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독립의 당위성 외/중국경륜이 발단되어
나는 열아홉 살 때 서울로 올라왔다. 상투 틀고 갓 쓰고 행전을 치고, 보잘 것 없는 행색이 초췌한 한 시골 청년의 몸으로!
내가 서울로 올라오게 된 동기는 지금 회고하여 보아도 흥미가 있다. 나는 소년시대를 순전히 조부의 감화로 사상을 닦았다. 조부는 규신(圭信)이라하여 일종의 들에 있는 강개지사(慷慨之士)라 함이 적평이겠다. 그분의 사상은 중국을 치자’함이다.
중국은 우리 반도를 속국인 듯이 치부하고 모든 정치상 테제를 보낼뿐더러 사사건건 간섭하고 조공을 강요하며, 통상무역에 자기네 편 편리만 주장하는 등 우리 족속을 전통적으로 무시하여 왔다. 당당한 국가로서 이렇게 큰 모욕이 어디 있느냐 하여 몸소 중국 정토의 장문의 건의를 조정에 올릴 뿐 더러 뜻을 같이 하는 재야의 정객들과 서로 손을 맞잡고, 크게 일을 이루기 위하여 무슨 결사를 만들고 동분서주하고 계시었다. 그러다가 일이 아직 열매를 맺기 전 그 비밀이 탄로되어 평안도 영원(寧遠)이란 산 높고 골 깊은(山高谷深[산고곡심]) 무인지처(無人之処)로 정배 갔던 터이다.
그래서 울며 자손들과 갈라져 멀리 떠나신 조부는 그래도 생명만은 완전히 가지시고 몇 해 만에 돌아오셨다.
돌아오신 날 우리들이 동구 밖에 나가보니, 그리 좋던 풍채는 이미 간곳이 없고 이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주름살이 여러 가닥 흘렀으며 기력도 몹시 쇠하셨다. 우리들은 풀밭에서 소리 놓아 울었다.
그렇지만 조부께서 오직 한 가지 변하지 않으신 것은 흰 눈 속에서도 오히려 푸른 장송녹죽(長松綠竹:큰 소나무와 푸른 대)과 같은 그 기개였다. 그 사상이었다. 그 지조였다.
돌아오셔서도 지나(중국)를 어서 응징하여야 하시겠다는 계략과 생각을 조금도 버리시지 않았다.
그분의 서재에는 병서가 가득 쌓였다. 그리고 주판 살가지를 가지고 산학(수학)을 연구하셨다. 그때는 유치한 때였으니까 산학이라 하여도 지금과 같은 아라비아 숫자를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일이삼(一二三)하는 한문 글자를 가지고 가감승제의 4칙을 하셨다. 그 숫자를 기초삼아 축성법 등을 연구하셨으니 지금부터 33,4년 전에 그 분의 머리와 회포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연구와 사색에 여념이 없으시되 정부의 감시가 자못 심하여 사람과 더불어 의논하는(與人會議[여인회의]) 기회조차 별로 없으신 듯 했다 이렇게 불우한 감금생활을 . 하시는 터라, 조부께서는 흔히 맏손자 되는 나를 불러 세우고 중국과 조선의 근세사를 말씀하여주시며, 또 북정(北征)의 경륜이 결코 그릇된 국책이 아니란 말씀을 늘 들려주셨다.
십여 세밖에 아니 된 나이 어린 내가 그때에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었으랴만은 중국과 조선의 관계가 심절(深切)하여 어쨌든 중국에 대한 경륜이 막연하게나마 내 가슴에 떠올랐다.
이리하여 나는 조부의 감화로 이 산골구석에 묻혀 있을 때가 아니란 자각을 얻고 앞서 말한 고향 양평을 떠난 것이 열아홉 살 때였다.
서울에 와서는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여기에서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 뒤 수진방(청진동) 골에 세워진 흥화학당과 이 배재학당은 실로 근세 조선의 개화사 가운데 중요한 페이지를 차지할 것이니, 배재학당은 미국인 아펜젤러 씨가 창립한 것이고, 흥화학당은 미국공사로 가 있던 민영환 씨가 서양문명을 수입하여야 한다고 손수 창립한 학교이니, 후일 우리 사회의 동량이 된 다수의 인재가 그때 그곳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그 뒤 여러 가지 파란을 겪고, 동생 운홍이 아메리카로 가자 할 때에 나는 조부 때의 감화로 미국행을 중지하고 중국 상해로 갔던 것이다. 청년시대의 뜻을 품고 동경 오르던 전말은 대략 이와 같도다.
(─《삼천리》, 1933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