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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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집]

『탕!』

하는 폭발탄 터지는 소리는 경성의 복잡하고 산만한 공기 를 울려서 천이면 천 사람, 만이면 만 사람의 다 각기 다른 여러 가지의 마음을 비교적 단순하게 통일을 시켰다.

이것은 계해년 팔월 스무 아흐렛날 오전 열한시, 곧 한일 합방 기념일의 일이었다. 폭탄 소리는 어느 나라와 어느 때 에라도 사람에게 의심스럽고 두려운 인상을 주는 것이다.

하물며 특수한 사정을 가지고 이상한 조선 사람, 그중에도 도회지인 경성에 있어서 신경이 더욱 발달되고 사정이 더욱 복잡한 여러 사람의 마음은 평화롭지 못한 폭탄 소리를 듣 고 이상한 자극을 받아서 절반은 의심하고 절반은 믿는 것 같은 방면으로 모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다른 의심과 특별한 무서움을 가지고 거친 들의 미친 바람에 흔들리는 외로운 꽃처럼 마음 속 깊이까지 떨 고 있는 사람은 계동(桂洞)의 조그만 초가집 건넌방에 도사 리고 앉아서 꽃 같은 얼굴과 옥 같은 마음이 서로 비치는 예쁜 영옥이었다.

폭발탄 터지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종로 경찰서의 전화 전 종이 울렸다. 어느 순사가 전화를 받고 서서,

『네, 그렇소. 누구요? ……경성 신문사에……그런데 무슨 일이요……말을 채 대답도 않고 전화를 끊나.』

하며 순사는 김 종철이가 인사동에 있는 경성 신문사의 편 집실에 폭탄을 던지고 나서 종로 경찰서에 자현하러 가겠다 고 먼저 전화를 한 것인데, 곧 가서 말하겠다고 자세한 말 은 않고 전화를 끊은 것이다.

전화 받은 순사가 서장에게 가서 전화 받은 말을 다하기 전에 서장실의 문이 열리더니 건장한 청년 한 사람이 들어 와서 한손으로 모자를 벗으면서 서장을 향하여 고개를 끄덕 하고,

『나는 김 종철이요. 경성 신문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현하 러 왔소.』

하고 기침을 한 번 하고서 몸을 똑바로 서서 조금도 군속 하고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순사에게서 전화 받은 말을 들 을 때에 긴장된 서장은 자현하는 김 종철의 살기를 띤 얼굴 과 단단한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장은 순사의 말을 정지시키고 종철을 향하여,

『그래, 무슨 일로 폭탄을 던졌노?』

종철은 얼굴빛을 고치고 한가한 어조로,

『신문의 기사가 잘못되어서 그랬소.』

하고 포켓에서 신문 한 장을 내어서 서장을 주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한다. 서장은 그런 일은 자기가 직접 물을 것 이 아닐 뿐 아니라 다른 바쁜 일이 있다는 듯이 종철의 말 을 중지시키고 순사로 하여금 종철을 안동하여 사법계로 보 냈다. 그리고 급히 심부름꾼을 보내서 고등계 주임을 청해 왔다. 서장은 고등계 주임을 대하여,

『어거 또 큰일났소그려.』

『무슨 일이요?』

『경성 신문사에 폭탄을 던졌답니다.』

『폭탄요? 누가 던졌소? 아까 나던 소리가 그 폭탄 소리였 읍니다그려. 그러지 않아도 지금 조사를 하려고 하는 차입 니다.』

하고 주임은 놀라고 긴장한 어조로 말하였다.

『폭탄 던진 자는 김 종철이라나요?』

하고 서장은 말을 계속하였다.

『김 종철인 웬 사람이요?』

『글세, 모르겠소, 아직.』

『무슨 일인가요?』

『무슨 일인지도 모릅니다. 속히 가서 조사하여 보시오.』

하고 서장은 매우 급한 기색을 보이면서 김 종철이가 자현 하였다는 말도 미처 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물론 서장의 실 태이지만 폭탄 소리에 여러 번 놀라서 정신이 빠진 경성의 경찰서장으로는 그만한 실태쯤은 그다지 괴이한 일은 아니다. 고등계 주임도 서장이 어째서 경성 신문사에 폭탄을 던 진 것을 알았으며, 김 종철이가 던진 줄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것을 묻지 않았다. 그것을 묻지 않은 것은 경찰서 정탐기 관의 주노되는 고등계 주임으로는 영리하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신경이 너무 민첩해서 그러한 중대 사건을 책 임자인 자기가 먼저 알지 못하고 서장이 먼저 안 것이 책임 상 조금 창피해서 짐짓 묻지 않았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서장에게서 그 말을 듣고 조사하는 명령을 받은 고등계 주 임은 자기의 처소로 들어와서 형사의 비상소집을 행하는 동 시에 각 경찰서와 파출소에 전화를 하여 경계망을 늘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종로 경찰서의 공기는 긴장할 대로 긴장 하였다. 모여드는 형사들은 눈과 손으로 서로 말을 하면서 긴장 중에도 가장 정숙하였다. 이것이 경찰서의 비밀이요 질서이다.

형사들은 이러한 일을 당하면 그 일과 계통이 같은 사건은 모조리 연상이 되고 또 연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에 서 생긴 폭탄 사건은 모두 연상이 되는 중에 지긋지긋하고 머리밑이 쭈뼛거리는 것은 김 상옥의 사건이 가장 새롭게 기억되었다.

고등계 주임은 형사 육칠 인을 데리고 현장인 경성 신문사 에 가게 되었는데, 형사들은 한편으로 마음이 후꾼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신이 나서 권총에 탄환을 재어 두루마기 속으 로 들고 모자를 훨씬 숙여 쓰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곁눈으 로 흘겨 보면서 한패는 이문(里門) 안을 거쳐서, 한패는 철 물교를 거쳐서 인사동으로 향하였다.

종철은 순사를 따라서 사법계로 갔다. 종철을 데리고 간 순사는 사법계로 들어가서 종철을 앞에 세우고 사법주임을 향하여,

『이 사람은 경성 신문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현한 사람인 데 서장께서 사법계로 데리고 가라 해서 데리고 왔읍니 다.』

사법계 주임은 그 말을 듣고 놀라는 어조로,

『폭탄을 던지고 자현을 해?』

하면서 종철을 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조금 있다가 사무상 을 정돈하고 서기를 불러서 옆에 앉히고 심문을 시작하였다. 고등계 주임은 형사를 데리고 경성 신문사에 갔으나 폭탄 을 던진 이외의 다른 일이 없고 범인은 이미 자현한 줄을 알았으므로 현장만 조사하고 돌아와서 그대로 보고하였다.

사법계 주임은 고등계 주임의 조사한 보고를 다시 각 방면 의 조사를 종합하고 일 주일 동안에 종철에게 대하여 세 번 의 심문이 있은 뒤에 심문한 서류와 함께 종철을 경성 지방 법원 검사국으로 넘겼다.

경성 지방법원 검사는 종철에게 대하여 수차의 조사가 있 은 뒤에 그 일을 중대 사건이라 하여 예심에 붙여서 자세히 조사하게 하였다.

2[편집]

종철은 강원도 양양군 도천면 도문리에서 났다. 어려서부 터 한문을 배우다가 열네 살에 경성으로 나와서 중앙고등보 통학교 이년급의 보결생으로 들어가서 그 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법과 일년급에 입학하였다가 학비의 부족으로 퇴학하고 말았는데 폭탄을 던지던 때는 스무 살의 당당한 청년이다.

종철의 출생지인 양양군 도문리는 뒤에 설악산이라는 장산 을 등지고 앞에 동해바다를 임하였으며 남쪽으로 아름다운 들을 끼고 있다. 만일 인물의 나는 것이 그 출생지의 지리 와 관계가 있다 하면 도문리에는 상당한 인물이 나게 될 것 이다.

종철은 신체가 건장하고 얼굴이 수려하며 어려서부터 품성 이 공정하고 의협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학교에 다닐 때 에도 같은 학생들에게 많은 경애를 받았고, 선생들에게도 유망하다는 칭찬을 들으며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종철이가 영옥을 위하여 경성 신문사에 폭탄을 던지기에 이르기까지는 인생 사회에 으fp 있다고 할 만한 다소의 파 란곡절이 있었다.

영옥은 거친 동산에서 피려다가 모진 풍우에 시달려서 가 엾이 꺾어지는 고요한 꽃과 같이 조각 구름에 가리어서 맑 은 빛을 비추지 못하고 산 너머로 숨어지는 예쁜 초생달과 같이 아름답고 박명한 여자였다. 영옥의 짧은 일생은 검은 물결의 파란이요, 기구한 산길의 곡절이었다. 그네의 입술은 쓰고 그네의 마음은 괴로웠다. 그네의 생애가 쓰고 괴로울 수록 그네의 인격은 더욱 아름답고 더욱 향기로왔다.

영옥은 경성 계동 태생이다. 그의 집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물같이 깨끗한 수조하는 가정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한문학 자로 상당히 수조하는 사람이요, 그의 어머니는 비록 구식 가정에서 자라난 부인이나 대단히 밝고 현철하였다. 그러므 로 그들의 생활은 곤란하였으나 가정은 평화로왔다.

영옥은 그런 가정에 태어난 무남독녀다. 그 집의 유일한 생계는 영옥 아버지가 동네 아이들을 모아서 한문을 가르쳐 주고 훈료로 다달이 들어오는 얼마 안 되는 수입을 가지고 근근히 연명하여 지낼 뿐이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그를 최 선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훈료의 수입으로 세 사람 의 영양에 부족이 없을 만한 생활을 하기에는 너무 곤란하 였다.

영옥이가 여섯 살 되었을 때에 그의 어머니는 신경 쇠약과 영양 부족으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점점 쇠약에 빠져 아주 병석에 누워 일어날 수가 없이 되었다. 신경 쇠약과 영양 부족은 구차한 집 부인에게 흔히 있는 병이요, 더구나 현철한 부인에게 많이 있는 병이다. 그것은 구차한 집 부인 은 넉넉지 못한 살림에 항상 근심으로 싸여 있고 모든 일에 불평이 많아서 흥분되기 쉬운 까닭으로 신경이 쇠약하고 의 식이 정당치 못하여 영양 부족이 되는 것이요, 더구나 현철 한 부인은 자기 이외의 가족 곧 부모나 남편이나 자질들을 구호하기 위하여 자기의 자봉은 심히 박한 까닭으로 그러한 특수한 병에 걸리기 쉬운 것이다. 이것이 인생 사회에 숨어 있는 견딜 수 없는 비밀한 슬픔의 하나이다.

영옥의 어머니는 최 선생에게 시집 온 뒤로 항상 구차해서 배고픈 때도 많았고 고생스러운 때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중에도 남편 공경에 마음과 힘을 기울여서 자기에 대한 범 절은 실로 참혹한 일이 많았다. 더구나 영옥을 낳은 뒤에는 영양이 부족할 뿐 아니라 어린아이를 기르기에 몹시 피로해 서 여러 가지의 원인으로 그런 병에 걸리게 된 것이다.

영옥의 어머니가 병들어 누운 후로 최 선생이 손수 병구완 을 하면서 어린 영옥을 구호하였으나 아무것도 없는 재료와 서툰 남자의 솜씨에서 나오는 병구완이 도저히 그 병을 치 료한다든지 병인의 마음에 위안을 준다든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남편의 서툰 병구완은 도리어 그 병든 부인에게 미안스러운 자극을 더할 뿐이었다.

영옥의 어머니는 병이 더욱 침중하여 이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네가 가난에 쫓겨서 쓰리고 괴로운 이 세상을 떠나기에 조금도 싫을 것이 없지만, 의지 없는 사랑 하는 남편과 예쁘고 불쌍한 어린 영옥을 뒤에 두고는 차마 눈물과 한숨을 받아먹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기가 싫어서 우는 사람에게는 죽음은 웃고 오는 것이다.

병은 시각을 더해서, 그네의 꺼져 들어가는 눈자위 위에는 귀신의 발자취가 보이고, 희어지다 못해 검어지면서 가볍게 떨리는 그네의 입술은 이 세상을 마지막 사례하려는 감각의 선물인 듯하였다.

홀쭉한 최 선생과 어린 영옥이는 시름없는 그의 앞에 앉았다. 최 선생은 부인의 병세가 외독해지는 것을 보고 하염없 는 눈물을 흘리고 앉았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서부터 영리 한 영옥이라도 죽음에 대한 경험이 없는 여섯 살 된 어린아 이였다. 그러므로 영옥이는 저의 아버지가 우는 것을 보고 입술을 삐죽삐죽하며 눈물만 가랑가랑할 따름이요, 저의 어 머니가 죽으려고 하는 쓰리고 아픈 슬픔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의 어머니가 보기에는 자기를 위하여 우는 사랑하는 남 편보다 자기의 죽음을 슬퍼할 줄 모르는 어린 영옥이가 더 욱 불쌍하고 슬펐다.

죽음을 기다리는 그네는 한손으로 우는 남편의 손을 잡고 또 한손으로 울 줄 모르는 영옥의 손을 잡았다. 손을 단단 히 잡으려고 했지만 힘이 없어 그럴 수가 없었다. 그네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지만 뜨거운 눈물이 솟아서 힘없는 눈을 가리고 복받치는 슬픔에 목이 메어서 말을 이루지 못 하였다.

최 선생도 소리를 놓아 울었다. 영옥이도 보드라운 손으로 힘없고 차디찬 어머니의 손을 만지고 흐느껴 가며 울었다.

저리고 아픈 공기로 채워진 방안에는 한참 동안 귀에 들리 는 울음소리와 마음에 들리는 울음소리와 마음에 들리는 죽 음의 소리가 서로 섞여서 날 뿐이다.

그러자 해가 저물어 어두웠다. 최 선생은 정신을 차려서 등잔에 불을 켜고 영옥의 어머니도 쏟아지는 눈물을 겨우 그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것은 자기의 남편과 딸을 위 하여 최후의 유언을 하려는 뜻이다. 최 선생은 부엌으로 나 가서 미음을 조금 데워다가 떨리는 손으로 그 부인의 입에 대엿 숟갈을 떠넣었다. 부인은 이마를 찡그리면서 받아먹고 조금 정신이 진정되었다. 영옥이 어머니는 다시 남편과 영 옥의 손을 잡고 한숨을 한 번 쉬고서 먼저 남편을 향하여 고요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인제 죽는 사람입니다. 당신과 저 어린 것을 위하 여 아무리 죽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나 어디 그것이 마음대 로 되는 일이요? 내가 죽더라도 당신은 그리 맘을 상하지 마시오. 사람이 누가 죽지 안합니까? 그리고 내가 죽거든 곧 마땅한 사람을 하나 얻으시오. 그래야 당신도 고생을 덜 하고 어린것도 고생을 덜 시키지요. 그러나 사람을 잘못 얻 으면 철모르는 영옥에게 고생이 더 됩니다. 아무쪼록 영옥 에게 고생이 덜 되도록 하시오. 그래야 내가 죽어도 눈을 감겠소.』

하고는 한참 말이 막혔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고서 다시 말을 계속한다.

『당신은 계집애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좋아 않습디다마 는, 낸들 어이 그걸 좋아합니까마는 세상이 다 그리 되고 또는, 사람 되기에 있는 것이지 여학생이라고 다 버리는 것 은 아니지요. 저것(영옥)이 학교에 다닐 만하거든 소매 동냥 이라도 해서 학교에 보내시오. 지금은 학교를 졸업해야 마 땅한 데로 시집을 가게 된답니다. 내 말을 허술히 듣지 마 시오. 그리고 내가 죽거든 곧 마땅한 사람을 얻으세요, 네?』

하고 남편에게 대한 말을 마쳤다. 최 선생은 부인의 말을 듣고 무엇이라고 대답할는지 몰라서 조금 있다가,

『그런 말씀 마시고 아무쪼록 안심해요, 죽기는 왜 죽어요.

설사 죽는다고 하면 내가 사람을 얻는 것은 모르겠소마는 영옥이야 학교에 보내다뿐이요. 요새 여학생들이 하도 못된 짓을 많이 하니깐 나도 이따금 말하는 것이지 여학생이라고 다 그렇겠소. 어서 공연히 마음을 상하지 말고 안심하시 오.』

이렇게 말하여 위로하였다. 영옥 어머니는 영옥을 쳐다보 면서 영옥의 손을 조금 잡아당겼다. 영옥은 앉은 채로 몸을 움직여서 어머니 앞으로 조금 다가 앉았다. 영옥이 어머니 는 영옥을 향하여,

『영옥아, 어머니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어머니가 죽으면 아버지하고 살지. 그리고 내가 죽으면 또 어머니를 얻는다.

어머니가 죽어도 울지 마라. 네가 울면 아버지는 어떻게 하 나, 울지 마라, 영옥아. 네가 울면 죽은 혼이라도 나도 운다.

그리고 새로 어머니를 얻거든 그 어머니를 잘 섬겨야 한다, 응 영옥이!』

하고는 목이 메어서 말을 못한다.

부인은 남편의 손을 잡았던 손으로 수건을 들어서 눈물을 씻었다. 총명한 영옥이는 아무리 어린 마음이라도 그 어머 니의 뼈가 저리는 말에는 소리를 쳐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고 울려야 울 수도 없는 부인은 도 리어 영옥을 위로하였다.

『영옥아, 울지 마라, 얘 착하다, 그리고 내 말을 들어야지, 영옥아.』

하고 영옥의 손을 놓고 그 손으로 영옥의 눈물을 씻어 주 고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다시 영옥의 손을 잡고 말을 계속하였다.

『영옥아! 그리고 네가 조금 더 크면 학교에 가야지. 학교 에 가서 공부를 잘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서 잘 살아야지.

학교에 가면 아버지가 좋은 구두와 꽃 그린 책을 사주신다.

너 학교 갈 때에 구두와 책을 사주려고 내가 돈 십 원을 모 아 두었다. 내가 오래 살면 네가 학교에 갈 때에 예쁜 구두 를 사서 내 손으로 신겨 주고 문 밖에까지 나가서 신고 가 는 것을 보려 했더니 그것을 못 보고 죽는데, 영옥아!』

하고 남편을 쳐다보며 말머리를 돌려서,

『에구, 참 잊을 뻔했소그려. 장롱 속에 있는 명주 저고리 소매를 뜯고 보면 거기 돈 십 원이 들었어요. 그것을 마땅 한 데 길미를 주었다가 우리 영옥이 학교 갈 때에 구두와 책을 사주려고 굶을 때에도 쓰지 않고 모아둔 것이에요. 내 가 죽어서 초상 치를 때도 쓰지 말고 두었다가 영옥이 학교 갈 때에 구두와 책을 사주시면 나 본 듯이 신겠지요. 그리 해 주세요.』

하고 다시 영옥에게 말을 한다.

『영옥아, 학교에 다닐 때에 못된 학생들과 같이 놀지 말 아라. 계집애들이 학교에 다닙네 하고 못된 짓을 하는 애들 이 많단다. 그래서 여학생의 나쁜 일이 신문에 많이 난단다.

못된 학생과 같이 놀면 본보기 쉽다. 아예 같이 놀지 마라.

그리고 후제 커서 시집갈 때에 첫째로 네가 당자를 보고서 혼인을 하더라도 네 맘대로만 하지 말고 아버지한테 여쭈어 보아라. 네가 아무리 구차히 살더라도 돈 많은 사람 취하지 마라. 그리고 얼굴 잘 생긴 사람만 취해도 못쓴다. 사람만 잘 되면 돈 같은 것은 절로 생긴다. 지금 여학생들은 돈과 인물만 탐하다가 신세를 버리는 사람이 많단다. 그것은 죽 어도 못할 일이다. 멀쩡한 사람이 어떻게 남의 첩 노릇을 하냐. 그런 일은 기생이나 색주가 하는 짓이지 깨끗한 사람 은 못하는 일이다. 우리 영옥이는 그런 못된 여학생을 보면 침을 뱉겠지, 그렇지 영옥아? 사람만 잘 되면 거지라도 관 계 없고 백정놈이라도 관계 없다. 돈이 다 무엇이고 인물이 다 무엇이냐. 지금은 지체도 쓸데없다. 지금 세상에는 사람 만 되면 정승도 하고 대통령도 하고 부자도 되고 천하 국가 에 유명한 사람도 된다. 너는 아무쪼록 그런 좋은 사람을 얻어서 잘 살아라. 더구나 첩이라니, 나는 남의 첩 노릇 하 는 딸이 있으면 죽은 혼이라도 울고 다니겠다. 영옥아 그렇지. 우리 영옥이는 재조가 있으니깐 내 말을 잊지 않겠지.

그리고 우리 영옥이는 착하니까 내 말을 거역하지 않겠지.

그렇지, 영옥아! 아무쪼록 내 말대로 해라. 그리고 복 많고 명 길어서 잘 살아라. 너만 커서 잘 살면 나는 죽어도 춤을 추겠다. 영옥아, 응?』

이렇게 말을 그치고 영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영옥이는 처음에는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도 슬퍼서 우는 것을 보고 저도 느껴 가며 울다가 저의 어머니의 말이 시작됨으로부터 저의 어머니도 적이 진정이 되고 저의 아버 지도 부인의 말을 듣기 위하여 진정이 되었다. 그러므로 영 옥이도 울음을 그치고 깜짝이지도 않는 눈으로 저의 어머니 의 말하는 입을 보면서, 그 말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자 세히 듣다가 영옥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어머니, 나는 무슨 말이든지 들으면 잘 잊어버리지 않아 요, 그런데 첩이 뭐예요?』

차차 꺼져 가는 짚불처럼 더운 기운을 거두면서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싸여 백골보다도 참혹한 영옥 어머니는 무사기 한 영옥의 말에는 너무도 재롱스러워서 무섭게 파리하고 타 는 입술에 우는 것보다도 가엾은 애처로운 웃음이 떠돌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지, 어른 말을 안 잊어버리고말고. 우리 영옥이는 재 조가 좋으니깐. 첩은 아내를 두고 또 여편내를 얻어 사는 것이 첩이란다. 이를테면 내가 있는데 늬 아버지가 또 다른 여편네를 데리고 살면, 그것이 첩이란다. 그러나 내가 죽은 뒤에 아버지가 다른 사람을 얻으면 그것은 첩이 아니고 관 계치 않는다.』

영옥이는 그 말을 이해한 듯이 잠자코 앉았다. 영옥 어머 니의 유언은 끝났다.

3[편집]

영옥 어머니는 물론 구식 가정에서 생장한 부인이다. 그 말은 학문적이 아니오, 특별한 깊은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이 학문적은 아니지만 속되지 않고 깊은 의미는 없지마는 천박하지 않다. 그 말이 임종의 유언이니 만큼 말끝마다 눈물이요, 어린 딸에 대한 어머니의 훈계인 만큼 다정하고 곡진하였다. 이 말은 철모르는 영옥에게 한 말이지마는 일반 여학생에게 들린대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 이 없는 말이다.

영옥이는 다시 들을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말을 그 영리하고 단순한 기억에 사라지지 아니할 만큼 새겼다.

이 눈물보다도 쓰리고 피보다도 아프고 지장보살의 팔보다 도 사랑스러운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실로 영옥의 일생의 운명을 차곡차곡 접어서 어린 가슴에 안겨 준 것이다. 다행 이라면 다행이며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아! 말의 힘도 큰 것 이다. 어린 아이를 기르는 가정 교육의 힘도 거룩한 것이다.

최 선생은 물론 한문학자요, 따라서 조수하는 사람이다. 구 도덕에 젖은 생각으로 시대에 맞지 않는 일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 여자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도 찬성하지 않고 더구나 자유 결혼 같은 것은 대단히 불가하게 생각하였다.

그러한 생각이 구도덕의 습관에서 나온 것도 사실이지마는 여학생의 품행이 부정한 일도 많이 있고 자유 결혼의 이름 을 빙자하고 여러 가지 폐해가 적지 아니해서 일반 학생계 의 풍기문제가 날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 러한 까닭으로 평일에 자기의 부인과 앉아서 영옥의 장래를 말할 때에 그 부인이 영옥을 장차 학교에 보낼 걱정을 하든 지 사위를 얻을 때에 당자끼리 서로 보이고 혼인을 해야 한 다든지 그런 말을 하면 최 선생은 반드시 반대하였다. 그래 서 영옥이는 어려서부터 명민해서 글을 배우기에 넉넉하였 고, 또한 배우려고 하였지만 그 완고한 아버지는 한문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것은 한문이 불가하다는 뜻이 아니 라 한문을 가르치면 장차 학교에 들어갈 준비가 된다는 생 각이었다.

그렇게 부레풀로 붙인 거문고 기둥처럼 빡빡하고 변통성 없던 최 선생이 그 부인의 유언을 들을 때에는 새로운 생각 이 움직여서 영옥의 장래에 대한 말에는 말끝마다 유리하게 들었다. 그래서 그의 사상에는 많은 변동이 생겼다.

영옥 어머니의 영옥에 대한 말, 그 중에도 특히 학교에 다 니라는 말과 혼인에 대한 말에는 여자가 반드시 학교에 다 니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든지 혼인은 꼭 자유 결혼을 해야 쓴다든지 그러한 논리적인 말은 한 마디도 없다. 영옥 어머 니는 그러한 일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변명할 만한 학문이나 지식이 없었다. 그러니만큼 그 말은 간단하고 평 범하였다. 그러면 그렇게 간단하고 평범한, 죽어 가는 여자 의 힘없는 말이 어찌하여 그런 썩은 한문적 바탕에 곰팡내 나는 구도덕의 못을 박아 놓은 찰완고에게 새로운 각성을 주었는가?

그것은 다만 인정이요 양심이다. 그 부인의 말은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었다. 숫되고 정성스러웠다. 간절하고 측은하 였다. 그 말은 그 입술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의 가슴의 가장 깊은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실로 작의 정성스런 마음을 다할 만한 변재가 없었다. 그래서 남편의 귀에 들려 주는 말보다 남편의 마음에 비쳐 주는 정성이 많았다. 그러 므로 그 부인의 유언을 들을 때에 귀로 들은 말소리보다 마 음으로 들은 소리 없는 말이 오히려 많았다. 가령 그 부인 의 말이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하여도 그 측은하고 간 절함에는 감동이 안될 수 없었다. 그래서 인정은 인정을 비 추고 양심은 양심을 끌어서 인정과 인정이 서로 엉클어지고 양심과 양심이 서로 뒤섞여 마침내 부인의 양심은 남편의 창자로 들어가고 남편의 인정은 부인의 가슴으로 들어가서 두 사람의 일만 생각이 하나가 되고 만 것이다. 때문에 사 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도도한 웅변이나 경쾌한 변론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정의에 있는 것이다.

아! 사랑, 아름다운 사랑은 새로운 윤리와 도덕의 황금으로 뼈를 만들고 학문과 지식의 비단으로 옷을 입힌 연애 지상 주의의 신식 혼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로 깎은 오리 로 폐백을 드리고 붉은 실과 푸른 실로 백년 언약을 붙들어 매는 구식 혼인에도 없지 않은 것이다.

아! 가난하고 병들고 슬픈 구식 가정의 작은 방안 외로운 등잔불 아래에 눕고 앉은 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인생이면 서도 자연인 현상, 그 가운데서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 철학 이나 종교를 본다면 그것은 사람의 다행인 동시에 불행일 것이다.

세 사람은 잠깐 동안 잠잠하였다. 영옥 어머니는 전신의 힘을 다하여 간신히 유언을 마치고 나서는 의식이 몽롱하여 지고 사지가 점점 굳어져서 다시는 어찌할 수가 없이 되어, 어서 가고 싶으면서도 차마 잊을 수 없는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영옥이 아버지는 다시 그 부인의 얼굴을 보았다. 그 부인 의 숨소리는 차차 가늘고 잦았다. 얼굴빛은 붉은 듯하더니 희어지고 희어지는 듯하더니 푸르러진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찡그리는 듯한 그의 눈에 는 구슬 같은 눈물 방울이 솟아올랐다. 힘 없는 등잔불은 그 눈물에 비쳐서 반들거리는 맑은 빛이 다시 이승과 저승 을 아울러 비췄다. 빛도 없는 얼굴을 찡그리며 목구멍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하더니 모든 소리는 잠잠하여지고 뭇 움직임은 고요하여졌다.

불쌍하고 애처로운 세 사람이 인제는 두 사람이 되었다.

최 선생은 이마를 땅에 비비며 목을 놓고 울었으나 못 미친 소리는 목 안에서만 흐느낄 뿐이다.

영옥이는 죽은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한손으로 차고 뻣뻣한 젖을 만지며 어머니를 부르며 소리쳐 운다. 영옥이 의 눈물은 죽은 얼굴에 떨어져서 미처 마르지 않은 어머니 의 눈물과 합쳐 흘러서 그네의 얼굴 위에 두어 줄기의 작은 시내가 된다.

최 선생은 영옥을 안아서 옆에 놓고 수건으로 그 부인의 얼굴에 떨어진 영옥의 눈물을 씻어내고 베개를 바로 놓고 베개 위에 그 부인의 머리를 반듯이 놓았다. 그리고 다시 한손으로 영옥을 잡고 한손으로 부인의 손을 만지며 정신 없이 울었다.

밤은 깊었다. 만호장안의 즐거운 꿈은 수없이 많았지만 처 량한 소리는 두 사람의 울음뿐이었다. 조금 있다가 무서운 어둔 밤은 죽음을 가지고 가고 산 사람의 새 운명을 가져오 는 아침날은 뚜렷이 돋아왔다. 최 선생은 초종범절을 간단 하고 질소하게 차려서 사흘 만에 애고개 공동묘지에 무사히 안장하고 마지막 뗏장 속에 두어 줄기의 눈물을 뿌려서 영 원한 제물을 드렸다.

최 선생은 그 부인을 장사 지내고 일개월 동안을 지낸 뒤 로부터 영옥에게 한문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삼 년간을 계속 하였다. 영옥은 천품이 총명해서 한문을 배우기에 조금도 곤란이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보다 초월한 성적을 가 져서 한문으로는 고등보통학교 졸업생 이상의 정도가 되었다.

4[편집]

살같은 광음을 따라가는 영옥의 나이는 아홉 살이 되었다.

삼월 중순이 되어 신학기가 가까워 오므로 최 선생은 영옥 을 데리고 가서 여자 고등보통학교 부속 보통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입학에 쓰는 물품을 사게 되 었는데 자기 부인의 유언이 생각났다.

최 선생은 안방으로 들어가서 장롱을 열고 맨 밑에 있는 그 부인이 생전에 입던 명주 저고리를 꺼내어 놓고 양쪽 소 매를 만져 보았다. 오른편 소매 끝에 무엇이 들어 있는 듯 해서 그 소매를 뜯으려고 했으나 홀연히 마음이 아프고 손 이 떨려서 한참 동안 앉았다가 한숨을 짓고 저고리 소매가 상하지 않도록 실밥만을 빼고 돈을 꺼내었다.

돈은 십원짜리 지화 한 장인데 네 골로 접어서 처음에는 종이로 싸고 다음에는 얇은 명주 조각으로 싸서 풀어지지 않도록 실로 매어 놓았다. 최 선생은 지화를 들고서 감격하 고 처창한 회포가 새로웠다. 쏟아지는 눈물이 눈을 가리어 한 장의 지화는 그 부인의 병든 얼굴로도 보이고 무덤 속의 백골로도 보였다. 이때에 영옥이는 웃방에서 글을 읽느라고 아버지의 일을 알지 못했다. 최 선생은 한참 진정하고 나서 영옥을 데리고 나갔다. 먼저 구두전에 가서 구두를 사고 그 다음에 책과 연필과 입학에 상당한 여러 가지를 사가지고 돌아와서 영옥에게 구두를 다시 신겨 보았다. 영옥은 구두 를 신고 앉아서 그 아버지를 대하여,

『아버지!』

『이 구두를 무슨 돈으로 샀어요?』

『그건 왜!』

『글세 말예요. 무슨 돈으로 샀어요? 가르쳐 주세요!』

『네가 먼저 말해라. 그건 왜 묻니?』

『아버지 어머니가 하시던 말 잊었어요?』

『무슨 말인데?』

『어머니가 왜 돈 십원을 장롱에 있는 명주 저고리에 넣어 두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그래 그 돈으로 제가 학교 를 갈 때에 구두와 책을 사주라고 하셨지요. 아버진 잊으셨 어요?』

『그래, 그 돈으로 샀으면 좋겠다는 말이냐?』

『그렇지요, 어머니가 말씀하신 일인걸. 그 돈으로 사서 신 어야 제 맘에도 좋고 돌아가신 어머니도 좋아하시겠지요.

어머니가 무슨 일이든지 말씀하신 대로 하라고 하시지 않았 어요?』

최 선생은 영옥을 안아서 무릎에 앉히고 한손으로 영옥의 몸을 껴안고 한손으로 영옥의 구두 신은 발을 만지면서 영 옥의 치마에 아롱진 흔적을 내었다. 그것은 죽은 부인에게 대한 슬픈 눈물이 아니라 그 어머니의 유언을 잊지 아니하 고 그대로 행하려 하는 어린 영옥에게 대한 감격한 눈물이 었다.

최 선생은 눈물을 거두고 영옥이 신은 구두를 가리키며,

『영옥아, 이 구두가 그 돈으로 산 구두다. 늬 어머니 말씀 하던 명주 저고리 속에 있는 돈으로 샀다. 영옥아, 이 구두 를 아껴 신어라. 돈이 생기면 다른 구두를 한 켤레 사 줄테 니 그 구두를 신고 이 구두는 두었다가 이따금 신고, 명절 때에 늬 어머니 산소에 갈 때에 신어라. 그래야 늬 어머니 돈으로 산 구두를 오래 두고 신는다, 영옥아.』

영옥이는 대답도 않고 머리를 아버지의 가슴에 댄 채로 느 껴 울다가 울음을 그치고 저의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 그 돈으로 구두를 사서 제가 신은 줄을 어머니 도 아실까요?』

『늬 어머니가 말씀 안하시더냐. 왜 내 말대로 해야 죽은 혼이라도 눈을 감겠다고, 그래 혼이 있으면 아시겠지.』

『어머니가 아시면 좋아서 웃으실까요, 우리가 우는 것을 알고 어머니도 우실까요?』

『그러면 아버지! 울지 않을 테요. 아버지도 울지 마세요, 네?』

최 선생은,

『아 그렇지. 착하다, 우리 영옥이. 나도 울지 않지. 인제 어서 새 구두를 신었으니 조금 다녀 보아라. 발이 맞지 않 는가.』

『그저 말씀 마세요, 쉽고 안 쉽기는 내 장중에 달렸어요.

마땅한 사람이야 내가 선생님 성미를 모르나요. 내 맘에 맞 으면 선생님 맘에도 맞지요. 이 늙은이가 그렇잖아요, 엄송 이 맘송이 다 겪었답니다.』

『어디 마땅한 사람이 있거든 구해 보시우.』

『걱정 마세요. 왜 진작 그런 말씀을 안하셨어요. 에구, 속 상해 죽겠네. 진작 그랬으면 저 고생을 안하시지. 내가 벌써 여쭈어 볼 걸 그랬지. 에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공연히 돌 아다니느라고 말씀할 새가 없었읍니다그려.』

『과부도 여러 층이요. 여염집 살림하던 착실한 과부래야 되고, 남의 첩도 돌아다니던 거나 놀아먹던 것은 안 되오.』

『글세, 두말 마세요. 이 물건이 보기는 이래두 떡국이 농 간을 해서 하늘천 하면 따지 한답니다. 첩실로 다니던 거나 못난이를 얻어서 무얼 합니까. 집안 망하려고 그런 걸 얻어요? 또 그런 건 이런 데 오지도 않는답니다. 동지섣달에 손 을 호호 불면서도 인경꼭지를 만지러 다닌다나요, 엄청나게.

나도 지금은 장담 못해요. 성사한 뒤에 선생님께서 칭찬을 하셔야지. 그러구 그때 선생님이 쓴 담배 한 대를 주신대 두…… 그러나 주시긴 무얼 주셔……그럼 갑니다. 이따라두 오구 내일이라도 오지요.』

하고 노파는 활갯짓을 하고 갔다.

최 선생은 노파를 보내고 나서 두 무릎을 두 팔로 깍지껴 앉아서 먼 하늘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저 노파가 아무리 보아도 진실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는 데 내가 그런 부탁을 한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만일 적 당치 못한 사람을 천거하면 어찌하나. 아무리 천거한다고 하여도 내가 보아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파의는 하겠지만 그러노라면 다 창피한 일이 아닌가. 그뿐 아니라 내가 아무 리 살펴본다 하더라도 한두 번 보아서 어찌 사람의 속을 알 수 있나. 처음에 알지 못하고 얻었다가 여의치 못하면 그렇 다고 도로 내어 보내기도 어려운 일이요, 그래도 두자니 내 게만 고통이 될 뿐 아니라 어린 영옥에게 어찌하나. 꿈이라 는 것이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마는 마누라가 돌아간 뒤로 한 번도 꿈에 보이는 빛이 없더니 어젯밤 꿈에 보이는 바에 병 들었던 때의 얼굴로 근심스럽게 보이니 그것이 무슨 징조나 아닌가. 내가 사람을 얻으려고 뜻을 둘 때에 마누라를 생각 하였더니 주사야몽이란 말과 같이 그 생각이 꿈이 되었는가. 만일 마누라의 혼령이 영험이 있어서 나의 꿈에 보였다 하면 사람을 얻는 일에 대하여 자세한 말을 하였을 것이다.

그가 꿈에 뵈기만 하고 말을 안한 것이 무슨 이유가 있는가. 내 마음과 바꾸어 생각하면 이러한 이유가 있는가. 내 마음과 바꾸어 생각하면 이러한 이유가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가 유언할 때에 나에게 후취를 권고한 것이 아무리 진정 이라 할지라도 내가 후취를 하려고 결심한 때에는 그의 영 혼이 결단코 기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의 후취가 잘못될 것을 알면서도 짐짓 말을 안한 것인가. 그는 하도 어질고 진실한 사람이니까 아무리 죽었더라도 그러할 리가 없지만, 가령 내가 바꾸어 생각하는 마음과 같아서 다소간 나에게는 감정을 말할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영옥이를 위하여서는 자세한 말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무슨 까닭인가. 혹은 나에게 들어오는 사람이 과히 상업지는 안할 것인가, 그래서 말을 안한 것인가.

그러나 그 노파가 아무리 진실하지 못하더라도 나에게 혐 의가 없고 한데 구태여 적당치 못한 사람을 천거할 리가 있나. 노파도 모르고 천거하는 것이야 할 수 없는 일이겠지.

또 그러한 노파를 내놓고는 어디 부탁할 사람이 있나. 그런 일은 흔히 여자가 하는 일인데 상당한 남의 집 부인이 그러 한 소개를 할 리가 없고, 소개를 할 만한 사람이 있더라도 내가 알 수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숙명이 있다면 세상 일을 억지로 피할 수 없는 것이요, 또 모든 현 상이 우연한 사실이라 하면 복도 제가 구하는 것이요 화도 제가 구하는 것이니 모두 나의 운명에 관계되는 일이라 일 이 잘못된다 하여도 남을 원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렀을 때에 영옥이는 학교에 갔다가 책보 를 끼고 돌아와서 빙긋이 웃으면서 저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한다.

최 선생의 눈에는 새삼스럽게 영옥이가 예쁘고 불쌍하게 보였다. 영옥이는 책보를 방에 들여 놓고 부엌으로 들어갔 다 나오더니 저의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 왜 점심을 안 잡수셨어요. 제가 차려 와요?』

『네가 어떻게 밥을 차려 와. 그대로 두어라.』

『상을 먼저 갖다 놓고 그릇을 하나씩 가져오면 되지요.』

『그대로 두어라. 아직 먹고 싶지 않다. 조금 있다 저녁 해 먹지.』

『그럼 지금 밥을 안쳐 주세요. 제가 불을 때겠어요.』

『아직 멀었다, 조금 있다 하지. 어서 글이나 보아라.』

『아버지, 그전에는 제가 학교에 다니면 불도 못 때 드리 고, 아버지가 어떻게 혼자 조석을 하시나 하였더니, 학교에 다녀보니깐 관계 없을 것 같아요. 아침에 일찍이 밥을 해먹 고 학교에 갔다 와서도 한참 있다 저녁을 하게 되니깐 걱정 없어요. 아버지, 그렇죠?』

『그렇지만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을 해야지 조석할 때 에 심부름을 하면 복습을 할 수가 있나.』

『밤에 복습해도 실컷 해요. 학교에 가 배워 보니까 그리 어렵지 않아요.』

『지금은 처음이니깐 그렇지, 차차 어려운 것을 배우게 된 다.』

『차차 어려운 것이 나올 때는 저도 글이 늘어갈 테니까 관계 없어요.』

『너는 학교에나 잘 다녀라. 인제 밥해 먹을 사람을 얻겠 다.』

『아버지, 그럼 어머니가 말씀하던 그런 이를 얻나요? 그 이가 오면 제가 어머니라고 하나요?』

『그렇지, 너를 낳지는 않았어도 그도 어머니라고 한단 다.』

『그럼 어서 얻으세요. 어머니가 곧 얻으라고 하잖았어 요?』

『그래, 그이가 너를 미워하고 때려 주면 어찌하나?』

『하라는 대로 하면 괜찮지요. 이르는 말을 잘 들어도 때 릴까, 뮈?』

『이를테면 말이다, 때리기야 왜 때려, 어서 들어가 복습하 여라.』

영옥은 방으로 들어가서 책을 펴놓고 복습하였다.

최 선생은 우연한 영옥의 말이 동기가 되어 자기의 가슴바 닥에 한량없이 떴다 잠겼다 하는 문제의 근심을 그 근심 가 운데의 주인공인 철모르는 영옥에게 누설한 것이다. 이것은 최 선생이 어린 영옥에게 대하여 무슨 동정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오, 어떠한 처리 방법을 요구한 것도 아니지만 사 람의 인정은 스스로 이렇게 말하여진 것이다.

6[편집]

최 선생에게서 사람을 얻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노파는 무 슨 영광이나 본 듯이 마음이 기뻤다. 그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신이 나서 가슴에서 두방망이질을 하였다. 바쁜 걸음 으로 굼치 부러진 짚신짝을 끌어서 온 길바닥에 먼지투성이 를 만들면서 집으로 가서 한걸음으로 방에 뛰어들어가더니 석유궤짝으로 만든 농짝문을 벼락치듯 열어 젖히고 빨아 두 었던 버선을 내어 신고, 다시 몇 번이나 입다가 그대로 개 어 두어서 구김살이 자기 얼굴의 주름살보다도 많게 된 푸 르뎅뎅한 명주치마를 내어서 두 손으로 치마허리를 잡고서, 구리질을 하고 난 미장이의 수건 털 듯 하여서 허리에 두루 고 치마끈을 매면서 방문 밖에 나와서 비단 바탕인지 전 바 탕인지 알 수 없이 된 출입신을 뜰에다 태질을 쳐서 발가락 만 꿰고서 끌며 신으며 하는 채로 대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생각이 나서 들어와서 본래 입었던 치마를 벗어 놓았다. 그 러고 나서는 얼굴빛이 골낸 사람처럼 긴장하였다가 빙긋빙 긋 웃었다가 미친 사람 모양으로 달음질쳐서 삼청동 막바지 로 갔다. 조그마한 초가집 뜰아래 방으로 들어가서,

『전주집 보고 싶어서 눈이 다 진물뻔했구료. 벌써부터 한 번 오려고 했지만 죽으려야 죽을 날이 없구만. 그래 그새 못된 재앙은 속거천리하고 만사는 여의로다, 그렇지요? 하 하하.』

『에구, 이게 누구요, 음전 할머니 아니오. 오늘 무슨 바람 이 불었소. 해가 서쪽에서 돋겠네. 그새 태평하시오?』

『흥, 전주집도 젊어서는 예간다 제간다 하더니 이제는 춘 화노골이 다 되었소그려.』

『지금은 쓰레기통에 갖다 버려도 주워 갈 사람도 없게 되 었다우.』

『그래도 지금이라두 차리고 나서면 썩어두 준치지 무슨 말이요. 그까짓 여학생들에게 댈까, 맵시로만 본대도.』

『여학생 말이 났으니 말이지 여학생들 꼴이 요새는 어떤 지, 나는 집안에 들엎드려서 나다니지 아니하니 알 수가 없 어요.』

『여학생? 여학생의 꼴을 보느니 신첨지네 신꼴을 보지.

치마는 왜 그리 올라가고, 저고리는 왜 그리 길어지우. 그러 다가는 치마는 올라가서 저고리가 되고, 저고리는 내려가서 치마가 되려나 봐. 꽁지 빠진 새처럼 휘두르고 다니는 꼴은 꼴도 보기 싫어.』

『겉이야 어쨌든지 속만 깨끗하면 그만이지만 말을 들으니 까 우리네보다도 한술 더 뜨나 보던데.』

『한술? 한술만 더 뜨면 누가 좋게? 오백술도 더 뜨니 걱 정이지. 전주집 같은 이는 원래 길을 그렇게 텄으니깐 열 군데를 다닌대두 상관이 없소. 여학생은 학교 졸업을 하면 상등 사람이 된다는 것들이 그 모양이라우. 우리 동네두 학 교를 갈 만한 애들이 더러 있지만 본볼까 봐서 안 보낸답니다. 못된 여학생들로 하여서 다른 사람까지 공부를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지, 말할 것 무엇 있소. 우리게 당한 이야기나 합시다.』

『참 그렇지, 그런 말 해서 쓸데 있소. 그런데 전에도 그런 말을 더러 하였지만 전주집은 어떻게 하시려우. 어디 마땅 한 데로 들어가서 몸주체나 할 도리를 해야 안하우. 나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라 이렇게 혼자 있는 것을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안허우. 에구, 딱해, 그렇게 호화롭게 지내던 이가.』

『에구, 음전 할머니나 그런 말을 하지 누가 그런 걱정을 하겠소. 나도 세상 고락을 그만큼 겪었으면 무던하고 지금 여편네 나이 오십이 넘었으니 무엇을 바라우. 자식이 있으 니 자식을 바라겠소, 또 돈이 많으니 돈에 재미를 붙이겠소.

어디 그저 굶지나 않고 사람이나 마땅한 데가 있으면 가서 몸주체나 할 생각이 있소마는 무당 제굿 못한다고 내가 어 떻게 할 수 없고…… 에구, 다 괴롭소.』

『에구, 그렇지. 나는 말을 안해두 그런 생각이 있어서 혼 자 속셈으로 돋보았지마는 어디 마땅한 데가 쉽습니까. 한 데 마침 마땅한 데가 있어서 왔소마는 천주집 생각이 어떨 는지.』

『고맙소, 어지간하면 가겠소. 그새는 옷가지와 그릇 가지 를 잡혀서 그럭저럭 먹고 지냈지만, 이제는 할 수 없이 되 었소. 죽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 몇 번씩 나우. 어떤 사람이 요?』

『우리 동네에 있는 최 선생이라는 이인데 집은 넉넉지는 못하나 굶지는 않고 사람은 말할 것 없이 얌전하우. 글이 좋아서 선생 노릇을 하는데 글 배우는 애들이 돈을 적지 않 게 갖다 주나 봅니다. 그리고 식구라고는 딸 하나뿐이고 단 두 식구뿐이요. 들어만 가면 이 집안 어른이 누구냐 하고 마음대로 차치고 포치고 하여도 말할 사람이 어디 있고. 내 가 범연히 알고 말하겠소. 생각해 보시우.』

『그물이 천코라도 벼리가 으뜸이라고 대관절 사람을 보아 야 하지 않우. 나이는 얼마나 되었소?』

『그가 쉰인가 쉰하난가 그리 되었지. 아무튼지 전주집보 다 서너 살 아래 되니 그럼 내가 내일 저녁이라두 같이 올 까?』

『아무려나, 그리 해 보시오마는, 그런데……』

『그런데는 무얼 그런데, 무슨 새과부가 시집을 가나 어쩌 나, 그런데니 무에니 하하……나는 가우. 내일 저녁에 모양 이나 좀 내구, 먹을 것이나 잘 차리우.』

하고 노파는 가 버렸다.

전주집은 본래 전주 기생으로 서울에 와서 있다가 다섯 번 비참하게 된 것이다. 그는 상당한 자격도 있고 가무도 있어 서 기생 시대에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네 는 의지가 박약하고 너무도 조행에 대한 관념이 없으므로 남의 첩이 되어서 장구한 사랑을 받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래서 다섯 번이나 남의 첩이 되었다가 나중의 신세는 기 구하게 된 것이다.

기생과 첩이 법률의 제도로, 혹은 사회의 습관으로 이 세 상 음에 있어야 옳으냐 없어야 옳으냐 하는 것은 별문제이 고, 기생이 된 바에는 기생에 대한 지조가 있어야 되고, 첩 이 된 바에는 첩에 대한 조행이 있어야 된다.

그것은 여자를 속박하는 의미에서 여자의 정조에 대한 관 념에서 나오는 남자의 희망이 아니라 여자 자신을 위하여서 필요한 조건이다. 여자가 경제상으로, 또 정치상으로 완전한 해방을 얻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인류 평등의 원칙이다. 그러나 여자는 경제상의 독립과 정치상의 인권으로만 원만한 행복을 얻는 것이냐 하면 결단코 그러한 것은 아니다. 여자의 아름다운 행복은 순결하고 끊임없는 남자의 사 랑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임시적으로 생기는 깨끗지 못한 허튼 사랑은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많고 꽃 같은 언약보다 가시 같은 후회가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깨끗한 조행이 없 는 여자에게는 아름다운 사랑이 없는 것이다. 조행이 없는 여자에게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입술에서 나오는 사랑이요 가슴에서 나오는 사랑은 아니며, 눈앞의 사랑이요 등 뒤의 사랑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받 기 위하여, 가장 완전한 사랑을 받기 위하여, 가장 완전한 행복을 받기 위하여 가장 순결한 조행을 지킬 것이다. 이 세상에는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 자가 없는 것과 같이 남자도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정조는 여 자에 대한 도덕과 윤리의 관념을 떠나서라도 자기 원만한 행복을 받기 위하여 남자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주는 오직 하나의 방법이다.

가령 여자가 정수리에서 발꿈치까지 내버릴 것이 없을지라 도 다만 정조에 대한 부주의로 해서 비참한 지경에 빠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마 이 세상에 여자의 불행은 열에 아홉은 정조에 대한 결함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자의 불 행의 대부분은 순결한 사랑이 아닌 추잡한 정욕에서 나는 것이다. 그래서 조행이 없는 여자는 어떠한 형식으로 부부 의 관계를 유지한다 하여도 도저히 행복한 생활을 할 수가 없고 심하면 부부의 생활을 계속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주집은 불행히 지조가 없는 심한 사람 중의 하나이어서 늦게는 배가 고프고 등이 시려울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많은 사람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젊어서 여러 사람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젊어서 여러 사람의 손에 꽃이 되고 옥이 되던 달콤한 꿈이 혼자 누워 있는 차디찬 이불 속에 흔적이나 남아 있느냐? 과연 세상 사람의 사랑이 무정한 것이냐? 세상 사람에 대한 사랑이 무 정한 것이냐? 자기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였건만 모든 사람 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자기가 모든 사 람을 사랑한 까닭에 모든 사람도 전주집만 사랑하지 않고 모든 여자를 사랑한 것이다. 자기의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이 깊지 못하니만큼 모든 사람의 자기에 대한 사랑도 깊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사랑이 당년의 붉은 등잔 과 푸른 술에는 뜨겁기도 하고 넘치기도 하더니 지금의 눈 물 비치는 외로운 등잔과 허기를 면하려는 막걸리잔에는 그 림자도 없어졌다.

그러고 보면 자기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남보다도 무정한 것은 자기다. 꿈보다도 허탄한 것은 한때의 사랑이다. 그뿐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사랑 하지 않는 사람은 남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한때의 허튼 사랑은 영원의 고통이 되는 것이다. 참혹한 전주집은 그런 사람이었다. 나이 쉰네 살인데 할 수가 없어서 남의 집 뜰 아랫방을 얻어 모양 없이 지내는 것이다.

전주집은 노파를 보내고 꿈 같은 과거를 생각하고 한숨을 쉬었으나 할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여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7[편집]

노파는 전주집에서 나와 자기 집으로 갔다. 저녁밥을 두어 숟가락 먹고 미처 물도 안 마시고 최 선생에게로 가서,

『최 선생님, 저녁 진지 잡수셨어요?』

『네, 저녁 자셨소?』

『에구, 얌전하신 양반의 일이라 쉽게도 됩니다. 벌써 일이 다 되었겠지요.』

『무슨 일이 다 되었단 말이요?』

『무슨 일은 무슨 일이에요, 「옥상감」일 말이지요.』

『어느새 그렇게 쉽게 되었단 말이요, 어떤 사람이요?』

『네! 인물 예쁘구요, 맘씨 좋구요, 바느질 잘 하구요, 먹새 잘 하구요, 나이는 마흔일곱이구요, 열일곱에 혼자 되어서 지금까지 수절하는 과부구요, 그만하면 못 쓰겠어요?』

『그럼 나쁜 것은 하나도 없구료.』

『에구, 저런 말씀 보았나, 조금이라도 나쁘면 내가 왜 천 거한단 말요. 나는 평생 거짓말은 아니해요. 벼락을 맞으려 고 거짓말을 해요? 그리고 보시면 알 텐데 거짓말을 해요?

하늘이 내려다보십니다.』

『그렇게 할 말이 아닙니다. 누가 거짓말이라구 왜, 나쁜 것이 없다는 말이지. 그런데 그렇게 수절하던 과부가 어째 시집을 가려고 하우?』

『네, 그도 차차 나이 많으니깐 마땅한 데 있으면 몸주체 할 생각이 있구요, 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있나요. 내가 혀가 닳도록 말을 하였지요, 선생님이 마땅하다구.

그래서 겨우 허락이 났읍니다. 예사로 된 줄 아십니까.』

『그렇겠소, 어디 자세한 말을 좀 하오.』

『네, 사람은 그러하구요. 딸린 것은 하나도 없구요. 집은 남의 셋집에 있으나 살림살이는 다 있지요. 장롱도 화류장 은 아니라도 화류 담은 간대요. 그리고 옷가지도 다 짭짤하 고, 아마 말을 안해도 바느질 품 팔아서 돈냥이나 착실히 모았답니다, 눈치가. 그리고 자자한 세간은 많은가 봅디다.

그를 얻기만 얻으면 업이 들어오는 셈이지요. 그런데 중신 할매 말만 듣지 마시고 내일 저녁에 나와 같이 가서 봅시다. 그래 선도 보시고 또 선을 보이기도 해야지요. 가십시 다, 내일 저녁을 일찍 먹고, 네.』

『가기를 어떻게 가우, 데리고 와야지.』

『글만 좋아하시는 양반은 세상 일은 어두세요. 게가 구멍 을 찾지 구멍이 게를 찾나요. 장가를 가도 신랑이 가지 색 시가 오나요. 아무 말씀 마시고 내일 가세요. 그런데 그 거 미줄 같은 탕건과 맷방석만한 갓을 쓰지 마시고 모자나 사 서 쓰시고 좀 말쑥하게 차리세요. 머리도 하이칼라로 깎고 또 가셔서 소박맞지 마시고, 호호……』

『글세, 잘 차렸으면 좋지만 어디 돈이 있소?』

『설마 모자 살 돈이 없을라구요. 저런 큰글 하시는 양반 들은 뱃속에 딴 생각이 들어서 시체것들은 좋아 안하니 그 렇지요. 아무튼지 내일 가세요. 그런 자리를 놓치면 원통합 니다. 내가 애쓴 보람도 없구요.』

『글세, 내일 가볼까, 원 그런 데는 평생 가보지 않아서.』

『에구, 기생방에 나가시나베. 하하하, 내일 저녁 먹고 일 찍 오겠읍니다. 차리고 계세요. 네, 가겠읍니다.』

하고 일어나서 노파는 나가 버렸다.

최 선생은 노파를 보내고 나서 다소 감상도 있고 해서 망 설이기도 하였으나 기왕 일이 그렇게까지 된지라 아주 마음 을 기울여 버렸다.

이튿날 노파는 최 선생의 집으로 갔다. 최 선생은 밝아서 가는 것이 재미가 없어서 짐짓 머뭇거리다가 어두운 뒤에 노파를 따라서 전주집으로 갔다.

노파는 먼저 들어가서 전주집의 귀에다 무슨 말을 소곤거 리고서 마당에 섰는 최 선생을 인도하여 들어갔다. 최 선생 은 아랫목 북편으로 앉고, 언주집은 남편 벽의 중간에 동을 향하여 서고, 노파는 웃목의 중간에 아랫목을 향하고 앉았다. 전주집은 키는 호리호리하고 갸름한 얼굴은 파리하고 입술은 얇고 눈은 가늘고 눈자위는 푸르스름한데 얼굴을 조 금 남쪽으로 돌이키고 서 있었다.

세 사람은 한참 잠잠하였다.

노파는 전주집을 향하여,

『이건 초례청에 들어가는 색시요? 쪽도리 씌워 드릴까?

원삼 입히고. 어서 앉으세요, 야단스럽다.』

이렇게 말하고 눈을 끔쩍하고서 최 선생을 보았다.

최 선생은 전주집을 쳐다보며,

『앉으시지요.』

하였다. 전주집은 섰던 방향대로 왼편 무릎을 세우고 고요 히 앉았다.

최 선생의 전주집을 향하여 말문을 열었다.

『지금 무슨 생이세요?』

『……마흔일곱이에요.』

하고 전주집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

『들으니까 일찌기 과거해서 오랫동안 고생을 하셨다니 놀 라운 일이요.』

하고 최 선생은 열녀 표창식에 가서 식사하듯이 말을 하였다. 『고생이고말고요. 사노라니 오죽할 수가 있어요?』

하고 전주집은 얼굴을 조금 붉혔다.

『나도 팔자가 사나와서 중년에 상처하고 삼사년 동안을 혼자 있어 보았소마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

노파는,

『나는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야겠어요.』

하고 나가 버렸다.

『음전네 늙은이한테 말을 다 들었으니깐 다른 말은 할 것 없고, 대관절 생각이 어떠시오? 나는 가세도 구차하고 사람 도 변변치 못하오만 그역 다 인연이니까 마음나는 대로 말 씀하시오.』

하고 최 선생은 말을 계속하였다.

『……나는 몰라요. 누가 그런 일을 해 보았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나를 해롭게는 안 하시겠지요.』

하는 전주집을 최 선생은 두 손을 서로 비비면서,

『그러면 여러 말씀 할 것 없이 내일이라도 가시지요. 내 일 짐꾼을 데리고 올까요?』

하고 단언하여 버렸다. 전주집은 최 선생을 돌아다보고 빙 긋이 웃으면서,

『마음대로 하세요. 물어 보실 것이 무엇 있어요?』

하고 방바닥에 있는 종이 조각을 주워서 손가락으로 비볐다. 『그럼 일찍 쉬지요. 내일 짐꾼을 데리고 오겠읍니다.』

하고 최 선생은 나왔다. 전주집은 대문 밖에까지 따라 나 와서 전송하였다.

최 선생은 집에 돌아와서 복습을 하고 앉아 있는 영옥을 향하여 후처에 대한 일을 간단히 말하였다. 영옥이는 그 말 을 듣고 기뻐하였다.

그 이듵날 최 선생은 짐꾼을 데리고 전주집에 가서 약간의 세간을 지우고 전주집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때에 소개하던 노파를 불러서 약간의 돈냥과 무명필을 주어서 소개한 공로를 사례하였다. 전주집은 최 선생에게 와서는 민적을 하기 위하여 이름을 창숙이라고 지었다.

창숙은 자기의 역사를 감추려고 무척 고심하였다. 그러나 수십 년의 습관은 하루 아침의 거짓을 가리지 못하였다. 물 론 자기의 입으로 자기의 역사를 말한 일은 없지만 날이 갈 수록 자기의 행위를 자연히 심상한 언어 동작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최 선생은 속은 줄 알았지만 기왕에 결정된 일이라 어찌할 수가 없어서 구태여 묻지도 않았다.

창숙은 공연히 영옥을 미워하였다. 최 선생이 꺼려서 마음 대로 괴롭게 하지는 못했으나 기회만 있으면 꾸짖기도 하고 때려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옥은 저의 아버지에게 그런 사색을 보이지 않고 계모의 말에는 일일이 복종하였다. 그것은 영리한 영옥이가 계모의 미워하는 것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저의 계모에 대하여 현저히 나타나지 않는 눈치까지라도 미워하는 줄은 알았지만 어린 마음에 어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아름 다운 천성으로 어렵지 않게 참은 것이다.

창숙이의 욕심과 행동으로 보면 날마다라도 불평할 가정이 최 선생의 인내와 영옥의 유순으로 말미암아 비교적 평화스 럽게 지냈다.

영옥은 차차 커 갈수록 자색과 마음이 아울러 아름다왔다.

보통학교를 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졸업하던 해에는 대단치 아니한 신병으로 상급학교에 입학을 하지 못하고 집 에서 저희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그 다음 해에 여자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차차 삼년급 이 되었는데 영옥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8[편집]

하루는 종로 경찰서 형사가 와서 최 선생을 데리고 갔다.

최 선생은 형사를 따라서 종로 경찰서 고등계로 갔다.

고등계 주임이 최 선생에게 물은 요령은 다른 일이 아니라 최 선생이 상해에 있는 조선 혁명당과 연락하여 비밀 통신 을 하였다는 일이었다.

최 선생은 그 일에 대하여 절대로 부인하고 경찰서에 유치 되었다. 이것은 기미년 십일월 어느날의 일이었다.

종로 경찰서 형사들은 다시 최 선생의 집에 가서 가택 수 색을 하고 창숙과 영옥을 데리고 가서 먼저 창숙에게 무슨 말을 물은 뒤에 곧 돌려보내고 다음에 영옥을 불러서 최 선 생의 비밀 통신에 대한 일을 물었으나 영옥은 한결같이 모 른다고 하였으므로 영옥이도 유치하였는데 최 선생과는 다 른 곳에 두었다.

최 선생은 기미년 삼일운동이 일어난 뒤로 그 운동 당시에 참예하지 못한 것을 분개하였다. 최 선생은 천품이 진실할 뿐 아니라 한문의 소양이 있으므로 마음으로라도 충의를 숭 상하여 왔다. 자기가 물론 혁명의 선봉이 되어서 여러 사람 을 지도할 만한 힘은 없었지만 다른 사람이 국가나 사회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한다면 자기도 따라서 몸을 바치겠다는 생각은 있었으므로 삼일운동의 당시에 참예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 것이었다.

그후로도 여러 방편으로 삼일운동을 찬조할 만한 일을 경 영하려 하였으나 그의 학문적으로 얻은 지식과 재능은 시대 적이 아니었으므로 시사를 경영하는 여러 지사들과 용이하 게 통정되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불쌍히 여기다가 어느 사람의 소개로 상해에 있는 조선 사람의 혁명 단체와 연락 하게 되어 비밀 통신에 대한 책임을 맡아 보게 되었는데 상 해에서 오는 통신을 조선 안에 배포하고 조선 안에서 일어 나는 사정을 상해에서 알게 하여 실로 내외의 통신을 연락 하는 중요한 비밀 기관이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최 선생도 출입이 많고 최 선생의 집에도 사람이 많이 내왕하였는데 최 선생의 집은 방이라고는 아래 웃방뿐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오면 아랫방과 장지 하나가 막힐 뿐인 웃방에서 대객하게 되었으므로 여러 가지 일을 아무리 비밀히 한다 하여도 한집안에 있는 창숙이와 영옥이 가 모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최 선생은 자기의 비밀을 절 대로 창숙과 영옥에게 대하여 말한 일이 없지만 그들은 자 연히 새어 들리는 말로써 눈치로써 그 일을 알게 되었다.

「여자의 맹세는 모래 위에 서 있다」는 말도 있고,

「여자의 입에는 비밀이 없다」는 말도 있다. 여러 사람의 마음과 피를 기울인 뜻있는 사람의 참담한 경영과 몇 사람 의 운명을 한마디의 말로 바꾸어 놓을 만한 깊은 비밀이 가 증한 여자의 입에서 누설되어서 천추에 끼친 한이 되는 일 이 고금을 통하여 한둘이 아닌 것이다.

진실하지 못한 창숙은 우연한 부주의로 최 선생의 비밀 통 신에 대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게 되었다. 그로 말미 암아 경찰서에서 그 단서를 알게 되어서 최 선생을 불러서 심문한 것이다.

최 선생이 경찰서에서 자기의 일을 부인한 것은 자기가 책 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그리한 것이 나이라 그 일이 탄로되 면 많은 일이 낭패가 될 것이므로 단 한 사람의 좋은 일을 위하여 자기의 양심에 허락지 않는 거짓말을 한 것이니 바 꾸어 말하면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개인의 양심을 희생한 것이다.

이튿날 경찰서에서 최 선생을 불러서 무서운 형벌을 하여 가며 여러 가지 수단으로 고문을 하였지만 최 선생은 조금 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한결같이 부인하였다.

그 이튿날 경찰서에서 다시 최 선생을 불러놓고 가택 수색 할 때에 압수하여 온 증거 서류를 보이는 동시에 자백한 창 숙을 불러서 대질을 하였다.

그제야 최 선생은 면하지 못할 줄을 알고 광명정대하게 시 종을 말하였다.

경찰서에서는 하나라도 증거를 더 얻기 위하여 그 자리에 서 영옥을 불러서 최 선생과 창숙의 자백한 것을 말하고 사 실을 말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세 사람에게 대질을 시킨 형 식이다.

영옥은 유치장에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일은 실로 중대한 일이다. 이 일은 아버지의 운명에 막 대한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조선 민족의 전체에 중대한 영 향이 미치는 일이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이 일의 단서를 어 찌 알게 되었는가. 아버지와 그 동지에게서는 누설될 리가 만무하고, 만일 그 동지 중에서 먼저 잡힌 사람이 있어서 그의 입에서 탄로되었으면 동지가 잡힌 것을 다른 동지가 모를 리 없다. 그러면 그 일의 단서는 발각이 되지 않고 다 만 혐의자로 아버지를 불러서 묻는 중에 계모와 나도 같이 불러서 묻는 것인가? 그런데 의심나는 것은 계모의 일이다.

그와 나를 같이 불렀으니 그에게도 반드시 같은 일을 물었 을 텐데 그는 곧 돌려보내고 나만 유치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계모도 이 일을 모를 리 없는데 경관이 묻는 대로 사실 을 말했으므로 돌려보낸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일은 부인 하기가 곤란할 것이다. 계모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설 마 아버지를 보아서라도 사실을 말하였을 리는 없겠지. 그 렇지 않으면 그가 진정으로 이 일을 몰라서 경관도 그것을 양해라고 돌려보낸 것인가? 그렇다고 하면 절대로 모른다고 한 나는 어찌 유치했는가? 나는 조금이라도 교육을 받았다 하여 사실을 알더라도 용이하게 자백하지 않을 줄 알고 상 당히 심문을 하려는 것인가?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서는 아버 지는 결단코 자백하실 리가 만무하다. 나도 어느 지경에 가 더라도 내 입으로 비밀을 누설하지는 않겠다. 만일 경찰에 서 벌써 이 일의 단서를 알았다 하면 상당한 증거가 있을 것이다. 상당한 증거까지 있는 이상에는 직접 관계자가 아 닌 나를 유치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다만 혐의자로 만 인정된 듯하다. 그러면 아버지가 자백을 않고 내가 말을 안하면 무사할 것이다. 혐의자로 잡혔다가 무사하면 안 잡 힌 것보다 오히려 무방할 것이다. 나는 결단코 비밀을 말하 지 않겠다. 전일에 아버지에게 배운 말씀과 여러 선생님에 게서 들은 것을 진실로 시험하여 보겠다. 이것이 나의 세상 에 나서는 첫걸음이다. 세상에 나서는 첫걸음은 곧 미래의 운명을 개척하는 첫걸음이다.

꽃봉오리 같이 어리고 약한 영옥은 가시덤불 같은 경찰서 유치장에서 폭풍우 같은 경관의 심문을 받을 줄 알면서도 이렇게 당돌하고도 쾌활한 당당한 결심을 하였다.

영옥이가 저의 부모가 다 자백하였다는 말을 들은 것은 실 로 청천의 벽력이었다. 저의 정밀한 추측과 굳은 결심이 물 거품에 돌아갈 뿐 아니라 중대한 일의 낭패가 저의 아버지 의 비참한 운명에 대하여 번개 같은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 쏟아지는 눈물을 손으로 가리고 느껴가며 울 뿐이요, 한 마 디의 말도 안 했다. 심문하던 형사도 영옥의 거동에 대하여 동정을 금치 못하여 얼굴빛을 고쳤다.

경찰서에서는 그날의 심문은 끝났으므로 창숙과 영옥은 집 으로 돌려보내고 최 선생은 도로 유치하게 되었는데, 창숙 과 영옥은 먼저 내보내고 최 선생은 조금 있다가 순사를 안 동하여 유치장으로 보내었다.

최 선생은 순사를 따라서 유치장으로 가는 길에 영옥을 만 나서 순사가 보지 않는 틈에 영옥의 손수건을 빼앗아서 품 속에 감추고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최 선생이 먼저 나온 영 옥을 만나게 된 것은 이유가 있다. 영옥은 먼저 나왔으나 그 전날에 자기가 유치될 때 경찰서에 임치하였던 물품을 찾아가느라고 지체하였다가 공교히 저의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인데 저의 아버지가 저의 수건을 가져가는 일에 대하 여는 아무 마음도 없었고, 다만 유치장에서는 수건이 없으 니까 사사로 쓰려고 그러나 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최 선생이 가져간 영옥의 수건은 두어자 되는 명주 수건이었다. 영옥이가 경찰서에 임치한 물품이라는 것은 별 다른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경찰서에 유치되는 때에는 자 기가 가지고 있던 것은 무었이든지 유치장으로 가지고 가지 는 못할 뿐 아니라 허리띠, 대님, 옷고름까지라도 떼고 끈이 라고는 손바닥만한 것이라도 가지지 못하게 사용할까 하는 염려에서 나오는 일이다. 그러므로 영옥이는 유치될 때에 그와 같은 물품은 무엇이든지 임치하였던 것이다.

영옥은 경찰서로부터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번 일은 모두 계모에게서 탄로된 것이다. 전일에 계모가 나와 같이 경찰서에 불려 갔을 때에 심문을 마치고 먼저 돌 아간 것도 의심나는 일이요, 오늘 내가 고등계에 불려갔을 때에 아버지와 계모가 같이 앉아 있는 것은 필경 대질한 것 이다. 경관의 말에는 아버지와 계모가 다 자백을 하였다 하 나, 만일 당자인 아버지가 먼저 자백을 하였으면 계모와 같 이 앉아 있게 될 리가 없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자백을 안 하니깐 경찰서에서 할 수 없이 이미 자백한 계모를 불려서 면질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도 할 수 없이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정밀하게 생각하는 영옥의 추상은 사실 그대로의 반영이었다. 전일에 창숙이가 영옥과 같이 경찰서 에 불려 가서 먼저 취조를 받은 것은 물론 최 선생의 비밀 통신에 대한 일이었다. 전일에 창숙이가 영옥과 같이 경찰 서에 불려 가서 먼저 취조를 받은 것은 물론 최 선생의 비 밀 통신에 대한 일이었다. 창숙이는 처음에는 어름어름하다 가 경관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치면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벌벌 떨면서 아는 대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말해 버렸다. 그리고 경관이 자기의 말하는 대로 써 놓고 그 밑에 도 장을 찍으라 하는데 도장이 없어서 지장을 찍어 주었다. 그 리고는 경관이 웃으면서 좋은 사람이라 하고 집으로 돌려 보낸 것이다.

창숙은 최 선생과 대질할 때에도 처음에는 최 선생 얼굴을 보아 가면서 말을 잘 않다가 경관이 전일의 심문조서를 내 놓고 이렇게 지장까지 찍고서 딴 소리를 하느냐고 야단을 치는 통에 창숙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돌려서 최 선생은 안 보고 대강 말하였다. 그리고 맨 나중에,

『그렇지만 나는 자세 몰라요.』

하였으나 그것은 조금도 효력이 없는 말이었다.

영옥은 집에 돌아왔다. 영옥은 이번 일의 탄로된 원인이 창숙에게 있는 줄을 알아서 그에 대한 마음이 물론 전일과 달랐다. 그러나 영옥은 저의 아버지의 일이 어찌 될는지도 모르고 또한 그의 장래를 생각해서 창숙에게 대하여 그러한 사색을 현저히 보이지 않았다.

영옥은 여러 가지로 보아서 꽃이라면 사람꽃이요 사람이라 면 꽃사람이다. 전에 창숙이가 저를 미워하는 줄을 알면서 도 일일이 복종한 것으로 보아서 그의 성격이 유순한 것을 알 수 있고, 경찰서의 유치장에서 결심한 굳은 뜻으로 보아 서 그의 지개가 강경한 것을 알 수 있고, 이번 일의 시종에 대한 정밀한 추상으로 보아서 그의 두뇌가 명석한 것을 알 수 있고, 거의 아버지의 운명에 막대한 관계가 있는 일을 그르친 사람이 창숙인 줄 알면서도, 저의 아버지의 일과 저 의 장래를 위하여 사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 의 주의가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영옥은 밝은 구슬이라 하자니 보다 더 강하고 굳은 황금이 라 하자니 보드라운 것을 겸하였다. 영옥은 이런 성격의 소 유자였다.

밤이 되었다. 영옥은 웃방에 혼자 앉아서 여러 가지 생각 이 일어났다. 저의 아버지가 추운 유치장에서 어찌 지내나, 저의 아버지의 운명이 어찌 될 것인가, 저으 ldkqj지가 자백 을 하였으니 그 일에 대한 동지들이 모두 잡히게 되면 그 일은 전부가 파멸될 터이니 조선을 위해서도 그러한 불행이 있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새삼스럽게 저의 아버지가 수건 을 가져가던 생각이 났다.

그것을 어째서 가져갔나. 가져갈 때에 생각한 것과 같이 유치장에는 수건 하나라도 가져가지 못하므로 숨겨 두었다 가 필요한 때에 쓰시려고 그런 것인가. 그렇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유치장에서 수건이 그렇게 필요할 것도 없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순사에게 청해서라도 쓸 수가 있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성격이 그런 것을 몰래 감추어 두고 쓸 리 는 없다. 그러면 아버지가 평소에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데 그 일이 결말이 되기 전에는 오래 볼 수가 없겠으므로 나를 사랑하시는 의미로 수건을 가져간 걸까? 그도 그렇지 않다. 아버지가 마음으로는 아무리 나를 사랑하시어도 형식 에 있어서는 대범하시므로 그런 사소한 일을 행하실 리가 만무하다. 그러면 무슨 까닭인가? 영옥은 이렇게 생각하다 가 마침내 상당한 이유를 얻지 못하고 공연히 가슴이 두근 거리다가 그대로 누워서 잠이 들었다.

9[편집]

영옥은 이튿날에 아침밥을 지어서 저의 아버지에게 가져가 려고 밥을 지을 때에 재동 파출소에 있는 순사가 와서 이 집이 최 선생의 집이냐고 묻더니 영옥을 보고,

『지금 종로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는데 어젯밤에 최 선생 이 유치장에서 죽었으니 시체를 찾아 가라고 이르라고 해서 왔으니 어서 가 보시오.』

하였다. 영옥은 하도 뜻밖의 일이라 믿을 수가 없어서 다 시 물었다. 순사는 전과 같은 말을 한 번 더 하고서 가 버 렸다.

영옥은 정신 없이 달음질쳐서 종로 경찰서로 갔다. 저의 아버지가 죽어서 유치장의 한편에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영옥은 얼빠진 사람처럼 아무 말도 없이 유치장의 살창을 의지하고 섰다가 차차 울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렇게 슬프게 우는 것 같지 않더니 나중에는 주저앉아서 몸부림치 며 울었다. 순사들은 영옥을 만류도 하고 달래기도 하였으 나 영옥은 자기 아버지의 시체를 만지며 「아버지」를 부르 며 울다가 북받치는 슬픔에 가슴이 메어서 때때로 기절하였다. 눈물에 가린 영옥의 얼굴은 소낙비를 견디지 못하고 거 의 떨어질 듯한 한 송이의 꽃과 같았다.

인간 사회를 떠나 별세계라고 할 만한 무섭고 잔학한 조선 의 경찰서에 있어서 따뜻한 사랑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어 보이는 경찰관들도 거기에 이르러서는 영옥의 광경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서 동정의 눈물을 뿌렸다.

경찰에서는 다시 창숙에게 통지하였다. 창숙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최 선생의 시체를 운반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에 최 선생의 일이 각 신문에 게재되었다. 신문 을 보고 최 선생의 일을 알게 된 여러 사람들은 알고 모르 는 사람을 물론하고 혹은 금전으로 혹은 물품으로 보조하는 사람이 많았고, 동리 사람들은 몸으로 가서 극진히 일을 보 았다.

영옥은 너무 애통하는 중에도 상당한 예의를 갖추어 삼일 만에 저의 어머니의 무덤 옆에다 저의 아버지를 무사히 안 장하였다.

최 선생이 죽은 원인은 이러했다. 최 선생은 경찰서에 불 려간 뒤로 비밀 통신에 대하여는 자백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만일 그 일의 단서가 다른 곳에서 드러났든지 피할 수 없는 증거가 있어서 자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는 차라 리 죽는 것이 옳다. 가령 그 일을 말해서 화가 나의 한몸에 만 미친다면 족히 근심할 것이 없지만 그 일을 말하기 시작 하면 자연히 동지들에게 대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이 된다. 그래서 동지들이 잡히게 되면 그 일은 뿌리로부터 와해 될 것이다. 그러면 차라리 나 한 몸이 죽어서 동지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나는 죽더라도 동지들이 무사하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나는 죽더라도 동지들이 무사하면 그 일은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 결심한 최 선생은 죽을 방법에 대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최 선생이 창숙이와 면질하게 되는 때에는 마음으로부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또한 면하지 못할 줄을 알 았다. 만일 그 당장에서 구차한 말로 면하려고 하다가느 s 도리어 자기의 결심에 대한 만사가 와해될는지도 모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창숙의 자백한 일에 흥분된 최 선생은 결심 의 방향을 조금 고쳐서 그 일을 당당히 자백하였으나 자기 에게 대한 일만 말하고 동지에게 연유되는 일은 하나도 말 하지 않았다. 경관도 차차 심문을 계속할 양으로 그날은 그 만하고 만 것이다. 최 선생은 뜻밖에 비상한 경우를 당해서 결심의 방향은 조금 고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결심의 내용 은 더욱 견고하였다. 자기의 결심을 실행하기 위하여 죽을 방법에 주의하는 최 선생은 심문을 받고서 유치장으로 갈 때에 뜻밖에 수건을 들고 있는 영옥을 만나게 되었다. 최 선생은 영옥의 수건을 볼 때에 그것만 가졌으면 용이히 죽 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나서 그것을 다시 얻을 수 없는 기 회로 알았다. 그래서 가장 깊은 주의로 영옥의 수건을 가져 간 것이다.

최 선생이 영옥의 수건을 가져가는 비밀은 최 선생의 마음 속 심히 어두운 곳에서 숨어 있어서 이 세상에는 그것을 비 출만한 광명이 없었다. 다만 죽음나라의 빛 없는 광명이 그 것을 비출 뿐이었다. 영옥의 수건을 가져가는 찰나에 최 선 생의 마음에는 자기의 딸인 영옥이보다 자기에게 죽음의 기 회를 주는 은인 영옥이가 더욱 사랑스러웠다.

최 선생은 그 수건을 감추어 가지고 유치장에 있다가 밤이 깊은 뒤에 기회를 보아서 그 수건으로 목을 매어 무참히 자 살한 것인데……

이튿날 아침에 경찰 의사가 검시한 결과 목을 매어 자살한 것으로 판명되어 그 시체를 친족에게 내어 준 것이다.

경찰에서 최 선생이 목을 맨 수건의 출처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조사하였으나 마침내 알지 못하였다.

최 선생의 일이 신문에 발표될 때에 두어 자 되는 명주 수 건으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는 귀절이 있으므로 영옥도 비 로소 저의 아버지가 저의 수건을 가져갔던 이유를 알게 되 었다. 이것이 영옥의 가슴에 영원히 풀릴 수 없는 끼친 한 이 되었다.

10[편집]

최 선생이 죽은 뒤로 영옥의 신세는 더욱 가련하게 되었다. 영옥은 생활이 곤란할 뿐 아니라 창숙의 학대가 심해서 여러 가지로 고통을 받았다. 최 선생이 살았을 때도 창숙이 가 영옥을 미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 선생에 게 꺼리어서 현저히 학대하지는 못하였다가, 최 선생이 죽 은 후로는 거침없이 고통을 주었다. 영옥이도 창숙이가 저 의 아버지의 일을 탄로한 것을 안 뒤로는 창숙에게 대한 태 도가 전일같이 유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창숙과 영옥의 사이는 날로 멀어지고 날로 험하여졌다.

생활의 곤란과 창숙의 학대는 영옥에게 대하여 많은 고통 을 주는 동시에 따라서 많은 시련을 주었다. 여옥은 도저히 창숙의 학대가 견딜 수가 없어서 될 수만 있으면 그 지옥 같은 가정을 벗어나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주위의 사 정이 허락지 않아서 고픈 배를 쓰린 고통으로 채워 가면서 그날그날을 지내었다.

영옥은 고통에 세월을 보내는 중에 열아홉 살이 되었다.

그새에 다니던 학교도 무사히 졸업하고 사회 교육에 유의하 여 그새에 다니던 학교도 무사히 졸업하고 사회 교육에 유 의하여 잡지도 많이 보고 강연도 많이 들어서 상당한 상식 을 구비하였다. 또한 불교를 믿어서 신앙에 대한 마음도 깊 고 종교에 대한 지식도 있었다. 처음에 불교여자 청년회원 이 되고, 다음에 조선 여자 청년이 되었다. 이것이 영옥의 사회 생활의 첫 출발이었다.

영옥은 아름다왔다. 영옥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만한 형용 사가 없을 만큼 아름다왔다. 구태여 말하자면, 꽃을 부끄럽 게 하는 얼굴, 옥보다 깨끗함 마음, 비단결 같은 재조, 향기 로운 말소리, 적은 바람에 쓸리는 실버들 같은 태도, 그것을 합한 것이 꽃다운 나이 열아홉 살의 영옥이다. 영옥은 화장 도 않고 고운 옷도 안 입는다. 얼굴에 화장도 않고 몸을 꾸 미지도 않는 자연 그대로의 영옥이가 더욱 아름다왔다. 그 뿐 아니라 영옥의 얼굴은 화장할 수가 없고, 영옥의 태도는 꾸밀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영옥의 얼굴빛보다 고운 화장 품은 있을 수가 없고 영옥의 몸맵시보다 어여쁜 장식품은 아직 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 영옥은 꾸밀 수가 없는 까닭에 꾸미지 아니할수록 아름답다. 그러나 영옥이가 좋은 장식품으로 꾸미지는 않았 지만 검소한 옷을 되는 대로 입었더라도 영옥의 몸을 가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그 옷에 가리어 있는 가장 꾸미지 않은 정도는 상상할 수가 없더라도 반드시 옷 위에 나타나 는 아름다움보다 이상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은 의심이 없 는 일이다. 혹은 인간이 가지지 않은 무슨 비밀이 있지 않 은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영옥에게 대하여 드러난 태도로 칭 찬하는 마음보다 숨은 태도를 그리워하는 생각이 많았다.

이것이 영옥에게 행복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러나 영옥이가 화장을 안하고 몸을 꾸미지 않은 것은 자기 의 아름다운 태도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 아니라, 아무쪼록 몸을 솔직하게 가져서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지 않고자 한 것이다. 만일 영옥이가 화장과 장식을 않는 것이 오히려 자 기에게 아름다운 것이 되는 줄을 알았으면 도리어 얼굴에 화장을 하고 좋은 장식품으로 몸을 꾸몄을는지도 모르는 것 이다. 세상 사람들은 영옥의 자태가 아름다운 것만을 알고 영옥의 마음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영옥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언제까지든지 혼자 가지 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그것을 쓸데없이 버려 두고자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청혼 을 받게 되었다. 여자가 상당한 연령에 이르면 결혼하는 것 은 물론이다. 무르녹은 청춘을 안고 있는 영옥은 여러 사람 의 청혼에 대하여 자극을 안 받을 수 없었다.

영옥이가 자기의 결혼에 대한 일을 생각할 때에 어떠한 남 자에게 결혼을 해야 좋을까 하는 것이 처음에 일어나는 생 각이었다. 그래서 먼저 자기 어머니의 유언을 생각하고 자 기의 마음으로 이렇게 비판하여 보았다.

여자가 결혼할 때에 남자를 구하는 것은 자기의 취미를 따 라서 여러 가지로 다를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돈 많은 남자를 취하는 것이요.

하나는 인물 좋은 미남자를 취하는 것이요.

하나는 인격 있는 남자를 취하는 것이다.

물론 세가지를 겸한 남자면 이상적이지만 겸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재물과 인격은 용이 합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재물이 없으 면 인격이 있고 인격이 있으면 재물이 없는 것은 고금에 나 타나는 사실로 보아서 무슨 진리인 듯도 하다. 돈 있는 사 람 대부분은 인색한 수전노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랑자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보」나 바보에 비슷한 것이다. 돈과 인 격을 겸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돈 있는 사람이 인격을 가 진 것이 아니라 인격 있는 사람이 돈을 가진 것이다.

인물 좋은 미남자는 인격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그것도 겸하기 어렵다. 천재는 병신이 많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 는 것이요, 철저한 지사는 흔히 괴퍅하게 생기지 않으면 기 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남자 중에는 부랑자나 유야 랑이 많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심지가 박약해 서 거친 세상을 밀고 나갈 만한 무슨 용기가 적다. 그러므 로 미남자가 인격을 가지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부자와 미남자가 인격을 가지기 어려우니만큼 인격 있는 사람이 돈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기가 어려운 것이다. 인 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당한 일을 하는 것이니 상당한 일 이라는 것은 자기의 사리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 여러 사람 의 공익을 위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자는 자기의 살 림을 위해서 재물을 가지게 된 것이요, 인격 있는 사람은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공익을 위하는 까닭에 돈을 모을 수 가 없는 것이다. 인격 있는 사람의 돈을 모으는 수단이 부 자보다 나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격 있는 사람이 쓰는 돈이 부자의 모은 돈보다 많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 가지를 겸한 남자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 이 아니다. 세 가지를 겸한 남자가 없다고 결혼을 안할 수 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세 가지 중 어떠한 것을 취할 것인가? 돈 있는 사람은 취하는 것은 결단코 이유가 없는 것은 아 니다. 지금 제도에 있어서는 돈이라는 것이 사람의 생활에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생활은 사람의 중요한 일이다. 그러 므로 돈을 취하는 것이 괴이치 아니할 듯하다. 그러나 돈은 인제까지라도 있는 사람이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하 루아침에 가난하게도 되고 가난한 사람이 졸지에 부자도 되 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와 결혼한다고 항상 부자 되고 다 른 사람과 결혼한다고 반드시 굶고 벗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인색한 부자의 아내가 오히려 인색치 않은 가난한 사람의 아내보다도 재산에 대한 권리가 없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다른 조건 없이 다만 돈만 탐하여 결혼하는 것은 정 신상으로 보아서 돈에 팔려 가는 것이다. 자기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고 물건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그런 비루한 일 을 상당한 사람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상당한 조건이 없이 예쁜 얼굴만을 취하여 결혼하는 것은 별로 이유가 없고 다만 정욕에 대한 비열한 관념에서 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욕에 대한 사치품이다. 그것은 부랑 자가 첩을 두는 것처럼 타락한 여자가 남첩을 두는 것과 같 은 의미다. 얼굴만을 취하여 결혼하는 것은 아무 가치 없는 하열한 일이다. 그뿐 아니라 미남자는 자기의 얼굴이 예쁘 다고 반드시 그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예쁜 남편에 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차라리 박색의 남편에게 소박 을 당하는 것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다. 하물며 보통의 인물에 사랑받는 것이 미남자에게 소박을 받는 것보다 얼마 나 행복이 될까?

그러고 보면 상당한 인격을 취하는 것이 가장 마땅한 일이다. 가령 상당한 인격으로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서 돈을 모 으지 않고 천품의 관계로 미남자가 아닐지라도 공익을 위하 여 돈을 모으지 않는 인격만큼 비참한 군속은 없을 것이요, 자기가 미남자가 아닌 만큼 아내를 사랑할 것이다. 남편에 게 아름다운 사랑을 받는 것은 여자의 생명이요 행복이다.

설사 돈이 많고 암다운 남편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에게 사 랑이 없으면 만사가 물거품에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조금 구차히 지내고 그렇게 뜨거운 사랑은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상당한 인격을 가진 남편을 섬기는 것은 여자 자신에 있어 서 책임인 동시에 광영일 것이다. 하물며 부부가 마음과 힘 을 같이하여 상당한 사업을 이룬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랴.

영옥은 이러한 의미로 생각해서 상당한 인격을 가진 남자 와 결혼하기로 결론하였는데 그 결론이 자기 어머니의 유언 과 일치하게 된 것을 더욱 기뻐했다.

11[편집]

하루는 성열이가 영옥을 찾아와서 이야기를 하다가 성열은 연애에 대한 말을 했는데 연애는 절대 자유라는 것을 주장 하고, 진정한 사랑에 있어서는 정식 결혼이 아니라도 관계 가 없다는 의미로 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영옥은 그 말에 대하여 동정을 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반대의 의미 로 말을 하였다. 성열은 말머리를 돌리어 영옥의 생활에 대 한 일을 물었다. 영옥은 사실대로 구차한 것을 말하였는데 성열은 오백원의 소절수를 내놓으면서,

『이것 실례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받아 쓰시기를 바랍니 다.』

『어쩐 돈을 이렇게 주세요?』

『무슨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이나 사 보실까 하 고 드리는 겁니다.』

『감사합니다만 책자는 아직 볼 것이 있습니다.』

『그야 책이 꼭 없다고 해서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호의로 드리는 것이니 호의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주시는 뜻에 대하여는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상당한 이유 없이 이런 많은 돈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미안하 지만 도로 거두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만일 이것을 받지 않으 시면 저에게 부끄러움을 주자는 것입니다. 용서하시기를 바 랍니다.』

『이것을 주시는 것은 저에게 모욕을 주시는 것입니다. 저 는 여자의 신분으로 이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가 없읍니 다.』

영옥은 흥분된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 거동은 냉담해서 범 하기 어려운 빛이 보였다.

성열은 조금 부끄러운 빛을 띠고,

『감사합니다. 이것을 받지 않으시는 것이 받으시는 것보 다 더욱 감사합니다. 받지 않으시는 것이 저를 사랑하는 것 인 줄로 알겠읍니다. 많은 교훈을 받았읍니다. 아무쪼록 길 이 사랑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을 내 손으로 도로 가지고 갈 수는 없읍니다.』

하고 소절수를 그대로 두고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

성열은 다옥정에 사는 부자 정동지의 독자인데 당년 스물 세살 된 청년으로 미남자의 평판을 받는 사람이다. 열다섯 살에 장가를 들어서 아들을 둘이나 낳고 일본에 가서 조도 전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돌아온 뒤로 낭만주의의 시인을 자 처하여 글을 쓰면 「오오!」「아아!」「사랑의 불꽃에 타는 가슴」「진주 눈물」이러한 귀절을 흔히 쓰고, 입을 열면

「연애는 신성」「정조는 유동(流動)」, 이런 말을 많이 하 는데 화류계에도 범연치 않고 여학생깨나 좋이 결딴을 내었다. 성열은 몇 달 전에 돈의 힘으로 경성 신문사의 편집국 장이 되었다. 형사와 신문 기자는 일반 사람이 재미없이 아 는 것이지마는 일부 여자계에서는 더욱 그러는 것이다. 바 꾸어 말하면 형사와 신문 기자는 화류계에 대하여 특수한 권위를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성열이가 편집국장이 된 것도 그런 의미가 십분의 육칠이 된다.

성열이가 영옥을 알기는 약 이개월 전의 일인데 경성 신문 사회 주최로 열리는 여자 웅변대회에서 영옥이가 사회를 하 였으므로 그 기회를 타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성열이가 영 옥을 알게 된 뒤로 영옥에게 대한 욕심이 불같이 일어났었다. 그래서 영옥을 여러 번 찾아가서 갖은 수단으로 그 마 음을 움직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번에는 돈으로 영옥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으나 또한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영옥은 성열을 보낸 뒤에 그 소절수를 불에 던지려다가 남 의 재물에 대한 것이므로 어찌 될는지 알지 못하여 책상 서 랍에 넣고 쇠를 채우고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성열은 더러운 남자다. 나를 여러 가지 수단으로 농락하려 다가 마침내 돈으로 나의 마음을 사려 하였다. 사랑은 수단 과 돈으로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수단과 돈으로 구 한다 하면 그것은 한때의 정욕이요, 정당한 사랑이 아닐 것 이다. 상당한 여자에게 사랑을 얻기 위하여 그런 방법을 쓰 는 것은 여자의 인격을 무시할 뿐 아니라, 자기 인격의 비 열한 것을 스스로 보이는 것이다. 성열은 비열한 남자다. 영 옥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스스로 흥분되었다.

성령릉 영옥의 집에서 돌아간 뒤로 분하기도 하고 부끄럽 기도 하였다. 그러나 따라서 더한 것은 영옥을 사랑하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영옥의 태도가 냉담할수록 성열의 욕심은 견딜 수 없이 뜨거웠다. 성열은 견디다 못하여 영옥에게 직 접 교섭하기로 결심하고 수일 후에 다시 영옥을 찾아갔다.

성열은 영옥을 만나서 다소간 주저하다가,

『영옥씨! 나는 여옥씨를 사랑합니다. 영원히 사랑하고자 합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나는 아직 사랑에 대한 이해가 없 읍니다.』

『그런 말씀에 대하여는…… 무엇이라고 말할는지 모르겠 읍니다. 그러나 나는 영옥씨를 사랑하지 못하면 생명이 없 는 사람이 되겠읍니다.』

『나는 사랑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그런지 성열씨를 사랑 하겠다는 마음은 없읍니다. 가령 성열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성열씨는 기왕 취처해서 아들까지 않은 터인즉 나 에게 대한 사랑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지극히 신성한 것이어서 사람의 종류를 가리는 것이 아닙니까. 기혼 미혼이 무슨 관계가 있읍니 까?』

『그것은 창녀에게나 할 말씀이 아닌가요?』

『그것은 여자의 정조를 무시하는 말은 아닙니다. 여자의 정조는 반드시 최초의 정식 혼인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자가 어떠한 사람을 사랑하든지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변치만 않으면 그것이 정조입니다. 그뿐 아니라 철학적으로 본다면 편협한 정조라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러면 여자가 남의 첩이 되든지 일시로 만나든지 한 남 자가 여러 여자를 사랑한대도 여자가 한 남자만을 사랑하면 정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를 인격으로 보지 않고 기계로 보는 것입니다. 여자 해방이 되는 오늘날 에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순전한 이론으로 하는 말이요, 영옥씨에게 무슨 조건을 붙여서 사랑을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영옥씨 가 나를 사랑하기 위하여 무슨 조건을 붙인다면 나는 어떤 희생이라도 아끼지 않겠읍니다. 나느 영옥씨를 사랑하기 위 하여 나의 아내와 이혼할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어느 여자든지 자기가 남자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 남자 로 하여금 본 아내를 이혼케 한다면 그것은 도덕상으로 보 아서 할 수가 없는 일일 뿐 아니라 사랑으로 말하여도 자기 를 사랑하기 위하여 본 아내와 이혼하는 남자는 그 다음에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를 버릴 것입니다. 그것 은 이론이요, 나는 뭇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폐일 언하고 나는 성열씨를 사랑할 마음이 없읍니다.』

『영옥씨, 나를 사랑하지 않으려면 나의 생명을 가져가시 오.』

『사랑은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으 로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영옥씨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나는 영옥씨를 사랑하는 사람을……「사랑」할 수가 없읍니다.』

『……소리가 있으면 메아리가 있고 꽃이 있으면 열매가 있읍니다.』

영옥은 말을 마치자 마자 시표를 내어 보이면서,

『시간이 없어서 실례하겠읍니다.』

하고 일어서려니깐 성열이도 마지못하여,

『실례하였읍니다.』

하고 가 버렸다.

영옥이가 성열의 말을 듣기 싫은 것도 사실이지만 시표를 보고 시간이 없다고 한 것은 성열을 보내기 위하여 거짓으 로 꾸민 것이 아니라 실로 조선 여자청년회의 임시 총회에 가는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12[편집]

영옥은 그 회에 가서 있다가 우연히 종철을 알게 되었는 데, 종철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법과에서 하학하고 자기의 여관으로 가는 길에 누구를 보려고 그 회에 들어갔 다가 영옥을 알게 된 것이다. 종철과 영옥은 인사하기는 처 음이나 그 이름과 얼굴은 서로 듣고 본 지가 오랬던 것이다. 영옥은 특별한 미인인 동시에 조행과 재조가 아울러 아 름다왔으므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종철은 풍골이 수려하고 의기가 당당해서 남녀 학생계에서 상당한 평판이 있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종철은 영옥을 보고, 영옥은 종철을 보았다. 이러한 두 사람은 인사할 때에 형식에 있어 서는 심상하고 고요한 맑은 물과 같았지만 정신에 있어서는 이상해서 스스로 흔들리는 마음의 물결이 일어났다.

종철과 영옥은 그 후로 여러 번의 내왕이 있었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심상한 언론이 있을 뿐이요, 태도는 극히 공경 하였다. 그러나 만남을 거듭할수록 알지 못하는 중에 그들 의 사랑의 실은 가닥이 많아지고 매듭이 굵어져서 도저히 풀 수가 없이 되었다. 언제든지 종철의 마음에는 영옥이가 있고 영옥의 눈에는 종철이가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를 막 은 모든 장애물은 수정 같은 수정체가 되어서 마음으로 비 추는 그들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에 대한 말과 행동은 조금도 없었다.

초가을의 어느날 다 저물어 가는 저녁때였다. 종철과 영옥 은 기약치 않고 파고다 공원에서 만나서 거북비가 있는 북 진으로 나무 밑에 놓여 있는 긴 교의에 같이 앉았는데, 이 른 가을 바람에 처음으로 붉은 적은 단풍이 나무 사이를 통 하여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영옥은 종철을 향하여,

『저 단풍은 곱고 좋기도 한데요.』

『단풍이 그렇게도 좋아요?』

『좋지 않습니까? 꽃보다도 더 고운데요.』

『단풍은 아무리 고와도 그것은 소슬하고 처량한 가을빛입 니다. 나는 그런 단풍을 사랑치 않고 아름다운 봄에 피는 좋은 꽃을 사랑합니다.』

『봄에 피는 좋은 꽃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자기를 위 하여 사랑하는 것이요, 꽃을 위하여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은 날이 많이 있는 봄꽃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스스로 사랑할 수가 있읍니다. 그러나 모든 빛을 거두어 가 는 가을 바람에 마지막 빛을 내는 고운 단풍은 스스로 사랑 할 수가 없읍니다. 나는 스스로 사랑하지 못하는 가을 단풍 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만일 단풍을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하 는 자기를 위하여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영옥씨 가 단풍을 사랑한다면 나도 꽃을 사랑하지 않고 단풍을 사 랑하겠읍니다.』

『……』

그 사이에 해는 저물고 상현달이 비쳤다. 종철은 청년 남 녀가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공원에 같이 앉았는 것이 영 옥을 위하여 미안하고 또는 사랑하는 영옥을 쓸쓸한 가을 저녁에 차고 단단한 나무교의에 오래 앉았게 하는 것이 안 타까와서 일어나자고 하였으나 말은 아직 다하지 못한 귀절 이 있었다.

『아마 내 말이 조금 과해서 실례가 되었는지 모르겠읍니다. 왜 대답을 안하세요?』

하는 종철은 먼저 말이 조금 과해서 영옥을 핍박했는가 하 고 뉘우치는 동시 가엾이 생각하였다.

『아니에요. 어떻게 대답을 할는지 생각하느라고 그랬어요.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미안스럽게.』

하는 영옥도 자기가 대답하지 않은 것을 뉘우쳐 보았다.

『영옥씨, 나는 영옥씨를 만난 뒤로 한시도 영옥씨를 잊을 수가 없었읍니다. 나는 영옥씨를 그만큼 사랑합니다. 그런 줄이나 알아 주세요. 만일 영옥씨가 나의 사랑하는 마음을 알아만 주신대도 나에게는 영광입니다.』

『나도 종철씨를 뵈온 뒤로 자연히 마음에……용서하세요.

말할 수가 없어요.』

영옥은 말소리가 조금 가늘고 떨리면서 이렇게 대답할 때 에 조금 소곳하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그의 얼굴에 때아닌 도화가 피었다가 사라지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다만 얇은 구름을 거쳐서 두 사람을 비추는 달빛과 나 무 사이로 스며나와서 영옥의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만이 그 것을 보았다.

종철은 영옥의 말이 끝난 뒤에 빙긋이 웃고 조금 잠잠하였다. 그것은 영옥의 다하지 못한 말은 마음으로 들었다는 표 정이었다.

영옥을 향하여 후일을 기약하고 서로 손을 나누었다.

영옥은 자기가 싫어하는 성열을 대해서도 사랑에 대한 말 을 할 때 조금도 수줍음이 없이 당당히 말을 하고, 종철을 대해도 다른 말을 할 때에는 명쾌한 변론으로 유창히 말하 었다.

그런데 가장 사랑하는 종철을 대하여 사랑에 대한 말을 할 때는 혀가 무겁고 가슴이 떨려서 말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에 대한 말을 하는 것은 입술 끝에서 떨어지는 심상한 이론에 지나지 못 하는 것인즉 조금도 마음에 관계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 나 끝없이 사랑하는 사람, 그중에도 아직 사랑을 이루지 못 하여 많은 장래를 꿈꾸고 사랑을 이루고자 하는 그 사람을 대하여 사랑의 말을 하기에는 너무도 기쁘고 마음이 졸여서 말의 순서를 이루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사랑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이다. 마음에 가득찬 진정한 사 랑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영옥은 혼자 생각할 때에는 사랑의 말이 바다같이 많았지 만 종철을 대하여 말을 하려 할 때는 한 마디도 없던 것이다. 영옥은 종철을 대하여 사랑의 말을 한 것보다 가슴이 떨려 서 말을 하지 못한 그것이 종철을 사랑한 것이다.

영옥은 종철에게 사랑의 말을 할 때에 갑작스럽게 부끄러 웠다.

영옥은 물론 얼굴이 예쁘고 두뇌가 명민하고 교제가 비교 적 쾌활하였다. 그것이 다 영옥의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끝없이 아름다운 것은 영옥의 부끄러움이었다. 그 중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여 수줍어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아람다움이다. 만고의 영웅 호걸들이 여자를 이기지 못한 것은 여자의 예쁜 얼굴을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여 자의 보드라운 마음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영옥은 겉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아름다움 가운데 드러나지 않은 부끄러 움과 수줍움과 보드라움이 있었다. 그것은 세상 사람이 알 지 못하는 영옥에게 숨어 있는 비밀의 아름다움이었다.

13[편집]

성열은 영옥에게서 여지없는 거절을 당하고 돌아가서 분하 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그래서 영옥을 미워하고 그 네에 대한 일을 단념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워하고자 하는 마음에 나타나는 영옥은 더욱 예뻐지고 끊고자 하는 생각은 그리운 생각보다 더 괴로왔다.

그러한 경우에 있는 성열은 힘과 돈을 다해서도 영옥을 사 랑해 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으로 교섭할 수 없는 것으로 각오하였다.

성열은 전일에 영옥을 찾아 다닐 때에 자연히 창숙을 알게 되었으므로 창숙과 영옥의 관계를 알았다. 성열은 창숙을 두어 번이나 청하여 후대를 하고 적지 않은 돈과 피륙을 주 어서 그의 마음을 샀다.

그 뒤에 성열은 창숙을 청하여 영옥에 대한 말을 자세히 하였다.

자기가 영옥을 양첩으로 얻을 말을 하고 만일 영옥이가 양 첩 되기를 좋아 않으면 본처와 이혼이라도 하겠다는 말을 여러 번 하면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영옥을 소개하여 자기 의 뜻을 이루어 주면 일평생을 유족히 살 만한 많은 재산을 주기로 하여 창숙의 승락을 얻었다.

창숙은 성열의 부탁을 받은 뒤로 영옥에게 대하여 여러 가 지 수단으로 말을 하여 보았으나 영옥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성열의 침모도 아니고 차집도 아니고 그리저리 드나들며 얻어먹고 있는 사십여 세의 여자가 있는데 그 집에서는 그 들 대접하여 침모라고 부른다. 그는 눈치도 빠르고 익살스 러운 구변이 있어서 무슨 일에든지 소개도 잘하고 방해도 잘한다. 성열은 그 침모에게 영옥에 대한 말을 하여 창숙에 게로 보냈다.

영옥은 창숙의 명령으로 바느질을 하고 앉았을 때 그 침모 가 들어왔다. 창숙은 대단히 반갑게 침모를 맞아서 아랫목 에 앉히고 침모를 대하여,

『요새는 어찌 지내시오?』

『나는 정동지댁의 덕택으로 아주 잘 지내지요.』

『정동지네가 참 부잔가 봅디다.』

『부자고말고, 아주 큰 부자랍니다. 그 집에는 없는 것이 없고 논밭전지가 수를 모른답니다. 그래서 그 집 덕으로 얻 어먹고 사는 사람이 수없이 많답니다.』

『그런 큰 살림을 누가 다 알아 하우?』

『정동지는 늙어서 그 외아들에게 온통 맡겼답디다. 그래 서 그 아들은 돈을 물쓰듯 하고 일본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와서 무슨 신문사를 도맡아 해서 신문을 맘대로 낸답니다.

그리고 안살림은 시어머니를 아른체도 안하고 모두 며느리 가 쇳대를 맡아 가지고 이럭저럭 한답니다.』

『그런 집 며느리가 된 사람은 복도 많기도 하지.』

『복인들 그런 복이 어디 있단 말유. 그래도 본래부터 내 외 금슬이 좋지 못하답니다. 그런데 요새 와서는 아주 좋지 못해서 아내 방에를 한번도 들어가지 않는답니다.』

『그렇게 돈 많은 이가 아내만 바라고 있겠소. 다른 데 치 거한 사람이 많겠지.』

『에구, 그런 말씀 마세요. 당초에 그런 일이 없답니다. 그 이가 그렇게 돈이 많고 젊은이라도 다른 여편네 치맛고리도 만져 보지 않는답니다. 그것은 내가 꼭 알지요. 그래서 기생 들이 그의 돈을 좀 먹으려 하여도 한푼도 못 먹는답니다.

시속 사람은 아니지요.』

『그런 이가 왜 아내에게 정이 없을까. 그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게지.』

『그런데 그이가 마땅한 여학생이 있으면 양첩을 얻을 생 각이 있답니다. 그래서 아주 호강을 시키고 잘 살아볼 생각 인가 봅디다. 그래서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돈은 얼마가 들 든지 얻으려는 눈칩디다.』

『그러면 요새 여학생이 좀 많소. 왜 마음대로 하나 고르 지.』

『여학생이면 다 여학생인가요. 요새 여학생은 성한 사람 이 별로 없답니다. 남의 첩이 되려고 눈이 벌개서 돌아다니 는 여학생이 수두룩하지만 그이는 그런 여학생은 눈꽁댕이 로도 안본답니다. 그런 것들을 얻으려면 하루에 열이라도 얻고 백이라도 얻지.』

『그럼 어떤 사람을 구한단 말이요. 아마 천상 선녀를 구 하는 게지.』

『그이는 아주 얌전한 이라, 꼭 자기 같은 사람을 구한답 니다. 인물 좋고 똑똑하고 깨끗하고 그런 사람을 고른답니다. 그런 마땅한 사람만 있으면 그 재산을 반을 갈라 가지 고 아내처럼 살려나 봅디다. 양첩은 보통 장가처보다 낫답 니다. 양첩이 좀 좋아요? 요새 여학생은 양첩자리도 별로 없어요. 말 말아요.』

『그렇고말고, 양첩이야 어때요. 양첩은 아내나 일반이지요. 그러면 그가 장가처에게 금슬이 없다니까 양첩을 얻어 가지고 본 아내처럼 데리고 살 모양이요그려!』

『그이가 양첩을 얻으면 큰집 살림을 통째 맡기려나 봅디다. 그리고 본 마누라는 따로 집을 사서 살리려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양첩으로 들어오는 이가 큰마누라 있는 것을 좋 아하지 않으면 본처는 아주 이혼할 생각인가 봅디다. 요새 세상에는 맘대로 아내를 떼고 붙이고 한답니다. 어 말은 우 리끼리 하는 말이지 말이 나면 안됩니다.』

『에구, 여간 복으로 그런 데를 들어가겠소. 제 복이 없으 면 그런 데도 대가리를 쌀쌀 내두른답니다.』

침모는 바느질하고 앉아 있는 영옥을 가리키며,

『저이는 웬 여학생이요? 저런 이가 있는데 여학생의 흉을 보아서 나보고 욕하겠네.』

『우리집 딸이랍니다.』

『에구, 예브기도 하여라. 어쩌면 저렇게 인물이 좋아요.

인물이 저럴 땐 재조도 좋겠지. 보던 중 처음일세, 혼인을 정하였나요?』

『아직 안 정했읍니다.』

『그러면 되었소그려. 내가 게다가 말해 볼까요. 그이가 내 말을 잘 듣는답니다. 그런 데로 들어가면 여북이나 좋아요.

그렇게 해봅시다.』

『누가 아우. 요새 계집애들은 제멋대로 하니깐 무슨 복에 그런 데로 가, 저한테 물어 보구료. 나는 모르오.』

침모는 영옥을 향하여,

『여보! 지금 하는 말을 들었지요. 그런 좋은 자리가 어디 있소. 내가 중매를 할 테니 그리 가 봅시다. 저런 인물을 가 지고 그런 데로 가면 여북 좋겠소? 두말말고 그래 봅시 다.』

『나는 아직 시집 갈 생각이 없고, 또 그런 데로 가기는 싫습니다.』

『에구, 저것 좀 봐. 싫기는 왜 싫어요. 그런 데가 어디 있어. 돈이 없소. 사내가 남만 못하우. 그이가 아주 남중일색 이라우. 그리고 말이 양첩이지 본처보다도 낫소. 그리고 본 아내를 내보낸다는데 무슨 걱정이요. 어서 그렇게 하시오.

다른 여학생은 절을 백 번이나 하고 들어가려고 하지만 누 가 붙이나요 어디? 당신은 내가 잠깐 보아도 아는 데가 있 어서 그러는 것이니 아무 말도 말고 대답하시오. 그이가 새 신랑보다 나은 이에요. 요새 여학생들이 난봉이 나니깐 사 내 학생은 덩달아 난봉이 난답니다. 그리고 그이가 독일국 인가 어디서 보석반지를 사왔는데 그것은 고금에 없는 보물 이랍니다. 그것은 새로 얻는 사람을 준답니다. 그리고 입으 로 할 수 있는 건 다 있소. 그저 들어만 가면 그런 호강이 어디 있소. 내 말만 듣고 그렇게 하시오.』

『암만 말해야 쓸데없으니 그만두시오. 나는 남의 첩노릇 할 사람이 아니오.』

하고 영옥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더니 편지봉투 하나를 가져다가 침모를 주며, 성열에게 전하여 달라고 했다. 침모 는 영옥이가 주는 것을 편지인 줄 알고 받아놓고 창숙을 보 고 눈을 끔쩍끔쩍하고 입을 삐쭉삐쭉하면서 수군수군하다가 가버렸다.

침모는 돌아가서 성열을 보고 먼저 영옥이가 주던 봉투를 전하였다. 성열의 편지인 줄 알고 반갑게 떼어 보았는데 그 속에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전일에 주었던 오 백 원의 소절수뿐이었다. 성열은 그것을 보고서 얼굴빛이 변하였다. 침모는 갔던 일을 자세히 말하려 하였으나 성열 은 대강만 말하라고 해서 영옥에게 문답한 말만 하였다.

성열은 침모의 말을 듣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앉았다가 양 복을 입고 나가 버렸다.

14[편집]

영옥은 침모를 보낸 뒤에 마음이 불안하였다. 침모에게 대 한 마음보다 창숙에게 대한 마음이 더욱 불안하였다.

영옥은 침모의 말에 대하여 조금도 가치가 없는 말로 생각 하였으므로 쓴웃음에 붙이고 말았지만 그 중의 여학생에 대 한 말에는 너무 과도한 말이지만 현대 여학생 중에 비난을 들을 만한 아름답지 못한 행동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 한 품행이 부정한 여학생으로 말미암아서 아직 완고에 가까 운 구식가정에서 여자들을 학교에 보내기를 꺼리는 것도 사 실이다.

그러면 교육이 보급되지 못하고 여자 교육이 더욱 보급되 지 못한 조건에서 그러한 좋지 못한 영향을 주는 것은 여학 생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울 것이냐.

지금 조선에서 교육을 받는 여자로 말하면 그 수효가 극히 적다. 여자 교육이 보급되지 못한 때에 특별히 교육을 받게 되는 그들은 경우나 사정이나 특색으로 보아서 대부분이 상 당한 가정에서 생장한 여자요, 그 인격과 재능이 비교적 출 중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그들은 조선의 여자 교육계로 보아서 선각자요, 여 자 사회로 보아서 선진자요, 미래의 사회로 보아서 어머니다. 그들의 책임은 얼마나 중대하며 그들의 경우는 얼마나 어 려운가. 그들이 교육에 대한 일이나 품행에 대한 일을 십분 아름답게 해서 자녀를 가진 학부형으로 하여금 흠선한 생각 을 내어서 그 자녀를 다투어 가르친다 하여도 교육 기관의 보급과 학비의 곤란과 기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자 교육 의 보급이 도저히 다른 나라를 따르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 물며 선진의 여학생이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쳐서 다른 사람 의 교육에 대한 마음을 방해하게 되면 자기 일신의 허물도 적지 않거니와 전사회에 미치는 허물은 얼마나 큰 것인가?

그뿐 아니라 사람의 교육이라는 것은 어느 것이 필요치 않 은 것이 없다. 학교 교육도 필요하고 사회 교육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필요한 것은 어렸을 때의 가정 교육 이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보다 보고 듣는 데서 배우는 것이 많고 절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 에서 하는 일은 어린아이에게 대하여 교과서 아닌 것이 없다. 그중에도 어린아이와 접촉이 많이 되는 아이의 어머니 가 가정 교육의 주임교사가 되는 것이다.

지금의 조선 사람들은 자기의 학식이 없는 것을 탄식할 때 흔히 자기 조상과 부모를 원망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의 조 상과 부모가 자기를 상당히 교육시키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나오는 일이다.

지금의 여학생은 미래 사회의 주인으로 나서는 어머니들이다. 다시 말하면 미래 사회의 어머니다. 미래의 조선 사회를 건설할 한량없는 인인군자 영웅호걸들이 그들에게서 나서 그들에게 가정 교육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얼마나 아름다 운 권리와 의무를 가졌는가. 그러면 그들이 자기의 학식이 부족하고도 자손에게 대하여 가정 교육을 잘할 수가 있는가? 자기의 품행이 부정하고도 자손에게 대하여 아름다운 일을 교훈할 수가 있는가? 그러면 상당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완전한 사회를 건립할 수가 있는가? 미래의 조선 사회를 완전히 그 공이 어디 많이 있으며, 미래의 조선 사 회를 완전히 건설 못한다면 그 죄가 어디 많이 있을까?

그뿐 아니라 개인의 쾌락주의로 말하여도 사랑이라는 것은 도저히 여러 사람에게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여러 사람의 사랑은 모래와 같고 한 사람의 사랑은 진주와 같은 것이다.

백천의 모래가 한 개의 진주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여학생으로 아름답지 못한 평판을 받는 것은 개인 이나 사회를 위하여 적지 않은 불행이다.

영옥은 이런 생각을 끝내자 바느질을 마치고 말았다.

영옥의 가세는 여지없이 어려워서 하루에 한 끼도 먹기가 어려웠다. 창숙은 기한이 심할수록 영옥을 권고하여 성열의 첩이 되라고 하였다. 그것은 영옥을 성열의 첩으로 소개하 여 성공만 하면 막대한 재산을 얻게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영옥에게 대하여 혹은 달래기도 하고 혹은 위협하기도 하고 혹은 구박도 해서 백방으로 수단을 다하였으나 영옥은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창숙의 영옥에 대한 감정 은 극도로 험악하여졌다.

그 이듬해 늦은봄의 어느 날이었다. 영옥의 집에서는 아침 밥도 짓지 못하고 오정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창숙은 영옥을 대하여,

『나는 이제는 내 한 몸도 살아갈 수가 없다. 네 치다꺼리 까지 할 수 없으니 너는 너대로 살아라. 너는 복이 많고 지 조가 높아서 부자 서방도 싫다니깐 네 멋대로 나가서 서방 을 얻든지 남방을 얻든지 쌍가마 타고 잘 살아라. 난 다 귀 찮다. 어서 나가거라.』

이렇게 말하였다. 웃방에 앉아서 책을 보던 영옥은 잠잠하 였다. 창숙은 독이 나서 웃방으로 쫓아 넘어가서 영옥의 머 리끄덩이를 잡고 손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입으로 물고 갖 은 악독을 다 피우다가 제 기운에 지쳐서 아랫방에 가 누웠다. 영옥은 잠잠히 앉아 맞다가 창숙이가 나간 뒤에 고개를 숙 이고 울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맞은 것이 아파서 우는 것이 아니오, 맞은 것이 원통해서 우는 것도 아니다. 자기의 신세 를 생각해서 울고, 자기의 부모를 생각해서 울고, 돈만 생기 면 아무 노릇이라도 하려는 세상의 인심 물태를 생각하여 그랬다.

마음 가운데로부터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가 하늘을 뚫을 듯하였지만 영옥은 창숙이가 무서워 마음대로 울지 못하고 울음소리를 삼켜서 주린 창자를 채우고 바싹 마른 혀끝으로 흐르는 눈물을 받아서 타오르는 입술을 축였다. 그러나 그 울음은 영옥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영옥은 울음을 거두고 흐트러진 머리와 구겨진 옷을 대강 정돈하고 방문을 소리없이 열고 문을 나섰다. 집을 나설 때 에는 마음 없이 나섰지만 나서고 보니 어디로 갈는지 방향 이 없었다. 차차 걸어서 교동 qurans을 나오다가 어느 동무 두 사람을 만나서 남산 공원에를 가게 되었다.

늦은 봄날은 너무도 청명하고 따뜻하고 도리어 사람을 피 곤케 하였다. 피어 있는 꽃보다 떨어진 꽃이 많고 푸릇푸릇 한 어린 잎들은 다투어 나온다.

영옥은 두 동무와 같이 남산공원에 가서 놀다가 두 동무는 어느 만찬회에 간다고 먼저 가고 영옥이만 남아서 진고개 쪽을 향하여 차차 내려오다가 길에서 조금 올라가서 작은 개울 위에 있는 소나무 아래에 앉아서 다리를 쉬었다.

영옥은 소나무 아래에 앉아서 끝업싱 아름다운 봄을 맛보 며 무척 불쌍한 자기를 슬퍼다가 홀연히 마음을 잊어버리고 많은 생각을 끊었다. 떨어진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앉았 다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꽃수염을 잘강잘강 씹었다. 그러 다가 자기의 이에 씹힌 꽃수염이 애처로와 다시 뉘우쳐 그 꽃을 입술에 대고 가는 입김으로 호호 불었다. 그것은 자기 의 이에 으스러진 꽃수염을 다시 살려 내려는 간간한 방법 이었다.

꽃을 따라다니는 나비는 영옥의 팔에 앉았다. 영옥은 나비 가 날아갈까 봐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영옥은 그 나비를 눈주어 보다가 자기의 보는 것이 나비를 놀랠까 봐서 보지 않는 체하고 곁눈으로 보았다. 그러다가 나비가 날아가면 몸이 자지러지도록 놀랐다. 나비를 다시 오게 하려고 말소 리가 나면 나비가 안 올까 봐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비야 나비야 여기 앉아라. 너 잡을 내 아니다. 꽃을 따 서 너를 주마. 그 꽃이 시들거든 다른 꽃을 주마. 또다시 시 들거든 무궁화를 너를 주마. 나비야 나비야 여기 앉아라. 너 잡을 내 아니다.」

그리고 갖은 방법을 다하였다. 갖은 방법이라는 것은 마음 으로 애를 쓰는 것뿐이요, 영옥의 몸은 털끝 하나도 움직이 지 않고 고요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비는 마음 있어 기 다리는 영옥에게 오지 않고 마음 없이 기다리지 않는 꽃에 게도 가 버렸다.

영옥은 다른 꽃을 꺾어서 그 꽃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볍게 스치면서 묻는 소리로 흥얼거렸다. 그것은 무슨 의미 있는 소리가 아니고 자기 청춘의 솟아오르는 향기가 무르녹은 봄 기운의 충동을 받아서 의미와 곡절을 초월하고 스스로 불려 지는 무심한 사랑의 노래이다.

15[편집]

영옥은 벌떡 일어서면서,

『에구, 어디서 이렇게 오세요, 어서 올라오세요.』

하였다.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법과에 다니다가 학비의 부족 으로 중도에 퇴학하고 각처로 다니면서 달리 배울 길을 얻 어보려 하였으나 쉽게 안 되어 수일 전에 시골로부터 서울 에 올라와서 번민에 싸여 있는 종철은 여관에서 책을 보다 가 머리가 아프고 갑갑증이 나서 산보를 나섰다가 선술집에 서 막걸리를 서너 잔 마시고 영옥을 찾아가려다가 남산 공 원으로 갔다.

종철은 동본원사 뒤로 올라가서 조선 총독부를 내려다보고 한숨을 한 번 쉬고 다시 남산을 향하여 가다가 영옥의 앉은 것을 보았다. 종철은 자기가 돌연히 나타나면 영옥을 놀랠 것 같아서 오던 길로 서너 걸음 물러가서 소나무가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볍게 기침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가면서 영옥을 못보는 체하고 고개를 돌려서 다른 방면을 보았다. 그것은 영옥으로 하여금 자기를 맞기에 무슨 군속 한 일이 없을 만한 시간의 여유를 주는 것이다.

사람이 가지 못하는 깊은 산골에 홀로 피어 있는 외로운 꽃처럼 너무도 적막하고 처량한 영옥이가 비루하고 사나운 계모에게 많은 욕을 당하고 봄이 늦어 가는 빈산에 앉아서 주린 창자와 슬픈 마음을 번갈아 어루만지면서 망망한 우주 를 향하여 한 줄기외 사랑을 그리워하다가 이 세상에 둘이 없고 오직 하나인 자기를 사랑하는 종철을 만나게 되었다.

고요히 놀라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기침 소리 나는 곳 을 향하여 보다가 종철인 줄 알고서는 너무도 반가와서 부 끄러운 것을 잊고 서슴없이 인사하고 오라고 한 것이다.

영옥의 인사를 받은 종철은 빙긋이 웃고서 영옥이 있는 곳 으로 가서 앉으면서,

『오래간만입니다.』

『언제 올라오셨어요? 원산서 하신 편지는 감사히 보았읍 니다만 일정한 주소를 몰라서 답장도 못했읍니다. 용서하세 요.』

『올라온 지 수일 되었읍니다. 가서 뵙든다는 것이 아직 못갔읍니다. 오늘도 댁으로 가려다가 이리로 왔읍니다. 여기 로 온 것이 댁으로 간 것보다 낫게 되었읍니다.』

『객고가 얼마나 심하세요. 학비에 대한 일로 시골 가신다 는 말씀은 편지를 보고 알았읍니다. 잘 되었어요?』

『잘 되다뇨. 잘될 수가 있읍니까? 학비를 얻으려는 사람 이 미친 사람이지요. 그런데 기골이 많이 상하셨읍니다. 무 슨 일이 있으십니까?』

『특별한 일은 없읍니다만 자연히 그렇습니다.』

『매사를 힘대로 하여 자기의 책임을 다할지라도 성공과 실패는 운명에 돌리는 수밖에 없읍니다. 무슨 일이든지 너 무 걱정하지 마세요. 왜 얼굴이 그렇게 상하셨어요?』

하는 종철은 말소리와 얼굴빛이 동정에 넘쳤다.

영옥은 얼굴빛을 고치고,

『그렇지만 약한 여자가 환경의 사실이 핍박하는 데야 어 찌합니까? 얼굴이 변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왜 얼굴이 틀린 이유는 말씀 안하세요. 영옥씨는 나에게 대하여 비밀이 있읍니까? 그러면 영옥씨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영옥씨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영옥씨의 사랑을 억지로 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일 영옥씨가 나 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것까지라 도 나의 마음에 감추어 두고 영옥씨를 나의 마음으로만 영 원히 사랑하고 말 것입니다.』

다정하고 사내다운 종철은 이렇게 말하였다.

영옥은 종철의 자기를 사랑하는 말에는 감격하였고, 말끝 을 꽉 눌러 말하는 데는 무서웠다.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종철에 대하여 이때까지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 안한 것을 뉘우쳤다. 그래서 자기가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고생하 던 말과, 성열이가 자기에게 대하여 직접 간접으로 교섭하 던 말과, 창숙이가 자기를 구박하던 말과, 자기가 종철을 사 랑해서 백년을 의탁하려는 말을 간단히 말하였다.

그리고 수건으로 두 눈을 가리고 울었다. 종철은 영옥의 말을 듣고는 여러 사람의 왕래하는 길가에 있음을 거리끼지 않고 영옥의 손을 힘있게 잡고 한참 잠잠하다가,

『영옥씨, 감사합니다. 전일에는 나의 눈으로 보아서 영옥 씨를 사랑하였지만 지금부터는 나의 마음으로 보아서 영옥 씨를 사랑합니다. 나는 영옥씨를 백년의 아내로 사랑할 뿐 아니라 천추의 지기로 사랑하겠읍니다. 이 세상의 돈을 하 늘처럼 숭배하고 여자의 지조를 티끌 속에 묻어 버리는 거 꾸로 흐르는 인심의 물결을 영옥씨는 이렇게 약한 몸으로 그것을 거슬러 갑니다그려. 나는 영옥씨를 사랑하기 위하여 는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맹세합니다. 영옥씨도 나를 사랑 함으로 기쁨을 삼아 주시오. 나는 영옥씨를 사랑함으로 만 족을 삼겠읍니다.』

이렇게 말하는 종철의 입술이 영옥의 입술에 닿지는 않았 지만 두 사람의 마음이 끝없는 사랑 속에서 하나가 된 것은 사실이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나와 나의 마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죽어도 만족입니다. 하물며 종철씨와 같은 좋은 남자가 나를 영원히 사랑하시면 나는 얼마나 영 광스럽겠읍니까? 지금부터 나는 종철씨의 것이에요. 불쌍한 사람을 사랑하여 주세요.』

하고 말하는 영옥은 기쁜 것은 눈물이 되고 슬픈 것은 웃 음이 되었다.

무악재의 남쪽 허리로 넘어가는 지는 해의 쇠잔한 빛은 만 호 장안의 저녁 연기를 거쳐서 장충단의 산림 사이로 엷은 그늘을 비춘다.

종철은 지갑에서 오원짜리 지화 한 장을 내어 영옥을 주 며,

『용서하세요, 사정이 절박합니다. 사람이 한때를 굶어도 신체가 쇠약하는데 하루를 어찌 굶습니까? 우선 저녁을 지 어 먹어야지요. 물론 용서하실줄 믿고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히 받겠읍니다. 지금부터는 종철씨에 대하여 쓸데없 는 체면을 보지 않겠읍니다. 그러나 깊이 용서해 주세요.』

하고 영옥은 지화를 받았다.

『어서 댁으로 가시오. 좀 시장하며 또는 신체가 괴롭겠읍 니까? 그리고 가정에 대한 고통을 조금 더 참아 주십시오.

결혼식은 물론 파격적으로 하겠읍니다만 집간이라도 장만해 야 하겠는데 돈이 없는 사람으로 그것인들 어디 용이한가요. 그러나 가을 안에는 어쨌든 변통하겠읍니다. 아무쪼록 마음을 상하지 말고 몸을 건강히 하세요. 종종 뵙겠읍니다.

같이 가세요.』

하고 종철은 먼저 일어나서 영옥을 재촉하였다.

영옥은 종철을 따라서 같이 오다가 교동벽 문에서 종철과 헤어져서 집으로 갔다. 두 사람의 몸은 헤어졌으나 두 사람 의 정의 실은 끊기지 않고 그들이 갈리는 길 사이로 내왕하 는 여러 사람에게 걸려서 어지럽게 엉클어지면서도 정의 실 과 정의 실은 서로 이어서 두 사람을 따라왔다.

16[편집]

영옥은 가족이라고는 계모인 창숙이밖에 없으므로 기회를 타서 종철이와 결혼할 말을 창숙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그 일을 창숙의 소개로 성열이도 알게 되었다. 성열은 영옥이 가 다른 사람과 결혼할 것을 극단으로 분하게 생각해서 마 침내 악의를 가지게 되었다.

영옥은 남모르는 처지에 곤란한 일이 있었다. 최 선생이 살아 있고 상해에 있는 조선 사람들이 최 선생의 집에 내왕 할 때에 어느 사람이 폭발탄 세 개를 갖다 둔 일이 있었다.

영옥이가 그것을 현저히 알게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우연한 기회로 그것을 알았다가 최 선생이 죽은 뒤에 그것을 자기 혼자만 알고 비밀히 감추어 두었는데 그것을 함부로 내버릴 수도 없고 감추어 두자니 위험해서 매우 곤란한 중에 있었 던 것이다.

하루는 종철이가 찾아왔는데 영옥은 종철을 대하여 폭발탄 의 처치에 곤란한 말을 하였다. 종철은 그것을 자기가 처치 하겠다고 가지고 갔다. 그것은 종철이가 무슨 소용이 있어 서 가져간 것이 아니라 처치에 곤란하여 하는 영옥의 고통 을 덜기 위하여 가져간 것이다.

종철은 여관에서 그전날의 경성신문을 보다가 돌연히 얼굴 에 분개한 빛을 띠고 그 신문의 한 곳을 붉은 잉크로 죽죽 긋고 척척 접어 포켓에 넣고 일어나서 조금 섰다가 혼잣말 로,

『응, 영옥은 결단코 그런 일을 행할 사람이 아니다. 물어 볼 것도 없다. 사람을 마음으로 사귄 바에는 형식으로 물어 보는 것이 도리어 불가한 일이다. 이것은 반드시 성열의 짓 이다. 이런 무리를 조선에서 없애 버려야지.』

하고 선반에 얹혀 있는 가방에서 폭발탄을 하나 꺼내어 포 켓에 넣고 경성 신문사로 가서 편집실의 문을 열고 폭발탄 을 던지고 문을 닫았다.

종철은 폭발탄 터지는 소리를 듣고 법률에 저촉되는 일을 하고 피하는 것은 구차한 일이라 하여 경찰서에 자현하러 가는 길에 혹시 자현하기 전에 잡히면 창피할까 하여 어느 상점의 전화를 빌어서 종로 경찰서에 먼저 전화를 하고 곧 가서 자현하여 대강의 조사 순서를 마치고 경성 지방법원에 서 예심하게 되는 것이었다.

종철에게 문제되는 경성 신문의 기사는 다른 것이 아니라,

「경성 계동에 사는 당년 스무 살의 최 영옥이라는 여자는 이미 결혼하여 폐백까지 받은 일이 있는데 아름답지 못한 관계로 다시 다른 남자와 결혼하였다 한다.」

라는 기사였다.

종철은 그 기사를 보고는 직각적으로 영옥에게 사랑을 구 하다가 실패한 경성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있는 정 성열의 소행인 줄로 판단하였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영옥에게 물어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 으나 자기의 마음으로 영옥은 그런 일을 행할 사람이 아니 란 것을 단언하였다. 한 사람의 사사 감정으로 자기의 사랑 하고 믿는 영옥에게 대하여 사실이 없는 아름답지 못한 기 사를 여러 사람이 보는 신문에 내어서 그의 옥 같은 신분을 여지없이 결딴내는 것을 생각할 때 종철의 마음은 의분에 떨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의협의 천품을 가진 종철은 자기 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아름다운 영옥을 위하여 생명을 돌아 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한 것이다.

영옥은 그 전날 저녁에 그 신문을 보고 성열의 소행인 줄 알았다. 그러나 종철을 만나서 그런 말을 하고 경성 신문사 를 걸어 고소를 할 양으로 종철의 여관에 갔었으나 종철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다가 종로에서 경성 신문사에 폭탄을 던졌다는 말을 듣고 서슴지 않고 자기의 사랑하는 종철이가 자기를 위하여 그런 무서운 일을 행한 것을,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혼자 앉아서 종철의 일을 의심하면서도 믿어서 무 섭고 걱정스런 마음을 금치 못했다.

종철은 사실의 유무를 묻지 않고 자기의 마음으로 영옥의 허물 없는 것을 알고 또 그 사랑하는 영옥의 신분과 명예를 위하여 생명보다도 더 큰 일을 행하고, 영옥은 사실을 듣지 않고도 자기의 마음의 거울에 비쳐서 종철이가 자기를 위하 여 그런 중대한 일을 행한 것을 알았다. 그들의 사랑은 육 체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었다. 그들의 사랑은 감정에 있지 않고 의지에 있었다.

경성 신문의 영옥에 대한 기사는 종철과 영옥의 생각과 같 이 성열의 소행이었다. 영옥에게는 사랑을 구하다가 실패를 한 성열은 영옥이가 종철이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는 분한 마음과 혼자 사랑의 시기를 이기지 못하여 그런 사실이 없 는 기사를 내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영옥에 대한 분풀이 요, 한편으로 종철과 영옥의 사이를 중상하여 그 결혼이 파 의가 되면 자기가 다시 영옥에게 대하여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 자기의 욕망을 채우고자 한 것이다.

경성 신문사는 삼층의 벽돌 양옥으로 남향한 집인데 정문 을 들어서면 우편은 영업국이요, 좌편은 기계실이요, 정문의 맞은편으로부터 서쪽으로 꺾어 올라가면 이층의 동쪽으로 편집실이 있는데, 편집실의 출입문은 서향으로 나고, 그 안 의 사무상들은 북편으로 가까이 놓고 편집원들은 대개 남향 하여 앉게 되었는데 동쪽과 남쪽은 유리창으로 되었다.

그 때는 아직 일기가 더웠으므로 동남의 유리창을 모두 열 어 놓았다.

종철은 편집실의 출입문을 열고 서서 폭탄을 던졌는데 그 폭탄은 열어 놓은 동쪽 창의 지도리를 스쳐서 터지면서 창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래서 그 유리창만 좀 부서지고는 사 람이나 건축물에는 조금도 손상이 없었다. 그래서 경찰서에 서나 일반 사회에서나 소동이 덜 되었다.

종철의 사건이 재판소로 넘어가서부터 종철은 서대문 감옥 에 미결수로 있게 되었다.

영옥은 종철의 의식과 소용되는 물품을 자기가 차입하기로 결심하였는데 창숙이 꺼리어서 도저히 자기 집에서는 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서대문 밖에 조그마한 삭월세 집을 얻어 가지고 힘과 정성을 다하여 종철에게 대한 차입을 별로 군 속하지 않게 하였다.

종철의 사건을 맡은 예심판사는 여러 방편으로 조사한 결 과 유죄로 인정하여 지방법원에 기소되었다.

종철은 기소된 지 약 일 개월 만에 공판을 열었는데, 판사 는 종철에게 대하여 성명?주소 등의 으례 묻는 말을 묻고 는,

『피고는 금년 팔월 이십구일 상오 십일시경에 경성 인사 동에 있는 경성 신문사 편집실에 폭탄을 던진 일이 있나?』

『그런 일이 있소.』

『무슨 일로 폭탄을 던졌는가?』

『개인의 감정으로 사실이 없는 기사를 신문에 내어서 남 의 여자 신분을 망쳐 놓았으므로 그랬소.』

『무슨 기사가 그랬단 말인가?』

『최 영옥이란 여자에 대한 기사인데 그 기사를 외울 수는 없소. 내가 그 신문을 경찰서에 드린 일이 있으니깐 그 신 문이 재판소에 왔을 줄로 생각하오. 그것을 보시면 알 것이 요.』

『이게 그 기사인가?』

하고 판사는 자기가 종로 경찰서에 드렸던 신문에 자기가 붉은 잉크로 그어 놓은 기사를 정면으로 나오게 접어서 내 보인다.

종철은 고개를 숙여서 잠깐 보고서,

『그렇소.』

『피고는 그 기사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는가?』

『최 영옥은 나와 결혼할 여자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사 람을 위하여 그런 것이요. 또는 신문이란 것이 무슨 기관 신문이 아닌 이상에는 일반 사회의 공기요, 그런 사회의 공 기인 신문사가 개인의 감정으로 조금도 사실이 없는 기사를 마음대로 내어서 허물 없는 사람의 신분을 타락시키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요. 그런 신문사가 있는 것은 조선 민중의 치욕이요, 해독이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여자 와 조선 민중을 위하여 그런 신문사를 없애고자 한 것이 요.』

『그러면 신문사에 있는 사람을 다 죽이고 신문사의 건물 을 다 파괴해서 그 신문사를 없애겠다는 목적이 있었는 가?』

『나는 반드시 사람을 죽이고 건축물을 파괴하겠다는 생각 은 없었소. 다만 의분을 이기지 못해서 행한 일이요.』

『신문사를 없애겠다는 생각으로 사람이 들어 있는 집에 폭탄을 던지고서 사람을 죽이고 건축물을 파괴할 의사가 없 었다는 것이 말이 될까?』

『내가 폭탄을 던진 동기로 말하면 그런 생각을 안했을 뿐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할 여가도 없었소. 신문사를 없앤다는 말은 그 사람을 다 죽이고 그 집을 파괴해서 없앤다는 말이 아니라 그 신문사에 중대한 영향을 주어서 신문 경영을 못 하게 하든지 신문사의 내용을 개량한다는 말이요. 나는 꿋 꿋이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양심대로 사실 을 말하는 것이요.』

『개인의 감정으로 그런 기사를 내었다니 어떤 사람이 무 슨 감정으로 그랬다는 말인가?』

『그건 말할 필요가 없소. 개인의 감정으로 그런 것도 사 실이요. 그 사람을 모르는 것도 아니오마는 아무리 개인이 낸 것이라 할지라도 기자와 신문사는 책임을 분리할 수가 없고, 나는 개인에게 대하여 한 일이 아니오. 신문사 전체에 대하여 한 일인즉 개인에 대한 말은 할 것 없고, 만일 재판 소에서 상당히 조사를 했으면 그 일의 내용을 아실 줄로 압 니다. 나의 책임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므로 나는 말하지 않 겠소.』

『피고는 폭탄을 던진 일에 대하여 후회는 안 하는가?』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 여, 사회를 위하여 당연히 할 일을 한 줄로 믿습니다. 법률 에서 내 수단의 가부를 의논하는 것은 별문제이겠지요.』

판사는 몇 가지 말을 더 묻고는 심문의 종결을 선언하였다. 검사는 일어서서 살인 미수와 건축물 파괴의 폭발탄 취체 에 대한 법률의 조문을 들어 말하고 범죄의 동기와 피고의 신분에 대하여 조금 피고에게 유리하게 말하고 삼년 징역을 구형하였다. 판사는 판결 언도의 기일을 다시 통지한다 하 고 폐정하여 버렸다.

이때에 방청석의 한편에 앉아서 종철의 당당한 진술을 듣 고 감격한 눈물에 잠겨서 터져 나오려는 울음소리와 참으려 는 상기에 절반은 떨고 절반은 침착하여 여러 사람의 시선 의 촛점이 되는 것은 어여쁜 영옥이었다.

종철은 공판한 후 약 일 주일 만에 이 년 징역 오 년 집행 유예의 선고를 받았다.

그 사건의 주임판사는 종철의 범죄한 동기가 사사 감정의 악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일반 사회를 위하는 의협에서 나온 것과, 법행의 결과가 사람이나 건물에 상해가 없는 것 과, 그의 평일의 행위와 자현한 것과 여러 가지를 종합하여 법률에서 고려하고 동정할 점이 있다 하여 작량경감(酌量輕 減)한 것이다.

종철은 그날로 출옥하게 되었으므로 재판소의 방청석에 있 던 영옥이는 하도 기뻐서 미친 사람처럼 뛰어가서 대강의 준비를 하여 가지고 감옥 문안의 차업인 휴게소에서 종철이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씩씩한 얼굴에 엷은 웃음을 띠고 침착 하게 나오는 종철의 손을 붙들고 이마를 종철의 가슴에 대 고 견딜 수 없이 울었다. 종철은 간단한 말로 위로해서 같 이 감옥을 나왔다.

영옥은 종철을 인도하여 자기가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영옥은 우선 자기가 재판소로부터 돌아올 때에 사 가지고 온 포도주를 따라서 종철에게 권하고, 다시 쑤어 놓았던 죽 을 가져왔으나 종철은 포도주만 두어 잔 마시고 죽은 아직 먹고 싶지 않다고 옆으로 치워 놓았다. 영옥은 종철을 대하 여,

『난 잘 있었읍니다. 마음이 편안하니깐 신체에 조금도 고 장이 없었읍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은 감옥밥과 감옥옷에 살찌는 것인데 차입은 왜 하셨어요. 그리고 무슨 힘으로 차 입을 하셨어요. 나는 먹고 입기는 잘하였읍니다만 마음은 도리어 미안하였읍니다.』

『그런 말씀은 체면의 말씀이지 나에게 한 말씀은 아닙니다. 물론 나에게 무슨 힘이 있겠읍니까. 자연히 아는 동무의 힘을 많이 입었읍니다. 신체가 건강하신 것만 다행입니다.』

『하옇든 통쾌합니다. 감옥에서도 배운 것이 많습니다. 다 만 영옥씨에게 여러 가지의 고통을 준 것이 미안합니다.』

『종철씨가 나에게 대하여 미안하다고 하시면 나로 말미암 아 생명이 위태할 뻔한 종철씨에게 대하여 내 마음은 어떠 하겠읍니까? 나는 무엇으로 종철씨에게 갚을는지 모르겠읍 니다.』

『나는 감옥에서 이런 생각을 하였읍니다. 영옥씨가 용서 만 하시면 영옥씨와 파혼을 하려고 생각하였읍니다.』

『……신문에 게재된 사실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그 일에 대하여 내가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 이었으면 그런 일을 행하였겠읍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엔 너무도 정욕에만 빠지는 경향이 있으니깐 나는 파혼 을 해서 사람을 정욕으로 사랑치 않고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세상에 공포하고 나는 일생 독신 생활을 하여 볼까 하 고 생각하였읍니다.』

『종철씨가 나와 파혼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죽는 것보다도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종철씨에게 유익하고 종철씨의 마 음이 편안하다면 나느 어떤 희생이라도 사양치 않겠읍니다.

종철씨의 뜻이라면 파혼까지라도 기쁘게 당하겠읍니다. 그 러나 종철씨가 이 세상에서 독신 생활을 하신다면 나는 다 른 세상에 가서 영원한 독신 생활을 하겠읍니다.』

하고 영옥은 한손으로 종철의 발을 만지면서 머리를 방바 닥에 대고 울었다. 종철은 영옥을 힘있게 껴안고 수건으로 영옥의 눈물을 씻어 주면서,

『내가 그렇게 결심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에 하도 부 패한 일이 많아서 그런 생각까지 하여 보았단 말입니다. 용 서하시고 안심하세요, 영옥씨!』

『나는 안심할 수가 없읍니다. 그런 말씀을 듣고는 나는 죽지 않고는 미칠 수밖에 없읍니다.』

하고 영옥은 느끼며 말하였다.

『그러지 마세요. 나는 진정 영옥씨와 결혼식을 하겠읍니다. 용서하세요.』

영옥은 눈물을 씻고 앉아서 조금 진정하여 밖에 나가서 잠 깐 바람을 쐬고 들어오더니 남은 포도주를 따라서 종철에게 권하였다. 종철은 그 술을 받아 먹고 그 컵에다 포도주를 반쯤 따라서 영옥에게 권하였다. 영옥은 술잔을 받아서 앞 에 놓고 종철의 얼굴을 보고 가늘게 웃으면서,

『이것을 어떻게 먹으라고 주세요?』

하였다. 종철은 말없이 웃고서 그 잔을 들어서 두어 번 마 시고 조금 남겨서 영옥을 주었다. 영옥은 잔을 받아서 고개 를 조금 돌리고 마셨다.

약 일주일 뒤에 종철과 영옥은 동대문 밖 안양암에 가서 고명한 법사의 지도 아래 간단하고 질소한 불식으로 결혼식 을 거행하였는데 불교 신자의 많은 남녀들은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부처님에게 기도하고 마음으로 축복하였다.

그들은 관훈동에 집을 장만하여 간단한 살림을 하게 되었 는데 두 식구의 작은 가정에서는 언제든지 봄과 같은 사랑 의 화기가 가득해서 구차한 것이 조금도 고통이 안 되어 여 러 사람의 부러워하는 바가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영옥은 동덕 여학교의 교원으로 고빙되어 많지 않은 월급이나마 그것으로 생활의 현상을 유지하여 가 면서 종철과의 향기로운 사랑의 생활을 계속하였다.

17[편집]

종철과 영옥의 사랑의 생활이 반년 조금 지나서 종철은 자 기의 고향에 있는 이 상훈이라는 청년의 도움을 받아 그 사 람과 같이 미국 시카고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것이 종철 의 장래를 위하여는 면할 수 없는 일이나 영옥의 사랑을 위 하여는 꽃수풀을 거쳐 가는 하루아침의 찬바람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때의 사랑에 꺼리어서 원대한 경 영에 지장을 내는 것은 그들에 있어서 취하지 않는 바이었다. 그러므로 종철은 유학을 가기로 결심하고 영옥은 종철 의 유학을 권고하였다.

이상(理想)의 결과는 사실이 오는 것이다. 종철은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 길을 떠나는 데 대하여는 두 사람 은 물론 충분한 이해가 있었다. 그러나 종철은 두 사람을 초월한 무정물이 아니오, 영옥은 정욕의 해탈을 얻은 출세 보살이 아니었다. 그래서 천하만고의 수없는 사람들이 괴로 와하고 슬퍼하는 이별의 쓴맛은 그들에게도 같은 맛을 주었다. 그들은 참는 마음으로 평범한 듯하였지만 느끼는 정으 로 견딜 수 없었다. 손을 나눌 때를 당하여 영옥은 아무리 참는 마음에 힘을 주어서 침착하려 하였지만 참으려는 마음 이 참을 수 없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대문간에서 떠나는 종철의 넥타이를 다시 매어 주던 영옥은 넥타이를 잡은 채 로 눈물보다 울음 소리가 먼저 났다. 종철의 넥타이는 여지 없이 옭매어지면서 끝의 한가닥이 끊어졌다. 이것이 종철에 게는 넥타이가 바르게 매어진 것보다도 더욱 깊은 인상을 주었다.

경성 신문사에 폭탄을 던질 때에 자기의 생명을 썩은 헌신 짝같이 보던 당당한 종철이도 이에 이르러서는 급한 소낙비 같은 눈물을 안 흘릴 수 없었다. 자기는 눈물을 흘리면서 영옥의 눈물을 씻어 주는 종철은 간단하고 깊은 말로 영옥 을 위로하였다.

영옥은 울음 섞인 말로,

『가실 때에 어디서든지 상륙하시는 대로 전보하여 주세요. 그리고 다달이 편지해 주세요. 그리고 공부를 너무 하시 지 말고 운동을 자주 하세요. 방학 때는 바다에 가셔서 수 양도 하시고 운동도 하세요. 공부보다도 신체를 건강히 하 세요. 그리고 나는 조금도 생각하지 마세요. 나도 학비를 변 통하면 미국으로 가겠어요.』

『염려 마세요. 나는 조금도 염려 마십쇼. 여가 있는 대로 도서관에 가서 수야에 대한 서적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불 교 서적도 좋습니다. 나는 졸업하기 전에 한두 번 다녀가려 합니다. 무슨 변통이 있으면 영옥씨도 같이 유학을 하게 될 는지도 모르겠읍니다. 아뭏든지 안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약한 신체를 돌아봐야지요. 우리는 신조선을 건설하는 일꾼 이 되어야 합니다.』

종철은 이렇게 말하고 계속하여 위로하였다.

영옥은 종철의 넥타이 끊어진 것이 마음에 대단히 좋지 않 았다. 그것이 우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는 그것이 상서롭지 못한 무슨 징조나 아닌가 하고 뉘우쳤다. 그것을 다시 매려 하였으나 종철은 이것을 미국에 가도 록 고쳐 매지 않고 기념하겠다고 하면서 영옥의 손을 잡았다. 종철은 다시 영옥의 손을 힘주어서 가만히 잡고 문을 나섰다.

영옥은 종철의 뒤를 따라서 남대문 정거장에 가서 이 상훈 이와 같이 떠나는 종철을 정중히 작별하였다. 종철을 태운 기차가 용산역으로 가는 굽이진 궤도를 지나서 보이지 않을 때에 영옥은 남산으로 올라가서 경부선 철로를 바라보면서 도에서 보던 미국의 위치와 미국으로 가는 항로를 생각하다 가 집으로 돌아왔다. 종철은 떠난 뒤로 도중에서 이삼차의 전보를 하고 나중에는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전보를 하였다.

종철의 전보를 차례로 받아보는 영옥은 적이 안심하였다.

그 다음에도 종철과 영옥 사이에 편지의 내왕이 끊이지 않 았다.

18[편집]

종철이가 떠난 뒤에 얼마 안 되어 성열이가 영옥을 찾아왔다. 성열은 영옥을 대하여 인사한 뒤에 경성 신문사 폭탄 사건을 말하며 종철의 의협한 것을 칭찬하고 그때 경성 신 문에 난 영옥에 대한 기사가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고 심히 모호한 변명을 하였다. 그리고 영옥이가 기왕 결혼한 바에 는 자기는 물론 사랑에 대한 마음은 포기하고 이 다음부터 는 다만 친구로 사랑하여 달라는 말을 여러 번 하고, 종철 의 유학간 일과 영옥의 생활 상태를 묻고서 만일 종철의 학 비가 부족이 된다면 자기가 보내 주겠다고 말하였다.

영옥은 심상히 대답하여 대개 거절하는 의미로 말하였다.

성열은 종종 오겠다고 말하고 갔다.

하루는 영옥에게 종철의 편지가 왔는데 그 편지에는 자기 가 유학을 온 것으로 말하면 상훈이가 자청해서 학비를 당 하겠다고 해서 같이 온 것인데 근일에 와서는 학비를 당할 수 없다고 하니 고학하는 수밖에 없다 하고, 상훈은 본래부 터 믿을 수 가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말하고, 남의 보조 를 받는 것보다 고학하는 것이 오히려 무방하다고 하였다.

영옥은 그 편지를 보고 종철을 위하여 실망이 되는 동시에 상훈의 무신을 탄식하였다.

그러자 성열이가 찾아와서 여러 말을 하고 만일 종철의 학 비가 부족하면 자기가 얼마라도 당하겠다는 말을 누누이 하 였으나 영옥은 들은 체도 안하므로 무료히 돌아갔다.

영옥은 그 편지를 받아본 후 이틀 만에 종철의 전보를 받 았는데 그 전보는,

「신병 위독 오백원 즉송」

이라는 전보였다. 영옥은 그 전보를 보고 대단히 놀랐다.

그러나 또한 여러 가지로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종철의 학비를 자담하겠다고 자원하여 같이 유학을 간 상훈이가 아 무리 무신하다 할지라도 불과 석 달에 학비를 못 당한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추측하기 어려운 일이요, 일전의 편지에는 신병에 대한 말은 조금도 없었는데 그 사이에 신병 위독이 란 말이 알 수 없고, 신병은 잠시라도 발생하는 것이므로 그렇다 하더라도 상훈이가 치료비까지 안 줄 수 없는 일이 요, 가령 치료비가 없다 하더라도 종철의 성격으로 보아서 단돈 백 원도 변통할 수 없는 나에게 오백 원이라는 거액을 보내라고 전보할 리가 없을 듯한데 어쩐 일인가 영옥은 이 렇게 의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분의 의심이요, 영옥의 마음은 무섭고 걱정스러워서 돈을 변통하여 속히 보내려고 백방으로 생각 하였으나 도저히 도리가 없었다. 영옥은 떨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부둥켜안고 눈썹을 찡그리고 앉았는데 돌연히 성열 이가 찾아와서,

『어디가 편찮으세요?』

『아뇨, 아픈 데가 없는데요.』

『그럼 무슨 불안한 일이 있으신가요?』

『별로 불안한 일도 없읍니다.』

『기상이 매우 불안하신 듯한데요. 아까 제가 오는 것을 보고 그러신가요?』

『천만의 말씀요. 낙낙지 못한 사람이라 자연 그렇습니 다.』

『아마 무슨 불편한 일이 계신가 봅니다. 오래 앉아서 말 씀하는 것이 오히려 미안한 일이니 곧 가보겠읍니다.』

하고 성열은 일천 원의 현금을 내놓으며,

『그러나 이것만은 용서하실 줄 압니다. 전에도 하찮은 것 을 드리려고 한 일이 있었읍니다만 그때와 지금은 성질이 대단히 다릅니다. 그때는 영옥씨가 처녀 시대니깐 어떠한 의미로 해석하시고 안 받으셨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단순한 친구로서의 호의로 약이나 사서 잡수실까 하고 드리는 것입 니다. 무슨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받으시면 전 일의 실례된 것을 모두 용서하시는 것으로 알겠읍니다.』

『……그 돈이 얼만데요?』

하고 성열은 웃음을 띠고 말하였다.

『얼마라뇨, 약소한 천 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돈을 다 받을 수는 없읍니다. 반 만 받겠읍니다. 용서하세요.』

성열은 기쁜 빛을 띠고 웃음을 계속하면서,

『그것은 많은 것이 아닙니다. 반을 받으시나 다 받으시나 무슨 차이가 있읍니까, 다 받으시기 바랍니다.』

『반을 받는 것도 그렇다고 말씀할 수가 없읍니다. 다 받 으라고 말씀하시면 나는 더욱 곤란하고 미안할 뿐입니다.

용서하십시오.』

하고 영옥은 조금 날카로운 기색을 보였다.

『네, 더 말씀 않겠읍니다. 대단히 광영으로 생각합니다.』

하고 성열은 그 돈 천 원은 도로 집어 넣고 다른 지갑에서 백 원짜리 지화 다섯 장을 내어서 영옥의 앞에 공손히 놓 고,

『감사합니다. 다시 와서 뵙겠읍니다.』

하고 일어서 갔다.

영옥은 그 돈 오백 원을 가지고 조선은행에 가서 전보로 환을 부쳐서 종철에게 보내고 돌아왔다.

영옥이가 성열의 돈 오백 원을 받기에는 양심상으로 여간 의 고통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영옥은 성열이가 자기에게 내왕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였다. 더구나 성열이가 돈을 주는 일에 대하여는 무슨 사약을 주는 것과도 같은 관념이 있었다. 성열의 말에는 다만 친구로서의 호의로 주는 것이 라고 하였지만 영옥은 성열이가 그런 일로 미끼를 삼아서 자기를 농락하려는 기회를 얻으려고 하는 줄로 추측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돈 몇십 원도 변통할 수 없는 경우에 있 어서 만리 해외에 병들어 있는 사랑하는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크게 잘못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는 수단을 가릴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하면 영옥이가 자기의 정조에 관계되 는 일이라든지 종철에게 크게 불명예되는 일이라든지 중대 한 의리에 손상되는 일이라든지 그런 일을 제한 외에는 자 기를 어느 정도까지 회생하더라도 위독한 병중에 있는 애인 이요 은인인 종철의 전보를 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열 의 돈은 내용에 있어서는 만 번이나 부당한 이유가 있더라 도 형식에 있어서는 한 가지의 조건도 없었다. 영옥은 성열 의 돈을 받는 것의 부당한 것과 병든 남편을 구하는 부득이 한 사정의 경중을 참작하여 부당한 돈을 받는 고통을 사랑 하는 눈물로 녹여 버리고 일천 원의 반액 곧 종철의 요구에 상당한 오백 원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돈을 받 을 때에는 으례 받을 것을 받는 것처럼 별로 이유도 말하지 않고 심상히 받았다. 그것은 영옥이가 체면을 불고하고 그 돈을 받은 바에는 구구한 형식의 언동으로 외양을 꾸미는 것이 도리어 구차한 줄로 알아서 외식을 피한 것이다.

그러나 영옥은 부당한 돈을 받은 고통과 종철에게 대한 두 려운 마음이 번민에 번민을 더하여 쓰리고 괴로운 중에 여 러 가지의 의심이 바다에서 일어나는 여름 구름과 같아서 갈피를 알지 못하였다. 물론 종철의 학비에 대한 일과 종철 의 전보에 대해서도 이미 의심하였지만 종철의 전보를 받아 보고 어찌할 수 없는 경우에 있는 때에 문제의 성열이가 일 천 원이라는 돈을 갖다 주는 것은 더욱 의심이 되었다. 세 상에는 우연히 발생하는 공교한 일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바람에 흔들리는 약한 가지에서 꿈꾸는 작은 새와 같이 위태하고 외로운 경우에 있는 영옥에게는 팔공산 초목 이 다 구병이 되었다.

19[편집]

영옥이가 종철에게 돈을 부친 지 사흘이 되었다. 영옥은 집안에 앉았는데 공연히 마음이 떨리면서 창문으로 들어오 는 바람이 심히 찬 것을 깨달았다. 체부가 중문을 두드리면 서 전보 받으라고 소리를 친다. 영옥은 정신없이 나가서 떨 리는 손으로 전보를 받았다. 그것은 상훈의 명의로 한 전보 인데,

「김 종철 병사(病死)」

라는 전보였다.

영옥은 그 전보를 받아 보고는 조금도 충동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람 죽었다는 전보가 놀라면 끝없이 놀라운 일 이지만 심상하다면 너무도 심상한 일이다. 죽는 것은 사람 마다 두번 있을 수 없는 일인 고로 놀라운 것이요, 죽지 않 는 사람이 없는 고로 심상한 것이다. 영옥은 모든 사람의 죽음과 자기의 죽음까지라도 밥 먹은 뒤의 차 마시는 것처 럼 한 웃음에 붙일는지 모르지만 종철이가 죽었다는 전보에 대하여서는 용이하게 믿을 수가 없었다. 만일 영옥이가 그 것을 믿었다면 충동을 초월해서 심장마비가 될 것이다. 그 래서 영옥은 그 전보를 보고서 아무 자극을 받지 않는 것처 럼 되었다.

그리고 각 신문에는 종철이가 미국에서 유학하다가 병들어 죽었다는 일이 기재되었다.

영옥은 사람도 아니오, 귀신도 아니었다. 미친 사람이라 하 자니 정신이 착란치 않고 성한 사람이라 하자니 감각이 없 는 것 같았다. 뿌리채 뽑힌 나무에 피어 있는 꽃이 쬐는 봄 볕에 시들어서 꽃다운 향기와 선명한 빛을 차차 거두는 것 처럼 얼빠지고 바스러졌다. 영옥에게는 웃음도 없었지만 울 음도 없었다. 즐거움도 없었지만 슬픔도 없었다. 감정도 없 고 이지도 없었다. 이것은 울음을 초월하는 슬픔과 아픈 것 을 지나치는 괴로움의 모든 상징의 표현이었다.

성열이가 누구보다도 먼저 영옥을 찾아와서,

『신문을 보고 알았읍니다만 댁에 무슨 기별이 있읍니 까?』

『……』

『그런 일이 어디 있읍니까? 무어라고 말씀드릴 수 없읍니다. 조선 사회에도 작은 손실이 아닙니다.』

『……』

『그러니 우선……댁의 일도 그렇고 반구할 도리가 없겠지요. 종철씨와 같이 간 상훈씨도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곧 상훈에게로 반구할 비용을 보내겠읍니다.』

『……』

『그러나 당한 일인데 어찌 합니까. 진정하셔서 선후책을 강구하셔야지요. 갔다가 다시 오겠읍니다.』

하고 성열은 나갔다.

영옥의 동무들이 차차 오기 시작하였다. 동무들은 진정으 로 위로하고 구원도 하였다.

영옥은 적이 정신을 들리고 동무들에게 안겨서 울기 시작 하였다. 처음에는 소리를 내어 울었지만 나중에는 자지러지 는 느끼는 소리가 이따금 날 뿐이다. 영옥을 위로하는 여러 동무들도 동정의 울음에 잠겼다. 영옥의 집은 눈물의 바다 에 꽃배를 파선한 듯하였다.

조금 있다가 인부 같은 사람들이 백미 석 섬과 장작 한 마 차를 싣고 와서 정 동지댁 서방님(성열)이 보내시더라고 쌀 과 나무를 적당한 위치에 싸놓고 갔다.

그 이튿날에 종철의 시체를 그의 고향으로 반구한다는 전 보가 상훈에게서 왔다.

영옥은 점점 몸이 쇠약하고 정풍증이 생겨서 동덕여학교의 교원도 사면하고 죽는 것보다도 괴로운 생활을 하는데 본래 부터 친하게 지내던 산파 노릇을 하는 한 봉순이라는 여자 가 종종 내왕하여 적지 않은 위안을 주었다. 영옥은 많은 천지에 자기의 마음을 말할 만한 사람은 한 봉순이 하나뿐 이었다.

성열은 수차 와서 영옥을 대하여 자기가 종철의 반구할 비 용으로 돈 천 원을 상훈에게 보냈다는 말과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위로하는 뜻으로 말하였으나 영옥은 대개 냉담하게 대우하였다.

반구하는 기일이 가까와 오므로 영옥은 종철의 고향인 강 원도 양양으로 내려갔다.

반구하는 배가 온다는 날에 짙무명의 흰옷을 입고 간단한 양머리의 질소한 흰 구두로 천사 같은 영옥은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면서 기선의 발착지인 양양 대포의 부두에 나타나 게 되었다.

부산으로부터 오는 종철의 시체를 실은 배는 강릉과 양양 의 지경을 지나서 희미한 검은 연기를 남쪽 하늘을 향하여 뿜으면서 아득한 선체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배가 차차 가까이 올수록 영옥의 눈에는 점점 보이지 않았다.

만약 무사히 졸업을 하고 살아오는 종철이가 그 배에 온다 면 부두에서 기다리는 영옥의 마음은 어떠할까. 만약 종철 의 죽은 영이 배 위에서 자기를 위하여 소복을 입고 기다리 는 영옥을 본다면 그의 마음은 어떠할까? 가령 종철이와 영 옥이가 처지를 바꾸었다면 기다리는 종철의 마음은 어떠하 며 배에 실린 영옥의 영은 어떠할까. 이런 것이 사람의 일 은 일이지만 이런 일을 잘 견디는 것이 인생에게 행복이 되 느냐 불행이 되느냐. 이것은 모든 종교의 철학이 아직 판단 하지 못한 또는 장래에도 판단하기 어려운 인생과 함께 소 멸될 수 없는 영원한 문제이다.

이것이 그 때에 관광하는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배는 산 사람을 실었는지 죽은 사람을 실었는지 배를 운전 하는 수레바퀴는 같은 속력으로 진행했다. 배는 기적을 불 어서 포구에 도착하였다는 경호를 하였다.

종선에 실려 들어간 영옥은 여러 사람의 부축으로 기선의 사다리로 올라갔다. 간신히 시체 있는 곳으로 가서 영옥은 종철의 널 위에 엎어져서 한참 동안 기절하였다. 그러다가 두 손으로 널을 껴안고 널을 싼 기적에 얼굴을 대고 비비면 서 몸부림치며 울었다. 영옥은 마음의 종철을 향하여 여러 가지의 말을 하였지만 널 속에 누워 있는 종철은 말이 없어 너무도 무정하였다.

영옥은 울다가 기절하고 기절하다가 울어서 이생과 저생을 여러 번 드나들었다. 만일 여옥이가 기절할 때에 저생에 가 서 죽은 종철을 만나 보았으면 종철을 만나서 무슨 말을 하 였으면 기절하였다가 다시 울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죽 은 종철이가 저생에 가지 않고 사랑하는 영옥을 위하여 이 생에 있는가. 만일 종철의 영이 이생에 있다면 우는 영옥을 위로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러면 영옥의 울음과 종철의 침묵은 동해 바다의 물거품과 같이 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는 것인가?

그 때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졸철의 시체는 무사히 상륙하여 곧 도문리 본댁으로 운구 하였다가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영옥은 자기의 시가에서 유(留)하는 중인데 장사한 후 수일 만에 종철의 반구하는 배에 같이 온 상훈이가 종철의 집에 와서 종철의 죽은 전말을 말하는데, 그 말이 선후 도착하고 모호한 귀절이 많을 뿐 아니라, 또 반구의 비용을 당한 성 열의 호의에 대하여 대중이 없는 칭찬을 하였으므로 두뇌가 명석하고 편단력이 빠른 영옥은 적잖은 의심을 품게 되었다.

20[편집]

다시 수일을 지낸 후에 그 집 사람들은 이웃집에 가고 영 옥이가 혼자 있었다. 그 집 머슴 아이가 심부름으로 대포에 갔다가 오는 길에 그 동네로 오는 우편물을 가지고 와서 마 루에 앉아 있는 영옥의 앞에 던진다. 그것은 그 동네의 여 러 사람에게로 가는 편지와 신문들이었다. 시골에는 우편물 을 흔히 인편으로 전하는 일이 있으므로 그 집에 있는 아이 가 우편소 근처에 갔다가 마침 그 동네로 오는 우편물을 가 지고 오는 것이다.

그 우편물 중에 영옥의 눈에 먼저 띄는 것은 이 상훈에게 가는 정 성열의 편지였다. 영옥은 그 편지를 보고 이상한 생각이 나서 그 편지를 집어서 자기의 옷춤에 비밀히 감추 었다.

영옥은 전일부터 종철의 전보와 그 뒤의 성열의 행동에 적 지 않은 의심을 품었다가 상훈의 모호한 말을 듣고는 더욱 의심을 가져서 그 의심에 대한 주의가 잠시도 자기의 마음 을 떠나지 않는 중에 성열과 상훈의 사이에 있는 편지를 보 았으므로 돌연히 무슨 비밀을 발견한 것처럼 이상한 생각이 나서 그 편지를 감춘 것이다.

종철의 집은 마침 아무도 없었으므로 영옥은 자기가 거처 하는 방에 가서 그 편지를 곱게 떼어 보았다. 그 편지의 내 용의 대개는 「상훈형!」을 허두로 하고,

「그대가 나를 위해 만리 해외에 가서 지극히 어려운 일을 성공하였으니 감사할 뿐 아니라 그 은혜를 상당히 갚겠으나 그것이 최후의 목적이 아니므로 다시 최(영옥)의 마음을 움 직여서 나의 최후의 목적을 달하지 않으면 이미 성공한 일 도 허사가 될 것이다. 지금 최가 그곳에 내려가 있으니 그 대가 아무쪼록 기회를 타서 좋은 수단으로 소개를 하여 주 면 그 은공은 그대의 청구대로 수응하겠다.」

는 의미의 말이었다.

영옥은 그 편지를 보고는 얼굴이 푸르러지고 몸이 떨려서 진정할 수 없다가 다른 사람들이 오면 자기의 행동이 탄로 될까 하여 그 편지를 깊이 간수하고 억지로 진정하였다.

영옥은 조금 앉았다가 깜짝 놀라는 듯이 옆에 있는 가방을 들고 편지지를 내어놓고 성열의 글씨를 본떠서 그 편지를 동서하여 동서한 편지를 본래의 봉투에 넣어서 흔적 없이 봉하여 머슴 아이가 가져온 우편물의 틈에 갖다 놓고 성열 의 편지는 다시 감추었다.

종철이가 미국에 도착하게 된 일로부터 죽은 일에 대하여 는 무서운 사실이 숨어 있었다.

전일에 성열이가 영옥과 종철의 사이를 중상하려고 뿌리없 는 말로 영옥에게 대한 좋지 못한 기사를 자기가 주필하는 경성 신문에 내었다가 성공을 못핼을 뿐 아니라 종철의 폭 탄바람에 하마터면 몸이 재가 될 뻔한 뒤로 종철에게 대한 원한이 깊어지고 영옥에게 대한 욕심이 뜨거워져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원한을 갚는 동시에 욕심을 채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종철을 극단으로 처치하고자 하여 그 방법을 백방으로 연구하는 중에 상훈으로부터 종철이가 미 국에 유학하려는 의사가 있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 기회를 적용하여 자기의 계책을 결정하게 되었다.

상훈은 종철이와 한 동네에서 생장한 사람인데 인격이 비 루하고 마음이 악독한 사람이었다.

자기의 집은 상당한 재산가였으나, 자기의 부형에게 신용 을 잃은 까닭으로 자기 학비까지도 용이치 않았다.

상훈은 본래부터 서열을 알았는데 성열이가 일본에 유학할 때에 성열의 도움을 입어서 동경에서 같이 유학을 하였다.

그 때에도 성열이가 화류계에 종사하는 일에 대하여 상훈은 많은 편의를 도모하였다. 그후로부터 성열은 돈냥으로 상훈 의 마음을 사서 짝이 없는 심복을 삼았었다.

성열은 상훈에게 대하여 영옥에게 대한 일과 종철을 처치 할 일을 자세히 말하고, 그 방법을 의논한 일이 있었는데, 상훈은 종철이가 미국에 유학할 의사가 있는 것을 말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처치의 방법을 강구하라고 하고, 그 일에 대하여 자기를 사용할 필요가 있으면 자기는 무슨 일이든지 노력하겠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종철이 항상 미국에 유학할 생각이 있는 고로 우연한 기회에 상훈을 대하여 그 뜻을 말 한 고로 그것을 성열에게 말하여 주고 술책의 재료를 삼도 록 한 것이다.

성열은 그것을 재료로 하여 여러 가지 술책을 생각한 결과 종철을 미국으로 보내어 없애 버릴 작정을 하고, 상훈을 대 하여 아래와 같은 문답이 있었다.

『자네와 나의 관계에 대하여 자네는 나를 어떠한 사람으 로 아나?』

『자네는 나를 어떻게 아는지 모르지만 나는 자네를 지기 요 은인으로 아네.』

『이 사람아, 지기면 지기지 은인은 무엇인가. 자네가 나를 지기로 알면 나도 자네를 지기로 알겠지. 그러면 내가 부탁 하는 일이 있으면 자네는 어느 정도까지 들어 주겠나?』

『내가 죽는 일까지는 모르겠네만 그러나 그 이외는 무슨 일이든지 듣겠네.』

『그러면 내가 무슨 일이든지 말해도 관계치 않겠나?』

『그거야 나에게 물을 것이 무엇 있나. 무슨 말이든지 하 게.』

『일전에도 한번 말한 일이 있네만 최와 김에 대한 일일세. 나는 김을 극단으로 처치할 생각이 나네. 그렇지 않고선 어떻게 할 도리가 없네그려.』

『어떻게 극단으로 처치한단 말인가?』

『극단이라면 그만이지 어떻게가 무엇인가?』

『아니, 어떠한 수단으로 하겠느냐는 말일세. 극단이란 말 이야 누가 모르나.』

『김을 미국으로 보내서 없애 버릴 작정일세.』

『냄새 안 나게, 그렇게 할 수가 있겠나?』

『그런데 그 일은 자네가 들어야 되겠는데 그래서 자처중 일세.』

『글쎄 이 사람아, 말만 하게. 자네는 나를 친구로 알지 않 는 말일세그려.』

『이 사람아, 친구로 알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이 용 이하게 나오나, 이 사람아.』

『자네는 헛글 읽었네그려. 친구를 위하여 생명을 내버린 일이 좀 많은가. 우리가 지나 <사기>에서도 많이 보지 않았나. 어서 말하게.』

『그럼 말하겠네, 용서하게.』

하고 성열은 말을 계속하려는데,

『이 사람아, 용서고 무어고 그런 말을 할 테면 애초에 말 말게. 자네와 나 사이에도 용서란 말이 있단 말인가?』

하고 상훈은 얼굴에 핏기를 올렸다.

『그럼 용서하란 말을 용서하게. 김을 없애 버릴 작정인데, 요 깍정이 같은 쪽발이 법률 아래서야 어떻게 냄새 안 나게 할 수 있나. 그래서 그를 미국으로 봬서 처치할 작정인데, 자네가 같이 가서 자네의 손으로 처치하야 하겠으니 그게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건 걱정 말고 방법만 말하게.』

『이렇게 생각했네. 내가 돈은 당할 테니 자네가 김의 학 비를 당하여 주마 하고 자네와 같이 유학을 가서 있다가 처 치하는 방법을 자네 수단대로 어떻게 하든지 그렇게 생각하 였네. 그러면 자네에게 보수는 상당히 하겠네.』

『보수가 무슨 보순가. 사내 자식이 보수를 바라고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어렵지 않은 일일세. 곧 실행하겠 으니 더 할 말이 있거든 하게.』

『김만 처치하는 것이 최후 목적이 아닐세. 최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데 그 기회를 타서 최를 연락해야 하겠으므로 이렇게 해 주게. 자네가 김을 데리고 가서 조금 있다가 무 슨 핑계를 하든지 학비를 대지 못하겠다고 돈을 주지 말게.

그러면 김이 그런 사정을 최에게 기별하지 않겠나? 그러면 나는 최에게 돈을 주어서 김에게로 보내게 하면 최의 환심 도 사고 최와 상종도 잘할 것 아닌가? 알아듣나?』

『그래, 어서 말하게, 그뿐인가?』

『그것이 반드시 성공할는지 모르니까, 또 이렇게 하여 주게. 자네가 김을 처치할 기회가 되거든 며칠 전 해서 김이 병들어 위독하게 되었으니 치료비로 돈 몇백 원을 보내라고 김의 명의로 최에게 전보를 하게. 그것은 물론 김이 모르게 자네가 위조해야 될 것 아닌가. 그러면 나는 그 교대에 최 에게 돈을 주어서 보내도록 하노라면 그 중에서 무슨 일이 될는지 모르겠지. 그리고 김을 처치한 뒤에 내가 돈을 보내 서 그 시체를 그외 고향으로 반구해야 되겠네. 그래서 아무 쪼록 최의 편에 시은을 해야 안 되겠나? 그렇게 생각을 했 네만 자네의 손을 비는 일이라 어떻다고 말할 수가 없네.』

『자네는 쾌활하고 의협한 남잔 줄만 알았더니 두뇌가 대 단히 정밀하네그려. 놀랄 만한 획책일세. 이 다음에 자네는 참모장이 되고 나는 선봉이 되어서 화류계를 정복하여 전제 국가를 건설하세. 친구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도 버리는 수 가 있는데,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 있나?

그러면 곧 실행에 착수할까?』

『그렇지만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까딱하면 자네나 나 의 신세가 간다, 봐라 하네. 안 하려면 모르되 하려면 곧 실 행하다뿐인가.』

『호랑이 구멍에 들어가지 않고 호랑이 새끼를 잡는 수가 있나? 오늘이라도 착수하겠네. 그럼 가겠네.』

하고 상훈은 일어선다. 성열은 지화 오백 원을 상훈의 앞 에 던지며,

『였네, 가다 술이나 한잔 먹고 시작하게.』

하였다.

상훈은 픽 웃고 돈을 집으면서,

『술값인가, 술값은 얼마라도 좋아.』

하고 조금 섰다가,

『소레자 사요나라, 아니, 오늘로부터 적어도 미국 유학생 인데 새로 굿바이.』

하고 나섰다.

상훈은 그길로 종철을 찾아가서 인사한 뒤에 종철을 향하 여,

『자네 외국 유학할 의향이 있다고 하였지? 요전에.』

『그런 생각은 있지만 어디 학비가 있나?』

『학비만 되면 가겠나?』

『가고말고. 지금 우리가 배우지 않으면 되겠나?』

『가면 어디로 갈 생각인가?』

『미국 생각이 많이 있네. 학술 방면으론 어떨는지 모르지 만 자유를 좋아하는 나라라, 사상 방면이 좋을 듯해서 가면 미국으로 갈 생각일세.』

『나도 미국 유학을 가려고 하는 중인데 내 학비를 나누어 쓰고 같이 가보려나?』

『감사한 말씀일세. 그러나 자네 학비도 넉넉하기가 어려 울텐데 내 학비까지 될 수가 있나?』

『존절히 하면 될 듯하나 같이 가보세.』

『나야 물어 볼 것 있나. 가게만 되면 오늘이라도 가고 내 일이라도 가겠네.』

『그렇지만 자네 장가 든 지가 얼마 안 되는데 신정지초에 떠날 수가 있겠나?』

『외로운 아내를 두고 멀리 가는 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방에만 들어 앉아서 배울 기회를 놓칠 수가 있 나.』

『나는 일간이라도 곧 떠나겠네. 그럼 자네도 곧 준비하 게.』

『준비가 무슨 준빈가, 아무것도 준비에 시일을 보낼 것은 조금도 없네. 나는 언제든지 떠날 수가 있네.』

『그러면 일간에 곧 떠나게 하세.』

하고 상훈은 갔다.

21[편집]

상훈은 성열과의 준비를 마친 뒤에 종철을 데리고 미국으 로 가게 되었다.

종철은 배에 실려서 태평양의 한복판을 지나갈 때에 출렁 거리는 물결은 가이 없고 고요한 하늘은 끝이 없었다. 지경 과 마음이 너무도 아득하여 어떤 때는 물인지 하늘인지 분 간을 못하고, 어떤 때는 자기가 인생인지 꿈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중에도 이따금 이따금 새롭고 희미하지 않은 것 은 사랑하는 영옥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시조를 지어서 스스로 불렀다.

바다가 하늘이냐 하늘이 바다냐 하늘보다 바다가 깊고 바다보다 하늘이 깊다.

그보다 높고 깊은 것은 임뿐인가……

종철이가 미국에 도착함으로부터 많은 감상을 얻게 되었다. 순사 하나만 보아도 기를 펴지 못하던 종철이가 자유의 천 지인 미국에서 그 나라 사람들의 모든 일의 자유스러운 것 을 보고 듣고 할 때에는 이 세상에도 이런 나라가 있는가.

인간도 이렇게 자유롭게 살 수가 있는가. 절반이나 의심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너무도 감격한 때에는 남 모르 게 눈물을 흘린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스스 로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고 조선도 이런 자유의 나라를 만 들고 조선 사람도 이런 자유의 사람이 되겠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 새긴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종철은 학문보다 미국 사람의 기상을 배우고, 기술 보다 미국 사람의 정신을 배우려고 결심했었다.

종철은 이러한 노래를 지어 부른 일이 있었다.

자유가 사람에게 가는 것입니까.

사람이 자유를 얻는 것입니까.

자유가 사람에게 간다면 어떠한 사람에게 갑니까.

사람이 자유를 얻는다면 어떻게 얻습니까.

자유가 사람에게 가는 것도 아니오, 사람이 자유를 얻는 것도 아닙니까.

그러면 자유가 곧 사람이요, 사람이 곧 자유입니까.

『임이여, 나를 사랑하시거든 나의 자유를 사랑하여 주십 시오.』

하였읍니다. 그 때문에 나에게 자유가 없읍니까.

『임이여, 나를 사랑하여 주세요. 나는 나의 자유를 사랑하 겠읍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에게 자유가 있겠읍니까.

『잠잠하여라, 자유는 말로 얻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생명 의 꽃수레를 타고 다닌다.』

하십니까. 감사합니다.

그들은 미국에 도착한 지 불과 두 달만에 상훈은 종철을 대하여 학비에 대한 말을 하였는데, 학비는 본래 자기의 힘 으로 판출한 것이 아니라 어느 친구에게 의뢰하였던 것인데 그 친구가 중간에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약속대로 하지 못 하게 되었으므로 부득이 학비를 도와 줄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종철은 부득이한 경우이었으므로 상훈에게 학비를 의뢰하 게 되었던 것이지만 평소부터 남에게 의뢰하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닐 줄을 알았을 뿐 아니라, 더구나 상훈이 같은 믿 기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받게 된 것은 차라리 불행이라 는 생각이 있었으므로 상훈의 말을 듣고서 그다지 이상한 일로 생각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기의 힘으로 노력해서 고 학하는 것이 오히려 행복스럽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종철은 그런 사정을 영옥에게 알게 하는 것이 한갓 영옥의 고통만 더하는 것인 줄로 생각해서 편지에 그 사연 을 쓰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자기의 사정에 대하 여 오직 하나뿐인 통정하는 영옥을 짐짓 혹이는 것이 마음 에 편안치 않아서 영옥에게 그 사정을 편지로 알게 하였다.

그후로 얼마 안 되어 종철은 기후와 수토의 관계로 대단치 않은 병에 걸려서 수일을 신음하게 되었는데, 상훈은 그 기 회를 타서 저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는데, 성열의 부탁 을 차례로 시행하기 위하여 먼저,

「신병 위독 오백 원 즉송」

이라는 전보를 종철의 명의로 위조하여 영옥에게 보내고, 수일 후에 병석에 있는 종철에게 비밀히 마취제를 사용하여 마침내 저의 목적을 이루고, 영옥이가 보낸 오백 원은 대신 찾아서 사용하고 성열이가 보낸 돈으로 종철의 시체를 반구 하게 되었다.

그런 사실이 있었으므로 상훈이가 종철의 반구와 같이 돌 아온 뒤에 성열은 상훈에게 그와 같은 편지를 보내는 중에 공교히 그 편지가 영옥의 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영옥은 시가에서 십여 일을 유하다가 서울로 올라가게 되 어쓴ㄴ데 배로 원산까지 가서 차를 타고 갈 양으로 배를 타 기 위하여 대포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바닷가 의 모래 사장에 모여 선 것을 보았다.

그 사람들의 모여선 가운데에는 여러 가지의 끈으로 결박 된 사람의 시체가 하나 이쓴ㄴ데, 그 시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상훈의 시체였다.

상훈은 그 전날 밤에 그 근처인 물치 장터에 와서 술을 많 이 먹고 어느 여관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 여관의 한 방에 어떤 여자가 혼자 유하는 것을 보고 상훈은 그 여자를 농락 하려 하였으나 그 여자가 듣지 않으므로 마침내 강제로 그 여자를 능욕하고 술이 취하여 그 방에 누워 있었다.

강원도 영월군의 어느 금점에서 일을 하던 금점꾼 세 사람 이 다른 금점으로 옮겨 가는 길에 그 여관에서 자게 되었는 데 그 여자는 그 금점꾼 중의 한 사람의 아내였다. 그 금점 꾼들은 저녁밥을 먹은 뒤에 다른 술집으로 술을 먹으러 가 서 밤이 오래도록 술을 먹었는데, 그 사이에 상훈은 그 여 자를 능욕하고 술이 취하여 그 자리에 누웠던 것이다.

금점꾼 세 사람은 자정이나 되어서 술이 취하여 여관으로 돌아왔는데 그 여자는 그 남편에게 자기의 욕본 말을 자세 히 하고서 분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울며불며 바다에 가서 빠져 죽는다고 야단을 쳤다.

우악이라면 우악이요, 의협이라면 의협으로 특색을 가졌다 고 할 수 있는 그 금점꾼들은 술이 얼근히 취한 김에 무명 업화(無名業火)가 십만 장이나 일어나서 술취한 상훈을 소리 도 없이 들고 나가서 닥치는 대로 노끈으로 동여 매어서 불 문곡직하고 바닷물에다 던져 버리고 그 여자를 합하여 종적 도 없이 달아나 버렸다.

22[편집]

그 이튿날에 상훈의 시체는 바닷물에 밀려서 대포에 표착 되었으므로 여러 사람은 그것을 던져 놓고 모여서서 보는 중에 영옥은 그 일을 알게 되었다.

영옥은 불교 포교당에서 인과보응(因果報應)의 설법을 들은 것을 생각하면서 상훈은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크게 악한 일을 행하고서 그의 인과율로 참혹히 죽은 것이 아닌가. 이러헥 생각하고 영옥은 멀리 부처님을 향하여 폐배하 고 상훈을 위하여 후세에는 좋은 사람이 되기를 진실한 마 음으로 기도하였다.

영옥은 경성환이라는 배의 이등선객이 되어서 고성 앞바다 에서 밤을 만났는데 다행한 일은 바다에 풍랑이 없어서 지 극히 평온한 것이었다. 동짓달의 스무날의 늦은 달은 먼 하 늘의 찬 기운을 거쳐서 만이천봉의 금강산을 정면으로 비추 는데 바다와 하늘은 하나가 되고 고요한 별들은 공중에 어 리어 있는 서릿발을 거쳐서 가늘게 뿔이 난다. 돌아가는 기 계의 물결소리를 내면서 가는 듯도 하고 안 가는 듯도 했다. 지경은 아득하고 사람은 잠잠했다.

영옥은 평온한 배에서도 몸을 이기지 못하여 비틀걸음을 치면서 배 위에 나섰다. 영옥은 그만큼은 깊고 정하기 어려 운 두뇌의 힘으로 넓이로는 천지를 보려도 하고 길이로는 만고를 보려고도 하였다. 인생의 근본 문제를 의심 없이 해 결하려고도 하고 당장에 생사를 해탈하려고도 하였다. 그러 나 그 문제들은 눈앞에서 해결될 듯하면서도 마침내 문제 그대로가 의연히 남아 있었다.

영옥은 스스로 절망하였다. 슬펐다. 절망과 슬픔은 돌돌 뭉 쳐서 쇠뭉치 같은 고통이 되었다. 영옥은 그 고통을 면하려 고 할 때에 즐거움도 없이 괴로움도 없이 만고에 변함도 없 이 죽음도 없이 끊임없이 한결같이 출렁거리는 바닷물이 한 량없이 부럽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다시는 종철의 품에 안길 수 없는 쓸데없는 몸을 사랑하는 바다의 품에 안기려 고 결심하였다. 바다에 뛰어들려는 영옥은 두 손으로 배 난 간을 힘있게 잡고 몸을 조금 주저앉은 듯하다가 「악」소리 를 치며 몸을 솟았다.

바닷물에 풍덩 소리를 내고 두서너 번 뒤넹기지릉ㄹ 쳐야 할 영옥은 배위갑판 위에 뒤로 넘어져서 얼굴에 땀을 흘리 고 사지를 떨었다. 그것은 영옥이가 바다에 빠지려고 몸을 솟치는 찰나에 번개 같은 무슨 생각이 나서 두 손으로 배 난간을 밀치면서 몸을 뒤로 넘어뜨린 것이다. 그리고 영옥 은 달리 결심하였다.

그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영옥의 뱃속에 종철의 혈육이 들어서 여덟 달이 된 것이다. 영옥은 가령 자기는 만 번을 죽더라도 종철의 혈육은 한 번도 버릴 수가 없었던 까닭이 었다.

영옥은 수륙 천여 리를 무사히 통과하여 경성에 도착하였다. 영옥은 집에 돌아온 뒤에 성열이가 상훈에게 보낸 편지를 증거삼아서 법률 문제로 남편의 원수를 갚을까 하고 생각하 여 보았으나 그 사건이 미국에서 발생한 일이므로 조선에서 재판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정범자인 상훈이가 이미 죽었다. 그러므로 미국에 가서 재판하려면 절차가 곤란할 뿐 아 니라 피해자의 시체가 없고 정범자가 없어서 재판의 결과로 복수가 될는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영옥은 법률에 붙일 일은 파의하였다.

영옥이는 두 달을 지낸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순산이 되고 산후의 여증이 없을 뿐 아니라 봉순의 주도한 구호로 해산 의 전후가 대단히 순조로이 되었다.

영옥은 오래 살라는 의미로 아들의 이름을 만수라고 지었다. 만수는 골격이 충실하고 얼굴이 영특해서 여러 사람에 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곱게 자랐다.

만수는 낳은 지 육칠 삭이 되자 사람을 알아보는 듯하고 해쭉해쭉 웃기도 해서 천진난만한 재롱은 제 어머니의 마음 을 위로도 하였지만 한편으로 제 어머니의 마음을 슬프게도 하였다. 그러나 영옥에게는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보물 이었다. 그래서 영옥은 잠시도 만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성열은 종종 영옥에게 와서 여러 가지로 성화를 부렸다.

그러나 내공방촌(乃公方寸)에 정산(定算)이 있는 영옥은 특 별한 사색이 없이 평범하게 대우하였다.

영옥은 자기가 결심한 일도 실행할 시기가 된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동해바다에 빠지려다가 중지할 때에 몸증에 있 는 종철의 혈육을 낳아서 남의 젖이나 우유 같은 것을 과히 어렵지 않게 먹을 만하면 자기는 종철의 뒤를 따라가서 다 하지 못한 사랑을 영원히 계속하겠다는 결심인데, 만수를 낳은 지가 반 년이 넘어서 그만하면 우유를 먹고라도 발육 할 만하고, 또 자기의 마음 가운데에 있는 무슨 일을 행하 기에 적당한 시기인 줄로 생각할 뿐 아니라 종철에게 대한 생각과 성열에게 대한 고통으로 하루를 사는 것이 백 년을 죽는 것만 못하였다.

영옥은 여러 가지 무색의 보드라운 옷감을 사다가 만수의 옷을 짓는데 작게도 짓고 조금 크게도 지어서 여러 벌을 지 었다. 그 무색옷들에게는 물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아롱진 흔적이 많이 있었다. 그것은 영옥이가 옷감을 살 때 주의 못하고 잘못 산 것이 아니라 영옥이가 그 옷으 f지을 때 아 무리 주의하였지만 알지 못하게 흐르는 눈물 방울이 떨어져 서 그대로 마른 것이다. 처음에는 눈물이 떨어지면 대단히 뉘우치고 다른 깨끗한 헝겊으로 떨어진 눈물 방울으 닦아 보았다. 그러나 떨어진 눈물은 닦을수록 흔적이 커져서 또 다시 뉘우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만일 눈물이 떨어지면 그것을 곱게 그대로 말린 것이었다.

23[편집]

팔월 열이렛날 밤은 정히 영옥의 하고 싶은 일을 행하는 때이다. 무궁한 시간에서 영옥에게는 가장 아프고 가장 슬 프고 가장 쾌락한 나링었다. 영옥은 만일 누가 오면 자기의 일에 방해될까 봐서 그 날은 어둡기 전에 대문을 걸었다.

밤은 아홉시를 지나 열시에 들어간다. 죽으러 가려는 영옥 은 만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눈이 부시게 비치는 전등은 곱 게 자고 있는 만수의 얼굴을 그림자 없이 비췄다. 영옥은 뜨거운 눈물의 안개를 거쳐서 숨소리도 없이 자고 있는 만 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영옥이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만 수의 얼굴은 희미했다.

영옥은 떨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새벽이 되면 만수는 깨겠지. 깨어서 만져 주고 젖먹이는 내가 없으면 울겠지. 혼자 울다가 기운이 없으면 나중에는 울지 못하겠지. 그러면 어찌될까? 만일 누가 와서 젖을 먹 이면 그를 나인 줄로 알겠지. 그리하여 울다가 젖을 먹으면 서 해쭉해쭉 웃겠지. 만일 한 사람이 저를 길러 주면 언제 까지든지 그를 저 낳은 어미인 줄로 알겠지. 그래서 그 어 머니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겠지. 그러나 그가 저를 낳은 자식처럼 사랑하여 줄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에 다시 볼 수 없는 만수의 얼굴은 끝없 이 예쁘고 한없이 불쌍하였다. 영옥은 자는 만수가 깰까 봐 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억지로 참고 돌아 앉아서 입을 막고 울었다.

영옥은 울음을 그치고 책상 앞에 가서 주시에다 만수의 생 월 생시를 쓰다가 눈물이 떨어져서 글자와 획이 번졌으므로 그것을 찢어내고 다시 썼는데

<김 만수 갑자년 음력 십이월 이십오일 하오 사시 생>

이라 썼다. 그것을 잘못된 것이 없나 하고 서너 번이나 자 세히 보고 마지막에는 손가락으로 글자마다 짚어 가며 보았다. 그것을 네모지게 접어 놓고 다시 장롱 문을 열고 그 안 에 있는 꽃 도슬박을 내어서 맨 밑에 있는 밤톨만한 작은 주머니를 꺼내었다. 그 주머니는 붉은 모본단으로 짓고 푸 른 공단조각으로 끈을 접어서 꿰었다. 한쪽에는 「수복강 녕」을 푸른 실로 수놓고 한쪽에는 무궁화꽃을 금실로 수놓 았다.

그 주머니 속에는 십원짜리 금전 하나, 일원짜리 지화 한 장, 십전짜리 은전 하나, 오전짜리 백룡전 하나 일전짜리 동 전 하나가 들어 있었다. 영옥은 만수의 생년월일을 쓴 것을 그 주머니에 넣고 다시 주머니 끈을 졸라매서 그 주머니를 가지고 만수의 옆에 가서 그것을 만수의 적삼 돌띠에 채워 주려는데 손이 떨리고 눈물이 가려서 채우려다 두서너 번이 나 헛 일을 하였다.

그러다가 간신히 채워 주고 그 주머니가 만수의 가슴을 누 를까 봐서 왼편 겨드랑 밑으로 돌려서 주머니가 방바닥에 놓이게 하여 주고 다시 만수의 얼굴을 보면서 거의 까무러 지도록 울었다.

시계는 열한시가 가까와 간다. 영옥은 놀라는 듯이 방안을 정돈하고 책상 앞에 가서 간단한 편지를 썼다.

그것은 봉순에게 하는 편지인데, 자기가 죽은 뒤에 만수를 잘 길러 달라는 유서였다. 그것을 봉투에 넣어서 방 한가운 데 보기 쉬운 곳에 놓고 문 밖으로 나가려다가 잊었던 것을 생각하는 듯이 장롱 틈에 가서 포도주 두 병과 과자 조금과 유리컵 하나를 한데 싸서 두었던 것을 옆에 끼고 방안을 둘 러본 뒤에 만수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들여다보고 자기의 얼 굴을 만수의 얼굴에 한번 대어 보려다가 만수의 잠이 깰까 하여 그대로 일어서서 쏟아지는 눈물의 한 방울을 만수가 덮고 자는 포대기 위에 떨어뜨려서 모자의 은정을 영원히 기념하였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나서서 문을 닫으려다가 다시 고개를 디밀어서 방안을 둘러보고 만수를 최후로 보았다. 방문을 가만히 닫고 대문 밖에 나서서 대문 고리를 밖 으로 걸었다가 문고리를 밖으로 걸면 누구든지 들어가 보지 않을까 하여 걸었던 고리를 다시 벗겨 놓고 빠른 걸음으로 한강 철교로 향하였다.

봉순의 집 전화 전령은 따르릉 울렸다. 봉순은 전화를 받 고 서서,

『네, 그렇습니다. 내가 한 봉순입니다. 네, 그러십니까? 안 잡니다. 아직 자정이 못 되었는데 어느새 자요. 이뿐 어미를 데리고요, 네, 그렇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네.』

하고 봉순은 치마를 갈아입고 행랑에 있는 이뿐의 모를 데 리고 영옥의 집으로 갔다.

봉순은 영옥의 집에 가서 안마당에 가서 영옥을 불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으므로 안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만수만 혼 자 자고 있고 방 가운데 봉투에,

「사랑하는 봉순씨에게」

라고 쓴 편지가 놓여 있다. 봉순은 의심이 가득한 마음으 로 들어가서 그 편지를 떼어 보고 비로소 영옥의 일을 알고 동정의 눈물을 뿌리면서 만수를 자기가 기르기로 굳게 결심 하고, 그날 밤에 이뿐의 모와 같이 영옥의 집에서 자고 만 수에게 대한 만사를 유감없이 준비하기로 하였다.

영옥은 한강 철교로 가는 길에 안국동 자동 전화에서 봉순 에게 전화를 하였는데, 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이뿐의 모 를 데리고 곧 자기의 집으로 오라고 하였다. 그것은 봉순이 가 자기의 집에 오면 자기 없더라도 자기가 써서 둔 편지를 보고 만수를 구호하여 달라는 의미요, 이뿐의 모를 데리고 오라고 한 것은 봉순이가 혼자 오면 너무 휘휘하여 할까 봐 서 그런 것이다.

24[편집]

영옥은 안국동에서 전차를 타고 가다가 종로에서 신용산 가는 전차를 갈아타고 한강의 큰 철교에 도착하였다.

벌써 와서 기다리는 성열은 깜짝 반가와하면서,

『인제 나오세요?』

하였다. 영옥은 고개와 허리를 아울러 굽히면서,

『벌써 나오셨어요? 늦게 나와서 미안합니다.』

『나오기는 벌써 나왔읍니다만 아직 시간은 지나지 않았읍 니다.』

『너무 일찍 나온 내가 시간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하고 성열은 웃었다.

영옥은 성열과 얼마 안 되게 사이를 두고 같이 걸어가서 철교의 중간쯤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약 일 주일 전에 성열이가 자기의 집에 찾아 왔을 때에 영 옥은 성열을 대하여,

『요새는 기후도 좋고 며칠 안 있으면 달이 대단히 밝겠읍 니다. 나는 열이렛날쯤 한강 철교로 달구경을 가겠읍니다.』

항상 냉담하던 영옥이가 돌연히 자기에게 대하여 달구경 간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에 이상한 충동을 받으면서 가만히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성열은,

『요새 달구경 좋습니다. 여러분이 가세요?』

하였다.

『아뇨, 혼자 가겠읍니다. 성열시 같은 분이 같이 가셨으면 좋지만……』

그 말은 들은 성열은 꿈인지 생신지 모를 만큼 기쁨에 취 하여 조금 가쁜 듯한 말소리로,

『저 같은 사람이 같이 가도 관계치 않겠어요? 저는 영옥 씨와 같이 달구경을 가면 한량없는 영광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같이 가 주시면 대단히 좋겠읍니 다.』

『그럼 열이렛날 저녁에 댁으로 와서 같이 나갈까요?』

『그럴 것 없이 열한시 삼십분쯤 해서 한강 큰 철교에서 만나기로 하지요.』

『좋도록 하세요. 그럼 그렇게 알겠읍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바람이 좀 찬 것은 괜찮으나 만일 비 가 오면 다른 날로 정하겠읍니다.』

『아, 그렇습죠. 비가 오면 어찌 나갑니까. 그럼 그날 오후 한시쯤 해서 자동차를 보내겠읍니다.』

『감사합니다만 난 그렇게 번거로운 것이 좋지 않아요. 전 차 타고 나가겠읍니다.』

『한강에 가서 배를 타시면 배를 미리 준비하겠읍니다.』

『난 어지러워서 배를 잘 못 타요. 그저 철교에서 노는 것 이 좋아요.』

『용금류의 요리는 조금 시켜야지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랍 니다.』

『나는 그런 거 다 좋지 않아요. 그저 담박하게 달구경이 나 하고 들어오겠읍니다. 아무것도 분별 마세요. 우리 두 사 람 외에 개미 하나라도 따르면 싫어요.』

성열은 그 소리가 천국의 음악을 듣는 것보다도 더욱 좋아 서,

『그러겠읍니다. 나는 진세 속객이라 그런 말을 합니다. 나 도 인제 영옥씨를 따라서 신선이 되겠읍니다. 그렇게 알고 가겠읍니다.』

하고는 일어서서 무슨 언동이 있을 것처럼 머뭇머뭇하면서 움직일 듯하다가 나가 버렸다.

그런 사실이 있었으므로 영옥과 성열은 철교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영옥은 철교의 난간을 잡고 서서 성열을 보면서,

『오늘밤은 바람이 찹니다.』

『오늘같이 온화한 날에 바람이 차다고 하세요. 아마 몸이 매우 쇠약하신 모양입니다그려.』

『달도 좋기도 합니다. 이 다리 위에서 저 달을 처음으로 본 사람들이야 좀 좋았겠읍니까? 그러나 이 다리 위에서 저 달을 마지막 본 사람도 적지 않을 텐데, 그 사람들이야 좀 슬프겠읍니까?』

『오늘같이 좋은 날에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 철교에 서 자살한 사람도 적지 않지만 전정이 만리 같은 사람들이 한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 요.』

『그거야 자살하는 사람은 자살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있어서 자살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런 말씀을 하여 무 엇을 하겠읍니까, 앉읍시다.』

하고 영옥은 먼저 앉으며 성열을 쳐다보았다.

성열은 웃음에 반만 감긴 눈으로 영옥의 얼굴을 심상치 않 게 보면서 단정치 못하게 주저앉았다.

영옥은 가지고 간 포도주병을 끌러 놓으면서,

『나는 오늘 저녁에 성열씨를 대접하려고 변변치 못한 포 도주를 조금 가지고 왔읍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아! 이게 웬일이세요. 이것을 손수 가지고 오셨어요. 영 옥씨로 하여금 이런 것을 손수 가지고 오신 것은 불민한 나 를 책망하시는 뜻으로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에요.』

『천만의 말씀요.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선선하신데 어서 술이나 한잔 잡수세요.』

하고 영옥은 포도주를 컵에 가득 부어서 성열을 주고, 과 자봉지를 끌러서 성열의 앞에 다시 놓았다.

영옥의 손으로 권하기만 한다면 한강수가 모두 포도주라도 오히려 부족할 즐거움에 넘칠 성열은 웃는 입술을 거두지 않은 채로 포도주 세 컵을 거듭 마셨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취하여 고개를 수그리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영옥은 한 컵을 더 따라서 한손으로 성열의 이마를 들고 컵을 성열의 입술에 대고 들어부어 먹였다.

이것이 사랑의 불에 타는 성열과 원한의 바다에 잠기는 영 옥의 살과 살이 처음으로 접촉한 것이다. 영옥을 사랑하기 위하여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 성열이가 한 번이라도 영옥의 손에 접촉되었으면 죽어도 만족할 것인가? 정조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 영옥이가 한 번이라도 성열의 이마에 옥 같은 손을 접촉하였으면 그것이 일만 섬의 흰구 슬에 한 점의 티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성열의 죄악은 거 기에서 사라지고 영옥의 꽃다운 향기는 거기에는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