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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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왜 이리 창작이 어려워지는지 모르겠다. 도시 붓을 들기가 끔찍하다. 창작욕은 여전히 쇠할 줄을 모르는데도 쓰기는 을씨년같다. 이달 그믐까지의 60매짜리를 하나 써야 할 것이 있어 구상은 다 짜 놓았는데 붓은 들리지 않는다. 사무에 펜놀음이 지친 탓도 탓이겠지만 원체 창작하면 겁이 앞서게 된다. 10여 년 전에는 잡은참 앉아서 4, 50매는 문제없이 쓰던 것이 근래엔 이렇게도 어려워진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이 창작이란 무엇인지가 좀더 알아진 탓도 같으나 쓸 수가 없으니 탈이다.
오늘도 사(社)에서 나올 때에는 집으로 돌아만 가면 고요히 정신을 가다듬고 앉아 좀 써 보리라는 생각이었으나 단 한 줄을 써 놓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시작에 여간 고심을 안 한다. 썼다는 찢고 썼다는 찢고 하기를 아마 7, 8차는 거듭했으리라. 그러니 역하기가 짝이 없는데 몸은 피로감을 느낀다.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잠깐 누웠다 다시 붓을 들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열한시가 넘도록 그대로 붓방아만 찧다 말았다. 그리고는 부질없는 생각만 혼자 해 보았다. 이렇게도 어려운 창작인데 비평가의 붓끝은 사정이 그렇게도 없으니 하고.

5월 14일


오늘 밤은 기어이, 30매는 쓰리란 생각으로 마음을 사려먹고 붓을 들고 앉았으나 뜻도 않았던 손님이 또 온다. 이런 때에 찾아오는 손님처럼 미운것은 없다. 친한 동무라도 그것은 밉다.
그러나 오래간만에 시골서 찾아온 동무라 반갑게 아니 대할 수가 없어 옛날 이야기를 한참 집어내니 또 열시다.
그러나 아직 자기까지에는 두 시가 남았다. 다시 붓을 들고 앉았다.

어이없어 웃었다. 수염이 센 것이다.
내천자(川)로 그어진 이마에 주름살이 인제 뚜렷이 나타나게 되었거니 하는 정도에서밖에 더 자기의 늙음이 내다보여지지 않던 현태는 오늘 아침의 면도에서 뜻도 않았던 수염이 턱밑에 세임을 찾았다. 그리고는 벌써! 하는 놀라운 생각에 유심히 아내의 경대 속에서 턱을 비추어 보았더니 수염은 턱밑의 그 한 곳에만 센 것이 아니요, 여기저기 심심찮게 희뜩희뜩 찾긴다. 아침마다의 면도날에 자라지를 못하는 수염이게 그렇지, 그대로 버려두는 수염이 있더라면 서릿발 같은 수염이 인젠 제법 치렁치렁 옷깃에까지 허옇게 늘어졌을 게다.
‘허―수염이 센다! 마흔다섯 수염이 세?’
어이없이 다시 한 번 웃었다.

겨우 이 두 장에 생각은 또 막힌다.

5월 15일


사에 나가서 뒤를 이어 좀 써 볼까 했으나 복잡해 쓸 수가 없다. 나는 고요한 자리에 혼자 앉았지 않으면 생각이 꽉 갇혀들고 나오지 않는 버릇이 있다. 독서 역시 그렇다. 다년간의 혼자 박혀서 쓰고 읽고 한 버릇의 영향인가 보다.
밤에 두 장을 썼다. 스스로 생각하고 웃었다. 사흘 동안에 2백자 넉장, 원 이렇게도 어려울 수가 있나? 자신의 역량에 의심을 마지 않는다.

5월 16일


다섯 장을 썼다.
그러나 부분부분에 문장이 몹시 마음에 맞지 않는다. 찢어 버리고 다시 썼다. 하나 문구가 좀 달라졌을 뿐 역시 그 턱이 그 턱이다. 이러다는 필시 기한까지 완전한 한 편이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구고(舊稿) 한 편을 정리해 볼까 꺼내서 읽어 보다, 묘사에 어리석은 데가 꽤 많다. 다시 층뜯이를 하여 개작을 하지 않으면 못 쓰겠다. 그대로 별 함 속에 집어넣고 다시 쓰던 뒤를 이어 쓰기로 붓을 들다. 석 장을 썼다.

5월 17일


열다섯 장을 썼다. 다른 날보다 그래도 꽤 많이 내려간 푼수다. 오늘은 쓰면 얼마든지 쓸 것 같다.
그러나 이미 피로해진 심신은 앞으로 더 내킬 수가 없다. 한참 머릿 속에 어물거리는 상(相)을 끄집어 내지 못하고 아깝게도 자리에 눕고 말다.
그러나 누워서 가만히 생각하니 당장 그것을 꺼내 놓지 않으면 그 상은 그대로 머릿속에서 썩어지고 다시는 떠오를 것 같지 않아 도로 일어나 불을 켜고 잊어버리지나 않을 정도로 대충대충 아무렇게나 적어서 내일의 참고를 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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