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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어류/권88 예5 禮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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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語類卷第八十八

  •   禮五

예(5)

  • ∞∞∞∞大戴禮

대대례기

  •  88:1 大戴禮無頭, 其篇目闕處, 皆是元無, 非小戴所去取. 其間多雜僞, 亦有最好處. 然多誤, 難讀. 義剛(64이후).

대대례기는 두서가 없다(無頭). 그 편목 가운데 빈 곳은 모두 원래 없는 것이지 소대가 빼서 가져가서 그런 것이 아니다.[1] 그 중에 조잡하고 날조된 것도 많지만 매우 좋은 곳도 있다. 하지만 오류가 많아서 읽기 어렵다.

  •  88:2 大戴禮冗雜, 其好處已被小戴採摘來做禮記了, 然尙有零碎好處在. 廣(65이후).

대대례기는 난잡하다. 좋은 부분은 이미 소대에게 뽑혀가서[2] 예기로 만들어져 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파편적으로 남아있는 좋은 부분들이 있다.

  •  88:3 大戴禮<賀孫錄云: “或有注, 或無注, 皆不可曉.”> 本文多錯, 注尤舛誤. 武王諸銘有直做得巧了切題者, 如鑑銘是也. 亦有絶不可曉者. <賀孫錄云: “有煞著題處, 有全不著題處.”> 想古人只是述戒懼之意, 而隨所在寫記以自警省爾; 不似今人爲此銘, 便要就此物上說得親切. <賀孫錄云: “須要倣象本色.”> 然其間亦有切題者, 如湯盤銘之類. 至於武王盥盤銘, 則又似箇船銘, <賀孫錄云: “因擧問數銘可疑. 曰: ‘便是, 如盥盤銘似可做船銘.’”> 想只是因水起意, 然恐亦有錯雜處. 廣(65이후). 賀孫錄少異.

대대례기[3]는 본문에 오류가 많고 주석은 더 심하다.[4] 무왕의 여러 명문(銘)은 제목에 딱 들어맞게 지어진 것이 있으니 감명(鑑銘: 거울에 새긴 명문) 같은 것이 그렇다. 하지만 또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5] 옛 사람들은 그저 계신공구의 의지를 담아 여기저기에 기록하여 자신을 향한 경고로 삼았을 뿐이요 오늘날 사람들이 명문을 작성할 적에 (그 명문이 새겨질) 사물의 특성에 꼭 맞게 서술하려는 것[6]과는 다르지 않았나 생각한다. 물론 그 중에는 제목에 딱 들어맞는 명문도 있으니 탕의 반명(盤銘)[7] 같은 것들이다. 무왕의 관반명(盥盤銘)[8]은 선명(船銘)[9] 같은데,[10] 그저 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지 싶다. 그래도 역시 뒤섞이고 난잡한 구석이 있는 듯하다.

  •  88:4 太公銘几杖之屬, 有不可曉·不著題之語. 古人文字只是有箇意思便說, 不似今人區區就一物上說.

태공이 지팡이나 안석 따위에 새긴 명문에는 이해도 안 되고 제목에도 맞지 않는 말들이 있다. 옛 사람의 글은 그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바로 서술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깨잘깨잘하게 해당 사물의 특성에 맞춰서 서술하는 것과는 다르다.

  •  88:5 安卿問: “大戴保傅篇, 多與賈誼策同, 如何?”

안경의 질문: 대대례기의 보부(保傅)편은 가의의 책문[11]과 같은 부분이 많은데 어떻습니까?

曰: “保傅中說‘秦無道之暴’, 此等語必非古書, 乃後人采賈誼策爲之, 亦有孝昭冠辭.” 義剛(64이후).

대답: 보부편의 '진나라는 빠르게[12] 도를 잃었다'는 말 등은 옛 문헌이 아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가의의 책문에서 가져와서 만든 것이다. 전한 효소제(孝昭)[13]의 관사(冠辭)[14] 역시 이런 경우이다.

  •  88:6 明堂篇說, 其制度有“二九四七五三六一八”, 鄭注云, “法龜文”也. 此又九數爲洛書之一驗也. <賀孫錄云: “他那時已自把九疇作洛書看了.”> 廣(65이후).

명당[15]편에서 말하기를 그 제도 가운데 "294, 753, 618"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16] 정현[17]은 주석에서 "거북무늬[18]를 본 딴 것이다."라고 했다.[19] 이것은 9수가 낙서가 된다는 주장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이다.[20] [21]

낙서(9수버전)
. . .
6 1 8
7 5 3
2 9 4
  1. 현재 통행본 예기는 한나라 대성(戴聖)이 편집한 것으로 모두 49편이다. 대성의 백부인 대덕(戴德)이 편집한 85편본 예기를 따로 대대례기라고 부르고 통행본 예기를 이와 구분하여 소대례기라고 종종 부른다. 현재 대대례기는 제 1편부터 38편까지, 그리고 제 43, 44, 45, 61편이 비어있다. 수서 경적지에 의하면 대덕이 편찬한 85편본 예기(즉, 대대례기)를 조카인 대성이 산삭하여 46편본 예기(즉, 소대례기)를 만들었고 여기에 후한의 마융이 세 편을 덧붙여서 현재와 같은 49편본 예기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설에 따르면 현재의 대대례기에 일부 편목이 빠져있는 것은 소대가 그 부분만 빼서 소대례기를 만들었기 때문이 된다. 주희는 여기서 이 설을 거부한 것이다.
  2. 앞선 조목에서는 소대가 빼간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긍정한다.
  3. 하손의 기록: "대대례기는 주석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아무튼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
  4. 대대례기는 현존하는 마흔여편 가운데 스물네 편에만 주석이 붙어있다. 주석자는 북주(北周)의 노변(盧弁)이다.
  5. 하손의 기록: "제목에 딱 맞는 경우도 있고 제목에 전혀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6. 하손의 기록: 반드시 해당 사물의 본색을 모방하려는 것
  7. 물그릇에 새긴 명문
  8. 세숫대야에 새긴 명문
  9. 배에 새긴 명문
  10. 하손의 기록: "(선생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의문이 드는 명문 몇 가지를 거론하여 질문하자 대답하시길 '그렇다. 관반명은 선명도 될 수 있겠다.'라고 하셨다."
  11. 가의의 '신서' 권 5에도 '보부편'이 있고 그 내용이 대대례기 보부편과 많이 겹친다.
  12. 여기서 폭(暴)은 빠르다는 뜻
  13. 전한 소제를 말한다. 소제의 시호가 효소.
  14. 대대례기 공부편에 소제의 관례에 관한 부분이 있다
  15. 명당은 고대의 건물 이름이다. 명당편은 해당 건물에 대한 해설이다.
  16. 가로세로대각선 어느 쪽으로 더해도 합이 15가 되는 숫자배열이다. 이른바 마방진
  17. 본래 대대례기의 주석자는 북주의 노변이다. 주희는 이를 정현으로 오인한 듯하다.
  18. 황하에서 용마가 나왔는데 그 털 무늬가 하도, 낙수에서 거북이가 나왔는데 그 껍질 무늬가 낙서라고 한다.
  19. 즉, 대대례기 이 부분의 주석자는 명당의 배치가 마방진 형태였고 이 마방진 형태는 '낙서'라고 본 것이다
  20. 송나라 당시 두 종류의 마방진 가운데 어느쪽이 하도이고 어느쪽이 낙서이냐를 놓고 논쟁이 있었다. 일부는 숫자 10개를 배열한 그림이 낙서, 9개를 배열한 그림이 하도라고 주장했고 다른 쪽은 반대로 주장했다. 주희는 여기서 낙서9수론을 주장하며 대대례기 주석을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21. 하손의 기록: 그(정현)는 저 당시 이미 구주(九疇)를 낙서로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