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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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前記)[편집]

  • 하고 싶던 말 ─ 하고 싶으면서도 못하던 말을 할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진실로 시원한 일이다.
  • 지난 옛날(惡夢時節이었다.) 역사 소설이나 史譚을 쓰고자 역사책을 뒤적이노라면, 모두가 눈에 거슬리는 소리뿐이었다. 漢籍을 보면 漢籍에는

支那人의 존대심 때문에. 東夷인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을 내려깍은 기록, 倭籍을 보면 倭籍 또한 無虎洞中의 삵 모양으로, 자기만을 추켜올린 기록, 韓籍을 보면 韓籍 역시 제 祖國보다 支那를 더 추앙하는 曲筆 기록.

  • 이러한 아래서 자라나는 우리의 자손들은, 자연히 스스로 자기를 경멸하고 남을 숭배하는 奴隸 관념이 생기게 될 것이다.
  • 箕子, 神功皇后, 天照大神, 聖東明은 모르지만, 子胥餘며 神功女만을 아는 우리 가련한 父老와 자제. 乙支文德의 위대함은 모를지언정 李世民의

强勇을 아는 우리의 가련한 형제들.

  • 祖先을 알리지 않으려는 日本人의 三六年의 敎育 精神은 오늘날 이런 병신의 조선을 만든 것이다.
  • 古史書를 펴볼 때마다 문득문득 가슴에 엉기던 분노─ 日本人이 諱之秘之하여(日本人에게까지도) 감추려던 日本史上 비밀, 혹은 우리의 之那崇拜의

先儒들이 曲筆했던 先史─ 생각나는 대로 틈틈히 몇 줄씩 적던 것 가운데서, 三國 以前의 것만 추려 내니 그것이 즉 이 책이다.

  • 脫稿하고 나서 또 우연히 一然의 『三國遺事』를 폈다. 대목대목을 골라 읽기는 그 번수를 다 따질 수 없고, 通讀하기도 六, 七회 째다. 그

회수가 많아짐에 따라 이 책의 고마움은 더 늘어만 간다.

  • 一然의 이 저술만 없었더라면, 우리는 聖祖 檀君을 어디서 찾고 어디서 알랴. 聖祖 檀君을 모르고는 우리가 한겨레라는 것을 어떻게 알랴?
  • 發達史學的으로 따지자면, 분명히,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는 옛날 한 갈래에서 갈린 것이라는 필연적인 結論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러나 누구를 시조로 한, 어떤 갈래였는지는― 여기 대한 해답은 오직 이 『三國遺事』가 있을 뿐이다. 해답해 주어 가로되, 「본시 단군이라는 성인이 계셨느니라」고.

  • 日本人 학자들은 자기네의 좁은 주관으로 檀君을 부인하여 놓고, (단군을 인정하고서야 비로소 해명될) 古代 三國(고구려, 백제, 신라)의

발전 事實의 해답을 못 얻어 쩔쩔매었다. 단군 時代를 부인하고 보니, 고구려는 滿洲의 先祖가 되고, 三韓만이 朝鮮의 先祖가 된다. 「滿洲」와 「韓」이 어떻게 오늘날 「朝鮮」이란 한 덩어리가 되었는가? 日本人 學者들은 여기서 딜레마에 봉착하여 쩔쩔맨 것이다.

  • 『三國遺事』의 不用意한 단 몇 줄의 기록만 없었더면, 우리 또한 꼭 日本人과 같은 의문에 봉착했을 것이다. 發達史學的 필연의 結論으로,

三國 이전, 三韓 이전에, 이 겨레는 본래 한 갈래였으리라는 推論만은 얻을지나, 누구에게서 또는 언제, 어떠한 갈래가 갈리어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三韓이 되고, 중부에는 支那種이 끼고, 북쪽에 주저 앉은자는 夫餘, 혹 藁離가 되었었다는 것이야. 想像만으로는 얻지 못할 해답이다.

  • 日本人의 조선에 대한 史說은, 꼬투머리의 檀君을 부인하고서 시작된 것이기에 근본부터 틀리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日本은 神國이라는 敎育

방침과 植民地人인 조선인에게 대한 지도 방침 등이 아울러서, 우리의 자손들은 전연 우리의 歷史를 모른다. 게다가 父老들 역시, 儒敎의 奴隸思想 아래서 생성된 조선 역사(日本의 韓國統監府시절에 編修된)를 알 뿐, 「箕子 없는 朝鮮」은 알지 못한다.

  • 단군 겨레의 조선, 우리의 조선을 단편적으로 말한 것이 이 책이다.

고구려(高句麗)[편집]

檀君 겨레의 統師

檀君의 일이 文獻에 나타난 것은 高麗 僧 一然의 『三國遺事』가 현존한 最古의 것이다. 거기는,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檀君王儉, 立都阿斯達, 云云」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魏書云」이라 한 魏書가 현존치 않다는 이유로 일본인은 檀君을 부인한다. 그러나 천 년 전 기록인 三國遺事가 「魏書에 그런 기록이 있다」고 明言하고 「三國遺事의 撰者 一然이 무슨 檀君說을 創出해 낼 의도나 필요성이 있을 사람이면여니와, 不然한 이상은 三國遺事의 「魏書云」의 기록을 의심할 필요가 없고, 그를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무슨 다른 의도거나 야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해도 실수가 아닐 것이다. 檀君建國이 唐高즉위 五十年이라 하였다.

그 뒤 檀君은 御國 一千五百年, 周武王 즉위 己卯에 周에서 箕子를 朝鮮王으로 봉하기 때문에, 즉 다시 말하자면 漢族의 침략에 檀君은 밀리어 藏唐京으로 가셨다가 다시 처음 건국하신 阿斯達에 은퇴하셨다 云.

그런데 日本人이며 一部人은 檀君 御國 千五百年이란 것을 황당무계하다 하여, 이로써 檀君을 부인하려 한다.

이것은 檀君을 한 분이라 보는 착각에서 생겨나는 잘못된 해석이요, 처음 阿斯達에 건국하신 檀君은 「王儉」이요, 마지막 東明帝 高朱蒙에게 傳位하신 檀君은 「解慕漱」다. 즉 「檀君」은 이 겨레의 聖主라는 代稱이다.

글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일이라, 檀君이 합계 몇 분이며 몇 代인지는 상고할 바 없지만,

「東明, 檀君之子」라 한 古記가 있고, 三國遺事에, 「天帝降于訖升骨城, (…略…), 自稱解慕漱. 生存名扶婁」라 한 것이 있고, 역시 三國遺事에, 「檀君記云, 君(檀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生存名扶婁」라 한 것 등으로 보아서, 解慕漱, 즉 檀君이요, 또한 '天帝'이다. 즉 檀君을 옛날 기록에는 天帝라고 불러 모셨다.

東明도 또 天帝 解慕漱의 아들이란 것은, 당년 온 동방에 퍼졌던 유명한 전설인 모양으로 漢土에도 많이 유포되고 있던 듯하다.

처음 阿斯達서 시작된 배달 민족이, 차차 西는 遼, 동은 바다, 북은 極地, 남은 半島까지─ 즉 遼 以東의 全東邦에 번식되고, 不咸文化 겨레를 무어 나갔으니, 二千年의 세월은 소비했을 것이며 檀君─ 王儉에서 解慕漱까지 몇 代인지 모르겠지만 檀君 歲月은 계속되어, 고구려 東明에게 뒤를 물린 것이다.

宇宙生命의 근원인 「解(해)」와 人造光明의 근원인 「불(扶餘)」은, 이 종족의 거룩한 신앙과 전설의 대상이다. 그리고 해며 불의 소산물인 '밝' '배' '발' (光明)이며, '해' '한'(大, 崇. 天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韓, 澣 등 漢字를 붙인다)등은 즐겨서 자기를 과장하기 위하여 쓰는 말이다.

고구려 시조 東明은 檀君의 후계자로 (東明의 姓도 解氏다) 그의 誕生神話는 全 東方의 信仰으로 되어, 東明後 千餘年인 高麗 中葉人 李奎報의 『李相國集』'東明王編'을 보자면,

「世多說東明王神異之事, 雖愚夫?婦, 赤頗能說其事 云云」하여 一千年 후까지, 國係를 달리한 高麗때가지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하였으니, 東方人의 神으로 꽤 尊崇되던 모양이요, 더우기 高句麗人은 찍하면 高句麗 八백년간을 내내, 「天帝之子 河伯之甥, 東明聖帝의 나라의 백성이로라」고 뽐냈으며 東邦에는 東明을 본떠서 卵生이라고 한 임금이 꽤 많다.

이것이 모두 檀君 겨레라는 서로 공통된 神話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新羅의 건국이 高句麗보다 앞서지 않았느냐, 앞선 자가 어찌 뒤선 자를 본뜨랴고 할는지 모르지만, 新羅가 먼저 건국된 뜻이 三國史記의 撰者인 新羅 後人 金富軾의 붓 농락 때문에 생긴 착각이지(몇 해 앞섰는지는 지금 상고할 수 없으나), 여기 참고할 것은 漢書 '北史'에 漢昭帝가 高句麗王(第三 大武神王인 듯)에게 衣?, 朝服, 鼓吹 등을 「下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漢昭帝는 三國史記의 高句麗 건국보다 약 五十年 前人이다. 高句麗의 건국이 먼저라는 것은 史家의 일치된 견해며 온갖 정세로 보아도 앞섰을 것이며, 唐나라 侍御史 賈言忠의 「高句麗秘記云, 高句麗不及九百年, 八十大將亡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征麗將)年八十矣. 云云」이란 것으로 보아도 三國史記가 말하는 바의 七百五年과는 엉뚱히 달라서 三國史記에는 실제보다 근 二百年이 축감되어 있는 듯하다.

金富軾이 檀君을 묵살하고, 高句麗를 경원한 正史를 남기고 또 『舊三國史記』며 古記, 金富軾 『三國史記』 이전의 모든 史記는 소멸되고, 게다가 儒學 輸入은 침입자 箕子를 도리어 朝鮮王으로 추대하는 위에, 日本人의 建國 先後 경쟁 등 가지가지의 까닭 때문에 우리는 하마터면 우리의 거룩하신 옛 어른들을 잃을 뻔하였다.

이렇듯 高句麗는, 단군 겨레인 高句麗, 百濟, 新羅 등 삼국에서 가장 먼저 건국하였다. 그리고 우선 松讓기 나라(沸流), 金蛙의 나라(扶餘) 등의 단군 겨레의 나라들을 흡수하고, 沃沮, 滅, 貊, 肅愼 등을 隷下에 넣으며, 漢族에게 한때 횡령당했던 玄?, 樂浪 등지를 복멸하고, 꾸준히 遼東으로 진출을 계속하였다.

더우기 이 단군 겨레의 盛昌을 꺼리는 漢民族이 대동단결하여 隋나라의 漢族 통일의 대세력으로 배달 종족 복멸을 목표로 한 대공격이며, 그 뒤를 계승한 唐나라의 내침을 격퇴하여 배달 겨레의 이름을 천하에 떨쳤다. 高句麗 八百年의 역사는 우리 민족에 있어서는 영원토록 자랑할 우리의 자랑거리다.

그런지라, 高句麗 시조 誕生神話에 관한 전설은, 百濟며 新羅에게까지 썩 후년에 이르도록 이야깃거리가 된 것이다.

高句麗 八百年 간에 支那民族의 나라들과의 관계를 略記해 보자면,

金富軾 『三國史記』의 高句麗 건국 연대는 실제보다 얼마 뒤라 하지만, 얼마나 뒤로 되었는지 따질 수 없으니 三國史記를 좇는다 할지라도, 高句麗 시조 東明이 卒本 땅에 건국한 것은 前漢 建昭二年이다.

支那는 周室 때부터 내내, 혹은 수백, 심지어는 千餘 諸侯國으로 부스러져서 동족 상잔의 역사를 계속하다가 泰 때에 始皇이 비로소 통일하여 一個國을 이룩하고, 그 아들의 代까지를 간신히 누리고는, 漢高祖의 발흥으로 泰는 없어지고 漢의 세상이 되었다.

支那族은 본시 자기네가 인류의 大宗으로 자인하고 있는데, 동쪽의 단군 겨레의 나라가 내내 支那族과 別立하여 자기(單軍 겨레) 독특의 문화를 가지고 딴 살림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支那族의 눈에는 늘 가시(■)로 보였다. 그 '가시'도 손안에 집어넣어 支那 天子기 호령 하에 아래 사는 나라로 만들고 싶은 것은 史前時代부터의 支那族의 희망이었다.

그러나 자기네부터 일국으로 통일을 못하였으니 딴데를 볼 겨를이 없었다. 支那族이 통일되어 내분만 없어지면 제일 먼저 檀君族 정복의 손을 뻗일 것이다.

이러한 적을 西方에 두고, 東明이 天帝(檀君)의 아들로서, 동방에 高句麗國을 이룩하였다.

建國 第三年에 北沃沮, 이렇듯 점점 늘리어 나갔다.

이리하여 東明御宇를 지내고, 그 아들 瑠璃王 때, 支那에는 王莽이 일어나서 漢을 멸하고 '新'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러고 王莽은 「支那族은 인류의 宗主」라는 생각만 가지고, 멋도 모르고 高句麗를 호령하여 보려고, 伐胡의 전쟁에 高句麗에게 출병 조력하기를 명하였다가 고구려에게 거절을 당하고, 분김에 高句麗를 '下句麗'라고 국호를 깎았다.

이 王莽이 열 다섯 해 支那天子 노릇을 하다가 劉玄이 대신하여 二, 三년 天子 노릇, 그러고 漢의 光武帝가 일어, 後漢을 세웠다.

그때는 高句麗는 周邊 小國들을 차례로 흡수, 혹은 소탕하고, 그 예봉은 오직 支那族의 檀君基地에 들어와 있는 자에게 향하여 樂浪, 玄? 등을 내 품 안에 회수하고, 멀리 北平 太原 등지까지 원정의 손이 뻗었다.

그렇지 않아도 밉고 괘씸한 高句麗가 멀리 漢族의 본토 역내까지 손을 붙이니 그들의 高句麗에 대한 증오감은 나날이 높아갔다. 그러나 국력이 모자라니 분하여도 어쩔 수는 없었다. 高句麗가 연해연방 그새 支那人에게 잃었던 국토를 회수해 들어가자니, 지방지방의 국부적 다툼은 늘 있겠지만 「高句麗와 後漢」의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을 漢쪽에서 꺼리고 피해 오던 것이다.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것이 後漢도 선 지 百四, 五十년, 靈帝의 시절─ 高句麗는 新大王御宇에, 後漢도 인제는 기초도 잡히고 보니 무엇보다도 高句麗를 그냥 방임할 수 없었다. 드디어 遠征의 대군을 떠나 보냈다. 그러나 ─ 결과는 '疋馬不反'이라는 漢軍의 대패였다.

이렇듯 高句麗 원정에 실패한 後漢은 그 본국까지 뿌리가 흔들려서 群雄이 붕기하고, 종내 나라가 넘어지고 말았다.

漢이 넘어지매, 그새 늘 나라이 안돈되지 못하여 전전긍긍한 생활을 해 오던 漢人들은 종내 제 나라를 믿을 수 없어, 樂土인 高句麗로 몇 천 명 만 명씩 집단이 되어서 넘어와서 투신하였다.

後漢을 넘어뜨리고 선 것이 曺氏의 魏나라요, 曺氏가 魏를 세우매 蜀도, 吳도, 제각기 딴 나라로 분립을 하여 統一支那는 다시 三國으로 鼎立되었다.

高句麗와 地境을 같이 접한 자는 魏였다. 蜀과 吳라는 대적을 갖고 있는 魏는 정책상 내내 高句麗와 친선 관계를 계속 하였다. 高句麗 역시 구태여 적을 누릴 필요가 없어서, 檀君故土 요동 지방 회수 운동은 그냥 계속했지만, 魏와의 친선 관계는 유지하여 南支那의 吳나라에서 동방 대국인 高句麗의 환심을 사고자 보낸 親善使節을 잡아 죽여 魏에 보내는 둥 魏와의 친교는 계속코자 하였다.

그 支那 三國時代도 五, 六十년으로 끝나고, 晋이 생겼다가 晋도 몇 해를 유지하기 못하고 南方으로 쫓겨갔다.

이때부터 소위 南北朝로─ 다시 부스러져서는 五胡十六國으로─ 支那는 무수한 群小國으로 부스러졌다.

支那가 이렇듯 난장판이 되어 있을 동안은 高句麗는 진실로 태평무사하였다. 南方의 百濟와 新羅는 싸움의 상대는 되지 못하는 나라이요, 支那는 백 조각으로 부서져서 자기 유지도 어려운 처지이니, 멀리 高句麗를 엿볼 生念도 못낼 뿐 아니라 이때의 高句麗는 국제상 특이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檀君 때부터의 不咸文化는 다른 민족의 침략 등으로 중단되어 보지 않고, 게다가 支那 系統의 亡命人으로부터 흡수한 문화까지 아울러 同化發展시켜서 高句麗 문화는 인류의 위에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무력적으로는 全支那族의 總合力인 漢의 내침에도 꿈쩍 안한 강한 국가이다.

寒土에 현재 생겨 있는 數百의 군소 국가는 胡族도 있고 支那族도 있는데, 바로 엊그제 생긴 국가요, 언제 없어질는지 짐작할 수 없는 얼치기 국가다. 그 새에 만들어 보려고 공작한 하다가 쓰러진 국가도 수두룩하거니와, 立都하다가 쓰러진 국가도 百僚까지 짜고 국가로라고 호령까지 하다가 쓰러진 국가가 부지기수다. 그러니만치, 현재 제법 국가로라고 국가로서의 체제를 다 갖춘 자도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것이, 남만이 그리 아는 것이 아니요, 當事한 자기 스스로도 자기가 과연 '國家'인지, 언제까지나 버틸 수 있으려는지, 누구누구가 자기를 국가로 인정해 주는지, 내 품 아래 있는 백성들이나마 국가로 여기어 주기는 하는지─ 모두가 의문이다.

이런 때에, 高句麗國이 자기네를 국가로 인정하고 상대해 주기만 하면 이렇듯 튼튼하고 마음 놓이는 일이 없다. 高句麗가 인정해 주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버젓하게 天下에 향하여 국가로라고 버티고 호령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漢土에 立國한 君主)가 高句麗王을 封爵을 하여, 高句麗王이 거절치 않고 받으면 이는 즉 고구려王이 자기(漢土에 立國한 군주)를 天子로 인정하여 주는 것이 된다.

漢書를 보면 高句麗가 光武帝 八년에 朝貢하고 漢의 巨國이 되었다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漢人의 존대성이 낳은 과장적 虛說로서, 高句麗만한 대국이 조공을 하고 巨國이 되면 漢帝는 으례 高句麗王에게 「무슨무슨 大將軍, 무슨 公 高句麗王」이라고 封爵을 하는 것이어늘, 爵封記錄은 없이 朝貢 운운은 단지 高句麗가 친선코자 보낸 使臣을 朝貢使라고 과장 기록한 것이, 光武帝 八年頃은 高句麗가 漢領 樂浪의 太守 崔理를 없이하고 樂浪을 복멸하는 한창 그 시절로서, 漢帝에게 卑屈朝貢할 까닭이 없었다.

그로부터 썩 뒤, 故國原王 때에 漢의 燕王?이 갑자기 高句麗를 들이쳐 國都 丸都域을 함락시키고, 왕을 도망케 하고 歸燕하려다가,

「高句麗가 우리(燕)의 電擊에 한때 패하고 모두 피했으나, 우리가 물러가면 반드시 뒤를 쫓으리니, 그것을 막기 위하여 王父의 陵을 파고 王父의 尸를 가지고, 또 王母를 生擒해 가자.」하여, 王陵을 파고 美川王의 尸와, 王母 周氏를 전리품으로 노획해 가지고 돌아갔다. 여기서 왕은 할 수가 없어서 王弟를 燕에 보내서, 조공하고 稱臣하고 도적맞은 貴寶(父尸와 生母)를 도로 찾아왔다. 이것이 高句麗로서의 처음의 타민족에게의 조공이었다. 그 뒤 燕은 복멸되고 高句麗의 支族 高雲慕容氏가 燕王으로 되었다.

父尸를 잃고 生母를 잃는 등의 사건은 있었지만, 그래도 천 조각으로 부스러진 支那族은 인제는 걱정거리가 되지 않으므로, 高句麗는 長壽王 때에 도읍을 북방에서 남방 平壤으로 옮겼다. 그때는 支那는 四分八裂이 되어 그 부스러기마다 임금이 있고, 제각기 제가 眞主요 他는 ■主라고 하며, 이러기 때문에 高句麗 같은 大國의 '認定'이 萬鈞의 무게를 갖는 형편으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때에 北魏로부터 사절이 高句麗로 와서, 高句麗 長壽王께, 「都督遼海諸軍事, 征東將軍, 領護東夷中郞將,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이라는 爵號를 呈하였다. 魏로서는 커다란 試金石이었다. 高句麗王이 이 爵號를 받아 주기만 하면, 자기는 天下에 뻐젓한 天子다. 宋, 後燕 등 隣國과는 다르다.

長壽王은 이 爵을 잠자코 받았다.

그런데 근 삼십 년쯤 뒤, 宋에서도 長壽王께 대하여,

「車騎將軍, 開府儀同三司」의 爵을 보내 왔다.

이로부터 支那의 群小新國의 주인에게서 高句麗王께 대한 封爵 경쟁이 시작되었다. 漢地에 누구나 새로 나라를 이룩하면, 가장 먼저 高句麗王께 漢土 왕래에는 지리상 魏 땅을 먼저 밟게 되는 관계상, 南方의 新皇帝가 등극하면서 첫 政事도중 魏에게 잡혀, 魏帝의 질투를 일으켜 문제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高句麗王이 이렇듯 차차 누구의 封爵이고 간에 받으니, 그 封爵도 점점 권위를 잃었다. 高句麗王이 몸소 한 번 몸을 움직여서, 어느 帝에게 陛見을 해 주면 얼마나 기꺼운 일일까?

이러한 평화의 몇 백년(단지 自國 문화 발전만에 전력할 수 있는)이 지난 뒤에, 漢土는 隋의 文帝의 힘으로 統一이 되었다. 高句麗 平原王 때.

그러나 처음 한동안은 高句麗는 여전히 관심치 않았다. 몇 해나 가리, 이만한 배짱으로 또 부스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나날이 國基가 튼튼히 자리잡혀 들어가는 것을 보고, 高句麗는 그 새 문제에만 향하였던 눈을 國防으로도 돌려 그 새 감추었던 高句麗魂의 再起를 전국민에게 요청하였다.

平原王 승하하고 ?陽王 제九년에 王은 支那人의 적개심(高句麗에 대한)의 그 정도를 작정해 보고자, 分族인 靺鞨人 萬餘를 親率하고 遼西 지방을 좀 건드려 보았다. 隋도 그 새 통일하노라고 쓴 그 피곤도 인젠 삭아서 高句麗 원정의 속준비를 하고 있던 차이라, 漢王■(將師)을 시켜 삼십 만 대군을 이끌고 高句麗로 향하게 하였다. 漢書에는,

「軍中發疫, ■轉不■, 乏食, 又 遼風舡多漂沒, 及返師, 死者十中八, 九」라 하여 참패한 까닭을 불가항력으로 돌리려 했지만 그러면 高句麗兵은 三十萬 大賊이 왔는데도 모르고 잠자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때에 百濟는 뒷길로 使臣을 隋에 보내서 「巨國이 導道를 하리다」고 자청했다가 도리어 隋帝에게 꾸짖기었다.

隋는 文帝 때오 高句麗王의 몸소 來朝를 요청하다가 창피만 당하고, 뒤이은 煬帝도 같은 요청을 하였으니, 漢族에게 있어서는 高句麗王이 몸을 굽혀 한 번 來朝해 주는 것이 平生의 원이었다.

文帝 下世하고 煬帝 서서, 이 煬帝와 高句麗 대신 乙支文德의 薩水에서의 승부는 千年 뒤 오늘날까지 우리 겨레의 자랑으로 口傳되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煬帝의 이끌은 군사가 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 號曰 二百萬이었다. 그것잉 乙支聖者의 손에 잔멸되어 무사히 遼東을 지나 귀국한 자 겨우 二千七百명뿐. 후일 唐太宗이며 支那種族이 뼈에 새겨두고 하는 말, 「遼東大原 어느 곳이라 우리 자제의 피와 뼈 안 묻힌 곳이 없다」는 말을 추호도 과장 없는 말이다. 漢族 四百萬의 피아 뼈…….

이만치 되었으면 지기지기하고 진저리 나겠지만, 하도 일이 엄청나게 되었는지라, 理性을 수습피 못하고 半狂亂이 된 煬帝는 이듬해 또다시 敗餘의 잔졸이며 새 軍丁(隋書에는 丁男 十萬이라 하였다)을 수습해 가지고 또 高句麗로 왔다. 그러나 全支那族의 정예도 잔멸시킨 高句麗라. 이 急造軍 따위는 문제도 안되었다.

이 악에 받친 광란의 隋帝는 또 그 이듬해에 군사를 불렀다. 그러나 小民들은 벌써 帝命도 좇지 않아 간신히 모은 약간의 장졸을 데리고 또 떠났으나 이 全支那人이 隋室에서 마음이 떠나서, 흐지부지 또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이 네 번의 참패는 隋室의 실력을 근본적으로 꺾어서 바람만 불어도 넘어질 형편이 되었다.

民의 歸依를 잃고, 실력까지 잃은 隋室이라, 자연히 넘어지려 할 때에 한 새「天子되어 보려는 힘」이 생겨서서 隋室을 넘어뜨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隋室에 대신하여 唐室이 支那의 주인이 되었다.

高句麗가 隋의 군대을 북에 받고 死鬪할 때에, 남쪽에서는 新羅가 高句麗땅 오백리를 橫取하였었다. 불 난 곳의 도적 셈이었다.

隋나라이 넘어지고 唐나라이 서서, 첫 황제 高祖는 아직 튼튼히 자리잡히지 못한 唐으로서, 全盛 高句麗를 건드리기 무서워서 소극적 정책을 썼는데, 이 정책을 꺼리면서, 太宗 李世民은 자신 太子의 位에 올라서, 곧 「征麗」였다.

太宗이 처음 淨侶의 말을 꺼낼 때 全支那民族은 하도 많은 자제를 遼東에 잃었는지라 일제히 반대하였다. 報讐慾도 컸거니와 「겁」이 더 앞섰다. 그러나 遼東平原에 흘린 支那人의 피의 복수를 굳게 결심한 太宗은 많은 理由를 들어서 자기와 隋氏와는 다르다고 역설하고, 반 강제적으로 눌러서 드디어 出師에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결과에 있어서는 太宗으로 하여금 「아아, 魏徵이 있더면 동방의 小醜에게 이 욕을 보지 않았을 것을」하는 탄성과, 高句麗 安市城主 楊萬春의 살에 눈깔 하나를 잃은 것과, 이끌고 왔던 대군의 전멸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天子의 체면도 있고 하여, 高句麗 재상 淵蓋蘇文에게 장하다고 弓腹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당연히 있어야 할 고맙다는 사례조차 없었다.

다음 다음해, 唐은 高句麗를 치러 왔었지만 또 헛길이었다. 漢書에도 三國史記에도 얼마나한 병력으로 왔었으며, 어떤 정도의 패배인지 상세한 기록은 않고, 다만 功 없이 돌아왔다 할 뿐이지만, 太宗의 결의를 알고 복수심을 아는 자는 역시 결코 小軍은 아닐 줄 알 것이다. 그 이듬해 또 왔다가 또 참패 귀국하였다. 이때에 太宗의 탄식과 決議─

「朕因弊, 議明年發三十萬衆, 一擧滅之」

금년도 또 졌지만 명년에는 三十萬軍을 이끌고 가서 단숨에 넘어뜨리겠다는 그 큰 결의를 품은 채, 이듬해에 太宗은 그만 下世하였다.

「知族不辱, 知止不殆. 陸下滅明德旣云足矣. 拓地開彊赤可止矣(…略…) 鄕使高句麗違失巨節, 誅之可也. 侵擾百姓 滅之可也, 他日能爲衆國患, 除之可也, 今無此三條而坐煩中國, 內爲前代雪?, 外爲新羅報讐, 何耶」

司空玄齡이 病中을 무릅쓰고, 太宗에게 如上리 간했거늘, 듣지 않고 창피를 거듭하다가 下世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 「外爲新羅之報讐」라 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高句麗가 北에 隋의 來寇를 맞아 死鬪할 때에 新羅는 高句麗가 남쪽를 돌볼 경황이 없는 것을 기화로 高句麗의 남쪽 지방 五百里를 新羅 소유로 집어삼켰다. 隋가 망하고 高句麗가 한때 숨을 돌릴 때에 新羅에게 잃었던 땅을 차차 회수하여 들어갔다. 북에는 아직 漢種인 唐이 호시탐탐히 高句麗땅을 엿보고 있을 때, 전 병력은 그냥 북에 멈추어 두어야 할 형편이라, 남쪽 失地는 地方將을 시켜서 조금씩 회수하여 들어갔다.

이때에 百濟는 또 동쪽에서 新羅의 四十餘城을 빼앗았다.

新羅는 일이 급하게 되매, 자기네가 高句麗에 대하여 한 일은 감빡 잊고, 金春秋가 高句麗로 구원을 청하러 달러갔다. 百濟를 물리쳐 달라고.

高句麗에서는 金春秋를 잡아 가두고, 너희가 훔친 五백리 땅을 반환하면 百濟를 물리쳐 주마는 조건을 내었다.

金春秋는 간신히 高句麗를 탈출하여, 이번은 다시 당나라로 가서 高句麗의 횡포를 호소하였다. 報讐해 주기를 탄원했다. 이것이 이른 바 「新羅地報讐」다.

唐나라는 新羅의 말을 듣고 보니, 高句麗 남쪽 국방은, 弱國 新羅로도 五백리의 훔칠 수 있을 만치 허수로운 모양이다. 그래서 司農丞相 玄將을 高句麗에 파견하여 그 虛實을 엿보게 하였던 바, 북방은 모르지만 남쪽은 허수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唐나라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高句麗를 어쩔 수 없지만 新羅를 끼고 남북에서 치면 高句麗도 꺾을 듯싶어, 급속하게 新羅와 唐의 접근은 되어갔다.

이리하여 新羅와 唐은 연합하여, 아니 新羅는 唐에게 조종되어 둘이 합하여 支那族 萬年의 협위요 혹을 멸한 것이다. 新羅는 支那族의 大國是에 협조한 것이다.

혹자 가로되, 新羅는 辰韓의 後요, 辰韓은 또는 泰韓이라고도 하니, 그러면 新羅는 泰人을 위하여 원수를 갚았는가?

高句麗 망한 원인에는 高句麗 재상 淵氏門內의 內訌도 있지만, 한 겨레의 반역─ 두 가지가 다 순전히 스스로 내포된 결함이었다.

백제(百濟)[편집]

三韓 이전을 「史前時代」라 하여 내버리려는 日本學者는, 따라서 그 옛날 檀君겨레가 前동방에 점거했다는 엄연한 사실을 부인하고, 「북방에는 夫餘(후에 高句麗), 중부에는 ■ )이요, 남부는 三韓(馬, 辰, 弁韓)인 시절」부터 비로소 認定하느니만치. 高句麗 왕자 高溫祚가 북방에서부터 중부 漢領을 지나서 馬韓에 와서 百濟國을 세웠다는 점을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지만, 檀君겨레라는 것을 인정하는 우리로서는 추호도 이상한 점이 없거니와 高句麗시조 東明의 아들 高溫祚가, 父命에 따라서 고국을 떠나서, 敵領까지도 넘어서 馬韓 땅에 내려와서 百濟國을 세웠는지라, 근본 목포가 支那人에게 횡령되었던 반도 중부 지대를 회복하여 북방 아버지의 나라와 직접 상접하는 데 있었다.

建國 초에는 무론 이 國是로 漢領인 樂浪에 대하여, 高句麗는 북쪽에서, 百濟는 남쪽에서 공격하여 드디어 樂浪을 복멸하고 高句麗와 百濟는 서로 국경이 접하였다.

百濟는 高句麗를 祖國으로 섬기고 百濟王의 姓氏도 夫餘氏라 일컫고, 東明廟를 세워서 늘 제사하고, 이렇듯 처음 동안은 高句麗의 支國인 듯한 感이 있었다. 이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馬韓 五十四國이 한꺼번에 百濟王의 날개 아래 든 것이 아니요, 처음은 慰禮城과 그 근처 일대만이 겨우 百濟領이었다. 그 뒤 樂浪을 복면하고 高句麗와 접경이 되니, 국경선에선 자연히 충돌이 생기고,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고, 차차 양국간에도 분쟁이 생기게 되었다. 게다가 百濟의 토민은 잡종이어서, 衛滿에게 쫓겨온 箕準의 백성도 있고, 倭種도 있고 하여, 통일된 민족이 못되었다. 支那人의 기록에 「百濟多詐」, 倭人의 기록에 「百濟叛服無雙」또는 지금까지도 그 地方人의 地方性을 이룩하고 있는 특성(표리 부동)은 이러한 원인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그런 민족성이니만치 강직한 高句麗性과는 맞지 않았을 것이나, 高句麗는 百濟를 남같이 보지 않는 관계상, 국경 근처의 소충돌은 늘 있지만, 그리고 高句麗의 실력으로는 일거에 百濟를 둘러엎기는 如反掌이지만 이렁저렁 그대로 지내왔다.

그런데 高句麗 故國原王 三十九年, 高句麗에서는 百濟와 또 싸웠는데, 그때 高句麗는 그 싸움에 패하였다. 여기서 승리의 맛을 본 百濟는 이태 위, 高句麗 故國原王 四十一년, 百濟近肖古王 二十六년 다시 싸움을 돋우어 이 싸움에서 高句麗 故國原王은 불행히 流失에 맞아 승하하였다.

그 뒤 백제는 晋(支那이다)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을 하며 巨國되기를 자원했는데, 漢籍의 그때 기록을 보면, 「百濟 上表自通云, 巨興高麗源出夫餘, 先世之時倭篤崇舊款, 其祖■輕■隣好, ■踐巨境, 巨祖?, 整旅電■, ■斬■首, 自爾以來莫敢南顧 云云」하여 승리를 자랑하였다.

그런데 이 高句麗王을 전사케 한 사실을 高句麗의 분노를 사서, 高句麗로 하여금 百濟에게 차차 중압을 가하여 百濟 蓋鹵王 二十一年, 高句麗 長壽王 六十三年에 長壽王은 三萬의 군사를 이끌고 百濟로 와서, 百濟王을 잡아 군문에 목 베고, 百濟 서울 근처의 지역을 모두 高句麗에서 빼앗았다.

그런데 그 전에 百濟 蓋鹵王은 高句麗의 漸强에 은근히 겁이 나서(현재 南朝─ 晋과 君臣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南朝─ 魏(魏는 高句麗를 두려워하여 高句麗와 친선그리고 를 맺고 있는 나라다)─ 에 사신을 보내서,

「若天然曲矜, 速遺一將, 來救巨國, 當奉送鄙女, 執掃後宮, 拜遺子弟, 牧?外廐, 尺壤匹夫, 不敢自有」라 하여, 臣이 나라를 도와 주시면 臣뿐 아니라 딸을 후궁으로 바치고 자제를 馬夫로 바치리다」고 아첨하고 이어서,

「高句麗不義逆詐, 南通劉氏, 北約??, 共相唇齒, 謨凌王略, 今若不取, 將貽後悔」라 이간까지 붙여 보려 하였다. 그러나 高句麗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高句麗와 친선 관계를 맺고 있는 魏가 이맛 이간책에 빠질 까닭이 없었다. 또한,

「臣(百濟王 自稱)西界海中, 見尸十餘, 幷得衣器鞍勒, 視之非高麗之物, 後聞乃是王人(漢人이라는 뜻) 來降

巨國, 長蛇隔路, 以阻于海, 今上所得鞍, 一以爲實嬌, 운운」하여 참소와 이간과 애원을 아울러 한 데 대하여 魏에서는,

「의좋게 지내거라. 仁으로 지키는데, 원수가 어디 있으랴. 네가 보낸 鞍具는 중국 물건이 아니더라.」하여 피해 버렸다. 百濟는 다시 靺鞨과 짜고 또 魏에게 빌어 보았으나, 魏는 책망을 물리치고 도리어 이 전후 사실을 高句麗에게 알려 주었다.

이듬해의 長壽王(高句麗)의 百濟 정벌은 오직 삼십 년 전 일(故國原王이 流失에 맞아 승하한 일)의 복수만이 아니라, 이번의 행사에 대한 응징을 겸했을 것이다.

여기서 日本人은 『日本書紀』에 기록하여 말하기를,

「雄略天皇二十一年, 春三月, 天皇開百濟爲高麗所破, 以久麻那利(筆者註 곰내─ 固麻城─ 態津─ 公州) 賜汶洲王(筆者註 文周王) 救與其國(…略…) 實賴於天皇(日本) 更造其國」云

日本書紀를 보면 이때뿐 아니라, 百濟는 늘 倭皇의 비호 아래서 나라를 유지한 듯이 되어 있는데, 이때의 公州뿐 아니라, 뒷날의 夫餘(百濟 서울)도 天皇이 百濟에게 「下賜」하여 그리로 서울을 옮기게 하였지, 이 下賜가 없었더면 百濟는 置京할 곳이 없어서 亡邦했으리라는 것이다.

後項에 말하겠거니와, 그 당년까지는 倭가 先住民 중의 가장 큰 덩어리였으며, 따라서 倭의 세력 범위 아래 있던 남조선 일부 지역에(서울과 임금을 한꺼번에 잃은) 百濟의 관민이 쏠려 오니까, 그때 반도에서는 차차 퇴각의 길을 밟던 倭가 자리를 비고 물러간 것을 이렇듯 체재 좋게 꾸민 것일 게다.

대체 日本書紀를 꾸민 史官은 대개가 百濟뿐 아니라 裔로서, 倭에 投化한 사람들이다. 그 계통이 본시 倭係인지 漢係인지는 알수 없지만, 조국 百濟에 대하여 고약한 기록만 한 것으로 보아서 檀君 겨레의 혈통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까지 표리부동한 일부 민족성을 드리우고 있는 他血統系의 일종일 것이다. 日本書紀에는,

「百濟, 失禮於貴國(倭를 가리키는 말이다)」

운운의 기록이 진실로 많이 나온다.

백제는 倭에게 문화를 전수하고 代償으로 무력의 원조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해안선(南)까지 국경을 넓혀 내려가려면 先住民 倭와는 늘 티각태각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무력 원조를 간간 하는 倭에게서는 자세가 또한 자심하였다.

高句麗와는 서로 임금을 죽인만치 불구 대천의 원수다. 百濟는 新羅와 친선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꼭 百濟와 입장이 같고, 國力은 더 미약하고, 倭와는 더 가까이 있는 新羅라, 濟羅間에는 對高句麗의 攻守同盟이 맺어졌다. 그러나 의리나 思情關係가 아니라 순전히 서로 利己的의 동맹이라, 百濟는 기회 있을 때마다 동맹국인 新羅를 침노하기도 게을리 않았다.

동방에서는 이렇게 지낼 때에, 漢城에서는 支那人은 늘 동방(高句麗)의 발흥을 꺼리면서도 자기네가 단결이 못되어, 내버려 두었었는데, 隋가 생기면서 漢族 몇 億의 대동단결에 성공하고, 곧 그 예봉을 東夷에게로 돌렸다.

동방 檀君聖域 守護뿐 아니라 중책을 띤 高句麗는 隋의 文帝와 뒤이은 煬帝의 全支那의 힘을 집중한 二백만 대군을 맞아 民族 死活의 분기점에서 사투할 때에 百濟는 몰래 사자를 隋에 보내, 길 향도하기를 자원했다.

이때는 隋帝는 하두 참담한 全敗에 넋을 잃고 있을 때에 高句麗에서는 隋帝가 가긍하고 민망하여 隋帝를 위로하는 뜻으로, ?陽王과 乙支大臣이 의논하고 隋帝에게 사신을 보내서,

「폐하, 멀리 糞土까지 오셨다가 재미를 못 보시고 돌아가서 황공하옵니다.」는 뜻의 글을 보냈다.

이때에, 百濟에서 길 향도겠다는 사신이 온 것이다. 사신은 뒷길로 唐京에 와서,

「폐하, 다시 暴麗를 치시면 巨國은 남쪽에서 도우리이다.」는 뜻을 아뢰었다. 그러나 高句麗의 공포가 아직 그냥 남은 煬帝는,

「高句麗가 이처럼 사죄를 하니(즉 糞土 운운의 글) 사죄하는 良國을 加害하는 것은 군자가 아니라.」하여 濟使를 물리쳤다.

隋는 전국력을 기울여 네 번을 高句麗를 치다가 마지막에는 기운이 진하여 스스로 넘어졌다.

唐나라가 대신으로 서서, 漢族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고자 또다시 온 국력을 모아 高句麗를 치고 또 치고 연해 침노하였다.

隋와의 싸움에서 隋를 넘어뜨리기는 하였지만 스스로도 중상을 입어, 꽤 쇠진한 高句麗는 여기 또다시 唐기 위해서 새 힘에 배달 종족 옹호를 위하여 감연히 일어서게 되었다.

唐의 대군도 잔멸시키기를 여러 번, 그 내내를 百濟는 혹은 唐에 붙는 듯 혹은 高句麗를 돕는 듯─ 그러면서도 內實은 연해 연방 新羅의 변지 약탈에 힘을 기울였다. 한때 무었던 新羅와의 동맹은 인젠 깨뜨렸다.

百濟는 이렇듯 온갖 수단을 다하여 邦命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그 뒤 唐軍과 新羅軍의 연합한 힘으로 들이치는 바람에(唐은 高句麗의 조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契芯何力을 시켜 일변 高句麗를 견제하며 남쪽에서는 百濟를 멸한 것이다) 꺾어졌다.

金富軾『三國史記』에 의지하면 六百七十八년 간 나라가 유지된 것이다.

百濟를 병력으로 멸한 漢族인 唐과 및 배달족인 新羅─ 그러나 서로 다른 겨레가 된 지 七백년이나 지난 뒤라, 같은 겨레라는 것도 서로 모르고, 唐은 단지 漢族 徹天뿐 아니라 원수인 扶餘族으로─ 新羅는 단지 그 새 늘 성화시키던 원수로─ 이리하여 배달 겨레의 하나는 없어졌다.

신라(新羅)[편집]

이 땅의 古代史(三國史記, 三國遺事)가 다 新羅 後人뿐 아니라 손으로 된 관계상 古史는 新羅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시조는 역시 卵生인 朴赫居世다. 그런데 처음 건국할 때의 국토는 상상키 어렵도록 작은 것으로, 아마 五, 六十里 정도였던 모양이요, 그런 작은 국가 가운데 하나인 「서라벌」 부락이 다른 友國중에서 出藍하여 마지막에는 大新羅까지 이룩한 것이다.

좌우간 지금의 大邱며 울산 지방도 「서라벌」에서는 여러 나라를 지나서야 갈 수 있었던 모양이다. 전쟁을 하려는데 전국에서 장정 스물 몇 명을 낼 수가 없어서 전쟁을 못했다는 이런 國家郡이다. 처음 「서라벌」에는 海岸 따위는 없었다.

여기 倭의 神功王妃의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日本書紀의 연대는 일본인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는 만큼 神功이 韓史의 어느 王의 때에 해당하는지, 說이 各異하여 新羅 婆娑王 때부터 基臨王 때까지, 計十一王, 二百三十여 년 간의 韓史에서 「倭賊來侵」이란 것이 있는 그 매번을 모두 갖다 맞춘다. 이 학자는 基臨王 때라 하면, 다른 학자는 沾海王 때라, 또 다른 학자는 助賁王 때라, 各人各異說이다.

그러나, 日本書紀에 神功女 出征이 十月에 시작하여 十二月에 끝났다 했는데, 불행히도 그 날짜에 해당한 내침은 韓史에는 없다. 게다가 往還이 단 두 달 새니 상륙할 시간은 전혀 없었고, 日本書紀에 「新羅往 波沙寐錦이 나와서 항복했다」고 기록은 되어 있는데, 그것이 누구인지, 婆娑尼師今을 波沙寐錦에 맞추는 것은 일본 학자들이 스스로 부인한 바요, 韓史에도 婆娑 때는 倭寇 來侵 기록이 없으며 百여 년이 틀리는 (婆娑가 神功보다 百餘年 前人이다) 위에, 婆娑는 초창기(둘째 昔氏王이다)의 임금이라, 그때의 「서라벌」 영역은 지금의 慶州 일원을 벗지 못했겠으므로 「上陸深入」관계 등으로 또한 神功에게 갖다 대기 힘들다.

그러나 그런 억지 문제 다 집어치고, 어떤 韓土 해변에 와서 해변 트민 부락을 약간 약탈하고 갔다 할지라도, 神功女는 二十 내외의 小女로 八十隻 船隊를 인솔하고 韓土까지 다녀간 것만으로도 一代 女傑의 칭호를 붙일 수 있겠거늘, 공연한 일에 머리를 썩이며 고심하는 일본 학자들도 가련타 아니할 수 없다.

좌우간 新羅는 朴, 昔, 金, 三姓이 번갈아 왕으로 되다가, 뒤에 金氏 혼자만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王權 金氏 독점 시대에 이르면서야 나라의 기초도 아주 서고 「서라벌」「鷄林」등에서 「新羅」로 확정하고 群小友邦을 점차 흡수하여 나라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 약간 흥미있는 일은, 百濟는 近肖古王代에 晋에 朝貢하고 晋에게서 「鎭東將軍 樂浪太守」의 稱號를 받았는데 (咸安二年이다) 倭는 宋文 元희嘉에 자칭 「使持節部都督 倭 百濟 新羅 任那 泰韓 慕韓 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이라 하며 이렇게 봉착해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결과는 「安東將軍 倭國王」에 冊된 뿐이었다.

그러나 倭王은 책봉됐건 안 됐건, 자기는 그 행세(게다가 加羅 一國을 더 넣어서 七國軍事都督)를 하였다. 그러매 帝는 그 七國에서 百濟 하나를 깎아네고, 다른 六國의 軍事部都督이로라는 것을 용인해 주었다. 즉 百濟만은 韓室에서 직접 책봉을 받은 나라이니, 倭의 아랑곳할 바이 아니라는 뜻이다.

倭는 新羅의 軍事都督으로는 인정을 받은 것이다. 즉 新羅는 이렇듯 漢族國家에게 존재조차 인정을 못 받았다. 倭에게도 수모받기 여지없어서, 倭의 요구에 인질로 왕자를 倭에 보내서, 朴提上의 美談을 천추에 남긴 것도 국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金春秋며 金庾信 등 위인이 생겨난 善德女王 때에도 처음은 역시 미약하여 百濟에게 大邱城 등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구원병을 청하러 金春秋가 高句麗로 갔다. 이것은 新羅로서는 일이 급하니 그런 考慮까지 못했겠지만 그보다 조금 앞서, 高句麗가 隋煬帝의 全支那 통합 대군을 맞아 種族 生死의 사투를 할 때에 高句麗가 뒤를 돌볼 여가가 없는 이 기회에, 新羅는 高句麗의 땅 五百여 리를 절취한 일이 있다. 아무리 지금 百濟에게 성을 빼앗긴 것이 분할지라도 내 한 일을 생각하면 高句麗에는 염치에 못 갈 것이어늘, 거의 理性을 잃었기에, 더우기 왕의 지친 金春秋가 몸소 高句麗까지 갔던 것이다.

高句麗에서는 좋은 기회라고 金春秋를 잡아 가두고 전날 강탈한 五百里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조선에 전하응 유명한 이야기─ 龍王의 딸이 병들었는데, 토끼의 간을 먹어야 낫는다 한다. 거북이 그 큰 사명을 띠고 계고를 베풀어 토끼를 잡아 왔다.

죽게 된 토끼는─ 계교로서 거북을 속이고, 死穴을 벗어났다. 죽음을 면하는데는 智慧가 있어야 한다…… 어느 高句麗의 智者에게 이 힌트를 얻은 春秋는 高句麗 朝野를 속이고 死血을 벗어났다.

이번에는 다시 구원을 청하려 당나라로 갔다.

당나라는 高句麗에게 천천의 한을 품고, 꼭 高句麗를 멸해야 속이 펴겠는데, 百萬, 二百萬의 대군을 누차 高句麗에 보냈지만 그 매번을 참패, 전멸의 역사만 거듭하던 터이라, 東夷의 하나인 新羅가 궁한 사정을 할 때에 약간의 은혜를 베풀어 新羅를 끼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합작된 新羅와 唐나라는 그 합한 힘으로 우선 百濟를 없이하고, 다시 高句麗까지 멸하였다. 高句麗는 불행히 그때 재상 淵氏 가문에 형제 분쟁이 있어서 이 때문에 온 국력을 적에게 붓지 못하고 그만 쓰러졌다.

본시부터 檀君 겨레라는 관념이 희박하던 新羅는, 한 사사로운 원념으로 외국의 힘을 빌어 자기 겨레 둘을 꺾은 것이다.

古史를 보자면, 漢族의 泰이 망하매 泰人이 많이 韓地로 망명해 왔다. 馬韓이 泰人에게 땅을 베어 주어 살게 하였는데 그것이 泰韓─ 와전되어 辰韓이라 했는데, 新羅가 辰韓 땅에서 생겼으매 支那 계통의 피로 꽤 섞이어 있을 것이다. 倭와 가까운 땅이라 先住種인 倭의 피도 꽤 섞이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만치 「배달」정신은 가장 미약하던 나리이다.

그러나, 시조 朴赫居世의 誕生神話가 벌써 「배달」겨레의 것이요, 次祖 金閼智 역시 그러하고─ 卵生說과 말(朴赫居世의 白馬 징조, 海扶婁의 所乘馬) 黃金錄(金蛙王의 金色蛙形, 金閼智의 黃金櫃=加羅始祖 首露王도 같다)의 인연 등─ 모든 점으로 「배달」겨레임에 틀림이 없다.

高句麗와 新羅가 國家籍이 서로 다르고 국경이 상접하였으니, 국경선 분쟁은 늘 있었을 것이나, 종족과 종족의 투쟁이 있을 때는 高句麗는 二千里의 길을 멀다 하지 않고 달려와서 新羅를 보호하고 外賊을 물리쳐 주고 하였다.

그 高句麗가 북쪽에서 종족 결사전을 할 때에 남쪽에서는 이를 호기회라 하여 高句麗 땅 五百里를 절취하였다. 같은 겨레라는 점은 둘째 두고서라도, 儒敎 정신으로든 武士道(花郞道)로든 용서치 못할 일이다.

그러고도 그 뒤 百濟에게 침략을 받게 돼매, 재래의 관습대로 高句麗에 보호를 청하러 갔다. 그때에 만약 高句麗에서 新羅의 그 괘씸한 행사(대적을 맞아 사투하느라고 다른 데 돌볼 경황이 없는 때, 남방 五百里르 훔쳐간)를 생각지 않고 新羅의 소청대로 조력을 해 주었더면, 新羅와 唐나라의 結合은 생기지 않고 말았을 것이로되, 高句麗야 또한 어찌 그 원혐 잊을 수 있으랴?

金庾信은 新羅 一千年의 가장 빼어난 영웅이었다. 그러나, 「배달 겨레」라는 큰 눈은 끝끝내 떠보지 못한 ─ 말하자면 지방적 영웅이었다.

'金富軾三國史記 高句麗篇' 맨 끝에 撰者의 견해가 있는데 가로되,

「値隋唐之一統, 而猶拒詔命以不順, 因王人於土室, 基頑然不畏如此, 故屢致間罪之師, 云云」

하였다. 즉 高句麗가 강성하여, 隋와 唐이 漢族을 통일한 뒤에도 漢天子의 명령에 좇이 않고 天子의 使臣을 土室에 가두는 등, 이렇듯 완명무쌍하여 문죄하는 정벌도 여러 번 받았다는 것이다.

새삼스러이 金富軾의 「頑然不畏」를 책하여 무얼 하리오마는, 新羅人의 당연의 공통된 사상이 이러했을 것이다. 배달 겨레 발상지에서 떠나기 二千里요, 발상시에서 흐리기 三千年이요, 漢이 倭의 피가 적지 않게 섞인 新羅이니,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도리어 일본인의 기록이 볼 점이 있으니 가로되.

「中世 이후, 漢人은 늘 대륙(支那)에 제압되어 이로써 效順聽命, 北主(支那)에게 복종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알았다. 그러나 高句麗는 그렇지 않아, 엄연한 不?獨立의 한 왕국이었다. 漢, 爲 이래, 大陸遺滅하여, 禹城(支那) 破殘의 날에 朝鮮, 夫餘, 遼東 등 境外의 땅, 누가 이를 수습하고 백성을 보호하고 땅을 유지하여 그 禹城의 소란을 對岸의 불로 구경하며, 백성들이 밭갈고 베짜는 祖業에 安亨할 수 있게 하였는가? 진실로 동방의 一雄國 高句麗다. 隋, 唐이 새로 일어 대병으로 위협하지만, 力戰에 이를 물리치는─ 마땅히 처할 길이다.

煬帝와 太宗은 스스로 驕하여 스스로 패했다. 이 스스로 패한 허물을 小國(高句麗)에게 씌워 이를 종내 멸했으나 高句麗는 제 할 일을 다 하였다.」운운(大義)

漢族은 新羅와 倂力하여 高句麗를 멸한 뒤에, 高句麗의 再起를 겁내어 高句麗의 亡人을 사면으로 흩고 高句麗의 땅을 쑥밭을 만들었다. 자고로 전쟁에 져서 나라이 망하면, 그 亡國의 治者는 없어지나, 토민은 그냥 남고, 戰勝者가 새 통치자가 되는 것이어늘, 唐은 高句麗에 대하여 그러하지 않고, 토민까지도 사방으로 흩어 버리고, 모든 성을 쑥밭을 만들어 버렸다. 그만치 姑舅를 무서워하고 미워하던 것이다. 戰勝同事者로 발언권을 가진 新羅역시 머리를 돌리고 전혀 관계치 않으려 하였다.

新羅는 唐의 힘을 빌어 같은 겨레의 두 友國을 엎기는 했으나, 영토도 더 늘은 것이 없고(서쪽으로 百濟의 옛터가 조금 新羅의 왕권 하에 들었다가, 그것이나마 後百濟 甄萱이 일어서며 도로 百濟領이 되었고, 북쪽으로는 대님形으로조금 더 생겼다가 弓裔에게 도로 앗겼다) 북쪽 담이 없는 허전한 세월을 좀더 보내다가 高句麗 後人 王建이 「배달 겨레」의 나라 「高麗」를 세우는 바람에 거기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新羅 一千年─ 辰韓 땅 한 구석의 조그만 부락에서 일어 이웃 동료 부락 가운데 出監하여 新羅國으로까지 오르기는 하였으나, 金春秋, 金庾信─ 즉 善德 초기까지도 여전한 미약국이었다. 唐나라와의 연결에 성공하여, 唐나라와 연합하여 百濟를 칠 때에도 黃山 싸움에서 新羅는 百濟의 몇 십 배 되는 병력을 가지고도 몇 十분의 一되는 百濟와 네 번 부딪쳐서 네 번을 다 도리어 참패하였다. 그러나 그 새 敎育으로 배양한 애국 사상과 화랑도 정신을, 이 긴박한 아침에 군중에 환기를 시켜서 승리를 얻었다.

藝術(노래, 춤)에 의지한 「애국사상 주입」과 花郞으로서의 무사도 고??? 등, 국민 개조의 큰 노력으로, 단시일 새에 新羅를 改建한 金春秋와 金庾信의 힘은 경탄할 바이지만, 그것을 계승할 좋은 후계자를 못 가졌기 때문에 이 兩金 合作時代를 지나서는 다시 수그러져 들어 갔다. 즉 그 兩金 合作의 수십 년간만으로서, 新羅는 上下 千年에 이름을 그냥 남긴 것이다.

다만 千載後인 오늘날까지도 그냥 아까운 것은, 그들(兩金)이 좀 더 널리 「배달 겨레」라는 것을 알았더면 하는 점이다. 卞韓 땅인 駕洛의 왕손 金庾信이 新羅에 들어 新羅의 충신, 新羅의 영웅이 되었으니, 한 걸음 더 나아가 檀君 종족의 수호자로 발전하였더면 庾信 자신이나 우리 민족이나 얼마나 더 좋았으랴?

사람에게 靈이나 魂이 있다 하면, 新羅 시조 朴赫居世의 靈은 檀君과 東明 두 靈前에 가슴을 피며 불초불효한 후손을 사죄할 것이다. 高句麗와 新羅─ 언어가 서로 같고 풍습이 같고(巫며 사당이며 제사를 즐겨한다) 신앙이 같고(하늘, 해, 별, 山川)─ 이러한 같은 겨레를 불러들인 당년의 新羅 위정가의 실태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분노를 금할 수 없다.

新羅와 漢族(隋건 唐이건)이 연합해서 南과 北에서 협공했기에 말이지, 그렇지 않았더면 高句麗는 끄떡도 안하였으리니, 그것은 隋가 全漢族의 總合力으로서 전후 네 번 計 二十여 년의 내침에도 高句麗는 끄떡 없었고, 도리어 隋가 제가 부서져 나갔으며, 隋를 계승한 唐나라도 高祖로부터 太宗, 高宗 三代에 걸치어 五十년간 全支那族의 총합력으로 무수한 내침을 하였으나, 新羅가 남쪽에서 협력을 하고서야 비로소 高句麗를 멸하였으니 高句麗의 실력을 가히 알지며, 新羅의 내응(즉 逆族)만 없이 高句麗 사직이 그냥 계속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면─ 소위 假定詞를 붙이지면 끝이 없지만, 이런 假定詞를 붙여 보자면 진실로 가슴아픈 일이다.

그런데 여기 좀 부언할 말은, 『新唐書』는 漢族의 기록이니 高句麗 복멸을 唐의 힘인 듯 기록하는 것이 당연하나, 三國史記의 撰者로서 조그만치라도 「배달」겨레라는 것에 생각이 간 사람이었더면, 高句麗 복멸에 대하여 좀 다른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新羅의 犯過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즉 高句麗는 新羅와 唐의 무력에 의지해서만 넘어진 것이 아니다. 高句麗 재상 淵蓋蘇文이 죽고 그 아들 형제간의 다툼이 심하여, 국내의 힘이 벌써 꺾어졌기에 넘어졌지, 그런 내부 알륵만 없었더면, 新羅와 唐의 합친 세력일지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수와 당의 내침사(隋와 唐의 來侵史)[편집]

漢族의 나라이 생기고 배달족의 나라이 생긴 이래 漢族은 그 독특한 존대성 때문에 까닭 없이 배달족을 미워하였다. 배달족이 다른 蠻族들같이 비문화적이요, 따라서 漢族을 聖天子의 裔로 맹신하여 주었으면 문제 없을 것이로되, 배달족은 그 독특한 不咸文化를 가지고 漢族에 대항하며 굴하지 않는 데서, 尊大性인 漢族에게 증오를 사고 적개심을 품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漢族은 자기네가 스스로 한 덩어리로 단합하지 못하여 배달족을 노려보기만 하고 손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隋가 漢族을 통일하면서 단 한개의 힘이 되니, 그 힘은 곧 배달족 격멸로 향하게 된 것이다.

隋가 처음 漢王 諒을 시켜서 高句麗를 三十만 대군으로 치다가 돌아간 데 대해서먼 다만 「軍中에 병이 생기고 또한 풍랑에 많이 엎어져서 회군했는데, 죽응 자가 十中八,九」라 했을 뿐 상세한 기록은 없으니 알 수 없지만 三十 만대군이 왔다가 「死者十中八,九」로 돌아간 것은, 단지 풍랑과 병만으로 돌릴 수 없고, 高句麗 역시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니 참패한 것이 분명하고,

嶺營왕 二十三年의 그 유명한 薩水戰이 있은 침략 때에는, 隋煬帝의 軍은, 左軍이 計 十二軍으로 열 두 가닥의 길로 右軍도 十二軍으로 열 두 가닥의 길로, 총합 二十四軍, 二百十三萬三千八百將卒이 스물 네 가닥의 길로 平壤???서 모두 집합하기로 하고 隋京을 떠났다.

차례로 떠나는 것이 四十일이 걸렸다 하며, 旗幟槍劍이 千里를 뻗쳐, 미증유의 出師之盛이라 隋書에 기록되었으니, 과연 전대미문의 장관이었을 것이요, 인류사상 과거에 보지 못한 대동원이었을 것이다. 三十萬兵으로 시험하여 보아서, 高句麗는 이만한 백만이 넘는 동원이 아니고는 어쩔 수 없음을 측정하고서 한 일이다. 그리고 煬帝가 호령할 수 있는 全支那의 총 집결일 것이다. 더우기 전투원이 一百十餘萬이요, ■運者가 倍라 하니, 합계 三, 四百萬의 동원이다.

전쟁의 兵士라기보다 오히려 민족 대이동에 흡사한 내침에 대하여, 高句麗는 大臣 乙支文德 지휘 아래, 淸野─ 즉 연변은 싹 쓸어서 띠끌 하나 없이하고, 온 국민은 성안에 잠겨버리고, 성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성내에는 양곡이 충분하고, 성은 견고하다. 賊이 와서 아무리 쳐도 성은 부숴지지 않고, 따라서 항복하는 성은 없다. 이 반향 없는 성에 대하여 헛 공격만 한참 하다가 단념하고, 賊이 집결 목표지인 평양으로 향하여 떠나면 성문은 홀연히 열리며 高句麗軍이 달려 나와서, 殿軍을 엄습하고 양곡을 빼앗고 한다.

沿邊을 淸野하였으매, 현지에서는 식량을 노획할 수 없고, 본국서부터 가져오던 양곡도 이렇듯 차차 빼앗기고─ 高句麗 땅에 深入하면 深入하느니만치 근심은 늘어가고, 항복받은 성은 하나도 없고, 장차 결과가 어떻게 될지─ 그저 눈 감고 진군할 뿐이었다. 帝命이니……

이 대군이 목적지 가까이 온 때, 高句麗 대신 乙支公은 적에게,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라고 좋은 말로 타일러서 물러가기를 종용하였다. 이것은 뒷날, 唐의 太宗에게 司空玄齡이 病床에서 한,

「知足不辱, 知止不殆, 陸下威名功德旣云足矣」란 것과 똑같은 말로서, 그저 물러가면 곱게 보내 주마는 약속이나 일반이다.

그러나 이 좋은 조언을 듣지 않고 그얀 버티다가 역사 이래 전무한 참패를 하고 쫓겨간 것이다. 그래도 隋書에는 「奔還」이라 하지 않고 「班師」라 했다. 그러고 都元師 宇文述 등 敗將의 벼슬을 깎고 尙書 劉士龍 등을 斬했다.

이듬해에 宇文述 등의 벼슬을 다시 주고, 丁男 十萬을 모아서 또다시 高句麗를 엄습하러 갔다. 갔다가, 玄感 등의 반란에 겸하여 兵部侍郞 斛斯政이 高句麗로 달아나 투신하기 때문에 班師했다. 隋書는 기록하여, 순전히 자신의 사정으로 自意回軍한 듯이 되어 있지만, 이것은 무론 支那式의 隱諱的 기록일 것이고, 그 해 十月에, 隋帝는 또 百寮를 모으고, 高句麗 칠 일을 의논하매,

「數日無敢言者」

라 하여, 신하들이 어이 없어, 맥맥히 며칠 간을 아무 말도 못하였다 한다. 狂人이 아니고서야, 그만치 혼이 난─ 게다가, 그 새의 경험으로도 隋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高句麗를, 더우기 精銳壯丁은 다 遼東에 잃고, 껍데기만의 隋로서 또 어쩔 生念이 어찌 될까?

그러나 隋가 넘어지느냐 高句麗를 넘어 뜨리느냐, 악에 바친 隋帝는 帝權으로 억압하여 또 出師하였다.

이때에,

「(隋書) (…략…) 高麗遺使請降, 上(隋帝) 大悅」

「(金富軾 三國史記) 王(高句麗)懼遺使乞降」

즉 高句麗가 겁나서 항복하기를 청했다 한다. 아직껏 내내 쾌승해온 高句麗가, 더우기 지금 한창 내란이 일어 生死가 조석에 있는 隋에게 항복하기를 청했다 한다. 漢人이라도 이 말을 믿은 자 있으랴. 隋人의 기록은 혹은 그의 존대성으로 그런 맹랑한 소리를 쓸 것이로되, 우리의 겨레에서 그런 소리를 쓰려면 손목이 부러지지 않던가.

隋는 내란이 일어서 종내 사직도 전복되고, 李唐이 支那의 주인이 되었다. 高句麗에서는 ?陽王 승하하고 榮留王이 등극하였다. 唐나라에는 高祖─

唐高祖는 高句麗王께, 漢土에 있는 高句麗人과 高句麗에 있는 漢人을 교환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高句麗에 있는 敗殘隋軍(포로가 되어 종 노릇하고 있는) 萬餘를 물려 주고, 高句麗人 在唐者를 받아오고, 또한 道士(老子學者)를 몇 사람을 고빙해다가 그 講을 들었다. 이때에 唐高祖는 좌우에게 「名實은 相副하여야 하는 것하여금 니데, 高句麗王는은 隋의 臣이라 하나 종내 隋帝의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이래서야 무엇이 臣下냐. 朕도 품안의 백성이 인젠 안돈되었으니 구태여 싫다는 高句麗王을 臣으로 하잘 것이 무엇이냐」는 의견(즉 高句麗와는 아주 결련치 말고 살면은 어떠냐는)을 내었다가 裵矩 溫彦博에게「遼東은 본시 箕子의 터로서 魏晋때네 內封이 되었읍니다. 중국과 夷族은 마치 해와 列星같아, 마땅히 높고 낮은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고 반대 받았는데, 이 사상이야말로 支那族으로 하여금 高句麗人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따라서 高句麗는 마땅히 支那人에게 머리 숙여야 한다는 그 근거가 되는 사상이다.

唐은 또, 司馬長孫師를 보내서 隋의 高句麗 땅에서 전사한 백만 亡靈을 제사하게 하고, 高句麗가 세운 바 京觀(高句麗 戰勝을 기념하는)을 헐어버렸다. 이로써 唐도 분명 高句麗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는 점을 깨달은 高句麗는, 夫餘땅에서 바다까지 千餘里의 長城을 쌓아 장차의 적의 來寇에 방비했다.

唐에는 高祖 下世하고 太宗 李世民이가 皇位에 오르고, 高句麗는 일대 영웅 淵蓋蘇文이 재상의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高句麗로서는 불난 데 도적 같은 新羅에게 약탈당한 五百里의 땅을 계속적으로 조금씩 회수해 들어갔는데, 新羅는 자력으로는 그것(훔친 땅)을 유지할 수가 없어 唐나라에 구원을 졸라대었다.

여기 대하여 太宗은,

「高句麗는 본시 겨우 四郡인 小國이다. 朕이 遼東으로 대군을 보내 치면 나라를 기울여 이를 막을 터인데, 이때 舟師를 바닷길로 평양으로 보내, 수륙 함께 치면 고구려 따위는 볼 것 없겠지만, 지금 山東이 조락하여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朕 차마 民勞를 못 보겠다. 그러니까 契丹, 靺鞨을 高句麗에 보내서 좀 뒤흔들면 어떨까.」는 의견을 내었다가 長孫無忌에게, 「高句麗는 재상 연개소문이 포악하여 오래잖아 세력이 숙을 터이오니 그때 치는 것이 좋을 듯 하옵니다.」

高句麗를 무서워하는지라, 그저 피하기 위주하는 이 의견에 좇기로 하고, 그 대신 우선 玄?을 使臣으로 高句麗에 보내어서 신라 征討를 멈추기를 부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太宗의 親臣 玄?을 맞은 高句麗 淵蓋蘇文은 玄?의 소청을 단연 거절하였다.

「연전에 우리가 隋賊을 맞아 싸우노라고 남방을 돌볼 경황이 없을 때, 新羅는 그 기회에 우리 땅 五百里를 훔쳤소. 지금 거진 도로 회수했지만 아직도 약간 더 찾아야겠소. 내 땅만 다 찾고는 新羅땅은 단 一尺도 손대지 않을 터이니 안심하오.」

그러나 玄?의 참 목표는 新羅 문제 따위가 아니라 고구려 警備의 虛實을 엿보는 데 있었다. 玄?은 자기의 탐지한 대로 太宗에게 보고하였다.

이리하여 唐太宗의 高句麗 원정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나라의 父老들을 모으고, 또는 재상들에게 이 일을 의논하면 한결 같이,

「醜類善守, 難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支那(隋) 몇 億萬衆을 굴복시킨 太宗의 의기로 高句麗 따위는 우습게 여겼다. 어떤 小捿에서, 「高句麗傾國來, 一麾而破, 天贊我也」라 한 것을 보면 萬丈한 그의 기개를 알 수 있다.

唐太宗의 來侵記는 新唐書에 마치 소설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唐太宗이 전쟁에 능하다는, 말하자면 稱讚錄이요. 金富軾의 三國史記는 그것을 고대로 베낀 것이라 신빙하기 어렵고, 신빙한다 할지라도 몇 개 성에 대한 攻略記일 따름이요, 도리어 言外文字를 찾아보고, 傍考하자면, 遼東 安市城에서,

「勅諸將擊之, 三日不下, 有詔班師(…略…) 酋長(安市城主) 登城再拜, 帝嘉其善守, 賜絹百匹云」하였으니, 사흘을 공격하다가 함락되지 않으므로 回軍(唐으로)하였다 하니 백만 대병을 이끌고 원정을 와서 연전 연승하다가 安市城 싸움에서 사흘 공격해 함락 안된다고 그냥 귀국한다는 것이 벌써 말이 안되고, 安市까지 오는 동안에 무수한 곤란과 敗와 손실을 보고 安市城에서는 더 무서울 일을 겪어서, 더 꿈질거리다가는 큰일날 조짐이 있었기에, 初志를 단념하고 차마 돌아설 수 없는 발을 돌렸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공격하다가 쫓겨가는 敵帝를 安市城主가 登城拜送했다는 것은, 支那人의 尊大性의 산물이요, 三國史記에도 그리 기록한 것은 賣族儒의 妄筆일 것이다.

여기서 크게 參考되는 글이 있으니, 즉 支那人의 소설로서, 소설의 덕에 우리는 安市城主가 楊(惑曰 梁) 萬春이란 사람인 것을 알았고, 太宗이 楊城主의 쏜 小弓에 한 눈을 잃어 애꾸눈이 된 것(高麗 文豪牧隱 李穡의 詩에도 太宗 失眼을 吊한 것이 있다)을 알았고, 이로써 단 사흘 공격하다가 창황히 退走한 까닭을 알았다.

柳公權의 소설은 또한, 「太宗望之 有懼色」을 말하고, 이어서,

「六軍(唐의)爲高句麗所乘, 殆將不振, 候者告英公之 麾黑旗被圍, 帝大恐」을 말하여 新唐書와는 전연 반대의 사실을 알려 준다.

唐太宗은 「나는 隋氏와 다르다. 高句麗 따위는 太陽前의 草路다」고 큰소리 치며 갔다가 불소한 손실과 一眼滅의 쓴맛을 보고 「班師」하여 다시는 隋氏 비웃을 용기도 잃고, 이듬해 그래도 또 牛進達, 李勣 등을 시켜 侵伐하였다. 또 그 이듬해에도 또 같은 일을 하였다. 그러나 어떤 싸움을 하고 勝負가 어떠하였는지, 「衝火而歸」라 하였으니, 몇 군데 불이나 놓고 奔還한 모양이다.

「少發則威不振, 多發則人不安, 是天下疲宇轉戌 云云」

이로 보아서 天子의 위신상 小兵을 보낼 수도 없고, 大兵은 인젠 없기도 하거니와 보내기 어렵고, 큰 두통거리던 모양이다. 이에 二萬, 三萬씩을 연해 보내서, 소위 게랄라전을 하여 高句麗로 하여금 농사를 못 짓고 피곤하게 하려고 정책을 바꾸었다. 그리고 水兵이 없는 高句麗를 침공함에 水戰을 하려고 많은 배를 만들기를 명하였다.

그러다가 唐太宗은 많은 한과 욕망을 품은 채 하세하였다. 高句麗에도 재상 淵蓋蘇文이 별세하고 그 아들이 뒤이어, 아들들의 분앵이 차차 커갔다. 高句麗에 이런 내홍이 있어서, 아들들이 제각기 군사를 가지고 兄弟相殘이 극도에 달한 때, 唐나라는 新羅를 손에 넣고 隋二代, 唐三代 計五帝의 숙망을 이루어, 高句麗를 꺾은 것이다.

唐太宗─ 『貞觀政要』며 『帝範』을 찬술시켜 帝道를 알리고 大聖人이라는 일컬음을 듣느니만치, 唐太宗은 비범한 임금이요 帝王 중의 최고 인격자였다. 그 唐太宗도 高句麗에 대해서는 끝끝내 理性을 못 차리고 덮어놓고 정벌하괒, 자기 역량과 高句麗 역량의 측정 비교까지 큰 오산을 하여 生前에도 「小醜」에게 한 눈을 잃고 死後에는 비웃음을 천재 후까지 남기고, 漢族백만을 요동에 죽였다.

唐太宗 같은 偉人으로도 그렇듯 高句麗를 미워하였다. 아니, 唐太宗이기에 남보다 더 미워했을 것이다. 高句麗와 漢族 국가는 양존치 못할 것을 누구보다도 똑똑히 알고, 兩存하려면 漢族이 高句麗에게 굴하여 지내지 않을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漢族 나라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高句麗를 복멸해야 할 필요를 알고, 高句麗 복멸을 帝一代의 유일이요, 최대의 사명으로 여기고, 그 사업에 일생을 바친 것이다.

隋가 넘어진 것을 보았고, 唐太宗 자신도 큰코를 다친 경력이 있는지라 高句麗의 실력은 몰랐을 까닭이 없다.

그러나 몇 억이라는 무서운 숫자의 국민과, 또는 여름에도 얼음 어느 북쪽과 겨울에도 꽃피는 남쪽을 가진 광대한 국가라는 경악할 「大」를 분할하여, 계속적으로 게릴라전을 하여 高句麗를 피곤케 넘어지게 하려는 전략으로, 희생(당초부터 희생은 각오한 일이다)의 막대함을 불고하고 초지를 굽히지 않고, 최고의 목적을 달한 것이다.

「이름이 천하를 덮고, 攻이 사해에 넘치거늘, 무얼하려 폐하 東方의 小夷를 쫓다가 욕을 스스로 사나이까.

이런 따위의 諫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帝 스스로의 이름이나 攻을 사려고 하는 노릇이 아니요, 堯舜의 裔의 萬年之計를 위하여 하는 일이다.

高句麗는 이 唐太宗의 漢族 옹호의 결의에 배달족을 대표하여 대항하다가, 淵氏門內의 내분과 배달족 新羅의 背族 행위의 三方 포위에 그만 넘어진 것이다.

무력적으로도 이러했거니와 이 종족(특히 新羅가 最甚했다)의 새에 支那 계통의 학문이 잠입되어, 이 학문의 중독으로 民族祖보다도 儒師를 존경하고, 자기를 小華라 자랑하고, 侵略魁 箕子를 國祖라 崇奉하고, 眞祖 檀君을 소홀히(심지어 부인)하며, 編史者는 자기 겨레의 하나이 꺾이는 것을 「天罰」이라 하며─

宗敎는 아편이라 한다. 儒敎는 한낱 학문이지 종교는 아니면서도, 그 및는 영향은 종교와 다름이 없다. 儒敎의 학문적 교양보다, 儒敎의 敎主崇仰의 노예성과 게다가 儒敎 創始國 및 그 종족 절대 尊拜의 亡國性을 우리 국민성으로 포섭한 사람들은 高句麗 멸망에 「만세」를 불렀으리라. 漢人보다도 더 큰 소리로─ .

삼국 국호(三國 國號)[편집]

日本人은 「韓이며 高句麗도 건국 초에는 글자며 歷日이었다. 朴赫居世 건국을 韓 宣帝 五鳳 元年 동이란 것은 후일에 꾸며낸 말이다」 운운하여 마치 자기 나라 일반으로 여기나, 이는 악의의 曲筆이지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新羅는 奉人의 모딤으로 된 나라이요, 百濟는 箕準의 터를 물려받은 나라이니 건국 전부터 漢字가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요, 高句麗는 支那 영토와 땅이 맞붙었고 支那의 亡命人이 끊임 없이 건너와 귀화한 扶餘뿐 아니라 뒤니, 무론 漢字가 꽤 보급되었을 것이며 더우기 그 國號로 보아, 支那人은 支那人의 나라 아닌 타민족의 나라에 대해서는 발음만 비슷한 고약한 글자를 붙여서 그 나라 국호로 해 주었으니, 만약 高句麗며 百濟며 新羅도, 각각 자기네가 그런 優美한 글자로써 국호를 삼기 전에 支那와 교제가 있었다 하면, 발음만 따서 「凋蟬」「孤狗驢」「拍罪」「?螺」라든, 무슨 劣惡 글자로 붙이지, 「朝鮮」「高句麗」「百濟」「新羅」등 優麗한 글자로는 안 쓸 것이다.

그런데 支那人과 교섭이 생기기 전에 벌써 각각 제 나라를 제 뜻에 맞는 漢字를 붙여 두었기 때문에, 支那人은 할 수 없이 그대로 습용한 것릴 것이다─ 이 점만으로도 三國은 건국 전부터 漢字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 이전에도 배달 민족이, 자기 민족 혹은 국가를 가리키기 위하여 쓴 한자를 혹은 「檀君」혹은 「王儉」혹은「朝鮮」혹은 「韓」「辰」무엇 무엇, 그다지 고약한 글자는 없는 것이, 즉 漢字가 썩 고대부터 이 민족에게 사용되었다는 증거이다.

그 대신 순전히 이 말씀의 地方語로서 조직되었던 官名 등은, 支那人이 그 발음에 유사한 고약한 漢字를 골라 붙였으니, 高句麗의 부족을 「絶奴部, 順奴部, 消奴部 등등」이며 일일이 들출 것이 없이, 모두 고약한 글자로 붙였다.

타민족은 「倭奴」「犬戎」「匈奴」며, 流求는 流鬼(新唐書)라는 등─ 진실로 支那人은 마음씨 곱지 못한 인종이다.

부여계통(扶餘系統)의 백제시조(百濟始祖)[편집]

일본의 이름 있는 역사가요, 百濟 연구가라고 하는 「今西龍」이며, 그 밖 일본 학자들이 두고두고 머리를 기울이는 일이 있다. 즉 그들은 가로되─

「어떤 지역에 어떤 사람이 한 나라를 세우고, 그 곳 임금이 된다 하는 것은 지나가다가 갑자기 되는 일이 아니요, 그럴 만한 연유와 역사와 배경 등을 가지고서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무력으로 정복을 하거나. 그런데, 여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즉 百濟의 시조 高溫祚는 馬韓 땅에 百濟國을 세웠다. 그런데 그 高溫祚에서 樂浪(支那 영토) 千里를 건너, 扶餘 땅에 있는 高句麗國의 王子이다. 이 高句麗 왕자가 扶餘 지역에도 빈땅이 많고 많거늘, 그 곳을 버리고 외국 영토인 樂浪도 지나서 馬韓까지 내려가서 거기다가 나라를 세웠으며, 馬韓人은 또 어찌하여 자기네와는 민족 계통으로건 어디로건 아무 관련도 없는 高句麗 왕자를 자기네의 임금으로 맞았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高溫祚가 扶餘 계통의 왕자인 것은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扶餘 王子인 高溫祚가 나라를 버렸고 樂浪도 지나서 馬韓땅에 내려가서 百濟國을 들린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운운」

韓史의 일부분을 고의(악의)로 부인하고, 그런 뒤에 그 부인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이런 모순에 봉착하여 쩔쩔 매는 것이다.

우리 역사를 가지고 가장 상식적으로, 가장 자연적으로 해석하면 아무 이상한 일도 없는 바인데, 그들은 우리에게서 檀君을 부인하고, 따라서 단군 시대에 단군께 예속되었던 영역이 「扶餘全域과 樂浪 등 漢領 전부와 三韓全域」이라는 前史를 부인하고 거기서 출발한 결론으로 북부 扶餘地方, 半島中部 漢領地方, 남부 三韓地方, 이렇듯 세 토막으로 나누고 보니, 북부 扶餘의 왕자가 아무 인연도 없는 馬韓에 와서 임금이 된다는 것이 이상하고 알수 없는 수수께끼로 보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역사를 기본삼아, 가장 자연적이요 상식적으로 해석하자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聖祖 檀君이 압록강 연변이여, 長白山 줄기 지역에 터를 잡고 나라를 들리고, 그 德化가 차차 널리 퍼져서 남쪽은 반도의 최남단까지, 북쪽은 인류가 살수 있는 最北까지, 동쪽은 바다까지, 서쪽은 遼의 全域이 檀君께 예속케 되었다.

이 단군 후예의 평화로운 발전은 韓民族의 팽창과 충돌하여 반도의 중부 지대는 箕子를 수령으로 한 漢族의 침략 때문에 잃어버리고 檀君領城은 허리를 끊겨 두 조각에 났다.

불, 빛, 밝, 해, 한 등은 이 단군 민족의 거룩한 상징이요 내셔널 심볼이다. 두 토막에 난 북부지방은 「불」에서 와전된 「부여」라는 지방 이름 겸, 민족 이름 겸, 나라 이름 겸, 임금의 성씨 겸한 말로 알리웠다. 北扶餘의 임금 解扶婁는 「해」와 「불」뿐 아니라 합칭으로, 거룩하다는 상징이며, 하늘의 아들이요 高朱蒙의 아버지는 「解慕漱라 傳한다.

남부로 갈린 부분은 「낳 」이라 하며 「韓」字를 여기 맞추어 三韓이라 하게 되었다.

하늘을 상징하는 「解慕漱」의 아들 高朱蒙이 하늘의 뜻을 받아 이 민족의 통솔자가 되어 高句麗國을 건설함에 그 세째아들 高溫祚가 멀리 남쪽에 (漢領을 지나서) 있는 단군 후예의 한 갈래를 품고자 아버지의 나라를 떠났다.

同族과 갈려 남쪽에 馬韓이라는 일컬음으로 분리되어 있던 분자들은 평생 그리던 조국의 왕자를 맞아서─

더 부연할 필요도 없다. 日本人이 두고두고 「엄연한 사실이지만 부자연키 짝 없는 사실이다」고 하던 일이 어디 추호나 부자연한 데가 있는가? 檀君을 부인하고 三韓(日人 가로되, 三韓族이 오늘날의 朝鮮族의 祖先이라 云)과 扶餘(日人 가로돼, 부여는 만주인의 祖先이라 云)와 다 별개물이라 하여 떼어내고 보니, 扶餘의 왕자가 韓城에 내려와서 건국했다는 것이 부자연하게 보일 것이다.

스스로 굴함을 파고 거기 빠져서 해메는 것이다.

소위(所謂) 「신공정한(神功征韓)」설[편집]

소위 神功皇后의 征韓이라 하여, 日本史家며 日本人들은 크게 떠들고 있지만 韓史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

대체 일본 역사라는 것이 되는 대로 꾸며낸 것이라. 그 소위 神功이 征韓을 했다는 연대가 新羅로 보자면 어느 왕의 御宇며, 어느 연대인지 전혀 찾을 길 없지만, 新羅史에는「倭의 來侵」은 빼지 않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三韓을 석권하였노라」는 神功의 침략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倭人來侵」이라는 많고 많은 기록 중의 그 어느 하나가 거기 해당하겠지만, 日人이 자랑하고 떠드는 것 같은 「三韓席卷」大亂의 기록은 없다.

대체 「神功征韓」이라는 것은, 明治 이전까지는 일본의 학자들도 가급적 이를 감추고 혹은 말하기를 피하려 하였다. 역사에 뚜렷이 기록되었으니 부인할 수는 없지만, 모두 할 수 있는껏 小事變인 듯 덮고 감추려 하였다.

그 까닭은 神功이 征韓할 생각을 낸 바의 그 동기가 國恥에 가까운 창피한 데서 생긴 것이 그 첫째니,

「바다 건너 서쪽 나라(新羅)에는 金銀寶貨가 산적되어 있다.」는 전설이 젊은 여인인 神功의 마음을 움직여서, 지아비 天皇이 애써 말리는데도 그냥 고집 출정하였다.

그 말리던 지아비 천황이 갑자기 죽어서 (그 죽음에도 예전의 일본 학자는 의심을 두었다) 말리는 사람이 없어지매, 神功은 夫喪을 감추고 新寡婦의 몸으로 征韓의 길을 떠난 것이다.

당시(明治 이전)의 일본 학자들은, 그들이 학문의 선진국으로 추앙하는 한국에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켜서 여인이 허영심 때문에 국제적 과오를 범하였다 하여 꺼리고 감추려 한 것이다.

그것이 일본 明治 팽창기를 만나서, 해외 발전의 국시가 서자 神功의 그 행위는 선구적 영웅 행위로 찬양의 목표로 돌아선 것이다.

우리는 일본 역사(日本書紀며 古事記)에서 당시의 경위를 한번 조사해 보자.

仲哀天皇 八年 九月, 그때 쿠마소(態襲)를 정벌하던 중이었는데, 쿠마소는 잘 항복하지 않고 전쟁은 難戰으로 되었다.

그때 황후(神功)는 「神託」이라 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보잘 것 없는 쿠마소를 가지고 왜 이다지 애쓰는 것이냐. 바다 건너 서쪽 나라 新羅는 금은을 깔고 寶貨를 밞는 지역이니, 그 나라를 얻을 생각을 않고 왜 보잘것 없는 쿠마소에 힘을 들이느냐?」

天皇은 이에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사면을 둘러보고 내려와서, 「내 살펴 보아야 서쪽에는 바다 또 바다이지 물은 보이지 않더라」고 하였다. 황후는 다시 神託이라 하여,

「네 내 말을 믿지 않고 내 말을 비방하니, 너는 그 금은의 나라를 못 얻으리라.」고 일종의 위협미를 띤 선고를 하였으나, 天皇은 굳이 그 말을 좇지 않고 쿠마소 정벌만 계속하다가 그나마 이기지도 못하였다.

그로부터 다섯 달 뒤인 九年 二月, 天皇은 갑자기 죽었다.

神功은 대신 몇 명을 비밀히 불러서,

「천황이 神託을 믿지 않고 그로써 갑자기 승하했으니, 이 喪은 그냥 감추어 두고, 먼저 新羅 정벌을 한 뒤에 장례 치르자.」고 하여 시체는 그냥 감추어 두고 말았다. 금은보화의 나라 新羅 정복욕에 현혹된 神功은 기회 있을 적마다 神託을 빙자하여 新羅 정벌을 하겠다는 결의를 대신들에게 보이기를 게을리 않았다. 그러다가 그 해 가을 九月(夫喪 七개월 뒤요, 겸해 胎中 七朔이었다) 新羅 정벌을 정식으로 발표하고 군사를 모았다.

한 달 뒤 十月 三日에 新羅 원정군은 용감하게 떠났다. 이 원정군의 통수자인 神功은 임신 八개월의 남산만한 배(初産이다)를 안고 선봉으로 나갔다.

두 달 뒤인 十二月에 원정군은 「三韓을 석권하고 개선」하였다.

그 개선 사흘인가 나흘인가 뒤인 十二月 十四日에, 胎中時日 十개월 半인가 十一개월(天皇急死에서 起算하여)의 皇子가 났다.

─ 이상이 日本正史에 나타나 있는 바의 神功征韓記다.

출발에서 귀착까지, 단 1개월의 짧은 날짜에 아무리 神助가 있어서 빨리 왕복하였다 할지라도 「新羅 王이 놀라서 나와 항복하고(싸우지도 않고), 또 멀리 百濟며, 더구나 二千里 밖의 高句麗에까지 그 소문이 가서 高句麗王도 와서 항복하였다」하니, 비행기며, 有線, 無線의 電信이 있는 지금 세상에서도 보지 못할 기적이다. 더우기 신라왕의 항복하는 맹세문 가운데, 「해가 서에서 뜨고, 압록강 물이 거슬러 흐를지라도 운운」의 句가 있으니, 新羅王이 하필 왜 新羅 땅 안에 있는 낙동강을 버려두고 멀리 남의 나라 압록강을 끌어 맹세하리오.

이 여러 가지의 모순되고 우스운 점들로, 일본 학자들도 할 수 있는껏 이 소위 征韓을 외면코자 한 것이다.

지금에 앉아서 모든 정치적이며 도덕적이며의 문제를 떠나 공평하고 냉정히 관찰하자면 그때의 경위를 이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

젊은 여인─ 더구아 姙娠女─ 의 신경에 금은보화에 대한 동경이 영향되어 (이를 억누르는 부군까지 이미 제거했으니)해산키 전, 즉 産褥에 눕기 전, 아직 홀몸인 동안에 결행하고자 八개월의 큰 배를 부둥켜 안고 雲波萬里의 길을 떠났다.

新羅까지 이르렀는지, 혹은 對馬나 一岐쯤까지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물(陸)에 도착하여 그 곳 土民을 붙들고 (新羅에는 흔하고 흔한─ 그리고 일본서는 三種神器의 하나로까지 존중히 여기는) 勾玉 몇 개며 근처 土民들의 일용품깨나 약탈해 가지고 (海産이 목전이라 절대로 주저하지 못할 입장이라) 황황히 「개선」하였다. 황후가 몸소 한 일이라, 장병들이며 본토 토인들도, 「승리의 명예군이나 마치는 듯」이 맞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해적 행위라, 明治 이전까지는 쉬쉬 하여 말하기를 꺼리어 오던 것이다.

韓史에서는 恒茶飯事「倭賊」의 하나쯤으로 여기었기에 特書치 않았지, 皇后 親率의 海賊團인 줄 알기만 했더면 大書特筆하였을 것이다.

임나고(任那考)[편집]

韓人은 韓史 중에서 기록이 없다 하여 任那의 존재를 부인하려 한다.

日本人은 옛날에 日本이 남조선에 「日本府」를 두었었다─ 즉, 任那가 韓地의 日本府라 하여 任那의 존재를 과장하려 한다.

그러면 任那는 과연 있었으냐 없었느냐?

支那의 기록인『南史』며 『北史』며 『唐書』등에 편입된 '倭國傳'을 보면, 「倭國王을 武持節都督 倭 新羅 任那 加羅 泰韓 慕韓 六國諸軍事, 鎭東大將軍 倭國王으로 봉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高句麗 好太王의 비문에도 「追至任那, 加羅從拔城」이란 句가 있어 任那가 실존하였던 것은 움직일수 없는 事實이다.

그러면 韓史(金富軾의 三國史記)에서는 고의로 이를 말살한 것이 분명하다. 왜? 新羅 後人인 撰者 金富軾의 좁으러운 마음으로 옛날일망정 新羅 境內에 日本府가 있었다는 것은 싫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서 高句麗며 百濟史에도 三國史記에는 상당한 曲筆이 있을 것이 추측되거니와─

지금의 金海, 高靈 땅 근처에 옛날 日本府가 있었다는 것은 말 잘 꾸며대는 日本人에게 말하라면 허울좋은 말이 나오겠지만, 실질에 있어서는 任那에서의 日本의 패퇴일 따름이다.

檀君께서 不感山 기슭에 만년 기업을 세우실 그 당년에는 배달족밖에 남부에는 倭며 南洋 土人의 표류민들이 여기저기부락을 이룩하고 先住하여 있었다. 新羅(처음은 서라벌)도 주변 겨우 三, 四十里 내외지, 大邱地方도 후에야 新羅에 들었다. 그리고 종족 계통으로도 「배달」후예가 아닌 종족의 부락이 곳곳에 산재했으니, 「서라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검고 크고 머리털 굽실굽실하고 사람 잡아먹는 인간이 있어서 柵으로 막고 살았다는 기록으로 보면 아프리카의 식인종의 부락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가운데를 단군 후예 배달 자손이 북쪽에서 차차 남하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며 번성하였으니, 단군 후예가 크노라고 저절로 차차 압축되어 마지막에는 흔적까지 없어진 종족 가운데, 식인종도 있거니와 金海 지방의 任那 倭種도 있다.

민족 발전과 쇠망에 있어서, 반드시 밟는 과정을 밟아서 한때 반도 땅에 일본 표류민의 부락(뒤따라 이를 보호하고 감독할 日本 官府)가 생겼다가 韓族發展에 따라 消滅된다는 것은 日本人을 자랑할 것도 아닌 대신, 韓人으로 부끄러이 여길 일이 아니다.

三國史記 이외의 모든 史書가 任那 있었음을 증명하고 여기 대한 반증은 없으나, 任那는 분명 지금의 金海 근방에 존재하였었다.

백제기원연대고(日本紀元年代考)[편집]

금년이 일본 기원 二千六百 몇 해라 한다. 소위 人皇 初代 神武가 즉위한 지 二千六百 몇 해란 뜻이다. 이것은 日本의 勅定正史인 日本書紀에 의지한 연수다.

그런데 일본 학자들은 이 年紀를 믿지 않는다. 勅定史에 그렇다 하니 부인은 못하나 믿지는 않는다.

그럼 왜 믿지 않는가? 사람의 상식으로는 믿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 사람의 一世代(싫었이 나서 후계자를 낳기까지)를 二十五, 六年으로 잡아야 한다. 무론 유난히 늦고 유난히 이른 사람도 있겠지만, 평균 잡아 二十五, 六이 가장 옳다고 볼 것이다.

古代에는 早婚하는 풍습이었고 왕실 등 상류사회는 더 일찍 결혼하는 것이 통례였으니까, 왕실 등의 一世代는 二十 내외로 보는 것이 가장 옳다. 新羅가 一王의 在位率 평균 十八年이요, 高句麗가 二十二年이요, 百濟가 三十年, 高麗는 十四年 평균이다.

그런데 日本皇室의 연수를 따지면 神武에서 崇峻까지 計 二十一世 三十二帝의 世代年月은, 每代 平均 五十九年이 된다. 즉 순 아홉해 뒤에야 次代에 몰려 준 셈이 된다.

따지자면 八十生男도 없는 바 아니지만 평균 五十九年은 상식으로 승인할 수 없다. 더우기 神武에서 允恭間 十七世 十九帝 평균은 六十五─ 즉 예순 다섯 해 뒤에야 次代가 생긴 셈이 된다.

이것은 무론 상식으로 승인할 수 없는 바라, 倭學者들은 비공식(공식으로는 기원 연수가 勅定된 바라 부인 못한다)으로 부인하는 所以다. 그리고 여러 가지로 따진 끝에, 公式紀元은 실제보다 약 六百三十년 더 늘었다. 神武紀元은 二千年 조금 미만이라고 한다. 一千九百七十 몇 년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古帝들의 壽 몇 千 몇 萬歲設을 정정하기 위하여, 그 몇 千 몇 萬에서 「千」이상의 「高壽」는 떼기로, 예컨데 某天皇의 壽가 古史에 五萬四千三百二十一歲라 되어 있으면 「高數」인 五萬四千은 떼고 三百二十一만으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萬, 千만 떼니, 七百, 八百歲의 天皇이 또한 수두룩해지므로 이도 부자연하다하여, 百位까지를 없애기로 하여 壽는 모두 百歲 이하로─ 말하자면 과한 부자연미는 없어졌지만, 그 대신 새로운 우스운 것이 많이 생겼다. 예컨대, 三千四百一歲이던 帝에게서 百이상의 三千四百一歲이던 帝에게서 百 이상의 高數를 빼면, 단 一歲로 되는 등, 혹은 七十, 八十, 九十에 비로소 후계자를 낳은 등, 별의별 기굉망측한 역사가 되어 버린다.

全일본의 지혜를 총합하여 이러한 곤란 등을 걱정하고 산출해 낸 것이 「公式 紀元年代에서 六百三十年 더 깎아야 한다」는 설이요, 이것은 일본의 학자며 지식인이 이만하면 무난하다고 용인하는 바다. 즉 과히 荒誣치도 않고, 또는 일본적 자존심을 과히 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그러나 우리 韓人을는 좀더 따지고 싶으니, 즉 비유컨대 金某가 某日에 李某의 집에 간다 하면, 그 某日에는 李某의 집에는 金某가 왔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倭와 이웃에 사는 韓土에서는 某日에 倭가 왔으면 그것이 서로 들어맞아야 한다. 倭가 갔으면 韓에는 왔고, 이렇듯이……

倭의 某가 韓에 왔다 치면, 倭가 떠나기를 오늘 떠났으면 韓土에서는 어제 도착할 수는 없다. 그런 기록이 있으면 僞記錄이다.

이렇게 따져보자면 倭의 꼭두머리 神인 天照(神武의 六代祖라 한다)의 아우되는 素?命이 新羅의 牛首山에 왔다는 것이 倭史에 있다. 또한 新羅王子 天日槍(新羅史에는 그런 왕자 없자)이 神代의 倭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로 보자면 적어도 天照의 아우는, 즉 왜의 「神代」는 新羅 건국 이후의─ 더우기 牛首山이 新羅領(본시 濊 땅이요, 뒤에 高句麗 땅이요, 新羅領으로 되기는 꽤 후이다)이 된 뒤의 일로 볼 것이요, 따라서 天照의 六代孫인 神武가 紀元한 것은 新羅 건국 數百年 뒤(사람의 代數로는 여섯 대 이상 뒤)요, 지금부터 홑 千八九百年 전이라 단정할 밖에 없다(新羅 기원이 거금 二千四, 五年 전이다).

神代日本에 갔다는 「新羅 王子 天日槍」의 五代孫(一代를 三年으로 잡아도, 天日槍의 一百五년十年 뒤밖에 안된다)이 日本의 乘仁天皇(日本紀元 六百三十年頃에 재위했다)朝에 日本에 살았다 하니, 倭史는 모두 뒤죽박죽이다.

韓史에는 天支가 기록되고 겸해 支那史와 서로 연대가 거의 부합되어 그와 大錯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倭史느 뒤죽박죽이다. 그러면서도 新井白石 같이 사람은 도리어 「韓史有誤紀元」이라 하여, 같은 倭學者間의 웃음을 산 일까지 있다.

日本은 公式紀元에서 한 千年쯤 더 줄이어야 實年代가 될 것이다.

기원 二千六百 몇 해란 당찮은 말이다(끝에 참고로 한 마디 부언할 것은, 日本에 記錄術이 수입되고 역사가 좀 정확하게 된 第二十世인 安康帝부터 昭和까지 一百六世는 一代 平均 十四年强인데, 그 이전에서 거꾸로 神武까지는 一帝 平均 六十年弱으로 된다. 一世 六十年弱이던 종족이 갑자기 一世 十四年强으로 돌변한 것이다).

비미호(卑彌呼)[편집]

위에도 소위 「神功皇后 三韓征伐」이라는 것에 대하여 몇 마디 썼지만, 좀더 敷衍을 하자면─

이내인 황후(神功)의 三韓征伐하자는 의견을 억누르다가 그날 밤에 갑자기 죽은 (二月 六日死) 仲哀天皇의 그때(죽은 때)의 나이가 쉰 두 살이었고, 아내 神功은 그 뒤 七十年(六十九년이다) 간을 아들 손주 대에 攝政을 하였으니까, 당시는 二十 안팎의 소녀였을 것이다. 西方에 금은보화가 산적된 나라가 있다 하면, 한사코 손대어 보고 싶은 허영의 適齡이다. 임신 八개월의 몸을 가지고 新喪夫의 젊은 과부로서 萬里 海路를 떠난 것이다. 금은보화에 욕심이 나서……

이 무겁고 부자유한 몸을 가지고 출발(日本 筑紫에서 十月 초사흗날)부터 歸着(十二月 十四日에 해산했으니까, 귀착은 十二월 초로 본다)까지가 단 二개월이라는 짧은 날짜로, 소위 三韓을 석권하였겠는지 어떨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夫皇 仲哀가 遠征을 억금하다가 급사한 그 死因도 미흡기 짝이 없다. 혹은 「中敵失而崩」이라, 혹은 「忽病發而崩」이라 혹은 「忽痛身而明日崩」이라 등등으로 대중을 잡을 수가 없고,. 따라서 의혹이 붙게 된다. 皇室의 일이라 공공히 毒殺設을 꺼내지는 못하지만……

그리고 그 出征의 안목이 전혀 「新羅에는 금은이 많다」는 전설에 의지하여 실행된 바이라, 이 國母의 해적 행위에 남편 仲哀도 이를 부끄럽게 여겨 극력 제지하다가 급사하였고, 후일의 儒者며 학자들도 마찬가지로서 「彼不窺我, 又不叛, 出師 義無名無」(?井瀨齋)라 또는 「何據而征韓之耶」(見原益軒) 등 비난이 자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神功은 그래도 인물이었던 모양으로 漢書에도「倭는 여왕의 나라요, 卑彌呼라는 여왕이 이를 다스린다」하였고, 三國史記에도 卑彌呼의 이름이 보인다.

이 卑彌呼를 일부 日本 학자는, 神功皇后가 아니요, 다른 女酋라 하고, 또 後漢書에 「卑彌呼年長不嫁, 事鬼神道能以妖惑衆, 於是共立僞王, 侍婢一千, 少有見者, 唯一男子給飮食傳辭語, 同處宮室 云云」으로 아닌 듯도 싶지만, 그 업적 등으로 神功이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른 일부의 학자는, 「卑彌呼」■ (姬子)라 읽지 않고 ■ (日之御字)」라 읽고 神功으로 인정한다.

좌우간 스무살 안팎의 소녀로, 더구나 임신 八개월의 무거운 몸으로, 八十隻의 戰船을 끌고 멀리 해외에 원정할 생각을 내었던만큼(그 원인이며 동기는 나변에 있는 간에) 凡女는 아니었다.

왜(倭)와 왜노(倭奴)[편집]

「倭」가 무엇이냐?

「왜」와 「왜놈」은 같은 말로─ 그리고 「日本」「日本人」을 가리키는 말로,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바이다. 즉 「倭」와 「倭奴」는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明治維新이후에 차차 발흥하여 세계 열강에 한몫 끼게까지 올라간 日本人으로서는 부인하고 싶은 창피스런 칭호이었다.

더구나 萬歲一系를 자랑하는, 외국에 굴해 보지 않았노라는 日本人에게는 (타민족을 수모하기 위하여 漢人이 지어준, 예컨대 濊, 貊, 犬戎, 匈奴, 靺鞨, 鮮卑 등 같은 惡稱─ 대체 漢族은 다른 민족에게 발음이 비슷한 고약한 글자를 붙여서 불러 주는 습성이 있다─ 인) 倭奴라는 칭호를 매우 싫어하였다. 더우기 倭奴가 옛날 漢에게 예속되어 漢을 상국으로 섬겼다는 등은 절대로 부인하여 왔다.

그런데 불행히도, 九州 어떤 곳에서 어떤 농부가 밭을 갈다가 한 개의 金印을 얻었는데 거기는,

「漢倭奴國王」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것이 다른 땅에서 발견되었으면 「우리는 혹 倭는 될지언정 倭奴는 아니다. 우리 日本과는 관련이 없는 印이라」고 부인할 것이지만, 불행 日本 영역 안에서 발견된지라, 「委奴는 倭奴의 略이라고」고 밖에는 인정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면 「漢나라의 倭縣」이었다는 것은 그 金印이 명백히 증명하였다.

말을 돌려 꾸미기를 잘하는 日本人은 여기서 다시, 通商 또는 문화 수입의 필요상 용인한 외교적 문자라고 둘러대기는 하였지만, 「倭奴」 즉 왜놈이라는 칭호말은 벗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後漢書'倭傳'에,

「建武中元二年, 倭奴國奉貢朝賀, 使人 自稱大夫, 倭國之極南界也」라는 구절과 '倭傳'에,

「…略…, 至伊都國, 云云」의 句를 발견하고 여기 부회하여,

「倭國과 倭奴國은 별개 존재다. 즉 '倭人의 奴들'만이 사는 나라이 따로 있다.

日本人은 倭人일지언정 倭奴人은 아니다.」라는 말을 시작하여, 자기네는 倭奴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漢人에게 倭奴라는 말이 생기면서 우리 겨레에게는 '왜놈'이란 말이 생겼으니, 「倭」와 「倭奴」가 다르면, 「왜」와 「왜의종」이라는 조선말도 있을 법한데 그러면 이 조선말의 왜놈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뿐더러 新唐書에는, 「日本, 古之倭奴」라고 밝히기까지 하였다.

원래 日本人은 이렇듯 末節에 구애되어 마음 쓰는 인종이다. 千年, 二千年 전에 倭라 불리었으면 어떻고, 倭奴라 불리었으면 어떻다는 말인가? 현재 세계의 일등국들도 一, 二백년 전까지만 해도 「洋鬼子」가 아니었던가.?

그런 좁살스러운 인종이니까 합병 후 해방 전까지 자기네기 위해서 식민지에 불과한 조선이 옛날에는 자기네보다 훌륭하였다는 것을 샘하고 애써서 韓人으로 하여금 古事를 모르게 하려 한 것이다.

日本 문화의 스승인 王仁이 百濟人이라는 것을 꺼리어서 「王仁은 百濟에 入籍은 하였지만 그 조상은 漢人이라」는 등, 당당한 扶餘末 高句麗初의 文化産인 평양 근처 樂浪趾의 古墳發掘品을 「樂浪文化」라 따로이 이름을 붙여서 「漢文化의 일부」라는 등……

그때에 그 지역이 漢領 樂浪郡趾이니 그 治者 내지 行政者는 漢人일지 모르나, 향토문화의 주인은 그곳 土民 단군 후예인 배달 민족이요, 이르는 바 古朝鮮族이다. 그것을 「樂浪文化」라 따로이 이름 붙이고 漢文化의 일부라 하여 우리 韓民族과 떼어내는 등의, 생각하면 야쓰껍기 짝이 없는 日本人이다.

또한 단군께서 창업하신 뒤에 배달민족은 차차 번식하고 흥왕하며 차차 남하하였다. 그리고 그때에 반도의 남부(지금의 慶, 全 등)의 남쪽에는 선주민으로 倭가 꽤 많이 살고 있었다.

漢籍의 「後漢書─ 東夷傳」이며 「魏志─ 東夷傳」를 볼지라도 馬韓條에,

「…略…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云云」이라 되어 있고, 辰韓도 역시 「南接倭」로 되었고 그 중간지에 바다가 있다는 기록이거나 隔海而接倭란 말이 없으니, 三韓때에는 倭가 현재 남부 조선 지방의 선주민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古代「民族移動」時에 북방에서 남방으로 倭族이 이동하던 그 꼬리인지 혹은 표류민 등인지는 알수 없지만,

그런 때에 현재의 金海 高靈 근처에 任那府가 있어서, 반도에 건너와 있는 倭人들을 감독하던 官府였던 것이다. 일본인이 말하는 바「王家■」다.

현재 만주 輯安縣에 있는 高句麗 好太王 脾門에 보건대 百濟와 新羅는 옛날 倭奴의 巨民이 되어 있었고, 新羅王이 好太王께 구원을 청하므로 步騎 五萬을 이끌고 달려가서 보니,

「至新羅城, 倭滿其中」이라고 하였고 日本書紀에 보면 新羅, 더우기 百濟는 일본(倭)의 보호국이었던 듯이 기록되어 있다.

隋나라의 강성, 唐나라의 웅대에도 머리를 굽히지 않은 高句麗까지도, 자기네(倭)에게 朝貢한 듯이 기록한 倭의 기록이라, 얼마만치 에누리는 하여서 볼 것이로되, 百濟며 新羅가 처음 미약한 소부락에서 건국하여 차차 늘여갔으니, 선주민인 倭에게 처음은 한동안 굴하여 지냈을 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렇듯 차차 단군 후예의 漸大에 밀려서 쫓겨난 선주민인 倭人이 그 記錄에는 자기네가 자기네 임의로 百濟 王을 혹은 봉하고, 혹은 폐한 듯이 꾸미었으며 百濟王이 몸 붙일 곳이 협소하므로 자기네(倭)가 점령하였던 땅(현재 남조선의 일부)을 百濟王에게 「下賜」하여 立都居住케 한 듯이 꾸며대었다.

일본인의 기록에는 어떻게 꾸몄든간에, 배달민족의 漸大로 선주민인 倭種은 완전히 바다 건너로 쫓아낸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파사니사금(婆娑尼師今), 우노서불감(宇老舒弗邯)[편집]

일본의 勅定 正史인 日本書紀에 이르기르, 「神功女」의 남편인 仲哀王이 갑자기 죽은 것은 仲哀 九年(서기 二OO年) 二月 초엿새(或曰 닷새)라 하고, 그 十月 초사흘날 神功은 筑紫를 떠나서 新羅 정벌의 길에 올랐다 하니, 남편 죽는 전날이나 當日朝에 임신하였다 할지라도 만 八개월의 巨腹이다.

이 巨腹을 붙안고 바다를 건너 「三韓을 席卷」하고, 築紫에 돌아와서 해산한 것이 十二月 열 나흘, 즉 정신적이며 육체적이며의 太過한 격동 가운데서도 早産은커녕 一개월 晩産을 하였다.

그런데 그 神功이 (日本書紀 曰) 八十隻 戰船을 이끌고 新羅에 이르매, 新羅王「波沙寐錦」나와서 항복했다.

그런데 新羅에는 波沙寐錦이란 임금은 없고 婆娑尼師今이란 임금이 있는데, 西紀 八十年부터 一一一년까지 재위했다. 이 임금의 御宇에는「倭賊來侵」의 기록은 없다. 韓史의「婆娑尼師今」을 倭史의 「波娑寐錦」으로 보아야겠는데, 그러니까 따라서 婆娑尼師今이 神功과는 年代도 맞지 않거니와 여러 가지 점으로 미루어 日本 史學者들도 神功의 新羅 원정은, 婆娑王 때가 아니고 다른 王의 때(어느 왕의 때인지는 各設이 各異하다)라 한다.

그런데 「云云」이라 하여 이런 것이 또 倭史에 있다. 가로되─

神功이 男裝하고 新羅 원정을 떠났는데, 新羅王 宇流助富利智干이 나와서 항복했다. 그 항복하는 新羅王을 잡아서 죽이고 땅에 묻은 뒤에, 관원 한 사람을 남겨 두고 다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그런데 新羅王의 아내가 뇌물하여 묻은 곳을 곧 알아내고, 그 관원(倭)을 죽여서 父王의 시체 아래 깔아 改葬하고,

「온갖 사물에는 上下가 있는 법이라. 너는 죽은 송장일지라도 마땅히 아래 깔려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天皇(倭)은 이 말을 듣고 다시 대군을 일으켜 新羅를 아주 멸하려 했는데, 新羅 백성이 王處를 죽여 사죄하므로 일이 끝났다, 云云.

즉「波娑寐錦」이 아니고 「宇流助富利智干」이다. 그리고 一書에는 항복받고 돌아갔다 하고, 一書에는 항복하는 羅王을 죽였다 하였다. 뒤죽박죽이다.

그런데 韓史(三國史記)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으니, 즉「三國史記本記 沾海尼師今」條(서기 二五十年경)에 沾海王 三年 四月에, 倭人이 舒弗邯(벼슬 이름) 宇老를 죽였다 하였고, 同 列傳'昔于老'條에,

「于老가 倭使 葛那古를 응대하다가, 농담으로 조만간 너희 왕을 鹽奴로 쓰고 너희 王處는 부엌데기로 쓰겠다 했더니, 倭王은 분개하여 장군 于道朱君을 보내서 싸우려 하였다. 于老는 이 일은 내게서 생겨난 일이니 내가 책임진다 하고 스스로 倭의 군문에 이르러 전에 희롱으로 한 말 때문에 이렇듯 소란이냐고 하니, 왜인은 대답치 않고 于老를 잡아서 섶 위에 올려 놓고 불태워 죽였다. 그때 于老의 아들은 아직 어렸다.

그 뛰 末鄒尼師今(西紀 二六十년 경)때에 倭國 大臣이 來聘했는데, 于老의 아내는 왕께 허가 얻어 倭大臣을 집에서 향응하다가 취한 뒤(왜)가 뜰에 끌어 내려 불태워서 亡夫의 원수를 갚았다. 倭는 분개하여 金城에 내공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云」

倭記錄에는 「新羅王 宇流助富利智干」이라 했고, 三國史記에는 「舒弗邯 于老」라 하여서 좀 다르지만 「于老」와 「宇流」, 또는 焚殺, 妻의 報讐 등, 공통되는 점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倭記錄의 宇流를 于老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三國史記느 新羅古記 등 예로부터 있던 기록을 金富軾이 정리하여 撰述한 것이니, 그 王代며 年條 등은 신빙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倭史는 倭紀元 一千三百년 뒤에

「어떤 기억력 좋은 사람」이 과거 一千三百년 간의 春秋를 기억해서 述(여기 관해서는 아래 다시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한 것이니, 스스로 뒤죽박죽이 되고 先後倒錯이 될 것은 정한 이치다.

神功女(이름은 「息長帶日賣命」이다.)라는 허영심과 야심 만만한 젊은 여편네가 있어서 이웃나라 新羅에는 金銀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仲哀天皇)에게 이를 빼앗으려 가자고 조른다. 그러나 남편은 나이가 五十을 넘은 初老의 사람으로, 그런 허영에 들뜰 시절은 지난 사람이라 아내의 허욕을 꾸짖기만 한다.

이에 아내는 꾀를 내어 소위 「神託」이라 하여, 하늘의 분부까지 있으니 꼭 金銀을 구해다가 나라를 가멸케 하고 자손을 안락되게 하자고 고집한다.

남편은 산에 올라가서 사면을 살펴 본 뒤에 다시 아내에게,

「서쪽에는 바다만이지 뭍이 보이지 않으니, 무슨 나라가 있단 말이냐? 神託이라 하니 무엇이라는 神의 분부가 그러하냐?」고 묻는다. 아내는 「表筒男」「中筒男」「底筒男」의 三神의 분부라 한다.

그러나 남편은 그냥 못하리라고 금하였다. 그런데 그 이튿날 남편은 갑자기 죽었다. 소위 「忽痛身」으로……

스무 살 안팎의 젊은 여인으로, 더우기 戰地(그때 態襲지방 정벌 도중이었다)에서 남편을 잃었으면 망지소조하여 정신을 못 차릴 터이나, 이 神功女는 二, 三, 大臣과 의논하고 夫喪을 감추고 金銀 획득의 계획만 진척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神功女의 배가 점점 커갔다. 그 뒷날의 해산 일자로 보아서 故 仲哀(남편)의 씨라고는 보기 힘든 胎兒였다.

新羅를 다녀 오려면 해산 전에 다녀 와야지, 産褥 중이거나 乳兒가 품에 달리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직 홀몸일 적에 결행해야 할 것이다.

新羅에 좌우간 다녀는 왔다. 그의 결의로 보아서는 명실이 같게 三韓을 석권하고 싶었겠지만 해산기가 임박한 몸이라 욕심대로 할 수 없고, 倭土가 아닌 어떤 해안에 이르러 이 곳을 新羅로 인정하고 토민을 붙들고, 토민의 소지품(토민의 소지품이라 할지라도 아직 石器時代를 벗지 못한 倭의 눈에는 희귀한 보물로 보였을 것이다)을 약간 약탈해 가지고, 위세 좋게 개선하였다.

황후가 몸소 멀리 해외에 원정갔다가 그래도 敗歸 奔還은 아니니 倭種 건국 이래의 대사였다. 더우기 그 뒤 六十九년 간을 神功은 자손의 대에 攝政을 하였으니 神功攝政의 전 기간은 그 사건(신라 원정)을 과장하여 찬송하고 떠들었을 것이다.

生理學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는 시절이니, 人胎가 모체 속에 며칠 동안 있는 것인지 정확한 날짜는 모르고 십 개월쯤이라는 막연한 지식만 가졌으니, 父(?)死後 십 개월하고 또 열흘이나 뒤에 난 아이에게도 아무 부자연성을 몰랐다.

十月初 발정하여 十二月初(개선) 귀환하였다는 것을 倭種이 두고두고 자손들에게 자랑하여 전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렇게 빨리 이겼노라 고……

그러나 불행 아직 記錄術을 모르는 미개 종족이라. 기록은 없이 입에서 귀로 전해 내려왔다.

왜(倭)의 신화(神話)[편집]

日本人은 韓史를 가리켜,

「高麗王時, 號爲粗略, 在千歲之下, 三國之後, 綴拾補遺, 屬辭比事, 尤多??, 豈可盡信乎」라 하여, 韓史는 수천 년 뒤에 주워 모은 기록이니 믿을 수 없다 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기에 韓史는 記錄術이 생긴 뒤에 비로소 歷史다웁다. 그 전엣 것은 가령「檀君」하면 檀君잉 업을 일으켰다는 것뿐이지, 단군의 아들, 손주 등, 계속된 기록은 전혀 없고, 箕子 亦 그렇고, 衛氏며 三韓 모두 그렇다. 詳記가 없으니 이것으로 보아서 거짓 없는 기록으로 믿을 수 있다. 그리고 고려조(金富軾이 三國史記를 撰하는 당년)까지는 古三國史記며, 高句麗 留記며, 百濟記 등이 잔존하였고, 민간 전설이며 野史 등이 있었으며, 거기서 추린 것이 金富軾의 三國史記며 一然의 三國遺事이니, 그 두 가지 서적은 撰者가 어떤 착각으로 改筆한 것을 제하고는 믿을 수 있다. 日本인은 덮어놓고 三國 이전은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간략한 것으로 보아서 믿을 것이라 본다.

日本人은 韓史를 그렇듯 내려친 뒤에, 자기네 日本事는 韓史보다 四百여 년 더 먼저 된 것이요, 古史도 상세히 기록되어 韓史의 조잡과는 다르다 자랑한다.

그러면 일본인이 자랑하는 日本 最古史인 『古事記』는 어떻게 하여 된 것인가?

倭 第四十代帝인 天武天皇(日本書紀로 따지자면 神武紀元 一千三百여 년 뒤다)이 平素에 각처에 전하는 自國 歷史가 차차 正實에서 멀어가고 거짓이 많이 섞여가는 것을 한탄하여 帝 자신이 削僞政實하여, 잘 외어 두었다가 「稗田阿禮」라는, 기억력 썩 좋은 (스물 여덟 살 났다) 사람에게 말하여 주어 다 외우게 하였다. 그 稗田某가 六十歲가 넘으매 당시 왕 元明帝가 稗田죽을 것을 근심하여, 安部某에게 勅하여 稗田에게 그 古史(一千三百年間의)를 다시 잘 들려가지고, 그때 撰述한 것이 日本最古史『古事記』라 한다. 말의 씨가 먹은 것인지 아닌지는 독자가 스스로 판단하라. 天武帝 이전에는 무엇으로 전하여 天武 一千三百年間을 그렇듯 상세하게 전해 왔으며, 어떤 神感으로 天武는 「전하는 바의 古史에는 正實을 잃은 것이 많다」고 단정하였으며, 무엇을 표준삼아 「訂正」하였으며, 一千三百년의 長久한 세월의 역사를 기억하는 그 기억력(더우기 太古時의 몇 月 몇 日 같은 숫자 등까지도)은 무슨 神術이며, 이런 것들을 傳授받은 稗田某가 二八 소년 때에 들은 것을 六十翁이 되어 第三者에게 또 傳授를 하엿다니 모두가 참으로 神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神武帝 때부터 天武 때까지 一千三百년 간을 지내노라니. 이야기의 원형과는 아주 딴 것이 되었을 것이며, 그것 또 天武의 주관으로 添削을 하고 稗田이 또 근 四一년간을 머릿속에 품고 있었으니 무엇이 되었겠는가…

그 古史記의 벽두에 말하기를 「伊■諾尊」「伊■冊尊」의 男女神이 八尋殿에서 서로 만나 「내게는 생기다가 남은 것이 있고, 네게는 생기다가 모자란 것이 있으니, 내 남은 것과 네 모자란 것을 맞추어 보자.」하여, 둘이 交尾하고, 이리하여서 「大八洲」를 낳고, 다음에는 바다, 산천, 초목, 風火 등을 낳고, 그러고서는 天照, 月讀, 素? 등의 세 자녀를 낳았다.─ 이상이 日本神話의 첫 페이지요 日本 歷史의 시작이다.

그리고는 六世에 ?한 神代가 있고, 그 뒤를 계속하여 神武 이하의 人皇時代가 온다. 세기 어렵도록 여러 번 勅令으로 漢, 韓史 보는 것을 엄금하고 또는 天皇이 직접 立案한 日本史를 꾸미는 등 하도 백성이 믿지 않을 역사라, 이를 믿게 하도록 (尊皇心 發興을 위하여) 많은 애를 썼다.

이 역사를 가지고 도리어 韓史는 황당무계하고, 더우기 上古史는 缺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韓史는 金富軾의 三國史記 이전에 海東古記, 檀君記, 神誌秘記 등이며, 高句麗에는 留記, 古記 등이 있은 기록이 있고, (文字 보급된 나라이니만치 民間에 野史稗記가 있었을 것은 있었다는 기록이며, 現品이 없으니 내버리고라도) 百濟에 百濟新撰, 百濟本紀 등이 있었다는 것은 日本書紀에까지 올랐으며, 新羅는 三國 중 가장 늦게까지 서 있었고, 唐나라와의 접촉이 빈번했으니, 물론 史記가 있었고, 이것들이 三國史記며, 三國遺事 撰述된 高麗 중엽까지는 檀君古記 등과 아울러 잔존했던 것은 遺事를 보아도 알 것이며 三國史記도 金富軾 이전의 舊三國史記가 있었다 하나, 이 나라 민족성이 문헌을 허수로이 하며, 더우기 高麗國의 특수 입장 때문에, 新三國史記가 나온 뒤에는 古記錄은 차차 泯滅되고, 新三國史記는 儒者의 撰이니만치, 支那 古典에서 箕子를 구해 내어 檀君을 경원하였다. 게다가 연해 겪은 兵火며 支那人의 携去 등으로 옛 문헌은 얻어볼 바가 없고, 그 대신 金富軾의 三國史記는 전기 문헌들을 토대로 꾸민 것이라, 특별한 대목(高句麗와 新羅의 민족적 갈등이며 對支那 반항 등에는 약간의 가필이 있을 것이다)을 제하고는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撰」이지 創作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日本의 古事記와 日本書紀 등은, 一千 수백년간의 무지한 민간의 전설만을 토대로, 게다가 倭族의 자존심이 가미되고, 天武帝의 성벽과 취미와 신앙 등이 가감되고, 또한 稗田某의 四十年前의 낡은 기억까지 작용한 것이니 어찌 가히 同日에 논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倭史야말로 韓, 漢 등과 관계가 생기고 韓, 漢 記錄에도 오른 이전의 분은 전연 부인하여도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다.

日本人은 그 황당무계한 역사로 자국민을 속여 왔다. 그러나 사람이 차차 開明하고 교통이 넓어지매 외국과도 저절로 교섭이 생기고, 이리하여 諱之秘之하던 門外不出의 日本史도 그냥 감추고 버티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서 明治初에 학자들의 全智囊을 모아서 역사를 해설케 하였다. 황당무계한─ 근대인의 상식으로는 절대로 믿지 못할 日本史를 상식적으로 개조케 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가로되, 二神(伊■ 諾과 冊의 남녀)이 大八洲를 낳았다는 것은, 즉 정복한 것을 비유함이요 素?이 新羅에 나무 八十株를 가지고 가서 심었다는 것은 식민을 비유함이요, 등…… 등……. 韓이나 漢史와 부합되지 않는 것은, 韓(혹 漢)史의 잘못이요, 自國史는 철두철미 정확한 것이로되, 비유로 표현된 것이 많아서 무지한 대중은 오해하기 쉽다 운운.

무슨 까닭으로, 해석키 힘든 비유로 썼는지는 해서설이 없다.

좌우간 日本最古史인 古事記는 일종의 淫書를 읽는 취미와 寄譯을 읽는 취미로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일본(日本)의 신비(神秘)[편집]

日本에 「三種의 神器」라 하여, 신비적으로 숭앙하는 물건이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즉 거울과 劍과 구슬이다.

이것은 天照大神이 손주 瓊瓊杵에게 주어, 倭皇 대대로 皇位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물로 여기어 오늘까지 이른 것이다.

그런데 동방문화의 대표되는 支那에도, 거울은 거금 二千二, 三百년 전 戰國時代에 비로소 생겼고, 제작이 조금 완비된 것은 漢代부터다. 그러나 역시 유리製가 아니요 銅이나 鐵이다.

瓊瓊이 어느 때의 사람(神)인지는 알 수 없지만(日本書紀로 따지자면 거금 一千七, 八百년 전이다) 日本神代에 거울이 일본까지 건너간 것이 있었다 하면, 지극히 劣惡品이나마, 이전에는 물에나 비추어 보던 자기의 모양을 이 기구로 볼 수 있게 되니, 重之寶之하여 國寶로 존중히 여기었을 것이다.

또 劍은 日本에 冶金術이 百濟에서 건너간 것은 百濟 건국 數百年 뒤니까 倭 石器時代에 鐵劍이 있었다 하면 물론 舶來品이요 素?(天照의 아우)이 그 劍으로 풀을 잘라서 「草?」의 칭호가 붙었으니, 낫이나 일반인 물건일 것이나 石器時代의 鐵劍이라 역시 重之寶之했을 것이다.

구슬은 韓城에 史前時代부터 장식품으로 써오던 것이 倭에 건너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의 값으로 따지자면 서픈 짜리도 못될 것이겠지만, 그러나 구경도 못하던 귀중품이니 國寶로 자자 손손이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그 물건이 생긴 지(일본인의 말로는) 二千, 七百 년을 지난 오늘이니, 그 물건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日本의 공식 기록으로 보자면 壽永亂때에 神劍은 바다에 잠겨서 잃고, 伊勢神宮에서 대신 바친 것으로 바꾸었고, 璽는 그때 壽永亂에 바다에 떨어졌다가 다시 저절로 떠오르고 다른 것들은 그냥 瓊瓊 이래의 보물이라 한다.

그러나 日本의 皇權이 北朝로 南朝로 떠돌기 몇 번이요, 天皇이 反賊에게 쫓겨서 옷도 못 입고 도망 다니며 혹은 정배가며, 혹은 전연 武家에게 밀리어 손님이 왔는데도 입을 옷이 없어서 모기장(蚊帳)을 두르고 나가 응대하는 따위의 가난한 영락 생활(明治 이전은 거의 그랬다)을 千年이나 하는 동안에 그 腐?物들이 그냥 보존되어 있다고는 상상치 못할 일이다(皇權과 三種神器는 숙명적으로 떠날 수 없는 물건으로, 반란이 있으면 叛人은 우선 그 神器를 입수하려 한다).

소위 天照大神은 女神이다. 거울이며 裝刀, 구슬 등은 항용 사내가 계집에게 정표로 주는 물건이다. 天照의 동생 素?은 新羅를 ?國(母國)이라 일컬었다. 이 점들을 종합해 생각할 때에 무슨 로맨스가 연상되지 않을까? 필자가 日本人만한 재간이 있으면 이 점을 좀 연구해 보고싶다.

대체 日本人은 파고 들어가는 데는 영악하여, 예컨대 韓史書에 「疲」자가 들은 고유명사가 있으면, 「파」「패」「판」「팔」「팡」「바」「배」「백」「뱀」「밸」「밥」「밤」「발」등의 音 유사한 글자를 모두 뒤지어, 「이것의 傳인가 싶다」「이것의 誤音인가 싶다」운운으로, 하여간 新羅의 「居世于」을 일본식으로 「居」를 「■」로 「世」를 「■」로, 「干」은 모양 비슷한 「于」로, 다시 「■」로, 이리하여 「居世于」을 「■ 」라 强牽하고, 倭의 神祖 「伊■」에 갖다대느니만치 융통성 좋고(필자의 학생시대에, 어떤 일본인 조선어학자는 조선 말 「쌀아기눈」과 일본말「■」의, 그 「아기」와 「■」가 같은 것으로 보아, 韓日 同語源이라는 학설을 발표한 일이 있다) 영악하다.

그렇듯, 비슷한 것이거나 일부만이라도 비슷한 것이 있으면 다 갖다 맞추어 본다. 그러니만치 때때로는 엉뚱한─ 다른 사람으로는 상상도 못할 것을 영악스럽게 바로 맞추는 수도 있다. 대개는 맹랑한 망설에 지나지 못하지만, 때때로는 놀랄 만한 的中도 있는 것이다.

韓史(일본인이 꾸민)를 뒤지어 보다가 때때로는 입을 딱 벌리게 놀랄 만한 「指摘」을 발견한다.

그런 재간으로써, 三種神器라는 것을 신비의 光暈 뒤에 깊이 감추고, 백성들에게는 무조건으로 믿고 崇仰하기만 강제하여 오던 것이다.

그 또 소위 萬世一系라는 것도 人皇 第一代인 神武부터 지금까지가, 그 할아범의 아들, 또 그 아들, 이렇듯 대대??? 아비의 아들이거나 할아비의 손주가 계승했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第一代神武의 후손이면 몇 百代 내려가서 촌수로 몇 千寸이 되었든간에 皇位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往古에는 奪位 사건이 자주 있었다. 神武의 후손이면 누구든 소위 三種神器만 입수하면 皇位에 오를 수 있으니까, 市井에 乞食하던 어떤 소원한 皇孫이 빈한에 진저리 나면 武士 몇을 입수해 가지고 대궐(皇이 居하니 稱曰 대궐이지, 초라한 집이다)로 뛰쳐 들어가서「神器」를 입수하고 神璽를 입수하면 그 時부터 天皇이 된다.

그러나 명색이 天皇이지, 武家政治 이후에는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못하였다. 탐내는 사람도 그리 없는 虛位였다. 富貴 겸전하여 인간의 갖은 호사 다해 보고, 최후로 하도 심심하니 天皇 노릇도 좀 해 볼까 한 好事客이 몇 있었을 뿐이다.

더우기 南北朝가 갈린 뒤에는 北朝의 세상이 되어 南朝의 皇胤들은 망명하여서 숨어 다니고, 그 口腹조차 보장해주는 사람이 없다가 明治가 北朝의 황손으로 皇位에 오르자 자신이 北朝의 孫이면서도 南朝를 정통으로 잡고, 그 새(南朝 落魄 기간 중)빈한에 쌓이어 사망한 南朝 亡命皇들에게는 天皇號를 追上하고, 재세 중 天皇 노릇을 한 南朝의 前天皇들을 모두 「上皇」「院」등으로 내려깎았다.

이리하여 온 일본이 天皇으로 섬기던 北朝帝 五代는 모두 떨어지고, 그 대신 市井에 落魄했던, 그리고 유랑 중 사망한 南朝主가 皇號를 追上 받았고, 明治의 前皇인 孝明은 北朝를 정통으로, 자신은 第一二二世 天皇이라 自稱했지만 明治는 南朝를 정통으로 明治도 一二二世라 한다. 그러니까, 소위 萬世一系라 하는 것은, 소위「二千六百여 년」전의 한 할아비의 후손이라 하는 것일 뿐, 예수교인이 「사람은 다 아담의 자손이라」하여 형님 누님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것으로 별로이 신기하고 신통할 아무것도 없다.

이 일본의 南北을 뒤집어 영락한 「南」을 다시 추켜 세우고, 得意의 「北」을 내리쳐 놓은 것에는 몇몇 文士의 힘이 꽤 많이 섞였다. 支那에서 南北朝가 갈렸던 것을 南朝로 정통을 삼은 것도 영향되었거니와 文人들의 붓이 南朝忠臣 楠正成을 사모하는 글과 연극을 꾸미어서, 일본 국민간에는 南朝를 사모하는 마음이 漲溢하여, 國論이 南朝를 正으로 사모하게 되었고, 더우기 南朝의 근본 사상이 「尊皇倒慕」인지라, 明治는 父祖에 逆하고 南朝를 皇室 正統으로 잡은 것이다.

일본 남북조(日本 南北朝)[편집]

여기 소위 日本의 南北朝에 관해서 몇자 적어 보자면, 日本 기원 二千년 전후경에 日本의 황실은 「

持明院系統」과 「大學寺계통」의 두 파로 갈리어서, 황위 계승권에 대해서 오래 다투어 오다가 慕府에서 서로 교체해서 하면 좋으리라는 의견을 내어 兩系統이 교체해서 皇位에 오르기로 작정했는데, 慕府에서는 「현재의 천황(持明 系統의 花園天皇이다)의 뒤는 後醍?가 皇位에 오르고 邦良이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太子로 책봉된 邦良은 불행 얼마 안되어 죽고, 「대신 세울 太子는 내 의견대로 하자」는 後醍?의 주장을 무시하고 慕府는 景仁(親王)을 태자로 정했다.

여기 불만이 생긴 後醍?는 홧김에 잠깐 南都로 潛行한 그 틈에, 慕府에서는 後醍?를 폐하고(太上皇이라 경원했다) 景仁을 天皇으로 삼고, 故 邦良의 아들을 태자로 정하였다. 이 景仁이 光嚴天皇이다.

잠깐 길 떠났다가 폐위당한 後醍?는 「神器(劍, 璽 등)가 그냥 내 손에 있으니 내가 그냥 천황이로라」고 주장하여, 慕府에서는 당황하여 後醍?를 京都로 청하여, 소위 「神器渡御之儀」를 하고서 後醍?는 隱岐로 보냈다.

그런데 後醍?는 여전히 神器는 내 손에 있노라고 자기가 천황임을 주장하는 이런 시절에, 慕府가 그만 넘어지고 따라서 隱岐로 쫓겨갔던 後醍?도 京都로 돌아와서 大쿠데타를 단행하여 이전 後醍?가 南都로 潛行하기 전의 원상태로 돌려 놓았다.

그런데 足利尊氏가 慕府를 재건하고 後醍? 때문에 皇位에서 내려쫓긴 光嚴 前皇의 아우 光明을 천황으로 모시고, 後醍?(도망가서 절간에 숨어 있었다)를 청하여 새 천황 光明과 화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後醍?는 빠져 피해서 요시노(吉野)에 조정을 세우고, 光明 조정에 대하였다. 이것이 이르는 바 南北朝라 한다. 京都(뒤에 가마꾸라)조정을 北朝라 한다.

北朝는 무력의 慕府의 지지를 받느니만치 절대 우세했다. 楠正成 夫子와 형제의 충성으로도 北朝의 힘은 당할 수가 없어서 나날이 비운에 빠져 들어가는 가운데서 後醍?도 죽고 後村上이 섰다.

그런데 北朝에도 불길한 일이 생겼다. 北朝 武力의 주인인 足利尊氏 형제간에 세력 다툼이 생기고, 심해져서 형 尊氏는 아우를 치기 위하여 後顧를 덜고자 南朝에 항복하고 崇光(光明을 계승해서 位에 올랐던 천황이다)을 폐하고 神器(後醍? 때 北朝에 넘어왔던)를 南朝에 바쳤다.

이리하여 임시 한때 北朝는 소멸된 듯 하였지만 尊氏의 아들이 다시 北朝 武力을 대표하여 일어나 崇光(尊氏가 폐했던 北朝 前皇이다)의 아우 後醍?를 천황으로 세우고 南北朝는 다시 대립하였다.

南朝에서는 後村上의 뒤에 長慶, 後龜山이 이어서 서고, 北朝에서는 後光嚴의 뒤에 後圓融, 後小松 등이 이어서 섰으나, 무력 배경을 가진 北朝가 절대 우세이어서 南朝의 존재는 아주 미미하였다.

게다가 北朝에서는 南朝에 대하여 아주 절멸책을 쓰기 위하여 南朝의 皇胤은 차례로 모두 僧籍에 집어 넣었다.

이리하여 南朝는 후손을 못보며 차차 사망하니, 얼마 뒤에는 南朝에는 경쟁할 만한 男孫이 없게 되었다. 때때로 北朝만이 ─ 아니 이젠 北朝가 아니라, 일본 유일의 皇流(본시는 北朝 계통)이 황위에 올랐다. 孝明, 明治, 大正, 昭和 모두 근본은 北統이다.

따라서 日本의 皇譜에는, 본시는 後醍?, 後村上, 長慶, 後龜山 등 南統帝는 빼었었고(소위「院」이라 되어 있었다), 그 대신 光嚴, 光明, 崇光, 後光嚴, 後圓融 등 南統人이 천황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明治 때에 明治가 維新을 하고 보니, 세상의 동정과 여론은 모두 南朝에 모이고 南朝를 사모한다.

이에 明治는 자기의 직계 조상인 北朝 前天皇들을 모두 「院」이라 내리치고, 南朝의 「院」이며 「上皇」이었던 사람을 다시 天皇號를 올려 바치고, 「日本皇室은 南朝를 정통으로 계승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리하여 明治 이후의 일본 황실은 北朝의 嫡孫으로 南朝의 養孫이 된 것이다.

천일창(天日槍)[편집]

新井白石 같이 사람은 韓史을 가리켜 경탄한다고 하지만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倭史야말로 한 古譚이지 역사가 아니며, 그 연대 등을 도저히 따져볼 재간도 없거니와─

소위 新羅 왕자 天日槍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건너왔다고 하며, 일본의 사학자들(黑川鎭賴, 吉田東伍輩)의 「天日槍 歸化時代考」등은 天日槍 日本 渡來가 神代 日本이라 하며, 그런지라 天日槍의 五代孫이 日本 乘仁天皇 때에 日本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 연대상으로 맞지 않으므로 (天日槍이 神代의 사람이면, 적어도 乘仁朝면 天日槍의 二, 三O代 후손이지 五代孫은 아닐 것이다) 여기 돌려 꾸미어 天日槍은 第一世, 第二世하여 數十世가 있었으리라는 寄設을 창출하였다.

그런가 하면 또 한편으로 일본 最古史인 古事記에는 天日槍은 乘仁天皇 때에 귀화했다 하였다. 또 日本書紀에는 天日槍의 四大孫이 乘仁에게 巨仕하였다고 한다.

들쑹날쑹, 뒤죽박죽, 倭史의 정체는 이러하다.

그런데 韓史에는 전연 없는 인물이라는 근본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서는 꽤 尊崇되어 天日槍의 후손이 뻗어서 적지 않은 名族이 그의 줄기에서 났고, 姓氏錄을 보면, 그의 계통은 단단히 넓게 퍼지었다.

古事記에 나타난 그의 전설을 보건대,

「新羅의 阿具奴麾라는 못(池) 가에 웬 천한 아낙네가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밝은 별이 음부에 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웬 사내가 그 여인을 가까이하여 여인은 임신하였다. 결국 붉은 구슬(알)을 하나 낳았는데, 사내는 구슬을 달래서 허리에 찼다. 그리고 밭에 일하는 사람들을 먹이려고 소에 음식을 싣고 밭으로 향하였다. 가다가 이 곳 주인의 아들인 天日槍을 만나서, 天日槍이 구슬을 소청하므로 구슬을 天日槍에게 주었다. 天日槍은 구슬을 床귀에 놓아 두었더니 구슬은 아름다운 색시로 화하여 아내가 되어 온갖 시중을 다 한다, 운운」

소설 작자의 눈에 비친 이 이야기는 틀이 잡히지 않고, 줄거리의 斷續에 티가 크고, 머리와 꼬리가 붙지 않고, 말하자면 아이들의 시재 꾸며서 하는 옛말인 듯 서툴고 초라하고 원시적이기 짝이 없으나 우리로 하여금 저으기 흥미를 끌게 하는 것이, 이 이야기는 日本的이 아니요 韓的이라 하는 점이다.

햇볕에 의지한 受胎와, 사람의 産珠(혹은 産卵)은 高句麗와 新羅의 건국신화가 그 원천이다.

알(혹은 구슬)에서 童子(혹은 美女)가 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생긴 美女가 아내가 되어 시중 든다는 것은, 「居蛇知」며 「沈淸」 說話의 건더기를 이룩하는 자로서, 배달 고대 민족의 상상이 낳은 아름다운 꿈이다.

天日槍 전설은 분명 우리 민족이 산출한 줄거리에서 생긴 것이다.

아직 미개하여 說話의 始와 終의 구성 형태며 방식을 모르는 왜인이 자기의 재간으로 꾸며놓은 배달 說話의 이식물이다.

이로 보아서 天日槍 이야기는 이상 韓的 說話 기초에서 시작되어 진전되다가, 倭的 결말을 지었으니 가로되,

「이렇듯 구슬의 색시는 天日槍의 아내가 되었는데, 天日槍이 차차 교만하게 되어 아내를 꾸짖고 하니, 아내는 나는 너같은 사람과 부부 될 사람이 아니라고 남편의 집에서 뛰쳐나와서 배를 훔쳐 타고 '나니와'로 도망쳤다.

天日槍은 아내의 도망한 것을 알고, 쫓아와서, 나니와에서 배를 건너려는데, 나루의 神이 받지 않아 못 건너고, 다시 '다지마'로 가서 거기서 다른 아내를 맞아 많은 자식을 낳고 잘 살았다. 운운」

유치하나마, 「배달」적 神話 이야기로 출발하고 진전하다가 倭的으로 결말 지은 說話─ 역사상이고 文獻上이고 유례를 찾기 어려운 색체 다른 설화다.

종족(種族)[편집]

日本人은 지금의 朝鮮人과 高句麗와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高句麗를 우리에게서 떼어가려 한다. 위정자가 정략 필요상 이런 설을 주장하자 학자들은 그 설을 좇아서 朝鮮과 高句麗를 떼어내려 하였다. 高句麗는 만주족이라고.

新羅가 唐나라와 연합하여 百濟를 멸하자 百濟의 유민은 얼마는 일본에 투하하고 나머지는 故土에 주저앉아 새 治者인 新羅의 백성 노릇을 하였다. 그 뒤 王建이 高句麗을 세우자 新羅, 百濟, 모두 高麗의 품에 흡수되었다.

그뒤 羅唐에게 高句麗가 망하자 高句麗의 장수요 귀족인 大祚榮이 高句麗의 遺民을 불러 渤海國을 세웠다.

그런데 高句麗 국민을 종족 계통으로 대별하자면 (본시는 같은 檀裔지만) 扶餘族과 ?婁(肅愼)族으로 나누인다. 그런데 漢書 三國志 東夷列傳을 보자면 '東夷傳 扶餘' 條에,

「食飮皆用■豆, 會同拜爵洗爵 揖讓 升降以殷, 正月祭天 (…略…) 在國衣尙白, 白布大袂 抱袴履革?, 出國則尙繪繡錦?, 大人加狐狸? 白黑貂?, 以金銀飾帽, 云云」이리 하여, 扶餘는 상당한 문화와 예의 관념과 사치와 및 그 制度, 모두 구비되어 「大體與中國相彷佛也」라 하였다.

그러면 同書에 ?婁(후일 高句麗에 복귀되어 高句麗 국민이 된 靺鞨種이다)는 어떤 民度를 가진 종족이라 기록되었는가?

「(…略…) 常穴居 大家深九梯 以多爲好, 土氣寒劇於扶餘, 其俗好養?, 食其肉衣其皮, 多以?膏塗身厚數分, 以禦風寒, 夏則裸袒, 以尺布隱其前後, 以蔽體形, 其人不潔, 作?在中央, 人圍其表居, (…略…) 唯?婁不法(於飮食) 俗最無綱紀也. 云云」

즉 아직 穴居하는 螢族이다.

日本人은 「扶餘, ?婁 등은 금일의 滿洲의 祖라」고 하지만, ?婁(의 일부)는 만주의 祖일 것이나 扶餘는 高句麗의 祖다 (그 더 이전에는 兩族 다 同祖였었던 것이 분리되어 나뉘었다). 그 民度가 兩者의 새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문화라는 것은 일조일석에 생기는 것이 아니요, 民度 또한 일조일석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로 미루어 扶餘族은 오래 전부터 隣族들과 달리 자기 문화를 건설하여 온 것이 입증되고 겸하여 일찌기 優秀한 지도자를 가졌었다는 것이 입증된다.

高度文化를 가진 扶餘族이 遼地에 高句麗國을 세우자, 혹은 토벌로 혹은 懷柔로, 遼地에 부동하던 다른 종족들도 차례로 흡수하여 八百年 王業을 누렸다. 그리고는 羅唐 연합군에게 망하였다.

그런데, 八百年을 한솥의 밥을 먹노라니, 다른 夷族(扶餘가 아닌)들도 좀 개화하여 「王의 治下의 생활」이 결국 좋다는 점을 이해하고 여기서 大祚榮이라는 傑物이 생겨나서 渤海國을 新建하였다. 領土는 압록강 이북의 高句麗 舊城이요, 號曰, 高句麗 재건이었다.

羅唐이 연합하여 高句麗를 멸함에 그 목적이 高句麗 영토 획득에 있지 않고 다만 唐으로서는 支那族萬年의 위협을 없이 함에 있고, 新羅로서는 自國 國境線 확보와 부단한 위협 제거에 있었는지라, 高句麗를 멸하고도 그 舊土는 둘이 다 손대지 않았다. 그리고 唐은 압록강 이남의 高句麗 舊土의 인민을 온통 江南(萬里 밖이다)에 옮기고, 터는 비고 (唐으로는 뚱딴지 근심이니, 高句麗 殘民이 言語 같은 국가인 新羅며 百濟와 통하여 재기할까 근심함이다) 高句麗 땅은 아주 쑥밭을 만들었다.

압록강 이북은 土豪들의 발호에 방임하여 以夷制夷策을 썼다. 唐으로서는 渤海가(大成만 못하면) 高句麗에 대한 방호벽으로 은근히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 渤海도 한 二百여 년 왕업을 누리고는 新興 契丹에게 망하였다.

몸을 의탁했던 渤海까지도 잃은 高句麗 亡民─ 그때 마침 반도의 중부에 王建이 「高麗國」를 신건하였다. 그리고 「高句麗」를 재건하노라고 고함쳤다. 新羅, 百濟, 모두 신생 高麗에 흡수되었다.

高句麗 유민은?

遼東 각곳에 산재해 있던 高句麗 유민은 그 財力이 있는 자─ 가지 이사할 비용이 있는 자는 모두 신생 高麗로 모여들었다. 압록강을 건너서─

二百년 간 無人荒野이던 압록강 이남의「高句麗 舊其」는 몰려오는 高句麗 후손들로서 곧 메워졌다.

王建 高麗는 그 法統과 國號가 高句麗를 계승한 것이고 겸하여, 그 민족으로는 三國(高句麗, 百濟, 新羅)으로 나누이기 이전의 檀君朝鮮의 계승이요 부활이다.

高句麗는 그 영토를 태반을 만주에 내버리고, 국민도(無國 二百년 간에) 蒙古며 支那本土며 滿洲에 不少히 흘렸지만 그 法統과 聖祖(단군)를 신생 高句麗에게 계승시켰다. 高句麗 유민 (종족적으로는 허다하였고, 대별하여 扶餘族과 靺鞨族으로 나누인다)은 母國 高句麗가 羅唐에게 망하자 이 失母한 無依孤兒를 맡아 기르고자 渤海國이 생겨나서 二百여 년 간을 길러 주었다. 압록강 이북의 高句麗 遺兒는 渤海의 손 아래서 무사히 二百年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이 乳母마저 契丹에게 亡하자, 때를 같이하여 같은 「배달」裔의 손으로 「高麗」國이 건립된 것이다.

三國(三韓 아울러) 이전의 배달 종족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일본인은 高句麗를 떼어서 만주로 가져가려 하나, 民族祖와 民族精神과 民族神話, 전설은 오늘날의 우리 겨레(新羅 후인이나 百濟 후인이나 高句麗 후인을 막론하고)는 모두 다 분립되었던 三國時代와 三韓時代를 건너뛰어서 聖祖 檀君에 갖다 相接시킨다.

일본인의 교육정신과 거기 영향된 그릇된 판단 때문에 일부인은 「현재의 조선은 新羅의 統이요, 高句麗의 統은 만주라」는 생각을 품고 있으나, 靺鞨 등으로 女眞으로, 女眞은 다시 滿洲로, 이렇듯 만주는 ?婁 전후 때부터 扶餘와 갈려나간 딴 統이요, 新羅는 扶餘統의 한 줄기다. 본시는 역시 檀君裔지만.

崇漢人들은 「辰韓은 泰韓이요, 泰나라의 망명인들로 조직된 나라요, 新羅는 辰韓 땅에서 생겼으니 新羅는 泰統이라」는 설을 주장하여, 근본이 東夷가 아니요 華國 泰의 後라 자랑한다. 그러나 이것은 儒敎 中毒의 忘族思想의 산물이지, 一顧할 바도 못되니, 설사 泰의 亡人들에게 땅을 빌려 주어서 나라를 세웠다 할지라도, 「배달」 종족이 布列居住하는 지역에 亡命泰人이 나라를 세웠다 하면, 그 국민은 「배달」人일 것이요, 차차 연하여 南下 번식하는 「배달」人에게 흡수되고 말 것이다.

더우기 辰韓땅에 배달裔로 건국된 新羅라, 泰人과의 관련성은 아주 박약할 것이다. 泰人과의 잡종은 어떤 정도까지 있을는지 모르지만……

좌우간, 그 언어로 보아 「徐羅伐」「斯盧」「新羅」라는 新羅語와, 「所夫里」「沙■」라는 百濟말이 오늘의 「서울」의 원어이며, 나라의 수도를 가리키는 말이 新羅와 百濟가 같은 점으로 보아서 「泰의 계통」이라는 新羅와 扶餘의 계통인 百濟가 결코 남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高麗 시조 王建의 덕으로 삼국시대에 세 조각으로 나누이었던 식구가 다시 이곳에 모이었다. 그 영토는 태반(高句麗 때의 高句麗 영토)이나 북쪽에 흘리고, 人口도 不少히 영토와 함께 北에 떨어뜨리로, 문화 유산까지도 高句麗의 것은 高句麗 파멸되고 유랑(高句麗)하는 동안에 자취없이 없어졌으나, 그 옛날 支那族을 압도하여 동방에 군림하던 우수한 종족(三國)이 함께 탐탁하게 모였으니, 옛날의 高句麗의 위대하던 힘, 百濟의 섬세하던 기술, 新羅의 優美하던 기능, 모두 합하여 발휘하여 그 총합한 힘으로써 배달裔 의 자랑을 펼쳐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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