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정종대왕실록/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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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年 春正月[편집]

1月 1日[편집]

명나라 건문 연호를 비로소 시행하다[편집]

○壬申朔/始行朝廷建文年號。

조정에서 명(明)나라 건문(建文)[1] 연호(年號)를 시행하였다.


임금이 종친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조회하고 하례를 행하다[편집]

○上率宗親, 朝太上殿行賀禮。 太上王以水陸齋齊戒, 不受賀禮, 上進表裏一套, 還殿冕服, 賀登極, 仍賀正訖, 服冠袍受朝, 宴群臣, 夜罷。 平壤府尹成石璘, 進《欹器圖》, 左道監司李廷俌, 進《歷年圖》, 右道監司崔有慶, 進《無逸圖》, 皆嘉納。

금상이 종친을 거느리고, 태상전(太上殿)[2]을 배알하고 하례(賀禮)를 행하다. 태상왕이 수륙재(水陸齋)[3]로 재계(齋戒)[4]를 행하는 중이라 하여 하례(賀禮)를 받지 않고 거절하자, 금상이 표리(表裏)[5] 1벌을 드리고 궁궐로 돌아와 면복(冕服)[6] 차림으로 명(明) 황제의 등극(登極)을 축하하고, 관습에 따라 하정(賀正)[7]을 마쳤다. 이어서 관(冠)·포(袍)를 입고 정사(政事)를 보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늦은밤까지 잔치를 벌였다. 평양부윤(平壤府尹) 성석린(成石璘)이 의기도(欹器圖)를 바치고, 좌도감사(左道監司) 이정보(李廷俌)가 역년도(歷年圖)를 바치고, 우도감사(右道監司) 최유경(崔有慶)이 무일도(無逸圖)를 바치니, 모두 가납(嘉納)[8]하였다.


1月 2日[편집]

눈바람이 거세게 일어 지붕의 기와가 날아 떨어지다. 화성의 위치[편집]

○癸酉/風雪暴作, 屋瓦飛墜。 火在亢第二星西, 隔一尺許。

눈바람[風雪]이 거세게 일어 지붕의 기와가 날아 떨어졌다. 화성(火星)이 항수(亢宿)[9] 제2성(第二星)의 서쪽에 있었는데, 그 간격이 한 자[尺]쯤 되었다.


홍제원에 거둥하여 명나라 서울에 가는 우정승 김사형을 전송하다[편집]

○幸弘濟院, 餞右政丞金士衡。 士衡如京師賀登極, 政堂河崙行陳慰弔祭禮。

홍제원(弘濟院)[10]에 거둥(擧動)하여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을 전송하였다. 김사형은 남경(南京)에 가서 명 황제의 등극(登極)을 하례하고, 정당(政堂) 하윤(河崙)은 진위 조제례(陳慰弔祭禮)를 행하였다.


1月 3日[편집]

화성이 항수 제2성 자리에 있었는데 그 사이가 4치쯤 되다[편집]

○甲戌/火在亢第二星, 隔四寸許。

화성(火星)이 항수(亢宿) 제2성(第二星)에 있었는데, 그 간격이 4치[寸]쯤 되었다.


경연에 나아가 《의기도》를 벽에 걸다[편집]

○御經筵, 命揭《欹器圖》于壁。 知經筵事李舒引滿而不溢之語, 以戒持盈之難, 上悅。

경연(經筵)에 나아가 명하여 의기도(欹器圖)를 벽에 걸었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이서(李舒)가 ‘가득 차도 넘치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여 영성(盈盛)을 지속하기 어려움을 경계하니, 금상이 기뻐하였다.


연경사에 법석을 베풀었으니 새로 이룩한 금자 화엄경을 운반하기 때문이다[편집]

○設法席于衍慶寺。 轉新成金字《華嚴經》也。

연경사에 법석을 베풀었다. 새로 이룩한 금 글씨 《화엄경》을 운반하기 때문이었다.


중 설오를 보내 보살재를 금강산 등에서 베풀고 중 2백 명을 공궤하다[편집]

○遣僧雪悟, 設菩薩齋于金剛山及安邊釋王寺, 飯僧二百。 江原道監司輸米豆供其費。

중 설오를 보내 보살재를 금강산 등에서 베풀고 중 2백 명을 공궤하다.


노비 변정 도감에서 송사를 결단하는 것을 2월 그믐날까지로 한정하다[편집]

○奴婢辨定都監決訟, 限二月晦日。

노비 변정 도감에서 송사를 결단하는 것을 2월 그믐날까지로 한정하다.


1月 7日[편집]

화성이 항수 제2성을 범하다[편집]

○戊寅/火犯亢第二星。

화성(火星)이 항수(亢宿) 제2성(第二星)을 범하였다.


사관이 비로소 경연에 입시하다[편집]

○史官始入侍經筵。 初, 上不近史官, 門下府上疏再請。 疏略曰:

史官之職, 人主言動、時政得失, 直書不諱, 以詔後世, 所以備觀省而垂勸戒也。 前朝之季, 荒淫無度, 昵比婦寺, 踈遠忠良, 憚史官之直書, 使不得近, 最爲無藝。 宜鑑前朝之失, 思設官之義, 特令史官, 日侍左右, 記言動錄時政, 以爲萬世之弘規。

從之。 知經筵事趙璞進曰: “人君所可畏者, 天也, 史筆也。 天非蒼蒼高高之謂也, 理而已。 史官記人君之善惡, 以貽萬世, 可不畏乎?” 上然之。 璞早詣闕, 與武臣爲局戲, 至進講開卷讀, 不能句其書。

사관(史官)이 비로소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사관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니,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두 번 청하였는데, 소(疏)는 대략 이러하였다.

"사관의 직책은 인주(人主)의 언동(言動)과 정사의 득실(得失)을 직서(直書)하여 숨기지 않고 후세에 전하니, 관성(觀省)에 대비하고 권계(勸戒)를 남기자는 것입니다. 고려 말년에 임금이 황음 무도(荒淫無度)하여 부녀자와 내시를 가까이 하고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를 멀리 하였으며, 사관이 직서(直書)하는 것을 꺼리어 근시(近侍)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너무나 무도(無道)한 일이었습니다. 마땅히 고려의 실정(失政)을 거울삼고 관직을 설치한 의의를 생각하여, 특히 사관으로 하여금 날마다 좌우에 입시하여 언어 동작을 기록하고, 그때그때의 정사를 적게 하여 만세의 큰 규범을 삼도록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조박(趙璞)이 나와서 말하였다.

"인군(人君)이 두려워할 것은 하늘이요, 사필(史筆)입니다. 하늘은 푸르고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리(天理)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사관은 인군의 착하고 악한 것을 기록하여 만세에 남기니, 두렵지 않습니까?"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조박이 일찍 예궐(詣闕)하여 무신(武臣)과 더불어 장기를 두다가, 진강(進講)할 때에 이르러 책을 펴고 읽는데 그 글의 귀절도 능히 떼지 못하였다.


순군부에 명하여 형조에 체류된 죄수를 판결하게 하다[편집]

○命巡軍, 決刑曹滯囚。 時刑曹皆闕員也。

순군부(巡軍府)[11]에 명하여 형조에 체류(滯留)된 죄수를 판결하게 하였으니, 이때에 형조에서 모두 궐원(闕員)하였기 때문이었다.


경연에서 지경연사 조박이 《논어》를 진강하다[편집]

○御經筵。 知經筵事趙璞進講《論語》, 至仍舊貫如之何章曰: “此欲人君罷土木勞民之役也。” 上曰: “土木之役, 已罷矣。 忠淸道監司李至, 請除宮城蓋茨。 余思之, 中外民貧, 不能齎糧, 國無所儲, 又不能給。 蓋茨轉輸之際, 其弊不小, 是害吾民也。 當此之時, 一切營繕, 皆所當已。 況宮城蓋茨乎! 是以從其請。” 璞對曰: “殿下此言, 誠吾民之福也。”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조박(趙璞)이 《논어(論語)》를 진강하다가, ‘예전 일 그대로 하면 어떠한가’라는 장(章)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것은 인군(人君)에게 백성들을 괴롭히는 토목(土木)의 역사를 파(罷)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토목의 역사를 이미 파하였다. 충청도 감사 이지(李至)가 궁성(宮城)에 띠 덮는 것을 없애자고 청하였으므로, 내가 생각하니, 중외(中外)의 백성들이 가난하여 양식을 싸 가지고 올 수도 없고, 나라에는 저축한 것이 없어 공급할 수도 없으니, 덮을 띠를 전수(轉輸)할 즈음에 그 폐해가 작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백성들을 해치는 것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일체의 영선(營繕)을 모두 그만두어야 할 터인데, 하물며 궁성에 띠 덮는 일이겠는가? 이 때문에 그 청을 따랐었다."

조박이 대답하였다.

"전하의 이 말씀이 참으로 우리 백성들의 복입니다."


선군(船軍)에게 어염의 역사를 면제하다[편집]

○免船軍魚鹽之役。 忠淸道監司李至啓: “船軍漕運造船營田等事, 役繁弊鉅。 漕運之時, 屢至溺死, 造船營田燔鹽之際, 農牛羸斃。 伏望令船軍, 改造破船, 漕運營田外, 免魚鹽二事, 以優其生。” 從之。

선군(船軍)에게 어염(魚鹽)[12]의 역사를 면제하였다. 충청도 감사 이지(李至)가 아뢰었다.

"선군(船軍)은 조운(漕運)하고 배를 만들고 농사를 짓는 등의 일로도 역사가 번다하고 폐해가 큽니다. 조운할 때는 자주 익사하게 되고, 배를 만들고 농사를 짓고 소금을 구울 즈음에는 농우(農牛)가 지쳐 죽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선군으로 하여금 파선된 배의 개조(改造)와 조운하고 농사를 짓는 일만을 행하게 하고, 그 밖의 어염(魚鹽) 두 가지 역사는 면제하여 주어서 그들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月 9日[편집]

나무에 서리가 내리고 화성이 항수의 제1성과 제2성 사이에 있다[편집]

○庚辰/木稼。 火在亢第一星第二星間。

○경진/나무에 서리가 내렸다. 화성은 항수의 제1성과 2성 사이에 있었다.


경연에서 중추원 학사 이첨이 《논어》를 진강하다[편집]

○御經筵, 中樞院學士李詹, 進講《論語》克己復禮章曰: “程子四箴, 當書諸左右, 以便觀覽。” 上允。

경연(經筵)에 나아갔다. 중추원 학사(中樞院學士) 이첨(李詹)이 《논어(論語)》의 극기복례(克己復禮) 장(章)을 진강하고 말하였다.

"정자(程子)의 사잠(四箴)을 마땅히 좌우에 써 두어 보기에 편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임금이 윤허하였다.


문하부에서 왕흥·유은지·유연지 등에게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용서하다[편집]

○門下府請王興、柳隱之、衍之等罪, 皆宥之。 門下府劾前評理王興, 上疏云: “王興, 逆臣柳曼殊姻婭之親。 曼殊伏誅, 而興潛匿曼殊子隱之、衍之等而不告。 請下憲司斷罪, 將隱之等竄于外。”

문하부(門下府)에서 왕흥(王興)·유은지(柳隱之)·유연지(柳衍之) 등에게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용서하였다. 문하부에서 전 평리(評理) 왕흥(王興)을 탄핵하여 상소하였다.

"왕흥은 역신(逆臣) 유만수(柳曼殊)의 인아지친(姻婭之親)으로서, 유만수가 복주(伏誅)되자, 왕흥이 유만수의 아들 유은지·유연지 등을 몰래 숨겨 두고 고하지 않았습니다. 청하건대, 헌사(憲司)에 내려 죄를 결단하고, 유은지 등은 외방에 귀양보내소서."


충청도에서 금년에 바칠 군자로 기민을 진휼하였으니 감사 이지의 계청을 따른 것이다[편집]

○以忠淸道今年所納軍資, 賑飢民。 從監司李至啓也。

충청도(忠淸道)에서 금년에 바칠 군자(軍資)로 기민을 진휼하였으니, 감사 이지(李至)의 계청(啓請)을 좇은 것이었다.


경상도 감사에게 명하여 불경을 해인사에서 인쇄하는 승도에게 공궤하게 하다[편집]

○命慶尙道監司, 飯印經僧徒于海印寺。 太上王欲以私財, 印成《大藏經》, 納東北面所畜菽粟五百四十石于端、吉兩州倉, 換海印寺傍近諸州米豆如其數。

경상도 감사에게 명하여 불경을 인쇄하는 승도(僧徒)에게 해인사(海印寺)에서 공궤(供饋)하게 하였다. 태상왕(太上王)이 사재(私財)로 《대장경(大藏經)》을 인쇄하여 만들고자 하니, 동북면(東北面)에 저축한 콩과 조 5백 40석을 단주(端州)·길주(吉州) 두 고을 창고에 납입하게 하고, 해인사(海印寺) 근방 여러 고을의 미두(米豆)와 그 수량대로 바꾸게 하였다.


올적합족 2인과 여진족 2인이 오다[편집]

○兀狄哈二人及女眞二人來。

○올적합 사람 두 사람과 여진 사람 두 사람이 왔다.


계품사 설장수를 진향사로 고쳐 김사형, 하윤과 함께 명나라에 입조하게 하다[편집]

○改計稟使偰長壽爲進香使, 同金士衡、河崙入朝。 初, 長壽至婆娑鋪, 遼東都司以非三年一聘之期不納。 長壽還至義州, 移書左政丞趙浚曰: “請每年朝聘事, 宜更奏聞, 否則於陳慰, 進香使差遣。” 於是, 啓爲進香使。

계품사(計稟使) 설장수(偰長壽)를 진향사(進香使)로 고쳐 김사형(金士衡)·하윤(河崙)과 함께 명나라에 입조하게 하였다. 처음에 설장수가 파사포(婆娑鋪)에 이르니,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3년에 한 번씩 조빙(朝聘)하는 시기에 어긋난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설장수가 돌아와 의주(義州)에 이르러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매년 조빙할 것을 청하여 다시 주문(奏聞)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진위(陳慰)할 때 진향사(進香使)로 차견(差遣)하든지 하십시오."

하니, 이때에 아뢰어 진향사를 삼았다.


경연에서 이서·조용·배중륜 등과 임금의 도리에 관해서 논하다[편집]

○御經筵。 上曰: “高皇帝日再視朝, 天下萬機, 皆親決斷。 然疑忌英雄及功臣, 指爲藍黨胡黨, 皆殺之, 無乃不可乎?” 知經筵事李舒、左諫議趙庸等復曰: “高皇帝, 勤勞儉素則有之矣, 然天下之事, 不任以賢, 身親聽斷。 君行臣職, 甚非設官分職之義也。 秦始皇衡石程書, 蓋近之。” 上曰: “然。” 校書少監裵仲倫曰: “臣昔在京師, 見諸王子書字, 可愛。” 庸曰: “人君專要正心修身, 工書非所尙也。” 上然之, 乃曰: “人君當以正心爲貴。”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임금이 말하기를,

"고황제(高皇帝)가 하루에 두 번씩 조회를 보고 천하 만기(萬機)를 모두 친히 결단하였다. 그러나 영웅(英雄)과 공신(功臣)을 의심하고 꺼리어 남당(藍黨)이니, 호당(胡黨)이니 지목[13]하여 모두 죽이었으니, 불가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지경연사(知經筵事) 이서(李舒)·좌간의(左諫議) 조용(趙庸) 등이 대답하였다.

"고황제가 근로(勤勞)하고 검소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일을 어진이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친히 청단(聽斷)하여 임금으로서 신하의 직책을 행하였으니,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눈 뜻이 심히 아닙니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저울과 추로 서류를 헤아리던 일[衡石程書][14]과 대개 비슷합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도다."

하니, 교서 소감(校書少監) 배중륜(裵仲倫)이 말하기를,

"신이 예전에 명나라 서울[京師]에 있을 때에 여러 왕자들의 글씨[書字]를 보았는데, 매우 훌륭하였습니다."

하였다. 조용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은 오로지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아야 하며, 글씨 쓰는 것은 숭상할 것이 못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이에 말하기를,

"인군은 마땅히 마음을 바루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하였다.


감사 이지의 상언에 따라 충청도 병선 20척을 감하다[편집]

○減忠淸道兵船二十艘。 監司李至上言: “嘗觀宥旨內, 船軍以三丁立一名, 聖上之德至矣。 然水陸之軍, 各有定額, 無役之民, 亦不易得, 故不能充三丁之額, 誠可痛也。 道內兵船本六十艘, 其軍近因逃散死亡, 未滿額數, 時立之軍, 半是單獨, 船隻雖多, 名存實亡。 乞除兵船二十艘, 以其軍及侍衛鎭屬軍官無馬者, 充三丁之額, 分騎四十艘, 泊諸要衝, 則水軍蘇息矣。” 從之。

충청도 병선(兵船) 20척을 감(減)하였다. 감사 이지(李至)가 상언(上言)하였다.

"일찍이 보건대, 유지(宥旨) 내(內)에 ‘선군(船軍)은 3정(三丁)에 1명을 입역(立役)[15]하라.’고 하시었으니, 성상(聖上)의 덕이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수륙(水陸)의 군사는 각각 정한 액수가 있고, 부역 없는 백성도 또한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3정(三丁)의 액수를 채울 수가 없으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도내(道內)의 병선이 본래 60척인데, 그 군사가 근래에 도망하여 흩어지고 죽어 없어짐으로 인하여 액수에 차지 못하고, 그때그때 세우는 군사도 반은 단독(單獨)이어서, 배의 척수는 비록 많으나 이름만 있고 실속이 없습니다. 빌건대, 병선 20척을 없애고 그 군사와 시위 진속(侍衛鎭屬)의 군관(軍官) 가운데 말[馬]이 없는 자로써 삼정(三丁)의 액수를 채우고, 이들을 40척에 나누어 태우고 요충지(要衝地)에 정박시키면, 수군(水軍)이 소복(蘇復)되고 쉬게 될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덕비의 생일이므로 중외의 경죄를 용서하다[편집]

○以德妃生日, 宥中外輕罪。

덕비(德妃)[16]의 생일이므로 중외(中外)의 경죄(輕罪)를 용서하였다.


경연에서 조박에게 임금이 격구하는 것이 건강상 이유임을 말하다[편집]

○御經筵。 謂講官曰: “寡人有疾, 手足酸痛。 或時擊毬, 欲以運身行氣也。” 知經筵事趙璞曰: “行氣之戲, 雖不能已, 請勿與宦寺憸小之輩共之。” 上然之。

경연(經筵)에 나아가 강관(講官)에게 이르기를,

"과인(寡人)이 병이 있어 수족이 저리고 아프니, 때때로 격구(擊毬)를 하여 몸을 움직여서 기운을 통하게 하려고 한다."

하니, 지경연사(知經筵事) 조박(趙璞)이 말하기를,

"기운을 통하게 하는 놀이라면 그만두시라 할 수 없습니다. 청하건대, 환시(宦侍)나 간사한 소인의 무리와는 함께 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내정에서 격구하는데 전 참지문하부사 도흥·유운과 종친 등이 참석하다[편집]

○擊毬於內庭。 前參知門下府事都興、前中樞院副使柳雲及宗親侍焉。

내정(內庭)에서 격구(擊毬)하였는데, 전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도흥(都興)·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유운(柳雲)과 종친(宗親)이 모시었다.


문하부에서 윤문수노가 거상중에 장가들었다고 죄를 극력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門下府力請尹文殊奴之罪, 不允。 初門下府上書曰:

三年之喪, 天下之通喪, 前朝之季, 禮制頹壞, 人心衰薄, 百日卽吉, 飮酒啖肉, 男女昏姻, 無所不爲。 今國家復行三年之喪, 明有著令, 學生尹文殊奴, 居其父承禮之喪甫踰年, 其諸兄皆在制中, 而先自釋服, 娶都承旨李文和之女, 以干成憲。 其母權氏, 稱有內旨, 其罪已不得而治矣, 然亦豈可不終制而在妻家乎? 伏惟命還其家, 俾終其制, 自今以後, 三年之內, 欲行嫁娶, 夤緣取旨者, 痛行糾理。

上曰: “今後自除其喪者糾理。” 門下府再上疏曰:

臣等以爲, 文殊奴當喪娶妻, 甚爲不孝, 不可不正, 具疏以聞, 未蒙聽納。 臣等竊惟, 親喪固所自盡, 是人子之至情, 出於天性, 不待外求。 故衰麻哭踊, 不處內不食肉, 以終再朞, 所以報三年之愛也。 昔人有當喪有疾, 使婢丸藥者, 鄕黨尙貶之。 況當喪嫁娶者乎? 今文殊奴, 丁父憂甫踰年, 自除衰絰, 任然娶妻, 飮酒啖肉, 恬不爲愧。 是豈人子之情也哉? 其壞俗亂紀, 莫此爲甚, 風俗何由正乎? 願依前日所申, 以正風俗。

上曰: “三年之內, 任然卽吉者, 一皆糾理。”

문하부(門下府)에서 윤문수노(尹文殊奴)의 죄를 극력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문하부에서 상서(上書)하였다.

"3년의 상(喪)은 천하의 공통된 상(喪)이온데, 고려 말년에 예제(禮制)가 무너지고 인심이 경박하여져서, 백일 만에 길복(吉服)을 입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남녀가 혼인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지금 국가에서 다시 3년의 상(喪)을 행하여 밝게 나타난 법령이 있습니다. 학생(學生) 윤문수노(尹文殊奴)는 그 아비 윤승례(尹承禮)의 상중에 있어 겨우 1년이 넘었는데, 여러 형들은 모두 복제 중에 있으나, 먼저 스스로 상복을 벗고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루어진 법을 범하였습니다. 그 어미 권씨(權氏)가 내지(內旨)가 있다 칭하였으므로 그 죄는 다스리지 못하였습니다마는, 또한 어찌 복제를 마치지 않고 처가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그의 돌아갈 것을 명령하여 복제를 마치게 하시고, 금후로는 3년 안에 가취(嫁娶)를 행하려 하여 취지(取旨)를 인연(夤緣)하는 자는 엄하게 규찰(糾察)하여 다스리소서."

임금이 말하기를,

"금후에는 스스로 그 상복을 벗는 자는 규찰하여 다스리도록 하라."

하니, 문하부에서 다시 상소(上疏)하였다.

"신 등의 생각에는, 윤문수노가 상중에 아내를 얻어 심히 불효하였으므로 바루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 소를 갖추어 아뢰었는데, 들어주심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신 등은 가만히 생각하건대, 친상(親喪)에 자진(自盡)하는 것은, 인자(人子)의 지극한 정리가 천성(天性)에서 나오는 것이요, 밖에서 구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최복(衰服)을 입고 슬피 곡(哭)하며 내실(內室)에서 거처하지 아니하고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 두 돌을 마치니, 3년의 사랑을 갚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상을 당하여 병이 나서 여자 종으로 하여금 환약을 짓게 한 자가 있었는데, 향당(鄕黨)에서 오히려 나쁘게 여겼으니, 하물며 상을 당하여 가취(嫁娶)하는 일이겠습니까? 지금 윤문수노가 아비 상을 당하여 겨우 1년이 넘었는데, 스스로 최복을 벗고 마음대로 아내를 얻고서 뻔뻔스럽게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자식 된 자의 정리이겠습니까? 풍속을 무너뜨리고 기강을 어지럽히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으니, 풍속이 어떻게 바로잡아지겠습니까? 원하건대, 전일에 아뢴 바에 의하여 풍속을 바로잡으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3년 안에 임의로 길복을 입는 자는 일체 모두 규찰하여 다스리도록 하라."


도흥·유운 등과 더불어 내정에서 격구하다[편집]

○與都興、柳雲等, 擊毬于內庭。

도흥(都興)·유운(柳雲) 등과 더불어 내정에서 격구(擊毬)하였다.


대사헌 조박의 아들 조신언에게 상복을 벗고 회안공의 딸에게 장가들라고 명하다[편집]

○命大司憲趙璞子愼言, 釋喪服娶懷安公女。 召臺諫掌務曰: “愼言將娶懷安公女。 雖在母喪, 毋以尹文殊奴例止之。” 臺諫諍之不已, 命出之。

대사헌 조박(趙璞)의 아들 조신언(趙愼言)에게 상복을 벗고 회안공(懷安公)[17]의 딸에게 장가들라고 명하고, 대간 장무(臺諫掌務)를 불러 말하기를,

"조신언이 장차 회안공의 딸에게 장가들 터이니, 비록 어미 상중에 있더라도 윤문수노의 예로 말리지 말라."

하니, 대간이 간하여 마지않으므로, 나가라고 명하였다.


오도리 만호 동소로가 오다[편집]

○吾都里萬戶童所老來。

오도리 만호(吾都里 萬戶) 동소로(童所老)가 왔다.


1月 19日[편집]

큰 바람이 불다. 사진이 일어나 눈을 뜨지 못하여 지척의 사람도 볼수 없었다[편집]

○庚寅/大風塵沙眛目, 咫尺不見人。

○경인/큰 바람이 불어서 모래먼지가 일어나 사람들의 눈을 가렸으니, 가까이 있는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여흥백 민제를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보내어 안태할 땅을 잡게 하다[편집]

○遣驪興伯閔霽于忠淸、全羅、慶尙道, 證考安胎之地。

여흥백(驪興伯) 민제(閔霽)를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보내어 안태(安胎)할 땅을 징험하여 고찰하게 하였다.


전대 군신의 자취를 보기 위해 《고려사》를 바치도록 하다[편집]

○御經筵。 諸公侯與宦寺擊毬於內庭, 喧囂不已, 上顧謂史官李敬生曰: “如擊毬事, 亦書諸史乎?” 敬生對曰: “君擧必書, 況擊毬乎?” 上曰: “吾欲觀前代君臣行事之跡, 其將《高麗史》以進。” 知春秋館事趙璞進《高麗史》。

경연(經筵)에 나아갔다가, 여러 공후(公侯)가 환시(宦寺)와 더불어 내정에서 격구하느라고 떠드는 소리가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사관 이경생(李敬生)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격구하는 일 같은 것도 또한 사책에 쓰는가?"

하니, 이경생이 대답하기를,

"인군의 거동을 반드시 쓰는데, 하물며 격구하는 것이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전대 군신(君臣)의 행사(行事)한 자취를 보고자 하니, 《고려사(高麗史)》를 바치도록 하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조박(趙璞)이 《고려사》를 바쳤다.


태상왕이 소도군 이방번의 옛집으로 이어하려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다[편집]

○太上王欲移御(昭悼君)〔撫安君〕芳蕃故第, 不果。 臺諫上言以爲: “芳蕃故第, 豈所宜御?” 上令都承旨李文和, 以其章轉申于太上王, 太上王不聽。 都評議使司率百官上言曰: “今者, 太上王欲移御撫安君故第, 大小臣僚, 莫不驚愕, 咸以爲太上王出居私第, 而殿下安於九重之上, 實爲未便。 前日臺諫所啓, 至爲詳悉。 伏望殿下, 毋以姑息順旨爲孝, 優納臺諫所啓, 以止太上移御之心, 奉承盡禮, 曲全大孝。” 上令都承旨李文和, 以其狀啓太上王, 太上王怒曰: “號令進退, 在人君之一言。 若曰老父之志, 予不能違, 臺諫百官, 誰曰不可!” 明日臺諫詣闕, 復請不已, 上使宦官朴英文, 告太上王曰: “父王若出居私第, 國人皆謂不能盡孝, 致使出居。 予是以深愧焉。” 太上王感其言, 不果移御, 只開北門, 以通往來。

태상왕(太上王)이 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의 옛집으로 이어(移御)하려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대간(臺諫)이 상언(上言)하기를,

"이방번의 옛집에 어찌 거처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도승지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그 글장을 태상왕께 아뢰게 하였으나, 태상왕이 듣지 아니하였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상언(上言)하였다.

"지금 태상왕께서 무안군(撫安君)의 옛집에 이어(移御)하려 하시니, 대소 신료들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모두 말하기를, ‘태상왕께서 사제(私第)에 나가 거처하시고, 전하께서 궁궐 안에 편안히 계시는 것이 실로 미편하다.’ 합니다. 전일에 대간이 아뢴 바가 지극히 자세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고식적으로 태상의 뜻[旨]을 따르는 것만으로 효도를 삼지 마시고, 대간이 아뢴 바를 우선으로 받아들이어 태상왕의 이어하시려는 마음을 그만두게 하시고, 뜻을 받들고 예(禮)를 다하시어 큰 효도를 곡진하고 온전하게 하소서."

임금이 도승지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그 글장으로 태상왕에게 아뢰니, 태상왕이 노하여 말하였다.

"호령 진퇴(號令進退)는 인군의 한 마디에 있는 것이다. 만일 말하기를 ‘늙은 아버지의 뜻을 내가 어길 수 없다.’고 한다면, 대간과 백관이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다음날 대간이 예궐(詣闕)하여 다시 청하여 마지않으니, 임금이 환관 박영문(朴英文)을 시켜 태상왕께 고하기를,

"부왕께서 만일 사제(私第)로 나가서 거처하시면,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나가서 거처하게 하였다.’고 할 것이니, 제가 이 때문에 깊이 부끄러워합니다."

하니, 태상왕이 그 말에 감동하여 이어하는 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북문(北門)만을 열어 왕래를 통하게 하였다.


각도 감사에게 사미(賜米)를 주지 않고 실직에 따라 반록하다[편집]

○除各道監司賜米, 從實職頒祿。

각도 감사에게 사미(賜米)를 주지 않고 실직(實職)에 따라 반록(頒祿)하였다.


배 타는 격군에게 사관(射官)의 예에 의하여 직책을 주다[편집]

○初授騎船格軍之職。 慶尙道水軍都節制使請曰: “騎船格軍, 非鹽干賤者, 依射官例賞職。” 從之。

배 타는 격군(格軍)의 직(職)을 처음으로 주었다. 경상도 수군 절제사가 청하기를,

"배 타는 격군(格軍)은 염간(鹽干)같이 천한 자가 아니니, 사관(射官)의 예에 의하여 직(職)을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경연에 나아가 강을 끝내고 내정에서 격구하다[편집]

○御經筵已, 擊毬于內庭。

○임금께서 경연에 나아가 강을 끝낸 뒤, 내정에서 격구하셨다.


장가물 등 5인에게 월료를 주다[편집]

○始給鳩房匠張加勿等五人月料。

구방장(鳩房匠) 장가물(張加勿) 등 5인에게 월료(月料)를 비로소 주었다.


축성 관원과 여러 절제사 휘하에게 첨설작을 주다[편집]

○授築城官員及諸節制使麾下添設爵。 時, 留後司城新都宮城及外城, 皆新築之。

축성 관원(築城官員)과 여러 절제사(節制使) 휘하에게 첨설작(添設爵)[18]을 주었다. 이때에 유후사(留後司)의 성(城)과 신도(新都)의 궁성(宮城)과 외성(外城)을 모두 새로 쌓았다.


박만으로 중추원 부사를 삼다[편집]

○以朴蔓爲中樞院副使。

박만(朴蔓)으로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삼았다.


정안공이 겸 판상서사사의 사면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靖安公請辭兼判尙瑞司事, 不允。

정안공(靖安公)이 겸 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의 사면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경기좌도 처인현의 겸관인 쌍부현을 혁파하여 도로 수원부에 소속시키다[편집]

○革左道處仁兼官雙阜縣, 還屬水原府。

좌도(左道) 처인(處仁)의 겸관(兼官)인 쌍부현(雙阜縣)을 혁파하여 도로 수원부(水原府)에 붙였다.


동북면 도내의 선군에게 벼슬을 주고 급전하는 등의 일을 청하다[편집]

○東北面都巡問使朴子安請除道內船軍職賞給田等事, 從之。

동북면(東北面) 도순문사(都巡問使) 박자안(朴子安)이 도내의 선군(船軍)에게 상(賞)으로 벼슬을 주고 급전(給田)하는 등의 일을 없애자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길주 도진무 신분을 보내어 수주의 올량합족과 오음회의 오도리족 만호 등에게 술을 하사하다[편집]

○遣吉州都鎭撫辛奮, 賜酒于愁州兀良哈萬戶劉八八禾ㆍ吾音會、吾都里萬戶童猛哥帖木兒ㆍ多甫水ㆍ兀狄哈等。

길주 도진무(吉州都鎭撫) 신분(辛奮)을 보내어 수주(愁州)[19] 올량합(兀良哈) 만호(萬戶) 유팔팔화(劉八八禾)[20]와 오음회(吾音會)[21] 오도리(吾都里) 만호(萬戶)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와 다보수(多甫水) 올적합(兀狄哈) 등에게 술을 하사하였다.


대사헌 조박이 격구를 과도하게 하지 말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기다[편집]

○大司憲趙璞進言曰: “擊毬之戲, 但以行氣也, 毋至過度。” 上然之。

대사헌(大司憲) 조박(趙璞)이 진언(進言)하기를,

"격구(擊毬)하는 놀이는 다만 기운을 통하자는 것이니, 과도하게 하지는 마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조박이 임금이 격구 즐기는 것을 근심하여 말하다[편집]

○讀《論語節要》畢, 趙璞進曰: “《論語》一書, 皆聖人之言。 願殿下日加熟玩, 取法於聖, 則治天下不難, 況一國乎? 昔宋相趙普, 平日所讀書, 唯一帙耳。 人莫得見, 及卒, 乃知爲《論語》也。 近日, 殿下常以擊毬爲樂。 人主代天理物, 所存者大。 不可頃刻怠忽, 況遊戲乎?”

《논어(論語)》의 절요(節要)를 읽어 마치니, 조박(趙璞)이 아뢰었다.

"《논어》 한 책은 모두 성인의 말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 날마다 숙독(熟讀) 완미(玩味)하여 성인을 본받으시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어렵지 않사온데, 하물며, 한 나라이겠습니까? 옛날에 송(宋)나라 정승 조보(趙普)가 평일에 읽던 글이 오직 한 질뿐이어서 사람들이 볼 수가 없었는데, 죽은 뒤에야 《논어》인 것을 알았습니다. 근일에 전하께서 항상 격구하는 것으로 낙을 삼으시는데, 인군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므로 가지는 것이 크니, 경각 사이도 게을리 하고 소홀히 할 수 없거든, 하물며 유희이겠습니까?"


1月 30日[편집]

화성이 항수 제2성 서쪽에 있는데 간격이 5치 쯤 되다[편집]

○辛丑/火在亢第二星西, 隔五寸許。

화성(火星)이 항수(亢宿) 제2성(第二星) 서쪽에 있었는데, 간격이 5치[寸]쯤 되었다.


元年 二月[편집]

2月 1日[편집]

왕흥을 개성에 안치할 것을 명하다[편집]

○〔壬寅〕/命置王興于開城。 月朔, 百僚班立于闕門外, 前門下評理王興, 騎馬而過, 直至闕門, 門下府劾之。 上書, 略曰:

宮禁, 臣民之所當敬; 朝廷, 國家之所共尊。 前門下評理王興, 徒以狂妄, 夤緣僞辛, 位至宰輔, 再干邦憲。 幸蒙赦宥, 尤宜謹愼。 今百官咸集闕門, 而興任然騎馬而過, 直至闕門, 其凌辱朝廷之罪, 不可不治。 請下憲司, 收其職牒, 鞫問其由, 遠竄于外。

왕흥(王興)을 개성(開城)에 안치(安置)할 것을 명하였다. 초하룻날에 백관이 궐문 밖에 반열을 지어 서 있었는데, 전 문하 평리(門下評理) 왕흥이 말을 타고 지나쳐 바로 궐문에 이르렀었다. 문하부(門下府)에서 이를 탄핵하여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은 이러하였다.

"궁금(宮禁)은 신민(臣民)이 마땅히 공경하여야 할 곳이요, 조정은 국가에서 함께 높이는 것입니다. 전 문하 평리 왕흥은 한갓 광망한 사람으로서 위조(僞朝) 신씨(辛氏)에 빌붙어서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고, 두 번이나 나라의 법을 범하였으나 다행히 용서를 입었으니, 더욱 마땅히 삼가고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백관이 모두 궐문에 모였는데, 왕흥이 마음대로 말을 타고 지나쳐서 곧장 궐문에 이르렀으니, 조정을 능욕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하건대, 헌사(憲司)에 내려 그 직첩을 회수하고 그 이유를 국문하여 멀리 외방에 귀양보내소서."


정탁으로 풍해도 도관찰출척사를 삼다[편집]

○以鄭擢爲豐海道都觀察黜陟使。

정탁(鄭擢)으로 풍해도 도관찰출척사(豐海道 都觀察黜陟使)를 삼았다.


정안공이 판상서사사를 사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다[편집]

○靖安公請辭判尙瑞司事, 從之。

정안공(靖安公)이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사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환관의 벼슬 품계를 없앨 것을 문하부에서 건의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門下府上疏, 請汰宦官爵秩。 疏曰:

信者, 人君之大寶也。 國保於民, 民保於信。 未有失信民, 而能治其國者也。 臣等頃者, 謹以一二條件, 仰瀆天聰。 閹人之官, 高不過三品, 且不許受朝官, 居其一焉。 旣蒙聽納, 布告中外, 一國臣民, 共知殿下從諫之美。 今內侍府得受朝官之資, 以至嘉善, 又受檢校, 其高至於嘉靖, 其多幾於五十, 而兼朝官者, 間或有之。 臣等竊恐有從諫之名, 而無從諫之實, 不唯失信於民, 名器之濫, 將無有紀極矣。 伏望一依前日所納, 其內侍府受朝官之資者, 令攸司收還其牒, 自今宦官除授, 只許內侍府, 其檢校一行削去。 盲人劉大原, 旣非閹人, 亦居其列, 有乖盛朝命官之義。 亦令攸司收其職牒。

不允。 補闕黃喜進曰: “臣等上疏待命, 未獲兪允。 然檢校之職泛濫, 不可不削。” 上曰: “宦官給事諸殿者甚多, 而內侍府官職有限, 故祿官外, 又有檢校。 且盲人劉大原, 雖得內侍府事, 曾有功於予, 勿收其牒。”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환관(宦官)의 작질(爵秩)을 없앨 것을 청하였는데, 소(疏)는 이러하였다.

"신(信)이라는 것은 인군의 큰 보배입니다. 나라는 백성으로 보존되고, 백성은 신(信)으로 보존되니, 백성에게 신(信)을 잃고서 능히 그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있지 않습니다. 신 등이 지난번에 삼가 한두 가지 조건을 가지고 천총(天聰)을 더럽혔는데, 환자(宦者)의 벼슬은 높아도 3품(三品)을 넘지 못하도록 하고, 또 조관(朝官)을 받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 그 한 가지 조건에 들어 있었습니다. 이미 청납(聽納)하심을 입어서 중외(中外)에 포고하여, 한 나라의 신민들이 모두 전하의 간(諫)하는 것을 따르는 미덕을 알았습니다. 지금 내시부(內侍府)에서 조관(朝官)의 자급(資級)을 받아서 가선 대부(嘉善大夫)[22]에 이르고, 또 검교(檢校)[23]를 받아서 높기가 가정 대부(嘉靖大夫)에 이르러, 그 수가 많기가 거의 50명이나 되고, 조관을 겸한 자도 간혹 있습니다. 신 등은 두렵건대, 간하는 것을 따른다는 이름은 있으나 간하는 것을 쫓는 실상은 없으니, 백성에게 신(信)을 잃을 뿐만 아니라, 명기(名器)의 남용(濫用)이 장차 끝이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한결같이 전날의 받아들이신 바에 의하여, 그 내시부의 조관의 자급을 받은 자는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직첩을 회수하게 하시고, 이제부터 환관의 제수는 다만 내시부에만 허락하고, 검교(檢校)는 일절 없애버리소서. 맹인(盲人) 유대원(劉大原)은 이미 환자가 아닌데도, 또한 그 열에 있으니, 성조(盛朝)의 벼슬을 임명하는 뜻에 어그러짐이 있습니다. 또한 유사로 하여금 그 직첩을 거두게 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니, 보궐(補闕) 황희(黃喜)가 말하기를,

"신 등이 상소하고 명령을 기다렸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검교(檢校)의 관직이 너무 많으니 깎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환관으로 여러 궁전에서 일하는 자가 심히 많은데, 내시부의 관직은 한도가 있다. 그러므로 녹관(祿官) 이외에도 또 검교가 있는 것이다. 또 맹인 유대원은 비록 내시부의 일을 얻었으나, 일찍이 내게 공이 있었으니, 직첩을 거두지 말도록 하라."


금주령을 내리다[편집]

○下禁酒令。

금주령(禁酒令)을 내렸다.


사헌부에서 갑사 봉사의에게 벌로서 베를 물리니 임금이 돌려주게 하다[편집]

○憲府徵甲士奉思義布。 上命攸司, 杖憲府書吏使令各一百, 充水軍, 還思義徵布。 知門下府事趙英茂族人中郞將奉思義會飮, 憲府書吏使令, 縛致于府, 幷其婦女, 徵布五十匹。 英茂怒, 面詰大司憲趙璞, 且復于上。

헌부(憲府)에서 갑사(甲士) 봉사의(奉思義)에게 포(布)를 징수하니, 임금이 유사(攸司)에 명하여, 헌부의 서리(書吏)와 사령(使令)에게 각각 장(杖) 1백 대씩을 때리어 수군(水軍)에 충당하게 하고, 봉사의에게서 징수한 포(布)를 돌려주게 하였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조영무(趙英茂)의 족인(族人)과 중랑장(中郞將) 봉사의가 회음(會飮)하였으므로, 헌부의 서리와 사령이 묶어서 사헌부에 이르렀고, 그 부녀(婦女)에게까지 포(布) 50필을 징수하였다. 조영무가 노하여 대사헌 조박(趙璞)을 면대하여 꾸짖고, 또 임금에게 여쭌 것이었다.


문하부에서 만류하였으나 제릉에 친히 제사하려 하다[편집]

○將祭齊陵, 門下府上疏止之, 不允。 初參贊李居易, 請拜掃先瑩, 上卽興感, 有拜齊陵之志。 將動駕, 門下府以爲: “殿下欲親祭齊陵, 孝誠至矣。 然人主奉先之道, 春秋修其祖廟, 薦其時食而已。 請停此行。” 不允。 郞舍詣殿庭, 請至再三。

장차 제릉(齊陵)[24]에 제사하려 하매, 문하부에서 상소하여 이를 만류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처음에 참찬(參贊) 이거이(李居易)가 선영(先塋)에 성묘 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곧 감격하여 제릉에 참배할 뜻이 있었다. 장차 거가(車駕)를 움직이려 하니, 문하부에서 아뢰었다.

"전하께서 제릉에 친히 제사하고자 하시니, 효성이 지극하십니다. 그러나 인군이 선조를 받드는 도리는 봄·가을로 조상의 사당을 수리하고 시식(時食)을 드리는 것뿐이니, 이 행차를 정지하시기를 청합니다."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므로, 낭사(郞舍)에서 대궐 뜰에 나와 두세 번 청하였다.


태상전에 제릉에 행차하겠음을 고하고 드디어 유후사로 가다[편집]

○朝, 太上殿告行, 遂如留後司。

태상전(太上殿)에 조회하고 〈제릉에〉 행차함을 고하고, 드디어 유후사(留後司)로 갔다.


2月 12日[편집]

밤중에 뭇 까마귀가 대궐 위에 날아와 울다[편집]

○癸丑/夜半, 群烏飛鳴於殿上。

밤중에 뭇 까마귀가 대궐 위에 날아와 울었다.


서성군 유원정의 졸기[편집]

○瑞城君柳爰廷卒。 爰廷無文武異才, 位至宰輔, 得與開國功臣之列。 及以田時之故, 繫巡軍獄, 太上王宥其罪, 仍命承旨盧石柱傳旨曰: “爰廷, 初無半面之知, 得與功臣之列, 其功從可知已。 政丞趙浚, 不得辭其責矣。”

서성군(瑞城君) 유원정(柳爰廷)이 졸(卒)하였다. 유원정은 문무(文武)의 특이한 재능도 없었는데, 벼슬이 재보(宰輔)에 이르고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반열에 참여하였었다. 전시(田時)[25]의 연고로써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는데, 태상왕이 그 죄를 용서하고, 인하여 승지(承旨) 노석주(盧石柱)에게 명하여 전지(傳旨)하기를,

"유원정은 처음부터 조금도 안면이 없었는데 공신의 반열에 참여하였으니, 그 공(功)이 가히 알 만하다. 정승(政丞) 조준(趙浚)이 그 책임을 사양치 못할 것이다."

하였다.


2月 14日[편집]

뭇 까마귀가 궁성 북쪽 소나무에 모여 지저귀다[편집]

○乙卯/群烏聚噪于宮城北松樹。

뭇 까마귀가 궁성 북쪽 소나무에 모여 지저귀었다.


임금이 노루를 쏘아 잡아서 사람을 보내 태상전에 달려가 바치게 하다[편집]

○上射獐, 遣人馳獻于太上殿。

임금이 노루를 쏘아 잡아서 사람을 보내어 태상전에 달려가 바치게 하였다.


2月 15日[편집]

뭇 까마귀가 경복궁을 빙빙 돌고 다음날도 또한 그와 같이 하다[편집]

○丙辰/群烏回翔于景福宮。 明日亦如之。

뭇 까마귀가 경복궁(景福宮)을 빙빙 돌았고, 다음날도 또한 그와 같이 하였다.


노비 변정의 잘못으로 좌산기 권담을 강릉에 유배하다[편집]

○流左散騎權湛于江陵。 初門下府劾辨定都監使田祖生爲誤決, 上疏請罪, 下其疏于憲府覈實。 憲府直祖生所決, 反劾郞舍, 湛流江陵, 餘皆罷職。

좌산기(左散騎) 권담(權湛)을 강릉(江陵)에 유배하였다. 처음에 문하부(門下府)에서 변정 도감사(辨定都監使) 전조생(田祖生)이 오결(誤決)하였다 논핵하고, 상소하여 죄주기를 청하였었다. 그 소(疏)를 헌부(憲府)에 내려 핵실(覈實)하게 하니, 헌부에서 전조생의 판결한 것을 곧게 여기고, 도리어 낭사(郞舍) 권담을 탄핵하여 강릉으로 유배하고, 나머지는 모두 파직시켰다.


송경으로 도읍을 옮길 의도를 은연중에 말하다[편집]

○至留後司, 御壽昌宮登北苑, 顧謂左右曰: “以前朝太祖之智, 建都于此, 豈偶然哉!” 遂有移都松京之志。

유후사(留後司)에 이르러, 수창궁(壽昌宮)에 나아가서 북원(北苑)에 올라가 좌우 근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고려 태조의 지혜로서 여기에 도읍을 세운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겠는가!"

하였으니, 드디어 송경(松京)으로 도읍을 옮길 뜻이 있었던 것이다.


2月 19日[편집]

목성이 헌원성 좌각을 범하는데 간격이 2치 쯤 되다[편집]

○庚申/木星犯軒轅左角, 隔二寸許。

목성(木星)이 헌원성(軒轅星) 좌각(左角)을 범하였는데, 간격이 2치[寸]쯤 되었다.


뭇 까마귀가 궁성 북원에 모여 울다[편집]

○群烏聚噪于宮城北園。

뭇 까마귀가 궁성 북원(北園)에 모여서 울었다.


한식이라 친히 제릉에 제사지내는데, 흉년이라 재궁을 수리하는 역사를 정지시키다[편집]

○上以寒食, 親祭齊陵, 當祭下淚。 時使僧徒, 修葺齋宮, 上曰: “歲方凶歉, 姑停此役。”

임금이 한식(寒食)이라 하여 친히 제릉(齊陵)에 제사하였는데, 제사지낼 때를 당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때에 승도(僧徒)를 시켜 재궁(齋宮)을 수리하였는데, 임금이 말하였다.

"해가 바야흐로 흉년이니, 우선 이 역사를 정지시키도록 하라."


2月 23日[편집]

까치가 근정전 망새에 집을 지다[편집]

○甲子/鵲巢于勤政殿角。

까치가 근정전(勤政殿) 망새에 집을 지었다.


2月 24日[편집]

유후사에서 돌아와 태상왕을 알현하다[편집]

○乙丑/至自留後司, 見于太上王。

유후사(留後司)에서 돌아와서 태상왕을 알현하였다.


2月 25日[편집]

바람이 크게 불고 또 비가 내리다[편집]

○丙寅/大風且雨。

바람이 크게 불고 또 비가 내렸다.


경연에서 시독 배중륜에게 옷을 하사하다[편집]

○賜衣于經筵侍讀裵仲倫。

경연 시독(經筵侍讀) 배중륜(裵仲倫)에게 옷을 하사하였다.


2月 26日[편집]

술잔만한 유성이 각성 북쪽에서 나와 저성 서쪽으로 들어가다[편집]

○丁卯/流星大如杯, 出角北, 入氐西。

유성(流星)의 크기가 술잔만 하였는데, 각성(角星) 북쪽에서 나와 저성(氐星) 서쪽으로 들어갔다.


종척과 공신을 모아 도읍 옮길 것을 의논하여 송경에 환도하기로 정하다[편집]

○會宗戚及功臣, 議移都。 書雲觀上言: “群烏聚噪, 野鵲來巢, 災異屢見, 宜修省消變, 且宜避方。” 上乃悉召宗親及左政丞趙浚等諸宰, 執示以書雲觀所上書, 且問避方可否, 皆對以宜避。 上問: “避諸何方?” 對曰: “畿內州縣, 大小臣僚宿衛之士, 無所依寓, 松都, 宮闕及群臣第宅皆完。” 遂定議還于松京。 初都人皆懷舊都, 聞欲還都, 相與喜悅, 提携負戴, 絡繹于路, 使守城門以止之。

종척(宗戚)과 공신을 모아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였다. 서운관(書雲觀)에서 상언(上言)하였다.

"뭇 까마귀가 모여서 울고, 들 까치가 와서 깃들고, 재이(災異)가 여러 번 보였사오니, 마땅히 수성(修省)하여 변(變)을 없애야 하고, 또 피방(避方)하셔야 합니다."

임금이 이에 종친과 좌정승 조준(趙浚) 등 여러 재상들을 모두 불러 서운관에서 올린 글을 보이고, 또 피방해야 될지의 가부를 물으니, 모두 피방하여야 된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어느 방위로 피방하여야 할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경기 안의 주현(州縣)에는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숙위(宿衛)하는 군사가 의탁할 곳이 없고, 송도(松都)는 궁궐과 여러 신하의 제택(第宅)이 모두 완전합니다."

하니, 드디어 송경(松京)에 환도하기로 의논을 정하였다. 애초부터 도성 사람들이 모두 구도(舊都)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환도한다는 말을 듣고 서로 기뻐하여 손에 손을 잡고 이고 지고 하여 길에 연락부절하니, 성문(城門)을 지키어 이를 제지하도록 하였다.


元年 三月[편집]

3月 1日[편집]

노비 변정 도감을 혁파하고 업무는 형조 도관으로 이송하다[편집]

○〔壬申〕/罷奴婢辨定都監, 其未決及誤決者, 悉送刑曹都官。

노비 변정 도감(奴婢辨定都監)[26]을 혁파하고, 아직 판결하지 못한 것과 잘못 판결한 것을 모두 형조 도관(刑曹都官)으로 이송하였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요동의 동녕위 소속 군인 한 사람이 도망쳐 와서 명나라 정변 소식을 권하다[편집]

○軍一人自遼東逃來, 本國人也。 屬東寧衛, 以遼東役煩逃還, 言: “燕王欲祭太祖高皇帝, 率師如京, 新皇帝許令單騎入城。 燕王乃還興師, 以盡逐君側之惡爲名。”

군인 한 사람이 요동(遼東)에서 도망쳐 왔는데, 본국 사람이었다. 동녕위(東寧衛)에 소속된 사람인데, 요동의 역사가 번다하므로 도망쳐 돌아온 것이었다. 말하기를,

"연왕(燕王)[27]이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28]에게 제사지내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경사(京師)에 갔는데, 새 황제(皇帝)[29]가 단기(單騎)로 성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연왕(燕王)이 곧 돌아와서 군사를 일으켜 황제 곁의 악한 사람을 모조리 추방하겠다고 위명(爲名)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고 중추원 부사 구성우의 처 유씨를 주살하다[편집]

○誅故中樞院副使具成祐妻柳氏。 柳氏初適金益達, 益達娶之三日而去, 後適成祐, 成祐無後卒。 柳氏聲言追福, 如僧伽寺, 私於僧信生, 信生無時往來。 成祐奴小古未、婢英生等, 欲伺執之, 柳氏與信生謀, 反殺二人, 事覺。 憲司執柳氏及信生鞫之, 請誅之, 上曰: “所犯雖大, 然春夏, 生長萬物之時, 古法忌殺。 待秋分後斷之, 若何?” 左右曰: “罪若非十惡, 待秋可也。” 上曰: “若秋分前忌殺, 則何擇十惡與否!” 良久乃依申。 降倭及吾郞哈等, 請于靖安公曰: “願宥其罪以爲妻。” 靖安公不許曰: “柳氏, 世族也。 寧抵死, 不可如仁達之妻也。”

고(故)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구성우(具成祐)의 처 유씨(柳氏)를 주살(誅殺)하였다. 유씨가 처음에 김익달(金益達)에게 시집갔었는데, 익달이 장가든 지 사흘 만에 버리었다. 뒤에 구성우에게 시집갔는데, 구성우가 아들이 없이 죽었다. 유씨가 명복을 빈다고 성언(聲言)하고 승가사(僧伽寺)에 가서 중 신생(信生)과 사통(私通)하여, 신생이 때 없이 왕래하였다. 구성우의 종 소고미(小古未)와 계집종 영생(英生) 등이 엿보다가 잡으려 하니, 유씨가 신생과 공모하여 도리어 두 사람을 살해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헌사(憲司)에서 유씨와 신생을 잡아 국문하고 주살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범한 바가 크기는 하지만, 봄·여름은 만물이 생장하는 때라, 옛 법에도 죽이는 것을 꺼렸으니, 추분(秋分) 뒤를 기다려서 단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좌우가 말하기를,

"죄가 만일 십악(十惡)[30]이 아니라면 가을을 기다려도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추분 전에 살생하는 것을 꺼린다면, 십악인지의 여부를 가릴 것이 있겠는가?"

하고, 한참 만에 헌사의 청대로 하였다. 항복한 왜인(倭人)과 오랑합(吾郞哈) 등이 정안공(靖安公)에게 청하기를,

"원하건대, 그 죄를 용서하여 아내를 삼게 하여 주소서."

하니, 정안공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말하였다.

"유씨는 세족(世族)이다. 차라리 죽게 둘지언정, 인달(仁達)의 아내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헌사에서 내관 이득분·이강달을 탄핵하였으나 용서하여 경외 종편하다[편집]

○宥內官李得芬、李剛達, 京外從便。 憲司上言: “太上王時, 興土木之役, 勞民傷財者, 金師幸也; 執權弄法者, 曹恂也, 今皆伏誅。 從臾佛事, 虛竭倉庫者, 得芬也。 乞以師幸、曹恂之例罪之。” 上大怒, 以其狀抵地, 進掌務責之曰: “得芬負如是罪, 何不早治, 待予放宥, 而後請罪乎? 是辱我也。” 留疏不下。

내관(內官) 이득분(李得芬)·이강달(李剛達)을 용서하여 경외 종편(京外從便)[31]하였다. 헌사(憲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태상왕 때에 토목의 역사를 일으켜서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물을 손상시킨 자는 김사행(金師幸)이고, 권세를 잡아 법을 농간한 자는 조순(曹恂)이었는데, 지금 모두 복주(伏誅)되었습니다. 불사(佛事)를 행하도록 권하여 창고를 탕진시킨 자는 이득분이니, 빌건대, 김사행·조순의 예로 죄를 주소서."

임금이 크게 노하여 그 소장을 땅에 던지고, 장무(掌務)를 앞에 나오게 하여 책하기를,

"이득분이 이 같은 죄를 지었으면, 왜 일찍 다스리지 않고, 내가 석방하여 용서한 것을 기다린 뒤에 죄주기를 청하는가? 이것은 나를 욕하는 것이다."

하고, 소(疏)를 머물러 두고 내려보내지 아니하였다.


3月 4日[편집]

까치가 근정전 취두에 깃들다[편집]

○乙亥/鵲巢于勤政殿頭。

까치가 근정전(勤政殿) 취두(鷲頭)에 깃들었다.


3月 5日[편집]

까치가 종루 꼭대기에 깃들다[편집]

○丙子/鵲巢于鐘樓角。

까치가 종루(鍾樓) 꼭대기에 깃들었다.


이득분을 외방 종편하다[편집]

○李得芬外方從便。 上擧司憲府疏曰: “是憲司辱我也。 欲焚之, 如何?” 諸公侯及宰樞僉曰: “所司狀詞過度矣。” 大司憲趙璞在告, 始出力請, 上不獲已下其疏, 止令外方從便。

이득분(李得芬)을 외방 종편(外方從便)하였다. 임금이 사헌부의 소장을 들고서 말하기를,

"이것은 헌사가 나를 욕한 것이다. 태워버리려고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여러 공후(公侯)와 재추(宰樞)가 모두 말하기를,

"헌사의 소장 글이 지나쳤습니다."

하였다. 대사헌 조박(趙璞)이 휴가 중에 있다가 비로소 나와서 극력 청하니, 임금이 부득이 그 소(疏)를 내려 주고 다만 외방 종편(外方從便)만 시켰다.


3月 7日[편집]

유후사로 환도하다. 공후는 모두 따라가고 각사의 인원은 반씩만 따라가다[편집]

○戊寅/還于留後司, 公侯皆從之, 各司半焉。 太上王動駕, 懷安君芳幹及各司一員從之。 道過貞陵, 周觀趑趄, 且曰: “初移漢陽, 非獨吾志, 與國人議之也。” 掩涕而去。

유후사(留後司)로 환도(還都)하니, 공후(公侯)는 모두 따르고, 각사(各司)에서는 반씩만 따랐다. 태상왕이 거가(車駕)를 움직이니, 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과 각사의 관원 한 사람씩이 따랐는데, 길이 정릉(貞陵)[32]을 지나니, 두루 살펴보고 머뭇거리면서 또 말하기를,

"처음에 한양(漢陽)으로 옮긴 것은 오로지 내 뜻만이 아니었고, 나라 사람과 의논한 것이었다."

하고, 눈물을 흘리다가 갔다.


3月 9日[편집]

안개가 끼어서 지척의 사람도 보이지 않다[편집]

○庚辰/霧, 咫尺不見人。

안개가 끼어서 지척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태상왕이 새벽에 먼저 유후사에 들어가서 변안렬의 옛집에 나아가다[편집]

○太上王昧爽先入留後司, 御邊安烈故第。

태상왕이 새벽에 먼저 유후사에 들어가서 변안렬(邊安烈)의 옛집에 나아갔다.


행재소에서 출입할 때에는 도사와 중들이 목탁을 치며 주문을 외우게 하다[편집]

○在行在所出入, 令道流僧振鐸呪之。

행재소(行在所)에서 출입할 때에는 도류(道流)와 중[僧]들로 하여금 목탁을 치며 주문을 외우게 하였다.


중들이 민호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리다. 간음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편집]

○下僧徒入民戶之禁。 上謂大司憲趙璞曰: “今國家紀綱陵夷, 僧徒因勸善, 屢入民戶, 奸犯婦女。 自今嚴禁, 毋蹈前弊。”

승도(僧徒)가 민호(民戶)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령(禁令)을 내렸다. 임금이 대사헌 조박(趙璞)에게 일렀다.

"지금 국가의 기강이 무너져서 승도가 권선(勸善)으로 인하여 여러 번 민호에 들어가서 부녀자를 간통하니, 이제부터는 엄금하여 전의 폐단을 밟지 말도록 하라."


임금이 노루나 꿩을 잡으면 즉시 태상전에 달려가 드리게 하다[편집]

○上每獲獐雉, 輒令馳獻太上殿。

임금이 매양 노루와 꿩을 얻으면, 곧 태상전(太上殿)에 달려가 드리게 하였다.


3月 13日[편집]

임금이 유후사에 이르러 곧 태상전에 나아갔다가 수창궁에 환어하다[편집]

○甲申/上至留後司, 將詣太上殿, 留儀衛於洞口, 以數騎入見, 還御壽昌宮。

임금이 유후사(留後司)에 이르러 곧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갔는데, 의장과 시위를 동구(洞口)에 머무르게 하고 몇 필의 말로써 들어가 뵙고, 수창궁(壽昌宮)에 환어(還御)하였다.


동북면과 강원도의 선군을 파하고 경기도·경상도·충청도·전라도 등의 선군을 감하다[편집]

○罷東北面江原道船軍, 減京畿、慶尙、忠淸、全羅、豐海道西北面船軍。 初, 上御經筵曰: “生民之苦, 莫甚於騎船。 棄父母妻子之養, 無有休息之期, 誠可痛惜。 比來, 倭寇寢息, 邊境稍安, 宜罷三分之一, 輪番代戍。 且賊之窺伺, 必有其處, 分泊要害之處, 擧烽相望, 傳檄相聚, 亦爲未晩。” 大司憲趙璞進曰: “殿下宵旰, 慮在安民, 臣等不勝欣抃。 臣數奉使邊境, 訊問民瘼, 民生艱苦, 莫甚於船軍。” 上曰: “然。” 卽命都承旨李文和, 傳旨都評議使司, 會議以聞。 都評議使司進六道船軍之籍, 上謂都承旨李文和曰: “江原道東北面深僻, 賊必經下道, 得至其地。 其船軍一行除罷, 但留守船軍, 輪番遞直。 京畿、全羅、慶尙、忠淸、豐海道西北面軍船, 除十分之一二, 各於其道要害之處分泊, 有變則擧烽相望, 迭爲掎角, 其除罷空船, 令人守之。”

동북면(東北面)·강원도(江原道)의 선군(船軍)을 파하고, 경기도·경상도·충청도·전라도·풍해도·서북면(西北面)의 선군을 감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말하였다.

"생민(生民)의 괴로움이 배 타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다. 부모 처자의 부양을 버리고 휴식할 시기도 없으니, 참으로 통석(痛惜)한 일이다. 근래 왜구(倭寇)가 조용하여 변경이 조금 편안하니, 마땅히 3분의 1을 파하여 윤번으로 교대하며 수자리하게 하라. 또 도적이 엿보는 것이 반드시 그러한 곳에 있을 것이니, 요해처(要害處)에 나누어 정박시키고, 봉화(烽火)를 들어 서로 망(望)보게 하며, 격문(檄文)을 전하여 서로 모이게 하면, 또한 늦지 않을 것이다."

대사헌 조박(趙璞)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소의 한식(宵衣旰食)하시어 생각이 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에만 있으시니, 신 등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자주 변경에 봉명 사신(奉命使臣)으로 나갔는데, 백성들의 병폐를 물어보면, 민생의 간고(艱苦)한 것이 선군(船軍)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고, 곧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해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전지(傳旨)하여 회의(會議)해 아뢰도록 하였다. 도평의사사에서 6도(道) 선군(船軍)의 군적(軍籍)을 바치니, 임금이 도승지 이문화에게 일렀다.

"강원도·동북면은 너무 궁벽하여, 도적이 반드시 하도(下道)를 거쳐야만 그곳에 이를 수 있으니, 그 선군을 모두 혁파하고 배를 지킬 선군만 머물러 두어서 윤번으로 교대하여 지키게 하고, 경기도·전라도·경상도·충청도·풍해도·서북면 군선(軍船)은 10분의 1, 2를 없애어 각각 그 도(道)의 요해처에 나누어 정박하게 하고, 변(變)이 있으면 봉화를 들어 서로 망(望)을 보면서 의각(掎角)의 세(勢)를 취하게 하며, 혁파한 빈 배는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라."


태상왕이 금강산 유점사에 가서 보살재를 베풀려고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다[편집]

○太上王欲幸金剛山楡岾寺, 設菩薩齋, 不果。 太上王將行, 上遣內官朴英文, 請曰: “去年水旱, 民失農業, 時罹飢饉, 矧今孟夏, 東作方殷, 大駕行幸, 則雖簡其扈從, 弊亦不小, 恐妨農事, 願待農隙。” 太上王幡然改曰: “父爲子言, 子爲父言, 安有不慮而發乎? 吾行誠有弊矣, 當止。” 英文還以告, 上喜, 賜衣一領。

태상왕(太上王)이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 가서 보살재(菩薩齋)를 베풀려고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태상왕이 장차 행차하려 하자, 임금이 내관(內官) 박영문(朴英文)을 보내어 청하였다.

"지난해에 수재와 한재로 백성들이 농업을 잃어서 기근(飢饉)에 걸려 있고, 더군다나 지금 첫여름에 농사일이 한창 바쁜데, 대가(大駕)가 거둥하시면 비록 호종(扈從)을 간편하게 하시더라도 폐단이 또한 작지 않아 농사에 방해될까 두려우니, 원하건대 농사의 한가한 때를 기다리소서."

태상왕이 번연(幡然)히 고치면서 말하였다.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말하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말하는 것이니, 어찌 생각지 않고 말할 리가 있나? 내가 가면 진실로 폐단이 있을 것이다. 마땅히 그만두겠다."

박영문이 돌아와 고하니, 임금이 기뻐하여 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태상왕이 명하여 궁문을 호위하는 군사를 철수시키다[편집]

○太上王命除軍士之衛宮門者。

태상왕이 명하여 궁문을 호위하는 군사를 없앴다.


조박의 건의에 따라 처음으로 집현전을 활성화시키는 조치를 취하다[편집]

○初令文臣會于集賢殿。 大司憲趙璞上言: “集賢殿, 徒有其名, 而無其實。 請復舊制, 多置書籍, 令藝文校書主之, 文臣四品以上職帶館閣者, 更日而會, 講論經籍, 以備顧問。” 上深許之。 以左政丞趙浚、醴泉伯權仲和、大司憲趙璞、中樞權近ㆍ李詹爲提調官, 以文臣五品已下充校理, 七品已下充說書正字。

처음으로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집현전(集賢殿)에 모이게 하였다. 대사헌 조박(趙璞)이 상언(上言)하였다.

"집현전은 한갓 그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으니, 청컨대 옛 제도를 회복하여 서적을 많이 비치하고 예문 교서(藝文校書)로 하여금 주장하게 하되, 문신 4품(品) 이상으로서 관각(館閣)의 직책을 띤 자는 날을 번갈아 모여서 경적(經籍)을 강론하게 하여 고문(顧問)에 대비케 하소서."

임금이 심히 허락하고,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예천백(醴泉伯) 권중화(權仲和)·대사헌(大司憲) 조박(趙璞), 중추(中樞) 권근(權近)·이첨(李詹)으로 제조관(提調官)을 삼고, 문신 5품(品) 이하로 교리(校理)에 충당하고, 7품(品) 이하로 설서(說書)·정자(正字)에 충당하였다.


태상왕이 옛수도에 돌아온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새벽 밝기 전에 시중 윤환의 옛집에 이어하다[편집]

○太上王昧爽移御于侍中尹桓故第。 太上王嘗曰: “予遷都漢陽, 喪妃及子。 今日還都, 實有愧於都人。” 故其出入, 必用未明之時, 不使人見之。

태상왕이 새벽 밝기 전에 시중(侍中) 윤환(尹桓)의 옛집에 이어(移御)하였다. 태상왕이 일찍이 말하였다.

"내가 한양(漢陽)에 천도(遷都)하여 아내와 아들을 잃고 오늘날 환도하였으니, 실로 도성 사람에게 부끄럽도다. 그러므로 출입(出入)을 반드시 밝지 않은 때에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여야겠다."


내정에서 격구하고 다음날도 계속하다[편집]

○擊毬于內庭, 明日亦如之。

내정(內庭)에서 격구(擊毬)하고, 다음날도 하였다.


여리에서 경행하는 것을 파하자고 예조에서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편집]

○禮曹上疏, 請罷閭里經行。 其疏略曰: “前朝崇信佛道, 設閭里經行之制, 奉命監察, 具公服領僧徒, 周行里閭, 懸幡吹螺, 誦經作法。 願以春秋《藏經》之例革之。” 不允。

예조에서 상소하여 여리(閭里)에서 경행(經行)[33]하는 것을 파하자고 청하였는데, 그 소(疏)는 대략 이러하였다.

"고려에서 불도(佛道)를 숭신(崇信)하여 여리(閭里)에서 경행(經行)하는 제도를 설치하여, 명령을 받든 감찰(監察)이 공복(公服)을 갖추고 승도(僧徒)를 영솔하여 마을과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번(幡)을 달고 나각(螺角)을 불며, 경문을 외우고 작법(作法)을 행하였습니다. 원하건대, 봄·가을에 장경(藏經)하는 예에 의해 혁파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태상왕이 좌우 근신과 내관을 거느리고 관음굴에 거둥하여 능엄 법석을 베풀다[편집]

○太上王率左右內官, 幸觀音窟, 設《楞嚴》法席, 翌日還。

태상왕(太上王)이 좌우 근신과 내관(內官)을 거느리고 관음굴(觀音窟)에 거둥하여, 능엄법석(楞嚴法席)을 베풀고, 이튿날 돌아왔다.


대사헌 조박에게 격구하는 까닭을 말하다[편집]

○語大司憲以擊毬之故。 上謂趙璞曰: “寡人本有疾, 自潛邸, 夜則心煩不能寐, 及晨乃睡, 尋常晩起, 諸父昆弟, 謂予爲怠。 卽位以來, 心懷戒謹, 不知有疾, 近日更作, 心氣昏惰, 皮膚日瘁。 且予生長武家, 山行水宿, 馳騁成習。 久居不出, 必生疾病, 故姑爲擊毬之戲, 以養氣體耳。” 璞唯唯。

대사헌(大司憲)에게 격구(擊毬)하는 까닭을 말하였는데, 임금이 조박(趙璞)에게 이르기를,

"과인은 본래 병이 있어서, 잠저(潛邸) 때부터 밤이면 마음속으로 번민하여 자지 못하고, 새벽에야 잠이 들어 항상 늦게 일어났다. 그래서 여러 숙부와 형제들이 게으르다고 하였다. 즉위한 이래로 경계하고 삼가는 마음을 품어서 병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근일에 다시 병이 생겨서 마음과 기운이 어둡고 나른하며, 피부가 날로 여위어진다. 또 내가 무관(武官)의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산을 타고 물가에서 자며 말을 달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므로, 오래 들어앉아서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잠정적으로 격구하는 놀이를 하여 기운과 몸을 기르는 것이다."

하니, 조박이 그저 ‘예, 예’만 하였다.


의원 양홍달과 양홍적 등을 다른 중앙 관리들과 함께 사진(仕進)하는 것을 허락하다[편집]

○許醫人楊弘達、弘迪等, 與朝士同仕。 趙璞進曰: “醫人楊弘達、弘迪等, 皆爲宮庫別坐。 監察以爲賤隷子孫, 不欲同坐。” 上曰: “予亦曾聞之矣。 然弘達等, 良醫也。 我太上王再患病, 盡心醫療。 由是太上王甚愛之, 予亦視猶兄弟。 且其爲賤無明證, 雖與之同事, 亦何嫌耶? 若有功國家, 則雖賤隷, 豈無可通之理乎?”

의인(醫人) 양홍달(楊弘達)·양홍적(楊弘迪) 등이 조사(朝士)와 함께 사진(仕進)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조박(趙璞)이 말하기를,

"의인(醫人) 양홍달·양홍적 등이 모두 궁고(宮庫) 별좌(別坐)가 되었는데, 감찰(監察)이 천한 노예의 자손이라고 하여 함께 앉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나도 일찍이 들었다. 그러나 양홍달 등은 훌륭한 의원이다. 태상왕께서 두 번이나 병환이 나시었는데, 마음을 다해 구료하였기 때문에 태상왕께서 심히 사랑하시고, 나도 또한 형제같이 본다. 또 그가 천인이라는 것은 분명한 증거가 없으니, 비록 함께 일을 하더라도 또한 무슨 혐의스러울 것이 있겠는가! 만일 국가에 공이 있다면, 비록 천례(賤隷)라도 어찌 통(通)할 도리가 없겠는가?"


태상왕이 관음굴에 거둥하여 평주와 온천에 가려다가 되돌아오다. 중 신강을 만나 이방번·이방석의 죽음을 한탄하다[편집]

○太上王以單騎, 幸觀音窟, 欲遂如平州溫泉, 不果乃還。 太上王將行, 上聞之驚懼, 遣內官朴英文請曰: “父王不預命所之, 而忽如溫泉, 則國人未知所之, 嘵嘵失望。 乞還宮, 諏日乃行。” 不允。 門下府上言: “往者, 奸臣鄭道傳、南誾等, 擅執國柄, 蒙蔽聰明, 以亂嫡庶之分, 禍幾不測。 幸賴太上王, 知天命之不可遏、人心之不可違, 禪于殿下, 俾嫡庶正其分, 長幼得其序, 而殿下奉事太上王, 視膳問安, 日篤誠敬。 太上王旣爲國君之父, 尊莫比焉, 侍其左右者, 宜盡誠啓達, 以致動靜有節, 出入以時。 臣等竊聞今月二十六日夜半, 太上王以單騎, 出幸觀音窟, 欲遂如溫泉, 今當農時, 其弊不細。 伏惟殿下, 動之以誠, 達之以義, 請止其行, 以副臣民之望。 且治國之要, 號令當出于一。 太上王所御車騎僕從, 宜啓于殿下, 殿下命攸司以備焉。 今者宦官李匡, 出納太上王之命, 不啓于殿下, 又令百官不知所之, 固未合於國家之大體。 請下匡攸司, 鞫問其故, 痛懲垂鑑, 繼自今, 太上王所御車騎僕從, 皆啓于殿下。” 上兪允, 李匡, 置而不問。 太上王左右聞議匡之疏, 罔不恐懼, 是夕還宮。 白雲寺老僧信剛, 見太上王, 嘆曰: “芳蕃、芳碩俱死矣。 予雖欲忘, 不可得也。” 信剛對曰: “願上勿用哀戚。 彼之不幸, 上之傷心, 皆自取也。” 太上王然之。 命書雲觀, 卜太上王幸溫泉吉日以聞, 太上王大悅。 上欲獻壽, 太上王聞之, 辭曰: “子之享父, 雖出至情, 待予浴還可也。” 上從之。

태상왕이 단기(單騎)로 관음굴(觀音窟)에 거둥하여 드디어 평주(平州) 온천(溫泉)에 가려 하다가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태상왕이 장차 행차하려 하자, 임금이 듣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내관 박영문(朴英文)을 보내어 청하기를,

"부왕(父王)께서 미리 가실 곳을 명령하지 않으시고 갑자기 온천에 가시면, 나라 사람들이 가신 곳을 알지 못하여 놀라고 두려워서 실망할 것입니다. 빌건대, 환궁하셔서 날을 가리어 행차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지난번에 간신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이 마음대로 나라 권세를 잡고 임금의 총명을 가려서 적서(嫡庶)의 분수를 어지럽혔으므로, 화가 거의 불측한 지경에 이르렀었습니다. 다행히 태상왕께서 막지 못할 천명과 어기지 못할 인심을 아시고, 전하에게 선위(禪位)하시어서, 적서의 분수가 바루어지고, 장유(長幼)가 그 차서를 얻었습니다. 전하께서 태상왕을 섬기시되 시선(視膳)[34]과 문안(問安)을 매일같이 정성과 공경으로 하시고, 태상왕께서는 이미 나라 임금의 아버지가 되시었으니 높기가 비할 데 없습니다. 그 좌우에 모신 자가 마땅히 정성을 다해 계달하여 동정(動靜)에 절도가 있고, 출입에 때가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신 등이 가만히 들으니, 이달 26일 밤중에 태상왕께서 단기로 관음굴(觀音窟)에 거둥하셨다가 드디어 온천으로 가시려 하였다 하오니, 지금 농사 때를 당하여 그 폐단이 작지 않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지성으로 움직이고 의리로 진달하여 그 행차를 중지하도록 청하셔서 신민의 소망에 부합하게 하소서. 또 나라를 다스리는 요법은 호령(號令)이 한 곳에서 나와야 합니다. 태상왕께서 어거하는 거기(車騎)와 복종(僕從)은 마땅히 전하께 아뢰어서, 전하께서 유사에 명하여 준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환자(宦者) 이광(李匡)이 태상왕의 명령을 출납하면서 전하께 아뢰지 않고, 또 백관으로 하여금 가는 곳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국가의 대체에 합하지 못합니다. 청하건대, 이광을 유사에 내려 그 까닭을 국문하고 엄하게 징치하여 감계(鑑戒)를 남기시고, 이제부터는 태상왕이 타시는 거기(車騎)와 복종은 모두 전하께 아뢰도록 하소서."

임금이 유윤하고, 이광은 묻지 않았다. 태상왕의 좌우에서 이광을 논죄하여 상소하였다는 말을 듣고서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날 저녁에 환궁하였다. 백운사(白雲寺)의 늙은 중 신강(信剛)이 태상왕을 알현하니, 태상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방번(李芳蕃)·이방석(李芳碩)이 다 죽었다. 내가 비록 잊고자 하나 잊을 수가 없구나!"

하니, 신강이 대답하기를,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의 불행과 성상의 상심(傷心)은 모두 자취(自取)한 것입니다."

하니, 태상왕이 그렇게 여겼다. 임금이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태상왕이 온천에 거둥할 길일(吉日)을 가려 아뢰게 하니, 태상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임금이 헌수(獻壽)하고자 하니, 태상왕이 듣고 사양하기를,

"자식이 아비에게 연향(宴享)을 드리는 것이 비록 지정(至情)에서 나온 것이나, 내가 목욕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충청도 등의 기민을 진휼하고 경차관을 3도에 보내 수령들의 치적을 살피다[편집]

○賑忠淸、全羅、豐海道飢民, 分遣敬差官于三道, 且考守令賑貸能否。

충청도·전라도·풍해도(豐海道)의 기민(飢民)을 진휼하고, 경차관(敬差官)을 3도에 나누어 보내어 수령들의 진대(賑貸)하는 것의 능하고 능하지 못한 것을 상고하게 하였다.


元年 夏四月[편집]

4月 1日[편집]

태상왕이 평주 온천에 가다[편집]

○〔辛丑〕/太上王如平州溫泉, 上遣諸公侯, 享于野次, 太上王却之。 太上王之行, 靑原侯沈淙、義寧侯孟宗、中樞趙仁瓊ㆍ張思靖等隨駕。 上又遣內官朴英文, 英文未至, 太上王只令饋女官, 使英文言於上曰: “吾嘗言勿爲此享, 今乃爾耶?”

태상왕(太上王)이 평주(平州) 온천(溫泉)에 갔다. 임금이 여러 공(公)·후(侯)를 보내어 야차(野次)[35]에서 연향하니, 태상왕이 이를 물리쳤다. 태상왕의 행차에 청원후(靑原侯) 심종(沈淙)·의령후(義寧侯) 이맹종(李孟宗), 중추(中樞) 조인경(趙仁瓊)·장사정(張思靖) 등이 거가(車駕)를 따랐다. 임금이 또 내관 박영문(朴英文)을 보내었는데, 박영문이 이르기 전에 태상왕이 다만 여관(女官)만 공궤(供饋)하게 하고, 박영문을 시켜 임금에게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연향을 베풀지 말라고 하였는데, 지금 어찌 이처럼 하느냐?"


의안공 이화를 신도에 보내 종묘에 제사하게 하다[편집]

○遣義安公和于新都, 享宗廟。 召禮曹曰: “齊陵之祭, 宜倣宗廟享禮。” 禮曹啓曰: “祭陵, 非古制也。 虞而安神, 事亡如事存, 孝之至也。 神懿王后, 雖不祔廟, 旣立原廟, 行四時祭, 則又不當祭陵也。” 不允, 但去犧牲。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를 신도(新都)에 보내어 종묘(宗廟)에 제사하게 하고, 예조를 불러 말하기를,

"제릉(齊陵)의 제사도 마땅히 종묘의 향례(享禮)와 같게 하라."

하니, 예조에서 아뢰었다.

"능(陵)에 제사하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닙니다. 우제(虞祭)를 지내서 신명을 편안하게 하고, 죽은 뒤에 섬기기를 생존하였을 때에 섬기는 것 같이 하는 것은 효도의 지극한 것입니다. 신의 왕후(神懿王后)는 비록 부묘(祔廟)는 하지 않았으나, 이미 원묘(原廟)[36]를 세우고 사시제(四時祭)를 행하오니, 능에 제사할 것이 없습니다."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다만 희생(犧牲)만 없애게 하였다.


4月 3日[편집]

유성이 저수 남쪽에서 나와서 기관성 북쪽으로 들어가다[편집]

○癸卯/流星出氐南, 入騎官北。

유성(流星)이 저수(氐宿) 남쪽에서 나와서 기관성(騎官星) 북쪽으로 들어갔다.


4月 4日[편집]

큰 비가 내리어 신도 서산의 큰 돌이 무너지다[편집]

○甲辰/大雨, 新都西山大石崩。

큰 비가 내리어 신도(新都) 서산(西山)의 큰 돌이 무너졌다.


정안공과 상당후 이저를 온천에 보내 태상왕에게 연향하다[편집]

○遣靖安公及上黨侯李佇于溫泉, 享太上王。

정안공(靖安公)과 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를 온천(溫泉)에 보내어 태상왕에게 연향하였다.


4月 5日[편집]

홍수가 나다[편집]

○乙巳/大水。

홍수(洪水)가 났다.


원종 공신과 회군 공신이 죽은 뒤에는 그 전지를 다른 사람이 진고하도록 허락하다[편집]

○戶曹給田司, 請以(元從)〔原從〕及回軍功臣田, 身後許人陳告, 從之。

호조(戶曹)의 급전사(給田司)에서 원종 공신(元從功臣)과 회군 공신(回軍功臣)의 전지를 당자가 죽은 뒤에는 다른 사람이 진고(陳告)하도록 허락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서북면 도순문사 겸 평양윤 성석린이 사직하니 지중추원사 이직을 대신 임명하다[편집]

○西北面都巡問使兼平壤尹(成石隣)〔成石璘〕, 以老病上疏乞骨, 遣知中樞院事李稷代之。

서북면 도순문사 겸 평양 윤(西北面都巡問使 兼平壤尹) 성석린(成石璘)이 늙고 병들었다 하여 상소(上疏)해서 걸해골(乞骸骨)하니,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직(李稷)을 보내어 대신하게 하였다.


중추원 사 조진을 보내 금산현에 태를 안치하게 하고 금산을 군으로 승격시키다[편집]

○遣中樞院事趙珍, 安胎于金山縣, 陞金山爲郡。

중추원 사(中樞院事) 조진(趙珍)을 보내어 금산현(金山縣)에 태(胎)를 안치(安置)하게 하고, 금산을 승격시켜 군(郡)으로 하였다.


과거시험에 합격한 김반 등 33인을 집현전에서 시험하여 차등을 매기다[편집]

○試知貢擧驪興伯閔霽、同知貢擧淸城君鄭擢等所取金泮等三十三人于集賢殿, 擢田可植爲第一。 賜可植、趙叙、李公義內廐馬各一匹。 叙, 英茂子; 公義, 茂子。 閔霽宴門生于其第, 遣中官賜醞。

지공거(知貢擧) 여흥백(驪興伯) 민제(閔霽)·동지 공거(同知貢擧) 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 등이 뽑은 김반(金泮) 등 33인을 집현전(集賢殿)에서 시험하여, 전가식(田可植)을 제1등으로 뽑고, 전가식·조서(趙敍)·이공의(李公義)에게 내구마(內廐馬) 각각 1필씩을 하사하였다. 조서는 조영무(趙英茂)의 아들이요, 이공의는 이무(李茂)의 아들이었다. 민제(閔霽)가 문생(門生)들에게 그의 집에서 잔치를 베푸니, 임금이 중관(中官)을 보내어 술을 하사하였다.


4月 16日[편집]

성거산 금신사 앞의 큰 돌이 무너지다[편집]

○丙辰/聖居山金神寺前大石崩。

성거산(聖居山) 금신사(金神寺) 앞의 큰 돌이 무너졌다.


태상왕이 온천에서 돌아오다. 흥천사 사리전 공사를 독촉하다[편집]

○太上王還自溫泉。 上只率宗親及甲士, 迎于西普通, 太上王從間道還宮, 上馳馬以至入見。 太上王以興天寺舍利殿營繕遲緩爲言, 上遣內官朴英文, 督其役。

태상왕이 온천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다만 종친과 갑사(甲士)를 거느리고 서보통(西普通)에서 맞으니, 태상왕이 사잇길을 따라 환궁하였다. 임금이 말을 달려 이르러서 들어가 알현하니, 태상왕이 흥천사(興天社) 사리전(舍利殿)의 영선(營繕)이 더디다고 말하였다. 임금이 내관 박영문(朴英文)을 보내어 그 역사를 독촉하게 하였다.


문하부에서 임금의 거둥은 반드시 의장과 시위를 갖추어야 한다고 하니 윤허하다[편집]

○門下府上疏以爲: “人君擧動, 必備儀衛。” 上允。 疏略曰:

擧動, 人君之大節, 不可不謹, 亦不可不嚴。 是以古之帝王, 雖當視朝聽政之時, 必出警入蹕, 以謹動靜; 必備儀仗, 以示尊嚴。 況當門外行幸之時, 安有不備儀仗, 又令百官不得侍從乎? 臣等竊聞, 今月十八日, 殿下幸于西郊, 以迎太上王, 不令百官侍從, 但以甲士侍衛, 其於警蹕謹嚴之禮何? 願自今如有行幸, 必命所之, 備儀衛具侍從, 以嚴動作, 垂範後世。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上疏)하여 인군의 거둥은 반드시 의장과 시위를 갖추어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상소는 대략 이러하였다.

"거둥은 인군의 큰 절도(節度)이니 삼가지 않을 수 없고, 또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제왕이 비록 조회를 보고 정사를 듣는 때를 당하여서도 반드시 출입함에 경필(警蹕)[37]을 행하여서 동정(動靜)을 삼가고, 의장을 갖추어서 존엄을 보였습니다. 하물며 문밖에 행차할 때를 당하여 어찌 의장을 갖추지 않고, 또 백관으로 하여금 시종(侍從)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신 등이 들으니, 이달 18일에 전하께서 서교(西郊)에 행차하여 태상왕을 맞이할 때에 백관으로 하여금 시종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갑사(甲士)로 시위하게 하셨다 하오니, 경필(警蹕)을 행하여 근엄(謹嚴)케 하는 예에 어떠하겠습니까? 이제부터 만일 행차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가시는 곳을 말씀하시고, 의위(儀衛)와 시종(侍從)을 갖추어 동작(動作)을 엄하게 하여 후세에 모범을 보이소서."


새로 급제한 사람에게 은영연을 베풀다[편집]

○賜新及第恩榮宴。

새로 급제(及第)한 사람에게 은영연(恩榮宴)[38]을 베풀었다.


4月 25日[편집]

뭇 까마귀가 백록산에 모이다[편집]

○乙丑/群烏集白鹿山。

뭇 까마귀가 백록산(白鹿山)에 모였다.


4月 27日[편집]

우박이 내리다[편집]

○丁卯/雨雹。

우박이 내렸다.


양청에 나아가서 척석 놀이를 구경하다[편집]

○御涼廳, 觀擲石之戲。

양청(涼廳)에 나아가서 척석(擲石)[39]놀이를 구경하였다.


마전현에 사당 세울 것을 명하고 고려 태조 등 7왕에게 제사지내다[편집]

○命立廟於麻田縣, 祭前朝太祖及惠、成、顯、文、忠敬、忠烈、恭愍七王。 以七王皆有功德也。

마전현(麻田縣)에 사당을 세울 것을 명하고, 고려 태조(太祖)와 혜종(惠宗)·성종(成宗)·현종(顯宗)·문종(文宗)·충경왕(忠敬王)[40]·충렬왕(忠烈王)·공민왕(恭愍王)의 7왕(王)에게 제사지냈는데, 7왕은 모두 공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흥·유운 등을 불러 대궐 뜰에서 격구하다[편집]

○召都興、柳雲等, 擊毬殿庭。

도흥(都興)·유운(柳雲) 등을 불러 대궐 뜰에서 격구하였다.


元年 五月[편집]

5月 1日[편집]

문하부에서 올린 시무(時務) 10개 조에 관한 상소문[편집]

○〔庚午〕/門下府上疏, 陳時務十事, 不允。 疏曰:

一, 孝者, 萬善之原, 百行之本。 堯、舜之道, 不越是矣。 太上王春秋已高, 宜勤視膳問安之職。 願自今, 一依唐太宗奉養太上之制, 置太上王宮於城中, 號曰太安宮, 日勤問安, 垂範萬世。 一, 太上王尊爲國君之父, 而殿下以一國之富, 奉事焉, 其奉養之道, 不爲不厚。 願自今, 其宮中執事, 定額數擇良能, 以幹其事。 其侍從者, 擇耆舊夙有名望者, 更迭入侍, 又令節制使輪番侍衛, 僧徒奴隷之輩, 毋得擅自出入。 一, 古者聖王, 設官制祿, 各有其職, 未有無其職而食其祿者也。 方今以老病, 而不宜職事者, 皆授檢校。 不任其職, 坐耗天祿, 殆非先王設官制祿之義也。 自今大小臣僚年七十者, 許令致仕, 各就私第, 雖未至七旬, 而不宜職事者, 亦不許檢校之職。 且古禮, 婦人無外事, 尤不當受職。 今者翁主十九, 宅主五十二, 國夫人四, 女官九人, 摠計八十四人, 坐食天祿, 無益於國。 每當頒祿之際, 必用軍資所儲, 充其不足, 倉廩虛竭, 軍餉不足。 臣等竊聞, 朝無幸位, 則食者寡矣。 安有無其職而食祿者, 至於百數十餘人乎? 其夫有大勳勞, 旣已不次擢用, 又錫之土田臧獲, 報功之典, 固已厚矣。 豈可又令婦女, 竝受其祿乎? 其檢校之職、婦女之祿, 一切停罷。 一, 王者之道, 一言之善, 足以垂範萬世; 一行之失, 足以貽欺千古。 古者或以司過二人, 置諸左右, 以記得失。 今門下府郞舍之職, 以左右名之, 蓋其例也。 以左右親近之職, 不得與聞殿下言行之得失, 無乃曠其官而尸其祿乎? 臣等竊聞, 經筵之制, 非惟講明道學, 歷代興替之迹, 無所不講。 故善可爲法, 惡可爲戒, 足以聳動其善心, 懲創其逸志。 今者經筵官, 但知句讀, 不講道學之宗, 不陳歷代之迹, 故雖殿下日御經筵, 無補於聖學, 殊失經筵講官之職。 願自今, 每御經筵, 令臺諫一員, 更迭入侍, 又令經筵官, 講論治道, 至于日昃乃罷。 一, 打毬之戲, 其在殘元君臣失道荒淫之所爲也。 都興、柳雲、金師幸等, 游事殘元, 得見其事, 適値太上王創始之初, 進言曰: “人君處於宮中, 苟不運身, 必生疾病。 運身之利, 莫如打毬。” 乃行其術, 得蒙寵幸, 逢迎之罪, 莫大於斯。 師幸旣伏天誅, 其都興、柳雲等, 望令攸司, 收其職牒, 屛斥于外, 以戒後來。 且殿下纉承大業, 宜法先王之道, 何效殘元之所爲乎? 願自今, 毋行打毬之戲, 一動一靜, 節之以禮。 一, 昔唐太宗謂魏徵曰: “爲官擇人, 不可造次。 用一君子, 則君子皆至; 用一小人, 則小人競進矣。” 對曰: “然。 天下未定, 則專取其才, 不顧其行, 喪亂旣平, 則非才行兼備, 則不可用也。” 我太上王創始之初, 國步未定, 故要收輿望, 但取其才, 革臺諫告身之法, 始有官敎之制, 賢愚冒進, 雜處朝班, 棄廉亡恥, 士風不振, 于玆有年。 願革官敎之弊, 復告身之法, 以勵士風。 一, 尙衣院, 是爲殿下之內帑, 衣帶服飾之物, 一皆掌之, 但以憸小之徒, 掌其事, 以至枉費無度。 自今擇公廉之士, 以監其事。 一, 國保於民, 民保於信。 信者, 人君之大寶也。 殿下踐祚之初, 謂別鞍色, 其弊不小, 合於工曹, 諭告中外, 衆皆悅服。 曾未期年而復立, 固非示信於民也。 工曹之職, 摠百工以供王事。 自今革別鞍色, 永屬工曹。 一, 宰相之職, 論道經邦, 燮理陰陽而已。 如出納錢穀等細務, 有司存焉。 是以太上王卽位之初, 使司供應之任, 禮賓主之, 國用錢穀之數, 三司掌之, 所以敬大臣也。 自今革使司所置支應庫, 其所貯錢穀, 移於禮賓, 以備國用。 一, 古今帝王, 莫不得之於艱難, 失之於宴安。 故或有不遑暇食, 或有昧爽丕顯, 坐以待朝, 以勤政治。 殿下旣承大業, 誠宜夙夜匪懈, 以成至治。 奈何每衙日, 但受朝禮, 不自聽政? 昔者魯文公, 四不視朔, 筆之《春秋》, 垂戒萬世。 願自今每衙日, 令各司將平決庶務, 具本啓聞。

上讀至擊毬之事, 怒甚, 召左諫議安魯生詰之曰: “言官之職, 直言可也。 予之所爲, 歸咎父王可乎?” 命掌務起居注朴竪基勿視事, 留狀不下。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上疏)하여 시무(時務) 열 가지를 진술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1. 효(孝)라는 것은 만 가지 선(善)의 근원이요, 백 가지 행실의 근본이니, 요(堯)·순(舜)의 도(道)가 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태상왕(太上王)께서 춘추(春秋)가 이미 높으시니, 마땅히 시선(視膳)·문안(問安)의 직책을 부지런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한결같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태상(太上)을 봉양하던 제도에 의하여, 태상왕의 궁을 성안에 두어 ‘대안궁(大安宮)’이라 이름하고, 날마다 문안을 부지런히 하여 만세에 모범을 남기소서.

1. 태상왕은 높기가 국군(國君)의 아버지가 됩니다. 전하께서 한 나라의 부력(富力)으로 받들어 섬기시니, 봉양하는 도(道)가 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원하건대 이제부터 그 궁중의 집사(執事)는 액수를 정하여 어질고 능한 사람을 뽑아서 그 일을 보살피게 하시고, 시종하는 사람은 늙고 오래된 사람으로서 일찍부터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교대하여 입시하게 하시고, 또 절제사(節制使)로 하여금 윤번(輪番)으로 시위하게 하여, 승도(僧徒)와 노예의 무리는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게 하소서.

1. 예전에 성왕(聖王)이 관제(官制)와 녹(祿)을 제정하여 각각 그 직책이 있어서, 직책이 없이 녹(祿)을 먹는 자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늙고 병들어 직사(職事)에 마땅하지 않은 자를 모두 검교(檢校)를 주어서, 직책을 맡지 않고도 앉아서 천록(天祿)을 소모하니, 자못 선왕(先王)의 관제를 설치하고 녹을 제정한 뜻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대소 신료(臣僚) 가운데 나이가 70세인 자는 치사(致仕)하도록 허락하여 각각 사제(私第)로 나가게 하고, 비록 칠순(七旬)이 되지 않았더라도 직사에 마땅하지 않은 자는 또한 검교(檢校)의 직책을 허락하지 말 것입니다. 또한 고례(古禮)에는 부인(婦人)에게는 바깥일이 없다고 하였으니, 또한 직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옹주(翁主)가 19명, 택주(宅主)가 52명, 국부인(國夫人)이 4명, 여관(女官)이 9명, 총계 84인이 앉아서 천록을 먹으니, 나라에 도움될 것이 없습니다. 매양 반록(頒祿)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군자시(軍資寺)의 저장한 것을 사용하여 그 부족한 것을 보충하니, 창고가 비고 군사 양식이 부족합니다. 신 등은 듣자오니, 조정에 요행으로 차지한 벼슬이 없게 되면 먹는 자가 적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그 직책이 없이 녹을 먹는 자가 백 수십여 인이나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남편이 큰 훈로(勳勞)가 있어 이미 불차 탁용(不次擢用)[41]하고 또 토전(土田)과 노비[臧獲]를 주었으니, 공을 갚는 은전(恩典)이 이미 후한 것입니다. 어찌 또 부녀로 하여금 같이 녹을 받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검교의 직책과 부녀의 녹을 일체 정지하여 파하소서.

1. 왕자(王者)의 도(道)는 선(善)한 말 한 마디로 족히 만세에 모범을 남길 수 있고, 잘못된 행실 하나로 천고에 능멸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간혹 사과(司過) 두 사람을 임금 좌우에 두어서 잘잘못을 기록하게 하였는데, 지금 문하부(門下府)의 낭사(郞舍)의 직책을 좌우(左右)로 이름한 것이 대개 그 예입니다. 좌우에 있는 친근한 직책으로서도 전하의 언행의 잘잘못을 참여하여 듣지 못하니, 그 벼슬을 비워 두고 그 녹을 거저 주는 것이 아닙니까? 신 등이 들으니, 경연(經筵)의 제도는 도학(道學)을 강명(講明)하는 것뿐만 아니라 역대 흥망의 자취도 강구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선(善)한 것은 법이 될 수 있고, 악한 것은 경계가 될 수 있어, 족히 그 선한 마음을 용동(聳動)시키고 방종한 뜻을 징계할 수 있다 하옵니다. 지금 경연관은 다만 귀두(句讀)만 알아 도학의 종지(宗旨)도 강명(講明)하지 않고, 역대의 자취도 진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전하께서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시나 성학(聖學)에 도움이 없으니, 경연 강관(講官)의 직책을 대단히 잃은 것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매양 경연에 나아가시면 대간(臺諫) 한 사람으로 하여금 교대하여 입시하게 하고, 또 경연관으로 하여금 치도(治道)를 강론하게 하여, 날이 기운 뒤에 파하소서.

1. 타구(打毬)[42]의 놀이는 망한 원(元)나라 때에 임금과 신하가 도리를 잃고 황음(荒淫)하여 행하던 것입니다. 도흥(都興)·유운(柳雲)·김사행(金師幸) 등이 망한 원나라에 들어가서 벼슬하다가 그 일을 보고서는, 마침 태상왕의 창시(創始)하는 초기를 당하여 진언(進言)하기를, ‘인군이 궁중에 처하여 만일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입니다. 몸을 움직이는 데는 타구(打毬)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고, 즉시 그 술책을 행하여 총행(寵幸)을 입었으니, 윗사람의 뜻을 맞춘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김사행은 이미 벌써 천주(天誅)를 받았거니와, 도흥·유운 등도, 바라건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직첩을 거두고 외방에 내쫓게 하여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또 전하께서 대업을 이어받으시어 마땅히 선왕(先王)의 도(道)를 본받을 것이지, 어찌 망한 원나라의 하던 짓을 본받겠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는 타구(打毬)하는 놀이를 행하지 마시고,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예(禮)대로 절제하소서.

1. 옛적에 당나라 태종(太宗)이 위징(魏徵)에게 이르기를, ‘벼슬을 위하여 사람을 택하는 것을 함부로 할 수가 없다. 군자 한 사람을 쓰면 군자가 모두 이르고, 소인 한 사람을 쓰면 소인이 다투어 나온다’ 하였는데, 위징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천하가 안정되지 않았을 때에는 오로지 그 재주만 취하고 그 행실을 돌보지 않지마는, 난국이 평정된 뒤에는 재주와 행실을 겸비한 사람이 아니면 쓸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태상왕께서 창시하던 처음에는 국보(國步)[43]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망(輿望)을 거두기 위하여 다만 재주만을 취하고, 대간(臺諫)의 고신법(告身法)을 고쳐서 비로소 관교(官敎)[44]의 제도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마구 나와서 조정의 반열에 섞여 있으므로, 염치를 잃어 선비의 기풍이 진작되지 못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원하건대, 관교(官敎)의 폐단을 고치고 고신(告身)의 법을 회복하여 선비의 기풍을 권면하소서.

1. 상의원(尙衣院)은 전하(殿下)의 내탕(內帑)이므로, 의대(衣帶)·복식(服飾)의 물건을 일체 모두 관장(管掌)하는데, 다만 간사한 소인의 무리로 하여금 맡게 하여 절도없이 낭비하는 데에 이르니, 이제부터 공정하고 청렴한 선비를 뽑아서 그 일을 감독하게 하소서.

1. 나라는 백성으로 보존되고 백성은 신(信)으로 보존되오니, 신(信)이라는 것은 인군의 큰 보배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시던 처음에 별안색(別鞍色)[45]은 그 폐단이 작지 않다고 하여 공조에 합하고, 중외(中外)에 유고(諭告)하시니, 민중들이 모두 기뻐하여 복종하였는데, 아직 1년도 못되어서 다시 세우시니, 진실로 백성에게 신(信)을 보이는 일이 아닙니다. 공조의 직책은 백공(百工)을 총괄하여 왕사(王事)에 이바지하는 것이니, 이제부터 별안색을 혁파하여 영구히 공조에 붙이소서.

1. 재상의 직책은 도(道)를 논(論)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음양(陰陽)을 섭리(爕理)하는 것뿐이요, 전곡(錢穀)을 출납하는 등, 세세한 사무 같은 것은 유사(有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상왕이 즉위하신 처음에는 사사(使司)의 공응(供應)하는 임무를 예빈시(禮賓寺)에서 주장하고, 국용(國用)의 전곡의 수는 삼사(三司)에서 관장하였으니, 대신을 공경하는 까닭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사사(使司)에서 둔 지응고(支應庫)를 혁파하고, 거기에 저축한 전곡(錢穀)은 예빈시(禮賓寺)로 옮겨 국용(國用)에 대비하게 하소서.

1. 고금(古今)의 제왕(帝王)이 간고(艱苦)에서 성공하고 연안(宴安)에서 실패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혹은 식사할 겨를이 없었던 이도 있었고, 혹은 새벽부터 불을 밝히고 앉아서 조회(朝會)를 기다려 정치를 부지런히 한 이도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대업(大業)을 계승하셨으니, 진실로 마땅히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말아서 지극한 다스림을 이루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아일(衙日)마다 조례(朝禮)만 받으시고 스스로 청정(聽政)은 하지 않으십니까? 옛적에 노 문공(魯文公)이 네 번씩이나 초하루 조례를 보지 않으니, 이를 《춘추(春秋)》에 써서 만세에 경계를 남겼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아일(衙日)마다 각사(各司)로 하여금 평결(平決)한 여러 사무를 장본(狀本)을 갖추어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임금이 읽다가 격구(擊毬)의 일에 이르러서 노여움이 심하여, 좌간의(左諫議) 안노생(安魯生)을 불러 힐난하기를,

"언관(言官)의 직책으로 곧은 말을 하는 것은 가하나, 내가 하는 일을 가지고 부왕(父王)에게 허물을 돌리는 것이 가하냐?"

하고, 장무(掌務) 기거주(起居注) 박수기(朴竪基)에게 일을 보지 말라고 명하고, 소장(疏狀)을 머물러 두고 내려주지 아니하였다.


도승지 이문화에게 명하여 생원 이약종 등 1백인을 뽑다[편집]

○命都承旨李文和, 取生員李約從等百人。 宗親義安公和之子漸亦中試, 和詣闕謝。 上謂經筵侍讀官裵仲倫曰: “叔父之子漸, 以宗親中試, 固非常例也。 爾與集賢殿尙瑞司及三館諸儒, 俱詣義安第以賀。”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생원(生員) 이약종(李約從) 등 1백인을 뽑았는데, 종친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의 아들 이점(李漸)이 또한 고시(考試)에 합격하니, 이화가 대궐에 나와서 사례하였다. 임금이 경연 시독관(經筵侍讀官) 배중륜(裵仲倫)에게 일렀다.

"숙부의 아들 이점이 종친으로서 고시에 합격하였으니, 진실로 범상한 예가 아니다. 네가 집현전(集賢殿)·상서사(尙瑞司)와 삼관(三館)의 여러 선비와 더불어 함께 의안공(義安公)의 집에 가서 치하하라."


유운·도흥 등에게 명하여 다시 시위하게 하다[편집]

○命柳雲、都興等, 復侍衛。

유운(柳雲)·도흥(都興) 등에게 명하여 다시 시위(侍衛)하게 하였다.


낭사 박수기에게 다시 일을 보라고 명하다[편집]

○命竪基視事。 大司憲趙璞上言, 郞舍之極諫, 其職也。

박수기(朴竪基)에게 일을 보라고 명하였으니, 대사헌 조박(趙璞)이 상언(上言)하여, 낭사(郞舍)가 극간(極諫)하는 것은 그 직책이라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조회하고 연향을 베풀다[편집]

○上率百官, 朝太上殿設享, 竟夕乃罷。 上進退太上王前如平時, 太上王待主上, 亦如之。 歡甚, 太上王使都承旨李文和, 傳旨於上曰: “父沒而子傳其物, 例也。 豈若父子親相授受, 以盡親愛之情耶?” 卽解所御黃金帶以賜, 上受扣頭謝而帶之。 靖安公感泣, 左右莫不揮涕。 諸公侯迭起上壽, 太上王輒令先獻主上, 上每觴輒盡, 太上王亦如之。 義安公和、前判漢城府事李居易起舞。 上還宮, 賜宗親公侯衣各一襲。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太上殿)에 조회하고 연향(宴享)을 베풀었는데, 저녁 때가 되어서 파하였다. 임금이 태상왕의 앞을 진퇴하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고, 태상왕도 주상을 대접하기를 또한 그렇게 하였다. 심히 즐거워하다가 태상왕(太上王)이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주상에게 전지(傳旨)하기를,

"아비가 죽은 뒤에 자식이 그 물건을 전(傳)해 받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지마는, 어찌 부자가 친히 서로 주고받아서 친애의 정을 다하는 것만 같겠느냐?"

하고, 즉시 띠고 있던 황금대(黃金帶)를 풀어 주니, 임금이 받고서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고 이를 띠니, 정안공(靖安公)이 감격하여 울고, 좌우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러 공후(公侯)가 교대하여 일어나 수주(壽酒)를 올리니, 태상왕이 먼저 주상에게 드리게 하였다. 임금이 술잔마다 다 마시고, 태상왕도 또한 그리하였다.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와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이거이(李居易)가 일어나 춤을 추었다. 임금이 환궁하여 종친·공후에게 옷을 각각 한 벌씩 하사하였다.


사헌 잡단 안순을 여자 문제로 파직하다[편집]

〔○〕罷司憲雜端安純職。 初, 純赴臺, 監察不迎, 條純罪告本府。 其一, 謂純奸妻兄卒政堂鄭摠妓妾重千金, 一, 謂純踈薄正妻, 昵愛婢妾。 憲府遂劾純, 請罷職遠流, 上以純功臣子, 只令罷職。

사헌 잡단(司憲雜端) 안순(安純)을 파직하였다. 처음에 안순이 헌부(憲府)에 부임하였더니, 감찰(監察)이 맞아들이지 않고 안순의 죄를 조목조목 들어서 본부(本府)에 고하였는데, 하나는 안순이 처형(妻兄)인 죽은 정당(政堂) 정총(鄭摠)의 기첩(妓妾) 중천금(重千金)을 간통하였다는 것이고, 하나는 안순이 정처(正妻)를 소박하고 비첩(婢妾)을 가까이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헌부(憲府)에서 드디어 안순을 논핵하여 파직해서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안순을 공신의 아들이라 하여 다만 파직하게만 하였다.


5月 16日[편집]

열흘 동안 가물다가 비가 내리다[편집]

○乙酉/雨。 上謂經筵官柳觀曰: “近者 十日不雨, 草木幾於不蘇, 今日雨, 可喜。” 觀對曰: “臣亦喜焉。” 上之敬天愛民之心, 見於言表。

비가 내렸다. 임금이 경연관(經筵官) 유관(柳觀)에게 이르기를,

"요사이 열흘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초목이 거의 소생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오늘 비가 오니 기쁘도다."

하니, 유관이 대답하였다.

"신(臣)도 또한 기쁩니다. 주상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언외(言外)에서도 엿보입니다."


조박을 이천에 조휴를 해주에 귀양보내다[편집]

○放趙璞于利川, 趙休于海州。 歲戊寅芳碩、芳蕃見殺之夕, 李居易取芳蕃妓妾重千金, 李伯卿取芳碩侍妾妓小斤孝道, 趙璞取芳碩侍妾妓孝養, 皆置于家。 至是, 璞爲大司憲, 與中丞徐愈、侍史趙休、雜端安純ㆍ閔公生等議謂: “上黨侯李佇取妻弟芳碩妓妾孝道, 乃其父居易所嘗姦者也。 父子(娶)〔聚〕麀, 瀆亂天常, 是不可不劾也。” 未及發, 徐愈在家樓上, 與人言其欲劾之意, 其壻在樓下聞之, 以洩於人。 又純見劾本府, 言於姻姪左副承旨李叔蕃, 叔蕃轉告靖安公; 閔公生亦漏其議於妹夫懷安公。 由是李佇父子知之, 佇泣訴於上曰: “憲司欲誣害臣, 臣待罪。” 佇卽伯卿也。 上怒, 下愈、休、純等巡軍獄, 公生以漏言獨免。 命左散騎常侍朴錫命、刑曹典書姜思德等, 雜問愈及休。 拷掠急, 乃曰: “首議者璞也。” 佇聞之愈怒, 欲攻璞, 又訴於上曰: “謀害我者璞也。 定社之盟, 口血未乾, 反欲害之。” 上不得已遣叔蕃, 傳旨于璞曰: “以公義論之, 則前日之開國, 今日之定社, 歃血同盟; 以私情論之, 則卿爲靖安公之友壻, 懷安公之壻父, 於佇不無恩情。 今乃背恩食言可乎? 按律斷罪, 於法得矣, 然同盟之意, 本不如是。 欲從卿願, 放歸田里, 卿將何之?” 璞對曰: “願歸利川, 老母在焉。” 遂放璞于利川, 休于海州, 愈免官, 公生復職, 純曾被劾免官, 故置之。

조박(趙璞)을 이천(利川)에, 조휴(趙休)를 해주(海州)에 귀양보냈다. 무인년에 이방석(李芳碩)·이방번(李芳蕃)이 살해되던 날 저녁에 이거이(李居易)는 이방번의 기생첩 중천금(重千金)을 취하고, 이백경(李伯卿)은 방석의 시첩(侍妾) 기생 작은효도[小斤孝道]를 취하고, 조박(趙璞)은 방석의 시첩 기생 효양(孝養)을 취하여 모두 집에 두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조박이 대사헌이 되었는데, 중승(中丞) 서유(徐愈)·시사(侍史) 조휴(趙休), 잡단(雜端) 안순(安純)·민공생(閔公生)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말하기를,

"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가 처제(妻弟) 방석의 기생첩 효도(孝道)를 취하였는데, 이것은 그 아비 이거이(李居易)가 일찍이 관계한 여자이다. 부자간에 한 여자를 간음하여 천상(天常)을 더럽히고 어지럽혔으니, 이것은 논핵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미처 발론(發論)하기 전에 서유(徐愈)가 자기 집 다락 위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논핵하고자 하는 뜻을 말하였는데, 그 사위가 다락 아래에 있다가 이를 듣고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였다. 또 안순(安純)이 본부(本府)에서 논핵을 당하자, 인질(姻姪)인 좌부승지(左副承旨) 이숙번(李叔蕃)에게 말하였고, 이숙번은 정안공(靖安公)에게 고하였다. 민공생(閔公生)도 또한 그 의논을 매부(妹夫)인 회안공(懷安公)에게 누설하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저(李佇) 부자도 알게 되었다. 이저가 임금에게 울며 호소하기를,

"헌사(憲司)에서 신을 무고하여 해치려 하니, 신은 대죄(待罪)하고 있겠습니다."

하니, 이저는 곧 이백경(李伯卿)이다. 임금이 노하여 서유·조휴·안순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민공생은 말을 누설하였기 때문에 홀로 면하였다.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박석명(朴錫命)·형조 전서(刑曹典書) 강사덕(姜思德) 등에게 명하여 서유와 조휴를 잡문(雜問)하게 하고, 고문하기를 급박하게 하니, 이에 말하기를,

"처음에 발의한 자는 조박(趙璞)입니다."

하였다. 이저가 듣고 더욱 노하여 조박을 공격하고자 하여, 또 임금에게 하소연하기를,

"나를 해치려고 꾀한 자는 조박입니다. 정사(定社)의 회맹(會盟)한 피가 입에서 마르지도 않았는데, 도리어 해치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부득이 이숙번을 보내어 조박에게 전지하였다.

"공의(公義)로 논하면, 전일의 개국(開國)과 오늘의 정사(定社)에 피를 마시어 함께 맹세하였고, 사정(私情)으로 논하면, 경은 정안공(靖安公)의 동서이고 회안공(懷安公)의 사위의 아비이니, 이저(李佇)에게도 은정(恩情)이 없지 아니하다. 지금 은의(恩義)를 배반하고 식언(食言)하는 것이 가한 일인가? 율(律)에 의해서 죄를 결단하면 법대로 하여야 되겠지만, 그러나 동맹한 뜻이 본래 그렇지 아니하였다. 경의 원(願)에 따라서 전리(田里)에 내보내려고 하는데, 경은 장차 어디로 가려는가?"

조박이 대답하기를,

"이천(利川)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노모(老母)가 있습니다."

하니, 드디어 조박을 이천에, 조휴를 해주(海州)에 귀양보내고, 서유는 면관(免官)하고, 민공생은 복직시키고, 안순은 일찍이 논핵을 당하여 면관되었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다.


통신관 박돈지가 일본과 왜구 근절책을 교섭하고 돌아오다. 일본이 남녀 1백여 인을 돌려보내다[편집]

○通信官朴惇之回自日本。 日本國大將軍遣使來獻方物, 發還被虜男女百餘人, 上御正殿引見, 命立四品班次行禮。 大相國獻綾一百匹、紗羅各五十匹, 大內殿義弘獻鎧子一、長劍一, 大相國母獻刻木地藏堂主千佛圍繞一座, 極精巧。 絹十匹、胡椒十封。 初, 三島倭寇爲我國患, 幾五十年矣。 歲戊寅, 太上王命惇之, 使于日本。 惇之受命至日本, 與大將軍言曰: “吾王命臣曰: ‘我中外軍官士卒每請云: 「陸置鎭戍, 海備戰艦。 今我輩寄命矢石之間, 憔悴勞苦, 至於此極者, 以三島倭寇之致然。 臣等願大擧以討三島, 則寇賊無遺類, 而我國家無復患矣。」 寡人以軍官士卒之望, 欲興師討罪, 然大將軍久掌兵權, 素有威望在乎三島之境, 不敢潛師入境。’ 故先遣臣告于左右。 且大將軍以兵甲之精、號令之嚴, 豈不能制三島之賊, 以雪隣國之恥! 惟大將軍以爲如何?” 大將軍欣然聞命曰: “我能制之。” 卽遣兵討之, 與賊戰六月未克。 大將軍令大內殿加兵進攻之, 賊棄兵擲甲, 擧衆出降。

통신관(通信官) 박돈지(朴惇之)가 일본(日本)에서 돌아왔는데, 일본국 대장군(大將軍)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피로(被虜)되었던 남녀 1백여 인을 돌려보내었다. 임금이 정전(正殿)에 나아가서 이를 인견(引見)하고, 명하여 4품(品)의 반차(班次)에 서서 예를 행하도록 하였다. 대상국(大相國)은 능(綾) 1백 필, 사(紗)·나(羅) 각각 50필을 바치고, 대내전(大內殿) 의홍(義弘)은 투구 1개, 장검(長劍) 1개를 바치고, 대상국(大相國)의 모후(母后)는 나무로 조각한 지장 당주(地藏堂主) 천불위요(千佛圍繞) 1좌(座)와 극히 정교한 견(絹) 10필과 호초(胡椒) 10봉(封)을 바쳤다. 처음에 삼도(三島) 왜구(倭寇)[46]가 우리 나라의 변환(邊患)이 된 지 거의 50년이 되었다. 무인년에 태상왕이 명하여 박돈지(朴惇之)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었는데, 박돈지가 명령을 받고 일본에 이르러 대장군과 더불어 말하였었다.

"우리 임금께서 신에게 명하기를, ‘우리 중외(中外)의 군관(軍官) 사졸들이 매양 청하기를, 「육지에는 진수(鎭戍)를 두고 바다에는 전함을 준비하여, 지금 우리들이 목숨을 시석지간(尸石之間)에 붙여 초췌(憔悴)하고 노고하기가 이처럼 지극한 데에 이른 것은, 삼도 왜구(三島倭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신 등은 원하건대 크게 군사를 내어 삼도를 쳐서 도적의 남은 무리가 없게 하고, 우리 국가에 다시는 근심이 없게 하소서.」 한다. 과인이 군관(軍官)과 사졸(士卒)의 희망에 따라 군사를 일으켜 죄(罪)를 토벌하고자 하나, 대장군이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평소에 위엄과 덕망이 있어 삼도지경(三島之境)에 미치니, 감히 군사를 가만히 행하여 지경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신하를 보내어 좌우(左右)에 고하는 것이다. 또 대장군이 정(精)한 병갑(兵甲)과 엄한 호령으로 어찌 삼도의 도적을 제압하여 이웃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겠는가? 대장군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시었습니다."

대장군이 흔연히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제가 능히 제어하겠습니다."

하고, 곧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으나 여섯 달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였다. 대장군이 대내전(大內殿)으로 하여금 군사를 더하여 나가서 공격하게 하니, 적이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모두 나와서 항복하였다.


문하부의 상언으로 우간의 윤사영을 재령현에 귀양보내다[편집]

○放右諫議尹思永于載寧縣。 門下府上言:

尹思永以庸劣之資, 幸蒙聖恩, 擢置諫官, 誠宜盡心效忠, 圖報聖恩。 不此之顧, 怠於職任, 又將府中機事, 漏洩於人。 本府劾之, 以懲不恪, 又不悔過, 欲免己罪, 造言生事, 以誑憲司, 變亂是非。 令攸司收其職牒, 鞫問其故, 以懲讒諂僥倖之臣。

疏上, 上允。 驪興伯閔霽請宥, 只令收職牒, 從其自願放之。

우간의(右諫議) 윤사영(尹思永)을 재령현(載寧縣)에 귀양보내었다.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윤사영이 용렬한 자질로서 다행히 성은(聖恩)을 받아 간관(諫官)의 자리에 올랐으니, 진실로 마땅히 마음을 다해 충성을 바쳐서 성은(聖恩)에 보답하기를 도모하여야 할 터인데, 이것은 생각지 않고 직임에 태만하고, 또 본부 안의 기밀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였으므로, 본부에서 논핵하여 공근(恭謹)하지 못함을 징계하였는데도, 또 허물을 뉘우치지 않고 제 죄를 면하려고 하여, 말을 만들고 일을 꾸며서 헌사를 속이고, 시비(是非)를 변란시켰습니다. 유사를 시켜 직첩을 거두고 그 이유를 국문하게 하여, 참소하고 아첨하여 요행을 바라는 신하를 징계하소서."

소가 올라가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여흥백(驪興伯) 민제(閔霽)가 용서하기를 청하였으므로, 다만 직첩만 거두고 자원에 따라서 귀양보내게 하였다.


이거이·조영무·조온·이서에게 관직을 명하고, 전백영을 기복하다[편집]

○以李居易、趙英茂參贊門下府事, 趙溫知門下府事, 李舒商議門下府事, 起復全伯英爲大司憲。 遣料物庫副使李孝仁, 齎敎書往諭之, 伯英卽起赴召。

이거이(李居易)·조영무(趙英茂)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조온(趙溫)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이서(李舒)로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를 삼았다. 전백영(全伯英)을 기복(起復)하여 대사헌(大司憲)으로 삼았는데, 요물고 부사(料物庫副使) 이효인(李孝仁)을 보내어 교서(敎書)를 가지고 가서 유시하니, 전백영이 곧 기복하여 부름에 응하였다.


오랑합이 바친 이리를 기르다가 사료가 많이 든다고 들로 내보내다[편집]

○放吾郞哈所獻狼于野。 上謂同知經筵事李詹曰: “此獸, 遠人所獻。 畜之官, 其所食月費十餘雞, 豈可以有用之物, 養無用之獸乎? 放于無人之地, 以遂其性。” 詹對曰: “昔漢文帝却千里馬, 況無益之野獸乎? 殿下之心, 與之符合。 請無忘此心, 擴而充之, 一國臣民之福也。”

오랑합(吾郞哈)이 바친 이리[狼]를 들로 내보냈다. 임금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이첨(李詹)에게 이르기를,

"이 짐승은 먼 곳 사람이 바친 것이므로 궁중에서 길렀는데, 먹는 것이 한 달에 닭 60여 마리를 소비하니, 어찌 유용(有用)한 물건으로 무용(無用)한 짐승을 기를 수 있겠는가!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내보내서 그 본성대로 살게 하겠다."

하니, 이첨이 대답하였다.

"옛적에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천리마(千里馬)를 물리쳤는데, 하물며 쓸데없는 들짐승이겠습니까? 전하의 마음씨가 이와 부합됩니다. 청하건대, 이러한 마음씨를 잊지 마시고 확충(擴充)하시면, 한 나라 신민(臣民)의 복입니다."


5月 20日[편집]

경상도 고성현에 천구성이 떨어져서 바닷물이 솟아올랐는데 붉기가 피와 같다[편집]

○己丑/慶尙道固城縣, 天狗星落, 海水沸湧, 赤如血。

경상도(慶尙道) 고성현(固城縣)에 천구성(天狗星)이 떨어져서 바닷물이 솟아올랐는데, 붉기가 피와 같았다.


5月 21日[편집]

유성이 하고성에서 나와 천병성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달걀과 같다[편집]

○庚寅/流星出河鼓入天屛, 狀如雞卵。

유성(流星)이 하고성(河鼓星)에서 나와 천병성(天屛星)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달걀과 같았다.


뭇 까마귀가 백록산에 모였는데 한 달 내내 그러하다[편집]

○群烏集于白鹿山終月。

뭇 까마귀가 백록산(白鹿山)에 모였다. 한 달 내내 그러하였다.


전 판서 남궁서의 아내를 때려죽인 장사정을 공신이라 하여 청주에 안치하는 데 그치다[편집]

○置張思靖于靑州。 初, 門下府上言: “思靖幸以武藝, 特蒙聖恩, 得與開國定社之列, 致位相府, 宜當小心恪謹。 於今月十九日, 執前判事南宮恕之妻, 割其耳, 從而擊殺, 其隣里之人, 被傷幾死者亦多。 其亂法之罪, 孰大於是! 願殿下斷以大義, 令攸司收其職牒, 鞫問所犯, 明正其罪。” 上以開國定社之功, 不許鞫問, 只(褫)〔遞〕職牒, 放于咸州。 事下憲府, 淹延數日, 門下府劾雜端閔公生。 司憲府上言: “邇者, 張思靖乘酒使氣, 擊殺前判事南宮恕之妻, 大爲不道。 殿下以功臣之故, 宥以流之, 其於處功臣之道得矣, 然未厭衆心, 物論沸騰。 夫罪莫重於殺人, 而思靖之殺人, 又有甚焉。 有耳目者, 莫不切齒, 殿下宜以至公處之。 昔者, 咸丘蒙問於孟子曰: “舜爲天子, 皐陶爲士, 瞽瞍殺人, 則如之何?” 孟子曰: “執之而已矣。” 苟或殺人, 雖天子之父, 猶當執之。 況功臣乎? 思靖險狠暴戾, 恃功專恣, 白晝大都之中, 擅殺三品官之妻, 又撻隣里男女五六人, 而有孕婦幾至於死。 思靖何人, 而敢如此哉! 王法必誅, 宜置極刑, 但以有功, 只收職牒, 流置咸州。 思靖則得保首領爲幸矣, 然咸州, 王迹所起之地, 不可置之罪人。 望令攸司, 籍沒家産, 移置海島, 終身不齒, 則私恩公義, 兩得之矣。” 不允, 只令移置靑州。 刑曹上言: “張思靖敢行私憤, 以干邦憲。 請依憲司所申, 以戒後來。” 又不允。

장사정(張思靖)을 청주(靑州)에 안치(安置)하였다. 처음에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장사정(張思靖)은 무예(武藝)로 인하여 특별히 성은(聖恩)을 입어서 개국(開國) 정사(定社)의 반열에 참여하여, 벼슬이 상부(相府)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조심하여 삼가고 공경하여야 할 터인데, 이달 19일에 전 판사(判事) 남궁서(南宮恕)의 아내를 붙잡아 귀를 자르고 때려 죽였으며, 그 이웃 마을 사람 가운데 상처를 입어 거의 죽게 된 자도 또한 많았습니다. 법을 어지럽힌 죄로서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 대의로 결단하여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직첩을 거두고 범한 바를 국문하게 하여, 그 죄를 밝게 바루소서."

임금이 개국 정사의 공로 때문에 국문은 허락하지 않고, 다만 직첩을 거두고 함주(咸州)[47]로 귀양보내게 하였다. 이 일을 헌부(憲府)에 내렸으나 여러 날을 끌었으므로, 문하부(門下府)에서 잡단(雜端) 민공생(閔公生)을 논핵하니,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근자에 장사정이 술에 취하여 혈기를 부려 전 판사 남궁서의 아내를 때려 죽였으니, 크게 부도(不道)합니다. 전하께서 공신인 까닭으로 용서하고 귀양보내니, 공신을 처우(處遇)하는 도리에는 합당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아 여론이 비등(沸騰)하고 있습니다. 대저 죄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없습니다. 장사정의 살인에는 또 심함이 있어서 이목(耳目)이 있는 자는 이를 갈지않는 이가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지극한 공의(公義)로 처리하셔야 합니다. 옛적에 함구몽(咸丘蒙)[48]이 맹자(孟子)에게 묻기를, ‘순(舜)임금이 천자(天子)가 되고 고요(皐陶)가 사(士)[49]가 되었는데, 고수(瞽瞍)[50]가 살인을 하였다면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하니, 맹자가 대답하기를, ‘잡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진실로 혹시 살인을 하게 되면, 비록 천자의 아버지라도 오히려 마땅히 잡아야 하는데, 하물며 공신이겠습니까? 장사정(張思靖)이 험하고 잔인하고 포학하고 패려하여, 공(功)을 믿고 방자히 굴어 백주 대낮에 큰 거리 한가운데서 3품관의 아내를 마음대로 죽였고, 또 이웃 마을 남녀 5, 6인을 매질하여 임신한 여자가 거의 죽기에 이르렀으니, 장사정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와 같이 합니까? 왕법(王法)에는 반드시 주살(誅殺)하도록 되어 있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다만 공로가 있다 하여 직첩만 거두고 함주에 귀양보내니, 장사정은 머리를 보전하게 되어 다행이지마는, 함주(咸州)는 왕조의 자취가 일어난 땅이니, 죄인을 둘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가산을 적몰(籍沒)하게 하고, 바다의 섬에 옮겨 두어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하시면, 사은(私恩)과 공의(公義)에 모두 합할 것입니다."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고 다만 청주(靑州)에 옮겨 두게 하니, 형조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장사정이 감히 사사 분풀이를 하여 나라 법을 범하였으니, 헌사(憲司)에서 아뢴 바에 의하여 후래(後來)를 경계하소서."

임금이 또한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元年 六月[편집]

6月 1日[편집]

문하부의 상언으로 우산기 윤사수의 경력 직임을 파하다[편집]

○〔庚子〕/罷右散騎尹思修經歷之任。 門下府上書曰: “諫官, 殿下之耳目, 首領官, 使司之手足, 不可相兼, 今者以右散騎尹思修, 兼授使司經歷之任。 願自今勿以諫官兼經歷之任。” 從之。

우산기(右散騎) 윤사수(尹思修)의 경력(經歷) 직임(職任)을 파하였다.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서(上書)하였다.

"간관(諫官)은 전하의 이목이요, 수령관(首領官)은 사사(使司)의 수족이니, 서로 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산기 윤사수로 사사(使司) 경력(經歷)의 직임을 겸하여 제수하니, 원하옵건대 지금부터 간관으로 경력의 직임을 겸하지 말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문하부에서 의안공의 판문하의 직임과 그 병권을 파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편집]

○門下府請罷義安公判門下之職及其兵權, 不允。 疏曰:

古者, 始封之君, 不臣諸父昆弟; 封君之子, 不臣諸父而臣昆弟。 此所以著親親之殺, 而尊君臣之分也。 殿下旣爲封君之子, 其叔父之親, 待以不臣之禮, 乃合古制。 今者, 義安公和位冠廟堂, 兼掌兵權, 此於不臣諸父之義, 有所嫌矣。 伏惟殿下, 一依古制, 待義安公以叔父之禮, 罷判門下之職及其兵權。

문하부(門下府)에서 의안공(義安公)의 판문하(判門下)의 직임과 그 병권(兵權)을 파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상소는 이러하였다.

"예전에 처음으로 봉(封)해진 임금은 제부(諸父)와 형제[昆弟]를 신하로 삼지 않았고, 봉해진 임금의 아들은 제부를 신하로 삼지 않고 형제는 신하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친친(親親)의 강쇄(降殺)를 나타내고 군신의 분수(分數)를 높이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봉하여진 임금의 아드님이 되었으니, 그 숙부(叔父)의 친분(親分)을 신하로 삼지 않는 예로 대접하는 것은 예전 제도에 합하는 것입니다. 지금 의안공 이화(李和)가 벼슬이 조정에 으뜸이고, 겸하여 병권을 장악하였으니, 이것은 제부(諸父)를 신하로 삼지 않는 의리에 혐의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예전 제도에 의하여 의안공을 숙부의 예로 대접하고, 판문하의 직과 그 병권을 파하소서."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나아가 헌수하니 여러 공후와 신하들이 시연하다[편집]

○上率百官, 詣太上殿獻壽。 諸公侯及靑城伯沈德符, 門下侍郞贊成事成石璘、淸川伯李居仁等侍宴。 石璘啓曰: “昔唐太宗獻壽於高祖, 起舞, 高祖亦起舞。 願上起舞。” 上卽起舞, 太上王亦起舞, 極歡乃罷。 賜李居仁水精帶一腰。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가 헌수(獻壽)하니, 여러 공후(公侯)와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성석린(成石璘)·청천백(淸川伯) 이거인(李居仁) 등이 시연(侍宴)하였다. 성석린이 아뢰기를,

"옛날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고조(高祖)에게 헌수(獻壽)하고 일어나 춤추니, 고조도 또한 일어나 춤추었습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 일어나 춤추소서."

하니, 임금이 곧 일어나 춤추니, 태상왕도 또한 일어나 춤추고, 지극히 즐거워하다가 파하였다. 이거인에게 수정대(水精帶) 1요(腰)를 하사하였다.


전 상의중추원사 곽충보가 공신임을 믿고 행패가 심하여 청주에 귀양보내다[편집]

○放前商議中樞院事郭忠輔于淸州。 初, 忠輔與其子承祐, 以私憾, 執前少監黃文及其妻與學生金桓等, 縛而抶之幾死, 又以人屎汚其口頰。 刑曹上言: “忠輔資本庸鄙, 惟以武材, 位至樞府, 誠宜謹愼, 圖報上恩, 不此之顧, 率不肖子, 逞其私憤。 乞將忠輔父子, 收其職牒, 依法痛懲。” 上以忠輔素著戎功, 只流淸州, 罷承祐別將職。

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곽충보(郭忠輔)를 청주(淸州)에 귀양보냈다. 처음에 곽충보가 그 아들 곽승우(郭承祐)와 더불어 사감(私憾)을 가지고 전 소감(少監) 황문(黃文)과 그 아내, 그리고 학생 김환(金桓) 등을 잡아다 묶어 놓고 때려서 거의 죽게 하고, 또 사람의 똥을 입과 볼에 발랐다. 형조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곽충보는 자질이 본래 용렬하고 비루한데, 오직 무재(武才)로 벼슬이 추부(樞府)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마땅히 근신하여 성상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돌보지 않고 불초한 자식을 거느리고 사사 분풀이를 하였습니다. 빌건대, 곽충보 부자에게 그 직첩을 회수하고 법에 의하여 엄격히 징계하소서."

임금은 곽충보가 본래 무공(武功)을 드러냈다고 하여 다만 청주(淸州)로 귀양보내고, 곽승우의 별장(別將)의 직을 파면하였다.


사헌부에서 소를 올려 별사전을 없애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다[편집]

○憲司請除別賜田, 不允。 疏曰:

御衆之道, 不過公與信而已。 田法之文, 有曰: “公私賤口、巫覡、倡妓、工商、僧尼、賣卜盲人, 不許受田。” 原其初意, 所以示信於民, 而防其亂也至矣。 人持一通, 見聞已熟, 而一有所毁, 則人必謂殿下, 刊行之法, 猶毁之, 況其他乎? 願自今, 有亡身隕命, 功勞可紀者, 必下都評議使司, 議其可否, 然後給之, 其夤緣成說, 干冒別賜者, 一行抑絶, 其庸賤之流, 曾有功勞, 已受別賜者, 亦令攸司, 追還其田, 賞以他物, 一依公文之制。

헌사(憲司)에서 별사전(別賜田)[51]을 없애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대중(大衆)을 어거하는 도(道)는 공(公)과 신(信)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전법(田法)의 조문에 있기를, ‘공사(公私) 천구(賤口)와 무격(巫覡)·창기(娼妓)와 공상(工商)·승니(僧尼)와 매복(賣卜)하는 판수[盲人]는 수전(受田)을 허락지 않는다.’ 하였으니, 그 당초의 뜻을 근원하여 보면, 백성에게 신(信)을 보이고, 그 문란을 방지하자는 것이었으니, 그 뜻이 지극합니다. 사람마다 한 통씩 가지고 있어서 보고 들은 바가 이미 익숙해졌사온데, 한 번이라도 허물어뜨리게 되면, 사람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전하께서 간행(刊行)한 법문도 오히려 허물어뜨리는데, 하물며 다른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할 것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몸을 망치거나 생명을 잃어서 공로가 기록할 만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내려 그 가부를 의논한 연후에 줄 것이며, 세력에 인연하여 말을 꾸미고 속여서 별사전(別賜田)을 받는 것은 일체 억제하여 근절하고, 그 용렬하고 천한 무리가 일찍이 공로가 있어서 이미 별사전을 받은 것도 또한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전지를 환수하게 하고, 다른 물건으로 상을 주어 한결같이 공문(公文)의 제도에 의하소서."


일본국 사신들에게 군기감으로 하여금 불꽃놀이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키다[편집]

○日本國使詣闕, 賜酒食。 日旣夕, 令軍器監張火戲以視之, 倭驚曰: “此非人力所爲, 乃天神使之然也。”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예궐(詣闕)하니 주식(酒食)을 하사하고, 날이 이미 저물게 되자, 군기감(軍器監)으로 하여금 불꽃 놀이[火戲]를 베풀게 하여 구경시켰다. 왜사(倭使)가 놀라서 말하였다.

"이것은 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천신(天神)이 시켜서 그런 것이다."


6月 15日[편집]

임금이 편치 못하다[편집]

○甲寅/上不豫。

임금이 편치 못하였다.


김육과 이현이 명나라에서 먼저 돌아와 승습을 허락하여 준 일을 말하다[편집]

○中樞院副使金陸, 與通事李玄, 自京師先至, 言聽許承襲事, 賜內廐馬各一匹。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김육(金陸)과 통사(通事) 이현(李玄)이 명나라 서울[京師]에서 먼저 이르러 승습(承襲)을 허락하여 준 일을 말하니, 내구마(內廐馬) 각각 1필을 하사하였다.


형조에서 곽충보 부자를 단죄할 것을 다시 청하니 아들 곽승우의 직첩만 회수하다[편집]

○刑曹上書, 復請郭忠輔父子依律斷罪, 不允, 只(褫)〔遞〕承祐職牒。

형조에서 상서(上書)하여 곽충보(郭忠輔) 부자를 율에 의하여 단죄(斷罪)할 것을 다시 청하니, 윤허하지 아니하고, 다만 곽승우의 직첩을 회수하였다.


곽충보가 간통한 고 참찬문하부사 김인찬의 처 이씨의 폭로로 여러 여자의 간통사건이 거론되다[편집]

○憲府囚故參贊門下府事金仁賛妻李氏于刑曹獄。 初忠輔稱李氏爲族, 往來通奸, 事覺。 憲府繫獄問之, 李氏曰: “失行, 非獨我也。 檢校中樞院副使李元景妻權氏, 與我同焉。” 由是權氏亦逮獄。 憲司上言: “頃者, 張思靖恃功驕恣, 擊殺三品員妻。 臺諫法官, 交章請罪, 殿下紀其微勞, 不置於法, 人懷憤惋。 今郭忠輔亦以睚眦挾恨, 敢於私門, 縛捶有官之人及妻幾死, 且以大臣金仁賛妻, 妄稱族親, 任然通奸。 非惟此也, 强奸良女, 擊殺無罪之人, 積惡甚矣。 府與法官, 交章請罪, 未蒙兪允。 臣等竊謂, 殿下前宥思靖, 人望缺矣, 又宥忠輔, 懲惡無門。 願收忠輔職牒, 鞫問科罪。” 門下府亦言: “忠輔本以市井之人, 濫蒙國恩, 位至樞府, 固當謹畏, 圖報國恩。 頃者, 忠輔掌兵於交州道, 脅一道良家女子, 皆以爲妾, 奪其畜産, 其所經過, 縱兵剽掠, 民皆痛心曰: “寧逢倭寇, 不逢忠輔。” 幸逃天誅, 以至今日。 又奸同列金仁賛妻, 杖擊前少監黃文及妻等三人幾死, 且以人屎汚其口頰, 其毁傷風俗, 無與爲比。 憲司刑曹, 交章請罪, 以至再三, 殿下只令收其職牒, 付處本貫。 近者, 張思靖擅殺人命, 臣等上言, 釋此不問; 擾法之臣, 相繼而起, 殿下不聽。 不月之間, 忠輔如此, 臣等竊恐此乃宥思靖之致然。 今若又宥忠輔, 是使如忠輔者, 接踵而起也。 古之聖王, 所以制治於未亂者, 良以此也。 伏望俯循憲司刑曹之請。” 不允。 故贊成事鄭熙啓妻辛氏, 聞李氏引元景之妻, 恐將及己, 遂逃焉。 旣而, 李氏果引辛氏及中樞趙禾之妻金氏數婦人, 醜聲播聞, 所司竝將問之。 上聞之, 命巡軍知事黃碩中, 流辛氏於白州, 金氏於衿州。 召臺省掌務曰: “金氏、辛氏, 已流于外, 自今以後, 閨門之內, 風聞之事, 置而勿問。” 初大將軍姜昇平, 乃仁賛妻李氏先夫姜世孫從姪也。 與其兄姜大平, 亦通于李氏, 憲司遂劾昇平, 上以事在宥前, 特原之。 元景妻權氏, 初嫁安腆, 再嫁安沼, 又嫁元景, 人目爲淫婦。 僧志敬、尙文等亦通焉。 憲司核實移刑曹, 志敬及權氏各杖九十, 志敬充水軍, 尙文逃。

헌부(憲府)에서 고(故)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김인찬(金仁贊)의 처 이씨(李氏)를 형조의 옥(獄)에 가두었다. 처음에 곽충보가 이씨(李氏)를 족친이라고 칭하면서 왕래하다가 간통하였다. 일이 발각되어 헌부에서 옥에 가두고 심문하니, 이씨가 말하기를,

"실행(失行)한 것이 나뿐만 아니고, 검교 중추원 부사(檢校中樞院副使) 이원경(李元景)의 처 권씨(權氏)도 나와 같습니다."

하여, 이 때문에 권씨도 또한 옥에 갇히었다. 헌사(憲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지난번에 장사정(張思靖)이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3품관의 아내를 때려 죽였는데, 대간(臺諫)과 법관(法官)이 교장(交章)하여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전하가 그의 작은 공로를 생각하여 법대로 처치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분한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곽충보가 또한 사사 원망으로 분한을 품고, 감히 사삿집에서 관직이 있는 사람과 그 아내를 결박하고 때려 거의 죽게 하였으며, 또 대신 김인찬의 처를 족친이라 거짓 일컫고 임의로 간통하였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양가(良家) 여자를 강간하고 죄 없는 사람을 때려 죽여, 죄악을 쌓은 것이 심합니다. 본부와 법관(法官)이 교장(交章)하여 죄주기를 청하였으나, 유윤(兪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전에 장사정을 용서하셨으므로 사람들이 실망하고 있사온데, 또 곽충보를 용서하니, 악을 징계할 길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곽충보의 직첩을 회수하고 국문하여 죄를 과하소서."

문하부(門下府)에서 또한 말하였다.

"곽충보는 본래 시정(市井)의 사람으로서 지나치게 국은을 입어 벼슬이 추부(樞府)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마땅히 근신하고 두려워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곽충보가 교주도(交州道)에서 군사를 맡았을 때에, 한 도(道)의 양가(良家) 여자를 협박하여 모두 첩으로 삼고, 그 가축과 재산을 빼앗으며, 지나는 곳마다 군사를 놓아 노략질하니, 백성들이 모두 마음에 통한하여 말하기를, ‘차라리 왜구(倭寇)를 만나면 만났지, 곽충보는 만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복주(伏誅)를 면하여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또 동렬인 김인찬의 처를 간통하고, 전 소감(少監) 황문과 그 아내 등 세 사람을 곤장으로 때려 거의 죽게 만들고, 또 사람의 똥을 그 입과 볼에 칠하였으니, 풍속을 훼상(毁傷)한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헌사와 형조에서 소장(疏章)을 번갈아 올려 죄주기를 청하여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전하께서 다만 직첩만 거두고 본고향에 부처(付處)하게 하였습니다. 근자에 장사정이 마음대로 사람을 죽였으므로, 신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이것을 놓아 두고 묻지 않으면, 법을 어지럽히는 신하가 잇달아 일어날 것입니다.’고 하였는데, 전하께서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한 달도 못되어 곽충보가 이와 같이 하였으니, 신 등은 이것이 장사정을 용서한 소치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만일 또 곽충보를 용서하면, 이것은 곽충보 같은 자가 계속하여 잇달아 나오게 하는 계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전의 성왕(聖王)이 어지러워지기 전에 어거하여 다스린 것이 참으로 이러한 까닭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헌사와 형조의 청을 굽어 좇으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고 찬성사 정희계(鄭熙啓)의 처 신씨(辛氏)는, 이씨(李氏)가 이원경의 처를 끌어넣었다는 말을 듣고 장차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도망하였는데, 조금 뒤에 이씨가 과연 신씨와 중추(中樞) 조화(趙禾)의 아내 김씨 등 몇몇 부인들을 끌어 넣어 추잡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 유사에서 장차 모두 심문하려 하니, 임금이 듣고 순군 지사(巡軍知事) 황석중(黃碩中)에게 명하여, 신씨는 배주(白州)에, 김씨는 금주(衿州)에 귀양보내게 하고, 대성(臺省)의 장무(掌務)를 불러 말하였다.

"김씨·신씨를 이미 외방(外方)에 귀양보내었으니, 이제부터는 규문(閨門) 안의 풍문으로 들은 일은 내버려두고 묻지 말라."

처음에 대장군(大將軍) 강승평(姜昇平)은 바로 김인찬(金仁贊)의 처 이씨의 먼저 남편 강세손(姜世孫)의 종질이었는데, 그 형 강대평(姜大平)과 함께 또한 이씨와 간통하였다. 헌사(憲司)에서 드디어 강승평을 논핵하니, 임금은 일이 사유(赦宥) 전에 있었다 하여 특별히 용서하였다. 이원경의 처 권씨는 처음에 안전(安腆)에게 시집갔다가 다시 안소(安沼)에게 재가하였고, 또 이원경에게 시집가니, 사람들이 음부(淫婦)로 지목하였다. 중 지경(志敬)·상문(尙文) 등이 또한 간통하였다. 헌사에서 사실을 조사하여 형조에 넘기니, 지경과 권씨는 각각 곤장 90대에 처하고, 지경을 수군(水軍)에 편입하였다. 상문은 도망하였다.


형조 도관이 공사 노비의 적(籍)을 만들자고 건의하였으나 끝내 시행되지 않다[편집]

○刑曹都官上言, 請成公私奴婢之籍。 其言曰: “公私奴婢成籍革弊之法, 國家重事。 其奸詐之人, 或有將奴婢名字、齒歲、傳來宗派, 變易施行者; 或有以負債良人、異土人口、典當奴婢、他人奴婢, 爲自己奴婢, 汎濫載錄者, 本司秩卑, 難於科斷。 願依給田司例, 司與刑曹判事臺省各一員, 僉議施行。” 上納之, 然事竟不行。

형조 도관(刑曹都官)이 상언(上言)하여 공사 노비(公私奴婢)의 적(籍)을 만들자고 청하였다. 그 상언은 이러하였다.

"공사 노비의 적(籍)을 만들어 폐단을 없애는 법은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간사한 사람들이 간혹 노비의 이름[名字]과 나이[齒歲], 그리고 전하여 오는 종파(宗派)를 변조하여 시행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빚을 진 양인(良人)이나 다른 나라 사람이 전당(典當)잡힌 노비, 또는 다른 사람의 노비를 자기의 노비로 삼아, 사실 아니게 기록해 올리는 자도 있습니다. 본사(本司)에서는 직질(職秩)이 낮아서 결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원하건대, 급전사(給田司)의 예에 의하여 본사(本司)에서 형조 판사(刑曹判事)·대성(臺省) 각 한 사람과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임금이 받아들였으나, 일은 마침내 시행되지 아니하였다.


6月 22日[편집]

임금의 병이 회복되다[편집]

○辛酉/上康復。

임금의 병이 회복되었다.


6月 27日[편집]

밤에 천전성이 경상도 양지포에 떨어지다[편집]

○丙寅/夜, 天箭落于慶尙道陽智浦。

밤에 천전성(天箭星)이 경상도(慶尙道) 양지포(陽智浦)에 떨어졌다.


하등극사 김사형 등 사신들이 명나라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돌아오니 임금이 친히 맞이 하다[편집]

○賀登極使右政丞金士衡、陳慰使政堂河崙、進香使判三司事偰長壽, (棒)〔奉〕禮部咨文, 回自京師, 上冕服躬迎, 百官具公服上箋稱賀。 咨文曰:

建文元年四月二十五日, 準朝鮮國咨, 該本國王年老疾病, 已令男某, 權署句當, 咨請奏聞, 明降施行。 本月二十六日早朝, 本部尙書陳迪等官, 於奉天門, 欽奉聖旨: “已先太祖皇帝, 詔諭本國, 儀從本俗, 法守舊章, 聽其自爲聲敎。 今後彼國事務, 亦聽自爲。” 欽此。 擬合移咨, 照驗施行。

하등극사(賀登極使) 우정승 김사형(金士衡)과 진위사(陳慰使) 정당(政堂) 하윤(河崙)과 진향사(進香使)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받들고 명나라 서울[京師]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친히 맞고, 백관들이 공복(公服)차림으로 전(箋)을 올려 하례하였다. 자문(咨文)은 이러하였다.

"건문(建文) 원년 4월 25일에 조선국(朝鮮國)에서 자문(咨文)한 것에 준하면, ‘본국 왕이 연로(年老)하고 병들어 이미 아들 모(某)로 하여금 국사(國事)를 임시로 서리(署理)하게 하고, 자문(咨文)으로 청(請)하노니 주문(奏聞)하여 시행해 주기 바란다.’ 하였습니다. 이달 26일 이른 아침에 본부(本部) 상서(尙書) 진적(陳迪) 등의 관원이 봉천문(奉天門)에서 성지(聖旨)를 흠봉(欽奉)하니, ‘이미 선군(先君) 태조 황제(太祖皇帝)께서 본국에 조유(詔諭)하기를, 「의례(儀禮)는 본국의 풍속에 따르고, 법은 예전 법을 지키며, 스스로 성교(聲敎)[52]하는 것을 허락한다.」 하였으니, 금후에도 그 나라 사무는 또한 스스로 하는 것을 허락한다.’ 하였으므로, 상량 합의하여 이자(移咨)하는 것이니, 조험(照驗)하여 시행하십시오."


사헌 잡단 김효공을 파직시키고 사헌부로 삼군부를 아울러 규찰하게 하다[편집]

○罷司憲雜端金孝恭職, 令憲司幷糾三軍府。 國初, 上、大將軍遞直, 巳三刻肅拜, 已有成法, 厥後不能遵守, 故使司受判, 令兵曹依舊遵行。 孝恭嘗爲兵曹正郞, 具擧事狀, 移文三軍府。 首領官朴淳令曰: “上、大將軍當遞直之際, 於巳三刻肅拜, 乃《六典》所載, 又有內旨。 及遞直, 上、大將軍以肅拜啓。” 上曰: “近者不行此禮, 今行之, 何也?” 於是, 上將軍柳濕、大將軍權軫ㆍ朴習等, 謂淳詐傳內旨, 告于三軍府, 憲司聞之, 劾淳以詐傳內旨。 三軍府上言: “雜端金孝恭, 嘗爲兵曹, 依古法移文三軍府, 今乃反劾朴淳, 且柳濕、尹坤、權軫、朴習等, 以使司受判申明《六典》之事, 妄謂詐傳, 皆下攸司, 鞫問其罪。” 上只罷孝恭職。 中丞李升商等上書曰:

左軍將軍朴淳謂: “巳三刻遞直肅拜, 乃《六典》所載, 近日亦有內旨。” 上將軍柳濕、大將軍尹坤等, 謂是無根之言, 告諸三軍府。 本府聞之, 劾淳詐傳王旨, 而三軍府反劾憲司曰: “淳非詐傳, 乃據使司申明《六典》受判耳。” 然本府, 殿下耳目之官, 京外彈糾, 一皆主之, 而本府得失, 庶司無得而議也。 況三軍, 宿衛王室, 唯掌中外兵事而已, 今乃劾耳目之官, 豈其職耶? 願自今, 許令本府幷糾三軍府。

上許之。

사헌 잡단(司憲雜端) 김효공(金孝恭)을 파직시키고, 헌사(憲司)로 하여금 삼군부(三軍府)를 아울러 규찰하게 하였다. 국초에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이 체직(遞直)할 때에 사시(巳時) 3각(三刻)에 숙배(肅拜)하는 것으로 이미 이루어진 법이 있었는데, 그 뒤에 그대로 준수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사(使司)에서 수판(受判)[53]하여 병조로 하여금 예전대로 준행하게 하였다. 김효공(金孝恭)이 일찍이 병조 정랑(兵曹正郞)이 되어 사상(事狀)을 갖추어서 삼군부(三軍府)에 이문(移文)하였었다. 수령관(首領官) 박순(朴淳)이 전령하기를,

"상장군·대장군이 체직(遞直)하는 즈음을 당하여 사시(巳時) 3각(三刻)에 숙배하는 것은 《육전(六典)》에 실려 있는 바이며, 또 내지(內旨)도 있으니, 체직(遞直)할 때에 이르러 상장군·대장군은 숙배하도록 하라."

하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근자에 이 예를 행하지 아니하다가 지금 행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다. 이때 상장군 유습(柳濕), 대장군 권진(權軫)·박습(朴習) 등이 박순(朴淳) 더러 내지(內旨)를 거짓 전하였다고 하여 삼군부에 고하였다. 헌사(憲司)에서 듣고 박순이 내지(內旨)를 거짓 전하였다 하여 탄핵하였다. 삼군부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잡단(雜端) 김효공(金孝恭)이 일찍이 병조 낭관이 되어 예전 법에 의하여 삼군부에 이문하였는데, 지금 도리어 박순을 논핵하고, 또 유습·윤곤(尹坤)·권진·박습 등이 사사(使司)에서 수판(受判)하여 《육전(六典)》을 거듭 밝힌 일을 가지고 내지(內旨)를 거짓 전하였다 망령되게 말하니, 모두 유사(攸司)에 내려 그 죄를 국문하소서."

임금이 다만 김효공을 파직시켰다. 중승(中丞) 이승상(李升商)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좌군 장군(左軍將軍) 박순(朴淳)은 말하기를, ‘사시(巳時) 3각(三刻)에 체직하고 숙배하는 것은 《육전》에 실려 있고, 근일에 내지(內旨)도 있었다.’ 하였는데, 상장군 유습·대장군 윤곤 등은 이것이 사실무근한 말이라고 하여 삼군부에 고하였습니다. 본부(本府)에서 듣고 박순이 왕지(王旨)를 거짓 전한 것을 논핵하였는데, 삼군부에서 도리어 헌사(憲司)를 논핵하기를, ‘박순이 거짓 전한 것이 아니라 사사(使司)에서 육전을 거듭 밝히어 수판(受判)한 것에 의거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부(本府)는 전하의 이목(耳目)의 관사이어서, 경외(京外)의 탄핵하고 규찰하는 것을 일체 모두 주장하니, 본부의 잘잘못을 여러 관사에서 논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삼군부는 왕실을 숙위(宿衛)하니, 오직 중외(中外)의 군사 일을 맡을 뿐인데, 이제 이목(耳目)의 관사(官司)를 논핵하니, 어찌 그 직책이겠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 본부(本府)로 하여금 삼군부(三軍府)를 아울러 규찰하도록 하소서."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임금이 송도에 종묘를 새로 지을 것을 거론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그만두다[편집]

○上議營宗廟於松都。 上謂左右曰: “今寡人在舊京, 而宗廟在新都, 誠不可也。 欲移宗廟, 身親奉祀, 何如?” 參贊門下李居易對曰: “太上王創業, 作都漢陽, 宗廟宮室咸在。 今欲移之, 實非繼述之道。 每遣大臣攝行可也。” (土)〔上〕曰: “卿之言是也。”

임금이 송도(松都)에 종묘(宗廟)를 영건(營建)할 것을 의논하였다.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지금 과인(寡人)은 구경(舊京)에 있고, 종묘는 신도(新都)에 있으니, 참으로 불가하다. 종묘를 옮겨서 몸소 친히 제사를 받들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참찬문하(參贊門下) 이거이(李居易)가 대답하기를,

"태상왕께서 창업하시고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시어 종묘·궁실이 모두 그곳에 있는데, 지금 옮기고자 하시니 실로 계술(繼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매양 대신을 보내어 섭행(攝行)하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元年 秋七月[편집]

7月 1日[편집]

탄일이므로 조하를 받고 이죄 이하를 용서하고 신하들에게 잔치하다[편집]

○〔己巳〕朔/誕日, 受朝賀, 宥二罪以下, 宴群臣。 姜昇平亦侍宴, 衆皆笑之, 昇平不恥。 張思靖、郭忠輔幷宥之。

탄일(誕日)이므로 조하(朝賀)를 받고, 이죄(二罪)[54] 이하를 용서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하였다. 강승평(姜昇平)도 또한 시연(侍宴)하였는데, 여러 사람이 모두 비웃어도 강승평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장사정(張思靖)·곽충보(郭忠輔)도 아울러 용서하였다.


초3일에서부터 초5일까지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하늘을 지나다[편집]

○自辛未至癸酉, 太白晝見經天。

초3일[신미]에서부터 초5일[계유]까지 태백성(太白星)[55]이 낮에 나타나서 하늘을 지나갔다.


일본국 대상국이 해적들을 격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배타는 일을 정파할 것을 의논하다[편집]

○以日本國大相國破賊之言, 議罷騎船事。

일본국(日本國) 대상국(大相國)이 왜적을 격파하였다는 말을 듣고, 배타는 일을 정파(停罷)할 것을 의논하였다.


대마도 도총관 종정무가 사신을 보내 방물 등을 바치며 왜구의 근절을 맹서하다[편집]

○日本國對馬島都摠管宗貞茂遣使來獻方物及馬六匹。 其書曰:

陪臣刑部侍郞宗貞茂拜書政丞閣下。 久仰德化, 無由瞻拜。 五十年前, 吾祖曾爲此地之宰, 曰: “不敢有負貴國鴻恩之意。” 爾後官差酷吏, 專縱貪婪之心, 獲罪於左右者, 豈免鈇鉞之誅乎? 此輩去歲, 曾無噍類, 天敗之也。 今以不肖, 補祖之職, 玆者不揣己量, 叨濫納款。 蓋以關西强臣, 拒朝命, 用縱橫之兵, 侵掠旁午。 海陸無官法, 邊民每歲, 縱放賊船, 虜掠貴國沿海男女, 燒殘佛寺人屋, 此非國朝所使也。 今則國土一統, 海陸平靜, 朝命嚴禁, 人民懼法。 今後貴國人船, 來往無礙, 沿海寺宇人家, 依舊經營, 則陪臣心願也。 天日明矣, 不敢食言。 謹罄丹衷, 仰冀憐(禁)〔察〕。

일본국(日本國) 대마도(對馬島) 도총관(都摠管) 종정무(宗貞茂)가 사자를 보내어 방물(方物)과 말 6필을 바쳤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배신(陪臣) 형부 시랑(刑部侍郞) 종정무(宗貞茂)는 정승(政丞) 각하(閣下)에게 삼가 글을 올립니다. 오래도록 덕화(德化)를 앙모하였으나 첨배(瞻拜)할 길이 없었습니다. 50년 전에 우리 할아비가 일찍이 이 땅의 장관(長官)이 되었는데, 말하기를, ‘감히 귀국의 큰 은혜를 저버릴 뜻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에 관차(官差)[56]와 혹리(酷吏)로서 탐욕스런 마음을 방자히 하여 좌우(左右)에서 죄를 얻은 자가 어찌 부월(斧鉞)의 베임을 면하였겠습니까? 이러한 무리들이 지난해에 하나도 남김없이 죽었으니, 하늘이 패망하게 한 것입니다. 이제 불초(不肖)로써 할아비의 직책을 맡기었으므로, 이에 저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외람되이 정성을 바칩니다. 대개 관서(關西)의 강한 신하들이 조정의 명령을 거역하고, 함부로 날뛰는 군사를 써서 침략함이 극심하였습니다. 바다와 육지에 관(官)의 법(法)이 미치지 못하여, 변방 백성들이 해마다 마음대로 적선(賊船)을 놓아 귀국(貴國) 연해(沿海)의 남녀를 노략질하고, 불사(佛寺)와 인가(人家)를 불태웠습니다. 이것은 국조(國朝)에서 시킨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국토가 통일되어 바다와 육지가 평온하고 조용하여, 조정의 명령으로 엄하게 금하고, 인민들이 법을 두려워합니다. 금후로는 귀국 사람의 배가 거리낌 없이 내왕하고, 연해의 사찰과 인가가 전처럼 아무 탈없이 경영하게 되는 것이, 배신의 마음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하늘의 해가 밝으니 감히 식언(食言)하지는 못합니다. 삼가 단충(丹衷)을 다하고, 우러러 불쌍히 여기심을 바랍니다."


사사(使司)와 여러 공후가 서강에 모여 병선을 구경하다[편집]

○使司及諸公侯, 會于西江, 觀兵船。

사사(使司)와 여러 공후(公侯)가 서강(西江)에 모여 병선(兵船)을 구경하였다.


영삼사사 심덕부가 사직서를 올리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다[편집]

○領三司事沈德符呈辭, 不允。

영삼사사(領三司事) 심덕부(沈德符)가 사직서를 올리니,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7月 10日[편집]

충주 북쪽 비야에 우박이 내려 곡식이 상하다[편집]

○戊寅/雨雹于忠州北鄙, 傷穀。

충주(忠州) 북쪽 비야(鄙野)에 우박이 내려 곡식이 상했다.


경상도 고성의 아전이었던 남금이 풍해도 경력의 직임을 받아 일을 보다[편집]

○慶尙道固城吏南琴, 受豐海道經歷之任。 門下府依《經濟六典》前朝奉翊、本朝通政以下從鄕之法, 移文憲司, 繫琴于獄, 特命視事。

경상도(慶尙道) 고성(固城)의 아전[吏]이었던 남금(南琴)이 풍해도(豐海道) 경력(經歷)의 직임을 받으니, 문하부(門下府)에서 《경제육전(經濟六典)》의 ‘고려의 봉익 대부(奉翊大夫)와 본조(本朝)의 통정 대부(通政大夫) 이하는 종향(從鄕)한다’는 법에 따라 헌사(憲司)에 이문(移文)하여 남금을 옥에 가두었으나, 특명(特命)[57]하여 일을 보게 하였다.


천재와 지괴가 여러 번 보여 기양하는 도량을 5일 동안 설행하다[편집]

○以天災地怪屢見, 設祈禳道場五日。

천재(天災)·지괴(地怪)가 여러 번 보이므로, 기양(祈禳)하는 도량(道場)을 5일 동안 베풀었다.


손을경이 밭을 갈다가 금조각을 발견하다[편집]

○有人孫乙卿, 耕田得金片, 刑曹請充國用, 不允。

손을경(孫乙卿)이라는 사람이 밭을 갈다가 금(金) 조각을 얻었다. 형조에서 국용(國用)에 충당하자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완산군 이백유의 졸기[편집]

○完山君李伯由卒。 伯由, 全州人, 登第。 値國初, 與於勳盟, 諡良厚。 子粟、粢、稛。

완산군(完山君) 이백유(李伯由)가 졸(卒)하였다. 이백유는 전주(全州) 사람인데, 과거에 올라 국초(國初)를 당하여 훈맹(勳盟)에 참여하였다. 시호(諡號)는 양후(良厚)라 하였다. 아들은 이속(李粟)·이자(李粢)·이균(李稛)이다.


백제의 후손으로 일본 좌경대부 육주목인 의홍에게 본관과 토전을 주는 일에 대한 의논[편집]

○日本左京大夫六州牧義弘伐九州克之, 遣使來獻方物, 且言其功。 上欲賜義弘土田, 以簽書中樞院事權近及諫官之議乃止。 義弘請云: “我是百濟之後也。 日本國人不知吾之世系與吾姓氏, 請具書賜之。” 又請百濟土田。 下都評議使司 考其家世, 世遠無徵。 假以百濟始祖溫祚高氏之後, 議給土田三百結。 簽書中樞院事權近致書都堂曰:

竊惟今者, 奉承王旨, 賜土田于日本國六州牧義弘之事, 不若授以封君之爵, 歲賜俸祿, 以褒其功之爲宜。 夫錫土田, 有不可者七。 以我之土田, 與彼之人, 一不可也; 歲輸租稅, 似乎納貢, 二不可也; 彼將歲遣人, 親自收租, 吾民受害, 三不可也; 禁之則彼必含怒, 順之則害及吾民, 四不可也; 彼固難信, 後有不順, 收其土田, 因而成釁, 五不可也; 彼將責曰: “我所受田, 傳之子孫, 何故奪之?” 名以復田, 來寇於我, 彼直我曲, 變將不測, 六不可也, 我疆之田, 爲彼之有, 後世必爲子孫憂, 七不可也。 又況錫以土田, 似乎弱國割地, 與强國求和之事。 吾之土田, 納貢于彼, 而吾若爲彼之邊鄙, 或有不順, 收之固難。 授以爵命, 似乎大國錫命小國之卿之義, 我之威名加于彼, 而彼若爲吾藩臣, 苟有不順, 責以大義, 收其爵命, 停其祿俸, 彼將何辭以責我哉? 輕重之勢、利害之機, 較然可覩, 伏惟擬議申聞施行。

使司以其書啓聞, 上曰: “事已定矣, 不必多言。” 左散騎常侍朴錫命等上疏曰:

竊聞《春秋》, 謹華夷之辨者, 以其非我族類, 其心必異, 萌猾夏之階也。 後世《春秋》之義不傳, 漢以南單于, 款五原塞, 賜姓爲藩臣, 其後劉淵、劉聰, 大爲中國之患; 唐求援於戎狄, 而卒被其毒; 宋之二帝, 北巡而不返, 亦與金和親之故也。 歷代之於戎狄, 失其御之之道, 反爲所制, 班班可見。 日本在我國東, 世爲邊境之患, 若中國之有戎狄也。 今以六州牧義弘, 有討賊之功, 稱百濟高氏之後, 賜田三百結以爲采地。 臣等竊謂, 義弘有討賊之功, 賞以錢帛可也。 山川土田, 受之天子, 不可私以與人也。 且倭之爲人, 其心强狠, 變詐無常, 無禮義之交, 惟利是視。 今義弘旣有六州之地, 其人民之衆、甲兵之利, 非不足也, 而欲明百濟之後, 願得百濟之地, 其設心未可知也。 若因采地之故, 出入無防, 窺覘虛實, 以生不測之變, 則雖悔於終, 亦將奚及! 願殿下, 賞義弘以金帛與其所求大藏經板, 毋以土田錫之, 則其御戎賞功之道, 得矣。

下使司議之。 門下侍郞贊成事成石璘、參贊門下府事趙英茂、政堂文學河崙、參知門下府事趙溫, 從郞舍所陳, 餘皆不從, 中樞院亦互言得失。 使司啓聞, 上亦不從曰: “義弘向吾國推誠破賊, 其所求惟此事, 況本非要土地, 乃要推明本系也。 是乃行虛惠而獲實報也, 何不可之有! 設有後變, 臨機應之, 又何難乎!” 事下戶曹給田司曰: “日本國六州牧左京大夫義弘, 本百濟始祖溫祚王高氏之後, 其先避難, 徙於日本, 世世相承, 至于六州牧, 尤爲貴顯。 比年以來, 對馬等三島頑民, 召聚兇徒, 侵擾我疆, 虜掠人民, 以阻隣好。 頃者, 大相國以義發兵, 身自督戰, 殄殲其衆, 而邊境人民, 得以寧靖, 使生民除害, 而兩國修好。 予嘉乃功, 曰篤不忘, 思有以報之。 惟爾戶曹給田司, 其考先祖之田之在完山者, 依舊折給, 以爲采地, 用旌殊勳。” 給田司奉王旨, 移文於全羅道觀察使, 令踏驗成籍, 以充永業。 使司言於義弘使僧以給田之事, 僧答曰: “若明示世系, 則休給亦得。” 門下府郞舍等又上言: “日本國六州牧義弘, 不當封采地, 具疏以聞, 未蒙進止, 敢以狂瞽之言, 再瀆天聰。 《易》曰: “君子以, 作事謀始。” 大抵交結於人, 必謀其始, 始而不謀, 悔吝隨至矣。 今以義弘討賊之功, 特稱百濟之後, 錫之土田, 竊恐後世爭亂之端, 兆於此矣。 伏惟一依前日所啓, 謹之於始, 爲萬世計。 若以臣等爲迂遠而昧於治體, 不賜兪音, 則雖悔於終, 噬臍無及矣。” 校書監丞金時用, 亦上言以不宜賜姓氏之籍及土田之意。

일본 좌경 대부(左京大夫) 육주목(六州牧) 의홍(義弘)이 구주(九州)를 쳐서 이기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또 그 공적을 말하였다. 임금이 의홍(義弘)에게 토전(土田)을 하사하고자 하다가,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권근(權近)과 간관(諫官)의 의논으로 그만두었다. 의홍이 청하기를,

"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世系)와 나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니, 갖추어 써서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고, 또 백제(百濟)의 토전(土田)을 청하였다. 임금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내려 그 가문의 세계를 상고하게 하니, 세대가 멀어서 징험할 수가 없었다. 잠정적으로 백제 시조(始祖) 온조(溫祚) 고씨(高氏)의 후손으로 하여 토전(土田) 3백 결(結)을 주기로 의논하니,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권근(權近)이 도당(都堂)에 글을 보내어 말하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지금 왕지(王旨)를 받들어 일본국 육주목 의홍에게 토전을 주는 일은, 봉군(封君)의 작(爵)으로 주고 해마다 봉록(俸祿)을 하사하여 그 공을 포상(褒賞)하는 것만큼 적의(適宜)하지 못합니다. 대개 토전을 하사함의 불가한 것이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토전을 저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한 가지 불가한 것이요, 해마다 조세(租稅)를 실어 보내는 것이 공(貢)을 바치는 것 같으니, 두 가지 불가한 것이요, 저들이 장차 해마다 사람을 보내어 친히 조세를 거두게 되면, 우리 백성이 해를 받을 것이니, 세 가지 불가한 것이요, 금(禁)하면 저들이 반드시 노여움을 품을 것이고, 따른다면 우리 백성에게 해가 될 것이니, 네 가지 불가한 것이요, 저 사람들은 진실로 믿기가 어려우니, 뒤에 불순함이 있어서 그 토전을 회수하면, 그로 인하여 변흔(邊釁)을 이룰 것이니, 다섯 가지 불가한 것이요, 저들이 장차 책하기를, ‘내가 받은 토전을 자손에게 전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빼앗는가?’ 하고, 토전을 되찾는다고 이름하여 와서 우리를 침구(侵寇)하면, 저들은 바르고 우리는 잘못이 되어, 변을 장차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니, 여섯 가지 불가한 것이요, 우리 강토의 토전이 저들의 소유가 되면, 후세에 반드시 자손의 근심이 될 것이니, 일곱 가지 불가한 것입니다. 또 더구나 토전을 주는 것은 약한 나라가 땅을 베어 강한 나라에게 주어 화호(和好)를 구하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의 토전이 저들에게 공(貢)을 바치니, 우리가 저들의 변강(邊疆)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혹 불순한 일이 있으면 회수하기가 진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작명(爵命)으로 주면, 큰 나라가 작은 나라의 경(卿)에게 작명을 주는 것과 같으니, 우리의 위명(威名)이 저들에게 가(加)하여지는 것입니다. 저들이 만일 우리의 번신(藩臣)이 되어 진실로 불순한 일이 있으면, 대의(大義)로 책하고 그 작명(爵名)을 회수하여 봉록(俸祿)을 정지하더라도, 저들이 장차 무슨 말로 우리를 책하겠습니까? 경중(輕重)의 형세와 이해(利害)의 기틀을 환하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하고 의논해서 신문(申聞)하여 시행하소서."

사사(使司)에서 그 글로써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여러 말을 할 것이 없다."

하니,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박석명(朴錫命) 등이 상소(上疏)하였다.

"가만히 듣건대, 《춘추(春秋)》에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분변을 삼간 것은, 같은 족류(族類)가 아니면 그 마음이 반드시 달라서 화하(華夏)를 어지럽히는 계제가 싹트기 때문입니다. 후세에 《춘추》의 의(義)가 전해지지 못하여, 한(漢)나라에서 남선우(南單于)[58]를 오원새(五原塞)[59]에 머무르게 하고, 사성(賜姓)하여 번신(藩臣)으로 삼았는데, 그 뒤에 유연(劉淵)[60]·유총(劉聰)[61]은 크게 중국의 근심이 되었고, 당(唐)나라에서 융적(戎狄)에게 원병을 구하였는데, 마침내 그 독을 입었고, 송(宋)나라의 두 황제[二帝][62]가 북쪽으로 순행하였다가 돌아오지 못한 것도 또한 금(金)나라와 화친한 까닭이었습니다. 역대에서, 융적(戎狄)에 대하여 어거하는 도리를 잃어서 도리어 제압을 당한 것을 소상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 나라 동쪽에 있어서 대대로 변경의 근심이 된 것이 중국의 융적과 같습니다. 지금 육주목(六州牧) 의홍(義弘)이 적을 토벌한 공이 있고, 백제(百濟) 고씨(高氏)의 후손이라고 칭한다 하여, 전지 3백 결(結)을 주어 채지(采地)를 삼게 하니, 신 등은 생각하건대, 의홍이 적을 토벌한 공이 있으면 전백(錢帛)으로 상주는 것이 가(可)할 것입니다. 산천(山川)과 토전(土田)은 천자(天子)에게 받았으니 사사로이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왜인(倭人)의 사람된 품이 그 마음이 강퍅하고 사나와서, 변사(變詐)가 무상하여 예의로 사귀는 것은 없고, 오직 이(利)만을 생각합니다. 지금 의홍이 이미 육주(六州)의 땅을 차지하였으니, 그 인민의 많음과 갑병(甲兵)의 날카로움이 부족한 것이 없는데, 백제의 후손임을 밝히고자 하고 백제의 땅을 얻기를 원하니, 그 마음가짐을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채지(采地)의 연고로 인하여 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없고, 허실(虛實)을 엿보아 불측한 변을 일으키면, 비록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또한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의홍에게 금백(金帛)과 그가 청구한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상주시고, 토전을 주지 마시면, 융적을 어거하고 공을 상주는 도가 적의(適宜)할 것입니다."

임금이 사사(使司)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성석린(成石璘)·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영무(趙英茂)·정당 문학(政堂文學) 하윤(河崙)·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조온(趙溫)이 낭사(郞舍)에서 진달한 것만 따르고 나머지는 좇지 않았다. 중추원(中樞院)에서도 역시 서로 득실(得失)을 말하였다. 사사(使司)에서 계문하니, 임금이 또한 좇지 않고 말하기를,

"의홍이 우리 나라에 향(向)하여 정성을 바쳐 적을 쳐부수었는데, 그 청구하는 바는 오직 이 일뿐이다. 하물며 본래 토지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본가의 계통을 추명(推明)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실속 없는 은혜를 베풀어 실속 있는 보답을 얻는 것이니, 무엇이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설혹 뒤에 변이 있더라도 시기에 임하여 응변(應變)하면 또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고, 일을 호조(戶曹) 급전사(給田司)에 내리고 말하였다.

"일본국 육주목(六州牧) 좌경 대부(左京大夫) 의홍은 본래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 고씨(高氏)의 후손인데, 그 선조가 난을 피하여 일본에 건너가서, 대대로 상승(相承)하여 육주목에 이르러 더욱 귀하고 현달하게 되었다. 근년 이래로 대마도(對馬島) 등 삼도(三島)의 완악한 백성들이 흉도(兇徒)를 불러 모아 우리 강토를 침노하여 어지럽히고 인민들을 노략하여, 이웃 나라 사이의 화호(和好)를 저해하였다. 지난번에 대상국(大相國)이 의(義)로써 발병(發兵)하여 몸소 스스로 독전(督戰)해서 그 무리를 섬멸하였으니, 변경의 인민들이 편안하고 조용하게 되어, 생민에게 해독이 없게 하고 두 나라로 하여금 화호를 닦게 하였다. 내가 그 공을 아름답게 여겨 그 공적을 말하기를, ‘참으로 잊지 못하여 〈그 공을〉 갚고자 생각한다.’고 하였다. 너희 호조 급전사(戶曹給田司)에서는 그 선조의 전지가 완산(完山)에 있는 것을 상고하여, 예전대로 절급(折給)하여 채지(采地)를 삼도록 해서 특수한 공훈을 포상하라."

급전사(給田司)에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전라도 관찰사에게 이문(移文)하여 답험(踏驗)하게 하고, 그 문적(文籍)을 만들어서 영업전(永業田)에 충당하게 하였다. 사사(使司)에서 의홍의 사자인 중[僧]에게 토전을 준다는 일을 말하니, 중이 대답하기를,

"만일 세계(世系)를 명시(明示)하여 주시면 전지를 주지 않더라도 또한 좋습니다."

하니,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 등이 또 상언(上言)하였다.

"일본국 육주목 의홍에게 채지(采地)를 봉(封)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소(疏)를 갖추어 아뢰었으나, 분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미치고 어리석은 말로 다시 천총(天聰)을 더럽힙니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일을 하는 데 시초에 도모한다.’ 하였습니다. 대저 다른 사람과 교결(交結)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 시초에 도모하여야 합니다. 처음에 도모하지 않으면, 후회가 뒤따라 이릅니다. 지금 의홍의 적을 토벌한 공으로 특별히 백제의 후손이라 일컫고 토전을 주면, 후세에 쟁란(爭亂)의 단서가 여기에서 시작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한결같이 전일의 계달한 바에 의하여 시초에서 삼가서 만세의 계책을 삼으소서. 만일 신 등이 오활하여 치도(治道)의 사체(事體)에 어둡다 하고 유음(兪音)을 내리지 않는다면, 비록 나중에 뉘우치더라도 그 후회[噬臍]는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교서감 승(校書監丞) 김시용(金時用)이 또한 성씨(姓氏)의 적(籍)과 토전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는 뜻으로 상언(上言)하였다.


7月 15日[편집]

전 강릉부사 이엽의 집 소가 한꺼번에 송아지 두 마리를 낳다[편집]

○癸未/前江陵府使李曄戶牛一生二犢。

전 강릉 부사(江陵府使) 이엽(李曄)의 집 소가 한꺼번에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다.


경상도 계림 이고의 종이 한 번에 아들 셋을 낳고, 말이 망아지 두 마리를 낳다[편집]

○慶尙道雞林安康縣李考婢萬月, 一乳生三男, 馬一生二駒。

경상도 계림(雞林) 안강현(安康縣) 이고(李考)의 종[婢] 만월(萬月)이 한 번에 아들 셋을 낳고, 말이 한꺼번에 망아지 두 마리를 낳았다.


함양 화척의 처가 한 번에 아들 셋을 낳자, 이에 대해 서운관에서 아뢰다[편집]

○咸陽禾尺每邑金妻一生三男。 使書雲觀稽古文, 申曰: “一生三子主太平, 一云不過三年, 外國來朝。”

함양(咸陽) 화척(禾尺) 매읍금(每邑金)의 처가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서운관(書雲觀)을 시켜 옛 글을 상고하게 하니, 아뢰기를,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는 것은 태평 세월을 주장한다고 하였고, 어떤 데에는 3년이 지나지 않아서 외국(外國)이 내조(來朝)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7月 16日[편집]

임금이 편치 못하다[편집]

○甲申/上不豫。

임금이 편치 못하였다.


도읍이 정해지지 못하였으므로 태상전에 나아가 명을 받아오도록 하다[편집]

○以都邑未定, 遣諸公侯詣太上殿稟命。

도읍(都邑)이 정해지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공후(公侯)를 보내어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가 왕명(王命)을 품달(稟達)하게 하였다.


위화도 회군시 주살당한 사람들의 속공한 노비 중, 도망 또는 사망한 자에 대한 처리[편집]

○命除戊辰被誅人屬公奴婢逃亡物故代立者。 從判門下府事李居易之請也。

무진년에 주살(誅殺)당한 사람들의 속공(屬公)한 노비(奴婢) 가운데 도망하였거나 물고(物故)하여 대신 세운 자들을 면제하라고 명하였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이거이(李居易)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7月 17日[편집]

경상도 울주의 바닷물이 붉기가 피와 같다고 관찰사가 보고하다[편집]

○乙酉/慶尙道蔚州, 海水赤如血。 觀察使所報也。

경상도 울주(蔚州)에 바닷물이 붉어서 피와 같았다. 관찰사가 보고한 것이다.


7月 19日[편집]

비가 많이 내리고 벼락과 천둥이 치다[편집]

○丁亥/大雨震雷。

비가 크게 내렸는데 벼락과 천둥이 쳤다.


여러 종친과 재상에게 명하여 태평관에서 김사형·설장수·하윤 등을 위해 잔치하도록 하다[편집]

○命諸公侯及宰執, 宴右政丞金士衡、判三司事偰長壽、政堂河崙于太平館。

여러 공후(公侯)와 재집(宰執)에게 명하여, 우정승 김사형(金士衡)·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정당(政堂) 하윤(河崙)을 태평관에서 잔치하도록 하였다.


남형하는 폐단을 막기위하여 유사로 하여금 조사, 보고하게 하다[편집]

○憫近代濫刑之弊, 令攸司商量申聞。

근대(近代)에 남형(濫刑)하는 폐단을 근심하여 유사(攸司)로 하여금 상량(商量)하여 신문(申聞)하게 하였다.


7月 21日[편집]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다[편집]

○己丑/上康復。

임금의 건강이 회복되었다.


일본 사신의 부관(副官)인 중 10인을 인견하고, 대장경판을 보내주기로 약속하다[편집]

○引見日本使者副官僧十人于西涼廳。 十人詣闕拜辭, 賜苧麻布及人蔘、虎ㆍ豹皮等物, 以謝大將軍及義弘, 爲我國滅賊之意。 且答大藏經板之請曰: “古有二本, 一本, 國人所印; 一本, 海寇火之, 殘缺不完。 將令攸司完補以遣, 其具舟楫來輸焉。”

일본 사자(使者)의 부관(副官)인 중 10인을 서쪽 양청(涼廳)에서 인견(引見)하였다. 10인이 예궐(詣闕)하여 배사(拜辭)하니, 저포(苧布)·마포(麻布) 및 인삼과 호피(虎皮)·표피(豹皮)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대장군(大將軍)과 의홍(義弘)이 우리 나라를 위하여 적을 멸한 뜻을 사례하고, 또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청한 것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예전에 2본(本)이 있었는데, 1본은 나라 사람들이 인쇄하는 것이고, 1본은 해구(海寇)가 불태워서 없어진 것이 많아 완전하지 못하다. 장차 유사(攸司)를 시켜 완전히 보충하여 보낼 터이니, 배를 준비하여 와서 실어 가라."


7月 26日[편집]

형혹성이 방수의 두 별을 범하다[편집]

○甲午/熒惑犯房二星。

형혹성(熒惑星)이 방수(房宿)의 두 별을 범하였다.


서원군 한상경을 경기좌도 도관찰출척사를 삼다[편집]

○以西原君韓尙敬, 爲京畿左道都觀察黜陟使。

서원군(西原君) 한상경(韓尙敬)으로 경기좌도 도관찰출척사(京畿左道 都觀察黜陟使)를 삼았다.


7月 29日[편집]

밤 4경에 부엉이가 수창궁 서남쪽에서 울다[편집]

○丁酉/夜四更, 鵂鶹鳴於壽昌宮西南。

밤 4경(更)에 부엉이가 수창궁(壽昌宮) 서남쪽에서 울었다.


元年 八月[편집]

8月 2日[편집]

부엉이가 궁성에서 울다[편집]

○己亥/鵂鶹鳴于宮城。

부엉이가 궁성(宮城)에서 울었다.


8月 3日[편집]

방성(房星)이 금성을 범하다[편집]

○庚子/房星犯金星。

방성(房星)이 금성(金星)을 범하였다.


분경(奔競)을 금하는 하교를 내리다[편집]

○下敎禁奔競:

王若曰, 若稽古昔, 舜命龍以朕堲讒說殄行, 震驚朕師, 而臻泰和之治; 箕子告武王以民無淫朋, 人無比德, 而成忠厚之風, 數千載之下, 皆可得想也。 至若前朝之季, 紀綱陵夷, 朋黨相結, 讒譖相尙, 離間君臣, 殘傷骨肉, 以至於亡。 恭惟我太上王, 賴天地祖宗之佑, 創朝鮮社稷之基, 至于寡人, 嗣守艱大, 盍圖所以咸與惟新之化哉? 然餘風未殄, 私相比附, 奔競聚會, 譖人扇亂者多矣。 若不用重典, 以示禁令, 浸潤膚受, 得以恣行, 將必至於阻我盟好, 疑我宗室, 間我君臣而後已。 與前朝奚擇哉? 繼自今宗室、公侯、大臣、開國定社功臣, 至于百僚、庶士, 各供乃職, 毋相私謁。 如有冤抑告訴, 許於各其衙門及公會處, 謁見陳告, 毋相隱密讒毁。 違者, 憲司糾察, 主客皆竄遐方, 終身不齒。 凡族中三四寸及各節制使大小軍官, 不在此限, 然有造言生事, 罪同。 若所司刑曹決事員, 則雖於三四寸及所屬節制使處, 除問疾弔喪外, 亦不許私謁, 違者罰同。 功臣慶弔迎餞, 不在此限。 於戲! 摠百官頒號令, 惟爾廟堂之職, 體予至懷, 痛行禁令, 一革前朝之俗, 挽回虞、周之治, 以永朝鮮億萬年之業。

是時, 諸公侯各擁兵衆, 私謁成風, 交相譖毁, 故下此敎。

하교(下敎)하여 분경(奔競)[63]을 금하였다.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옛일을 상고하면, 옛날 순(舜)임금이 용(龍)[64]에게 명하기를 ‘짐(朕)은 참소하는 말이 착한 사람의 일을 중상하여 짐(朕)의 백성들을 놀라게 하는 것을 미워한다.’고 하여, 태평의 정치에 이르게 하였고, 기자(箕子)가 무왕(武王)[65]에게 고하기를, ‘백성은 음란한 붕당이 없고, 벼슬아치는 서로 비부(比附)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하여, 충후(忠厚)한 풍속을 이루었으니, 수천년이 내려와도 모두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의 말년에 이르러 기강이 해이하여져서 붕당(朋黨)을 서로 만들고, 참소하기를 서로 좋아하여, 군신을 이간시키고 골육을 상잔(傷殘)하여 멸망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공경하여 생각하건대,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 천지(天地)·조종(祖宗)의 도움을 힘입어서 조선(朝鮮) 사직의 기업을 창조하시고, 과인에 이르러 어렵고 큰 일을 이어 지키니, 어찌 모두 함께 새로워지는 교화를 도모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남은 풍속이 끊어지지 않아서 사사로이 서로 비부(比附)하여 분경(奔競)을 일삼아, 모여서 남을 참소하고 난(亂)을 선동하는 자가 많도다. 만일 중한 법전을 써서 금령(禁令)을 내리지 않으면, 침윤(浸潤)의 참소와 부수(膚受)의 호소가 마음대로 행하여져, 장차 반드시 우리의 맹호(盟好)를 저해하고, 우리의 종실을 의심하며, 우리의 군신을 이간하는 데 이르고야 말 것이니, 고려 때보다 무엇이 나을 것이 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종실·공후 대신(宗室公侯大臣)과 개국·정사 공신(開國定社功臣)에서 백료 서사(百僚庶士)에 이르기까지 각기 자기 직책에 이바지하여, 서로 사알(私謁)[66]하지 말고, 만일 원통하고 억울하여 고소할 것이 있거든, 각기 그 아문(衙門)이나 공회처(公會處)에서 뵙고 진고(陳告)하고, 서로 은밀히 참소하고 헐뜯지 말라. 어기는 자는 헌사(憲司)에서 주객(主客)을 규찰하여 모두 먼 지방에 귀양보내어, 종신토록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하리라. 무릇 족친 가운데 삼사촌(三四寸)과 각 절제사(節制使)의 대소 군관(大小軍官)은 이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말을 만들고 일을 일으키는 것이 있으면, 죄가 같을 것이다. 만일 맡은 바 형조의 결사원(決事員)이면, 비록 삼사촌과 소속(所屬) 절제사의 처소에라도 문병과 조상(弔喪)을 제외하고는 또한 사알(私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기는 자는 벌이 같을 것이다. 공신(功臣)의 경조(慶弔)와 영전(迎餞)은 이에서 제외된다. 아아! 백관을 통솔하고 호령을 반포하는 것은 너희 묘당(廟堂)의 직임이니, 나의 지극한 생각을 몸받아서 금령(禁令)을 엄하게 행하여 고려의 풍속을 일변해 고치고, 우(虞)나라·주(周)나라의 정치를 만회하여 조선 억만년의 기업을 영구토록 하라."

이때에 여러 공후가 각각 군사를 가지고 있어 사알(私謁)하는 것이 풍속을 이루어, 서로 참소하고 헐뜯었기 때문에 이러한 교서(敎書)를 내린 것이었다.


좌정승 조준이 전을 올려 사직하기를 비니 윤허하지 않다[편집]

○左政丞趙浚上箋乞辭, 不允。 箋略曰:

臣聞盛滿不止, 蕭何所以自辱; 封留知足, 張良所以保全。 臣自遭太上, 逮事殿下, 盛滿之極, 措身無地, 深以蕭何爲戒, 張良爲法, 罄竭至情, 仰瀆天聰。 伏念臣早志于學, 粗涉經史, 始事玄陵, 侍奉帷幄, 中遭否運, 若將終身。 不期太上, 一見如舊, 待之不次, 起臣衰絰之中, 置諸憲司之長。 臣由是感激, 知無不言, 太上包容, 言無不從, 赫然奮發, 勵精圖治, 昭布公道, 振起頹綱, 革私田以足民養, 黜僞姓以復王氏。 天不悔禍, 王氏昏迷, 奸臣搆隙, 不思太上匡復之功, 反生忌疾, 指太上爲權重, 目臣等爲朋黨, 嗾使臺諫, 謀殺臣等, 尋圖太上。 天佑太上, 諸公奮義, 兇徒瓦解, 臣亦生還。 於是天命人心, 已去王氏, 謳歌獄訟, 皆歸太上。 是由太上, 積德潛邸, 昭格於蒼蒼之使然, 臣安有毫髮之力於其間哉? 大事甫定, 位以大宰之崇, 錫以食邑之封, 冠名開國, 賞賜鉅萬, 太上所以生我貴我卵翼之德, 極天蟠地, 言之不覺涕泣。 臣與道傳、南誾, 同功一體, 初無纖毫之隔, 自道傳得罪天子, 與南誾結好, 謀攻遼東, 規免一己之禍。 臣當是時, 病臥於家, 太上遣二人, 枉咨於臣, 臣力疾作氣, 上謁天門, 奮發愚衷, 得回天意, 邪謀遂沮。 由是二人, 與臣猜隙, 勢不相容, 路人所知。 當太上失豫彌留之際, 惟此二人, 欲肆其慾, 貪立幼孼, 奸軌已成, 禍在朝夕。 幸賴天地祖宗陰相之力, 諸公駙馬擧義先發, 兇黨伏誅, 國步再安。 殿下擢置臣於上功之列, 錫以山河之誓, 圖畫雲臺, 賞賜尤極, 德至渥也。 及乎流言繼作, 眩惑衆聽, 臣浚隕越, 以竢鈇鑕。 殿下憐臣愚直, 察臣無罪, 天顔慘默, 泫然涕下, 生死肉骨於雷霆之下。 臣於是時, 知有殿下, 不知有一身也。 臣之耿耿, 天地鬼神, 所共赫臨, 事不避難, 竭心奉職, 死而後已。 此臣所以報太上, 而忠殿下之職分也。 然臣性本駑鈍, 不學墻面, 愛君憂國之念, 雖切於心, 輔世澤民之道, 未領其要, 久處論思之地, 曾無輔弼之益。 日者, 星芒示譴, 山石崩頹, 群烏夜噪, 無非臣愚, 久防賢者之路, 未克燮理之所致也。 《易》曰: “知進而不知退。” 《書》曰: “臣罔以寵利居成功。” 《傳》曰: “知足不辱, 知止不殆。” 此聖賢之格言也。 願殿下除臣食邑之封, 解臣政丞之職, 使臣優游盛化之中, 保全犬馬之餘年, 則臣生效華封之祝, 死期結草之報。

上未覽箋, 謂都承旨李文和曰: “昨夢, 浚見予, 自敍恭愍王以來歷仕之勞, 乞免政丞。” 言未訖, 文和展浚箋開讀, 上嘆曰: “予以否德, 承此丕基, 庶賴勳臣協輔, 以致隆平, 何乞辭之亟也!” 乃使右承旨李淑, 齎不允批答, 至浚第慰諭之。 略曰:

卿天資英毅, 識度淵深。 遇我太上王, 盡忠輔益, 以創萬世之丕基, 國家賴以爲安, 生靈倚以爲命。 不幸奸伏蕭墻, 禍在不測, 而卿仗義決策, 夾輔宗室, 推戴寡躬, 以定嫡庶, 置社稷於盤石之固, 措斯民於衽席之安。 惟卿之功, 宜誓帶礪, 惟卿之德, 宜冠廟堂, 仍授上相之任, 期致昇平之治, 退托之辭, 非所欲聞。 且予昨夢, 卿告以辭職, 而予慰勉不許, 及朝而卿書適至。 於戲! 君爲元首, 臣爲股肱, 一體相須, 以成其治。 苟非衷誠相感、聲氣相應, 則安得卿有心, 而予輒夢乎? 自今卿以盛滿爲戒, 予以保全爲急, 庶幾君臣各盡其道, 而亦有辭於後世矣。 近者天之示變, 地之見異, 皆否德所召。 卿當助我, 求所以消變之道, 不當求去以慼我也。 姑安厥位, 以副予懷。

浚讀之感泣。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이 전(箋)을 올려 사면하기를 비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전문(箋文)은 대략 이러하였다.

"신은 들으니, 성만(盛滿)[67]에 그치지 않은 것은 소하(蕭何)[68]가 스스로 욕(辱)을 부른 것이고, 유후(留侯)에 봉한 것을 족하게 안 것은 장양(張良)[69]이 스스로 보전한 것입니다. 신이 태상왕(太上王)을 만나고부터 전하를 섬기기에 이르기까지 성만(盛滿)이 극진함에 몸 둘 곳이 없었습니다. 깊이 소하로 경계를 삼고 장양으로 법을 삼아, 지극한 정회를 다하여 우러러 천총(天聰)을 더럽힙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이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대강 경사(經史)를 섭렵(涉獵)하고, 처음으로 현릉(玄陵)[70]을 섬겨 유악(帷幄)을 모셨는데, 중간에 비운(否運)을 당하여 장차 종신(終身)을 기약하지 못할 듯하였습니다. 태상(太上)께서 한 번 보시고 구면 같이 여기어 불차(不次)로 대접하였습니다. 신을 최질(衰絰)중에 기복(起復)하여 헌사(憲司)의 장(長)에 두시니, 신이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알면 말하지 않는 바가 없었고, 태상께서 널리 포용하여 말하면 좇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 혁연(赫然)히 분발하여 정성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도모해서, 공도(公道)를 밝게 펴고 무너진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하였습니다. 사전(私田)을 개혁하여 백성의 생활을 넉넉히 하고, 위성(僞姓)[71]을 내쫓아 왕씨(王氏)[72]를 다시 세웠는데, 하늘이 화(禍)를 풀지 아니하여 왕씨가 혼미하고, 간신들이 틈을 얽어서, 태상(太上)의 광복(匡復)하신 공은 생각지 않고 도리어 꺼리어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태상을 가리켜 권세가 중(重)하다 하고, 신 등을 지목하여 붕당(朋黨)이라 하여, 대간(臺諫)을 사주(使嗾)하여 신 등을 모살(謀殺)하고, 곧 태상을 도모하려 하였습니다. 하늘이 태상을 도와서 제공(諸公)들이 의거(義擧)를 분발하여, 흉도(兇徒)가 와해(瓦解)되고, 신도 또한 살아 돌아왔습니다. 이에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왕씨를 떠나고, 구가(謳歌)와 옥송(獄訟)이 모두 태상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태상께서 잠저(潛邸)에 덕을 쌓으시어 밝게 하늘에 이르게 해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신이 어찌 그 사이에 털끝만한 힘이 있었겠습니까?

큰 일이 겨우 정하여 지니, 태재(太宰)의 높은 자리에 앉게 하고 식읍(食邑)을 봉하여 주시어, 이름이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첫째가 되고, 상사(賞賜)가 거만(鉅萬)이나 되었습니다. 태상께서 저를 살리시고 귀하게 하시어, 난익지덕(卵翼之德)이 하늘에 닿고 땅에 서립니다. 말을 하면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신은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과 더불어 동공일체(同功一體)여서, 처음에는 털끝만한 간격도 없었습니다. 정도전이 천자에게 죄를 얻으면서부터 남은과 결탁하여 요동(遼東)을 치자고 꾀해서 한 몸의 화를 면하려 하였습니다. 신이 이때 와병(臥病)중에 있었는데, 태상께서 두 사람을 보내어 신에게 물으셨습니다. 신이 병을 무릅쓰고 기운을 내어 천문(天門)에 뵈옵고, 어리석은 충정을 분발하여 천의(天意)를 돌이키니, 간사한 꾀가 드디어 저지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두 사람과 신 사이에 시기하고 틈이 생겨, 형세가 서로 용납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길 가는 사람도 아는 바입니다. 태상께서 병환이 나서 오래 끄는 때를 당하여, 오직 이 두 사람만은 그 욕망을 이룩하고자 하여 어린 얼자(孽子)를 세우기를 탐하였습니다. 외간(外奸) 내궤(內軌)가 이미 이루어져서 화가 조석에 있었는데, 다행히 천지(天地) 조종(祖宗)의 몰래 돕는 힘을 입어서, 제공(諸公)과 부마(駙馬)가 먼저 의거(義擧)를 일으켜, 흉한 무리가 복주(伏誅)되고, 나라의 운수가 다시 안정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신을 공신(功臣)의 상열(上列)에 뽑아 두시어, 산하(山河)의 맹세를 주시고, 운대(雲臺)[73]에 그림을 그리고, 상사(賞賜)가 더욱 지극하였으니, 덕이 지극히 우악(優渥)하였습니다. 유언(流言)이 잇달아 생겨 여러 사람의 청문(聽聞)을 현혹하게 됨에 미쳐서, 신 조준(趙浚)이 운월(隕越)하여 부월(鈇鉞)을 기다릴 뿐이었더니, 전하께서 신의 어리석고 곧은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신의 무죄함을 살피시와, 천안(天顔)이 참측(慘惻)하고 침묵하시어 현연(泫然)히 눈물을 흘리셔서, 뇌정(雷霆) 아래에 재생(再生)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신은 이때에 전하가 계신 것만 알고 신의 한 몸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경경(耿耿)한 마음은 천지 귀신이 함께 조림하는 바입니다. 일에 있어 어려운 것을 피하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직책을 받들어서 죽은 뒤에야 마는 것이, 이것이 신이 태상께 보답하고 전하께 충성하는 직분입니다.

그러나 신은 성품이 본래 노둔(駑鈍)하고 배우지 못해 무식하여 도리에 어둡습니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생각은 비록 마음에는 간절하나, 세상을 돕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도리는 그 요령을 알지 못합니다. 오래 논사(論思)의 자리에 있었으나 일찍이 보필의 도움이 없었습니다. 근자에 꼬리별이 견책(譴責)을 보이고, 산의 돌이 무너지고, 뭇 까마귀가 밤에 울고 하는 것이, 모두가 어리석은 신이 오래 어진 사람의 길을 막아서 섭리(燮理)를 잘 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나가는 것만 알고 물러가는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고, 《서전(書傳)》에 말하기를, ‘신하는 총애와 이록(利祿)으로 성공(成功)에 처하지 말라.’ 하였고, 전(傳)에 말하기를, ‘족한 것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만두는 것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현의 격언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에게 봉한 식읍을 없애시고, 신에게 정승의 직책을 해면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성화(盛化) 가운데서 한가롭게 노닐며 견마(犬馬)의 남은 해를 보전하게 하시면, 신이 살아서는 화봉(華封)의 축수[74]를 본받고, 죽어서는 결초(結草)의 보은(報恩)[75]을 기약하겠습니다."

임금이 전(箋)을 보기 전에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에게 이르기를,

"어제 꿈에 조준이 나를 보고 공민왕 이래로 벼슬하여 온 노고를 스스로 말하고, 정승을 사면하기를 빌었다."

하였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문화가 조준의 전문을 펴서 읽으니, 임금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덕이 없이 이 큰 기업을 이어받아, 훈신(勳臣)의 협찬과 보필에 힘입어서 태평시대에 이를까 바랐는데, 어찌하여 사면하기를 급히 비는가?"

하고, 우승지(右承旨) 이숙(李淑)을 시켜 윤허하지 않는 비답(批答)을 가지고 조준의 집에 이르러 위로하여 유시하였는데, 대략 이러하였다.

"경(卿)은 타고난 바탕이 영의(英毅)하고, 지식과 도량이 매우 깊다. 우리 태상왕(太上王)을 만나 충성을 다하여 보좌해서 만세의 큰 기업을 창건하니, 국가에서 힘을 입어 평안해졌고, 생령(生靈)이 의지하여 명(命)을 부지하였다. 불행하게도 간신이 소장(蕭墻)[76]에 엎드려 있어 화가 불측(不測)한 지경에 있었는데, 경이 대의에 의하여 계책을 결정해서 종실을 협보(夾輔)하고, 과궁(寡躬)을 추대하여 적서(嫡庶)의 분수를 정해서, 사직(社稷)을 반석같이 굳게 하고, 백성들을 임석(衽席)의 편안한 곳에 두었도다. 경의 공은 마땅히 대려(帶礪)[77]로 맹세하여야 하고, 경의 덕은 마땅히 묘당(廟堂)의 으뜸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상상(上相)의 직임을 주고 승평(昇平)의 정치에 이르기를 기약하니, 사퇴하고 칭탁하는 말은 듣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또 내가 어제 꿈에 경이 사직하기를 고하기에, 내가 위로하고 권면하여 허락하지 않았는데, 아침에 경의 글이 마침 이르렀다. 아아! 임금은 원수(元首)요, 신하는 고굉(股肱)이니, 한 몸이 되어 서로 의지하여 정치를 이루는 것이다. 진실로 충성(衷誠)으로 서로 느끼고 성기(聲氣)로서 서로 응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경의 마음이 있는데, 내가 문득 꿈꿀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 경은 성만(盛滿)한 것으로 경계를 삼고, 나는 보전하는 것으로 급한 것을 삼으면, 거의 군신이 각각 그 도리를 다하고, 또한 후세에 칭사(稱辭)가 있을 것이다. 근자에 하늘이 이변(異變)을 보이고, 땅이 재이(災異)를 보이는 것은 모두 부덕(否德)이 부른 것이니, 경은 마땅히 나를 도와서 변(變)을 없애는 방도를 구(求)할 것이요, 물러가기를 구(求)하여 나를 슬프게 할 것이 아니다. 아직 그 직위를 편안히 하여 나의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조준이 읽고서 감격하여 울었다.


8月 4日[편집]

백운산 백운사에 피비가 내리다[편집]

○辛丑/雨血于白雲山白雲寺。

백운산(白雲山) 백운사(白雲寺)에 피비[血雨]가 내렸다.


조온·정남진·조진이 날마다 임금과 격구하였으므로 각각 말 1필을 하사하다[편집]

○趙溫、鄭南晋、趙珍, 日侍擊毬, 各賜馬一匹。

조온(趙溫)·정남진(鄭南晉)·조진(趙珍)이 날마다 모시고 격구(擊毬)하였으므로, 각각 말 1필을 하사하였다.


8月 6日[편집]

경상도 바닷물이 나흘 동안 피같이 붉고 물고기가 죽어 통도사에 기양 도량을 열다[편집]

○癸卯/慶尙道海水, 自蔚州至東萊長三十里、廣二十里, 赤如血, 水族盡死, 凡四日。 人云天狗星落海中所致, 命設道場于通度寺以禳之。

경상도 바닷물이 울주(蔚州)에서 동래(東萊)까지 길이 30리, 너비 20리로 피같이 붉었는데, 무릇 나흘 동안이나 그러하였다. 수족(水族)이 모두 죽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천구성(天狗星)이 바다 가운데에 떨어진 까닭이다."

하였다. 명하여 도량(道場)을 통도사(通度寺)에 베풀어 기양(祈禳)하였다.


우보궐 황희를 불러 의원 양홍도의 임명장에 서명하도록 명하다[편집]

○召右補闕黃喜, 命署楊弘道敎牒。 弘道, 醫人, 母本金允澤之婢也。 受郞將, 門下府不署敎牒, 故有是命。

우보궐(右補闕) 황희(黃喜)를 불러 양홍도(楊弘道)의 교첩(敎牒)[78]에 서명(署名)하도록 명하였다. 양홍도는 의원인데, 어미는 본래 김윤택(金允澤)의 계집종이었다. 낭장(郞將)을 제수받으니, 문하부(門下府)에서 교첩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은 것이다.


8月 8日[편집]

부엉이가 신도의 근정전과 태묘 옆에서 울다[편집]

○乙巳/鵂鶹鳴於新都勤政殿鷲頭, 又鳴於太廟之傍。

부엉이가 신도(新都)의 근정전(勤政殿) 취두(鷲頭)에서 울고, 또 태묘(太廟) 옆에서 울었다.


하늘의 변고와 땅의 재변으로 임금이 대 사면령을 반포하다[편집]

○頒宥旨:

王若曰, 予以眇躬, 幸賴天地宗社之佑, 獲纉丕基, 夙夜惟寅, 勵精圖治, 期至昇平。 然而不明于德, 昧於時措, 民不被澤。 且人事感於下, 則天變應於上, 故古之王者, 每遇災變, 必修人事, 或側身修行, 或發政施仁, 蓋反其本, 應天以實也。 近者, 天變地怪, 屢彰譴告, 實由寡人否德之致。 慄慄危懼, 若涉淵氷, 飭躬修省, 思免厥愆, 宜勤恤於民隱, 庶小答於天心。 自建文元年八月初九日昧爽以前, 二罪以下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咸宥除之。 雖干一罪, 互相連逮, 涉於疑似者, 宜卽申聞, 取旨施行, 敢以宥旨前事, 相告言者, 以其罪罪之。 所有事件, 條列于後。 一, 獄囚淹滯, 雖甚不可, 若其死罪, 所當精察。 今中外官司, 畏其遲緩, 務欲速斷, 濫加鞫問, 致傷人命, 實所不忍。 自今中外官司, 罪之輕者, 宜卽斷決, 毋致淹滯; 外方死罪, 毋得彼此移囚。 每於罪囚在處, 監司親到, 詳窮情僞, 毋委守令, 嚴加刑問, 以致冤枉, 以體予欽恤之意。 其中外輕罪, 淹滯不斷者, 憲府、監司, 考察糾理。 一, 自戊辰至戊寅, 被誅人員奴婢, 皆屬各司, 不堪其苦, 以至逃避, 令其本主代立, 致使主奴, 皆失其所, 怨謗滋甚。 中外官司將上項人員奴婢家舍及其贈與奴婢, 各還本主; 戊寅年被誅者家財, 亦令還給。 一, 前朝之季, 倉廩虛竭, 凡爲國用, 强取於人, 不卽給價, 淹延歲月, 民甚不便。 今濟用庫, 其弊尙存, 已曾納物未受價者, 皆悉給之。 自今所用, 雖當急遽, 必先給價而後取, 毋敢强焉。 一, 民無遠慮, 侈用傷財, 以至窮乏, 所當禁制。 且今幸致年豐, 盛設酒食, 群聚宴飮, 糜費甚煩。 凡中外公私宴飮, 一行禁斷, 以阜民財, 違者糾治。 一, 牛以耕田, 有功於人, 屠殺之禁, 已有著令, 頑暴之徒, 尙不畏法, 私自屠殺。 自今中外官司, 嚴加禁斷, 違者痛治。 一, 《經濟六典》備載治國之要, 自今頒布中外, 遵守擧行。 違者, 內而憲司, 外而監司, 嚴加考察, 毋致廢弛。 一, 中外寺社所屬田地, 許令本寺專收其租。 於戲! 畏天之威, 敢忘警戒之志! 爲政以德, 宜推寬恤之仁。 其務行之, 以副予意。

유지(宥旨)를 반포하였다. 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작은 몸으로 다행히 천지(天地) 종사(宗社)의 도움에 힘입어 큰 기업을 이어받아, 숙야(夙夜)로 공경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도모해서, 승평(昇平)에 이르기를 기약하였다. 그러나 덕(德)이 밝지 못하고, 때로 조처하는 데에 어두워서, 백성이 혜택을 입지 못하였다. 또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느껴지면, 천변(天變)이 위에서 응하기 때문에, 예전의 왕노릇하는 이는 매양 재변을 만나면 반드시 인사(人事)를 닦았다. 혹은 몸을 삼가하여 행실을 닦고, 혹은 정령(政令)을 발하여 인정(仁政)을 베풀었으니, 대개 그 근본에 반성하여 실상으로 하늘에 응하는 것이었다. 근자에 천변과 지괴(地怪)가 여러 번 견고(譴告)를 보이었으니, 실로 과인의 부덕한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위태하게 여기고 두려워하기를 연못의 얼음을 건너는 것 같이 하여, 몸을 신칙(申飭)해 닦고 살피어 그 허물을 면하기를 생각하였다. 백성의 괴로운 것을 불쌍히 여기는 데 마땅히 부지런하여, 천심(天心)에 조금이라도 보답하여야 하겠다. 건문(建文) 원년 8월 초9일 새벽 이전의 이죄(二罪) 이하는,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結正)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용서하여 면제하라. 비록 일죄(一罪)[79]에 관계되더라도 서로서로 연관되어 의사(疑似)에 속하는 것은 곧 신문(申聞)하여 왕지(王旨)를 받아서 시행하라. 감히 유지(宥旨)를 내린 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하고 말하는 자는, 그 죄로써 죄를 주겠다. 지금 사건을 조목조목 아래에 열거한다.

1. 옥수(獄囚)를 오래 가두어 두는 것은 비록 심히 불가하나, 만일 사죄(死罪)라면 마땅히 정(精)하게 살펴야 할 것인데, 지금 중외(中外)의 관사(官司)에서 그 지완(遲緩)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되도록 빨리 결단하려고 하여, 지나치게 국문(鞫問)을 가해 인명을 상하게 하니, 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 이제부터 중외(中外)의 관사(官司)에서 죄의 경한 것은 곧 결단하여 오래 지체하게 하지 말라. 외방(外方)의 사죄(死罪)는 여기저기로 이수(移囚)시키지 말고, 매양 죄수가 있는 곳에 감사(監司)가 친히 가서 자세히 사실과 허위를 캐묻고, 수령(守令)에게 위임하여 엄하게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게 하지 말아서, 나의 흠휼(欽恤)하는 뜻을 몸받으라. 그 중외(中外)의 가벼운 죄로 오래 지체하여 결단하지 않은 것은 헌부(憲府)와 감사가 고찰하여 규리(糾理)하라.

1. 무진년에서 무인년 사이에 주살(誅殺)당한 사람의 노비(奴婢)를 모두 각사(各司)에 붙였는데,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도피하기에 이르렀으므로, 그 본주(本主)로 하여금 대신 세우게 하였었다. 그 때문에 주인과 노비가 모두 살 곳을 잃어서 원망과 비방이 자심하다. 중외(中外)의 관사(官司)에서는 상항의 인원(人員)의 노비와 가사(家舍), 그리고 그 증여한 노비를 각각 본주인에게 돌려주고, 무인년에 주살당한 사람들의 가재(家財)도 또한 돌려주도록 하라.

1. 고려 말년에 창름(倉廩)이 고갈하여, 무릇 국가에서 쓰는 것을 강제로 사람에게서 취하고 곧 값을 주지 않고 세월을 끌어서, 백성들이 심히 불편하게 여겼다. 지금 제용고(濟用庫)에 그 폐단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미 일찍이 물건을 바치고 값을 받지 못한 것은 모두 다 지급하고, 이제부터는 급한 때를 당하더라도 반드시 먼저 값을 준 뒤에 취하고 감히 강제로 하지 말라.

1. 백성들이 후일을 염려하지 아니하고 사치하게 써서 재물을 없애고 궁핍(窮乏)하기에 이르니, 마땅히 금하고 제재하여야 하겠다. 또 지금 다행히 풍년이 들어서, 풍성하게 주식(酒食)을 차려놓고 무리를 모아 연음(宴飮)하여 낭비하는 것이 심히 많으니, 무릇 중외(中外)의 공사(公私) 간의 연음(宴飮)을 일절 금단하여 백성의 재물을 풍족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규찰하여 다스리라.

1. 소는 밭을 갈므로 사람에게 공이 있다. 도살(屠殺)의 금지는 이미 나타난 영갑(令甲)이 있는데도, 완악하고 포악한 무리가 오히려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사로이 도살하니, 이제부터는 중외(中外)의 관사(官司)에서 엄하게 금단(禁斷)하여, 어기는 자는 엄격하게 다스리라.

1.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치국(治國)하는 요령을 갖추 실었으니, 지금부터 중외에 반포하여 준수해 거행케 하고, 어기는 자는, 안에서는 헌사(憲司)가, 밖에서는 감사(監司)가 엄하게 고찰하여, 폐지하거나 해이하게 하지 말라.

1. 중외의 사사(寺社)에 소속된 전지(田地)는 본사(本寺)로 하여금 오로지 그 조세(租稅)를 거두게 하라.

아아!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니, 감히 경계하는 뜻을 잊으랴! 정치는 덕으로 하는 것이니, 마땅히 관휼(寬恤)하는 인(仁)을 베풀어야 한다. 힘써 행하여 내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하라."


8月 9日[편집]

산올빼미가 종묘 옥상에서 우는데 마치 웃으면서 우는 것 같았다[편집]

○丙午/鵩鳴于宗廟屋上, 聲如笑號。

산올빼미[鵩鳥]가 종묘 옥상에서 울었는데, 그 소리가 웃으면서 우는 것 같았다.


8月 10日[편집]

산올빼미가 신도의 근정전 위에서 울다[편집]

○丁未/鵩鳴于新都勤政殿上。

산올빼미[鵩鳥]가 신도(新都)의 근정전(勤政殿) 위에서 울었다.


산올빼미가 수창궁 옥상에서 울자 서운관에서 근신할 것을 권하다[편집]

○翌日, 鳴于壽昌宮屋上。 書雲觀啓云: “宜避正殿, 齊心愼慮, 消去變怪。” 上曰: “一宮之內, 避之何益! 宜擇別所。”

이튿날 수창궁(壽昌宮) 옥상에서 울었다. 서운관(書雲觀)이 아뢰기를,

"마땅히 정전(正殿)을 피하고, 마음을 정제하고 생각을 삼가서 변괴를 없애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한 궁(宮)안에서 피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른 곳을 택하는 것이 마땅하다."


기양하는 도량을 불은사에서 베풀다[편집]

○設祈禳道場于佛恩寺。

기양(祈禳)하는 도량(道場)을 불은사(佛恩寺)에서 베풀었다.


8月 12日[편집]

달이 견우성을 범하다[편집]

○己酉/月犯牽牛。

달이 견우성(牽牛星)을 범하였다.


신덕 왕후의 기일재를 흥천사에서 베풀다[편집]

○設神德王后忌齋于興天寺。 是日, 太上王幸廣明寺, 別設忌齋。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기일재(忌日齋)를 흥천사(興天寺)에서 베풀었다. 이날에 태상왕이 광명사(廣明寺)에 거둥하여 따로 기일재(忌日齋)를 베풀었다.


공신 도감에서 임금의 화상과 정사 공신의 화상을 바치다[편집]

○功臣都監進御容及定社功臣影子。

공신 도감(功臣都監)에서 어용(御容)과 정사 공신(定社功臣)의 그림을 바치었다.


태상왕이 천수송정에서 흥천사의 주법(主法) 조생(祖生)이 가는 것을 전송하다[편집]

○太上王如天水松亭, 餞興天寺主法祖生之行。

태상왕이 천수송정(天水松亭)에 가서 흥천사(興天社)의 주법(主法) 조생(祖生)의 가는 것을 전송하였다.


8月 15日[편집]

부엉이가 솔개에 쫓겨 근정전 위에 와서 모이자 중들을 모아서 기양하다[편집]

○壬子/鵂鶹爲鳶烏所毆, 來集于勤政殿上。 集緇流讀佛經以禳之。

부엉이가 솔개에게 쫓겨 근정전 위에 와서 모였다. 중들을 모아서 불경을 읽어 기양(祈禳)하였다.


8月 19日[편집]

물동이만한 유성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다[편집]

○丙辰/流星大如盆, 自西流于東。

유성(流星)의 크기가 물동이만 하였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갔다.


문하부에서 시무 3개 조목을 아뢰다[편집]

○門下府上書陳時務:

一, 求言納諫, 人主之要道, 君不納諫, 則無以知其過。 是故以大舜之智, 好察邇言; 以成湯之聖, 從諫弗咈。 由是觀之, 歷代帝王之治, 莫不從諫而致然。 日者臺諫上疏, 或不賜允, 留中不下, 以致言路塞而下情不達, 恐非先王治天下國家之道也。 願自今, 臺諫所啓之事, 卽賜兪允, 以廣言路, 以達下情。 一, 古之聖王, 朝以聽政, 晝以訪問, 暮以修令, 未嘗頃刻而怠於政事。 殿下旣承祖宗之業, 誠宜夙夜匪懈, 自夏至秋, 未有視朝聽政之日。 今天妖地怪, 屢彰譴告, 豈非怠於政事之致然歟? 殿下當恪謹天戒, 視朝聽政, 日與群臣, 講論治道, 以答天心。 豈可祈禱神佛, 以去災異之譴? 願殿下, 於每月六衙日, 令各司所掌之事, 具本啓聞, 親自裁斷。 一, 三年之喪, 萬世之常經; 起復之制, 一時之變例。 是故當國家危亂之際, 人臣有才兼將相, 身佩安危者, 則必須奪情起復, 以任其事, 誠有所不獲已也。 豈可行於治平之世哉? 況諫官掌獻替, 以正人主; 憲司掌糾察, 以繩百僚。 是以臺諫之官, 必先正己, 然後可以責難於君, 可以糾治風俗。 願自今毋起衰絰之人, 以授臺諫之任, 其餘起復之制, 一依《六典》。

時全伯英丁母憂廬墓, 以大司憲赴召, 故郞舍言及之。 上自五月患痢疾, 然有啓事, 無不裁決, 近雖康復, 又因雨潦, 不視衙朝。 然至於聽政, 不論朝暮, 不忌內外, 啓輒聽斷。 至是, 諫官言天變地怪, 皆怠政所致, 上甚慙赧, 卽許之, 唯論起復一條不下。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서(上書)하여 시무(時務)를 진술(陳述)하였다.

"1. 말을 구하고 간(諫)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주(人主)의 요도(要道)이니, 임금이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허물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순(大舜)의 지혜로도 천근(淺近)한 말을 실피기를 좋아하였고, 성탕(成湯)[80]의 성(聖)스러움으로도 간(諫)하는 말을 좇아서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역대 제왕의 다스림이 간함을 좇아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일에 대간(臺諫)이 상소(上疏)하면, 혹 유윤(兪允)을 내리지 않거나, 궁중에 머물러 두고 비답(批答)하지 않아서, 언로(言路)가 막히고 하정(下情)이 통달하지 못하게 되니, 두렵건대, 선왕(先王)의 천하 국가를 다스리던 도리가 아닌가 합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대간이 계달(啓達)하는 일은 곧 유윤을 내리시어 언로를 넓히고 하정을 통달하게 하소서.

1. 예전의 성왕(聖王)은 아침에 정사를 듣고, 낮에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고, 저녁에 명령을 닦아서, 일찍이 경각(頃刻) 사이도 정사(政事)에 태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전하가 이미 조종(祖宗)의 업을 이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숙야(夙夜)로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여름부터 가을까지 조회를 보고 정사를 들은 날이 없습니다. 지금 천요(天妖)와 지괴(地怪)가 여러 번 견고(譴告)를 보인 것이, 어찌 정사에 게을리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마땅히 하늘의 경계를 삼가시어 조회를 보고 정사를 들어서, 날마다 여러 신하와 치도(治道)를 강론하여 천심(天心)에 보답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찌 귀신과 부처에게 기도하여 재이(災異)의 견책(譴責)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매월(每月) 6아일(六衙日)[81]에 각사로 하여금 맡은 일에 대하여 계본(啓本)을 갖추어 계문(啓聞)케 하여, 친히 스스로 결단하소서.

1. 3년의 상(喪)은 만세의 떳떳한 법이요, 기복(起復)하는 제도는 한때의 변례(變例)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위태하고 어지러울 때에는 신하로서 재주가 장상(將相)을 겸하고, 그 몸이 국가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탈정(奪情) 기복(起復)하여 일을 맡기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하여 하는 것입니다. 어찌 치평(治平)한 세상에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간관(諫官)은 헌체(獻替)[82]를 맡아서 임금을 바르게 하고, 헌사(憲司)는 규찰을 맡아서 백료(百僚)의 잘못을 고치게 하니, 이로 인하여 대간(臺諫)의 관원은 반드시 먼저 자기를 바르게 한 연후에야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책망할 수 있고, 풍속을 규찰하여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최질(衰絰) 중에 있는 사람을 기복(起復)하여 대간의 직임을 주지 마시고, 그 나머지 기복의 제도는 한결같이 《육전(六典)》에 의하소서."

이때에 전백영(全伯英)이 모상(母喪)을 당하여 여묘(廬墓)살이를 하다가 대사헌으로 소환되었기 때문에, 낭사(郞舍)에서 말한 것이다. 임금이 지난 5월부터 이질(痢疾)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계사(啓事)가 있으면 재결하지 않음이 없었고, 근자에는 비록 강복(康復)은 되었으나, 또 장마로 인하여 아일(衙日)에 조회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정사를 듣는 것에 이르러서는 아침 저녁을 불문하고, 안과 밖을 꺼리지 않고, 계달(啓達)하면 문득 들어서 결단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간관이 말하기를, 천변(天變)과 지괴(地怪)가 모두 정사를 게을리 한 소치라고 하니, 임금이 대단히 부끄러워하여 곧 허락하였다. 오직 기복(起復)을 논한 한 조목은 내려 주지 않았다.


행대 감찰을 각도에 보내어 민심·수령·향리를 몰래 체찰하게 하다[편집]

○分遣行臺監察於各道, 潛行體察民間利害、守令得失與州郡老奸之病民者。

행대 감찰(行臺監察)[83]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민간의 이해(利害)와 수령들의 잘잘못과 주군(州郡)의 노간(老奸)[84]들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을 몰래 체찰(體察)하게 하였다.


중문에 나아가 조회를 보다[편집]

○御中門視朝。

중문(中門)에 나아가서 조회를 보았다.


전 남편의 종들과 간통한 박원길의 아내 변씨가 여러 사악한 일을 저질러 주살당하다. 변씨는 변계량의 누이[편집]

○誅朴元吉妻卞氏。 卞氏私于亡夫朴冲彦之鶹大及沙顔, 至是再適元吉。 元吉知其狀, 卞氏乃懼, 謂其弟季良曰: “吾夫性暴, 難與偕老。” 季良不答, 卞氏遂惡季良, 與包大謀, 結靖安公第寺人金貴千作過房, 贈以奴婢四口。 使包大因貴千以告靖安公曰: “予之未適元吉也, 今年正月, 李養蒙爲其兄養中媒我曰: ‘吾嘗率才人數百人, 吾主將義安公, 亦有麾下軍數千人, 一日鼓亂, 安知其不爲大將軍乎!’ 及嫁元吉, 嘗與元吉語之, 元吉曰: ‘吾亦一日見義安公, 公曰: 「吾之氣像如何? 吾得大位, 亦何難乎!」’ 今元吉及季良, 與養蒙、養中等, 潛謀搆亂, 事將發矣。 盍早圖之!” 靖安公聞于上。 於是, 諸公侯及諸節制使, 俱會闕下, 使大將軍沈龜齡, 執元吉鞫之。 元吉曰: “無是事也。” 卞氏逃焉, 靑原侯得之, 幷包大囚之, 使與元吉、養蒙參問。 卞氏曰: “養蒙, 義安公麾下牌頭也。 與吾夫謀立義安公, 將欲發事。” 義安父子聞之, 震懼哭泣。 元吉及沙顔, 皆被杖病死。 鞫養蒙等, 皆無驗。 包大曰: “吾兄弟通乎主婦, 而元吉覺其事, 故搆飛語, 欲陷之死地, 實無是事。” 於是, 盡釋養蒙等, 其卞氏及包大處斬。

박원길(朴元吉)의 아내 변씨(卞氏)를 주살하였다. 변씨가 죽은 남편 박충언(朴沖彦)의 종 포대(包大)와 사안(沙顔)과 사통(私通)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박원길에게 재가(再嫁)하였다가 박원길이 그 실상을 알게 되니, 변씨가 두려워하여 그 아우 변계량(卞季良)에게 말하기를,

"내 남편이 성질이 사나와서 더불어 해로(偕老)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변계량이 대답하지 않으니, 변씨가 드디어 변계량을 미워하여 포대(包大)와 더불어 모의하고, 정안공(靖安公)의 집 사인(寺人) 김귀천(金貴千)과 결탁하여 양자(養子)로 삼아 노비(奴婢) 4구(口)를 주고, 포대를 시켜 김귀천을 인연하여 정안공(靖安公)에게 고하였다.

"내가 박원길(朴元吉)에게로 시집가기 전인데, 금년 정월에 이양몽(李養蒙)이 그의 형 이양중(李養中)을 위하여 내게 중매하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재인(才人)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고, 우리 주장(主將) 의안공(義安公)[85]이 또한 휘하(麾下)에 군사 수천 명이 있으니, 하루에 난을 일으키면 어찌 대장군(大將軍)이 되지 않을지 아느냐?’ 하였습니다. 박원길에게 시집가서 박원길에게 얘기하였더니, 박원길이 말하기를, ‘나도 역시 어느날 의안공(義安公)을 뵈오니, 공이 말하기를, 「나의 기상(氣象)이 어떠하냐? 내가 대위(大位)를 얻더라도 또한 무엇이 어렵겠느냐?」 하였다.’ 하였습니다. 지금 박원길과 변계량이 이양몽·이양중 등과 더불어 몰래 난을 일으킬 것을 꾀합니다. 일이 장차 터질 것이니, 왜 일찍 도모하지 않습니까?"

정안공이 임금에게 계문(啓聞)하니, 이에 여러 공후(公侯)와 여러 절제사(節制使)가 함께 궐하(闕下)에 모여, 대장군(大將軍) 심귀령(沈龜齡)을 시켜 박원길을 잡아 국문하였다. 박원길이 말하기를,

"그런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변씨는 도망하였으나, 청원후(靑原侯)가 잡아서 포대와 함께 가두고, 박원길·이양몽과 같이 심문하였다. 변씨가 말하기를,

"이양몽은 의안공(義安公) 휘하의 패두(牌頭)입니다. 내 남편과 함께 의안공을 세우기를 도모하여 장차 거사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의안공 부자가 듣고 두려워하여 떨며 통곡하였다. 박원길과 사안(沙顔)은 모두 곤장을 맞아 병사(病死)하였다. 이양몽 등을 국문하니, 모두 혐의가 없었다. 포대가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주인 마님을 사통하였는데, 박원길이 그 일을 알게 되었으므로, 거짓말을 꾸며 사지(死地)에 빠뜨리고자 한 것이요, 실상은 이런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양몽 등은 모두 석방하고, 변씨와 포대는 처참(處斬)하였다.


문하부에서 공사의 방목(放牧)을 금하자고 청하니 윤허하지 않다[편집]

○門下府上言, 請罷公私放牧, 不允。 疏曰:

古者, 度閑曠之地, 置牧馬之場, 令太僕監之, 晝牧于場, 夜入于閑, 不使傷農。 今內乘牧馬之人, 侵漁附近之民, 一有不順其慾者, 則驅所牧之馬, 納諸禾穀之田, 無告之民, 罔不憤惋。 且諸節制使道及三軍十司、成衆愛馬, 亦於圻內, 各占私場, 晝夜縱馬, 彌滿田野, 所遇之田, 蕩然無遺。 田夫不忍而驅逐之, 則反爲牧人所制, 拱手無言, 痛心飮泣者衆矣。 然則歲雖豐穰, 何益於民哉! 宜遣監察, 巡行考察, 使內乘牧人, 毋得縱馬傷穀, 違者痛治, 其上項私放牧, 一皆罷之。

上只令行臺監察, 分道考察, 其公私牧場不罷。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언(上言)하여 공사(公私)의 방목(放牧)을 혁파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예전에 놀고 있는 빈 땅을 헤아려서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하고, 태복(太僕)을 시켜 감독하였는데, 낮에는 목장에 방목하고, 밤에는 우리에 넣어서 농작물을 상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지금은 내승(內乘)[86]의 말 기르는 사람이 부근의 백성들을 침탈(侵奪)하여, 하나라도 그 욕심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먹이는 말을 몰아서 화곡(禾穀)의 밭에 넣으니, 고(告)할 데 없는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또 여러 절제사도(節制使道)[87]와 삼군 십사(三軍十司)·성중 애마(成衆愛馬)[88]가 또한 경기(京圻) 안에 각각 사설 목장을 점유하여 밤낮으로 말을 놓아 전야(田野)에 가득하니, 당하는 밭은 씻은 듯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밭 주인이 참지 못하여 몰아서 쫓으면, 도리어 목인(牧人)의 제어를 받게 되므로, 두 손을 끼고 말은 없으나, 마음은 아파 울음을 삼키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하니 비록 풍년이 들더라도 백성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감찰을 보내서 순행(巡行) 고찰하여, 내승(內乘)의 목인(牧人)으로 하여금 말을 놓아 곡식을 상하지 못하게 하고, 어기는 자는 엄하게 다스리고, 상항(上項)의 사사 방목은 일절 모두 혁파하소서."

임금이 다만 행대 감찰(行臺監察)을 시켜 도(道)를 나누어 고찰하게 하고, 공사의 목장은 혁파하지 아니하였다.


8月 25日[편집]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다[편집]

○壬戌/大風拔木。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삼군의 둑기를 강안전의 간락청에 옮겨 두다[편집]

○移置三軍纛于康安殿之看樂廳。

삼군(三軍)의 둑(纛)을 강안전(康安殿)의 간락청(看樂廳)에 옮겨 두었다.


임금이 편치 못하다[편집]

○上傷風不豫。

임금이 바람에 상해 편치 못하였다.


8月 26日[편집]

경상도 등지에 바닷물이 검붉어지고 물고기들이 썩어 죽다[편집]

○癸亥/慶尙道寧海、長鬐、盈德、淸河等地, 海水赤黑, 迎日、固城等縣, 海水赤, 水族爛死。

경상도(慶尙道) 영해(寧海)·장기(長鬐)·영덕(盈德)·청하(淸河) 등지에 바닷물이 검붉었고, 영일(迎日)·고성(固城) 등 고을에 바닷물이 붉었는데, 수족(水族)들이 썩어 죽었다.


호조 전서 최운사를 보내어 일본에 보빙하다[편집]

○遣戶曹典書崔云嗣, 報聘于日本。

호조 전서(戶曹典書) 최운사(崔云嗣)를 보내어 일본에 보빙(報聘)하였다.


임금의 건강이 조금 회복되다[편집]

○上稍康復。

임금이 조금 강복(康復)되었다.


태상왕이 낙산사에서 능엄 법회를 베풀고 이튿날 돌아오다[편집]

○太上王如洛山寺, 設《楞嚴》法會, 翌日還。

태상왕이 낙산사(洛山寺)에 가서 능엄 법회(楞嚴法會)를 베풀고, 이튿날에 돌아왔다.


경상도 도관찰사 임정의 사임에 따라 조박을 대신 임명하다[편집]

○慶尙道都觀察使林整辭, 以趙璞代之。

경상도(慶尙道) 도관찰사 임정(林整)이 사면하니, 조박(趙璞)으로 대신시켰다.


8月 29日[편집]

안개가 끼다[편집]

○丙寅/霧。 明日亦如之。

안개가 끼었다. 다음날도 역시 그러하였다.


임금이 건강이 회복되어 격구놀이를 하다[편집]

○上康復, 爲擊毬戲。

임금이 강복(康復)되어 격구 놀이를 하였다.


청천백 이거인의 무고가 탄로되어 청주에 귀양보내다[편집]

○流淸川伯李居仁于淸州。 初, 居仁謂妹夫禮曹典書閔慶生曰: “弟居易與其子佇, 銜君壻趙璞, 欲發其父子(娶)〔聚〕麀事, 潛欲犯夜起兵以殺璞。” 又謂居易曰: “趙璞有才氣, 且於懷安、靖安公、李茂, 皆有姻婭之故。 璞若蒙宥而來, 禍必及君父子矣, 宜速圖之。” 言泄, 命簽書中樞院事李詹, 與門下散騎朴錫命、司憲中丞李升商、刑曹典書鄭符, 交坐巡軍, 執居仁、慶生對辨。 居仁告以聞諸居易之奴, 旣而伏其誣, 乃流之, 釋慶生復其職。

청천백(淸川伯) 이거인(李居仁)을 청주(淸州)에 귀양보냈다. 처음에 이거인이 매부인 예조 전서(禮曹典書) 민경생(閔慶生)에게 말하기를,

"아우 이거이(李居易)와 그 아들 이저(李佇)는 군(君)의 사위 조박(趙璞)이 그들 부자가 한 여자를 관계한 일을 폭로시키려 한 것을 원망하여, 가만히 밤을 타서 군사를 일으켜 조박을 죽이려 한다."

하고, 또 이거이에게 이르기를,

"조박이 재기(才氣)가 있고, 또 회안공(懷安公)·정안공(靖安公)·이무(李茂)에게 모두 인아(姻婭)의 관계가 있으니, 조박이 만일 용서를 받아서 돌아오면, 화가 반드시 군의 부자에게 미칠 것이니, 마땅히 빨리 도모하라."

하였다. 이 말이 누설되니,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이첨(李詹)에게 명하여 문하 산기(門下散騎) 박석명(朴錫命)·사헌 중승(司憲中丞) 이승상(李升商)·형조 전서(刑曹典書) 정부(鄭符)와 더불어 순군부(巡軍府)에 교좌(交坐)하여, 이거인·민경생을 잡아서 대변(對辨)하게 하였다. 이거인이 이거이의 종에게서 들었다고 고하였다가 조금 뒤에 무고임을 자복하였다. 그래서 귀양보내고, 민경생은 석방하여 그 직을 회복하게 하였다.


元年 九月[편집]

9月 2日[편집]

달이 건성을 범하다[편집]

○己巳/月犯建星。

달이 건성(建星)을 범하였다.


9月 4日[편집]

지진이 일어나다[편집]

○辛未/地震。

지진(地震)하였다.


여우가 수창궁 성안에서 울다[편집]

○狐鳴于壽昌宮城中。

여우가 수창궁(壽昌宮) 성 안에서 울었다.


문하부에서 사헌부 잡단 민공생을 논핵하다[편집]

○門下府劾司憲雜端閔公生。 初張思靖殺南宮恕妻, 其子訴冤于憲府, 公生托以各位不齊而不受理, 故郞舍劾之。 懷安公芳幹, 公生之姊夫也。 白於上, 令公生復視事。 臺諫員, 不待改批而復仕, 自公生始, 郞舍又劾之。 遂上疏言:

法者, 先王所以治天下國家之本也。 是以, 創始之君, 立法創制, 繼世之君, 遵守成憲, 不敢輕改, 古之道也。 太上王踐祚之初, 設官分職, 令諫官主諫諍格君心, 憲司守邦憲糾百官, 刑曹掌邦禁詰奸慝, 故居是官者, 必先守法, 然後可以諫諍於君, 可以糾百官而詰奸慝。 一有不能守法者, 則臺諫劾之, 以懲不恪, 而人主亦不敢經宥, 以重其法。 今者憲司刑曹, 犯法被劾, 而殿下輒令還仕。 是則輕改先王之法也, 臣等竊恐未合於繼世守文之道。 且憲司刑官, 苟被劾焉, 但當改行自新, 今乃不顧禮法, 唯利祿是急, 規復舊任, 恬不爲愧, 豈能糾百官詰奸慝哉! 願自今, 臺諫刑官犯法被劾者, 毋令復任, 以守先王之法, 以懲不恪之臣。

疏上, 可之。 仍命都承旨李文和傳旨曰: “自今上疏之辭, 毋得倨敖〔倨傲〕, 今日以前被劾者, 毋得擧論, 風聞疑似, 亦莫彈劾。” 時刑曹議郞具宗之、佐郞朴安義, 以他事被劾, 上遂召公生及宗之、安義, 命還本職。 郞舍聞而更劾公生, 芳幹訴于上。 上怒, 召掌務右拾遺卓愼責之曰: “公生已承命還任矣, 又劾之, 何?” 對曰: “臺諫刑曹郞吏被劾者, 必須改下, 然後出仕, 古法也。 公生豈以承命, 遂廢成法乎?” 上怒曰: “所司之所爲, 未必皆是, 而自以爲是; 予之所爲, 未必皆非, 而反以爲非, 其故何哉?” 卽命巡軍當直員, 押送其家, 令勿視事。

문하부(門下府)에서 사헌 잡단(司憲雜端) 민공생(閔公生)을 논핵하였다. 처음에 장사정(張思靖)이 남궁서(南宮恕)의 아내를 죽였는데, 그 아들이 헌부(憲府)에 원통함을 호소하니, 민공생이 여러 관원이 모이지 않았다고 하여 수리(受理)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낭사(郞舍)에서 이를 논핵하였다. 회안공 이방간(李芳幹)이 민공생의 자부(姊夫)였으므로, 임금에게 아뢰어 민공생으로 하여금 다시 일을 보게 하였다. 대간원(臺諫員)이 임금의 개비(改批)[89]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다시 사진(仕進)하는 것이 민공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낭사가 또 이를 탄핵하여 상소(上疏)하였다.

"법(法)이라는 것은 선왕(先王)이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입니다. 이 때문에, 창시(創始)하는 임금이 법을 세우고 제도를 창설하면, 대를 잇는 임금이 이루어진 법을 준수하여 감히 가볍게 고치지 못하는 것이 옛 도리입니다. 태상왕이 등극하던 처음에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어, 간관(諫官)으로 하여금 간쟁(諫諍)을 주장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게 하고, 헌사(憲司)로 하여금 나라 법을 지켜서 백관을 규찰하게 하고, 형조로 하여금 나라의 금령을 맡아 간특(奸慝)한 자를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직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법을 지킨 연후에 임금에게 간쟁(諫諍)할 수 있고, 백관을 규찰할 수 있고, 간특함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하나라도 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대간(臺諫)이 탄핵하여 불경한 것을 징계하고, 인주(人主)도 또한 감히 가볍게 용서하지 아니하여 그 법을 중히 하였습니다. 지금 헌사(憲司)와 형조에서 법을 범하여 탄핵을 당하였는데, 전하께서 곧 도로 사진하게 하시니, 이는 선왕의 법을 가볍게 고치는 것입니다. 신 등은 대(代)를 잇고 성문(成文)을 지키는 도에 합하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또, 헌사·형관이 진실로 탄핵을 당하였으면, 오직 마땅히 행실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져야 할 것인데, 지금 예법을 돌보지 않고 오직 이록(利祿)에만 급급하여, 구직임(舊職任)을 회복하기를 꾀하고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어떻게 백관을 규찰하고 간특한 사람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이제부터 대간과 형관이 법을 범하여 탄핵을 당한 자는 다시 임명하지 말아서, 선왕의 법을 지키고 불경한 신하를 징계하소서."

소를 올리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인하여 도승지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전지(傳旨)하였다.

"이제부터 상소(上疏)하는 말을 거만하게 하지 말고, 금일 이전에 탄핵을 당한 자는 거론하지 말며, 풍문(風聞)으로 들은 의심스러운 일도 탄핵하지 말라."

이때에 형조 의랑(議郞) 구종지(具宗之)·좌랑(佐郞) 박안의(朴安義)가 다른 일로 탄핵을 당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민공생(閔公生)과 구종지·박안의를 불러 본 직임에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낭사(郞舍)가 듣고 다시 민공생을 탄핵하니, 이방간(李芳幹)이 임금에게 호소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장무(掌務)인 우습유(右拾遺) 탁신(卓愼)을 불러 책하기를,

"민공생이 이미 명령을 받아 환임(還任)하였는데, 또 탄핵하는 것은 어째서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대간(臺諫)과 형조의 낭리(郞吏)로서 탄핵을 당한 자는 반드시 개하(改下)한 연후에 출사(出仕)하는 것이 옛 법입니다. 민공생이 어찌 어명을 받았다고 하여 드디어 이루어진 법을 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유사가 하는 일이 반드시 모두 옳은 것도 아닌데 스스로 옳게 여기고, 내가 하는 일이 반드시 모두 그른 것도 아닌데 도리어 그르게 여기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고, 곧 순군(巡軍) 당직원(當直員)에게 명하여 그 집으로 압령하여 보내고, 일을 보지 말게 하였다.


9月 10日[편집]

형혹성이 태미원의 상장성을 범하다[편집]

○丁丑/熒惑犯太微、上將。

형혹성(熒惑星)이 태미원(太微垣)의 상장성(上將星)을 범하였다.


목성이 좌집법성을 범하다[편집]

○木星犯左執法。

목성(木星)이 좌집법성(左執法星)을 범하였다.


순군의 나장을 시켜 좌습유 김익정을 그의 집으로 압령하여 보내다[편집]

○令巡軍螺匠, 押送左拾遺金益精于其家。 益精力疾詣闕啓云: “向者門下府上疏言: ‘臺諫刑曹員吏被劾者, 勿許口傳還仕。’ 上旣許之, 今又責卓愼歸家, 臣恐自此言路蔽塞。 且郞舍掌務, 乃臣也, 非愼也。” 上使李文和傳旨曰: “爾以寡人前日之事爲非耶?” 益精對曰: “臣近因謁告, 未嘗知之, 然公生之出, 則古無此例, 臣不敢不啓。”

순군(巡軍)의 나장(螺匠)을 시켜 좌습유(左拾遺) 김익정(金益精)을 그의 집으로 압령하여 보냈다. 김익정이 병을 무릅쓰고 예궐(詣闕)하여 아뢰었다.

"지난번에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하여, 대간·형조의 원리(員吏)로서 탄핵을 당한 자는 구전(口傳)[90]하여 도로 출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고 하였더니, 주상(主上)께서 이미 허락하시고서, 지금 또 탁신(卓愼)을 책하여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신은 이것으로부터 언로(言路)가 가리워지고 막힐까 두려워합니다. 또 낭사(郞舍) 장무(掌務)는 신(臣)이고 탁신(卓愼)이 아닙니다."

임금이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전지하기를,

"그대가 과인의 전날의 일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인가?"

하니, 김익정이 대답하였다.

"신이 근일에 휴가로 인하여 일찍이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민공생이 출사하는 것은 예전에 그런 예(例)가 없었으니, 신이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하부 낭사들의 언로 보장을 위해 사소한 잘못에 대한 견책을 삼가해 줄 것을 사헌부 중승 이승상 등이 상언하다[편집]

○司憲中丞李升商等上言。 略曰:

伊尹稱湯之德曰: “從諫弗咈。” 傅說言於高宗曰: “后從諫則聖。” 其或自聖, 而遠忠直近邪佞, 則反是。 今門下府郞舍等, 職在言責, 劾其不法者, 其職也, 而殿下不以爲是, 反從而譴之, 臣等竊恐自是忠讜之士, 鉗口結舌, 而下情不達於上矣。 昔者, 子思言於衛侯曰: “君之國事, 將日非矣。 君出言自以爲是, 而卿大夫莫敢矯其非。 賢之則順而有福, 矯之則逆而有禍, 善安從生!” 此實萬世之格言也。 願殿下念玆在玆, 以宥門下府郞舍等, 則言路開而下情達矣。

사헌 중승(司憲中丞) 이승상(李升商) 등이 상언(上言)하였는데, 대략 이러하였다.

"이윤(伊尹)[91]이 탕왕(湯王)의 덕(德)을 일컬어 말하기를, ‘간(諫)하는 것을 좇아서 어기지 않는다.’ 하였고, 부열(傅說)[92]이 고종(高宗)에게 말하기를, ‘후(后)[93]는 간하는 것을 좇으면 성(聖)스러워진다.’고 하였습니다. 혹시 스스로 성스러운 체하여 충성하고 곧은 사람을 멀리 하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면, 이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지금 문하부의 낭사(郞舍) 등은 직임이 말하는 책임에 있으니, 불법한 것을 탄핵하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옳게 여기지 않고 반대로 따라 견책하시니, 신 등은 이제부터 충성하고 곧은 말을 하는 선비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아서 아래의 정(情)이 위에 통달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옛적에 자사(子思)[94]가 위후(衛侯)에게 말하기를, ‘임금의 나라 일이 장차 날로 잘못될 것입니다. 임금이 말을 하고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니, 경(卿)·대부(大夫)가 감히 그 그른 것을 바로잡지 못합니다. 어질게 여기면 순하여 복이 있고, 바로잡으면 거슬려서 화가 있으니, 착한 것이 어디에서 좇아 생기겠습니까?’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만세의 격언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언제나 생각을 여기에 두시어 문하부의 낭사 등을 용서하시면, 언로(言路)가 열리고 하정(下情)이 통달될 것입니다."


복무 규정을 어긴 형조 의랑 정혼을 파면하다[편집]

○刑曹議郞鄭渾免。 渾妻母在晋州遇疾, 渾夤緣復于上, 求藥餌, 且干乘馹而歸, 門下府劾之。 啓云: “《經濟六典》, 凡有職事者, 除父母奔喪外, 不許關外出入, 如有不獲已, 辭職而歸。 渾以刑官冒法而行, 請治其罪。” 從之。

형조 의랑(刑曹議郞) 정혼(鄭渾)이 파면되었다. 정혼의 장모가 진주(晉州)에 있어 병에 걸렸는데, 정혼이 임금에게 복명(復命)하는 것을 인연하여 약을 구하였고, 또 역마를 타고 돌아가서 죄에 간범되었다. 문하부에서 탄핵하여 아뢰기를,

"《경제육전(經濟六典)》에, 무릇 직사(職事)가 있는 자는 부모(父母)의 분상(奔喪) 이외에는 관외(關外) 출입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만일 부득이한 일이 있으면 사직하고 돌아가게 되어 있사온데, 정혼이 형관(刑官)으로서 법을 무릅쓰고 갔사오니,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상왕이 경순 궁주로 하여금 여승이 되게 하다[편집]

○太上王使敬順宮主爲尼。 宮主, 李濟之妻也。 臨剃髮, 泫然泣下。

태상왕이 경순 궁주(敬順宮主)[95]로 하여금 여승이 되게 하였는데, 궁주(宮主)는 이제(李濟)[96]의 아내였다. 머리를 깎을 때에 임하여 현연(泫然)히 눈물을 흘렸다.


해적들의 침입을 염려하여 각도의 기선군을 다시 두다[편집]

○復各道騎船軍。 以慶尙道兵馬都節制使之報, 慮海寇復爲患也。

각도의 기선군(騎船軍)을 다시 두었으니, 경상도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보고하여, 해구(海寇)의 변환(邊患)이 다시 생길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문하부 낭사를 폄직하여 모두 좌천시키다. 박석명 등을 지방관으로 새로 임명하다[편집]

○貶門下府郞舍, 皆左遷。 左散騎常侍朴錫命爲安州牧使, 左諫議大夫安魯生爲鐵原府使, 直門下權軫知陜州事, 內史舍人金汾知稷山郡事, 免補闕黃喜、許稠官。 右諫議大夫孟思誠, 以視事日淺, 初不與議, 乃與金益精、卓愼, 皆復職。 益精、愼, 托父母之病, 相繼辭歸, 閔公生復爲雜端。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를 폄직(貶職)하여 모두 좌천시켰다.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박석명(朴錫命)은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삼고,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 안노생(安魯生)은 철원 부사(鐵原府使)를 삼고, 직문하(直門下) 권진(權軫)은 지합주사(知陜州事)를 삼고, 내사 사인(內史舍人) 김분(金汾)은 지직산군사(知稷山郡事)를 삼고, 보궐(補闕) 황희(黃喜)·허조(許稠)는 벼슬을 파면하고, 우간의 대부(右諫議大夫) 맹사성(孟思誠)은 일을 본 지가 며칠이 안되어 처음부터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김익정(金益精)·탁신(卓愼)과 더불어 모두 복직되었다. 김익정과 탁신은 부모의 병을 칭탁하여 서로 잇달아 사직하여 돌아갔고, 민공생(閔公生)은 다시 잡단(雜端)이 되었다.


왜적이 서북면의 선주·박주를 침구하니 각도에 조전 절제사를 보내다[편집]

○倭寇西北面宣、博州, 遣助戰節制使陳乙瑞于西北面, 朴蔓于豐海道, 李彬于忠淸道, 崔雲海于全羅道。

왜적이 서북면(西北面)의 선주(宣州)·박주(博州)를 침구하니,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 진을서(陳乙瑞)를 서북면(西北面)에, 박만(朴蔓)을 풍해도(豐海道)에, 이빈(李彬)을 충청도(忠淸道)에, 최운해(崔雲海)를 전라도(全羅道)에 보냈다.


일본 대마도 총관 종정무의 사신으로 온 중들이 예궐하여 배사하다[편집]

○日本對馬島摠管宗貞茂, 使僧等詣闕拜辭, 各賜黑麻布三匹、白苧布三匹、虎皮一領。

일본(日本) 대마도(對馬島) 총관(摠管) 종정무(宗貞茂)의 사승(使僧) 등이 예궐(詣闕)하여 배사(拜辭)하니, 각각 흑마포(黑麻布) 3필, 백저포(白苧布) 3필, 호피(虎皮) 1영(領)을 하사하였다.


임금이 해주에 가서 사냥하고자 하니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만류하다[편집]

○上欲畋于海州, 憲司上疏止之。 疏以爲: “禾稼未收, 倭寇來侵, 欲幸溫井, 實爲未可。” 召侍史安省曰: “予有宿疾, 欲如溫井, 其勿復言。” 翼日, 參贊門下府事李茂啓云: “本都所畜糧餉不足, 請輸豐海道米菽。” 上謂左右曰: “昨不從憲司之諫, 竟夕心未平。 今雖農隙, 予之所至, 豈無百姓之弊哉?” 遂停溫井之行。 上心猶有嫌焉, 又欲幸原中浦, 右散騎常侍尹思修等, 復上書諫。 略曰:

近年以來, 土木役煩, 加以飢饉, 生民之困已極。 幸賴殿下位育生成之德, 屢降宥典, 以罷百役, 秋稼大登, 閭閻無事, 然困苦已甚, 而休息未幾。 雖曰行幸之際, 禁令必嚴, 無弊於民, 然其芻蕘轉輸, 糧餉委積, 則皆出民力, 豈可謂之無弊也哉? 況今海赤於東, 山崩於北, 星辰之變、草木之怪, 相繼而見, 又海寇竊發, 其勢滋熾, 此正修省畏懼, 不可少有苟安之時也。 伏願殿下, 姑停此, 以謹天戒。

不允。

임금이 해주(海州)에 가서 사냥하고자 하니, 헌사(憲司)에서 상소(上疏)하여 이를 만류하였다. 소(疏)는 이러하였다.

"화곡(禾穀)을 거두지 아니하였고, 왜구가 와서 침노하는데, 온정(溫井)에 거둥하고자 하시니, 실로 불가합니다."

시사(侍史) 안성(安省)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오래된 병이 있어 온정(溫井)에 가고자 하는 것이니,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튿날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무(李茂)가 아뢰기를,

"본도(本道)에 저축한 양식이 부족하니, 풍해도(豐海道)에서 쌀과 콩을 수송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어제 헌사(憲司)의 간(諫)하는 것을 좇지 않아 저녁내 마음이 미평(未平)하였다. 지금 비록 농극(農隙)이지마는, 내가 가는 곳에 어찌 백성의 폐해가 없겠는가!"

하고, 드디어 온정에 가는 것을 정지하였다. 임금의 마음에 오히려 섭섭한 데가 있어서 또 원중포(原中浦)에 가고자 하니,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 윤사수(尹思修) 등이 다시 상서(上書)하여 간하였는데, 대략 이러하였다.

"근년 이래로 토목(土木)의 역사가 번다하고, 게다가 흉년이 들어서 생민(生民)의 곤궁함이 극심합니다. 다행히 전하의 위육(位育) 생성(生成)하시는 덕에 힘입어서, 여러 번 사유(赦宥)의 특전을 내려 백 가지 역사를 파하였고, 가을 농사가 크게 풍년이 들고, 여염(閭閻)에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곤고(困苦)가 이미 심하였고, 휴식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비록 ‘거둥할 즈음에 금령(禁令)이 반드시 엄하여 백성에게 폐해가 없다.’고 하오나, 꼴의 운반과 양식을 적치(積置)하는 것이 모두 백성의 힘에서 나오니, 어찌 폐단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물며 지금 동쪽에서 바다가 붉고, 북쪽에서 산이 무너지고, 성신(星辰)의 이변(異變)과 초목의 괴이(怪異)가 계속하여 보이고, 또 해적이 가만히 발(發)하여 그 형세가 점점 성하니, 이것은 정히 수성(修省)하고 외구(畏懼)하여 조금이라도 안일한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때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거둥을 정지하여 하늘의 경계를 삼가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달에 일본국의 절 주지가 사람을 시켜 예물을 바치다[편집]

○是月, 日本國博多城慈雲禪庵住持天眞, 使人獻禮物, 一歧安國新住持顯悅, 亦使人獻禮物。

이달에 일본국 박다성(博多城) 자운선암 주지(慈雲禪庵住持) 천진(天眞)이 사람을 시켜 예물을 바치고, 일기(一岐) 안국(安國)의 새 주지(新住持) 현열(顯悅)이 또한 사람을 시켜 예물을 바쳤다.


元年 冬十月[편집]

10月 1日[편집]

왜구가 옹진에 침입하다[편집]

○〔丁酉〕/倭侵瓮津。

왜구가 옹진(甕津)에 침입하였다.


종친들과 강음현 원중포에서 사냥하였는데, 문하부에서 유렵의 중지를 청하다[편집]

○率宗親畋于江陰縣之原中浦, 路上射獐獲之。 是日, 門下府上疏, 請勿遊畋, 上使承旨李叔蕃傳旨曰: “卿等以天變屢彰, 宜戒逸遊。 是則然矣, 但予久不運身, 致生疾病, 玆欲出遊, 以舒鬱結之氣耳。”

종친(宗親)을 거느리고 강음현(江陰縣)의 원중포(原中浦)에서 사냥하였는데, 노상에서 노루를 쏘아 잡았다. 이날에 문하부에서 상소(上疏)하여 유렵(遊獵)하지 말기를 청하니, 임금이 승지(承旨) 이숙번(李叔蕃)을 시켜 전지(傳旨)하였다.

"경(卿)들이 천변(天變)이 여러 번 나타났다고 하여 마땅히 유일(遊逸)을 경계(警戒)해야 된다 하니, 이는 옳은 말이다. 다만 내가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하여 병이 생기므로, 한 번 나가 놀아서 울울하게 맺힌 기운을 풀려고 하는 것이다."


10月 4日[편집]

밤에 우레하고 번개하다[편집]

○庚子/夜, 雷電。 翌日, 畋于原中浦, 還次于歧灘, 上射二獐獲之。 留都右政丞金士衡等來享上, 夜罷。

밤에 우레하고 번개하였다. 이튿날 원중포(原中浦)에서 사냥하고, 돌아와 기탄(岐灘)에 머물렀다. 임금이 노루 두 마리를 쏘아 잡았다. 도성(都城)에 머물러 있던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 등이 와서 임금에게 연향(宴享)을 베풀었는데, 밤에 파하였다.


원중포에서 돌아오다[편집]

○至自原中浦。

원중포(原中浦)에서 이르렀다.


10月 8日[편집]

큰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다. 우레와 번개가 치고, 우박도 내리다[편집]

○甲辰/大風暴雨雷電雨雹。

큰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고, 우레와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태상전의 시위를 없애고 보화고를 태상전의 사사 창고로 삼다[편집]

○除太上殿侍衛, 以保和庫爲太上殿私藏。 上召諸公侯及內相李居易、李茂、趙英茂曰: “昨日夜, 天之譴告太甚。 未知何事有違於天心? 父王遣人於予曰: ‘吾之侍衛, 不殊囚直, 予常痛心。’ 父王之心若此, 則吾與卿等, 可不愧歟! 今欲一依所命輟侍衛, 如何?” 因泣下霑襟。 公侯宰相皆對曰: “唯命。” 遂使朴英文告于太上王, 凡事一依敎旨, 侍衛亦除之。 太上王甚喜灑淚曰: “王性本純厚, 不傷我心, 今之孝我, 又如此哉!”

태상전(太上殿)의 시위(侍衛)를 없애고, 보화고(保和庫)를 태상전의 사사 창고로 삼았다. 임금이 여러 공후(公侯)와 내상(內相) 이거이(李居易)·이무(李茂)·조영무(趙英茂)를 불러 말하기를,

"어제 밤에 하늘의 견고(譴告)가 너무 심하니, 무슨 일이 천심(天心)을 어긋나게 하였는지 알지 못하겠다. 부왕(父王)께서 내게 사람을 보내어 말씀하시기를, ‘나의 시위(侍衛)는 가두어 지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하시니, 내가 항상 마음이 아프다. 부왕의 마음이 이와 같으시니, 나와 경들이 부끄럽지 않은가! 지금 한결같이 명령에 의하여 시위를 철폐하고자 하는데, 어떠하겠느냐?"

하고, 인하여 울어서 옷깃을 적시었다. 공후와 재상들이 모두 대답하기를,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박영문(朴英文)을 시켜 태상왕께 고하기를,

"모든 일을 일체 교지(敎旨)에 의하겠습니다. 시위도 또한 없애겠습니다."

하니, 태상왕이 대단히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왕은 성품이 본래 순후하여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더니, 지금 내게 효도하는 것이 또 이와 같구나!"

하였다.


천변으로 인해 양부와 각 관청에 구언하는 교서를 내리다[편집]

○下敎求言。 敎曰: “今天變屢作, 予甚懼焉。 宜令兩府百司, 各陳政刑得失、民間利害, 實封啓聞。”

하교(下敎)하여 구언(求言)하였다. 교서(敎書)는 이러하였다.

"지금 천변이 여러 번 나타나니, 내가 심히 두려워한다. 마땅히 양부(兩府) 백사(百司)로 하여금 각각 정형(政刑)의 득실(得失)과 민간(民間)의 이해(利害)를 진술하게 하되, 실봉(實封)[97]하여 계문(啓聞)케 하라."


첨서중추원사 권근이 상서하여 시정의 여섯 가지 일을 말하다[편집]

○簽書中樞院事權近上書, 陳時政六事:

一曰正心術。 人主一心, 治民之本源, 感天之樞機, 不可以不正也。 苟有所感, 纔動於心, 卽應於天。 往者殿下, 巡幸西郊, 明日雷雨, 又明日夜, 有星變, 旣還明日, 又大震雷, 災異荐至。 蓋當馳騁射獵之際, 殿下之心, 必以爲樂。 樂心一萌, 卽是般遊無度之漸, 故天現異, 以彰譴告。 欲消其變, 亦在殿下一心之誠。 昔成王一悟, 天乃反風; 宋景一言, 熒惑退舍。 天人之間, 感應甚速。 伏惟殿下, 恐懼修省, 虛懷納諫, 毋溺宴私之安, 毋徇嗜欲之樂, 持敬以正心術, 克勤以懋實德, 以治民生, 以應天道。 二曰崇孝敬。 孝者, 人倫之本, 王化之源。 殿下富有一國, 以事太上王, 榮孝之至, 無以加矣。 然尊號未加, 殿名未立, 宮門之外, 不設紅門, 殆與平人之居無異, 非所以示尊嚴也。 頃者, 門下府請立殿名, 殿下允之, 迨今數月, 未聞擧行。 萬幾之中, 豈忘之耶? 君爲臣之天, 父爲子之天, 太上王, 卽殿下之天也。 憂勤積累, 創業垂統, 以開億萬年無疆之基, 以傳殿下, 隆功盛德, 與天罔極, 而尊號未上, 誠爲闕典。 欲盡事天之道, 當盡事親之誠。 願自今, 加上尊號, 立殿名設紅門, 開府置屬, 數朝問安, 益敦孝敬之誠。 三曰勤聽政。 古者人君, 每日坐朝聽政, 前朝中葉, 怠於坐朝, 始於六衙日一聽政, 因有受朝之禮。 及至衰季, 但受朝而不聽政, 失其本矣。 我太上王, 雖不受朝, 每於衙日, 必引政丞以下一二大臣, 共議政治, 有三益焉。 敬重大臣一也, 共論政治二也, 君臣道合三也。 今我殿下, 受朝禮畢, 卽入于內, 未嘗坐朝聽政, 亦未嘗引大臣論政, 君臣之情, 邈不相接, 殆與前朝之季, 無以異焉。 願殿下, 每於衙日受朝之後, 坐而聽政, 或入于內, 則引大臣論議, 一遵太上王成憲。 四曰戒遊畋。 遊畋之樂, 雖人君之大戒, 然亦有其道焉。 古之人君, 非不遊畋也, 《禮記》曰: “國君無事, 歲三畋。 一爲乾豆, 二爲賓客, 三爲充君之庖。” 乾豆者, 乾之以爲豆實, 是爲宗廟也。 夏諺曰: “吾王不遊, 吾何以休! 吾王不豫, 吾何以助! 一遊一豫, 爲諸侯度”, 而孟子曰: “春省耕而助不給, 秋省斂而補不足。” 是爲民也。 往日殿下, 巡幸西郊, 所獲之禽, 乾之以爲豆實者幾何? 所過之地, 往往田畝有不收者, 臣獲扈駕而觀之矣。 有不可食而不收者焉, 有可食而不及收者焉。 不可食者, 固可憫也, 宜除其租; 不及收者, 亦可憫也, 宜助其力。 殿下見不可食而除其租者幾何? 見不及收而助其力者幾何? 不惟不助, 而被芻秣者亦多有之。 上不爲宗廟, 下不爲民, 而唯耽樂之從, 未審天意以爲如何? 此所以當其時災異屢見者也。 願殿下戒遊畋, 不敢般遊, 苟或爲之, 則必上爲宗廟, 下補民業, 而無耽樂之從。 五曰立詞訟之限。 詞訟之滯, 冤屈滋甚。 自辨定都監移來都官, 奴婢爭訟, 淹滯不決, 兩邊俱瘁。 乞令定限, 必以訴訟呈狀日月爲先後, 每於衙日, 申聞所決一房決幾道; 違者, 糾理; 誤決者, 令憲司覆察。 其兩府以上辨訟之法, 前朝舊制, 兩府招致聽訟官於其家, 告其事狀, 聽訟官聞訖, 坐於本司而決。 及至衰季, 詞訟甚煩, 奸僞日滋, 聽訟官不得進於兩府之門, 兩府乃反往於聽訟者之家, 識者猶以爲非。 自今年八月敎禁私謁之後, 辨訟者不得進於私門。 由是兩府, 亦有往於聽訟官之庭, 辨於奴隷賤人之中, 非所以重爵也。 或有恥之, 不敢往辨, 而懷鬱抑之志者焉。 願兩府及顯官三品以上辨訟者, 許於聽訟官家往辨, 其非自己及同宗假托干請者, 一依敎旨, 嚴加糾治。 六曰示政令之信。 信者, 人君之大寶。 國保於民, 民保於信。 魏文侯不失虞人之期, 秦孝公不廢徙木之令, 所以全信也。 殿下卽位以來, 所降條令及各司所申依允者, 悉皆良法美意, 而不能盡行者多矣。 如今年八月頒降宥旨內一款, 戊辰年已來屬公奴婢還給之事, 各司或因未有充代之人, 至今不放, 本主恐其久而不給, 反謂國令以爲不信。 宜卽定日, 一皆放還, 以示其信, 其餘未盡擧行者, 亦令憲司糾察施行, 永爲恒式。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권근(權近)이 상서(上書)하여 시정(時政) 여섯 가지 일을 말하였다.

"첫째는 심술(心術)을 바루는 것이니, 인주(人主)의 한 마음은 백성을 다스리는 본원이요, 하늘을 감동시키는 추기(樞機)이니, 바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느낀 바가 있어 겨우 마음에서 동(動)하면, 곧 하늘에서 응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서교(西郊)에 순행하셨을 때, 다음날 우레하고 비가 내렸으며, 또 다음날 밤에도 성변(星變)이 있었으며, 돌아오신 다음날도 또 크게 벼락과 우레가 쳐서 재이(災異)가 거듭 이르렀습니다. 대개 치빙(馳騁) 사렵(射獵)할 즈음을 당하여, 전하의 마음에 반드시 즐겁게 여겼을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이 한 번 싹트면, 곧 반유(般遊)[98]하여 절도가 없는 시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재이(災異)를 나타내어 견고(譴告)를 보인 것입니다. 그 변괴(變怪)를 없애고자 하면, 또한 전하의 일심(一心)의 진실한 데에 있습니다. 옛적에 성왕(成王)이 한번 깨달으시니, 하늘이 바람을 돌이키었고[99], 송(宋)나라 경공(景公)이 한번 말하니, 형혹성(熒惑星)이 3사(舍)를 물러났으니[100], 하늘과 사람 사이에 감응(感應)은 심히 빠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공구(恐懼)하고 수성(修省)하시어 마음을 다해 간(諫)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연사(宴私)의 안일에 빠지지 말며, 기욕(嗜欲)의 즐거움을 따르지 말고, 공경의 마음을 가지시어 심술을 바르게 하고 부지런히 실덕(實德)에 힘써서, 민생을 다스리고 천도(天道)에 응하소서.

둘째는 효도와 공경을 높이는 것이니, 효도라는 것은 인륜(人倫)의 근본이요, 왕화(王化)의 근원입니다. 전하가 한 나라의 부(富)를 차지하여 태상왕을 섬기니, 영화와 효성이 지극함이 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존호(尊號)를 올리지 않고, 전명(殿名)을 세우지 않고, 궁문(宮門) 밖에 홍문(紅門)을 설치하지 않아서, 평범한 사람의 거실(居室)과 다를 것이 없으니, 존엄을 보이는 소이(所以)가 아닙니다. 지난번에 문하부(門下府)에서 전명(殿名)을 세우기를 청하니, 전하가 윤허하셨습니다. 지금 두어 달이 되었으나, 거행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만기(萬機) 가운데에 혹 잊으셨습니까? 임금은 신하의 하늘이 되고, 아버지는 아들의 하늘이 되니, 태상왕은 곧 전하의 하늘이십니다. 근심하고 부지런하여 덕(德)을 쌓아서, 왕업을 창건하고 대통(大統)을 전하여 억만년 무궁한 기업(基業)을 열어서 전하에게 전하였으니, 높은 공(功)과 성한 덕(德)이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는데, 존호를 올리지 아니하였으니, 참으로 궐전(闕典)이 됩니다. 하늘을 섬기는 도리를 다하고자 하면, 마땅히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다하여야 합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존호를 더 올리고, 전명(殿名)을 세우고, 홍문(紅門)을 설치하고, 관부(官府)를 개설(開設)하고 요속(僚屬)을 두어, 자주 조회(朝會)하고 문안(問安)하여서, 더욱 효도하고 공경하는 정성을 두텁게 하소서.

셋째는 부지런히 정사(政事)를 듣는 것이니, 예전에는 인군(人君)이 매일 조정에 앉아 정사를 들었습니다. 고려 중엽에 조정에 앉는 것을 게을리 하여, 비로소 6아일(六衙日)에 한 번씩 정사(政事)를 듣고, 조회(朝會)를 받는 예(禮)가 있었는데, 쇠망한 말년에 이르러서는 다만 조회만 받고 정사는 듣지 않았으니, 그 근본을 잃은 것입니다.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는 비록 조회는 받지 않았으나, 매양 아일(衙日)이면 반드시 정승(政丞) 이하 한두 대신(大臣)을 인견(引見)하여 함께 정치를 의논하였습니다. 이것은 세 가지 유익함이 있으니, 대신을 공경하고 중하게 여기는 것이 한 가지요, 함께 정치를 의논하는 것이 두 가지요, 군신(君臣)의 도가 합하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조회를 받고 예가 끝나면, 곧 내전(內殿)으로 들어가시고, 일찍이 조정에 앉아 정사를 듣지 않으시며, 또 일찍이 대신을 인견하여 정사를 의논하지 않으시니, 군신의 정이 멀어져 서로 접하지 못하여, 고려의 말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아일(衙日)에 조회를 받은 뒤에도 그대로 앉아서 정사를 들으시고, 혹 내전에 들어가시면 대신을 인견하고 의논하시어, 한결같이 태상왕이 이루어 놓으신 법을 따르소서.

넷째는 유전(遊畋)[101]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유전(遊畋)의 낙(樂)이 비록 인군(人君)의 대계(大戒)라 하지만, 그러나 또한 그 방도(方道)가 있으니, 옛 인군이 유전(遊畋)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나라 인군이 일이 없으면 1년에 세 번 사냥하는데, 첫째는 간두(乾豆)를 위한 것이요, 둘째는 빈객(賓客)을 위한 것이요, 셋째는 임금의 푸줏간[庖]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간두(乾豆)라는 것은 말려서 두(豆)[102]에 채우는 것을 만드는 것이니, 이것은 종묘(宗廟)를 위한 것입니다. 하(夏)나라 속담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놀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쉴 수 있으며, 우리 임금이 즐기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도움을 받으리오? 한 번 놀고 한번 즐기는 것이 제후(諸侯)의 법도가 된다.’ 하였고,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봄에는 밭 가는 것을 살피어 부족[不給]한 것을 도와주고, 가을에는 수확하는 것을 살펴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준다.’ 하였으니, 이것은 백성을 위하는 것입니다. 지난 날에 전하께서 서교(西郊)에 순행하여 잡은 새를, 말려 두(豆)의 재물로 만든 것이 얼마나 됩니까? 지나는 곳에서 왕왕 밭고랑에 곡식을 거두지 않은 것이 있음을, 신(臣)이 거가(車駕)를 호종하면서 보았습니다. 먹을 수 없어서 거두지 않은 것도 있고, 먹을 수 있어도 미처 거두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먹을 수 없는 것은 진실로 불쌍하니, 마땅히 그 조세(租稅)를 면제하여야 하고, 미처 거두지 못한 것도 또한 불쌍하니, 마땅히 그 힘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전하께서 먹지 못할 것을 보고 조세를 면제해 준 것이 얼마나 되며, 미처 거두지 못한 것을 보고 그 힘을 도와준 것이 얼마나 됩니까? 도와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먹이가 된 것도 또한 많이 있습니다. 위로는 종묘를 위하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지 아니하며, 오직 탐락(耽樂)만 따르니, 알지 못하거니와 천의(天意)에 어떻다 하겠습니까? 이것이 그때에 재이(災異)를 여러 번 보인 까닭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유전(遊畋)을 경계하여 감히 반유(般遊)하지 말며, 만일 혹 사냥을 하게 되면, 위로는 종묘를 위하고 아래로는 백성의 생업을 도와 탐락을 따름이 없게 하소서.

다섯째는 사송(詞訟)의 기한(期限)을 세우는 것이니, 사송(詞訟)이 엄체(淹滯)되면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점점 심하여집니다. 변정 도감(辨定都監)이 도관(都官)으로 옮겨진 뒤부터 노비(奴婢)에 대한 소송이 오래 끌고 결단하지 못하여, 양쪽이 함께 지쳤습니다. 빌건대, 기한을 정하게 하여 반드시 소송의 소장(訴狀)을 바친 월일(月日)을 선후를 삼아, 매양 아일(衙日)에 소송을 결단한 것과 1 방(房)에서 몇 사건을 결단하였는가를 신문(申聞)하게 하되, 어긴 자는 규찰(糾察)하여 다스리고, 그릇 결단한 것은 헌사(憲司)로 하여금 복심(覆審)하여 살피게 하소서. 양부(兩府) 이상의 변송지법(辨訟之法)은, 고려의 옛 제도에 양부(兩府)가 청송관(聽訟官)을 그 집에 초치(招致)하여 그 사상(事狀)을 고하면, 청송관이 다 듣고나서 본사(本司)에 앉아서 결단하였는데, 쇠망한 말년에 이르러서는 소송이 심히 번다하고, 간사(奸邪)와 허위(虛僞)가 날로 심하여 청송관이 양부의 문(門)에 나가지 못하고, 양부가 도리어 청송관의 집에 가니, 식자(識者)들이 오히려 그르게 여겼습니다. 금년 8월에 하교(下敎)하여 사알(私謁)을 금지한 뒤로부터 변송(辨訟)하는 자가 사문(私門)에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때문에 양부가 또한 청송관의 집 뜰에 가서 노예와 천인(賤人) 가운데 서서 변송하는 일이 있으니, 작위(爵位)를 중하게 여기는 소이(所以)가 아닙니다. 혹은 부끄럽게 여겨 감히 가서 변송(辨訟)하지 않고 억울한 뜻을 품는 자가 있습니다. 원하건대, 양부(兩府)와 현관(顯官) 3품(品) 이상의 변송하는 자는 청송관(聽訟官)의 집에 가서 변송하는 것을 허락하고, 자기와 같은 종족[同宗]이 아닌데 가탁(假托)하여 간청하는 자는 한결같이 교지(敎旨)에 의하여 엄하게 규치(糾治)를 가하소서.

여섯째는 정령(政令)의 신(信)을 보이는 것입니다. 신(信)이라는 것은 인군(人君)의 큰 보배이니, 나라는 백성으로 보전되고, 백성은 신(信)으로 보전되는 것입니다.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우인(虞人)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았고[103], 진(秦)나라 효공(孝公)이 나무를 옮기[徙木]는 명령을 폐하지 않은 것은[104] 신(信)을 온전히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내린 조령(條令)과 각사(各司)에서 아뢴 것을 의윤(依允)한 것이 모두 다 훌륭한 법이요 아름다운 뜻인데, 행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금년 8월에 반포하여 내린 유지(宥旨)안의 한 조목에, ‘무진년이래 속공(屬公)한 노비(奴婢)를 환급(還給)하라.’고 한 일 같은 것은, 각사에서 혹 보충하여 대신할 사람이 없음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놓아주지 않고 있는데, 본주(本主)는 오래되면 주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도리어 나라의 명령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마땅히 곧 날을 정하여 일체 모두 방환(放還)하여 신(信)을 보이시고, 그 나머지 다 거행하지 못한 것도 또한 헌사(憲司)로 하여금 규찰 시행하게 하여 길이 항구한 법식으로 삼으소서."


태상왕의 탄일이므로 도승지 이문화를 보내어 표리와 의대를 바치다[편집]

○以太上誕日, 遣都承旨李文和, 獻表裏及衣襨。 上將獻壽, 以患水痢未果, 太上王聞之曰: “毋患今日之未來, 宜速治疾。” 仍賜文和網笠一事、段子衣一領。 上令諸公侯獻壽, 太上王不受。

태상왕(太上王)의 탄일(誕日)이므로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보내어 표리(表裏)와 의대(衣襨)를 바치었다. 임금이 장차 헌수(獻壽)하려 하였는데, 설삿병이 나서 행하지 못하였다. 태상왕이 듣고 말하기를,

"오늘 오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빨리 병을 치료하라."

하고, 인하여 이문화에게 망립(網笠) 하나, 단자의(段子衣) 한 벌을 하사하였다. 임금이 여러 공후를 시켜 헌수하니, 태상왕이 받지 않았다.


10月 13日[편집]

안개가 끼다. 임금이 건강이 회복되어 격구놀이를 하다[편집]

○己酉/昏霧。 上康復, 爲擊毬戲。

컴컴하게 안개가 끼었다. 임금이 강복(康復)되어 격구 놀이를 하였다.


산올빼미가 연복사 부도에서 울다[편집]

○鵩鳴于演福寺浮屠。

산올빼미[鵩鳥]가 연복사(演福寺) 부도(浮屠)에서 울었다.


흥국사의 금부처가 땀을 흘리다[편집]

○興國寺金人出汗。

흥국사(興國寺)의 금인(金人)[105]이 땀을 흘렸다.


사헌부에서 임금의 치도에 관해 상소하다[편집]

○司憲府上疏曰:

夫人主一心, 萬化之源, 政治之得失、民生之利害繫焉。 若人君先正其心, 無一毫私意行乎處事之間, 而政平訟理, 則人心和天地泰矣。 復何災異之足患哉! 往歲之冬, 百僚所獻便民之目及言官所上之疏, 皆切時病, 而殿下之藥石也, 今又令庶僚, 盡言不諱。 伏惟殿下, 命建條例詳定都監, 分爲三房, 簡其嘗涉古制, 識通時務者屬之, 而其判事, 則特命諸公已下領之。 條其水戰陸守凡人物差役等事, 付之一房; 徭賦錢幣凡需於國家者及水陸轉運等事, 付之一房; 制度禁令凡綱紀於國家者, 付之一房。 將前後所獻, 以類而分, 輒使三房會議, 然後達於判事, 判事酌其可否, 從宜而決。 有荒遠而未及周知者, 大則差人訪問, 小則移牒各道, 悉令呈報參考, 取其宜於今不悖於古, 利於民而亦便於官者, 上達天聰, 受可成籍, 分府各掌官, 守之以信, 行之如式, 則孰不囿於聖化之中乎? 《書》曰: “有言逆于汝心, 必求諸道; 有言遜于汝志, 必求諸非道。” 伏惟殿下, 不患言之不盡, 惟患聽之不敏, 不憚言之逆順, 惟察事之是非, 更加修省, 克謹天戒, 宗社幸甚。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上疏)하였다.

"대저 인주(人主)의 한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원이어서, 정치(政治)의 득실(得失)과 민생(民生)의 이해(利害)가 매어 있습니다. 만약 인군(人君)이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일호의 사의(私意)도 처사(處事)하는 사이에 행하지 아니해서, 정사(政事)가 공평하고 송사(訟事)가 다스려지면, 인심이 화순(和順)하고 천지(天地)가 태평(泰平)하여지니, 다시 무슨 재이(災異)를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난해 겨울에 백료(百僚)가 드린 바 백성을 편안케 하는 조목과 언관(言官)이 올린 소장(疏章)은 모두 시병(時病)에 적절하여 전하의 약석(藥石)입니다. 지금 또 백료로 하여금 숨기지 말고 다 말하게 하시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명하여 조례 상정 도감(條例詳定都監)[106]을 세우고 나누어 3방(房)을 만들어서, 일찍이 옛 제도를 섭렵(涉獵)하고 시무(時務)를 잘 아는 자를 가려서 배속시키되, 그 판사(判事)는 특별히 제공(諸公) 이하를 명하여 관령(管領)하게 하고, 수전(水戰)·육수(陸守)의 모든 인물을 차역(差役)하는 따위의 일을 1방(房)에 붙이고, 요부(徭賦)·전폐(錢幣)의 모든 국가에 수용되는 것과 수륙(水陸)의 운수(運輸)하는 따위의 일을 1방(房)에 붙이고, 제도(制度)·금령(禁令)의 모든 국가에 기강(紀綱)이 되는 것을 1방(房)에 붙이고서, 전후에 헌의(獻議)한 사목(事目)을 유(類)대로 나누어 곧 3방(房)으로 하여금 모여 의논한 연후에 판사에게 진달하면, 판사가 그 가부를 참작하여 마땅한 것에 좇아 결정하고, 황원(荒遠)하여 미처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큰 것은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고, 작은 것은 각도에 이첩(移牒)하여 모두 정문(呈文) 보고하게 하여 참고해서, 금세(今世)에 마땅하면서 고제(古制)에 어그러지지 않고, 백성에게 이로우면서 또한 관(官)에도 편리한 것을 취하여, 위로 천총(天聰)에 계달(啓達)하여 재가를 받아 문적을 만들어서, 분부(分府)의 각 장관(掌官)이 신(信)으로 지키고, 행하기를 법식과 같이 하면, 누가 성화(聖化) 가운데서 길러지지 않겠습니까?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말이 네 마음에 거스리는 것이 있거든 반드시 도(道)에 구하고, 말이 네 뜻을 순히 하는 것이 있거든 반드시 도 아닌 것에 구하라.’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말을 다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마시고 듣기를 민첩하게 하지 못함을 근심하시며, 말의 거슬리고 순함을 꺼리지 마시고 오직 일의 옳고 그른 것을 살피어, 다시 수성(修省)을 가(加)하여 능히 하늘의 경계를 삼가시면, 종사(宗社)에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정당 정총·김약항·조서·오진·곽해룡 등의 집에 쌀과 콩을 내리다[편집]

○賜政堂鄭摠家米菽五十石, 金若恒、曺庶、吳眞、郭海龍等十餘人家, 亦各賜米菽二十石。 從門下府之請也。

정당(政堂) 정총(鄭摠)의 집에 쌀·콩 50석을 주고, 김약항(金若恒)·조서(曹庶)·오진(吳眞)·곽해룡(郭海龍)[107] 등 10인의 집에 또한 각각 쌀·콩 20석을 주었으니, 문하부(門下府)의 청을 따른 것이다.


10月 17日[편집]

비가 내리고 나무에 서리가 끼다[편집]

○癸丑/雨。 木氷。

비가 내리고, 목빙(木氷)[108]하였다.


조례 상정 도감을 설치하다[편집]

○置條例詳定都監, 分爲三房。 以靖安公及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參贊門下府事李茂ㆍ李居易、大司憲全伯英、中樞院副使柳觀爲判事, 以右散騎尹思修等九人爲屬官。

조례 상정 도감(條例詳定都監)을 설치하고 나누어 3방(房)으로 하여, 정안공(靖安公)과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무(李茂)·이거이(李居易), 대사헌(大司憲) 전백영(全伯英),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유관(柳觀)으로 판사(判事)를 삼고, 우산기(右散騎) 윤사수(尹思修) 등 9인으로 속관(屬官)을 삼았다.


장인·장사치·천례에게 벼슬주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는 청을 윤허하지 않다[편집]

○司憲府上言: “工商賤隷, 不許混雜朝廷。” 不允。 時, 內奴李德時爲義成庫別監, 韓長祐保和庫別監, 李生義順庫別監, 故憲司言之。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언(上言)하여,

"공(工)·상(商)·천례(賤隷)가 조정(朝廷)에 뒤섞이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때에 내노(內奴) 이덕시(李德時)가 의성고 별감(義成庫別監)이 되고, 한장우(韓長祐)가 보화고 별감(保和庫別監)이 되고, 이생(李生)이 의순고 별감(義順庫別監)이 되었기 때문에, 헌사(憲司)에서 말한 것이다.


10月 19日[편집]

흥국사 금부처가 땀을 흘리다[편집]

○乙卯/興國寺三金人出汗。

흥국사(興國寺) 세 금인(金人)이 땀을 흘렸다.


19일부터 연 3일간 안개가 끼다[편집]

○自乙卯至丁巳, 霧。

19일[을묘]부터 21일[정사]까지 안개가 끼었다.


판삼사사 설장수의 졸기[편집]

○判三司事偰長壽卒。 諱長壽, 字天民, 其先回鶻高昌人。 至正己亥, 父伯遼遜挈家避地于我國, 恭愍王以舊知, 賜田宅, 封富原君。 壬寅, 公年二十二, 中同進士科, 仕至密直提學, 封完城君, 賜號推誠輔理功臣。 丁卯, 以知門下府事, 奉表赴京, 奏免起取流移人戶李朶里不歹等, 仍蒙許襲冠服。 庚午夏, 以高麗王氏復位定策功, 封忠義君。 壬申, 知貢擧, 夏, 得罪配海上。 太上王以潛邸知待召還, 除檢校門下侍中, 封燕山府院君。 戊寅秋, 上卽位, 赴京奏聞, 行至甛水站, 會帝崩, 蒙遼東都司阻當, 沿途停留, 稟奉朝旨, 仍充進香使赴京。 建文元年六月, 奏奉聖旨, 準請回還, 十月, 以疾卒, 年五十九。 訃聞, 輟朝賜祭。 官庇襄事, 賜諡文貞。 公天資精敏剛强, 善爲說辭, 爲世所稱。 自事皇明, 朝京師者八, 屢蒙嘉賞。 所撰《直解小學》行于世, 且有詩藁數帙。 三子, 耐、衜、振。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가 졸(卒)하였다. 휘(諱)는 장수(長壽)요, 자(字)는 천민(天民)이었다. 그 선조는 회골(回鶻)[109] 고창(高昌) 사람이었다. 지정(至正) 기해년에 아비 백료손(伯遼遜)[110]이 가족을 이끌고 우리 나라로 피난하여 오니, 공민왕(恭愍王)이 옛 지우(知遇)라 하여 전택(田宅)을 주고 부원군(富原君)으로 봉하였다. 임인년에 공(公)의 나이 22세에 동진사과(同進士科)에 합격하여 벼슬이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이르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추성 보리 공신(推誠輔理功臣)의 호(號)를 하사 받았다. 정묘년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나라 서울에 가서 주문(奏聞)하여 유이(流移)한 인호(人戶) 이타리불대(李朶里不歹) 등을 기취(起取)하는 것을 면제 받고, 인하여 관복(冠服)을 습용(襲用)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경오년 여름에 고려(高麗) 왕씨(王氏)를 복귀시키는 데 정책(定策)한 공(功)으로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임신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었고, 그해 여름에 죄를 얻어 해상(海上)으로 귀양갔는데, 태상왕이 잠저(潛邸) 때의 지우(知遇)라 하여 소환해서 검교 문하 시중(檢校門下侍中)을 제수하고, 연산 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하였다. 무인년 가을에 임금이 즉위하자, 명나라 서울에 가서 주문(奏聞)하게 되었는데, 행차가 첨수참(甛水站)에 이르니, 마침 황제가 붕어(崩御)하여 요동 도사(遼東都司)의 저지를 당하였다. 연도(沿途)에 머물면서 품(稟)하여 조정 명령을 받고, 인하여 진향사(進香使)에 임명되어 명나라 서울에 갔다. 건문(建文) 원년 6월에 성지(聖旨)를 받들어 주문(奏聞)하여 청(請)을 허락받고 돌아왔다. 10월에 병으로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니, 조회를 정지하고 제사를 내려 주고, 관(官)에서 장사를 지내 주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정(精)하고 민첩하며, 강(剛)하고 굳세며, 말을 잘하여, 세상에서 칭송을 받았다. 황명(皇明)을 섬기면서부터 명나라 서울[京師]에 입조한 것이 여덟 번인데, 여러 번 가상(嘉賞)을 입었다. 찬술(撰述)한 《직해소학(直解小學)》이 세상에 간행되었고, 또 시고(詩藁) 두어 질(帙)이 있다. 아들은 설내(偰耐)·설도(偰衜)·설진(偰振)이다.


왜적이 풍해도에 침입하여 병선 1 척을 불태우고, 선군 50명을 죽이다[편집]

○倭寇豐海道, 燒兵船一艘, 殺船軍五十名。

왜적이 풍해도(豐海道)에 침입하여 병선(兵船) 1척을 불태우고, 선군(船軍) 50명을 죽였다.


백관들이 올린 상소를 조례 상정 도감에서 의논하여 보고하게 하다[편집]

○下百官封章于條例詳定都監, 令擬議以聞。

백관의 봉장(封章)을 조례 상정 도감(條例詳定都監)에 내려, 상량 의논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였다.


왜적이 풍주 서촌에 침구하다[편집]

○倭寇豐州西村。

왜적이 풍주(豐州) 서촌(西村)에 침구(侵寇)하였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조회하고 연향을 베풀다[편집]

○上率百官, 朝太上殿設享, 太上王懽甚。 上起舞, 太上王亦起舞。 沈德符、成石璘侍宴, 夜分乃罷。 太上王謂上曰: “內官李匡、咸承福, 每違忤於予。” 上流李匡於羅州, 囚承福于巡軍。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太上殿)에 조회하고, 연향(宴享)을 베푸니, 태상왕이 심히 즐거워하였다. 임금이 일어나 춤을 추니, 태상왕도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심덕부(沈德符)·성석린(成石璘)이 시연(侍宴)하였는데, 밤중이 되어서 파하였다. 태상왕이 임금에게 이르기를,

"내관(內官) 이광(李匡)과 함승복(咸承福)이 매양 나에게 거스린다."

하니, 임금이 이광을 나주(羅州)에 귀양보내고, 함승복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정당 문학 정총을 문민공이라 추시하다[편집]

○追諡政堂文學鄭摠文愍公。

정당 문학(政堂文學) 정총(鄭摠)을 문민공(文愍公)이라 추시(追諡)하였다.


흥천사의 사리전이 낙성되어 태상왕이 신도에 거둥하다. 수륙재를 베풀다[편집]

○太上王幸新都。 爲興天社之舍利殿落成也。 且設水陸齋, 以薦先王先妣若顯妣諸亡子壻及前朝王氏。 初, 太上王之將如新都也, 門下府上言: “臣等謹稽《孝經》, 曾參問於仲尼曰: ‘子從父之令, 可謂孝乎?’ 仲尼曰: ‘是何言歟? 當不義則子不可以不爭於父, 臣不可以不爭於君。 從父之令, 焉得爲孝乎?’ 今太上殿下, 因浮屠之事, 不愛聖躬, 冒寒跋涉, 將幸新都, 主上殿下, 定省之曠, 音問之疎, 誠所軫念。 伏願殿下, 起敬起孝, 達之以義, 動之以誠, 請止此行, 更加誠孝, 萬世幸甚。” 疏留中不下。 上欲幸天水北原, 餞太上之行, 以宿酲不果。 門下府詣闕請曰: “殿下雖有醉困, 亦宜勉强以出。” 使知申事李文和傳旨曰: “卿等所言, 誠合於禮。 然前日獻壽, 幸父王極懽, 予不敢不醉。 今欲起, 困不自勝, 且父王知我困甚, 使之勿出, 卿等勿怪。” 令使司及各司一員, 祗送崇仁門外。

태상왕이 신도(新都)에 거둥하였으니, 흥천사(興天社)의 사리전(舍利殿)이 낙성(落成)되고, 또 수륙재(水陸齋)를 베풀어 선왕(先王)·선비(先妣)와 현비(顯妣), 그리고 여러 죽은 아들과 사위, 고려의 왕씨(王氏)를 제사하기 위함이었다. 처음에 태상왕이 장차 신도(新都)에 가려 하니,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신 등이 삼가 《효경(孝經)》을 상고하니, 증삼(曾參)[111]이 중니(仲尼)[112]에게 묻기를, ‘아들이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면 효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니 중니(仲尼)가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이냐? 불의(不義)를 당하면, 자식이 아비에게 다투지 않을 수 없고, 신하가 임금에게 다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비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어찌 효도가 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지금 태상 전하(太上殿下)께서 부도(浮屠)의 일로 인하여 성궁(聖躬)을 아끼지 않으시고 추위를 무릅쓰고 발섭(跋涉)하여 장차 신도(新都)에 거둥하려 하시니, 주상 전하(主上殿下)의 정성(定省)이 궐할 것과 음문(音問)이 드물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공경(恭敬)과 효도(孝道)를 일으켜서 의(義)로 진달(陳達)하고, 정성으로 움직이어, 이번 행차를 정지하도록 청하고, 다시 정성과 효도를 더하시면, 만세에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임금이 소(疏)를 궁중에 머물러 두고 내려 주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천수의 북쪽 언덕으로 가서 태상왕의 행차를 전송하려 하였는데, 취한 술이 깨지 않아서 실행하지 못하였다. 문하부에서 예궐(詣闕)하여 청하기를,

"전하께서 술에 취해 곤하시더라도 마땅히 면강(勉强)하여 나가셔야 합니다."

하였다. 지신사(知申事) 이문화(李文和)를 시켜 전지(傳旨)하였다.

"경들의 말이 진실로 예(禮)에 합하다. 그러나 어제 헌수(獻壽)할 때에 부왕께서 극히 즐거워하심을 다행히 여겨, 내가 감히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일어나고자 하나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또 부왕께서 내가 심히 피곤할 것을 아시고 나오지 말라고 하시었으니, 경들은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사사(使司)와 각사(各司)의 1원(員)으로 하여금 숭인문(崇仁門) 밖까지 지송(祗送)하게 하였다.


10月 29日[편집]

흥국사의 금부처가 땀을 흘리다[편집]

○乙丑/興國寺金人出汗。

흥국사(興國寺)의 금인(金人)이 땀을 흘렸다.


元年 十一月[편집]

11月 1日[편집]

일본 서해도 준주 태수 정종(貞宗)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편집]

○〔丁卯〕/日本西海道駿州太守貞宗, 遣人來獻土物。

일본(日本) 서해도(西海道) 준주 태수(駿州太守) 정종(貞宗)이 사람을 보내어 토물(土物)을 바쳤다.


현관 6품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각각 현량를 천거하게 하다[편집]

○令顯官六品以上各擧賢良。

현관(顯官) 6품(品) 이상으로 하여금 각각 현량(賢良)을 천거하게 하였다.


대간의 건의에 따라 종친과 훈신에게 여러 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게 하다[편집]

○命宗親及勳臣, 分典諸道兵。 靖安公江原道及東北面, 益安公芳毅京畿及忠淸道, 懷安公芳幹豐海道、西北面, 上黨侯李佇慶尙、全羅道, 參贊門下府事李居易ㆍ趙英茂、參知門下府事趙溫、同知中樞院事李天祐, 亦參典兵, 其餘典兵者皆罷。 初司憲府上疏, 請罷家甲曰:

兵者, 聖人之所不得已, 不戢有自焚之災。 今國家幸賴殿下之德, 內無奸黨倡亂之釁, 外無邊寇侵陵之患。 而典兵者衆, 巷陌之間, 干戈交橫, 常若有變者。 豈不爲聖朝守文之累乎? 《易》曰: “師或輿尸, 凶。” 程子傳之曰: “輿尸, 衆主也。” 願殿下深察輿尸之戒, 任將授師, 悉遵古制, 宗親功臣外, 不許掌兵。

上然之。 至是, 臺諫交章上言:

典兵者衆, 則勢不相容, 其理然也。 盛朝自大小宗親, 以至異姓大臣, 分掌中外兵權, 各擁兵衆, 門列棨戟, 或被堅執銳, 出入宮門, 中外戒嚴, 人人自危, 有如交兵對敵之時。 兵制之紊, 未有如今日者也。 頃者上章, 請減節制之額, 殿下雖允其請, 所減纔數人耳, 未厭人心, 物議沸騰。 願殿下簡擇至親有忠義可典兵者主之, 其餘不使典兵, 以盡光武保全功臣之道。

疏上, 有是命。

종친(宗親)과 훈신(勳臣)에게 명하여 여러 도의 군사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 정안공(靖安公)은 강원도(江原道)와 동북면(東北面)을, 익안공(益安公) 이방의(李芳毅)는 경기(京畿)와 충청도(忠淸道)를, 회안공(懷安公) 이방간(李芳幹)은 풍해도(豐海道)와 서북면(西北面)을, 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113]는 경상도(慶尙道)와 전라도(全羅道)를 맡았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거이(李居易)·조영무(趙英茂),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조온(趙溫)·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이천우(李天祐)도 군사를 맡는 데에 참여하고, 그 나머지 군사를 맡은 자는 모두 혁파하였다. 처음에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하여 가병(家兵)을 혁파하기를 청하였다.

"군사라는 것은 성인(聖人)이 부득이하여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지식(止息)하지 않으면 자멸(自滅)하는 재앙이 있습니다. 지금 국가가 다행히 전하의 덕(德)에 힘입어서 안으로는 간사한 무리가 난을 일으킬 틈이 없고, 밖으로는 변방의 도적이 침략할 근심이 없사온데, 군사를 맡은 자가 많아서, 여항(閭巷)과 천맥(阡陌) 사이에 간과(干戈)가 서로 비끼어 항상 변이 있는 것 같으니, 어찌 성조(聖朝)의 문(文)을 지키는 정치에 누(累)가 되지 않겠습니까?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혹 군사를 여시(輿尸)하면 흉하다.’ 하였는데, 정자(程子)가 주석(註釋)하기를, ‘여시(輿尸)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주관[衆主]한다는 말이라.’ 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여시(輿尸)의 경계를 살피시고, 장수를 임명하여 군사를 주는 것을 모두 예전 제도에 따라서, 종친·공신 이외에는 군사를 맡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임금이 옳게 여기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간에서 교장(交章)하여 상언(上言)하였다.

"군사를 맡은 자가 많으면, 형세가 서로 용납지 못하는 것이 이치가 당연한 것입니다. 성조(盛朝)에서 대소 종친으로부터 이성(異姓) 대신(大臣)에 이르기까지 안팎의 병권(兵權)을 분장(分掌)하여 각각 많은 군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문(門)에 창검(槍劍)을 늘어세우고, 혹은 갑옷을 입고 칼을 잡고 궁문(宮門)에 출입합니다. 중외(中外)에서 경계가 엄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위태롭게 여겨 교병(交兵)하기를 적을 대한 때와 같이 하니, 병제(兵制)의 문란한 것이 금일과 같은 때가 없습니다. 지난 번에 글장을 올려 절제사(節制使)의 액수를 감하자고 청하였는데, 전하께서 그 청을 윤허하셨으나, 감한 것이 겨우 몇 사람 뿐이니, 인심에 만족하지 못하여 물의(物議)가 비등(沸騰)합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지친(至親)으로서 충의(忠義)가 있어 군사를 맡을 만한 사람을 가려 주장하게 하시고, 그 나머지는 군사를 맡게 하지 말아서, 광무제(光武帝)의 공신을 보전한 도리를 다하소서."

소(疏)가 올라가니,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중추원 사 장철의 졸기[편집]

○中樞院使張哲暴卒。 哲, 義州萬戶列之子也。 以開國定社之功, 致位樞府, 恃其威勢, 多行不義。 至是, 扈從太上王于新都, 疽發背, 不愼。

중추원 사(中樞院使) 장철(張哲)이 갑자기 졸(卒)하였다. 장철은 의주 만호(義州萬戶) 장열(張列)의 아들인데, 개국(開國) 정사(定社)의 공(功)으로 벼슬이 추부(樞府)에 이르렀다. 그 위세(威勢)를 믿고 불의한 짓을 많이 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태상왕을 신도(新都)에 호종(扈從)하였다가 등창이 났는데도, 몸을 삼가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군신을 거느리고 성절을 하례하다[편집]

○上率群臣, 賀聖節。

임금이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성절(聖節)을 하례하였다.


응패가 없이 마음대로 매를 놓는 자는 사헌부로 하여금 규찰하여 다스리게 하다[편집]

○命作鷹牌, 其無牌而擅放者, 令憲司糾理。

응패(鷹牌)[114]가 없이 마음대로 매를 놓는 자는 헌사(憲司)로 하여금 규찰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11月 7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가 밤에 형혹성을 범하다[편집]

○癸酉/太白晝見, 夜, 犯熒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가, 밤에 형혹성(熒惑星)을 범하였다.


부엉이가 이어소에서 울다[편집]

○鵂鶹鳴于移御所。

부엉이가 이어소(移御所)에서 울었다.


11月 8日[편집]

유성의 크기가 주발만하고 꼬리의 빛이 불과 같았다[편집]

○甲戌/流星出柳星南, 大如鉢, 光芒如火。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남쪽에서 나왔는데, 크기가 주발(周鉢)만하고, 꼬리의 빛이 불과 같았다.


왜선 7척이 서북면에 이르러 항복하니, 안마와 의관을 하사하다[편집]

○倭船七艘, 至西北面宣州請降, 遣降倭仇陸、藤昆招諭之, 仍賜陸鞍馬衣冠。 初, 倭寇侵掠大明沿海之地, 以及我豐海道西北面等處。 及聞其六州牧高義弘起兵擊殲三島之爲賊者, 恐禍及己, 遂乞降。

왜선(倭船) 7척이 서북면(西北面) 선주(宣州)에 이르러 항복하기를 청하니, 항복한 왜인 구륙(仇陸)·등곤(藤昆)을 보내어 초유(招諭)하고, 인하여 구륙(仇陸)에게 안마(鞍馬)와 의관(衣冠)을 하사하였다. 처음에 왜구(倭寇)가 명(明)나라의 연해(沿海) 지방을 침략하고 우리 나라 풍해도(豐海道)·서북면(西北面) 등지에 이르렀는데, 육주목(六州牧) 고의홍(高義弘)이 군사를 일으켜 쳐서 섬멸한다는 소문을 듣고, 〈왜구로서〉 삼도(三島)의 도적들은 화(禍)가 저희들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항복하기를 애걸한 것이다.


우정승 김사형이 병을 칭탁하고 사직을 청하니 병의 차도를 기다리라고 하다[편집]

○右政丞金士衡, 稱疾上箋辭, 上謂都承旨李文和曰: “且留此箋, 以竢其病之差劇。”

우정승(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병이라 칭탁하고 전(箋)을 올려 사직하니,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에게 이르기를,

"아직 이 전(箋)을 머물러 두고 그 병의 차도를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11月 11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편집]

○丁丑/太白晝見。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전 장군 전흥을 자기집 노비라고 강제로 일을 시킨 전 정당 문학 곽추를 평주에 귀양보내다[편집]

○流前政堂文學郭樞于平州。 樞謂前將軍田興爲家奴, 勒令役使, 興訴于憲司。 憲司辨其宗派, 良籍明甚, 劾樞壓良之罪, 上以樞靖安公翁主之族父, 宥之, 只流平州農莊。

전 정당 문학(政堂文學) 곽추(郭樞)를 평주(平州)에 귀양보냈다. 곽추(郭樞)가 전 장군(將軍) 전흥(田興)을 그의 집종이라 하여 강제로 사역(使役)을 시켰다. 전흥이 헌사(憲司)에 호소하여, 헌사에서 그 종파(宗派)를 변별하여 보니, 양적(良籍)인 것이 매우 분명하였으므로, 곽추의 양인(良人)을 억압한 죄를 탄핵하였다. 임금이 곽추가 정안공(靖安公) 옹주(翁主)의 족부(族父)라 하여 용서하고, 다만 평주(平州)의 농장(農莊)에 귀양보내었다.


11月 15日[편집]

붉은 요기가 사방에 가득하다[편집]

○辛巳/赤祲徧于四方。

붉은 요기(妖氣)가 사방에 가득하였다.


11月 16日[편집]

동지에 큰 비가 내리니 조하를 그만두다[편집]

○壬午/冬至大雨, 免朝賀。

동지(冬至)이었는데, 큰 비가 내리니, 조하(朝賀)를 면제하였다.


까마귀떼가 불은사 소나무에 모이다[편집]

○群鴉集于佛恩寺松。

뭇 까마귀가 불은사(佛恩寺) 소나무에 모였다.


11月 17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편집]

○癸未/太白晝見。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도승지 이문화를 보내어 김사형에게 일을 보라고 이르다[편집]

○遣都承旨李文和, 諭金士衡視事。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를 보내어 김사형(金士衡)에게 일을 보라고 일렀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장단에 가서 태상왕의 환가를 맞이하다[편집]

○上率百官幸長湍, 以迎太上王之還。 太上王發漢京, 將還舊都, 上欲幸長湍, 只令諸節制使及甲士隨駕。 門下府上言: “人主動靜, 不可斯須廢禮。 願殿下率百官備儀仗, 以迎太上王, 垂法後世。” 從之。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장단(長湍)에 가서 태상왕의 환가(還駕)를 맞이하였다. 태상왕이 한경(漢京)[115]을 떠나 장차 구도(舊都)[116]로 돌아오려 하므로, 임금이 장단에 거둥하고자 하여, 다만 여러 절제사(節制使)와 갑사(甲士)로 하여금 거가(車駕)를 따르게 하였다.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인주의 동정(動靜)에는 잠시라도 예를 폐지할 수 없습니다. 원하건대, 전하는 백관을 거느리고 의장(儀仗)을 갖추어 태상왕을 맞아서, 법을 후세에 남기도록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月 20日[편집]

나무에 얼음이 얼고 산올빼미가 수창궁 북쪽 동산에서 울다[편집]

○丙戌/木氷。 鵩鳥鳴于壽昌宮北苑。

목빙(木氷)하고, 산올빼미[鵩鳥]가 수창궁(壽昌宮) 북쪽 동산에서 울었다.


11月 21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편집]

○丁亥/太白晝見。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임금이 장단에서 머물러 행악에서 태상왕을 뵙고 헌수하다[편집]

○上次于長湍渡頭, 見太上王于行幄, 鼓樂獻壽。

임금이 장단(長湍) 나루 머리[渡頭]에서 머물러 태상왕을 행악(行幄)에서 뵙고, 풍악을 울리면서 헌수(獻壽)하였다.


11月 22日[편집]

달이 좌각성을 가리다[편집]

○戊子/月掩左角。

달이 좌각성(左角星)을 가리었다.


임금이 태상왕의 막차에 나아가 문안하니 임금을 먼저 가게 하다[편집]

○上詣太上王幕次問安, 太上王令上先行, 上遂動駕, 駐椒川邊, 以竢太上王。 尋至, 上欲享太上王于龍屯郊, 太上王以中夜(經)〔徑〕入京, 上平明動駕, 隨詣太上殿, 不得見, 遂還宮。

임금이 태상왕의 막차(幕次)에 나가 문안하니, 태상왕이 임금으로 하여금 먼저 가게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거가를 움직여 초천(椒川)가에 머물러서 기다리니, 태상왕이 조금 뒤에 이르렀다. 임금이 태상왕께 용둔교(龍屯郊)에서 연향(宴享)하려 하니, 태상왕이 밤중에 바로 서울로 들어갔다. 임금이 새벽에 거가를 움직여 뒤따라 태상전에 나갔으나 뵙지 못하고, 드디어 환궁하였다.


11月 23日[편집]

달이 각성을 가리다[편집]

○己丑/月掩角星。

달이 각성(角星)을 가리었다.


11月 25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달이 상장성을 범하다[편집]

○辛卯/太白晝見。 月犯上將。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달이 상장성(上將星)을 범하였다.


구륙이 항복한 왜인 14명을 데리고 오다[편집]

○仇陸以降倭十四人來。 仇陸等至宣州, 見萬戶藤時羅老等, 諭以我國待降附甚厚, 且言殿下仁威, 倭人感悅遂降。 時羅老隨仇陸赴都下。

구륙(仇陸)이 항복한 왜인 14명을 데리고 왔다. 구륙 등이 선주(宣州)에 이르러 만호(萬戶) 등시라로(藤時羅老) 등을 보고, 우리 나라에서 항복한 사람을 대접하기를 심히 후하게 한다고 타이르고, 또 전하의 어질고 위엄스러움을 말하니, 왜인들이 감동하고 기뻐하여 드디어 항복하였다. 등시라로는 구륙을 따라 도하(都下)에 이르렀다.


조회를 보다. 항복한 왜인 14명이 서반 8품 아래에 들어와 참여하다[편집]

○視朝, 降倭十四人入, 與西班八品之下。

조회를 보니, 항복한 왜인 14명이 서반(西班) 8품(品) 아래에 들어와 참여하였다.


박돈지를 보내어 항복한 왜인을 위로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살게 하다[편집]

○遣判殿中寺事朴惇之, 慰降倭于宣州, 各賜衣冠。 將萬戶藤望吾時羅、船主彼堅都老等六十餘人及所虜中國男婦二十一名, 分處郡縣。

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 박돈지(朴惇之)를 보내어, 항복한 왜인을 선주(宣州)에서 위로하고, 각각 의관을 주었다. 만호 등망오시라(藤望吾時羅)·선주(船主) 피견도로(彼堅都老) 등 60여 인과 잡혀 온 중국 남녀 21명을 군현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였다.


11月 29日[편집]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다[편집]

○乙未/太白晝見。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1月 30日[편집]

나무에 서리가 끼다[편집]

○丙申/木稼。

목가(木稼)하였다.


항복한 왜인에게 사직 이하의 직을 주고 계급이 선략인 자는 은대를 주다[편집]

○授降倭司直以下之職。 階宣略者, 賜銀帶。

항복한 왜인에게 사직(司直) 이하의 직(職)을 주고, 계급이 선략(宣略)인 자는 은대(銀帶)를 주었다.


元年 十二月[편집]

12月 1日[편집]

세초의 도목 정사를 그만두다[편집]

○〔丁酉〕/停歲抄都目政。

세초 도목(歲抄都目)[117]을 정지하였다.


휴가를 얻어 귀향하는 길에 기생첩 봉이를 데리고 간 각문 사인 윤하를 흥덕진에 귀양보내다[편집]

○流(閣門舍人)〔閤門舍人〕尹夏于興德鎭。 夏之母居淸州, 夏因內人, 啓以母疾乞歸侍藥, 上給驛馬。 夏率其妾妓鳳伊, 遞宿傳舍而歸。 憲司上言: “夏之母若無疾, 而妄告於朝, 則欺天也, 不忠莫大焉; 母實有疾, 而携妓遲行, 則不孝之罪, 不可不治。” 上然之。

각문 사인(閣門舍人) 윤하(尹夏)를 흥덕진(興德鎭)에 귀양보냈다. 윤하의 어미가 청주(淸州)에 있었는데, 윤하가 나인(內人)을 통하여 어미 병을 아뢰고 돌아가 시약(侍藥)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역마(驛馬)를 주었다. 윤하가 그의 기생첩 봉이(鳳伊)를 데리고 주막집을 갈아서 자며 귀향하였다. 헌사(憲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윤하의 어미가 만일 병이 없는데 거짓으로 조정에 고하였다면 임금을 속인 것이니, 불충하기가 더할 수 없이 크고, 어미가 실지로 병이 있는데 기생을 데리고 늦게 갔다면, 불효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 옳게 여겼다.


전 소감 유충길과 고 중랑장 송지로의 처 허씨에게 정표하고 쌀과 콩을 하사하다[편집]

○前少監兪忠吉及故中郞將宋智老妻許氏, 旌表其門, 仍賜米菽。 忠淸道都觀察使李至啓: “淸州人兪忠吉, 居父母喪,三年哀痛, 未嘗現齒。 連山人許氏, 年十九喪夫, 三年喪畢, 父母宗族欲奪志, 許誓不許, 奉養其姑如初。” 上嘉之, 有是命。 許氏年八十矣。

전 소감(少監) 유충길(兪忠吉)과 고(故) 중랑장(中郞將) 송지로(宋智老)의 처 허씨(許氏)에게 그 문(門)에 정표(旌表)하고, 인하여 쌀과 콩을 하사하였다. 충청도 도관찰사 이지(李至)가 아뢰었다.

"청주(淸州)사람 유충길(兪忠吉)은 부모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애통해 하며 일찍이 남에게 웃음을 보이지 않았고, 연산(連山) 사람 허씨(許氏)는 나이 19세에 지아비를 잃고 3년상을 마친 뒤에 부모와 종족(宗族)이 개가시키고자 하였으나, 허씨가 맹세코 허락하지 않고 그 시어머니를 봉양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습니다."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허씨는 나이 80세였다.


좌정승 조준이 재이에 대한 자책 때문에 전을 올려 사직을 청하다[편집]

○左政丞趙浚, 以災異上箋辭。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이 재이(災異) 때문에 전(箋)을 올려 사직하였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조회하고 연향을 베풀다[편집]

○上率百官, 朝太上殿設享, 鼓樂盡歡, 李居仁、成石璘起舞。 上復於太上王曰: “今兩政丞皆乞辭, 何以處之?” 太上王曰: “浚與士衡, 人中傑也。 然苟力辭, 則沈德符、成石璘亦可代之。”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太上殿)에 조회하고, 연향을 베풀어 풍악을 잡히니, 몹시 즐거워서 이거인(李居仁)·성석린(成石璘)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임금이 태상왕께 여쭈기를,

"지금 두 정승이 모두 사면하기를 비니, 어떻게 처리할까요?"

하니, 태상왕이 말하였다.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은 사람들 가운데 호걸이다. 그러나 진실로 굳이 사양한다면, 심덕부(沈德符)·성석린(成石璘)이 또한 대신할 만하다."


사헌부에서 상소하여 시무 3조목을 건의하다[편집]

○憲司上疏, 論時務三條。 疏曰:

一, 宮闈者, 至尊之處。 今時座所, 垣墉淺狹, 帶弓劍者, 出入無常, 無差備者, 進退無時, 宮闈之禁, 固不如此。 願自今, 中門之內, 守以宦官; 中門之外, 把以甲士, 諸公侯內相外, 自非召見, 無得擅入, 其根隨之人, 一依《經濟六典》之數, 不許持兵。 司門不能禁遏者, 當府治罪。 一, 《經濟六典》所載分決庶務, 各有攸司。 大內都堂, 直呈訟牒, 一切禁止, 以嚴大內, 以尊朝廷, 已有成典, 越訴之罪, 亦有成律。 邇者, 憸小之徒, 巧飾百端, 雖小訟直訴于內, 殿下寬仁, 不輕絶人, 無小無大, 悉付有司, 令決是非, 甚非爲政之體也。 願自今越訴之狀, 禁而勿受, 使之告于攸司, 而勿煩天聰, 則大內尊嚴, 成典不墜, 而越訴之弊絶矣。 一, 《經濟六典》所載凡仕于朝者, 除父母奔喪外, 不許出關。 其事有不獲已, 必辭職而後乃行, 違者痛治。 近來貪位冒祿之徒, 不顧成法, 憚於呈辭, 或言父母有疾, 或言室家有故, 托以多方, 妄干口傳, 至受鋪馬, 橫行州郡者, 比比有之。 以今尹夏之事觀之, 則其弊可知。 驛路凋廢, 職此之由。 願自今, 如有似前干冒口傳, 規得鋪馬者, 當府推劾, 以懲其罪。

從之。

헌사(憲司)에서 상소(上疏)하여 시무(時務) 3조목을 논하였다. 소는 이러하였다.

"1. 궁위(宮闈)라는 곳은 지존(至尊)이 거처하는 곳인데, 지금 시좌소(時座所)는 담벼락이 얕고 좁으며, 활과 칼을 가진 자가 무상하게 출입하고, 차비(差備)가 없는 자가 때 없이 진퇴(進退)하니, 궁위를 금(禁)하는 것이 이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중문(中門) 안은 환관(宦官)으로써 지키고, 중문 밖은 갑사(甲士)로써 파수(把守)하여, 여러 공후(公侯)와 내상(內相) 이외에는, 임금이 소견(召見)하는 것이 아니면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 근수(根隨)하는 사람도 한결같이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수(數)에 의하고, 병기(兵器)를 가지는 것을 허락하지 말며, 사문(司門)으로서 능히 금하여 막지 못한 자는 당부(當府)에서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1.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실려 있는 바, ‘서무(庶務)를 나누어 결단하는 데 각각 유사(攸司)가 있어, 대내(大內)와 도당(都堂)에 직접 송첩(訟牒)을 올리는 것을 일절 금지하여, 대내(大內)를 엄하게 하고 조정을 높인다.’고 하여, 이미 성전(成典)이 있고, 월소(越訴)한 죄도 또한 이루어진 법률이 있사온데, 근자에 간사한 소인의 무리가 교묘하게 백 가지로 꾸며, 비록 작은 송사라도 대내(大內)에 직접 호소합니다. 전하가 너그럽고 어지시어 가볍게 사람을 끊지 않으시므로,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유사(有司)에게 맡겨 시비를 결단하게 하시니, 심히 정치하는 체통이 아닙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월소(越訴)하는 소장(訴狀)을 금하여 받지 말고, 유사(攸司)에게 고하여 천총(天聰)을 번거롭게 하지 말게 하면, 대내(大內)가 존엄하여지고, 이루어진 법이 실추(失墜)되지 않고, 월소(越訴)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1. 《경제육전》에 실려 있기를, ‘무릇 조정에 벼슬하는 자는 부모의 분상(奔喪)을 제외하고는 관(關)[118]을 나가는 것을 허락지 않고, 일이 부득이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사직(辭職)한 뒤에 가며, 어기는 자는 엄하게 다스린다.’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벼슬을 탐하고 녹을 함부로 받는 무리들이 이루어진 법을 돌보지 않고 사직하기를 꺼려, 혹은 부모가 병이 있다고 말하고, 혹은 아내가 연고가 있다고 말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청탁하여 거짓으로 구전(口傳)을 간청해서 포마(鋪馬)까지 받아 가지고 주군(州郡)에 횡행(橫行)하는 자가 가끔 있습니다. 이번 윤하(尹夏)의 일로 보면 그 폐단을 알 수 있습니다. 역로(驛路)가 조폐(凋廢)한 것이 곧 이때문입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만일 전과 같이 구전(口傳)을 간청하여 함부로 포마(鋪馬)를 얻기를 꾀하는 자가 있으면, 당부(當府)에서 추핵(推劾)하여 그 죄를 징치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화·조준·김사형·심덕부·성석린·이거이·민제·권근에게 관직을 주다[편집]

○以李和領三司事, 趙浚判門下, 金士衡爲上洛伯, 沈德符左政丞, 成石璘右政丞, 李居易門下侍郞贊成事, 閔霽判三司事, 河崙參贊門下府事, 李稷知門下府事, 權近政堂文學。

이화(李和)로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조준(趙浚)으로 판문하(判門下)를, 김사형(金士衡)으로 상락백(上洛伯)을 삼고, 심덕부(沈德符)로 좌정승(左政丞)을, 성석린(成石璘)으로 우정승(右政丞)을, 이거이(李居易)로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를, 민제(閔霽)로 판삼사사(判三司事)를, 하윤(河崙)으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이직(李稷)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권근(權近)으로 정당 문학(政堂文學)을 삼았다.


문하부에서 상소하여 도목 정사를 회복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르다[편집]

○門下府上疏, 請復都目之政, 從之。 疏曰:

竊謂歲末循資之政尙矣。 百官員吏則考功主之, 成衆愛馬則吏兵曹主之, 每當歲抄, 將都歷狀, 覈其勤慢, 勤者陞之, 慢者罷之, 使新授者, 得受翼年之祿, 以供其年之事, 名之曰歲末都目政。 苟或不然, 待頒祿而除授, 則瘝官廢職者, 僥倖受祿, 都目受職者, 不得其祿, 豈任官頒祿之義乎? 且勸課農桑, 不可失時, 守令交代, 適在農時, 迎送之弊, 亦且不小。 今殿下於十一月二十日, 令攸司受都目狀, 以備歲抄除授, 中外罔不見聞, 而乃淹留式至于今, 其於令出惟行之義何如? 伏望殿下, 一依成憲, 行除授之法。

문하부(門下府)에서 상소(上疏)하여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회복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소는 이러하였다.

"생각하건대, 세말(歲末)에 순자(循資)하는 정사(政事)는 오래된 것입니다. 백관원리(百官員吏)는 고공사(考功司)에서 주장하고, 성중 애마(成衆愛馬)는 이조·병조에서 주장하여, 매양 세초(歲抄)를 당하면 도력장(都歷狀)[119]을 가지고 그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조사하여, 부지런한 자는 승진시키고, 게으른 자는 파면하며, 새로 제수(除授)된 자로 하여금 이듬해의 녹을 받고 그 해의 일에 이바지하게 하는 것을 세말 도목정(歲末都目政)이라고 이름합니다. 만일 혹 그렇지 않고 반록(頒祿)을 기다려서 제수하면, 관(官)을 병들게 하고 직사를 망치는 자가 요행으로 녹을 받게 되고, 도목에 수직(受職)한 자는 녹을 얻지 못하게 되니, 어찌 임관(任官)하고 반록(頒祿)하는 뜻이겠습니까? 또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는 것은 때를 잃을 수가 없는데, 수령이 교대하는 것이 마침 농사 때에 있으니, 맞이하고 보내는 폐단이 또한 작지 않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11월 20일에 유사(攸司)로 하여금 도목장(都目狀)을 받아서 세초(歲抄)의 제수(除授)에 대비케 한 것은, 중외(中外)에서 보고 듣지 않은 바가 없사온데, 이를 지체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영(令)이 나오면 오직 행한다는 뜻에 어떠합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이루어진 법에 의하여 제수(除授)의 법을 행하소서."


양부의 대신은 상중이라도 특지에 의해 출사하는 법을 세우다[편집]

○立兩府大臣有服, 特旨就職之法。 右政丞成石璘, 以從弟之服, 不視事, 都評議使司啓: “兩府大臣, 雖當服制, 如有國家大事, 特旨就職, 著爲常典。” 從之。

양부(兩府) 대신은 복제(服制)가 있더라도 특지(特旨)로 직사에 나오게 하는 법을 세웠다. 우정승(右政丞) 성석린(成石璘)이 종제(從弟)의 복제로 일을 보지 않으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아뢰었다.

"양부 대신은 비록 복제를 당하였더라도, 만일 국가의 큰 일이 있으면 특지(特旨)로 직사에 나오게 하고, 이를 항구한 법전으로 삼으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수창궁에 환어하다[편집]

○還御壽昌宮。

수창궁(壽昌宮)에 환어(還御)하였다.


우현보로 단양백을 삼다[편집]

○以禹玄寶爲丹陽伯。

우현보(禹玄寶)로 단양백(丹陽伯)을 삼았다.


항복한 왜인 17명이 와서 창과 갑옷을 바치니 모두 습의를 주다[편집]

○降倭十七名, 來獻槍甲各六部, 皆賜襲衣。

항복한 왜인 17명이 와서 창과 갑옷 각각 6부(部)를 바치니, 모두 습의(襲衣)를 주었다.


각도의 도관찰사와 경력·도사를 모두 경관으로 겸하여 임명하다[편집]

○各道都觀察使及經歷都事, 皆以京官兼差。 從判中樞院事鄭洪之言也。

각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와 경력(經歷)·도사(都事)를 모두 경관(京官)으로 겸하여 차하(差下)하였으니,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정홍(鄭洪)의 진언(進言)을 따른 것이었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나아가서 헌수하다[편집]

○上率百官, 詣太上殿獻壽。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태상전에 나가서 헌수하였다.


태상왕이 성거산 관음굴에 가다[편집]

○太上王幸聖居山觀音窟。

태상왕이 성거산(聖居山) 관음굴(觀音窟)에 갔다.


사헌부에서 환관의 발호를 억제할 것에 대해 상소하다[편집]

○司憲府上疏。 疏曰:

賞罰, 人君之大柄, 賞一人而千萬人勸, 罰一人而千萬人懼。 賞不當功, 罰不當罪, 雖堯、舜在上, 無由致治。 殿下寬仁, 善善則重, 惡惡則輕, 豪猾無忌憚, 而肆行狂暴, 吏民恃赦宥, 而輕犯憲章, 詞訟日煩, 紀綱不振。 願自今, 親貴勳勞, 罪入於輕, 情可矜法可疑, 律應以議外。 凡輕重罪犯, 無問親疎貴賤, 一依有司之啓, 依律科斷, 期致無刑。 且非功德顯著, 衆所共知者, 不偏賞賜, 以均衆心。 卽位之初, 首革宦官之弊, 皆斥遠方, 京中所留, 纔十餘人, 而事未有闕, 中外相賀。 曾未數月, 斥者皆還, 宦官之額, 不減前日。 夫宦官之害, 載在史冊, 昭昭可鑑, 未易悉擧, 姑以近來耳目所及論之, 師幸以奇巧, 曹恂以諂佞, 俱得寵幸, 更相依附, 勢傾中外。 朝士畏之如鬼蜮, 百姓疾之如仇讎。 雖諸公駙馬, 亦側目屛氣, 莫敢發一言以論其失。 此皆殿下之所親見也。 今之宦官氣勢, 雖未聞有如二人者, 然《易》曰: “履霜堅氷至。” 有國家者, 防微杜漸, 可不愼其始歟! 願量掖庭緊要差備, 定其額數, 擇謹厚忠信可親近者, 隨缺隨補, 罷遣其餘, 任其所之, 爲子孫萬世之法。

上曰: “宮中差備, 不可闕也。 卽今宦官, 各充其任, 宜勿復論。”

사헌부(司憲府)에서 상소(上疏)하였으니, 소(疏)는 이러하였다.

"상(賞)·벌(罰)은 인군의 큰 권병(權柄)입니다. 한 사람을 상주면 천만 사람이 권장되고, 한 사람을 벌주면 천만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상(賞)이 공(功)에 적당하지 못하고 벌(罰)이 죄(罪)에 적당하지 못하면, 요(堯)·순(舜)이 위[上]에 있다 하더라도 지치(至治)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너그럽고 어지시어,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는 것은 중히 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은 가벼이 하니, 교활(狡猾)한 자가 거리낌 없이 광포한 짓을 자행하고, 아전과 백성이 사유(赦宥)를 믿고 가볍게 헌장(憲章)을 범하여, 사송(詞訟)이 날로 번다하여지고, 기강(紀綱)이 진작되지 못합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친귀(親貴)·훈로(勳勞)가 죄가 경한 데에 들어서, 정상이 가긍하고 법이 의심스러워서 율을 응당 의논할 것 이외에는, 무릇 경하고 중한 범죄를 친소 귀천(親疎貴賤)을 불문하고 한결같이 유사의 계달(啓達)에 의하여 율에 따라서 과단하고, 형벌이 없는 데에 이르도록 기약(期約)하소서. 또 공덕(功德)이 현저하여 여러 사람이 함께 아는 자가 아니거든, 편벽되게 상주지 말아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공평하게 하소서.

즉위하던 처음에 먼저 환관(宦官)의 폐단을 고쳐 모두 먼 지방에 추방하고, 서울 가운데 남은 자는 겨우 10여 인이었으나, 일이 궐(闕)하는 것이 없었으니, 중외(中外)에서 서로 하례하였습니다. 일찍이 두어 달이 못되어 추방되었던 자가 모두 돌아와서, 환관의 액수(額數)가 전보다 감해지지 않았습니다. 대저 환관의 해는 사책(史冊)에 실려 있어서 밝게 알 수 있습니다. 모조리 들기는 쉽지 않으니, 우선 근래의 이목(耳目)에 미친 것을 가지고 논(論)하겠습니다. 김사행(金師幸)은 기이하고 교묘한 것으로, 조순(曹恂)은 아첨하고 간사한 것으로 모두 총행(寵幸)을 받아, 서로서로 의지하여 그 세력이 중외(中外)를 기울게 했습니다. 조사(朝士)들은 두려워하기를 귀(鬼)와 역(蜮)[120]같이 하고, 백성들은 미워하기를 원수 같이 하며, 비록 제공(諸公)과 부마(駙馬)라 하더라도 이를 무서워하여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숨을 죽이어 감히 한마디 말로 그 잘못을 논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전하께서 친히 보신 것입니다. 지금 환관의 기세가 이들 두 사람 같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나,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고 하였으니, 국가를 가진 자가 기미를 막고 조짐을 막는 데에 있어서 그 시초를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액정서(掖庭署)의 긴요한 차비(差備)를 헤아려 그 액수를 정하고, 근후(謹厚)하고 충신(忠臣)하여 친근하게 할 수 있는 자를 선택하여, 결원이 생기는 대로 보충하고, 그 나머지는 파(罷)하여 보내어 갈 데로 가게 해서 자손 만세의 법을 삼으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궁중의 차비(差備)를 궐(闕)할 수는 없다. 지금 환관이 각각 그 임무에 충당되어 있으니, 다시 논하지 말라."


주석[편집]

  1. 명(明) 제2대 혜제(惠帝)의 연호(年號)-(1398년 ~ 1402년)
  2.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3. 불교에서 음식을 수중과 육상에 뿌려 외로운 혼령이나 아귀들에게 베풀어줌으로써 고뇌를 제거하게 한다는 법회
  4. 제사가 시행되기 전에 정성을 드리는 것
  5.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거나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던 옷의 겉감과 안찝
  6.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의 임금의 정복(正服)으로 면류관과 곤룡포를 말한다.
  7. 새해를 축하(祝賀)함
  8. 물건(物件)을 바치는 것을 고맙게 여기며 받아들임
  9. 이십팔수의 둘째 별자리
  10. 조선(朝鮮) 때 여관의 하나. 서울 홍제동에 있었으며, 중국(中國)의 사신(使臣)이 한양 성안에 들어오기 전에 묵었음
  11. 조선조 초엽에 옥사(獄事)를 맡아 보던 관청. 태조(太祖) 원년에 설치하여 태종(太宗) 3년에 순금사(巡禁司)로, 태종 14년에 의금부(義禁府)로 고침. 순군 만호부(巡軍萬戶府).
  12. 고기를 잡아 어물(魚物)을 공납(貢納)하고, 염조(鹽竈)에서 소금을 구워 일정량을 나라에 바치던 일
  13. 명(明)나라 태조(太祖) 때, 공신 남옥(藍玉)과 호유용(胡惟庸)을 각각 중심으로 하여 뭉친 당파.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이들이 모반을 기도하였다는 혐의로 2차에 걸쳐 공신 4천 5백 명을 주살하였음. 이를 호람(胡藍)의 옥(獄)이라 함.
  14. 저울[衡]과 추[石]로 서목(書目)을 달아 매일 일정량을 결재하던 일. 형석 정서(衡石程書)를 형석 양서(衡石量書)라고도 하는데, 진 시황(秦始皇)은 신하를 불신하여 이처럼 모든 서류를 자신이 직접 재결(裁決)하였음.
  15. 조선조 초엽에 3인의 성정(成丁)이 1인의 정군(正軍)을 세우던 일. 삼정 일자(三丁一子)
  16. 공정왕(恭靖王)의 비(妃) 김씨
  17. 이방간(李芳幹)
  18. 나라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주던 작위(爵位). 실직(實職)이 아닌 차함(借銜)으로 주었음.
  19. 종성(鍾城)의 옛 이름
  20. 유파아손(劉把兒遜)을 말함
  21. 회령(會寧)의 옛 이름
  22. 종2품
  23. 여말 선초(麗末鮮初)에 정원(定員) 이외의 사람에게 녹봉을 주기 위하여 벼슬을 줄 때, 그 벼슬 앞에 붙이던 칭호. 이는 실직(實職)이 아니고 허직(虛職)임
  24. 신의 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능
  25. 유원정(柳爰廷)의 사위. 태조 7년 7월에 순릉(純陵)의 문제로 옥사를 일으켰음.
  26. 여말 선초(麗末鮮初) 때 천적(賤籍)에 따라 노비의 시비(是非)를 판정하던 관청.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에 설치하고 조선조 태조 5년에 부활함.
  27. 영락제(永樂帝)
  28. 주원장(朱元璋)
  29. 건문제(建文帝)
  30. 《당률소의(唐律疏義)》에 의하면, 모반(謀反)·모대역(謀大逆)·모반(謀叛)·악역(惡逆)·부도(不道)·대불경(大不敬)·불효(不孝)·불목(不睦)·불의(不義)·내란(內亂)을 말하는데, 사유(赦宥)에서 제외되었음.
  31. 유배된 죄인을 적소(謫所)에서 풀어주어 서울 밖의 어느 곳에서든지 뜻대로 살게 하던 일
  32.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능
  33. 매년 2월과 8월에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수백 명의 중들이 부처를 모시고 불경을 외우면서 온종일 성내(城內)의 큰 거리를 돌아다니던 일. 전경법(轉經法).
  34. 왕비(王妃)나 왕세자(王世子)가 임금의 수라상을 손수 보살피던 일
  35. 임금이 교외에 머물 때 임시로 들판에 마련하는 악차(幄次)
  36. 종묘(宗廟)의 정묘(正廟) 외에 따로 세운 묘(廟). 한(漢)나라 혜제(惠帝)가 숙손통(叔孫通)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세웠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진전(眞殿)을 말함.
  37. 임금이 거둥할 때 길에 사람이 다니는 것을 금지하던 일
  38.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그 영예를 축복하여 내려 주던 잔치. 대개 의정부에서 베풀었음
  39. 두 패로 나누어 돌을 던져서 그 승부를 내던 싸움. 주로 5월 단오날에 행하였는데, 고려 때부터 일종의 군사 훈련으로 여기어 국가에서 장려하였으나, 사상자가 많이 나서 금지한 때도 있었음.
  40. 원종(元宗)
  41. 관계(官階)의 차례를 밟지 않고 초자(超資)하여 벼슬에 올려 쓰던 일
  42. 격구(擊毬)
  43. 나라의 운명
  44. 조선조 태조(太祖) 때 3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을 임명할 경우에는 대간(臺諫)의 서경(署經)을 거치지 않고 바로 벼슬을 주던 제도
  45. 궁중에서 말안장의 제조(製造)를 맡아보던 임시 관아. 후에 공조에 소속됨.
  46. 상하 대마도(上下對馬島)와 일기도(一岐島) 등지에 근거지를 둔 왜구. 이 지역은 일본의 왜구가 가장 심하게 발호(跋扈)하던 곳임.
  47. 함흥(咸興)
  48. 춘추 전국(春秋戰國)시대 노(魯)나라의 대부(大夫). 맹자의 제자.
  49. 구관(九官)의 하나. 형정(刑政)을 맡음.
  50. 순(舜)의 아버지
  51. 승니(僧尼)나 무격(巫覡)·복자(卜者)에게 특별히 주던 토지
  52. 백성을 감화시키는 교육
  53. 판지(判旨)를 받음. 몽고가 고려를 지배할 때 교지(敎旨)를 판지(判旨)로 바꾸었으므로, 곧 교지(敎旨)를 받는 것을 말함. 수교(受敎).
  54. 일죄(一罪)에 해당하는 십악(十惡) 이외의 경죄(輕罪)로서, 상사(常赦)에서 용서되었음
  55. 금성(金星)
  56. 관에서 파견하는 관리
  57. 특지(特旨)를 내림
  58. 한(漢)나라 때 흉노(匈奴)의 한 부족. 중국과 인접하여 다른 흉노족보다 중국에 향화(向化)한 일이 많음.
  59. 한(漢)나라의 북방 요새. 오원군(五原郡) 유류새(楡柳塞)를 말하는데, 오늘날의 수원성(綏遠省) 오원현(五原縣)에 있음.
  60. 흉노(匈奴)의 추장. 흉노 추장 묵특(冒頓)의 후손. 전조인(前趙人). 자는 원해(元海), 시호는 광문(光文). 대선우(大單于)가 되어 한왕(漢王)이라 모칭(冒稱)하고 진(晉)나라 회제(懷帝) 영가(永嘉) 2년에 포자(蒲子)에 도읍함.
  61. 흉노의 추장. 유연(劉淵)의 네째 아들. 자는 현명(玄明), 시호는 소무(昭武). 전조인(前趙人). 영가(永嘉) 4년에 낙양(洛陽)을 함락하여 회제(懷帝)를 사로잡은 소위 영가(永嘉)의 난(亂)을 일으켰음.
  62.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63. 엽관 운동(獵官運動). 벼슬을 얻기 위하여 권세 있는 집을 분주하게 찾아다니던 일. 조선조 때 와서 분경 금지법(奔競禁止法)을 법제화하였음.
  64. 순임금 신하
  65. 주(周)나라의 임금. 문왕(文王)의 아들. 이름은 발(發). 여상(呂尙)을 태사(太師)로 삼아 아우 주공단(周公旦)과 더불어 은(殷)의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주(周) 왕조를 창건함.
  66. 총애(寵愛)를 받는 신하나 비빈(妃嬪)이 임금에게 사적으로 청탁(請託)을 행하던 일. 청알(請謁).
  67. 성하고 참. 즉 재상의 즉위.
  68.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공신(功臣). 강소성(江蘇省) 출신. 군량(軍糧) 보급에 큰 공을 세우고, 진(秦)나라의 번거로운 법을 폐지하고 율구장(律九章)을 실시함. 장양(長良)·한신(韓信)과 더불어 한나라 창업(創業)의 3걸(三傑).
  69.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명신(名臣). 자는 자방(子房). 한(韓)나라의 세족(世族)으로 유방(劉邦)을 도와 천하를 통일함. 뒤에 유후(留侯)에 봉해졌으나 은거 생활을 하였음.
  70. 공민왕(恭愍王)
  71.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72. 공양왕(恭讓王)
  73. 후한(後漢) 때 궁중(宮中)에 높이 쌓은 대(臺).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영평(永平) 3년에 광무제(光武帝)의 공신(功臣) 28인을 그려 이곳에 봉안(奉安)하였음.
  74. 요(堯)임금이 화봉(華封:지금의 용계현(龍溪縣) 서북) 지방을 순행하였을 때, 화봉인(華封人)이 요임금의 덕을 찬양하여, ‘성인(聖人)은 수(壽)하시고, 성인은 부(富)하시고, 성인은 다남(多男)하시라.’고 축복하였다는 고사(故事). 화봉 삼축(華封三祝).
  75. 죽어서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 것. 《좌전(左傳)》에 의하면, 위무자(魏武子)의 아들 위과(魏顆)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서모(庶母)를 순사(殉死)시키지 않고 재혼(再婚)을 시켰는데, 그후 싸움터에서 위과가 진(秦)나라 역사(力士) 두회(杜回)와 맞싸울 때, 서모의 아버지 혼이 나타나서 풀을 잡아매어, 두회로 하여금 넘어져 쓰러지게 하여, 위과가 생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고사(故事).
  76. 임금과 신하가 조회하는 곳에 세우는 병풍.
  77. 황하(黃河)가 띠 같이 되고 태산(泰山)이 숫돌 같이 되도록 변하지 않는다는 뜻
  78. 고신(告身)
  79. 가장 무거운 중죄(重罪). 십악(十惡)에 해당되는 죄로 사유(赦宥)에서 제외되었음.
  80. 은(殷)나라 첫 임금. 본명은 이(履) 또는 천공(天工). 하(夏)의 걸왕(桀王)을 쫓아내고 천자(天子)의 자리에 오름. 탕왕(湯王).
  81. 매달 여섯 번씩 백관(百官)이 모여 조회(朝會)하여 임금에게 정무(政務)를 아뢰던 일. 고려 때에는 초1일·초5일·11일·15일·21일·25일이었으나, 조선조 때에는 초1일·초6일·11일·16일·21일·26일이었음. 조참일(朝參日).
  82. 가(可)한 것은 들이고 불가(不可)한 것은 버린다는 뜻.
  83. 조선조 초엽에 민간의 이병(利病)·수령의 득실(得失)·향리의 횡포·사신(使臣)의 사물(私物)을 직접 조사하기 위하여 각도로 보내던 사헌부(司憲府)의 감찰.
  84. 향리(鄕吏)
  85. 이화(李和)
  86. 여말 선초에 승여(乘輿)를 맡아보던 관아. 사복시(司僕寺) 이외에 따로 궁중에 두었음.
  87. 각도 절제사(節制使)의 군영(軍營).
  88. 궁궐의 숙위(宿衛)와 근시(近侍)를 맡아보던 관원. 고려 때는 사순(司楯)·사의(司衣)·사이(司彝)·내시(內侍)·다방(茶房)·우달치(迂達赤)·속고치(速古赤) 등이었으나, 조선조에 들어와 내금위(內禁衛)·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충순위(忠順衛)·별시위(別侍衛) 등에 소속되었음.
  89. 헌사(憲司)의 상소(上疏)에 대하여, 임금이 비답(批答)을 다시 수정하여 내리던 일. 개하(改下).
  90. 삼망(三望)을 거치지 않고 관원을 임명하던 제도.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에서 당하관(堂下官)을 임명할 때 이러한 방법을 썼음. 여기에서는 관원을 복직시킬 때를 말함.
  91. 중국 은(殷)나라 때의 명상(名相). 은(殷)나라의 탕왕(湯王)을 보필하여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선정(善政)을 베풀었음.
  92. 중국 은(殷)나라 고종(高宗) 때의 재상. 토목 공사(土木工事)의 일꾼이었는데, 재상으로 등용되어 은나라 중흥(中興)의 대업(大業)을 이룩하였음.
  93. 임금
  94. 중국 전국(戰國) 시대의 학자. 공자(孔子)의 손자. 이름은 급(伋), 자사(子思)는 자(字)임. 증자(曾子)의 제자이며 맹자(孟子)의 스승.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을 내세우고 《중용(中庸)》을 지었다고 함.
  95. 태조의 딸.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소생.
  96. 태조의 사위. 무인년에 죽음.
  97. 신하가 임금에게 밀계(密啓)할 일이 있을 때, 소장의 내용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봉(封)하는 일.
  98. 즐겁게 놀아나는 것.
  99. 주공(周公)이 참소를 당하여 동쪽에 은거할 때, 하늘에서 바람이 크게 불어 벼가 모두 쏠리고 나무가 뽑히었는데, 성왕(成王)이 금등(金藤)의 글을 보고 깨달아서, 다시 주공(周公)을 맞아오니, 하늘이 바람을 돌이켜 벼가 모두 일어났다는 고사(故事).
  100. 송(宋)나라 경공(景公) 때 형혹성(熒惑星)이 심성(心星)을 범(犯)하였으므로, 자위(子韋)에게 그 연고를 물으니, 자위가 말하기를,"화(禍)가 임금에게 당합니다. 그러나 재상에게 옮길 수 있습니다." 하니, 경공이 말하기를,"재상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다." 하매, 자위가 말하기를,"백성에게 옮길 수 있습니다." 하니, 경공이 말하기를,"백성이 없으면 누구를 위해 임금노릇하겠는가?" 하매, 자위가 말하기를,"다음 해에 옮길 수 있습니다." 하니, 경공이 말하기를"흉년이 들면 백성이 굶어 죽을 것이니, 임금으로서 백성을 죽이면 누가 나더러 임금이라 하겠는가!" 하고, 세 번이나 모두 거절하였는데, 이 말이 있자, 형혹성이 3사(舍)를 옮겨 물러났다는 고사(故事).
  101. 유렵(遊獵)
  102. 제기의 하나. 마른 제물을 담음.
  103. 위(魏)나라의 문후(文侯)가 우인(虞人)과 더불어 사냥하기로 약속하였는데, 그날 마침 비가 몹시 내리니, 좌우에서 만류하였으나, 문후가 말하기를,"내가 우인(虞人)과 약속하였으니, 어찌 약속한 대로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약속대로 갔다는 고사(故事).
  104. 진(秦)나라 효공(孝公)이 상앙(商鞅)의 개혁안(改革案)을 채용할 때, 백성들이 법을 믿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도성(都城)의 남문(南門)에 세워 놓고, 백성들에게 이것을 북문(北門)으로 옮기는 자가 있으면 50금(金)을 주겠다고 선포하였는데, 한 사람이 옮기는 자가 있으므로 곧 50금을 주었다는 고사(故事).
  105. 금(金)으로 만든 부처.
  106. 나라의 법률 조례를 상정(詳定)하는 기관. 3방(房)으로 나누어 일을 처리하였으며, 판사(判事) 7인, 속관(屬官) 9명을 두었음.
  107. 조선조 태조 6년에 명(明)나라에서 표전문(表箋文)을 문제 삼았을 때, 정총(鄭摠)과 김약항(金若恒)은 그 책임을 지고 명 태조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고, 조서(曹庶)·오진(吳眞)·곽해룡(郭海龍)도 이때 명에 가서 억류되었음.
  108. 상고대의 일종
  109. 위구르(uigur)
  110. 설손(偰遜)
  111. 중국 춘추 전국(春秋戰國) 시대 노(魯)나라의 학자. 자는 자여(字輿), 공자의 제자임.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그 손자 자사(子思)에게 전하였음. 높여 증자(曾子)라고 함.
  112. 공자(孔子)
  113. 이백경(李伯卿)
  114. 매를 놓아 사냥할 수 있는 패(牌). 일종의 허가증.
  115. 한성(漢城)
  116. 개성(開城)
  117. 해마다 6월과 섣달에 이조와 병조에서 관리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벼슬을 올리거나 내리던 일. 도목 정사(都目政事).
  118. 도성문
  119. 도목 정사(都目政事)를 하기 위하여 관리의 근무 성적을 기록한 장부
  120. 살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