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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국사(상) (6차 교육과정)/Ⅱ. 고조선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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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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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우리 민족은 만주와 한반도를 생활 무대로 하여 활동하였는데, 이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70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였다. 구석기 시대를 거쳐 기원전 6000년경부터는 간석기와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면서 생산이 늘어나고 인구도 증가하여 각 지역에서 군장 사회가 성립되었고, 이들이 연맹체를 구성하여 고조선을 이루었다. 고조선은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로서,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세력을 떨쳤다.

기원전 4세기경부터는 철기 문화가 보급되어 생산력이 더욱 늘어나고, 각 지역의 문화도 고루 발전하여 만주와 한반도 전 지역에서 새로운 나라들이 일어났다. 북쪽에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가 일어나고, 남쪽에서는 먼저 진국이 일어나더니 이어서 삼한이 형성되었다.

1. 한민족의 기원과 선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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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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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터를 잡고 일찍부터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이 지역에서는 약 70만 년 전부터 구석기 문화가 시작되었고, 기원전 6000년경부터는 신석기 문화가 시작되었다.

구석기 시대인들은 뗀석기를 사용하여 사냥과 어로 활동을 하였다. 신석기 시대부터는 간석기와 골각기를 사용하여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생활하다가 차츰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기르게 되었다. 또, 이 때부터는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고 움집을 지어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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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 나라의 구석기, 신석기 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2. 구석기,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은 무엇인가?
  3. 구석기 시대의 생활에 비하여 신석기 시대의 생활이 크게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한민족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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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부터였다. 구석기 문화가 진행되는 동안, 지구에는 추운 빙기와 따뜻한 간빙기가 여러 차례 번갈아 나타났다. 이러한 자연 환경의 변화는 인간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빙기에는 지구 북반구의 일부가 빙하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의 해수면 높이는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 열도, 타이완 등이 모두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빙하기가 끝난 후, 해수면이 상승하고 지각이 변동되어 해안선이 변화됨으로써,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은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로써 오늘날 한국인의 주된 생활 무대가 된 한반도는, 북쪽으로는 대륙과 연결되고, 동쪽과 서쪽으로는 바다와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대한 해협을 건너 일본과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생활 터전으로 삼아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워 왔다.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살기 시작한 우리 민족은 몽고 인종에 속하는 한민족으로, 알타이어계의 언어를 사용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구석기 시대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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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뗀석기와 뼈 연모 등의 간단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 시대를 구석기 시대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구석기 시대는 약 70만 년 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유적은 우리 나라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은 함경 북도 웅기군 굴포리, 평안 남도 상원군 검은모루 동굴,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충청 남도 공주시 석장리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구석기인들은 처음에는 돌을 깨어 이를 연모로 사용하다가, 차츰 쓰임새에 따라 여러 가지 편리한 연모들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사냥을 위하여 주먹도끼, 찍개, 찌르개 등을 만들어 쓰고,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르개, 밀개, 긁개 등을 사용하였다. 또, 돌마치, 새기개 등의 석기를 이용하여 나무 연모나 뼈 연모를 만들기도 하였다.

구석기인들은 짐승과 물고기를 잡아먹었으며, 또한 식물의 열매나 알뿌리도 채집하여 먹고 살았다.

구석기인들은 동굴이나 강가의 막집에서 살았다. 또, 이들은 짐승이 많이 잡히기를 바라는 뜻에서 뼈나 돌에 짐승의 그림을 그려 놓고 빌기도 하였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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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서는 기원전 6000년경부터 간석기와 토기를 사용한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유물로는 돌도끼, 돌창, 돌화살촉 등의 간석기와 낚시 등의 뼈 연모가 있다. 신석기 시대 초기에는 이른 민무늬 토기와 덧무늬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뒤에는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토기인 빗살무늬 토기는 그릇 표면에 직선 또는 곡선을 평행으로 배열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새긴 그릇이다. 그 형태는 아가리가 넓고 밑이 뾰족하여 달걀을 잘라 놓은 모양이었다. 빗살무늬는 단순한 무늬에서 차츰 복잡하고 화려한 무늬로 변하였다.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로는 평안 북도 의주군 미송리,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서울 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부산 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신석기 시대 유적은 한반도 전 지역에 고루 퍼져 있으며, 주로 큰 강 유역이나 해안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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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인들은,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뼈낚시, 그물 등을 가지고 물고기를 잡거나, 창, 화살 등으로 사냥을 하였다. 한편, 나무 열매나 알뿌리를 캐어 먹으며 생활하다가, 뒤에는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기르게 되었다.

농경 생활을 시작한 신석기인들은 돌괭이로 땅을 일구어 조, 피 등을 재배하여, 돌낫, 뼈낫 등으로 추수를 하였으며, 돌갈판에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또, 가락바퀴로 실을 뽑아 옷감을 만들고, 뼈바늘로 옷을 만들어 입기도 하였다.

신석기인들은, 땅을 파고 그 위에 지붕을 씌운 움집에서 살면서 같은 핏줄의 씨족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나아가 몇 개의 씨족들이 모여 부족을 이루었다. 이들 사회에서는 경험이 많은 부족장이 농사 등 생산 활동을 지휘하였다.

신석기인들은 인간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해, 달, 산, 강, 동물, 큰 나무 등에 영혼이 깃들여 있다고 믿었으며, 또 이들은 특정 동물을 자기 부족의 수호신으로 생각하여 숭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예술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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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 나라의 구석기 문화는 약 70만 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신석기 문화는 기원전 6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2. 구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은 주먹도끼 등의 뗀석기이고,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은 간석기와 빗살무늬 토기이다.
  3. 구석기인들은 사냥과 채집 활동으로 식량을 얻었으나, 신석기인들은 점차 농경 등의 생산 활동으로 식량을 마련하였고,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다.

2. 고조선의 성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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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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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무늬 토기를 사용한 사람들은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하여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청동검, 청동 도끼 등의 무기를 만들어 힘을 과시하였으며, 반달 돌칼 등 농경 도구를 사용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였다.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각 지역에서 군장 사회가 출현하고, 이들이 뭉쳐 연맹체를 형성하였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로서, 단군의 건국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을 기리는 이념으로 계승, 발전되어 왔다.

학습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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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 나라의 청동기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은 무엇인가?
  2. 청동기 문화의 보급으로 어떠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는가?
  3. 단군의 건국 이야기는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4. 고조선의 발전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청동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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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 만주에서는 이보다 앞서서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처음으로 금속을 사용하였으며, 그들이 사용한 토기도 보다 다양해졌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청동검과 청동 거울이 있다. 청동검은 비파형 동검에서 세형 동검으로 발전하였다. 비파형 동검은 만주의 요령 지방과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세형 동검은 주로 한반도에서 발견되고 있다.

한편, 청동 거울은 거친무늬 거울에서 잔무늬 거울로 발전하였는데, 그 출토 지역은 청동검의 출토 지역과 거의 같다. 또, 청동을 부어 청동검이나 거울을 만들던 거푸집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는 민무늬 토기이다. 민무늬 토기의 빛깔은 대개 적갈색이며, 모양은 바닥이 좁은 것과 판판한 것의 두 가지가 있는데, 주로 집터나 고인돌에서 간석기와 함께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이들 유물과 함께 돌도끼, 돌화살촉, 돌칼, 반달 돌칼, 맷돌 등의 석기도 사용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무덤으로는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있다. 청동기 시대의 특징적 유적인 이들 무덤은 한반도의 거의 모든 지역과 만주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들 무덤에서는 껴묻거리로 넣은 청동기와 민무늬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의 분포를 보면, 한반도와 만주 요령 지방의 청동기 문화는 같은 계통의 문화이며, 중국의 청동기 문화와는 성격이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의 사회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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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의 사람들은 농경을 주로 하였다. 단단한 나무로 만든 농기구를 이용하여 농경지를 넓히고, 또 깊이 갈고 김을 매어 생산량을 늘려 나갔다. 한편, 반달 돌칼로 추수를 하고, 맷돌로 곡물을 가공하기도 하였다. 이 때 재배된 곡식은 벼, 보리, 콩, 조 등이다.

청동기인들은 주로 강을 끼고 있는 야산이나 구릉 지대에 살았는데, 이는 구릉 주위의 골짜기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 때의 집들은 긴 네모꼴의 움집으로 움은 신석기 시대보다 얕아졌고, 집의 크기는 훨씬 넓어졌으며, 마을의 규모도 커졌다.

청동기 시대에는 경제 생활이 발전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부족을 단위로 하는 정치적 사회가 성립되었다. 부족을 통솔하는 군장은 농업 생산의 증대로 재산을 늘려 갔으며, 청동 무기를 이용하여 이웃 부족을 정복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

또, 군장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일 등 종교적 의식도 주관하여 더욱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를 제정 일치의 사회라고 한다. 군장이 죽으면 그의 권위를 상징하는 거대한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을 만들고, 청동검, 청동 거울 등을 함께 묻었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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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요령 지방과 한반도 서북 지방에서 군장이 다스리는 많은 부족들이 나타났다. 단군은 이러한 부족들을 통합하여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단군 왕검의 고조선 건국(기원전 2333)에 관해서는 삼국유사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건국 사실은 우리 나라의 역사가 매우 오래 되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또, 단군에 의한 고조선의 건국 사실과 홍익 인간의 건국 이념은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자긍심을 일깨워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고조선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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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은 청동기 문화의 발전에 따라 점차 정치적, 문화적 중심 역할을 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갔다. 그리하여 기원전 4세기경에는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잇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때 중국의 연과 국경을 접하면서 잦은 충돌이 있더니 마침내 연의 침략을 받아 한때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 후, 서쪽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위만이 준왕을 몰아 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위만은 철기 문화를 보급하면서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한반도 남부 지방의 진국 여러 나라들과 한나라와의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여 부강해졌다.

고조선이 강성해지면서 한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커 가자, 한은 대군을 보내어 수도인 왕검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은 약 1년 동안 버티면서 잘 싸웠으나, 결국 왕검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고 말았다(기원전 108).

한은 고조선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였으나, 우리 민족의 반격을 받아 물러갔다.

고조선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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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사회는 생산력의 증가로 사유 재산이 늘어나면서 빈부의 차가 생기고, 정치와 군사적 업무를 맡은 지배층과 생산을 담당하는 피지배층으로 나누어졌다.

또, 통치 조직이 확립되어 왕 밑에는 상, 대부, 장군과 같은 여러 관직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도 제정되었다. 법률은 8개조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을 다치게 한 자는 곡물로써 갚으며, 도둑질한 자는 잡아다 종으로 삼는데 용서를 받으려면 많은 돈을 내야 한다.”는 3개 조항만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이 법을 보면, 고조선 사회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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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건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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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인(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비, 바람, 구름을 주관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와 신시를 건설하고, 곡식, 생명, 병, 형벌 등 인간 생활의 360여 가지의 일을 맡아보며 사람들을 다스렸다. 그 때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기를 원하므로 환웅은 곰을 여자로 변하게 하고, 그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 단군 왕검은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하였다.

개천절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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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우리 조상들은 태양 숭배 신앙을 가지고 있어, 지상의 국가를 하늘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땅 위의 임금을 태양의 아들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임금을 하늘로 보았으니, 개천(開天)이란,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는 뜻으로 건국을 의미한다. 즉, 개천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바와 같이,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란 나라를 세웠음을 뜻하는 것이다.

개천절은 처음에 대종교에서 기념하던 것을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서 전 민족적인 국경일로 정하였고, 그 뒤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음력 10월 3일을 양력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학습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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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가 시작되었는데, 대표적인 유물로는 청동검, 청동 거울, 민무늬 토기 등이 있다.
  2. 청동기 시대에는 벼농사를 비롯한 농경 생활이 발전함에 따라 군장 사회가 출현하였고, 마침내 국가가 형성되었다.
  3. 단군의 고조선 건국 이야기에는 홍익 인간의 건국 이념과 자주 독립 사상이 담겨 있다.
  4.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만주와 한반도를 지배하였으며, 통치 조직을 갖춘 국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