三省)에서 올린 소(疏)가 비록 법에 합하나, 내가 어찌 차마 골육지친(骨肉之親)을 형륙(刑戮)에 처하겠는가? 지금 들으니, 삼성이 함께 모였다 하니, 이 일을 다시 청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미연(未然)에 금지하니, 모두 그리 알라!"

장무(掌務)가 아뢰었다.

"방간이 사사로이 군사를 움직여 골육을 해치려고 하므로, 주상께서 처음에 도승지(都承旨)를 보내어 금하였는데 듣지 않고, 또 이지실(李之實)을 보내어 금하였는데도 또한 좇지 않고, 군사를 발(發)하기에 이르렀으니, 죄가 더 막중합니다. 마땅히 큰 법에 처해야 합니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내가 차라리 해를 당할지언정, 어찌 차마 동모제(同母弟)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하겠는가? 다시는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박포는 관직을 삭탈하여 장 1백 대에 청해(靑海)로 귀양보내고, 박만(朴蔓)·이옥(李沃)은 변방 고을에 귀양보냈다. 삼성에서 방간의 당여(黨與)의 죄상의 경중(輕重)을 갖추어 아뢰니, 명령을 내리었다.

"박포는 이제 벌써 삭직하여 장형(杖刑)에 처하여 귀양보냈고, 또 양차(兩次)의 공신이니, 다시 극형을 가할 수는 없다. 다만 가사(家舍)를 적몰(籍沒)하고, 자손을 금고(禁錮)하게 하라. 전 소윤(少尹) 민원공(閔原功)은 큰 말을 하였으니 율에 의하여 처참(處斬)하고,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용소(崔龍蘇)는 삭직하여 장(杖) 60대에 처하고, 중추원 사(中樞院使) 이침(李忱)·전 판사(判事) 환유(桓愉)·전 전서(典書) 설숭(薛崇)은 각각 태(苔) 50대에 처하고, 호군(護軍) 원윤(元胤)은 장 60대에 처하고, 박인길(朴寅吉)·곽범(郭凡)·김보해(金寶海)는 각각 장 70대에 처하여 아울러 먼 지방에 부처(付處)하고, 내관(內官) 강인부(姜仁富)·원윤(元尹) 이백온(李伯溫)·전 전서(典書) 임천년(任天年)·우군 장군(右軍將軍) 김간(金旰), 장군(將軍) 이난(李蘭)·이거현(李巨賢)·황재(黃載), 전 전중 경(殿中卿) 강승평(姜昇平)·선략 장군(宣略將軍) 이윤량(李允良)은 아울러 외방에 부처(付處)하고, 또 도망 중에 있는 오용권(吳用權)·곽승우(郭承祐)·민공생(閔公生)·민도생(閔道生)·정승길(鄭承吉)·정윤(鄭倫)·김월하(金月下)·김귀남(金貴南)·민교(閔校)·이군필(李君弼)·김국진(金國珍)은 나누어 원방에 유배(流配)하되, 그 자현(自現)하는 것을 들어주어 각각 배소(配所)에 이르게 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장담(張湛)은 양차(兩次)의 공신이므로 다만 파직만 시키고, 승지(承旨) 조경(趙卿)은 당여(黨與)에 간여하지 않았으니, 특별히 죄를 방면하게 하라."

강유신(康有信)·장사미(張思美)·이군실(李君實)·정승길(鄭升吉)은 모두 방간에게 힘을 다한 자들인데, 정안공이 즉위한 뒤에 모두 임용하였다.


도망 중에 있던 이맹종이 대궐에 나오니 그 아비를 돌보도록 보내다[편집]

○是日, 孟宗在逃詣闕, 召見泣曰: “爾父失心, 汝可歸侍。” 遂遣之。

이날에 이맹종(李孟宗)이 도망 중에 있다가 대궐에 나아오니, 임금이 불러 보고 울며 말하기를,

"네 아비가 실심(失心)하였으니, 네가 돌아가 모시어라."

하고, 드디어 보내었다.


2月 2日[편집]

토성이 건성을 범하다[편집]

○丁酉/土星犯建星。

토성(土星)이 건성(建星)을 범하였다.


신도의 문묘 대성전이 불타다[편집]

○新都文廟大成殿災。

신도(新都)의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이 불탔다.


참찬문하부사 조영무·상의중추원사 윤방경·전 완산 부윤 최원에게 관직을 주다[편집]

○以參贊門下府事趙英茂爲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 商議中樞院事尹方慶、前完山府尹崔遠爲上鎭撫。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영무(趙英茂)로 도독 중외 제군사 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를 삼고,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윤방경(尹方慶)·전 완산 부윤(完山府尹) 최원(崔遠)으로 상진무(上鎭撫)를 삼았다.


삼사좌복야 이서를 보내어 종묘에 세자를 책봉하는 것을 고하다[편집]

○遣三司左僕射李舒, 告封世子于宗廟。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 이서(李舒)를 보내어 종묘(宗廟)에 세자(世子)를 책봉하는 것을 고하였다.


2月 4日[편집]

정안공을 왕세자로 책립하여 군국의 일을 맡기다. 전국의 죄수들을 사유하다[편집]

○己亥/冊立弟靖安公【諱】爲王世子, 句當軍國重事:

王若曰, 建儲貳, 所以正國本; 崇位號, 所以定人心。 玆遵典章, 庸擧冊禮。 惟爾靖安公【諱】, 資全文武, 德備英明。 當太上開國之初, 克倡大義; 及寡兄定社之日, 特立膚功。 矧謳謌之有歸, 宜監撫之是任。 用命爾爲王世子。 於戲! 知人不易, 爲子亦難。 以親以賢, 旣處承祧之位; 惟忠惟孝, 用裨爲政之方。 故玆敎示, 想宜知悉。

仍宥境內:

王若曰, 自古王者之建儲, 所以尊宗祀, 而重國本也。 稽諸禮文, 有立嫡子同母弟之說, 或世或及, 惟其至當而已。 予以寡昧, 嗣守景緖, 嚴恭思治, 于玆二年, 顧無嫡嗣, 只有庶孽, 昏弱不慧, 夙夜兢惕, 罔敢遑寧。 惟念同氣之親, 庸篤友于之義, 不期芳幹, 崇信奸回, 妄生疑忌, 稱兵構亂, 禍在不測。 幸賴天地宗社之佑, 旋卽戡定, 不日淸明。 尙憐象憂之情, 不忍管辟之致, 已將芳幹, 安置私莊, 儻與人等, 各以輕重處決。 蓋緣國本之未定、人心之易搖, 禍亂斯生, 以至此極。 興言及玆, 深用惻然。 宜建母弟之賢, 以端國本之固。 靖安公諱, 氣挺英明, 資全勇智。 文武之略, 秉自生知; 孝悌之誠, 發于至性。 佩服詩書之訓, 識達政敎之方。 左右太上, 以建開國之功; 捍衛寡躬, 以成定社之烈。 宗社之所永賴, 臣民之所共知。 勳德旣隆, 謳歌悉歸。 是用冊命爲王世子, 以慰輿望。 載惟儲副之任, 必兼監撫之權, 仍命句當軍國重事。 咨爾宗親耆老宰輔臣僚中外人民! 咸體予懷, 各(共)〔供〕爾職, 祗順元良之德, 以補予德。 玆行冊命, 宜布寬條。 自建文二年二月初四日昧爽以前, 除謀叛大逆、殺(父祖母父母)〔祖父母父母〕、妻妾殺夫、奴婢殺主、蠱毒魘魅、但犯强盜、謀故殺人、芳幹儻與人外, 已發覺未發覺、已結正未結正, 罪無輕重, 咸宥除之, 敢以宥旨前事相告言者, 以其罪罪之。 於戲! 爲父與子, 益敦慈孝之心; 由邇及遐, 共享隆平之樂。

時大臣獻議者以爲: “自古帝王立母弟, 則皆封皇太弟, 未有以爲世子者也。 請立爲王太弟。” 上曰: “今予則直以此弟爲子。” 以李佇判三軍府事、左軍都節制使, 李居易中軍節制使, 趙英茂右軍節制使, 趙溫知中軍節制使, 李天祐知右軍節制使, 李叔蕃爲中樞院副使、同知左軍節制使, 李原爲右副承旨。 自是一品以下, 皆復署經臺省。

임금의 아우 정안공(靖安公) 【휘(諱)】을 책립(冊立)하여 왕세자(王世子)로 삼아 군국(軍國)의 중사(重事)를 맡게 하였다.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이(儲貳)[17]를 세우는 것은 국본(國本)을 정하는 것이요, 위호(位號)를 높이는 것은 인심을 정하는 것이다. 이에 전장(典章)에 따라서 책례(冊禮)를 거행한다. 너 정안공 【휘(諱).】 은 자질이 문무(文武)를 겸하고, 덕이 영명(英明)한 것을 갖추었다. 태상(太上)께서 개국(開國)하던 처음을 당하여 능히 대의(大義)를 주장하였고, 과형(寡兄)이 정사(定社)하던 날에 미치어 특히 큰 공을 세웠다. 하물며, 구가(謳歌)의 돌아가는 것이 있으니, 마땅히 감무(監撫)를 맡겨야 하겠다. 이로써 너에게 명하여 왕세자로 삼는다. 아아! 사람 알아보기가 쉽지 않고, 자식노릇하기도 또한 어렵다. 지친(至親)으로 택현(擇賢)으로 이미 대통(大統)을 잇는 자리에 처하였으니, 오직 충성하고 오직 효도하여 이로써 정사하는 방도를 도우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바이니, 마땅히 다 알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하여 경내(境內)에 사유(赦宥)하였는데,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부터 왕노릇하는 자가 저이(儲貳)를 세우는 것은 종사(宗祀)를 높이고 국본(國本)을 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문(禮文)을 상고하면, 적자(嫡子)와 동모제(同母弟)를 세운다는 말이 있는데, 혹은 세대(世代)로 하든지 혹은 차제(次弟)로 하든지 오직 지당하게 할 뿐이었다. 내가 덕이 적고 우매한 몸으로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공경하고 근신하여 다스리기를 생각한 지가 이제 2년이 되었다. 돌아보건대, 적사(嫡嗣)가 없고 다만 서얼(庶孽)이 있는데, 혼매하고 유약하여 지혜스럽지 못하니,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었다. 오직 동기(同氣)의 지친을 생각하여 우우(友于)[18]의 의를 두터이 하였더니, 생각지도 않게 방간이 간교하고 사곡한 말을 곧이 믿고, 망령되게 의심하고 꺼리는 마음을 품어 군사를 내어 난을 꾸며서, 화가 불측한 데에 있었는데, 다행히 천지 종사(宗社)의 도움에 힘입어서, 이내 곧 평정되어 하루도 못되어 청명하여졌다. 오히려 상우(象憂)[19]의 정을 불쌍히 여기고 관벽(管辟)[20]에 이르도록 차마 하지 못하여, 이미 방간을 사사 전장(田莊)에 안치하고, 당여(黨與) 사람들은 각각 죄의 경중에 따라 처결하였다.

대개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못하고 인심이 흔들리기 쉬움으로 인하여, 화란이 발생하여 이처럼 지극함에 이르렀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깊이 슬프도다. 마땅히 어진 모제(母弟)를 세워 굳건한 국본을 정해야만 하겠다. 정안공 【휘(諱).】 은 기운이 영명(英明)하게 빼어나고, 자질은 용맹과 지혜를 온전히 하였다. 문무(文武)의 도략(圖略)은 생지(生知)로부터 가졌고, 효제(孝悌)의 정성은 지성(至性)에서 나왔다. 시서(詩書)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정교(政敎)의 방법을 통달하였다. 태상왕을 보좌하여 개국의 공을 세웠고, 과인의 몸을 호위하여 정사(定社)의 공을 이루었다. 종사에서 길이 힘입은 것은 신민(臣民)이 함께 아는 바이다. 공과 덕이 이미 높으니, 구가(謳歌)하는 것이 모두 돌아간다. 그러므로, 책명하여 왕세자를 삼아서 여망(輿望)을 위로한다. 생각하건대, 저부(儲副)의 임무는 반드시 감무(監撫)의 권한을 겸하므로, 이에 군국(軍國)의 중사(重事)를 맡도록 명한다.

아아! 너희 종친(宗親)·기로(耆老)·재보(宰輔)·신료(臣僚)와 중외 인민(中外人民)은 모두 내 뜻을 몸받아서 각각 너희 직책에 이바지하고, 원량(元良)의 덕에 공경하고 순종하여, 내 덕을 도우라. 이에 책명을 행하니, 마땅히 너그러운 법전을 반포하여야 하겠다. 건문(建文) 2년 2월 초4일 새벽 이전에 모반(謀叛)하고 대역(大逆)한 것, 조부모·부모를 죽인 것, 처첩이 남편을 죽인 것, 노비가 주인을 죽인 것, 고독(蠱毒)[21]하고 염매(魘魅)[22]한 것, 강도를 범한 것, 고의로 살인(殺人)을 꾀한 것과, 방간(芳幹)의 당여(黨與)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죄의 경중이 없이 모두 용서하여 면제하라. 감히 유지(宥旨)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여 말하는 자는 그 죄로 죄를 주겠다. 아아! 아비와 자식이 되었으니, 더욱 자효(慈孝)의 마음을 두텁게 하고, 가까운 데로부터 먼 데에 미치기까지 함께 태평의 낙을 누리리라."

이때에 대신으로서 헌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제왕이 동모제(同母弟)를 세우면 모두 황태제(皇太弟)를 봉하였고, 세자를 삼은 일은 없었습니다. 청하건대, 왕태제(王太弟)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는 직접 이 아우로 아들을 삼겠다."

하였다. 이저(李佇)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좌군 도절제사(左軍都節制使)를, 이거이(李居易)로 중군 절제사(中軍節制使)를, 조영무(趙英茂)로 우군 절제사(右軍節制使)를 조온(趙溫)으로 지중군절제사(知中軍節制使)를, 이천우(李天祐)로 지우군절제사(知右軍節制使)를 삼고, 이숙번(李叔蕃)으로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동지좌군절제사(同知左軍節制使)를, 이원(李原)으로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삼았다. 이때부터 1품(品)이하를 모두 대성(臺省)에서 다시 서경(署經)하였다.


세자가 태상전에 나아가 사은하니 태상왕이 임금노릇하는 도리를 논하다[편집]

○世子詣太上殿謝恩, 太上王賜宴, 因論爲君之道, 無所不至。 且曰: “汝身所繫至重, 宜自愼也。 今芳幹愚陋無知, 妄興師旅, 以至於此。 三韓多貴家大族, 必皆笑矣, 予亦恥之。 然汝旣爲世子, 宜布至公之道, 治國保民可也。 老父所言, 惟止此耳。” 世子獻壽, 極歡乃出。 太上王謂李佇曰: “朴苞死有餘罪, 歸語汝主, 須擧法以懲後來。”

세자(世子)가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가 사은(謝恩)하니, 태상왕이 사연(賜宴)하고, 인하여 임금노릇하는 도리를 논하여 이르지 않은 데가 없었다. 또 말하기를,

"네 몸이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하니, 마땅히 스스로 삼가도록 하라. 지금 방간이 어리석고 우둔하여 아는 것이 없어서 함부로 군사를 일으켜 이 지경이 되었다. 삼한(三韓)에 귀가(貴家)·대족(大族)이 많으니, 반드시 모두 비웃을 것이다. 나도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네가 이미 세자가 되었으니, 마땅히 지극히 공정한 도리를 펴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보전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늙은 아비가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그친다."

하였다. 세자가 헌수(獻壽)하고 지극히 즐기다가 곧 나왔다. 태상왕이 이저(李佇)에게 이르기를,

"박포(朴苞)는 죽고도 남는 죄가 있다. 돌아가 네 임금에게 말하여 반드시 법을 들어서 후래(後來)를 징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당에서 전을 올려 세자 책봉한 것을 하례하고 세자의 저사에 나아가 숙배하다[편집]

○都堂率庶司上箋賀封世子, 又進世子邸肅拜。 典書已上, 世子皆答拜。

도당(都堂)에서 서사(庶司)를 거느리고 전(箋)을 올려 세자 책봉한 것을 하례하고, 또 세자의 저사(邸舍)에 나아가 숙배(肅拜)하였다. 전서(典書) 이상은 세자가 모두 답배하였다.


삼성이 교장하여 다시 박포·이침·강인부·이백온의 죄를 청하다[편집]

○三省交章, 再請朴苞及李忱、姜仁富、李伯溫之罪。 疏上, 下使司擬議。 使司啓云: “攸司所言, 深合於理, 惟功臣, 取殿下裁斷。” 乃命收朴苞功臣錄券, 削忱職, 加杖六十, 削仁富、伯溫職。

삼성(三省)이 교장(交章)하여 다시 박포(朴苞)·이침(李忱)·강인부(姜仁富)·이백온(李伯溫)의 죄를 청하였다. 소를 올리니, 사사(使司)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사사에서 아뢰기를,

"유사(攸司)의 말한 바가 깊이 도리에 합합니다. 오직 공신들은 전하의 재단(裁斷)을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명하여 박포의 공신 녹권(功臣錄券)을 회수하고, 이침은 삭직하여 장(杖) 60대를 가(加)하고, 강인부·이백온은 삭직하였다.


사헌부에서 판문하부사 조준을 탄핵하다[편집]

○司憲府劾判門下府事趙浚。 浚以上相, 國有急難, 與其弟三司右僕射狷、壻前中樞院副使鄭鎭, 皆杜門不出。 三省同議欲劾之, 右散騎尹思修, 浚所薦拔者, 洩其議。 三省劾思修罷之, 遂交章論浚之罪曰:

臣等竊謂, 國之大臣, 不顧宗社安危, 貪寵冒祿, 爲一身計者, 當治其罪, 以戒臣隣。 今判門下府事趙浚, 外示正直, 內懷奸險, 久執國柄, 廣樹黨與, 爪牙腹心, 布列中外, 威福生殺, 在其掌握。 今拜判門下, 位雖極而無權, 怏怏鬱鬱, 日夜思所以復相。 臣等姑以顯著五事, 縷陳如左。 當國初廢嫡立庶之際, 浚方爲上相, 力陳大義, 以回天意, 以正天倫, 則戊寅之變, 何自而生乎? 慮不出此, 阿意曲從, 與道傳、南誾, 遂立庶孽, 勢將覆國。 又當定社之日, 今我世子, 使大將軍無疾, 就第招來, 而乃徘佪猶豫, 占筮吉凶, 以觀其變。 無疾等知其不出, 還告世子, 世子欲親往, 浚不得已而出, 遇世子於途, 始肯赴難。 幸蒙殿下寬厚之恩, 得與定社功臣之列, 獨保首領, 以至今日, 中外臣民, 罔不腐心, 此其一也。 太上王以好生之德, 當開國之初, 有罪者或杖或貶, 皆不至死。 浚潛遣黨與, 擅殺數人, 欺君亂法, 以報私怨, 此其二也。 浚位極人臣, 富貴無比, 固當安分盡忠, 以奉王室, 妄生非分之心, 卜其吉凶, 妓妾菊花漏洩其言, 國家下吏問之。 爲浚計者, 當自驚懼, 上達殿下, 下告朝廷, 力辨是非, 使國人昭然知其眞僞可也。 顧乃潛謀殺之, 以滅其口, 此其三也。 當國家遷都之時, 浚營構私第, 極其壯麗。 監察金扶過門而歎, 浚聞而大怒, 巧言飾非, 冒蔽上聰, 置諸極刑, 朝野莫不痛心。 其恃功專恣, 罔上害人, 罪不容誅, 此其四也。 今者, 芳幹擧兵作亂, 謀傾社稷, 殿下命將討罪, 宰輔臣僚, 莫不奔走赴難, 以衛王室, 而浚爲廟堂之首, 初無詣闕赴難之心, 至於廟堂使吏往告, 猶罔聞知, 與其弟狷, 杜門觀變, 遣女壻鄭鎭, 率數騎欲赴助亂, 爲官軍阻當而還。 亂旣定翌日, 公然立於百寮之上, 若無與於亂者, 其奸詐反覆無君之心, 益以昭著, 此其五也。 其他淫靡無道, 廣占田宅, 奪人臧獲, 筆所不盡, 此所謂大奸似忠, 大詐似信, 大貪若廉。 若論其罪, 則王法所必誅而不宥者也。 殿下若以開國爲功, 則道傳、南誾, 皆以一等功臣而就戮, 功不掩罪故也。 且開國之功, 一時之所或有, 無君之心, 萬世之所不容。 若殿下釋此不誅, 竊恐亂臣賊子, 接踵而起矣。 伏惟斷以大義, 令攸司收其職牒, 鞫問其罪, 依律處決, 以杜亂賊之萌, 幷將狷與鎭, 削職論罪, 竄之遠方, 以戒後來。

乃遣吏圍守三家, 使不得出。 上覽疏曰: “所論罪目, 皆違於寡人所知, 宜勿復言。”

사헌부(司憲府)에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조준(趙浚)을 탄핵하였다. 조준은 상상(上相)으로서 나라에 급하고 어려운 일이 있는데도 아우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조견(趙狷)과 사위 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정진(鄭鎭)과 더불어 모두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삼성(三省)에서 함께 의논하고서 탄핵하고자 하였는데, 우산기(右散騎) 윤사수(尹思修)는 조준이 천거하여 발탁한 자이므로, 그 의논을 누설하였다. 삼성에서 윤사수를 탄핵하여 파직하고, 드디어 교장(交章)하여 조준의 죄를 논하였다.

"신 등은 가만히 생각건대, 나라의 대신이 종사의 안위(安危)를 돌아보지 않고 은총을 탐하고 녹을 마구 받아서 한 몸의 계책만 위하는 자는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서 신하들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지금 판문하부사 조준(趙浚)이 밖으로는 정직한 것을 보이고, 안으로는 간사하고 음험한 생각을 품어서, 오래 나라의 권세를 잡고 널리 당여(黨與)를 심어, 조아(爪牙)와 심복(心腹)들이 안팎에 널려 있으므로, 위복(威福) 생살(生殺)이 그 손아귀 속에 있습니다. 지금 판문하(判門下)를 제수하니, 지위는 비록 지극하나 실권이 없어서 앙앙(怏怏) 울울(鬱鬱)하여 밤낮으로 다시 정승이 될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 등은 우선 나타난 다섯 가지 일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길게 진달합니다.

국초에 적자(嫡子)를 폐하고 서얼(庶孽)을 세우던 즈음을 당하여, 조준이 바야흐로 상상(上相)이 되었는데, 힘써 대의(大義)를 진달하여 천의(天意)를 돌이키고 천륜(天倫)을 바로잡았다면, 무인(戊寅)의 변란이 어디에서 생겼겠습니까? 생각을 이러한 데에 두지 않고, 임금의 뜻에 아첨하고 곡종(曲從)하여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과 더불어 서얼을 세워서 형세가 장차 나라를 뒤집을 뻔하였습니다. 또 정사(定社)하던 날을 당하여 지금의 세자께서 대장군(大將軍) 민무질(閔無疾)로 하여금 집에 가서 불러오게 하였으나, 배회하며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며 길흉(吉凶)을 점치면서 변을 방관하였습니다. 민무질 등이 그가 나오지 않을 것을 알고 돌아와 세자에게 고하니, 세자가 친히 가려고 하였습니다. 조준이 부득이 나와서 세자를 길에서 만나 비로소 난에 나아갔습니다. 다행히 전하의 관후(寬厚)한 은혜를 입어서 정사 공신(定社功臣)의 반열에 참예하여 홀로 머리를 보전해 오늘에 이르렀으니, 중외의 신민들이 부심(腐心)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그 한 가지입니다.

태상왕께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으로 개국하던 초(初)를 당해, 죄가 있는 자는 혹은 장형(杖刑)에 처하고, 혹은 폄척(貶斥)하여 모두 죽음에는 이르지 않았는데, 조준이 가만히 당여(黨與)를 보내어 임의로 몇 사람을 죽여, 임금을 속이고 법을 어지럽히면서 사사 원망을 갚았으니, 이것이 그 두 가지입니다.

조준이 지위가 극진하여 신하로서는 부귀가 견줄 데 없으니, 진실로 마땅히 자기 분수를 지키고 충성을 다하여 왕실을 받들어야 할 것인데, 망령되게 분수 아닌 마음을 내어 그 길흉을 점쳤습니다. 기생첩 국화(菊花)가 그 말을 누설하였으므로, 국가에서 형리(刑吏)에게 내려 문초하였습니다. 조준의 계책으로서는 마땅히 스스로 놀라고 두려워하여, 위로 전하(殿下)께 진달하고 아래로 조정에 고하여 힘써 시비(是非)를 분변해서,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소연(昭然)히 그 진위(眞僞)를 알게 하는 것이 가한데, 도리어 남몰래 모의하여 죽여서 그 입을 멸하였으니, 이것이 그 세 가지입니다.

국가에서 천도(遷都)할 때에 조준이 사사집을 짓기를 극히 장려(壯麗)하게 하였으므로, 감찰(監察) 김부(金扶)가 문을 지나다가 탄식하였는데, 조준이 듣고 크게 노하여 교묘한 말로 허물을 꾸며 임금의 총명을 가려서 김부를 극형에 처하였으니, 조야가 마음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 공을 믿고 전횡(專橫) 방자하여 임금을 속이고 사람을 해친 것은 죄가 주살(誅殺)하여도 용서할 수 없으니, 이것이 그 네 가지입니다.

이번에 방간이 군대를 내어 난을 일으켜 사직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므로, 전하께서 장수에게 명하여 죄인을 토벌하시니, 재보(宰輔)와 신료가 분주하게 난에 나아가서 왕실을 호위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조준이 묘당(廟堂)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처음부터 대궐에 나와 난에 나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묘당(廟堂)에서 서리(胥吏)를 시켜 가서 고하였는데도 오히려 못 들은 체하며, 그 아우 조견(趙狷)과 더불어 문을 닫고 변을 방관하고, 사위 정진(鄭鎭)을 보내어 기병(騎兵) 두어 명을 거느리고 가서 난을 돕고자 하다가, 관군(官軍)에게 저지당하여 되돌아갔습니다. 난이 이미 평정되니, 이튿날 공공연하게 백료(百僚) 위에 서서 난에 참여하지 아니한 것 같이 하였습니다. 그 간사하고 반복하여 임금을 업신 여긴 마음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으니, 이것이 그 다섯 가지입니다.

그 밖에 음란하고 사치하고 무도(無道)하여 전택(田宅)을 널리 점령하고, 남의 노비[臧獲]를 빼앗은 것은 붓으로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크게 간악한 자는 충성스러운 것 같고, 크게 속이는 자는 믿음직스러운 것 같고, 크게 탐하는 자는 청렴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죄를 논(論)한다면, 왕법(王法)에는 반드시 주살(誅殺)하여 용서하지 못할 자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개국으로 공을 삼는다면, 정도전(鄭道傳)과 남은(南誾)이 모두 일등 공신으로 주륙(誅戮)되었으니, 그 공이 죄를 가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개국의 공은 한때에 혹 있을 수 있는 것이요,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은 만세에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이것을 용서하고 주살하지 않는다면, 난신(亂臣) 적자(賊子)가 연달아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의로 결단하여 유사(攸司)로 하여금 직첩을 거두게 하고, 그 죄를 국문하여 율에 따라 처결해서 난적의 싹을 막고, 아울러 조견(趙狷)과 정진(鄭鎭)을 삭직(削職)하고 논죄하여 먼 외방에 귀양보내 후래를 경계하소서."

서리(胥吏)를 보내어 세 집을 둘러싸고 지키게 하여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임금이 소(疏)를 보고 말하였다.

"논한 죄목이 모두 과인이 아는 것과 틀리니, 다시 말하지 말라."


삼성(三省)에서 박포, 강인부의 죄를 다시 청하니 이산으로 귀양보내다[편집]

○三省再請朴苞、(姜仁府)〔姜仁富〕之罪, 上曰: “朴苞雖有罪, 功臣也, 不可置之極刑。 (仁府)〔仁富〕, 嘗守顯妃陵, 故以太上王之志, 從末減焉。” 乃流于尼山。

삼성(三省)에서 박포(朴苞)·강인부(姜仁富)의 죄를 다시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포는 비록 죄가 있으나, 공신이니 극형에 처할 수 없다. 강인부는 일찍이 현비(顯妃)[23]의 능을 지켰기 때문에 태상왕의 뜻으로 말감(末減)에 좇은 것이다."

하고, 이산(尼山)으로 귀양보내었다.


사헌부에서 다시 상서하여 조준 등의 죄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다[편집]

○憲司更上書請趙浚等罪, 不許。 上謂居易曰: “以浚之性, 必痛恨於此矣。”

헌사(憲司)에서 다시 상서(上書)하여 조준(趙浚) 등의 죄를 청하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이거이(李居易)에게 이르기를,

"조준의 성품으로 반드시 이것을 통한(痛恨)할 것이다."

하였다.


명하여 세자부를 설치하고 인수부라고 이름하다[편집]

○合設世子府, 號曰仁壽。

명하여 세자부(世子府)를 설치하고, ‘인수부(仁壽府)’라고 이름하였다.


장담의 졸기[편집]

○張湛死。 湛嘗爲僧, 長髮娶太上王庶兄元桂之女。 芳幹構亂, 過其門, 遂脅與之俱。 亂平, 繫獄訊之, 因杖而死。 贈諡良安。

장담(張湛)이 죽었다. 장담은 일찍이 중이 되었다가 머리를 기르고 태상왕의 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의 딸에게 장가들었었다. 방간이 난을 일으키고 그 집 문을 지나다가 드디어 협박하여 함께 데려갔었다. 난이 평정되니 옥에 가두고 신문하였는데, 장형(杖刑)으로 인하여 죽었다. 시호를 양안(良安)이라고 하였다.


조준·조견·정진 등을 용서하다[편집]

○宥趙浚、趙狷、鄭鎭等。 三省固爭, 浚上箋辭, 不允。 上曰: “是非浚之罪, 豈可以此枉害忠良? 卿等若固爭, 則當坐以枉害忠良之罪。” 上之宥浚, 因居易、李茂之論救也。

조준(趙浚)·조견(趙狷)·정진(鄭鎭) 등을 용서하였다. 삼성(三省)에서 굳이 간쟁(諫諍)하니, 조준이 전(箋)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조준의 죄가 아니다. 어찌 이것으로 충량(忠良)한 사람을 잘못 해치려고 하는가? 경 등이 만일 굳이 간쟁한다면, 마땅히 충량(忠良)을 잘못 해치는 죄로 연좌(連坐)시키겠다."

하였다. 임금이 조준을 용서한 것은 이거이(李居易)·이무(李茂)의 논구(論救)로 인한 것이었다.


도평의사사의 건의로 각도 고을과 역참의 용관을 감원시키다[편집]

○使司啓宜汰各道州縣及驛冗官, 從之。 啓曰: “今各道各州縣, 不遠程途, 多設守令。 雖一二驛, 亦各置丞, 故多給廩田, 軍糧耗費。 且以有限人吏, 差煩冗事務, 其弊不纖。 是冗官之可汰者也。 宜令各道觀察使, 酌量各州縣、各驛程途遠近, 將原定新定知官縣令監務驛丞, 革某州縣守令某驛丞, 當合某州縣某驛, 可幷者幷之, 可減者減之, 永使無弊。”

上令使司行移。

사사(使司)에서 각도의 주현(州縣)과 역(驛)의 용관(冗官)을 마땅히 줄여야 한다고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계본(啓本)은 이러하였다.

"지금 각도 각 주현(州縣)은 도정(途程)이 멀지 않은데, 수령을 너무 많이 설치하고, 비록 한두 역(驛)이라도 또한 각각 승(丞)을 두었기 때문에, 늠전(廩田)을 많이 주어서 군량이 소비되고, 또 한도가 있는 인리(人吏)를 가지고 번잡한 사무를 시키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이 용관(冗官)을 태거(汰去)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각도 관찰사로 하여금 각 주현·각역의 거리의 멀고 가까운 것을 참작 요량하여, 원래 정했거나 새로 정한 지관(知官)·현령(縣令)·감무(監務)·역승(驛丞)을 가지고, 아무 주현의 수령과 아무 역의 승(丞)을 혁파하여 아무 주현과 아무 역에 합하여야 한다는 것을 조사하게 하여, 합병할 것은 합병하고 감할 것은 감하여 영구히 폐단이 없게 하소서."

임금이 사사(使司)에 명하여 행문 이첩(行文移牒)하게 하였다.


2月 13日[편집]

토성이 건성 남쪽을 범하니 간격이 두 자쯤 되다[편집]

○戊申/土星犯建星南, 隔二尺。

토성(土星)이 건성(建星) 남쪽을 범하니, 간격이 두 자쯤 되었다.


세자가 제릉에 조알하고 전헌례를 행하다[편집]

○世子朝齊陵, 行奠獻禮。

세자(世子)가 제릉(齊陵)에 조알(朝謁)하고 전헌례(奠獻禮)를 행하였다.


유관으로 강원도 도관찰출척사를 삼다[편집]

○以柳觀爲江原道都觀察黜陟使。

유관(柳觀)으로 강원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삼았다.


조준·우인렬 등에게 관직을 주다[편집]

○復以趙浚判門下府事, 賜丹陽伯禹玄寶推忠輔祚功臣之號。 以禹仁烈、趙仁瓊爲三司左右僕射, 李天祐判中樞院事, 右僕射趙狷、判中樞鄭洪免。 洪, 鎭之父也。

다시 조준(趙浚)으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삼고, 단양백(丹陽伯) 우현보(禹玄寶)에게 추충 보조 공신(推忠輔祚功臣)의 호를 내려 주고, 우인렬(禹仁烈)·조인경(趙仁瓊)으로 삼사 좌복야(三司左僕射)·삼사 우복야를 삼고, 이천우(李天祐)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삼았다. 우복야(右僕射) 조견(趙狷)과 판중추(判中樞) 정홍(鄭洪)은 파면하였으니, 정홍은 정진(鄭鎭)의 아버지였다.


방간을 안산군에 옮겨 안치하다[편집]

○移置芳幹于安山郡。 遣靑原君沈淙、禮曹典書成石因于兔山, 傳旨于芳幹曰: “兔山, 東北面往來之地, 且爾舊所領軍士所居。 爾若久留, 後必有言, 宜往安山。 爾所受田, 移給其郡, 又賜食邑五十戶, 爾其隨宜任使, 以終天年。 如値元日, 單騎入京, 以申懷思之情。” 芳幹免冠, 叩頭痛哭。

방간(芳幹)을 안산군(安山郡)에 옮겨 안치하였다.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예조 전서(禮曹典書) 성석인(成石因)을 토산(兎山)에 보내어 방간에게 전지(傳旨)하였다.

"토산(兎山)은 동북면(東北面)에 왕래하는 땅이고, 또 네가 전에 영솔하였던 군사들이 사는 곳이니, 네가 만일 오래 머물면 뒤에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안산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네가 받은 땅은 그 고을에 옮겨 주고, 또 식읍(食邑)[24] 50호(戶)를 주는 것이니, 네가 편의한 대로 땅을 맡기고 사람을 부려서 천년(天年)을 마치도록 하라. 만일 정월 초하루를 당하거든 단기(單騎)로 서울에 들어와서 서로 생각하는 정을 펴도록 하라."

방간이 갓을 벗고 머리를 두드리면서 통곡하였다.


2月 25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보이다[편집]

○庚申/太白晝見。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였다.


경연에서 부처를 좋아함이 그르다는 것에 관해 신하들과 논하다[편집]

○御經筵。 讀《撮要》至襄楷上表言漢桓帝好佛之甚, 謂同知經筵事全伯英曰: “卿等何故言好佛非耶?” 伯英對曰: “孔子曰: ‘攻乎異端, 斯害也已。’ 聖人之道, 以仁義爲重, 釋氏以無父無君爲宗, 故臣等以爲佛氏之道, 非人君所宜好也。 自古人君好佛者, 未有不亡者也。” 上曰: “然。 貪慾莫甚於僧人。 與之則喜, 不與則怨之。”

경연(經筵)에 나아가 《촬요(撮要)》를 읽다가, 양해(襄楷)가 표(表)를 올려 한(漢)나라 환제(桓帝)가 부처를 좋아함이 심하였던 것을 말한 데에 이르러,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전백영(全伯英)에게 이르기를,

"경들이 무슨 까닭으로 부처를 좋아하는 것을 그르다고 말하는가?"

하였다. 전백영이 대답하였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이단(異端)을 깊이 연구하면 해만 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인(聖人)의 도는 인의(仁義)를 중하게 삼는데, 석씨(釋氏)는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것으로 종지(宗旨)를 삼기 때문에, 신 등이 불씨(佛氏)의 도를 인군이 좋아할 바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부터 인군으로서 부처를 좋아한 이는 망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그렇다. 탐하고 욕심내는 데는 중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사람들이 주면 좋아하고 주지 않으면 원망한다."


대간이 박포를 주살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다[편집]

○臺諫交章請誅朴苞, 從之。 三省掌務嘗請苞罪, 上曰: “苞雖有罪, 功臣也, 吾不忍殺。” 又上疏曰:

兄弟之親, 聖人所重; 亂賊之黨, 王法必誅。 此所以厚人倫明大法, 而爲宗社萬世之計也。 今朴苞懷奸挾詐, 造言搆釁, 離間宗親, 謀傾社稷, 王法必誅之罪也。 頃者, 臣等再瀆天聰, 未獲兪允, 中外臣民, 罔不缺望。 且爲功臣者, 當以王室安危爲慮, 盡忠勵節, 終始不渝可也, 先自背盟, 遽生異圖, 謀亂王室, 是自毁其功也。 殿下不念宗社大計, 兄弟至親, 議功輕宥, 其於兄弟至親之意, 王法必誅之義何? 伏惟斷以大義, 明置極刑, 以正大法。

苞在咸州, 見憲府刑曹之吏, 嘆曰: “上仁厚, 吾得延生, 已踰月矣。 死亦何恨!” 遂伏誅。 先是, 太上王謂世子曰: “何不誅苞?” 世子對曰: “以功臣故, 從末減耳。” 太上王曰: “苞雖功臣, 身犯重罪, 其可不誅乎?” 世子曰: “近臺諫請誅, 故臣欲白王誅之矣。” 太上王曰: “臺諫之請, 誠是矣。 國有臺諫, 不亦重乎!”

대간(臺諫)이 교장(交章)하여 박포(朴苞)를 주살(誅殺)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삼성(三省)의 장무(掌務)가 일찍이 박포의 죄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포가 비록 죄가 있으나, 공신이니 내가 차마 죽일 수가 없다."

하였으나, 또 상소하였다.

"형제의 지친은 성인이 중하게 여긴 바이요, 난적(亂賊)의 당은 왕법에 반드시 복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륜을 두텁게 하고 큰 법을 밝혀 종사(宗社) 만세(萬世)의 계책으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박포가 간사한 뜻을 품고 거짓말에 넘어가 말을 만들고 틈을 얽어서 종친을 이간하고, 사직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였으니, 왕법에는 반드시 주살할 죄입니다. 지난번에 신 등이 두 번이나 천총(天聰)을 더럽혔으나, 유윤(兪允)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중외에서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또 공신이 된 자가 마땅히 왕실의 안위(安危)를 생각하여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닦아서 시종(始終) 변하지 않는 것이 가한데, 먼저 스스로 맹세를 배반하고 갑자기 다른 생각을 내어 왕실을 어지럽히기를 꾀하였으니, 이것은 스스로 그 공을 허물어뜨린 것입니다. 전하께서 종사(宗祀)의 대계(大計)와 형제의 지친(至親)을 생각지 않고, 공(功)을 의논하여 가볍게 용서하였으니, 형제는 지친이라는 뜻과 왕법에 반드시 주살한다는 의리에 있어 어떠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대의로 결단하여 밝게 극형에 처해서 큰 법을 바로잡으소서."

박포(朴苞)가 함주(咸州)에 있었는데, 헌부(憲府)·형조(刑曹)의 아전을 보고 탄식하기를,

"주상께서 어질고 후하시어 내가 생명을 연장한 지가 이미 달포가 넘었다. 죽어도 또한 무슨 한이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복주(伏誅)당하였다. 이보다 앞서 태상왕이 세자에게 이르기를,

"왜 박포를 주살하지 않는가?"

하였다. 세자가 대답하기를,

"공신이기 때문에 말감(末減)에 따른 것입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말하기를,

"박포가 비록 공신이라도 자신이 중한 죄를 범하였으니, 주살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세자가 말하기를,

"근일에 대간(臺諫)에서 주살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신이 왕에게 사뢰어 주살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태상왕이 말하였다.

"대간의 청이 참으로 옳다. 나라에 대간이 있는 것이 또한 중하지 아니하냐!"


二年 三月[편집]

3月 1日[편집]

일식하니 임금이 소복차림으로 군신을 거느리고 북을 치며 구원하다[편집]

○丙寅朔/日有食之, 上素服率群臣, 伐鼓救之。


3月 3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지나가다[편집]

○戊辰/太白晝見經天。


좌정승 심덕부가 늙었다고 하여 전을 올려 사직하니 그대로 따르다[편집]

○左政丞沈德符以老耄上箋辭, 從之。


3月 4日[편집]

민씨를 봉하여 세자 정빈으로 삼다. 책문[편집]

○己巳/封閔氏爲世子貞嬪。 冊曰:

重配匹, 所以厚人倫; 崇位號, 所以正名分。 玆遵盛典, 庸建徽稱。 咨爾閔氏, 生於世家, 配于君子。 夙著柔嘉之則, 常存靜一之心。 無非無儀, 在中饋而貞吉; 必儆必戒, 殫內助以肅雍。 旣敦風化之源, 宜奉宗祧之祀。 是用冊爾, 爲王世子貞嬪。 於戲! 每進《雞鳴》之戒, 德音莫違; 永應《麟趾》之祥, 福祿是荷。 惟予以懌, 其乃之休。


처음으로 선잠에 제사하다[편집]

○初祀先蚕。


왕세자와 더불어 제릉에 배알하고 호곶에서 사냥하다[편집]

○與王世子謁齊陵, 遂畋于壺串。


다야점에서 사냥하고 도평의사사에서 막차에 나아가 연향을 베풀다[편집]

○畋于多也岾, 使司進幕次設享, 極懽夜罷。 上與諸宰相聯句, 賜石璘良馬一匹, 解通天神鹿科犀帶一腰, 賜門下贊成事李居易。 諸宰相皆出, 上與世子及李居易、李佇、李茂入夜盡懽, 世子起舞, 上亦起舞。 翌日, 中酒不能起, 日昃還宮。 內官朴英文進曰: “前日殿下之起舞, 非禮也。 若在太上王前則可矣, 安有人君與世子及諸臣對舞之禮乎?” 上曰: “予醉不知所爲。”


3月 8日[편집]

초3일부터 이날까지 엿새 동안 낮에 태백성이 나타나다[편집]

○癸酉/太白晝見。 自戊辰至是凡六日。


내탕의 재물을 내어 석가와 오백 나한상을 만들어 화장사에 두다[편집]

○出內帑, 造釋迦及五百羅漢像, 安于華藏寺。


정전에서 세자에게 연향하고 중궁도 정빈에게 연향하다[편집]

○御正殿享世子, 公侯宰相皆侍宴。 上入內殿, 召世子及李和、李居易、李佇、沈淙、李良祐, 極懽乃罷。 中宮亦享貞嬪。


판문하 조준이 전을 올려 사면하기를 빌다[편집]

○判門下趙浚上箋乞免。


경연에서 하륜이 군자와 소신을 잘 분별하여 인재를 채용할 것을 말하다[편집]

○御經筵。 知事河崙進曰: “君子得位, 則小人退而國興; 小人得勢, 則君子退而國亡。 在人君審於用捨之間。” 深納之。 崙又曰: “春溫而漸至夏熱, 秋涼而馴致冬寒。 小人用事, 則乘間抵隙, 漸害君子, 禍亂將至。 所貴在辨之於早。” 上曰: “孰不知是非之分! 但行之不及耳。”


헌사의 건의를 사련소에서 소와 말을 미리 길러서 국용에 대비하게 하다[편집]

○憲司請令司臠所預養牛馬, 以備國用, 毋得奪諸民間, 從之。


남의 땅을 공전이라 속여 사취한 예조 의랑 권비의 직임을 파면하다[편집]

○罷禮曹議郞權裨職。 前軍器少監李思彦喪父在外, 裨誣謂思彦所受田爲公田, 冒受於給田司。 思彦終制, 來京請還, 裨不許, 憲司劾罷之。


3月 15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기양 7일 동안 현성사에서 도량을 베풀다[편집]

○庚辰/太白晝見。 設祈禳文豆屢道場于賢聖寺七日。


조준·성석린·민제·권근에게 관직을 주다[편집]

○以趙浚復爲判門下事, 成石璘爲左政丞, 閔霽爲右政丞, 權近爲政堂文學兼大司憲。


왕세자가 신도에 가서 종묘에 배알하다[편집]

○王世子如新都, 謁宗廟。


중상동 옛집에 거둥하여 활을 쏘며 날을 보내다[편집]

○幸中常洞古第, 射侯終日。


3月 18日[편집]

비가 오고, 천둥하고, 번개 치니 변괴의 징조인가를 왕이 하륜에게 묻다[편집]

○癸未/雨震電。 翌日, 問參贊門下府事河崙曰: “昨日雨震電, 是何如?” 崙進曰: “春雷非妖。 震動萬物, 惟其時矣。”


권근이 사헌부의 직을 겸임하고, 전백영이 여묘살이 중에 상의중추의 직을 맡다[편집]

○御經筵。 同知事權近進曰: “以臣不才, 兼任憲司。 臣不知所爲, 惶悚而已。” 上謂伯英曰: “聞卿以居廬未終爲恨, 改憲長授以商議中樞。” 伯英對曰: “殿下不以臣爲不才, 授大任於廬墓之中, 故臣卽亟來。” 時人譏伯英聞命不讓, 亟來就職, 故伯英陳之以此。


3月 19日[편집]

화장산의 큰 돌이 무너지다[편집]

○甲申/華藏山大石崩。


도사와 중들로 하여금 내전에서 경을 읽게 하다[편집]

○使道流及僧徒, 讀經于內殿。


대사헌의 직을 제수받은 권근이 경연에서 임금에게 사례하다[편집]

○御經筵。 大司憲權近進曰: “臣本昏愚, 少不更事, 踈於吏治。 殿下不以臣爲鄙陋, 濫長憲司, 誠惶誠喜, 尙恐貽笑中外。 然愚者一得, 豈無可陳事條! 願殿下俯察寬恤, 儻有上言不害於理, 特賜兪允。” 上曰: “予本昏昧, 不明治體, 簡拔忠良, 皆明哲也。 卿等輔弼寡躬, 以臻至治, 予將虛心聽察。”


세자가 신도에서 이르니 잔치를 베풀어 매우 즐기다[편집]

○世子至自新都。 上及世子, 御涼廳觀射(候)〔侯〕, 因設宴極懽。 上起舞, 世子醉甚, 扶上腰, 上曰: “此汝之眞情也。” 入夜乃罷。


참찬문하부사 조영무를 해주에 보내 항복한 왜적을 서북면에 나누어 두다[편집]

○遣參贊門下府事趙英茂于海州。 分處降倭於西北面諸州也。


二年 夏四月[편집]

4月 1日[편집]

각사로 하여금 아일(衙日)마다 아뢸 사항이 있으면 진달하게 하다[편집]

○〔丙申〕/初下敎, 令各司每衙日, 有所啓則陳之。


대사헌 권근이 풍문공사가 불가피하게 있음을 논하고 관직을 함부로 주지 말기를 건의하다[편집]

○大司憲權近啓曰: “憲司名曰風憲官, 凡正風俗等事, 皆風聞彈劾。 往者, 旣命毋行風聞公事, 然不風聞, 則何以正人心乎? 願自今風聞之事, 如得其實, 則悉皆糾理。 且刑者, 禁民爲非, 輔治之具也。 有罪者, 不可輕宥。 自今罪狀現著者, 必令本府推鞫懲之。” 上曰: “然。 但風聞公事, 太上王之所禁, 不可輕改。 今欲行之, 則宜更立法。” 近又進曰: “當今兩府已上諸相, 數過四十。 皆坐都評議使司, 議國家之事, 其中各品商議, 似爲冗官。 且名器, 人君之大寶, 不可紊也。 邇者除授之法, 不論實職, 或以添設典書, 陞爲檢校中樞, 或以檢校中樞, 超拜省宰, 甚爲未便。 願自今, 受實典書者, 乃陞檢校中樞, 受實中樞者陞爲省宰, 則差除有序, 而官品秩然矣。” 上然之。


대마도 왜인이 말 16필을 바치다[편집]

○對馬島倭獻馬十六匹。


사헌부에서 오래 날이 가물어 연음(宴飮)을 금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다[편집]

○司憲府以久旱, 請禁公私宴飮, 從之。


조영무가 항복한 왜인을 풍해도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두다[편집]

○趙英茂分置倭於豐海道諸州。 英茂至海州, 使人傳令于倭曰: “汝若欲戰速戰, 不然, 宜速降”, 以兵脅之, 倭人氣沮皆降。


세자가 예궐하여 연향을 베푸니 의안공 이화와 이숙번 등이 시연하다[편집]

○世子詣闕設享, 義安公和、李叔蕃等侍宴。 公侯宰相以次起舞, 上亦起舞。 世子醉倒, 上親使人扶起, 世子乃還。


4月 4日[편집]

짙은 안개가 끼고 서리가 오다. 토성이 건성의 제2성을 범하다[편집]

○己亥/沈霧隕霜。 土星犯建第二星。


4月 5日[편집]

서리가 내려 풀이 죽다[편집]

○庚子/隕霜殺草。


날이 가물자 금주령을 내리다[편집]

○下禁酒令。 大司憲權近曰: “今年春旱, 恐是禾稼不登之占。 臣以言官, 不敢默默。 伏望殿下, 憂恤惕慮, 更下禁酒之令, 以節國用。” 從之。


4月 6日[편집]

서리가 내리고 큰 바람이 불다[편집]

○辛丑/隕霜大風。


임금이 태상전에 나아가 헌수하려 하니 태상왕이 가뭄으로 인해 정지시키다[편집]

○上欲詣太上殿獻壽, 太上王止之。 太上王使宦者傳命曰: “近者旱氣太甚, 不可宴樂。” 上聞命遂止。


경군관 12패를 만들어 번갈아 숙직하게 하고 선배들의 패는 특별히 면제하다[편집]

○作京軍官十二牌, 更日直宿, 特除儒牌入直。


대간과 형조에서 노비 송사를 결단하는 일이 없도록 문하부에서 건의하다[편집]

○門下府上疏請除臺諫刑曹決訟。 疏曰:

設官分職, 所以代天工, 各有所職, 不可紊也。 頃者, 殿下慮辨定都監誤決, 冤滯未伸, 令憲司納狀, 分付各司本府及憲司、刑曹, 以辨邪正。 竊謂諫官內廷侍臣, 憲司彈糾百官, 刑曹專掌刑決, 各有所職。 而奴婢詞訟, 專是都官之任。 如有誤決, 憲司察之, 至於詞訟繁多, 主掌官或未能速決, 則別立都監以決正之。 今以奴婢辨正之事, 分付臺省、刑曹, 實有乖於設官分職之義。 願殿下命設都監, 將其所呈六百六十六道, 速令改決, 以伸冤抑, 幸甚。

上只令憲司、刑曹決正, 門下府則如其所啓。 謂大司憲權近曰: “奴婢決正事, 何以一定! 昨日門下府上言: ‘臣等職掌諫諍, 未聞諫官聽訟決事。’ 其言甚是, 予卽允許。 初我太上王深慮奴婢爭訟之不息, 特設都監, 簡拔良士, 限月決正。 然謂誤決之徒, 非一二也。 夫人之情欲無窮, 雖自知非, 强言誤決。 如此之徒, 有司嚴加考察, 誤決事跡未見, 則痛懲, 昭示中外。 自今已後, 奴婢爭訟, 一歸主掌都官。” 近對曰: “上敎誠然。”


문하부에서 상소하여 초파일에 연등의 설치를 정지하도록 청하니 회답하지 않다[편집]

○門下府上疏, 請止八日燃燈之設, 不報。


사헌부의 건의로 사냥을 정지하다. 태상왕이 신도 행차를 그만두다[편집]

○司憲府請止田獵, 從之。 太上王欲幸新都, 上欲出餞郊外, 因以觀獵。 司憲府大司憲權近等上疏曰:

臣等竊聞, 太上殿下巡幸新都, 殿下欲與世子, 拜餞郊外, 信宿而還。 臣等竊謂, 孝當盡誠, 禮貴得中。 太上王之行, 親率百官, 拜送于郊, 卽日還宮, 得禮之中, 孝亦至矣。 不必遠幸郊外, 留連數日, 然後爲盡其孝誠也。 前冬, 太上王嘗幸新都, 毋令殿下出城拜送, 蓋不欲煩殿下, 亦不欲煩民也。 今若遠駕, 以煩師衆, 太上之心, 亦不自安, 豈以爲孝哉? 又況今春以來, 淒風不雨, 及至夏初, 且有繁霜, 天時失節, 陰陽不調。 此正殿下恐懼修省, 不敢遑寧, 畏天䘏民, 以消災沴之時也。 乃出于郊, 馳騁田獵, 非所以畏天也; 農務方興, 吏民奔走於趨從, 一麥方長, 軍士躪踐其田畝, 非所以䘏民也。 臣等爲殿下惜之。 伏望出餞于郊, 卽日還宮, 毋敢止宿遊畋, 上慰親心, 下副輿望, 不勝幸甚。

旣而, 太上王亦不行。


문하부에서 상소하여 용관을 태거하도록 청하다[편집]

○門下府上疏, 請汰冗官。 疏曰:

謹按周官, 三公論道, 六卿分職。 官不必備, 惟其人。 天官冢宰以下, 各屬六十, 而六卿之屬, 三百六十, 猶能任賢使能, 以臻泰和之治。 唐之太宗, 定爲三百六十七員而曰: “吾以此, 待天下之賢才足矣。” 雖以天下之大, 官爵之設, 不過如此。 我朝東班, 自判門下、領三司至九品, 五百二十餘員, 西班自上、大將軍, 至隊長隊副, 四千一百七十餘人, 文武官吏之數, 固三倍於中朝之制矣。 加以成衆官、上林園、圖畫院、司楯、司衣、司幕、司饔、忠勇、近侍、內侍府、掖庭、典樂ㆍ雅樂署, 各有祿官, 而檢校、散秩, 則亦增其數, 祿俸之不周, 實由此也。 前朝舊制, 自中書令至知門下凡十員, 自判樞密至學士凡九員, 自尙書令至左右員外郞每各品一員。 開城府尹陞於吏曹典書之上, 不得與於兩府, 而下官各品, 各置二員。 六部則吏部工部, 自尙書以下每品各一員, 戶部以下每品各二員, 六寺七監, 判事以下各品各一員。 大槪如此。 西班上護軍八人、大護軍十六人、親從三人。 每一領護軍一人、中郞將以下五員十將, 凡四十二領。 其餘衙門員吏之數, 亦不煩冗, 使之不廢職事, 而國治民安, 維持四百餘年。 至于近代, 兩府之數, 少加於古, 而恭愍王始毁古制, 六曹、六寺、七監, 每品各增二員, 西班之職, 亦加於古。 甲寅之後, 權臣擅政, 視名器爲己私物, 布列枝黨, 增添兩府, 猶爲不足, 又設商議, 多至十數, 而掌經濟者, 不過侍中二人, 此皆殿下所見聞也。 我太上殿下, 應天開國, 立經陳紀, 欲革冗官, 第因草創, 以待勤勞, 而未得盡革, 以至于今, 每年頒祿, 常不周足。 夫糧餉之畜, 有國之大計。 今以軍資, 充其祿俸, 甚非爲國之道也。 我國在海外, 折長補短, 猶不過千里, 山川險阻, 土地磽薄, 租稅之法, 不可與中國比也。 諸倉庫、宮司、各品科田、各司公廨田、院館、津、驛所受, 軍資所屬外官三百餘員廩給外, 京官之祿, 幾於十萬石。 祿俸常患於不足, 軍資未見其積畜者, 豈非冗官之未汰, 散秩之尙多也? 《傳》曰: “無君子, 莫治野人, 無野人, 莫養君子。 治人者食於人, 治於人者食人。” 君子小人, 雖有尊卑之等, 而實相資也。 豈可無事而坐食, 享民之利乎? 檢校之職, 增益其數, 多至數十, 不仕於官, 在家食祿, 是乃無事而享民之食者也。 伏惟殿下, 深思廣慮, 兩府一依前朝舊制, 而商議則一切汰去。 漢城府掌土之官, 不可列於兩府。 今無所事, 而坐於廟堂, 非所以尊朝廷重名實也。 請革判事, 只置一尹, 以復舊制, 而陞於吏曹典書之上。 六曹各減典書一員, 餘皆仍之。 六寺七監判事卿監, 各減一員, 四品已下仍舊。 西班請依前朝四十二都府之制, 每一領各五員十將, 隊長隊副, 皆仍其額。 其他不緊京官、新設成衆愛馬祿官、上林院、圖畫院、尙衣院祿官等及外方州縣, 特命都堂擬議, 可汰者汰之, 可幷者幷之。 年老勳舊, 不可授職七十已上者, 請循前朝之制, 仍令致仕, 俾不失祿, 檢校散秩, 一皆革之。 公侯宗室功臣外無功者, 不許封君祿俸。 以原額之多少, 計數頒賜, 毋得貸軍資而充之。 如此則朝廷尊, 而官爵貴, 冗員省而祿俸足, 民弛漕輓之勞, 國有畜積之資。

疏啓, 上曰: “州府郡縣, 或幷或除事, 吾已下令矣。 兩府百司減省員數事, 今當草創之時, 不可遽行。”


경연에서 인군의 학문에 대해 중추원 사 전백영이 아뢰다[편집]

○御經筵。 中樞院事全伯英言於上曰: “人君之學, 莫如《尙書》。 然《五誥》、《盤庚》、《禹貢》等篇, 有佶屈難讀處, 不必進講也。 若《大學》一部, 格致誠正絜矩之道, 實帝王爲治之法也。” 上然之。


사병을 혁파하니, 병권을 잃은 자들의 불만이 노출되다[편집]

○罷私兵。 司憲府兼大司憲權近、門下府左散騎金若采等交章上疏曰:

兵權, 國家之大柄, 當有統屬, 不可散主。 散主無統, 是猶太阿倒持, 授人以柄, 難可以制。 故典兵者衆, 各樹徒黨, 其心必異, 其勢必分, 交相猜貳, 以成禍亂。 同氣之相殘, 功臣之不保, 恒由於此, 古今之通患也。 故孔子曰: “古者家不藏甲”, 言無私兵也; 《禮記》曰: “兵革藏於私家, 非禮也。 是謂脅君”, 言人臣而有私兵, 則必至於强僭, 以脅其君也。 聖人立法垂訓, 以防後患, 可謂至矣。 昔宋太祖卽位之初, 從容談笑, 能解功臣兵權, 使得保全, 可謂後世之法矣。 魯之三家, 晋之六卿, 漢末之群雄竝起, 唐季之藩鎭跋扈, 皆蓄私兵, 以構其亂, 亦可爲後世之戒矣。 惟我太上王, 開國之初, 特置義興三軍府, 專掌兵權, 規模宏遠, 而時議者以爲: “革命之初, 人心未定, 當備不虞之變。 宜令勳親, 各典私兵, 以應倉卒。” 由是私兵未能盡除, 而典兵者反謀扇亂, 禍在不測, 幸賴上天啓佑殿下, 靖亂定社。 式至今日, 私兵之置, 尙復如古, 因循未除。 臺諫已嘗上章請罷, 殿下以宗親勳臣, 可保無他, 使復典之, 未幾, 蕭墻之禍, 發於至親。 由是觀之, 私兵之置, 徒以生亂, 未見其益, 臺諫之言, 今已驗矣。 然私門之兵, 今亦未罷, 將來之禍, 誠不可不慮也。 又況外方各道軍馬, 分屬諸節制使, 或稱侍衛, 或稱別牌及私伴儻, 番上之煩, 徵發之擾, 其弊甚多, 陪從之衆, 田獵之數, 其勞亦極。 人飢馬困, 暴露雨雪, 直宿私門, 衆心怨咨, 甚可憫也。 方今巨弊, 莫甚於此。 願自今, 悉罷各道留京諸節制使, 以京外軍馬, 盡屬三軍府, 以爲公家之兵, 以立體統, 以重國柄, 以攝人心。 除兩殿宿衛外, 私門直宿, 一皆禁斷; 朝路毋令私伴, 持兵根隨, 以應古者家不藏兵之意, 以防後日交猜搆亂之端, 國家幸甚。

疏上, 上與世子議之, 卽令施行。 是日, 放諸節制使所領軍馬, 悉還其家。 李佇獵于平州未還, 三軍府遣人于佇, 使之速還。 居易父子與失兵權者皆怏怏, 日夜會聚, 多憤怨。


문하 시랑찬성사 하윤에게 명하여 관제를 다시 정하다[편집]

○命門下侍郞贊成事河崙, 更定官制。 改都評議使司爲議政府, 改中樞院爲三軍府。 職掌三軍者, 專仕三軍, 不得坐議政府。 改左右僕射爲左右使, 復(致)〔置〕藝文館太學士一員、學士二員。 改中樞院承旨爲承政院承旨, 改都評議使司錄事爲議政府錄事, 中樞院堂後爲承政院堂後。 以趙浚爲平壤伯, 李和領三司事判議政府事, 李居易判(門下府)議政府事, 成石璘判議政府事, 閔霽判議政府事。 改石璘功臣號爲同德贊化, 霽同德佐命, 竝加錄軍國重事。 鄭擢藝文春秋館太學士。 都摠制以下, 不得兼議政府事。 鄭矩承政院都承旨。 先是, 臺省復上交章曰:

兵權不可散而無統, 亦不可偏而獨專。 散而無統, 則其威分, 偏而獨專, 則其權移。 威分於人, 權移於下, 其生亂一也。 臣等前日上章, 請罷私兵, 屬三軍府, 以防威分之弊, 卽蒙兪允, 衆心欣慶。 然以重兵歸之一府, 則偏專權移之患, 不可不預爲之防也。 臣等謹按, 古者兵法之設, 有發命發兵掌兵之差。 發命者, 宰相也; 發兵者, 居中摠制也; 掌兵者, 受命以行者也。 宰相非稟君上之命, 不得發命; 摠制非有宰相之命, 不得發遣; 掌兵者非有摠制之命, 不得以行。 上下相維, 體統不亂, 雖欲爲變, 莫能自動, 此定法也。 前朝舊制, 取法唐、宋, 省宰掌邦治, 軍國之事, 無所不統, 卽發命者也; 中樞掌軍機, 卽摠制發兵者也; 諸衛上、大將軍已下, 專掌府兵, 以當宿衛, 有變小則遣郞中郞將, 大則遣將軍已上, 出而應敵, 未嘗敗衄, 此則掌兵者也。 事元以後, 國家多務, 省宰中樞, 會而議事, 謂之兩府合坐, 因置都評議使司。 忠烈已後, 府兵漸毁, 始遣宰相, 領兵應敵, 非古制也。 惟我太祖開國之初, 兩府合坐, 沿襲不革, 置義興三軍府, 專掌軍務。 由是宰相, 不得聞軍政, 中樞不得掌軍機, 有乖古法。 中樞之官, 實爲虛器, 員多位高, 徒受祿俸而已。 願自今罷中樞, 以三軍府爲祿官, 省宰已上可兼者, 卽兼節制, 其祿官則依中樞例, 知三軍、同知三軍、簽書、學士各一員, 皆以或文或武, 善謀能斷者爲之, 帶使司銜合坐, 與議軍國之政。 凡有軍事, 使司承稟上命, 移三軍府, 以應宰相發命之法。 諸節制使, 除省宰兼外, 三軍各一爲祿官。 雖曾經中樞, 位在知同知之上, 然只爲一軍節制, 非統三軍之比, 不許帶使司銜, 直坐本府, 以治京外軍務, 以尊摠制之職。 諸衛上、大將軍, 合屬三軍府, 以供其事; 諸節制使與上、大將軍以下, 分番宿衛, 以備不虞, 以供掌兵之任, 有變則節制以下, 受命而行。 如此則旣有統屬而威不分, 亦難獨專而權不移, 名實相孚, 體統尊嚴, 實可爲子孫萬世之令典也。

嘉納之。


노한으로 공조 의랑을 삼고, 전이로 사헌부 시사를 삼다[편집]

○以盧閈爲工曹議郞, 田理爲司憲侍史。 初, 閈爲侍史, 理爲議郞, 世子復于上曰: “霽爲政丞, 以其壻閈爲憲官, 於義不便。” 從之, 換其職。


4月 17日[편집]

크게 우박이 내리다[편집]

○壬子/大雨雹。


4月 18日[편집]

화장산의 돌이 무너지다[편집]

○癸丑/華藏山石崩。


판문하부사 이거이로 판상서사사를 겸임시키고 일부 직제를 개편하다[편집]

○以判門下府事李居易, 兼判尙瑞司事。 藝文春秋館太學士學士三軍摠制, 皆兼議政府。 居易以門下侍郞, 超遷判門下, 猶以不得爲政丞, 殊怏怏, 謂人曰: “吾年歲未暮, 雖陞判門下, 如戴釜入深淵。” 其兄居仁聞之歎息, 宣言於人曰: “居易不度其才德, 但以功臣及其子之寵, 嘗有心於政丞, 故其言如此。”


사병 혁파에 불만을 표시한 참판삼군부사 조영무를 황주에 귀양보내다[편집]

○流參判三軍府事趙英茂于黃州。 初臺諫劾英茂及參贊門下府事趙溫、知三軍府事李天祐等, 遣吏守其家。 交章上言曰:

兵權不可散主, 當有體統, 故頃者, 臣等交章請罷私兵, 殿下兪允施行, 以京外軍馬, 盡屬三軍府, 臣民罔不欣慶。 此實慮患防危, 爲宗社萬世之大計也。 今趙英茂, 當三軍府收取兵器之時, 不卽輸納, 歐傷三軍府使令, 其軍官牌記, 累日不送, 多匿私伴。 又於世子以革兵之故, 輕發不遜之言, (頡頑)〔頡頏〕致問, 聚會陰謀, 欲扇禍亂。 天祐、趙溫等, 亦皆不卽輸納牌記, 累日淹延, 擅減軍目, 聚謀不道。 右英茂等, 俱爲功臣, 當以國家大體爲慮, 下旨之日, 所有軍目軍器, 卽還公家, 慮不及此, 反懷怏鬱, 不從王旨, 私蓄軍兵, 爲謀不測。 若不早圖, 安知有尾大不掉之患哉? 其無君陰詭之罪, 不可不治。 伏惟殿下, 深思長慮, 卽賜兪允, 將英茂、天祐、溫, 收其告身, 鞫問其罪, 依律施行, 以杜亂源。

不從。 是日, 臺諫再上疏曰:

臣等以英茂、天祐、溫等, 革私兵之後, 私匿軍兵, 聚會陰謀, 具疏以聞, 殿下不卽兪允, 臣等不勝隕越。 竊以爲君令臣行, 禮之大者。 苟無禮焉, 何以爲君臣, 何以爲國家! 殿下以國家大計, 革私兵, 悉屬三軍府。 今英茂等, 不思殿下經遠之計, 以失兵權爲憾, 乃懷憤怨之心, 不從王旨, 軍目兵器, 不卽輸納, 擅抶三軍府持牒使令, 聚會陰謀, 其漸難測。 況以不遜之言, 抗於世子, 其犯禮陵僭之狀, 亦已明矣。 人臣而至於此, 得蒙寬恕, 臣等竊恐堅氷之患將至, 而跋扈之心, 無所懲矣。 伏惟殿下, 一依前疏所聞罪狀條件, 斷以大義。

上以功臣, 又不從。 是日, 臺諫又上疏曰:

臣等以英茂等所犯之事, 關於大體, 請治其罪, 殿下以功臣之故, 不卽兪允, 臣等惶恐隕越, 不能自已, 再瀆天聰。 賞罰不明, 則爲善者無所勸, 爲惡者無所懲, 故善爲國者, 必以賞罰爲重。 殿下以英茂等, 有功王室, 報以厚賞而富貴之, 賞則大矣, 今恃功陵僭, 遂干不臣之罪, 而罰乃不加。 殿下雖以功臣, 可保無他, 至誠相與, 而不虞之變, 每出於功臣之手。 若議功輕宥, 則人人益生專恣, 無所畏懼, 不唯不得保全其身, 而國家將亦必有禍亂矣。 伏惟殿下, 依前疏所聞, 削職鞫問, 依律論罪, 以杜亂源。

上曰: “英茂所犯爲重, 可流外方。 天祐、溫, 其勿復論。”


사병 혁파에 불만을 표시한 지삼군부사 이천우와 참찬문하부사 조온을 파면하다[편집]

○罷知三軍府事李天祐、參贊門下府事趙溫職。 臺諫又上疏請英茂、天祐、溫等罪至于再, 上皆不允。 於是, 臺諫俱進闕庭固請, 上亦不從, 臺諫皆以不得言責呈辭。 上見之, 驚曰: “臺省何至此耶?” 卽召世子問曰: “臺省以予不從其言, 皆辭職而退。 處之如何?” 世子曰: “諫官之言, 不可不從。” 上意乃決, 遂召臺省, 令都承旨鄭矩傳旨曰: “向者卿等所啓, 不爲不是, 但以二人勳親之故, 不忍遽決。 予當從之, 卿等亦當就職。” 遂還其狀, 乃免天祐、溫官。 世子謂諫議徐愈曰: “近日英茂、趙溫、天祐之事, 處決無乃難乎? 言官等上疏以爲: ‘英茂、天祐等, 陰謀聚會。’ 果如其言, 鞫問戒後, 事理當然, 但其陰謀與否, 不可灼知。 上以故不獲已, 姑從輕典, 止罷其職, 以保功臣。” 愈對曰: “臣等職在諫諍, 不敢緘默。 近日殿下之處決, 乃聖人之權道也。”


태상왕이 정릉사 탑전에서 7일 동안 불사를 베풀다[편집]

○太上王設佛事於貞陵社塔殿凡七日, 舍利四枚分身, 太上王作佛堂於楡洞, 以安舍利。


조영무가 적소에 도착전 서북면 도순문사 겸 평양 윤으로 임명되다[편집]

○以趙英茂爲西北面都巡問使兼平壤尹。 英茂未至貶所, 而受此命。


대사헌 권근이 재능이 없다고 하여 사면하기를 비니 윤허하지 않다[편집]

○大司憲權近上箋, 以不才乞辭, 不允。


기년 대공의 친족을 모두 군에 봉하고 직사를 맡기지 않다[편집]

○期大功之親, 皆封君。 大司憲權近、左散騎金若采等, 上交章曰:

王者之德, 莫先於睦親, 睦親之道, 在乎富貴而全安之耳。 古之帝王, 封建同姓, 尊之以列爵, 貴之也, 食之以土地, 富之也, 而不任王朝之職, 所以安全之也。 蓋任之以職, 則必責之以事, 有過不聞, 則廢王法, 治之則廢私恩。 二者皆未合理, 故欲全其親愛之心, 必不委以職事也。 前朝之時, 所以待宗室者, 甚得其道。 封君以貴之, 厚祿以富之, 位在百僚群臣之上, 未嘗任以職事也。 出入之時, 必備儀衛, 儀衛不備, 不敢輕出。 其位尊嚴, 其勢安固, 共享安富尊榮之福, 垂五百年, 豈不美哉! 惟我國家, 創業之初, 法制未備, 宗親駙馬, 以功以才, 或拜朝官, 或任兵權, 因循未革, 迄至于今, 大則擁兵搆禍, 小則犯法被劾, 全安之道, 有乖乎古。 且周之宗盟, 異姓爲後, 所以尊同姓也。 今以同姓之貴, 混處朝班, 以列於群臣之中, 非所以重金枝也。 願自今保全宗親之道, 一依前朝之舊, 宗親駙馬, 皆以公侯就第, 不責軍國職事, 其支庶族屬, 或封諸君, 或拜元尹正尹, 皆厚其祿, 以致富貴, 使得優游, 永享尊榮。 又稽前朝舊式, 定其儀衛, 出入必備儀衛而行, 其有不備儀衛, 而敢輕出者, 憲司糾理, 以尊公族, 以別異姓, 以防犯罪之源, 以全睦族之道。

上曰: “期大功之親, 不任以事, 皆令封君, 餘皆勿論, 其儀衛, 禮曹議之。 但寡人無駙馬, 故駙馬儀衛及任事與否, 其勿議焉。”


대마도수 형부 소보 종정무와 사미 영감이 해적을 금지하겠다는 뜻을 전하다[편집]

○對馬島守刑部少輔宗貞茂, 使人獻馬十匹, 其父沙彌靈鑑亦獻馬六匹, 皆告誠心禁賊之意。


二年 五月[편집]

5月 1日[편집]

권근·김약채 등의 상소로 종친과 부마로 하여금 직사를 맡지 못하도록 명하다[편집]

○〔乙丑〕/令宗親、駙馬不任以事。 大司憲權近、左散騎金若采等, 復交章上言曰:

前日臣等交章, 請依前朝舊制, 以立宗親、駙馬富貴安全之道, 與其出入儀衛之制, 敬奉王旨, 以爲: “寡人無駙馬。” 臣等竊稽古典, 駙馬者, 諸臣之子, 得尙宗女之通稱, 非止謂當代帝王親女下嫁之人而已。 況臣等前日所申, 蓋謂宗親宗女, 均是祖宗之子孫, 當與王者, 共享富貴, 而安全之者也。 苟欲寵之, 任以事權, 而或犯法難逃譴責, 其所以寵之者, 乃所以禍之也。 故請極其富貴, 而不任事權, 以享安全之福。 此非爲一時之權宜, 實欲永爲萬世保全宗親之令典也。 願自今, 諸臣得尙親女及親姊妹者, 封爵例秩, 竝同宗親, 貴以封侯, 富以厚祿, 不責以軍國之事, 以保其安全之福, 則殿下有睦親之德, 宗親享尊榮, 而與國咸休, 永世無患, 豈不美哉? 出入儀衛, 亦不可與諸臣無別, 當有第儀, 以彰其貴。 願令禮官, 參酌古今, 詳定其儀。

疏凡三上。 時李佇以太上駙馬, 爲判三軍府事, 總軍政橫甚, 故臺諫極論之。 上曰: “駙馬不可與同姓宗親例論。 且其儀衛, 後當擧行, 今姑停之。” 是日, 臺諫復交章曰:

臣等累次交章, 上請宗親、駙馬, 長享尊榮, 保全無患之道。 歷代以來, 自有成規, 太上王開國之初, 法制未備, 其所以待宗親駙馬之道, 未盡得宜, 故自戊寅以來, 不能保全之端, 已再驗矣。 臣等念此, 每切痛心, 乃知古先哲王, 立法定制, 所以使宗親駙馬, 享有富貴, 而不任以事, 永保尊榮, 其慮遠矣。 伏惟遠法古先哲王之意, 近戒戊寅以來之事, 務令宗親駙馬, 安享富貴, 不煩以事, 優游以樂, 永世無患, 以保尊榮之極, 以篤保全之道。 其出入儀衛, 亦依前章所申, 以立制度, 以爲成憲。

上可其疏, 儀衛之制, 勿復論。


임금이 태상전에 나아가 헌수하고자 하다가 몸이 편찮아 실행하지 못하다[편집]

○上欲詣太上殿獻壽, 因體氣違和, 不果。


수창궁 후원 청심정에서 척석놀이를 구경하고 다음날도 또한 그와 같이 하다[편집]

○御壽昌宮後苑淸心亭, 觀擲石戲。 明日亦如之。 世子獻壽于上, 上御西亭受宴。 貞嬪亦詣中宮侍宴, 義安公和、寧安侯良祐、上黨侯李佇、參判三軍府事李茂、前參贊門下府事趙溫、前知三軍府事李天祐、三司左使李稷、同知摠制李叔蕃ㆍ趙卿等侍坐, 以次獻壽極懽, 至夜乃罷。


5月 7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하늘을 지나가다[편집]

○辛未/太白晝見經天。


경연에 나아가다[편집]

○御經筵。


5月 8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편집]

○壬申/太白晝見。


봉상시 승 김권이 기생 효도의 인사청탁에 의한 부정으로 우봉현에 귀양가다[편집]

○流奉常寺丞金綣于牛峯縣。 時, 綣兼尙瑞注簿, 愛妓孝道, 欲官其娚吳天, 托以宰臣金需之請, 授天散員職, 門下府上疏請罪。


대간에서 사병혁파에 불평한 이거이·이저·이천우의 처벌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편집]

○臺諫上疏, 請置李居易及佇、李天祐于外, 不允。 疏曰:

曩者, 臣等交章, 請罷私兵, 欲爲親勳, 得保富貴, 永享尊榮, 卽蒙兪允, 中外欣慶, 而判門下府事李居易、上黨侯李佇等, 不體殿下保全之意, 吝釋兵權, 潛懷憤怨, 將其私兵牌記, 遷延不卽送納于三軍府, 趙英茂等, 相聚怨謗。 其時, 臣等以其連姻宗室, 不卽論執, 只請英茂等罪。 是宜慙悔自新, 思保安榮, 尙未悛改, 以畜憤恨, 相與言曰: “一二人者, 如一塊肉”, 欲快其憤。 夫以人臣, 不卽釋兵, 且以私憾, 比人于肉, 敢欲爲亂。 又況居易, 往者謀害平原君趙璞, 情狀已露, 至於囚其兄于巡軍, 詰問其事, 所供皆實。 初欲害其甥壻, 後以流其親兄, 其於人倫何如, 乃以姻親之故, 置而不問。 此人之心, 難可以保, 固殿下之所明知也。 蓋緣暴貴恃勢, 長其驕悍之氣, 以至于此。 使其恃勢之心, 久蓄釋兵之憾, 儻或一朝, 不勝驕悍, 以逞其欲, 則禍亂之作, 不知其極。 據法論罪, 所當鞫問, 然以勳親, 在於八議。 願將居易、佇及同心結黨天祐等, 安置于外, 使銷驕悍之氣, 以生悔悟之心, 然後使還于朝, 復其封邑, 則禍釁不作, 長保富貴, 殿下有保全之德, 彼亦享安榮之福。

上以宗親功臣, 令皆勿問。 是日, 臺諫復上交章曰:

臣等以李居易、李佇、李天祐等安置于外之事, 具疏論啓, 蓋以宗親功臣之故, 不敢以法論執, 姑使處外, 消沮驕氣, 改心易慮, 以歸于善, 然後召還復爵, 俾享富貴。 此實爲之防其驕恣不法之萌, 永爲安享尊榮之計, 殿下不忍斥遣, 勿使復論。 然此只是一時之恩, 臣等所申, 實爲宗親功臣, 圖其久遠之計, 伏惟殿下依允施行。

上不允曰: “禁風聞公事, 已有常典, 臺諫何以至此?”

是日又上疏曰:

臣等竊謂, 風聞公事, 指謂閨門(瞹眛)〔曖昧〕, 風俗汚染等事耳, 前章所申, 實關國家禍亂之機。 耳目之官, 得聞此事, 以爲風聞, 不敢論執, 必待其事已發, 然後論之, 則臣等實恐無及於亂矣, 況今臣等, 非敢以此爲罪而治之也。 驕悍如此, 苟不防制, 後患難測。 若使處外, 以消驕悍之心, 就安全之地, 則今日斥遣之事, 實爲後日安全之本。 伏惟殿下斷以大義, 依允施行。

臺諫復交章言:

臣等竊聞, 人君所以待勳親之道, 要當恩義之兼全, 不宜寵愛之偏係。 恩義兼, 則永蒙其福, 寵愛偏, 則終受其禍, 此古今必然之理也。 昔鄭莊公弟叔段, 不義驕縱, 莊公不早爲其所, 縱使失道, 以至於亂, 然後討之, 《春秋》譏莊公養成其惡; 齊僖公寵愛其弟仲年, 不以公子之道待之, 施及其子, 猶與嫡等, 恃寵而當國, 卒成禍亂, 故《春秋》亦譏其有寵愛之私, 非友于之義。 夫弟且不可偏於寵愛。 況宗親功臣乎? 由是觀之, 功臣所當待以其道, 不使驕縱以稔其惡, 然後爲得也。 苟溺寵愛, 縱使失道, 養成其禍, 則其所以愛之, 適所以害之也。 今不預防, 而俾罹後患, 是豈宗社之福, 國家之美耶? 臣等實恐萬世之下, 溺愛不斷, 養成其罪之譏, 將有累於聖明之世, 竊爲殿下惜之。 又恐居易等恃勢驕恣, 愈無忌憚, 盛滿之禍, 將生於後, 而不知戒, 臣等實亦爲彼惜之。 能因臣等今日之言, 退居于外, 有所懲艾, 修心改行, 以復于朝, 則必以勳親之故, 克享保全之福, 終身富貴, 優游無患矣。 臣等今日所言, 實爲居易等治病之藥, 安身之術。 居易等苟能反躬而思之, 亦必以臣等之言, 爲箴規之益, 非所憤恨。 伏惟殿下, 特垂明斷, 務從大義, 毋溺寵愛之私, 爲圖永遠之計。

上不得已命放居易于淸州, 佇于漢陽私第, 天祐前已罷職, 其勿復問。 旣而悔之, 乃召臺諫官, 傳旨曰: “雖已可卿等之疏, 然反覆思之, 實難忍也。 姑置勿論。” 大司憲權近以下, 同辭而對曰: “臣等之言, 但爲宗社, 不爲私也, 不敢奉敎。” 上乃召居易及佇, 親自問之曰: “向者卿父子所言, 果如臺諫所劾乎?” 二人揮淚指天, 各言無罪。 佇又言: “大抵臺諫所上之章, 與劾問之辭爲一, 然後人服其罪。 今臺諫劾問臣父子以軍官牌記軍器不卽輸納, 至於所上之章, 則謂有不忠之言, 安有是理哉! 不忠之言, 臣等所不說也。 臣若不能辨明, 則雖死不辭。 臣忝戚屬, 未有毫髮之負, 請與臺諫辨明。” 上憐之, 又傳旨臺諫曰: “二人之罪, 難以的知。 且勳親也, 置之勿論, 如何?” 近等對曰: “臣等請功臣駙馬之罪, 豈敢以疑事爲之乎? 深知熟議, 不得已而發之, 臣等固不敢奉敎。” 因引鄭莊公養成段惡之說, 極言居易父子不忠之罪。 上怒, 命臺諫各歸私第, 毋得視事。 又命居易父子歸私第, 禁其出入。 旣而, 召大司憲權近等就職。 上悔前日之怒, 召近等曰: “佇至親, 且有勳勞, 故不敢輕貶。 當從卿等所言。”

臺諫交章上言:

臣等於今月十日詣闕聞命之時, 李佇密遣私伴三人, 潛入奉書局, 窺覘事變, 及昏越窓逃出, 爲守門者所執。 其遣人窺覘之心, 陰詭難測。 右佇等, 自革兵之後, 怏鬱憤怨, 敢欲爲亂。 據法言之, 所當論執, 第以宗親功臣之故, 臣等只請安置于外, 得蒙兪允。 事未施行, 殿下召致臣等, 問佇等亂言之所由生, 其狀已見, 果如臣等所申。 宜貶外以懲其惡, 殿下不忍斥遣, 置而不論。 其在佇等, 固宜慙悔自新, 乃不是思, 反懷陰詭, 潛令私伴, 乘暗入闕, 窺覘事變。 其驕悍自恣, 不畏邦憲如此, 將來之患, 甚可畏焉。 伏惟殿下, 深思防患之道, 將居易、佇、天祐等, 安置于外, 以銷憤怨之氣, 以杜禍亂之萌。 其所遣私伴, 特令鞫問所由, 明正其罪。

不允。


내갑사 중에 동북면 출신이 아닌 자 50인을 가려 파면하다[편집]

○簡內甲士非係東北面人者, 罷之, 凡五十餘人。 以忽赤、忠勇衛代之。


경연에서 지경연사 하윤이 경연의 중요성을 말하다[편집]

○御經筵。 知經筵事河崙曰: “前朝辛氏之初卽位也, 聰明過人, 又設書筵, 擢置儒士, 日就於學, 當時卿相皆曰: ‘明君出矣。’ 厥後憸小之徒, 誘之曰: ‘馳馬試劍, 自壯歲學之爲最。’ 以故廢學, 好遊畋溺聲色, 以至於亡。” 上曰: “然。 予其時爲書筵侍讀官, 王厭之, 授我以將軍之任, 日與侍中堅味之子林緻等二三人, 習畋獵。 予老矣, 無及於學。 人主當春秋鼎盛之時, 日與儒臣, 講論治道, 豈無所益乎?”


정당 문학 겸 대사헌 권근이 전을 올려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다[편집]

○政堂文學兼大司憲權近上箋辭, 不允。


이천우를 완산후로 봉하고, 이지란·우인렬·하윤·조온·이거이·이저·이무 등의 관직을 명하다[편집]

○封天祐爲完山侯, 李之蘭門下侍郞贊成事, 禹仁烈判三司事, 河崙判三軍府事, 復以趙溫爲參贊門下府事, 貶李居易領雞林府尹, 李佇領完山府尹, 以李茂爲東北面都巡問察理使兼永興府尹。 初, 茂子承祚謂其父曰: “竊聞上黨侯欲殺父公。” 茂大懼托疾, 率其子衎等四五人, 三夜避宿。 佇之麾下金允仁聞之, 以告佇, 佇卽至茂家曰: “不圖今者, 有如此言。 吾之才德, 不及君遠矣。 且以朝鮮社稷, 豈負君哉?” 遂結盟而退。 世子聞之, 召佇、茂和解, 慰諭之。 至是, 茂請辭職爲外任, 蓋佇等出外, 茂在內, 則恐佇益疑, 令出外以避嫌也。


좌군 동지총제 이숙번이 사직하니 안성군을 봉하다[편집]

○左軍同知摠制李叔蕃辭, 封安城君。


이무가 조사하고 동북면으로 가니 내구마 1필을 하사하다[편집]

○李茂朝辭, 赴東北面, 賜廐馬一匹。


세자의 생신이므로 가벼운 죄를 용서하다[편집]

○以世子生辰, 宥輕罪。


이거이와 이저가 조사하고 폄척되어 임소로 가다[편집]

○李居易、李佇朝辭, 出赴貶所, 上各賜夏衣鞍馬。 仍賜定社功臣及承旨鄭矩、李原馬各一匹。 居易私語人曰: “此馬何物也? 初超等爲判門下, 今又貶外, 雖賜萬匹, 何喜之有!” 佇告辭於太上王, 太上王曰: “有如此之故, 何不早告於我?” 佇對曰: “臣亦未知其故, 一朝出之, 所以不能進告。” 太上王曰: “必汝等之所自致也。”


5月 17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편집]

○辛巳/太白晝見。


경연에서 《통감촬요》를 강론하다가 권근과 요동의 정세를 논하다[편집]

○御經筵, 講《撮要》。 至 “吳孫權遣于禁, 求降於魏, 魏主欲許之, 劉曄諫之, 同知經筵事全伯英問於上曰: “魏主與劉曄孰是?” 上曰: “曄之諫是矣。 魏主不從其諫, 而許吳之詐降, 甚非也。” 伯英曰: “今燕王擧兵, 而中國亂矣。 設有定遼衛求降於我, 則許之否乎?” 上曰: “此正所深慮也。 然不若不受之爲愈也。” 知經筵事權近曰: “魏主之失, 唯在不從曄諫, 而許詐降而已, 受定遼之降, 有大不可者。 若燕王定亂而有天下, 則必問罪於我矣。 其時何以對之? 上言甚合於義。” 上曰: “卿言是也。”


화자(火者) 강인부를 외방에 귀양보내다[편집]

○流火者姜仁富于外方。 憲司上言: “仁富當芳幹作亂之時, 與聞其故, 容隱不言。 前者府與門下府交章上疏, 請依律論, 殿下只許外方付處, 罪重罰輕。 今聞殿下以脅從人一例, 京外從便。 如此則亂臣之儻, 懲戒無門, 尤有乖於典律。 伏惟殿下, 勿許從便。” 從之。


세자가 빈객 이서와 더불어 《주역》과 역사를 강론하다가 국방문제를 언급하다[편집]

○世子與賓客, 講《易》及史學。 左賓客李舒謂世子曰: “古人云朋亡。 夫朋亡者, 絶人情也。 爲人上者, 立法定制, 犯法則雖宗親勿宥。” 世子曰: “絶人情甚難。” 舒又曰: “二年以來, 倭寇稍息, 邊境甫安, 然不虞之變, 未可知也。 備亂之術, 山城爲最, 當於農隙修築, 以備不虞。” 世子曰: “曩者, 民困於土木之役, 迨今休息二三年矣。 久息則用民何害! 且人言日本國爭亂, 其漸甚可畏也。” 少監金科曰: “山城兵甲, 雖備不虞, 然農事爲急。 孟子曰: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世子與賓客鄭擢, 論漢、唐人主爲學之效, 行事之跡, 至唐太宗代隋之事, 嗟嘆良久曰: “眞英主也。”


올량합족이 경원 만호 이청을 살해하다[편집]

○兀良哈殺慶源萬戶李淸。


세자가 정사 공신을 삼군부에서 연향하다[편집]

○世子享定社功臣于三軍府。


5月 29日[편집]

우박이 내리다[편집]

○癸巳/雨雹。


세자가 태상전에 조회하며 부(府)를 설치하자고 건의하다[편집]

○世子朝太上殿。 世子告以建宮立府之意, 太上王曰: “寡人自戊寅年封太上王, 不建府今已三載矣, 殊無遺闕, 何必更立府爲!”


이달에 가뭄과 역질로 백성들이 죽다[편집]

○是月, 旱, 中外多疫, 民夭(扎)〔札〕。


二年 六月[편집]

6月 1日[편집]

태상왕의 궁을 세워 덕수궁이라 하고 부를 세워 승녕부라 하다[편집]

○〔甲午〕/建太上宮號曰德壽, 府曰承寧。 世子詣太上殿, 更請建府, 太上王曰: “前朝恭愍王之母洪氏, 雖婦人而立府曰崇敬, 庶事盡備, 古法不可廢也。 然今三年不立府, 服飾膳羞, 亦無闕乏。 今更建府, 於我何益!” 是日, 號太上宮曰德壽, 立府曰承寧, 班次三司之下。 以禹仁烈爲判事, 孫興宗、鄭龍壽爲尹, 備置少尹、判官、丞、注簿各二員。 仁烈等詣太上殿謝恩, 太上王怒稍解。


공신이 아닌데도 군에 봉했던 것은 모두 없애고, 권중화·이거인 등을 모두 치사하게 하다[편집]

○非功臣而封君者皆罷。 以權仲和爲判門下府事致仕, 李居仁、權禧、韓蕆、崔永沚、慶補皆爲判三司事致仕。


환왕의 진전을 계성전이라 하다[편집]

○號桓王眞殿, 爲啓聖殿。


좌정승 성석린, 우정승 민제에게 금대를 각각 1요씩 하사하다[편집]

○賜左政丞成石璘、右政丞閔霽金帶各一腰。


대간에서 이거이와 이저의 휘하에 있는 마필의 수를 제한하자고 건의하다[편집]

○臺諫請定李居易及佇伴人馬匹之數。 大司憲權近、左散騎朴訔等交章上言:

政令不信, 黜陟不明, 此國家之弊政也。 前者, 臣等交章, 請罷私兵, 又請宗親不任以事, 欲使勳親, 永保富貴, 殿下兪允, 定以爲法, 雖至萬世, 所當謹守而無墜者也。

領雞林府事李居易、領完山府事李佇等, 恃寵驕蹇, 恨釋兵權, 群聚謗議, 敢發不道之言。 有是心, 故有是言, 久畜不泄, 必動於惡, 禍亂之生, 不可不慮, 故臣等又請安置于外, 使其悔悟自新, 以獲保全, 殿下明斷, 亦依所申。 居易等苟知人臣之義, 所當汗慄請罪, 自退于外, 以竢上命可也, 乃敢偃然, 傲上從康, 不卽發行, 掩匿己罪, 欲與臺諫辨明。 殿下寬仁, 不忍輕絶, 乃召臣等于庭, 詰問其由。 及至罪狀明著, 當得重譴, 殿下屈法伸恩, 授以藩屛重任。 彼乃驕悍自若, 不知辭避, 多率私兵鷹犬以行, 所過州郡驛路, 支費甚繁。 況其所住雞林、完山, 將何以堪之哉! 居易又將上妓重千金者, 擅自率行, 絃管之具, 靡不持載。 其驕恣無恥, 不畏公法, 至如此極, 豈有奉法修職尊主庇民之心哉? 到官之後, 聲色之娛, 畋獵之行, 軍官僕從之費, 鷹犬馬匹之養, 凡所以爲民害者, 豈可勝言! 及今不制, 至其弊積罪著, 不審殿下, 將何以處之? 前者殿下, 旣定宗親不任以事之法, 不日之間, 乃授外寄, 政令不信, 無甚於此。 居易、佇等, 初違上命, 不欲釋兵, 又發狂言, 以被彈劾, 請置于外, 殿下旣允之後, 敢欲辨明, 其事益著, 不能復辨, 欺罔之罪, 亦所難逃。 且當詰問臺諫之時, 潛令私伴, 遣入闕內, 至夜不出, 窺伺動靜, 其心難測。 如斯罪愆, 皆置勿問, 反授巨鎭, 黜陟不明, 無甚於此。 伏惟殿下, 上爲國家, 示其法令之明信, 下爲居易等, 慮其富貴之安保, 收還外寄, 安置私莊, 使其懲艾自新, 永無犯法之患, 則彼得優游自逸, 與國咸休, 而殿下保全宗親之道, 亦永終而無虧矣。

命除他事, 伴人馬匹數, 一依在前府尹之例, 鷹犬幷禁。 又臺諫交章上言: “李居易以判門下, 斥守雞林, 率上妓重千金赴任, 於法不當。 請居易、佇等罷任, 安置私莊, 重千金還定其役。” 不允。 臺諫交章上言:

臣等累次交章, 請解居易、佇外任之事, 蓋謂法已定者, 不可以變, 罪已彰者, 不可以任。 二者皆是毁法亂紀之事。 國勢衰替, 職此之由。 臣等職在言責, 不敢不陳, 殿下乃以勳親之故, 不忍遽釋其任, 臣等復稽古實, 仰瀆聰聞。 昔舜封其弟象於有庳, 使吏治之, 象不得有爲。 論者以爲封之有庳, 富貴之也; 使吏治之, 不得有爲者, 是不任以事, 而保全之也。 故舜之處象, 仁之至而義之盡, 萬世之所當法也。 鄭莊公封其弟叔段於大邑, 縱使失道, 以至於亂, 然後討之。 論者譏其不早爲之所, 養成段惡, 萬世之所當戒也。 殿下苟以佇之爲親, 不忍置之私莊, 宜以大舜爲法, 莊公爲戒, 仍以爲領完山府事, 以食其俸, 毋令煩以府事, 而委判官, 專治府事, 則合於大舜處象之道矣。 又按宋朝宰相呂惠卿, 以太尉責授建寧節度, 本州安置, 不得簽書公事。 蓋大臣被譴, 不欲廢黜, 又不宜任之以事, 故有此命。 雖出一時之權宜, 亦可爲後世之法。 殿下於居易, 亦以勳貴, 不忍置之私莊, 宜法宋朝呂惠卿故事, 仍以居易領雞林府事, 安置其府, 不治其事, 使其判官, 專治府事, 則不失殿下優待勳親, 不忍廢黜, 授以爵位之恩, 亦不失國家欲保勳親, 不任以事, 已定之法。 且犯法者, 不得以寵而幸免; 挾貴者, 不得以勢而自肆。 當時之弊, 不及於其民, 後日之患, 永絶於其身, 一擧而數美幷焉。 伏惟殿下兪允焉。

申判: “依所申私莊安置。”


6月 2日[편집]

성석린이 극심한 가뭄에 책임을 지고 사면하길 청하다[편집]

○乙未/小雨。 時方旱甚, 石璘言於上曰: “天久旱不雨, 臣未能燮理愆伏之罪也。 請免官謝之。” 上善其言。


사헌부에서 장사길·장사정 등의 비행을 열거, 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司憲府上言請張思吉、思靖等罪, 不允。 疏曰:

花山君張思吉及其弟思靖等, 生長邊鄙, 習於武事, 不識義理, 性且奸黠, 其心難保。 思靖尤爲殘暴, 以其父烈防禦之功, 父子兄弟, 相繼爲萬戶。 戊辰回軍之時, 太上殿下以爲, 不可全付邊境於奸黠難保之人, 率思吉、思靖而來京, 授職厚待。 思吉等當開國之時, 同心翊戴, 得與勳盟, 位至宰相。 思靖恃寵驕恣, 打殺無辜, 罪惡深重, 乃以功臣, 止流外方, 俄而從便, 還歸義州。 思吉當懷安作亂之時, 潛懷異心, 中立觀變, 情狀現露, 亦以功臣, 止令付處, 未幾宣喚復職。 聖恩深重, 宜益謹愼侍衛, 反懷憤怨, 妄托母疾而歸。 今當罷私兵之時, 思吉與思靖, 多聚奸猾之人, 稱爲伴儻, 成群畋獵, 擅行威福, 凌辱守令, 役使良民, 一如(奴肄)〔奴隷〕, 一方人民, 擧皆服從, 多行賄賂, 其罪一也。 外方禁酒, 已有條令, 旁近守令及軍民人等, 畏其威勢, 爭持酒肉, 設宴縱飮, 其罪二也。 聽妖僧地動誑誘, 破人家産, 多行不法, 其罪三也。 率軍馬越江畋獵, 累日留宿, 因此往來, 人命溺死, 其罪四也。 當農月率其妻妾, 往返溫井, 車騎從徒, 擬於車駕, 所過民戶, 皆被侵擾, 道旁禾穀, 盡行踏損, 其罪五也。 思吉等狼子野心, 實所難保, 不顧國家之恩, 俾居隣境巨鎭, 將來之患, 不可不慮。 請收思吉、思靖等職牒, 其作弊所犯及信惑妖僧譎謀事狀鞫問, 依律論罪。 將其母妻一族等, 移置下道, 其副萬戶之任, 擇有材智朝官, 依上萬戶例差遣。

申判: “待上京更議, 姑勿擧論。”


사헌부에서 삼군 총제 김영렬이 규정을 어겼다고 죄를 청했으나 용서하다[편집]

○司憲府請三軍摠制金英烈罪, 原之。 見任官歸寧掃墳, 必皆辭職, 然後出外, 《六典》所載。 英烈欲如黃州, 娶柳曼殊之女, 托以治病溫井, 不辭職而行, 竟不得柳氏而還, 憲司劾之。 上書請罪, 世子曾知其故, 以聞于上, 免其罪。


까마귀떼가 5월부터 6월까지 백록산에 모여 지저귀다[편집]

○群烏自五月至六月, 聚噪白鹿山。


경연에서 임금이 탄일에 각도 방물전을 없애고자 하다. 문관에게 중시를 보이게 하다[편집]

○御經筵。 禮曹上誕日各道進獻方物狀, 上曰: “誕日各道方物箋, 無補於治。 況盛農時, 其弊甚多, 欲除之。” 知經筵事河崙進曰: “誕日方物箋, 自古有之, 不可廢也。” 都承旨鄭矩, 亦以崙意啓, 從之。 河崙、李詹等, 進講《通鑑綱目》。 訖, 崙因言於上曰: “大抵儒者登科, 則棄卷不講, 及試文官, 則多不稱職。 自今各年及第, 悉令重試, 以備擢用。” 上然之。


오랜 가뭄 끝에 전라도에 큰 비가 내리다[편집]

○時, 久旱太甚, 全羅道境內大雨。


경연에서 지경연사 하윤이 《위기》를 진강하다[편집]

○御經筵。 知經筵事河崙進講《魏紀》, 至循名責實之言, 曰: “孔明此言, 蓋慮用人之不易也。 大抵爲大臣則盡其道, 爲史官則盡其職, 以至日用之間, 凡事莫不皆然。 觀孔明臨絶薦人, 不過公琰、文偉, 則當時之循名責實, 從可知也。”


임금이 하루 종일 반성하고 근신하니 비가 억수같이 내려 사흘 만에 그치다[편집]

○左政丞成石璘、右政丞閔霽, 入便殿進戒, 上聞之, 省愼竟日, 雨作沛然, 三日乃止。 石璘等啓曰: “古者輔相之臣, 如有水旱不虞之變, 辭位以禳之。 今旱氣雖未至太甚, 其漸可畏也。 臣等顧無絲毫之補, 濫居宰輔之首, 恐未合於天心。 願擇才德全備者代之。” 又曰: “方今四方無虞, 土木不興, 庶民安業。 然而雨暘不時, 誠由臣等之無良, 深以爲懼。 且臣等優荷聖恩, 常飽酒食。 今當農月, 恒暘不雨, 恐失西成之利。 請下禁酒之令, 以省經費。” 又曰: “方今四方鉅弊, 獨奴婢一事。 太上王深知其弊, 設奴婢辨定都監, 盡令平決, 以絶爭訟。 今殿下又令司憲府, 受辨定都監誤決所志, 分付刑曹及都官決之。 臣等以爲如此, 則雖至二三年, 不能盡決, 冤抑未伸, 恐傷和氣。” 又曰: “古之王者, 每當災異, 必減膳徹樂, 恐懼修省。 願殿下於燕安之時、起居之際, 必加戒愼, 無或怠忽, 以答天意。” 上拱手斂容曰: “卿等敎我之道、愛我之誠至矣。 戒愼之事, 寡人氣質本懶, 不能勉强, 以應天心。 然卿等以赤心警予, 予豈敢不勉! 若誤決奴婢決絶事, 更議申聞。” 是日, 自朝竟夕, 恐懼修省, 未嘗少懈, 當夜雨作。


세자가 빈객 정탁과 더불어 충효의 도리를 강론하다[편집]

○世子與賓客鄭擢講忠孝之道。 世子與擢, 論陰陽之理、性學之要, 與夫皇王禪授之事, 漢、唐人主行事之跡, 撫掌咨嗟。 至講忠誠不二之言, 曰: “臣之爲主, 不二其心者, 在所褒奬。 往者懷安之亂, 其麾下三四人, 不顧死生, 竭力捍禦, 予甚嘉之。 予之麾下曰: ‘此人抵罪爲可。’ 予曰: ‘此非罪人, 忠臣也。 我若遭變, 麾下人不盡力以救, 可謂忠乎?’ 皆默然。” 擢對曰: “邸下此言, 可爲龜鑑。 桀犬吠堯, 非其主也。” 世子曰: “陰陽之不和, 古人以爲君臣行事之所致。” 擢對曰: “《洪範》曰: ‘王省惟歲, 卿士惟月, 庶民惟星。’ 其應雖殊, 必然之理也。” 世子曰: “人之死生有命, 非人所爲。 歲丁丑, 朴子安不克防倭, 太上王大怒, 命遣人斬之。 其子實, 吾之麾下也。 欲救其父, 哭泣來告。 予欲救之無路, 遂如南誾家議之。 誾曰: ‘使者已行矣, 奈何?’ 實於誾前大聲號哭, 予愈悲之。 還陪殿下及義安公, 啓于太上王, 幸而得生。 人子如實, 可謂孝矣。”


의정부에 명하여 태상전에 옥책과 금보를 갖추어 바치다[편집]

○命議政府, 備進太上殿玉冊金寶。 太上王語宦者李得芬曰: “今已建我府矣, 何不成印章乎? 吾嘗見恭愍王封其母洪氏爲太后, 鑄印章, 使兩侍中, 具朝服以獻。 古禮豈可廢也?” 上聞之, 有是命。


권근의 건의로 다시 노비 변정 도감을 설치하다[편집]

○復置奴婢辨定都監。 大司憲權近等上疏言: “府所受辨定都監奴婢誤決所志, 請更立都監, 速令平決, 以伸冤抑。” 於是置都監, 分爲十五房, 以六曹、開城留後司、閣門及寺監之事簡者, 任之。


전라도 수군 절제사 김빈길에게 옷, 갓, 신을 하사하다[편집]

○賜全羅道水軍節制使金贇吉衣及笠靴。


임금의 고모부 개령군 문원좌의 졸기[편집]

○開寧君文原佐卒。 原佐, 上之姑夫也。


내상 하윤·조온·이직·정남진·조진·이숙번에게 양죽립과 사피화를 하사하다[편집]

○賜內相河崙、趙溫、李稷、鄭南晋、趙珍、李叔蕃涼竹笠、斜皮靴各一。


6月 16日[편집]

전 낭장 최선이 벼락을 맞다[편집]

○己酉/震前郞將崔選。


세자가 빈객 정탁과 더불어 사냥하는 일을 의논하다[편집]

○世子與賓客鄭擢, 論田狩之事。 世子曰: “我國家壤地褊小, 田狩之處, 皆農場也。 自鐵原以北, 漢陽以東, 擧無閑曠之地, 蒐狩則必損禾稼。 唯平州之南, 有閑曠之地百餘里, 以爲蒐狩之囿, 禁人樵採, 每歲秋冬, 蒐狩其地, 訓鍊武藝。 他處田獵, 一皆禁斷, 無乃可乎?”


태상왕의 존호를 올리기 위해 봉숭 도감을 설치하다[편집]

○設封崇都監。 將以上太上王尊號也。 以政丞成石璘ㆍ閔霽、判三軍府事河崙爲提調。


문하부에서 도량과 학식있는 조사 중에서 순군의 관원을 보충하기를 건의하다[편집]

○門下府上言請擇朝士, 以充巡軍之官。 左散騎常侍朴訔等上疏言:

竊惟巡軍, 掌巡綽捕禁, 而兼治刑獄。 一杖一訊之下, 人之死生決焉; 一言數字之間, 罪之輕重辨焉。 其任至重, 可不愼哉! 往往世系不明之人, 一字不學之輩, 僥倖冒干, 而得側於官員之列, 故雖在縲紲之中, 亦侮笑而不服。 於是訊之以難對之言, 施之以慘酷之刑, 殘虐無辜, 以傷和氣, 甚可痛也。 願自今, 巡軍官員, 必擇朝士之有器度學識者, 以差其任, 其世系不明, 一字不學之人, 請令憲司劾黜, 其法外慘酷之刑, 亦令痛禁, 以重其任, 以愼其獄。

上然之。


6月 19日[편집]

남산의 돌에 벼락이 떨어지고, 삼각산의 큰 돌이 무너져서 무착사를 덮치다[편집]

○壬子/大雨震電。 震男山石, 三角山大石崩, 壓無著寺。


6月 20日[편집]

큰 물이 져서 성안의 사람과 말이 많이 상하다[편집]

○癸丑/大水, 城中人馬漂溺甚衆。


방간의 휘하였던 진무소 갑사 3백 인을 혁파하고, 군기와 갑옷을 모두 삼군부로 보내다[편집]

○成均樂正鄭以吾上書。 略曰:

侵官之罪, 無所逃; 芻蕘之言, 有所取。 伏惟殿下, 勿以爲迂遠而不切。 夫草創與守成, 其法不同。 惟我太上王, 當前朝衰亂之季, (極)〔拯〕民塗炭, 措國盤石, 天命人心, 有不容釋。 然草創未久, 特置義興三軍府, 而宮中多養甲士, 至使勳戚, 分掌各道之兵, 如李濟、道傳、南誾者, 陰結憸利, 幾覆社稷。 殿下擧義削平之日, 宮中甲士, 倒戈而應。 由是觀之, 社稷安危, 非兵力之所能維持, 殿下之所親覩也。 且壬申之開國, 戊寅之定社, 其功烈之盛, 孰有加於殿下與東宮也哉! 芳幹不此之顧, 潛圖不軌, 禍在不測, 殿下乃命芳幹, 安置于外, 是則大舜處象之心, 又命東宮, 立爲儲副, 委以監撫之任, 此則計安國家之遠慮也。 然芳幹之黨與, 尙列中外, 至有屬甲士者, 良可慮也。 況(肄)〔隷〕于宮甲者, 非巿井無賴之徒, 必嚚悍不逞之人乎? 今也芳幹, 密邇京邑, 設有如前日之煽亂, 彼爲甲士者, 不識大義, 其足賴乎? 老子曰: “佳兵, 不祥之器, 其事好還。” 於《傳》亦曰: “兵猶火也。 不戢, 將自焚。” 此皆所鑑也。 殿下旣任東宮以撫軍, 乃於宮中, 別置三軍府鎭撫, 而多養宮甲, 東宮監撫之意安在? 願殿下, 罷宮甲之養, 周廬、陛楯, 環以司楯、成衆愛馬, 日接賢士大夫, 朝夕與居, 强於政治, 以永國祚, 幸甚。

時, 甲士多芳幹麾下人, 世子出入, 常懷戰慄, 故以吾上此書。 上見之, 謂趙溫曰: “以吾之言如何?” 溫對曰: “豈可以一儒之言, 輕罷宮甲哉!” 上曰: “以吾之言, 甚合予志。” 卽罷鎭撫所甲士三百, 軍器鎧仗, 皆送三軍府, 只留潛邸麾下百人。


예조에서 태상왕의 존호를 계운신무태상왕이라 올리니 그대로 따르다[편집]

○禮曹進太上王尊號。 禮曹上言:

伏準議政府關, 令本曹擬議太上王尊號, 啓聞施行。 臣等竊謂, 前朝之季, 兵革競起, 民受其殃。 惟我太上殿下, 以神武之資, 摠戎中外, 削平積亂, 四方以寧, 民遂其生, 上順天命, 下得人心。 勉循勸進之誠, 肇啓熙明之運, 傳歸殿下, 式至今休。 宜上尊號曰啓運神武太上王, 以彰盛烈, 昭示永世, 具狀以聞。

王旨依申。


하윤의 제의로 종묘 제사에 쓸 향을 받아 갈 때 행하는 예를 고치다[편집]

○改宗廟祭受香禮。 判義興三軍府事河崙啓曰: “宰臣將詣宗廟受香之時, 殿下雖不能備禮親傳, 請正衣冠焚香, 致敬傳授。” 自此上正衣冠, 出寢門外, 焚香跪授, 拱立竢宰臣出門, 還入內。


세자가 대학연의를 읽다가 좌보덕 서유와 더불어 사병 혁파와 관련한 문제를 논하다[편집]

○世子讀《大學衍義》。 與左輔德徐愈, 論握兵之弊, 至玄宗、肅宗之事, 嘆曰: “肅宗之畏李輔國, 但以輔國握兵也。 兵權之不可散在, 殷鑑如此。 且以我家之事言之, 太上王以握兵之故, 當高麗之季, 能化家爲國。 至於戊寅南、鄭之亂, 吾兄弟若不握兵, 豈能應機制變也哉? 朴苞之說懷安, 亦由其有兵權故也。 近日, 功臣三四人, 以解兵權, 怏悒不已, 臺諫請罪, 放流于外。 往日, 吾以兵權不可散在事, 諄諄面諭, 皆莫能悟。 今者唯趙英茂在平壤, 謂恨不悟世子之敎。” 徐愈對曰: “昔宋太祖平定天下, 宴將相于內。 將相曰: ‘天下平定, 宜樂也。’ 太祖曰: ‘吾則不樂也。’ 將相曰: ‘天下已定, 陛下胡不樂也?’ 太祖曰: ‘始卿等握兵, 能尊朕爲天子。 吾恐卿之麾下將士, 推卿爲天子, 亦猶卿之尊朕也。’ 功臣將相叩頭拜謝, 卽日上印綬解兵權。 今世子之言, 與宋祖一也。 但功臣將相, 不及宋祖之時矣。”


김영렬의 고신 서경과 관련하여 사헌 잡단 김질 등 10여 명이 귀양·파직되다[편집]

○流司憲雜端金晊于忠州, 監察宋興、成揜、柳思訥于外方, 罷監察徐宗俊等十人職。 初, 雜端尹向, 署出三軍摠制金英烈告身, 兼大司憲權近、中丞安省、雜端金晊議曰: “英烈告身, 論議不均, 向署出之, 當劾問。” 厥後晊先仕本府劾向。 門下府以獨行(殫劾)〔彈劾〕爲罪, 反劾晊, 而不問近與省。 監察興、思訥、揜等十二人議曰: “權近、安省, 與晊同議劾向, 而晊獨被劾於門下府, 於義未便。” 方本府齊坐之日, 於近與省不行祗迎禮, 上聞之怒, 令門下府劾問其故。 門下府劾興等, 上疏以爲: “大司憲權近, 孚於衆望者也。 今興等欲誣陷之, 請將興、思訥、揜等及雜端金晊等收職牒, 鞫問竄黜。 其餘宗俊等少不更事者, 但收職牒遠流。” 從之。 晊ㆍ興等四人, 私莊付處; 宗俊等, 皆罷職。


二年 秋七月[편집]

7月 1日[편집]

유성이 동북방 사이로 떨어졌는데 크기가 물동이만 하였다[편집]

○甲子朔/流星落東北間, 大如盆。


탄일이므로 하례를 받는데 일본의 사신도 또한 9품 말미에 들어와 행례하다[편집]

○以誕日受賀, 日本使亦入, 九品班末行禮。 舊制, 誕日必宴群臣, 是時, 風雨失時, 變怪屢作, 故止之。 惟世子與義安公和、寧安侯良祐、左政丞成石璘以下諸大臣, 入詣便殿, 從容論事, 仍獻壽。 酒酣, 宗親宰相以次起舞, 上與世子亦起舞, 至夜乃罷。


7月 2日[편집]

새벽에 북방에 붉은 기운이 있었다[편집]

○乙丑/曉, 北方有赤氣。


동북면·서북면·풍해도에 크게 황충이 일어 관리를 보내 이를 잡도록 하다[편집]

○東ㆍ西北面、豐海道大蝗, 監司以聞, 遣使捕之。 右政丞閔霽, 方在廟堂, 戲言閔繼生任安岳時(勑)捕蝗之事, 略無憂色。


세자가 존호 올리는 것을 고하기 위해 덕수궁에 조알하다[편집]

○世子朝德壽宮。 以告上尊號也。


태상왕에게 잘못 보인 참찬문하부사 조온을 완산부에 귀양보내다[편집]

○流參贊門下府事趙溫于完山府。 前此, 世子朝德壽宮, 太上王謂世子曰: “汝等以予爲父, 欲加尊號, 是誠可嘉, 然予有言, 汝其聽之。 趙溫, 本吾麾下人也。 予嘗拔擢, 位至宰輔, 自我遜位以來, 未嘗一來見, 人之背恩, 孰甚焉! 戊寅秋, 率領甲士, 宿衛于內, 聞有外變, 遂率兵出應, 反復不忠, 無可比者。 汝等但以從汝阿諛爲德, 而不思大義乎! 人臣之有二心者, 自古罪在不宥。” 世子還, 以告于上而貶之。


임금이 세자와 덕수궁에 조알하고 계운신무태상왕이란 존호를 올리다. 책문[편집]

○上率世子及百官, 朝于德壽宮, 奉玉冊金寶, 上尊號曰啓運神武太上王。 冊文曰:

維建文二年歲次庚辰七月朔甲子越六日己巳, 國王臣諱, 稽首再拜, 謹奉冊上言。 應千齡而作之君, 肇開景運; 以一國而傳之子, 宜極尊稱。 玆率典章, 庶申誠孝。 恭惟太上王殿下, 勇智天錫, 聖敬日躋。 武烈偉於濟時, 寬仁溥於育物。 斯迫輿情之推戴, 以建王業之興隆。 方百度之惟新, 遽萬機之是倦。 庸釋大位, 傳付眇躬。 遂黽勉以恭承, 每祗勤而惕厲。 欲彰盛德之至, 惟在徽號之崇。 率籲臣僚, 擧行冊禮。 臣諱不勝大願, 謹奉冊寶, 上尊號曰啓運神武。 伏惟太上王殿下, 廓包容之度, 推覆育之慈。 體一大之曰天, 勿嫌强名之道; 莅萬姓而爲父, 永享多壽之期。 臣諱誠懽誠抃, 稽首再拜上言。

上奉冊畢, 因獻壽。 上與世子諸公, 起舞極歡, 至暮乃罷。 太上王賜左政丞成石璘、右政丞閔霽、判三軍府事河崙各廐馬一匹、段綃各一匹, 賜三司左使李稷、參判三軍府事崔有慶、簽書李文和、典書韓尙敬等段綃各一匹。 皆執事於封崇之禮者。


세자가 불러들여 고려 주서 길재가 서울에 이르다[편집]

○高麗注書吉再至京。 世子嘗以再經明行修, 下令三軍府, 移牒徵之。


세자가 덕수궁에 조알하다[편집]

○世子朝德壽宮。


태상왕이 세자에게 나쁘다고 말하여 이무와 조영무를 강릉부와 곡산부에 각각 귀양보내다[편집]

○流東北面都巡問使永興尹李茂于江陵府, 西北面都巡問使平壤尹趙英茂于谷山府。 是日, 世子朝德壽宮, 太上王復謂世子曰: “趙溫姊夫之子, 趙英茂番上之軍。 予哀其微賤, 或賜衣冠, 或除官爵, 入相出將, 靡不從之, 遂爲開國功臣, 位至卿相, 皆我之賜。 溫與英茂, 皆掌禁兵, 直宿內殿, 當戊寅寡人不豫之時, 不顧昔日愛護之恩, 率軍內應, 背恩忘德, 無可比者。 李茂雖非溫與英茂之比, 亦依寡人, 得列於原從功臣。 茂素與南誾、道傳等善, 常相作謀, 欲傾汝輩, 戊寅之變, 往來行間, 中立觀變, 惟勝者是從, 會汝得勝, 故來附耳。 此非觀變不忠之人乎, 而皆置於定社功臣之列。 儻有急難, 則豈不効戊寅背寡人之事乎? 汝等若以予爲父, 則罪此三人, 以圖社稷長久之計, 以戒後世不忠之黨。” 世子還告于上, 上不得已流之。


대사헌 권근 등에게 일을 보도록 명하다[편집]

○命大司憲權近等視事。 初近等以監察不祗迎, 故不視事。


문하부에서 요청, 곽충보 등 12인을 외방에 귀양보내다[편집]

○門下府上言, 請竄郭忠輔等十二人于外, 從之。 疏曰:

竊謂芳幹, 稱兵構亂, 幾覆宗社, 罪在不宥, 幸賴殿下友愛之恩, 得全性命, 以至今日。 然其憤怨反側之情, 難可測也, 而其黨與郭忠輔、李忱、李伯溫、桓愉、薛崇、朴寅吉、金甫海、郭承祐、黃載、郭願、任天年、崔龍蘇等, 亦蒙聖恩, 皆得從便。 誠宜杜門屛跡, 悔罪自責, 思有以報聖德之萬一可也, 而泰然自恣, 不懲其惡, 或摳朋引類, 奔馳朝路, 或帶劍佩箭, 橫行村落, 不可不制也。 願殿下安不忘危, 治不忘亂, 令憲司將上項郭忠輔等十二人, 屛之遠方, 禁其出入, 以待自新, 以杜亂萌, 國家幸甚。

伯溫以親戚免。


사헌부와 형조에서 이무, 조영무 등을 불러들이자고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편집]

○省憲刑曹上言, 請召還李茂、趙英茂等, 不允。 兼大司憲權近、左散騎朴訔、刑曹典書呂稱, 交章上言:

賞有功罰有罪, 人主之大權, 而臨大事決大疑, 人臣之大節也。 人主以大權御下, 人臣以大節報上, 皆出乎至公而已。 霍光之廢昌邑, 狄仁傑之正廬陵, 此皆以大節報上, 而賞及後世者也。 向者, 南誾、鄭道傳, 以腹心大臣, 當太上王議儲之日, 不能建白大義, 以正嫡庶之分, 而乃阿諛順旨, 扶立幼孼, 稱之曰賢有德, 狐媚弄權, 陰謀不軌, 及至太上王不豫之時, 敢欲盡害嫡子, 挾其孤兒, 擅行威福, 以遂簒竊之謀, 社稷存亡之機, 正在瞬息。 幸賴天地宗社之靈, 中外臣民之望, 今永興府尹李茂、平壤尹趙英茂、參贊門下府事趙溫、完山侯李天祐等, 乃與二三大臣, 奮不顧身, 擧大義決大事, 而姦雄伏誅, 宗社再安。 太上王亦自悔悟, 以大位傳之殿下, 以正朝鮮萬世之本, 實茂等之力也。 其撥亂反正之功, 當不在霍光、仁傑之下矣。 故勒碑紀功, 建閣圖形, 誓以山河, 宥及永世, 其所以賞之者, 亦可謂至矣。 今者, 太上王殿下, 無故欲罪茂等, 擧國驚疑, 莫知其實。 此豈浸潤之譖, 有以間之歟! 不然, 太上王大公至正, 英明冠古, 不應以庶孽之故, 而反罪朝鮮社稷之臣也。 臣等未知茂等, 能使太上王艱難草創之業, 不歸於姦雄之手, 是爲罪乎? 忘身徇國, 以正嫡庶之分, 是爲罪乎? 撥亂反正, 以安社稷, 使殿下昆弟, 得有今日, 太上之業, 傳之萬世, 是爲罪乎? 今趙溫無故見逐, 趙英茂亦在於外, 在朝勳臣文武百僚, 莫不自危, 如臨不測之淵。 功臣解體, 衆心疑懼, 至於如此, 不審殿下, 將誰與爲國乎? 願殿下勿以苟順爲孝, 當以至誠幾諫, 以沮衆疑, 李茂、趙英茂, 宜卽召還于朝, 以安衆心。 如或太上王固執不改, 則請劾左右譖訴之人, 以明此非出於太上王之心也, 且以示殿下賞罰之至公。

上重違太上之意, 不從。 是日, 復交章上言:

臣等交章所論李茂、趙英茂、趙溫、李天祐, 當戊寅年鄭道傳、南誾等將害嫡子, 挾其幼孼, 謀傾社稷, 禍變不測之際, 乃能奮不顧身, 仗義決策, 殲除姦凶, 以明嫡庶之分, 得蒙太上王悔悟, 傳付國統, 歸于殿下, 以基朝鮮社稷億萬世(無彊)〔無疆〕之業。 其功甚大, 國人所共知也, 未嘗聞有可議之罪。 今者, 太上殿下, 欲罪茂等, 殿下孝誠不敢違命, 一朝以無罪, 斥逐趙溫等, 擧國臣民, 靡不驚疑, 故臣等交章, 請卽召還, 留中不下, 未蒙兪允。 是非不知溫等無罪, 但不欲傷太上之心耳。 臣等竊謂, 親有過擧, 子不可以不諫, 君有失德, 臣不可以不爭。 況我太上王寬仁明睿, 必不妄加譴責於有功無罪之臣, 是必有左右憸小之徒, 苟爲讒譖, 離間勳親, 欲逞姦兇之計, 以圖不利於社稷, 復有如道傳、南誾者焉, 將來之患, 甚可懼也。 臣等敢請速召李茂等, 皆還于朝, 以彰有功, 以明無罪, 又將太上王左右憸小之徒李得芬、張翼等輩, 收其職牒, 鞫問構讒謀害勳親之故, 以懲不軌, 永絶亂源, 不勝幸甚。

上亦不從。


좌정승 성석린, 우정승 민제가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나아가 이무·조영무·조온 등을 변호하다[편집]

○左政丞成石璘、右政丞閔霽, 率文武百官, 詣太上殿。 初, 石璘、霽等, 詣闕啓云: “太上王以非罪, 譴逐功臣李茂ㆍ趙英茂ㆍ趙溫等, 文武百僚, 莫不驚疑觖望。 願召還于朝, 以安衆心。” 上亦不許。 石璘等與文武百僚, 上疏言:

爲治之道, 在明其賞罰。 有功不賞, 無罪見罰, 雖欲爲治, 不可得矣。 竊見李茂、趙英茂、趙溫等, 當戊寅年太上王不豫之時, 權姦秉政, 貪立幼孼, 謀害正嫡, 將傾社稷, 禍亂之變, 間不容髮, 而茂等與宗室大臣及忠義之士, 奮不顧身, 仗義定策, 克殲姦雄, 扶立嫡長, 載安宗社, 以基萬世(無彊)〔無疆〕之業, 其功甚大, 故嘗誓以帶礪, 宥及後昆。 頃者, 殿下以太上之命, 斥逐趙溫, 擧國臣民, 靡不驚疑, 今者, 又聞太上殿下, 欲加罪於李茂、趙英茂等, 殿下不敢違命, 乃逐茂等。 臺省、刑曹交章上請, 召還于朝, 以彰其有功, 以明其非罪, 且勸後來忠義之士, 以爲宗社萬世之計。 其論甚當, 宜卽兪允, 殿下重違太上之命, 留中不下。 夫茂等所建之功, 關於宗社萬世, 今所坐之事, 未審何事? 是有功而不見賞, 無罪而反見罰, 其於爲治之道何如, 其於宗社之計何如? 文武百僚莫不觖望。 臣等竊謂爲孝之道, 當以至誠感動, 匡救其失, 不宜苟且以順其旨, 故古人不以從令爲孝。 伏望殿下, 上體至誠匡救之孝, 下念爲治賞罰之公, 卽將臺省、刑曹交章所申, 依允施行。

上不能決。 臺諫、刑曹復詣闕切諫, 上使都承旨鄭矩, 齎三省所上書, 進太上王前白曰: “三省論李茂、趙英茂無罪, 耆老文武百僚, 亦請召還。 臣未知處決, 寢食未安, 惶恐悉深。 惟命是從, 伏惟裁下。” 太上王見三省疏, 益怒曰: “國人皆以寡人爲非, 予豈敢居於此乎? 吾將任意所往。” 於是, 石璘、霽等詣太上殿, 太上王謂石璘等曰: “卿等何爲來哉?” 石璘等對曰: “殿下近日, 以不肖一二臣之事, 至勞聖慮, 臣等是以來。” 太上王曰: “吾亦意其來耳。 吾欲見卿等, 言吾心事久矣。 兩政丞, 吾之同列宰相也, 其餘宰相, 皆吾麾下人也。 我家之事, 無不知之。 寡人幸賴祖宗之德、天命之集, 創始朝鮮, 卽位七年, 而傳之長子, 平生之事, 無復有憾矣。 戊寅之被戮弱子, 吾奚念哉! 皆天命也。 我若以喪其愛子, 失其寶位之故, 不顧社稷安危, 則證有上蒼。 李天祐本系甚微, 我承先父恩愛之志, 父子二人, 擢置宰相, 顧乃背我厚恩, 其於人道何如也?” 謂大司憲權近曰: “柳璥侍中妾孫之謀害本主, 反從賤役, 宰臣所知也。” 又曰: “趙溫者, 所得於父母者, 但皮肉耳。 其衣之食之, 立於朝端, 位至宰相, 得與開國之列, 皆我之使然; 英茂者, 自東北面侍衛軍, 擢爲牌頭, 位至宰相, 得與開國之列。 此三人者, 雖粉骨糜身, 豈足以報我之恩! 然皆小人也。 歲在戊寅, 我極不豫, 背我如棄弊屣, 溫與天祐, 率我甲士, 得與定社之列; 李茂者反間, 而亦與定社之列。 不顧君臣之大義, 惟利是求之人, 信之任之, 則大位誰得而不窺? 朝鮮之社稷, 其可久乎?” 指石璘、近而曰: “卿等今爲世名儒, 豈不知漢祖斬丁公, 以徇軍中, 而傳祚四百年乎? 國人皆以我爲恨其失大位而殺愛子, 故惡定社功臣, 然今予傳位於嫡長, 又立季子爲世子, 寧有所恨! 我不傳位, 則其將殺我而奪乎? 但以漢祖之心, 慮社稷萬世之計耳。 若茂等罪之釋之, 在汝君矣。” 遂取酒飮石璘等。 石璘等更不得一言而退。 臺省、刑曹, 復詣闕請允下臣等所上書, 上又不從。 郞舍等以不得言責, 皆上章辭職, 刑曹亦辭職, 上皆召令就職。


문하부에서 과전을 신고하여 넘겨받는 것을 규정대로 하기를 청하여 승인하다[편집]

○門下府請科田陳告遞受, 一依田制, 從之。 郞舍朴訔等言: “前朝之季, 紀綱陵夷, 田制大壞, 我太上王卽位之初, 立經陳紀, 正經界定田制, 以爲子孫萬世持守之法。 今殿下嗣服厥命, 當以太上之心爲心, 遵守勿失可也。 受科田者, 或犯罪或無後或科外餘田, 許令科田不足者, 新來從仕者, 陳告遞受, 已有成法, 故或有理合陳告之田, 給田司依例接狀, 將給公文也, 而往往撓法亂政之徒, 冒干特旨, 奪人已告之田, 以壞成法, 其不可一也。 人有依法陳告, 而殿下乃下特旨, 奪與他人, 是罔民而爭之也, 其不可二也。 且分田之法, 有司存焉。 有司謹守成法, 而殿下每下特旨, 以撓其法, 其不可三也。 願自今, 科田陳告遞受, 一依田制施行, 如有冒干內旨, 規奪他人陳告之田者, 以罔上壞法論罪, 以杜憸小撓亂之萌, 以固太上創垂之法, 幸甚。” 兪允, 但已施行事, 勿幷擧論。


권근·정탁·최유경 등의 관직을 바꾸고 문무관 3품이상에게 관교를 주다[편집]

○以權近爲參贊門下府事兼司憲府大司憲, 鄭擢爲政堂文學, 崔有慶爲三司右使, 李至爲藝文春秋館太學士, 吉再爲奉常博士。 復賜文武官三品已上官敎。


대 사면령을 반포하고 편민 사의 13개 조를 발표하다[편집]

○御正殿, 頒降宥旨:

王若曰, 父子之親, 天性之至, 苟居繼體之位, 當極尊崇之禮。 惟我太上王, 以盛德隆功, 承先世積累之仁, 肇有家國, 以開萬世之基。 顧以菲德, 祗服明訓, 纘膺景命, 永思持守之艱, 惟恐不克負荷, 夙夜兢惕, 罔知所措。 已嘗謹與臣僚, 奉上尊號, 用光盛美, 昭示來今, 爰命攸司, 載稽典禮, 謹備冊寶, 於七月初六日己巳, 加上尊號曰啓運神武太上王, 以表德業之盛, 以副天人之心。 於戲! 旣立尊榮之典, 宜推渙汗之恩。 自建文二年七月初六日昧爽已前, 除謀叛大逆、殺祖父母父母、妻妾殺夫、奴婢殺主、蠱毒魘魅、謀故殺人、强盜外, 其餘罪狀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咸宥除之。 所有便民事宜, 條列如左, 惟爾臣僚, 體予至懷。 一, 卽位之初, 頒降條畫, 謂於國體民生, 有所裨益, 中外官司, 視爲文具, 不盡心奉行, 實違共治之意。 京中司憲府、外方都觀察使, 嚴加考察, 其有奉行無遺, 灼有成效者, 具錄申聞, 以備擢用; 猥劣怠惰, 廢閣不行者, 痛懲其罪。 一, 己卯年以前各府州郡縣稅貢, 未滿本數當充者, 稱貸係官錢糧積年未還者, 耗損官物錢糧已曾追徵未滿本數者, 官府器皿破毁遺失未償者, 一皆蠲免, 義倉不在此限。 一, 凡有所犯人奴隷, 非其罪而被囚獄中, 致相染疾, 召怨傷和。 今後凡官府, 合囚奴隷, 止充徒役, 散置官府, 無令雜處重囚。 一, 凡民間負債, 其有貸者與者俱歿, 子孫只憑文契追徵者, 一皆痛禁。 一, 貧窮小民, 負債未還, 其有刦質子女, 役使積年, 或謀永以爲賤, 所在官司, 體察痛治。 一, 鰥寡孤獨老幼廢疾, 除有産業可以自養者外, 窮而不能自存者, 所在官司, 優加賑濟, 毋致失所。 一, 濱海之民, 幼弱子女, 被掠倭寇, 見放他州, 不能自還鄕里, 仍爲土人僕妾者, 所在官司, 就加覺察, 隨卽給引, 經由驛官, 廩給還本。 一, 婚嫁之禮, 要在及時。 其有良家之女, 或父母俱歿, 或貧乏無告, 年長失時者, 所在官司, 諭其族親, 使主婚事, 量宜助費, 以厚民生。 一, 窮乏人民, 其有父母在殯, 累年不克永葬者, 所在官司, 從宜助費, 剋日葬埋, 使之無憾。 一, 水陸軍官, 累有戰功, 未蒙職賞者, 錄其實效, 具名申聞。 一, 軍官歿於水陸征役者及奉使遠方隕命者, 錄其子孫敍用; 軍人戰亡者, 給復其家。 一, 外方敎授官、驛丞、鹽鐵場官, 積年不遷者, 仰都觀察使考其赴官年月, 所任勤慢, 呈報尙瑞司, 以憑黜陟, 如守令之例。 一, 在外品官、鄕吏, 有影占良民者, 限今年十月, 許令自首, 當使免罪。 過期不首, 爲人所告者, 坐以重罪。


장군들의 모임인 장군방을 혁파하다[편집]

○罷將軍房。 前朝舊制, 立將軍房, 有房主掌務之員, 有會坐回坐之禮。 其有新除將軍者, 則爲房主掌務者, 必考其族屬, 察其心行, 以行會坐回坐之禮, 然後新除者得行其任。 國初仍其制, 至是, 司謁李德時之子登, 拜將軍, 而房主朴東美, 掌務金成美以登係出內僚, 不行會坐之禮。 登妻, 乃太上王寵姬之女。 太上王聞之而怒, 上令憲府劾東美等, 遂罷其房。


사신을 동북면·서북면·풍해도에 관리를 나누어 보내 황충을 잡게 하다[편집]

○分遣使臣于東ㆍ西北面、豐海道, 捕蝗。


덕수궁에 드나들며 잡된 말을 하고 다닌 전 삼사 좌복야 이염과 전 판사 이덕시를 춘주와 이천현에 귀양보내다[편집]

○流前三司左僕射李恬于春州, 前判事李德時于利川縣。 恬與德時, 出入德壽宮, 好爲雜言。 司憲府聞之, 上疏請其欺君之罪, 上只流于外。


이행으로 계림윤을 삼다[편집]

○以李行爲雞林尹。


길재가 사직하고 돌아가다. 사신의 인물평[편집]

○吉再辭職而歸。 再仕辛朝爲門下注書, 歲己巳, 棄官歸善州, 奉養孀親, 鄕黨稱其孝。 世子在潛邸, 再嘗侍學于成均館。 一日, 世子與書筵官, 論遺逸之士, 乃曰: “吉再, 剛直人也。 我嘗同學, 不見久矣。” 正字田可植, 再同貫人也。 具言在家孝行之美, 世子喜, 下令三軍府移牒徵之。 再乘傳至京, 世子啓于上, 授奉常博士, 再不詣闕謝恩, 乃上書東宮曰:

所言,再於昔日, 得與邸下, 讀《詩》泮宮, 今之召臣, 不忘舊也。 然再於辛朝登科筮仕, 及王氏復位, 卽歸于鄕, 若將終身。 今者, 記舊徵召, 再欲上謁卽還, 從仕則非再志也。

世子曰: “子之乃綱常不易之道也, 義難奪志。 然召之者吾也, 官之者上也, 告辭於上可矣。” 再遂上書, 略曰:

臣本寒微, 仕於辛氏之朝, 擢第至門下注書。 臣聞女無二夫, 臣無二主。 乞放歸田里, 以遂臣不事二姓之志, 孝養老母, 以終餘年。

上覽而怪之曰: “此何人也?” 左右曰: “寒儒也。” 明日御經筵, 問權近曰: “吉再抗節不仕, 不識古有如此者, 何以處之?” 近對曰: “如是之人, 當請留之, 加以爵祿, 以勵後人, 請之而强去, 則不如使之自盡其心之爲愈也。 光武, 漢之賢主也, 而嚴光不仕。 士固有志, 不可奪也。” 上乃許歸本郡, 令復其家。

【史臣洪汝剛曰: “或以爲辛氏旣非正統, 注書亦非達官, 再宜仕於盛朝, 不須拘於小節。 愚謂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辛氏雖僞, 旣委質以爲臣, 注書雖微, 亦從仕而食祿, 安得以僞朝微官, 而虧吾臣子之分乎? 且節義, 天地之常經, 莫不受之於有生之初矣, 然其誘於功利, 淫於爵祿, 不能皆有以全之也。 辛氏之亡已久, 無子孫之可托矣。 再也能爲舊君, 守其節義, 等功名於浮雲, 視爵祿於弊屣, 若將終身於草野, 亦可謂忠烈之士矣。”】


이거이·이무·조영무·조온을 경외 종편하도록 하다[편집]

○命李居易、李茂、趙英茂、趙溫京外從便。 臺諫交章上言: “居易尙不悛改, 怨憤驕傲, 不宜從便。”

上令於近畿, 自願安置。


7月 21日[편집]

비바람에 나무가 뽑히다[편집]

○甲申/風雨拔木。


7月 25日[편집]

비가 내려 함주의 순릉이 무너지다[편집]

○戊子/雨。 咸州純陵崩。


문하부의 건의로 천례가 서울안에서 말 타고 다니는 것을 금하게 하다[편집]

○立賤隷騎馬之禁。 門下府郞舍上疏曰:

京都, 乃朝廷百官之所處, 禮樂文物之所在, 而四方之所取則者也。 前朝之季, 紀綱陵夷, 禮制先壞, 富賈豪商、公私賤隷之徒, 乘肥衣輕, 交錯於朝路, 朝廷百官之儀始卑, 尊卑貴賤之等不明, 式至于今, 其弊尙存, 良可惜也。 《易》曰: “上天下澤, 《履》, 君子以, 辨上下, 宅民志。” 伏惟特命有司, 別時散各品之儀表, 定工商賤隷之服色, 使尊卑貴賤之分, 秩然有序, 不相紊亂。 其工商賤隷牧竪樵童及孝服之人, 於京都內, 毋得乘馬騎牛, 如有犯令者, 所騎牛馬沒官, 決杖八十, 亦令朝士九品以上, 皆得捕獲, 毋或故縱, 其私奴僕所騎本主牛馬, 則止罰其奴, 不許沒官, 公私賤隷雖有職者, 毋得騎馬, 定爲恒式。 各殿差備內僚六品以上, 不在此限。

從之。


전에 평양성 쌓을 때의 죄를 물어 판삼사로 치사한 최영지를 해주에 귀양보내다[편집]

○流判三司致仕崔永沚于海州。 初左散騎常侍朴訔等上疏言: “判三司致仕崔永沚, 築平壤城, 發先代陵墓古塚之石四百九十四。 請令攸司, 收其職牒, 鞫問其罪, 依律典刑。” 憲府亦上言以爲: “世代雖異, 君臣一也。 崔永沚爲西北面都巡問使, 築平壤城, 掘先代君王陵墓之石, 有悖於人道。 乞下攸司, 收其職牒, 鞫問不敬之罪。” 上謂永沚本武人, 不識義理, 止流海州。


二年 八月[편집]

8月 1日[편집]

일본이 사신을 보내 방물과 감자, 매화를 각각 한 분씩 바치다[편집]

○〔癸巳〕/日本遣使來獻方物, 柑及梅花各一盆。


평양백 조준을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석방. 무고한 조박과 권진을 귀양보내다[편집]

○下平壤伯趙浚于巡軍獄, 旣而放之。 初, 慶尙道監司趙璞, 言於知陜州事權軫曰: “雞林府尹李居易, 與吾言曰: ‘吾悔信趙浚之言。’ 問曰: ‘何故?’ 居易曰: ‘浚當革私兵之時, 與我言: 「衛王室, 莫若兵强。」 予信之, 乃以不卽納牌記于三軍府, 獲罪, 以至今日。’” 軫拜諫議大夫, 以璞之言, 私自增益, 告于坐中。 於是, 憲臣權近、諫臣朴訔等, 交章上言浚與居易等之罪, 上曰: “浚豈有是言乎?” 留其狀。 近等更上書, 進闕固請, 於是下浚于獄, 命參贊門下府事李舒、巡軍萬戶李稷ㆍ尹抵ㆍ金承霔等推之。 浚以慷慨之性憤發, 但言: “臣無是言。” 涕泣而已。 知陜州事田時, 浚與居易之所信者也。 欲證浚等之罪, 遣吏捕之, 上欲令浚與居易、璞, 一處憑問。 近等請置各處鞫問, 上疑而怒曰: “豈有罪狀未著, 而遽加刑乎?” 令臺諫勿復言之, 卽命巡軍官吏, 執李居易、趙璞以來。 世子召抵曰: “卿知上之以卿爲巡軍萬戶乎?” 抵對曰: “臣本昏愚, 不習吏事。 今命臣以刑官之任, 罔知施措, 夙夜惶懼。” 世子曰: “卿本世族, 不拘小節, 不阿世態, 惟務寬平, 故命以刑官之任。” 以臺諫狀示之曰: “太上開國, 主上嗣位, 予以不肖爲世子, 以至今休, 皆浚之功也。 今忘前日之功, 不核虛實, 但信所司之狀鞫問, 則皇天上帝, 甚可畏也。 浚若有是言, 大有罪焉, 卿其往欽之。” 抵再拜而出。 右政丞閔霽密言於抵曰: “浚等欲謀害吾與崙, 而緣及世子。 今乃見囚, 不可不窮推也。” 臺省咸進闕庭, 更請遣委官于居易、璞之在處, 質問浚之所言, 上曰: “凡質問之事, 當置一處憑問。 豈可遣人以問!” 臺諫極爭, 命不視事, 各歸私第。 囚璞于巡軍問之, 璞之言, 與臺省疏意不同, 又囚軫問之, 軫之言, 亦與疏意異。 上大惡近等, 囚居易于巡軍, 與璞憑問。 居易曰: “吾不聞浚有是言也。” 璞面質曰: “君不言於雞林東軒乎?” 居易曰: “否。 君饋我二三杯, 然我心則異, 不醉也。 君在己卯, 貶于利川, 出爲慶尙道監司者, 以我父子故也。 吾與浚不改定社之盟。 浚雖有是言, 吾豈與君言乎?” 璞曰: “吾子愼言娶懷安公之女, 浚與之鞍馬, 吾出爲監司, 與之金帶。 然其心則向我不平。” 居易大言曰: “璞之言, 皆私恨也。 願諸公聞之。” 璞大有慙色。 放浚與居易, 各還其第, 貶璞于利川, 流軫于丑山島。


예문춘추관 태학사 이지를 명나라 서울로 보내 성절을 축하하게 하다[편집]

○遣藝文春秋館太學士李至, 如京師賀聖節。


전 전서 여칭과 사농시 경 강천주를 동북면에 보내 기민을 구제하게 하다[편집]

○遣前典書呂稱、司農卿姜天霔於東北面, 發倉賑飢。


8月 4日[편집]

무지개가 중천에 나타나다[편집]

○丙申/虹見中天。


경연에서 첨서삼군부사 이첨이 《통감강목》을 진강하다[편집]

○御經筵。 簽書三軍府事李詹, 進講《通鑑綱目》。 上問於詹曰: “予欲覽古人詩, 如何?” 詹曰: “可。”


최이·서유·맹사성·박습 등에게 관직을 주다[편집]

○崔迤兼大司憲, 徐愈、孟思誠爲左右散騎, 朴習、李垠爲左右諫議, 金九德爲中丞。 臺省刑曹皆左遷, 左散騎常侍朴訔爲忠州牧使, 中丞安省爲甫州事, 刑曹典書呂稱爲淸州牧使, 侍史田理爲金海府使, 雜端朴軒爲樂安郡事。


경상도 감사 전백영에게 궁시와 검갑을 하사하다[편집]

○賜慶尙道監司全伯英弓矢劍甲。


도승지 정구가 거듭 요청하여 최도원으로 하여금 역마를 타고 근친하게 하다[편집]

○都承旨鄭矩, 令崔道源乘馹覲親。 內侍右掌務崔道源之父, 在晋陽得疾, 道源求乘馹以去, 矩以啓, 上曰: “乃者, 尹夏以覲母病, 傳馹以去, 率妓橫行諸郡, 以犯憲綱。 自後朝士覲親者, 不許驛馬, 豈可偏給此人!” 矩再三請焉, 許之。


편문으로 나와 본궁에 가서 공사를 독촉하다[편집]

○出自便門, 至本宮督役。


경연에서 동지사 이첨이 고시(古詩)를 익힐 것을 권하며 두시 300수를 뽑아 올리다[편집]

○御經筵。 同知事李詹進曰: “頃上欲覽古詩。 爲人君者, 亦不可不習也。 昔漢高祖製《大風歌》, 武帝製《秋風詞》, 下及于隋煬帝, 亦好詞章。 然忌上人之才, 故殺薛道衡、王冑、鄭鼐。 抄《杜詩》百首, 蓋倣《詩》之三百篇也。 乞於經筵幷觀之。”


8月 14日[편집]

노루가 국자동에 들어와서 사람들이 때려 잡다[편집]

○丙午/獐入國子洞, 爲人所搏。


세자가 제릉에 배알하다[편집]

○世子謁齊陵。


문하부에서 상소하여 내재상을 혁파하기를 청하다[편집]

○門下府上疏, 請罷內宰相, 不允。 疏曰:

古之人君, 每當論事, 必因大臣而咨訪, 故嬖幸之臣, 不得以間之, 可爲後世之法也。 前朝之時, 主少國危, 權臣擅政, 其在闕內議事者, 謂之內宰樞, 凡所處置, 皆在掌握, 而都堂大臣不與聞焉, 殿下所親見也。 我太上王應天開國, 立經陳紀, 每與都堂大臣, 圖議政事, 而內相之名則未有也。 今殿下以兩府五六員, 置之於內, 以爲內相。 伏惟殿下鑑前朝之弊法, 遵太上之宏規, 革去內相, 垂法萬世。 其他宗親大小臣僚, 非有命召, 毋得擅入於內, 每坐正殿, 與世子都堂大臣, 講論治道。 如此則偏黨絶而公道明, 君臣合而政事修矣。

門下府又上疏, 請罷內相, 且請自今宗親臣僚, 非命召, 毋得擅入內, 以嚴宮禁, 兪允, 唯大小臣僚出入無禁。


8月 19日[편집]

부엉이가 수창궁 동마루에 와서 울다[편집]

○辛亥/鵂鶹來鳴壽昌宮屋脊。


8月 21日[편집]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 큰 물이 지고 바람이 크게 불다[편집]

○癸丑/慶尙、全羅、忠淸道大水大風。


까마귀떼가 덕나동 밤나무에 모이기 때문에 중에게 《금강경》을 읽게 하다[편집]

○群鴉集德那洞栗木, 邀僧一七, 令讀《金經》。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덕수궁에 나아가 헌수하고 매우 즐기다가 파하다[편집]

○上與世子詣德壽宮獻壽, 極歡而罷。 初太上王潛幸新菴寺, 世子親詣請還。 上及世子獻壽, 義安公和、左政丞成石璘、淸川伯李居仁、判承寧府事禹仁烈等, 皆以耆舊侍宴, 迭起爲壽。 酒酣, 太上王聯句云: “明月滿簾吾獨立。” 笑謂世子曰: “汝雖及第, 未易爲如此之句。” 又云: “山河依舊人何在?” 顧左右曰: “吾之此句, 有深意焉。” 上與世子起舞, 太上王召出寵妓巫峽兒, 與宴焉。 上賜表裏, 世子賜段一匹, 極歡而罷。


이튿날 임금과 세자가 덕수궁에 나아가 잔치를 베풀고 연구를 지어 창화하다[편집]

○翌日, 上與世子詣德壽宮設宴, 聯句唱和極歡。 太上王曰: “年雖七十心相應。” 上對曰: “夜已三更興不窮。” 成石璘、禹仁烈侍宴, 上起舞, 夜深乃罷。


부엉이 때문에 중에게 정전에서 《금강경》을 읽게 하다[편집]

○邀僧二七, 令讀《金經》於正殿, 以禳鵂鶹。


사헌부에서 방간을 먼 지방에 옮겨 두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司憲府請移置芳幹於遐方, 不允。


사헌부에서 방간에 대해 또 상서하여 극력 진달하였으나 따르지 않다[편집]

○司憲府又上書極陳, 不從。


동·서부 학당의 생도를 순천사·미륵사에 수용했으나 중들의 반대로 내보내다[편집]

○放東西部學堂生徒。 初, 設五部學堂, 未立黌舍, 故東部會學生於順天寺, 西部於(彌勤寺)〔彌勒寺〕。 兩寺僧以破染三寶啓之, 卽命罷學。


좌정승 성석린이 병으로 사면하다[편집]

○左政丞成石璘以疾辭。


태상왕이 신암사를 중창할 것을 명하다[편집]

○太上王命重創新菴寺。


연경궁을 태상전에 소속시키니, 태상왕이 기뻐하다[편집]

○上以延慶宮屬太上殿。 中官朴英文啓于太上殿, 太上喜, 賜英文馬一匹。


이달에 일본 준주 태수 원정이 말 2필을 바치고 잡혀 간 사람들을 돌려보내다[편집]

○是月, 日本駿州太守源定, 使人獻馬二匹, 發還被擄人。 博多城承天禪寺住持誾公, 使人獻禮物, 求《藏經》。 又慈雲禪院住持天眞, 使人亦獻禮物, 發回被擄人口。


二年 九月[편집]

9月 1日[편집]

대마도의 사미 영감이 사람을 시켜 말 6필을 바치다[편집]

○〔壬戌〕/對馬島沙彌靈鑑使人獻馬六匹。


임금이 북문으로 본궁에 몰래 나아가 공사를 감독하다[편집]

○出自北門, 潛幸本宮, 監督營繕。


양온동 안원의 집에 이어하다[편집]

○移御良醞洞安瑗第。


9月 8日[편집]

달이 건성을 범하다[편집]

○己巳/月犯建星。


성석린이 어머니가 늙었다고 사직하기를 비니 창녕백으로 봉하다[편집]

○成石璘以母老, 乞辭甚切。 以石璘封昌寧伯, 李居易判門下府事, 閔霽左政丞, 河崙右政丞, 禹仁烈判三司事, 李茂判三軍府事, 李舒判承寧府事, 趙英茂門下侍郞贊成事, 趙溫三司左使, 鄭矩大司憲, 朴錫命都承旨。


사헌부에서 녹봉 지급 문건에 착오를 일으킨 시사 신상을 탄핵하다[편집]

○憲司劾侍史申商。 摠制辛克禮子, 年十一歲。 拜功臣都監錄事受祿, 憲司以幼未稱職, 還徵其祿。 時, 商錯誤文簿故也。


유운·도흥 등을 불러 대궐 뜰에서 격구하다[편집]

○召柳雲、都興等, 擊毬于殿庭。


수창궁 후원에 기르던 사슴을 매도에 놓아주다[편집]

○放鹿于媒島。 嘗畜鹿于壽昌宮後苑, 至是放之。


문하부에서 궁궐에 남아있는 갑사를 모두 삼군부에 돌려보내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다[편집]

○門下府上疏, 請以甲士歸之三軍府, 從之。 疏曰:

殿下繼世守文, 期致太平。 頃以甲士送于三軍府, 而數十人猶守宮內, 帶佩凶器, 有乖儀仗之制。 伏望悉以甲士, 歸之三軍府, 以示守文之意。

兪允, 若有不豫色然。


문하부 건의로 원종 공신들의 시위패를 혁파하여 모두 삼군부에 보내다[편집]

○罷原從侍衛牌, 悉送于三軍府。 因門下府所啓也。


상당후 이저를 불러들이다[편집]

○召還上黨侯李佇。


이거이·이저·이무·조영무를 위해 후원 양청에 술을 베풀다[편집]

○置酒于後苑涼廳, 慰判門下李居易、上黨侯李佇、判三軍李茂、門下侍郞趙英茂也。 世子及義安公李和、完山侯李天祐、靑原侯(沈悰)〔沈淙〕、奉寧侯福根等皆侍宴。 史官金涉入侍, 上謂左承旨閔無疾曰: “彼何人歟?” 無疾曰: “史官也。” 都承旨朴錫命知上意, 目涉以出。 酒酣, 上起舞, 至夜乃罷。


배중륜에게 은대 한 개를 하사하다[편집]

○賜裵仲倫銀帶一腰。


일찍이 왜구에게 잡혀갔던 중국 사녀(士女) 20여 명을 요동에 돌려보내다[편집]

○送還中國士女二十餘名于遼東。 士女, 嘗爲倭所虜者也。


9月 16日[편집]

형혹성이 태미 상장을 범하다[편집]

○丁丑/熒惑犯太微上將。


문하부 건의로 방간 부자를 익주에 옮겨 안치하고 쌀과 콩 각각 1백 50석을 하사하다[편집]

○移置芳幹父子于益州, 仍賜米菽各百五十石。 門下府上疏曰:

芳幹信憸邪之言, 實獲僭亂之罪。 當置極刑, 但以殿下友愛之情, 得保首領, 然近在畿甸之內, 儻或煽亂, 則無及矣。 伏惟斷以大義, 移置遠地, 俾不出入, 則殿下有保全之德, 彼亦享安榮之福, 豈不美哉!

上命將軍朴淳移置。


제주의 백백 태자가 환자(宦者)를 보내 말 3필과 금가락지를 바치다[편집]

○濟州伯伯太子遣宦者, 獻馬三匹及金環。


9月 19日[편집]

남산의 돌이 벼락을 맞다[편집]

○庚辰/震男山石。


우인렬과 이문화를 명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로 말 30필을 바치고 인신과 고명을 청하다[편집]

○遣判三司事禹仁烈、簽書李文和, 如京師賀正, 獻馬三十匹, 兼請印誥。


경연에서 이첨이 상림원에서 점탈한 평민의 땅이 많다고 하니, 돌려주라고 하다[편집]

○御經筵。 李詹進曰: “古昔帝王, 以上林苑地, 賜人造家, 史臣美之。 今上林苑, 多奪平民所居之地, 與古者賜人之意異矣。” 上嘉納, 命還其奪占之地。


요동의 정료위 사람 12명이 도망하여 와서 명나라 정세가 심각함을 전하다[편집]

○定遼衛人十二名逃來, (人)乃言: “王室大亂, 燕王乘勝長驅。”


화장사의 베 15필과 의창의 소금값에 마추어 바꾸어 주도록 호조에 명하다[편집]

○命戶曹受華藏寺布十五匹, 給義鹽稱其數。


삼군부의 도사 현맹인과 무공들이 국학 생원들을 구타하였으나, 헌사에서도 탄핵하지 않다[편집]

○三軍都事玄孟仁, 歐國學生員。 孟仁將祭纛於講武堂, 武工等欲宿明倫堂, 生員等以爲: “非武工所處”, 欲黜之, 武工反唇相詰, 至以拳歐生員。 生員等具告於孟仁, 孟仁以爲: “武工於祭, 不可闕者。” 反以生員宋殷, 脫冠投地, 嗾武工結縛, 歐而曳之。 兼大司成李詹、大司成趙庸等, 坐視不愧。 三館諸儒, 具其本末, 告諸憲司, 大司憲鄭矩, 亦不欲劾孟仁。 博士琴柔詣庸家告之, 庸執手曰: “庸, 趙浚之所擧, 足下亦其門生也。 今浚被譴, 且世子掌三軍, 而孟仁爲其僚佐, 不可抗也。”


二年 冬十月[편집]

10月 1日[편집]

세자가 갑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호곶에서 매를 놓다[편집]

○〔壬辰〕/世子率甲士數百, 放鷹于壺串。


10月 3日[편집]

여우가 시좌궁 북쪽에서 울다[편집]

○甲午/狐鳴時坐宮北。


유운 등을 불러서 격구하다[편집]

○召柳雲等擊毬。


각도에 관리를 보내어 각처 절간의 노비를 수색하고 토호들을 적발케하다[편집]

○遣使各道, 推括各寺奴婢, 且詰諸州土豪。


경연에서 동지사 이첨과 유교·불교와 노자 및 신선도에 대해 문답하다[편집]

○御經筵。 問於同知事李詹曰: “老子與神仙之道, 可得聞歟?” 詹進曰: “臣昔以爲老與仙道無異。 今見《通鑑綱目》, 老子之道, 以虛無爲宗, 謂人生此世, 比之離家而行, 不拘生死遲速, 速還本處, 是任生死以反本爲貴。 仙以長生不老爲貴, 服餌求生, 不欲其死也。 釋道則有天堂地獄之說, 爲善者生天堂, 爲惡者墜地獄。 然人未見其果生天堂墜地獄也。” 上曰: “嘗聞儒道以爲: ‘人受陰陽二氣以生。’ 然則仙、老、釋之說, 與儒家孰是?” 詹曰: “吾道不在於杳冥昏默, 在乎事物上, 古之聖賢, 蓋嘗論之矣。 人受天地陰陽以生, 陰陽卽鬼神。 其生者神也, 其死者鬼也。 人之動靜呼吸, 日月盈虧, 草木開落, 莫非鬼神之理。” 上曰: “然則鬼神之理, 卽天地之理也。 人之死也, 其有精神乎? 且諺曰: ‘鬼神有降禍福與責取之說。’ 然乎?” 詹曰: “人之死也, 精氣未散, 則有責取之理。 然此非天地鬼神之正氣, 乃不正之氣也。” 上然之。


문하부에서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없애고 술 마시는 것을 금하기를 청하다[편집]

○門下府請去讒佞禁崇飮, 兪允。


평주 온천에 거둥하려 하니 낭사에서 폐단을 극력 진달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將幸平州溫井, 郞舍上疏, 極陳其弊, 不允。 上曰: “予有微疾, 爲浴而行, 非爲田也。 況四時之田, 古典所載, 予但一年一出耳。” 郞舍又上疏請止行幸。 其疏曰:

閱兵講武, 雖國家之常典, 畏天勤民, 實人主之大德。 當閒暇之時而不講武, 則武備弛; 當凶荒之時而不恤民, 則邦本危, 故善爲國者, 必審時之治亂、世之緩急而爲之。 今也禾穀不實, 民不聊生, 災怪屢興, 天之所以戒殿下者至矣。 彼道之民, 困於漕輓之致遠, 怨於收穫之失時, 必有疾首者矣。 伏惟姑停此行。

不允曰: “天災地怪, 予豈不戒! 但予有微疾, 不得已耳。”


10月 6日[편집]

우레하며 비가 내리다[편집]

○丁酉/雷雨。


몰래 화장사에 가서 새로 만든 석가 삼존과 오백 나한을 구경하다[편집]

○潛幸華藏寺。 以觀新造釋迦三尊、五百羅漢也。


10月 11日[편집]

우박이 내리다[편집]

○壬寅/雨雹。


태상왕의 탄일이므로 경내의 이죄 이하와 남은·정도전의 당여를 용서하다[편집]

○宥境內二罪以下及南誾、鄭道傳黨與。 以太上王誕日也。


온천에 거둥하려 하므로 세자가 먼저 황교들에 머물면서 승여를 기다리다[편집]

○將幸溫井, 世子先出, 次于黃橋野, 以待乘輿。


전부에 관한 법을 고치는 데 대한 불만으로 좌정승 민제가 병을 칭탁하여 사진하지 않다[편집]

○左政丞閔霽稱疾不仕。 先是, 右政丞河崙以爲: “我國田賦之法不均, 凡爲民戶, 或耕田多而服役者少, 或耕田少而服役者多。 自今以所耕多少, 定其賦役之數爲便。” 霽爭之曰: “法若是其苛, 民心離矣。 豈可行於今日乎?” 至是, 稱疾不仕。 崙令經歷李灌, 以請行是法啓, 事未施行, 霽歸咎於灌曰: “必待此人受罪, 然後出仕矣。”


평주 온천에 거둥하는 길에 금교에 머물다[편집]

○幸平州溫井, 次于金郊。


10月 14日[편집]

큰 비가 내리고 천둥하고 번개가 치다[편집]

○乙巳/大雨震電。


여우가 시좌궁 북쪽에서 울다[편집]

○狐鳴時坐宮北。


10月 15日[편집]

우박이 내리고 우레와 번개가 치다[편집]

○丙午/雨雹雷電。


온천에서 해주로 거둥하려 하니 문하부 등에서 이를 말렸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自溫井將幸海州, 門下府上疏止之, 不允。 疏曰:

殿下將幸平州溫井, 臣等因天地之變、民庶之苦, 再上封章, 請停是行, 殿下敎曰: “寡人本有微疾, 全爲沐浴治病, 非爲遊田。” 臣等以爲信然, 及其命駕, 歷遍山野, 不擇夷險, 馳射禽獸。 爲人上者, 患在欺罔其下。 又念殿下一身, 宗社之所依, 臣民之所仰。 所係非輕, 不可不自愼重, 而況天地屢示變怪, 其所以警殿下者深矣。 其或猛獸奔突於隘狹, 御馬顚蹶於坑坎, 則其危大矣。 伏望慮一身所係之重, 體皇天示變之意, 整頓車駕, 直行道路, 不復身親馳射, 實宗社臣民之福也。

司憲府亦上疏曰:

《詩》云: “敬天之怒, 無敢馳驅。” 又曰: “昊天曰明, 及爾游衍。” 聖人垂訓之意嚴矣。 古之帝王, 每遇災變, 側身修行, 所以敬天之怒, 而不敢逸也。 今歲災變之多, 念之可爲寒心。 誠宜守靜修德, 以答天意, 顧乃躬自遊獵, 馳射禽獸, 無所不至, 其敬天修省之意如何? 且山林坑坎馳驅之際, 設使馬失步驟, 則竊爲殿下危之。 伏望上念皇天之讉告, 下慮宗社之所係, 愼重厥躬, 毋爲自輕, 勑整法駕, 率行坦道, 以慰天人之心。

上之將幸海州也, 禮曹正郞鄭井、成均直講金時用, 上言不可西狩, 臺省亦皆進諫, 皆不允。


해주의 쌀과 콩을 운반하여 시위 군사의 식량과 말먹이로 주다[편집]

○運海州米菽, 給侍衛軍士人馬料。


태상왕이 이방석·이제 등을 위해 신암사에서 크게 불사를 베풀다[편집]

○太上王爲芳碩、李濟等, 大設佛事於神巖寺, 德妃與貞嬪詣其寺觀之。 神巖寺幹事僧暴死, 太上王不悅而還。


임금이 해주에서 환궁하여 곧 태상전에 나아가다[편집]

○上自海州還宮, 卽詣太上殿。


태상왕이 신도에 거둥하니 임금이 지송하고자 했으나 미치지 못하고 돌아오다[편집]

○太上王幸新都, 上欲祗送于郊, 追至于古東大門, 不及而還。 太上王以夜四鼓動駕, 世子追及於碧蹄驛。 將還, 大將軍朴淳進曰: “太上王雖不使邸下從行, 至此遽還, 非臣子之心也。 淳聞太上王自新都, 將幸臺山。 若邸下從行, 則太上必不果而止, 否則跋履山川, 遠行臺山, 後必有悔。” 世子不聽。 太上王之行, 督出驛馬百三十匹, 驛吏未充其數, 頗有逃匿者。


유구 국왕 찰도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또 왕세자에게 예물을 바치다[편집]

○琉球國王察度, 遣使奉箋獻方物, 又獻禮物於王世子。 其國世子武寧, 亦於王世子獻禮物。 使者別以方物, 遺左右政丞閔霽、河崙, 皆不受。 傳敎曰: “琉球若以不義而來獻, 則予及世子, 亦皆不受, 彼遠涉而來, 推誠致聘。 今卿等郤之, 則彼必謂以何心而不受。 受而厚報可也。” 左右政丞對曰: “不可受於私第, 欲坐都堂, 受而分諸左右。 今命臣以受, 遂受焉。”


10月 24日[편집]

비가 크게 내리다[편집]

○乙卯/大雨。


태상왕이 정릉에 이르러 정근 법석을 베풀다. 오대산·낙산사 행차계획을 아무도 모르다[편집]

○太上王至貞陵, 設精勤法席。 太上王脫衣施佛, 將幸臺山洛山, 國人不知乘輿所指。 郞舍上疏曰: “草創之主, 子孫之所宜法也。 今因佛事遠行于外, 實非貽謀之道。 以國君之父, 出入無時, 國人不知所之, 非體國子民之道也。 請遣首相及二三勳老, 道達國人之情, 請還車駕, 保安聖體, 以慰臣民之望。” 上曰: “太上之志, 已定矣。 雖使宰相請之, 何益!”


10月 25日[편집]

우박이 내리다. 우레와 번개가 치고 무지개가 보이다[편집]

○丙辰/雨雹雷電虹見。


10月 26日[편집]

짙은 안개가 끼고 우레와 번개가 치다[편집]

○丁巳/沈霧雷電。


중 설오를 보내어 태상왕의 환가를 청하였으나 끝내 오대산으로 행차하다[편집]

○遣法王都僧統雪悟於新都, 請太上還。 雪悟不得請, 侍詣臺山。


의정부에서 상소하여, 방간의 난과 관련 신상필벌의 법을 정하여 공포하다[편집]

○立賞功罰罪之法。 議政府上疏以爲:

賞功罰罪, 實爲國家之大典。 苟或失當, 無以勸懲。 往者, 芳幹陰結黨與, 謀害骨肉, 幾傾宗社, 禍在不測。 同知摠制李來, 徇義忘私, 首告其謀, 以致骨肉保全, 宗社載安, 其功重大。 宜以功臣賜號, 封君世襲, 賜田一百結、奴婢二十口, 用勸後人。 朴苞首謀讒構, 以生禍根。 雖有前功, 不足揜罪, 得免夷族, 其亦幸矣。 追削其爵, 錮其子孫, 功臣田民沒官, 以懲後人。 今後儻有如芳幹及朴苞者, 則知情首告者, 不論職秩高下, 賞依李來之例。 告者, 賤人則免賤許通, 直拜將軍, 犯人家産田民, 一皆賞給。 知情不首者, 不分首從, 竝置極刑, 父母兄弟妻子, 亦皆隨坐, 立爲定制, 以爲勸懲之門, 以杜禍亂之萌。

許之, 遂榜示于朝。


二年 十一月[편집]

11月 1日[편집]

방간의 난에 공이 있는 단양백 우현보에게 전지 70결을 하사하다[편집]

○〔辛酉〕/命賜田七十結于丹陽伯禹玄寶。 初芳幹謀作亂, 李來知之, 言於玄寶, 傳告于世子, 世子轉聞于上, 得以備患, 故有是命。


사헌부에서 노비 변정 도감의 일로 지제교 안노생·김첨·정정을 탄핵하다[편집]

○司憲府劾知製敎安魯生、金瞻、鄭井。 初魯生等以口傳, 仕於奴婢辨定都監, 視事數日。 魯生等上言以爲: “載稽古典, 本院侍從之職, 掌詞命備顧問而已, 未嘗差任於吏守雜務。 前朝之季, 法制廢弛, 苟有新設都監, 每以詞臣兼之, 刀筆吏事, 靡所不爲。 今我國家, 設官分職, 一遵古制, 惟此一事, 尙循舊習, 非令典也。 伏望令臣等本職之外, 不許口傳吏務, 以復古制。” 上允。 司憲府以爲: “魯生等曾知差任吏務之不可, 不卽請辭, 仕於都監, 見其事冗, 乃欲規免, 上疏受判。” 遂劾之。


삼사 우사 이직을 대산에 보내 태상왕의 기거를 문안하다[편집]

○遣三司右使李稷詣臺山, 敬問太上起居。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성절을 하례하다[편집]

○上率百官, 賀聖節。


참판삼군부사 최운해를 음죽, 예문관 학사 송제대를 배주에 귀양보내다[편집]

○流參判三軍府事崔雲海于陰竹, 藝文館學士宋齊岱于白州。 初雲海及齊岱, 自南京來, 宿瑞原郡, 郡守朴希茂, 不食根隨人, 雲海等怒, 歐希茂, 希茂卽告憲府。 憲府上書請罪以爲: “雲海、齊岱擅打守令, 而齊岱則猶知其不可, 終自禁止, 隨其輕重罪之。” 罷雲海職, 宥齊岱。 門下府以大司憲鄭矩、中丞金九德、侍史安騰、雜端李季拱, 論請雲海、齊岱等罪狀不公, 劾之, 遂請罪, 上曰: “前者, 憲司論二人罪狀, 齊岱稍輕, 故只罷雲海職。” 於是, 郞舍等劾矩等曲法不正之罪。 齊岱, 左政丞閔霽妻兄也。 詣闕上言: “雲海、齊岱同議, 歐打守令, 其罪一也, 今憲司鄭矩等, 論請其罪, 曲分輕重, 意實不公。 臣等是以劾憲司員矣。 願將雲海等依律斷罪。” 上乃流之。 世子聞之, 歎曰: “郞舍有人矣, 此事甚正大。 齊岱於予姻親, 左政丞妻兄。 憲司以此輕其罪, 非也。 雲海, 勇將也。 如有不虞, 當以禦侮, 然今貶外, 豈可輕宥! 如齊岱者, 雖竄海島, 不足惜也。”


11月 9日[편집]

햇무리가 지다[편집]

○己巳/日珥。


11月 10日[편집]

안개가 끼다[편집]

○庚午/霧。


11月 11日[편집]

임금이 왕세자에게 선위하다. 선위하는 교서[편집]

○辛未/上禪位于王世子。 判三軍府事李茂奉敎書, 都承旨朴錫命奉國寶, 詣仁壽府上焉, 世子涕泣不受。 上傳旨世子曰: “予自幼好馳馬執弓, 未嘗學問, 卽位以來, 澤不及民, 災變荐至。 予雖兢惕, 末如之何。 世子自幼好學達理, 大有功德, 宜其代予。” 世子不獲已受之。 其敎書曰:

恭惟祖宗, 仁厚積德, 以集景命。 逮我神武太上王之肇興也, 王世子明炳幾先, 灼知天命, 首唱大義, 以建鴻業, 則我朝鮮開國, 惟世子之功是多, 故當初建儲之議, 物望咸歸。 不期權姦貪立幼孼, 將傾宗社, 天誘其衷, 建策戡定, 以安宗社, 則我朝鮮之再造, 亦惟世子之功是賴。 國於爾時, 已爲世子之有, 乃執沖謙, 申啓太上王, 謂予不穀居嫡之長, 俾命以位。 予辭不獲, 黽勉卽政, 于玆三年, 天意未允, 人心未孚, 蝗旱爲災, 妖孼荐至。 良由寡昧非德之致, 慄慄危懼, 俯仰有怍 矧予素纏風疾, 眩於萬機, 勞神應務, 恐致彌留, 思釋重負, 以付有德, 庶可以上答天心, 下慰輿望。 王世子, 稟剛明之德, 挺勇智之資。 仁義秉乎生知, 孝悌本乎至誠。 學問精於義理, 英謀合於變通。 固睿哲之離倫, 乃謙恭之彌謹。 早以濟世安民之量, 克成撥亂反正之功。 謳歌之所歸, 宗社之所賴。 惟賢惟德, 宜承大統, 爰命世子, 傳卽王位。 予將退歸私第, 優游怡養, 以保期頣。 於戲! 天人之情, 必付於有德; 宗社之統, 當傳於至親。 故世及以相承, 實古今之通義。 咨爾宗親耆老大小臣僚! 咸體予懷, 永保惟新之治。

參贊門下權近之製也。 遣左承旨李原, 告太上王以禪位之意, 太上王曰: “爲之不得, 不爲亦不得。 今已禪位, 復何言哉!”


백관이 세자전에 나가서 하례를 행하니 받지 않다[편집]

○百官詣世子殿行賀禮, 不受。


11月 12日[편집]

의정부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세자가 청정하기를 청하다[편집]

○壬申/議政府率百官請世子聽政。


11月 13日[편집]

세자가 수창궁에서 즉위하고 사면령을 반포하다[편집]

○癸酉/世子詣闕, 具朝服受命。 御輦至壽昌宮卽位, 受百官朝賀, 頒宥旨:

王若曰, 惟我啓運神武太上王承祖宗之積德, 得天人之協贊, 膺受景命, 奄有東方。 盛德神功, 宏規遠略, 以衍我朝鮮億萬世(無彊)〔無疆〕之祚, 而我上王, 以嫡以長, 祗承嚴命, 傳卽寶位, 勵精致治, 于玆三年。 頃者, 以無嫡嗣, 宜預建儲, 乃謂小子, 母弟之親, 且於開國定社之際, 與有微效, 冊爲世子, 付以監撫之任, 尙懼不堪, 每懷兢惕。 何圖今月十一日, 忽降敎旨, 乃命以位? 讓至再三, 成命莫回, 已於十三日癸酉, 卽位於壽昌宮。 顧惟眇末, 膺受大任, 慄慄危懼, 若涉淵(水)〔氷〕。 尙賴宗親宰輔、大小臣僚, 各虔爾心, 勉輔台德, 以匡不逮。 屬玆膺命之初, 宜布寬恩之典, 可宥竟內。 自建文二年十一月十三日昧爽以前, 除常赦所不原外,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咸宥除之, 敢以宥旨前事, 相告言者, 以其罪罪之。 於戲! 天地之德, 莫大於生物; 王者之德, 莫大於惠民。 位天人之兩間, 欲俯仰之無怍。 曰敬曰仁, 畏天勤民, 勉循玆道, 以克負荷。 惟爾臣民, 體予至懷。


주상을 높여 상왕이라 하고, 상왕의 거처를 공안부, 중궁의 거처를 인녕부라 하다[편집]

○尊上爲上王, 立府曰恭安, 中宮府曰仁寧。 以閔霽爲驪興伯, 金士衡判門下府事, 李居易門下左政丞, 趙璞參贊門下府事, 鄭矩大司憲, 李伯剛淸平君, 金需判恭安府事, 李來藝文學士, 孟思誠左散騎, 金九德中丞。 夜二鼓, 還于楸洞本宮。


각도의 관찰사·절제사·수령이 서울에 와서 진하하지 못하게 하다[편집]

○令各道觀察使、節制使、守令等, 毋得赴京進賀。


인왕불을 내원당에 옮겨 안치하다[편집]

○移置仁王佛於內願堂。 仁王佛, 宦官等願佛也, 留置宮中久矣。 上卽位, 宦官等欲進其佛, 不納, 置于內願堂。


첨서삼군부사 이문화를 명나라 서울에 보내 공마를 바치다[편집]

○遣簽書三軍府事李文和, 如京師獻貢馬。


여러 신하에게 아일마다 정사의 득실과 민생의 이해를 직접 계달하게 하다[편집]

○敎群臣, 每於衙日, 政事得失, 民生利害, 皆直啓達。


유사에 명하여 관복을 일체 비단으로 짓지말고 명주나 베를 쓰게 하다[편집]

○命攸司所服之衣, 一除綾段, 皆用紬布。 上曰: “凡進衣裳, 必待予命, 勿令無時擅進。”


맹사성 등이 매일 경연 열고 인재를 공평히 등용할 것 등 5개 조목을 상언하다[편집]

○門下府郞舍孟思誠等以五事上言, 兪允。

一, 君心, 出治之源也。 心正, 則萬事隨以正, 心不正, 則衆欲得以肆。 然則有天下國家者, 可不思所以正其心乎? 萬機之治, 兆民之安, 莫非此心之所爲也。 故帝堯之德, 本於欽明, 而克致時雍之盛; 文王之德, 原於敬止, 而能成泰和之治。 臣等伏見, 殿下在東宮, 開書筵, 講《大學衍義》, 其於聖學, 已有緝熙之功。 伏惟殿下, 日御經筵, 講論道義, 益加存養省察之效, 則殿下之心, 光明正大, 事理之來, 是非不謬, 用舍之際, 賢愚不混, 嗜欲無自而撓, 讒諂無自而進。 然後朝廷百官, 莫敢不正, 而可以致太平之治也。 伏惟殿下宜潛心焉。 一, 人才, 致治之具也。 自古治亂之迹, 常必由之。 前朝之季, 權臣擅政, 視名器爲私物, 用舍顚倒, 士風委靡, 遂至於亡。 我朝應天開國, 一新法制, 用舍不可謂不當, 士風不可謂不美。 然而餘風未殄, 習以爲常, 廉恥之道不立, 奔競之風尙存, 士大夫不以趨事赴功爲意, 以阿意取媚爲事, 執政大臣亦以之而進退, 此實前朝之弊政也。 願自今, 凡於除拜之際, 自宰相至六品, 各擧所知, 錄其行實而公薦之, 尙瑞司考其薦之多少, 以補中外之職, 而阿附權貴者, 斥而不用, 亦令憲司糾察痛治, 其以私單子, 亂雜干請者, 尙瑞司以其單子, 悉送憲司, 以憑考劾。 如此則用舍當, 而士風正矣。 一, 宗親皆祖宗之裔, 不可與常人混也。 前朝盛時, 宗親儀衛, 皆有定制, 出入起居, 不敢輕擧, 所以示尊榮而別於群臣也。 今也以宗親之貴, 乘匹馬而行, 興居無節, 混於常人, 是豈殿下敦睦宗族, 同享富貴之義哉! 願令禮官, 參酌定制, 非有命召, 不敢輕出, 以示尊榮。 一, 侍衛陪從, 必擇正人, 所以杜干謁逢迎之弊也。 前朝之制, 司謁司鑰奉書局, 以內竪充之, 皆令給事宮中, 闒茸之徒, 不自謹愼, 肆行姦詭, 至有竊其宮內所需之費。 且微賤之徒, 豈可使親近於左右? 願自今, 將司謁司鑰奉書之官, 階爲七品, 以內侍別監廉謹端方者, 俾充其任, 則左右前後, 罔非正人, 宮禁淸矣。 一, 古者, 中丞一人, 每月繞行宮垣, 所以使姦倖知畏, 而嚴內外之分也。 願倣此制, 令監察一員, 每日輪番, 繞行宮禁, 凡有干謁之徒, 亂雜出入者, 盜竊宮內所需者, 悉皆糾察, 以嚴宮禁。

上許疏內首二條施行。


정부와 예조에 귀신과 불사의 일을 없애도록 의논하게 하다[편집]

○命政府及禮曹, 議除神佛之事。 上曰: “神佛之事, 我不敢知, 然其無驗, 亦甚明白, 有何益哉! 顧我太上王及上王, 皆崇信之, 雖不能盡革, 其參酌可除者以聞。”


사헌부에서 치도에 관한 11조목을 담은 상소를 올리니 윤허하다[편집]

○司憲府上疏十一條, 上允。 目曰敦孝悌、納(諫靜)〔諫諍〕、立紀綱、明賞罰、節財用、戒游畋、進忠直、去讒佞、崇儉素、重守令、毋輕宥, 辭意切至。


상왕이 세자에게 전위한 것을 첨서삼군부사 이첨을 명나라에 보내 알리다[편집]

○上王以傳位世子, 遣簽書三軍府事李詹, 如京師奏聞。


태상왕이 오대산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각사 1원씩 거느리고 장단의 마천에 가서 맞이하다[편집]

○太上王至自臺山, 上率各司一員, 幸長湍麻川以迎。 車駕至, 上詣幄次以見, 設享。 宗親及大臣侍宴, 迭起爲壽, 太上王懽甚, 夜分乃罷。 太上王夜五鼓動駕, 昧爽入松京, 上亦還京, 詣太上殿省候。 先是, 太上王常欲還都漢陽, 至是, 謂上曰: “汝兄欲還漢陽, 以慰我心, 其志已定, 汝能體予心乎?” 上對曰: “予何敢不從命乎!” 太上王賜酒。


단양백 우현보의 졸기[편집]

○丹陽伯禹玄寶卒。 字原功, 忠淸丹陽人。 至正乙未, 中第入翰林, 自是歷揚淸要, 轉至門下右侍中。 歲癸亥, 以門下贊成事知貢擧, 時上登丙科第七。 歲壬申, 謫在雞林, 戊寅, 召還。 己卯, 授丹陽伯, 明年庚辰, 芳幹構亂, 門人李來知之, 以告玄寶, 玄寶卽遣子洪富于上之潛邸, 密告事機, 上得預備, 以定禍亂, 賜以推誠補祚功臣之號。 至是以病卒, 年六十八。 訃聞, 輟朝三日, 遣中官賜祭致賻, 及葬, 命用上等例。 諡忠靖。 子洪壽、洪富、洪康、洪得、洪命。


경연에서 《대학연의》를 잘 강의한 권근에게 음식을 대접하다[편집]

○御經筵。 知事權近進講《大學衍義》, 上講問甚詳。 近能辨析微旨, 上喜, 講畢饋之。


문하부 평리 박자안을 명나라에 보내 임금이 습위한 것을 알리다[편집]

○上以襲位, 遣門下評理朴子安, 如京師奏聞。


덕수궁에 나아가 문안하다[편집]

○上詣德壽宮問安。


의정부에서 이내로 좌명 공신을 삼도록 청하다[편집]

○議政府請以李來爲佐命功臣。


상의찬성사 강시가 졸하다[편집]

○商議贊成事姜蓍卒。 贈諡恭穆。


동짓날이므로 수창궁에 거둥하여 하례를 행하고 백관의 조하를 받다[편집]

○至日, 上率群臣幸壽昌宮, 服袞冕行賀禮, 又受百官朝賀。 各道觀察使節制使獻方物。


남이 훔친 소를 잡아 연회한 이조 의랑 윤목을 대흥에 귀양보내다[편집]

○流吏曹議郞尹穆于大興。 初穆爲辨定都監副使, 同僚有被劾者, 都監欲備酒肉以慰之。 令史告穆曰: “肉未易得也。 請買牛以宰。” 穆許之, 乃人之所竊牛也。 被竊者以告, 憲司劾而流之。


개국 공신과 정사 공신이 상왕전에 헌수하고 이튿날 주상전에 헌수하다[편집]

○開國及定社功臣, 獻壽于上王殿, 翼日, 獻壽于主上殿。


二年 十二月[편집]

12月 1日[편집]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상왕전에 나아가 옥책과 금보를 올리고 헌수하다[편집]

○〔辛卯〕/上率百官詣上王殿, 上冊寶, 仍獻壽。 其冊曰:

德敦親愛, 式著克讓之光; 禮合尊崇, 益虔强名之道。 玆遵彝典, 庸獻徽稱。 恭惟性稟溫文, 心全孝友。 承太上而卽政, 克綏厥猷; 保小子而盡仁, 乃命以位。 顧忝傳歸之緖, 惟懷報謝之悰。 臣不勝大願, 謹上尊號曰仁文恭睿上王。 伏惟殿下, 樂道優游, 凝神怡養, 俯諒由衷之願, 永膺多祉之祺。

太妃冊曰:

保佑恩隆, 母儀斯著。 尊崇禮備, 子道是殫。 庸擧彝章, 庶伸誠孝。 恭惟德妃殿下, 柔嘉稟性, 恭儉存心。 維德之行, 夙彰治內之美; 因心則友, 克篤展親之仁。 實賴慈庥, 獲叨洪緖。 欲表難名之德, 宜加歸美之稱。 臣不勝大願, 謹奉冊寶, 上尊號曰順德王太妃。 伏惟殿下, 勉循歡情, 誕膺顯號, 儷至人而多壽, 與一國而同休。

上王坐正殿受賀, 賜封執事官政丞李居易ㆍ河崙各馬一匹、段絹各一匹, 贊成事趙英茂、判三軍府事李茂、三司右僕射李稷與趙璞、趙珍、尹抵、金若采、尹子當, 皆賜段絹各一匹。 上獻壽在內, 公侯及政丞李居易等侍宴, 君臣皆起舞, 極懽而罷。


궁궐에 숙직하면서 기생을 불러들이고 비판지를 내준 이조 좌랑 이승조를 귀양보내다[편집]

○流吏曹佐郞李承祚。 承祚入直本曹, 招致上妓, 擅發批判紙以給, 議郞鄭渾等, 具狀移文憲司, 請罪流之。 承祚, 茂之子也。


갑사 2천 명을 다시 세워, 한번에 천명씩 각위에 보충하여 매년 교대하게 하다[편집]

○復立甲士二千, 一千充諸衛之職, 一年相遞爲式。


문하부의 상소로 분경을 금하지 않은 대사헌 정구, 중승 김구덕 등을 파직하다[편집]

○罷大司憲鄭矩、中丞金九德等職。 郞舍徐愈等上疏, 請大司憲鄭矩等罪曰:

人主作法於上, 人臣守法於下, 然後紀綱不紊, 而上下相安。 伏見前朝之季, 政在權臣, 奔競成風, 用舍顚倒。 至于盛朝, 民風士習, 猶未頓革。 臣等於卽位之初, 上疏請令憲司, 禁斷奔競, 以正士風, 卽蒙兪允, 已移文於憲司矣。 今也宰相百執事, 公然奔走, 聚會權門, 大司憲鄭矩、中丞金九德、侍史安騰、雜端李季拱等, 不卽禁止。 是將使奔競益熾, 權柄移於下也。 矩等曾不是慮, 不遵成法, 其廢閣敎旨, 罪莫大焉。 願將矩等, 收其職牒, 遠竄于外, 擇忠讜剛直不屈於勢者, 俾充憲司, 以振紀綱。

上謂左右曰: “前日省郞請鄭矩等罪, 予只令罷職, 更思之, 憲司之不奉職審矣。 門下府旣受敎移文, 則爲憲司計者, 當速出令, 禁其奔競, 稽留未行, 其受罪宜矣。 凡事虛心觀之, 可知曲直。 省郞所啓, 言順理正, 不可不聽。”


순자비를 내려 김약채를 대사헌으로, 전순을 중승으로, 권희달을 대장군으로 삼다[편집]

○下循資批, 以金若采爲大司憲, 全順中丞, 權希達爲大將軍。 初, 希達扈駕長湍, 以私憤歐打同僚司禁一人, 憲司上章請罪, 命囚希達於巡軍, 至是宥之, 改授大將軍。


사헌부와 문하부에서 번갈아 상소하여 권희달을 귀양보내기를 청했으나 파직만 시키다[편집]

○司憲府大司憲金若采等上疏曰:

頃者, 權希達頑暴犯法, 本府遣吏以守, 希達於中夜, 被甲執兵, 打吏逃出。 本府上書請罪, 殿下命囚巡軍, 臣等謂殿下必痛懲其罪, 今乃改授大將軍。 臣等竊恐橫亂之臣, 無所懲矣。 伏望明正其罪, 竄逐于外。

特原之曰: “冬月繫獄, 今已十七日, 足以懲矣。 更勿擧論。” 憲府復上疏申請希達之罪, 當竄逐于外。 門下府亦上言:

賞罰, 政之大柄。 賞而不濫, 罰而不僭, 然後人得而勸懲, 此實人主之所當謹也。 頃者, 大將軍權希達, 狂暴犯法, 被甲執兵, 歐打憲司書吏。 憲司上書請罪, 殿下命囚巡軍, 臣等以爲殿下剛明之量, 必明正其罪, 以懲其惡。 伏覩今月十一日批, 以希達仍授大將軍, 使得罪在獄者, 反蒙爵賞, 臣等竊恐賞罰之法, 因此而濫矣。 希達恣行狂暴, 擅打司禁, 已爲大惡。 況當憲司守直, 歐打書吏, 被甲逃出? 未知希達以何心, 而至此極也。 請下憲司, 收其爵牒, 按律科罪。

疏上, 皆不允。

門下府再上疏曰:

希達狂暴犯法之事, 上章請罪, 殿下以十七日囚禁, 足以懲戒, 毋得擧論。 臣等惶恐隕越, 再瀆天聰。 臣等竊見, 《書》曰: “眚災肆赦, 怙終賊刑。” 此聖人所以垂戒後世之大訓也。 今希達擅打司禁, 又於守直之際, 被甲執兵, 歐打憲司之吏, 逃出橫行, 用意自恣, 不畏邦憲, 是怙終之甚者也。 豈以久囚懲戒, 爲足免哉! 況當卽位之初, 誠宜信賞必罰, 以定民志。 不可以一人, 廢萬世不易之大法也。 殿下若於希達, 屈法伸恩, 使免其罪, 臣等竊恐橫亂之徒, 將接踵而起矣。 伏望將希達, 特下攸司, 收其職牒, 按律科罪, 以正邦憲。

司憲府復上疏曰:

臣等聞, 法猶規矩, 爲天下國家者, 所共倚賴。 古先哲王, 固守三尺, 良以此也。 臣等以爲希達, 不惟縱逸, 而埋沒所司, 刦掠巷婦, 恣淫無度, 歐撻其妻, 陵慢其姑, 是其常事, 實乖人倫。 雖有呵禁之愎, 直宿之勞, 何足惜哉! 殿下寬宥之仁, 於希達則幸矣, 其乃人主設官立法之義何? 願殿下, 卽將希達, 竄逐于外, 以遂人臣爲殿下正紀綱明賞罰之望。 賞罰不明, 則紀綱不立, 而風俗不美矣。

上皆覽之, 但罷其職。


재능 있는 군사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품계가 높은데 낮은 관직을 준 시초[편집]

○除軍士之有才者, 或因前職三品而授實職中郞將, 或四品而實職郞將, 其他別將散員皆然。 階高而授卑職, 自此始。


하윤이 인재를 천거하는 데 전단하는 것을 이거이가 미워하다[편집]

○左政丞李居易、右政丞河崙等, 皆以判尙瑞司事在政房。 崙薦擧賢良, 居易惡其專, 退謂子佇曰: “薦人大事, 崙不與我議, 處之如何?” 佇曰: “宜啓於上。” 居易曰: “豈可爭之!”


경연에서 환관이 정치에 참여하는 폐해에 대해 말하다[편집]

○御經筵, 讀《大學衍義》。 至趙高擅權曰: “宦官之設, 本爲使令於前也。 擧止習熟而已, 何可授以國柄乎?” 承旨朴信進曰: “古今人主, 豈不知其不可授以權柄也? 然宦官朝暮侍側, 專以阿諛苟容爲事, 人君若不能明察, 則必駸駸然墮於其術矣。 是故人君, 當以防微杜漸爲急。” 召內史李擔傳旨曰: “每當經筵, 諫官一人入侍, 如有過失, 直言不諱, 以輔台德。”


12月 18日[편집]

달이 헌원성을 범하다[편집]

○戊申/月犯軒轅。


경연에서 기양에 대해 경연관과 논하다[편집]

○御經筵, 左散騎李復始入侍。 知經筵事成石璘, 進講《大學衍義》, 上曰: “人君致天災地怪, 便設祈禳, 於義如何?” 經筵官皆曰: “祈禳不可廢也。” 上曰: “予聞人事正於下, 則天氣順於上, 人事有不順, 則天氣亦從而有不順者矣。” 上又問曰: “昭格殿醮星之事, 靈異屢著, 不可忽也, 其餘淫祀, 去之如何?” 經筵官等對曰: “天子諸侯士庶人, 各有所祭之神。 天子然後祭天地, 諸侯然後祭山川。 今我國俗, 雖庶人亦皆祭山川, 禮當禁之。” 上曰: “今俗尙神, 而皆以爲非神之陰助, 無以安其生也。 若下禁令, 民不悅服, 反有怨咨。” 應敎金瞻對曰: “因古制立里社之法, 使民皆得祀焉, 則民皆悅從, 而淫祀亦將絶矣。”


12月 19日[편집]

목성이 저성에 들어가고, 화성이 도수를 잃다[편집]

○己酉/木星入氐, 火星失度。 書雲注簿金子綏實封啓曰: “夜四更, 木星入氐, 火星失度。 氐, 天子之路寢, 休解之房也。 屬後宮, 屬女主。”


이무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별시위를 두고, 사순·사의를 혁파하다[편집]

○初置別侍衛, 革司楯司衣。 司楯司衣等一千三百人, 以別牌朝士代(司循)〔司楯〕之任, 以內侍向上代司衣之任。 初, 判三軍府事李茂, 請罷司楯司衣, 屬三軍府, 選子弟有武才者, 號別侍衛, 分爲左右, 三分入直, 上坐正殿, 佩弓矢分立左右, 上曰: “卿言善矣。 何所聞歟?” 對曰: “朴文崇言於臣, 臣亦然之。” 上可其言而罷之。 命三軍府, 選子弟充別侍衛。


중궁의 투기때문에 경연청에 나와서 10여 일 동안 거처하다[편집]

○以中宮妬忌, 出御經筵廳十餘日。


전향할 때에는 마땅히 면복 입기를 대간이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다[편집]

○臺諫請傳香, 當御冕服, 上允。 上以紗帽團領傳香時, 臺諫皆具朝服, 乃進諫曰: “殿下爲宗廟擧事, 而不御冕服, 非禮也。” 上曰: “今日有疾失禮, 後當從其所言。”


12月 21日[편집]

목성과 화성이 궤도를 잃고 저성 서남쪽에 있다. 임금이 전번에 성변을 보고하지 않은 일을 말하다[편집]

○辛亥/木、火二星失度, 在氐西南, 隔一尺許。 上謂左右曰: “先是, 木、火二星犯氐星, 現災異之象。 書雲觀不卽啓聞, 其廢職何也? 召致星變, 雖由否德, 然知有火災, 則予當行愼火之令矣。”


임금이 덕수궁에 나아가 태상왕께 헌수하다[편집]

○上詣德壽宮獻壽。 上詣太上殿, 太上王適幸神巖寺。 上遣義安公和、宦官李芬, 迎太上王, 還宮設享。 召太上王素所親信昌寧伯成石璘、淸川伯李居仁、判承樞府事李舒、判漢城崔有慶等侍宴。 石璘以下, 更相起舞, 聯句唱和, 極歡而罷。


12月 22日[편집]

화성이 목성이 있는 자리를 관통하여 지나가다[편집]

○壬子/火星貫木星。


수창궁이 화재를 당하다. 사관 노이가 사책을 건지다[편집]

○壽昌宮災。 司鑰失火, 始于寢室, 延及大殿。 驪興伯閔霽、判門下金士衡、左政丞李居易、右政丞河崙, 皆會救火。 上驚懼曰: “宮闕已災, 無及於救矣, 毋令傷人。” 時史庫在壽昌宮內, 入直史官盧異開庫, 手出史冊焉。


천도 문제를 의논하다. 서운관에 명하여 술수에 관한 그림이나 서적을 금하도록 명하다[편집]

○命禁術數圖籍, 議還漢都。 謂平壤伯趙浚、昌寧伯成石璘以下文臣十餘人曰: “不幸有災。 卿等按書雲觀秘密圖籍, 議遷都利害以聞。” 時論議紛紜未定, 右政丞河崙建議, 宜都毋岳, 上謂諸大臣曰: “今讖緯術數之言, 縱橫不止, 眩惑人心, 何以處之?” 諸宰相皆曰: “不可從也。” 大司憲金若采獨以爲可從, 上曰: “新都, 乃父王所創也。 何必別建都邑, 以勞民乎!” 遂命書雲觀, 藏術數地利之書。


지형조 정절과 형조 정랑 박고를 파직하다[편집]

○知刑曹鄭節、正郞朴翺罷。 初, 上詣太上殿, 至夜還宮, 右軍同知摠制洪恕, 侍衛至中路, 潛歸其家。 節等知之, 劾恕請罪, 憲司上言: “彈糾, 非刑曹之任也。 曾有判禁, 節等不此之顧, 乃敢劾恕, 以廢邦憲。 願將節、翺, 收其職牒, 竄逐于外, 以懲後日思出其位之徒。 且恕於下輦前, 自退私第, 有乖人臣敬上之禮。 罷其官爵, 以戒後日不謹其任之輩。” 但罷節、翺職。


예조에서 성변·재이에 따른 여러 가지 기도행사에 관해 상언하니, 불사(佛事)만을 혁파하게 하다[편집]

○罷佛事。 禮曹上言:

竊見佛法始入中國以來, 歷代帝王或信或否, 未有災福之驗, 前朝之季, 崇信彌篤, 亦未蒙福。 乞中外寺社設行道場、法席、國卜、祈恩、年終、還願等事, 一皆停罷。 且祀神, 誠敬爲主。 黷于淫祀, 不如不祭。 願自今, 祀典所載名山大川, 一依《洪武禮制》, 盡誠致祭, 如國巫堂及紺嶽、德積等處, 發遣巫女司鑰, 非時祭祀, 一皆禁斷。

但令罷佛事。


중앙과 지방에 영을 내려 구언하다[편집]

○下敎求言:

王若曰, 蓋聞天人相與, 通達無間, 政失於下, 謫見於上。 災異之興, 實由人作, 天之讉告, 可不懼哉! 予以否德, 纘承丕緖, 夙夜軫念, 期至于治, 四方之廣, 萬務之煩, 豈能周知而無過! 比者, 雷雨失當, 星文示儆, 又於今月壬子, 壽昌宮失火。 咎至於斯, 痛自劾責。 動作失當而己德虧歟? 嬖寵得進而私謁行歟? 刑罰不信而人無勸懲歟? 用舍失宜而人材堙鬱歟? 抑享祀不潔而百神不歆歟? 賦徭不均而庶民怨咨歟? 姦邪撓法而獄滯冤訟歟? 豪猾肆兇而里有愁嘆歟? 此皆上干和氣, 以召災異者也。 欲修弭災之道, 宜求讜直之言。 凡寡人之闕失、左右之忠邪、政令之臧否、民生之利病, 救弊之術, 極陳無諱。 言而可採, 予則有賞, 說或不中, 亦不加罪。 咨爾中外大小臣僚、閑良、耆老, 各以所見, 實封條上。 尙其協心交儆, 勉修厥職, 補予不逮, 以副予畏天勤民之意。


임금이 군신을 거느리고 제릉에 제사지내다[편집]

○上率群臣, 祭齊陵。


임금이 원유관과 강사포 차림으로 종묘의 향과 축을 전하다[편집]

○上以遠遊冠、絳紗袍, 傳宗廟香祝, 侍臣皆具朝服。


동북면에 황충이 일어 사신을 보내 진휼하다[편집]

○東北面蝗, 遣使賑之。


다음 날 하례를 받기 위해 옛 강안전에 거둥하여 그대로 머물러 자다[편집]

○幸古康安殿仍宿。 以明日受賀正也。


  1. 우왕(禑王).
  2. 주(周)나라 때부터 설치한 천자의 스승. 천자가 부형(父兄)의 예로 대접하였는데, 삼로(三老)는 삼덕(三德: 正直·剛·柔)을 아는 자, 오경(五更)은 오사(五事:貌·音·視·聽·思)를 아는 자를 말함.
  3. 만물을 생성하는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5 원소(元素). 오행상생(五行相生)과 오행상극(五行相克)의 이치로 만물을 지배한다고 함.
  4. 사람이 항상 행(行)하여야 하는 5가지 바른 행실. 곧 인(仁)·의(儀)·예(禮)·지(智)·신(信). 또는 아버지의 의(義), 어머니의 자(慈), 형의 우(友), 동생의 공(恭), 아들의 효(孝)를 말함.
  5. 대간(臺諫)에서 새로 임명된 관원(官員)의 고신(告身)을 서경(署經)하여 내주던 일.
  6. 대간(臺諫)이 서경(署經)하여 예조(禮曹)에 내주던 공첩(公貼).
  7. 시호(諡號)
  8. 나라 제사에 소를 통채로 바치던 일. 원래 소·양·돼지를 아울러 바치는 것을 대뢰(大牢)라 하였으나, 뒤에 소만 바치는 것을 일컫게 됨. 태뢰(太牢).
  9. 중국 원(元)나라 순종(順宗) 지정 연간(至正年間)에 만든 법규. 고려 말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 많은 참고가 되었음.
  10. 대가(大駕)나 군중(軍中)의 앞에 세우는 둑기(纛旗)에 지내던 제사.
  11. 몸종. 소사(小史).
  12. 세종.
  13. 옛날 한족(漢族)의 문명(文明)을 받지 못한 야만족(野蠻族)이 살던 양자강(楊子江)이남의 땅.
  14.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장자(長子). 나라를 동생 계력(季歷)에게 사양하고 만형(蠻荊)으로 들어갔음.
  15.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차자(次子). 형 태백(太伯)과 같이 만형(蠻荊)으로 들어갔음.
  16. 상당후 이저(李佇:뒤의 이백경(李伯卿)의 아우 이백강(李伯剛)을 말하는데, 그는 태종(太宗)의 맏딸 정순 공주(貞順公主)와 결혼하였음.
  17. 세자.
  18. 형제의 우의.
  19. 상(象:순임금의 아우)이 근심하면 순(舜)임금이 근심하고, 상이 기뻐하면 순임금이 기뻐하였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20. 주공(周公)이 관숙(管叔)을 대벽(大辟:死刑)에 처한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21. 뱀·지네·두꺼비 등의 독기(毒氣)가 든 음식을 남에게 몰래 먹여 복통·가슴앓이·토혈(吐血)·하혈(下血) 등의 증세를 일으켜 죽게 하는 것.
  22. 주문(呪文)이나 저술(詛術)로 남을 저주(詛呪)하여 죽게 만드는 것. 염(魘)은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쇠꼬챙이로 심장을 찌르고 눈을 후벼파고 손·발을 묶는 것이고, 매(魅)는 나무나 돌로 귀신을 만들어 놓고 저주를 비는 것임. 압승술(壓勝術)이라고도 함.
  23.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24. 국가에서 특별한 공신(功臣)에게 내려 주어 조세(租稅)를 거두어 쓰게 하던 제도. 대개 호수(戶數)를 지정해 주는 것이 상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