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사(상) (6차 교육과정)/Ⅳ. 통일 국가의 성립
통일 국가의 성립
[편집]신라의 삼국 통일로 우리 민족은 비로소 단일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통일 신라는 안으로 삼국의 문화를 융합하고, 밖으로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민족 문화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발해는 신라와 함께 남북국 시대를 열었고,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해동 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8세기 후반 이후, 귀족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혼란이 심해졌고, 이 틈을 이용하여 지방의 호족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후삼국 시대를 열었다.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한 고려 태조는 발해의 유민을 포섭하여 민족을 재통일하고, 민생 안정을 꾀하면서 민족 융합 정책, 북진 정책 등을 통해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다.
1. 삼국의 통일
[편집]학습 개요
[편집]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백제,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였다.
백제는 의자왕의 잦은 신라 공격에 따른 국력 소모와 지도층의 내분으로 쇠약해지면서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었다.
고구려는 수 및 당과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많았고, 연개소문의 독재 정치와 지도층의 권력 다툼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마침내 멸망하였다.
그 후 신라는 당나라의 영토적 야욕을 분쇄하여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는데, 이로써 민족 문화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학습 문제
[편집]-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원인은 무엇인가?
- 신라가 나⋅당 전쟁에서 승리한 요인은 무엇인가?
- 삼국 통일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백제의 멸망
[편집]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고구려가 중국과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백제는 신라를 자주 공격하였다.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탈취하였고,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당항성을 공격하여 신라에서 당으로 가는 교통로를 끊으려 하였다.
이에 어려움을 맞게 된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진덕 여왕은 김춘추를 당에 보내어 친당 정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무렵 의자왕은 성충, 흥수와 같은 충신을 멀리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이에 민심은 멀어져 갔고, 나라의 살림은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이 당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백제를 공격하였다. 신라군은 계백의 결사적인 저항을 물리치고 당군과 함께 사비성을 함락시켰다(660). 당은 사비성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 등 5도독부를 두어 이 지역을 그들의 지배하에 넣으려고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 백제인들은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은 주류성에서, 흑치상지는 임존성에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여기에 200여 성이 호응하여 그 기세가 드높았다. 그러나 백제의 부흥 운동은 지도층의 분열로 인하여 실패하였고, 이를 도우려던 일본 세력도 백강에서 격퇴되었다.
고구려의 멸망
[편집]백제를 멸망시킨 후, 신라와 당은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서둘렀다. 당군은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는 이를 잘 방어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당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컸으며, 연개소문의 독재와 지도층의 내분으로 어려움이 겹쳤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나⋅당 연합군은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
당은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두어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려 하였다. 이에 고구려의 유민들은 곳곳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검모잠은 왕족 안승을 왕으로 받들고 고구려를 부흥시키려 하였다.
나⋅당 전쟁과 삼국 통일
[편집]당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대동강 이남의 지역을 신라에게 준다는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의 부흥군을 지원하면서 당군을 몰아 내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먼저, 신라는 백제의 옛 땅을 수복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을 보덕왕으로 삼았고, 동시에 당군이 주둔하고 있던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웅진 도독부를 없애 버렸다.
이후 당군의 계속적인 침략에 맞서 신라는 끈질긴 항쟁을 벌였다. 신라군은 당군과 매소성, 기벌포 등지에서 싸워 이를 크게 격파하였다. 당은 마침내 안동 도호부를 평양성에서 요동성으로 옮겨 한반도로부터 물러나고 말았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였다(676).
신라의 통일은 그 과정에서 외세의 지원을 얻었다는 점과, 대동강 이남에 한정된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점에 그 한계가 있다. 그러나 신라가 당의 야욕에 대항하여 끈질긴 항쟁을 벌여 이를 물리치고 통일을 완수하였다는 사실은 신라인의 자주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최초의 민족 통일로서 새로운 민족 문화를 건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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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문무왕의 호국 정신
[편집]문무왕은 신라의 제30대 임금으로, 아버지는 태종 무열왕인 김춘추이고, 어머니는 김유신의 동생인 문희이다.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와 통일 전쟁에 앞장 섰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국가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는 660년에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 정벌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 결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며, 신라까지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던 당군마저 매소성 등에서 크게 격파하여 이를 물리쳤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국경선 이남의 영토를 확보하면서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룩하게 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은 전쟁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에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평소에 왕은 지의 법사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지키려고 한다.”고 말하였다.
법사가 “용은 짐승인데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으니, 왕은 “내가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이니, 비록 짐승인 용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개의치 않으리라. 그것은 오히려 나의 소망에 꼭 맞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신하들은 이러한 왕의 소망을 받들어 동해 바다의 큰 바위 가운데에 장사지냈다. 후대에 그 바위를 가리켜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이는 죽어서라도 동해의 해룡이 되어 일본의 침략을 막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보여 준 것으로 국민에게 호국 사상을 일깨워 주었다.
학습 정리
[편집]- 7세기에 동북 아시아에서 남북과 동서의 두 세력 간의 대결이 장기화되면서 백제와 고구려는 국력이 소모되고 지도층의 내분이 겹쳐 멸망하였다.
- 신라는 고구려 유민의 부흥 운동을 지원하면서 강한 단결력으로 당의 야욕에 맞서 나⋅당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 신라의 삼국 통일은 최초의 민족 통일로서 새로운 민족 문화 발달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2. 통일 신라의 발전
[편집]학습 개요
[편집]통일 신라는 전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중앙에는 집사부 등 10여 관청을, 지방에는 9주 5소경을, 군사 조직으로는 9서당과 10정을 두었다. 또,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녹읍을 폐지하고 귀족과 농민들에게 관료전과 정전을 지급하였다.
통일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융합하고, 당의 문화까지 받아들여 찬란한 민족 문화를 이룩하였다. 특히, 불교 예술이 발달하여 불국사, 석굴암, 성덕 대왕 신종 등이 만들어졌다.
한편, 당과의 활발한 해상 무역은 두 나라 간의 문물 교류를 증진시켰으며, 신라인의 해외 활동을 촉진시켰다.
이처럼 통일 신라 시대에는 경제, 문화의 기반이 확대되고 사회가 안정되었으며, 당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민족 문화의 수준이 높아졌다.
학습 문제
[편집]- 삼국 통일 후 신라는 전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제도를 어떻게 개편하였는가?
- 신라인의 해외 진출은 어떠하였는가?
- 통일 신라의 문화는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 통일 신라의 불교는 어떻게 발전하였는가?
전제 왕권의 강화
[편집]신라 사회는 무열왕 때부터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의 왕으로서, 왕권을 보다 강화하였다. 우선 그 직계 자손들이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해 나갔으며, 종래의 불교식 왕명을 버리고 유교식 왕명을 채택하였다.
특히, 신문왕 때에는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유교 정치 이념을 내세워 전제 왕권을 확립하였다. 또, 통일 국가에 맞는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여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였다.
통일 신라의 중앙 행정은 집사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그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집사부를 중심으로 위화부, 창부 등 10여 개의 관청이 있어서 중앙 행정을 분담하였다.
한편, 전제 왕권의 확립에 따라 귀족 대표자들의 회의인 화백 회의는 그 기능이 축소되고, 의장인 상대등의 세력도 약화되었다.
지방은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지방의 중심지에 5소경을 두었다. 5소경은 수도가 국토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중앙의 귀족들이 이주하여 지방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다. 주 아래에는 군, 현이 있었다. 말단 행정 구역으로는 촌과 특수 구역인 향, 부곡이 있었으며, 촌의 농민들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그리고 지방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지방의 세력가를 교대로 수도에 머무르게 하였는데, 이를 상수리 제도라 하였다.
또, 통일 신라는 전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군사 제도를 강화하였다. 중앙군으로는 9서당이 있었는데, 이는 신라인 이외에 고구려, 백제, 말갈인까지 넣어 편성한 부대였다. 지방의 각 주에는 1개의 군단을 배치하였는데, 특히 한주에는 2개의 군단을 배치하여 전국에 10정을 두었다.
사회⋅경제 생활
[편집]통일 신라는 국가의 수입을 늘리고 귀족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토지 제도를 개편하였다.
통일 이전의 귀족들은 녹읍을 받았다. 이는 토지에서 나오는 조세 이외에 노동력까지 지배할 수 있었다. 통일 후, 신문왕 때에는 녹읍을 폐지하고 관리들에게 해마다 조를 나누어 주는 한편,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이 부활되었다. 귀족들은 녹읍에서 조세와 공물을 징수하여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경주의 안압지, 포석정 등은 바로 귀족들의 사치했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백성들에게는 정전을 주어 경작하게 하고, 국가에 조를 바치게 하였다.
민정 문서를 통해서 통일 신라 때의 농민 생활과 촌락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다. 당시의 농민들은 10호 가량의 자연 촌락에 거주하였고, 촌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또, 농민들은 자신들의 땅은 물론 여러 종류의 국가 토지를 경작하였으며, 그 밖에 소와 말을 기르고, 뽕나무, 호두나무, 잣나무 등을 재배하였다.
통일 신라는 정치가 안정되고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수도인 금성은 17만 호나 될 정도로 번성하였다. 시내에는 통일 전부터 있었던 동시와 함께 서시, 남시 등 큰 시장이 설치되어 지방의 특산물이 매매되었다. 그리고 많은 땅이 개간되고 수리 시설이 정비되어 농업이 발달하였으며, 금⋅은 세공품, 나전 칠기, 비단, 삼베 등을 생산하는 수공업과 목축업도 발달하였다.
해상 무역
[편집]신라는 사회가 안정되면서 당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에 따라 공식 사절을 비롯하여 유학생, 승려, 상인 등의 왕래가 빈번해졌으며, 해상 무역도 번성하였다.
신라는 당과 활발한 교역을 벌여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신라는 인삼, 금⋅은 세공품 등을 당에 수출하였고, 당으로부터는 비단, 책, 차 등을 수입하였다.
당으로 가는 해로는 통일 이전부터 이용되었던 당항성에서 산둥 반도로 가는 길과, 전남 영암에서 지금의 상하이 방면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울산항은 당시 국제 무역항으로서 크게 번성하여 아라비아 상인까지도 내왕하였다. 또, 신라인이 자주 당에 왕래함에 따라 산둥 반도와 화이허 하류 일대에는 신라인 마을인 신라방이 생기고, 신라소라는 감독 관청과 신라원이라는 절까지 있었다.
9세기 이후에 해적들의 약탈 행위가 극심해지자, 장보고는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들을 소탕하였고,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당,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였다.
유학
[편집]신문왕 때에는 국학을 세우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논어, 효경 등 유교의 경전을 가르쳤다. 원성왕 때에는 독서 삼품과라는 관리 채용 제도를 두고 학생들의 학문 성적에 따라 상, 중, 하로 나누어 관리를 뽑았으나, 진골 귀족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유학이 발달함에 따라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강수는 외교 문서를 잘 써서 나라에 기여하였고, 설총은 이두를 정리하여 문자의 보급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김대문은 화랑세기, 한산기 등 신라의 역사와 풍토에 관한 책을 남겨 우리 전통 문화의 우수성을 나타내었다.
또, 당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당에 유학생이 파견되었다. 이들 중에는 당의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김운경, 최치원 등이 유명하였다. 최치원은 계원필경을 썼고, 뛰어난 문장으로 당에서도 이름을 떨쳤다. 유학생 중에는 6두품 출신이 많았는데, 이들은 골품제의 모순을 앞장 서서 지적하기도 하였다.
불교
[편집]삼국 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통일 신라에 와서 크게 융성하였다. 이 때 불교는 귀족으로부터 평민층에까지 널리 확산되어 사회의 지배 이념이 되었다.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경전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교종의 5교가 성립되었는데, 화엄종이 대표적인 종파였다.
이 때 활약한 고승으로는 의상과 원효 등이 유명하였다. 의상은 중국에 건너가 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돌아와 신라 화엄종을 일으켰다. 원효는 여러 종파를 융합하여 불교의 종합화에 힘썼다. 또, 염불만 외우면 죽은 뒤에 극락 세계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토종을 보급하여 불교를 평민층에까지 확대시켰다. 그 밖에, 혜초는 인도를 순례한 후 당에 돌아와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신라 말기에는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이 성행하여 9산의 종파가 성립되었다. 교종은 전통적인 권위를 내세워 권력과 결탁하였으며, 주로 진골 귀족 사이에서 믿어졌다. 반면, 선종은 신라 사회의 모순에 비판적이었던 지방의 호족들과 연결되었으며, 평민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다.
과학 기술
[편집]통일 신라의 과학 기술은 삼국 시대에 이룩된 높은 수준의 천문학과 수학 등을 바탕으로 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발달하였다.
국가에서는 기술학을 적극 권장하여 전문적인 기술자에게 박사라는 칭호를 주는 제도가 있었다. 이 때의 의학과 천문학은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일찍이 고분, 도성, 궁궐 축조에 응용되었던 수학적 방법은 보다 정밀해져서, 다보탑이나 석굴암을 만드는 데 활용되었다.
또, 금속 제품의 주조 기술이 발달하여 범종, 사리 장치, 금동 불상 등이 제작되었다.
한편, 불교의 융성과 함께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였다. 불국사 3층 석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 경덕왕 때에 간행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이다. 목판 인쇄술과 함께 제지술도 발달하였다. 신라에서는 주로 삼과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어 썼는데, 전문적으로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도 있었다.
예술
[편집]통일 신라의 예술은 불상, 탑, 범종 등 불교 미술에서 신라의 뛰어난 솜씨가 발휘되었는데, 사실적인 기법에 생동감이 있고 조화의 미가 가미된 것이 특징이었다.
통일 신라의 미술을 대표하는 것은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불국사는 불교 세계의 이상을 표현한 것으로, 돌계단인 백운교, 청운교와 대웅전 앞의 3층 석탑과 다보탑 등이 특히 세련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간소하면서도 아름다운 3층 석탑과 화려하고도 균형 잡힌 다보탑은 신라 탑을 대표한다.
석굴암은 돌을 쌓아서 만든 인공의 석굴 사원으로, 직사각형의 전실과 원형의 후실로 되어 있다. 특히, 후실의 천장은 돔형으로 돌을 쌓아올려 안정감을 주고 있어, 당시 수학과 건축 기술의 발달을 엿보게 해 준다. 여기의 불상들은 뛰어난 조각 솜씨로 유명하다.
이 밖에도 감은사지 3층 석탑, 화엄사의 4사자 3층 석탑,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 등이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공예품으로는 범종과 사리 장치 등이 있다. 범종으로는 상원사 종과 성덕 대왕 신종이 유명하다. 상원사 종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종이며, 성덕 대왕 신종은 크기가 거대할 뿐만 아니라 은은한 종소리와 표면의 비천상 무늬가 유명하다. 사리 장치로는 감은사지 3층 석탑에서 나온 것이 유명한데, 화려하면서도 안정감을 주고 있다.
향가는 통일 후에 더욱 발달하여 귀족으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유행되었다. 향가의 작가로는 승려와 화랑이 많았다. 이들 향가는 국가의 평안을 빌고 부처의 은덕을 찬양하며, 죽은 사람을 추모하여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많다.
삼국유사와 균여전에는 향가 25수가 전하는데, 여기에는 당시 사람들의 높은 정신 세계가 담겨 있다. 신라 말 진성 여왕 때에는 대구화상이 향가를 모아 삼대목을 편찬하였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한편, 글씨에서는 김생, 요극일 등이 명필로, 그림에서는 김충의 등이 이름을 날렸다.
도움글
[편집]장보고의 해상 활동
[편집]장보고는 가문이 미미한 평민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궁복이었다. 그는 잠수를 잘 하여 바닷물 속에 들어가 쉬지 않고 50리를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친구인 정년과 함께 당에 건너가 하급 무관인 무령군 소장을 지냈는데, 이 때 말을 타고 창을 던지는 데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무예가 뛰어났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학대를 받고 있는 신라인 노비를 보고 분개하여, 귀국한 후 흥덕왕을 뵙는 자리에서 “저에게 청해를 지키는 일을 맡기신다면, 해적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끌고 가는 것을 막겠습니다.”라고 요청하자 왕은 이를 흔쾌히 허락하였다.
청해진(완도)은 당나라에서 흑산도와 남해 연안을 거쳐 일본의 북 규슈에 이르는 국제 무역 항로의 중간 기항지였다. 그는 828년에 군사 1만 명을 모집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이 곳을 기지로 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황해의 무역로를 보호하면서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신라-일본을 잇는 국제 무역을 주도하였다.
당시 당나라 동해안 지역에는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특히 초주의 신라방은 신라인 스스로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이들 중에는 중국 연안 뿐만 아니라 당과 일본을 오가며 국제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보고도 당나라 등주 문등현 적산촌에 법화원이라는 절을 짓고, 매년 500섬을 수확할 수 있는 농장을 기증하였다. 이 곳에는 신라인 승려 24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정월 대보름의 법회에는 신라인 250명이 모이기도 하였다. 장보고는 이 곳을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신라인의 친목과 단결, 안녕을 도모하는 정신적 위안처로 만들었다.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라 불리고 있었다. 중국을 순례하고 법화원에서 신세를 진 일본의 승려 엔닌은 본국으로 돌아갈 배편을 구하면서 840년에 장보고에게 “생전에 귀하를 뵈온 적은 없으나, 높으신 이름을 오래 전에 들었기에 우러러보는 마음이 더욱 깊어만 갑니다.……”라는 서신을 전하였다. 이를 통해 그의 명성이 이미 국제적으로 높아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므로 지방의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왕위 다툼이 진행되고 있던 중앙 정치 무대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학습 정리
[편집]- 통일 후 신라는 전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중앙의 정치 제도를 집사부 중심으로 개편하고, 9주 5소경의 지방 행정 조직과 9서당 10정의 군사 제도를 마련하였다.
- 통일 신라는 당과의 교류를 활발히 하여 당에는 신라인의 마을이 여러 곳에 생겼다.
- 통일 신라는 삼국의 문화를 종합하고 당의 문화까지 받아들여 민족 문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 통일 신라 시대에는 불교가 크게 발달하여 대중화되고, 5교 9산의 종파가 성립되었으며, 뛰어난 불교 예술품이 많이 만들어졌다.
3. 발해의 발전
[편집]학습 개요
[편집]발해는 만주 지방에서 대조영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건국되었으며,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고, 고구려 계승 의식이 뚜렷하였다.
발해는 옛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신라와 함께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다. 또, 만주를 지배하여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를 유지하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고구려 문화의 기반 위에 당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발해는 거란의 침입으로 붕괴되었으나, 그 문화의 전통과 유민은 고려에 흡수되었다.
학습 문제
[편집]- 발해의 건국 과정과 민족 구성은 어떠하였는가?
- 전성기 때 발해의 지배 영역은 어떠하였는가?
- 발해의 문화는 어떠한 특색을 지니고 있는가?
- 발해사를 우리 민족사에 포함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발해의 건국
[편집]고구려가 멸망하자, 대동강 이남 지역은 신라가 지배하였으나, 만주 지역은 당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때 고구려의 유민들은 여러 갈래로 분산되었다. 일부 귀족층은 신라와 당으로 끌려가기도 하였으나, 만주 일대에 머물러 있던 유민들은 고구려 부흥 운동과 당에 대한 저항 운동을 끈질기게 전개하였다.
이 때, 고구려의 장군이었던 대조영은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지금의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에서 발해를 세웠다(698).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으며, 그들은 말갈족의 여러 촌락을 통솔하였다. 발해의 건국으로 만주는 계속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발해는 당나라를 견제하면서 성장하였다. 무왕 때에는 흑수부 말갈을 쳐서 송화강과 흑룡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혔고, 해군을 이끌고 당의 산둥 지방까지 공격하여 서쪽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문왕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발달된 문물 제도를 받아들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영역의 확장에 따라 수도를 동모산에서 상경 용천부로 옮겼다.
발해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9세기 전반이었다. 이 때 발해는 유학생을 보내어 당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었고, 또 요하의 중류 유역까지 진출하여 요동 지방을 확보하였다.
이리하여 발해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흑룡강,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요동, 남쪽으로는 영흥 지방에까지 이르렀다. 이로써 발해는 만주의 대부분과 연해주 지역을 차지하여, 선왕 때에는 해동 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전성기를 이루었다.
정치 제도의 정비
[편집]발해는 독자적인 연호를 쓸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면서 정치 제도를 정비하였다. 중앙관제는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의 3성 아래 6부가 있었다.
발해의 3성은 당의 3성 6부제를 모방하였으나, 그 운영 방식은 독특하였다. 즉, 3성은 정당성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정당성 아래에 6부를 두어 국사를 나누어 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일은 귀족들이 정당성에 모여 회의를 열어 결정하였다.
지방 행정 구역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특히, 5경은 상경을 중심으로 하여 5도의 교통망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말단에 있는 촌락은 토착 세력가에 의해서 다스려졌는데, 이는 고구려 계통의 지배층이 말갈의 전통적인 사회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두 민족 간의 조화를 꾀한 것이었다.
대외 관계
[편집]발해는 처음에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정신이 뚜렷하여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도 고구려 왕이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발해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과 신라에 대해서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발해는 북쪽으로는 돌궐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일본과 친선 관계를 맺었다.
당은 신라와 말갈족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하였기 때문에, 발해의 무왕은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후, 문왕 때에는 당과 평화 교섭을 통해 당의 제도와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 국력을 신장시켰고, 일본과도 교류하였다.
그리고 발해의 대외 교통로 중에 당, 거란, 일본으로 가는 길과 함께 신라로 가는 길인 신라도가 있었고, 신라 국경에서 발해의 동경 용원부까지 역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두 나라 사이에도 교류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만주에서 그 세력을 떨쳤던 발해는, 9세기 후반부터 국력이 약화되어 거란족에게 멸망되었다(926). 발해의 멸망으로 고구려 계통의 지배층은 대거 고려에 흡수되었으나, 만주 지역이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에서 떨어져 나가는 아쉬움을 남겼다.
발해의 문화
[편집]발해는 지배층이 주로 고구려인이었으므로, 당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발해는 유학이 발달하였는데, 주자감이란 대학이 있어서 유학자를 배출하였고, 발해의 유학생들 중에는 당나라에 가서 과거에 합격한 사람도 많았다.
또, 불교도 자못 융성하여 발해의 승려들이 당에 유학하기도 하였고, 상경성에서는 불상, 석등, 연꽃무늬 기와 등 뛰어난 불교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의 대부분은 고구려의 양식을 계승하여 웅장하고 건실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건축 문화도 발달하여, 상경은 당의 수도인 장안성을 본따 외성을 두르고, 그 안에 내성을 쌓았다. 그리고 내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까지 직선으로 주작 대로를 내고,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왕궁을 지었다. 이 안에서 온돌 장치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것이었다.
한편, 발해의 옛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고분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 문왕의 딸인 정혜 공주와 정효 공주의 묘가 유명한데, 앞의 것은 남쪽에 입구를 가진 굴식 돌방무덤이며, 뒤의 것은 벽돌무덤이다. 정혜 공주 묘 안의 천장 양식에서는 소박한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찾을 수 있는 데 반해, 정효 공주 묘의 벽화는 당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세련된 문장으로 쓰여진 묘지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발해의 한문 수준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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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발해의 건국
[편집]668년에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당은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하여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유민 3만여 호를 당나라 영토 안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이 때 대조영 일가도 요서 지방 영주 땅으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방의 이민족을 견제하기 위해 설치한 전략 도시였다. 이 곳에는 고구려 유민 외에 말갈인, 거란인 등도 본거지에서 강제로 옮겨져 살고 있었다.
696년, 당의 감시와 억압에 시달리던 거란족의 이진충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조영은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영주를 빠져 나와 요하를 건너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은 거란족 출신의 이해고에게 군대를 주어 이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대조영이 이끄는 군대는 천문령에서 당군과 일대 결전을 벌여 당군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군을 격퇴시킨 대조영은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진’이라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산자 산성이 그 유적지이다.
학습 정리
[편집]- 발해는 고구려 유민의 부흥 운동에 의해 건국되었는데,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층은 대부분이 말갈족이었다.
- 발해는 만주의 대부분과 연해주 및 한반도의 북부를 지배하였다.
- 발해 문화는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당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발전하였고, 웅장하고 건실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 발해는 고구려 부흥 운동에 의해 건국되었고,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다.
4. 고려의 재통일
[편집]학습 개요
[편집]통일 신라는 8세기 후반에 진골 귀족들의 반란과 왕위 다툼, 6두품 세력의 정치적 불만 등이 커지면서 골품 제도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나라의 행정 체계가 흐트러지고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각처에서 호족 세력과 해상 세력들이 독립된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신라는 분열되고 말았다.
또, 신라 말에는 종교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 새로운 불교의 종파인 선종이 널리 보급되고, 유교, 도교, 풍수 지리설까지 성행하였다. 이러한 사상계의 변화는 중앙의 6두품 세력과 지방의 호족 세력에 의해서 주도되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한편,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민생의 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민족 융합 정책, 숭불 정책,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왕권의 기반을 굳건히 다져 나갔다.
학습 문제
[편집]- 신라 말기에 어떤 세력이 사회 변화를 앞장 서서 이끌었는가?
- 신라 말기의 사상계에 나타난 새로운 동향은 어떠하였는가?
-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 고려 태조는 민족의 재통일을 위하여 어떠한 정책을 추진하였는가?
신라 사회의 동요
[편집]통일 후 번영을 계속하던 신라는 8세기 후반부터 귀족들의 반란과 왕위 다툼이 거듭 일어나 왕권은 흔들리게 되었고, 귀족 세력 내부의 분열과 갈등으로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혼란은 혜공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진골 귀족이 가담한 싸움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선덕왕 때부터 무열왕계가 끊어지고, 방계 귀족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때부터 신라에서는 왕위 다툼이 심해져서 150여 년 동안에 20여 명의 왕이 바뀌는 큰 혼란을 겪으면서 왕권은 크게 약화되어 갔다. 헌덕왕 때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이후 귀족들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격심한 왕위 다툼은 신라의 전통적 신분 질서인 골품제를 동요시켜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진골 위주의 사회 체제에 특히 반발을 보인 계층은 6두품 세력이었다. 6두품은 관직 승진에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국학에 들어가 배우기도 하고, 당에 유학을 갔다 오거나 승려가 되어 새로운 활로를 찾으면서 골품제의 모순을 앞장 서서 비판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새로운 정치 감각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추구하였다.
지방 세력의 대두
[편집]신라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각 지방에서는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진골 귀족 중심의 사회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지방 세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신라 말의 지방 세력에는 촌주 등과 같은 토착적인 세력이 많았고, 이 밖에 중앙에서 지방에 내려간 귀족 출신도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성주 또는 장군이라 불리는 호족이 가장 큰 세력이었다.
이들은 많은 사병과 큰 농장을 가지고 농민을 지배하면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또, 이들 호족은 새로운 불교 종파인 선종과 결탁하면서 자신의 세력 기반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웃의 다른 호족 세력을 통합하여 세력을 넓혀 나갔다.
또하나의 중요한 지방 세력으로는 해상 세력을 들 수 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해외 무역으로 세력을 길러 왕위 다툼에까지 관여하였다.
한편, 신라 말의 사회 혼란은 9세기 후반 진성 여왕 때에 이르러 더욱 심하였다. 중앙 귀족들은 부패하고 사치와 향락에 젖어 있었으며, 이에 따라 재정이 궁핍해지고 지방에 대한 명령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때에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해 가뜩이나 궁핍해진 농민들에게 세금을 심하게 독촉하자, 각처에서 농민들이 봉기하거나 도적 떼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상주 지방의 원종과 애노를 비롯하여 북원의 양길, 완산의 견훤 등이 잇따라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사상계의 변화
[편집]신라 말 사상계의 큰 변화는 새로운 불교 종파인 선종의 등장이었다. 이 때 교종은 교리와 전통적인 권위를 내세운 데 반하여, 선종은 교리보다도 정신 수양을 통한 해탈을 강조하였다. 선종은 호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크게 발전하여 선종 9산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도선에 의하여 풍수 지리설이 널리 보급되었고, 유학자들도 선종과 풍수 지리설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신라 말에는 선종, 유교, 풍수 지리설이 서로 결합되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상계의 변화는 중앙의 6두품 세력과 지방의 호족 세력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후삼국의 성립
[편집]신라 말에 이르러 골품제의 모순으로 귀족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고, 이러한 분열은 결국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지방 호족 세력의 대두와 농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지방의 호족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서로 연합하면서 그 세력을 키워 나갔다. 이들 가운데 세력을 모아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한 사람은 견훤과 궁예였다.
견훤은 본래 상주 지방 농민의 아들로서, 신라군에 들어가 서남해 방면에서 활약하다가,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자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를 점령하고, 이어서 완산주에 도읍하여 후백제를 세웠다(900). 그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남중국의 오월, 일본과 외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리고 경주에까지 쳐들어가는 등 신라에 압박을 가하였다.
한편, 신라의 왕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 궁예는 한때 양길의 부하였으나, 힘을 길러 그를 넘어뜨린 다음, 송악을 근거로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후에 그는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수도를 철원으로 옮겨 나라의 기틀을 갖추어 갔다.
태봉은 강원, 경기, 황해도 일대까지 영역을 넓혀 그 세력을 떨쳤다. 궁예도 중국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를 침략하였고, 전라도의 나주 지방을 점령하여 후백제를 견제하였다.
고려의 건국과 민족의 재통일
[편집]송악의 호족인 왕건은 해상 세력을 배경으로 성장하였으며, 일찍부터 궁예 밑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수군을 이끌고 나주 지역을 공략하여 후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전공으로 궁예의 신임을 얻어 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 때,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포악한 정치를 일삼다가 민심을 잃고 있었다. 이에 왕건은 궁예를 몰아 내고 새 왕조를 일으켰다(918). 왕건은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하고,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으며, 고구려의 후계자로 자처하였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후백제를 공격하는 한편, 신라에 대해서는 화친 정책을 썼다. 처음에는 전세가 고려에 불리하였으나, 점차 세력을 만회하면서 후백제군을 격파하여 승리를 굳혔다.
고려의 왕건은 견훤이나 궁예와는 달리 확고한 토착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군대의 규율이 엄격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므로 곳곳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다른 호족들을 포섭하여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이 무렵, 신라는 세력이 더욱 약해져서 겨우 경주 일대를 지배할 따름이었다. 더구나, 견훤의 경주 침입으로 쇠약해진 신라는 더 이상 국가를 보전할 수 없어서 마침내 나라를 고려에 넘기고 말았다(935).
이 무렵,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크게 내분이 일어났다. 견훤의 큰 아들인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고려는 이 틈을 타서 후백제를 쳐 무너뜨렸다(936). 이로써 반세기에 걸친 분열이 수습되고, 민족의 재통일이 이룩되었다.
태조의 정책
[편집]태조는 새 왕조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후삼국 이래로 무질서해진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조세를 비롯한 여러 가지 농민의 부담을 덜어 주고자 노력하였다.
둘째,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이념하에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하였다. 태조는 평양을 중시하여 서경이라 하고, 이 곳을 북방 개척의 기지로 삼았다. 그리하여 태조 말년에는 북으로 청천강과 영흥 지방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셋째, 민족 융합 정책을 폈다. 태조가 비록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였지만, 각 지방에는 여전히 호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에 태조는 여러 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왕씨 성을 내리기도 하여 이들을 회유하였다. 또, 태조는 발해 유민을 포섭하여 민족 화합에 힘썼다.
넷째, 불교를 숭상하였다. 신라 이래로 백성들은 불교를 널리 믿어 왔는데, 태조는 특히 부처의 도움으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고 하여 정책적으로 불교를 널리 장려하였다.
왕권의 강화
[편집]태조의 뒤를 이어 혜종이 즉위하자, 여러 왕자와 외척들 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싸움이 벌어졌다. 이에 정종은 왕권에 위협적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서경 천도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종이 갑자기 병으로 죽음으로써 서경 천도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고려 초 왕권 강화에 획기적인 기반을 닦은 것은 광종이었다. 광종은 먼저 노비 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이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던 많은 노비를 해방시킴으로써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또, 과거 제도를 실시하여 유교의 학식과 능력에 따라 인재를 채용하고 이들을 국왕에 충성하는 관료로 삼았다. 그리고 광종은, 이러한 왕권 강화책에 대하여 공신, 호족들의 불만이 커지자, 이들을 단호하게 숙청하였다. 그리하여 호족들의 세력이 꺾이고 왕권이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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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호족 세력의 등장
[편집]신라 말기의 사회 모순에 항거하여, 지방에서 일어난 세력 중에서 주류를 이룬 것은 지방 호족들이었다. 이들은 각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변동을 주도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호족들은 낙향한 중앙 귀족, 지방관, 해상 세력, 군진 세력, 촌주, 초적 등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촌락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던 촌주는 일반 농민보다 많은 토지와 소, 말을 소유하여 경제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중앙 정부의 착취에 시달려 유랑하는 농민들을 끌어들여 농장을 경영하고 이들을 사병으로 삼기도 하였다.
신라 말에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각지에서 초적이 봉기하게 되자, 이들은 촌락민을 동원하여 촌락 주위에 성을 쌓고 무장 자위 조직을 갖추었다. 이들은 성주나 장군으로 자칭하고 농민이나 초적은 물론 6두품의 지식인과 선종의 승려를 끌어들이면서 통치력도 길러 나갔다. 그 중에서 세력이 강한 자는 주위의 촌락들을 복속시키면서 더욱 세력을 확대하여 대호족으로 성장하였다.
학습 정리
[편집]- 신라 말기에 사회적 변화를 앞장 서서 이끌었던 세력은 지방의 호족과 중앙의 6두품 세력이었다.
- 신라 말기에는 선종이 호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유행하였고, 유교, 풍수 지리 사상과 결합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 태조 왕건은 애민 정책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 세력을 널리 포섭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 태조 왕건은 민족 융합 정책과 북진 정책을 추진하고, 발해의 유민까지 포섭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