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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청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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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하면서 조선 청년에게 몇 마디 말을 부치게 되는 것도 한때의 기회라면 기회다. 그러는 말을 많이 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할 말이 하도 많아서 이루 다 할 수가 없을 것 같더니 글을 쓰려고 붓을 들고 보니 다시 말이 없자 한다. 그래서 나의 말은 거칠고 자르다.

여기에서 특별한 의미(意味)를 찾으려는 것보다 한 줄기의 정곡(正鵠)으로 알려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讀者) 여러분은 거친 말을 다듬어 읽고, 짧은 글을 길게 보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들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상승(上昇)이 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괴로운 형식(形式)으로 표현(表現)되는 거친 말과 짧은 글을 독자의 가슴의 깊은 속으로부터 다듬어 보고 길게 읽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고통(苦痛)이 되는 동시(同時)에 따라서 흥미(興味)가 되는 것이라고 말할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현대(現代)의 조선 청년을 가리켜 불운아(不運兒)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냐? 어리석은 촌학구(村學究)의 말이 아니면 근시안적(近視眼的) 유부(幼婦)의 소견(所見)일 것이다. 현금(現今)의 조선 청년의 주위(周圍)를 싸고도는 모든 환경이 거슬려 부딪쳐서 하나에서 둘까지, 뒤에서 앞까지 모두가 고르지 못한 역경(逆境)인 전차로 그것을 보고서 현대의 조선 청년은 불운아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가리켜 어리석고 근시안적인 소견(所見)이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만지(滿地) 풍설(風雪) 차고 거친 뜰에서 바야흐로 맑은 향기(香氣)를 토하려는 매화(梅花)나무에 아름답고 새로운 생명(生命)이 가만히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은 논법(論法)이 될 것이다. 현금의 조선 청년은 시대적(時代的) 행운아(幸運兒)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현대는 조선 청년에게 행운을 주는 득의(得意)의 시대(時代)다. 조선 청년의 주위는 역경인 까닭이다. 역경을 깨치고 아름다운 낙원(樂園)을 자기의 손으로 건설(建設)할 만한 기운(機運)에 재회(再會)하였다는 말이다.

불행(不幸)히 승평(昇平)한 시대에 나서 하염없이 살지 않고 다행(多幸)이 유위(有爲)의 시대에 나서 좋은 일을 제 손으로 많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기마(驥馬)는 마구(馬廐)에서 늙는 것을 싫어하고, 용사(勇士)는 집에서 죽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예로부터 하염없는 사람들은 불우(不遇)를 슬퍼하나니 하염없는 사람들의 이른바 '불우'라는 것은 아무 일도 할만한 자료(資料)가 없는 미지근한 승평시대를 가리킨 것일 것이다.

아아, 좋은 일의 자료가 되는 역경에 싸여 있는 조선 청년은 득의의 행운아일는지 모른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하여 일정한 목표(目標)를 바라고 나갈 뿐이다. 인생은 좋은 표준(標準)을 세우고 자동적(自動的)으로 고결(高潔)하게 진행(進行)하는 것이 가장 귀(貴)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표준을 바라고 나아감에는 앞에 지장(支障)이 없고 뒤에 마(魔)가 없는 것이다. 가다가 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육체(肉體)요, 정신(精神)은 아닐 것이다. 나침반(羅針盤)은 지방(地方)과 기후(氣候)의 차이를 좇아서 지침(指針)의 방향(方向)을 고치는 것은 아니다. 조갑지로 한강수를 말릴 수가 있고, 삼태기로 백두산을 옮길 수가 있나니라.

이론가(理論家)들의 말을 빌려 말하면 향복(享福)은 과거인의 피와 땀의 대가(代價)다. 그렇다면 후대(後代) 아손(兒孫)에게 향복(享福)의 유산(遺産)을 끼쳐 주기 위하여 피와 땀을 흘리게 되는 현대의 조선 청년은 행운아다.

나는 구구(區區)한 이론(理論)을 많이 쓰기는 싫다. 다시 말하면 독자(讀者) 여러분의 '눈으로 볼 만한 글'을 많이 쓰기는 싫다. 다만 '마음으로 읽을 만한 한 뜻'을 조금 썼으면 족(足)한다. 소석(小石)은 원래로 말이 없나니라. 그러나 적은 말에도 '참'이 있다면 급한 조수(潮水)에 몰려서 판이 어지러운 작은 틈도 침투(浸透) 하나니라.

조선 청년은 자애(自愛)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