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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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구 씨에게는 약혼한 처녀가 있으며…….”

“최성구 씨는 혼인 문제 때문에 약혼자의 고향인 T군으로 내려갔으니 …….”

이러한 편지를 처음으로 받았을 때는 정희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성구와 근 일 년을 교제(라 할까?)를 하는 동안에 정희는 성구에게서 그댓 이야기는 듣지는 못한 - 뿐만 아니라 정희에게는 어떠한 여자와 혼약을 한 사내가 근 일 년이나 다른 여자(정희 자기)와 교제를 하면서 한번도 혼약한 여자를 찾아가 보지도 않는다는 것은 믿지 못할 일이었다. 만약 그 편지에 있는 말 이 사실이라 하면, 성구는 그 근 일 년 동안에(설혹 찾아는 못 갔다 할지라도)한마디의 한숨이라도 지었을 것이었다. 근심과 비련의 눈물이라도 지었을 것이었다. 극도로 이기적으로 - 자기와 성구의 사이의 사랑이며 자기의 쉬는 조그만 한숨이며 엷은 웃음에까지 차디찬 이 지적 해부안(解剖眼)을 던지느니만치 - 이기적으로 생긴 정희 자기의 눈에(만약 성구에게 그런 행동이 있기만 하였더라면) 벗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변변치 않게…….”

얼마를 더 양보하여 약혼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약혼자는 사실 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지금은 친척이며 재산이며 아무것도 없는 성구지만, 구한국 시대의 방백 자리로 돌아다니던 사람의 종자인 그인지라, 혹은 부모끼리 술김에 약혼이라도 한 계집애가 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러 나 그것은 존재와 부존재를 구별할 필요까지 없는 귀찮은 일이다. 일만 명 의 약혼자가 있으면 무엇하나.

성구가 T군을 잠깐 다녀오겠다고 내려갈 때에 정희가 무엇하러 가느냐고 물으매, 그는 그때에 그저 웃고 버리고 말았다.

성구가 내려간 뒤 사오 일 지나서 정희는 그 괴상한 편지를 받았다. 성구가 다만 웃어 버리던 그 여행의 목적에 대한 구체적 설명에 가까운 것이 그 편지에 있기는 있었다. 이런 편지를 받는 것이 좀 불쾌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정희의 머리를 지배할 만치 큰 문제는 못되었다. 혹은 파혼하러 갔을 지도 모를 일이니까…….

한 사나흘 걸릴 줄 알았던 성구의 여행은 의외로 길어졌다. 한 주일이 지 나서 열흘이 되어도 성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성구의 여행이 뜻밖에 길게 됨을 따라 정희의 머리에는 차차 검은 구름이 덮이기 시작하였다. 웬일일까? 파혼하러 갔을 성구 이매 문제가 좀 어렵게 되었나 그러나 문제가 ? 어렵게 되는 것 같은 것은 걱정이 없다. 그에게 무서운 것은 성구의 성격으로써 짜낸 지금의 경우였다. 만약 시인이 되었더면 불세출의 시인이 될지도 모를 만치 열정적 성격의 주인인 성구이며…… 정희의 걱정은 여기 있었다.

상대자와 접촉하는 순간 인스피레이션 그것으로써 그 상대자의 전인격을 추정하며 그 추정뿐으로 그 사람에 대한 관념을 지으려 하는 성구인지라, 그 소위 약혼자라는 계집애가 성구의 첫눈에 어떻게 보였든지, 만약 첫눈에 ‘마음에 드는 계집애로다’고만 박혔을 것 같으면 거기 정희가 저퍼할 만 한 사건이 생겨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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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희의 근심이 마침내 실현될 때는, 정희는 과히 놀라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정희는 그때 ‘용부(勇婦)파틸리샨의 전기(傳記)’를 읽고 있 었다. T군에 친언니와 같이 사괴던 친구가 있었으므로, 거기 성구의 일을 조사하여 달라고 편지를 하였던 그 화답이 정희가 파틸리샨의 전기를 읽을 때에 이르렀다.

그때에 파틸리샨은 에집트에서 외로이 병든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로 코자 황망히 고국을 떠났다.

‘파틸리샨도 여인이다. 그의 눈에도 따뜻한 눈물이 무론 있었을 것이다.’ 정희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페이지에 종이를 끼우고 책을 접은 뒤에 고즈너기 편지 봉을 뜯었다.

정희는, 까딱 안 하고 그 편지를 다 읽었다. 그러고는 다시 파틸리샨 전(傳)을 폈다. 온갖 파란과 모험으로 눈이 뒤집힐 듯한 파틸리샨의 항해(航海)이야기도 한 줄기의 얽힘이 없어 정희의 머리에 들어박혔다. 정희의 머리는 편지 때문에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파틸리샨은 에집트의 어느 해안에 닿았다. 파틸리샨은 사랑하는 사람의 병 들어 누워 있는 곳을 찾아갔다. 여위고 쇠약한 ‘그’는 해안 어느 조그만 오막살이에 토인 계집애의 간호로써 고즈너기 누워 있다. ‘그’는 파틸리 샨을 보고 적적한 웃음을 웃었다. 파틸리샨도 고즈너기 웃었다. 그리고 애인의 앞에 가까이 가서 꿇어앉았다.

“파틸리샨, 나는 당신이 오늘은 오실 줄 알았소이다.”

“어떻게요?”

‘그’는 힐긋 토인 소녀를 보았다. 파틸리샨도 소녀를 보았다. 파틸리샨 의 눈에는 약간한 의심의 빛이 있었다.

“이 계집애는 대체 누구예요?”

“파틸리샨, 그 소녀에게 감사의 하례를 드려 주. 앓아 죽어 가는 몇 달 동안 나의 유일의 생명이고 넋이었던 그 소녀에게 -.”

파틸리샨은 다시 한 번 힐긋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두려운 듯이 ‘그’의 팔에 자기의 손을 얹으며 머리를 숙여 버렸다.

“저는 당신 때문에 제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수백의 생령을 고국에 내버려두고 왔습니다. 물길과 뭍길에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도 파리하고 여윈 당신을 보고 싶기 때문에 참고 왔습니다. 그런데 - 그런데,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이 검붉은 계집애의 팔에 붙안겨서 이 파틸리샨 같은 계집은 생각도 안 하셨겠지요.”

“파틸리샨!”

“단정코 그래요.”

파틸리샨은 벌떡 일어서면서 소녀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파틸리샨!”

파틸리샨은 대답도 안 하고…….

정희는 책을 접어 버리고 말았다.

‘시기’라는 죄악이라 하여도 과하지 않은, 더러운 감정을 그는 파틸리샨 에게서도 발견하였다.

정희는 책을 제자리에 넣은 뒤에 T군 친구의 편지를 서랍 속에 넣고 일어 나서 아버지의 서재로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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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얼굴빛이 좋지 못하구나?”

학자인 정희의 아버지는 서재에 들어오는 딸을 보고 무슨 통계표인 듯한 종이를 밀어 놓으며 빙긋 웃었다.

무론 정희는 아까 그 편지 때문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은 하였다. 그러나, 좋지 못하게 된 얼굴빛은 또한 감출 수가 없었다. 정희는 고즈너기 아버지의 앞에 앉았다.

“아버지.”

“왜 그러냐.”

“전, 남영식(南永埴)씨와 결혼하겠습니다.”

“호호! 그럼 최성구는 어쩔 작정이냐?”

“그만두지요. 아직 구체적인 혼약이니 무엇이니는 안 했으니깐요.”

“네 소견대로 해라. 나는 아무 간섭도 안 하랸다. 젊은 것들은 좀 하면 간섭이니 무엇이니 하기에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간섭은 안 하마. 그 대신 -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이 뒤에 책임도 지지 않는다, 하하하하!”

정희는 할 말이 다 성립되었으므로 다시 일어서려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다시 그를 찾았다 -.

“그런데 너 성구와 무슨 조그만 감정 문제로 그러지 않니? 혼인은 일생의 대사라 그런 조그만 감정으로 좌우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

정희는 이 한마디뿐으로 아버지의 질문에 대답하였거니 하였다. 사실이 한 마디는 ‘아버지 내가 그런 천박한 계집애로 아십니까’ 하는 뜻을 넉넉히 나타내었다.

아버지는 다시 통계표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머리는 그 통계표로 향한 채로 다시 찾았다 -.

“성구도 지금 T군에 가 있다지?”

“네.”

“네 혼약은 성구가 돌아오기 전에 맺구 싶으냐, 돌아온 뒤에 맺자느냐?”

“일을 급히 하면 며칠이나 걸릴까요?”

“남영식이는 밤낮 조르고 있으니깐 내일이라도 될 수 있지.”

“급히 해주세요.”

아버지의 눈은 통계표에서 떠났다.

“그렇게 급하냐?”

“…….”

“일에는 도리라는 것이 있지 않냐? 내 의견으로 말하면 무론 성구보다는 영식이가네 서방 재료로는 낫다. 찬성은 하지만 - 아직껏 그리 좋아하던 성구를 내버리고 그렇게 싫어하던 영식이에게 가겠다는 네 마음을 알 수 없 다. 일시적 감정이 아니냐? 내 의견으로는 성구가 T군에서 돌아온 뒤에 다 시 한 번 만나 보고 일을 처결하는 것이 옳을 듯 싶다.”

“…….”

“꼭 빨리 해야겠느냐?”

“네.”

정희는, 모깃소리만 한 소리로 대답하고 그만 그 자리에 쓰러졌다. 파틸리 샨의 시기를 더럽다 한 정희의 가슴에도 시기라 할 수밖에 없는 어떤 불꽃이 타오는 것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아직껏 감추고 누르고 삭이려던 모든 감정은 일시에 그의 마음에 터져 올랐다. 꺾어지고 부스러진 자존심과 거기 대한 복수에 가까운 무겁고 맹렬한 감정은 그의 마음에 일어섰다. 아직껏 그리 싫어하던 영식에게 갑자기 혼인을 허락하게 마음이 변한 것도 여기서 나온 것이었었다.

얘 정희야 울 만한 “ , 일이 있으면 울어라. 죽을 일이 있으면 자살이라도 해라. 결코 간섭 안 하마. 그 대신 소위 사후 승낙 - 아니 사후 설명이란 것이 있지 않니? 영식이와의 혼약도 인젠 성립된 것과 마찬가지이니 사유를 설명해라. 성구와는 어떤 까닭으로 떨어지게 됐는지, 영식이와 결혼하겠다는 까닭은 무엇인지, 그 연유며 이유를 설명해 봐라.”

정희는 펄떡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들었다. 이게 무슨 광태냐. 그래도 정희라고 하던 계집애가 세상 보통의 계집애들과 같이 울며불며, 이런 광태가 어디 있나. 그는 눈물을 얼른 씻고 일어나 앉았다.

“별로이 설명할 일은 없어요. 그저…….”

아버지는 종내 통계표를 집어서 서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정희의 편으로 돌아앉았다.

“너 성구한테 버리우지 않았니?”

“…….”

“버리웠구나.”

“아니예요.”

“아니가 아니다. 버리웠다. 자, 사유를 설명해라.”

정희는 힐긋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노여움으로 불 겋게 되었다. 버림받은, 사랑하는 가련한 딸 정희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은 선독과 같이 붉게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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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박한 자식!”

정희에게 설명을 듣고 T군에서 온 편지까지 본 뒤에 아버지는 토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경박한 자식의 일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너는 꼭 시집을 가야겠냐? 안 가고는 못 견디겠냐? 나는 아무리 해도 네가 영식이에게 가겠다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일시적 감정으로 네가 제일 싫어하던 사람에게로 간다는 것이 한 복수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러지 않냐?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네 잘못 생각이로다. 결혼은 일생의 대사다. 응, 일생의 대사야.”

정희는 걸핏 남영식을 생각하여 보았다. 영식은 그리 미남자라 할 수는 없 지만 어디 내어놓아도 뻐젓하니 지낼 만한 풍채는 가진 사람이었다. 대단히 침착하고 점잖은 사람이었었다. 예수교인은 아니지만, 진실한 예수교인에게 뒤지지 않을 만치 신실한 사람이었었다. 재산가이었었다. 실업가이었었다.

훌륭한 인격자이었었다. 그리 웃는 때는 적지만 대단한 호인이었다. 그리고 - 남편 감으로는 세상에 드문 사람이었었다.

자기는 아직껏 왜 영식이를 그렇게 싫어하였나? 싫어할 점이 어디 있나?

자기가 영식이를 그렇게 싫어한, 다만 한 가지의 이유는 영식이는 성구와 정반대(어떤 점으로 보든지)의 사람이라 하는 점이었다. 좋아하려면 못 할 일은 아닌 것이다. 억지로, 억지로, 정희는 이렇게 마음먹고 머리를 아버지 에게 돌렸다 -.

“아버지, 영식 씨를 저 - 애인과 같이 대접할 수는 없지만, 그 지아버니로 존경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다른 점보다도 - 점잖고 신실한 인격자에게…….”

아버지는 벙글 웃었다 -.

“네 성격에는 영식이가 맞겠지. 그러나 작정은 안 하겠다. 결혼은 일생의 대사야. 너두 좀 더 생각해 봐라. 더 생각해 봐 가지고 다시 작정하자. 급히 작정했다가는 이후에 마음이 변하게 되었다는 어찌할 수 없잖니? 후회막급 - 그 너희들의 문자로는 뭣이라든가, 그, 저…….”

“더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아버지께서 생각해 보라시니 하룻밤 더 생각은 해보겠습니다만 생각해야 그것이예요.”

“하룻밤뿐? 너무 급행으로 하지 마라. 천천히, 천천히 - 너 저 담벼락에 써 붙인 내 표어를 봐라, 무에라구 썼나?”

정희는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올 때마다 보곤 하는 아버지의 표어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관찰(觀察), 해부(解剖), 심사(深思), 숙고 (熟考), 연후 착수( 然後着手)’

“내가 이십 년 이래로 지켜 내려온 것이 저 표어다. 절대로 실패찮고 후회할 일이 안 생기는 유일의 방법이 저 표어를 지키는 것이다. 더 생각해라. 혼인도 일생의 대사다.”

정희는 싱겁게 한번 웃은 뒤에 아버지의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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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에 정희와 남영식의 혼약은 성립되었다.

그 날 밤 정희는 자기 방에 들어박혀서, 자꾸 울고 있었다. 모든 아름답고 꽃다울 미래는 한나절의 꿈으로 스러져 버렸다.

남편을 존경할 수는 있지만 사랑할 수는 없는 아내와(짐작컨대) 아내를 귀애하며 존경하여 줄 줄은 알지만 사랑할 줄은 모를 남편 - 그 두 사람 새에 혼약은 성립되었다. 봄날 꽃밭에서 지저귈 꾀꼬리를 생각하던 성희는 소나 무 위에 한가히 앉은 학을 보았다.

‘성구 씨, 성구 씨!’ 이런 밉고도 또한 그리운 이름이 어디 있을까?

“성구 씨!”

정희는 울면서 소리까지 내어 뇌어 보았다.

‘야, 성구야! 아이구 속상해! 성구 사람 살리려무나. 너 때문에 사람 죽는다.’ 정희는 이전에 성구와 자기 새에 왕복된 편지들을 쪽쪽 찢었다.

봄날의 짧은 밤은 꽤 깊었다. 그러나 정희는 자리도 펴지 않고 책상에 엎드린 대로 자꾸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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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낮에는 정희는 천연하다.

날이 지나자 얼굴은 차차 보이게 초췌하였었지만 남 보기에 그리 괴로워하는 듯하지는 않았다.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책임도 안 진다는 정희의 아버지는 아무 간섭도 안 하였다. 이것이 정희에게는 더욱 적적하였다. 아버지에게서 성구의 이야기라도 나오면 마음껏 성구를 욕을 하여 반어(反語)로라도 성구에게 대한 그리운 정을 토하여 보고 싶으나, 물 없는 곳에서 헤엄칠 수는 없었다. 정희 의 쓰리고 아픈 마음은 호소할 곳이 없었다.

어느 날 정희는 이전에, ‘파틸리샨은 대답을 안 하고’까지 읽고 내버려 두었던 파틸리샨 전(傳)이라도 좀 볼까 하고 책을 펼 때에, 아버지가 정희 의 방에 찾아왔다. 정희는 빨리 책을 접어 치웠다.

“또 소설 읽고 있었냐? 한데 누가 널 찾아왔더라.”

“누구예요?”

“최성구!”

정희는 눈이 아득하여졌다. 온몸의 피가 모두 얼굴로 모여드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정희는 허둥지둥 책상 귀에 의지하였다.

“만나 보기 싫으냐? 싫거든 내쫓아 버리지.”

“아니예요. 만나 보겠어요.”

“만나 봐? 그럼, 이 방으로 보내련?”

“네.”

아버지는 나갔다 아버지가. 나간 뒤에, 정희는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뒤에 치마 고름을 다시 매고 일어섰다.

성구가 들어왔다. 그러나, 이때는 벌써 정희는 마음의 동요를 다 눌렀을 때였다. 정희는, 조금 허리를 굽혀 보고,

“언제 올라오셨어요?”

물었다.

“이제 왔습니다.”

성구도 무론 혼약 사건을 알았을 것이었다. 정희에게 대한 차디찬 태도는 그것을 증명하였다.

둘은 먹먹히 서 있었다. 그러나 좀 뒤에 성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좌우간 앉으시지요.”

“참, 앉으시지요.”

정희는 성구에게 자리를 가리키면서 앉았다. 둘은 역시 먹먹히 앉아 있었다. 정희는 자존심만 허락하였더면 이 자리에 쓰러져서 모든 사연을 다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실 성구가 이때를 당하여 정희를 찾아온 것은 타협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뜻함으로 해석하여도 과히 틀린 일은 아닐 것이었다.

성구도 역시 자존심과 다투는 듯이 먹먹히 앉아 있었으나 종내 입을 열었다 -.

“남영식 씨와 혼인을 하겠다지요?”

“네.”

정희는 꽤 큰 소리로 대답하였다.

“축하드립니다.”

마침내 정희의 감정은 자존심을 깨뜨렸다 -.

“네, 마치 성구 씨가 시골서 혼약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과연 항복의 제 일보였다. 이때에 만약 성구에게서 정희의 말을 인도할 무슨 한마디의 말이라도 떨어졌으면 정희는 온갖 것을 내어 던지고라도 다시 성구의 품으로 돌아왔을 것이었다.

성구의 입은 부들부들 떨렸다 -.

“축하드리지요.”

“네, 고맙게 받겠습니다.”

“기쁘겠습니다.”

“네, 기쁩니다.”

타협은 이리하여 깨어졌다.

잠깐 더 잠잠히 앉았던 성구는 모자를 집어 가지고 일어섰다. 그것을 힐긋 보고 정희는 책상 편으로 모른 체하고 돌아앉고 말았다.

성구의 나가는 문소리가 들렸다. 문은 열렸다 닫겼다. 그러나 닫겼던 문은 다시 열리고 성구의 성나서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

“나는 혼약 안 했어요. 아마 영구히 혼약이라는 것은 안 하겠지요.”

문은 다시 절컥 하니 닫기고 대문으로 나가는 성구의 발소리가 들렸다.

정희는 벌떡 하니 일어서서 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성구의 그림자는 대문 밖에 스러져 없어졌다. 정희는 맥없이 다시 문을 닫고, 자리에 돌아왔다. 쓰라린 눈물이 하염없이 그의 눈에서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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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에 K신보에 최삼덕(崔三德)이라는 서명으로 어떤 여성에게 대한 공 개장이 발표되었다. 정희는 그 최삼덕을 알았다. 그것은 최성구의 아명으로 서 정희와 서로 편지 거래를 할 때에 늘 쓰던 이름이었다.

그 공개장에는 자기는 얼마나 ‘그대’를 사랑하였는지, 그 정도 문제이며, 아직도 자기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말이며, 자기가 T군에서 좀 오래 묵어 있게 된 것은 한 조그만 호기심(호기심 이상이랄지도 모르나, 엄정한 의미로 볼 때는 호기심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다)에 지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쓰고 - 그러한 것을 경솔히도 이를 그르친 ‘그대’를 책망하는 글로 마쳤다. 그는 자기의 마음은 인제 한낱 원망으로 변하였다 하였다. 그는 여인의 영리한 듯한 좁은 마음이 밉다 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아아! 그러나 그때에 그대는 어떤 길을 취하였나? 그대는 나에게 반성할 여유라도 주었나? 반성할 만한 한마디 주의라도 하였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대는 사건의 경위라도 똑똑히 알아보았나? <약한 자여! 네 이름은 여인이라>고 한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너무 강하여 자기 힘에 넘어진 그대 여. 자기의 영리함을 과신하여 한 사람의 장래를 파괴한 그대여. 그대의 과 신 때문에 온전히 장래를 잃어버린 자기는 어느 날 어느 곳에 물론하고 자 기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대를 원망하고 미워하겠다.

나의 탄 기차는 지금 닫는다. 향한 곳은 어디? 그것은 나는 알 수 없다.

나의 마음은 다사로운 남쪽을 가리키되, 나의 다리는 머리를 가로젓고 북으로 북으로 향한다. 어디로? 무얼 하러? 상처받은 나의 마음은 더욱 찬 인정을 맛보아서 지금의 나의 마음을 얼마라도 위로하려 한없이 끝없이 북으로 간다.

일생은 길다. 세상은 좁다. 우리 둘이 이후, 어느 곳에서 어떤 경우 아래에 다시 만날지 그것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 아아, 이 이상 나는 무엇을 쓸까 나는 다만 ? 영구히 그대의 불행을 빌면서 이 붓을 놓는다. 운운.’ 그리고 그 날 신문 삼면란에는 조그맣게 ‘최성구 씨 실종’이라는 제목 아래, 최성구씨는 아무 유서나 전갈도 없이 실종되었단 기사가 있었다.

그 날 밤 정희는 열이 사십 도나 나서, 자리에 누워서 몹시 신음하였다.

의사는 독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독감이라고 간단히 설명할 병은 아니었다.

음식을 먹은 뒤에는 몇 분이 지나지 못하여 모두 도로 게웠다. 한 숟갈의 약을 먹고도 도로 토하였다. 헛소리까지 하였다. 밤에 그의 머리맡에서 그 머리를 짚어 보며 앉았던 그의 아버지는 머리맡에 놓인 신문을 보았다. 그리고 최삼덕의 공개장을 보았다.

이튿날 아침 정희가 조금 정신이 들어서 눈을 뜰 때에 아버지가 들어왔다.

“너 남영식이와 파혼하려?”

“네?”

“…….”

아버지는 물끄러미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싫으냐?”

“네?”

“남씨하고 파혼하고 싶으냐 말이다.”

정희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다.

“제가 개자식이야요? 이 사람과 파혼하고 저 사람하고 파혼하고…….”

“싫으면 그만두어라. 억지로 하라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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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나간 뒤에 정희는 아버지의 말을 다시 한 번 속으로 외어 보았다. 그것은 과연 어떤 뜻이었을까? 무엇을 뜻함이었을까?

그러나 정희의 열 때문에 어지럽게 된 머리로는 정돈된 생각은 할 수가 없 었다. 어떤 까닭으로 그런 말을 물었나?

그보다도 더 이상한 일은, 자기는 어떤 까닭으로 남씨와 파혼하겠느냐고 물을 때에, 첫마디로 거절하였나. 자기는 남씨에게 대하여 손톱눈만치도 사랑을 안 가지고 있지 않나? 한때는 남씨를 좋아하려고 마음을 먹어 보기는 하였으되, 그 성구의 센티멘탈한 공개장을 본 뒤에는 눈과 같이 그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나? 억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은 하나 자기의 마음속에는 역시 성구에게 대한 그리움이 불붙듯 타오르지 않나? 이제라도 성구가 두 팔을 벌리고 오기만 하면 자기는 모든 것을 내어던지고라도 그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나?

그런데 자기는 왜 남씨와 파혼하겠느냐고 할 때에 첫말로 거절하였나?

이 세상에 모든 일은 수수께끼다. 자기의 행하는 일까지 수수께끼다. 위 선? 자기는 결코 위선으로 그러지는 않았다. 자기가 파혼을 거절한 일은 다 만 돌발적 변태심리로밖에는 볼 수 없다.

정희는 괴로운 한숨을 한번 내어쉰 뒤에 돌아누웠다. 무겁고도 상쾌한 졸음이 그의 머리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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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東京)- 사흘 뒤에 정신이 좀 똑똑하여지며 괴로운 잠에서 깬 정희는 문득 동경을 생각하였다. 슬퍼하는 자백만과 기뻐하는 자백만, 춤추는 자백만과 통곡하는 자백만을 포용하고도 조금도 모(甬)를 보이지 않는 널따랗고 커다란 ‘동경’의 품을 그는 생각하였다. 남편 끝에서 수천 호가 타지는 큰 불이 있으되 북편 끝에서는(신문을 보기 전에는) 그것을 알지도 못 하느니만치 큰 동경, 활동사진관만 다 구경하려도 한 달의 날짜를 가지고야 하는 널따란 동경, 하루에 새로운 부부 수백 쌍과 새로운 독신자 수백 쌍을 내면서도 신문 기자까지도 그런 일은 눈떠 보지도 않느니만치 분주스런 동경.

- 그 가운데 있는 유-토피아 아사꾸사(천초(淺草))며 젊은이의 히비야(일비곡(日比谷)), 긴자(은좌(銀座)), 간다(신전(神田))의 낡은 책방, 더구나 지금이 한창일 야시의 금어(金魚)며 꽃 화분들 - 이것들은 모두 상처받은 쓰리라고 외로운 정희의 마음에는 봄 동산의 진달래와 같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활보하던 이태 전의 자기를, 그는 눈물 머금은 마음으로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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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뒤에 아버지가 자기의 방에 들어왔을 때, 정희는 다짜고짜로 동경을 가겠노라고 말하였다.

“동경? 무얼 하러?”

“몸두 좀 쉬이기 위해서…….”

아버지는 물끄러미 정희의 옷깃을 바라보았다.

“몸? 몸을 쉬이러 동경을 가?”

그런 뒤에 아버지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몸을 쉬이려? 마음을 쉬이려?”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맛더스 파이프를 꺼내어 담배를 붙여서 한참 뻐근뻐근 빨면서 가만히 있다가 또 입을 열었다.

“너 최성구 어디 있는지 아느냐?”

“몰라요.”

정희는 외마디로 대답하였으나, 이것뿐으로는 부족한 듯도 하고 혹은 어떻게 보면 모욕당한 것 같기도 하여 다시 한마디 보태었다.

“알 수 없어요. 알 필요도 없구…….”

“성구가 동경으로 간 듯싶지 않냐?”

“아버지…….”

정희는 벌컥 성을 내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생각하시구의심하시면 전 동경 그만두겠습니다. 몸을 쉬기 위해서는 동경 아니라두…….”

“얘, 정희야! 마음을 진정하고 생각해서 말해라. 내 말을 그렇게 해석할 바가 아니다. 가구 싶으면 가거라. 또 싫으면 그만 두어라 - 그것은 하여 간, 난 당초에 네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남영식이와 혼약을 한 것도 네가 한 일이고 결혼 날짜를 정한 것도 네가 한 일이 아니냐? 너도 아는바 결혼 날까지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동경을 가겠다는 것은 결혼을 연기하겠다는 뜻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지 않느냐? 최성구가 네 서방이 되거나 남영식이가네 서방이 되거나, 네가 서방을 오늘 맞거나 십 년 뒤에 맞거나, 그런 것은 나는 도무지 모른다. 모르나 - 그, 저…….”

아버지는 벌떡 일어서서 방안을 거닐기 시작하였다.

“가고 싶으면 오늘 저녁으로라도 가라. 그러나 남씨한테는 무에라고 말해 두랴느냐?”

“…….”

“어디 대답해 봐라.”

“무에랄 것 없지요. 건강만 회복되면 곧 돌아온다고 그래 두면 그뿐이지요.”

아버지는 숨을 한번 길게 내어 쉬었다.

🙝 🙟

정희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딸과 연구와 담배 - 이 세 가지 밖에는 이 세상에 아무 오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 늙은 아버지, 아버지의 얼굴은 외로웠다. 자기의 다만 하나의 혈속(血屬)인 정희에게서까지 마음을 열어 헤친 사정을 듣지 못한 아버지의 얼굴은 외로웠다.

정희는 머리를 숙였다.

“아버지 내 마음을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버지두 말씀하신 바같이 남씨와 혼약을 한 것은 사실 - 돌발적-거시기 - 그 무에라고 설명 할지는 모르지만 말하자만 돌발적 심리예요. 그러나 저는 넉넉히 남씨를 남편으로 공경할 만한 자신이 있습니다. 소위 사랑은 없다 할지 모르나 믿음과 공경은 넉넉히 바칠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부 생활에는 그 서로 믿는 마음과 서로 공경하는 마음이 무엇보다도 귀한 줄 압니다. 철없는 연애 니 무엇이니 하는 것보다 건전한 믿음이 오히려 부부 생활의 기초를 굳게 하는 것인 줄 압니다. 누가 무에라든 저는 남씨와 혼약한 계집애예요. 이번에 갑자기 동경을 가겠다는 것도…….”

정희는 말을 끊었다. 하마터면 또 거짓말이 그의 입에서 흐를 뻔하였다.

“한 일 년 동안 동경 가서 좀 편안히 쉬려고 했어요. 그래도 아버지가 그만두라시면 그만두겠습니다. 어저께는 몹시도 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 마음도 좀 적어졌고…….”

아버지는 담배를 털었다.

“누가 가지 말라느냐? 그저 네 마음대로 해라. 나는 전에도 네 자유를 조금도 구속치 않거니와 장래에도 그럴 마음이 없다.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그만두고 -.”

“그리 갈 생각도 없어요.”

“싫으면 그만둘 뿐이지.”

아버지는 간단히 결론하였다.

🙝 🙟

그러나 한 주일쯤 뒤에 정희는 동경 땅을 밟게 되었다. 이번의 정희의 동경행에 극력으로 찬성을 한 사람은 정희의 약혼자인 남영식이었다. 무슨 까닭으로? 별로이 이유는 없었다. 다만 동경이란 곳은 웬만한 슬픔이며 근심은 저절로 사라지는 곳이라는 남영식 자기의 경험에서 나온 결론의 결과였었다.

동경은 정희가 있던 이태 전보다도 온전히 달라졌다. 시가의 변화, 습관의 변화는 둘째 두고 전차 선로 계통의 변경에는 정희는 적지 않은 괴로움을 받았다.

여름 방학 때로서 귀국한 학생이 많은 때라 어렵지 않게 하숙 하나를 얻은 정희는 그 날 밤으로 아사꾸나(천초(淺草))로 뛰어가서 활동사진관에 뛰쳐 들어갔다.

귀국한 뒤에 한번도 활동사진이라고는 가보지 못한 정희는 여기서 삼사 년 전의 소녀 시대의 자기를 발견한 듯하였다. 시끄럽고 답답한 숙녀 생활을 이태나 하던 정희는, 여기서 다시 한 학생인 자기를 발견하였다.

‘니꼬니꼬 대회(ニコニコ大會)’였었다. 한 칠팔 년 전에 전기관(電氣館)에서 그때의 유행 광대이던 채플린이며 소위 ‘데부군(テブ君= 뚱뚱보)’이며 이런 광대들의 희극을 몇이 모아 가지고 희극대회를 열 때에 붙인 이 ‘니꼬니꼬 대회’라는 이름은 명칭 그것뿐으로도 정희의 마음을 매우 젊게 하였다.

“벙글벙글 대회?’ 정희는 한번 그 말을 번역하여 외어 보고 스스로 씩 웃었다. 광대들은 정희의 온전히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하롤드 로이드, 찰스레이, 더글러스 - 희극의 취미며 플롯도 그 당시와는 온전히 달라졌다. 채플린의 희극 방식이 아직 좀 남아 있는 흔적이 보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변하였다. 진화(進化)?, 퇴화(退化)? 이것은 활동사진이란 것의 정의(定義)를 두기에 따라서 진화로도 볼 수 있고 퇴화로도 볼 수 있지만 그런 어려운 문제는 둘째로 두고 정희는 이 대단한 변화에 일종의 애수와 함께 일종의 즐거움을 얻었다.

‘역시 동경은 좋다.’ 돌아오는 길에 터질 듯이 좁은 전차에 끼여서 빛나는 거리거리를 꿈결같이 내다보면서 정희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 🙟

이튿날 그는 모교(母校)를 찾아가 보려 하였다. 자기보다 삼 년 아래급이 던 자기를 극진히도 따르던 S며 K의 앞에 한 개 레이디인 자기를 발표하여 보겠다는 것도 정희의 조그만 자과심(自誇心)의 하나이지만, 그보다도 그는 자기가 사오 년 동안을 고생하던 기숙사며 교사며도 볼 겸 자기를 사랑 혹은 미워하던 선생들에게 한번 가서 머리를 숙이고 인사를 드려보겠다는 이 상한 충동 때문이었다.

조반을 먹은 정희는 곧 전차를 타고 백금대정(白金臺町)까지 왔다. 오른쪽으로 꺾어져서 언덕을 하나 내려서면 그의 정다운 모교가 있는 곳이었다.

그의 가슴은 뛰놀았다. 그는 다리가 허둥허둥 길다란 언덕을 내려서 또 왼쪽으로 꺾어졌다. 거기가 그의 모교였다. 무성한 아카시아 틈으로 정희는 때때로 펄럭이는 남빛과 자줏빛을 보았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리며 풋볼이 떠올랐다. 수백의 장래의 레이디들의 깩깩거리는 즐거운 웃음 소리가 들렸다. ‘아라(アラ)’ ‘이야(イヤ)’ ‘아레에(アしエ)’ ‘하하하하’ 울려 나오는 이런 소리들은 모두 환락의 음악이었다.

그 길에는 사람도 적었다. 정희는 아카시아 담장 쪽으로 곁눈질을 하면서 대문 있는 편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대문 앞까지 이른 정희는 문득 더욱 걸음을 빨리하여 곁눈질도 안 하고 도망하듯이 대문을 거저 지나가 버렸다. ‘누가 나를 보지나 않았을까?’하는 걱정과 ‘누가 보았으면’하는 바람의 생각이 그의 마음을 눌렀다.

정희는 그 학교를 썩 지나가서 몰래 학교쪽을 돌아다 보았다. 무성한 포플러-등 수풀 - 그 가운데는 정희 자기가 심은 나무도 있을 것이었다. 자기가 기대고 책을 보던 나무, 또는 자기가 숭배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칼로 새긴 나무도 있을 것이었다. 정희는 머리를 수그리고 빨리 담장을 돌아서 다시 전차길로 향하였다. 마침 운동시간이 끝났는지 교실에서 땡땡 울리는 종 소리가 들렸다.

그 날 밤 정희는 자리에 누워서 울었다. 다시 한번 추억한 뒤에 눈물로써 장사하려던 ‘과거’는 그의 모르는 틈에 그의 곁을 빠져 지나가버렸다. 그 꽃동산과 같은 아름다운 클럽에 자기는 참가할 자격은 둘째 두고 참가할 용기까지 없는 할머니였다. 도망하지 않을 수 없느니만치 그것을 오히려 두려워하는 늙은 자기였다.

이틀 뒤 일요일에 정희는 그 모교 생도이며 자기를 퍽 따르던 S를 미쓰코시(삼월(三越))에서 만났다. 그러나 정희는 그를 피하였다. S도 정희를 몰라보는 듯하였다.

‘과거’는 역시 멀리서 바라볼 것이었다. 가까이서 그것을 보려던 정희는 거기서 무정과 한숨밖에는 발견한 것이 없었다.

🙝 🙟

어떤 날 밤, 긴자의 밝은 거리를 돌아다니던 정희는 거기서 문득 같은 해에 한 학교를 졸업한 A라 하는 여편네를 만났다.

“아라(아-)!”

“아라!”

둘의 눈은 똑 마주쳤다. ‘아라’ 소리와 함께 든 손을 서로 잡았다.

“좌우간 잠깐 들어가서 이야기나 해요.”

A는 정희를 끌고 그 근처의 어떤 깨끗한 카페로 들어갔다.

“아이스크림!”

A는 웨이터에게 명령한 뒤에 맵시 나는 담배를 한 꼬치 꺼내어 붙여 물었다.

“A씨 담배를 잡수세요?”

정희는 놀라서 물었다.

“네, 정희씨는 아직?”

“망칙해!”

“잡솨봐요, 좋으니 - 좌우간 참 오래간만이구려.”

둘의 사이에는 여편네에게 상당히 오래간만에 만나는 인사가 사귀었다.

“자, 아이스크림 잡수세요. 그런데 정희씨 결혼하셨어요?”

정희는 대답없이 적적히 웃었다.

“응, 아직 안 했구먼. 안 했으면 이후에라도 아예 할 생각을 말아요. 참 귀찮어.”

“당신은 했어요?”

“했기에 말이지요. 참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에요.”

정희는 A를 자세히 보았다. A는 얼굴이며 그 사상까지 이태 전보다 다름이 없었다. ‘부인세계(婦人世界)’라는 잡지에서 지식을 흡수하는 그의 정도는 이태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난 이제라도 다시 이혼을 하고 독신이 될까 해요. 모든 일이 다 시끄럽고 귀찮고…….”

“난 이제 귀국해서 결혼할까 하는데요.”

“그만둬요. 필연코 후회할 테니 -.”

“왜?”

“모든 일이 다 시끄럽고 부자유고-.”

“A씨도 부자유예요?”

“부자유고 말고요.”

정희는 웃으면서 다시 A를 보았다. 그리고 그 ‘부자유’라는 것도 의미가 명료치 못한 - 다시 말하자면 ‘여인으로서의 자유’라는 것을 이해치 못하 고 잡지 등에서 본 바의 중상(重商)에 지나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보았다.

“난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유 부자유는 둘째 문제이고 결혼은 사람의 의무라고 -.”

“무에요?”

“의무에는 부자유가 섞일 테지요.”

“정희씨는 대단히 변했는데요.”

“변했지요?”

정희는 아이스크림을 한 술 떠먹었다.

“오래간만에 만나서 토론 그만둡시다. 좌우간 정희씨의 사상은 구식이에요.”

A는 쾌활히 웃었다.

“구식! 진리는 신구가 없어요.”

A는 놀란 듯이 정희를 보았다. 사실 오십 년 전 사상을 구사상이 아니라는 사람을 A는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정희씨, 그새 귀국해서 잡지 안보셨어요?”

“아니오.”

“그럼 무엇했어요?”

“연애!”

“네?”

A는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떴다.

“그 결과로 지금과 같은 결론을 얻었어요?”

“네, 그 결과 -.”

“그런 별한 결론을?”

“네.”

둘은 한꺼번에 크게 웃었다.

“오도로 이다(놀랐어)!”

“놀랐지요? A씨 나도 놀랐어요.”

사실 정희도 놀랐다. 한 달전- 아니 이십 분 전까지도 정희는 A와 같은 사상을 가진 여편네였다. 그것이 그 이야기하여 나아가는 중에 어느덧 아직껏 마음 속에 잠복하여 있던 새 생각이 머리를 든 것이었다.

“이봐요, A씨. 이 세상은 무섭고 강하고 쓰라려요. 우리가 이 세상을 농담으로 넘겨버리려면 모를 일이지만 경건한 삶을 살아가자면 - 마치 사람이 겨울의 찬바람을 막기 위해서 집을 지은 것과 같이 약한 여인에게는 굳센 그 지아버니라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소소하고 좀살스러운 일은 돌아 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또한 보조벽(補助壁)으로 마누라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강한 힘에 대한 보호벽(保護壁)인 남편과 소소한 데 대한 보조벽인 마누라가 서로 돕고 믿고 힘쓰고 하는 데서 생겨나는 사 랑 - 이것이 참 연애겠지요. 그 밖의 사랑은 아무런 것이든 연애라고 명명치 못할 것이에요. 젊은 남녀의 사랑 - 그런 것은 춘정(春情)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고 - A씨, 나는 얼마 뒤에 돌아가서 결혼해요. 그리고 그것이 내 의무고 권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 말이외다. 내 즐거움으로 생각합니 다.”

이것은 모두 정희의 참 마음에서 나온 말이지 결코 일시적 반항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한때의 흥분으로 떠올랐던 그의 마음이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그의 사상은 이만큼 변하였다.

A는 달갑지 않은 듯이 듣고 있다가 정희의 말이 끝나는 것을 기화로 보이를 불러서 포도주를 청하였다.

밤 열한 시쯤 그들은 카페를 나섰다. 작별할 때는 정희는 A에게서 한번 찾아오란 말과 자기는 삼사일 후에 머리를 깎아 버리겠단 말을 들었다.

정희는 하숙인 교회로 향하는 쓸쓸한 전차에 앉아서 A의 생각을 하면서, 그 얌전하고 사기 없고 쾌활하던 사랑스런 계집애를 이런 비속(卑俗)된 여인으로 변케한 ‘시대’라는 것을 밉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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