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방 비사 소고
一. 청방(靑幇)의 조직
惡의 華 ! 청방을 말한다해도 이것은 시카고의 알·카보네의 얘기는 아니다. 上海를 中心으로 한 중국 각도시에 그들의 방대한 조직을 가지고있는 중국식『깽}청방이라면 국민당의 流氓政治에 사용되는 형형색색의 도구중에 한개의 중요한 세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해의 {깽}성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유명한 불란서(佛蘭西)의 루이·뽀냐팔트가 이용한 Socrety of December Jenth나 帝政露西亞의 Black Hundred나 가까운 예로는 시카고의 {깽}들의 성질을 종합하여 상상하면 명료하게 알아질 수가 있는것이다. 물론 중국 전토에뿌리박은 {깽이라면 여러 가지 종류가 많은 것이지만은 그 질에 있어서나 량에 있어서나 조직의 치밀한 것이라든지 규율의 잔인한 모든 점으로보아 [청방]이라고 불러지는 상해의{깽}은 중국{깽}의 대표적인 동시에 그[멤버-]의 수는 호적조차 정확치 못한 중국이니만치 자세히는 모르나 사람에 따라서는 이만 내지 십만이라고 추정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멤버의 자격은 하층사람, 불조계의 순사, 형사, 공안국의 공리, 유맹정치가, 공장감독, 노동계약자, 국민당의 노동지도자(황색조합의 간부) 시중의 소상인에 이르기까지이며 그들의 하는 일은 인신매매, 아편밀수운반, 방표(인질) 싸움청부, 도박, 총기밀매, 살인 등등이나 일면에 ×動政治의 도구되기위해서는 우국지사, 은행가부호, 고급정치가, 국민당 간부까지가 유력한[멤버-]로서 이면에 활약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개석 자신도 선서한[멤버-]의 한사람이란 것은 너무도 유명한 사실의 하나였다.
그러면 이 {깽}의 수령 즉 암흑 중국의 대통령은 누구냐? 이것은 군웅이 접거하는 中國의 모든 사회가 그러한 것과같이 이{깽}의 사회에서도 두월생(杜月笙), (황금영)黃金榮, 장숙림(張肅林) 등 거물? 들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가장 봉건적 가장적인 이 결사의 주인들인 동시에 최고통제자들이며 따라서 대불란서조계(大佛蘭西租界) 내의 사실상지배자들이다. 불조계 당국은 그 등의 활동에 의하여 대금을 수확해드리는 대상으로 그 지배권을 그 등에게 양여하였다는 것은 두월생(杜月笙)은 정말 불란서(佛蘭西)의 시참사원의 한사람이었었다는 것만보아도 알수가 있다. 본래 柱, 黃, 張의 삼대두령들은 민국 이십년도까지도 상해를 삼분하여 정족의 세를 일구고 서로서로 협조하여 왔던 것이지만은 아편의 이익으로 말미암아 내부의 암투는 황금영(黃金榮)의 세력를 희생하고 두월생(杜月笙)의 강대를 결과하였으며 경쟁에 이긴 두월생은 드디어 상해의 [츠아-]가 되고말았다.
二. 그들의 정치적 역할
중국의 {깽}! 이것도 민국 십칠년까지는 순연한 유맹의 집단이었다. 그래서 일반으로는 봉건군벌인 손전방(孫傳芳)과 결탁하여 아편과 노예의 운반을 하는데 지나지 못하였으나 中國××이 ×動化한 同年 四月에는 이것이 정식으로 정치적 도구가 되어 등장하였던 것이다.
國民××軍이 멀리 상해를 향하여 진격하고 있을때 상해의 시민들은 환호하며 무기를 잡고 손전방(孫傳芳)을 상해로부터 쫓아냈다. 그리고 광동의 백숭희(白崇禧)장군이 國民 17年 3월 21일 상해에 도착했을때 당시 상해를 완전히 지배하던 근로자들은 무대의 후면에서 무엇이어떻게 되는 줄도 모르고 장개석을 지도자로 한 국민군이 상해에만 도착을 하면 꼭 자기네를 해방하여 줄줄만알았다. 그래서 그 등의 대부분은 무기를 던지고 상해를 [정당한 상해의 당국]에다 넘겨주었던 것이다. 바로 그 2일 후 남경사건에 뒤이어 장개석은 남경에 좌정하고 全市中의 은행가들은 회의를 열었으니 그 결과는 모든 선량한 근로자들에 대하여 직시 전율할 [테러리즘]이 행하여졌다. 그래서 즉시로 무기를 포기하지 않는 자들은 얼마인지 그 수조차 모르게 몰려가서 ××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하수인들은 장개석 자신의 병사는 한사람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때까지 병사 자신들은 민중의 동맹자일지언정 민중이 적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시(沙市), 만현(萬縣) 등 사건과 유명한 민국 15년의 오, ??사건을 지나고 얼마 안되는 때라 외국병사들도 이××에는 한 사람도 직접 하수인이 되지는 안았다. 그××은{깽}의 손으로 행하여진 것이며 그 기금만은 경로가 있었다.
이 {테러} 집행대장은 바로 장숙림(張肅林)이었고 그는 당시 제일유의 {깽}이었다. 그뒤 그들의 동료들중에는 국민당 중앙위원회의 {멤버-}가 된자도 있었으며 장개석에 선발되어 상해경비사령(上海警備司令)에 등용된 자도 있었다. 이뿐만아니었다. 상해에 있는 ×國警察과 결합된 {깽}들은 수많은 노동자 [인테리켄차]를 ××하였으니 그 제1회의 [테러]가 광란 한 판에 육천 남녀의 희생자가 났다. 여기에 차마 웃지도 못할 삽화가 있다. 그것은 두월생의 비서역인 한 사람은 제남대학의 종교학교수로서 그후 제남사변이 발발될때까지 일신량역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깽}은 민국 17년 이래로 국민당의중요한 무기가 되었다는 것은 주로 노동자들의 대중운동을 압박하는 것과 조합운동을 통하여 스트라익을 궤멸시키는 역할을 맡아 연출해 왔다. 그리고 종래의 모든 노동조합을 분쇄한 후 [존경할만한]? 새로운 조합을 창설한 {깽}들은 국민당의 노동운동의 지도도 맡아왔다.
三. 정치성질의 발전
백%의 효과를 발휘한 민국 17연후의 {깽}을 발견한 국민당 지도자들과 그 계급적 배후자들은 벌써 그냥 있을수는 없었다. 될 수있으면 청년과 달여붓기 시작하였으니 두월생은 더욱더 위대하게 성장하였으며 그의 세력은 확대되어 경제적 정치적으로 국민당정권의 계급적기초를 형성하고 있는 거리에서는 식민지뿌르조아지의 진정한[맴버-]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그는 점차로 정부의 배경이 되어있는 계급의[멤버-]와 정부와 및 그 배후자의 계급이 이용하는 암흑한 하층계급의[츠아-]로서 이중의 역할을 일신에 결합하게되어 이 청방의 [츠아-]가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회의라든지 장개석과의 사이에 행하여진 비밀회의의 기사가 때때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릴때에는 그들 거물?들은 벌써 남경정부의 명향고문이라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반을 가진 우월생은 동시에 장학량(張學良)의 고문도 된다. 그것은 민국 21년 3월 장학량 부인이 상해를 방문하였을 때는 그 화려한 호텔이 즐비하게 나열한 거리를 지나서 화객기로에 있는 금역을 두른 궁성과 같은 두월생의 저택에 손님이 되었다.
민국 21년 5월 1일 남경정부는 두원생에게 상해의 코뮤니스트에 대한 억압을 하기위하여 그 수석의 관직을 수여한 것은 유명한 사실로서 당시 북중에서 이름높은 천진대공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유명한 상해의 두목 두월생은 불란서 조계내의 다른 유력자와 함께 회의에 소집되어 참석하였다]
이 중요한 비밀회의에서 무엇이 토의되었는지는 대다수의 중국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며 또 중국신문에 때로는 보도도 되었던 것이다. 이에 그런 중국신문들을 재료로서 상고하여보면 장개석은 상해에서 초공공작(剿共工作)을 강화하기위하여 보다 더 강력적인 [테러]단을 조직하려고 일금 백만원을 {깽}에게 내여놓고 동시에 정객과 {깽}과의 사이에 아편운반에 대한 밀약을 맺었다. {깽}은 그 주요 수입을 강소(江蘇), 절강(浙江), 양자강(楊子江)유역의 아편으로부터 짜내고 남경정부에서는 소위 아편전매에 의하여 법외의 이득을 빨아올릴 계획이었었다.
남경회의에서는 아편전매기관의 관리는 남경정부로부터 임명하기 전에 미리{깽}측에서임명하던지 최저한도라도 이들의 승인을 얻어 임명하기로 되어 지배는 의연히{깽}의 수중에 잡혀있었다. 그리고 그뒤의 소문은 또[스테-숀]의 송자문(宋子文)(당시재정부장)의 암살소동도 이들 청방두목들의 암투의 결과가 폭발한 것이라 전하여졌다.
이뿐만아니라 회의에서 두월생은 금전이나 세력만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즉 그것은 [面子]-명예까지도 요구하였다. 그의 이름을 상해부근이나 적어도 중국은 모르는 사람이없다. 또 그의 지위라든지 그의 수입의 원인이라든지 그의 활동의 성질이 어떠한 게라는 걱도 다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포동하를 건너서 굉장히 호화한 가랑을 세웠다(양반이 될 작정이었다) 바로 민국 21년 6월 9일부터 10일까지 엄청나게 큰 제전이 거행되었다. 장개석은 두월생의 지배구역내에 있는 무관, 문관, 국민당지부할 것 없이 명령하여 I축전을 보내게 하였으며 당일 상해는 여간 소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수천의{깽}들과 실업가, 정부의 관리들로 된 장사의 대행렬이 화객효로에 있는 두월생의 저택으로 붙어나와서 특별경계에 정리되는 도로를 통하여 상해시를 횡단하였다. 행렬의 선두에는 장개석, 장학량, 상해시장 왕정연(王正延)박사, 불란서총령사, 기타 국민당의 관리, 전국으로부터 지명지사가 보낸 축기 등등이 흘러갔었고 두월생은 자기가랑에 참배한 사람들을 위하여 포동하(浦東河)를 왕래하는 특별[랜취]를 새로히 준비하였다. 참배자 중에는 남경정부의 대신, 상해시장, 그외에도 대부분은 고위고관이 자진참배하였으며, 장개석의 대표로는 당시 시장 장군(張群)이었다. 이날두월생은 종자와 친근자들에게 {팁}으로 준 돈이 칠만원이었다고 중국신문들은 보도에 혈안이였었다. 이만하면 얼마나 큰 소동이었다는 것도 상상할수 있는 것이지만은 이뒤로부터{깽}의 [츠아-]인 두월생과 그를 둘러싼 청방들은 보다더 그등 본래의 사명을 열심히 수행하였으며 젊은 노동자, 학자 작가, 학생 등등에 대한[테러]는 더욱더 맹렬하여졌으니 체포, 고문, 암살 등등은 중국민족혁명사에 얼마나 두터운[페-지]를 비린내 나는 피로 칠하였는지 모른다.
四. 청방과 노동 계급
청방들은 노동자에 대해서는 스파이인것이다. 조금만 저들의 명령에 거역을 하면 그것은××이다. 그뿐만아니라 국내자본이나 국외자본의 압잡이로서는 현장두목도 되고 노동계약자도 된다. 어느 조합에나 어느 공장에도[깽]의 그물이 안치여 있는 곳은 없다.
이러한 정황밑에서는 [스트]를 한다하거나 노동자를 어찌한다는 것은 벌써 문제가 아니다. 좌우간[깽]들의 안경테 밖에 벗어만지면 체포되고 체포만 되면 장기나 사형쯤은 각오해야만 하는 것이다. 국민 21년 9월 불란서조계의 전차종업원의 파업때의 한사람의 노동자는 아주 적당한 예였다. 그는 매우 정녕 한 노동자였으나 공산주의자라는 협의로 기소되어 하등증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청방의[멤베-]인 공장감독들이 열호한되지도 않은 팜프렡을 증거라고하여 그는 그런 것은 일생에 본 일조차 없다고 하였건만 변호인도 변론도 없이 십분간의 재판으로 십개년의 징역에 십이개년간 모든 권리를 박탈한다는 부가형까지 선고하였다.
국민당의 지배한다는 노동조합은 완전히[깽]의 수중에 있다. 그 등은 조합의 간부로서 쟁의나 파업때에는 독립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 대신 그 등은 호화한 저택에 살고 있을 뿐아니라 그 등은 직공전체의 노임을 공장주로부터 받으면 두전이라고하여 몇할쯤은 제 주머니에 실례를 한다. 그리고 노동계약자로 부터는 회뇌을 강요하고 은혜깊은 공장주에게선 직접보조금을 받으며 노동자에겐 아편을 강제로 팔고 노동자의 자녀는 노예로 사서 따로 돈벌이를 시켜먹는 것이다.
민국21년 하반기 상해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어느때나 실패를 하게됨으로 자기들의 조합에 대하여 단연코 항의를 했다.
12월초에 상무인서관태업은 청방들과 호주가 짜고 유린하여 실패하였으며 동월 26일 상해의 제모, 제약 등 노동조합들에서는 조합원들이 자기네의 마음대로 되는 조합을 만들어보겠다고 구조합의 본부를 습격해보았다. 그러나 국민당과 청방은 이것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그리고 노동자층이나 공장에는 스파이와 선동자를 밀파하고 노동시장과 조합을 지배하는 동시에 청방의 대두목은 자신진두에 나와서 쟁의나 파업의[중재자]짓을 한다. 국민당의 광폭한 탄압활동의 대이인으로서 두월생은 활약하는 것이다. 그의[중재]로서 가장 광휘있던 예는 국민 22년 1월[초상국]의 대파업때이었다. 일천인의 선원이 1월 7일 전부 하선하고 13소가 정선하였던 때니 그때의 요구조목은
1. 더블 보-너스를 다오 2. 선원조합을 승인하라 3. 사무소에서 일하는 것과 동등으로 취급하라 4. 사고없이 하는 해고 절대 반대 5. 연말상여를 영속하라
1월 9일 청방두복 두월생은 [중재]자로서 이 쟁의에 정면으로 등장하여왔다. 그래서 그는 먼저 감언이설로 1소만을 설복하는데 성공하였다. 1월 11일 두월생은 파업중 선원들과 대면하여 최초의 삼항은 승인될줄로안다 그러나 끝으로 이항은 안될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익일 간부들을 쑥덕여서 분열케하고 회사의 태도는 미명도 되기전에 중재는 어름어름하고 파업은 터졌다.
상해사변의 뒤를 이어 오십만에 가까운 실업노동자는 가두로 흘러나왔다. 국민당사회국에는 물론 노동자들의 대표가 파견도 되어보았으나 순사에게 거절되어 만날 사람은 만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노동자의 압력도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음으로 사회국은 [실업구제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빵에 주린 노동자들에게 빵대신으로 위원회를 턱 밑에 내받은 것이다. [구제기금모집]을 위해서는 소위원회라는것이 조직되었으나 그것은 별것이 아니고 두월생 등등이 모인 것이었다. 그래서 위원회의 주요한 역할은 노동자를 문서상으로 등록하고 즉 다시말하면 사회의 해독을 제거하기 위해서 위험분자를 힘써 제거하는 것이었다.
5. 청방의 두복과 정치
한때는 국민당좌파는 상해의 청방과 결합하여 장개석의 그룹을 위협하고 자금을 빨아 올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왕정위가 영파의 히틀러-장개석과 결합되어 극우익에 달라붙고는 그러한 소식은 벌써 끊어졌다. 왕정위가 민국 21년 말 상해에 왔을 때는 그 목적은 표면상 남경과 광동을 합작케하려는 평화회의였다. 그러나 그 실은 장개석에게 달라붙는 제일보였으며 양자의 중간에서 산파역을 한 것은 청방의 삼대두목 중의 한사람인 황금영(黃金榮)으로서 그는 그 대상으로 오늘날도 [大世界]라는 큰 생재기관을 가지게 되였다. 그리고 왕정위가 회의에 열석하려 상해에 들어올 때에는 두월생의 소유한 특별 [랜취]는 그를 불란서조계 [빤드]까지 운반하였고 그곳에는[깽]들이 자동차를 가지고 대기하고 있다가 그의 저택까지 호위해 보냈다.
그 외에도 동년11월말부터 12월 초에 이르기까지 왕정위가 그 도당인 소위[개조파]의 동료들을 소집하여 중앙위원회를 열고 간부를 개선할때 왕 자신을 합한 10명의 위원이 지명된 이외에 14인의 보결 [멤버-]에는 두월생의 비서 한 사람도 당선되었으며 그 회합의 장소는 황금영의 경영하는 도박환락경이 있었다.
민국 21년 낙양에서 열린 국가긴급회의에도 깽의 삼대두 팀들은 대표로 선발되어 이들은국민당의 소위 당치에 기회있는대로 정치적 지도자로서 활약하였으나 이 중에도 황금영은 출석하였었고 두월생은 뒤에 처져서 2당정치에 반대하는 60인 중 한사람으로 선언서를 발표하였던 것이다.
구, 일팔 이후로 항일회가 조직되었을때는 청방의 지도자들은 엄청난 활동도 하였다. 외화배척으로 남는 막대한 배당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수천 인의 애국정신을 이들은 즉석에서도동원시킬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후 상해사변에는 23인의 청방두목들은 19로군에게 무기를공급한 대상으로 거대한 돈벌이를 할 수가 있었다. 일절의 회합과 행렬과 결사와 언론이 용서되지 않는 국민당의 치하에서 상해의{깽}들만은 모든 악습과 범죄의 대비밀결사를 만들어 가지고 가장 대담하게 한 세력을 위하여 다른 한 세력을 궤멸하기에 난폭하게 상해의 지붕 밑을 돌아다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