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학 오십 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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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문학(中國文學) 50년사(五十年史)
- 이육사(李陸史)
一
[편집]중국(中國) 문학사상(文學史上)에서 이 50년(五十年)이란 세월(歲月)이란 매우 중요(重要)한 시기(時期)이었으니 이 50년(五十年) 동안의 몇 가지 중요(重要)한 사건(事件)을 종합(綜合)해 보건대
(ㄱ), 이 50년전(五十年前)은 『신보(申報)』가 창간(創刊)되던 해이며 (1872(一八七二)) 또한 증국번(會國藩)이 죽은 것도 바로 이 해이었으니, 증국번(會國藩)은 동성파(桐城派)의 고문(古文)을 중흥(中興)시킨 제일(第一) 맹장(猛將)이었다. 그러나 그의 중흥사업(中興事業))은 비록 광영찬란(光榮燦爛)한 바 있었다 해도 가석(可惜)한 것은 전연(全然) 온고(穩固)한 기초(基礎)를 갖지 못하였으므로 한 가지도 장구(長久)한 수명(壽命)이 없었다는 것은 청조(淸朝)의 운명(運命)이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동란(動亂)으로 말미암아 일체(一切)의 병상(病狀)과 일체(一切)의 약점(弱點)을 노출(露出)했을 때 증국번(會國藩) 등(等) 일련(一聯)의 사람들이 태평천국(太平天國)을 타도(打倒)하여 각지(各地)의 비란(匪亂)을 평정(平定)하 고 그들의 중흥사업(中興事業)을 달성(達成)하였다. 그것은 다만 증파(曾派)의 중흥사업(中興事業)이 5,60년간(五六十年間)의 만청국운(滿淸國運)을 연장(延長)한 것은 될지라도 마침내 만청제국(滿淸帝國)의 부패(腐敗)를 구(救)하지 못하고 만청제실(滿淸帝室)의 멸망(滅亡)을 구(救)하지 못한것같이 그들의 문학(文學)의 중흥사업(中興事業)도 또한 이같은 것이었다. 고문(古文)이 『도광(道光)』 『함풍(咸豊)』 시대(時代)에 이르러 공소(空疏)한 방요파(方姚派)와 괴벽(怪僻)한 공자진(龔自珍)파(派)등(等)이 일시(一時)에 세상(世上)에 나와서 증국번(曾國藩)등(等) 일련(一聯)의 동성(桐城) 고문파(古文派)에게는 은연(隱然)한 1부대(一部隊)의 생력군(生力軍)으로 홀연(忽然)히 중흥적(中興的) 지위(地位)를 차지했으나 다만 『동성(桐城))』 『상향파(湘鄕派)』 중흥(中興)도 역시 잠시적(暫時的)이었고 결(決)코 지구적(持久的)이지는 못했으며 증국번(會國藩)의 정신(精神)과 경험(經驗)만은 확실(確實)히 동성파(桐城派) 고문(古文)을 재건(再建)한 중심인물(中心人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증국번(會國藩)이 죽은 뒤 고문(古文)의 운명(運命)도 점점(漸漸) 미약(微弱)해 갔으니 증파(曾派)의 문인(文人) 곽숭도(郭嵩燾), 설복성(薛福成), 려서창(黎庶昌), 유월(兪樾), 오여륜(吳汝綸) 등(等)이 한 사람도 그 중흥사업(中興事業)을 계속해가지 못했을뿐 아니라 다시 한 대(代)를 나려가면 실로 『강노말지(强弩末之)』밖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때의 고문(古文)의 중흥(中興)이란 겨우 병(病)들어 죽는 사람에게 『회광반조(回光返照)』는 되었을 지언정 여구(如舊)히 고문(古文)의 쇠망(衰亡)을 구(救)치 못했으며 이 고문(古文)의 쇠망사(衰亡史)의 일단(一段)이 50년(五十年) 동안의 아주 명현(明顯)한 추세(趨勢)였었다.
(ㄴ) 고문학의 말기는 시대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한번도 그 양식을 번복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오십년간의 하반이 무릇 고문학의 수점(遂漸)변화한 역사인데 이 계단의 고문학의 변화사를 다음 몇개의 소단락으로 나누어 본다면
(ㄴ) 고문학(古文學)의 말기(末期)는 시대(時代)의 핍박(逼迫)을 받으면서도 한번도 그 양식(樣式)을 번복(翻覆)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50년간(五十年間)의 하반(下半)이 무릇 고문학(古文學)의 수점(逐漸)변화(變化)한 역사(歷史)인데 이 계단(階段)의 고문학(古文學)의 변화사(變化史)를 다음 몇개의 소단락(小段落)으로 난호아 본다면
1(一), 엄복(嚴復), 임서(林紓)의 번역(翻譯)문장(文章)
2(二), 담사동(譚嗣同), 양계초(梁啓超)의 의론(議論)문장(文章)
3(三), 장병린(章炳麟)의 술학(述學)문장(文章)
4(四), 장사쇠(章士釗) 일파(一派)의 정륜(政綸)문장(文章)
이 네가지 운동(運動)이 20여년(二十餘年)의 문학사상(文學史上)에서 모다 한개의 중요(重要)한 위치(位置)를 점령(占領)하는 것이다. 그들의 연원(淵源)이나 주장(主張)은 비록 매우 다른곳이 많다고 하더라도, 다만 우리가 역사상(歷史上) 안목(眼目)으로 곤찰(觀察)해 볼 때는 이 4파(四派)는 모다 응용방면(應用方面)의 고문(古文)이었다. 이러한 위급(危急)한 과도시기(過渡時期)에 있어서 여러가지 수요(需要)가 언어(言語)와 문자(文字)로 하여금 부득불(不得不) 『응용(應用)』이란 방면(方面)으로 변해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므로 이 4파(四派)를 지목(指目)해서 『고문(古文) 범위(範圍) 이내(以內)의 혁신운동(革新運動)』이라고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다 자발적(自發的)으로 근본적(根本的) 개혁(改革)을 할 여가(餘暇)도 없었고 고문(古文)이란 것이 단순한 일종(一種)의 사치품(奢侈品)이고 일종(一種)의 장식품(裝飾品)이었기에 도리혀 응용(應用)할 공구(工具)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의 한 사람도 인식(認識)치 못했었다. 그래서 장병린(章炳麟)의 고문(古文)이 이 파(派)중(中)에서 가장 고아(古雅)하면서도 겨우 자기(自己) 한 대(代)에서 끝을 막고 다시 전(傳)하는 사람이 없었으 며 엄복(嚴復), 임서(林舒)의 번역문학(翻譯文學)이 당시(當時)에는 겨우 일시적(一時的)이나마 수요(需要)에 공급(供給)할 수가 있었으되 마침내 길게 가지못했고 주작인(周作人) 형제(兄弟)의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이 이 일파(一派)의 최고작품(最高作品)이었으나 그것도 다만 일방면(一方面)에만 사용(使用)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모다 실패(失敗)는 하였으나 실패(失敗)한 뒤에 그들은 다시 백화문학(白話文學)의 건장(健將)이 되었다. 담사동(譚嗣同), 양계초(梁啓超) 일파(一派)의 문장(文章)이 응용(應用)한다는 정도(程度)에서는 비교적(比較的) 나은 편이었고 사회적(社會的)으로 미치는 영향(影響)도 적지 않었으나 그것도 그 일파(一派)의 말류(末流)에 와서는 천박(淺薄)한 부연(敷衍)과 무용(無用)의 퇴적(堆積)을 면(免)치 못해서 한갓 사람으로 하여금 염증(厭症)이 나게 하였을 뿐이였다. 장사쇠(章士釗) 일파(一派)는 본래 엄복(嚴復)과 장연린(章煉麟) 양등파(兩等派)에서 변화(變化)해 나온 것으로 그들은 논리(論理)와 문ㅂㅂ(文法)을 중시(重視)해 왔기에 매우 근엄(謹嚴)하고 또 위완(委婉)한 데가 있어 양파(梁派)의 결점(缺点)을 다소(多少) 보충(輔充)을 했으나 갑인파(甲寅派)의 정론문장(政論文章)이 민국(民國) 초년(初年)에는 거이 한 개 중요(重要)한 문파(文派)를 형성(形成)했것이다. 다만 이 일파(一派)의 문자(文字)가 저술(著述)에 용이(容易)치 못하고 통속적(通俗的)이 아니여서 실재(實在)에 있어서는 역시 실패(失敗)에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엇다. 그래서 이 일파(一派)의 건장(健將) 중(中)에도 고일함(高一涵) 이대쇠(李大釗), 이검농(李劍農) 같은 이는 뒤에 모다 자화(自話) 산문(散文)의 작자(作者)가 되었다.
이렇게 고문(古文)이 겨우 응용(應用)이라는 길을 따라간 일단(一段)의 역사(歷史)는 역시 신구문학(新舊文學)이 교체(交替)하는 과도시대(過渡時代)에 면(免)치 못할 한 개의 계단(階段)이었고 그러면서도 고문학(古文學)이 이 시기(時期)에 있어서 23년(二三十年)의 운명(運命)으로 지지(支持)해 간 것은, 또한 사실(事實)이었다.
(ㄷ) 이 50년(五十年) 동안에 가장 세력(努力)이 컸고 가장 유행(流行)이 광범(廣汎)하게 된 것은 이상하게도 양계초(梁啓超)의 문장(文章)도 아니었고 임서(林舒)의 소설(小說)도 역시 아니었으며 그것은 정(正)히 허다(許多)한 백화소설(白話小說)이었다. 『칠사오의(七俟五義)』 『아녀영웅전(兒女英雄傳)』 등(等)은 모다 이 시대(時代)의 작품(作品)이었으며 『칠사오의(七俟五義)』 뒤에 『소오의(小五義)』 등(等)의 속편(續篇)이 나온 것도 모다 이 30년래(三十年來)의 작품(作品)이니 이러한 소설(小說)이 진실로 대표적(代表的)인 북방(北方)의 평민문학(平民文學)이었다. 그리고 전청(前淸) 만년(晚年)에 와서는 남방(南方)의 문인(文人)들도 역시 허다(許多)한 소설(小說)을 산출(産出)하였으니 유악(劉鶚)의 『노잔유기(老殘遊記)』 이백원(李伯元)의『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 『문명소사(文明小史)』 오옥요(吳沃堯)의 『20년간(二十年間) 목도지(目睹之) 괴현상(怪現狀)』 『한회(恨悔)』 『구명음원(九命音寃)』 등등(等等)인데 모다 의의(意義)있는 작품(作品)으로써 구상(構想)과 견해(見解)에 있어서도 한갓 북방(北方)의 순수(純粹)한 민간오락(民間誤樂)에만 공급(供給)되는 작품(作品)들과는 달라서 이 남방(南方)의 백화소설(白話小說)은 50년(五十年) 중국문학(中國文學)의 최고작품(最高作品)인 것이고 가장 문학적(文學的)으로 가치(價値)있는 작품(作品)인만큼 이 일단(一段)의 소설발달사(小說發達史)는 즉(卽) 중국(中國)의 『산 문학(文學)』의 한 개 자연(自然)스러운 추세(超勢)이었다. 그러므로 그 중요(重要)함이란 전면(前面)에 재차(再次) 말한 고문학사(古文學史)보다도 한층(層) 더한 바 있는 것이다.
(ㄹ) 오십년래 백화소설사는 의연히 일년래의 자화문학과 다름이 한 개 큰 결점도 가졌다는 것은 백화채용이 다시 말하면 무자각했다는 것, 즉 되는 대로 해서 아무런 비판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민국 6년 이래의 문학혁신은 그야말로 일종 의의있는 주장으로써 무의의한 연진(演進)이 너무나 오랬고 또한 불경제적이었다.
근오십년래의 혁신운동으로만 보더라도 의식적인 주장이 있고 계획적인 혁신인 때문에 가장 짧은 기간 중에서도 능히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자상의 혁신도 또한 이러한 것이다. 일천년래에 자화문학이 일선상전하여 한번도 단절되여 본 일이 없었으면서도 그중 어떠한, 그야 물론 당시(唐詩)거나 송사(宋詞)거나 원곡(元曲)이거나 또는 명청의 소설이거나 한가지도 의의있는 고취를 하여본 일이 없었다. 한번도 명백하게 고문을 공격한 적도 없었고 한번도 명백하게 백화문학을 주장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근오년의 문학혁신이란 그와는 다른 것이니 그들은 해명하게도 고문은 벌써 {죽은 문학}이란 것을 선언했었고 또 그들은 {죽은 문자}은 {산 문학}을 생산치 못한다고 선언한 다음 현재와 장래의 문학은 백화가 아니면 안 된다고 완강히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의있는 주장이 그야말로 문학혁신의 특점이며 그야말로 오십년래에 이러한 운동이 능히 성공할 수있는 최대의 원인이었다.
이상의 사항은 말하자면 오십년간 중국문학이 변천해온 대세이었는 만큼 다음은 이러한 몇개의 추세를 보다 더 상세하게 설명보기로 하는 것이다.
이(二)
[편집]증국번이 한번 죽은 뒤의 {동성 상향파}는 사실상 한번도 정채동인할 그런 문장이 없었다. 왕선겸(王先謙)의 편집한 {속고문류찬}(광서 8년 1882)에 보면 용계서, 노일룡, 오매수 등의 문장을 실어서 겨우 이 일파의 노장들을 대표한 것인데 왕선겸의 자서를 보건대
- 석포(요내)가 절학을 진흥하니 해내가 미연히 따라 배우더니 그후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사승하기에만 자랑으로 여겨서 류부(謬附)가 없지 않았다. …매씨(매증량)는 고풍에 침음해서 짓는 것이 심원하기는 하나… 증문정공(국번) 만은 웅직한 기풍과 굉통한 식견으로써 문장에 발로함이 고금에 관절한 것이라.…배우는 사람들이 기로에서 나갈 바를 모를 때 궤도를 바르게 따르게 하였으니 요씨를 내놓고는 그 법을 매씨와 증씨에 취하면 족하니라.
{요씨를 내놓고는 그 법을 매씨와 증씨에 취하면 족하니라} 한 이것이 증국번 사후의 고문가들의 전법하는 첩경이니만치 우리들이 이이상 그들의 문장을 끌어다가 편복을 채울 것이 없이 이에 증국번의 구양생문집서를 들면 이 서문이야말로 동성파의 연원전파가 쓰여진 만큼 문학사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다.
건륭말년에 동성에 요희전(내)선생이 고문사를 가장 잘하였는데 그 향중 선배인 방망계시량(시량은 직함 역자)의 하던 바를 본받고 유군대괴와 그의 백부편수(편수는 직함 역자) 군범에게 법을 내렸는데 이 삼자가 모두 사도(斯道)에 명망이 높았으되 요선생이 가장 수법이 정어하였으므로 역성의 주영년(서창)이 말하기를 {천하의 문장이 그 동성에 있을진저}라고 해서 이로부터 학자들이 동성에 귀향하는 자 많았으니 동성파라고 부르기는 마치 전세에 강서시파라고 일컬은 것과 같으니라.
요선생이 말년 종산서원에서 강석을 주재하실새 그 문하 저명한 자로 상원의 관동(이지)과 매증량(백언)과 동성의 방동수(식지) 요영(석포) 등 네사람이 가장 고제 제자로서 제각기 그 능한 바를 교우간에 전수해서 그치지 않았고 동성에는 재균형존장(載鈞衡存莊)이 있어 식지를 사사하기 오래하였었고 매우 정력이 절인하여 스스로 그 고을 선배의 규모를 지켰을 뿐아니라 후진을 개발해서 그 의기가 비길데 없었으며 직접 그 제자의 예에 서지는 않아도 그 기풍에 감복한 이로는 신성의 노사기(魯仕驥)(혈비(絜非))와 의흥(宜興)의 오덕선(중륜)과 혈비의 생질 진용광(석사) 등이 있었는데 석사만은 그 외숙을 사사하였고 또 직접 요선생의 문하에 수업을 해서 향인이 모두 감화되었을 뿐아니라 문장도 매우 빛나니라. 석사의 군종 형제 중에는 진학수(예숙)와 진전(광부)가 있었고 남풍에는 오가빈(자서)이 있어 모두 혈비의 풍을 받고 요선생을 사숙하였기에 이때부터 강서 영창에도 동성학이란 게 생겼는데 중륜이 영복의 여황(월창)과 더불어 교우이었고 월창이 임계의 주기(백한)와 용계서(윤신)와 마평의 왕승(정포)과 함께 오씨와, 여씨를 가까히 하면서 더욱 그 기법을 매백언에게 추구하였으므로 이때에는 동성종파가 광서에도 유연되었었다.
일찍이 국번이 고이히 여긴것은 요선생이 호남에 시관이 되었을때 오향의 그 문하에 나온 이들이 학문으로 업을 삼는 자 있다는 것을 못들었더니 파릉의 오매수(남병)가 있어서 그 기술하는 바 독호하여 싫지 않고 무릉의 양성진(성농)과 선화의 손정차(효방)과 상음의 곽숭도(郭嵩燾)(백침(伯琛))와 격포의 서도(舒燾)(백노(伯魯))가 모두 도씨의 문가정궤(正軌)로서 이 사람들을 두고는 누구를 찾을고? 하면 최후로는 상담(湘潭)의 구양생(훈)을 들 수 있나니 파릉의 오군과 상음의 곽군에게서 법을 나려오고 신성의 두 진씨를 사사하니만치 그 색채 농후하여 지취와 기호가 천하미를 모았다고는 하겠으나 동성 요씨로써 바꿀 수는 없나니라.
홍양(홍수전, 양수청=역자註)의 창란으로 동남지방이 도탄에 빠지니 종산, 석성 등지는 옛날 요선생의 강학하시던 곳이나 지금은 견양의 소굴이 되어 다시 만회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동성이 윤락해서 이역이 됨이 또한 극도에 달하였으니 재균형은 전가가 순난(殉難)하고 자신도 피를 토하고 죽었나니라.
- 내 건창에 와서 들으니 신성, 남풍은 병화(兵燹)으로 인하여 백가가 탕진하고 전황이 불치하여 봉호(蓬蒿)가 무성하며 일이 문사가 전도할 곳조차 없다고 하며 광서는 구년간이나 용병을 했는 데도 군도가 더욱 흉흉하여 수습할 바 없을 뿐 아니라 용군한신이 또한 작고하였고 겨우 우리 고을이 조금 안온하여 이삼 군자가 오히려 문학에 우유할 수 있어 간신히 동성의 전철에 영합은 한다 해도 서도가 이미 죽고 구양생이 또한 죽은 지라 노자는 인사에 얽매이거나 혹은 난을 만나 마침내 그 학문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소자는 혹 중도에 요절하거나 백방으로 지장이 많으니 만약 요선생과 같은 총명조달한 이가 있어 태평고수를 하면 넉넉히 옛날 작자들과 어깨를 가치할 수 있건마는 마침내 얻을 수 없고.......
이 일편으로 말하면 비단 수성파의 전통을 말한 것 뿐만 아니라 우리들로써 이 일파의 최고 목표가 {간신히 동성의 전철에 영합한다.}는 것과 {천하의 미를 모았다고는 하겠으나 동성 요씨로써 바꿀 수는 없나니라.}고 하는데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증국번이 당시에 있어 속으로는 동성파의 중흥 공신인 것을 자처하였으며 남들도 그렇게 추숭한 것이 사실인데 (왕선겸 자서 참조) 그가 {성철화상기}를 쓸 때 삼십이인의 성철 중에 요보를 삼십이인의 수위로 한 것만으로도 넉넉히 그의 심리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며 원래에 그의 막부 속에는 무수한 인재를 나열하여 두었으니 우리가 천복성의 쓴 증문정공막부보우(용화문편사) 일편을 읽어보면 가히 알수있는것은 당시학자에도 전태길, 유소진, 유수회, 이선란 (산학가)화마방, (산학가) 손의언, 유파, 막우효, 재훌훌, 성향경 이원도같은이라든지 문인으로는오민수 장격휩j, 진학수, 방종성, 오향편 젖양홉를창, EE사석, 왕관운같은 이가 모두 그의 막부속에 있었는만큼증국관의 세력이 몇십년동안 중국에 영향한것도 그다지 고이 할바는 아니나 그러나 이 일련의 사람들이 문학사상에, 있어서는 한사람도 예외없이 아무런 책환도 없었는 것이다. 그저 연수가 최고하고 명의가 최대하기로는 유구 왕관운 오、따윤등 셰사람만한이가 없었으나, 유기의 시나 문이 아무런 가f직도 없는것이고 왕관운은 말로는 일대의 대사라고 했으나 그의 고문이란 천복성만도 못한것이며 (시는논외)오헐편만이 사상이 조금새로운 례가있었드므로 그의 영향은 비교적 크다고는하겠으나 그도 그자신의 문장에있는것이 아니고, 그가 조성해온 후진인재에 있었으니 엄복이나 임결가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와서 그들의 영향이 그 자신보다 훨신 더큰것이었다.
이에 평심적기하고 말하면 고문학중에는 자연 {고문}이란것이(한유로부터 증국관이하에 이르기까지의 고문) 가장 정당하교 가장 유용한 문체인데 연려문의 병청는 말할것도 없거니와 되지못한 용송팔가이하의 고문하는 사람들은 주태한건로 돌아가기를 훌상、하여 만드면 만들수록 통하지 못하고 고체를 뜨면플수록 용처가 없이되어 다만 문학계에서 {사통비통}의 가짜골동품을 보태놓았을뿐이었다. 용송팔가의고문과 망성파의 고문의 장점은 그들이 통할수 있는 청담한 문장을 지어내는폐있고 가골황품을 만들려고 훌상치 않었는데 망성파를 배운 고문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그래도 {통}한다는례 까지는 되었고 한발더나가면 {응용} 할수있는 문자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추성려의 중흥이 비록 아무런 책환은 없었다고하도래도 또한 아무런 해로운곳도 없었는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때로는 {위도}의 성현으로 자처하여 방동수같은 이는 한학을 공격하고 임결같은 이는 신사、호를 공격했으되 그런것쯤은 소위 {재도문학}이란폐 중독이 되어서 분수도 모르고 며든것이고 망성파의 영향이 고문으로 하여금 {통} 한다는폐 힘쓴것과 그후 이삼십년동안 겨우 {응용}한다는폐 예비한 그한가지 공로만은 이몰할수 없는 것이었다.
태평천국의 동속L이란것이 명말류헌의 옳L후에는 최대의 참빼이니만치 응당히 조곰 더 비애거청한 문학이 나와야 할것이다·그런폐 당시귀}‘If에 정진(자는 자윤이고 조의인인데 일팔O육=일팔사륙)이란 대시인이 있었는데 위풍사년 귀써、I난에 국부적이나마 영향을 받어서 그의 경년의 시 몽n뚫경뚫시횡후집에 무수한 비통한 시료를 볼수있i나 정EE의 사가 오십팔년전의 일인만큼 이것은 이 소사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것이다. 그러나 고야한것은 동남각성이 가장 그해독을 받은바 큰건마는 마침내 아무런 위대심훔한 시가 나오지못한것이다. 왕관운으로말하면 일대의 시인이라고 하고이 시대에 살어있었지마는 그의 {호통루시집} 일권으로부터 육권까지는 바로 태평천국시대(일팔사구=일팔륙사)에 나왔느니만치 우리가 끝까지 읽어보아야 겨우 범명원을 본픈것이나 전현장를 숭내내는것이 아니면 왕원장 조자건을 할아보는 등류의 가짜 골동품이고 우연히 한두구식 눈에 띠이는게라야 {세월속다난, 천:강파원유}라는 아푸지도 가렵지도 않는 시일뿐 결국 아무런 이시대를 기념할만한 비통한 시가 나오지 못한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까닮이냐하면 내가 생각하건대 이 시인들의 대다수는 모두 모주 시를 쓰기에 파파했다는것은 그들이 사는 세계, 더구나 범명원, 조자건의 세계가 전연 홍수전, 양수청의 세계가 아니란것이다. 하물며 범명원, 조자건의 시체가 이렇다는 해방을 경과치도 못하고 홍수전, 양수청의 시대적참빼을 요사한다는 것은 결코 부가능한것이다. 왕관운시집중 -팔칠이 연작에 속하는 독행제삼십장(권구)이 있는데 그중에 이십년한의 시사를 횡사한것이 있고 때때로 대청한 양평이 있기도하나 대관절 문장이 통하지않고 적술이 명백치않는례가 있어서 말하자면 조해한 삼십편의 가훌훌라고는 하겠i나 시라고는 할수없어서 생각다못해 겨우 찾어낸것이 그의 {강관행,기장수훌훌제구감도}란 일편을 들어 이 대명정정한 대시인을 대표하렸더니 그도 문장이 태반은 부통하으로 이에 약하는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당연코 한사람의 시A만은 이 시대를 대표할수있는 시인이 있었다. 그는 바로 상원의 김화로서 자를 아친라하고(일팔일팔=---팔팔오){추전P금관시횡}라는 칠권의 저작이 있는데 일팔오삼년 남경성o1수락당할때 김화가 그때 성중에 있어서 장발원의 군중사람들과 왕래해가며 점점 많은 사람들과 결합해 가지고 관병들과 내응할 계획을 하였든것이다. 그때 향영의 대본영이 성밖에 있었으므로 김화가 가만히 성밖으로 버서저나와서 내응할 계획을 관병에게 고하였i나 향영이 처음에 믿지않으므로 그 자신이 스사로 A질이 되어 대본영에 있기로 보증한뒤 성내의 동당과 관병이 약정한 기일에 성을 쳤i나 관병이 오지않으므로 다시 기일을 정했는데도 관병은 오지않고 성내의 동당에 구성당한이만 많었든것이다. 그래서 김화가 친히 위성중의 생활을 경험하고 또 당시관군의 청패무능함을 통한하였i으로 그의 기사시는 사람을 감동케할뿐만아니라 또한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직있는것이며 그의 {통정편}(권이, 이O=이일혈)은
일기체로 쓴 시인례 남경의 낙성하는 상황과 성중의 정형을 그린것i로 그 일절을 예를들면 이월도 이십삼일 대군이 처온다 한번 들이자 도적은 황황해서 왼종일 세네번 북을 울리는데 남방백성 서로들 같은 마음에 또다시 재생의 빛이 불타고 늠늠한 향장군의 위엄, 하늘처럼 거룩히 우러를계도적의 각소리 또한번 불이면 장군의 말굽소리 들랄세라 맛난 안주도 향그런 술도 장군。1 오실세라 받들어두고끄니마다 장군의 식사랑 밤이면 잠자리 걱정이 올혜 일곱난 어린애 플아래 놀다 무심쿄 길사람에 장군이 오신다니 큰누의 놀라서 셋빛얼굴 부즈렵다 말말나 뺨을 치는데 이제야 행차 마저 얼굴은 열홀에 아흐래 수척함도 애무쉐라 그중도 젊은 연석들은 한밤중에 충의를 맹서하고 심장한 드나드리 가는곳도 허리우 단짧은 날카롭더니 하루는 입성한단 그날에 제각기 병정들은 햇불을 들어 이제웹는 장군얼굴, 불상타 모두들놓아주라 일읍시폐 둬라서 장군념 바뿌신줄 알었으리 손에 넘는 공사도 있으리 그의 육월초이일 기사시백수에는 전면에 향영의 각일 출병한다는 상황을 추사하는례 먼저 사후에게 대향훌을 베풀고 장군이 직접으로 술을 처주고 선촬를 한뒤에 명일 새벽에는 단연코 출전을 준비한다는 구십여구를 쓴뒤에 편말에 와서 겨우 말하기를 북치고 가볍게 뛰면 웅빨은 힌깃들이 나부끼는데 이제야 오랜 음우도 끝나고 찬란한 무지개 보히네 밤조차 수선수선 참못일고 아층햇발 눈에 부시드니 한낮은 벌서되고 성난 말들이 코부는 소리도 들리네 그러나 하루종일 둥둥 떠가던 해오래벼 보히면 칼엔 피안묻고 봄에 흙칠도 못한 전군은 돌아서 오네.
이것이 벌서 단순한 조자만이아니고 i종 독폼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난조적인 담제가 역시 김화의 특별한 장처인데 여기서 우리가 더욱 흥미를 느끼는것은 그가 전민오민가의 외손、이라는것과다수임외사}와 및 {속임외사}의 저자라든지 {비림외사}중에 나타나는 몇개 중요한 A물들과 모다조금식은 관계가 있는것이며 그 자신이 {비임외사}에 나오는 한사람안만큼 그의 시가 {귀임외사}의 난조적본령에서 득력을 한것도 사실일것이다.
그러므로 못있는 사람의 구자는 그냥 매펌하는것만이 아니고 통곡언것이며 경장이 아니라 지한극통이 어쩔수없이 터저나오는것이다. 그러으로이사람의 이런 기술에는 확실히 주남나 백거역보다 별다른 일면에서 문제시를 쓴것이 수없이 많:나 여기서 ---히 예를 들수없으되 김화의 시에화신적정신이 풍부하다는것은 그가 담기의 {환우집}에 쓴것을 보면 이 한권 책자는 시라고는 말하지않는다. 만약 시라고할것같오면 군중에서 쓴 모든 작품이 말은 H1록 통협한것이나 벌서 옛사람들의 교훔한 풍격을 버렸고 더욱 요즘 선배들의 배조하는 법이 아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제공들이 이러니저러니 하든바요 또 이러한 홈배에 윤뚫이 있다는것이 휴지와 맞캡이나 그러나 그도 또한 기수가 그렇게 만드는떼야어찌하리요.
이러한 의미에서 오십년의 시첼이면에서 그를 한개 중요한 지위에 둔다는것은 총대로 고이할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오십년간의 조는 어떠한것이냐하면 모두몽뿔、(오문영)파에 중독되어서 아무런 가{직도 없는것이므로 여기서 토론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사
일팔사。년 청편전쟁이래로 중간에 일팔륙。연의 영불련합군이 천율을 돌파하고 북경에 들어와 원명원을 불태워버린 전사를 경과한둬 중흥의 전쟁에는 서양A의 조력을 얻은바 많었으므로 사리에 현명한 사람들은 차차 서양각국이라는것을 중요시하게되었으니 일팔륙일년 청정은 {총이각국사 무충문}이란것을 설치하였고 다시 일팔륙칠년에는 {동문관}을 설치하였으며 학생을 외국에 파조하여서 그들의 정책들을 배워오게하였는폐 당시의 석고한 사회에서는 차종 정책에 극력으로 반대했으묘로 동문관은 좋은 학생을 얻지도못하고 외국에 파유한 학생들중에는 더욱 사람을 얻지못하였으나 그러나 십구세기말년부터 난역사업이 점점 발달하게되었으니 전교사들중에도 {이제마태}같은이는 중국문사들의 조력을 얻어서 부소한 서적을 편역하였고 태평천국의 문사 왕의같은이도 이 사업에는 중흉흉한 한사람의 선종이 되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난역사업이란 그 범위가 그다지 광%L하지는 못하였으니 제일종은 종교서적으로서 그중에도 가장중요한것은 신구약전서의 각종난 역본이었고 제이종은 과학서적이나 또는 응용과학서적즈L로 당시에는 {격치}의 서적이라고ι말하든것이며 제삼종은 역사, 정치, 법제, 등류의 서적안폐 {태서신사요응}이나 {만국공법}등서적이 전역되어나온것은 매우 자연스러운일이었다. 종교서적은 전교사들의 담동적 사업이었고 과학서적으로 따지변 당시에 모두 진은병선의 기건적학문이란것을 알기혜문이었으며 역사법제등서적은 당시 중국인으로써 서양사정을 이해하도록 하기뚫한것이었i나 이밖에 서적 낭 문학서적이나 철학서적같은것은 당시 어떠한 사람들에게도 주의를 껄지못하였i니 그 역시 필연의 사세였다는것은 그때의 중국의 학자라는 사람들의 거이 전부가 생각키를 서양의 진은라는것은 무섭지않은바아니나 문예, 철리에있어서는 저들이 아무리해도 오천년 문명고국언 우리들에게 멀리미치지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든것이다.
그런데 엄복과 임사의 큰 공로는 이러한 양대결짧을 보구한데있는것이니 엄복으로 말하면 {서양근세사、상、}을 소개한 제일인o1었고 임종로말하면 {서양근세문학}을 소개한 제--A이었다. 엄복의 이역한 {혁수레}의 {천연론}(진화론-역자주)은 광적곤신(일팔구륙)이었는만큼 일청전쟁의 직후이고 [용방변법의 직전인데 그의 {천연론}이 출판된 이후(일팔구팔) 중국의 학자들도 서양에 진은병선이외에 정도한 철학사상、이 우리들의 탐용하기에 넉넉한바있다는것을 점차로 깨닫게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상、사상의것인만큼 여기는 말하지않는것이다.우리들이 여기서 응당히 한번 토론해볼것은 엄복의 난역하는 문체일것이다. {천연론}의 {예언}에서 그 자신이 말한바도 있기는하지마는 당시로 보면 자연、히 백화를 사용하기는 곤난하였고 그렇다고 팔고식적 문장을 쓰기에는 더욱 부편하였으므로 그의 난역하는 문체는 당시로보면 부득이한 방법이라 실로 전청관제가 {홍례자}를. 쓰고 연설하는 격이나마 그의 역서의 가{직는 매우 높은것이므로 당시의 고문대가로 자타가 공인、하는 오찮논 같은이도 {천연론}의 서문에 {훌훌훌훌여진주제자상상하}라고까지 격호케한 것이다.
엄복자신 역시 그의 역서방법을 말하기를 {십법사유긍·[학아자병]내유방다·흐름끼이시서청구실야}(천연론례언)라고한것은 고이치않은것이니 엄복으로말하면 영문이나 고중문의 정도가 매우 높은데도부포하고 그가 항상 주의하고 혐차로히 하지않었으므로 비록 일종의 {사문자}-를 사용해서도 완전히 {달}한다는폐까지 성공을 하였든것이다. 그의 역서할때의 정중한 용의、라든지 태도에는-정히 감뼈,할바있어 우리들의 모범이 되기에 넉넉한바있으려니와 그 담신이 일찍이 말하기를 {도언}이란 일개 명조를 쓰기청해서는 그는 처음 {툴언}이라고 난역을 하였든바 하회우가 {연、언}이라고 고친일이 있었는례 오찮편이 또 찬성치않어서 최후에 자기가 {도언}이라고 고쳤다고 또 말하기를 {일명지립, 구월관구, 아죄아지, 시존명철}이란 엄복의 훌짧역이 능히 성공하는 까닭의 대부분은 {일명지립, 구월강구}라는 이 정신때문이다. 이 정신이 있고서야 {고문이나백화}를 꺼논하고 거이 성공하는법인데 후인들은 그와같은 공력도 없고 그와같은 정신도 없이 반통부통의 고문을 사용해서 일지반해의 양서를 난역한다는 무리들이야 자연히 실패하지 않은 예가 없었다.
그리고 엄복이 난역한 서적의 종류도 여러가지가 있는폐 {천연론} {군기권계론} {군학훌훌언} 같은것은 원문에 자못 문학적가f직가 있는것이지마는 그의 역문 그것도 고문학사에 역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의 서풍이 이십년동안이나 성행한 것이다.임결의 난역한 소{뮤마}의 {다화녀}=(구희 역자주)도역시 고문으로연애소설을 난역한것인만큼 한개 시험으로서 의의가 있을뿐만 아니라 자고이래로 고문이 생긴뒤에 이러한 장편련애소설을 쓴 문장이 없었느니만큼{다화녀}의 성과는 그로하여금 고문개관에 한개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게한것이다. 임경가 초년에 난역한 {다화녀} {흑없고천록} {정철노급} {이전금전혈여성기}등서가 맛츰 손에 없어서 --히 예를 들지는못하나 능히 원서를 읽는 사람에게는 다소 역법에있어서나 문장에있어서나 완전한 만족을 느낄수는 없다하드래도 평심하고 볼것같으면 임경의 소설에는 그 자신의 풍격이 왕왕히 나타나나니 그가 원서의 심각한 소낙취미를 이해하는 경지가 높음으로써 그러한 곳에 다다르면 한층 더 힘을 쓰므로더욱더 정말가 나는것이다. 그저 그의 결점을 말하자면 원서를 능독치못랬다는것이겠으나 그래도 그가 문학적으로는 천재이었든만큼 만약 그에게 청명한 조수가 있어 그로서 원문을 죽죽 읽는 사람들보다는 좀더 높은 경지에서 그일을 하였으리란것은 지금에 원서를 읽는다는 사람들이 완전히 원문을 이해하는 이가 없고 또 그들의 백화를 쓴다는 정도가 임경가 백화를 사용하는 능력에 멀리 맞지못하면서 함부로 임경의 전역소설을 비평한다는것은 임결로하여금 너무나 영광케하는것이다. 그러므로 공평한 말로 하면 임결가 고문을 써서 소짧을 편역혔다는 시험은 말하자면 큰 성과를 얻었다는것은 고문으로는 일즉야 한번도 장편소설을 쓴일이 없는데 임경는 남이 못한 고문을 써서 백여편의 장편소설을 전역해냈고 그를 배우는 수많은 사람들이 역시 고문을 써서 허다한 장편소설을 전역했i며 고문에는 제획성이 부족한떼 부포하고 임경는 고문으로 {떡켄스}의 {이도애화}를 훌짧역했
으며 고문으로는 연애소설을 쓰기에는 부적당하다는데도 임사는 고문으로{다화녀}와 {유휩소전}을 난역하야 고문의 응용에있어서는 사마훌훌이래로 어떤사람도 이러한 성과를 거둔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도 마침내 실패에 돌아갔다는 것은 그 이유가 임경자신에 있는것이 아니고 고문 그 자체에 탈이 있는것이다. {고문도 소설를 홉홈역할수 있다}고 우리의 많은소설을 난역한 사람들은 감히 말하리라·그러나 고문이란뽕경 {죽은문자}이라 어떠한 형식으로 만든다하드래도 그것은 결국은 소수인의 {상완}에 제공할 뿐이지 이 이상 더 생명이 있는것도 아니고 이 이상 더 보급이 될것도 아난껏은 여기 한개 명현한 예를 들면 주작인이 그 형홈、짧과 초기에 고문으로서 소설을 전역했는데 그들의 고문공부가 매우 높은 경지에 있었고 또 모두 직접으로 원문을 이해한만큼 그들이 난역한 {역외소설집}은 임경가 홈햄역한 소설에 비하면 그 내용이 훨신 높은 작품인데도 부포하고 주민 형제가 신신고고해서 전역한이
소설이 십년간에 겨우 이십일책이 팔렸다는 이 옛얘기로도우리가한개 각폼할것은 주민형제가 고문으로 써서 얻은바가 잃은바만 못하고 결국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하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