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탑/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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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宋春植 夫人

「백진주 선생이 오셨습니다.」

그 한마디가 하인의 입에서 떨어지자 창백한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를 띠우면서 과연 백진주 선생은 들어왔다.

『정확(正確)은 왕자(王者)의 예의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몇천리 몇만리 밖에서 달려왔기 때문에, 一,二초 늦어진 것을 용서하시요.』

그러면서 백진주 선생은 천천히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백선생!』

하고 송준호는 반가히 손을 잡으며

『원로에 수고로이 오셨습니다. 선생을 맞이하고저 나의 절친한 친구 몇사람을 청했으니 소개하겠습니다. 이이는 서울에서도 가장 유서가 깊은 양반인 홍일태군, 이이는 전도가 유망한 총독부 관리인 조봉구군. 이이는 조고계(操觚界)에서도 가장 이름이 높은 임성묵군, 그리고 이분은 청년 의학박사 모인규씹니다.』

맨 마즈막의 이 모인규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때까지 은근하고도 한편 무척 냉정한 태도를 가졌던 백진주 선생의 창백한 용모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처녀의 그것처럼 빨갛게 홍조를 띠웠다.

『모인규씨— 분명히 모인규씨라고 부르셨지요?』

그처럼 침착하던 백진주 선생의 목소리가 약간 떨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모인규올시다.』

하고 모인규는 백진주 선생이 청하는대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받았다. 그순간 아아, 이것이 대체 무슨 이유일고? 백진주 선생은 어이하여 이처럼 자기의 손을 부서저라하고 다정히 그리고 힘있게 쥐여 주는고?

『백선생, 이 모형의 혈관에는 실로 용감하고 실로 고결한 피가 흐르고 있답니다.』

하고 송준호가 말하였을 때 모인규는

『송형, 무슨 말씀을.......』

하고 얼굴을 붉히는것을

『백선생, 지금도 모형의 실로 용감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입니다. 오늘 처음으로 뵈는 분이기는 하지마는 저의 친구로서 백선생에게 소개합니다.』

그 말을 들은 백진주 선생은 그의 일종 독특한 시선으로 모인규 청년을 물끄럼이 바라보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용감하고도 고결한 피— 그것은 실로 훌륭한 피입니다!』

백진주 선생의 이러한 태도에 일동은 놀랐다. 아니 특히 더 놀랜란것은 모인규박사였다.

『송군의 말처럼 백선생은 실로 신비로운 분입니다. 모형은 어떻게 생각하시우?』

하고 홍일태가 물었다.

『네, 저는 이순간 이런것을 생각했습니다. 백진주 선생은 허위를 모르는 눈동자와 다정한 음성을 가지셨다고요.』

그 말을 들은 백진주 선생의 얼굴에는 적지않은 만족한 표정이 떠돌았다.

그때 하인이 들어와서 식사의 준비가 되였다는 말을 전하였다. 일동은 하인의 안내로 화려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독자제군도 아다싶이 진주섬 아방궁과 같은 동굴에서 글짜 그대로의 산해의 진미를 매일처럼 맛보는 백진주 선생에게는 제아모리 서울장안의 일등가는 요리를 베풀었다손 치더라도 입에 맞을 리가 만무하다.

그래서 백진주 선생은 몇술 드는척 하고는 곧 술을 놓으면서

『아, 저번 상해에서 듣자니 송군은 이번 어떤 고귀한 부인과 약혼을 하신다더니 어떻게 되였습니까?』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백선생, 그 이야기는 아직도 이야기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집의 아버지가 나보다도 더 이번 혼인을 기뻐하시니까, 아마 얼마후에는 장옥영(張玉英) 양을 약혼자로서 백선생에게 소개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의 부친 되시는 분은 어떤 분인가요?』

『장현도씨라고, 서울에서도 은행가로서는 손을 꼽는 유명한 분이지요.』

하고 임성묵이가 대신 대답하였다.

『장현도씨라고요?』

하고 백진주 선생은 다시 한번 송준호의 얼굴을 처다보았다.

『그렇습니다.』

하고 사회부장 임성묵은 다시 말을 가로채서

『손꼽는 은행가로서도 유명하지만 황국신민으로서도 으뜸되는 선봉자지요.』

『황국신민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조선사람을 일본사람으로 만들고저하는 노력이 아주 진실한 분이지요.』

『임군, 그건 너무하네. 장내에는 나의 장인이 될 사람을 가지고.......』

송준호는 약간 얼굴을 붉힌다.

『너무하긴 뭐가 너무하다는 말인가? 중추원 참의인 자네 부친 송춘식씨두 그만했으면 무던하고...... 하하하...... 짝패야 짝패! 그만했으면 서루 잘 만났지, 잘 만났어! 자네와 옥영양은 생각건대 천분인가 보이. 하하하.......』

임성묵은 호탕하게 웃어댄다.

『너무 사람을 그렇게 단련시키지 말게.』

하고 송준호는 백진주 선생을 향하여

『그런데 백선생은 장현도씨를 아십니까?』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두 아마 멀지 않어 알게 될것입니다. 실은 상해교역은행에 맡겨둔 예금을 이번에 거기서― 장현도씨의 은행에서 찾아 쓰게 될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백진주 선생은 힐끗 곁눈으로 모인규을 바라보았다. 과연 모인규는

『아, 선생은 상해교역은행을 아십니까?』

하고 놀래여 물었다.

『네, 잘 알고 있지요.』

『오오, 백선생!』

하고 모인규는 감동하며

『실은 이전에 상해교역은행이 저이 상점에 대하여 잊을수 없는 혜택을 베풀어 주었답니다. 그래 그후 그 혜택의 만분지일이라도 갚을 셈으로 수차 조사를하여 보았으나 그런 일은 통 없다고 합니다.』

『글세 올시다. 무엇이던지 제가 할수있는 일이라면 도와 드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송준호는 말머리를 돌려서

『그런데 백선생, 무엇보다도 백선생이 서울 계시는 동안 거처하실 적당한 주택이 필요하실 텐데...... 혹시 선생께서만 용서하신다면 그리 호화롭지는 못합니다만 저이 집에서 유하시도록 하시는것이 어떠실까요?』

『고맙습니다. 그러나 내가 서울에 머물러있을 동안 있을 주택은 이미 구해 놨습니다.』

『엣?...... 벌써 구하셨다고요?』

일동은 놀래지 않을수 없었다.

『네, 내 시종을 하는 하인 한사람이 있는데요. 그이에게 주택과 가구를 준비하도록 나보다 먼저 이 서울에 보내 뒀었지요. 이것이 이번 새로 정한 나의 집 번집니다.』

하고 백진주 선생은 수첩을 끄내 주소를 적은 페이지를 내여 보였다.

『혜화정 三十번지— 그러면 백선생은 아직 댁에 못 가보셨습니까?』

『네, 저는 송군과의 약속의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오늘 정거장에 내리자 곧 이리로 달려왔습니다.』

이말을 듣고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처다보지 않을수 없었다.

이리하여 이윽고 식사는 끝났다. 일동은 백진주 선생을 혼자 송준호의 집에 남겨둔채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백진주 선생은 송준호 청년을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백선생님, 제 어머니를 선생께 소개하기 전에 제 서재를 한번 구경하여 주시요. 별로 볼만한 책은 없습니다만.......』

『오오, 훌륭한 서잽니다. 송군은 자연과학 보다 좀더 깊이 예술을 사랑하시는 구먼요.』

그러면서 책상앞을 뚜벅뚜벅 거닐다가 백진주 선생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벽위에 걸린 한사람의 어여쁜 여인의 사진틀 앞에서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새까만 긴 눈섭밑에 타오르는 한줄기 정열을 숨긴듯한 二十五六세의 젊은 부인의 초상이었다.

분홍 저고리, 깜정 치마...... 멀리 꿈구는 사람처럼 푸른 바다를 바라다보고 섰는 한사람의 여인의 초상화다! 그 초상화를 처다보는 순간 백진주 선생의 창백한 두 볼에 무지개처럼 뻗치는 한줄기 홍조! 전신을 부르르 떨며 번개처럼 지나가는 전률이여!

한참동안 침묵이 계속되였다.

『송군은 어쩌면 이렇게도 어여쁜 여인을 애인으로 가졌습니까! 행복하십니다!』

하고 백진주 선생은 조용히 물었다.

『백선생!』

하고 그때 송준호는 엄숙한 소리로

『잘못 생각하시면 안되십니다. 이것은 나의 어머닙니다. 지금으로부터 七, 八년전에 그린 것인데, 아주 잘된 그림이예요. 어머니는 이 그림을 무척 좋아하시지만 어쩐지 아버지는 무척 싫어하신답니다. 아버지는 중추원에서도 아주 이론가로서 유명하지만 미술같은 것에는 소양이 없으시는 분이지요. 그러나 어머니는 그와 반대로 무척 예술을 사랑한답니다. 이런 부질없는 가정 이야기까지 여쭈어서 민망스럽습니다만 아버지가 싫어하신다고해서 버릴수도 없고...... 그래서 어머니는 이 초상화를 내 서재에다 기부를 하셨지요. 그런데 이 초상화에는 아주 무엇인가 불길한 힘이 있는지도 모를것이 어머니께서는 나를 보려 서재에 들어오시면 반다시 이 초상화를 처다보시고, 또 이 초상화를 처다보시면 반다시 눈물을 흘린답니다.』

백진주 선생은 깊은 신음과 함께 창밖의 정원을 내다보았다. 무엇인지는 알수없으나 오주주하니 전신에 달려드는 오한과도 같은 전률이다.

『그러면 아버지가 지금 사랑방에 계시니 아버지를 소개하여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송준호는 백진주 선생을 다시 응접실로 모셔다두고 자기는 넓은 복도를 걸어 아버지 송춘식을 모시러 갔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四十五六세쯤 되어 보이는 송춘식이가 아들의 안내를 받으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아버지, 백진주 선생입니다. 상해에서 제 생명을 구해주신 백선생입니다.』

『아아, 먼길에 수고로이 오셨습니다.』

송춘식은 만면에 웃음을 띠우면서 백진주 선생 앞으로 다가왔다.

『준호가 여러 가지로 선생의 덕택을 힘입었다 하오니 은혜는 백골난망이 올시다.』

『천만의 말씀이 올시다. 사소한 일을 가지고 너무 그처럼 과장하실 필요는 없읍니다. 아니, 그 보다도 이처럼 훌륭하신 가정에 들어와 볼수있는 영광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내 안해는 지금 화장을 하노라고 조금 늦을것 같사오니 용서하십시요. 저이들은 백선생의 혜택을 정말 하늘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송준호가 뒤를 돌아다보며

『아, 어머니가 오셨습니다.』

하고 조용히 들어서는 어머니를 맞이하였다.

그 소리에 백진주 선생도 뒤를 돌아다 보았다.

중추원 참의 송춘식 부인― 아니 그 옛날 억낭틀 해변가에 어여쁘게 피었던 한떨기 해당화인 계옥분이가 바루 백진주 선생의 눈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