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학 오십 년사
- 중국 문학(中國文學) 50년사(五十年史)
- 이육사(李陸史)
一
[편집]중국(中國) 문학사상(文學史上)에서 이 50년(五十年)이란 세월(歲月)이란 매우 중요(重要)한 시기(時期)이었으니 이 50년(五十年) 동안의 몇 가지 중요(重要)한 사건(事件)을 종합(綜合)해 보건대
(ㄱ), 이 50년전(五十年前)은 『신보(申報)』가 창간(創刊)되던 해이며 (1872(一八七二)) 또한 증국번(會國藩)이 죽은 것도 바로 이 해이었으니, 증국번(會國藩)은 동성파(桐城派)의 고문(古文)을 중흥(中興)시킨 제일(第一) 맹장(猛將)이었다. 그러나 그의 중흥사업(中興事業))은 비록 광영찬란(光榮燦爛)한 바 있었다 해도 가석(可惜)한 것은 전연(全然) 온고(穩固)한 기초(基礎)를 갖지 못하였으므로 한 가지도 장구(長久)한 수명(壽命)이 없었다는 것은 청조(淸朝)의 운명(運命)이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동란(動亂)으로 말미암아 일체(一切)의 병상(病狀)과 일체(一切)의 약점(弱點)을 노출(露出)했을 때 증국번(會國藩) 등(等) 일련(一聯)의 사람들이 태평천국(太平天國)을 타도(打倒)하여 각지(各地)의 비란(匪亂)을 평정(平定)하 고 그들의 중흥사업(中興事業)을 달성(達成)하였다. 그것은 다만 증파(曾派)의 중흥사업(中興事業)이 5,60년간(五六十年間)의 만청국운(滿淸國運)을 연장(延長)한 것은 될지라도 마침내 만청제국(滿淸帝國)의 부패(腐敗)를 구(救)하지 못하고 만청제실(滿淸帝室)의 멸망(滅亡)을 구(救)하지 못한것같이 그들의 문학(文學)의 중흥사업(中興事業)도 또한 이같은 것이었다. 고문(古文)이 『도광(道光)』 『함풍(咸豊)』 시대(時代)에 이르러 공소(空疏)한 방요파(方姚派)와 괴벽(怪僻)한 공자진(龔自珍)파(派)등(等)이 일시(一時)에 세상(世上)에 나와서 증국번(曾國藩)등(等) 일련(一聯)의 동성(桐城) 고문파(古文派)에게는 은연(隱然)한 1부대(一部隊)의 생력군(生力軍)으로 홀연(忽然)히 중흥적(中興的) 지위(地位)를 차지했으나 다만 『동성(桐城))』 『상향파(湘鄕派)』 중흥(中興)도 역시 잠시적(暫時的)이었고 결(決)코 지구적(持久的)이지는 못했으며 증국번(會國藩)의 정신(精神)과 경험(經驗)만은 확실(確實)히 동성파(桐城派) 고문(古文)을 재건(再建)한 중심인물(中心人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증국번(會國藩)이 죽은 뒤 고문(古文)의 운명(運命)도 점점(漸漸) 미약(微弱)해 갔으니 증파(曾派)의 문인(文人) 곽숭도(郭嵩燾), 설복성(薛福成), 려서창(黎庶昌), 유월(兪樾), 오여륜(吳汝綸) 등(等)이 한 사람도 그 중흥사업(中興事業)을 계속해가지 못했을뿐 아니라 다시 한 대(代)를 나려가면 실로 『강노말지(强弩末之)』밖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때의 고문(古文)의 중흥(中興)이란 겨우 병(病)들어 죽는 사람에게 『회광반조(回光返照)』는 되었을 지언정 여구(如舊)히 고문(古文)의 쇠망(衰亡)을 구(救)치 못했으며 이 고문(古文)의 쇠망사(衰亡史)의 일단(一段)이 50년(五十年) 동안의 아주 명현(明顯)한 추세(趨勢)였었다.
(ㄴ) 고문학(古文學)의 말기(末期)는 시대(時代)의 핍박(逼迫)을 받으면서도 한번도 그 양식(樣式)을 번복(翻覆)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50년간(五十年間)의 하반(下半)이 무릇 고문학(古文學)의 수점(逐漸)변화(變化)한 역사(歷史)인데 이 계단(階段)의 고문학(古文學)의 변화사(變化史)를 다음 몇개의 소단락(小段落)으로 난호아 본다면
1(一), 엄복(嚴復), 임서(林紓)의 번역(翻譯)문장(文章)
2(二), 담사동(譚嗣同), 양계초(梁啓超)의 의론(議論)문장(文章)
3(三), 장병린(章炳麟)의 술학(述學)문장(文章)
4(四), 장사쇠(章士釗) 일파(一派)의 정륜(政綸)문장(文章)
이 네가지 운동(運動)이 20여년(二十餘年)의 문학사상(文學史上)에서 모다 한개의 중요(重要)한 위치(位置)를 점령(占領)하는 것이다. 그들의 연원(淵源)이나 주장(主張)은 비록 매우 다른곳이 많다고 하더라도, 다만 우리가 역사상(歷史上) 안목(眼目)으로 관찰(觀察)해 볼 때는 이 4파(四派)는 모다 응용방면(應用方面)의 고문(古文)이었다. 이러한 위급(危急)한 과도시기(過渡時期)에 있어서 여러가지 수요(需要)가 언어(言語)와 문자(文字)로 하여금 부득불(不得不) 『응용(應用)』이란 방면(方面)으로 변해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므로 이 4파(四派)를 지목(指目)해서 『고문(古文) 범위(範圍) 이내(以內)의 혁신운동(革新運動)』이라고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모다 자발적(自發的)으로 근본적(根本的) 개혁(改革)을 할 여가(餘暇)도 없었고 고문(古文)이란 것이 단순한 일종(一種)의 사치품(奢侈品)이고 일종(一種)의 장식품(裝飾品)이었기에 도리혀 응용(應用)할 공구(工具)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의 한 사람도 인식(認識)치 못했었다. 그래서 장병린(章炳麟)의 고문(古文)이 이 파(派)중(中)에서 가장 고아(古雅)하면서도 겨우 자기(自己) 한 대(代)에서 끝을 막고 다시 전(傳)하는 사람이 없었으 며 엄복(嚴復), 임서(林紓)의 번역문학(翻譯文學)이 당시(當時)에는 겨우 일시적(一時的)이나마 수요(需要)에 공급(供給)할 수가 있었으되 마침내 길게 가지 못했고 주작인(周作人) 형제(兄弟)의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이 이 일파(一派)의 최고작품(最高作品)이었으나 그것도 다만 일방면(一方面)에만 사용(使用)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모다 실패(失敗)는 하였으나 실패(失敗)한 뒤에 그들은 다시 백화문학(白話文學)의 건장(健將)이 되었다. 담사동(譚嗣同), 양계초(梁啓超) 일파(一派)의 문장(文章)이 응용(應用)한다는 정도(程度)에서는 비교적(比較的) 나은 편이었고 사회적(社會的)으로 미치는 영향(影響)도 적지 않었으나 그것도 그 일파(一派)의 말류(末流)에 와서는 천박(淺薄)한 부연(敷衍)과 무용(無用)의 퇴적(堆積)을 면(免)치 못해서 한갓 사람으로 하여금 염증(厭症)이 나게 하였을 뿐이였다. 장사쇠(章士釗) 일파(一派)는 본래 엄복(嚴復)과 장연린(章煉麟) 양등파(兩等派)에서 변화(變化)해 나온 것으로 그들은 논리(論理)와 문법(文法)을 중시(重視)해 왔기에 매우 근엄(謹嚴)하고 또 위완(委婉)한 데가 있어 양파(梁派)의 결점(缺点)을 다소(多少) 보충(輔充)을 했으나 갑인파(甲寅派)의 정론문장(政論文章)이 민국(民國) 초년(初年)에는 거이 한 개 중요(重要)한 문파(文派)를 형성(形成)했것이다. 다만 이 일파(一派)의 문자(文字)가 저술(著述)에 용이(容易)치 못하고 통속적(通俗的)이 아니여서 실재(實在)에 있어서는 역시 실패(失敗)에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엇다. 그래서 이 일파(一派)의 건장(健將) 중(中)에도 고일함(高一涵) 이대쇠(李大釗), 이검농(李劍農) 같은 이는 뒤에 모다 자화(自話) 산문(散文)의 작자(作者)가 되었다.
이렇게 고문(古文)이 겨우 응용(應用)이라는 길을 따라간 일단(一段)의 역사(歷史)는 역시 신구문학(新舊文學)이 교체(交替)하는 과도시대(過渡時代)에 면(免)치 못할 한 개의 계단(階段)이었고 그러면서도 고문학(古文學)이 이 시기(時期)에 있어서 23년(二三十年)의 운명(運命)으로 지지(支持)해 간 것은, 또한 사실(事實)이었다.
(ㄷ) 이 50년(五十年) 동안에 가장 세력(努力)이 컸고 가장 유행(流行)이 광범(廣汎)하게 된 것은 이상하게도 양계초(梁啓超)의 문장(文章)도 아니었고 임서(林紓)의 소설(小說)도 역시 아니었으며 그것은 정(正)히 허다(許多)한 백화소설(白話小說)이었다. 『칠사오의(七俟五義)』 『아녀영웅전(兒女英雄傳)』 등(等)은 모다 이 시대(時代)의 작품(作品)이었으며 『칠사오의(七俟五義)』 뒤에 『소오의(小五義)』 등(等)의 속편(續篇)이 나온 것도 모다 이 30년래(三十年來)의 작품(作品)이니 이러한 소설(小說)이 진실로 대표적(代表的)인 북방(北方)의 평민문학(平民文學)이었다. 그리고 전청(前淸) 만년(晚年)에 와서는 남방(南方)의 문인(文人)들도 역시 허다(許多)한 소설(小說)을 산출(産出)하였으니 유악(劉鶚)의 『노잔유기(老殘遊記)』 이백원(李伯元)의『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 『문명소사(文明小史)』 오옥요(吳沃堯)의 『20년간(二十年間) 목도지(目睹之) 괴현상(怪現狀)』 『한회(恨悔)』 『구명음원(九命音寃)』 등등(等等)인데 모다 의의(意義)있는 작품(作品)으로써 구상(構想)과 견해(見解)에 있어서도 한갓 북방(北方)의 순수(純粹)한 민간오락(民間誤樂)에만 공급(供給)되는 작품(作品)들과는 달라서 이 남방(南方)의 백화소설(白話小說)은 50년(五十年) 중국문학(中國文學)의 최고작품(最高作品)인 것이고 가장 문학적(文學的)으로 가치(價値)있는 작품(作品)인만큼 이 일단(一段)의 소설발달사(小說發達史)는 즉(卽) 중국(中國)의 『산 문학(文學)』의 한 개 자연(自然)스러운 추세(超勢)이었다. 그러므로 그 중요(重要)함이란 전면(前面)에 재차(再次) 말한 고문학사(古文學史)보다도 한층(層) 더한 바 있는 것이다.
(ㄹ) 50년래(五十年來) 백화소설사(白話小說史)는 의연(依然)히 1년래(一年來)의 백화문학(白話文學)과 다름이 한 개 큰 결점(缺点)도 가졌다는것은 백화(白話)채용(採用)이 다시 말하면 무자각(無自覺)했다는것 즉(卽) 되는 대로 해서 아무런 비판적(批判的)이 아니었다. 그러나 민국(民國) 6년이래(六年以來)의 문학혁신(文學革新)은 그야말로 일종(一種) 의의(意義)있는 주장(主張)으로서, 무의의(無意義)한 연진(演進)이 너무나 오랬고 또한 불경제적(不經濟的)이었다.
근50년래(近五十年來)의 혁신운동(革新運動)으로만 보드라도 의의적(意識的)인 주장(主張)이 있고 계획적(計劃的)인 혁신(革新)인 때문에 가장 쩌른 기간중(期間中)에서도 능(能)히 최후(最后)의 승리(勝利)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자상(文字上)의 혁신(革新)도 또한 이러한 것이다. 1천년래(一千年來)에 백화문학(白話文學)이 일선상전(一線相傳)하여 한번도 단절(斷絶)되여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 중(中) 어떠한, 그야 무론(無論) 당시(唐詩)거나 송사(宋詞)거나 원곡(元曲)이거나 또는 명청(明淸)의 소설(小說)이거나 한 가지도 의의(意義)있는 고취(鼓吹)를 하여본 일일이 없었다. 한번도 명백(明白)하게 고문(古文)을 공격(攻擊)한 적도 없었고 한번도 명백(明白)하게 백화문학(白話文學)을 주장(主張)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근(近) 5년(五年)의 문학혁신(文學革新)이란 그와는 다른 것이니 그들은 해명(解明)하게도 고문(古文)은 벌서 『죽은 문학(文學)』이란 것을 선언(宣言)했엇고 또 그들은 『죽은 문자(文字)』은 『산 문학(文學)』을 산생(産生)치 못한다고 선언(宣言)한 다음 현재(現在)와 장래(將來)의 문학(文學)은 백화(白話)가 아니면 안 된다고 완강(頑强)히 주장(主張)하였다. 이러한 의의(意義)있는 주장(主張)이 그야말로 문학혁신(文學革新)의 특점(特點)이며 그야말로 50년래(五十年來)에 이러한 운동(運動)이 능(能)히 성공(成功)할 수 있는 최대(最大)의 원인(原因)이었다.
이상(以上)의 4항(四項)은 말하자면 50년간(五十年間), 중국문학(中國文學)이 변천(變遷)해온 대세(大勢)이었는큼만 다음은 이러한 몇 개의 추세(趨勢)를 보담 더 상세(詳細)하게 설명(說明)보기로 하는 것이다.
二
[편집]증국번(會國藩)이 한번 죽은 뒤의 『동성(桐城) 상향파(湘鄕派)』는 사실상(事實上) 한번도 정채동인(精彩動人)할 그런 문장(文章)이 없엇다. 왕선겸(王先謙)의 편집(編輯)한 『속(續)고문류찬(古文類纂)』(광서8년(光緖八年)‧1882(一八八二))에 보면 용계서(龍啓瑞), 노일동(魯一同), 오민수(吳敏樹) 등(等)의 문장(文章)을 실어서 겨우 이 파(派)의 노장(老將)들을 대표(代表)한 것인데 왕선겸(王先謙)의 자서(自序)를 보건대
- 석포(惜抱) (요내(姚鼐))가 절학(絶學)을 진흥(振興)하니 해내(海內)가 미연(靡然)히 따라 배우더니 그후(後)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各其) 사승(師承)하기에만 자랑으로 여겨서 류부(謬附)가 없지 않었다. ... 매씨(梅氏)(매증량(梅曾亮))는 고풍(古風)에 침음(浸淫)해서 짓는 것이 심원(深遠)하기는 하나.……증문정공(曾文正公)(국번(國藩))만은 웅직(雄直)한 기풍(氣風)과 굉통(宏通)한 식견(識見)으로써 문장(文章)에 발로(發露)함이 고금(古今)에 관절(冠絶)한 것이라.…… 배우는 사람들이 기로(岐路)에서 나갈 바를 모를때 궤도(軌道)를 바르켜 따르게 하였으니 요씨(姚氏)를 내놓고는 그 법(法)을 매씨(梅氏)와 증씨(曾氏)에 취(取)하면 족(足)하니라.
『요씨(姚氏)를 내놓고는 그 법(法)을 매씨(梅氏)와 증씨(曾氏)에 취(取)하면 족(足)하니라』한 이것이 증국번(曾國藩) 사후(死後)의 구문가(古文家)들의 전법(傳法)하는 첩경(捷徑)이니만치 우리들이 이 이상(以上) 그들의 문장(文章)을 끄러다가 편폭(篇幅)을 채울 것이 없이 이에 증국번(曾國藩)의 구양생문집서(歐陽生文集序)를 들면 이 서문(序文)이야말로 동성파(桐城派)의 연원부파(淵源傅播)가 쓰여진겐만큼 문학사적(文學史的)으로도 매우 가치(價値)가 있는 것이다.
건륭말년(乾隆末年)에 동성(桐城)에 요희전(姚姬傳)(내(鼐)) 선생(先生)이 고문사(古文辭)를 가장 잘하였는데 그 향중(鄕中) 선배(先輩)인 방망계시랑(方望溪侍郞)(시랑(侍郞)은 직함(職啣) 역자(譯者))의 하든 바를 받고 유군대괴(劉君大櫆)와 그의 백부(伯父) 편수(編修)(편수(編修)는 직함(職啣) 역자(譯者))군(君) 범(範)에게 법(法)을 나렸는데 이 3자(三者)가 모다 사도(斯道)에 명망(名望)이 높였으되 요선생(姚先生)이 가장 수법(手法)이 정어(精禦)하였으므로 역성(歷城)의 주영년(周永年)(서창(書昌))이 말하기를 『천하(天下)의 문장(文章)이 그 동성(桐城)에 있을진저』라고 해서 이로부터 학자(學者)들이 동성(桐城)에 귀향(歸響)하는 자(者) 많었으니 동성파(桐城派)라고 부르기는 마치 전세(前世)에 강서시파(江西詩派)라고 일커른 것과 같으니라.
요선생(姚先生)이 만년(晚年) 종산서원(鍾山書院)에서 강석(講席)을 주재(主宰)하실새 그 문하(門下) 저명(著名)한 자(者)로 상원(上元)의 관동(管同)(이지(異之))과 매회량(梅會亮)(백언(伯言))과 동성(桐城)의 방동수(方東樹)(식지(植之)) 요형(姚瑩)(석포(石甫)) 등(等) 네 사람이 가장 고제제자(高第弟子)로서 제 각기(各其) 그 능(能)한 바를 교유간(交友間)에 전수(傳授)해서 끄치지 않었고 동성(桐城)에는 대균형존장(戴鈞衡存莊)이 있어 식지(植之)를 사사(師事)하기 오래 하였었고 매우 정력(精力)이 절인(絶人)하여 스스로 그 고을 선배(先輩)의 규모(規模)를 직혔을 뿐아니라 후진(後進)을 계발(啓發)해서 그 의기(義氣)가 비길데 없었으며 직접(直接) 그 제자(弟子)의 열(列)에 서지는 않어도 그 기풍(氣風)에 감복(感服)한 이로는 신성(新城)의 노사기(魯仕驥)(혈비(絜非))와 의흥(宜興)의 오덕선(吳德旋)(중륜(仲倫))과 혈비(絜非)의 생질(甥侄) 진용광(陳用光)(석사(碩士)) 등(等)이 있었는데 석사(碩士)만은 그 외숙(外叔)을 사사(師事)하였고 또 직접(直接) 요선생(姚先生)의 문하(門下)에 수업(受業)을 해서 향인(鄕人)이 모다 감화(感化)되었을 뿐아니라 문장(文章)도 매우 빛나니라. 석사(碩士)의 군(群) 종형제(從兄弟) 중(中)에는 진학수(陳學受)(예숙(藝叔))와 진부(陳溥)(광부(廣敷))가 있었고 남풍(南豐)에는 오가빈(吳嘉賓)(자서(子序))이 있어 모다 혈비(絜非)의 풍(風)을 받고 요선생(姚先生)을 사숙(私淑)하였기에 이때부터 강서(江西)영창(永昌)에도 동성학(桐城學)이란 게 생겼는데 중륜(仲倫)이 영복(永福)의 려황(呂璜)(월창(月滄))과 더부러 교우(交友)이었고 월창(月滄)이 임계(臨桂)의 주기(朱琦)(백한(伯韓))와 용계서(龍啓瑞)(한신(翰臣))와 마평(馬平)의 왕증(王拯)(정포(定甫))과 함께 오씨(吳氏)와, 려씨(呂氏)를 가까히 하면서 더욱 그 기법(技法)을 매백언(梅伯言)에게 추구(追求)하였으므로 이때에는 동성종파(桐城宗派)가 광서(廣西)에도 유연(流衍)되었었다.
일찍이 국번(國藩)이 고이히 역인 것은 요선생(姚先生)이 호남(湖南)에 시관(試官)이 되었을 때 오향(吾鄕)의 그 문하(門下)에 나온 이들이 학문(學文)으로 업(業)을 삼는 자(者) 있다는 것을 못 들었더니 파릉(巴陵)의 오민수(吳敏樹)(남병(南屛))가 있어서 그 기술(記述)하는 바 독호(篤好)하여 싫지 않고 무릉(武陵)의 양이진(楊彝珍)(성농(性農))과 선화(善化)의 손정신(孫鼎臣)(지방(芝芳))과 상음(湘陰)의 곽숭도(郭嵩燾)(백침(伯琛))와 서포(溆浦)의 서도(舒燾)(백로(伯魯))가 모다 요씨(姚氏)의 문가정궤(文家正軌)로서 이 사람들을 두고는 누구를 찾을고? 하면 최후(最後)로는 상담(湘潭)의 구양생(歐陽生)(훈(勳))을 들 수 있나니 파릉(巴陵)의 오군(吳君)과 상음(湘陰)의 곽군(郭君)에게서 법(法)을 나려오고 신성(新城)의 두 진씨(陳氏)를 사사(師事)하니만치 그 색채(色彩) 농후(濃厚)하여 지취(志趣)와 기호(嗜好)가 천하미(天下美)를 모았다고는 하겠으나 동성요씨(桐城姚氏)로써 바꿀 수는 없나니라.
홍양(洪楊)(홍수전(洪秀全), 양수청(楊秀淸)=역자주(譯者註))의 창란(倡亂)으로 동남지방(東南地方)이 도탄(塗炭)에 빠지니 종산(鍾山), 석성(石城) 등지(等地)는 옛날 요선생(姚先生)의 강학(講學)하시던 곳이나 지금은 견양(犬羊)의 소굴(巢窟)이 되어 다시 만회(挽回)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동성(桐城)이 윤락(倫落)해서 이역(異域)이 됨이 또한 극도(極度)에 달(達)하였으니 대균충(戴鈞衝)은 전가(全家)가 순난(殉難)하고 자신(自身)도 피를 토(吐)하고 죽었나니라.
내 건창(建昌)에 와서 들으니 신성(新城), 남풍(南豐)은 병선(兵燹)으로 인(因)하여 백가(百家)가 탕진(蕩盡)하고 전황(田荒)이 불치(不治)하여 봉호(蓬蒿)가 무성(茂盛)하며 일이(一二)문사(文士)가 전도(轉徒)할 곳조차 없다고 하며 광서(廣西)는 9년간(九年間)이나 용병(用兵)을 했는데도 군도(群盜)가 더욱 흉흉(洶洶)하여 수습(收拾)할 바 없을 뿐 아니라 용군한신(龍君翰臣)이 또한 작고(作故)하였고 겨우 우리 고을이 조금 안온(安穩)하여 2,3(二三)군자(君子)가 오히려 문학(文學)에 우유(優遊)할 수 있어 간신히 동성(桐城)의 전철(前轍)에 영합(迎合)은 한다 해도 서도(舒燾)가 이미 죽고 구양생(歐陽生)이 또한 죽은지라 노자(老者)는 인사(人事)에 억매이거나 혹(或)은 난(亂)을 만나 마츰내 그 학문(學問)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소자(少者)는 혹(或) 중도(中道)에 요절(夭折)하거나 백방(百方)으로 지장(支障)이 많으니 만약(萬若) 요선생(姚先生)과 같은 총명조달(聰明早達)한 이가 있어 태평고수(太平高壽)를 하면 넉넉히 옛날 작자(作者)들과 어깨를 가치 할 수 있건만은 마침내 얻을 수 없고.………
이 1편(一篇)으로 말하면 비단(非但) 동성파(桐城派)의 전통(傳統)을 말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들로써 이 일파(一派)의 최고목표(最高目標)가 『간신히 동성(桐城)의 전철(前轍)에 영합(迎合)한다.』는 것과 『천하(天下)의 미(美)를 모았다고는 하겠으나 동성요씨(桐城姚氏)로써 바꿀 수는 없나니라.』고 하는데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증국번(曾國藩)이 당시(當時)에 있어 속으로는 동성파(桐城派)의 중흥공신(中興功臣)인 것을 자처(自處)하였으며 남들도 그렇게 추숭(推崇)한 것이 사실(事實)인데 (왕선겸(王先謙) 자서(自序) 참조(參照)) 그가 『성철화상기(聖哲畵像記)』를 쓸 때 32인(三十二人)의 성철중(聖哲中)에 요내(姚鼐)를 32인(三十二人)의 수위(首位)로 한 것만으로도 넉넉히 그의 심리(心理)를 상상(想像)할 수 있는 것이며 원래(元來)에 그의 막부(幕府) 속에는 무수(無數)한 인재(人才)를 나열(羅列)하여 두 었으니 우리가 설복성(薛福成)의 쓴 증문정공(曾文正公)막부빈료(幕府賓僚) (용암문편사(庸菴文編四)) 1편(一篇)을 읽어보면 가(可)히 알수 있는 것은 당시(當時) 학자(學者)에도 전태길(錢泰吉), 유육숭(劉毓崧), 유수회(劉壽會), 이선란(李善蘭)(산학가(算學家)), 화형방(華蘅芳)(산학가(算學家)), 손의언(孫衣言), 유월(兪樾), 막우지(莫友芝), 대망(戴望), 성용경(成蓉鏡), 이원도(李元度) 같은 이라든지 문인(文人)으로는 오민수(吳敏樹) 장유쇠(張裕釗), 진학수(陳學受), 방종성(方鍾誠), 오여륜(吳汝綸), 여서창(黎庶昌), 왕사탁(汪士鐸), 왕개운(王闓運) 같은 이가 모다 그의 막부(幕府) 속에 있었는 만큼 증국번(曾國藩)의 세력(勢力)이 몇십년(十年) 동안 중국(中國)에 영향(影響)한 것도 그다지 고이할 바는 아니나 그러나 이 일련(一聯)의 사람들이 문학사상(文學史上)에 있어서는 한 사람도 예외(例外) 없이 아무런 공헌(貢獻)도 없었는 것이다. 그저 연수(年壽)가 최고(最高)하고 명예(名譽)가 최대(最大)하기로는 유월(兪樾) 왕개운(王闓運) 오여륜(吳汝綸) 등(等) 세 사람 만한 이가 없었으나, 유월(兪樾)의 시(詩)나 문(文)이 아무런 가치(價値)도 없는 것이고 왕개운(王闓運)은 말로는 일대(一代)의 대사(大師)라고 했으나 그의 고문(古文)이란 설복성(薛福成)만도 못한 것이며 (시(詩)는 논외(論外)) 오여륜(吳汝綸)만이 사상(思想)이 조금 새로운 데가 있었으므로 그의 영향(影響)은 비교적(比較的) 크다고는 하겠으나 그도 그자신(自身)의 문장(文章)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조성(造成)해온 후진인재(後進人才)에 있었으니 엄복(嚴復)이나 임서(林紓)가 모다 그의 문하(門下)에서 나와서 그들의 영향(影響)이 그 자신(自身)보다 훨신 더 큰 것이었다.
이에 평심서기(平心叙氣)하고 말하면 고문학(古文學)중(中)에는 자연(自然) 『고문(古文)』이란 것이 (한유(韓愈)로부터 증국번(曾國藩) 이하(以下)에 이르기까지의 고문(古文)) 가장 정당(正當)하고 가장 유용(有用)한 문체(文體)인데 연려문(聯麗文)의 병폐(病弊)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되지 못한 당송팔가(唐宋八家) 이하(以下)의 고문(古文)하는 사람들은 주태한위(周泰漢魏)로 돌아가기를 망상(妄想)하여 만드면 만들수록 통(通)하지 못하고 고체(古體)를 뜨면 뜰수록 용처(用處)가 없이 되어 다만 문학계(文學界)에서 『사통비통(似通非通)』의 가(假)짜 골동품(骨董品)을 보태 놓았을 뿐이었다. 당송팔가(唐宋八家)의 고문(古文)과 동성파(桐城派)의 고문(古文)의 장점(長點)은 그들이 통(通)할 수 있는 청담(淸淡)한 문장(文章)을 지어내는 데 있고 가골동품(假骨董品)을 만들려고 망상(妄想)치 않었는데 동성파(桐城派)를 배운 고문(古文)하는 사람들은 대다수(大多數)가 그래도 『통(通)』한다는 데까지는 되었고 한 발 더 나가면 『응용(應用)』할 수 있는 문자(文字)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동성파(桐城派)의 중흥(中興)이 비록 아무런 공헌(貢獻)은 없었다고 하드래도 또한 아무런 해(害)로운 곳도 없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때로는 『위도(衛道)』의 성현(聖賢)으로 자처(自處)하여 방동수(方東樹) 같은 이는 한학(漢學)을 공격(攻擊)하고 임서(林紓) 같은 이는 신사조(新思潮)를 공격(攻擊)했으되 그런 것쯤은 소위(所謂) 『재도문학(載道文學)』이란 데 중독(中毒)이 되어서 분수(分數)도 모르고 떠든 것이고 동성파(桐城派)의 영향(影響)이 고문(古文)으로 하여금 『통(通)』한다는 데 힘쓴 것과 그후(後) 2,30년(二三十年) 동안 겨우 『응용(應用)』한다는 데 예비(預備)한 그 한 가지 공로(功勞)만은 매몰(埋沒)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계속)—
이육사(李陸史) 초역(抄譯)
三
[편집]태평천국(太平天國)의 동란(動亂)이란 것이 명말류구(明末流寇)의 난후(亂後)에는 최대(最大)의 참척(慘惕)이니만치 응당(應當)히 조곰 더 비애강개(悲哀慷慨)한 문학(文學)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시(當時) 귀주(貴州)에 정진(鄭珍)(자(字)는 자윤(子尹)이고 준의인(遵義人)인데 1806(一八○六)=1846(一八四六))이란 대시인(大詩人)이 있었는데 함풍4년(咸豊四年) 귀주난(貴州亂)에 국부적(局部的)이나마 영향(影響)을 받어서 그의 만년(晩年)의 시(詩) 즉(卽) 소경소시초(巢經巢詩鈔) 후집(後集)에 무수(無數)한 비통(悲痛)한 시료(詩料)를 볼 수 있으나 정씨(鄭氏)의 사(死)가 58년전(五十八年前)의 일인만큼 이것은 이 소사(小史)의 범위(範圍)에 속(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고이한 것은 동남(東南) 각성(各省)이 가장 그 해독(害毒)을 받은 바 크건마는 마침내 아무런 위대심후(偉大深厚)한 시(詩)가 나오지 못한 것이다. 왕령운(王閱運)으로 말하면 일대(一代)의 시인(詩人)이라고 하고 이 시대(時代)에 살어 있었지마는 그의 『상기루 시집(湘綺樓詩集)』 1권(一卷)으로부터 6권(六卷)까지는 바로 태평천국시대(太平天國時代)(1849(一八四九)=1864(一八六四))에 나왔느니만치 우리가 끝까지 읽어보아야 겨우 포명원(鮑明遠)을 본뜬 것이나 부현마(傅玄麻)를 숭내내는 것이 아니면 왕원장(王元長) 조자건(曺子建)을 핥아보는 등류(等類)의 가(假)짜 골동품(骨董品)이고 우연(偶然)히 한두 구(句)식 눈에 띠이는 게라야 『세월유다난(歲月猶多難), 간과파원유(干戈罷遠遊)』라는 아푸지도 가렵지도 않는 시(詩)일 뿐 결국(結局) 아무런 이 시대(時代)를 기념(記念)할 만한 비통(悲痛)한 시(詩)가 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하면 내가 생각하건대 이 시인(詩人)들의 대다수(大多數)는 모다 모방시(模倣詩)를 쓰기에 급급(汲汲)했다는 것은 그들이 사는 세계(世界), 더구나 포명원(鮑明遠), 조자건(曺子建)의 세계(世界)가 전연(全然) 홍수전(洪秀全), 양수청(楊秀淸)의 세계(世界)가 아니란 것이다. 하물며 포명원(鮑明遠), 조자건(曺子建)의 시체(詩體)가 이렇다는 해방(解放)을 경과(經過)치도 못하고 홍수전(洪秀全), 양수청(楊秀淸)의 시대적(時代的) 참겁(慘㥘)을 묘사(描寫)한다는 것은 결(決)코 불가능(不可能)한 것이다. 왕개운(王闓運) 시집(詩集) 중(中) 1872년(一八七二年) 작(作)에 속(屬)하는 독행요(獨行謠) 삼십장(三十章)(권9(卷九))이 있는데 그중(中)에 20년간(二十年間)의 시사(時事)를 묘사(描寫)한 것이 있고 때때로 대담(大膽)한 기평(譏評)이 있기도 하나 대관절 문장(文章)이 통(通)하지 않고 서술(敍述)이 명백(明白)치 않는 데가 있어서 말하자면 조졸(粗拙)한 30편(三十篇)의 가요(歌謠)라고는 하겠으나 시(詩)라고는 할 수 없어서 생각다 못해 겨우 찾어낸 것이 그의 『동관행(銅官行), 기장수린제구감도(寄章壽麟題舊感圖)』란 1편(一篇)을 들어 이 대명정정(大名鼎鼎)한 대시인(大詩人)을 대표(代表)하렸더니 그도 문장(文章)이 태반(太半)은 불통(不通)하므로 이에 략(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時代)에도 당연코 한 사람의 시인(詩人)만은 이 시대(時代)를 대표(代表)할 수 있는 시인(詩人)이 있었다. 그는 바로 상원(上元)의 금화(金和)로서 자(字)를 아포(亞匏)라 하고 (1818(一八一八)=1885(一八八五)) 『추혜음관시초(秋蟪吟館詩鈔)』라는 7권(七卷)의 저작(著作)이 있는데 1853년(一八五三年) 남경성(南京城)이 함락(陷落) 당(當)할 때 금화(金和)가 그때 성중(城中)에 있어서 장발적(長髮賊)의 군중(軍中) 사람들과 왕래(往來)해가며 점점 많은 사람들과 결합(結合)해 가지고 관병(官兵)들과 내응(內應)할 계획(計劃)을 하였든 것이다. 그때 향영(向榮)의 대본영(大本營)이 성(城) 밖에 있었으므로 금화(金和)가 가만히 성(城) 밖으로 버서저 나와서 내응(內應)할 계획(計劃)을 관병(官兵)에게 고(告)하였으나 향영(向榮)이 처음에 믿지 않으므로 그 자신(自身)이 스사로 인질(人質)이 되어 대본영(大本營)에 있기로 모증(保證)한 뒤 성내(城內)의 동당(同黨)과 관병(官兵)이 약정(約定)한 기일(期日)에 성(城)을 쳤으나 관병(官兵)이 오지 않으므로 다시 기일(期日)을 정(定)했는데도 관병(官兵)은 오지 않고 성내(城內)의 동당(同黨)에 희생(犧牲) 당(當)한 이만 많었든 것이다. 그래서 금화(金和)가 친(親)히 위성중(圍城中)의 생활(生活)을 경험(經驗)하고 또 당시(當時) 군관(官軍)의 부패무능(腐敗無能)함을 통한(痛恨)하였으므로 그의 기사시(紀事詩)는 사람을 격동(感動)케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歷史的)으로도 매우 가치(價値) 있는 것이며 그의 『통정편(痛定篇)』 권2(卷二), 20(二○)=21(二一)엽(頁))은 일기체(日記體)로 쓴 시(詩)인데 남경(南京)의 낙성(落城)하는 상황(狀況)과 성중(城中)의 정형(情形)을 그린 것으로 그 일절(一節)을 예(例)를 들면
2월(二月)도 23(二十三)일 대군(大軍)이 처온다 한번 들이자
도적은 황황해서 왼종일 세네번 북을 울리는데
남방(南方) 백성 서로들 같은 마음에 또다시 재생의 빛이 불타고
늠늠한 향장군(向將軍)의 위엄, 하늘처럼 거룩히 우러를제
도적의 각(角)소리 또 한 번 불이면 장군(將軍)의 말굽 소리 들릴세라
맛난 안주도 향(香)그런 술도 장군(將軍)이 오실세라 받들어두고
끄니마다 장군(將軍)의 식사랑 밤이면 잠자리 걱정이 올 때
일곱난 어린애 뜰 아래 놀다 무심코 길 사람에 장군(將軍)이 오신다니
큰 누의 놀라서 잿빛 얼굴 부즈럽다 말 말나 뺨을 치는데
이제야 행차 마저 얼굴은 열흘에 아흐래 수척함도 애무쉐라
그중도 젊은 연석들은 한밤중에 충의를 맹서하고
원(願)컨데 장군(將軍)님 명(命)대로 물샘도 없는 일을 꾀하올 때
도적의 휘하(麾下) 한 놈을 잡어도 저도 모르게 하옵자 하니
심상한 드나드리 가는 곳도 허리우 단검(短劒)은 날카롭더니
하루는 입성(入城)한단 그 날에 제각기 병정들은 횃불을 들어
이제 뵙는 장군(將軍) 얼굴, 불상타 모다들 놓아 주라 일읍시대
뉘라서 장군(將軍)님 바뿌신 줄 알었으리 손에 넘는 공사도 있으리
그의 6월(六月) 초2일(初二日) 기사시백수(紀事詩百首)에는 전면(前面)에 향영(向榮)의 각일(刻日) 출병(出兵)한다는 상황(狀況)을 묘사(描寫)하는데 먼저 사졸(士卒)에게 대향연(大饗宴)을 베풀고 장군(將軍)이 직접(直接)으로 술을 처주고 선서(宣誓)를 한 뒤에 명일(明日) 새벽에는 단연(斷然)코 출전9出戰)을 준비(準備)한다는 90여구(九十餘旬)를 쓴 뒤에 편말(篇末)에 와서 겨우 말하기를
북치고 가볍게 뛰면 기(族)빨은 힌 것들이 나부끼는데
이제야 오랜 음우(陰雨)도 끝나고 찬란한 무지개 보히네
밤조차 수선수선 잠못 일고 아츰 햇발 눈에 부시드니
한낮은 벌서 되고 성난 말들이 코 부는 소리도 들리네
그러나 하루 종일 둥둥 가던 해오래비 보히면
칼엔 피 안 묻고 몸에 흙칠도 못한 전군(全軍)은 돌아서 오네.
이것이 벌서 단순(單純)한 풍자(諷刺)만이 아니고 일종(一種) 독설(毒舌)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풍적(嘲諷的)인 회해(詼諧)가 역시(亦是) 금화(金和)의 특별(特別)한 장처(長處)인데 여기서 우리가 더욱 흥미(興味)를 느끼는 것은 그가 전초(全椒) 오씨가(吳氏家)의 외손(外孫)이라는 것과 『유림외사(儒林外史)』와 및 『유림외사(儒林外史)』의 저자(著者)라든지 『유림외사(儒林外史)』 중(中)에 나타나는 몇 개 중요(重要)한 인물(人物)들과 모다 조금식은 관계(關係)가 있는 것이며 그 자신(自身)이 『유림외사(儒林外史)』에 나오는 한 사람인만큼 그의 시(詩)가 『유림외사(儒林外史)』의 조풍적(嘲諷的) 본령(本領)에서 득력(得力)을 한 것도 사실(事實)일 것이다.
그러므로 뜻있는 사랑의 풍자(諷刺)는 그냥 매도(罵倒)하는 것만이 아니고 통곡(痛哭)인 것이며 경박(輕薄)이 아니라 지한극통(至恨極痛)이 어쩔 수 없이 터저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이런 기술(技術)에는 확실(確實)히 두보(杜甫)나 백거이(白居易)보다 별다른 일면(一面)에서 문제시(問題詩)를 쓴 것이 수(數)없이 많으나 여기서 일일(一一)히 예(例)를 들 수 없으되 금화(金和)의 시(詩)에 혁신적 정신(革新的精神)이 풍부(豊富)하다는 것은 그가 자기(自己)의 『초우집(椒雨集)』에 쓴 것을 보면
- 이 한권(卷) 책자(冊子)는 시(詩)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만약 시(詩)라고 할 것 같으면 군중(軍中)에서 쓴 모든 작품(作品)이 말은 비록 통쾌(痛快)한 것이나 벌서 옛 사람들의 돈후(敦厚)한 풍격(風格)을 버렸고 더욱 요즘 선배들의 배조(排調)하는 법(法)이 아니랴. 그러므로 오늘날 제공(諸公)들이 이러니저러니 하든 바요 또 이러한 오배(吾輩)에 한묵(翰墨)이 있다는 것이 휴지와 맞잽이나 그러나 그도 또한 기수(氣數)가 그렇게 만드는 데야 어찌 하리요.
이러한 의미(意味)에서 50년(五十年)의 시단 이면(詩壇裡面)에서 그를 한 개 중요(重要)한 지위(地位)에 둔다는 것은 절대(絕對)로 고이할 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50년간(五十年間)의 사(詞)는 어떠한 것이냐 하면 모다 몽창(夢窓)(오문영(吳文英))파(派)에 중독(中毒)되어서 아무런 가치(價値)도 없는 것이므로 여기서 토론(討論)하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四
[편집]1840년(一八四〇年) 아편전쟁 이래(鴉片戰爭以來)로 중간(中間)에 1860년(一八六○年)의 영불연합군(英佛聯合軍)이 천진(天津)을 돌파(突破)하고 북경(北京)에 들어와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워버린 전사(戰事)를 경과(經過)한 뒤 중흥(中興)의 전쟁(戰爭)에는 서양인(西洋人)의 조력(助力)을 얻은 바 많었으므로 사리(事理)에 현명(賢明)한 사람들은 차차 서양(西洋) 각국(各國)이라는 것을 중요시(重要視)하게 되었으니 1861년(一八六一年) 청정(淸廷)은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이란 것을 설치(設置)하였고 다시 1867년(一八六七年)에는 『동문관(同文館)』을 설치(設置)하였으며 학생(學生)을 외국(外國)에 파견(派遣)하여서 그들의 정책(政策)들을 배워오게 하였는데 당시(當時)의 완고(頑固)한 사회(社會)에서는 차종(此種) 정책(政策)에 극력(極力)으로 반대(反對)했으므로 동문관(同文館)은 좋은 학생(學生)을 얻지도 못하고 외국(外國)에 파견(派遣)한 학생(學生)들 중(中)에는 더욱 사람을 얻지 못하였으나 그러나 19세기(十九世紀) 말년(末年)부터 번역사업(飜譯事業)이 점점(漸漸) 발달(發達)하게 되었으니 전교사(傳敎士)들 중(中)에도 『이제마태(李提摩太)』 같은 이는 중국문사(中國文士)들의 조력(助力)을 얻어서 불소(不少)한 서적(書籍)을 번역(翻譯)하였고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문사(文士) 왕도(王韜) 같은 이도 이 사업(事業)에는 중요(重要)한 한 사람의 선봉(先鋒)이 되었었다.
그러나 당시(當時)의 번역사업(飜譯事業)이란 그 범위(範圍)가 그다지 광범(廣汎)하지는 못하였으니 제1종(第一種)은 종교서적(宗敎書籍)으로서 그중(中)에도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신구약전서(新舊約全書)의 각종(各種) 번역본(飜譯本)이었고 제2종(第二種)은 과학서적(科學書籍)이나 또는 으용과학(應用科學) 서적(書籍)으로 당시(當時)에는 『격치(格致)』의 서적(書籍)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제3종(第三種)은 역사(歷史), 정치(政治), 법제(法制), 등류(等類)의 서적(書籍)인데 『태서신사요람(泰西新史要攬)』이나 『만국공법(萬國公法)』 등(等) 서적(書籍)이 번역(飜譯)되어 나온 것은 매우 자연(自然)스러운 일이었다. 종교서적(宗敎書籍)은 전교사(傳敎士)들의 자동적(自動的) 사업(事業)이었고 과학서적(科學書籍)으로 말하면 당시(當時)에 모다 창포(鎗鉋)병선(兵船)의 기초적(基礎的) 학문(學問)이란 것을 알기 때문이었으며 역사법제(歷史法制) 등(等) 서적(書籍)은 당시(當時) 중국인(中國人)으로써 서양사정(西洋事情)을 이해(理解)하도록 하기 위(爲)한 것이었으나 이밖에 서적(書籍) 즉(卽) 문학서적(文學書籍)이나 철학서적(哲學書籍) 같은 것은 당시(當時) 어떠한 사람들에게도 주의(注意)를 껄지 못하였으니 그 역시(亦是) 필연(必然)의 사세(事勢)였다는 것은 그때의 중국(中國)의 학자(學者)라는 사람들의 거이 전부(全部)가 생각키를 서양(西洋)의 창포(鎗鉋)라는 것은 무섭지 않은 바 아니나 문예(文藝), 철리(哲理)에 있어서는 저들이 아무리 해도 5천년(五千年) 문명고국(文明古國)인 우리들에게 멀리 미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엄복(嚴復)과 임서(林紓)의 큰 공로(功勞)는 이러한 양대결함(兩大缺陷)을 보구(補救)한 데 있는 것이니 엄복(嚴復)으로 말하면 『서양근세사상(西洋近世思想)』을 소개(紹介)한 제1인(第一人)이었고 임서(林紓)로 말하면 『서양근세문학(西洋近世文學)』을 소개(紹介)한 제1인(第一人)이었다.
엄복(嚴復)의 번역(飜譯)한 『헉수레』의 『천연론(天演論)』 (진화론(進化論)―역자주(譯者註)은 광서병신(光緖丙申)(1896(一八九六))이었는 만큼 일청전쟁(日淸戰爭)의 직후(直後)이고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직전(直前)인데 그의 『천연론(天演論)』이 출판(出版)된 이후(以後)(1898(一八九八)) 중국(中國)의 학자(學者)들도 서양(西洋)에 창포병선(鎗鉋兵船) 이외(以外)에 정도(精到)한 철학사상(哲學思想)이 우리들의 채용(採用)하기에 넉넉한 바 있다는 것을 점차(漸次)로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상사상(思想史上)의 것인 만큼 여기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이 여기서 응당(應當)히 한번 토론(討論)해 볼 것은 엄복(嚴復)의 번역(飜譯)하는 문체(文體)일 것이다 『천연론(天演論)』의 『d예언(例言)』에서 그 자신(自身)이 말한 바 있기는 하지마는 당시(當時)로 보면 자연(自然)히 백화(白話)를 사용(使用)하기는 곤란(困難)하였고 그렇다고 팔고식적(八股式的) 문장(文章)을 쓰기에는 더욱 불편(不便)하였으므로 그의 번역(翻譯)하는 문체(文體)는 당시(當時)로 보면 두득이(不得已)한 방법(方法)이라 실(實)로 전청관료(前淸官僚)가 『홍모자(紅帽子)』를 쓰고 연설(演說)하는 격(格)이나마 그의 역서(譯書)의 가치(價値)는 매우 높은 것이므로 당시(當時)의 고문대가(古文大家)로 자타(自他)가 공인(共認)하는 오여륜(吳汝綸) 같은 이도 『천연론(天演論)』의 서문(序文)에 『駸駸與晚周諸子相上下』라고까지 격찬(激讃)케 한 것이다.
엄복(嚴復) 자신(自身) 역시(亦是) 그의 역서방법(譯書方法)을 말하기를 『什法師有云 ‧ 「學我者病」來有方多 ‧ 幸勿以是書爲口實也』(천연론예언(天演論例言))라고 한 것은 고이치 않은 것이니 엄복(嚴復)으로 말하면 영문(英文)이나 중고문(古中文)의 정도(程度)가 매우 높은 데도 불구(不拘)하고 그가 항상 주의(注意)하고 구차(苟且)로히 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일종(一種)의 『사문자(死文字)』를 사용(使用)해서도 완전(完全)히 『달(達)』한다는 데까지 성공(成功)을 하였든 것이다. 그의 역서(譯書)할 때의 정중(鄭重)한 용의(用意)라든지 태도(態度)에는 정(正)히 감패(感佩)할 바 있어 우리들의 모범(模範)이 되기에 넉넉한 바 있으려니와 그 자신(自身)이 일찍이 말하기를 『도언(導言)』이란 일개(一個) 명사(名詞)를 쓰기 위(爲)해서는 그는 처음 『호언(扈言)』이라고 번역(飜譯)을 하였든 바 하증우(夏曾佑)가 『현언(懸言)』이라고 고친 일이 있었는데 오여륜(吳汝綸)이 또 찬성(贊成)치 않어서 최후(最後)에 자기(自己)가 『도언(導言)』이라고 고쳤다고 또 말하기를 『일명지립(一名之立), 순월지주(旬月踟躊), 아죄아지(我罪我知), 시존명철(是存明哲)』이란 엄복(嚴復)의 번역(飜譯)이 능(能)히 성공(成功)하는 까닭의 대부분(大部分)은 『일명지립(一名之立), 순월지주(旬月踟躊)』라는 이 정신(精神) 때문이다. 이 정신(精神)이 있고서야 『고문(古文)이나 백화(白話)』를 물론(勿論)하고 거이 성공(成功)하는 법(法)인데 후인(後人)들은 그와 같은 공력(功力)도 없고 그와 같은 정신(精神)도 없이 반통불통(半通不通)의 고문(古文)을 사용(使用)해서 일지반해(一知半解)의 양서(洋書)를 번역(飜譯)한다는 무리들이야 자연(自然)히 실패(失敗)하지 않은 예(例)가 없었다.
그리고 엄복(嚴復)이 번역(飜譯)한 서적(書籍)의 종류(種類)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천연론(天演論)』 『군기권계론(群己權界論)』 『군학예언(群學隷言)』 같은 것은 원문(原文)에 자못 문학적(文學的) 가치(價値)가 있는 것이지마는 그의 역문(譯文) 그것도 고문학사(古文學史)에 역시 중요(重要)한 지위(地位)를 차지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의 서풍(書風)이 20년(二十年) 동안이나 성행(盛行)한 것이다.
임서(林紓)의 번역(飜譯)한 소(小)『뜌마』의 『다화녀(茶花女)』=(춘희(椿姬) 역자주(譯者註))도 역시 고문(古文)으로 연애소설(戀愛小說)을 번역(飜譯)한 것인 만큼 한 개 시험(試驗)으로서 의의(意義)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고이래(自古以來)로 고문(古文)이 생긴 뒤에 이러한 장편연애소설(長篇戀愛小說)을 쓴 문장(文章)이 없었느니만큼 『다화녀(茶花女)』의 성과(成果)는 그로 하여금 고문개벽(古文開闢)에 한 개 새로운 식민지(殖民地)를 만들게 한 것이다. 임서(林紓가 초년(初年)에 번역(飜譯)한 『다화녀(茶花女)』 『흑노유천록(黑奴𥸤天錄)』 『활철로급(滑鐵盧及)』 『이비금전혈여성기(利俾琴戰血餘醒記)』 등(等) 서(書)가 맛츰 손에 없어서 일일(ㅡㅡ)히 예(例)를 들지는 못하나 능(能)히 원서(原書)를 읽는 사람에게는 다소(多少) 역법(譯法)에 있어서나 문장(文章)에 있어서나 완전(完全)한 만족(滿足)을 느낄 수는 없다 하드래도 평심(平心)하고 볼 것 같으면 임서(林紓)의 소설(小說)에는 그 자신(自身)의 풍격(風格)이 왕왕(徃徃)히 나타나나니 그가 원서(原書)의 심각(深刻)한 회해취미(詼諧趣味)를 이해(理解)하는 경지(境地)가 높음으로써 그러한 곳에 다다르면 한층(層) 더 힘을 쓰므로 더욱 더 정채(精釆)가 나는 것이다. 그저 그의 결점(缺點)을 말하자면 원서(原書)를 능독(能讀)치 못했다는 것이겠으나 그래도 그가 문학적(文學的)으로는 천재(天才)이었든 만큼 만약 그에게 총명(聰明)한 조수(助手)가 있어 그로서 원문(原文)을 죽죽 읽는 사람들보다는 좀 더 높은 경지(境地)에서 그 일을 하였으리란 것은 지금에 원서(原書)를 읽는다는 사람들이 완전(完全)히 워문(原文)을 료해(了解)하는 이가 없고 또 그들의 백화(白話)를 쓴다는 정도(程度)가 임서(林紓)가 백화(白話)를 사용(使用)하는 능력(能力)에 멀리 및지 못하면서 함부로 임서(林紓)의 번역소설(飜譯小說)을 비평(批評)한다는 것은 임서(林紓)로 하여금 너무나 원왕(寃枉)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평(公平)한 말로 하면 임서(林紓)가 고문(古文)을 써서 소설(小說)을 번역(飜譯)했다는 시험(試驗)은 말하자면 큰 성과(成果)를 얻었다는 것은 고문(古文)으로는 일즉이 한번도 장편소설(長篇小說)을 쓴 일이 없는데 임서(林紓)는 남이 못한 고문(古文)을 써서 백여편(百餘篇)의 장편소설(長篇小說)을 번역(飜譯)해 냈고 그를 배우는 수많은 사람들이 역시 고문(古文)을 써서 허다(許多)한 장편소설(長篇小說)을 번역(飜譯)했으며 고문(古文)에는 골계성(滑稽性)이 부족(不足)한데 불구(不拘)하고 임서(林紓)는 고문(古文)으로 『띡켄스』 『이도애화(二都哀話)』를 번역(飜譯)했으며 고문(古文)으로는 연애소설(戀愛小說)을 쓰기에는 부적당(不適當)하다는 데도 임서(林紓)는 고문(古文)으로 『다화녀(茶花女)』와 『가인소전(迦茵小傳)』을 번역(飜譯)하야 고문(古文)의 응용(應用)에 있어서는 사마천(司馬遷) 이래(以來)로 어떤 사람도 이러한 성과(成果)를 거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成果)도 마침내 실패(失敗)에 돌아갔다. 그것은 그 이유(理由)가 임서(林紓) 자신(自身)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고문(古文) 그 자체(自體)에 탈이 있는 것이다. 『고문(古文)도 소설(小說)을 번역(飜譯)할 수 있다』고 우리의 많은 소설(小說)을 번역(飜譯)한 사람들은 감(敢)히 말하리라. 그러나 고문(古文)이란 구경(究竟) 『죽은 문자(文字)』이라 어떠한 형식(形式)으로 만든다 하드래도 그것은 결국(結局)은 소수인(少數人)의 『상완(賞玩)』에 제공(提供)할 뿐이지 이 이상(以上) 더 생명(生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이상(以上) 더 보급(普及)이 될 것도 아닌 것은 여기 한 개 명현(明顯)한 예(例)를 들면 주작인(周作人)이 그 형(兄) 노신(魯迅)과 초기(初期)에 고문(古文)으로서 소설(小說)을 번역(飜譯)했는데 그들의 고문(古文) 공부(工夫)가 매우 높은 경지(境地)에 있었고 또 모다 직접(直接)으로 료해(了解)한 만큼 그들이 번역(飜譯)한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은 원문(原文)을 임서(林紓)가 번역(飜譯)한 소설(小說)에 비(比)하면 그 내용(內容)이 훨씬 높은 작품(作品)인데도 불구(不拘)하고 주씨(周氏) 형제(兄弟)가 신신고고(辛辛苦苦)해서 번역(翻譯)한 이 소설(小說)이 10년간(十年間)에 겨우 21책(二十一冊)이 팔렸다는 이 옛 얘기로도 우리가 한 개 각오(覺悟)할 것은 주씨(周氏) 형제(兄弟)가 고문(古文)으로 써서 얻은 바가 잃은 바만 못하고 결국(結局)은 실패(失敗)했다는 것이다. (이하(以下) 중단(中斷))
본고(本稿)는 호적(胡適)의 원문(原文)을 필자(筆者)가 초역(抄譯)한 것인데 신년호(新年號) 편집시(編輯時)에 이 뜻이 누락(漏落)되었음 (편집부(編輯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