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의 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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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7월 23일 밤, 경성 방송국의 제2방송 야간 프로그램에는 경성방송 관현단의 관현악 연주가 있었다. 모차르트 작(作) 교향곡 제 41번 C장조(일명 〈주피터 교향곡〉)──.

이것은 13만 여의 방송 청취자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또는 당연한 일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방송사업의 역사가 있은 지 10여년. 그리고 방송 관현단이 생긴 지도 4, 5년이나 된 오늘에 교향곡의 전곡 연주란 이것이 처음일 뿐만 아니라, 극히 소수의 멤버로 이 역사적 연주를 결행한 이면에는 제3자로서 헤아리지 못할 온갖 고심과 노력과 감격이 숨어 있었음을 우리는 눈물겹게도 잘 기억하고 있다.

한국에서 교향악 단체를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음악인의 머리에서 쉴새없이 왕래했었던 것이요, 또 수삼 년 전에는 이의 실천운동의 제일보를 내디딘 적도 있었지마는, 인재의 결핍과 경비난으로 인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로 우리는 금년에 들어서서 하얼빈 교향악단과 동경 신교향악단의 2대 단체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것은 확실히 우리에게 있어서 다행한 일인 동시에 부끄러운 일이었다. 70만 시민이 살고 있는 문화적 대도시 서울에 교향악단 하나쯤은 우리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절대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을 소유하기에 필요한 아무런 호조건도 가지지 못했음을 생각할 때에, 새삼스럽게 장탄식(長歎息)이 나오는 것이다.

이때에 있어서 경성방송 관현악단은 빈약하나마, 그대로 우리가 가진 유일의 관현악단인만치, 우리는 이것을 토대로 하여 가지고 앞날의 대교향악단을 만들기 위하여 기초적 공작을 해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7월 23일 밤, 우리는 마이크로폰을 통해서 교향악 연주의 화개(火蓋)를 뗀 것이다.

백도에 가까운 염열(炎熱). 더구나 밀폐된 방음장치 실내에서의 30분간의 연주란 생각만 해도 고한(膏汗)이 흐르지만, 그러나 우리의 고행은 염열에 있음도 아니었고 공기의 유통이 없는 외계와의 차단에도 있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충실하고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해보겠다는 것이 20여 단원의 일맥상통된 기백(氣魄)이었다. 관현악단의 연주란 언제나 그리해야 될 것이지마는, 이날 밤 우리는 다 각각 자아를 죽이고 혼연일체가 되어서 어떤 일개의 창조물을 완성하기에 심혈을 다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기하던 이상의 호결과를 지을 수 있었다.

축음기의 원반을 통해서, 또는 일본으로부터의 중계방송에 의해서 훌륭한 연주에 귀가 젖은 청취자에게 이날 밤의 〈주피터〉의 연주는 상찬(賞讚)할 만한 아무것도 없었으리란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마는, 그러나 각원(各員)의 멸사협조(滅私協調)에 의한 이날 밤의 연주야말로 빈약한 우리로서는 실력 이상의 열연이라고 자긍하는 동시에 각원의 마음 속에 일어난 이날 밤의 감격은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도 그다지 흔하지는 않은 것이었음을 생각할 때에 연주자로서의 유열(愉悅)이나 지휘자로서의 감명이 또한 옅지 않다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은 이것을 자화자찬이라고 웃어버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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