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 연구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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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齋 申采浩 著

朝鮮史硏究草

京城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2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3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4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5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6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7
麗란일홈의所自出이될지며 百濟初年에甁山、馬首、高木、牛谷等城柵이다그所在地의地名을가저일홈한者인데 홀로그首都의慰禮城을漢江古名『아리』에서取치안코圍籬의ᄯᅳᆺ으로일홈하엿다함이何說이며 弁韓의『弁』을배얌의『배』에서ᄯᅳᆺ을取하엿다함은더욱一駁할價値가업지만 三韓의位置가明白히辰韓은東이며馬韓은西이며弁韓은南이어날 이제馬韓은午方이라弁韓은巳方이라함이 何에據함이뇨

무릇 古史上의 이두문으로 쓴 명사의 해석에 허다한 곤란이 있으니 대개 이두문은 한자의 全音, 全意, 혹 半音, 半意로 만든 일종의 문자라.

그러나 이두문의 口譯文으로 화하기 전에는 字母의 발견만 못되었을 뿐 아니라 일정한 법칙도 없어서, 같은 白자 이지만 하고로 上白是의 白은 그 全意를 讀하여 “살”이라 하면서 白良의 白은 그 반음을 독하여 “바”라고 하느냐 하면 그 해답이 없으니 그 곤란이 첫번째요.

한자로 지은 주, 군, 현의 이름은 경덕왕이 始한바, 그 변경의 際에 밀불(推火)이 密城이 되고 거물라(今勿奴)가 黑壤이 된 것 같이 古名을 譯用한 것도 있지만, 退火가 義倉이 되며 比火가 安康이 되어 아주 고명의 본의를 버리고 한자로 지은 지명이 더 많으며, 중화의 관명을 모방함은 궁예왕에서 시작하여 고려 광종에서 완성이 되었으나, 이는 또 한 개도 고 명을 譯用한 것이 없은즉 명의의 원류를 찾는 동시에 매양 전후 際斷의 憾이 없지 아니하니 그 곤란이 두번째요.

삼국사기나 기타 史冊에 이두문으로 쓴 당시의 본명으로 실록에 記치 아니하고 후래에 譯用한 한자의 명사를 記하였으니 예를 들건대 백제가 쓰던 한강의 이름인 욱리하(郁里河)가 겨우 개로왕기에 일견한 이래에는 오직 신라가 고친 이름인 한강이 온조 초년부터 보이었으며, 고구려가 쓰던 요동성의 이름은 오렬홀(烏列忽)이거늘, 삼국사기에 오렬홀이 겨우 地誌에 일견한 이외에는 모두 隨唐사람이 칭호한 요동성으로 적히었을 뿐이니, 그러면 아주 可考할 수 없이 된 본명도 허다할 뿐더러 어떤 것은 당시의 본명인지 후래의 譯名인지 알 수 없이 된 것도 적지 아니하리니 그 곤란이 세번째다.

조선의 사책은 從古로 저자만 있고 독자는 없는 서적이라, 무슨 사책이든지 訛字, 誤字, 첩자(疊字), 누자(漏字)가 지폭(紙幅)에 충만한 중에, 더욱 古地名과 古官名같은 것은 夷言으로 배척하여 그 訛, 誤, 疊, 漏를 거의 등사자(謄寫者)나 인판자(印版者)의 자유에 방임하여 정정자가 없었으며, 支那24사 중 이른바 조선열전 혹 동이열전에 적힌 명사가 傳聞으로 음역한 것도 있지만, 직접으로 당시 이두문의 본명을 그대로 가져다가 쓴 것도 적지 않으나, 그러나 수백년래로 고서고증에 늙은 중화문사들이 남의 역사에는 사정도 격막일 뿐더러 노력도 좀 아긴지라, 그리하 여 모든 사실의 誤나 문구의 訛도 발견한 이가 없거든, 하물며 彼等의 눈에 서투른 일반명사이랴. 그러므로 그 조선열전 등의 訛, 誤, 疊, 漏가 또한 대단하여 신용하기 위험한 기록들이니 그 곤란이 네번째다. 언어는 死板的이 아니요 活板的이라 시대를 따라 생멸하며 변화하는고로 훈몽자회나 용비어천가나 처용가 같은 것에 據하면, “코 鼻”가 “고”이며, “가랑 脚”이 “가랄”이며, “잇기 苔”가 “잇”이며 “강 江”이 “가람”이며, “바다”가 “바랄”이요, 삼국사기나 만주원류고 같은 것에 거하면 “철 鐵”이 “물”이며, “삼림 森林”이 “와지”이며, “관경 管境”이 “주선”이니, 그러면 이밖에 소멸 혹 변개된 말이 얼마인지 모를지니 그 곤란이 다섯번째라. 그러나 조선사를 연구하지 안니하려면 모르거니와 연구하려면 여기에 힘을 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라. 이제 左方에 千慮의 一得을 진술하여 일반 讀史者의 斤正을 구하노라

2. 해석 방법

i) 본문의 自證이니, 이를테면 삼국사기 職官志에 각간(角干)의 일명을 서불감(舒弗邯) 혹은 서발한(舒發翰)이라 하였으니 角은 쇠뿔의 뜻이요, 서불 혹은 서발은 쇠뿔의 음이라. 武官이 쇠뿔로 만든 활을 씀으로 관명을 지음이니, 근세까지도 嶺南人이 무관을 “쇠뿔에기”라 함이 그 유풍이요, 간(干), 감(邯), 한(翰)은 다 “한”의 음이니 (邯은 邯鄲의邯과 동음), 그런즉 각간(角干), 서불감(舒弗邯), 서발한(舒發翰)은 다 “쇠뿔한”으로 독(讀)할 것이니라.

열전(列傳)에 이사부(異斯夫) 일명 태종(苔宗)이라 하며, 居柒夫 일명 荒宗이라 한 바, 이사(異斯)는 苔(이끼)의 뜻이니 “잇”이요 거칠(居柒)은 荒의 뜻이니 “거칠”이요, 夫는 경서언해의 士大夫를 “사태우”로 解함에 의거하여 그 古音이 “우”임을 알지니, 宗(마루 종, 위에 사투리로 우에)의 뜻이니 이사부는 “잇우”로 거칠부는 “거칠우”로 讀한 자이며, 本紀에 “炤智一作毘處”라 하여 “伐暉一作發暉”라 하였은즉, 소지(炤智)의 炤에서 半意를 취하여 “비”로 읽고, 智는 全音을 취하여 “치”로 읽은 자니 “소지”와 “비처”가 동일한 “비치”이며, 이두문에 매양 弗, 發, 伐은 통하는 자인즉, 伐暉와 發暉가 동일한 “뿔휘”니 뿔휘는 용비어천가에 거하여 今語의 뿌리 根이다.

지리지에 “三陟郡本悉直國”이요 “金壤郡本休壤郡”이라 하였은즉, “세치”의 음이 실직(悉直)이 되며 “세치”의 “세”는 뜻으로 쓰고 세치의 “치”는 음으로 써 “삼척”이 됨이요, “쇠라”를 음으로 써 휴양(休壤, “쉬다 휴”이므로 이 역시 뜻이라 사료됨)이 되고, “쇠” 뜻으로 써 금양(金壤)이 됨이니라. 이 따위는 이루 셀 수 없으므로 아직 약하거니와, 이상은 곧 他의 遠證을 待할 것없이 그 해석을 얻는 자니라.

ii) 동류의 傍證이니, 이를테면 古史를 읽다가 지명의 꼬리에 달린 忽, 波衣, 忽次, 彌 知 같은 것들을 만난다 하자. 홀(忽)이 곧 “골”인가의 의문이 있지만 의문이 확설이 되지 못하나니 반드시 미추홀(彌鄒忽), 술이홀(述爾忽), 비렬홀(比列忽), 동비홀(冬比忽) 등 모든 홀의 동류를 얻어야 학설이 될지며, 파의(波衣)가 곧 바위인가의 가정이 생기지만 가정으로 단언을 내리지 못할지니 반드시 조파의(租波衣), 구사파의(仇斯波衣), 별사파의(別史波衣) 등 모든 파의의 동류를 얻어야 단안이 될지며, 갑비홀차(甲比忽次), 요은홀차(要隱忽次),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 등 모든 호차의 동류를 얻으면 홀차가 곧 “고지” 半島인 줄을 알지며, 송미지(松彌知), 고마미지(古馬彌知), 무동미지(武冬彌知) 등 모든 미지의 동류를 얻으면 미지가 곧 水灣인 줄을 알지니라. 漢陽의 남산도 목멱(木覔)이요 평양의 남산도 목멱인즉, 남산과 목멱(木覔)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관계로 인하여 목멱은 “마메” 곧 남산의 이두문인 줄을 알지며, 松山의 古號가 부사대(扶斯達)요, 송현(松峴)의 고호가 부사파의(扶斯波衣)요, 송악(松嶽)의 고호가 부사갑(扶斯甲)인즉, 松과 扶斯의 서로 따라다니는 원인으로 인하여 松의 고어가 “부스” 곧 扶斯인 줄을 알지니라. 이상 본문에서 그 해석을 얻을 수 없는 명사는 그 동류를 수집하여 추단할 자니라

iii) 前名의 遡證이니, 이를테면 황해도 文化縣의 九月山을 단군의 阿斯達이라 하고, 解字가 가로되, 阿斯는 아홉이요, 達은 달(月)이니 구월의 뜻이라 하나, 阿斯를 앗, 엇, 옷, 웃 혹은 아 쓰, 어쓰, 오쓰, 우쓰 등으로 읽을 수 있으나 아홉으로는 읽을 수 없으며 達의 음은 “대”이니 대는 山嶺의 뜻이니 淸州의 上黨山을 “것대”라 칭하는 류니, 삼국사기 지리지에 蘭山의 고명이 석대(昔達)요 靑山의 고명이 가지대(加支達)이요, 松山의 고명이 부사대(扶斯達)이니, 阿斯達의 達도 그와 같이 음은 “대”요, 뜻은 山嶺이니 달(月)의 뜻으로 解함이 불가하며, 구월산의 고명은 궁홀(弓忽)이요, 궁홀의 별명은 검모현(劍牟縣) 혹 궁모현(窮牟縣)이니, 세가지 이름을 합하여 보면 궁홀(弓忽)은 “굼골”로 읽을지니, 고구려 말엽에 의병대장 검모잠(劍牟岑)이 의병을 일으켜 당나라와 사우던 곳이며, “굼골”의 명산인고로 “굼골산”이라 함이니, 마치 금강산이 “개골”에 있는 산인고로 “개골산”이라 한 類이거늘, 이제 굼골을 구월로 와전하고 구월을 아사달로 위증하여 단군의 후예가 구월산으로 移都한 사실을 위조하였으나, 이는 신라 경덕왕이 북방 주와 군명을 옮기고 따라서 고적까지 옮길 때에 만든 것이요 史實이 아니니라.

북부여(北夫餘)의 고명이 조리[5]비서(助利非西)요, 합이빈(哈爾賓)의 고명이 비서갑(非西岬)이라. 속어에 팔월 추석을 가우절이라 하고 삼국사기에는 가배절(嘉俳節)이라 하였으니, 비(非), 배(俳) 등의 글자가 고음에 “우”임이 명백하니 비서(非西)와 아사(阿斯)가 음이 상근(相近)할 뿐더러 단군 후예인 해부루는 합이빈에서 동천하여 동부여가 되며 해모수는 합이빈에서 굴기(堀起)하여 북부여가 되었은즉, 아사달은 곧 비서갑(非西岬)이니, 지금의 합이빈 완달산(完達山)이 그 유지(遺地)가 될 지니라 이상은 그 父나 祖의 성씨를 얻으면 그 자손된 其人의 성씨도 자연 알게 되듯이 본명사의 발생한 지방이 모호하거든 그 고명을 찾아 진가를 아는 류니라.

(四) 後名의 沿證이니, 이를테면, 진수(陳壽) 三國志 三韓傳에 “諸官”을 다 “지(支)”라 이름하였다 하며, 그 중의 대관(大官)은 신지(臣智)라 명하였다 하며, 신지(臣智)를 혹 “신운견지(臣雲遣支)”라 칭한다 하였으니, 지(智), 신지(臣智), 신운견지(臣雲遣支) 등을 당시에 무엇으로 읽었겠느뇨. 고대에 諸小國의 宗主가 되는 대국을 辰國이라 하며, 諸小王을 관할하는 대왕을 辰王이라 하며, 제소도(諸蘇塗; 神壇)의 종주되는 대소도(大蘇塗)를 신소도(臣蘇塗)라 한바, 臣과 辰 등을 다 “신”으로 독할지니, 신은 太의 뜻이며 總의 뜻이며 上의 뜻이며 제일이란 뜻이요, 智의 음은 “치”니 관명의 支와 智 등의 글자는 모두 “치”로 독할지니 신지(臣智) 즉 신치는 집정의 수상이요 “臣雲遣支”의 雲은 下文의 巨雲新國의 “운”을 여기에 첩재한자니 운 자를 빼고 “신크치”로 독함이 가하며 臣遣支는 고구려의 太大兄이요 신라의 上大等이니 신크치의 음이 臣遣支가 되며 뜻이 太大兄 혹 上大等이 됨이니라(大兄의 일명은 近知).

무릇 太大는 모두 “신크”니, 연개금(연개소문)의 太大對盧(金庾信傳에 보임)는 “신크마리”로 독할지며, 김유신의 太大角干은 신크쇠뿔한(쇠뿔한의 뜻은 이미 前述)으로 독할지니라. 저자가 연전에 북경 순치문내 석등암에 우거할때에 일개의 東蒙古僧을 만나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몽고말로 무엇이냐 물은즉 “동은 준라, 서는 열라, 남은 우진라, 북은 회차”라 하여 그 명칭이 고구려의 순나(順那), 연나(涓那), 관나(灌那), 절나(絶那) 등, 동서남북 4부와 비슷하므로 매우 경기(驚起)하여, 인하여 한자로 써 서로 문답하다가 원태조 황제의 成吉思汗이라 칭한 뜻을 물어본즉 成吉은 “싱크”니 몽고말로 최대의 뜻이요, 思는 음이 “쓰”니 威權의 뜻이요, 汗은 제왕의 뜻이니, 성길사한은 곧 무상최대의 위권을 가진 제왕이란 뜻이라 하니, 싱크는 대개 조선고어의 신크가 변화한자니 삼국 이두문의 학자의 붓으로 원 태조의 명을 쓰자면 太大思라 할지로다. 그러면 太大의 명을 가지고 역사상에 나타난 자가 김유신, 연개소문, 성길사한 3인이니, 비록 文野의 別과 활동 범위의 대소는 현수(懸殊)하나 각기 일시 동양 정치무대상의 대괴물이니 또한 일종의 佳話라 할지로다.

v) 同名異字의 互證이니, 전술한 모든 명사가 거의 동일한 명사를 互異한 자로 쓴 것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복잡한 자가 두가지니니,

하나는 “라”이니, 사라(沙羅)가 되기도 하고 사량(沙良)이 되기도 하며, 가슬라(加瑟羅)가 가서량(加西良)도 되며, 平壤이 平穰, 平那, 百牙, 樂浪, 樂良 등도 되며, 大良이 大耶도 되어, 加羅가 駕洛, 加耶, 狗邪, 加良 등도 되며, 安羅가 安邪도 되며, 邁羅가 邁盧도 되며, 新羅가 斯羅도 되며, 順那 涓那 등이 順奴涓奴 혹 順婁 涓婁 등도 되어 갈피를 잡을 수 없으나 기실은 “羅 良 盧 奴 婁 那 牙壤 耶 邪”등이 모두 “라”로 읽을 수 있는 자니 “라”는 川의 뜻이라. 삼국사기에 “故國壤一名故國川”이 壤 등이 “라” 됨을 증명하며, “素那一名金川”이 那 등의 “라”됨을 증하며, “沸流奴一名沸流川”이 奴 등의 “라”됨을 증하니라. “穰 壤” 등의 글자가 어찌 “라”가 되느뇨. 훈민정음에 “ㅿ如穰字初發聲”이라하니ㅿ은 이제 소멸된 음이나 老乞大 朴通事諺解 등의 책에 北京話의 日을 ㅿ로 발음하였은즉 ㅿ은 즉 ㄹ에 비슷한 자라. 穰자의 全聲이 ‘랑’에 비슷한 “”인고로 이두문에 펴라(펴라 씀이 가하나 “”가 소멸된 자인 고로 “라”로 代함)란 물을 쓸쌔 음으로 써서 平壤, 平穰, 百牙 등이 되며, 上字는 뜻으로 下字는 음으로 써서 樂浪, 樂良 등이 되며, 상자는 음으로 하자는 뜻으로 써서 浿河, 浿江, 浿水 등이 됨이니, 속어에 平壤笠을 “펴랑이”라 함을 보아도 平壤을 이두문에 “펴라”로 독함이 명백하니라. 平壤이나 浿水가 동일한 “펴라”이면 “펴라”가 어찌 수명이 되는 동시에 또 지명이 되겠느뇨. 공주의 “버드새”가 수명이지만, 그 수변(水邊)의 역명(驛名)도 “버드새”요, 청주의 “까치내”가 수명이지만 그 수변의 村名도 “까치내”니, 삼국지에 “句麗作國好傍大水而居”라 한 바, 수변에 作國함은 조선인 고래의 습속이다. 그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9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20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21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22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23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24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25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26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27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28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29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30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31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32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33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34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35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36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37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38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39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40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41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42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43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44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45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46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47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48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49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50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51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52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53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54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55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56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57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58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59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60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61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62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63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64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65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66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67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68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69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70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71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72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73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74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75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76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77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78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79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80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81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82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83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84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85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86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87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88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89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90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91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92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93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94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95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96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97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98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99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00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01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02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03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04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05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06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07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08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09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10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11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12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13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14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15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16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17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18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19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20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21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22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23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24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25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26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27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28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29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30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31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32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33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34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35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36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37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38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39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40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41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42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43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44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45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46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47 페이지:朝鮮史硏究草1946.pdf/148

러므로 羅, 良, 盧, 奴 등 모든 “라”의 지명이 있음이며, 나라(國家)의 명칭이 나루(津渡)에서 始함이니라. 平壤과 浿水가 이와 같이 갈리지 못할 관계가 있거늘, 順菴 선생은 패수는 대동강으로 잡고서 위만의 평양을 그 오백리 이외의 한양에 와서 구하며, 白鳥庫吉은 평양을 지금의 평양으로 잡고서 위만이 건넌 패수를 압록강 하반부라 하였으니, 이는 다 “펴라”란 이름이 이두문의 平壤, 浿水 등 됨을 모른 까닭이라.

두번째는 “불”이니, 삼한의 비리(卑離)와 백제의 부리(夫里)와, 동부여 북부여 졸본부여 사비부여(泗沘扶餘) 등의 扶餘와, 추화(推火), 음즙화(音汁火) 등의 火와, 不耐城의 不과, 사벌(沙伐), 서라벌(徐羅伐) 등의 伐이 다 “불”로 독할 자니, 불은 평지(平地)의 뜻이요, 도회(都會)의 뜻이다. 청나라 건륭황제의 흠정만주원류고에 삼한의 비리(卑離)를 곧 청조관명(淸朝官名)의 패리(貝勤)와 같은 자라 하였으나, 그러나 이를 백제의 지리지와 대조하면 牟盧卑離는 毛良夫里요, 피비리(辟卑離)는 波夫里요, 如來卑離는 爾陵夫里요, 監奚卑離는 古莫夫里니, 卑離는 국명이요 관명이 아니니, 그 상세는 졸저 전후삼한고에 보이니라. 이상은 곧 복잡한 異名字에서 음과 뜻과 연혁으로써 그 同名됨을 발견한 자니, 조선고사의 연구에 비상한 도움이 있는 자니라.

vi) 異身同名의 分證이니, 전술한 同名異字는 “라”와 “불” 등 보통명사에 관하여 同名이 異字로 쓰인 것을 논술한 바이어니와, 여기에서는 고유명사 가운데 字의 同異이는 불문하고 名의 동일한 것을 논증하려 한다.

예를 들면, 동사강목 지리고에 大同列水, 漢江列水의 辨이 있으며, 松花 鴨綠, 遼河鴨綠, 今 鴨綠의 爭이 있으나, 기실은 是라 하면 皆是요, 非라 하면 皆非니, 조선 고어에 長을 “아리”라 하였으니 장백산 고명의 아이민상견(阿爾民商堅)의 “아이”가 이를 증명하며 鴨도 “아리”라 하였으니 압수(鴨水) 일명 아리수(阿利水)가 이를 증명하는 자라. 대개 고인이 일체의 장강(長江)을 “아리가람”이라 칭하니라.

한자를 수입하여 이두문을 만들어 쓸 때에 “아리”의 음을 취하여 아리수(阿利水), 오열강(烏列江), 구려하(句麗河), 욱리하(郁里河) 등으로 썼으니, “아리”의 “아”가 “아”, “오”, “우” 등의 간음(間音)인 고로 阿, 烏, 句, 郁 등의 각종 取音이 부동함이요, 뜻으로 써서 鴨子河 혹은 鴨綠江이라 함이니 鴨綠, 炤智의 이두와 같이 아리의 “아”를 “鴨”의 뜻에서 취하고, 아리의 “리”를 綠의 음에서 취함이니, 조선족분포의 순서를 따라 아리가람의 득명한 선후를 추상해본다.

제1차에 完達山 아래 哈爾賓에 조선을 건설하고 松花江을 “아리가람”이라 하였으니 이상국집 동명왕편 註에 引한 古記의 유화왕후의 가리킨 “熊心山下鴨綠水”와 요사 성종본기의 “改鴨子河爲混同江”이 松花의 고명의 “아리”임을 증명하여, 제2차에 남하하여 遼河를 보고는 또한 아리가람이라 하였으니, 삼국사기 지리지의 “遼東城本名烏列忽”과 삼국유사의 “遼河一名鴨綠”이 遼東河 옛 이름인 “아리”임을 증명하며, 제3차에 동진하여 현재 압록강을 보고 또한 아리가람이라 하였나니 지금까지 변치 않은 압록의 명이 그 고명의 아리임을 증하며, 제4차에 서출하여 永平部의 灤河를 보고 또한 아리가람이라 하였으니 永平部志의 郁列河, 武列河가 난하의 고명이 “아리”임을 증하며, 제5차에 경기도의 한강을 보고 또한 아리가람이라 하였으니 온조본기의 위례성과 광개강토호태왕의 비문이 “渡阿利水”와 개로왕본기의 郁里河가 한강 고명의 아리임을 증하며, 제6차에 경상도에 至하여 낙동강을 보고 또한 아리가람이라 하였으니, 신라 지리지의 阿尸良과 일본서기의 阿禮津이 낙동 고명의 아리임을 증하니라. 列水, 烈水 등은 支那人이 烏列水, 郁列水 등을 약하여 슨 자니 모든 열수가 곧 모든 압록강이요 모든 압록강이 곧 모든 열수니, 시대와 경우를 따라 위치를 구별함은 가하거니와, 만일 열수를 한 개를 만들며 압록가을 한 개를 만들려 함은 치상(癡想)에 불과하니라.

산해경이 비록 후인이 백익(伯益)에게 위탁한 書이나 사마천 사기에 산해경을 설급하였은즉, 지나의 秦漢 이전의 書됨은 명백한 바, 기중의 “朝鮮在列陽東海北山南列陽屬燕”의 文에 의하여 先儒들이 列은 漢水요 陽은 水北의 뜻이요, 조선은 지금 평양이라 하여朝鮮在列陽을 一句로 읽었으니, 그러면列陽屬燕을 어떻게 해석할까? 列陽의 陽은 平壤의 뜻과 같이 水의 뜻이요 초성을 읽어 “라”로 발음할 자니[6], 지나인이 당시 조선인이 쓰는 이두문의 烏列陽, 혹은 郁列陽을 약하여 열양(列陽)이라 쓴자라. 列陽屬燕이 한 개의 구니 우의 列陽은 곧 영평부의 灤河를 가리킨 자요, 조선은 廣寧 平壤 혹은 海城 平壤을 가리킨 자요, 海北은 발해의 북을 가리킴이요, 山南은 無閭의 남을 가리킴이니, 이것이 대개 秦開 入寇 이후의 기록이므로列陽屬燕이라 함이니라.

관야정(關野貞)의 조선고적도설 해설 점제비(朝鮮古蹟圖說解說 黏蟬碑) 註에 그 비의 발견에 의하여 歷來爭論이 되던 열수는 대동강이 됨이 가하다 하였으나, 이든 반드시 한서 지리지의 “列水西至黏蟬入海”를 거함일지나, 그러나 이는 1) 열수의 多數됨과 2) 한서 註의 顔師古등의 위증이 있음을 모른 말이라. 2)에 속한 논변은 졸저 “평양 패수고”와 “전후 삼한고”에 보이니라. 余友 某君이 鴨綠의 鴨은 음 “압”이니 앞(前)의 뜻이요, 鴨綠의 古號인 마자(馬訾)의 馬는 음이 “마”니 南의 뜻이요, 송화강의 古號인 粟米의 粟은 음이 “속”이니 리(裡)의 뜻이라 하니, 압록의 “압”은 오해이나 其餘는 거의 近理하니, 송화강은 만주어에 “송아리”라 하니 “송아리”는 “속아리"의 변화일지니, 속아리는 “國裡(나라 안)”의 아리란 뜻일지며, 압록의 일명이 梅河이니 梅가 馬訾, 馬와 비슷하니 國南의 長江인고로 “마아리”라 함이며, 灤河, 遼河, 漢水 등의 구별한 명사는 찾을 수 없으나 모두 아리로 할때에 그 구별이 있었을지니라.

고대에는 지명뿐 아니라 인명도 父子祖孫이 같이 짓고, 세대 혹 대•소 등 자를 그 上에 冠하여 구별하였으니, 김부식이 신라의 양(兩) 儒理王을 의(疑)하여 其一은 禮자로 改한다 명언하며, 백제의 兩 蓋婁王을 疑하여其一은 蓋鹵王으로 하였으나, 이는 다 周公 孔子의 諱法이 수입된 뒤의 안목으로 고사를 독한 까닭이라. 麗朝 초년가지도 그 유풍이 있었으므로 안동권시의 족보에 據하면 權太師의 이름이 幸이요, 그 子의 명이 仁幸이니라. 이 따위 관계를 모르고 고사를 연구하면 마침내 맹인의 야행이니라.

목차

3. 결론[편집]

이상의 서술한 바는 곧 졸견으로 얻은 바 古史上의 이두문으로 쓴 명사의 해석법이라, 이 따위 해석에서 얻은 사학적 연구상의 효과를 略陣하리라.

1) 前人의 이미 증명한 자를 더욱 堅確하게 함이니 마치 咸昌이 古寧加耶임은 전인의 설도 있지만, 이제 耶, 羅가 동음인 줄을 발견하여 고녕가야를 고링가라로 독하는 동시에 咸昌 공갈못의 공갈이 곧 고링가라의 축음임을 알지며, 따라서 고링가라의 위치가 더욱 명백할지니라.

2) 유래의 의문을 명답할 수 있으니, 마치 고려사 지리지에 익산의 武康왕릉을 箕準의 능으로 載하고, “俗號末通大王陵”이라 註하여 “一云百濟武王小名薯童”이라 再註하여 양설을 병존하였으나, 그러나 삼국유사에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女 선화를 유취(誘娶)한 사실을 기하였으며, 여지승람에는 무강왕이 선화부인과 미륵산성을 作할새 진평왕이 百工을 보내 助하였다 하니 薯의 뜻은 “마”니 薯童은 곧 “마童”이요, 末通은 곧 마동의 취음인즉, 무강왕은 곧 백제 본기의 武王인 장(璋)이라. 장(璋)의 시(諡)가 무강(武康)왕이어늘 잔결(殘缺)한 백제사에 강(康)을 궐하며 장(璋)의 왕후가 선화요, 미륵산성은 장(璋)과 선화의 연애를 노래하던 유지(遺址)어늘 사가의 참고가 부정(不精)하여 8백세의 연령이나 차이가 있는 격세(隔世)의 왕인 기준(箕準)의 궁인으로 인(認)하여 柳冷齋같은 박학자로도 그 익산의 懷古詩에 “可惜蒼黃浮海日”, “船頭猶載善花嬪”의 笑話를 끼쳤다.

3) 전인의 위증한 자를 교정할 수 있으니, 역옹패설에 신라 진흥대왕이 벽골제(속칭 金堤萬頃 외밤이들)를 짓고 도(稻)를 種하므로 후인이 그 은덕을 생각하여 稻를 羅祿이라 하다 하였으니 羅祿의 解도 고린 漢文장이의 해석이어니와, 完山에 그친 眞興의 족적이 어찌 김제의 벽골제에 가서 稻를 種하리요. 백제 지리지에 거하면 碧骨은 곧 김제의 古號요 백제의 군이니, 碧骨은 베골(稻邑)이니 백제가 이 堤를 쌓아 稻田을 作하고 그 이익이 다대함을 기념하여 “베골”이란 군명을 냄이 명백하다. 백제본기에 稻田을 記한 자가 둘이니, 하나는 다루왕 6년의 始作稻田이 그 是요 두번째는 고이왕 9년의 開稻田於南澤이 是니 벽골은 곧 두번째에 속한 남택의 稻田이 될지니라.

4) 前史에 두찬(杜撰)을 타파할 수 있으니 삼국사기에 석탈해는 金櫝에서 탈출한 고로 이름을 탈해라 하고, 작명(鵲鳴)의 서(瑞)가 있었으므로 鵲자 좌변의 昔을 차(借)하여 성을 석씨(昔氏)라 하였다 하며, 동사회통에 고주몽은 거국이 고앙(高仰)한 고로 성을 高氏라 하였다 하며 문헌비고에 여수기(余守己)가 단군의 9부 군장이 되어 중인이 부(附)하므로 중인변(衆人邊)을 가하여 徐氏가 되었다 하여, 각종의 괴설이 분운하나, 그러나 삼국 중엽 이전에는 人, 地, 官 등 각종의 명사를 모두 우리말로 짓고 이두문으로 슨 것이니, 어디 이 같은 漢字 破字의 벽습(僻習)이 있었으랴. 이다위 파자가 麗朝 중엽에 성행하여 황규(黃葵)가 황규(皇揆)가 되고, 계명성(鷄鳴聲)이 고귀위(高貴位)가 되고, 無古之那가 無古之難이 되고 身負三椽이 王자가 된다는 等說이 고려사에 보인 자 허다한 바, 이 시대의 이 습관을 잘 아는 문사들이 고기를 수습하다가 말로 지은 명사를 한자의 뜻으로 解하여 고사의 면목을 오손함이 적지 아니하니라.

이두문적 명사의 해석이 이와 같이 고사 연구에 유익하나, 그러나 반드시 독단을 피함이 가하니, 예하면 연개소문의 蘇文은 신으로 독함이 가하나 을지문덕의 文德은 묵인지 묻인지 무드인지 알 수 없음은 전자는 삼국사기의 그 本註의 一名蓋金이 그 해석을 전하거니와, 후자는 그 해석을 失한 까닭이라. 고자미동(古資彌凍)의 고자(古資)는 구지(半島)로 독함이 가하나, 彌難彌凍의 彌難은 밀인지 미리인지 머리인지 알 수 없음은 전자는 고자군(古自郡: 田城의 古號)의 지형과 역사의 연혁이 그 설명을 與하거니와 후자는 그 증거가 없나니라.

나. 三國史記 중 東西 兩字의 相換 考證[편집]

1. 東有樂浪의 시비[편집]

낙랑은 평양의 별명이요, 평양은 백제의 서북이어늘, 이제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를 보면 “國家東有樂浪” 이란 1구가 있다. 그리하여 歷來 사가의 논제가 되었다. 安順菴은 “낙랑이 비록 백제의 서북이지만 낙랑국(최씨) 성시(盛時)에 강원도 반폭(半幅)이 거의 낙랑의 속지가 된 고로 백제가 강원도 부분의 낙랑을 가리켜 東有라 하였다” 하고, 정다산은 “右의 낙랑은 춘천 낙랑이요 평양 낙랑이 아니니, 대개 춘천의 土酋 최씨가 굴기(堀起)하여 낙랑국이라 칭하고 매양 신라와 백제를 침하므로 신라 백제 양국의 초엽에 보인 낙랑은 모두 춘천 낙랑이니, 춘천낙랑인 고로 東有라 하였다” 하나, 낙랑의 본부가 평양인즉, 백제인이 낙랑을 거론할 때에 본부를 사(捨)하고 그 부분인 강원도 낙랑을 말할 리가 없으므로 나는 순암 선생의 말을 좇으려 아닌한다.

춘천이 漢의 낙랑 동부가 되었단 말은 있으나 춘천을 낙랑이라 칭한 때는 없으며, 또는 삼국사기에 거하면 신라와 백제의 초년에 모두 낙랑국의 침구로 인하여 비상히 곤고하다가 고구려 대무신왕 17년에 낙랑을 멸하고 20년에 낙랑을 다시 漢에게 견탈(見奪)함으로부터 낙랑의 침구가 羅•濟 양국사에 보이지 아니하였은즉, 그 각문에 보인 낙랑들이 곧 1개의 낙랑임이 명백하여, 漢이 낙랑을 취하여 살수 이남이 한에게 속하였다 한즉 그 낙랑들이 모두 今 평양임이 명백하다. 그리하여 나는 다산 선생의 말도 좇으려 아니한다.

그러면 東有의 兩字를 어떻게 해석하려 하는가? 次節에 이를 해설하여 한다.

2. 삼국사기에 바뀐 東西 兩字[편집]

삼국사기에 西자가 東자로 바뀐 것이 많으니, 이를테면 온조왕 24년에 마한왕이 온조를 責하여 가로되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라 한 바, 백제가 마한의 서북인즉 마한의 할여한 百里地, 온조의 初據한 미추성, 위례성 등도 서북이 됨이 명백하니 “동북일백리”는 “서북일백리”로 作함이 가하며, 온조왕 37년에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浿帶之間 空無居人.”이라 한 바, 패수는 대동강이요, 대수는 임진강이면, 한수 서북됨이 확연한즉, 한서 서북 부락이 도망하여야 浿帶之間에 據人이 없으리니, “한수동북”은 “한수서북”으로 作함이 가하며, 지리지에 “新城國之東北大鎭.”이라 한 바, 신성은 高奴子가 鮮卑를 막고 男建이 李勣을 막던 고구려의 서북 요새인 고로 신당서에도 “新城賊之西邊要鄙.”라 함이니 “동북대진”은 “서북대진”으로 작함이 가하다. 이상은 모든 東자는 西자로 작함을 인하여 나는 東有樂浪도 西有樂浪으로 작함이 가하다 한다.

3. 東西兩字의 바뀐 원인의 가정[편집]

하고로 삼국사기 중에 西자를 東자로 바뀐 자가 이다지 많으냐. 만일 당시의 사람들이 일월의 출몰하는 동서의 방향까지 몰랐다 하면 삼국 문명이 모두 거짓말이 될 뿐이며, 혹은 당시의 초사자(抄寫者)나 후세의 인판자(印版者)가 誤함이라 하면 다른 문자는 그렇지 않은데 홀로 西자만 쫓아다니면서 東자로 誤할 리가 없으며, 또는 西자의 자형과 비슷한 兩자나 雨자나 而자나 亞자 등으로 誤寫치 않고 오직 字意의 반대되는 東자로 오사할 리도 없으며, 또는 반대되는 南자나 北자로 誤치 않고 이제 공교히 3, 4 처에나 동일한 西자로만 誤하였다 함도 不成의 설이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말에 “동방”을 “시”라 하고 “서방”을 “한”이라 하므로 삼국시대의 학자들이 한자를 취하여 이두자를 만들 때에 西자의 음 “시”를 취하여 “東”쪽을 “시(西)”로 쓰며, 그 대신에 “西”를 “東”으로 써 東西 양자가 바뀌었으며 사가가 사책을 지을 때에 그 바뀐 東西 兩字를 썼으므로 고사상에 바뀐 동서 兩字가 있음이라는 가정을 세웠다.

4. 가정부터 實例[편집]

그러다가 삼국사기의 지리지를 독하니 “迦瑟羅一名河西良”이라 하였다. 가슬(迦瑟)은 “가시”요, “가시”는 포동(浦東)의 意니 고구려는 琿春 등지를 가시(迦瑟)라 하고, 신라 경덕왕 이후에는 今 강릉을 가시(迦瑟)라 한 자니, 그러면 고구려의 가시는 고구려 동북의 지명이요, 신라의 가시는 신라 동북의 지명인즉, 가시를 河東良이라 하지 않고 河西良이라 함은 東의 意를 취하지 않고 西의 意를 취함이니 이것이 이두자의 東자를 西자로 바꾸어 쓴 실례가 아니냐. 이로써 나의 제1가정을 확증하였으며, 고구려에서 제천대회를 寒盟이라 칭한 바 한맹의 일명이 東盟이니, 寒盟은 그 음이 한몽이 될지며, 한몽은 大會의 意니, 함몽의 한을 음으로 쓰면 寒盟의 寒이 되려니와 意로 쓰면 西가 될 터인데, 이제 西盟이라 하지 않고 東明이라 함은 이두자의 西자를 東자로 바꾸어 쓴 실례가 아니냐. 이로써 나의 제2가정을 확증하였다.

5. 兩種史冊의 不同[편집]

그러면 고사상에 동서 양자가 모두 바뀌지 않고 바뀐 동서 양자가 있는 이외에 바뀌지 아니한 동서 양자도 있음은 하고인가(뭔소린지…)?

대개 삼국시대에 이두자로 쓴 史冊과 한자로 쓴 사책이 있었으니, 가령 백제사에 왕근왕(王斤王 – 本紀에 三斤王이라 함은 誤板) 일명을 임걸왕(壬乞王)이라 하니, 一은 한자 사책에서 전한 명이면 他一은 이두자 사책에서 전한 명이며, 삼국유사에 노례(弩禮; 누리 즉, 世)왕의 일명이 유례왕(儒禮王)이라 하니, 一은 한자 사책에서 전한 명이면, 他一은 또 이두자 사책에서 전한 명니, 기타 모든 관명 지명 등의 양명있는 자는 다 양종 사책의 쓰인 명을 竝傳한 자며, 소문전(蘇文傳)에 “其父東部大人”이라 하고, 註에 “或云西部大人”이라 하였으니, 본문과 주의 인용한 자가 이같이 상반함은 양자 중의 一이 한문 사책에서 출한 동시에 他一은 이두자 사책에서 출한 것일지니, 동부 서부의 분별하지 못하게 됨이 더욱 고사상에 동서 양자 바뀐 것이 있는 실증이다.

6. 김부식의 호도(糊塗)[편집]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미 한문의 저작인즉 이두자의 쓰인 古詞나 방위 같은 것을 모두 개정치 아니함은 하고인가? 김씨는 황조맹랑(荒粗孟浪)한 사가라. 發岐와 拔奇는 1인의 名의 兩譯이어늘, 김씨가 一은 고구려사에 거하며 他一은 중국사에 거하여 쓸 쌔 誤分하여 양인을 만들었으며, 살수는 삼국시대 가장 유명한 전장이어늘 김씨는 이들 未詳地分에 넣었으며, 이밖에도 이러한 호도(糊塗) 하나 둘이 아니다. 김씨가 이두문에 무식하므로 모든 알기 쉬운 국어의 관명도 “夷言不知其意”라 自註하였으며, 게다가 이두문 배척에 결렬하여 신라시대에 끼친 시가, 삼국유사에 적힌 시가를 삼국사기에는 한 짝도 쓰지 아니하였으니, 만일 김씨가 전술한 인명, 지명, 東西 등이 이두문의 것인줄을 알았더라면 모두 배척하고 收入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어찌 개정 여부가 있으랴. 그러면 삼국사기에 바뀐 東西 등 자의 존재는 누구의 收拾이냐? 麗初의 문사, 혹 승려들이 각종의 古記를 한문으로 지을 때에 모든 이두자의 사책을 역출하는 동시에 그들 不經意하는 가운데서 우연히 유루(遺漏)하여 몇 개 바뀐 동서 양자가 남아 있음이 아닌가 한다.

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편집]

1. 교정의 이유[편집]

조선사 연구의 제목을 가지고 하고로 중국 위진시대 사관이 지은 삼국지 동이열전 같은 것을 취하는가. 조선 고문헌이 너무 멸망하여 상고의 조선을 연구하자면 마치 바빌론고사를 연구하는 자가 헤로도투스의 희랍사를 참고하지 아니할 수 없음과 같이 중국 고사에 힘입은 것이 적지 아니하나, 다만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 쓰인 조선열전은 중국 망명자로 조선의 一隅를 도거(盜據)한 衛氏 일가가 漢과 대항하던 略記니 조선열전이라느니보다 도리어 중국 流賊의 침략사라 함이 가하며, 남북사, 수서, 당서 등의 동이열전은 비교적 상비(詳備)하나 또한 각기 당시 중국에 관계된 일만 적었으니 이는 漢族의 外競史라 함이 가하거니와, 위진시대의 사관들은 그렇지 아니하여 단군왕검의 건국이 왕심의 위서에 보이며, 조선왕 否, 조선왕 準 등의 약사가 어환의 위략에 보이며, 고대 열국의 국경 관제 풍속 등이 진수의 삼국지에 보이어, 중국과 관계되지 않은 고사까지도 간혹 기재하였다.

이는 고구려 동천왕 때에 衛將 관구검이 환도(丸都: 고구려 서울)에 入寇하여 주워간 서적과 전설이 있어 據錄한 자가 있은 듯 하니, 당시에는 비록 국치(國恥)이나 후세의 사적 재료는 이에서 더 진귀한 것이 없을 까닭이다.

魏晉 사관의 기록 가운데서 하고로 삼국지만 취하는가. 전술한 모든 사관의 기록에 왕침의 魏書는 “往在二千載有檀君王儉立國阿斯達”의 수십자가 麗僧 一然의 삼국유사에 전하였을 뿐이며, 어환의 魏略은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 註에 인용한 4, 5조가 전하였을 뿐이요, 그 양서의 전부가 다 缺亡하였으므로 하릴없이 삼국지만을 취하게 됨이며, 先儒는 매양 삼국지 동이열전을 捨하고 후한서의 것을 취하였으나, 이는 다만 후한이 삼국의 前代인 줄만 알고 후한서 저자 범엽이 삼국지 저자 진수보다 백여년 이후의 사람임을 생각지 아니함일 뿐더러, 양 동이열전을 대조하면 후한서의 것이 명백히 삼국지의 초록이건만 이를 깨닫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후한서를 사하고 삼국지를 취함이다.

하고로 이를 취하는 동시에 교정을 가하는가. 천 년 이전에는 印版이 없어 一致書籍이 모두 抄寫로 전하므로 전도(顚倒), 와오(訛誤), 탈락(脫落), 증첩(增疊)된 자구가 허다하여 중국의 경사(經史)가 모두 고증가의 손을 경한 뒤에야 可讀하게 되었는데, 조선열전 동이열전 같은 것은 피등(彼等)이 고증에 용력하지 아니하였으며, 설혹 용력할지라도 自家의 눈에 서투른 인명, 풍속, 사정 등을 잘 모르므로 그 교정한 것이 더 착오된 것이 있으니 교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 하나요, 피등이 그 유전적 자존성으로 타국을 묘시(藐視)하여 동이라 칭한 것도 가통(可痛)하나 그러나 이는 사실에는 관계가 없거니와, 다만 고의로 무록(誣錄)한 것도 있으며, 혹 전문으로 오록(誤錄)한 것도 있어 교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 두번째이니, 그러므로 저자의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이 있게 된 것이다.

2. 字句의 교정[편집]

이제 전도, 와도, 탈락, 증첩된 자구를 교정하리라.

1) 서문에 窮追極遠踰烏丸骨都라 하니 오환골도(烏丸骨都)는 烏骨丸都의 誤요, 오골과 환도는 다 城名이나, 오골성은 지금의 連山關 일명 鴉骨關이요, 환도성은 지금의 집안현동선령(輯安縣洞仙嶺)이니, 오골과 환도의 위치 연혁은 조선사를 읽는 자의 명지하는 바이므로 이제 번록(煩錄)하지 아니하거니와, 관구검의 환도성 침입은 본 열전에 상기한 바, 오골은 곧 관구검이 유주(幽州)로부터 환도성에 침입하는 경로인즉 踰烏丸骨都가 곧 踰烏骨丸都의 오임이 명백하지 아니하냐. 대개 상문의 烏丸傳이 있음으로 인하여 초사자(抄寫者)가 오골의 골과 환도의 환을 바구어 오골환도라 쓴 것이다.

2) 濊傳에 有亷恥不請句麗言語法俗大扺與句麗同 이라 하니, 우기의 문자는 文理가 닿지 아니하므로 지나학자들까지도 이를 의심하여 모두 그 오자가 있음을 인하여 동시에 건륭의 흠정삼국지 위지 권 20 고증에는 有廉恥不請의 請을 諳의 오자라 하고 이를 下文에 屬讀하여 不諳句麗言語라 하였으나 上文에 同言語의 인민을 指함인즉 청을 암으로 개하여 不諳句麗言語라 독함이 상하의 문으를 모순케 함일 뿐더러 예는 곧 동부여의 오니 (次節의 기사교정 참조) 동부여가 구려의 언어를 몰랐다 하면 갑의 종형제 을이 갑의 언어를 모른다 함과 같으니, 흠정삼국지의 운운은 다만 억단이 될 뿐이다. 후한서 예전의 상문에 自謂與句驪同種 言語法俗大抵相同其人性愿慤少嗜欲不請匄에 거하여 보면, 不請句麗言語의 請은 오자가 아니요 句가 匄의 오자이며 麗는 하문의 句麗의 麗로 말미암아 오증이 된자니, 이를 개정하면 有廉恥不請匄 言語法俗與句麗同이니 有廉恥不請匄가 1구요 言語法俗與句麗同이 1구이다.

3) 韓傳의 臣智惑加優呼臣雲遣支니 삼한이나 부여가 각부 대신을 “크치”라 칭한 바, 크치를 음으로 써서 “遣支(견지)”, “遣智(견지)” 혹은 “近支(근지)”가 되고 뜻으로 써서 大兄(대형) 혹 大等(대등)이 되고, 각 대신의 首長(수장) 총리대신을 “신크치”라 칭한바, 신크치를 음으로 써서 臣遣支(신견지), 혹 臣近智(신근지)가 되고, 뜻으로 써서 太大兄(태대형), 혹 上大等(상대등)이 된다 함은 이미 졸저 이두문 명사 해석에 설명하였거니와, 우기한 臣雲遣支의 雲은 곧 하문의 臣雲新國의 雲으로 말미암아 誤證된 자니 이를 개정하면 臣智惑加優呼臣遣支라 할지니, 신크치의 약칭이 신치가 되어 당시의 습관어가 되고 신크치라 具稱함이 희소하므로 臣遣支惑略呼臣智라 쓰지 않고 도리어 臣智惑加優呼臣遣支라 씀이다.

4) 변진전의 “借邑”이니 韓傳에는 邑借란 관명이 있고 변진전에는 借邑이란 관명이 있는 바 양자 중 하나는 반드시 倒寫(도사)한 자일지니 何者(하자)가 도사인가. 頓(돈)씨의 가보에 거하면 돈씨는 을지문덕의 자손이니 을지는 관명이요 성이 아니라 하며, 일본인 白鳥庫吉은 퉁구스족의 말에 使者(사자)를 “일치”로 칭한 바, 읍차는 그 음이 일치와 비슷하니 또한 사자의 뜻이 될지며, 고구려의 관명의 鬱折(울절)도 또한 ”일치”인 듯 하니 변진전의 차읍은 곧 읍차의 도재일 것이다.

5) 변진전의 彌烏邪馬(미오야마)니 邪 耶 牙 등 자가 모두 “라”의 음이 됨은 이미 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에 설명하였거니와 해동역사 지리에 거하면 현금 高靈이 곧 변진의 彌摩那인즉 본전의 邪馬는 馬邪의 倒寫이다.

6) 한전의 駟盧(사로), 莫盧(막로)와 변진전의 馬延(마연)이니, 우의 삼국은 疊寫(첩사)이므로 해동역사의 刪去함이 옳은 것이다.

窮追極遠踰烏丸骨都 (지극히 먼 지방까지 추격하니, 烏丸과 骨都를 넘고)

3. 기사의 교정[편집]

前節(전절)에 진술한 바는 본 列傳(열전)의 抄寫(초사)시대의 抄寫者(초사자)들이 誤(오)한 字句(자구)를 교정한 자이어니와, 이제 본절에는 당초 그 본문의 잘못된 기사를 교정하려 함이다.

위진 사관이 관구검이 가져간 고구려의 서적이 있어 참고하였다해도 기사의 違誤(위오)가 많음은 마치 원명청 사관들이 원사나 명사나 일통지 간운데서 고려의 사책이나 이조의 여지승람의 본문을 등록하자면 매양 妄改(망개)와 위증이 있는 유라 할 것이다.

이제 이를 略擧(략거)하건데,

1) 辰韓(진한)을 秦人(진인)의 자손이라 함이니 사마천의 사기에 흉노를 하우씨의 자손이라 하며, 한시외전에 고죽국을 湯(탕)의 封國(봉국)이라 하며, 어환의 위략에 大秦(대진)–로마인을 지나인의 자손이라 하여 彼國(피국) 사가들이 매양 그 조존의 僻見(벽견)으로 허다한 笑話(소화)를 끼쳤지만, 본 열전에도 그 謬習이 있어 辰韓(진한)의 일명은 秦韓이라 하고, 秦韓(진한)의 秦(진)에 傅會(부회)하여 辰韓(진한)은 秦人(진인)의 동주한자라 하며 이를 위증하기 위하여 辰馬 양 韓이 동일한 “羅 那 不斯” 등의 지명과 동일한 신지, 읍차 등의 관명이 있음을 불구하고 “辰韓…言語不與馬韓同”의 억단을 내리며, 모호망매(模糊茫昧)한 國爲邦,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등 난구(讕句)를 가입하여 “言語…有似秦人”의 불충분한 증거를 발표하여 조선의 족계를 亂하려 하였으며…

2) 동부여를 濊로 오인함이니, 지나인이 조선 일을 적을 때에 너무 무책임하게 적어, 공자의 춘추에 조선을 산융과 섞으며, 사마천의 사기에 진번조선의 對燕전쟁을 흉노전의 동호 산융 혹 예맥 등의 사실에 넣어 만일 관자나 위략이 아니면 그 오류를 발견할 수 없이 되었거니와, 본지에도 또한 동부여를 예로 오인한 잘못이 있다.

예맥은 곧 “려신”이니 려신을 혹 “려”의 한자로 譯하여 離枝(이지), 令支(영지), 濊(예), 穢(예), 薉(예) 등이 되며, 혹 려신을 두 자로 병역하여 女眞(여진), 野人(야인) 등이 되며, 혹 려신의 아리강으로 그를 이름하여 挹婁(읍루), 鴨盧(압로) 등이 되며, 혹 “려신”의 別部(별부) “물가”로 전체를 총칭하여 勿吉(물길), 靺鞨(말갈) 등이 된 자라 할 것이다. 歷來(역래) 학자들이 조선의 삼국 초인 중국의 漢末(한말)에 읍루란 명만 있은 줄 알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기에 “王率馬韓濊貊一萬餘騎”라 하여 읍루를 예맥으로 仍書(잉서)하였으며 조선의 삼국 말인 중국의 당나라 초기에 靺鞨이란 명만 있는 줄 알지만 김유신전에 “唐高宗高句麗與濊貊向惡”이라 하여 말갈 예맥으로 仍稱(잉칭)하엿으니 “려신”의 명칭과 연혁이 대개 이러한 것이어늘, 본지에 읍루가 濊의 별명임을 모르고 읍루전을 立한 이외에 따로 濊傳을 立함이 하나의 誤요, 동북 양 부여 가운데에 북부여는 그저 부여라 칭하는 동시에 동부여를 濊로 인함이 再誤니라

그러나 읍루전에 “挹婁在扶餘東北千餘里言語不與扶餘句麗同 東夷飮食類皆用俎豆唯邑婁不法俗最無綱紀” 라 하니 扶餘東北千餘里가 송화 흑룡연안의 려신국이 아니냐. 言語不與扶餘句麗同이 후한서 읍루전과 북사 물길전의 在東夷中言語獨異라 한 려신족이 아니냐. 唯邑婁不法俗最無綱紀가 조선 열국 중 가장 미개한 려신이 아니냐. 그 위치 언어 풍속의 설명이 곧 려신임이 명백하며, 濊傳에는 濊南與辰韓北與高句麗沃沮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이라 하였으니, 남으로 진한을 접하고 북으로 고구려와 옥저를 접한 자가 동부여가 아니냐. 언어는 당시 조선 열국이려신 부락 이외에 모두 동일한 어어이었지만, 법속이 부여 고구려 양국과 상동한 자가 동부여가 아니냐. 이는 그 위치 언어 풍속으로 말미암아 동부여를 예로 오인함이 명백하거늘 후세 학자들이 삼국지의 誤를 발견치 못하여 조선사상 또는 동양사상 종족의 界限을 劃淸(획청)하지 못하여 허다의 분규를 釀出(양출)하였다.

唐(당) 賈耽(가탐)의 “新羅北 溟州古濊地前史以扶餘爲濊地者蓋誤”는 다만 북부여가 濊가 아님을 발견할 뿐이요 동부여가 濊가 아님은 依舊히 발견치 못함이다.

혹왈 “려신이 水草를 逐하여 遷徙하는 蠻族인 고로 삼국사에 羅 濟 麗 삼국의 중간에 잡거한 말갈려신도 있으며, 고려사에 두만과 압록 등지에 侵據한 女眞려신도 있었은즉, 본지의 濊도 이와 같이 일시 동부여 역내에 침입한 려신됨이 가하다”하나 설혹 그렇다 할지라도 主인 동부여를 立傳하지 않고 客인 濊를 입전함은 본지의 誤이다.

3) 樂浪을 뺌이니, 낙랑은 조선사상 가장 장황분요(張皇紛擾)한 대문제라, 그 詳論은 타일로 讓하거니와, 이제 약설하건대 낙랑은 평양이요 평양은 펴라의 譯이니, 漢 武帝가 위만을 멸하고 낙랑을 州郡의 제일로 정하니, 그 위치가 지금 海城등지요, 최씨란 자가 대동강 연안에서 굴기하여 낙랑국이라 칭하다가 末王 崔里가 고구려에게 망하니 이는 곧 대무신왕 20년이요, 그 뒤에 낙랑속국이 고구려에게 불복하여 漢兵을 영입하여 고구려에게 반항하니 이는 대무신왕 말년이라. 羅 濟 양국이 처음에 낙랑의 침구로 말미암아 안정한 날이 없다가 대무신왕 이후부터 그 침구가 絶跡(절적)됨은 최씨왕국이 멸망한 까닭이라.

한 광무 이후의 낙랑이 비록 漢에 服하였으나 그 인민의 자치와 각 소국의 주권은 의구히 조선인이 主하였으니, 소위 낙랑태수는 요동에 僑寓(교우)한 자요, 태조왕때에는 요동이 낙랑까지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당 賈耽(가탐)의 四夷述自序에 “遼東樂浪陷於漢建安之際”라 함이요 동천왕 때에 至하여 대동강의 낙랑은 고구려에 仍屬하였으므로 동천왕이 丸都를 관구검의 유린에 棄(기)하여 廟社와 인민을 평양에 移함이나, 요동의 낙랑은 魏에 見失하였으므로 관구검의 還軍할 際에 낙랑을 從함이요, 미천왕 때에는 요동의 낙랑이나 대동강의 낙랑이 다 고구려에 入하였으므로 연나라 모용외가 永平部의 柳城에 낙랑을 移設함이며, 광개토왕 장수왕 이후에는 柳城의 낙랑이 고구려의 침핍을 당하다가 백제의 兵이 海를 渡하여 침거하여 위제(魏帝: 拓跋氏)가 상곡(上谷: 지금 大同府)내에 낙랑을 이설함이니, 이상은 사책에 증명된 자라.

요동낙랑은 비록 조선의 소유된 때가 있으나 그 인민과 지리가 당시 중국사의 범위에 입한 자이며, 대동강의 낙랑은 비록 漢族의 정복을 被한적이 있으나 항상 조선에 속한 것이어늘 삼국지가 한서 지리지의 遺規(유규)를 襲(습)하여 낙랑을 조선열전 중에 빼었으므로 그 지리의 缺憾(결감)은 고사하고 첫번째는 고구려와 낙랑의 언어 풍속 등 同異의 관계를 말하지 아니하며, 두번째는 낙랑과 삼한의 언어 풍속 등 同異의 관계를 말하지 아니하며, 세번째는 따라서 고구려 부여 등 북방제국과 삼한 등 남방 제국과의 연락이 단절하여 본지 동이열전의 비상한 결점이 되었다.

4) 拔奇(발기) 新大王의 제2자의 차서를 誤하여 장자라 하며, 공손강에게 借兵한 사실에도 약간의 誤가 있으며 고구려왕을 고구려후라하며 고구려사에 보이지 아니한 고구려후의 騶(추)란 이름이 있으며 王莽(왕망)이 고구려후 騶(추)를 斬(참)하였다하며…기타 모든 착오가 있으나 이는 사학상에 그리 대문제 될 것이 아니라 贅論(췌론)하지 아니한다.

4. 결론[편집]

역사를 연구하려면 사적 재료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지라. 고물이 산같이 쌓였을지라도 고물에 대한 학식이 없으면 일본의 寛永通寶(관영통보)가 箕子의 유물도 되며, 십만책의 藏書婁(장서루) 속에서 坐臥(좌와)할지라도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왕검의 성언이 되는 것이다.

역래의 조선사가들의 소위 사학은 매양 博學으로써 유일의 조건을 삼으며 그 소위 박학은 오직 서적뿐이요 그 소위 서적은 중국서적뿐이었다.

김부식은 조선 고사가 결망된 까닭에 無虎洞中의 弧狸와 같이 조선사가들의 鼻祖가 되었지만, 彼가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宋人의 책부원구 일천권을 사다가 自家의 참고에 供하고는 內閣에 心臟하여 타인의 열람을 불허하여 자가가 유일한 박학자의 명예를 가지는 동시에 삼국사기가 명예와 같이 국내 유일의 역사됨을 희망하였다. 彼의 악렬한 수단이 참 通惡할 만할 뿐더러 그 사학적 두뇌가 비상히 결핍하여, 즉 근세의 발달된 역사에 비하여 손색이 있을 뿐 아니라 동양 고대의 인물중심주의의 역사의 저울로 달아볼지라도 삼국사기는 몇푼어치가 못되는 역사다.

삼국유사 점필재집 등에 산견한 천년사상계의 지배자인 영랑, 술랑, 부례랑 등 위인을 쓰지 아니하며 文武王書, 당서, 일본서기 등에 유전한 백제 말일의 유일한 영물인 부여福信의 열전을 짓지 아니하며, 무공이 가장 많은 동성왕 시대를 微弱으로 오증하며, 奇功을 세운 양만춘을 누락하며, 족계를 談하려면 왕검시의 정통인 부여를 刪棄하며, 지리지를 기하려면 고구려의 후계인 발해를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는 문화사로나 정치사로나 가치가 심히적다.

彼가 중국서적에서 얻은 박학도 너무창피하여 사기 조선열전의 “聚燕齊亡命王之都王儉”을 인용할 때에는 왕지를 하문에 붙여 “왕지도왕검”이라하여 그 귀절을 옳게 떼지 못하였으며, 宋書 고구려전의 “璉不欲使弘南來”를 移錄할 때에 璉을 왕으로 고치면서 來는 그대로 두어 장수왕이 평양에 앉지 않고 浙江에 안자 하는 말이 되었으며, 수서의 “高麗傲慢不恭帝將討之”는 “我傲慢不恭帝將討之”라 개서하여 허리부러질 我란 주인을 찾았으며, 책부원구의 “姓募名秦”을 등사하여 신라 박, 석, 김 3성 이외에 턱없는 의문의 募氏帝王을 인사하게 되고, 이밖에도 이 같은 盲人夜行의 기사가 많으니 선택없는 박학은 박학이 아닌 석택만 못하다.

최근의 구암, 순암 등 諸先儒는 탄복할 만한 精詳謹密을 가져 김씨의 착오를 발견한 것이 적지 아니하나, 다만 중국 서적에 대한 신뢰가 너무 과하여지리를 논하려면 지위가 착잡한 水經을 그대로 인용하며, 연대를 표하려면 속석(束晳: 죽서기년의 학자) 이후에 위작한 죽서기년을 그대로 尊信하고 彼 소위 經史는 字字金玉으로 보아 그 위증과 오증을 발견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저자가 시기를 얻으면 중국 서적 중 일체 조선에 관한 기록의 是非誤正을 찾아보려 하거니와, 근래 著史者들이 매양 각종의 진서 위서 訛言 정언을 모두 조선사의 재료로 삼아 洋文의 형식으로 篇 章을 갈라 신사학자의 지은 조선사를 함은 좀 부끄러운 일인가 한다.

라. 평양 패수고[편집]

1. 서언[편집]

평양은 신지비사(神誌秘詞: 고려사 金謂磾傳에 보임) 가운데 古 3京의 하나인 百牙岡이요, 조선 문명이 발생한 7대 강의 하나인 浿水가의 서울이라. 그러나 시대를 따라 지명이 遷徙했으므로 만일 지금 패수 대동강을 옛날 패수로 알고, 지금 평야 평안남도 首府를 옛 평양으로 알면 평양의 역사를 그릇 앎일 뿐 아니라 곧 조선의 역사를 그릇 앎이니, 그러므로 조선사를 말하려면 평양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丸都가 어디냐. 卒本 이 어디냐. 安市城이 어디냐. 迦瑟那가 어디냐. 백제의 6方이 어디냐. 발해의 5京이 어디냐. 이 모든 지리가 조선사상 누백년래 未決訟案이다. 그러나 그 가장 중요 도 유명한 송안은 평양의 위치가 어디냐의 문제이다. 왜 그러냐 하면, 평양 위치의 문제만 결정되면 다른 지리의 해득은 용이한 까닭이다. 평양의 위치가 시대를 따라 다르니 첫번째는 삼조선 시대의 평양이요, 두번째는 삼국, 동북국 양 시대의 평양이요, 세번째는 고려 이후의 평양이다.

고려 이후의 평양은 지금 평양이니 이는 오직 그 수백년래 定都 可否의 계통적 쟁론이 대강 변론할 거리가 되는 이외에 그 위치에 대하여는 문제가 없거니와, 삼조선의 평양인 고 평양은 비상한 노력을 들이지 아니하면 도저히 그 위치를 알 수 없으므로 가장 어려운 문제요, 삼국 동북국의 평양은 혹 고평양을 가리킨 평양이라 한 기록도 있고, 혹 지금 평양을 가리켜 평양이라 한 기록도 있는 평양이므로 다음 어려운 문제이다.

본편은 곧 고조선의 평양인 고 평양의 위치를 변증하려 하는 바, 근세 우리 조선의 先儒들이나 최근 일본 학자들이 경기 황해 평안 3도와 요동반도의 명산대천을 골마다 더듬어 고 평양의 위치를 찾음에 비상히 노력하였지만 그노력의 보수가 없고 평양이 어디라는 답안이 바로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찾는 방법이 착오된 까닭이다.

저자가 才力의 천박함을 불구하고 착오을 정정하여 누백년래 잃어버린 평양을 제자리로 돌리려 하여 본변을 초한다. 대개 그들의 착오가 어디에 있는가

2. 제1의 착오[편집]

제1의 착오는 평양 패수의 音義를 해독하지 못하이다. 사책에 보면 平壤, 平穰, 平那, 卞那, 百牙, 樂浪, 樂良, 浿水, 浿江, 浿河 등은 다만 “펴라”를 가종의 假音으로 쓴 자니, 平壤, 平穰, 平那, 卞那, 百牙는 다 그 음의 초성을 讀하여 “펴라”가 되고, 樂浪, 樂良은 樂의 뜻 “풍류[7]”의 초성을 讀하며, 浪과 良은 그 음 “랑”의 초성 중성을 독하여 “펴라”가 되고, 浿水, 浿江, 浿河는 浿의 음 “패”의 초성을 독하며 水 江 河의 뜻 “라”의 全聲을 讀하여 “폐라”가 된 것이니, 이상 云云은 졸저 이두문 해석에 설명한지라. 여기에서는 상술하지 않거니와 “펴라”는 본래 강의 이름으로 그 江上에 건설한 도성도 “펴라”라 명한자니, 卒本河 上에 卒本國이 있고, 泗沘江 상에 사비국이 있는 유니, 平壤, 平穰, 平那, 卞那, 百牙, 樂浪, 浿水 등이 비록 그 문자는 各異하나 그 “펴라”의 假音됨은 동일하며, 비록 그 펴라의 가음됨은 동일하나 다만 패수 패하 등은 ‘강’의 펴라를 가리키는 문자됨에 반하여 平壤, 平穰, 平那, 卞那, 百牙, 樂浪 등은 ‘城’의 펴라를 가리키는 문자됨이 다르며, 城의 펴라와 江의 펴라가 비록 一水一陸의 구별은 각이하나 양 펴라의 거리가 마치 눈과 눈썹같이 밀접한 자어늘 후세이 이두문을 모르는 학자들이 이를 한자의 음으로 직독하여 平壤은 평양, 平那는 평나, 百牙는 백아, 樂浪은 낙랑 혹 락랑, 浿水는 패수가 되어 수륙 양 펴라의 밀접한 관계가 알 수 없이 된지라, 이에 다만 조선의 古記나 중국의 사기, 한서 등의 王儉城平壤이 패수의 東에 있다는 추상적 문자에 의하여 패수와 평양의 위치를 찾을 새, 혹은 요하를 패수로 잡는 동시에 鳳凰城을 평양이라 하며, 혹 압록강을 패수로 잡는 동시에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며, 혹 대동강을 패수로 잡는 동시에 한양을 평양이라 하며, 또 혹 평양이란 配匹이 없는 禮成江, 碧瀾渡 등의 홀아비의 패수도 생기며, 혹 패수란 동무가 없는 춘천, 成川의 외아들의 평양도 생기어 삼국사기 삼국유사 여지승람 열하일기 동사강목 해동역사 아방강역고 등의 이에 대한 쟁론이 분운하였지만, 기실은 모두 맹인이 활을 쏨과 깉아 과녁을 맞추지 못하였다.그러므로 평양과 패수를 찾으려면 제1에 그 音義를 해독하여 패수를 떠나서 평양이 없고 평양을 떠나서 패수가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3. 제2의 착오[편집]

제2의 착오는 평양과 패수의 고전에 관한 사책의 본문을 善解하지 못함이다. 이를태면

위략에 “朝鮮…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及漢以盧綰爲燕王朝鮮與燕界於溴–해동역사에 浿로 개정–水”라 하고[8],

사기 조선열전에 “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 漢興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 … 都王儉”이라 하고[9]

사기 흉노전에 “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人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 燕亦築長城自遼陽[10]至襄平 置上谷 漁陽 右北平遼西 遼東郡[11]” 이라 한 바, 우의 세개의 책은 다 동일한 사실의 기록이다.

先儒들이 혹 위략을 據하여 흉노전의 1천여리를 2천여리의 誤라고 하고, 이에 의하여 패수를 대동강이라 하여 滿潘汗을 대동강 이남에서 구하며, 혹 흉노전을 거하여 위략의 2천여리를 1천여리의 誤라 하고, 이에 의하여 패수를 압록강이라 하여 만반한을 압록강 이남에 구하였다. 그러나 愚見으로 말하건대 위략의 2천여리나, 흉노전의 1천여리가 그 何地부터 起算함인지를 묻지 않고 종점의 만반한이 하지임을 구함은 비상한 착오라 하노라. 흉노전으로 보면 진개가 彼 소위 동호조선을 卻(각)하고 遼陽(요양)으로부터 양평까지 장성을 築(축)하고 상곡(上谷: 지금 大同府), 어양(漁陽: 지금 북경 북 60여리의 廢縣), 우북평(右北平: 지금의 永平部), 요서(遼西: 지금의 盧龍縣), 요동(遼東: 지금의 遼陽)까지의 연장 2천여리의 지방이 곧 조선의 소유를 진개가 약취함이니, 2천여리는 곧 상곡부터 기산하여 요양가지 至한 자요, 만반한은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의 汶縣(문현)과 潘汗縣(반한현)의 양 현이니, 문반한의 연혁이 비록 傳(전)치 아니하였으나 위략에는 만반한이라고 하고, 흉노전에는 양평이라 한바, 양평은 漢(한) 遼東郡(요동군)의 군치(郡治: 지금 遼陽)인즉 문반한은 곧 遼陽 부근의 땅이며, 燕은 조선과 만반한으로 정계하였다가 漢은 退하여 패수를 守하였은즉, 패수는 곧 요양 以西의 물이며 同 地理誌에 沛水가 潘汗縣의 塞外에서 出한다 한 바 지금 海城 蓒芋灤(헌우락)의 고명이 패수인즉 南藥泉의 설을 從하여 沛水를 곧 浿水로 잡는 동시에 만반한을 곧 해성 동북, 요양 서남으로 잡음이 가하며, 險瀆縣(험독현) 註에 험독은 조선왕 滿의 都, 즉 王儉城이라 하였은즉, 왕검성(平壤)인 험독은 금 海城이 됨이 명백하거늘 이제 2천여리의 기점을 찾지 않고 종점을 찾으며 만반한의 연혁을 묻지 않고 그 위치를 억정하여 패수와 평양의 관계적 지방을 버리고 패수와 평양 왕검성의 연혁을 억설하려 하니 어찌 실제에 합하랴.

4. 제3의 착오[편집]

제3의 착오는 위조의 문자를 考核하지 못함이라. 이를테면,

1) 歷來 학자들이 한서 帝紀 武帝 元封 3年眞番, 臨屯에 대한 註에서 “臣瓚曰 茂陵書臨屯郡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十五縣眞番郡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十五縣”[12] 를 거하여 진번 임둔의 위치를 담색하는 유일한 재료를 삼았으나, 그러나 그 소위 茂陵書(무릉서) 司馬相如(사마상여)가 지었다는 책이 과연 可信(가신)할 책이냐. 사기나 한서에 사마상여가 무릉서를 지었다는 기록이 없을 뿐 더러 한서 사마상여전에 거하면 상여의 죽은 뒤 5년만에 무제가 后土(후토)에 始祠(시사)하다 하고, 사기 封禪書나 한서 郊祀志에 거하면 무제가 元狩(원수) 2년[13]에 비로서 后土祠를 세웠으니, 그러면 사마상여의 죽은 해는 원수 2년의 5년전인 원삭 3년[14]이요, 진번, 임둔 양군의 설치는 원삭 3년에서 18년 후인 원봉 3년[15]이니, 원봉 3년 진번, 임둔의 설치의 際에 벌써 죽은지 18년이 넘은 사마상여가 무릉서를 지어 양군의 명칭 위치 및 그 속현의 수를 말하였다 하면 이는 비사학적인 요괴담이 될 뿐이니 한서 註 “臣瓚曰 茂陵書”의 위조임이 또한 명백하지 아니하냐.

2) 선유들이 한서 지리지 樂浪郡(낙랑군)의 소속인 朝鮮, 䛁邯, 浿水, 含資, 黏蟬, 遂成, 增地, 帶方, 駟望, 海㝠, 列口,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吞列, 東暆, 不而, 蠶臺,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등 25현과 그 註의 “浿水西至増地入海” “帶水西至帶方入海” “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 등의 말에 거하여 浿帶列 3수를 곧 지금 대동 임진 한강 3수로 잡고, 3수의 출입에 의하여 각 현의 소재지를 핵득하려 하였으나, 그러나 此設이 전술한 “상곡부터 2천여리의 종점인 만반한이 요양 등지가 되고, 요양의 서남인 해성현의 헌우락이 패수가 된다.”한 위략 흉노전 조선전 등과 맞지 아니하니, 한서 지리지의 일부분인 낙랑군의 본문과 本註 모두가 위조임이 명백하니 중국 사책은 거의 그 독특한 병적 심리인 자존성이 있는 춘추필법의 繼痛者의 저작인 고로, 비록 저작자의 본서가 그대로 존재할지라도 彼를 상대로 한 전쟁이나 피의 관계된 강토의 문제 같은 것은 피의 기록을 맹신함이 불가하거든, 하물며 위조한 무릉서나 낙랑군 지리지에 의거하여 상고 국경의 문제의 쟁점되는 패수와 평양의 위치를 구할 수 있으랴.

5. 제4의 착오[편집]

제4의 착오는 古史를 讀할때에 전후의 文例를 모르고 字句의 文義를 臆解하여 위증한 기록의 발견할 기회를 없게 함이다. 이를테면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險瀆)의 주에 “應劭曰朝鮮王 滿 都也 依水 險 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説是也[16]”의 此는 요동군 험독의 대명사니, 본주의 대의를 상해하면 곧 응소가 요동군의 험독을 조선왕 만의 故都 왕검성이라 주장하매,, 신찬이 이를 반대하여 가로되 왕검성 조선왕 만의 고도는 요동군에 있지 않고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는 자니, 此 요동군의 험독은 彼 왕검성과 관계 없이 따로 있는 험독이라 하여 응소와 신찬 양씨의 설이 서로 반대의 견지에 있으므로 사고가 응소의 설을 棄(기)하고 신찬의 설을 취하여 “瓚説是也”의 단안을 내림이니, 그 문의가 십분 명백할 뿐더러, 또 지리지의 각군 각현 註에 거하여 볼지라도, 가령 金城의 주에 應設에는 “성을 築하다가 금을 得한 고로 금성이라 명하였다”하고, 瓚設에는 “금의 견고의 뜻을 취하여 금성이라 명하였다.” 하여 응설과 신찬의 금성에 대한 해석이 서로 반대되매 사고가 瓚説是也의 단안을 내리며, 靈丘의 주에 “應設에는 趙武寧王의 葬地인 고로 영구라 하였다”하고 瓚設에는 무령왕 이전부터 靈丘의 명이 있었다 하여 응설과 신찬의 영구에 대한 양설의 해석이 서로 반대되매 사고가 “찬설시야”의 단안을 내리며, 기타 臨晉, 栒邑, 晉陽, 浦反, 脩武, 梁, 尉氏 등 수십 현의 주가 다 이와 같이 응소 신찬 양설이 반대되는 경우라야 “응설시야”라 하거나 “찬설시야”라 하는 양설의 하나를 취하는 단안을 내렸거니와, 만일 응설과 찬설이 독립으로 是하거나 찬설이 응설을 화동하여 是하면, 비록 단안이 없을지라도 그 시가 自現하므로 煩文(번문)을 피하여 그런 경우에는 응설시야 혹 찬설시야란 어구가 없음이니, 이는 지리지를 일람하면 소연히 각득할 문례인즉, 전술한 바 요동군 험독의 註도 신찬이 본 험독을 왕검성이라 주장하는 응소를 반대하여 왕검성은 낙랑군의 속현이요 此 요동군 험독과는 관계없다는 이의를 발하였으므로 사고가 그 이의를 찬성하여 찬설시야라 함이니, 그 전후의 문례에 의하여 그 문의가 더욱 명백하거늘 선유들이 지리지의 문례를 잘 알지 못하고 또 험독 註의 문의를 잘못 풀어 比自是險瀆의 比를 왕검성의 대명사로 보며, 찬설을 응설의 찬성설로 알아 그 全文을 응소가 가로되 “험독은 조선왕 만의 고도 왕검성이라”하매 신찬은 이를 찬성하여 가로되 왕검성 곧 조선왕 만의 고도가 낙랑군 패수의 동에 재하니 차 왕검성은 곧 요동군의 험독이라” 하고 사고는 또 신찬의 찬성설을 찬성하여 가로되 “찬설이 시야라”한 줄로 해석하였으니, 이러한 해석은 전후의 문례에 불합할 뿐더러, 또는 험독현이 요동군의 속현인 동시에 낙랑군의 속현도 되며, 요동군이 곧 낙랑군인 동시에 낙랑군이 곧 요동군이라는 瘋人의 해석이 되니, 이는 상하의 문의만 모순이 될 뿐 아니라 곧 同樣(동양), 同名, 同位置 성읍이 一地에 쌍립하고 동시 동지 동사실의 역사가 일선에 병행하여 필경 세인이 模捉(모착)할 수 없는 非地理의 지리, 비역사의 역사가 됨이 아니냐. 諸先生의 精博한 학식으로 이 같은 대 착오가 있음은 참으로 喫驚(끽경)할 일이며, 더구나 신찬의 본의는 왕검성인 평양을 요동군 以東의 낙랑군 평안도에 있다고 주장하는 제선생의 의견과 틀림이 없거늘 제선생들은 전술과 같이 신찬의 절을 오해하였으므로 이를 自家의 평안도 평양설을 반대하는 요동평양설로 본지라. 그리하여 동사문답, 아방강역고, 해동역사 지리고 등 각서에 모두 평안도 평양을 주장하는 동시에 신찬의 설이 忘爲之라 하였으니 어찌 천하의 笑話가 아니냐.

이상 네개의 착오를 발견하는 동시에 모든 서적의 위증이 다 파괴되고 모든 학자의 誤考, 誤證이 다 歸正되어, 평안도의 대동강과 今 평양을 古 평양 古 패수로 잡던 망성들은 자연 그 근거를 잃고 奉天省의 海城縣과 蓒芋灤이 고 평양, 고패수인 확증을 얻어 이에 조선문명의 발원지인 古 3경의 하나인 평양과 7대 강의 하나인 패수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평양과 패수가 이같이 조선문명사상의 중요한 지방으로써 천여 년 동안 그 고유의 위치를 잃고 천여리나 이사하여 평안도의 소 지방으로 出系하게 됨은 위증한 서적의 作孼(작얼)이라 하겠지만, 그러나 이 같은 위증이 행세되어 제2패수, 제2평양인 대동강 평양이 제1패수, 제1평양인 헌우락 평양의 위치 역사 기타 모든 것을 빼앗게 됨은 何故이냐.

1) 조선민족의 대외적 실패로 말미암음이니, 신라 발해 동북 양국이 서로 대치하다가 북국은 거란과 여진에게 유종이 전멸되고 토지도 전실하여 북국 해북 등 명사는 겨우 삼국古人의 끼친 殘爛한 서자로 남아있을 뿐이며, 이제 제2의 평양 패수가 평양 패수가 되고, 제1의 평양 패수는 깊이 이역에 침몰하여 평양 패수란 이름도 보전치 못함이라.

2) 조선 문헌의 결망함에 말미암음이니, 그와 같이 조선민족의 대외세력이 미약하매 일체 고대의 문화나 무력을 자랑할 만한 고적과 문헌은 모두 매장 혹 燒棄(소기)되고, 오직 노예적 비열과 處士的 담백으로 민족적 苟活을 도모할새 경덕왕은 북방 주군을 남방으로 이설하고, 김부식은 외교적 納媚(납미)의 문자로 지운 삼국사기를 간행하더니 및 몽고황제가 사책을 가져다가 竄削塗改(찬삭도개)를 妄加하니, 이제 지리 연혁이 가장 그 참변을 만나는 동시에 평양 패수의 실록이 모두 멸절하고 오직 그 명칭만 존재한 것이다. 그리되매 중국사의 위증한 문자가 일세에 횡행하나 歷來의 학자들이 혹은 忌諱(기휘)로 인하여 그 위증을 위증이라 하지 못하며, 혹은 習聞으로 인하여 그 위증을 위증인 줄 모르므로 海城 平壤, 蓒芋灤 패수는 겨우 尋常野史家의 耳語로 남아있을 뿐이요, 평안도 패수 평양만 행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사가가 이같이 위증의 문자를 조작함은 어느 때에 어떤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한 짓이냐. 전설에 거하면 唐人이 조선의 강성과 문명을 시기하여 당 태종이 일체 중국사에 보인 조선에 관한 기사를 개찬하고 이정과 소정방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는 그 서적을 몰수 소화하였다 하니, 이 말이 비록 어느 기록에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대개 可信할 말인가 하노라.

그러면 당 태종이 손댄 서적이 무엇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 漢書, 晉書가 가장 심할지니, 顔師古가 당 태종의 총신으로 瀛州의 學士列에 참여하여 깊은 帷幄(유악)에서 태종 東侵의 모의를 협조하는 동시에 漢書 校正의 任을 대하였은즉, 그 교정의 際에 한 무제 4군의 범위를 확정하여 위치를 이동하여 조선의 故疆을 거의 중국의 소유로 위증하여 이로써 군신 상하의 적개심을 고무하는 자료를 만들려 한지라. 그리하여 지넌 임둔의 취치를 주할 때에 무릉서란 서명과 기사를 위조하여 지리지를 교열할 대에 낙랑군의 부분을 위조하여 요동군 험독 주에 신찬의 말을 위조 첨입하고 게다가 찬설시야의 例語를 삽기하니 이에 조선의 지리가 아주 문란하였다.

그뿐아니라 南齊書 百濟傳의 二葉殘缺(이엽잔결)이 혹 백제 盛時의 “北據遼薊齊魯南侵吳越[17]”하던 해외 발전의 실록을 당 태종이 削去함이 아니냐. 수서에 적은 동양 고사상 미증유의 대전쟁의 기록이 그같이 모호함도 혹 당 태종의 도말 혹 개찬이 아니냐. 중국 사책이 당 태종 이전의 것이라고 어찌 중국인의 습성된 자존적 심리로 저작한 것이 없으랴만, 다만 당 태종과 안사고의 손댄 서적같이 심하지 아니할 지니라.

일본학자 관야정의 노력에 의하여 성취한 朝鮮古蹟圖譜의 그 도설에 龍岡에서 발굴한 黏蟬碑文을 기재하고 “역래 학자의 쟁송되던 열수는 곧 대동강됨이 가하다” 하였으나, 이는 곧 한서 지리지의 “列水西至黏蟬入海”와 점제비문이 용강에서 발견됨에 의하여 한 말이라. 그러나 만일 한서 지리지의 낙랑군 부분의 위증임을 알았으면 이런 착오가 없었을 것이다.

고 평양 패수가 해성 헌우락임은 상에 전술한 바와 같거니와, 금 평양이 평양되고 금 대동강이 패수됨은 하시부터냐. 이에 대하여 양설이 있으니, (갑) 조선 고대에 2개 혹 2개 이상의 지명을 짓고는 그 위에 형용명사를 관하여 구별한 것이 많으니 兩句麗, 三韓, 六伽倻 등이 다 그 류니, 평양 패수도 이와 같이 해성 헌우락을 펴라라 명하는 동시에 평양 대동강도 펴라라 명하고 그 위에 남북 양자를 가하여 구별하였다 함이 하나의 설이요, (을) 우리 선민이 무슨 사항을 인하여 국토나 인민을 갑지에서 을지로 옮기는 경우에는 매양 그 지명까지 옮기었으니, 해부루가 동천하매 동북 양 부여가 생기고, 부여 온조가 南徙하매 하북 하남 양 위례가 생긴 등이 다 그 류니, 평양 패수도 이와 같이 위만과 한무의 난에 해성 헌우락의 펴라에서 대동강상으로 천거한 인민들이 그 신거지를 또한 펴라라 명하여 이에 남북 양개의 펴라가 생기었다 함이 또한 하나의 설이라.

양설중 하설이 是한지는 殘缺한 문헌이 그 판결 재료를 주지 않거니와, 그러나 중고 평양 패수인 삼국시대의펴라는 고 평양 패수와 같이 해성 헌우락을 가리킨 것도 있고 근세 평양 패수 같이 금 평양 대동강을 가리킨 것도 있으니만일 其一을 고집하고 他一을 부인하거나 혹 양자 다 互換하면 곧 지리와 연혁이 불명하여 역사의 사실이 착란할지라. 이제 삼국사기를 주요한 증거서류로 삼고 타서도 보조하여 중고의 펴라를 찾으려 한다.

갑. 樂浪國과 樂浪郡의 구별[편집]

왕검성 펴라인 고 평양 패수가 한무의 침구를 입어 4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되었으나 4군의 위치가 시세에 따라 遷徙無常하므로 낙랑군 수부의 위치는 해성에 고정한 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 범위가 요동 이외에 나오지 못하거늘 후인이 매양 삼국사기에 기재한 낙랑국을 곧 낙랑군으로 오인하여 드디어 남북 양 펴라를 혼동하였다.

“赫居世三十年樂浪人將兵來侵”, “三十八年卞韓樂浪倭人無不畏懷”, “南解元年秋七月樂浪兵至圍金城”, “樂浪謂內虛來攻金城”, “儒理十三年秋八月樂浪犯北邊”, “十四年高句麗王無恤襲樂浪滅之其國人五千來投分居六部” 에 보인 낙랑국의 신라와 관계된 약사요, “大武神王十五年夏四月王子好童遊於沃沮樂浪王崔理出行因見之”, “遂同歸,以女妻之”, “好童勸王襲樂浪崔理以鼓角不鳴不備”, “遂殺女子出降”, “二十年王襲 樂浪滅之”, “二十七年秋九月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縣薩水已南屬漢” 등은 고구려본기에 보인 낙랑의 고구려와 관계된 약사요, “溫祚 八年七月築馬首城竪甁山柵 樂浪太守–太守는 王의 誤–使告曰…今逼我疆造立城柵或者其有蠶食之謀乎十一年夏四月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十三年 王謂臣下曰 國家東–西로 讀함이 可함–有樂浪 十七年春樂浪來侵焚慰禮城十八年 王欲襲樂浪牛頭山城” 드은 백제본기에 보인 낙랑국의 백제와 관계된 약사라.

선유가 상술한 온조 8년의 낙랑태수란 어를 인하여 3국의 본기에 보인 낙랑 등이 다 漢의 낙랑군을 가리킨 자로 臆定하고, 대무신왕 15년의 낙랑왕은 곧 당시의 조선인이 낙랑태수를 왕으로 오칭함이라고 强解하였으나, 이는 한의 낙랑군이 원래에 요동에 있는 자인 줄을 모른 망설이며, 혹은 대무신왕 27년의 漢光武…벌낙랑取其地爲郡縣의 어로 인하여 낙랑국이 멸망한 뒤에 그 땅이 곧 한의 낙랑군이 된 줄로 아나, 그러나 이는 봉건시대라 조선 전토(만주 동북을 포함)에 수개의 辰國(진국: 대국이란 뜻)이 병립하고, 진국이 하나면 其下에 다수의 소국이 부속하였으니 최씨가 곧 낙랑 진국의 왕으로 기하의 黏蟬, 含資, 帶方 …등 소국을 통솔하였다가 고구려가 최씨를 멸하매 그 각 소국들이 고구려에 子服하여 한의 원병을 청하여 고구려를 막음이니 取其地爲郡縣은 誇大의 辭요, 사실이 아니다. 신라본기 기림 3년에 樂浪帶方兩國歸服의 기사를 보면 낙랑의 진국은 비록 멸망하였으나 그 각 소국은 의연히 존속한 명증이다. 후한서 帝紀에 거하면 漢光武建武六年 … 初王調據郡不服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郡吏殺調降遣 … 九月赦樂浪逆殊死已下[18] 라 한바 건무 6년은 대무신왕 13년이니 왕자 호동이 낙랑에 취하던 전 3년이니 낙랑군에 何等의 大事가 있으되 낙랑국이 부지하고, 낙랑국에 하등의 대사가 있으되 낙랑군이 부지하여 당시 양 펴라의 관계가 이같이 격절하였거늘 삼국사기의 오류도 가책하려니와 후세의 독사자들도 또한 소루하다 하겠다.

을. 낙랑과 평양의 구별[편집]

낙랑과 평양이 다 펴라의 假字이나 그러나 낙랑국이 멸망한 뒤에는 낙랑이라 쓰지 않고 평양이라 써 요동의 낙랑군과 구별한 고로 대무신왕 이후 삼국사기에 쓰인 낙랑 돋 신라본기 기림 3년의 낙랑이 금 평양을 가리킨 것인 이외에는 其餘는 모두 요동의 漢 낙랑군을 가리킨 것이요, 평양은 모두 금 평양을 가리킨 것이니, 이를테면 i) 동천왕 20년의 魏軍擾亂不能陳遂自樂浪而退라 한 낙랑은 dyed의 낙랑이요 지금 평양이 아니니, 이때에 魏軍이 丸都를 파하고 동천앙을 追하다가 패퇴함인즉 만일 금 평양의 낙랑이라 하면 이는 軍을 進함이요 퇴함이 아니며, 21년의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 築平壤城이라 한 평양은 지금 평양이요 요동의 낙랑이 아니니, 이때에 동천왕이 위군에게 패하고 都을 遷하여 寇를 피함이니, 만일 요동의 낙랑이라 하면 이는 寇를 近함이요 피함이 아니니, 이에서 南펴라는 평양이라 쓰고, 北펴라는 낙랑이라 썼음을 볼지며, ii) 미천왕 3년에 王率兵三萬 侵玄菟郡虜獲八千人 移之平壤이라 하고, 14년에 侵樂浪郡虜獲男女二千餘口라 하였으니, 평양과 낙랑이 만일 동일한 지방이면 이는 전에는 노획을 移置하던 지방이 후에는 다시 노획하던 지방이 되어 我로써 아를 攻하는 怪劇을 행함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러므로 여기에 云한 평양과 낙랑도 하나는 금 평양이요 하나는 요동의 낙랑임이 또한 명백하다. 후인이 위증과 개찬이 많은 중국 各史에도 또한 무의중에 끼쳐온 낙랑이 요동에 있는 증거가 간혹 있으니 후한서 帝紀 安帝永初 5년 3월에 “扶餘犯樂浪塞”를 기한 바 부여는 북부여–지금 합이빈이니 낙랑이 요동의 낙랑인 고로 부여가 그 새를 攻함이요, 자치통감 愍帝(민제) 建興 원년 美川 14년에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樂浪王遵說統率其民千餘家歸(慕容)廆 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를 기한바, 만일 統의 據한 낙랑 대방이 살수 이남의 낙랑 대방이라면 당시에 고구려가 강성하여 살수 이북만 掩唯하였을 뿐 아니라 곧 요동의 西安平安東縣 등지까지도 美川 12년에 벌써 고구려에 입하여 살수 이남을 거한 張統이 千餘家를 率하고 요서까지 도주하지 못할지니 이것도 요동의 낙랑됨이 또한 無疑하다.

그러나 우리 선민들은 비록 평양의 假字로 펴라를 기하나, 펴라의 의미를 잘 알므로 펴라란 水名인데 浿水를 떠나서는 평양이라 칭한 일이 없다. 이를태면, 고국원왕이 黃城—歷來史家가 고국원왕 十三年移居平壤東黃城의 황성을 上句에 연독하여 東黃城이라 하였지만 이는 大誤—에 都하여 평원왕이 장안성에 都한 바 황성과 장안성이 다 평양에 至近하지만 다만 패수를 挾하지 아니한 고로 평양이라 칭하지 아니하고 황성 혹은 장안성이라 칭하여 그 구별이 이같이 엄절하지만, 중국인은 역대 이래에 패수의 유무를 불관하고 낙랑을 이리저리 마음대로 이치하였으니 요동의 낙랑도 이미 전술과 같이 고정한 처소가 없거니와 慕容廆가 장통(張統: 전항에 보임)의 降을 받아 낙랑태수를 삼고 柳城에 낙랑을 僑設하였으니 이는 遼西의 낙랑이요, 拓跋魏의 이후에는 上谷에 낙랑을 이치하였으니 이는 山西의 낙랑이니, 이 따위는 다 펴라의 물과 관계 없는 낙랑이라 할 것이다.

병. 백제 중엽의 관계한 낙랑[편집]

평양 낙랑의 구별이 전술한 바와 같으나, 이에 백제사를 讀하고 고이왕 13년에 幽州刺史毌丘儉與樂浪太守劉茂朔(朔은 帶의 誤이다)方太守王(王은 弓의 誤이다)遵伐高句麗王乘虛襲樂浪邊民茂聞之怒王恐見侵討還其民口라 하고 분서왕 7년에 春二月潛師襲取樂浪西縣冬十月王爲樂浪太守所遣刺客賊害薨이라 하니, 여기에 4차나 보인 낙랑의 명사를 역래의 사가들이 의심없이 금 평양을 가리킨 것으로 알아왔으나, 그러나 이때는 낙랑국이 망한 지 已久하니 남펴라에 어찌 낙랑이란 假字로 그 칭호를 썼으랴.

대개 삼국사기 가운데 본기와 열전의 가장 간결한 자는 백제가라. 거칠부전의 百濟人先攻破平壤의 語에 인하여 그 연조를 따지면 聖王 29년에 백제가 일차 고구려의 수도를 함락한 대사가 있을지어늘 본기에 이를 누락하며, 문무본기 당서 일본서기 등을 대조하면 부여福信의 隆才(융재)와 전략과 충절은 고금에 倫比(윤비)가 없는 백제 末日의 거인이어늘 열전에 이 같은 거인을 유기하였으며, 자치통감의 扶餘初居鹿山爲百濟殘破[19]의 기사로 보면 금 합이빈이 백제의 땅이 되었거늘 본기나 열전에 그런 말이 보이지 아니하였으며, 姐瑾과 沙法名의 공적을 찬양한 南齊書 가운데에 동성왕의 國書로 보면 동성왕때에 拓跋魏의 누십만 대병을 전승하여[20] 국세가 매우 강성하였거늘 동성왕 본기중의 백제는 어찌 그리 미약하며, 송서의 百濟略有遼西晉平[21]으로 보면 어느 때 백제의 해외 발전이 금 영평부[22] 등까지 미쳤거늘 양 왕의 본기에는 그런 기록이 없으며, 건국설은 十濟, 百濟 등의 부당한 곡해나 남아 있으며 망국의 遺墟에는 釣龍白馬의 적장을 숭배하는 鬼話만 끼쳐있고, 정작 자가의 문화상 정치상 美하고 선하고 웅대한 무엇은 볼 것이 없으니 이는 敵人이 병화에 焚蕩된 문헌의 액보다 사실을 전도한 羅末 文士의 曲筆의 죄가 더 많음을 볼 것이다.

이제 古爾王의 침습한 낙랑으로 말하면 삼국지 동이열전에 “眀帝密遣帯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이라 하고, “正始六年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興師伐之不耐侯等擧邑降”이라 한바, 이같이 낙랑이 魏將 劉昕과 劉茂가 相繼하여 태수된 곳이니 만일 이 낙랑이 금 평양일진대 丸都에서 寇를 피하여 천도한 동천왕이 어찌 9년동안 根基가 深厚한 魏人의 낙랑에 移都할 수 있으리요. 그런즉 劉昕, 劉茂, 弓遵 등이 거한 낙랑 대방이 요동의 낙랑 대방인 동시에 고이왕이 침습한 낙랑도 요동의 낙랑이니 이는 대개 백제의 해외 발전의 始일지며, 분서왕의 침습한 낙랑으로 말하면 梁書 백제전에 “晉世百濟據有遼西”라 하니 汾西 원년은 晉惠帝元康 8년[23]이요 慕容廆와 동시라.

史에 거하면 모용외의 요서 낙랑의 建置는 미천왕 14년 張統의 降을 받을 때의 일이나 그 전에 慕容遵이 낙랑왕의 號를 가짐을 보면 요서 낙랑의 건치가 已久함을 볼지니, 그러면 대개 백제가 慕容氏의 요서를 공탈하고 彼의 낙랑 東縣을 차지함에 낙랑태수가 병력으로 백제를 막기에 부족하므로 드디어 자잭을 보내어 왕을 암살함이니 이것도 백제의 해외발전의 일반이라. 古陁炤娘의 참사에 인한 신라인의 激怨이 백제 역사에 미치어 매양 그 功烈은 刪하고 패망만 記하므로 요동 요서 양 낙랑의 初頭관계가 본기에 궐함이니, 그러면 신라 고구려의 양 본기에 뿐 아니라 백제본기에도 낙랑국의 멸망이후 남펴라는 평양이라고 쓰고 북펴라는 낙랑이라고 쓴 鐵證이며, 이로 말미암아 당 태종이 晉書를 지을때에 고구려와 백제의 戰蹟과 강토를 많이 刪去함이 명백하다.

자치통감에 胡三省이 모용외의 낙랑을 柳城에 僑治한 자라 하고, 문헌통고에 백제의 요서 진평을 唐 柳城 北平之間이라 하고, 당서 지리지에 柳城은 東至 遼河480리, 남지 海 260리, 서지 北平郡 7백리, 북지 契丹界 50리라 하며, 그리고 북평은 동지 류성 7백리, 서지 어양 3백리, 동복도 류성 7백리라 하니, 이로써 류성 낙랑의 위치를 상상할 만 하다.

정. 중국사 지리지와 동이열전에 보인 낙랑[편집]

한서 지리지의 낙랑 25현이 唐人의 위증임은 이미 상편에 약설하였거니와, 이제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의 지리지와 동이열전에 보인 낙랑과 낙랑에 관계되는 현도, 대방 등을 幷考하면,

한서지리지에 보인 현도 낙랑의 기록이 좌와 같으니,

현도군 – 戶 45,006 口 221,845 縣3 (고구려 上殷臺, 西蓋馬)

낙랑군 – 戶 62,812 口 406,748 縣 25 (朝鮮, 䛁邯, 浿水, 含資, 黏蟬, 遂成, 增地, 帶方, 駟望, 海㝠, 列口, 長岑, 屯有, 昭明, 鏤方, 提奚, 渾彌, 吞列, 東暆, 不而, 蠶臺, 華麗, 邪頭昧, 前莫, 夫租)

후한서 군국지에 보인 현도 낙랑의 기록이 좌와 같으니

현도군 – 6城, 戶 1,594 口 43,163 고구려, 서개마, 상은대, 高顯故屬遼東, 候城故屬遼東遼陽故屬遼東

낙랑군 – 18성, 户 61,492, 口 257,050 朝鮮 喃(䛁)邯 浿水 貪資 占蟬 遂城 増地 帶方 駟望海冥 列口 長岑 屯有 昭明鏤方 提奚 渾彌 樂都

삼국지에는 지리지가 없으므로 이는 궐하고,

진서 지리지에는 현도군[24]이 없고 낙랑과 대방을 양군에 분기함이 좌와 같으니

평주 낙랑군(平州樂浪郡) – 統縣 6, 戶 3700, 朝鮮 屯有 渾彌 遂城 鏤方駟望

대방군 –公孫度置 統縣 七, 戶 4900, 帯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含資 海㝠

사기에 한무제가 위씨를 멸하고 4군을 두었다 했는데 하고로 한서 지리지에는 현도 낙랑만 있고 진번 임둔이 없는냐. 낙랑이 25현이나 되는데 현도는 하고로 겨우 3현이냐. 후한서 군국지에는 하고로 한서 지리지보다 낙랑의 1현이 더하고 동이 이하 7현이 없느냐. 진서에는 하고로 현도가 없고 대방과 낙랑 양 군이 있느냐.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이열전의 “昭帝罷眞番臨屯以幷樂浪玄菟[25]”가 그 제1의 답안일지며, “玄菟復徙居句驪自單大領已東沃沮濊貊悉屬樂浪”이 그 제2의 답안일지며, 復分嶺東七縣置東部都尉光武建武六年省東部都尉遂棄嶺東地[26]가 그 제3의 답안일지며, 建安中公孫康分屯有以南荒地爲帶方郡[27]이 그 제4의 답안일지나, 후한서 帝紀 광무제 23년에 “句麗蠶支落大加戴升詣樂浪內屬[28]”이라 하니 蠶支는 곧 蠶臺요, 잠대는 (前漢 시대)낙랑의 縣名이어늘 이제 잠대가 낙랑에 속함을 구하다 함은 마치 楊州가 경기도에 속하려 한다는 笑話이며, 和帝[29] 元初 5년에 宮—태조의 이름—復與濊貊寇玄菟攻華麗城이라 하니, 화려는 낙랑 동부인 嶺東 7현의 하나인즉, 광무때에 벌써 파기한 현이어늘 이제 다시 고구려의 침입하는 漢의 현이 됨도 불성설일 뿐더러 현도에 寇하여 화려를 공한다 함은 낙랑의 속현이 곧 현도의 속현이라는 모순의 語이며, 고구려의 국명에 擬하여 고구려현을 둠은 아직 용서하고라도, 琉璃王 33년에 태자 무휼이 고구려현을 점령하여 그 땅이 고구려국의 소유가 되었거늘 이 뒤 3백년이 지나도록 고구려현이 현도의 수부로 한서지리지나 후한서 군국지에 적힘은 架空의 妄筆이다. 다시 더 상고하면 이따위가 얼마인지 모를지라. 그러므로 한서의 지리지나 후한서의 군국지나 진서의 지리지에 보인 낙랑 현도 등 군은 후인의 위증이요 당 이전 各史의 모든 동이열전의 후인의 개찬이 허다한 것이다. 기중 더욱 낙랑 현도 등에 관한 기록은 대개가 위조라 할 것이다.

그러면 낙랑 현도의 제현은 모두 일필로 묵삭함이 가할까. 한서 지리지 遼東郡番汗縣의 沛水가 곧 浿水임은 이미 상편에 술하였으며, 삼국지 동이열전에 낙랑전을 궐함이 유감임은 이미 삼국지 동이열전의 교정에 술하였거니와 혹 삼국지에 본래 낙랑전이 있고 낙랑전 가운데에는 낙랑 속국 20여개가 기재되었던 것을 당 태종 안사고 등이 낙랑전을 도말하고그 20여 국을 가져다가 한서 지리지에 첨입하여 낙랑군 25현을 만들며 지리지 가운데 낙랑군의 속현인 번한 험독 등을 요동군에 이입할새, 그 흔적을 숨기기 위하여 번한의 浿水를 沛水로 改하고 험독의 주 “朝鮮王滿都”를 반박하고, 각사의 동이열전 혹 기타에 보인 낙랑의 기사를 혹 削 혹 改하여 중국 古疆의 범위를 넓히어 東侵將士의 적개심을 고무하려 함이었던가. 여하간 지리지의 현도의 3현과 낙랑 25현은 거의 조선의 열국이요 당시 요동 낙랑군의 본현이 아니라 할 것이다.

6. 결론[편집]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중고시대의 평양 패수는 남북에 分峙하여 남에 있는 자는 낙랑국이라 평양성이라 칭하여 그 위치가 대동강상에 고정하고 북에 있는 자는 낙랑군이라 칭하여 그 군치가 요동부터 요서, 요서부터 상곡까지 이동한 자라. 그러나 南樂浪에는 중국인의 세력이 중고시대에 아주 들어온 적이 없느냐. 이는 단언할 수 없는 자라. 대개 중고시대에 조선인은 금 조선 8도 이외에 압록강을 渡하여 興京 이동, 開原 이북의 奉天, 길림의 대부분을 근거하고, 지금의 長城 이북으로 출하여 熱河道, 興和道, 綏遠道 등으로 진취의 지방을 삼아 세가 성할대에는 남하하여 漁陽(어양: 북경 부근), 右北平(우북평: 永平部), 太原(태원: 大同府) 등을 공격하고, 지나인은 영평부부터 산해관으로 진취의 지방을 삼아 세가 성하면 요동부터 혹 興京 이동도 窺伺(규사)하여, 혹 살수 이남까지도 侵逼(침핍)하였거늘 역대의 史氏들이 매양 이런 줄을 認明하지 못하므로 삼국사기를 읽을 때 고구려가 요서에 축성하였다, 어양, 상곡, 우북평 등에 침입하였다는 말을 보면 고구려가 열하도, 흥화도 등지부터 남향하여 영평부 혹 대동부 등을 攻한 것인 줄을 모르고 산해관부터 서진하여 영평부 혹 대동부 등을 공함인 줄로 알며 중국인의 세력이 미천왕 이전 누백년 동안 평안 황해 등지에 蟠據하였던 줄로 아니, 이 다위는 다 비상한 착오라. 설혹 평안 황해에 1,2차 지나인의 병화를 입은 일이 있다 할지라도 또한 麗末 紅巾이 開城에 침입하듯이 잠시의 침요가 될 뿐이니 영구한 점령지로 있었다 함은 사적 기록에 틀리는 망설이라 할 것이요, 다만 낙랑 遷徙에 대하여 일종 재미를 感할 일이 있으니, 낙랑이 요서로 遷할 때는 조선의 세력이 요동에 미친 뒤며, 낙랑이 상곡으로 천할 때는 조선의 세력이 요서에 미친 뒤니, 낙랑 위치의 진퇴로 조선 세력의 소장을 卜할 것이다.

조선고적도보에 다수히 낙랑과 대방의 墳들을 기재하였으나, 그러나 낙랑군 제8대동강면의 고분을 漢墳이라 함은 銅鏡이나 金口 등에 박힌 王자를 제왕의 왕으로 풀지 않고 한인 왕씨의 왕으로 풀며, 제 6, 제 5江東의 古陵은 전설에 皇帝塚이라 하고, 여지승람에는 이를 동천왕릉이라 하였거늘, 이제 漢王陵이란 전무의 별명을 주며, 점제비는 그 초두의 缺面에 問標를 질러 漢 光和 원년이라 하니, 우리 같은 고고학의 문회한이 어찌 그 시비를 경론하리요마는, 그러나 그 도설의 대개를 보건대 어떤 말은 학자의 견지에서 나왔다느니보다 정치상 他種의 작용이 적지 않은 듯 하다. 대방태수 漁陽 張撫夷의 묘는 그 비문의 漁陽 2자를 거하여 지나 북경인이 出仕한 자의 묘라 하였으나, 백제 중엽부터 백제인이 중국을 모방하여 지은 지명이 많으니 廣陽, 城陽 등이 是니, 어양도 이와 같이 백제 내지의 지명이 아닌지 모를지며, 개로왕때에 대방태수 司馬張茂란 자가 있으니 장씨는 백제의 世家로 대방태수의 직을 세습하던 성씨인지도 모를지니, 據然히 북경인이라 단언함은 너무 급조한 일인가 한다.

마. 前後 三韓考[편집]

1. 인용서의 선택[편집]

1.1. 인용서의 진위 변별[편집]

아직 지중 발굴이나 고적 탐사나 고물 연구 같은데 지식과 기구가 모두 부족한 우리로서는 우리 고사를 연구하려면 오직 고인의 끼친 서적으로 자료삼을 뿐인 것은 물론이다. 서적이라면 우리의 것뿐 아니라 隣國의 것도 가하며, 往代의 소위 正史라는 것보다도 혹 신화 소설 妖談 잡서에서 직접 혹 간접으로 사적 가치를 더 얻는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는 선택할 줄을 안 연후의 일이라, 어찌 아무 변명도 없이 조선에 관한 기재만 있으면 산해경이나 죽서기년이나 抱朴子나 博物誌같은 것을 가치를 묻지 않고 인용하며, 후인의 위조라고 擧世가 다 말하는 堯典과 禹貢의 嵎夷니 島夷니 하는 것을 가져다가 4,5천년전 조선사의 한 페이지를 채우려 함은 또한 가소한 일이 아니냐. 페리클레스의 무록에 의하여 아테네는 매양 스파르타를 이긴 줄로 알며, 기원 390년 카리 병화 이후의 로미인이 추록한 로마 고사에 의하여 고 로마의 연대 사적등을 믿으면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사를 논술함에 먼저 인용서의 가치를 성찰할 것이다.

1.2. 조선 고사의 殘缺[편집]

조선 최고의 사적을 神誌秘詞라 한다. 신지를 혹은 인명이라 하며 혹은 서명이라 하나, 졸견으로는 신지는 본래 고대의 관명, 삼한사의 臣智 곧 “신치”니 역대 신치의 신수두 祭日의 致語를 모은 것이 있었던가 하니, 그 全書가 남아 있으면 혹 조선의 호메로스 시편이 될는지도 모를 것이나, 불행히 신지의 것이라고는 참 것인지 거짓 것인지도 모를 震壇九變圖(진단구변도)란 이름이 大東韻海(대동운해)에 보이며, 비사 10구가 고려사에 보이며 그밖에는 유락된 3구가 전할 뿐이요, 고구려의 국초 유기 백권이니, 이문진의 신집 5권이니, 백제 고흥의 서기니, 신라 거칠부의 국사니 하는 것까지도 그 서명만 우리 귀에 남아 전하고 그 1자도 인간에 유락하지 못하였다. 그리 된 원인은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일 대사건에 약론하겠지만 어디 우리 조선의 사학계와 같이 白沙地(백사지)된 사회가 있으랴. 그러면 우리가 무슨 서적에 의하여 고사를 말할까

1.3. 지나 사가의 조선에 관한 기록[편집]

인국의 서적에서 탐색한다 하자. 고대 우리의 인국 가운데 남의 일까지 적어줄 만한 문화를 가진 나라가 오직 지나뿐이요 지나의 信史(신사)를 찾으려면 사마천에게 第一指를 屈할 터이나, 그러나 사마천은 충실하게 원방 외국인 이집트 바빌론의 역사를 채록하던 희랍의 헤로도투스 같은 사가가 아니요, 즉 공자 춘추의 尊華攘夷, 詳內略外, 爲國諱恥 등의 주의를 견수하던 頑儒라. 그러므로 조선을 중국의 일부인 浙江지방과 等視하여 사기에 朝鮮兩越을 合傳하며, 또 그 조선전이란 것이 조선사가 아니요 다만 연 제 流寇의 수령 위만이 조선을 침략한 기록일 뿐이며 조선의 연과 전쟁한 대 사실 같은 것도 흉노전에 동호란 이름아래 기록하여, 만일 위략이 아니면 조선의 일도 알 수도 없게 되었다. 반고 한서의 조선에 관한 기록은 사기의 것을 초습했을 뿐이며, 범엽 후한서의 조선에 관한 기록—동이전—은 삼국지의 것을 초습한 중 거기다가 妄改한 것이라(제3절에 상론). 만일 조선사의 재료될 가치가 있는 자를 구하면 양서의 것은 모두 털끝마한 가치가 없고, 오직 曹魏末 西晉初의 사가의 저작인 진수의 삼국지는 부여 고구려 등의 관제 풍속과 삼한 70여개국의 국명과 기타 모든 것을 약술하여 중국사 중에 附見한 조선 기록의 가장 칭찬할 것이며 진수와 동시대인인 왕침의 위서에는 단군의 이름 왕검을 적었으며 어환의 위략에는 대부례, 조선왕 부, 조선왕 준의 약사를 적어서 근세의 동국통감, 조선사략 등에 보인 기부 기준 삼한 78국 명 등이 모두 피등의 끼친 이삭을 주운 것이다. 위서와 위략은 이제 망실하여 겨우 일연의 삼국유사와 배송지의 삼국지 주에 인용한 것이 여존하였을 뿐이니 어찌 가석하지 않은가.

1.4. 조선인의 기록으로 지나사책에 초록된 삼국지의 조선 사실

삼국지의 부여 고구려 삼한 등 傳에 使者는 “사리”요, 沛者는 “부리”요, 對盧는 “마리”요, 樂浪은 “펴라”요, 구야(狗邪)는 “가라”요 , 안야(安邪)는 “아라”니, 이는 다 한자의 음의 초성이나 뜻의 초성을 가져다가 쓴 삼국시대의 이두문이요, 漢人의 自譯이 아닌즉, 이것이 모두 魏將 관구검이 환도성에 入寇하였을 때 고구려의 기록, 혹 전설을 가져다 전한 것이 있어서 삼국지, 위서, 위략 등 저자가 진귀한 조선사의 자료를 가졌던 것인가 한다. 다만 피등이 조선 본위의 조선사를 짓지 않고 중국사 四夷傳 가운데 부록하는 조선사를 지었은즉 그 채위한 바가 자연 소략하였을 것이다.

1.5. 삼국지의 조선에 관한 기록 전부를 신용할 수 없는 조건

그러한즉 삼국지 등서 중에 있는 부여 삼한전 등을 곧 고구려 사관의 기록과 같이 보아 진귀품으로 사랑함이 가하나, 순전히 그렇게만 여길 수 없는 것은 1) 피등이 또한 중화인인고로 역대 중화 사사가의 타국에 대한 병적 심리를 가져서 그 기록 중에 비사실의 誣錄을 끼웠으니, 예를 들면 위략에 대진(大秦: 羅馬)의 秦자에 부회(傅會)하여 백색인종인 대진인을 중국인의 자손이라 하며, 진한(辰韓)의 辰자 음에 맞추어 진한은 秦人—진시황의 진—이 秦의 長城役을 피하여 동천한 자라 하여 이와 같은 망설이 적지 않으니 피등을 偏信하다가는 그 欺弄의 붓에 속을 뿐이며, 2) 당 태종이 고의로 고구려를 침랴하려 할새 自家臣民의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중국 고서에 보인 조선에 관한 문자를 거의 다 塗改한 의심이 없지 아니하니, 이는 평양패수고에 상론한 바이어니와, 조선사상 소위 삼한 사군의 訟案의 분분한 것은 당 태종의 도개한 서적을 그대로 준신함이 또한 한 원인이 되며, 3) 倒字, 오자, 漏字, 疊字 등이 많음이니, 예를 들어보이면 삼국지의 本列傳 序에 “窮追極遠踰烏丸骨都”라 하였으나 고구려에는 오골성과 환도성은 있었지마는 오환성과 골도성은 없은즉, 대개 상문의 烏丸傳이 있음을 인하여 骨, 丸 양 자를 倒換하여 烏骨丸都를 烏丸骨都라 한 것이며, 馬韓傳에 臣智惑加優呼臣雲遣支라 하였으나 臣의 음은 신이니 臣蘇塗, 臣濆活 등의 臣과 辰韓, 辰王 등의 辰과 같이 모두 太의 뜻이요 遣支는 “크치”라 그 뜻이 大兄이니 “신크치”는 곧 太大兄인즉, 臣雲遣支의 雲자는 곧 下文의 臣雲新國의 雲자를 첩사하여 臣遣支를 臣雲遣支라 한 것이며, 辰韓弁辰傳의 진변 24국내에 軍彌馬延 양국을 첩사하여 26국이 되었으니, 이상의 것은 다 상문 하문에 의하여 발견할 수 있는 것이거니와, 이외에 발견할 수 없이 된 訛, 誤, 倒, 漏된 자도 적지 아니할 것이라. 이것도 연구상 일대장애라 할 것이다.

1.6. 삼한에 관한 기록

삼한은 역래 사가의 논쟁되어 오는 제문제 중 하나인 동시에 또한 가장 중용한 문제, 가장 곤란한 문제라. 이제 1) 서적을 선택하여 先儒와 近人의 韓 혹 朝鮮 등 字의 보인 글이면 모두 인용서로 보는 폐를 제하며 2) 선택한 서적 중에서 다시 그 眞妄을 분간하여 일반 誣錄을 辨正한 결과 삼국지 위략 등으로 主하며, 사기의 흉노전 봉선서 조선열전으로 副하며 국어 관자 등으로 輔하여 연구의 자료를 삼아서 전후 삼한고를 논술하려 한다.

2. 前 三韓三 朝鮮의 전말[편집]

2.1. 삼한의 所自出[편집]

한구암 선생이 한강의 남북을 갈라 그 북은 조선이 되며 4군이 되며 고구려가 되고, 그 남은 삼한이 되며 신라 가라 백제 등 3국이 되었다고 주장한 후, 후래 학자가 靡然風從하여 이의가 없었으나, 구암 이후 삼한만 삼한으로 알고 전 삼한이 있음을 모르므로 이와 같은 실착이 있는 것이다. 무슨 증거로 전 삼한이 있다 하는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원년에 “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是爲辰韓六部”라 하고 38년에 “自辰韓遺民…無不畏懷”라 하고, 위략 삼한전에 “辰韓…爲流離之人故爲馬韓所制”라 하고, 삼국지 삼한전에는 “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 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라 하니, 避秦役 3자는 이미 전절에 그 위증됨을 변정하였거니와, 기술한 바 신라본기와 삼한전의 말을 대조하여 보면, 진한은 원래 북방에서 천래하여 마한의 할지를 받아 우거한 자이며, 삼한전에 변한은 없고 변진만 있으니 이것은 변한 진한 양국의 유민이 遷來한 자가 함께 잡거하여 득명한 明證이니, 그러면 진 변 양한의 이주민이 있기전에 경상 좌우도가 모두 마한의 땅이었음을 볼지니, 그러면 진변 양 한의 본토는 타지에서 구함이 가한 것이다.

2.2. 삼한은 곧 삼조선[편집]

전 삼한의 역사를 말하려면 먼저 조선이란 의의와 삼조선의 내력을 밝힐 필요가 있다. 1) 조선에 대하여 김학봉의 朝日鮮明, 여지승람의 東表日出, 안순암의 鮮卑山東 등 각종의 해석이 있으나, 이는 곧 中京의 뜻인 가우리로 입명한 고려를 山高水麗의 뜻으로 해석한 것 같은 후세 문사의 傅會요 본의가 아니다. 관자에 八千里之發朝鮮, 發朝鮮不朝, 發朝鮮之文皮의 等語가 있고, 사기와 大戴禮에 發肅愼이 곧 발조선인 동시에 조선과 숙신의 동일한 명사가 양 종의 역이 됨이 명백한데, 견륭제의 만주원류고에 숙신의 본음을 珠申이라 하였으니, 그러면 조선의 음도 주신이요 管境의 뜻이 됨이 명백하며, 2) 삼조선은 고려사에 단군 기자 위만을 삼조선이라 하였으나, 이는 역대를 구별하기 위하여 가설한 삼조선이나 流寇首領의 위만이 역대의 하나됨이 가소한 일이거니와, 이밖에 따로 實有한 조선이 있으니, 사기 조선열전에 始全燕時에 甞略屬眞番朝鮮이라 한 바, 서광이 가로되 眞番은 一作 眞莫이라 하고, 색은에는 진번을 2국으로 證하였으니, 그러면 진막도 2국이니 진과 번과 막이 곧 3조선이니, 중국인이 타국의 명사를 쓸 때에 매양 文從字順을 구하여 장단을 임의로 하는 폐가 있으므로 (불경의 역에 比類가 더욱 많은), 진 번 막 조선이라 쓰지 않고 혹 莫자를 去하여 진번조선이라 하고, 혹 번자를 거하여 진막조선이라 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진 번 막 3조선이니 眞番莫은 곧 辰弁馬요 삼한의 韓은 大의 뜻과 제일의 뜻으로 왕의 명칭이 된것이니, 건륭의 이른바 韓은 관명이요 국명이 아니라 함이 近可한 해석이다.

眞番莫이나 辰弁馬는 모두 ‘신’ ‘불’ ‘말’로 讀할 것이니, 진번막 삼조선은 箕準南遷 이전 북방에 있던 전 삼한이니 진번막 삼조선은 신 불 말 三國의 뜻이요, 진 변 마 삼한은 신 불 말 三王의 뜻이라. 다 같이 신 불 말의 譯일 것이면 어찌하여 하나는 진번막이 되고 또 하나는 진변마가 되었는가. 이는 이두문 초창시대에 면치 못할 일이라. 다같이 신라 본기에 보인 쇠뿔한이지만 舒弗邯, 舒發翰, 角干의 딴 자를 쓰게 되었으며, 다같이 고구려말 “마리”지만 對盧, 莫離支의 딴 자를 쓰게 되었으니, 만일 職官志에 角干 一名 舒弗邯 又名 舒發翰이란 기록이 없으면 어찌 각간의 角이 羊角, 鹿角, 獐角 등의 각이 아니고 오직 牛角인 쇠뿔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으며, 만일 김유신전에 연개소문을 大對盧라 한 문자가 있는 동시에 고구려 고기에 개소문 대막리지라 한 문자가 있지 아니하면 어찌 對盧의 對의 “마차”의 초성을 찾아서 對盧가 莫離支와 동일하게 “마려”로 발음되는 줄을 알 것이냐. 동일한 신라본기와 삼국 고기로도 이와 같은 착잡이 있거든 하물며 6백 년 전 진개가 入寇하였을 때 얻어 전한 前三韓의 이름 신 불 말이 燕國의 史記로부터 사마천의 사기에 옮기어 眞番莫이 되고, 6백년 후 관구검이 입구하였을 때 주워간 後三韓의 이름 신 불 말이 辰弁馬가 됨이야 무슨 기괴하게 여길 것이 있으랴. 관자의 발조선은 삼조선 중의 번조선일 것이며, 설문의 樂浪番國도 번조선일 것이며, 대조영의 국호인 震은 辰韓이나 辰國의 辰에서, 궁예의 국호 摩震은 마한 진한에서 取義함일 것이며, 송서에서는 辰韓 馬韓을 秦韓 慕韓이라 하여 그 취용한 한자가 서로 같지 아니하니, 이와 같은 것은 매양 연혁으로부터 명의를 찾을 것이다.

2.3. 前三韓의 명칭[편집]

삼조선의 명칭은 三京에서 비롯한 것이니, 三京은 고려사와 신지비사에 보인 扶蘇樑, 五德地, 百牙岡이니, 이른바 단군 삼경이 이것이요, 삼경은 조선 고대 종교의 대상인 삼신으로 말미암아 설시한 것이니 삼신은 곧 고기에 보인바 桓因, 桓雄, 王儉 등 삼신이다. 다만 그 고기가 불교도의 撰集한 바이므로 迦瑟羅(가슬라)를 迦葉原(가섭원)으로, 毗處王(비처왕)을 炤智王(소지왕)으로, 기타 모든 명사를 佛書의 것으로 妄改(망개)하듯이 환인 환웅의 양 명사는 법화경의 석제환인이나 석가의 별명인 大雄에 맞추어 개작한 이름이요 본래의 명칭은 아니다.

사기 封禪書에 “三一神者天一地一太一……三一之中太一最貴……五帝者太一之佐[30]”라 하니 천일, 지일, 태일은 곧 삼신의 별명이며, 屈原의 九歌에 東皇太一이란 가명이 있은즉 태일 등 삼신의 명이 사마천 이전부터 중국에 유행되었음을 볼 것이며, “啓棘賓商九歌是歌”의 句로 推하면 東皇太一의 가명이 굴원 이전의 고대로부터 중국 연해 민간에 유행되었음을 볼 것이니, 대개 조선 고대에 산동 강소 등지에 이식한 인민, 곧 彼史에 이른바 九夷가 삼신의 명을 전하여 漢族이 漢子로 譯하여 혹은 歌名에 혹은 信條에 오름이니, “신”의 역이 太됨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太一은 신한의 뜻이요, 天一은 말한의 뜻이요, 地一은 불한의 뜻인듯하니, 신 불 말 삼한에 신한의 首位에 거함은 봉선서의 三一之中太一最貴의 뜻이면 신한의 밑에 大官 5인을 두어 5가라 칭하니 이는 5개의 국무대신이요, 전국을 동 서 남 북 중 5개 부로 나누어 5가가 軍民兩政을 分掌하고 시시로 각기 本道에 出駐하여 “사리”라 칭하니 薩, 使者, 舍利등이 그 譯이니 사리는 出駐의 뜻일 것이며 亂時에는 5인이 戰事를 분담한 5大將이 되어 “크치”라 칭하니 遣支, 遣智, 儉側, 大兄 등이 그 譯이니 크치는 대장의 뜻일 것이다.

다섯 臣이 신한을 보좌함은 봉선서의 “五帝者太一之佐”의 뜻이니, 이는 상고에 미신의 神界를 人事에 응용하여 3왕 5가, 3경 5부를 관할한 三頭五臂의 관제라. 그 상세는 타일 관제고에 별론 하려니와, 삼국시대의 辰王, 太王, 大王은 다 신한의 역이니, 고구려는 태왕의 밑에 “부리” “마리”의 좌우보를 두어 3·1을 擬하여 국내 평양 한성을 3경이라 하고 전국은 順那, 消那, 灌那, 絶那, 桂那의 5부에 나누니 또한 조선의 遺形이요, 신라와 백제는 3두5비에 1臂를 가하여 3두 6비가 된 것이다.

2.4. 전삼한 창립자 단군[편집]

최근에 간행된 東史年表에 鷄林類事 曰檀倍達 國那羅 君壬儉이라 하여 단군을 倍達那羅壬儉이라 解하였으나, 계림유사는 이미 망실하고 오직 陶宗儀의 說郛에 게재한 고려의 말 몇마디만 남아 있는데, 거기에 그런 말이 없으니 그 저자가 어디서 이를인용하였는지 據然히 取信하기 어렵다. 동사강목 考異에는 “삼국유사에 神壇의 樹下에 降하여 호를 壇君이라 하였으나, 고려사 지리지에는 檀木下에 강하여 호를 檀君이라 하였다 하였는데, 동국통감에서 고려사를 좇아 檀君이라 하였으므로 이제 此를 從한다” 하였으니, 이와 같이 단군의 壇이 원래 木변의 檀이 아니요 土변의 壇인 것은 순암 선생 같은 沈沈한 학자도 시비를 캐지 않고 세력을 따랐으니 괴이한 일이다.

삼국지 삼한전에 거하면 마한 열국이 각기 별음을 設하여 蘇塗를 세우고, 천신의 主祭者인 1인을 두어 天君이라 號하며, 有罪者가 소도의 읍에 逃入하면 索還치 못한다고 하고, 또 그 게재한 54국 가운데 臣蘇塗란 1국이 있으니, 蘇塗는 수두로 수두는 고어에 神壇을 가리키는 말이니, 열국의 수두는 곧 열국의 신단이요, 臣蘇塗는 신수두니, 열국의 신단을 續管하는 최대 신단이 있는 나라를 가리킨 것이다. 현금까지 關北 지방에는 數村이 연합하여 一大樹林을 周圍하여 금줄을 매고 그 이내를 신단이라 칭하여 大祭를 행하니, 비록 고금의 변천이 없지 못할 것이나 오히려 그 의식의 일반을 전한 것이니, 대개 단군왕검이 이와 같은 수림의 신단 수두 하에서 출현하여 시대의 방편을 따라 三神五帝의 神界를 說하며, 자기가 곧 3신의 1인 신한의 화신이라 칭하고 조선이라 운하는 雛形的國家를 建함이니, 그 신단이 土築이나 石築이 아니요 자연한 수림의 신단인즉, 土변의 壇을 써서 단군이라 하지 않고 木변의 檀을 써서 단군이라 한다 하면, 이는 紫檀, 白檀의 檀이 아니라 새로 字義를 내어 “수두나무 檀”이라 함이 가한 것이다.

흉노전에 보면, 흉노는 제단 있는 곳을 休屠國이라 하니, 휴두는 곧 수두일 것이요, 또한 수림의 제단이므로 漢人이 이를 농성(蘢城)—衛靑傳—이라 하고 후래의 편의로 草頭를 去하여 龍城이라 하였으니 사기 한서 후한서 진서 등에 보인 모든 龍城이 이것이니, 흉노도 조선의 민족과 원래 同原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태고의 혹 동일한 치하에 있던 시대가 있었던 듯 하다. 어떤 때는 신수두로서 3조선 전토의 명칭을 삼은고로 神誌의 진단구변도가 있음이니, 진단의 震은 신수두의 신의 음이요 진단의 단은 신수두의 수두의 뜻이다.

왕검은 王의 半義를 취하여 “님”을 취하고 儉의 全音을 취하여 “금”을 취하여 “님금”으로 讀하는 것이니, 혹 王자가 이미 님금의 뜻인데 하고로 半義만 취하였는가 하겠지만, 삼국사기 소지(紹智)의 주에 一作毘處라 함을 보면 炤가 이미 비치라는 뜻인데 구태여 智자를 가하여 비치로 독함과 같은 것이니, 삼국사기 중에 이와 같은 예를 찾으려면 심히 많으나 飜擧치 아니한다.

조선 1세 건국자의 이름이 “님금”인 고로 역대 제왕의 존칭을 임금이라 한 것이니, 이는 기괴한 지나 周公의 諱名法이 수입되기 이전의 일이며, 님금은 神壇主祭者의 칭이요, 신한은 정치 원수의 칭이나, 이때는 신단 주제자가 곧 정치의 원수가 되는 때인즉 임금이 곧 신한의 직권을 병유하였을 것은 물론이다. 혹은 말이 인도(印度) 범어(梵語)의 스투파(stupa)가 조선에 들어와 수두가 되고 일본에 들어가 소도바가 되고 중국에 들어가 탑(塔)이 되었다 하니, 이것도 일종 참고할 말이 되나, 그러나 한두개의 偶同으로써 그 所自出을 판명함은 너무 급거한 의론이라 할 것이다.

희랍사를 독하면 중앙의 대 델피神殿을 가진 델피국이 있고, 열국에 각기 小 델피의 신전이 있었다 하니, 이것이 조선의 신수두와 같지 아니한가. 波斯史를 독하면 전국을 統御하는 대왕이 있고 대왕 하에 諸小王이 있었다 하니, 이것이 삼국시대 태왕의 하에 각 소왕이 있음과 같지 아니한가. 서양 중고에 耶蘇敎의 武士團에서 부인으로서 敎師를 삼았다 하니, 이것이 신라의 源花와 같지 아니한가. 애급 고대에 太陽日의 수인 360여개를 쓰기를 좋아하여 나일강의 본명에도 360여란 의미가 있다 하니, 단군고기의 “主穀主命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事”와 여지승람에 기한 묘향산 고적의 “三百六十餘宮”이 또한 그와 같지 아니한가.

이는 모두 본론의 범위가 아니라 姑捨하거니와, 역사는 시대와 경우를 따라 성립하는 것이니 비록 변쇄한 미신의 기록이지만 수두와 수두의 敎義에서 나온 3경 5부의 건설된 원인을 알아야 삼조선 고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우와 같이 대강 진술하였다.

2.5. 전삼한 강역과 연대[편집]

이때까지 진술한 것은 겨우 전삼한 곧 삼조선의 존재한 證實과 그 건립된 원인과 그 國制의 대략뿐이어니와, 이에서 따라오는 3개 문제의 하나는 삼조선의 범위다.

범위에 또 양별이 있으니 첫번째는 삼조선 각자의 범위요 두번째는 삼조선 전체의 범위다. 첫번째의 구별은 명언할 수 없으니 만주원류고에 요동의 番汗縣을 弁韓의 故地로 지정함이 近理하니, 대개 삼조선중에 불한의 관경이 가장 지나와 密邇한 고로 발조선이란 명사가 가장 먼저 지나인의 서적에 보인 바라. 燕 王喜가 조선을 침략하여 영평부의 盧龍縣을 요서라 하고 이 이동을 요동이라 칭하였은즉, 불한의 서울이 당시에 內遷하였으나(下文에 상론), 당초에는 요하 이서와 개원 이북이 모두 번조선의 舊壤이었을 것이며, 후삼한중 변진 양 한은 遷來한 것이나 마한은 본토에 있던 것이니, 마한의 전신인 막조선은 알기가 쉽다 할 것이나, 다만 위만의 난에 임진강 이북을 전실하였으니 그 본토의 전체로 말하면 대개 압록 이동이 모두 그 舊壤이었을 것이며, 신한의 구양은 가장 模捉할 수 없으나, 신한은 임금의 겸임인즉 왕검성 즉 금 海城縣이 그 서울이라 하면 요동반도와 길림 등지가 곧 신한의 부분인 진조선의 구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조선이 截然 각별한 국가가 아니요 다만 신한의 통치하에 약간의 구별을 가진 국가가 될 뿐이다.

동국총목의 “檀君疆域北至黑龍江南至鳥嶺”이 삼조선 전체의 강역이 될 것이나 흑룡강 조령 등은 고대 명칭이 아닌즉 고사에서 나온 기록이 아니요 후인의 억설이다. 그러나 후삼한의 辰弁이 천래하기 이전에는 조령 이남이 거의 黃落하여 인거가 없었을 것이니, 총목의 억설이 대개 근리하며, 문헌비고에 고죽(孤竹: 영평부)이 춘추 이후에 조선 소유가 되었다 했으나, 이는 백이를 한족(漢族)으로 인(認)하는 동시에 그 본국인 고죽을 漢族의 國으로 認한 것이다. 건륭의 도서집성에는 고죽을 北夷의 하나라 하였으니, 夷가 비록 范漠한 명사이나 漢族이 아님은 명백하니, 秦開戰 이전에는 고죽이 조선의 일부이던 것도 명백하다 할 것이며, 사기 흉노전에 直上谷以往者東接濊貊朝鮮이라 하였은즉 조선과 지나와 흉노의 분계를 이로써 대강 알 것이다.

3개 문제 중 두번째는 삼조선의 연대다. 금인이 보통 조선 건국부터 前甲子까지 4257년이라 하니, 왕검 이후로부터 동 북부여 분립 이전까지 그 사이 범막한 장세월의 사적이 전부 殘缺하였는데, 이것을 어디서 고증하였는가 하면, 고기에 “檀君與堯竝立於戊辰”이라 한 것을 據하고 邵康節皇極經世書의 唐堯이래 연대표에 의해 정한 연조라. 그러나 확극경세서에 적힌 연대를 믿을 것이냐. 사주보는 자가 남의 미래의 행년을 내면 1세부터 70세, 80세까지 내지만, 그 행년이 꼭 맞는 것은 아니니, 지나연대를 사마천 사기에 周召共和로부터 연표를 비롯함은 그 이전 역년을 알 수 없는 까닭이어늘 소강절이 자기의 자랑하는 象數學으로 아무 증거도 없이 商이 幾百幾十歲, 周가 기백기십세, 심지어 某帝는 재위 약간세, 모왕은 재위 약간세…… 등 고 국조와 고 제왕의 사주를 내었으니, 이러한 것으로 증실을 삼아 지나 연대 중 당요의 기원에 대조하여 단군의 연대를 알려고 함은 愚擧이다.

고구려의 기록으로부터 전한 위서의 “往在二千歲有檀君王儉立國阿斯達”이 본문의 전부를 잃고 오직 십수자의 단구로 전한즉 준신할 만한 확실한 가지가 있고 없음을 모르나, 오히려 조선의 고기라 한즉 고구려로부터 그 이전 2천년이면 距今 4천년 내외이니, 이와 같은 成數나 存記함이 가하며, 기자도 황극경세서의 주 무왕 연대와 대조하여 거금 幾年이라 하지만, 무왕 연대도 또한 당요의 연대와 같으며, 기씨 선우씨의 족보에 인하여 기자를 태조 문성왕이라 하고, 그 이하 마한까지의 시호와 역년이 詳備하나, 그러나 태조 문성 등의 諡가 상고에 있지 아니하며, 혹은 후왕의 追崇이라 하나 조선에서 諡法을 씀이 삼국 말엽에 비롯하였거늘, 이제 그 이전에 마한 때에 시법이 있었다 함도 不成의 설이니, 기자는 거금 3천년 내외에 조선에 건너온 인물로만 앎이 가하다.

3개 문제 중 세번째는 조선의 흥망 변천한 사적이다. 이는 재료가 연구의 여지를 주지 않는 가장 난문제이나 이 문제를 또한 2분하니[31],

(가) 단군 기자의 替代, 즉 기자가 일개 지나 망명객으로 들어오자 어떻게 단군을 代하여 왕이 되었는가의 문제이다. 壇은 수두요, 수두는 고대의 조선 전체를 총칭한 이름임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그때 제왕은 오직 제1세 왕검과 제2세 부루가 고기에 보일 뿐이요, 기자와 그 후예라 운하는 조선왕 否, 조선왕 準은 조선사략에 보였으나 기실 기자의 일은 사기 한서와 소설류의 삼재도회에서, 부와 준의 일은 위략에서 初出한 것뿐이라. 李朝 이전의 조선인의 붓으로 쓴 기자의 사실은 겨우 삼국유사에 “壇君…避箕子”의 십수 자이며, 삼국사기에 “箕子受封於周室”의 7자가 쓰였으니 이것은 사기에 적힌 것을 초록한 것이라. 신라 말의 유일무이한 지나 숭배자로 제왕연대력을 쓴 일종 사가 최치원도 일찍 한 마디 말도 기자에게 미침이 없음은 하고이며, 위서에 단군왕검을 기하였는데 그 동시의 저작인 삼국지와 위략에는 왕검을 배고 기자만 載하여 부여 고구려 등의 문명을 기자에 歸功하였음은 하고이며, 遺事의 말과 같이 단군이 位를 退하고 기자에게 주었다 하면 神壇樹林의 권위가 이미 衰死한 징후이거니, 기자 이후 천여 년에 해모수 해부루 고주몽이 모두 단군 혹 檀君子라 칭함은 하고이며, 또는 삼국 초엽까지 조선 전체를 震壇이라 칭하는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하고인가. 중국사에 조선에 관한 무슨 말이 있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조선사 어느 책장에 집어넣고, 만일 彼我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면, 자가의 추측으로 한두자를 개정 혹 첨부하여 없는 사실을 날조함은 역대 사가의 관습이니 遺事에 檀君…避箕子가 어찌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명백한 반대의 증거가 없는 이상에는 일종 의문으로 고대의 기록을 깨치지 못할 것이라. 아직 특별한 발견이 있기 전에는 기씨 연대를 그대로 두고 볼 것이다.

(나)는 삼조선의 결국 즉 삼조선이 일시에 공망하였느냐 하는 문제다. 사기 조선전에 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 이라 하니, 이것이 아마 삼조선의 최후일 것이다. 이는 곧 진개가 入寇하여 滿番汗 이북 2천리를 沒失하던 때의 일이다. 만번한은 곧 한서 지리지에 보인 文番汗의 양현이요, 番汗은 전술한 만주원류고에 이른바, 변한의 舊地 즉 불한의 서울이다. 근세의 선유들이 2천리를 오증하여 만번한을 대동감 이남에 와서 찾았으므로 졸저 평양패수고에 이미 명백히 변증하여 금 대동부부터 熱河 등지를 지나 요동까지 2천리임을 논술하였으니 여기에 더욱 復載치 않거니와, 이는 삼조선 건국 이후 미증유한 대외 전쟁의 실패며 三頭정치 붕괴의 동기가 됨이다. 신조선이 붕괴하여 삼국이 되니 其一은 興京縣, 桓仁縣 등지로 들어가 불조선 유민과 연합하여 진번국이 되고, 又一은 경상우도로 들어와 변진국이 되니, 전자는 신조선 유민이 주가 되고 불조선 유민이 부가 되어 진번이라 이름하고, 후자는 불조선 유민이 주가 되고 신조선 유민이 부가 되어 변진이라 이름함이니, 이는 대개 인구의 다과에서 선후 차서를 정한 이름인듯하고, 又一은 단순한 신조선 유민들이 경상좌도로 건너가 진한6부를 건설하니 이 가운데 진한과 변한은 다 마한 南遷한 뒤의 일이라, 차절 후삼한고에 상술하려 한다. 신불 양조선의 또 일부 인민의 後來가 燕寇衛滿에게 趨附하여 위만조선이 성립하니, 위만전에 이른바 役屬眞番朝鮮蠻夷와 侵降其旁小邑眞番臨屯皆來服屬이 이를 가리킴이라. 말조선은 신 불 양조선의 대패 멸망한 끝에 홀로 진개의 방어에 성공하여 조선이란 이름을 보전하고, 또 조선왕 부는 진시황의 중국 통일 후 만리 장성의 威燄에 四海를 전율케 하는 때에 정병을 선하여 요새를 守하여 半壁의 강산이라도 보수함이러니, 不肖子準이 繼位하여 위만을 신임하여 西鄙를 할여하며 宿衛를 허하다가 마침내 反攻을 만나 남방으로 달아나 조선이란 이름을 버리고 다만 말한이라 칭하니, 삼국지와 삼국사기의 이른바 마한이니, 마한 진한 변한은 다 전삼한 후신으로 남방에 재설된 삼한이다. 나의 창명으로 후삼한 혹 남삼한이라 정하고 그 상세는 차절 삼한고에 보인다.

3. 후삼한 – 삼국지에 보인 羅 加 濟 삼국[편집]

3.1. 후삼한 고증에 대한 선유의 오류[편집]

한구암 안순암 정다산 한대연 숙질 등 제선생이 비록 전삼한의 존재한 것을 인정치 못하였으나 辰弁馬 삼한을 곧 신라 가라 백제라 하여 최고운의 羅麗濟 삼국에 분배한 삼국설을 벽파하여 후삼국의 강역을 정돈한 공은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중에도 後生小子의 校正을 待하는 다소 오류가 없지 않으니, 그 제반 오류가 이하에 열거한 3者의 대 오류에서 원인한 것이다.

(가) 참고서의 誤니, 범엽의 후한서의 동이열전은 곧 진수 삼국지의 동이열전을 초록한 자니, 그 실례의 하나를 들어 보인다. 삼국지 동옥저전에 王頎别遣追討宫盡其東界問其耆老海東復有人否 … 說得一布衣從海中浮出 … 兩袖長三尺 … 一人項中復有面[32]라 한바, 왕기는 曹魏의 장수요, 궁은 고구려 동천왕의 이름 위궁의 약자인즉, 다 후한 이후의 사람인 고로 왕기 이하 13자를 刪去하고 고구려 耆老의 自言으로 作하여 삼국지의 것을 초록하였다. 이 같은 사적 가치없는 요괴담의 초록이야 우리에게 何關이랴마는, 초록뿐이면 오히려 가하나, 이제 중대한 기록을 개찬하여 삼국지에는 “準…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準後絶滅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33]”라 하였거늘, 후한서에는 “準…將其餘衆數千人徒入海攻馬韓破之自立為韓王凖後滅絶馬韓人復自立為辰王[34]”이라 하였다. 진수, 어환, 왕침 등은 다 관구검과 동시의 人으로 儉이 가져간 고구려의 기록을 得見한 자일 것이니, 曄의 개찬이 어찌 狂擧가 아니랴. 그런데 선유들은 다만 후한이 삼국의 전대인 것만 알고 후한서 저자 범엽이 삼국지의 저자 진수의 후인 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던지, 매양 후한서에 보인 삼한으로 주요 재료를 삼고 삼국지는 도리어 보조로 인용하였다.

(나) 偏信의 오니, 당 태종의 중국고사 중 조선에 관한 기재를 妄刪 혹 위조하였음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그뿐 아니라 당 태종의 백여 년 후 당 덕종때의 賈耽은 그의 소위 四夷연구의 전문가로서 더욱 조선과 중국관계를 잘 아는 자이었는데, 그 저서 四夷述의 序에 “玄菟樂浪陷於漢建安之際”라 하여 2군이 고구려에게 함락됨을 한탄하였거늘, 이제 후한서에는 그와 비슷한 말도 없고, 삼국지에는 公孫康이 屯有縣 이남의 地를 분하여 대방군으로 삼았다 할 뿐이며, 또 위 명제(魏明帝: 曹睿)가 대방태수 劉昕과 낙랑태수 鮮于嗣를 보내어 海를 越하여 2군을 정하였다 하여 대방 낙랑이 일찍이 公孫淵에 함락되었음을 말하였으나, 그러나 대방이 현도가 아니며 공손연이 고구려가 아니니 이것을 곧 가탐의 말한 바로 간주함이 불가하니, 그러면 진수, 범엽 등이 종족적 편견으로 현도 낙랑의 失陷한 大事를 厥함이 아니면 곧 후인의 妄刪이며, 또 삼한전에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二郡遂滅韓[35]”이라 하였으니, 下文에 據하면 진한의 전국 수가 12국인데 8국을 奪하여 4국만 餘하였다가 후에 그 4국까지 멸함이니, 그러면 신라 왕국이 어디에 존재하였던가. 그런데 선유들은 매양 古記의 斷爛한 문자는 다 버리고 오직 후한서 삼국지 등을 거하여 故事를 단정하려 하였다.

(다) 해석의 오니, 辰韓, 辰王 등의 辰은 臣蘇塗, 臣濆活, 臣智, 臣遣支, 臣雲新 등의 臣은 그 음이 신인데 元의 義요 總의 義로 三國時人이 이를 太라 譯한 자며, 卑離는 불이니 平地의 義요 郡會의 義로, 백제 지리지의 夫里, 扶餘 등이 다 同音同義며, 狗邪, 安邪, 彌烏邪馬 등의 邪는 다 그 음이 라니, 駕洛의 洛과 加羅의 羅가 동음이어늘 선유들이 이두자의 해석을 몰랐으며, “準…入海”는 곧 조선 남방을 가리킨 것이니, 지나인이 고대에 島나 半島를 모두 海 혹은 海中이라 한 고로 조선에 응용한 것이니, 한서에 “朝鮮在海之中越之象是也[36]”와 博物誌에 “燕伐之朝鮮亡入海[37]” 등에서 볼 수 있거늘, 선유들은 매양 準을 浮海南奔으로 認하였다.

제一로 인하여 오류가 생긴 것이 또 二니 一, 마한은 전후 삼한을 통하여 箕氏一姓 —否와 準을 箕子의 후예라 하면 — 선유들이 후한서에 거하여 準의 攻破하기 이전의 마한을 原有의 마한이라 하고, 공파한 마한을 기씨의 소유한 마한이라 하고, 진왕이라 자칭한 마한을 기씨멸절한 뒤의 마한이라 하여 3개의 마한으로 나누며 二, 선유의 말에 중국 21사의 조선열전이 모두 當代 병립한 隣國을 기재한 것인즉, 후한서나 삼국지의 삼한도 곧 지나 후한과 삼국시대에 상당한 羅 加 濟 삼국이요, 그 백년 혹 천년 전의 삼한이 아니라 하여 역대 사가가 후한서와 삼국지에 보인 사실을 羅 加 濟 삼국 이전에 향하여 찾으려던 愚擧를 갈파함은 실로 千確萬確한 견해라 할 것이나, 다만 후한서로 인하여 마한을 3개로 나누어 진왕의 마한을 최후의 마한으로 인하여 이에 백제를 조치할 곳이 없으므로 드디어 백제본기의 온조가 마한을 멸한 사실을 부인하고 즉 진수 범엽의 저서하던 때 백제 건국 2백년 후 까지도 마한이 따로 존재하였음을 주장하여 架空의 筆로 전대의 2백년 수명을 연장하고, 그리하여 辰弁 양한을 신라와 가라로 인정하는 동시에 백제만 삼한 권외에 축출하여 연대와 사실의 대착오를 이루었다.

제二로 인하여 오류가 생긴 것이 또 二니 一, 辰韓을 秦人의 避役者라 한 妄證은 이미 변론하였거니와, 선유들은 진수 범엽 등의 기록을 신용하여 드디어 신한을 지나인의 자손으로 認하는 동시에 그러면 어찌하여 진한에 지나인의 언어 문자와는 비슷도 아니한 斯盧, 已祗, 不斯 등 國의 국명이 있느냐의 의문이 있으므로, 이에 해동역사 지리고에는 진한의 명은 秦人의 避役東來者로 말이암아 나고, 6부의 명은 위만의 2세인 우거의 신민들이 이주한 뒤 始한 줄로 말했으나, 이같이 辰韓이 秦人이 이주한 한국이라 解할진대, 삼국사기 혁거세 원년에 辰人以瓠爲朴, 居西干辰言長者之稱의 辰은 모두 秦人이란 秦일진대, 어원학상으로 고구하여 朴이나 거서간이 결코 고대 지나인의 언어가 아니었으며, 二, 삼국지에는 後準僭號稱王이라 하여 기자 자손이 대대 侯爵으로 오다가 준에 至하여 비로소 稱王한 줄로 말하며, 위략에는 朝鮮侯見周衰燕自尊爲王…亦自稱王[38]이라 하였으니, 삼국지나 위략에 적힌 사실이 다같이 관구검의 所傳이련마는, 此一절이 다 각각 다름은 각기 尊中國의 습관으로 사실에 위반되는 사실을 쓴 것이 명백하거늘 이런 辨駁이 없음은 고사하고 선유 중 혹 辰王의 辰이 人臣의 臣으로 作하여 臣屬한 侯王의 義로 妄解한 이가 있다.

제 三으로 인하여 생긴 오류가 더욱 허다하니, 이제 略擧하면, 一, 辰國을 辰韓이외에서 찾아 삼한 이전에 辰이란 특별한 1국이 있는 줄로 認하며, 二, 辰王을 태왕 이외에 찾아 진국이란 특별한 일국의 왕으로 오인했으며, 三, 따라서 辰王, 臣蘇塗 등의 본의를 몰라 삼한의 관제 풍속 등을 거의 다 오증했으며, 四, 한강 남북을 갈라 북은 조선이 되고 남은 진국 혹은 한국이 되었다 하여 고래로 남북의 종족이 各別한 것으로 오증하였으며, 五, 卑離와 夫里를 동음으로 보지 못하였으므로 백제 이외에서 마한을 찾았을 뿐더러 마한 열국의 위치를 많이 오증하였으며, 六, 이상과 같이 이두자를 辨解치 못하므로 삼한전 중에 言語不與馬韓同不暗句麗言語 등의 기록을 과신하여 異字로 쓴 同名을 발견치 못하였으며, 七, 海자의 오해 같은 것은 비록 그다지 중요치 아니하나 陸行南走로 認하면 구 평양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현금의 평안 황해 경기 충청 등도를 지나 準의 新都라 하는 金馬國—익산까지 중간 천여리가 모두 준의 신민인 고로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도망하는 패잔한 同時行次가 無恙함인 줄 알 것이며, 沿海南走라 하면 이와 반대로 육행의 위험을 연상할 수 있는 제왕에 舊都돠 新都 중간 모든 지방이 準의 管境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도 발생할 것이다.

3.2. 中 삼한의 약사[편집]

上文은 선유들의 오류를 지적한 것뿐이다. 이제부터 후삼한의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眞番莫을 삼조선이라 하고 신라 가라 백제를 후삼한이라면 眞番莫 삼조선은 이미 멸망하고 羅 加 濟 삼국은 아직 건설되기 전에 準의 마한과 眞番 양국은 유민이 건설한 진한과 변한의 양 자치부락은 무엇이라 이름할까? 佛家에서 전신은 已脫하고 후신을 未得한 그 중간 暫有의 身을 中陰身이라 하니, 이것은 전후 양 삼한의 중음신이라 함이 가나하, 지금 다만 중삼한이라 이름하고 후삼한의 역사를 말하기 전에 먼저 중삼한의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중삼한의 역사를 兩段에 분하니,

一은 마한의 건국이다. 준이 왕검성을 버리고 금마군에 천도하여 어찌하여 조선의 舊名으로 국호를 삼지 아니하였는가? 이는 위만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함일 것이다. 고대에 천도하면 매양 그 지방의 이름으로 국명을 삼았으니, 백제가 사비부여에 천도하여 국명을 곧 사비부여라 한 類가 그것이니, 준이 금마군에 천도하여 어찌 금마국이라 칭하지 아니하였는가? 금마군은 삼한전 중의 건마국이니금마군이라 함은 백제 중엽 이후 봉건제를 폐지한 뒤 郡名이라. 신라가 백제를 멸하고 그 군명을 仍用한 고로 신라 문사들이 古記를 述할때에 준이 금마군에 천도하였다 함이요, 준의 때부터 백제 중엽까지는 건마국 혹 금마국이라 칭했을 것이니, 준의 남천 후에 금마국의 국명을 仍稱하였던지 모르나 후인들이 古史를 追述할 때 준의 位號인 말한으로 그 국명을 삼은 것이다. 선유들이 모두 금마군을 삼한전 중의 건마국으로 認하지 않고 월지국으로 인함은 하고인가? 이는 전술한 범엽의 攻破馬韓, 馬韓人復自立爲辰王 등의 위증에 속아서 삼한전 중의 辰弁 양한은 신라와 가라로 認하면서도 마한은 백제 이전의 마한으로 인한고로 삼한전 중 백제에 관한 사실을 준의 사실로 오증하였으나, 그러나 辰王治月支國이라 한 진왕은 백제의 태왕이요, 월지는 백제의 위례성이니, 위례의 음이 월되고 성의 義가 티(支)가 됨이다. 후한서의 攻破馬韓 등 說을 범엽의 위증이라 하여 준의 천도 이전에는 남방에 마한의 명칭이 있었다 함은 그럴 듯하나, 그러나 삼국지의 準…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은 하설인가? 이는 상문의 韓在帶方之南을 받아서 말한 것으로 韓地에 入居하여 此地에 왕이라 號하였다 하미요, 그 이전에 韓國이 있다 함이 아니다. 만일 엄격하게 문구와 시실의 부합만 구할 것 같으면 상문에 이미 辰韓者古之辰國也라 하였은즉 진한의 辰이 진국의 辰에서 나옴이어늘 하고로 하문에 辰韓 … 耆老 … 自言 … 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今有名之爲秦韓이라 하여, 진시황의 秦으로 진한의 辰을 만들어 상하문의 사실을 서로 모순되게 하였는가? 이미 韓有三種一曰馬韓이라 하였으면 下面에 마땅히 마한의 득명한 시초나 원인을 말하여야 할지어늘 이제 居韓地, 號韓王, 韓遂屬帶方, 樂浪分統韓國 등의 語만 있고 마한이란 자는 없으니, 어찌 이같이 전후 文勢가 관통치 않았는가? 그러므로 더욱 당 태조이 이래로 고사 안에 妄刪 혹은 위증이 많이 가입하였음을 볼 수 있다.

二는 辰弁 양한의 건설과 마한의 革姓이다. 진한은 순전히 신한 유민의 이주자가 건설한 바이고 변진은 불한과 신한의 양국 유민의 이주자가 공동건설한 바임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여기에 일언코자 하는 바는 기씨의 마한의 멸망한 사실이다. 대개 기씨 말엽에는 남에게 토지를 할여하다가 멸망하였으니, 준이 이미 西鄙 백 리를 위만에게 할여하고는 마침내 위만에게 쫓기어 남방에 와서 마한이 되며, 마한이 된 뒤에도 신한 이주민에게 동계를 할여하고(진한전에 割其東界與之란 구절로 알수 있음), 또 불한 신한 양국 이주민에게 동남계를 할여하다가(이는 史에 보이지 않았으나 事理로 推知할 수 있음) 마침내 신라 혁거세가 진한과 변진을 연합하여 대항하매 드디어 동계와 동남계를 幷失하였으며, 그리고 최종으로 졸본천의 유수한 부호의 과부 召史奴가 그 2子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南來하매 幾斤의 황금을 받았던지 미추홀, 漢忽 등 서북 百里地를 할여하였다가(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割東北百里라 하였으나 東자는 마땅히 西자로 作할 것이니 동서양자상환고를 참조).

마침내 온조태왕의 가장한 사냥꾼에게 금마국에 우거한 서울까지 빼앗기고 箕氏왕조 천여 년의 운명도 이로써 마치었다. 이와 같이 마한은 망하여 扶餘氏의 백제가 되고, 진한은 기씨 망하기 전 66년에 혁거세가 이미 6부의 盟主가 되었고, 변진은 기씨 망한 후 35년에 首露大王이 6加羅의 맹주가 되니, 이곳 백제 신라 가라로 후삼한이라 칭한 바요, 후삼한이 흥하매 중삼한의 역사는 이에 일단락을 고하게 되었다.

3.3. 후삼한 羅 加濟의 역사[편집]

羅 加 濟의 역사는 首尾 6~7백년의 역사니, 그 연대의 長은 전삼한의 삼분의 일밖에 안되나 사적재료로 유전하여 오는 것은 서적으로만 말하여도 不精하나마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이 있어, 도저히 이 따위 단편으로 다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하고자 하는 후삼한은 순전히 진수 삼국지 삼한전에 보인 羅加 濟의 별명인 삼한에 대하여 말함에 그칠 뿐이다.

먼저 후삼한의 강역을 의론하면 삼국지에 기록한 삼한 70여국은 곧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인 羅 加 濟 삼국의 각 주군이니, 다만 전자는 봉건시대의 지리를 기한 자이므로 國이라 하고, 후자는 봉전 타파 후 기한 자이므로 州 혹은 郡이라 한 것이다. 封國을 폐하고 주군을 設하는 동안에 대소의 합병도 있었을 것이며, 명호의 변경도 있었을 것이며, 또 같은 명호로도 이두문 용자의 변경도 있었을 것이며, 신라 경덕왕 때 이두문으로 쓰던 지명을 한문으로 개정한 뒤 혹 古號가 전치 못하며, 혹 고호의 의의를 알 수가 없이 된 자가 많아 일일이 찾을 수 없으나, 오히려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가) 백제의 강역은 삼한전에 이른바 마한 50여국인데 국명은 좌와 여하다.

해양국(奚襄國), 모수국(牟水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삭국(小石索國), 대석삭국(大石索國), 유휴모탁국(優休牟涿國), 신분활국(臣濆活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람국(怒藍國), 월지국(月支國), 자로모로국(咨離牟盧國), 소위건국(素謂乾國), 고해국(古奚國), 막로국(莫盧國), 비리국(卑離國), 점비리국(占卑離國), 신흔국(臣釁國), 지침국(支侵國), 구로국(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염로국(冉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内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만로국(萬盧國), 벽비리국(辟卑離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半國), 구소국(狗素國), 첩로국(㨗盧國), 해로비리국(奚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막로국(莫盧國), 고랍국(古臘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椘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야국(不斯濆邪國), 해지국(奚池國), 건마국(乾馬國), 초리국(椘離國).

우 50여국의 국명중에 疊載한 막로국을 산거하면 합이 54이니, 54의 국명을 삼국사기 백제 지리지의 주군명에 만춘 뒤 다시 백제 주군의 연혁을 고려사 지리지와 이조 8도 지명에 맞추어 본즉 그 가운데 卑離 등제국들은 곧 백제 지리지에 夫里 등 주군인데, 監奚卑離는 古莫夫里, 즉 固麻城이니 금 공주요, 辟卑離는 波夫里니 금 同福이요, 毛卑離는 毛良夫里(牙, 邪, 良, 壤, 襄, 奴, 那 등 자가 다같이 라의 음임은 이두문 해석법 참조)니 금 高敞이요, 如來卑離는 爾陵夫里니 금 綾州요, 그 중에 형용적 頭辭가 없지만 卑離國이라 한 卑離는 그위에 卑의 一자가 脫한 듯하니 卑卑離는 夫夫里로 臨陂와 沃溝 사이 澮尾廢郡이요, 이밖에 삼한전에 內卑離, 占卑離, 楚山塗卑離 등 卑離가 있고, 백제 지리지에 半奈夫里, 未冬夫里, 古沙夫里, 古良夫里가 있어 數도 一이 差하여 음도 서로 맞지 아니하니 아직 後考로 미루고, 大石索은 大尸山이니 금 泰仁이요, 優休牟涿은 于召渚니 금 高山 서부의 폐군이요, 월지는 위례성이니 금 한성이요, 支侵은 백제 지리지에 그 본위치를 말하지 않았으나 당 도독부의 設郡에 支潯이란 군명이 있으니 支潯은 州治가 貝彡인 고로 득명한 자요, 패삼은 신라가 餘邑이라 개명한 바 餘의 義가 끼침이니 금 海美요, 狗盧는 皆利伊니 그 연혁이 없고, 駟盧는 沙好薩이니 好는 奴의 誤인 듯한데 금 洪州요, 感奚는 今忽이니 금 德山이요, 莫盧는 邁羅니 동성대왕 때에 위병(魏兵: 拓跋氏) 누십만을 깨친 명장 沙法名의 봉국이니, 삼국사기에 그 연혁이 없으나 백제 망후 당 도독부의 관할인즉 대개 공주 부근일 것이요, 臼斯烏旦은 구사진방(仇斯珍芳: 일명 貴旦)이니 금 長城 동부요, 楚離는 所力只지 금 沃溝요, 건마가 곧 금마군임은 이미 전술한 바이다. 나머지는 아직 발견치 못하였으니 후일을 기다리려니와, 이만하여도 마한 54국의 지도를 그릴 수 있지 않은가.

(나) 다음으로 진한과 변진은 합하여 24국인데 국명은 좌와 여하다.

이지국(已祗國), 불사국(不斯國),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늑기국(勤耆國),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염해국(冉奚國),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변악노국(弁樂奴國), 군미국(軍彌國), 변군미국(弁軍彌國),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 여잠국(如湛國),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마연국(馬延國),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사로국(斯盧國), 우중국(優中國).

이 가운데 군미국과 마연국이 첩재하였으니 선유들의 말을 좇아 이 양국은 산거하면 24의 수에 恰當하다[39]. 사로가 신라임은 그 연혁도 명백하고, 선유들이 斯는 새요 盧는 라(금어의 나라)이니 곧 新國의 義라 함도 틀림 없으며, 구야(狗邪)는 加羅니 금 金海며, 彌烏邪馬는 任那니 금 高靈이요, 古資彌凍은 금 固城이라 함도 선유의 정설이 있거니와, 이제 졸견으로 그 音義을 해석하여 이외 제국의 연혁을 찾을 만한 자를 더 찾으려 한다. 辰弁 양한 23국 중에 彌凍으로 명한 나라가 3이니, 비록 마한의 卑離처럼 많지 못하나 삼국사기 지리지에 彌知로 명한 郡은 모두 水灣이 曲한 곳에 임한 자니 백제의 古馬彌知는 금 康津 海南 간의 海灣의 읍이요, 松彌知는 靈光부근 해만의 읍이요, 신라의 武冬彌知는 庇安 북부 丹密 廢邑이니 또한 丹江 江灣에 임한 자이다. 彌凍은 이두문에 대개 彌知-미지로 讀하는 것으로 동일한 水灣의 義일 것이니, 古資彌凍이 금 固城임은 이미 상술하였거니와 古資는 구지, 즉 반도의 義니 고성이 반도인 동시에 또한 大海灣에 임한고로 古資彌凍 즉 구지미지라 이름함이며, 弁辰彌離彌凍은 혹 迎日灣이 될 것이다.

문헌비고에 大伽倻今 高靈, 小伽倻 今 固城, 古寧伽倻 今 咸昌, 阿羅伽倻 今 咸安, 星山伽倻(一云碧珍伽倻) 今 星州라 하니 弁辰古淳是는 곧 古寧伽倻(고링가라)니 함창 공갈못의 공갈은 고링가라의 訛傳인 듯 하며, 弁辰安邪는 곧 阿羅伽倻(아라가야)니 아라는 咸安 北江의 고호인 듯 하며, 삼국사기 지리지의 互用字에 거하여 珍ㆍ彌ㆍ買의 3자가 다 ‘매’로 독함을 알지니, 星山의 별메의 의요 碧珍은 별메의 음인데, 半路는 곧 ‘별’이니 弁辰半路는 곧 星山伽倻며, 이상에 이미 술한 彌烏邪馬 — 任那 今 高靈과 狗邪—加羅 금 金海와 古資彌凍—구지미지를 합하여 6가야라 칭한 것인데, 다만 彌烏邪馬의 邪馬 양자의 倒載일 것이다. 瀆盧는 茶山이 巨濟古號 裳郡의 裳은 속어에 두룽이니, 瀆盧는 두룽이의 음이니 금 巨濟라 하니 대개 비슷하며 不斯는 부스니 곧 고어에 松의 義나 그 위치를 알 수 없으며, 勒耆는 長鬐의 고호가 耆立이니 늑기가 기립일 것이나 양자 중 어느 하나가 倒字일 것이다. 그 나머지는 아직 음의 위치와 연혁을 발견치 못하였다.

3.4. 후삼한의 互相 관계[편집]

삼한전에 진한과 변한의 政體를 기록하여 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爲王이라 하였으니, 이는 實과 訛가 參半한 것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서에 쓰인 王, 太王, 大王 등은 모두 삼한전의 辰王임과, 전삼한 시대에는 신한이 首位이고 말한과 불한이 보좌임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후삼한에 이르러서는 말한은 비록 쇠패한 끝이나 오히려 한강 이남은 전부를 차지하여 고대의 一대국의 위치를 가졌으므로 그 국호는 말한(馬韓)이라 하였지만 그 位號는 辰韓이라하여 70여국의 共主가 되었으며, 신한(辰韓)과 불한(弁韓)은 다만 그 유민임에 의하여 이로써 그 所居의 지명을 삼아 슨 것이요, 그 위호인 신한은 도리어 마한에 讓한 고로 신라본기에 거하면 혁거세부터 지증까지 거서간, 니사금, 마립간 등으로 칭하고 왕이라 칭하지 못하였는데, 마립간은 삼국사기 눌지마립간 주에 김대문이 이르기를 “麻立橛也”라 하니 橛의 義는 “말”이라. 그러면 마립간은 말한으로 독한 것이니 말한도 오히려 존칭이므로 초대에는 쓰지 못하고 눌지에 이르러서 4대를 쓰고 법흥때에 와서 비로소 신한 곧 대왕이라 칭한 것이다.

백제는 마한의 故地를 據하므로 그 국호를 마한이라 하나 그 왕호는 辰韓이며, 신라는 진한의 유민이므로 그 국호는 진한이라 하나 그 왕호는 마한이 되어 진한 마한의 명의가 이같이 뒤죽박죽 되었는데, 삼한전이 곧 관구검이 얻어간 기록과 전설을 쓴 것인즉 신라 초대의 일이니 其十二國—辰韓弁韓 양 방면의 十二國 합 二十四국을 竝擧한 者—屬辰王의 一절은 實錄이며, 신라는 그 건국 이후 항상 朴, 昔, 金三姓이 서로 遞傳하고, 어느 때 백제인이 신라왕이 된 적이 없으니 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의 一절은 訛錄이다. 그러나 신라본기로 보면 그 초대부터 백제와 대치하였던듯하나 이는 신라 史官이 先代의 恥를 諱하여 산거한 것이니, 隋書에도 “新羅…其先附庸於百濟”라고 적히어 있다. 고구려가 선비와 혈전하는 동안 백제가 강하여짐과 같이 백제가 고구려와 혈전하는 동안에 신라가 강하여짐은 實在의 사실인즉 눌지와 내물 이전에는 12국이 마한 진왕의 절제를 받았을 것이니 이는 삼한전의 것으로 신라본기의 缺을 보충함이 가하다.

3.5. 후삼한과 병립한 열국[편집]

삼국지에 적힌 후삼한 당시의 왕국이 5이니

一, 扶餘눈 불의 譯이니, 卑離, 夫里, 弗, 發, 火, 伐 등의 역과 같은 자나, 불은 국명이 아닌고로 조선고사에 반드시 그 위에 頭辭를 冠하여 北扶餘, 東扶餘, 泗沘扶餘, 卒本扶餘, 爾陵夫里, 古莫夫里, 密弗, 推火, 音汁弗, 沙伐, 徐羅伐이라 하여 그를 구별하였다. 그러나 각 불 중에 북부여가 가장 대국이며 중국과 교통이 잦았던 고로 漢 사마천부터 북부여를 다만 부여로 칭하여 관습어가 됨이니, 삼국지 중 부여도 곧 북부여를 가리킨 것인데 그 수도의 위치는 합이빈으로 삼국사기의 황룡국이 是며, 삼국사기 중 부여는 동부여니 삼국지의 부여가 아니요.

二, 고구려는 그 中京 가우리로 득명한 자니, 삼국지 중 고구려의 수도는 금 즙안현(輯安縣)이요.

三, 옥저는 와지니, 森林의 義니 만주원류고에 보인 窩集이며, 고대조선 북부인이나 근세까지의 만주인이 그 所居 지방에 대삼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와지라 하였은즉, 삼국지에 동북남 삼옥저는 그 중 최대한 와지를 가리킨 것이요. 그밖에도 무수한 와지가 있었으니, 삼국사기에 好童이 出遊한 와지와 晉書의 依慮子第의 走保한 와지는 다 삼옥저 이외의 와지요.

四, 挹婁는 ‘오리’라. ‘오리’강반(江畔: 금 송화강)에 거하여 득명한 자니, 廣開疆土平安好太王의 비문에 쓰인 鴨盧가 그것이니 삼국지에 이를 숙신씨의 후예라 하였으나, 이는 그 소용 무기인 楛矢와 石弩가 左氏 國語의 記한 숙신씨 矢와 같은 고로 傅會한 말이니 숙신, 직신, 州愼 등은 다 고대 지나인이 조선을 譯傅한 것이며, 읍루는 조선 최북 미개한 일부 조선족으로 삼국사기와 당서에는 읍루를 말갈이라 하였으니, 말갈은 읍루의 별명인데 그 音義는 아직 고증치 못하였고,

五, 濊도 또한 “오리”강으로 득명한 자인데 다음의 오리강은 永平部의 灤河니, 예가 처음 난하 부근에 立國하였으니 逸周書에 令枝와 管子의 離枝가 다 예의 漢譯이며, 예가 차차 동천하여 두만강 내의 연안에 분포하였으니 韓人 長良이 力士를 구하던 滄海國과 漢武와 戰하던 南呂王의 창해국이 다 그것이요, 그 일부가 다시 남하하여 금 강원도 등지에 분포하였으니 삼국지의 예가 다 그것이다. 삼국사기에는 혹 읍루 즉 말갈을 예로 기한 곳도 많으니 고구려 태조본기에 率馬韓濊貊과 김인문전에 高句麗負固與濊貊同惡 등인데, 선유들이 다만 예란 字面만 좇아 그 계통을 구하므로 예의 家譜가 비상히 착란하게 되었으니 그 상세는 따로 專論이 있어야 할 것이라 여기므로 아직 중지한다.

右 五국 가운데 옥저 예 양국은 고구려에 복속한 자로 독립한 왕국이 아니니 五국의 지리강역은 선유의 고증이 대략 옳으나, 다만 북부여를 금 開原이라 함은 그 말엽에 遷居한 서울을 그 원 주둔지로 오인한 것이다. 5국이 다 후삼한과 그리 핍절한 관계가 적었고 가장 관계가 많았던 자는 낙랑 대방 양국이어늘 삼국지에는 이를 궐하였으니 次節에 약론코자 한다.

3.6. 후 삼한과 낙랑 대방의 관계[편집]

樂浪, 樂良, 平那, 平壤, 百牙 등을 모두 “펴라”로 독함이 가함은 이두문 해석법, 평양 패수고, 동서 양 낙랑고 등 편에 詳見하였거니와, 낙랑국이 당시 열국중 후삼한과 가장 핍절한 관계를 가졌음은 신라본기의 신라 초대와 백제본기의 백제 초대에 낙랑의 침구가 빈번한 사실에 거하여 명백하거늘 선유들이 중화 역대 사가의 붓에 속아 평안도를 할양하여 漢의 낙랑군을 만드는 동시에 낙랑국을 이동하여 강원도 춘천군에 특설한 것이다. 무엇에 의하여 춘천을 낙랑이라 하느냐 하면, 백제본기 온조 十三년의 東有樂浪이란 일구가 그 유일한 증거라 하나, 그러나 동서 양자 상환고에 보임과 같이 삼국사기에는 동서 양자가 많이 상환되어 있다. 낙랑국의 왕의성은 최씨니 그 기원을 확증할 수 없으나 대개 箕準, 衛滿의 際에 평안도를 할거하여 일시 雄强하여 그 뒤에 자주 남방의 신라 백제를 侵逼하더니 그 末王崔理가 고구려 왕자 호동을 狼林山의 森林(沃沮) 같은 곳에서 만나 그 용모의 미수함에 혼탁하여 맞아서 사위를 삼았다가 고구려에게 망하였으나 그 소속한 수십 소국이 그 宗國 최씨의 멸망을 한하여 고구려에게 不服하고 西方으로 漢을 통하여 이에 한의 세력이 낙랑에 침입됨이다.

그러나 한의 낙랑국에 대한 관계가 明의 海蔘威, 松篁營 등지 諸南衛와 같이 漢 관리의 족적이 이곳에 오지 아니하며 漢帝의 詔令이 이곳에 미침도 아니요, 낙랑군은 낙랑국에서도 천여 리를 더 가나 요동에 있는 군명이니, 한 무제가 위만을 멸하고 이상적 군현으로 진번 현도 임둔 낙랑 사 군을 만들려 하였으나 조선의 저항이 강경하여 동북에서 卒本扶餘(後來의 고구려)가 起하매 진번 현도 二 군이 공상이 되고 말고, 압록강 동에서 낙랑국 최씨가 기하매 낙랑 임둔 二 군도 공상이 되고 말았거늘, 遼東 界內에 낙랑 현도 등 四 군을 허설하여 사책을 장식할새 최씨 망후(고구려 대무신왕과 한 무제의 際) 낙랑 열국의 교통을 인하여 그 열국의 名을 가져다가 그 虛說한 낙랑군 가운데 허설한 낙랑 諸縣의 名을 만들고, 고구려와 고구려 속국인 蓋馬, 殷臺 등의 명을 가져다가 허설한 현도 三 현의 명을 만들었으며, 그뿐 아니라 최씨 망후 수십년만에 대방국이 長湍 등지에서 起하여 六, 七 소국의 맹주가 되어 비록 그 주권자의 성명과 國祚 長短은 사책에 보이지 않았으나,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에 백제왕의 처 寶菓의 父 대방왕이 現하였으며, 기림니사금 三년에 낙랑 대방 양국의 服한 사실을 記하였으니, 그 일시의 소왕국 됨이 명백한데, 漢家帝王들은 이를 따라 또 요동에 대방군을 虛設하였거늘 歷來 우리의 조선 사가들이 매양 조선 古記와 중국사의 충돌되는 사실을 억지로 조화하느라고 고기를 刪改塗抹함이 적지 아니한 중 낙랑의 사실은 피차 모순이 더욱 심하므로, 조화에 더욱 고심하여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과 교섭한 낙랑왕을 낙랑태수로 杜撰하였으며, 삼국유사에는 漢의 없는 州名의 平州와 없는 관명 都督을 내어 四郡二府說을 날조하여 此等의 망필이 많으므로 그 일반의 訛誤를 발견키에 더 곤란케 되었다. 여하간 중국사 중 조선 일을 가장 자세히 적은 삼국지에 낙랑 대방이 빠지므로 전후의 맥락이 끊기어 큰 결점이 되었다.

3.7. 후삼한과 북방 제국의 언어[편집]

당시에 가장 可驚할 사실은 현 조선 각 지방과 東三省 각지의 언어통일이다. 이제 삼국지에 거하면 고구려전에 言語諸事多與夫餘同이라 하며, 沃沮傳에 言語與句麗大同이라 하니 부여 옥저 구려 삼국의 지방은 곧 흑룡, 길림, 평안, 함경 등이니, 우 각지의 언어가 동일한 實證이요, 濊傳에 自謂與句麗同種其人性原慤少嗜欲有亷恥不請句麗言語法俗大扺與句麗同이라 한바 不請 二 자가 文理 不屬하므로 건륭제 흠정 삼국지의 고증에 請자를 諳의 誤라 하여 不暗句麗言語로 一구를 作하였으나 이는 臆斷이니, 후한서 조선열전이 삼국지의 것을 초록함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후한서 예전에는 與句麗同種言語法俗大抵相類其人性愚慤少嗜欲不請匄라 하였은즉, 삼국지의 不請句麗의 句는 匄의 誤며 麗는 疊載衍字니 그 본문이 不請匄言語法俗與句麗同일 것인데 不請匄가 一구요, 言語法俗句麗同이 一구며, 또 그러하여야 上文의 與句麗同種과 의사가 접속될 것이니, 예와 구려의 同言語임이 명백하고, 진한전에 비록 言語不與馬韓同이라 하였으나 이는 진한의 辰은 진인의 秦으로 위증하는 동시에 名國爲邦弓爲弧……有似秦人의 誣錄을 臆辨키 위하여 쓴 것이요 實錄이 아니며, 진한이나 마한에 臣智, 邑借 등 동일한 관명이 있고 다른 異言語의 證跡이 없으니 또한 동일한 언어이었던 것이다. 다만 낙랑 대방 兩傳이 궐하므로 삼한과 고구려 등의 중간연락이 끊어지며 따라서 낙랑 대방이 부여 고구려와의 언어관계가 어떠하였던지, 삼한이 낙랑 대방과 언어관계가 어떠하였던지 삼국지에는 기재가 없으나 신라의 樂曲般涉調를 백제인이 노래하며, 고구려의 來遠城과 백제의 無等山을 신라인이 노래하며, 호동이 고구려 궁중 미성년 동자로서 낙랑에 入하여 최왕의 여와 연애를 성취하며, 서동이 백제 궁중 一六세의 묘령 태자로 신라에 逃入하여 群童을 꾀어 노래를 짓고 선화공주를 유인한 사실 같은 것이 모두 삼한 낙랑 고구려 등의 언어가 서로 通曉되었음을 설명한다.

그러면 경상도의 신라, 경기 충청도 등의 백제, 강원도의 예, 평안도의 낙랑, 함경도의 옥저, 길림 봉천 흑룡 등의 부여와 고구려가 다 언어가 동일하던 실증이 있었다. 오직 읍루 일부가 언어가 좀 다르므로 후한서에 挹婁在東夷中言語獨異라 함이나, 그러나 읍루는 滿淸族의 先代니 만청과 조선의 고어가 상통되는 것이 많은즉 이것도 아주 懸殊한 언어는 아니었던 것이다. 설령 소부분인 읍루를 제외할지라도 고조선 全幅, 즉 금 조선 一三도와 금 關東 三省이 고대의 언어가 통일된 민족으로, 또 사책에 의하여 보면 그 관제와 풍속은 더욱 차이가 적었던 것이다. 영국사를 보면 一六세기까지도 런던과 웨일즈의 相近한 지방으로도 언어가 불통하여 웨일즈의 어느 항구에 정박한 상인이 계란을 사서 먹으려 하나 에그란 말을 알아 듣는 자가 없어 손으로 卵의 모양을 형용한 결과 감이 나오며 배가 나왔다는 笑話가 있으며, 그밖의 서양 열국이 모두 근세교육이 발달되기 전에는 一국내에 각종의 언어가 있어 지금까지도 그 惰習이 遺存한 나라가 많으며 중화는 문물과 정치가 통일된 지 수천년이나 지금에 동일한 省內에서도 언어 불통되는 곳이 많거든, 하물며 百里不同風, 千里不同俗이 하던 고대이랴. 조선은 고대에 적지 아니한 강토에 언어 풍속이 남보다 먼저 통일된 민족으로서, 망망한 고대에 수두 神木하에 神權政治的통일이 있은 이후에는 다시 정치통일이 행해지지 못하고 압록강 以西를 割棄하며, 게다가 또 매양 북방 대국의 문화와 위력을 자뢰(藉賴)한 연후에야 구구한 소통일(小統一)의 국가로 존재케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원인인가.

바. 朝鮮歷史上[조선역사상] 一千年來[일천년래] 第一大事件[제일대사건][편집]

1. 緖論[서론][편집]

민족(民族)의 성쇠는 매양 그 사상(思想)의 추향 여하에 달린 것이며, 사상 추향의 혹좌혹우(或左或右)는 매양 모종 사건의 영향을 입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 근세에 종교(宗敎)나 학술(學術)이나 정치(政治)나 풍속(風俗)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됨이 무슨 사건에 원인함인가. 어찌하여 효(孝)하며 어찌하여 충(忠)하라 하는가. 어찌하여 공자(孔子)를 높이며 어찌하여 이담을 배척하라 하는가. 어찌하여 태극(太極)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팔괘(八卦)를 낳는다 하는가. 어찌하여 신수(身修) 연후에 가제(家齊)요, 가제 연후에 국치(國治)인가. 어찌하여 비록 두통이 날지라도 관망(冠網)을 끄르지 않으며 티눈이 있을지라도 버선을 신는 것이 예(禮)이었던가. 선성(先聖)의 말이면 그대로 좇고 선대의 일이면 그대로 행하여 일세를 몰아 잔약·쇠퇴·부자유의 길로 들어감이 무엇에 원인함인가. 왕건(王建)의 창업인가, 위화도(威化島)의 회군인가, 임진(壬辰)의 왜란(倭亂)인가, 병자(丙子)의 호란(胡亂)인가, 사색(四色)의 당파인가, 반상(班常)의 계급인가, 문귀무천(文貴武賤)의 폐인가, 정주학설(程朱學說)의 유독(遺毒)인가. 무슨 사건이 전술한 종교·학술·정치·풍속 각 방면에 노예성을 산출하였는가. 나는 일언으로 회답하여 가로되, 고려 인종(仁宗) 13년(1135) 서경전역(西京轉役) 즉 묘청(妙淸)이 김부식(金富軾)에게 패함이 그 원인이라 한다. 서경전역의 양편 병력이 각 수만에 불과하며 전역의 수미(首尾)가 양개년에 불만하였지만, 그 전역의 결과가 조선사회에 영향을 끼침은, 서경전역 이전에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渤海) 멸망의 전역보다도, 서경전역 이후 고려 대 몽고의 60년 전역보다도, 몇갑절이나 돌과(突過)하였으니, 대개 고려 지(至) 이조 1천년간에 서경전역에 지날 대사건이 없을 것이다. 서경전역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사(王師)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그 실상은 이 전역이 즉 낭(郎)·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獨立黨) 대 사대당(事大黨)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이었던 것이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1(2)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다음에 전역 발생의 원인과 동기를 먼저 서술하고, 다음 전역으로 하여 생긴 영향을 논하려 한다.

2. 郎[낭]·儒[유]·佛[불] 三家[삼가]의 源流[원류][편집]

서경전역(西京戰役)의 원인을 말하려면 당시 낭(郎)·유(儒)·불(佛) 삼가의 정치(鼎峙)한 대세부터 논술할 필요가 있다.

(1) ‘낭(郎)’은 곧 신라의 화랑(花郞)이니, 화랑은 본래 상고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사 곧 그때에 ‘선비’라 칭하던 자인데, 고구려에서는 조의(皀衣)를 입어 ‘조의선인(皀衣仙人)’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미모를 취하여 ‘화랑’이라 하였다. 화랑을 국선(國仙)·선랑(仙郞)·풍류도(風流徒)·풍월도(風月徒) 등으로도 칭하였다. 『삼국사기』는 그 저자 김부식이 화랑을 구시배척(仇視排斥)하는 유교도 중에도 가장 협애엄혹(狹隘嚴酷)한 인물이므로, 본국 전래의 『선사(仙史)』『화랑기(花郞記)』같은 것은 모두 말살하고 다만 외국에까지 전파된 화랑의 1, 2 사실과 『화랑세기(花郞世紀)』의 1, 2구 곧 당인(唐人)이 지은 『신라국기(新羅國記)』『대중유사(大中遺事)』등에 쓰인 화랑에 관한 문구를 초록하여, 그 원류(源流)를 혼란하며 연대를 전도하고, 허다한 화랑의 미사(美事)를 매몰하였으니, 이 얼마나 가석한 일인가, 이에 관한 곡절은 타일에 전서(傳書)로 상론하려 하니 여기에는 약하거니와, 화랑은 곧 신라 이래 국풍파(國風派)의 중진이 되어 사회사상계의 일위를 점령하던 자이다.

(2) ‘유(儒)’는 공자(孔子)를 존봉하는 자니, 지난날에 사가들이 매양 존화주의에 취(醉)하여 역사적 사실까지 위조하여 가며 태고부터 유교적 교의(敎義)가 조선에 횡피(橫被)한 줄로 말하였으나, ‘비치’나 ‘불구레’로 왕을 부르며 ‘말치’나 ‘쇠뿔한’으로 관(官)을 이름하던 시대에는, 공자·맹자의 이름을 들은 이도 전국에 기인(幾人)이 못 되었을 것이다. 대개 유교는 삼국 중·말엽부터 그 경전(經傳)이 얼마큼 수입되어, 예(禮)를 강하며 춘추(春秋)를 읽는 이가 있어 뿌리를 박아, 고려 광종(光宗) 이후에 점차 성하여 사회사상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3) ‘불(佛)’은 인도로부터 중국을 지나 조선에 수입된 석가(釋迦)의 교니, 삼국 말엽부터 성행하여 조정이나 민간에서 일체로 숭봉하고, 불교(佛敎)가 비록 세사에 관계 없는 출세적(出世的) 종교이나 그 교도가 문득 정치상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이다. 당초에 신라 진흥대왕(眞興大王)이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만세의 책(策)을 정할 때, 각교의 경알(傾軋)을 염려하여 유·불 양교는 평등으로 대우하며, 화랑(花郞)은 삼교 교지(敎旨)를 포함한 자라 하여 각교의 상에 위(位)케 하며, 각 교도의 호상 출입을 허하였다. 그래서 신라사를 보면 전밀(轉密)[40]은 불교의 승(僧)으로 화랑 문노(文勞)의 제자가 되고, 안상(安詳)[41]은 화랑인 영랑(永郞)의 고제(高弟)로 승통(僧統)의 국사(國師)가 되고, 최치원(崔致遠)은 유·불 양교에 출입하는 동시에 또한 화랑도(花郞道)의 대요를 섭렵함이 있었었다. 그러나 세상사가 매양 시세를 따라 변천하고 사람의 기망(期望)대로 되지 아니하는데야 어찌하랴. 진흥대왕의 각교 조화책도 불과 수백년에 무효에 돌아가고 고려 인종 13년(1135)에 서경전역(西京戰役)이 일게 된 것이다.

3. 郎[낭]·儒[유]·佛[불] 三敎[삼교]의 政治上[정치상] 투쟁[鬪爭][편집]

고려 태조의 왕건(王建)이 불교로 국교(國敎)를 삼고 유교와 화랑도 또한 참용(參用)하더니, 그 후사(後嗣)에 이르러는 왕왕 중화를 존모하여, 광종(光宗)은 중국 남방인 쌍기(雙冀)를 써서 과거(科擧)를 설치하고 더욱 유학(儒學)을 장려할새, 만일 유교의 경전(經傳)을 통하는 중국인이 이르면, 대관을 시키며 후록(厚祿)을 주며 또 신하의 미려한 제택(第宅)을 빼앗아 준 일까지 자주 있었고, 성종(成宗) 때에 이르러는 최승로(崔承老) 등 유자(儒者)를 등용하여 재상을 삼아, 낭교도(郎敎徒)나 불교도(佛敎徒)는 모두 압박하여 오직 유교뿐을 존상(尊尙)하기에 이르렀다. 불교는 원래 출세(出世)의 교일뿐더러 어느 국토에 수입되든지 매양 그 나라 풍속·습관과 타협하기를 잘하고 타교를 심히 배척하지 않지만, 유교는 그 의관·에악·윤리·명분 등으로 그 교의 중심을 삼아 전도(傳道)되는 곳에는 반드시 표면까지의 동화를 요구하며 타교를 배척함이 비상히 격렬하므로, 이때의 유교 장려는 낭파(郎派)와 불파(佛派)를 불평히 여길 뿐 아니라 곧 전국 인민의 불락(不樂)하는 바이었었다. 이런 관계는 대개 공자 『춘추(春秋)』의 ‘필즉필삭즉삭(筆則筆削則削)’ 주의를 존봉하는 사가(史家)들의 삭제를 당하여 상세한 전말은 기술할 수 없으나 불명 불비한 사책(史册) 속에 끼친 1, 2 사실을 미루어 그 전체를 대략 상상할 수 있다. 『고려사』와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의거하매, 성종 12년(993)에 거란대장 소손녕(蕭遜寧)이 입구(入寇)하여, 북계(北界)를 공격하며 또 격문을 보내어 80만병이 장차 계속하여 이르리라 통갈(恫喝)하니, 거조(擧朝)가 황겁하여 서경(西京) 이북을 할양(割讓)하여 걸화(乞和)하자는 의론이 일어났 는데, 그때 홀로 서희(徐熙)·이지백(李知白) 양인이 있어 그 비계(非計)임을 박론(駁論)하여, 이지백은 주(奏)하기를 “선왕의 연등(燃燈)·팔관(八關)·선랑(仙郞) 등 회(會)를 회복하고 타방의 이법(異法)을 배척하여, 국 가 태평의 기(基)를 보(保)하며 신명(神明)에 고한 연후에, 싸우다가 불승(不勝)하면 화함이 늦지 않다” 하였다. 이는 이지백이 성종의 중화 문물만 낙모(樂慕)하여 국민 감정에 어긋남을 기(譏)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지백이 가리킨 ‘선왕(先王)’은 고려의 선대요 ‘선랑회(仙郞會)’는 화랑회니, 태조 이래로 대개 신라의 화랑회를 중흥하여 연등·팔관 등회와 병행하다가 성종이 유교를 독신(篤信)하고 화풍(華風)을 숭상하여 낭(郎)·불(佛) 양가의 회를 혁파하였던 것이 명백하 다. 이제 외국의 입구(入寇)를 당하여, 같이 숭중(崇重)의 예대(禮待)를 받언 유교의 제신들이 외구(外寇)를 물리칠 계책은 추호만치도 안출치 못하고 도리어 할지매국(割地賣國)의 거(擧)로 국왕을 권하는 고로, 이지백의 차주(此奏)는, 제일로 유신(儒臣)의 유약(儒弱)을 열매(熱罵)코, 제이로 낭·불 양가를 위하여 원(寃)을 명(鳴)하고, 제삼으로 국풍파(國風派)를 대표하여 중화 숭배자를 질타함이니, 여기에서 낭·불 양가의 국풍파들이 유교도에 대한 불평의 온양(醞釀)이 이구(已久)함을 볼 수 있다. 이 뒤로부터 조신(朝臣)의 정론자(廷論者)가 드디어 양파로 나뉘었으니, 낭가(郎家)는 매양 국체상에는 독립·자주·칭제·건원(建元)을 주장하며, 정책상에는 흥병북벌(興兵北伐)하여 압록 이북의 구강(舊疆)을 회복함으 역창(力唱)하고, 유가는 반드시 존화주의의 견지에서 국체는 중화의 속국 됨 을 주장하고, 따라서 그 정책은 비사후폐(卑辭厚幣)로 대국을 섬겨 평화로 일국을 보(保)함을 역창하여, 피차 반대의 지위에 서서 항쟁하였었다. 예를 들면 현종(顯宗) 말년에, 발해(渤海)의 중흥을 보조하여 거란(契丹[글란])을 쳐서 구강(舊疆)을 회복하자는 곽원(郭元)이 있는 반면에, 본토를 근수 (謹守)하여 생민을 보하자는 최사위(崔士威) 등이 있으며, 덕종(德宗) 초년에, 압강교의 훼철(毁撤)과 구류된 아방 사신의 회환을 거란에게 요구하다 가 불청하거든 절교하자는 왕가도(王可道) 등이 있는 반면에, 외교를 근신(謹愼)히 하여 병화가 없도록 하자는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이 있으며, 기 타 여조 역대 외교에 매양 자존의 경론(硬論)을 발한 자는 거의 낭파나 혹 간접으로 낭파의 사상을 받은 자요, 비사(卑辭)와 후폐(厚幣)의 사대론을 집 한자는 대개 유교도들이었고 (執) , 불교는 자체의 성질상 정치 문제에 관하여 낭가와 같이 격렬히 계통적 주장을 가지지는 아니하였으나, 대개는 낭 가와 접근하였었다. 팔관회(八關會)를, 『삼국사기』에는 불씨(佛氏)의 법회(法會)라 하고,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한시(漢時)의 대포(大酺)와 같은 가례(嘉禮)의 경회(慶會)라고 하고, 근자 이능화(李能和)의 저한 『불교통사(佛敎通史)』에는 『고려사』태조 천수(天授) 원년(918)에 “設八關會…… 其四仙樂部 [기사선악부]”와 태조 유훈(遺訓)에 “八關[팔관] 所以事天[소이사천] 及山川龍神[급산천용신]”과 의종(毅宗) 22년(1168)에 “自今[자금] 八關會 [팔관회] 豫擇兩班家產饒足者[예택양반가산요족자] 定爲仙家[정위선가]”등의 말을 인용하여, 팔관회를 사선(事仙)의 회로 불사(佛事)를 겸섭(兼攝) 한 자라 하였다. 그러나 ‘사선(四仙)’은 『삼국유사』에 의거하면 화랑의 사성(四聖) 영랑(永郞)·부례랑(夫禮郞) 등의 존칭이요, ‘선가(仙家)’는 그 상하문을 참조하여 또한 화랑을 가리킨 자인데, 대개 낭(郎)·불(佛) 양가의 관계가 접근한 이래로 낭가의 소도대회(蘇塗大會)에 불가(佛家)의 팔관계(八關戒)를 쓴 것이니, 팔관을 대포(大酺)의 유라 함도 망단이거니와 팔관의 선가(仙家)를 지나 선교(仙敎)의 선(仙)으로 인정함도 대오(大誤)다. 고려 초·중엽에는 화랑이 그 사상으로만 사회에 전할 뿐 아니라 실재 그 회가 존속하여 왔으므로, 화랑을 반대하는 유가에서도 그 명칭과 의식을 많 이 도취(盜取)하였으니, 그 1, 2의 예를 들면 최공도(崔公徒)·노공도(盧公徒) 등은 화랑의 원랑도(原郞徒)·영랑도(永郞徒) 등을 모방한 것이며, 학 교(學校)의 청금록(靑衿錄)은 화랑의 풍류 황권(風流黃券)을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사가(史家)의 삭제를 당하여 화랑의 사적이 망매(茫昧)하니 어찌 차탄할 바가 아니랴.

4. 睿宗[예종]과 尹瓘[윤관]의 대 女眞戰爭[여진전쟁][편집]

고려 일대에 화랑의 사상을 실행하려던 군신 양인이 있으니, 예종(睿宗)과 윤관(尹瓘)이다. 예종본기(睿宗本紀)에 의거하면 그 11년(1116) 4월에 “四仙之跡[사선지적] 所宜加榮[소의가영]…… 國仙之事[국선지사] 比來仕路多門[비래사로다문]…… 宜令大官子孫[의령대관자손] 行之[행지]”의 조(詔)를 내렸다. 예종이 만일 화랑의 중흥에 동경하는 인군(人君)일진댄, 어떤 까닭으로 그 즉위한 지 10여년 만에야 비로소 영랑(永郞)·부례랑(夫禮郞) 등 4성의 유 적을 가영(加榮)하고 국선(國仙)의 사로(仕路)를 열었을까. 본조(本調)는 서경 신궐(新闕)에서 내린 것인데, 서경 신궐 창작한 사실이 예종본기에는 불견하였으나, 오연총전(吳延寵傳)에 의거하면 예종이 참(讖)에 의하여 서경 신궐을 세우므로 연총(延寵)이 간하나 불청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곧 여 진 정벌 이전의 일이니, 그런즉 서경 신궐의 창작은 여진 정벌 이전의 일인 동시에 화랑 중흥책과 밀절(密切)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또한 여진 정벌과 관련된 것이니, 당시 사책(史册)에 반드시 상세한 기록이 있었을 것이나, 후래 김부식파 사가가 서경 신궐의 창작이 묘청 천도계획의 선구이므로 이를 삭제하는 동시에, 그의 구시(仇視)하는 화랑에 관한 기록도 물론 존류 (存留)치 아니하였을 것이다. 11년 조칙(詔勅)의 국선 운운은, 저들의 화랑전고(典故)의 무식한 사가들이 국선(國仙)이 곧 화랑(花郞)임을 알지 못하 고 무의중에 삭제치 아니함이니, 이는 마치 『여지승랑(輿地勝覽)』에 ‘선(仙)’을 도교(道敎)의 ‘선’으로 오인하여 다수한 화랑의 유적(遊跡)을 존류함과 일반이다. 여하간 예종은 화랑사상을 가진 인군으로 여진 정벌도 이 사상을 실행함인 것은 명백하며, 윤관은 신라 화랑 김유신(金庾信)을 숭배하여 위국기도(爲 國祈禱)의 충성과 6월빙하(六月氷河)의 열신(熱信)을 가진 인물로, 예종과 동의하여 여진을 정벌하여 북변을 개척하고 9성(九城)을 건설하였다. 9성은 『고려사』에 의거하면, 구사(舊史)에는 영(英)·웅(雄)·복(福)·길(吉)·함(咸)·의(宜) 6주(州)와 공험(公嶮)·통태(通泰)·평융(平戎) 3진(鎭)이 라다가, 철환(撤還)할 때의 의주(宜州)와 공험(公嶮)·평융(平戎) 2진이 없고 숭녕(崇寧)·진화(眞化)·의화(宜化) 3진이 돌현(突現)함이 가의(可疑) 며, 또 의주성(宜州城)은 정주(定州)[42] 이남에 있은즉 여진을 격축하기 이전에도 쌓은 자라 하여 9성의 수목(數目)을 의심하였으며, 함주(咸州)는 지금 함흥(咸興)이요 영주(英州)·웅주(雄州)는 길주(吉州)에 합병한 자요 복주(福州)는 지금 단천(端川)이요, 의주(宜 州)는 지금 덕원(德源)이라 하고, 공험진·통태진·평융진 등의 지계를 명기치 못하여, 9성 거리의 원근을 모호히 하여, 지금껏 사가의 쟁송하는 바 가 되었으나, 이 따위 구구한 문제는 아직 차치(且置)하고 9성의 건설과 철환한 사실의 전말이나 약론코자 한다. 여진(女眞)은, 삼한시대의 예맥(濊貊)이요 삼국시대의 말갈(靺鞨)이니, 고구려가 망하매 발해(渤海)에 속하고, 발해가 망하매 고려에 속하였으나, 또 일변으로는 거란(契丹)을 섬기는 고로, 『문헌통고』에 “女眞[여진] 臣事契亂[신사계란] 奴事高麗[노사고려]”라 하고, 예종 4년(1109) 여진 사자의 말에도 “女眞[여진] 以大邦[이대방][43] 爲父母之邦[위부모지방] 朝貢不絶[조공부절]”이라 함이다. 예종의 부 숙종(肅宗)이 여진의 점점 강대함을 꺼려 이를 정복하려 하였으나, 다만 헌종(獻宗)의 유당(遺黨)이 내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흥병(興兵)을 주저하였다가, 및 그 죽 을 때에 여진 정복할 밀지(密旨)를 예종과 윤관에게 내리었었다. 예종과 윤관이 대병 17만으로 여진을 정벌하여, 누천여급을 참하고 불과 수삭의 내에 9성의 땅을 얻었다. 고려 지리지에 두만강 외 7백리 선춘령(先春嶺) 하에 : 至此爲[지차위] 高麗之境[고려지경]“ 7자를 새긴 윤관의 비가 있다 하니, 윤관의 개척이 이조 김종서(金宗瑞)보다 원과(遠過)함을 보겠다. 윤관의 성공(成功)은 낭도(郎徒)의 흔약(欣躍)하는 바이나 유도(儒徒)의 불락(不樂)하는 바이다. 출병의 처음에도 벌써 유신(儒臣) 김연(金緣) 등이 상소하여 출병을 반대하더니, 및 9성을 성치한 뒤에 여진이 그 실지(失地)를 회복코자 번갈아 침입하니, 아군이 비록 연승하나 수년 동안에 인부의 징발과 재물의 손해가 적지 아니한 것은 면치 못할 일이라, 유도들이 더욱 이를 기회삼아 공박하니, 예종이 마침내 초지(初志)를 견수하지 못하고 9성 을 철(撤)하여 여진에게 환귀하였다. 『금사(金史)』에 살피면, 이때 여진군의 참모장 된 자는 금 태조(金太祖)다. 거란은 점점 쇠약하고 여진이 발흥하는 때니, 만일 예종이 초지를 견수 하여 일시의 곤란을 잊고 윤관을 전임(傳任)하였더라면, 고려의 국세가 흥익(興益)하여 후세에 외국의 피정복자 될 치욕을 면할 뿐 아니라, 곧 거란 을 대신하여 일어난 자가 금(金)이 아니요 고려일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여진은 9성 반환의 은(恩)을 감(感)하여, 자금(自今)으로 세세 자손이 세공 (世貢)을 수(修)하고 와력(瓦礫)으로라도 고려 경상(境上)에 던지지 아니하겠다고 맹서하였다. 이 뒤에 여진이 강대하여 대금국(大金國)이 되매, 비록 고려에 바치던 조공은 폐하였으나, 금 일대에 한번도 고려를 침입한 일이 없엇으니, 이는 윤 관 일전의 공이다. 윤관의 때에 사필을 잡은 자가 윤관을 구시(仇視)하던 김부식의 도당이었으니, 윤관의 전공을 그대로 적지 아니하였으리라. 이것 도 독사자(讀史者)의 알아둘 바이다.

5. 妙淸[묘청]과 尹彥頤[윤언이]의 稱帝北伐論[칭제북벌론]의 발생[편집]

전술과 같이 윤관(尹瓘)이 비록 금 태조(金太祖)를 전승하였으나, 고려의 유신들이 이를 반대하여 더 진취함을 막을 뿐 아니라 기득한 9성까지 환귀하더니, 금 태조가 이에 고려와 청화(請和)하고 서북에 전력(專力)하여, 제 위(帝位)에 즉위한 지 10년 안에 거란을 멸하고, 만주로부터 중화의 양자강 이북을 병탄하여 대금제국(大金帝國)을 건설하였다. 생면부지의 원처 사람은 졸지에 흥하거나 망하거나 이를 심상히 볼 뿐이지만, 자가 행랑(行廊)의 하인배가 돌연히 천상인이 된다 하면, 이를 볼 때 신경의 앙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는 거의 보통의 인정이다. 수천년래 중화대륙을 차지하는 자가 악마 같은 진시황이거나, 비적괴수(匪賊魁首)의 한 고조(漢高祖)이거나, 야만종족의 거란 태조이거나, 모두 그다지 조선인의 두뇌를 자극할 것이 없었으나, 오직 금 태조가 중국 황제 됨에 이르러는 거의 예시(睨視)의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금 태조가 원래 고려에 조공하던 여진종으로, 더구나 윤관에게 패하여 9성 등 천여리 땅을 빼앗기던 만추(蠻酋)로서, 일조에 중국 황제가 되어 작일의 정복자인 고려 군신을 도리어 압 박하기에 이르니, 고려의 군신이 어찌 분개치 않을 것인가. 예종이 9성의 철환을 후회하는 동시에, 국선(國仙)의 중흥을 장려하며, 서경(西京)의 이도를 계획하며, 또 성종 이래의 비사후폐적(卑辭厚幣的) 외교 정책을 고치고, 왕왕 금 태조에게 보내는 국서 중에 “여국(汝國)의 원(源)이 오토(吾土)에서 발하였으니 여(汝)는 원래 오국의 속국”이니 하는 문구 로, 금국 군신의 노를 촉하여 하마하마 국교상 대결렬이 발생케 된 때가 허다하였건마는, 금 태조는 전일의 맹약에 구속되어 거연히 고려를 침범치 않 고, 예종은 9성의 역(役)에 제신의 반대를 (懲)하여 경홀히 금과 대항치 못하므로, 피차 평화를 유지함이러니, 및 예종이 승하하고 인종(仁宗)이 즉위 하매, 낭가(郎家)와 불가(佛家)와 기타 무장과 시인배(詩人輩)가 분기하여 칭제코 북벌키를 강경히 주장함에 이르렀다. 칭제북벌론(稱帝北伐論)의 영수는 첫째는 윤언이(尹彥頤)니, 윤언이는 곧 윤관의 아들로 유일한 낭가의 계통이다. 본론의 영수됨이 필연코 당연한 일 이나, 윤언이가 칭제북벌론을 주장할 때의 상소와 건의는 『고려사』본전(本傳)에 모두 삭제를 당하고 오직 서경전역 후 자명소(自明疏)만 게재되 어, 후인으로 하여금 윤언이가 칭제북벌론자의 일인임만 알고 그 상세는 알지 못하니 어찌 가석치 않은가. 둘째는 묘청(妙淸)이니, 묘청은 서경 승도(僧徒)로, 도참(圖讖)의 설을 부회(傅會)하여 서경에 천도하고 제호(帝號)와 연호(年號)를 칭한 후, 북으로 금을 정벌하자는 자이다. 셋째는 정지상(鄭知常)이니, 정지상은 7세에 “何人把新筆[하인파신필] 乙字寫江波[을자사강파]”의 「강부(江鳧)」시를 읊던 신동으로 당시에 천명 (擅名)하던 시인이요, 근세 임백호(林白湖)와 같이 강토의 확대를 몽상하던 인물이다. 이 3인이 칭제북벌(稱帝北伐)에 대한 의견은 동일하나, 다만 묘청과 정지상은 서경천도까지를 주장하였고, 윤언이는 거기 부동의하던 바이다. 묘청 전에는 묘청·백수한(白壽翰)·정지상(鄭知常) 3인이 다 서경인이므로 서경인 김안(金安) 등이 존봉하여 ‘서경삼성(西京三聖)’이라 칭하였다 하나, 백수한은 묘청의 제자라 따로 일파를 칠 것이 없어 이를 거론치 아니한다.

6. 妙淸[묘청]의 狂妄[과망]한 擧動[거동] ── 西京[서경]의 擧兵[거병][편집]

『고려사』에 묘청을 요적(妖賊)이라 하였다. 이는 묘청이 음양가(陰陽家)의 풍수설(風水說)로 평양 천도를 창(唱)함에 인함이라 한다. 대개ㅐ 신라 말엽부터 평양 임원역(林原驛)은 대화(大華)의 세라, 여기에 천도하면 26국이 내조(來朝)하리라는 비결(秘訣)이 유행하였었다. 아마 고 구려가 망하고 평양 구도가 황폐하매, 신라의 비열한 외교를 분히 아는 불평가들이 이 일단의 비결을 조작하여, 거연히 세간의 일종 미신이 되었던지 도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 헌덕왕(憲德王) 14년(822)의 김헌창(金憲昌)과 17년의 김범문(金梵文)이 모두 평양 건도에 탁(託)하여 반병(叛兵)을 일으켰으며, 그 뒤 궁예(弓裔)도 이상의 신도(新都)는 평양이었으며, 고려 태조도 그 ‘훈요(訓要)’에 평양은 지덕(地德)의 근본이라 하여 후왕의 사 중순주(四仲巡駐)를 권하였으며, 혜종(惠宗)은 아주 평양에 굉대한 궁궐을 짓고 도읍을 옮기려 하였으며, 예종도 전술한 바와 같이 평양에 신궐을 창 작하였다. 이같이 평양 건도가 역대 왕조의 기도하던 바이나, 기실은 평양에 천도하면 북구(北寇)에 밀이(密邇)하니, 만일 적기(敵騎)가 압록강을 건 너는 때에는 도성이 먼저 병화의 요충(要衝)이 되므로, 중앙의 근본이 동요하여 한번의 소좌(少挫)만 잊어도 전국이 진경(震驚)할 것이다. 평양은 실로 당시 도성 될 지점에 만만 불의(不宜)하거든, 칭제북벌론자(稱帝北伐論者)가 매양 평양 천도를 전제로 함은 비상한 실책이니, 유언이 가 전자를 주장코 후자에 부동의함은 과연 탁견이라 이를 것이다. 그러나 비결과 풍수설로 평양 천도를 주함은 묘청으로써 비롯함이 아니니, 이로써 묘청을 요적(妖賊)이라 함은 너무 억울한 판결이다. 묘청이,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능히 지휘한다 이르며, 대동강저에 유병(油餠)을 빠뜨리고 신 룡(神龍)의 토연(吐涎)이라 하여 백관의 표하(表賀)를 청함이, 어찌 요적의 일이 아닐까 그러나 . 이러한 일은 고려 이전 상유(常有)한 일이니, 고대에 종교상·정치상 인물들이 매양 망연한 천신을 의탁하여 군중을 농락하던 것이라, 이것으로 묘청을 죄함도 또한 공언(公言)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어 찌하여 묘청을 광망(狂妄)타 하였는가. 예종본기나 묘청전으로 보면, 다시 칭제북벌론에 경향(傾向)한 자가 거의 전국인의 반이 지나며, 정치세력의 중심인 군주 인종도 10의 9분은 묘청을 믿었다. 비록 김부식·문공유(文公裕) 등 기개인의 반대자가 외구(外寇)의 형세를 성히 포장하며 그 전통적 사대주의의 보루(堡壘)를 고수하려 하나, 이를 공파함이 그다지 어려운 일 아니거늘, 이제 이같이 성숙한 시기(時機)를 선용치 못하고 문득 김부식의 일소(一疏)로 인종이 천도의 계를 정지함 을 노하여, 서경에서 병을 일으키고 ‘천견충의군(천견충의군)’이라 자칭하며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평양을 상경(上京)으로 정하고, 인종에게 상경 신궐로 이어하여 그 국호, 그 연호를 받기를 구하니, 그 시대 인신의 예로 그 얼마나 발호(跋扈)한 행동인가. 이같이 발호한 행동을 취할 것 같으면 반드시 그 내부가 공고하고 실력이 웅후(雄厚)한 뒤에 발표할 것이 아닌가. 묘청의 거병한 밀모(密謀)에 윤언 이와 정지상이 공참치 못하였을뿐더러, 묘청의 심복 제자인 백수한(白壽翰)까지도 송도에 있어 진행의 내막을 막연히 알지 못하고, 그 공모자가 불과 서경에 우류(偶留)하던 병부상서 유참(柳旵),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뿐이요, 돌연히 서경병마사(西京兵馬使) 이중(李仲)을 집수(執囚)하 고 그 병을 탈취하여 거사하였으니, 인종이 비록 유약하나 어찌 대위국 황제의 허명(虛名)을 탐하여 발호한 인신의 근거지인 서경으로 즐기어 이어하 였을 것인가. 윤언이가 비록 묘청의 칭제북벌론에는 동일하던 일인이나, 어찌 이같이 광망(狂妄)한 거동에야 일치할 수 있을 것인가. 윤언이의 일파는 고사하고 묘청의 친당인 문공인(文公仁) 등도 거병의 보가 처음 송도에 이르렀을 때에는 거의 이 일의 절무(絶無)를 믿음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실이 차차 적확하여 오매, 칭제북벌론자는 모두 와해되고 반대자 등이 작약(雀躍)하여 김부식이 원수로 묘청 토벌의 길에 오르며, 정지상·백수한 등은 출병 전에 김부식에게 피살되며, 윤언이는 묘청과 같은 칭제북벌론자임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의 막하가 되어 묘청 토벌자의 일인이 되게 되었다. 정지상은 시재(詩才)가 고금에 절륜(絶倫)하여 문예가의 숭배를 받다가 김부식에게 죽었으므로 후래의 시인들이 불평히 여기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 이 유행한다. 그 한둘을 들겠다. 김부식이 정지상의 “琳宮擊磬罷[이미궁격경파] 天色淨琉璃[천색정유리]” 양구를 달라다가 지상이 허치 아니하므로 살해하였다고도 하며 , 혹은 정지상의 “그대가 술 있거든 부디 나를 부르소서.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또한 청하오리. 그래서 우리의 백년 세월을 술 과 꽃 사이에서” 이 시조(時調) 1수를 지었더니, 김부식이 보고 이놈이 시조도 나보다 잘한다 하여 살해하였다고도 한다. 이와 같은 문예의 시기(猜 忌)도 한 원인이 될지 모르나 대체는 김부식은 사대주의의 괴(魁)요 정지상은 북벌파(北伐派)의 건장(健壯)이니, 만일 정지상을 살리어 그 작품의 유 행을 허한다면 혹 그 주의가 부활할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김부식으로서 정지상을 살해한 최대의 원인이다.

7. 妙淸[묘청]의 敗亡[패망]과 尹彥頤[윤언이]의 末路[말로][편집]

인종 13년(1135) 정월에 묘청이 서경에서 거병하매, 인종이 김부식으로 토역원수(討逆元帥)를 배(拜)하고 김정순(金正純)·尹彥頤[윤언이] 등이 부 (副)가 되어 중군(中軍)을 이끌고, 김부의(金富儀)·김단(金旦) 등은 좌우 양군을 거느리어 왕정(往征)할새, 불과 수십일에 조광(趙匡)이 묘청을 참하 여 걸항(乞降)하거늘, 광(匡)의 사자 윤첨(尹瞻)을 하옥하니, 광이 다시 항수(抗守)하여 그 익년 12월에야 비로소 성을 함락하고 조광을 참하였다. 처음에 김부식이 행군하는 중로에 보사역(寶山驛)에 이르러 군사회의를 열고 공격 완급의 가부를 제장에게 물었다. 윤언이 등 제장은 모두 급공(急 攻)을 주장하나, 김부식은 묘청의 흉모(凶謀)를 회포(懷抱)함이 5, 6년인즉 그 수비가 완고(完固)하니 기개일간에 공발(攻拔)할 바 아니라 하여 완공 (緩攻)을 정하였다. 그러나 묘청은 실상 음모를 쌓아온 것이 아니요, 다만 그 광망한 생각에, 서경을 의거하고 거병하여 인종의 천도를 촉구하면 김부식 등 사대주의파는 자연 경산(驚散)하고 인종은 하릴없이 내림(來臨)하리라 한 것이 의외에 토벌군이 이르매 그 도당의 묘청에 대한 신망이 돌락(突落)하여 드디어 묘청 을 참하여 걸항함이니, 이는 사실이 명증하는 바이다. 조광 등이 묘청을 참한 뒤에 조정의 사의(赦意) 없음을 보고 이에 창졸히 반하여 거전(據戰)하 였으니, 김부식이 만일 윤언이를 신용하였으면 시일간에 토평(討平)하였을 것이거늘, 부식이 종시 언이를 시의(猜疑)하여 완공(緩攻)의 계를 쓰다가 말내(末乃)에 양년에 걸치도록 승산이 없어, 안으로 인종의 의구(疑懼)가 적지 않고 밖으로 금국 내침(金國來侵)의 염려가 급하매, 언이의 말을 들어 공인(工人) 조언(趙彥)이 만든 석포(石砲)로 성문을 부수고 화구(火毬) 던지어 함성(陷城)의 공을 아뢰었으니, 『고려사』의 묘청·윤언이·김부식 3 전 을 상찰하면 본 (三傳) , 전역의 성공은 모두 윤언이의 계책에서 나옴이요 김부식은 촌공(寸功)이 없음이 명백하다. 윤언이가 묘청과 동일한 칭제북벌론자로서 이제 도리어 묘청 토벌에 진력하니, 주의를 저버림이 아닌가. 그 러나 이는 묘청의 허물이요, 윤언이의 책임이 아니라 할 것이다. 묘청의 행동이 광망하여 그 동당 정지상 등을 속이어 사지에 빠지게 하고, 기타 모든 동주의자를 진퇴양난의 지경에 서게 하여 칭제북벌의 명사까지도 세인의 기휘(忌諱)하는 바가 되게 하였으니, 윤언이가 비록 천재인들 어찌 할 것인가. 그러나 개선 후에 김부식이 윤언이를 정지상의 친우라 하여 구살(構殺)코자 하여, 전공의 상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6개년 원적 (遠謫)에 처하였다가 간신히 생환하였다. 윤언이의 자명표(自明表)에 “在壬子年西幸時[재임자년서행시] 上請立元稱號[상청입원칭호]…… 嫛是立元之稱[예시입원지칭] 本乎尊主之誠[본호존주 지성] 在我本朝[재아본조] 有太祖[유태조]·光宗之故事[광종지고사] 稽諸往牒[계제왕첩] 雖新羅[수신라]·渤海以得爲[발해이득위]”라 하여, 입원(立 元)[44] 일사만 변명하고 칭호(稱號)[45]의 일건은 묵과하였으니, 칭제북벌의 논자로 사대주의의 조정에 서 구활(苟活)하려 하니, 그 신세의 거북함과 언론의 부자유함을 상견(想見)할 수 있다. 윤언이전(尹彥頤傳)에 의거하면, 윤언이가 만년에 불법을 혹호(酷好)하여 승 관승(貫乘)과 공문우(空門友)가 되어, 관승이 일찍 일포단(一蒲團)을 제 작하여 언이와 누구든지 양인 중 선사자(先死者)가 포단을 쓰기로 상약하였더니, 일일은 언이가 관승을 찾고 돌아오매 관승이 포단을 보내었거늘, 언 이가 웃으며 “사(師)가 약(約)을 부(負)치 아니한다” 말하고 일서를 벽에 써 가로되 “春復秋兮[춘복추혜] 花開葉落[화개엽락] 東復西兮[동복서혜] 善養眞君[선양진군] 今日途中[금일도중] 反觀此身[반관차신] 長空萬里[장공만리] 一片閑雲[일편한운]”이라 하고 포단에 앉아서 영면하였다. 그 벽에 쓴 글이 표면으로는 일개의 불게(佛偈)와 같으나, 기실은 주의상 실패한 분노가 언외에 넘친다. ‘一不而殺六通[일불이살육통]’은 천하의 지통(至痛) 한 일이다. 묘청이 비록 그 행동이 광망하였으나, 그 주의상 불후(不朽)의 가치는 김부식 유에 비할 자가 아니거늘, 전사에 폄사(貶辭)만 있고 살린 말은 전무 하니, 이는 공론이 아니다.

8. 本戰役後[본전역후] 『三國史記[삼국사기]』編撰[편찬][편집]

묘청이 패망하여 서경 전역이 결말되매, 김부식이 드디어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輸忠定難靖國賛化同德功臣) 휘호(徽號)에 개부의동삼사 검교태 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성서사 겸이예부사(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尚書事兼吏禮部事)의 영직(榮職)에 또 집현전태학사 감수국사의 문임(文任)을 맡아, 고려 당시의 국사(國史)를 감수하는 동시에 나(羅)·여(麗)·제(濟)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선유들이 말하되, 삼국의 문헌이 모두 병화에 없어져 김부식이 고거(考據)할 사료(史料)가 부족하므로 그의 편찬한 『삼국사기』가 그렇게 소루함이 라 하나, 기실은 역대의 병화보다 김부식의 사대주의가 사료(史料)를 분멸(焚滅)한 것이다. 부식의 때에 단군(壇君)의 『신지(神誌)』나 부여(扶餘)의 금간옥첩(金簡玉牒)이나 고구려의 『유기(留記)』나 『신집(新集)』이나 백제의 『서기 (書記)』나 거칠부(居柒夫)의 『신라사(新羅史)』같은 것이 남아 있었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제 『삼국사기』인용서목으로 보면 『해동고기(海東古記)』『삼한고기(三韓古記)』『고려고기(高麗:〔高句麗〕古記)』『신라 고사(新羅古事)』『선사(仙史)』『화랑세기(花郞世紀)』등은 다 부식의 급견(及見)한 것이며,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여 신라와 발해가 병치한 지 불 과 2백년 만에 고려 왕씨조가 되었은즉, 여·제·나·발의 고비(古碑) 유문과 민간 전설이 많이 유전(遺傳)되었을 것인즉, 이것도 모두 채집할 수 있 을 것 아닌가. 그뿐 아니라, 김부식 이후 5, 5백년 만에 외국인의 손으로 저작한 『성경지(盛京志)』『직례통지(直隷通志)』등서에도 고구려 대 수(隋)·당(唐) 전쟁의 고적인 고려성·고려영·개소둔(蓋蘇屯)·당태종함마 처(唐太宗陷馬處)·황량대(謊糧臺) 등이 다수히 기재되었은즉, 부식의 당시에는 사료될 만한 고적이 더욱 풍부하였을 것이니, 부식의 요(遼)·송 (宋)에 왕래할 때에 마음대로 수습할 수 있을 것이며, 부식 이후 수백년 곧 고려 말엽에 저작한 『삼국유사』에는 이두문의 시가를 다수 게재하였고 이조 초엽에 편찬한 『고려사』에는 고려의 「내원성(來遠城)」과 백제의 「무등산(無等山)」[46]을 그 의의를 해독한 증거가 있은즉, 부식의 때에는 이보다 풍부한 삼국의 국시(國詩)인 이두문의 시가를 망라할 수 있을 것이건만, 이는 다 부식의 구수시(仇讎視)하는 바요 채록코자 하는 사료가 아니다. 어떤 까닭 이냐 하면, 부식의 이상적 조선사는

① 조선의 강토를 바싹 죽이어, 대동강 혹 한강으로 국경을 정하고,

② 조선의 제도·문물·풍속·습관 등을 모두 유교화하여 삼강오륜(三綱五倫)의 교육이나 받고,

③ 그런 뒤에, 정치란 것은 오직 외국에 사신 다닐 만한 비열한 외교의 사령(辭令)이나 감인(堪任) 할 사람을 양성하여, 동방군자국의 칭호나 유지하려 함이다.

그러나 부식 이전의 조선사는 거의 부식의 이상과 배치되어, 강토는 요하를 건너 동몽고까지 연접한 때가 있으며, 사회는 낭가(郎家)의 종교적 무사풍을 받아 공· 맹의 유훈(遺訓)과 다른 방면이 많으며, 정치계에는 왕왕 광개토왕(廣開土王)·동성대왕(東城大王)·진흥대왕(眞興大王)·사법명(沙法名)·을지문덕 (乙支文德)·연개소문(淵蓋蘇文)같이 외국과 도전하는 인물이 간출(間出)하여, 부식의 두통거리가 한둘뿐만이 아니러니, 이제 천재일시(千載一時)로 서경전역의 승리한 뒤를 기회삼아 그 사대주의를 근거하여 『삼국사기』를 지을새, 그 주의에 합하는 사료는 부연 찬탄 혹 개작하며, 불합하는 사료는 논폄도개(論貶塗改) 혹 산제(刪除)하였다. 나의 말을 불신하거든 『삼국사기』를 보라. 부여와 발해를 발거(拔去)할 뿐 아니라, 백제의 위례(慰禮)는 직산(稷山)이라 하고, 고구려의 주군을 태반이나 한강 이남에 옮기고, 신라의 평양주(平壤州)를 삭제하여 북방 강토를 외국에 할양함에 그 이상에 맞추려 함이 아닌가. 조선의 고유한 사상으로 발전한 화랑(花郞)의 성인(聖人)인 영랑(永郞)·부례랑(夫禮郞) 등은 성명도 기재하지 않고, 당조 유학생으로 거의 당에 동화한 최치원 등을 숭배 하며, 당과 혈전한 부여복신(夫餘福信)은 열전(列傳)에 올리지 않고 투항한 흑치상지(黑齒常之)를 특재(特載)함이, 그 이상에 맞추려 함이 아닌가. 기타 이 같은 종류가 허다하여 매거할 수 없다. 대개 자가의 이상과 배치되는 시대의 역사에서 자가의 이상에 부합하는 사실만을 수습하려 한즉, 그 사료도 간핍(艱乏)하려니와 또 부득이 공구씨(孔 丘氏)의 필삭주의(筆削主義)를 써, 그 사실을 가감 혹 개작할밖에 없을 것이다. 그중 가장 산삭(刪削)을 당한 자는 유교도의 사대주의의 정반대되는 독립사상을 가진 낭가(郎家)의 역사인 것이다. 희라. 이적(李勣)과 소정방(蘇定方)이 여(麗)·제(濟)의 문헌을 소탕하였다 하지만, 그 사학계의 겁운 (劫運)이 어찌 김부식의 서경전역의 결과에 미치랴. 김부식이 화랑의 역사를 증오하였을진대, 어떤 까닭으로 『삼국사기』중에 그 사실(史實)을 전삭(前朔)치 아니하였는가. 부식은 대개 중국사를 존 중히 여기는 자라, 화랑의 사실이 당인(唐人)의 『신라국기(新羅國記)』『대중유사(大中遺事)』등서에 기재된 고로 부식이 부득이 몇줄의 낭가의 전고(典故)를 적어 줌이다. 낭가에서 여교사(女敎師)를 원화(源花)라 하고 남교사(男敎師)를 화랑(花郞)이라 한 것이거늘, 『삼국사기』에는 원화와 화랑의 구별을 혼동하였으며, 사다함전(斯多含傳)에 사다함(斯多含)이 진흥왕 26년(565)에 화랑이 되었거늘, 본기(本紀)에 진흥왕 27년에 원화·화랑 이 비롯하였다 하여 그 연대를 착오하였으며, 화랑은 고구려 조의선인(皀衣仙人)을 모방한 것이거늘, 그 내력을 말살하였으니 가석한 일이 아닌가. 내가 일찍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읽어본즉 그 목록에 ‘선랑(仙郞)’이 있거늘, 매우 반갑게 그 편을 피람(披覽)하니 전부가 1자도 없이 결항 (缺頁)이 되고 말았다. 중화인의 삼국과 발해에 관한 기사로 『동번지(東藩志)』『발해국지(渤海國志)』등이 허다하였지만 1권도 전한 것이 없고, 그 전하여 온 서적에도 우리의 요구하는 바 조선의 자랑할 만한 사실로 『삼국사기』나 『고려사』에 빠진 기사는 매양 결항되어, 『남제서』에 적힌 동 성대왕과 사법명의 전사(戰史)가 2항이 결하고 『고려도경』에 선랑 전고의 수항이 결하였다. 이 어찌 후에 고의로 한 것이 아닌가.

9. 『三國史記[삼국사기]』가 유일한 古史[고사] 된 원인[편집]

모든 고기(古記)인 『선사』와 『화랑세기』등은 모두 멸종되고 오직 『삼국사기』란 일서가 세간에 전하였으니, 이는 저들 제사(諸史)의 가치가 모두 『삼국사기』보다 열(劣)한 명증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본서의 우열로 생긴 결과가 아니라 대개 이하 수종 사건에서 원인함이다.

(1) 서경전역의 뒤에 다시 제이의 남경전역(南京轉役)이 나지 못하여, 윤언이·정지상 등 일류의 인물은 주사(誅死)가 아니면 찬축(竄逐)을 당하여 다시 그 주의로 사회에 제공치 못하게 되매, 낭(郎)·불(佛) 제가의 저사(著史)는 다시 독자의 요구가 못될뿐더러, 또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뒤에 일체의 사료[47]를 궁중에 비장하여 타인의 열람할 길을 끊어, 자기의 박학자인 명예를 보전하는 동시에 국풍파(國風派)의 사상 전파를 금지하는 방법을 삼은 것이다. 그 리하여 『삼국사기』가 홀로 당시 사회의 유일한 유행의 역사가 된 것이다.

(2) 『삼국사기』가 유행된 이후에 고려의 국세가 더욱 쇠약에 향하여, 불과 백여년 만에 몽고가 발흥하여 그 세력이 구·아 양대륙에 횡절(橫絶)하 여 중화를 병합하매, 고려가 오직 비사후폐(卑辭厚幣)로 그 국호를 유지하게 되다가 마침내 저의 압박이 정치 이외 각 방면에 미쳐, ‘황도(皇 都)’‘황궁(皇宮)’등의 명사를 폐하게 되며, 심지어 팔관회(八關會)에 쓰는 악부시가(樂府詩歌)까지 가져다가 ‘천자(天子)’‘일인(一人)’ 등의 구어를 고치게 하고, 왕건 태조 이래의 실록(實錄)을 가져다가 허다한 찬삭을 행하니 이에 (竄削) , 오직 『삼국사기』같은 사책에 의거하여 우리가 자 고로 사대의 성의가 있다는 자랑을 하게 된 때, 궁중 비장(宮中秘藏)의 고사(古史)가 더욱 심장(深藏)하게 된 것이다.

(3) 몽고의 세력이 병축(屛逐)되매 고려조의 운명도 또한 고종(告終)하였다. 이씨조가 창업하매 비록 내정과 외교를 다 자주하여 타방의 철주(掣肘) 를 받지 아니하였으나, 다만 그 창업의 시인(始因)이 위화도(威化島)의 회군으로 되므로, 『삼국사기』이외의 역사를 세상에 공포할 의기가 없어, 송도의 비장이 다시 한양의 비장이 될 뿐이었었다. 정도전(鄭道傳)이 『고려사』를 편찬할새, 『삼국사기』의 서법을 봉승(奉承)하여 몽고제조(蒙古 帝朝)에서 미쳐 다 찬개(竄改)치 못한 나머지까지 찬개하더니, 그 뒤에 세종이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 등을 명하여, 태조 이래 실록 가운데 ‘조(詔)’‘짐(朕)’ 등자 곧 정도전의 ‘교(敎)’‘여(予)’ 등자로 고친 것을 다시 원문대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 전부가 거의 정도전의 찬개한 원본이었으니, 하물며 몽고제조의 찬삭을 당한 자야 어찌 회복하였으랴. 그런즉 고려의 사료도 사료 될 만한 사료는 삼국의 사료와 같이 모두 비장 속 에 갇히어 있게 된 것이다.

(4) 중국서는 본조사를 자유로 저작치 못하는 악습이 있었거니와, 우리 조선에는 전술과 같이 전대사까지도 관사나 준관사(準官史) 이외에는 마음대 로 보거나 쓰거나 하지 못하는 괴습이 있었다. 그러므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이 일찍 「사벌국전(沙伐國傳)」을 지어서 비밀히 가장하였다가, 우연히 친우의 휴거(携去)한 바가 되어 대화(大禍)를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상고 이래 역대의 비장(秘藏)이 수백년래 경복궁(景福宮) 중에 숨어, 내외하는 처녀적 서적이 되었다가 임진란의 병화에 장(葬)하고 말았을 것이니, 삼국의 사료 될 재료가 모두 멸종되고 오직 『삼국사기』만 전 하여 온 것이 상술한 수종 원인에 불출(不出)할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그러면 『삼국유사』는 어찌 유전(流傳)하였는가. 이는 다만 불교의 원류를 서술하고, 정치에는 혹 어급(語及)하였어도 대체가 『삼국사기』를 의방(依倣)할 뿐이요 사대주의의 의견과 충돌된 고싱 없는 까닭이다. 대각국사(大 覺國師)의 『삼국사(三國史)』는 김부식 『삼국사기』이전의 저술인데, 『이상국집(李相國集)』가운데 「동명왕편(東明王篇)」주에 인용한 자로 보면 그 사료 될 가치가 『삼국유사』보다 배승(倍勝)할 것이나, 이것도 마 침내 멸종됨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취지가 같지 아니한 까닭이다. 『고려사』는 정도전이 찬하다가 역주(逆誅)하고, 김종서가 이어서 완성하였으나 그도 또한 정변에 죽으므로 세조가 드디어 정인지의 찬이라 이름하 여 행세한 것이다.

10. 結論[결론][편집]

이상 서술한 바를 다시 간략히 총괄하여 말하면, 조선의 역사가 원래 낭가(郎家)의 독립사상과 유가(儒家)의 사대주의로 분립하여 오더니, 돌연히 묘 청이 불교도로서 낭가의 이상을 실현하려다가 그 거동이 너무 광망하여 패망하고, 드디어 사대주의파의 천하가 되어, 낭가의 윤언이 등은 겨우 유가 의 압박하에서 그 잔명을 구보(苟保)하게 되고, 그 뒤에 몽고의 난을 지나매 더욱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게 되고, 이조는 창업이 곧 이 주의로 성 취되매 낭가는 아주 멸망하여 버리었다. 정치가 이렇게 되매 종교나 학술이나 기타가 모두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어, 불교를 믿으면 의양(依樣)의 방할(棒喝)을 전수(傳授)하는 태고(太古) 나 보우(普愚)가 날지언정 평지에서 돌기하는 원효(元曉)가 날 수 없으며, 유교를 좇는다 하면 정주(程朱)의 규구(規矩)를 각준(恪遵)하는 퇴계(退溪)나 율곡(栗谷)이 될지언정 문로(門路)를 자립하는 정죽도(鄭竹島)는 존립할 곳이 없으며, 비록 세종의 정음(正音)이 제조된 뒤일지라도 원랑도(原郞徒)의 송가(頌歌)가 나지 않고 당인(唐人)의 월로(月露)를 음(吟)하는 한시가 (漢詩家)가 충척(充斥)하며, 비록 갑오·을미의 시기(時機)를 제우(際遇)할지라도 진흥대왕(眞興大王) 같은 경세가가 일지 않고 외세를 따라 전이(轉 移)하는 사회 될 뿐이니, 아아, 서경전역(西京轉役)의 지은 원인을 어찌 중대하다 아니하랴.

編註[편집]

  1. 원본은 午이나 오자로 보인다.
  2. 동언고략》(東言考略)은 조선 말기의 한문 서적으로 한국어 어원을 풀이한 책이다. 저자가 박경가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3. 원본은 午이나 오자로 보인다.
  4. 이 설에 의하면 진한은 용, 마한은 소, 변한은 뱀의 뜻을 가진 것이 된다.
  5. 4부중 하나인 북부 절나(絶那)에서 나라를 뜻하는 那이외의 글자인 절(絶)은 조리(助利)의 반절씩 취한 “졸”과 그 음이 비슷하다.
  6. 본디 발음은 “열양”이나 예전에는 연음하여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으므로 “여량”이라고 읽혔을 가능성이 크다.
  7. 편안하다의 뜻도 있으므로 펴라에 사용된 뜻은 이것이 아닌가 한다.
  8. '위략'에서 말하길,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가 '주나라'가 약해짐을 보고, '연'이 스스로를 왕으로 높이고, 동쪽의 땅을 다스리려고 하자,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병사와 함께 '연'을 공격하여 '주'의 왕실을 높이고자 하였다. 대부 '예'가 이를 간하여, 멈추게 되고, '예'를 서쪽으로 보내어 '연'에게 말하니 '연'도 이를 그치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해지자, '연'이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이천여리를 취하였다.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이 약해지게 되었다.'진'이 천하를 아우르자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하였다. 이때에 '조선왕 비'가 섰다. '진'이 엄습할까를 두려워 하여 복속하여 '진'에 속하였지만, 알현하지는 않았다. '비'가 죽고 그 아들 '준'이 섰다. 이십여년후에 '진', '항'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럽자,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시름하였다. 점점 '준'에게 가서 망명을 하니, '준'이 이들을 서쪽에 두었다. '한'이 '노관'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이 '연'과의 경계를 '패수'로 삼았다. '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호'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이에 이르러, '준'에게 항복하였다. '준'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고, 중국망명인으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고자 하니, '준'이 믿고 은혜를 베풀어, '박사'의 벼슬을 주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하였다. '만'이 망한 무리들을 꾀여, 무리가 점점 많아지니, 이에 '준'에게 사람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고하길, '한'의 병사가 열길로 쳐들어 온다. 방비하기 위해 들어가니, 돌아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이 '만'과 전쟁을 하는데, 대적하질 못하였다
  9. 조선왕 '만'은 연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가 전성기때부터 '진번조선'에 속하여 노략질을 일삼더니 관리가 되어 장새를 쌓았다.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하고 요동을 변경으로 삼았다. 한나라가 일어서자 그곳이 멀고 지키기 어려워 요동의 옛 요새를 고치니, 경계가 패수로 연나라에 속한다. '연왕 노관'이 반하여 흉노로 도망가고,'만'이 명령을 버리고 그 무리 천여명과 상투를 틀고 '만이'의 복식으로 바꾸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벗어났다.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공지'인 '상하장' 땅에 살다가 차츰 '진번조선'에 속하게 되고, 연 제나라의 망명자들의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을 하였다.
  10. 사기 흉노전에는 조양(造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1. 그 후 연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었는데, 호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그들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연으로 돌아오자 동호를 습격하여 격파하니 동호는 천 여리를 물러나게 되었다. 형가와 함께 진왕을 찌르러 갔던 진무양이란 자는 진개의 손자이다. 연 또한 장성을 쌓으니 조양에서 양평에까지 이르렀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해 호를 방비했다.
  12. 漢書 卷6武帝紀 “三年春作角抵戲三百里内皆采觀夏朝鮮斬其王右渠降(㠯其地爲樂浪臨屯玄菟眞番郡臣瓉曰茂陵書臨屯郡治東■縣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十五縣眞番郡治霅縣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十五縣師古曰樂音洛浪音郎番音普安反■音弋支反霅音丈甲反)
  13. BC 121년이다.
  14. BC 126년이다.
  15. BC 108년이다.
  16. 요동군 험독현에 대해서 응소가 말하기를 ‘조선 임금 위만이 도읍한 곳이다. 물에 의지하여 살고 험하기에 예부터 험독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찬이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고 이곳이 진짜 험독이다.’라고 하였다. 사고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맞다.
  17. 백제의 북쪽으로 요, 계, 제, 노나라 등이 있고 남으로 오월을 침략하였다.
  18. 후한서 권1하 光武帝紀 “初樂浪人王調據郡不服【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郡吏殺調降遣前将軍李通率二将軍與公孫述将戰於【西城破之西城縣屬漢中今金州縣也】夏蝗秋九月庚子赦樂浪謀反大逆殊死已下
  19. 자치통감 권97 晉紀 19 ”初夫餘【夫餘在玄菟北千餘里鹿山葢直其地杜佑曰夫餘國有印丈曰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葢本濊貊之地其國在長城之北去莬千里南與高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居于鹿山為百濟所侵【東夷有三韓國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馬韓有五十四國百濟其一也後漸强大兼諸小國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隋書曰百濟出自東明其後有仇台者始立其國漸以强盛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杜佑曰百濟南接新羅北距高麗千餘里西限大海處小海之南】
  20. 자치통감 권 136 帝紀2 魏遣兵擊百濟為百濟所敗【陳夀曰三韓凡七十八國百濟其一也據李延夀史其先以百家濟海後浸強盛以立國故曰百濟晉世句麗畧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
  21. 송서 권97 열전57百濟畧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22. 난하 유역인 것으로 보인다.
  23. AD 298년으로 백제 분서왕 원년이다. 삼국사기 기록과 보면 AD304년에 낙랑을 습격하는데, 아마도 진나라 惠의 원강8년이 최근들어 중국이 새로이 역사를 정립하면서 연대가 많이 바뀐 듯 한다. 혹은 책계왕 13년 기사를 말한 것 같기도 하다.
  24. 晉書 권14를 보면 현도군이 있다. “玄菟郡(漢置統縣三戶三千二百)髙句麗望平 髙顯“ 신채호 선생이 진서 지리지에 현도군이 없다고 했으니 본인지 읽은 晉書도 또한 후대의 위작인가.
  25. 후한서 권 115 동이전 75, 昭帝始元五年 罷臨屯眞番以幷樂浪玄菟, 玄菟復徙居句驪自單大領已東沃沮濊貊悉屬樂浪 소제 시원 오년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없에고 낙랑과 현도에 합병하였다. 현도는 다시 구려의 거처로 옮겨갔다. 단단대령의 동쪽 옥저와 예맥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26. 후한서 권115 동이전 75, 後以境土廣遠, 復分領東七縣, 置樂浪東部都尉. 自內屬已後, 風俗稍薄, 法禁亦浸多, 至有六十餘條. 建武六年, 省都尉官, 遂棄領東地 후에 그 지경이 넓고 멀어 다시 동쪽 칠현으로 나누고, 낙랑 동부도위를 두었다. 속한 이후로 풍속이 점점 박해지고 금하는 법이 또한 많아지니 육십여개에 이르렀다. 건무 육년 도위관을 없애고, 드디어 단단대령 동쪽 땅을 버렸다..
  27. 삼국지 위지 권 30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帯方郡 건안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의 남쪽 거친땅을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았다.
  28. 후한서 권 115 동이전 75 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内屬 구려 잠지락 대가 대승 등 만여호가 낙랑의 안에 이르러 속했다.
  29. 安帝의 오타인 것 같다. 안제 원초 5년은 AD 118년으로 고구려 태조대왕 66년에 해당하며 삼국사기에 화려성을 공격한 기사가 보인다.
  30. 사기 권 28 封禪書 제6 “神三一天一地一太一…最貴者太一……五帝太一之佐也”
  31. 원문에 3분한다 하였으나 (가) (나) 두개 밖에 없다.
  32. 삼국지 동이열전 “王頎别遣追討宫盡 其東界問其耆老海東復有人不 耆老言 國人嘗乘船捕魚遭風見吹數十日東得一島上有人言語不相曉 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又言 有一國 亦在海中 純女無男又說 得一布衣從海中浮出其身如中國人衣 其兩袖長三丈又得一破船随波出在海岸邉 有一人項中復有面” 왕기에게 부대를 나누어 궁을 토벌하려고 파견하였는데, 그 나라 동쪽의 경계에 이르러 늙은 노인에게 물었다.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있는가?' 늙은 노인이 말하길 나라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데, 풍랑을 만나 수십일에 이르러 동쪽에서 하나의 섬을 얻었다. 올라가 보니 사람이 있는데,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다. 그 풍속에 항시 칠월에 어린 여자를 바다에 받치는 것이 있다. 또 말하길 한 나라가 있는데, 역시 바다가운데에 있다. 모두 여자이고 남자가 없다. 또 말하길 바다에서 떠 다니는 옷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중국인의 옷과 같고, 그 양 소매의 길이는 삼장이나 된다. 또 부서진 배를 하나 얻었는데, 파도가 밀려와 해안에 닿았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에 얼굴이 또 있었다.
  33. 삼국지 동이열전 将其左右宫人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其後絶滅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그 좌우궁인들과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한의 땅에 거하였다. 스스로 한왕이라 하였다. 그 후로 끊어져 멸망하니 지금 한인이 오히려 그를 제사지내는 자가 있다.
  34. 장수와 남은 무리 수천을 이끌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하여, 마한을 공격하고 이를 깨뜨린 후 스스로 한왕에 올랐다. 준후로 망하여 끊어졌다. 마한사람들이 다시 스스로 진왕을 세웠다.
  35. 부종사 오림'이 '낙랑'이 '한국'을 통일했다고 해서 '진한'의 팔개국을 나무어 '낙랑'에게 주었다. 통역하는데 다르고 옳음이 있어 전해지자, 신지 '첨한'이 노하여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때 태수 '궁준'과 '낙랑 태수 유무'가 함께 병사로 쳤는데, '준'은 전사하고, 이군은 '한'을 멸하였다.
  36. 후한서 권 23권이다. 朝鮮在海中越之象也
  37. 박물지 권 8이다. 箕子居朝鮮其後伐燕復之朝鮮亡入海為鮮國師兩妻黒色珥兩青蛇蓋勾芒也
  38. 삼국지 권30의 주석에 있는 위략.
  39. 나라이름 앞에 ‘변’ 혹은 ‘변진’이 붙은 것은 변진에 속한 나라이고, 나머지는 진한에 붙은 나라이다. 마연국은 중복 기록되어 있고, 군미국과 변군미국은 다른 나라로 보인다. 군미국은 진한에 속했으며 변군미국은 변진에 속했다. 이렇게 되면 진한은 12국이고, 변진은 13개 국이된다. 그러나 악노국(樂奴國)은 안야국(安邪國)와 같은 나라로 보인다. 樂은 安과 그 의미가 같고 奴와 邪는 “라”로 발음해야 하는 고어라고 신채호가 말한바 “나라”를 뜻하는 말이다. 즉 “편안한 나라”로 같은 나라 이름이다.
  40. 原註: 金歆運傳[김흠운전]에 보임
  41. 原註:〔安常〕:『三國遺事[삼국유사]』栢栗寺[백률사]에 보임
  42. 原註: 지금 定平[정평]
  43. 原註: 高麗[고려]
  44. 原註: 年號[연호]
  45. 原註: 帝號
  46. 原註: 兩種[양종]도 다 吏讀文[이두문]의 詩歌[시가]
  47. 原註: 곧 前述[전술]한 古記[고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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