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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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집]

안동(安東)이다. 태백(太白)의 영산(靈山)이 고개를 흔들고 꼬리를 쳐 굼실 굼실 기어 내리다가 머리를 쳐들은 영남산(嶺南山)이 푸른 하늘 바깥에 떨어진 듯하고, 동으로는 일월산(日月山)이 이리 기고 저리 뒤쳐 무협산(巫峽山)에 공중을 바라보는 곳에 허공중천이 끊긴 듯한데, 남에는 동대(東臺)의 줄기 갈라산(葛蘿山)이 펴다 남은 병풍을 드리운 듯하다.

유유히 흐르는 물이 동에서 남으로 남에서 동으로 구부렸다 펼쳤다 영남과 무협을 반 가름하여 흐르니 낙동강(洛東江) 웃물이요, 주왕산(周王山) 검은 바위를 귀찮다는 듯이 뒤흔들며 갈라 앞을 스쳐 낙동강과 합수(合水)치니 남강(南江)이다.

옛말을 할 듯한 입 없는 영호루(暎湖樓)는 기름을 흘리는 듯한 정적 고요한 공기를 꿰뚫어 구름 바깥에 솟아 있어 낙강(洛江)이 돌고 남강이 뻗치는 곳에 푸른 비단 같은 물줄기를 허리에 감았으니, 늙은 창녀(娼女)의 기름때 묻은 창백한 얼굴같이 옛날의 그윽한 핑크 색 정사(情史)를 눈물 흐르는 추회(追懷)의 웃음으로 듣는 듯할 뿐이다.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태화산(太華山) 중록(中麓)에 말없이 앉아 있는 서악(西岳) 옛 절 처마끝에는 채색 아지랭이 바람에 나풀대고 옥동(玉洞)한 절〔大寺〕 쓸쓸히 빈 집에는 휘 -- 한 바람이 한문(閑門)을 스치는데 녹슬은 종소리가 목쉬었다.

노래에 부르기를 성주(城主)의 본향(本鄕)이 어디메냐고 읍(邑)에서 서북으로 시오리를 가면은 바람에 불리고 비에 씻긴 미륵(彌勒) 하나가 연자원(燕子院) 옛 터전을 지킬 뿐이다.

낙양촌(洛陽村)의 꿈 같은 오계(午鷄)의 울음 소리 강물을 건너 귓속에 사라지고, 새파란 밭 둔덕에 나어린 새악시의 끓는 가슴 타는 마음을 짜내고 빨아내는 피리소리는 어느 밭 두덩에서 들리는지 마는지.

벽공(碧空)을 바라보니 노고지리 종달종달 머리를 돌이키니 행화(杏花)ㆍ도화(桃花) 다 피었다. 할미꽃 금잔디 위에 고달피 잠들고, 청메뚜기 콧소리 맞춰 춤춘다.

일요일이다. 오늘도 여전히 꽃 피고 나비 춤추는 파랗게 개인 날이다.

석죽(石竹)색 공중이 자는 듯이 개이고 향내 옮기는 봄바람이 사람의 품속으로 숨바꼭질한다. 버들가지에는 단물이 오르고 수놈을 찾고 암놈을 찾아 날개를 쳐 푸르륵 날고 목을 늘여 길게 우는 새들은 잦아지는 봄꿈에 취하여 나뭇가지에서 몸부림한다.

반구 귀래 (伴鷗) (歸來)의 두 정자를 멀리 바라보는 곳에 낙동강 푸른 물이 햇볕에 춤을 추며 귀에 들리는 듯이 고요한 저쪽 모래톱에는 사공이 조은다.

신세동(新世洞)에서 빙그르 서남으로 돌아가는 제방 위에는 머리를 모자에 가리고 웃옷을 한팔에 걸은 방년 이십의 소년은 얼굴이 향내가 나는 듯이 불그레하게 타오르고, 두 눈은 수정 알 박은 듯이 영롱한데, 머리는 흑단(黑檀)같이 검고 눈썹은 붓으로 그린 듯하고 두 입 가장자리는 일수 조각장이 가 망칠까 마음을 졸여 새긴 듯이 못 견디게 어여쁘다.

그는 영호루 편을 향하여 걸어갔다. 걸음걸음이 젊은이의 생기가 뛰고 허리를 휘청 고개를 까댁, 흐르다 넘치는 끓는 핏결이 그의 핏속에서 춤춘다.

그는 버들가지를 꺾어 입 모퉁이를 한 옆으로 찡그리며 한 손에 힘 주어 그것을 틀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어 피리를 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만족치 못한 듯이 길 옆에 내던지고 또다시 댓 걸음 앞으로 가다가 다시 버들가지를 찢어 내버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아래위 툭 잘라 꺾어 던지고 다시 비틀어 입으로 잡아 빼었다. 그러나 공교히 옹이의 마디가 쭉 훑는 바람에 애써 비튼 버들을 반가름하여 놓았다.

그 소년은 잠깐 눈을 밉상스럽게 찡그리고 한참 그것을 바라보더니 휙 집어 풀 위에 던져 버리고 얄상궃게 싱긋 웃으면서,

「빌어먹을 것 괜히 애만 썼네」

하고 또다시 버드나무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기름하고 휘청휘청하는 놈을 길게 찢었다. 그리고는 풀 위에 주저 앉았다. 마음 유쾌한 잔디가 앉아 있는 몸을 시원하게 하고 마음 어루만지는 듯이 편안하게 한다.

그는 피리를 내었다. 칼을 대고 가지를 돌려 아래위 쓸데없는 것을 베어 버리고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졸여 살며시 빼낸 것이 버들피리다. 그는 그 끝을 둘째 손가락 위에 대고 칼날을 세워 혀를 내려고 살짝 겉꺼풀만 벗겼다. 그러고 또다시 저쪽 편 혀를 내려 하다가 그는 갑자기 「에쿠」하고 칼 들은 손으로 그 둘째 손가락을 꼭 쥐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그 손가락을 입에다 넣고 호호 불었다. 내려는 피리는 그의 겨드랑이에 끼어 있었다.

손가락에서는 진홍빛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그러나 그 소년의 주머니에는 종이도 없고 수건도 없었다. 양복 입은 그에게 피나는 손가락을 동여맬 만한 옷고름이나마 없었다. 쓰리고 아픔을 견디다 못하여 상을 찌푸리고 사람의 집을 찾아간다는 곳이 영호루 높은 집 옆으로 돌아 초가라 삼 간을 해 정히 짓고서 오는 이 가는 이에게 한 잔 술 한 그릇 밥을 팔아 가면서 그날 그날을 지내가는 주막집이었다.

『물 주소.』 꽉 닥치는 감발한 장돌뱅이.

『그런둥 그런둥, 허허허.』

큰 웃음 웃는 촌양반이 밥을 먹고서 막 일어서 들메인 미투리를 두어 번 구르고,

『야, 주인 아즈먼네이 또 만납시다이.』

『응』하는 군소리에 뭉치인 인사를 던지고 언제 보아도 그저 그대로 말한 마디 없는 영호루만 쳐다보고서 무슨 감구지회가 그의 마음을 쓰다듬는 지 반 얼빠진 사람처럼 한참 있다가 어디론지 가 버린다.

주막집은 잠깐 조용하였다. 부엌 구석에 조을던 누른 개 한 마리가 앞발을 버티고 기지개를 켜고 긴 혀를 내밀어 콧등을 두어 번 핥더니 그대로 푸르륵 털고 나아온다.

그 소년은 그 주막집을 마루끝까지 들어서며,

『여보, 주인』

하고 주인을 찾았다. 뒤꼍에서 손을 씻었는지 치맛자락에 물 묻은 것을 훔치며 나오는 사오십 가까운 중년의 노파가 양복장이가 이상한 듯이 슬며시 내다보며,

『왜 그러십니까?』하며 그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소년은 온순한 어조로,

『그런 게 아니라요, 내가 손을 다쳤는데 처맬 것을 좀 얻으려 하는데요』

하며 손가락을 내보였다. 손가락 끝에는 누른 빛 도는 혈장(血漿)이 엉키어 붙었다. 그 노파는 끔찍하게 여기는 듯이 얼핏 달려들며,

『에그, 그거 안되었십니다그려』

하고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가만히 계시소』하고서 마루 위로 올라가려 하였다.

그때 어떠한 처녀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그 마당 한 가운데로 들어섰다.

발은 벗었으나 살빛은 검노른데 바짓가랑이 밑으로 보일 둥 말 둥 하는 종아리는 계란빛 같이 매끈하고, 행주치마를 반허리에 감았으니 내다보느냐 숨어드느냐 몽실 매끈한 겉 가슴이 사람의 마음을 무질러 녹이는 듯하다.

고개는 잘 마른 인삼 같으며 가늘지도 않고 굵지도 않고 매끈 동실한데 귀밑의 섬사한 솜머리털이 보는 이의 눈을 실눈 감듯이 가무 삼삼하게 한다.

두 뺨에는 연홍빛 혈조가 밀려 올랐고 쌍꺼풀 졌는지 말았는지 반쯤 부끄러움을 머금은 두 눈에는 길다 하면 길고 알맞다 하면 알맞을 검은 속눈썹이 쏟아져 나오는 신비스러운 안채를 체질하듯이 깜박한다. 코는 가증하게도 오똑 갸름하고 청춘의 끓는 피 찍어 묻혔느냐 그의 입술은 조금만 힘 주어 다물지라도 을크러져 터질 듯이 얇게도 붉다. 혹단 같은 검은 머리에 다홍 댕기 드리지나 말지 이리 휘휘 저리 설기 들다 남은 머리가 반쯤 곁 귀 위에 떨어졌는데, 머리에 인 물동이에서 진주나 보석을 흘리는 듯이 대굴 따르륵 구르는 물방울은 소매 걷은 분홍 저고리에 남이 알면 남편 생각 간절하여 혼자 울은 눈물 흔적이라 반 웃음 섞어 놀려 먹을 만치 어룽지게 할 뿐이다.

그 처녀는 허리를 구부리고 물동이를 내려 정지간 물독 속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머리에 얹었던 또아리를 다시 오른손 네 손가락에 휘휘 감았다.

이것을 본 그 소년의 손가락 상처는 깨끗하게 나은 듯이 쓰림도 모르고 아픔도 몰랐다. 다만 몽환의 낙원에서 소요하듯이 아무 때도 없고 흠도 없는 정결의 나라에 들었을 뿐이었다. 환락에 차고 찬 그의 두 눈에서는 다만 칠야의 명성(明星)을 끼어안으려는 유원한 애회(愛懷)와 이 꽃잎의 이슬을 집으려는 청정한 애욕의 꽃잎에 명주실 같은 가는 줄이 그 처녀의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고치 엮듯 하였다. 그러고 그의 심장은 나어린 그 처녀를 지 근거려 보는 듯이 부끄러움과 타오르는 뜨거운 정염(精炎)이 얼기설기한 두려움으로 소리가 들리도록 뛰었다.

노파는 방에서 나왔다. 마루를 내려와 그 처녀를 보더니,

『양순(良淳)아, 반지그릇은 어쨌는?』

하고서 화가 나서 몰아세우는 듯이 묻는다.

『왜 방 안에 없어요, 왜 그러세요?』

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가는 양순의 은실 같은 목소리가 구슬이 튀는 듯한 발걸음과 함께 그 소년의 신경의 끝과 끝을 차디찬 얼음으로 비비는 듯도 하고 따가운 젓가락으로 집어 내는 듯도 하였다.

방에 들어간 양순은,

『이것 아니고 무어세요?』

하며 승리자의 만족한 웃음을 웃는 듯이 자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는 비로소 처음으로 마당에 그 소년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누가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는 듯이 멈칫 하고 섰다. 그러다가는 앵둣빛 같은 웃음을 웃으며 누가 간지르는 듯이 정지로 뛰어들어갈 때에는 그 처녀 육체의 바깥에 나타나지 않는 모든 부분 샅샅이 익지 못한 청춘의 푸른 부끄러움이 숨어들었다.

노파는 헝겊을 가지러 마루에 던져 놓은 반짇고리로 가까이 갔다. 그러나 거기에는 쓸 만한 오라기가 하나도 없었다.

『이것 어떻게 하는?』하고 주저주저할 때,

『무엇을 어떻게 해요? 왜 그러세요?』

하고 부끄러움을 삼켰는지 점잖고 얌전하게 얼굴빛을 가라앉힌 양순이는 다시 나왔다. 뒤적뒤적 가위 소리를 덜컥거리며 반짇고리를 뒤지는 노파는,

『저기 서신 저 양반이 손을 다치셨는데 싸매 드릴 것이 없구나』하니까 양순은 다시 고개를 돌이켜 그 소년을 쳐다보더니 다시,

『응,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똘똘 뭉친 조각보 보퉁이를 들고 나오더니 이리 끄르고 저리 헤쳐 한 카락 자주 헝겊을 꺼내어 오니, 그것은 작년 섣달 설빔으로 새 댕기를 접을 때에 끊고 남은 조각이다.

『여기 있어요』하고서 자기의 헝겊을 그 젊은 소년이 그의 손에 감는 것이 그다지 기뻤든지 서슴기는 그만두고 간원하듯 내주었다.

소년은 그것을 받았다. 그 헝겊이 그리 곱지는 못하였으나 자기의 손을 감을 때 봄바람 같이 부드러우며 노곤한 햇볕같이 따뜻하였다. 피가 몰려 흥분된 손가락은 마음 시원하도록 차지근하였다.

이리 감고 저리 동이기는 하였으나 한 손으로 맬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끝은 입에 물고 한끝은 오른손에 쥐고서 거북하게 매려 할 때 양순은 이것을 바라보더니 가엾이 여기는 듯이.

『제가 매 드릴까요?』 하고 두 손을 들어 그 소년의 윤기있는 손가락을 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소년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 할 때 녹는 듯한 반 웃음을 살짝 웃고서 아무 소리 없이 싹 돌아섰다.

2[편집]

그 소년은 의성군(義城郡)출생으로 대구상업학교를 작년에 마친 유일복(柳一馥)이라는 사람이다. 학교를 마치자 대구은행 안동지점 계산과에 근무하게 되어 오늘까지 계속해 온 것이다.

그는 그 주막집에서 집으로 향하여 돌아오려다가 또다시 영호루에 올라갔다. 고개를 돌리면 이름만 가진 영가(永嘉) 구읍의 쇠잔한 자취가 한가히 족재(簇在)하고 내다보면 자기의 그리운 고향으로 통한 주름살 같은 넓은 길이 낙동강의 허리를 잘라 남으로 통하였다.

그윽한 감구의 회포가 그의 마음을 수연하게 물들이는 동시에 아까 본 그 처녀의 달콤한 웃음이 애연한 인상을 박아 준 듯하다. 아무것도 없는 자기 주위가 무엇이 있어 못 살게 구는 듯하고 가득 찼던 자기 마음이 이지러진 반달같이 한귀퉁이가 비었다가 또다시 동그란 보름달처럼 가득 찼다 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 한귀퉁이가 비는 듯할 때에는 뜻 모르는 눈물이 흐르려 하고 그의 가슴이 찰 때에는 넘쳐 흐르는 기쁨이 그를 몹시도 즐거웁게 하였다.

그가 머리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에는 끝없이 퍼진 하늘이 자기의 모든 장래를 말하는 것 같이 길어 보였으며, 그가 고개를 숙여 땅을 내려다볼 때에는 발 밑에 살살 기어다니는 개미보다 저 자신이 별로 커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오늘에 비로소 그 전에 맛보지 못하던 비애를 맛보았으며 예전에 당해 보지 못하던 기쁨을 당하였다.

그는 웬일인지 자기의 몸뚱이를 돌고 또 도는 뜨거운 피가 약동하는 그대로 자기의 육체의 모든 관능을 모래 사장에 비비고 싶도록 발휘하여 보고도 싶고, 촉루(髑髏)의 곰팡내 흐르는 암굴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눈 딱 감아 버리고 요절한 정(精)의 육향(肉香)에 취하여 그대로 사라지고도 싶었다.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지?」 혼자 군소리를 하기는 십여 차나 하였으나 발에다 송진을 이겨 붙이지도 않았을 것이요 몸에다 동아줄을 얽어 놓지도 않았으나 초가 삼 간 작은 집, 보이지 않는 그 방 안에 혼자 앉아 바늘을 옮기는 그 처녀의 흔적 없이 잡아 낚는 이성(異性)의 매력이 그를 잡아 놓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또다시 영호루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도 다시 한번 그 집 뒤를 일부러 돌았다. 행여나 그 처녀가 다시 한번 눈에 띄었으면! 다시 한번 나를 바라나 보았으면!

그러나 그 처녀의 숨소리나마 들리지 않았다. 다만 괴괴 정적한 마을 집에 저녁 연기가 자욱할 뿐이었다.

그는 가기 싫은 다리를 힘없이 끌어 서문(西門) 밖 법상동(法尙洞) 자기 여관을 찾아들어온다.

한 걸음 떼어 놓으니 한 걸음이 멀어지고 두 걸음 떼어 놓으니 두 발자국 떠나온다. 뒤를 돌아다보나 살금살금 기어오는 저녁 그늘이 벌써 그 집을 싸돌아 보이지 않으며 실모래 깔린 길이 그리로 연했으나 자기 맘 전해 줄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가 자기 은행 옆에 왔을 때였다. 누구인지,

『어데 가쇼?』

하는 이가 있었다. 일복은 다만 망연히 그를 바라보다가,

『네, 집에 갑니다』 하였다.

『어데 갔다 오십니까?』

『영호루에 바람 좀 쏘이러 갔다 옵니다.』

『혼자요?』

『네, 혼자요.』

『그런데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오시지요.』

『참 간다 간다 하고 못 가 뵈어서 죄송합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한번 놀러 오십쇼.』

『네, 이따 저녁 후에 가겠읍니다.』

『그러세요. 그러면 기다리지요.』

그는 삼십이 가까운 그 고을 보통학교 교원인 이동진(李東眞)이었다.

일복은 자기 사관(舍館)에 돌아와 남폿불을 켜 놓고 저녁 예배를 보러 가리라 하고 성경과 찬송가를 찾아 놓고 저녁상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남폿불이 때없이 팔락팔락할 때에 그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것도 그 처녀이었으며 귀쪽 귀퉁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춤추는 듯하는 것도 그 처녀의 환영이었다. 그가 그 옆의 책을 집어 글을 볼 때 그 글자와 글자를 쫓아 내려가는 것도 그 처녀의 어여쁜 자태이었으며, 그가 편지를 쓰려고 붓을 들어 한 줄 두 줄 써 내려가는 것도 그 처녀의 그림자뿐이었다.

그가 저녁을 먹을 때였다. 편지 한 장을 주인 노파가 갖다 준다. 그것은 자기의 친구에게서 온 것이었다.

사랑하는 유군!

오래도록 군의 음신(音信)을 얻어듣지 못하여 나의 외로운 생애가 더욱 적막하다. 나는 웬일인지 아직 나어린 군에게 이 편지가 쓰고 싶어 못 견딜 만치 쓰고 싶었다. 그래서 종작이 없고 두찬(杜撰)의 흠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쓰고 싶어 쓰는 것이니까 거기에 진실이 있을 줄은 믿는 바이다.

군은 이 세속에 무엇이라 부르짖는 수많은 대명사의 껍질을 씀보다도 먼저 사람이 되기를 나는 바란다. 예술가가 됨보다도 학자가 됨보다도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인생이 최고 이상을 향하여 부단의 노력을 하고 있다 하면 그 최고 이상이라 하는 것은 참사람일 것이다.

그러면 그 참사람이 되려면! 되지는 못하더라도 되려고 노력이라도 하려면 거기에는 그 무슨 힘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힘을 창조하는 그 무슨 신앙이 있어야 할 것이다.

유군이여 나는 달구다 ! 내버린 무쇳덩이다. 나는 참쇠가 못 된다. 참으로 쇠의 사명을 완전히 하는 참쇠다운 쇠가 되려면 그것을 불에 달구어 메로 때려야 할 것이다. 장도리 쇠메가 재아무리 많을지라도 그 쇠를 완전히 연단(鍊鍛)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 사람을 아무리 이성적으로 교육하고 훈어(訓御)하고 지도(指導)할지라도 가슴속에서 활활 붙는 사랑의 불길로 녹을 만치 달궈 내지 않으면 참사람이 못 될 것이다.

사랑의 불길! 아아 유군! 나의 가장 친애하는 유군! 나의 동생 같은 유군!

나를 신임하여주는 유군!

쇠가 불 속에 들어간다 함은 무엇을 이름인가? 철광에서 깨어 낸 차디찬 광철이 도가니에 들어간다 함은 무엇을 이름인가? 거기에 참으로 쇠 된 본분을 완전히 하려는 근본 정신의 발휘할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광철은 쪼들림을 당할 터이다. 귀찮음을 맛볼 것이다.

인간 사회에 무근(無根)한 연쇄를 이룬 우리 인생도 정(情)의 불길에 들어가 이성(理性)의 망치로 두드려 맞아 참으로 사람이 되려는 그 고통은 어떠하며 그 가슴 아픔은 어떠할까? 자기의 영육(靈肉)을 정의 불길에 녹이고 달굴 때, 또는 이성의 망치로 두드릴 때 사붓사붓 박히는 망치의 흔적이 그의 가슴을 쓰리게 할 때, 아아 눈물지으며 한숨 쉴 터이다. 어떠한 때에는 해 돋는 월곗빛 하늘 같은 장래를 바라보고 너무 기쁜 눈물의 웃음을 웃을 것이며 그 어떠한 때에는 해 지는 석조(夕照)에 빠져 가는 저녁해 같은 낙망의 심연에서도 헤맬 터이다.

유군이여! 만일 그대가 처음으로 이성을 동경하게 되거든 그가 웃을 때 군도 군 모르게 웃을 것이며 그가 눈물질 때 군도 군 모르게 울 것이다. 그때의 그대는 지순(至純)할 것이며 지정(至淨)할 것이다. 조화가 무르녹는 진주 같은 문자를 주루룩 꿰어 놓은 일 편의 시(詩)였을 것이다. 아니라, 아무 시인도 그것을 시로 표현하기 곤란할 만치 청정무구(淸淨無垢) 지순지성(至純至聖)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그 찰나를 얻었거든, 그 순간을 얻었거든 그것을 연장하여라.

그것을 무한히 연장하기에 노력하라.

나는 옛날에 그것을 얻었었으나 그것을 연장하지 못한 까닭에 무쇳덩이가 되어 버렸다. 군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대가 만일 그 찰나를 연장시키려 노력하다가 반 발의 반 발을 연장시켰을 때 그것이 끊기려 하거든 그것을 놓지 말고 붙잡고 사라져라. 감정과 이성의 조화 일치가 참사람 되는 데 유일한 궤도라 하면 감정의 모든 것인 사랑의 연장이 끊어지려 할 때 그 이성 혼자만 남는다 하면 그것은 궤도를 벗어난 유량(流量)일 것이니 그대는 참 사람이 못 될 것이라. 최고 이상에 이르지 못하는 자여, 인생의 사명을 이루지 못할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반 발의 반 발만큼 참사람 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그대는 참사람으로 사라지는 것이 도리어 인생의 근적 정신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유군! 나는 나중으로 군이 사랑에 눈뜨거든 먼저 사랑을 얻으라!

하는 것이다. 사랑을 위하여 너의 이성을 수고롭게 하라! 그리하여 그 사랑을 얻은 그 후에 군에게 생(生)의 광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절대의 세력을 부여하는 신앙이 생길 것이다.

金友一柳一馥[유일복]의 것 편지를 다 본 그의 마음은 바늘 끝으로 찌르는 듯하기도 하고 또는 치륜(齒輪)과 치수(齒輸)가 절조 있게 맞아나가는 것과 같이 그의 편지에 써 있는 글의 의미와 정신이 자기 가슴속에서 혼자 휴지(休止)하였던 무슨 치륜과 서로 나가 맞아 돌아가기를 시작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사물을 만나든지 반드시 자기 가슴에서 새로이 약동하는 그 처녀의 춤추는 듯하는 모양을 끌어내어 그것과 조화를 시키려고만 하는 그에게 자기의 가장 경모하는 김우일의 편지를 볼 때 끓는 물로 밀가루를 반죽하는 것과 같이 차지고 끈기 있게 그 처녀와 또는 자기와 그 편지의 정신을 혼일(混一)할 수가 있었다.

그는 그 편지를 보고 가장 큰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 전보다 더 그 편지를 요 경우 그 시기에 보내 준 그 김우일을 신뢰할 생각이 생겼으며 절대의 애착하는 마음이 그를 잡아당기었다.

그리고는 다시 그 편지를 펼쳐 들고,

「만일 그대가 처음으로 이성을 동경하게 되거든 그가 웃을 때 군도 군 모르게 웃을 것이며 그가 눈물질 때 군도 군 모르게 울 것이다⋯」

하고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그리고는,

「그대가 만일 그 찰나를 얻었거든, 그 순간을 얻었거든 그것을 연장하여라. 그것을 무한히 연장하기에 노력하여라」하고 다시 읽었다.

「그렇다. 나는 웃었다. 그 처녀가 웃을 때 나도 모르게 나는 웃었지! 그렇다. 나는 얻었다. 그 찰나를 얻었다. 나는 그것을 연장할 터이다. 연장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부르짖고는 주먹으로 상을 한 번 치고 벌떡 일어서 무엇을 얻은 듯이 한 번 웃었다.

그렇다 나는 그 찰나를 「 . 연장할 터이다.」 구두를 신으면서도 중얼거리었다. 대문을 나서 큰길로 걸어가면서, 「나는 웃었다. 그가 웃을 때 나도 나 모르게 웃었다⋯ 나는 얻었다. 그 찰나를 얻었다. 그것을 무한히 연장할 터이다. 노력할 터이다.」

3[편집]

그가 법상동 예배당에 들어갈 때에는 그 전에 한 번도 당해 보지 못하던 갑갑함을 당하였으며 지루함을 당하였다.

휘황찬란하여 보이는 커다란 남폿불이나 웅얼거리는 신남신녀(信男信女)의 소리가 어쩐 일인지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것 같이 뻣뻣하고 거북하였으며 목구멍이 알싸한 것 같이 가슴이 답답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찬송가를 시작하였을 때 아무 선율도 맞지 않고 조화도 되지 않는 그 얼룩진 노래소리일지라도 영호루 옆 그 주막집에 조그마한 처녀와 자기의 얼크러지는 행복을 찬양하는 것 같았으며 또한 저쪽 중공(中空)에 계신 듯한 하나님이 엄연한 얼굴에 인자한 웃음으로 그것을 재롱삼아 들어 주시는 듯할 때 그는 기뻤다. 그리고 찬송가를 그치는 것이 섭섭하였다.

성경을 보고 연금을 하는 것도 그 조그마한 처녀와 자기 사이를 몽환적으로 얽어 놓는 사이에서 습관적으로 하였다.

목사는 사십 전후의 장년이었으나 몸은 그리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데 머리에는 벌써 흰 머리털이 군데군데 나 있었다.

그가 연단에 올라서 목사들의 약속 있는 듯한 구조(口調)로 자기의 정력을 다하고 지략을 다하여 여러 교도에게 최상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의 말 중에 한 귀절이라도 일복의 귀를 끄는 것은 없었다.

목사는,

「여러분, 여러분이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올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올시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목숨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여야 할 것이올시다」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또다시,

「여러분은 또다시 여러 형제를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여야 할 것이올시다. 요한 1서 제3장 14절을 보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이미 죽음을 벗어나 삶으로 들어감을 벌써 알았도다.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죽음 가운데 있는 자로다 라고 , 써 있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을 모르는 자와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은 사람이올시다」 할 때 일복은 목사를 향하여 눈을 크게 떴다.

『사랑을 모르는 자와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은 사람이올시다.』

이것을 속으로 한 번 짚어 외어 볼 때 자기 속 혼잣말로,

「그러면 나는 지금 살려 한다. 죽음에서 삶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렇다.

무한한 생의 광휘(光輝)가 나의 눈앞에서 번쩍인다. 나는 죽음에서 일어나 삶에서 눈뜨려 한다.」

그리고는 또 목사가,

「하나님은 사랑이요」 할 때 일복은 또다시,

「그렇다. 나는 사랑을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사랑을 사랑하는 자가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까」 하고 또다시,

「나는 사랑을 사랑하련다. 나는 사랑을 사랑하련다」 하고서는,

「그렇다. 나는 그 찰나를 얻었다. 그 순간을 얻었다. 그 순간에 죽음에서 삶으로 사랑을 사랑하려 잠 깨인 자이다」 하였다.

그가 기도를 할 때에는 사랑은 하나님께 하였다 함보다도 그 처녀의 환상(幻想) 앞에 고개 숙였었다. 별들이 찬란한 꽃잎을 뿌린 듯하게 반짝이는 푸른 하늘을 눈 감은 속에서 바라보며 절대의 제일위(第一位)에 올려 놓은 것도 그 처녀이었으며, 구름 가고 달 밝은 그 청공(靑空)에 여신(女神)과 같이 우러러보기도 그 처녀뿐이었을 것이다. 도리어 자기 마음속에 그려 놓은 로맨틱한 환상을 목사의 기도 올리는 소리가 흠 없는 옥돌에 군데군데 흠지게 하는 종의 소리같이 울렸을는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기도를 그치고 예배당 문 밖을 나섰을 때에는 또다시,

「나는 찰나를! 나는 얻었다. 그것을 연장할 터이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죽음에서 삶으로 나온 자이다」

하며 예배당 뜰을 지나 아까 저녁 때 약속한 이동진의 집으로 가려 할 때 누구인지,

『일복 씨! 어디 가세요』

하는 고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복은 고개를 돌렸다. 그 여자는 미소를 띠고 일복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고 섰다. 일복은 그 여자를 볼 때, 그 여자가 웃을 때,

『네, 어디 좀 가요』

하고서는 도리어 속으로 귀찮은 생각이 났으며 노하는 생각이 났다.

『저 좀 보세요.』

『급한 일이 있어서 가야 하겠는데요.』

『저의 말을 좀 듣고 가세요.』

『아뇨, 바빠요.』

『일복 씨는 저를 생각하여 주지 않으세요?』

『무엇을 생각하지 않어요?』

일복은 생각하였다. 그는 참으로 생각지 않았다. 또한 생각해지지 않는다.

생각할 수가 없었다.

『네, 저는 그 말씀을 모르겠읍니다』

하고 아무 말 없이 큰길로 나서면서 혼잣말로 우리 부모가 그를 보고 웃었으며 그의 부모가 나를 보고 좋아하였으나 나는 그 여자가 웃을 때 나 모르게 나는 웃지 못했다. 나는 그 찰나를 그 여자에게서 얻지 못하였다. 나는 도리어 그 여자가 나를 보고 웃을 때 나는 성내었었다. 나는 불안하였으며 살에 붙는 거머리같이 근지럽게 싫었었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즉 사랑을 사랑한다. 내가 그 여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것도 죄악은 아니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니까!

이동진의 사랑 들창을 두드리기는 아홉 시나 되었을 때였다.

『어서 들어오쇼』하는 주인의 말을 따라 방에 들어 앉은 일복의 입에서는 첫인사가 끝났다.

이동진은 담배를 권하니,

『어디 먹을 줄 압니까?』하고 그것을 사퇴한 후 옆에 있는 책을 집어 보려 할 때,

『그 손은 왜 처매셨나요?』하며 가엾은 듯이 들여다본다. 일복은 어린애처럼 웃으며,

『그런 게 아니라 장난을 하다가 베었어요.』

『무슨 장난을요?』

『아까 영호루에 갔다가 피린가 무엇인가 좀 내느라고 하다가 다쳤어요.』

『하하, 그것 참 취미 있는 상처입니다그려.』

『그나 그뿐인가요. 어여쁜 여성이 그 상처를 매어 주었으니 더욱 시적(詩的)이지요.』

『네에, 그래요.』

『그나 또 그뿐인가요. 그 여성의 부드러운 웃음이 저의 마음까지 동여맸는걸요.』

『하하, 그것 참 그럴 듯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란 누군가요?』

『왜 영호루 밑에 주막집 있지 않습니까?』

네 있지요 『 , . 가만 있거라(한참 생각하다가) 옳지, 엄영록(嚴永錄)의 집 말씀입니다그려.』

『그 집이 엄영록의 집인가요?』

『네, 그렇지요. 그의 누이동생 말입니다그려, 아주 유명합니다. 경북(慶北)의 제일가는 미인이라는 소문이 있는 여자지요. 그런데 그 여자가 그 손을 매어 드렸어요?』

『네.』

이야기는 한참 중절되었다가,

『그런데 엄영록이를 아십니까?』

『알지요.』

『친하세요?』

『그 전부터 집에를 다니니까 장날이면 꼭 들러 가지요.』

『그러세요!』

4[편집]

집에 돌아와 하룻밤을 새고 은행 일을 마친 그 이튿날 저녁 때, 일복은 또 다시 영호루를 향하여 갔다. 멀리 보는 공민왕(恭愍王)의 어필 현액(御筆縣額)이 그를 맞이하는 듯이 바라보며 있을 때 그 전에 그리 반갑지 않던 영호루가 오늘에는 웬일인지 없지 못할 것 같이 반가웁고 그리웁다. 그러나 처녀를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영호루가 연상되고, 영호루를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그 처녀가 생각이 된다.

양복 주머니에서 그 처녀가 준 자주 헝겊을 꺼내어 보며,

「이것을 갖다 주어? 가서 다시 한번 만나 봐? 그렇다! 가 보는 핑곗거리는 단단히 된다.」

해는 바야흐로 서산을 넘으려 하고 저녁 연기는 온 읍내를 덮기 시작한다.

일복이 그 주막집 앞을 다다랐을 때 그는 또다시 주저하였다. 만일 내가 이것을 돌려 보낼 때 그 처녀가 있어서 나를 또 보고 웃으면 모르거니와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노? 그렇기는 고사하고 보고도 웃지 않으면 어찌하나?

웃지도 않으려면 있지 않는 게 좋고 없으려면 내가 가지 않는 것이 좋지!

그는 바로 들어가지를 않고 일부러 영호루를 돌았다. 그리고 영호루 주춧돌 틈으로 그 집을 엿보았다.

그때였다. 또다시 어저께와 같이 그 처녀는 물동이를 이고 물 길러 갔다.

넘어질까 겁하여 두 눈을 아래로 깔고 물 길러 갔다. 걸음걸음이 향 자취를 땅위에 인박고 발끝 발끝마다 , 꽃그림자를 그리는 양순은 텅 빈 물동이에 사랑의 샘물을 가득 채우려는 듯이 물 길러 갔다. 쓰지 않은 새 그릇 같은 양순의 가슴속에 새로운 사랑의 씨를 담아 주려는 일복이 뒤에 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는 아무 소리 없이 물만 길러 갔다.

일복은 그 뒤를 따라갔다. 좁은 비탈길을 지나고 언덕 아래 길을 거쳐 밭이랑을 꿰뚫고 언덕 모퉁이 하나를 돌아 포플라 그늘이 슬며시 걸친 우물에 왔다.

우물에 허리를 굽혀 물을 뜨는 양순은 뒤에 누가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다만 두레박을 물 속에 텀벙 잠가 이리 한 번 저리 한 번 잦혀 누일 뿐이었다.

저녁 그늘진 곳에 수분 섞인 공기가 죄는 일복의 마음을 더욱 으스스하게 한다. 그리고 점점 어두워 가는 저녁날에 아무도 없이 다만 나뭇가지 속에서 쌕쌕하는 고요한 곳에 단둘이 서 있는 것이 어째 그의 마음을 정욕으로 가늘게 떨리게 한다.

양순이 물동이를 들고 일어서려 할 때이다. 일복은, 『에헴』하고 기침을 하였다. 양순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고 그 서 있는 사람이 일복임을 알고서 겨우 안심하는 중에도 「나는 누구라구. 왜 사람을 놀라게 하느냐」하며 반가와하는 가운데 얄미웁게 토라지는 듯이 반쯤 웃었다. 일복은 다만,

『이것 가지고 왔는데』 하고 그 헝겊을 꺼내 놓았다. 그 처녀는 그것 한번 들여다보고 또 일복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러고서는 그것을 받으려 하지도 않고 물끄러미 서 있었다.

『자, 받어요』하고 그 헝겊을 그 처녀의 손에 쥐어 주는 일복의 얼굴은 빨개졌다.

그리고 몸이 떨리었다. 아무 소리 없이 그것을 받아들은 양순은 웬일인지 섭섭한 기색을 띠고 서 있다가 아무 소리 없이 물동이를 이었다. 그리고 구름이 발에 걸치는 듯이 느럭느럭 힘없이 걸어갔다.

일복은 다만,

『내일도 또 저녁 때 물긷지?』

하였다. 그러니까 그 처녀는,

『네』 할 뿐이었다.

두 사람이 다시 언덕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에는 일복은 언덕 위에 올라서서 멀리 그 처녀가 자기 집으로 물동이 이고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양순은 물을 독에 부어 놓고 누가 쫓아오는 듯이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방구석에 돌아앉아 훌쩍훌쩍 울면서 손에 든 헝겊을 손에다 단단히 쥐었다.

『그이가 왜 이 헝겊을 도루 주었노?』

할 때 눈물 방울은 삿자리 위에 떨어졌다.

『그이가 이 헝겊을 싫어하는 것인 게지?』

할 때 그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느껴 울었다. 그리고 또다시 고개를 들고 먼 산을 볼 때,

『내가 준 헝겊을 도루 줄 때에는 나를 보기 싫어 그리한 것인 게지?』

하고서는 또다시 눈물 방울이 따르륵 두 뺨에 굴렀다.

『그런 줄 알았더면 애당초 주지를 말 걸!』

양순은 웬일인지 울음이 복받쳐 올라오고 어두운 방구석이 마음 죄게 답답하다. 그러다가는,

『나는 내일은 물길러 가지 않을 터이야』

하고 그 헝겊을 갈갈이 찢어 창 밖에 내버렸다.

5[편집]

그 이튿날 저녁에는 또다시 일복이 그 우물가에 갔다. 나무와 풀과 그 우물에 놓여 있는 돌맹이까지 어제 같으나 그 아리따운 처녀는 보이지 않았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둑어둑하여도 양순은 오지 않았다. 눈썹달이 서편 하늘에 기울어져 한적한 옛 읍을 반웃음져 흘겨보며 서산으로 들려 할 때 사랑을 도적하려는 어여쁜 도적놈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쏴 ⎯⎯ 해도 그가 오는가? 나무 끝이 사르륵하여도 그가 오는가? 오는지 안 오는지! 오려거든 온다 하고 오지 않으려거든 오지 않는다 하지, 오는지 안 오는지 알지 못해 속태우는 마음 미친 소년이 있는 줄은 누가 있어서 알아 줄는지!

달이 어뒀으매 정조(貞操) 도적맞을까 보아 오지를 않을 터이요, 오지 않으면 외로이 기다리는 나이 젊은 사람의 붉은 피를 바지작바지작 태우는구나.

그러나 제가 아니 오지는 못하느니라. 물동이 머리에 얹고 누가 있을까 마음 졸여 황망히 오는 사람은 분명히 그 처년데 날이 어두워 그 얼굴은 모르겠으나 그 윤곽은 분명히 양순이요 그 걸음걸음이 분명히 그 처녀다.

양순은 우물까지 와서 사면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물 한 두레박 뜨고 뒤를 돌아보고서는 가느다란 목소리를 입 속에 굴려,

『오지 않었나?』하는 소리를 할 때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일복의 가슴은 부질없이 뛰었다. 그리고 양순이가 물을 떠놓고 한참이나 서 있다가 긴 한숨을 쉴 때 일복은 슬며시 그의 등 뒤에 나서서,

『이것 좀 봐!』

하고 나지막하게 부를 때 그 처녀는 두 어깨가 달싹 하도록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일복은 다시,

『양순!』

하고 서서 정 뭉친 두 눈으로 흘겨보며 다시,

『양순!』하였다. 양순은 다만 돌아선 채로 아무 소리가 없이 손가락에 옷고름만 배배 감고 있었다.

『오늘은 어째 물을 늦게 길러 왔어?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양순은 한 번 허리를 틀더니 말을 할 듯 할 듯하고 그대로 서 있다.

『나는 네가 보고 싶어서 여기 와 기다렸는데 너는 아마 그렇지 않지? 나는 너를 날마다 여기서 만나 보았으면 좋겠어!』

『저두요』하는 양순은 부끄러워 그랬던지 얼굴이 빨개지며 두 손으로 낯을 가리었다.

『정말?』하고 묻는 말에 양순은 아무 대답이 없다.

『정말야? 응, 정말야? 대답을 해야지.』

양순은 물동이를 이려고 허리를 구부리며 부끄러워 웃음지며,

『네』하고서는 그대로 동이를 이고 가 버리려 하니까, 들려는 물동이를 일복은 붙잡으며,

『내일 또 오지?』

『네.』

『내 또 와서 기다릴께.』

양순은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는,

『무엇 하느라고 여태까지 있었는?』

하며, 들어오는 양순을 흘겨본다.

『두레박이 우물에 빠져 건지느라고 그랬어요.』

한 마디 말로 의심을 풀었다. 물을 부어 놓고 방으로 뛰어들어가 양순은 얼른 뒷창문을 열고 어저께 저녁에 갈갈이 찢어 버린 그 헝겊을 다시 차곡차곡 모아다가 다시 손에 쥐어 들고,

『내가 잘못알고 그랬지! 내가 모르고 그랬지! 이것이 그이의 손가락을 처매었든 것인데!』

하고서는 그대로 그것을 똘똘 뭉쳐 반짇고리에 넣어 놓았다.

6[편집]

대구은행 안동지점 지배인의 집 대문 소리가 열 두 시나 거의 지나 닭이 홰를 치며 울 때 고요한 밤의 한적을 깨뜨리고 나더니 지배인의 딸 정희(貞姬)가 혼자 몸으로 어디인지 지향하여 간다.

밤이 점점 고요하고 달은 밝아 흐르는 빛이 허리 감겨 땅에 끌리는 듯한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달빛같이 창백한 빛이 얼굴에 돌며 걸음을 천천히 걷는 중에도 주저하는 꼴이다. 그는 혼잣말로,

「나는 왜 이다지도 불행한고?」 하더니 수건으로 눈물을 짓는지 콧물 마시는 소리가 난다.

정희가 일복의 집 문간에 와서 문을 열어 달랄까 말까? 그러나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잘못이나 아닐까? 아무리 정혼(定婚)한 남자일지라도 밤중에 남몰래 찾아오는 것이 여자의 일은 아니지, 하며 주저주저하고 서 있다가 문틈으로 집안 동정을 살펴보니 일복의 방에는 여태까지 불이 켜 있다.

『여태까지 주무시지를 않는 모양일세!』

『어떻게 할까? 문을 열어 달랠까 말까! 이왕 왔으니 할 말이나 다 하고 가지.』

정희는 대문을 밀어 보았다. 단단히 닫혀 있을 줄 알았던 대문이 힘없이 삐꺽하고 날 때 정희의 온몸엔 맥이 풀리는 듯하였다. 주저하던 생각은 어디로 가고 인제는 아니 들어갈 수 없구나 하여지며 공연히 가슴이 두근두근 하다.

정희는 마당으로 들어서며,

『일복 씨』

하고 가늘은 가운데에도 애연한 어조로 일복을 불렀다. 한 번 부르나 말소리가 없고 두 번 부르나 대답이 없다.

정희는 이렇게 정성껏 부르는데 대답이나마 하여 주지 하고 야속한 생각이 나며 공연히 눈물이 핑 돈다. 그리고서 저 방 안에는 그이가 누워 있으렷다. 누워서 잠이 고단히 들었으렷다. 내가 여기 와서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자렷다. 아니다. 온 줄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렷다.

아니다! 그렇지 않지! 그이는 지금 자지를 않는다. 눈을 뜨고서 영호루를 생각한다. 내가 온 줄 알면서도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것인 게지? 아 ── 무정한 이여.

정희는 다시 허리를 구부리고 일복의 방문 틈으로 들여다보면서 이번에 한 번만 다시 불러 보아서 대답이 없거든 그대로 가 버리리라 하였다.

일복 씨 하면서 문틈을 『 !』 들여다보니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면서 언뜻 마루끝을 보니까 미처 생각지도 못하였던 구두가 없다.

정희의 마음은 냉수로 씻은 듯이 말짱하여지고 또는 깨끗하여졌다. 그리고 웬일인지 또다시 조그마한 나머지 믿음이 있는 듯하였다.

「어디를 가셨을까?」

「주인에게 물어나 볼까?」

그러나 고단히 자는 주인에게 물어 보기는 싫었거니와 또한 젊은 여자가 밤중에 남자를 찾아온 것도 남에게 알리기 싫어서,

「내일 또 오지」하고서 문 밖으로 그대로 내려갔다.

그가 큰길에 나섰을 때였다. 저쪽에서 일복이가 이쪽을 향하여 온다. 그는 몸을 감출까 하고 주춤하였다. 그러다가는 이왕 보려던 이를 보고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가 자기 곁으로 가까이 오기만 기다리고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숙이고 오는 일복이 정희 앞에 탁 당도하였을 때에 정희는 한 걸음 나서면서,

『일복 씨!』하였다. 의외의 여자의 목소리가 자기를 부르므로 일복은 깜짝 놀라 발을 멈칫하고 서서,

『누구요?』

하였다. 정희는 원망스러운 중에도 부끄러운 생각이 나서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서 있다가 가까스로,

『저예요』하였다.

『이게 웬일이십니까?』

『댁에까지 갔다 오는 길예요.』

『집에요?』

『네.』

『무엇 하러요, 낮도 아니고 밤에.』

『…………』

기막힌 듯이 한참 서 있던 일복은,

『어떻든 댁에까지 바래다 드리지요.』

이 말을 들은 정희는,

『아녜요. 오늘 일복 씨에게 꼭 한 마디 말씀을 할 것이 있어요.』

『저에게요.』

『네. 꼭 한 마디요.』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만나 말씀하시지요.』

『아녜요. 오늘 못 만나 뵈이면 또다시 만나 뵈일 날이 없어요』

『그것은 어째서요』

정희는 무엇을 결심한 듯이,

『어떻든 댁까지 같이 가세요.』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일복의 집까지 걸어갔다.

서산으로 넘는 달이 원한을 머금은 계집의 혼령같이 눈 흘겨 서창(西窓)을 들여다보며, 흐드러지게 비웃음 웃는 앞뜰의 나뭇가지가 선들선들한 바람을 풍지 틈으로 들여보낼 때, 정희는 두 다리를 쪼그리고 일복 앞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더니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일복 씨!』하고 불렀다. 안개같이 뽑아 나오는 목소리를 애원의 구슬로 매디매디 장신한 듯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방 안에 이상하게 긴장한 정조(情調)를 바느질하는 듯하다.

등불만 바라보고 있던 일복은,

『네』하고 고개를 돌려 정희를 보매 정희는 두 눈을 아래로 깔고 앉아,

『일복 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요?』

『저는 일복 씨의 아내인 것을 알어 주세요?』

일복은 한참 있다가,

『아내요? 저는 아직 아내가 없는 사람입니다.』

정희는 당신의 대답이 의례히 그러시리라는 듯이,

『일복 씨는 저를 아내로 생각지 않으신다 하드래도 부모가 장차 아내가 되게 정하셨으니까 저는 일복 씨의 아내지요.』

일복은 이 소리를 듣고서 코웃음 웃는 듯이 반쯤 입을 삐죽하더니,

『사랑 없는 아내는 아내가 아니지요.』

『그러시면 저를 사랑치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렇지요.』

치마폭을 다시 휩싸고 앉는 정희는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눈물 섞인 목소리로,

『일복 씨!』를 부르며,

『알었읍니다. 저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일복 씨의 사랑을 얻지 못하게 태어난 저만 불행하지요. 그러나 저는 부모의 작정대로 그것을 억지로 이행하려고 아내로 생각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요. 사랑이 없는 아내는 없으니까요 법률상의 . 아내나 인습에 젖은 그 형식의 아내를 저는 원하는 것이 아녜요. 저에게는 온 우주가 없을지라도 일복 씨 하나는 잃을 수 없어요. 만유(萬有)가 있음도 자아(自我)가 있은 연후의 일입니다. 저는 일복 씨가 없으면 자아까지 잃을 것입니다.』

『일복 씨!』 다시 부르나 대답이 없다.

『여보세요.』 또 아무 말도 없다.

『일복 씨, 저는 일복 씨를 사랑합니다. 저의 진정을 일복 씨는 알어 주지 못하시겠어요?』

『저는 마음 약한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어요. 저는 제가 마음 약한 자인 것 압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마음이 굳은 자가 되기를 노력합니다. 저의 마음 여자의 애원을 들을 때마다 불쌍함을 깨달었을지라도 사랑을 깨달은 일은 없었어요. 연민은 사랑이 아니겠지요. 정희 씨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여 주신다 하드래도 나에게는 아무 행복과 불행이 간섭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어떤 경우에는 나의 마음을 귀찮게 할 때가 있읍니다.』

정희는 그 자리에 엎드러지며,

『일복 씨!』하고 느끼어 울면서,

『그러시면 한 가지 원이나 들어 주세요.』

새벽 닭의 우는 소리가 먼 동리 닭의 홰에서 꿈속같이 들려온다. 달은 떨어져 방 안은 어둠침침한데 두 사람의 숨소리에 섞인 정희의 느껴 우는 소리가 온 방 안을 채울 뿐이다.

『저에게 원하실 것이 무엇일까요?』

일복은 보기 싫고 귀찮은 듯이 말을 던지었다.

『네, 꼭 한 가지 원할 것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저를 다만 한 마디 말씀으로라도 아내라고 인정만 해주세요. 그러면 저는 다른 원은 아무것도 없어요.』

일복은 허리를 펴고 팔짱을 끼고 고쳐 앉더니,

『에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한참 있다가,

『녜, 알겠읍니다. 그러나 어떠한 이성(異性)이 어떠한 이성을 혼자 사랑하는 것은, 그것은 누구에게든지 자유겠지요마는 남편 없는 아내나 아내 없는 남편은 없겠지요. 비록 있다 하면 그것은 진리에서 벗어났거나 결함 있는 것이겠지요. 또는 형식이나 허위겠지요. 나는 거기에 대답할 수 없읍니다.』

정희의 다만 터럭만한 것이나마 희망은 칼날 같은 일복의 혀끝으로 떨어지는 말 한 마디에 다 끊어졌다.

때가 이미 늦었는지라 정희라는 여성은 자기가 결심한 맨 마지막 길을 아니 밟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서며,

『안녕히 계세요. 저는 갑니다. 저는 또다시 일복 씨를 뵈올 때가 아마 없겠지요』

하고서 마루끝을 내려서 신을 신고서 문 밖으로 나왔다.

나어린 정희의 갈 곳이 어디메냐? 달 같은 정희의 마음은 월식(月蝕)하는 그 밤처럼 무엇이 삼킨 듯이 있는지 없는지 어둠 침울하고 작열하는 백금선(白金線)과 같이 뜨거운 혈조(血潮)는 다만 그의 가슴을 중심하여 전신을 태울 뿐이다. 정희의 전신을 꿀꺽 집어삼키는 듯이 아찔 아슬한 비분이 때없이 온몸으로 쌀쌀 흐를 때 그는 몸서리를 치며 그대로 땅에 거꾸러지고 싶었다.

그것이 실연(失戀)이란다. 조소하는 듯이 땅 틈에서 우는 벌레 소리가 똑똑하게 정희의 귀에 들려올 때 정희에게는 구두 신은 발로써 그놈의 벌레를 짓밟아 죽이고 싶도록 깍정이었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서투른 길을 급한 보조로 걸어나오다가 발끝에 돌멩이가 채고 높은 줄 알았던 땅이 정신없이 쑥 들어갈 때 에쿠 하고 넘어질 듯하다가도 그 돌멩이 그 허방에 분풀이를 하고 싶어서 못견딜 지경이었다.

정희에게는 만개한 꽃이 다 여윈 듯하고 둥근 달이 이지러진 듯하다. 밤빛에 흔들리는 웃는 꽃들도 때아닌 서리를 맞아 애처롭게 여위어 땅에 떨어져 짓밟힌 듯하고 구만 리나 멀고 먼 하늘에 진주를 뿌린 듯한 작고 큰 별들도 죽어 가는 요귀(妖鬼)의 독살스러운 눈동자 같이 보일 뿐이다.

그는 발이 이끄는 대로 정처없이 걸어간다. 화분(花粉) 실은 봄바람이 그의 두 뺨을 선들선들하게 스치고 적적한 밤기운은 쓰리고 아픈 가슴을 채울 뿐이다.

원산(遠山)의 검은 윤곽은 세상의 광막(廣漠)을 심수(心髓)에 전하여 주는 듯하고 어두움 속에 멀리 통한 백사지(白沙地) 길은 일종(一種) 낭만적 경지로 자기를 인도하는 듯하였다. ⎯⎯ 그 낭만적 경지라 함은 물론 모든 행복의 이상경(理想境)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곳이었을 것이다.

정희는 가슴에서 쓰린 감정이 한 번 치밀어 올라오며 주먹을 쥐고 전신을 바르르 떨고,

「죽을까?」

할 때 굵다란 눈물 방울이 두 뺨을 스치었다.

「죽지, 살어 무엇하나!」

그 옆에 누가 서 있어 그에게 의견을 묻는 듯하다.

「죽어도 좋지요.」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혼자 부르짖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두 입술이 떨리며 눈물이 식어 그의 옷깃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

「하나님,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 저도 하나님이 만드셨지요. 인간의 모든 행복이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것이라 하면 또한 불행도 그러하겠지요.

사람이 만물을 자유로 할 수 있을 만치 총명한 것 같이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자유로 하실 수 있을 만치 전능하시지요. 아아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마음 약한 사람의 하나로서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하나님, 저는 다만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그대로 모든 것을 행할 뿐입니다.」

그는 걸음을 낙동강 연안으로 향하여 갔다. 두 팔을 가만히 치마 앞에 모으고 걸음을 반 걸음 반 걸음 내놓을 때마다 그의 고통과 초민(焦悶)은 그 도를 더하여 갈 뿐이다.

틀어 얹은 머리털이 풀어지고 흩어져 섬사한 살쩍이 촉촉히 솟은 땀에 젖었다. 그에게는 있다 하면 가나안 복지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면 모세의 영감(靈感) 있는 지팡막대기가 아니라 죽음의 깊은 물로 그를 집어던지려 하는 낙망에서 일어나는 일종 반동적 세력이었다.

어두컴컴한 저쪽에 출렁거리는 물소리를 정희는 들었다. 그리고 푸른 물이 암흑 속에서 울멍줄멍 자기의 몸을 얼싸안으려는 것이 보일 때 그는,

「아!」

하고 그대로 땅에 엎드려져,

「너무 속하구나!」하고서,

「나는 원망도 없고 질투도 없고 다만 순결한 일생을 만들기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구하여 여기까지 왔읍니다. 세계는 순결한 곳에 비로소 영(靈)의 나라를 세울 수 있겠지요.」

사박사박하는 가루 모래가 바람에 불려 사박사박할 때 동으로 왕태산(王汰山) 저쪽의 새벽빛이 서편 암흑과 어우러져서 밝아 온다.

정희는 구두를 벗었다. 이것이 그의 죽음으로 가는 첫째 번 해탈(解脫)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욱 천천히 걸음걸이를 하여 물 흐르는 곳으로 가까이 갔다. 비단 양말 밑에 처음으로 가루 모래가 닿을 때 그는 차디찬 송장의 배 위를 딛는 것 같이 몸서리치게 근지러움을 깨달았다. 그리고 두 발걸음 세 발걸음 점점 물 가까이 가서는 멈칫하고 서며 가슴이 무쇠로 때리는 듯이 선뜻하여졌다. 그리고 컴컴한 가운데서 시커먼 물이 넘실넘실할 때 그는 무서워 떨었다 그리고는 . 물 속의 졸던 고기 하나가 사람 그림자에 놀라 푸르락하고 뛸 때 그는 간이 좁쌀만하여지도록 놀랐다. 그리고는 「에그머니」 소리를 칠 만치 몸을 소스라쳤으나 달아날 만치 약하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선 채로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오 분 이상을 꼼짝 아니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먼 동리에서 「죽어라」하고 신호를 하는 듯한 닭의 소리가 들릴 때 그는 비로소 동쪽이 밝은 것을 알았다. 그래 치마를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 모든 용기를 다하여 물 속으로 달음질하였다.

그가 이제는 물 속에 들어왔지? 하였을 때, 인제는 죽었지 하였을 때, 모든 세상을 단념하고서 두 팔을 두 다리를 쭉 펴고 힘없이 누웠을 때, 그가 송장이 된 줄 알고 모든 세상의 괴로움 슬픔이 없어진 줄 알았을 때, 자기 몸은 둥실둥실 강물을 따라 흐르는 줄 알았을 때, 그 찰나에 다시 정신을 차려 보니 아직까지도 모래 위 자기가 섰던 그 자리에 나무에 붙잡아 매어 놓은 듯이 꼿꼿이 서 있었다. 그는 다시 주먹을 쥐었다. 푸른 물은 서색(曙色)을 받아 조금 얇게 푸르다. 그는 또다시 달음질하였다. 그가 죽을 힘을 다하여 죽음으로 뛰어들어가려 하는 노력은 죽는 것보다도 더 어려웠을 것일는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물이 이 몸에 닿으리라고 예기하던 찰나에 그는 도리어 그 반대 방향 되는 그의 등 뒤쪽으로 자빠지고 등이 모래 위에 닿을 터인 그 찰나가 되기 전에 그의 등은 어떠한 사람의 가슴에 안겼다. 그리고 비로소 처음으로,

『이게 무슨 짓요?』 하는 소리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인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물 있는 곳으로 뛰어들려 할 뿐이었다. 그는 그때에는 자기가 죽으리라고 결심한 낙망을 동기로 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을 무슨 부끄러움, 또는 세상에 대한 자아의 불명예를 생각할 때 그는 거의 비스름하게 물로 뛰어들려 하였다. 그러나 그를 제지하는 그 사람은 그리 완강하지는 못하였으나 정희 하나를 붙잡기에는 넉넉한 힘이 있었다.

정희의 전신은 땀에 젖었다. 그리고 이제는 하는 수 없구나 하였을 때 그는 그 사람 팔에 그대로 안기며 힘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얼굴 가린 치마는 벗으려 하지도 않고 소리가 들릴 만치 느껴 울었다. 그가 정신을 차릴 때에는 그의 머리가 어떠한 사람의 무릎에 놓여 있고, 그는 모래사장에 두루마기를 깔고 누워 있었다.

7[편집]

『나무아미타불!』

정희는 눈을 떴다. 온몸이 땀에 젖은 데다가 새벽 바람이 불어 척근 척근하게 한다.

『누구십니까?』하고 자기를 문지르고 있는 사람을 바로 쳐다보았으나 그의 얼굴 윤곽이라든지 음성이라든지 또는 몸짓이라든지 한 번도 만나 본 기억이 없는 사람인데 머리에는 송낙(松蘿)을 썼다.

『나무아미타불!』

을 또 한 번 외더니 가슴을 내려앉히고 한숨을 한 번 쉬고,

『누구신지는 알 수 없으나 젊은신 양반이 어째 그런 마음을 잡수셨을까요?』

정희는 일어나 앉으려 하지는 않고 고개를 힘없이 그 여승(女僧)의 무릎 위에서 저쪽으로 돌리며,

『그거야 말씀해 무엇 하겠읍니까마는 어떻든 고맙습니다』

하고 다시 하늘을 쳐다보니 아까 있던 별은 여전히 깜박거리고, 아까 보이던 산도 여전히 멀리 둘리어 있고, 아까 자기를 삼키려던 물은 여전히 흘러 가느라고 차르럭거린다.

『고맙기야, 이것도 다 부처님이 지시하심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젊으신 이가 물에 빠지려 하심은 반드시 곡절이 있을 듯한데요. 저에게 말씀을 하시고 어서 바삐 날이 밝기 전에 댁으로 가시지요. 소문이 나면 좋지 못할 터이니까요.』

정희는 또다시 한참 있다가 겨우 일어나려 하니까 그 여승은,

『염려 마시고 누워 계세요. 신열이 이렇게 나시고 가슴이 이렇게 뛰시는데』하며 아직 주름살이 잡히지 않은 사십 가까운 여자의 손으로 정희의 머리를 짚어 준다. 정희는,

『저에게는 이제부터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예요. 지금 당신이 나를 구하신 것이 세상 사람이 혹 그것을 잘한 일이라고 칭송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죽는 사람은 벌써 이 세상에서 한 가지 반 가지의 행복을 얻지 못할 줄 알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세상에 살어 있는 것이 고통이며 불행한 것을 안 까닭에 죽으려 한 것이니까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어떻게 생각해서 더욱 행복은 된다 할 수 없드래도 사는 것보다 나으니까 죽으려 한 것이겠지요. 지금 당신이 나를 구한 것이 당신의 자비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에게는 도리어 고통의 연쇄가 될는지도 알 수 없어요.』

여승은, 그렇지요 그것도 그렇지요 『 . . 그러나 이 세상의 괴로움은 극락에 들어가는 어비입니다⋯』

말도 마치기 전에 정희는,

『알었읍니다. 신심(信心) 깊으신 당신으로는 그런 말씀 하시는 것이 잘못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 당신은 당신 마음 가운데 언제든지 극락이나 열반이란 당신 자신이 믿는 바 이상경을 동경하는 까닭에 이 세상에서 살어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의 마음에는 당신과 같이 굳세인 힘을 주는 것인 천당도 아니요 극락도 아니요 그 무엇인 것이 없어졌읍니다.』

여승은,

『그 무엇이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녜, 그것은 말씀하지 않으렵니다. 그 말을 하여서 도리어 자비하신 당신의 마음을 걱정되게 할 것은 없으니까요. 그것은 청정하신 당신의 마음을 도리어 불쾌한 감정으로 물들이게 할 터이니까요. 도리어 당신네들에게는 죄악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모든 종교 모든 속박 모든 세력을 깨뜨려 부술지라도 그것 한 가지는 우리 인류가 존재한 그 날까지는 길이길이 우리 인생에게 최대의 신앙을 줄 것입니다.』

여승은 알아챈 듯이 한참이나 묵묵히 있다가,

『알었읍니다. 알었세요. 그러면 저는 또다시 말씀을 여쭈어 보려 하지도 않겠습니다.』

『네, 그 말 하나는 물어 주지 마세요. 그것은 언제든지 기회가 오면 알어질 날이 있을 터이니까요. 그런데 여보세요. 저는 다만 청정한 몸으로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으렵니다. 저의 영(靈)에게도 아무 흠이 없고 저의 육(肉)에게도 아무 흠이 없이 죽고 싶어요. 종교에 헌신한 사람이 어떠한 종교의 한 가지 신앙만으로써 그의 일생을 마칠 때 그가 영생의 환희를 깨닫는 것과 같이 나는 아무 매듭과 아무 자국이 없는 영과 육으로 영원한 대령(大靈)과 영원한 만유(萬有) 속에 안기고 싶어요.』

여승에게는 그 무슨 의미인 줄 알아듣지 못한 듯이 다만 묵묵히 앉아 있을 때 저쪽 갈라산 앞에서 삐걱삐걱 새로이 밝아 오는 새벽 기운을 흔들며 낙동강 하류로 흘러가는 뗏목 젓는 소리가 들려 온다.

두 사람은 일시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정희는 일어나 앉아 사면을 둘러보았다. 새벽빛은 벌써 온 하늘에 가득 차고 작은 별들은 자취를 감추고 동쪽 하늘에 여왕의 이마를 치장하는 금강석 알 같은 샛별이 번쩍번쩍할 뿐이다.

『어서 가십시다.』

사람도 없는데 누가 듣는 듯이 여승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황망히 정희를 재촉한다 정희도 . 여승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나 어데로 갈꼬?

『댁이 어디세요?』

『나는 갈 집이 없어요.』

『그러실 리가 있나요? 봐 하니 그러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우리 집이라고 있었기는 있었지만은 이제부터는 우리 집이 아녜요. 있다 하드래도 가기를 원치 않으면 가지 못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십니까?』

『무엇을 어떻게 해요. 나는 벌써 죽은 사람예요. 그러기에 아까도 말씀했거니와 죽으려는 사람을 구하시는 것이 당신에게는 자비가 될는지 알 수 없으나 나에게는 행복이 못 된다 하였지요.』

『그러면 소승하고 같이 가세요.』

『고맙습니다. 녜, 녜, 나를 어디로든지 데려다 주세요. 그러고 나의 살어 있는 것 누구에게든지 알리지 말어 주세요.』

『그것은 어째서요?』

『네, 그것은 그렇지요 ── 한참 있다가 ── 요 다음에 말씀하지요.』

여승은 정희의 발바닥 발을 보더니,

『신을 신으시지요』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정희는 그 소리를 듣고 구두를 신으려 하다가 무엇을 생각한 듯 얼른 말머리를 돌리어,

『싫어요. 죽으려다 다시 산 사람이, 죽으려 할 제 벗어 버린 신을 다시 신으려 하니까 어째 몸서리가 쳐지는구려. 그대로 발바닥으로 가지요.』

두 사람은 걸어간다. 먼 곳에서 바라보매 송낙 쓴 중의 등에 정희가 업히어 강물을 건너는 것이 희미히 보인다. 그리고 저쪽 의성으로 통한 고개 비스듬한 길 위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말았다.

8[편집]

그날 새벽이 새어 아침이 되었다. 온 안동 전읍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었다.

『어젯밤에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네그려.』

『어디서?』

『강물에서.』

『누구인지 모르나?』

『모르기는 왜 몰라. 은행소(銀行所) 사장(社長)의 딸이라네.』

『이 사람아, 사장의 딸이 아니라 지배인의 딸이란다.』

『아냐 사장의 딸야. 자네는 알지도 못하고 공중 그러네그려.』

『아따, 이 사람아. 대구은행 안동지점에 사장이 있든가? 지배인이 사장 대리를 보지.』

『그런데 나이는 얼만데?』

『열 여덟 살야. 왜 자네 보지 못하였나? 작년에 대구여자학원을 제2호로 졸업한 그 여자 말일세.』

『그것 참 안되었는 걸. 그런데 시체나 찾었나?』

『송장까지 못 찾었다네. 물은 그리 깊지도 않은데 어디든지 떠가다가 모래에 묻혔거나 어디 걸렸겠지.』

『그런데 어떻게 물에 빠진 것을 알었어?』

『웅, 그것은 강가 모래톱에 구두를 나란히 벗어 놓았는데 바로 물가로 사람 걸어간 자국이 나란히 났네그려.』

『자네 가 보았나?』

『그래, 가 보았어. 그런데 조화데 조화야. 빠진 곳은 물이 한 자도 못 되데 그려.』

한참 있다가 또다시,

『그런데 그와 정혼한 사람이 있지?』

한 사람이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말 말게. 이번 일도 다 그 사람 때문이라네.』

『그 사람 때문이라니?』

『소박덕이야. 소박덕이. 새로운 문자로 말하면 실연자렷다.』

『그걸 보면 사람이란 알 수 없는 것이야. 남들은 침들을 게게 흘리면서 따라다니는 놈도 있는데 또 싫다고 내대는 사람은 누구야. 그것을 보면 우리 사람이란 영원히 불구자들야. 장님이며 귀머거리들야.』

이러한 소문이 난 줄을 알지 못하는 일복은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은행으로 가려 하다가 시간이 아직 되지 못하였으므로 이동진을 찾아 그의 집까지 갔다.

『동진 씨』

하고 문 밖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은 주인은,

『네. 누구십니까? 에구, 이게 웬일이시오. 이렇게 일찌기⋯』

하면서 아직 대님도 풀은 채 문 밖으로 나와 일복을 맞아들인다. 일복은 방 안으로 들어가 앉으며, 네 하도 잠이 오지 『 , 않기에 세 시에 일어나 앉어 밤이 새기를 기다려 여기까지 찾어왔읍니다. 일찍 일어나니까 참 좋은 걸요.』

두 사람은 대좌하였다. 이 말 저 말 하다가 일복은 무슨 하기 어려운 말이나 꺼내려 하는 듯이 기침을 한 번 하고,

『그런데요, 한 가지 청할 것이 있어서요』

하니까, 동진은 이상히 여기는 눈으로 일복을 바라보며,

『무슨 말씀입니까?』

하였다. 일복은 다짐을 받으려는 것처럼,

『꼭 성공을 시켜 주셔야 합니다.』

『글쎄 말씀을 하셔야지요. 성공할 만한 일이면 어디까지든지 일복 씨를 위하여 전력하여 드리지요. 대체 무슨 일인가요?』

일복은 한 번 빙긋 웃더니 부끄러워 얼굴이 잠깐 연분홍빛으로 변하였다가 사라지며,

『저 ⎯⎯ 엄영록을 아신다지요?』

하고서는 동진의 기색을 살피는 동시에 아첨하는 듯이 또 빙긋 웃었다.

『하하하하』

하고, 크게 웃는 동진의 웃음 속에는 일종의 조롱과 호기심이 잠재하였다.

이것을 알아챈 신경질의 일복은 달아나고 싶을 듯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꿀꺽 참고 자기도 거기에 공명하는 듯이,

『하하하』

하고, 웃었으나 그 웃음 소리는 자기의 폐부를 씻어 내는 듯한 시원한 웃음이 아니었다.

『알었읍니다. 그러면 날더러 중매가 되라시는 말씀이지요. 예, 진력해 보죠. 그러나⋯』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더니,

『그러면 그이는 어떻게 하시나요?』

하며 일복의 얼굴을 중대 문제나 들으려는 듯이 물어 본다.

『그이라뇨?』

『정희 씨 말씀에요.』

『네, 정희요. 정희가 나에게 무슨 관계가 있읍니까?』

『그게 무슨 말씀에요? 그 정희 씨는 일복 씨의 아내가 되시지 않습니까?』

『아내요? 저는 아내가 없거니와 될 사람도 없어요. 있었다 하드래도 그것은 벌써 옛날이지요.』

동진은 일복의 마음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였는 듯이, 나는 이런 문제를 당할 『 때마다 한가지 큰 걱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요사이 젊은이들 가운데에는 이혼 문제가 많이 일어나는 모양이올시다.

그런데 그것은 당사자 된 그 사람들이 깊이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경솔히 행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기네들은 자기의 만족만 채우기 위하여 일개 잔약한 여자의 불행을 생각지 못한다 하는 것예요.』

『그거야 사랑이 없는 까닭이지요. 또한 그 아내 되는 이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습관의 노예가 되는 까닭이지요.』

『흥, 사랑이 없어요? 사랑만 없다 하면 차라리 모르겠읍니다만은 그것을 지나쳐 자기의 정식 아내를 아내라는 미명하에 유린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무엇이라 할까요? 아내와 사랑이 없다는 핑계로써 다른 여자를 소위 애인이라고 사랑을 하면서 또 한옆으로 자기 아내에게 자식을 낳게 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 아내에게 대하여서 부정(不貞)일 뿐만 아니라 그 소위 애인이라 하는 사람에게 간음이 아니고 무엇예요? 정식 아내는 신성합니다. 부모가 정하여 주었다거나 또는 법률상으로 인정한다 하여 신성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자기는 누구의 아내라는 굳은 신념과 책임을 갖게 한 곳에 있어 신성하지요. 보십시오. 비록 그의 남편을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그 남편을 위하여 자아를 희생하는 곳에 있어 아마 자기네들이 싫어하는 아내 같은 이가 별로 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요사이 새로운 청년간에 애인이라는 새로운 명사를 많이 듣습니다. 애인, 진정한 애인이 있기를 나도 바라마지 않는 바가 아니지만은 자기네들도 죄악으로 덮어놓고 인정하는 첩(妾)이라는 말과 애인이라는 명사의 그 거리가 얼마나 먼지 알 수가 없는 일이 있어요.』

이 말을 들은 일복은,

『그렇지요. 거기 들어서는 나도 공명하는 의견을 가졌읍니다. 아내가 즉 애인이요 애인이 즉 아내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지요. 〈아내=애인 애인= 아내〉 여기에 비로소 완전한 애인 원만한 가정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동진씨나 나나 입으로 말하는 곳에 그럴 듯한 생리, 일리, 혹은 진리가 없지 않겠지만은 우리의 모든 행동에 모순이 있을는지 없을는지 나는 단언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감정이 미친 장님처럼 날뛸 때에 과연 생각의 일절(一節) 사이에라도 죄악의 마음이 발동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저의 입으로는 대답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이 약한 동시에 강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른 만물과 다른 점이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약한 데서 일어나 강한 데로 나가는 곳에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성품(未인 자아를 성품 成品) (成品)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그 노력 여하에 그 인격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오늘의 제가 약자가 되어 일개 여성의 눈물을 보고서 저의 입을 한 번 잘못 벌리었드면 저는 영원히 죄짓는 사람이 되었을 터이지요.』

『그것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차차 아시겠지요. 그러나 동진 씨는 나를 독신자로 물론 인정하시는 동시에 어떠한 이성의 사랑을 구하는 데 완전한 권리와 자격이 있는 것을 의심치 않으시겠지요?』

동진은 빙긋 웃어 그것을 긍정하는 뜻을 표하더니,

『그거야 그렇지요. 그러나 정희 씨와 그렇게 되셨다 하는 말씀을 들으니까 어째 좋은 마음은 들지 않는 걸요.』

『그러하시겠지요. 그런 일이 없으니만은 같지 않으니까요. 저도 좋은 감정이 일지는 않어도, 그러나 적은 것은 큰 것을 위하여 용단 있게 버릴 것이지요. 그러면 아까 말씀한 것은 꼭 그렇게⋯』

『그거야 염려 맙쇼. 말씀을 해보지요.』

9[편집]

일복은 동진의 집 문을 나섰다. 그리고 큰길 거리로 나섰을 때 등에 나무를 진 촌사람들과 지게에 물건을 듬뿍 진 장돌뱅이들이 서문으로 통해서 읍을 향하여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본 그는 무엇을 깨닫는 듯이 발을 멈칫하다가 다시 걸어가며,

『옳지, 가만 있거라. 오늘이 며칠인가? 오늘이 장날이로구나, 오늘이 장날이야. 됐다, 됐어. 그러면 오늘 엄영록이가 이동진의 집에를 들어올 터이지. 그러면 내가 부탁한 말을 하렷다』

하고서는, 웬일인지 얼굴이 시커멓고 상투꼬부랭이에 땀내 나는 옷을 입은 촌사람 장돌뱅이들이 만나는 족족 반가와 손목을 붙잡고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는 엄영록은 양순의 오라비였다, 저렇게 저 사람들처럼 생긴 촌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은행원. 제가 나를 매부를 삼기만 하면 해로울 것은 없지! 사람의 마음이라 알 수 없지만은 제가 나를 매부를 삼아 보아라.

제 등이 으쓱하여질 터이지.

일복 앞에는 새로 뜨는 아침 볕이 금색으로 번득거려 새날의 기쁜 새 소식을 전하여 주는 고마운 전령사의 사람 좋은 웃음같이 그의 마음을 즐거움으로 넘치게 하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산들산들한 길거리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혼인 잔치 구경가는 사람들처럼 발자취가 가벼웁고 기꺼운 농담이 입 가장 자리에 어린 듯하다.

그에게는 어린애가 촛불을 잡으려는 듯한 환희와 기대가 있었다. 앞길이 밝고도 붉으며 신묘하고도 즐거운 희망의 서색이 그를 끝없는 장래까지 끌고 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어린애가 다만 그 목전에 휘황한 촛불의 빛만 보고 그 뜨거운 것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일복도 또한 자기 앞길에 전개되는 광채나게 즐거운 것만 볼 줄 알았지만, 그 외에 그 광채 속에 가리어 있는 그 어떤 쓰림과 그 어떤 아픔이 있을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가 은행 문을 들어서기는 아홉 시가 십오 분을 지난 뒤였다. 앞서 온 은행원들은 장부들도 뒤적거리고 전표를 가지고 왔다갔다하기도 했다.

일복은 모자를 벗어 걸고 자기 사무상(事務床)으로 나아가려 할 때 다른 행원 두엇이 자기를 돌아다보고서는 냉정한 눈으로 다만 묵시(默視)를 하고서는 하나는 저쪽 지배인실 모퉁이를 돌아가 버리고 한 사람은 자기 상에 돌아앉아 전표에 도장을 찍을 뿐이다.

그는 일부러 당좌예금계(當座預金係)에 있는 행원에게 가까이 가서 심심풀이로 말을 붙여 보려 하였다.

『오늘은 어째 이르구려. 어제는 아마 마시지를 않은 모양이구려.』

술 잘 먹는 당좌예금계는 삐쭉하면서, 그 전 같으면 껄껄 웃고 말 일을 오늘은 어째 유난히 냉정한 태도에 침착한 어조로,

『내가 술 잘 먹는 것을 언제 보셨든가요?』

하고서는 장부를 이것저것 꺼내 들고서 쓸데없이 뒤적거린다. 이 말을 들은 일복의 마음은 불쾌하였다. 더구나 <보셨든가요>라 아주 싫었다. 전 같으면

<보셨소> 하든지 <보았다> 할 것을 오늘에 한하여 <보셨든가요> 경어를 쓰며 그의 표정이 너무 사무적인 데 일복은 불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말 한 마디를 정다웁게 꺼냈다가 도리어 불의(不意)와 분외(分外)에 존경을 받고 보니 도리어 그는 치욕을 받은 것 같고 멸시를 당한 것 같았다.

그래서 입이 멍멍 하여지며 공연히 얼굴이 홧홧하여졌다. 그러나 그대로 돌아설 것도 없어,

『아뇨.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유명하시니까 말씀예요.』

『무엇이 유명해요? 나는 그런 불명예스러운 유명은 원치 않아요.』

일복은 기가 막혀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다가,

『그렇게 말씀할 것은 없지요. 그리고 그렇게 불명예될 것은 없을 듯한데요.』

『일복 씨는 그것을 불명예로 생각지 않으시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저는 아주 얼굴 붉어지는 불명예로 알어요. 그리고 저는 언제든지 자기로 말미암아 남에게 불행을 끼치기를 원치 않으므로 이제부터는 술을 끊으려 합니다.』

『술 먹는 것으로 남에게 불행을 끼치게 할 것이 무엇입니까?』

당좌계는 「흥」하고 한 번 기막힌 듯이 웃더니 그 말 대답을 하지도 않고, 『사람이란 불쌍한 것이지요. 자기 때문에 생명을 잃은 사람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안연한 태도로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것은⋯』

일복은 속으로 「이 사람이 미쳤나?」하였다. 그래서, 「그게 무슨 말씀예요?」하려 할 때 누가 소절수(小切手) 하나를 들이밀므로 그는 그 소절수들이 민 사람의 얼굴 한 번 보고 그것을 받는 당좌계를 한 번 쳐다보고서는 남의 일에 방해가 될까 하여 이쪽 자기 사무상으로 왔다.

일복이 자기 사무상으로 가는 뒷그림자를 보는 당좌계는 현금 출납계를 건너다보며 일복을 향하여 입을 삐쭉하더니 빙긋 웃었다. 출납계원도 거기에 따라 웃었다. 일복을 보고서 말 한 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전표를 옮기는 하인까지 경멸히 여기는 태도와 또는 가까이 하기에도 무서운 눈으로 일복을 대한다. 그리고 여기저기 자기 일을 보고 앉았는 여러 사람들은 약속한 듯이 말이 없고 은행 안은 근지러운 듯이 적적하여 때때로 문 닫히는 소리와 스탬프 찍는 소리가 가라앉은 신경을 놀라웁게 자극할 뿐이다.

일복은 자기의 장부를 폈다. 그러고서 주판을 골라 놓고 한 줄기 숫자를 차례로 놓아 본 뒤에 다시 다른 장부를 펴려 하다가 다시 접어 놓고 혼자 멀거니 앉아 유리창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앉았으려니까 또다시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은 양순이며, 또는 오늘 그의 오라비와 이동진 사이에 체결될 연담(緣談)이 성공되리라는 믿음이 공연히 침울하던 마음을 양기(陽氣) 있게 흥분시켜 당장에 자기가 하늘로 올라갈 듯이 기쁜 생각이 나는 동시에 아까 당좌예금계에게 받은 반 모욕의 핀잔이 지금 와서는 자기의 행복을 장식하는 한 개 쇠못같이 밖에 생각되지 않아 혼자 빙긋 웃었다.

열 한 시가 되어도 지배인은 들어오지를 않았다. 일복은 지배인실을 돌아다보고 지배인이 들어오지 않음에 얼마간 이상히 여기는 생각이 났다. 그리고 여태까지 알지를 못하였더니 모든 사무를 다른 사람들은 지배인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처리하는 것을 그때야 발견하였다. 지배인에게 인(印)을 찍어 받아야 수리될 전표는 그대로 그 다음 계(係)로 돌아가 거기서 임시 처리가 되고, 지배인의 승낙을 받아야 할 만한 일은 내일로 연기가 된다.

그것을 본 일복은 오늘 지배인이 들어오지 않는 것은 반드시 무슨 긴급한 일이 생기었으며, 또는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아는구나 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인을 불러,

『오늘 지배인 어른은 안 오셨니?』

하고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대하여 태도가 냉정한 듯하므로 하는 수 없이 만만한 하인을 부름이다. 하인은 다만,

『네, 안 들어오셨어요. 아마 오늘은 못 들어오신다나 보아요. 무슨 일이 계신지요?』

하고서, 일종 연민히 여기는 눈으로 일복을 보다가 저쪽에서 자기를 부르므로 그리로 가 버렸다.

조금 있다가 지배인의 집 하인 하나가 은행문에 들어섰다.

『유일복 씨 계세요?』

하는 하인의 말을 수부(受付)에 앉았던 행원이 듣고서 조소하듯이 쌍긋 웃더니 얼굴짓을 하여 일복을 가리킨다. 하인의 목소리를 들은 일복은 서슴지 않고 벌떡 일어서며,

『왜 그러나?』

하였다. 하인도 일복을 조금 경멸히 여기는 듯이 시원치 않은 말씨로,

『댁에서 잠깐만 오시라고요.』

즉 지배인이 부른단 말이다.

『나를?』

『네.』

『왜?』

하인은 조금 주저하다가,

『모르겠어요?』

『여기 일은 어떻게 하고.』

『곧 오시라고 하시든 걸요. 퍽 급한 일이 있는가 봐요.』

일복은 공연히 의심이 난다. 어제 저녁에 정희가 다녀갔는데 오늘 지배인이 은행에도 들어오지 않고 또 은행사무 시간에 당장 오라는 것은 어떻든 좋은 일이 아닌 것을 예감하였다.

『가지. 먼저 가게.』

『아뇨. 같이 가세요.』

하인은 구인장(拘引狀)을 가진 형사나 순사 모양으로 의기 양양하고 또는 엄격한 빛을 띠고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일복은,

『먼저 가』

하고 조금 무례를 책하는 듯이 하인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하인은, 더욱 꿋꿋한 태도로써,

『같이 가셔야 합니다. 같이 모시고 오라 하셨어요.』

일복은 하는 수 없이 모자를 쓰고 여러 사람에게 인사하고 문 밖으로 나왔다.

나가자 은행 속에서는,

『잡혀가는구나!』

『인제는 저도 이 은행하고는 하직일세.』

『하지만 제 잘못은 아니니까.』

『이 사람아, 그럼 누구 잘못인가? 사람이 인정이 있어야지. 그렇게까지 저를 생각하는 여자를 목숨까지 끊게 하였으니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사람으로서는 너무 냉정한 짓을 하였으니!』

『말 말게. 그 사람도 하고 싶어했겠나. 다 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랬지.』

『참 알 수 없어. 글쎄 주막집 계집애가 아무리 인물이 반반하다 하드래도 그래 자기 처지도 생각하고 장래도 생각해야지. 무엇 무엇 할 것 없이 죽은 사람만 불쌍하이. 그러나 저도 잘못이지. 죽을 것까지야 무엇 있나?』

10[편집]

문 밖에 나오려니까 장꾼들이 와글와글 한다. 층계를 내려서려 하니까 우편 배달부가 편지 뭉치를 들고 은행문을 향하여 들어온다.

우편 배달부는 일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하며 인사를 하고서 편지 한 장을 꺼내 준다.

일복은 그 편지를 손에 받기 전에 벌써 그것이 김우일에게서 온 것을 알았다. 편지를 뜯었다. 그리고 읽었다.

나는 지금 이곳에 온 지 삼십 분이 못 되어 이 편지를 친애하는 군에게 쓴다. 일천여 년 긴 역사를 말하는 고운사(孤雲寺)에 오려고 맘먹기는 벌써 여러 해였으나 이제야 이곳에 발을 잠시 머물게 되니 옛날과 오늘을 한 줄에 쭈루룩 꿰뚫은 회고의 심정 위로 나의 추상의 그림자는 시간을 초월한 듯이 고금을 상하를 오락가락한다.

군이여, 안동서 여기가 걷자면 삼십 리, 멀지 않은 곳이니 한 번 다녀가라. 그대를 떠난 지도 벌써 반재여(半載餘) 멀리 있어 그립던 정이 가까운 줄을 알게 되매 더욱 끊어지는 듯이 간절하다.

義城 孤雲寺[의성고운사]에서 友一[우일]이 편지를 받아 든 일복은 의성 편을 바라보았다. 몽몽한 구름과 한없는 천애(天涯)가 다만 저쪽에 고운(孤雲)이 있다는 추상(推像)만 주고 산이 막힌 그쪽에는 산모퉁이의 위로 두어 마리 소리개가 소라진을 치고 있다.

나의 벗은 저쪽에 있다. 나의 모든 사상, 모든 감정을 속속들이 피력할 수 있고 또는 호소할 수 있으며 또는 능히 지도하여 주고 안위를 줄 수 있는 친우는 여기서 재를 넘고 물을 건너 삼십 리 저쪽에서 나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갈 터이다. 마음을 서로 비추어 밝힐 수 있고 간담을 서로 토하여 서로 알아 주는 우일에게로 나는 가리라 하였다.

그는 당장에 맥관(脈管)으로 흐르는 핏결이 술 먹어 유쾌한 흥분을 깨달은 듯이 얼굴이 더워지도록 약동함을 깨달았다. 그러고 흐르고 넘치는 회우(懷友)의 정이 그의 가슴으로 스며드는 듯함을 느꼈다.

한 사람의 지기(知己)도 갖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가진 바 없이 사막을 가려 함과 같다. 일복에게는 만 사람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우일이라는 지기가 있다. 그는 그의 생애에 기름이며 에너지였다. 우일은 자기를 바쳐서 일복을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일복을 능히 신앙을 부어 줄 만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으며, 일복을 우는 데서 웃게 하며 약한 데서 강하게 할 만한 힘이 있었다.

우일의 웃음은 도리어 일복을 감격으로 울릴 수 있으며 그의 눈물 한 방울은 일복의 용기를 솟쳐 줄 만큼 뜨거움이 있었다.

우일은 일복이 울려 할 때 웃음으로 그 눈물을 위로하였으며, 그는 일복이 넘어지려 할 때 농담 섞어 격려하여 그를 붙잡아 주는 사람이다. 네가 우느냐? 함께 울어 주는 마음 약한 동정자가 아니라 울려거든 네 맘껏 울고 그 울음을 말았거든 다시 웃어라 하는 자였다. 너는 약함을 알고 비애를 알고 고통을 알아라! 그러나 그것은 강자(强者)가 되기 위하고 또는 환희(歡喜)를 얻기 위하고 또는 무한한 생(生)의 위안을 얻기 위하여서 하라 하는 자였다.

남이 넘어지거든 그를 붙잡아라. 그리고 자기 등에 그 사람을 짊어지고 나아갈 만한 용자(勇者)가 되라. 넘어진 사람을 위하여 함께 넘어져 같이 파멸되는 자가 되지 말라 하는 자였다.

진주 같은 눈물 방울은 영원한 환희의 목을 장식하는 치렛거리요 탕 비인 한숨의 울림은 무한한 안위의 반영인 신기루로밖에 생각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복이 편지를 주머니에다 넣고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나가려 할 때에 하인은 죄수를 감시하는 간수와 같이 일복에게서 시선을 조금도 떼지 않았다.

일복은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가 다시 군청(郡廳)서기 한 사람을 만나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며 넘치는 우정을 웃음으로 나타내었으나 그 사람은 전에 없는 멸시하는 표정으로 모자를 벗고 땅만 내려다보며 인사를 하고 지나갈 뿐이다.

장거리에서 물건을 사고 팔던 사람들도 일복을 모두 한 번씩 유심히 바라본다. 저쪽에서 방물(方物)을 늘어 놓고 촌사람과 수작을 하던 상투장이 장돌뱅이가 일복을 보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무엇이라 수군댄다.

술집 마누라장이가 일복을 보았다. 허리가 아픈 듯이 뒷짐을 지고 뚱뚱한 배를 내밀고서 진물진물한 두 눈을 두어 번 끔벅끔벅하더니 긴 한숨을 휘 ── 쉬며 들릴 둥 말 둥한 소리로,

『허 ── 저렇게 얌전한 이가 가엾은 일이로군』

하며, 옆의 어린애를 업고 있는 늙은 할멈을 부르더니,

『동생네, 이리 오소. 술이나 한잔 자시소.』

사투리 섞어 동무를 부른다.

일복은 어제와 아주 다른 별천지를 지나간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게 대한 태도가 그렇게까지 고둥을 틀어 놓은 듯이 변한 줄은 알지 못하고 다만 이상한 숲 속으로 지나가는 듯이 일복은 장거리를 지나간다.

방 안에서 술 먹던 사람은 고개를 기웃 일복을 쳐다보며, 이발관에서 머리를 깎던 이발장이는 가위를 솔로 털면서 일복을 내다본다.

일복은 지배인의 집 문간에 들어섰다. 새로이 지은 주택이 해정하고 깨끗하나 그런데 맨첨 생각나는 것은 정희다.

정희가 나를 보면 어저께 일을 생각하고 퍽 부끄러워 하겠지! 아니다, 보러 나오지도 않으렷다. 보러 나오지 않는 것이 피차간 좋은 일일는지도 알지 못하니까. 그러나 오늘 지배인이 다른 날과 다르게 나를 사무 시간에 자기 집으로 부르는 것은 반드시 중대한 일이 있는 모양인데 필연 정희에게 무슨 말을 듣고서 그것을 나에게 권고하려거나 또는 책망하려는 것인 게지.

그렇지, 그래. 그러나 쓸 데 있니. 나에게는 하늘이 준 절대 자유가 있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고 하기 싫은 일은 아니하는 것이지.

일복은 마루끝까지 갔다. 그 전 같으면 문간까지 나오지 못하는 것을 한 할만치 자기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와하던 지배인이 자기가 방문 가까이 와서 기침을 서너 번 하여도 소리가 없다.

그가 열어 놓은 방을 흘깃 들여다볼 때 지배인은 그대로 자리에 누워 일복을 보고도 본체만체한다 . 어제까지 그렇게 인자하고 온정이 넘치었으나, 적의와 노여움과 심각한 비애의 빛이 그 얼굴에 박혀 있다.

일복은 방 안에 들어서 예를 하였다. 그러나 지배인은 점잖은 사람의 예하는 투로 고개를 끄덕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그의 드러누운 태도로 패전한 장군이 적군의 하급 병졸을 대하는 듯이 비소(鼻笑) 중에는 한(恨) 있는 적의를 품은 듯하였다.

일복은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그러나 어쩐지 지배인의 태도가 너무 냉담하다 함보다도 결투장에서 늙은 원수에게 무리로 결투하기를 강청함을 받은 듯이 불안하여 못 견딜 지경이었다.

『부르셨습니까?』

하는 것이 맨처음 불안을 누르고 나오는 일복의 목소리다. 지배인은 다만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을 쉬어 긴장하였던 가슴을 내려앉히더니,

『어제 저녁에 정희가 자네에게 갔든가?』

일복은 속으로 그렇지 그래, 그 까닭이지, 하면서도 부끄러운 생각이 나는 중에 얼굴이 잠깐 붉어져 수줍은 생각이 나면서도 공연히 사람을 부끄럽게 하여 준 정희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녜』

하고 정직하게 대답하였다.

『그러면 몇 시에 왔나?』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두 시는 된 듯합니다.』

『두 시?』

한 번 다시 묻더니,

『혼자 왔는가?』

『네.』

『자네는 정희를 아내로 생각하는가?』

일복은 아무 대답이 없다.

『왜 대답이 없어!』

『그것을 왜 저에게 거푸 물으십니까?』

『글쎄 거기에 대답을 해 달란 말야.』

『저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어요.』

『그것은 어째서?』

『정희는 저에게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니까요.』

지배인은 멀거니 무엇을 탄식하는 듯이 한참 있더니,

『그러면 자네 내 말 한 마디 들어 주려나?』

『무슨 말씀입니까?』

지배인은 벌떡 일어나서 바로 앉더니,

『만일 세상에 어떤 사람으로 인하여 그 어떤 사람이 목숨을 끊는다 하면 도덕상으로 보아서 그 어떤 사람은 책임을 갖게 되겠지?』

『물론 그거야 형편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형편에 따라서 다르다니, 형편이란 어떤 것 말인가?』

『즉 말씀하면 어떤 남성과 여성이 있어 그 여성이나 남성이 그 어떤 남성이나 여성을 혼자 사랑하다가 저편에서 뜻을 받어 주지 않는 편에는 책임이 없다는 말씀예요.』

이때 안방 쪽에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바늘로 찌르는 듯하고, 날카로운 칼로 저미는 듯한 여성의 울음소리가 따뜻한 햇볕이 쬐어 드는 앞마당을 지나 일복의 귓속으로 원한 있는 듯이 달려든다. 그리고 조(調)있게 뽑아 내는 애처로운 소리가 일복의 가슴 위로 살금살금 기어드는 것이 천연 산발한 처녀가 덤비어 돌아다니는 듯하다.

일복은 가슴이 공연히 내려앉았다. 지배인이 나를 불러다가 정희 말을 묻고서, 또는 어떤 사람으로 인하여 그 어떤 사람이 목숨을 끊는다 하면 도덕상으로 보아서 그 어떤 사람이 책임을 지지? 하는 말을 물은 것을 생각하면서 안에서, 곡성이 나는 것을 들으매 반드시 곡절이 있는 일인가 보다 하였다. 그러고서 자기가 거기에 대답한 말이 생각날 때 내가 대답은 그렇게 하였지만 만일 그 경우를 당장 내가 당하고 있으면 참으로 그 책임을 면할 수가 있을까?

울음소리는 일복을 소스라치고 소름이 끼치게 한다. 그리고 저 울음소리가 마녀(魔女)의 홑치맛자락이 흩날리는 것 같이 회선(回旋)하는 저 방 안 아랫목에는 창백하게 식은 정희의 시체가 놓여 있지나 아니한가? 그리고 그 정희의 죽음이 이를 악물고서 나를 영원히 원망하지 않는가?

그의 추상이 너무 불명하고 막연하게 자기 눈앞에 보일 때 그는 모든 의식에서 뛰어나 정말 정희가 죽었고 정말 정희의 홑이불 덮은 송장이 저 어머니의 우는 방 아랫목에 놓여 있는 것을 믿었다.

지배인은 안에서 울음소리 나는 것을 듣더니 북받쳐 올라오는 비애를 못 견디는 듯이 힘있고 떨리는 목소리로,

『일복 군!』

하고서 한참이나 천장을 쳐다보더니 사나이 얼굴에 금치 못하여 흐르는 뜨거운 눈물 방울이 두 뺨에 괴며,

『저 울음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자네는 아는가?』

일복도 고개를 숙이었다 . 온 방 안은 순례자의 경건한 묵도를 올리는 듯한 엄숙하고도 신비한 침묵이 돌았다. 지배인은 일복을 자기 자식같이 끼어안으며,

『일복! 나의 딸 정희는 갔네! 영원히 갔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딸을 불러 가셨네! 그러나 영과 육을 한꺼번에 찾아가셨네! 아! 일복 군! 내가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허물하겠나! 그러나 간 사람의 고통과 비애를 나누어 차지할 사람이 남어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나는 더욱 서러워한다.』

일복의 가슴은 떨리었다. 어떻게 그렇게도 나의 추상이 맞았는가? 그러면 정희가 과연 나로 인하여 죽었는가?

일복은 지배인의 점잖은 눈물을 보고서 자기도 아니 울 수가 없었다. 그의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방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더욱 그의 신경을 으스스하게 자극한다.

일복은 그때에 자기가 마음이 약한 자인 것을 다시 깨달았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자기를 힘있게 끼어안는 정희 아버지의 뜨거운 살이 자기 몸에 닿을 때 그는 웬일인지 죄지은 죄수가 의외의 특사(特赦)를 받은 듯이 눈물날 듯한 감격을 당한 동시에 또는 자기가 짓지도 않은 죄가 있는 듯이 그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게 뉘우치는 생각이 났다.

『일복 군!』

지배인의 목소리는 간원하는 정이 목이 메었다.

『정희는 죽었으나 자네는 나의 사위지? 그것을 자네가 허락지 않는다 하드래도 나는 그렇게 인정할 터일세.』

일복은 방바닥에 엎드러졌다. 그리고 눈을 감고 엎드린 방바닥 밑 암흑 속에는 정희가 있다. 저 ── 멀리 영혼이 날아가서 자기를 본 체도 하지 않고 멀거니 앉아 있다. 일복은 그 정희를 웬일인지 다시 데려 오고 싶도록 그리웠으나 그것은 할 수 없다고 단념할 때 그는 가슴이 죄도록 괴로웠다.

그리고 지배인의 묻는 말에 대하여 얼핏,

『녜』

하고 대답을 하고 싶도록 모든 꿋꿋한 감정은 풀려 버렸다. 그러나 얼른 입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때의 일복은 마음이 약하여지려는 자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그가 지배인의 얼굴을 쳐다보려고 고개를 들 때, 여전한 햇빛 여전한 현실이 그의 눈과 코와 눈과 귀와 또는 피부에 닿을 때, 그는 다시 풀렸던 감정이 다시 뭉치며 두 손을 단단히 쥐고 전신에 힘을 주었다.

그는 속으로 혼자 「아니지!」하였다. 「약자로부터 강자가 되려고 위대한 노력을 하는 자가 인격 있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눈물을 씻었다 어린애 . 꾸지람 들을까 겁하여 남몰래 씻는 듯이 눈물을 씻고 시치미를 떼는 듯이 얼굴빛을 고치고 바로 앉았다.

그리고는 또 생각하기를, 나의 입아! 네가 나를 죄짓게 마라! 하였다. 그리고 그의 심장을 속마음으로 가라앉히며 너는 상(傷)함을 받은 염통이 되지 마라! 보기에도 지긋지긋한 푸르딩딩하게 상흔이 있는 마음이 되지 마라! 그리고 영원히 새 피가 돌고 뜨거운 피가 밀물 일듯 용솟음치는 심장이 되라! 깨끗한 심장이 되라! 하였다.

「눈물에 지는 자가 되지 마라! 자기의 영(靈)을 비애라는 여울에 던지는 자가 되지 마라! 탄식이란 폭풍우에 날려 보내지 마라! 강한 자야지만 완전한 사랑도 할 수 있나니라!」

일복은 벌떡 일어서며,

「운명은 우리를 무가내하(無可奈何)라는 경지로 인도하였읍니다. 운명은 진리를 말하는 대변자입니다. 운명처럼 정직한 가치표는 없읍니다. 우리는 입이나 또는 형식으로써 그 가치표를 뜯어고칠 수는 없읍니다.」

11[편집]

집에 돌아온 일복은 쓸쓸히 빈 방에 혼자 누웠었다. 그러나 누르는 듯한 공포가 가끔가끔 공중에서 자기 가슴을 누르는 듯할 때 그는 다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 ── 그 책임은 내가 가져야 할 것이지!』

혼자 중얼거리는 그에게는 온 방안이 자기 몸에 피가 때때로 타는 듯이 고조(高調)로 긴장할 때마다 암흑하게 눈에 비친다.

「그가 죽은 것이 과연 나의 잘못으로 인함일까?」 한참 있다가 다시 멀리 보이는 강물을 실없이 내다보다가,

「그가 정말 나로 인하여 죽었다 하자!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가지고서 나에게 그 책임을 질 만한 증거를 내세울 수가 있는가?」

그는 다시 초조한 감정을 내려 앉히고서 아주 침착하고 냉정한 생각으로 그것을 순서 있고 조리 있게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일개 여성의 생명! 더구나 꽃 같은 청춘 여자의 끔찍한 생명! 인생의 무한한 생의 관맥(管脈) 중의 하나인 정희의 생명! 그 생명은 나의 이 생명과 조금도 다름없이 두 번 얻기 어려웁게 귀한 생명이다! 그러면 그와 같은 생명을 자기의 손으로 자기의 똑똑한 의식으로 사(死)의 선언을 하고 또한 자기 자신으로서 그것을 집행한 그 생명 소유자의 고통! 그것은 얼마나 정 있는 자의 동정을 받을 만하였을까? 그 동정할 만한 고통의 동기가 나에게 있다 하면 다른 몇 만 사람의 동정보다 더욱 많은 동정을 정희에게 부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자. 내가 비록 정희의 몸에 손을 대거나 또는 흉기를 대어 죽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또한 그의 생명을 빼앗으리라는 마음은 비록 먹지 않았다 할지라도 오늘의 그 결과는 어떠한가? 정희는 어떻든 죽은 것이 아닌가? 정희라는 여자가 자기의 생명이 끊길 만큼 원동적(原動的) 원인은 나에게 없다하더라도 그만큼 반동적 원인을 가진 자 되는 것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내가 법률상으로는 죄를 면할 수 있고 또는 양심으로 보아서 내가 허물이 없지마는 인간성의 보배 중 하나인 인정으로 보아서 나는 그 책임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나 때문에 초민하고 나 때문에 고통하고 나 때문에 울고 또한 나 때문에 죽고 내가 있으므로 그의 인생이 의의 있을 수 있었고 또한 내가 있어 그의 생애가 능히 무가(無價)할 수 있는, 즉 내가 있으므로 그의 생이 죽고 살 수 있는 그를 오늘날 생명까지 끊게 한 나는 오늘에 이렇게 살아 있어 자기의 생을 누리고 또한 자기의 사랑을 사랑할 만치 무책임한 자이며 몰인정한 자일까? 자기의 생명을 귀중히 알면은 또한 남의 것도 그렇게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새로이 따가운 인정이 그의 전신을 따뜻하게 싸고 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서 그 전에는 그렇게까지 보기도 싫어하던 정희의 모든 것을 다시 불러내어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만나 보고 싶도록 그리운 생각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최근의 그를 보던 때와 또는 최초에 그를 만나던 때를 번개같이 머리 속에서 중동을 끊어 영사(映寫)하는 활동사진 필름같이 보았다.

그리고 어제 저녁 자기 앞에서 흘린 눈물 방울이 떨어진 방바닥을 한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보고, 또는 어저께 정희가 신 벗어 놓았던 마루끝을 여전히 그 신이 있는 듯이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 이 방문을 정희가 나갈 적에 나의 이 손이 한 번만 붙잡았더라면 오늘 그가 그대로 이 세상에, 더구나 나와 가까운 안동읍에 살아 있을 걸!」

하고서 문지방과 문설주를 만져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서 그는 다시 정희가 그 옆에 앉아서 자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듯이 「정희!」하고 불러 보았을 때 그 <정>하는 음의 종성(終聲)인 <ㅇ> 음이 피아노의 <파>음이 연하고 부드럽게 울려나오는 듯하였다. 그래서 그는,

「정희! 정! 정!」 두어 번 거푸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나 대답이 없고 다만 새파랗게 개인 공중에 두어 점 구름이 미끄러지는 듯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가는 것이 눈에 보일 뿐이다.

그러매 그는 고적한 듯한 생각이 나며 또는 여태까지 자기를 칭찬하고 숭모(崇慕)까지 하던 온 안동 전읍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떠나 자기를 욕하고 비웃고 나중에는 저주까지 하는 듯이 생각이 들 때 그는 암야(暗夜)에 귀신 많은 산골을 지나가는 듯이 머리끝이 으쓱할 만큼 무서움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기를 누가 있어 두 어깨를 답삭 들어 천인절벽(千仞絶壁) 밑 밑 없는 음부(陰府)에 내려던지려고 지금 그 위에 번쩍 들고 있어 대롱대롱 매달린 듯하다.

그는 그러나 그 무서움 속에서도 억울함이 있었다. 몸이 떨리는 중에서도 그 비(非)를 반발하고 자기의 시(是)를 호소할 만한 정의를 주재하는 이를 찾아보고 싶었다.

그는 자기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두려움과 자기의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떨림을 어떻게 무엇으로든지 이길 것을 찾으려 애썼다.

그는 방에 들어앉은 것이 지옥에 들어앉은 듯하였다. 그래서 그 지옥을 벗어나기 위하여 밖으로 나왔다.

밖에 심은 푸성귀 향내. 저쪽 우물에서 물 길어올리는 두레박에서 흐르는 물방울. 먼 산에서 바람에 춤추는 허리 굽은 장송(丈松). 빨래하는 못 속에 비친 촌녀(村女)의 불겅 저고리, 검은 치마.

그는 지옥에서 나왔다. 그러나 유열(愉悅)과 환락(歡樂)이 흐르는 천당에는 들지 못하였다. 태우는 몰약(沒藥)에 혼을 사르고 피우는 볼삼(bolsam)에 영을 취(醉)케 하는 듯한 몽중(夢中)에 들지는 못하였으나, 배암의 혀끝에서 흐르는 듯한 독액(毒液)을 빠는 듯하고 삼 척(三尺) 긴 칼끝에 묻은 독약을 피 솟는 가슴에 받은 듯한 고통은 잊었다.

그는 발을 정처없이 옮겨 놓았다. 그러나 가고 싶은 곳도 없고 오라고 하는 곳도 없었다.

새로운 공기와 향기로운 풀 내음새가 저으기 초민에 타는 듯한 가슴을 문질러 줄 뿐이다.

「어찌할꼬? 내가 책임을 져? 진다 하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책임을 진다고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단념하는 수밖에 없거니와 그렇지 않고는 무슨 다른 도리가 있을까? 그러면 정희가 나로 인하여 죽었으니 나도 또한 정희를 위하여 죽을까?」

그것을 생각한 일복은 혼자 껄껄 웃으며, 죽는다니 어리석은 「 일이지. 내가 생에 대한 집력(執力)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어리석은 희생자는 되기 싫어!」

그러면 또 무엇이냐? 나를 사랑하여, 즉 사랑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바친 정희를 위하여서는 나는 사랑을 바치는 것밖에는 없지? 그렇지. 나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할지라도 나의 사랑은 바쳐야 할 것이다.

그러면 사랑을 바친다 함에는 다만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즉 소극적으로 내가 일평생 다른 여성을 사랑하지 않고 나의 정신과 육체로써 정희를 위하여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길을 새 길로 취하였다. 초가집 담 모퉁이를 돌고 밭고랑을 지날 때 그는 자기의 그림자가 땅 위에 비쳐 있어, 자기를 따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사랑은 생의 일부분이지!」하면서 고개를 들어 저쪽 영호루를 보았다. 그러자 그의 머리에는 또다시 양순이가 보였다. 그 양순의 자태가 자기 눈앞에서 춤추는 듯 환영이 보일 때 그는 또다시,

「사랑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을 만치 강한 것이다. 불이 나무에 붙을 수 있는 것이지마는 그 나무를 능히 사를 수 있는 것 같이 사랑도 생 있는 연후에 작열할 수 있는 것이지마는 능히 그 생을 불살라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자기 어깨를 탁 치며,

『어디를 가시오?』하는 사람이 있었다. 일복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기에는 이동진이가 한턱 내라는 듯이 웃으며 서 있었다.

『어째 여기까지, 이렇게?』 하며 일복은 조금 주저하는 중에도 반가와 손을 내밀었다.

『네, 나는 일복 씨에게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읍니다.』

일복은 그 좋은 소식이란 양순과 자기 사이의 연담이 그 공을 이룬 줄로 추상되었을 때 그의 맥을 풀리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반가운 표정도 보이지 못하고 도리어 침착하게,

『무슨 소식을요?』

『녜, 반가운 소식입니다. 엄영록은 그것을 승낙하였읍니다. 당장에 쾌락하였읍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틀렸읍니다. 내가 또다시 다른 여성을 사랑할 권리는 있지마는 나는 그 권리를 나로 인하여 죽은 여성을 위하여 내버리려 합니다.』

이동진은 껄껄 웃었다. 그리고서는 일복에게,

『그것은 어째서요?』 하고 물었다.

『그것은 동진 씨도 아시겠지마는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한 사람입니다.』

이동진은 입을 크게 벌리며 또다시 웃더니,

『나는 알겠읍니다. 정희 씨가 죽은 까닭이겠지요?』

일복은 남이 그 말을 하는데 너무 감정이 감상으로 변하여 눈물이 날 듯하였다. 그러나 억지로 그것을 참고서,

『네』하고 먼 산을 보았다.

동진은 얼굴빛을 교회사(敎誨師)처럼 엄숙한 중에도 정이 어리게 하며,

『여보세요! 일복 씨! 정희 씨가 죽은 것이 당신으로 인하여 죽은 줄 아십니까? 물론 그 외면적 원인은 일복 씨에게 있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희씨 그이는 자기 자신의 사랑을 위하여 죽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사랑을 완전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만들기 위하여 죽은 것입니다. 지금 만일 그 정희 씨의 혼령이 있어 우리가 그 의견을 들을 수 있다 하면, 그는 당신에게 호소할 것도 없는 동시에 또한 원망도 없을 터이지요. 그는 옛날에 순교자가 폭군의 칼날도 무서워하지 않고 자기의 신앙을 위하여 죽은 것과 같이 자기의 사랑을 위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은 것이지요.』

일복은,

『그렇지만 내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으니까요.』

동진은 다시 힘있게,

『그렇지요. 그 책임이 있다 하면 있겠지요. 그리고 없다 하면 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일 일복 씨가 또다시 다른 여성을 사랑하지 않으신다 하시니 당신은 그 무가치한 인정 ── 이 경우에만 말씀입니다. ── 그것으로 인하여 일평생 당신은 사랑을 못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사랑을 하는 사람이어야만 이 세상에서 강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만큼 위대한 세력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또 없으니까요! 사랑은 생(生)보다 적으나 온 생을 포괄하고 또한 지배할 수 있읍니다. 마치 우리 인생이 우주의 일부분에 불과하나 능히 그 영(靈)으로서 온 우주를 포괄할 수 있는 것 같이! 나는 적은 인정을 이겨 큰 사랑을 하시라 권합니다. 인정이 물론 우리 인류의 꽃이지만 사랑은 여왕입니다. 만일 신심깊은 목사가 어떠한 매춘부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하면 그것을 동정이나 연민이라 할지언정 사랑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 동정이나 연민으로 인하여 도리어 자기가 죄짓기를 원치 않을까. 일복 씨! 정희 씨는 정희 씨의 사랑을 위하여 순(殉)하였읍니다. 일복 씨는 또한 일복 씨의 사랑을 위하여 최후까지 강하게 나아가셔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일복은 새로운 광명이 자기 앞에서 번득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 그는 동진의 손을 잡고서, 동정은 사랑이 아니지요 『 ? 나는 나의 사랑에 충실하여야 할 것이지요? 사랑을 하여야 참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우리 인간미를 영의 나라에서 참으로 맛볼 수가 있겠지요? 고맙습니다. 나는 그러면 지금에 잘못 길을 들려 할 때 동진 씨가 그것을 가르쳐 주심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동진은,

『아뇨, 천만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어떻든 나는 당신의 장래할 행복이 영원하기를 빕니다. 오늘 엄영록은 당신에게 행복의 문을 열어 놓았읍니다.』

12[편집]

일복은 그 이튿날 해가 떨어지려 할 때 양순의 물긷는 우물을 향하여 갔다.

어제 동진에게 엄영록이가 자기 누이동생 양순을 자기에게 허락하였다는 말을 듣기는 듣고 당장에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는 하였으나, 한옆으로 부끄러웁고 또 한옆으로 점잖은 생각이 나서 그날 바로 가지는 못하고 오늘 하루종일 주저하다가 겨우 해 떨어지려 할 때 그 우물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집에서 떠나기는 오정 때나 되었었으나 공연히 빙빙 돌아다니느라고 그날 해를 다 보내었다.

그는 우물 옆에 서서 오리라고 기대하는 양순을 기다릴 때 이슬같이 흐르는 반웃음이 입 가장자리에 돌아 보는 이의 단침을 삼키게 할 듯하였다. 그리고 또는 고대하는 가슴이 따갑게 타서 불난 곳에 화광(火光)이 하늘에 퍼지는 것 같이 그의 가슴의 불길이 하얀 피부 밑으로 살짝 밀렸을 그의 용모는 술 취한 신랑같이 보였다.

그는 북국(北國)의 회색 천지에서 석죽색(石竹色) 공중에 연분홍 정조(情調)가 떠도는 남국(南國)에 온 것 같이 껴안고 딩굴 만치 흘러 넘치는 희열이 도리어 그를 가슴이 두근거리도록 흥분시키며 입에 윤기가 흐를 만치 오감(五感)에 감촉되는 모든 것을 껴안고 입맞추고 싶었다.

그는 우물에 허리를 구부리고 물 한 두레박을 퍼먹었다. 그러고 나니까 흥분되었던 것이 조금 가라앉았다.

사람의 기척만 나도 그쪽을 보고서 속으로,

「오는가?」

하다가 아니 오면 무참히 고개를 돌리기를 몇 번이나 하였는지, 어떤 때는 벌떡 일어서려다가 다른 곳을 보고서 군소리까지 한 일이 있었다.

사면은 조용하다. 저쪽 포플라 그늘 속으로 대구서 오는 자동차가 읍을 향하여 달아나고는 또다시 무엇으로 탁 때린 듯이 조용하다.

멀리서 저녁짓는 연기가 공중으로 오르지 않고 땅 위로 기어간다. 아마 비가 오려는가 보다.

그러나 양순의 그림자는 볼 수 없었다. 일복은 우물 옆 잔디 위 넓죽한 돌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양순의 집을 머릿속으로 보고 앉았었다. 양순의 오라비 엄영록은 무엇을 하는가? 마루 위에 벌떡 드러누워 아리랑 타령을 하지 않으면 땔나무를 끌어들이렷다. 양순의 어머니는 무엇을 하는가? 부엌에서 솥뚜껑을 열어 보고서 옆에서 가로 거치는 개란 놈의 허구리를 한 발 툭 차며 「이 가이!」 하고 소리를 지르렷다. 그러고 보자, 양순은 지금 마루 끝에 내려섰다. 그러면서 혼자 속마음으로 「오늘도 또 그이가 안 왔으면 어떻게 하노? 그가 와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면서 툇마루 위에 놓았던 또아리를 휘휘 감아 가리마 어여쁘게 탄 머리 위에 턱 얹고서 허리를 굽혀 물동이를 이렷다. 그럴 때 그만 잘못 또아리가 비뚤어지니까 그 옆에 있던 오라비더러 그것을 고쳐 놓아 달라고 두 팔로 물동이를 공중을 향하여 번쩍 들고 있으렷다. 그러면 그 오라비는 자기 누이 곁으로 와서 그 또아리를 바로 놓아 주면서 자기 누이가 새삼스럽게 어여쁘기도 하고 또 이 나하고 혼인할 것을 생각하매 아주 좋아서,

「저것이 시집을 가면 흉만 잡힐 터이야. 또 쫓겨나 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쫓겨오지! 쫓겨 와! 얘, 양반 남편 섬기기가 어떻게 어려운데 그러니?」

하며 놀려먹으면 양순은 얼굴이 그만 빨개져서 물동이를 내던질 만치 부끄러워 저의 오라비에게 달려들며,

「에그, 난 싫어. 오라버니두, 그럼 난 물 안 길러 갈 테야」

하다가 그래도 나를 못 잊어 문 밖을 나서렷다. 지금 나섰다. 그리고 걸어 온다. 지금 오는 중이다.

일복은 혼자 눈을 감고서 머리속에서 양순의 걸음 걸어오는 것을 하나 둘 세고 있다. 그리고 지금쯤은 그 수양버들나무 밑을 걸어오렷다. 지금은 밭이랑을 지났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요 모퉁이 돌아섰다. 양순은 지금 나를 보면서 이리로 온다. 왔다. 이만하면 눈을 떠야지. 이 눈을 뜨면은 양순이 바로 내 앞에 있을 터이지.

일복은 눈을 떴다 . 정말 양순이 서 있다. 그러나 저를 보고서 「악」하고 서 희롱삼아 깜짝 놀라며 가만가만 상글상글 웃으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는 돌아서서 울고 있었다.

이게 웬일이냐? 일복은 벌떡 일어나서 양순의 등 뒤로 가서,

『왜 그래?』

하며 두 어깨를 껴안을 듯이 두 손으로 쥐었다.

그러나 양순은 자꾸 울고 있을 뿐이다.

『왜 울어, 응?』

일복은 귀 밑에서 소곤거려 물었다.

그래도 말이 없다.

『말을 해야지?』

일복은 두 어깨를 재촉하듯이 흔들었다. 그때야 겨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아녜요.』

『아니라니, 집에서 꾸지람을 들었나?』

『아뇨.』

『그럼 무엇을 잘못한 것이 있나?』

『아녜요.』

『그럼 내가 오지 않어서 그래?』

『그것도 아녜요.』

『그럼 무엇야?』

양순은 눈물을 두 뺨 위에 흐르는 채 그대로 내버려 두고서 긴 한숨을 힘없이 쉬더니 일복을 바라보며,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는 아직까지 보지 못하던 애수가 뭉켰었다.

『왜 그래?』

일복의 감정은 이유없이 양순의 애수에 전염되어 그도 울고 싶었다.

『당신은 양반이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저는 상사람의 딸입니다.』

일복은 속으로 껄껄 웃었다. 그러나 양순은 말을 계속하여,

『저를 생각하시는 것은 도리어 당신 명예나 신상에 이롭지 못합니다. 저를 잊으시는 것이 도리어 당신이 저를 생각하여 주시는 정예요. 오늘부터 저를 잊어 주세요.』

일복은, 그게 무슨 소리야 양순이가 『 . 없으면 내가 없는데 나는 어디까지든지 양순을 잊을 수는 없어. 내가 잊지 않으려는 것 아니라 잊어지지 않는 것을 어찌하나?』

『여보세요. 나는 당신을 섬길 마음이 간절하지마는 저는 내일⋯아녜요.

저는 당신을 섬길 몸이 못 되지요. 너무 천한 몸예요.』

양순은 내일이라는 말을 하다가 다시 말을 고쳐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일복은 의심이 생기어,

『무엇야, 내일 어째?』

양순은 이 말을 듣더니 눈물이 새로이 떨어지며 울음이 복받쳐 올라온다.

『여보세요? 당신은 저를 참으로 생각하시지요? 그러면 저를 데리고 어디로든지 가 주세요. 저는 내일 돈 백 원에 팔려 가는 몸예요. 우리 어머니는 돈 백 원에 나를 장돌뱅이에게 팔었어요. 그래서 내일은 그 장돌뱅이가 와요.』

『무엇?』

일복의 몸과 혼이 한꺼번에 떨리기 시작하였다. 일복의 가슴에 몸을 기댄 양순의 몸까지 부리나케 떨린다.

『정말야?』

일복은 다시 물었다. 그러다가는 양순의 귀 밑에 입을 대고,

『거짓말이지? 응?』

그것이 거짓말이지 참말일 리는 없었다.

『거짓말이지? 거짓말?』

『왜 거짓말을 해요?』

일복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에서 형광(螢光)같은 불빛이 번쩍이며,

『여! 금수(禽獸)! 독사다! 내가 그런 짐승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자기 딸의 살과 피를 뜯어먹고 빨어먹는 귀신이다. 에! 그런 것을 그대로 두어?』

그는 당장에 그쪽으로 향하여 가려 하였다. 그가 힘있는 발을 한 걸음 내놓았을 때,

『왜 이러세요.』

양순은 일복의 팔을 붙잡았다.

『우리 오라버니는 황소 하나를 드는 기운을 가진 이예요. 당신이 가시면 당장에 큰일나세요.』

『아냐. 내가 가서 그까짓 것들은 모조리 처치를 할 터이야.』

『가지 마세요. 글쎄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세요.』

일복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양순은 한참 있다가,

『여보세요! 저는 당신의 몸이지요?』

『왜 그것을 거퍼 물어?』

『글쎄 대답을 하세요.』

『그래.』

『그러면 저를 죽이시거나 살리시거나 그것은 당신에게 달렸으니까 저를 어디로든지 데불고 멀리 가 주세요.』

『어디로?』

『어디로든지.』

『죽을 때까지?』

『죽어도 좋아요. 당신과 같이 죽으면…』

양순은 일복의 허리에 착 감기며 잠깐 바르르 떨더니,

『여보세요. 나는 결심했습니다. 저의 한 가지 길은 그것밖에 없어요.』

일복의 마음은 무엇으로 부수려 할지라도 부술 수 없이 단단하여졌다. 온 우주의 정령과 세력의 정화(精華)가 그의 가슴에 엉키어 만능의 힘을 가지게 된 듯하였다. 그리고서 형광 같은 신앙의 불길이 그 앞에서 붙으며 최대의 세력이 그 전 관능(全官能)을 지배하는 듯하였다.

『나도!』그의 부르짖음은 굳세었다. 그리고 투사(鬪士)가 모자(gage)를 던진 그 찰나와 같이 아무 세력도 그의 의지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러면!』일복은 말을 꺼냈다.

『오늘 저녁에라도 달아날까?』

『네!』

양순은 몸을 턱 일복의 팔에 실면서 대답하였다.

『저를 저기서 해가 넘어가는 저 산 뒤까지라도 데려다 주세요. 그리고 언제든지 같이 가세요. 저는 당신이 계실 때는 조금도 무서운 것이 없으나 당신이 없으시면 무서워 죽겠어요.』

『그러지, 그래. 어디든지 데리고 가지. 같이 가고 같이 살고 같이 죽지!

응?』

양순은,

『네』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일복은 벌개진 서천(西天)을 한탄 있는 눈으로 한참 바라보다가,

『그렇다, 그렇지!』

하며 손뼉을 탁 치더니,

『옳지, 옳아』하며 무엇을 혼자 깨달은 듯이,

『이것 봐! 그러면 좋은 수가 있어! 만일 어머니에게 내가 돈 백 원을 주면 고만이지! 그렇지? 그래그래, 그러면 고만야. 자, 오늘 그러면 어머니에게 나는 의논을 할 테야.』

양순은,

『글쎄요. 그러나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셨어요?』

『그것야 어디 가서든지 변통을 하여 오지! 그것은 염려 없어. 그러나 그것을 저쪽에서 물러 줄는지가 의문이지.』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이 멀리 가지 않어도 괜찮지요?』

『그것야 말할 것도 없지!』

『정말요?』

『그럼.』

양순은 눈물 방울을 방울방울 눈썹에 달고서 좋아 못 견디어 나오는 웃음을 웃으면서,

『그러면 저는 공연히 울었어요』

하고 두 손등으로 눈을 씻었다.

13[편집]

일복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이동진을 만났다.

『아, 그런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일복은 인사도 없이 댓바람에 물어 보았다. 동진도 그 말을 알아들은 듯이,

『허, 참 일이 우습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만나 뵙고 그 말씀이나 여쭈려고 지금 댁에를 다녀오는 길입니다.』

일복은 주춤하고 서서,

『글쎄 그런 일이 어디 있읍니까? 돈 백 원에 일직(一直) 사는 장돌뱅이에게 팔아먹었다니, 그런 비인도의 짓이 글쎄 어디 있읍니까?』

하고서 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내돌린다.

『글쎄요. 저도 그 말을 오늘야 듣고서 퍽 분개하였읍니다. 그런 죄악의 짓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니 짐승이 아니고 무엇에요』

하고서 동진은 손에 들었던 사냥총을 다시 어깨에 메고서,

『이번 일은 제가 퍽 미안하게 되었읍니다. 그 내용인즉 이렇습니다그려.

엄영록은 자기 어머니가 자기 딸을 팔아먹은 줄 알지 못하고서 나에게 그와 같이 승낙을 하였다가 그날 자기 집에 가서 어미와 의논을 하여 보니까 어미 말이 그와 같은 일이 있으므로 할 수 없다고 하드랍니다. 그 어미 말이 그 돈 백 원이라는 것도 그 어미가 그 장돌뱅이 놈에게 거진 이백 원 돈의 빚이 있는 것을 얼마간은 탕감해 주고 그 딸을 백 원에 쳐서 데려 가는 것이랍니다그려. 어떻든 언어도단이지요. 말할 것도 없지마는 그 어미가 나쁩니다. 그래서 나는 그 어미도 알고 또는 어미도 내 말이라면 웬만한 것은 듣는 터인 고로 오늘 일복 씨하고 같이 가서 직접 말이라도 해 보고 만일 돈이라도 달라면 좀 안 되기는 하였읍니다마는 돈이라도 주시지요.』

일복도,

『그러지요. 돈야 주려면 주겠지요마는 어떻든 일이 잘 되었으면 좋겠읍니다. 동진 씨가 많이 진력하여 주실 줄만 믿습니다.』

『힘은 써 보지요마는. 무얼 그런 것들은 돈만 주면 고만이지요. 그저 돈예요. 돈』

하며 동진은 손가락을 동그렇게 만들어 내흔든다. 일복의 마음에도, 그렇지, 돈만 많이 주어 보아라. 저의 입들이 딱 벌어질 터이니. 그놈이 백 원 주면 나는 이백 원 주지. 그래도 싫달라구? 그러나 돈으로 애인을 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걸! 그러나 아냐. 결함 많은 세상에서 살려는 우리의 임시 권도지!

『그러면 이따 저녁 잡순 후에 우리 같이 가십시다. 아니. 우리 집 가서 저녁을 같이 잡숫고 그리고 같이 가십시다』

하며 동진의 팔을 끌어당기었다.

『아녜요. 집에 가서 먹지요.』

『같이 가세요. 우리 집에도 밥 있읍니다. 밥 없을까 보아서 그러세요? 하하.』

두 사람은 일복의 집으로 가기로 정하였다.

얼마 가다 동진은 어깨에 메었던 사냥총을 보이며.

『이것 좋지요? 어저께 허가가 나왔어요. 그래서 내일은 사냥을 좀 해 볼까 합니다.』

『그것 참 좋습니다그려. 얼마 주셨어요?』

『○○원 주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어떤 선생님에게 총 놓는 법을 한일 년간 배운 일이 있지요.』

『그러면 퍽 잘 놓으시겠읍니다.』

『무얼요. 잘 놓지는 못하여도 대강 짐작은 합니다.』

『이것으로 사람을 놓으면 죽지요?』

『죽고말고요. 바로 맞으면 죽습니다.』

『그러나 몇 방이나 나갑니까?』

『오연발예요.』

일복은 그 총을 빼앗아 들고서 한 번 노려보더니,

『저도 대구 있을 때 일본 사냥군의 총을 두어 번 놔 본 일은 있지요. 그러나 겁이 나요. 하지만 총이란 위태한 것인 까닭에 가까이하는 것이 좋지는 못하지요. 어떻든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이 되어서 웬만큼 자제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무슨 짓이든지 하니까요.』

『그래요. 그러기에 조선에도 성미가 급한 사람이 주머니칼을 아니 가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사람을 죽이는 것도 거의 다 그 자제력 없는 데서 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감정을 누를 만한 자제력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읍니까? 감정은 피도 생명인데 더구나 사랑으로 인하여 사람을 죽였다 하면, 즉 자기의 사랑 원수를 죽였다 하면 그것은 얼마간 동정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다가,

『고만두십시다. 그까짓 이야기는, 우리 관에 가서 쇠고기나 한 근 사고 술집에 가서 술이나 몇 잔 받어 가지고 가십시다.…그러나 그 돈을 준비하실 수가 있읍니까?』

일복은 속에 예산하기를 의성 고운사에 있는 김우일에게 그와 같은 사정을 하지 않고라도 자기가 급히 쓸 데가 있으니 얼마간 보내라 하면 그만한 것은 즉시 보내 줄 줄을 믿는 터이므로 그렇게 하기로 하고서,

『그거야 되지요. 어떻든 하면 그거야 못 되겠읍니까.』

『만일 없으시면 저라도 변통하여 드리지요.』

두 사람은 밥을 먹었다. 일복은 먹을 줄을 모르는 술을 동진의 강권에 못 이기 어 석 잔이나 먹었다. 얼굴이 빨개지고 숨소리가 잦았다. 그리고 온 세상이 팽팽 내돌리고 어질어질하면서도 그의 감정이 흥분되어 앞에 무서운 것이 별로 없고, 유쾌함이 한이 없다. 그래서,

『여보, 동진 씨!』 아무리 똑똑히 한 말이라도 자꾸 헛나간다.

『그까짓 년을 그래 그대로 둔단 말이요?』

동진은 껄껄 웃으며,

『여보, 술 취했소. 정신차리시우.』

『술이 취해요? 예 여보시우. 그까짓 술에 취해요』하고서는 머리를 짚으며,

『어, 머리 아퍼』한다.

『큰소리는 고만하시우, 당장에 머리가 아프다면서 그러십니까? 자, 어서 갈 곳이나 가 봅시다.』

『가지요! 자, 이번 일은 꼭 동진 씨에게 있읍니다. 만일 듣지를 않으면 그런 짐승 같은 것은 죽여 버리지.』

『사람을 죽여요? 그것은 죄 아닌가요?』

『그것이 어디 사람인가요? 짐승이지요. 짐승을 죽이는 것이 죄예요?』

『그럼 죄가 아녜요? 요새 사냥 규칙을 좀 보십시오. 팔자가 사람보다도 좋은 짐승이 어떻게 많은데 그러십니까?』

『녜, 보호받는 짐승들 말씀이지요. 그래요. 짐승도 마음이 곱고 모양이 어여쁘면 대접을 받어요. 그러니까 사람은 동물 아닌가요. 그저 짐승만 못한 것은 일찍 죽여 버리는 것이 도리어 양순 씨를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이렇게 실없은 말 섞어서 무엇이라 떠들더니 구두를 신으려고 마루 끝에 내려서려 하다가 다리가 헛놓여서 고만 주저앉았다. 이것을 본 동진이가,

『글쎄 이게 무슨 짓이요. 그렇게 취하셨소?』

『아녜요. 취하기는 취했어도 정신은 까딱 없어요.』

동진은 짚어 세워 놓았던 사냥총을 집으며,

『이것을 어떻게 할까? 가지고 가자니 안 되었고.』

일복은,

『이리 주세요. 내 방에 두세요. 내일이나 이따가 찾어 가시지요.』

『그렇지만 위험합니다.』

『위험하기는 누가 어쩌나요?』

『그러나 탄환을 아까 장난하느라고 다섯 개를 넣었다가 한 개를 쓰고 네 개가 남었는데요.』

『괜찮어요. 나도 그만한 주의는 하는 사람이랍니다. 염려 말고, 자, 내 방에 두세요』

하고, 일복은 총을 방에 들여다 세우고 나왔다.

14[편집]

의성이라 고운사다. 울울창창한 대삼림(大森林)이 제철형(蹄鐵形)으로 등을 껴안아 고개를 돌려 쳐다보면은 높이 뜬 솔개가 그 중턱에서 배회한다.

절 옆으로 흐르는 잔잔한 시내 소리는 숲 속에서 울려나오는 자규(子規)의 소리와 이리저리 얼키어 한아(閑雅)한 정조에다 새긴 듯한 무늬를 놓아 놓는다. 가운루(駕雲樓) 옛집이 구름을 꿰뚫지는 못하였으나 천여 재 시일을 구슬 꿰듯 하였고, 최고운(崔孤雲) 선생의 목소리는 들을수 없으나 그의 발자취를 고를 수 있는 듯하다.

여기 온 지 며칠이 되지 못한 김우일은 사무실 뒷방에 혼자 누웠다. 너무 고요한 것이 피부를 간지럽게 문지르는 듯하다. 저쪽 선방(禪房)에서 참선하는 소리가 가끔가끔 그 간지러운 정적을 긁어 줄 뿐이다.

우일은 혼잣말로,

「이상하다!」 하고서는 벌떡 일어났다.

『오늘 저녁에는 다시 한번 나가 보리라!』

할 즈음에 그 절 주임(主任)의 대리를 보는 중 하나가 앞 복도를 지나다가 우일을 보고서 합장하고 와 앉는다. 얼굴빛은 자둣빛같이 검붉으나 건강하다는 것을 유감없이 나타내며 미목(眉目)이 청수하여 그의 천분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웃음지으며 말을 꺼낼 때에 하얀 이가 사람의 마음을 잡아당긴다.

『심심하시지요?』그는 꿇어앉아 친절하게 물어 본다.

『네, 조금 무료합니다. 그러나 퍽 좋습니다.』

『무얼 좋을 거야 있겠읍니까마는 속계(俗界)보다야 조금 한적한 맛이 있지요.』

『조금뿐이 아니라 퍽 많습니다. 이런 데서 살면은 늙지를 않을 것 같습니다.』

『네. 헤헤, 그렇습니다. 건강에 관계가 조금 있지요.』

우일은 화제를 돌리어,

『그런데 이 절에 모두 몇 분이나 계십니까?』

『몇 사람 안 됩니다. 한 이십여 인밖에.』

『여자라고는 하나도 없겠지요?』

그 중은 시치미나 떼는 것처럼,

『없읍니다』하니까 우일은 의심쩍은 듯이,

『네 ──』하고서는 멀거니 서 있다. 그러니까 그 중은 할 말이 없어 군 이야기처럼,

『안동읍에 가 보신 일이 계신가요?』

『한 두어 번 가 보았지요. 거기에는 나의 절친한 친구 한 사람 있어서요.』

『네, 그러세요. 누구십니까요?』

『네, 지금 은행에 있는 유일복이라는 사람예요.』

이 말을 들은 중은,

『유일복 씨요!』하고 고개를 기웃하고 무엇인지 한참 생각하다가,

『그의 본댁이 의성이지요?』

『네. 바로 우리 집하고 가깝습니다.』

김우일은 이 중도 그러면 혹시 유일복을 짐작하는가 하여,

『그것은 어떻게 아십니까?』

『녜, 알 만한 일이 있어요. 들으니까 그이가 은행 일을 고만두었다나 보아요.』

김우일은 깜짝 놀라는 듯이.

『그럴 리가 있나요?』

『아니올시다. 고만두었읍니다. 그럴 사정이 있어요.』

김우일은 속마음으로 일복 사정은 나같이 자세히 알 사람이 없는데 내가 모르게 일복이 은행 일을 그만두었다니 네가 잘못 알았다 하는 듯이,

『아마 똑같은 이름이 있는 게지요』

하니까 그 주지 대리는,

『그러면 우일 씨 아시는 그 어른이 저 아는 그이가 아닌 게지요.』

『그렇지만 안동은행에는 유성(柳姓) 가진 이가 그 사람밖에 없는 걸요.』

『그러면 정희라고 아십니까?』

『은행 지배인의 딸 말씀입니까?』

『녜, 녜. 바로 맞었읍니다.』

『알고 말고요. 그이가 유일복과 정혼한 이죠.』

『바로 맞었읍니다. 녜, 녜.』

주지 대리는 한숨을 후 쉬더니,

『참 가엾은 일예요』하고 고개를 숙인다.

우일은 무슨 가탄한 일이 일복과 정희 사이에 생겼는가 하여,『무슨 일이요?』 하니까 그 중은,

『말씀할 것까지는 없읍니다마는…가엾어요.』

우일은 궁금증이 나서 무슨 일인지 어떻게 해서든지 알아보려고,

『무슨 일인지 가르쳐 주십쇼그려. 궁금합니다. 그렇지 않어도 요사이 그 사람의 소식을 듣지 못해서 궁금하던 차인데요.』

『녜, 일복 씨하고 그렇게 친하시다 하고 또 우일 씨를 신용하는 까닭에 말씀은 하겠읍니다마는 정희 씨가 일전에 돌아갔지요.』

이 말을 들은 우일은 자기의 동생의 죽음을 들은 듯이,

『녜? 죽어요?』

중은,

『네』

하고서 점잖게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으며 입속으로 중얼중얼 염불을 하였다.

『어떻게 하다가요? 병이 났었든가요?』

우일은 바짝 달라붙어 앉았다.

『아니지요.』

그 중은 다시 점잖게 고개를 내흔들더니,

『물에 빠졌지요』

하며 입맛을 다셨다.

우일은 중의 얼굴을 무엇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듯이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여태까지 민틋한 얼굴에 윤기가 번쩍거리고 그야말로 영광(靈光)이 있는 듯하더니 지금 자기가 속마음에 어제 저녁 자기가 변소에 갔을 때에 이 절에는 여자가 하나도 없다는 데서 여자를 본 것과 또는 그 여자가 정희와 똑같은 것을 본 것을 생각하면서 그 중의 얼굴을 보니까 그 윤기와 영광은 어디로 사라지고 짐승의 털 같은 검은 수염과 사자 입 같은 길게 째진 입과 이리의 욕심 많은 눈 같은 두 눈이 보일 뿐이다.

아무리 신심(信心) 깊다는 승(僧)ㆍ목사(牧師) 등 여러 종교가에게 대하여 착실한 신임을 하지 못하는 우일은 속으로 「너도 사람인 이상에야 죄를 안 짓고는 어디가 가려워서 못 견디는 모양이로구나?」하였다.

우일은 얼굴 빛을 다시 냉정하게 고치고서.

『어째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 유일복 씨 까닭이지요. 그이가 아마 마음을 주지 않었든 모양예요.』

『녜.』

우일은 대답할 뿐이다.

15[편집]

그날 밤 한 시나 되었다. 우일은 문을 살며시 열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웁게 문을 나섰다. 복도로 가만가만 걸어서 옆의 방을 들여다보니까 주지 대리가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시커먼 먼 산에 바람이 쏴 할 때에는 그 무슨 대신(大神)이 달음질하는 듯하다. 우일은 회랑(回廊)을 돌았다. 대웅보전이 점잖게 (大雄寶殿) 앉아 있는 앞뜰을 지났다. 주방을 지나 다시 마당에 나왔다. 이쪽 선방에서는 이야기 소리가 들리더니 뚝 그친다. 우일도 멈칫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 소리가 나기를 기다려 다시 걸어갔다.

맨끝 방을 돌았다. 그리고 뒷방 문 앞에 와 섰다. 백지로 다시 바른 미닫이에는 머리카락 날신날신 하는 양 머리가 비쳤다 말았다 한다. 우일은 숨소리를 죽이고 마루 위로 올라섰다. 찬바람이 쏴 ── 불어 잔등이를 으쓱하게 할 제 그는 미닫이 틈에 한 눈을 대고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불빛이 어룽대어 그 방안에 앉은 여자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지 않고 윤곽의 곡선이 자주 변한다. 그 여자는 무슨 책인지 펴놓고 앉아서 보는지 마는 지 십분이 지나가도 책장 하나 넘기지 않는다.

우일은 속으로

「분명히 정희는 정흰데」

하며 더욱 똑똑한 증거를 알기 위하여 자기가 삼 년 전에 대구서 만날 때의 기억을 꺼내어 그것과 지금 방안에 앉아 있는 실물과 대조하기를 시작하였다. 댕기를 드렸을 때에 본 정희가 지금 머리를 튼 때와 똑같을 리는 없지마는 어떻든 많이 같은 곳이 있다. 눈초리에 눈썹이 조금 숱해서 사람의 마음을 끌게 된 것, 코가 어여쁜 것, 입이 조그마한 것, 두 뺨이 불룩한 것, 가끔가다가 고개를 까땍까땍하는 버릇까지 꼭 정희다.

그러면 저 정희가 무엇 하러 자기 부모와 또는 일복까지 내버리고 이런 절에 외로이 와 있는지? 정말 주지 대리의 말과 같이 죽었다 하면 여기에 와 있을 리도 없을 뿐더러, 그렇다고 죽지 않은 정희를 옆에다 두고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겠는데 내가 아마 잘못 보고 그러지나 않는지? 똑같은 여자가 있는 것을 잘못 보고 그러지! 그렇지만 어떻든 나이 젊은 여자가 여기 혼자 와 있는 것은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이다. 아니 한양(閒養)을 하러 와 있는 것인가?

우일은 한참 의욕에 싸여 멀거니 서 있으려니까 방안에서 가늘게 기침하는 소리가 나더니 부시시 일어나는 소리가 난다. 우일은 깜짝 놀라 담모퉁이에 가서 숨었다.

방문 소리가 나더니 그 여자는 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는 마당 한복판에 한참 섰다가 다시 두어 번 사면을 둘러보고서 샛길로 아래 시내를 향하여 내려간다. 우일도 나무 사이에 몸을 숨겨 쫓아 내려갔다.

저 아래서 차르럭차르럭 손 씻는 소리가 나더니 또 얼굴 씻는 소리가 난다. 우일은 그 여자가 앉아서 수건을 적시는 바로 옆 나무 뒤에 숨어 섰다.

그 여자는 얼굴을 씻고 손을 씻은 뒤에 다시 일어서 멀거니 섰더니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며 나무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별을 쳐다보고서 그 별을 껴안을 듯이 두 팔을 벌려 한껏 내밀었다가 다시 끌어들이며,

『아아』

하고 옆의 사람에게까지 들리도록 소리를 내어,

『저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또한 아무것도 부끄러울 것이 없읍니다. 저는 다만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할 뿐입니다. 저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쳤읍니다』

하고서 한참 있다가 다시,

『하나님! 그러나 저는 그이를 사랑합니다. 저의 피와 저의 생명은 그를 위하여 있읍니다. 저는 그를 위하여 그의 제단(祭壇) 위에 저의 흠 없는 사랑을 바치려 합니다.』

그리고서는 고개를 숙이고서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린다. 너무 감격함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울게 하였다.

「<그이>! 그이가 누구일까?」

우일은 <그이>가 알고 싶었다. 「그이가 일복이가 아닌가?」

그러면 저 여자는 필연 실연자(失戀者)인 듯한데 그 대상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소나무 위에서 이슬이 가끔가끔 머리 위에 떨어질 때마다 척근척근한 것이 흐릿한 감정을 청신하게 하는 동시에 어디선지 자기 몸뚱어리에서 용기가 나는 듯하다.

그는 혼자 속으로,

「물어 봐?」

하다가도 그 냅다 나오는 감정을 참고서,

「아니지! 만일 말을 꺼냈다가 정말 저 여자가 정희가 아니면 어떻게 하게. 정희라 할지라도 나를 못 알어보면 어찌하노? 그렇지. 내일 자세히 알어본 뒤에 하자!」

하고서 다시 나무 등뒤로 서 그 여자의 행동만 살펴본다.

가끔가끔 나뭇잎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가늘게 떨 때 우수수 하는 소리가 너무 고요함을 조금씩 조금씩 깨뜨린다.

그 여자는 대리석으로 깎아 세운 여신상처럼 한참이나 멀거니 서 있더니 몸을 잠깐 뒤로 틀어 고개를 돌리더니 올라갈까 말까 하는 듯이 주저주저하다가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다. 흰 옷 입은 그의 흐르는 듯한 몸맵시가 새까만 암흑 속에 서 있으니 시내에서 솟아 오른 정령의 화신같이 보인다.

그러고서 몸짓을 잠깐씩 할 적마다 치마 저고리의 주름살이 살근살근 울멍줄멍 할 때 주름살의 음영이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하여 휘둘리는 곡선이 희었다 검었다 한다.

그 여자는 다시 두 손을 맞잡고서,

『그만 올라갈까?』

하고서 내려오던 비탈로 다시 올라갈 때 그는 입 속으로 혼잣말로,

『나는 살었으나 죽은 사람이지? 그렇지! 언제든지 일복 씨가 나를 생각지 않으시면 나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니까』

할 제, 이 소리를 들은 우일은,

「응? 무엇야? 일복?」

하고 속으로 놀라면서,

「그러면 정말 정희인가?」

할 제, 그 여자는 다시,

『이이는 나를 여기다 혼자 맡겨 두고 어디를 가서 여태 오지 않는고?』

하다가,

『그렇지. 나는 어디로든지 그 여승이 가자는 대로 가겠지만 일복 씨는 이렇게 내가 살어 있는 줄 모르시고 죽은 줄만 믿으시렷다! 그렇지. 그렇게 아시는 것이 일복 씨에게는 도리어 좋으실 터이지!』

우일은 알았다. 그 여자가 분명히 정희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당장에,

「정희 씨, 무엇요?」

하려다가, 그래도 그렇지 않아서 가만히 그 여자의 뒤를 쫓아 너른 마당 한 가운데 왔을 때. 그는 가늘게 기침을 하여 인기척을 내었다. 별은 공중에 총총히 박히었고 시커먼 숲은 사면에 둘러 있었다.

『에고!』하고 자지러지는 듯이 놀란 그 여자는 뒤를 한 번 돌아다보고서 누가 자기 뒤를 따라오는 것을 보더니 한달음에 뛰어서 방으로 들어가려 한다. 우일은 어조를 가다듬어,

『여보세요! 정희 씨!』

하고서 그래도 의아하여 시험삼아 불러 본 <정희>라는 이름이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 그 여자가,

『녜?』하고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으므로 멈칫하고 서서 반갑기도 하고 의심쩍어 흘끔 돌아다보지 않았더면 몰랐었을 것이다.

『정희 씨를 이런 곳에서 뵈옵기는 참으로 뜻밖입니다』

하고 돌아서는 정희에게로 가까이 갔다. 정희는 누구인지 몰라서 겁이 나는 듯이 뒤로 물러서며,

『누구세요?』

우일은,

『녜! 저를 몰라 보시겠어요? 저는 김우일이올시다.』

정희는 눈을 번쩍 뜨는 듯이,

『녜! 김우일 씨요! 이게 웬일이십니까?』

하고서 일복이나 만난 듯이 가까이 덤벼들려다가 다시 멈칫하고 서면서,

『참 오래간만이십니다』

하고서 고개를 숙이고 땅을 내려다보면서 한참 서 있더니,

『참 오래간만이세요.』

다시 하는 목소리에는 옛날을 생각하여 오늘을 비추어 보는 일종 금치 못한 애수의 회포가 엉키었다.

『녜. 뵈인 지가 벌써 삼사 년이나 되나 봅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곳에 와 계십니까?』

정희는 주저하였다. 말을 할 수도 없고 아니 할 수도 없었다. 말을 하자니 자기의 비밀을 세상에 알릴 터이요. 아니 말하자니 무슨 핑계가 없었다.

『녜, 녜. 다니러 왔어요.』

『다니러요?』

『녜.』

『그러면 혼자 오셨나요?』

『녜.』

『언제 오셨어요?』

『온 지 며칠 안 돼요.』

『녜, 그러세요.』

우일은,

『저도 여기 온 지가 며칠 못 됩니다마는, 일복은 요사이 잘 있나요?』하면서 어두운 가운데서도 정희의 기색을 살피었다. 정희는 일복이란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괴로운 듯이,

『녜, 안녕하세요』

하고서는 눈을 위로 흘겨뜨면서 우일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속마음으로 저이가 내가 물가에서 한 소리를 다 듣고서 일부러 저렇게 물어 보는 것이렷다, 하는 생각을 할 때 얼굴이 홧홧하여졌다. 우일은 또다시 어떻게든지 의심나는 것을 알아보고 싶어서,

『이런 말씀을 여쭈어 보는 것은 실례일는지 알 수 없읍니다마는 밤마다 시냇가에 내려가시나요?』

정희는 가슴이 달랑 내려앉으며 「에쿠, 저이가 아는구나」하고서,

『그것은 어떻게 아십니까?』

『날마다 뵈오니까 말씀예요.』

『날마다요?』

『녜.』

『오늘도 오셨어요?』

『네. 뵈옵기만 할 뿐 아니라 무엇이라고 하시는 말씀까지 다 들었어요.』

『제 말하는 것까지?』

『녜.』

정희는 한참 있다가 공중을 쳐다보더니,

『우일 씨는 우일 씨의 누이동생 같은 이정희의 비애를 알어 주실 수가 있겠지요?』

입술이 떨리는지 목소리가 가늘어지며 떨린다. 그리고 망연히 서 있는 그의 두 눈에는 무궁한 거리에서 멀리 비추는 별빛을 반사하여 반짝거리는 눈물 방울이 그 별 같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우일은 정중한 목소리로,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죽은 사람예요. 저는 살어 있으나 죽은 사람예요. 저의 목숨은 비록 육체의 피를 돌게 하나 저는 죽은 지 오랜 사람입니다. 그는 저의 최대의 행복을 잃었고 또는 저는 지금 세상을 속이어 이곳에 몸을 감춘 사람입니다. 물에 빠진 나로서 오늘은 잠깐 이곳에 머물렀으나 내일은 또 어디로 갈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를 물에서 구해 낸 여승은 저를 잠깐 이곳에 맡겨 놓고 모레에는 다시 나를 데려다가 어느 곳에 숨겨 줄는지 알 수 없읍니다.』

그러고서는 그대로 서 있는 정희의 두 눈에는 구슬 구슬이 눈물이 떨어진다.

이 말을 들은 우일은,

『정희 씨! 제가 일복의 가장 신뢰하는 친구인 것을 알어 주시죠. 그러면 저는 일복 군에게…』

『고만두세요.』정희는 우일의 말을 가로끊었다.

『나는 우정을 의뢰하여 사랑을 이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라, 우정으로써 사랑을 이을 수는 없읍니다. 사랑은 사랑으로야만 이을 수가 있겠지요.』

이때이다. 저편에서 사람이 오는 기척이 났다.

『에헴.』

기침 소리는 나이 늙은 주지의 소리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삼물 장삼 자락이 어두운 저쪽에서 걸음걸이에 흩날리는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정희는 깜짝 놀라면서,

『에쿠, 우일 씨! 가세요, 어서요.』

우일은,

『녜? 녜.』

『밤이면 이 절 주지가 가끔가끔 저 있는 곳까지 순회를 하고 가요. 제가 이 절에 맡겨 있을 때까지는.』

정희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며 댓돌 밑까지 쫓아온 우일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 절 주지가 저를 구한 여승의 법사(法師)이라나요.』

이것이 일복과 동진이 양순의 집을 가려던 전날 밤이었다.

16[편집]

동진과 일복은 엄영록의 집에 다다랐다. 일복은 여태까지 술이 깨지 않았는지 얼굴빛이 붉은 데다가 양순의 집으로 비록 자기 직접은 아닐지라도 연담을 하러 가는 것을 생각하매 부끄러웁기도 하며 또 한옆으로는 한 번 허락하였던 것을 물리치고 오십이나 된 장돌뱅이에게 돈 백 원에 팔았다는 것을 생각하매 공연히 두 주먹이 쥐어졌다 펴졌다 하며 팔이 불불 떨린다.

그가 양순의 집에 들어가는 심리(心理)는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초례청에 들어가는 나이 어린 신랑 수줍어하는 듯한 그것과 또 한 가지는 흉적(凶敵)을 물리치려 그 소굴로 들어가는 연소무인(年少武人)의 의분이 넘치는 그것이었다.

동진은 먼저 마당에 들어섰다. 마루에 앉아 하루 판 돈을 세던 양순 어미는 동진을 보더니 술 항아리 옆으로 비켜 앉으며,

『어서 오시소』

하고서 인사를 한다.

『괜찮은가?』동진은 인사 대답을 하고 마루에 걸터 앉아 사면을 한 번 둘러보더니,

『재미가 어떤고?』

『언제든지 그렇지요. 장 그렇지요』

하면서 두 눈을 더러웁게 스르르 감는다.

『죄다들 어디 갔는가? 아들서껀.』

『모르겠쇠다. 동리에 갔는가요.』

『또 딸은?』

어미는 방을 가리키며,

『저 방에요.』

이러다가 일복이 웬일인지 뚫어지도록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마루끝에 서 있는 것을 보더니,

『이리 올러오시죠』

하고서 마룻바닥을 가리킨다. 동진은 그제야 알아차린 듯이 두루마기를 휩싸고서,

『올러앉이소』

하며 일복을 권하는 듯이 쳐다본다.

일복은 허리 굽혀 사례를 하고,

『녜』

하며 걸터앉았다.

동진은 담배를 피워 물고,

『그런데 술이나 한잔 주게나그려.』

어미는 잔을 씻고 안주를 담더니 미안한 듯이 빙긋 웃으며,

『안주가 있어야죠. 에그, 맨술만 잡숫나요?』

하고서 두 잔을 부어 놓는다. 일복은 술을 보더니 진저리나 치는 듯이 상을 찌푸리고 얼굴을 내흔들며,

『에그, 나는 정말 못 먹겠어요. 지금도 머리가 아퍼 죽겠는데요.』

그래 동진은 억지로 권하면서,

『한 잔만, 꼭 한 잔만 잡수세요.』

『녜, 정말 못 해요.』

『무얼 공연히 그러십니다그려. 오 ⎯⎯ 장모에게 어여쁘게 보이려고 그러십니까?』

이 말이 떨어지자 어미는 일복을 보더니 고개나 끄덕거리는 것 같이 곁눈으로 일복을 바라본다. 일복은 얼굴이 더욱 빨개지며 이 양반이 유일복 씨란다 하는 듯이 슬그머니 얼러맞추는 동진의 두름성 있는 말을 듣고서는 이제는 주저할 것 없다는 듯이 안심이 된다. 그러나 참말 먹을 수 없는 술이나마 하는 수 없이 안 받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마시었다.

그리고 안주를 먹은 뒤에 뒤로 물러앉았다. 동진은 마루에 걸쳤던 두 다리를 마루 위로 올려 놓으면서 부어 놓은 술을 마시더니 잔을 탁 내려놓고 안주를 씹으며,

『그런데 여보게, 내 말 한 마디 할 것이 있네』

하고서 젓가락을 놓고 다시 고개를 처들어 양순 어미를 보면서,

『그래 이번 일은 어떻게 된 셈인가? 오늘 온 것은 다름이 아냐. 그 일 때문에 온 것이야.』

그 말이 나오자 양순 어미는 그 말 나오는 것이 귀찮은 듯이 공연히 딴소리를 하려고 앵 하고 모여드는 모기를 두 손으로 날리면서,

『망할 놈의 모구, 사람 못 살겠군』

하니까, 얼핏 대답하지 않는데 조금 조급한 듯이,

『응? 웬일야? 곡절을 알 수가 없으니.』

동진은 재우쳐 묻는다. 양순 어미는 벌써 알아차리고서,

『무엇을요?』

하면서 미안히 여기는 중에도 비웃는 듯이 씽긋 반웃음을 웃었다.

『내가 자네 아들에게 청한 것 말야?』

그때야 어미는,

『녜 ──』

하며 긴 대답을 하고서,

『나는 무엇이라구요. 참 미안한 말씀을 벌써 하려다가. 그렇지만 정혼을 하여 놓은 것을 어떻게 합니까?』

『정혼을 하였어?』

『녜.』

일복은 한 잔 술이 또 취하여 공연히 말이 하고 싶은 중에도 동진의 교섭이 점점 진전할수록 마음 조마조마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동진은,

『흥!』

하고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여보게, 글쎄 그게 무슨 짓인가? 자아 여기 앉으신 이가 그 어른일세』

하며 일복을 가리키더니,

『자아, 그런 생각 먹지 말고 내가 말한 것대로 이 어른에게 허락하게. 오늘은 이 어른이 직접으로 자네의 말을 들으시려고 몸소 오셨으니,』

일복은 소개하는 소리를 듣고서 허리를 다시 펴고 몸을 고쳐 앉아서,

『참 보기는 두어 번 보았으나 알지를 못하였소. 나는 유일복이요. 아마 이미 동진 씨에게 말씀을 들었을 듯하오.』

하니까 어미는 조금 냉담하게,

『참 말씀은 많이 들었읍니다』

하고서 걸레로 방바닥을 훔쳤다.

동진은 조금 더 바싹 들어앉더니,

『어떻게 할 터인가? 허락할 터인가?』

하니까 어미는 동진을 바라보고 태연한 웃음을 웃으면서,

『무엇을 어떻게 하랍니까? 어서 술이나 드소.』

『술야 먹겠지마는 그 말 대답을 해야지.』

『글쎄요』

하고서 일복을 가리키며,

『약주 한 잔만?』

하며 주전자를 들어 먹겠느냐는 의견을 들으려 한다.

『아니, 싫소. 싫어. 진저리가 나오.』

일복은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이킨다. 동진은 한 잔을 마시더니 고개를 숙이고 젓가락으로 안주를 뒤적거리면서,

『사람이란 그래서 안 되네. 어린 딸을 생각해야지. 자네가 그것은 잘못 생각하고 한 짓이지. 글쎄 이 사람아, 지금 말하자면 갓 피는 꽃봉오리 같은 젊은 딸을 오십이나 넘은 늙은 사람에게다 주다니, 안 돼. 안 될 일야』

하니까 어미는 그래도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고서 한참 있다가,

『그것도 연분이지요.』

『연분!』

동진은 어미를 한 번 쳐다보더니,

『연분이 무슨 빌어먹을 연분인가? 그래 젊은 딸을 늙은 놈에게 팔어먹는 것이 연분야?』

하고 조금 어조가 불온히 나가는 것을 들은 일복은 자기까지 미안한 생각이 나서, 어미는 오죽하랴 하는 듯이 어미의 기색을 살피었다. 그러나 어미는 또 한번 씽긋 웃더니,

『그것도 다 연이 있길래 그렇게 되지요.』

동진은 껄껄 웃어 쓸데없는 분격을 잘못 말한 것을 덮어 버리면서,

『그렇지. 그러나 그 연을 이쪽으로 끌어와 보게그려. 그것은 자네 입에 달린 것이 아닌가?』

『그러면 혼인을 무르라는 말씀이지요?』

『그렇지 그래.』

『혼인을 무르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면?』

『그렇지만 이번 일은 무를 형편이 되지 못해요.』

동진은 어미를 홀겨보더니, 형편이 무슨 형편야 『 . 그까짓 놈에게 나는 싫소 하며는 제가 또 무슨 큰 소리를 할라구.』

『그래도 못 돼요.』

『무엇이 못 돼?』

동진은 무엇을 알아차린 듯이 들었던 젓가락으로 소반 변죽을 탁 치면서,

『옳지, 알겠네. 그거야 염려 말게, 이 사람아! 그까짓 것을 가지고 그러나? 돈 말일세그려. 돈 때문에 그렇지? 하하, 그거야 내가 있는데도 그러는가? 아마 말하기가 부끄러워 그러나보이그려. 그거야 벌써 생각해 둔 거야.』

동진은 일복을 돌아다보며,

『사람이 저렇게 용렬합니다그려』

하고서 놀려먹듯 웃더니, 다시 어미를 보고서,

『이 사람아, 아무리 하기로 이 어른이 돈 몇 백 원이야 못 해 주실 줄 아는가?』

일복은 속으로 문제는 그것 하나면 낙착이 되리라 하면서도 혼인 이야기를 하는데 돈이라는 소리가 나는 것이 아주 불쾌하였다. 그러나 어떻든 잘 되기만 기대하는 그는,

『그거야 우리도 벌써 의논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 염려는 할 것이 없겠지요』

하고서 동진의 말에 뒷받침을 하였다.

그러고 나니까 반 이상의 허락을 받은 듯하여 일복은 부질없이 기꺼운 중에도 죄던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석유 남포에 켜 놓은 불빛으로 마주앉은 어미를 볼 때 기름 때 묻은 머리채를 이리저리 설기설기하여 틀어 얹은 것과 두 발의 열 발가락이 짐승의 발같이 험상스러웁게 생긴 것과 격에 맞지 않는 은가락지를 목우상(木偶像)의 손가락에 끼워 놓은 것 같은 것까지 반 이상은 벌써 눈에 익어 짐승 같은 발가락과 격에 맞지 않는 은가락지와 때 묻은 머리채가 벌써 자기 장모의 그것이 되고 만 듯하다. 그래서 아까 여기를 들어올 때에 깨달았던 그 의분은 어디로 사라지고 잦아지는 재미에 웃음으로 꽃피는 화목한 가정에 앉은 듯할 뿐이다. 그리고 마루 밑에서 정정하고 나서는 그 집 개까지 벌써 자기집 개가 되고 만 듯하다.

그러나 어미는 얼굴에 차디찬 정이 돌면서,

『고만두세요』

하며 고개를 내두르는 두 눈에는 어떠한 여성에게서든지 볼 수 있는 암상맞은 광채가 나면서, 저는 돈도 바라지 않고요 『 , 아무것도 싫어요. 상사람은 상사람끼리 혼인을 해야지 후환이 없어요.』

일복은 다시 어미를 보았다. 그러고서는 양을 보려다가 여우를 본 것 같이 적지 않은 낙망이 되면서도, 그러나 한 번 더 다지는 수작이려니 하고서 일복은 있는 말솜씨를 다 내어,

『그러면 내가 상사람 노릇을 하지』

하니까 동진도 잠깐 웃다가,

『이 사람아, 양반하고 혼인해서 후환 있을 것이 무엇인가?』

어미는,

『어떻든 저 어른에게 내 딸 드릴 수는 없어요』

하면서 일복을 원망이나 있는 듯이 가리킨다. 동진은 기가 막힌 듯이 허허 웃고서,

『그것은 또 어째서?』

『왜든지요.』

『말을 해야지?』

『말요?』

『그래.』

『그 말해 무엇 하게요? 안 하는 것이 좋지요.』

『무슨 말인데 못 할 것이 무엇이야. 알기나 하세그려.』

『어떻든 저는 저의 딸을 아무리 나이 늙은 장돌뱅이라도 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좋아요.』

일복은 다시 살이 에이는 듯한 불쌍한 정과 피가 끓는 듯한 분노가 가슴에서 일어난다. 그리고서 가끔가끔 방 안에서 크게 못 하는 가는 양순의 기침 소리를 들을 때 일복은 그 어여쁜 양순을 수염이 짐승의 털 같이 나고 수욕(獸慾)이 입 가장자리와 두 눈에서 낙수지듯 하는 그놈의 장돌뱅이가 이리 발 같은 두 손을 넓게 벌리고 자기의 만족을 채우려고 덤벼드는 듯할 때 악 소리를 치면서 덤벼들어 그놈을 당장에 죽여 흠 없고 깨끗한 양순을 구해 내고 싶었다. 그는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온몸을 진저리치듯 떨었다. 그래서 그는 저도 모르게,

『무어요? 그것은 어째 그렇소?』

하고서 바싹 가까이 다가앉았다. 어미는,

『녜, 녜. 그것은 아무리 나이 젊고 얌전하고 재주 있는 당신이라도 남의 목숨을 끊게 한 어른에게는 드릴 수가 없단 말예요.』

일복의 머릿속에는 번개같이 정희가 보였다. 정희!

일복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벙벙히 천장만 바라보고 앉았었다. 그의 입은 무엇으로 풀 발라 봉한 듯하였다.

이 말을 들은 동진은 눈 크게 뜨며 어미를 쥐어지를 듯이,

『무어야? 누가 사람을 죽게 해?』

하니까 어미는 태연한 얼굴로,

『꽃 같은 젊은 아가씨를 죽게 한 이가 누구십니까?』

하며 일복을 쳐다본다. 일복은 그 자리에 엎드러질 듯이 낙망하였다.

『여보!』

일복의 목소리는 떨리더니 조금 있다가 다시,

『동진 씨!』

하려니까 어미는 하려던 말을 채 마치지 못한 듯이,

『흥, 물에 빠진 귀신은 사라지지도 않고 언제든지 등 뒤에 따러 다닌답니다. 그런 이에게 딸을 줘요!』

동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일복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이나 앉았더니,

『여보! 내가 이 말을 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하는 수가 없이 하오. 그런데 동진 씨!』

말에 눈물이 마룻바닥에 떨어진다.

『동진 씨! 나의 마음을 말하려 하나 그 말이 없고 귀를 가졌으나 들어 줄 사람이 없읍니다. 여보세요. 만일 나를 죄인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딸을 줄 수가 없거든, 줄 수가 없거든 말씀여요…』

일복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사면을 한 번 물끄러미 바라보고서,

『저에게 주지는 않을지라도 제발 오십먹은 장돌뱅이에게는 주지 말어 달라고 해 주세요』

하고서는 그 자리에 엎드러져 울었다. 그러려니까 그 어미는 다시 깔깔 웃으면서,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그려. 내 딸이지 당신의 딸은 아니지요. 내 딸은 언제든지 내 맘대로 하렵니다.』

이 말을 들은 일복은 벌떡 일어나 두 주먹을 쥐고서 어미에게 달려들며,

『이 아귀야! 딸의 피를 빨아먹는 독사야! 너 같은 것들은 모두 한번에…』하고서 발길을 들려 하니까 동진이 덤벼들어 말리면서,

『고만두십쇼. 고만두세요. 그것을 그러시면 무엇 합니까?』

어미는 분해서 씩씩하며,

『무어요? 아귀요? 내가 아귀여요? 어째 내가 아귀요?』

하고 말대답을 하려니까, 동진은 호령을 하면서,

『가만 있어! 무엇이라 지껄여?』

일복은 눈물을 씻으면서,

『에 ── 분해요. 내가 죽드라도 저런 짐승 같은 것은 살려 두기가 싫어요.』

17[편집]

그날 밤이다. 일복과 동진이 양순의 집에서 나간지 한 시간이 지난 열 한 시이다.

누구인지 시커먼 옷을 입고 머리에 검은 수건을 두른 사람 하나가 양순의 집 뒤 언덕을 기어오르더니 사면을 둘러보고서 다시 그 집 뒷담을 살금살금 기어간다. 무엇인지 기다란 막대기로 이리저리 위아래를 조사하더니 중턱을 손에 단단히 쥐고서 뒤창을 향하여 걸어가다가 무엇이 부스럭하기만 하여도 멈칫하고 서 있다가 소리가 그친 뒤에야 다시 걸어간다. 사면은 적적 고요한 밤인데 공중 위에서 유성 하나가 비스듬히 공중을 금 긋는 듯이 흐르고 별들까지 속살대는 소리를 그친 듯하다. 영호루 나루에 가로놓인 다리에 물결치는 소리가 차르럭거리며 풀 속에 곤히 자는 벌레를 잠 깨우는 것이 오늘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 검은 옷 입은 사람은 뒤창에 와서 가만히 엎드려 한참이나 그 속을 엿듣더니 손가락에 침질을 하여 창구멍을 뚫고서 그 속을 들여다본다. 그러고서는 무엇을 생각하더니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저쪽에는 버드나무 두어 개가 하늘을 꿰뚫을 듯이 정적 속에 서 있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 앞마당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루로 올라와 뒷방을 엿보고 안방을 들여다보았다. 처마에 잠자던 제비 새끼가 찌르륵 하는 바람에 그는 멈칫하고서 뒤를 돌아보다가 다시 건넌방으로 소리 없이 건너가서 손에 든 총을 옆에 놓고서 머리에 쓴 것을 벗었다. 그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복이었다.

일복은 이불도 덮지 않고 가로 누운 양순을 가만히 흔들었다. 그의 손이 그의 보드라운 살에 닿을 때, 그는 간지러운 불쌍함을 깨달았다. 그러고서 지금 이때부터는 여기 누운 이 여자와 끝없이 갈 것을 생각하매, 공연히 세상 일이 비애로웁고 한스러웠다.

『일어나!』

오기를 기다렸는지 양순은 쌍꺼풀진 두 눈을 반짝 뜨더니 꿈꾸는 사람처럼,

『에구, 오셨네.』

『일어나! 어서!』

양순의 손을 붙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일복의 손은 떨리었다.

『가야지!』

일복의 목소리는 전판(電板)에 구르는 구슬같이 떨리었다.

『어서! 어서!』

그러나 양순은 일복의 목을 끼어안으며,

『여보세요, 정말 가요?』

하고서 소리 없이 운다.

『그럼 가야지. 가지 않고 어떻게 해?』

하고 양순을 달래듯이,

『울지 말어, 응! 남이 알면은 어떻게 하게.』

양순은 고개를 더욱 일복의 가슴에 비비면서,

『어디로 가요?』

양순은 어린애처럼 온몸을 발발 떤다.

『어디로든지.』

일복은 또 한 번 안방을 건너다보았다.

양순의 울음은 복받쳐 오르며,

『여보세요. 저는 할 수가 없어요』

하고서 침을 한 번 삼키었다.

일복은 병 앓는 어린애를 안은 어머니가 귀여웁고도 불쌍히 여겨 내려다보는 듯이 양순을 내려다보며 혼자 마음으로 「네가 아직 집을 떠나 보지 못 해서 집을 떠나기가 싫어서 그러는구나?」하였다.

『그럼 어떻게 해? 어서 가야지? 응?』

『가기 싫거나 집을 떠나기가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어제까지는 제가 당신을 따러서 어디까지든지 가려 하였어요. 그러나 오늘은 다만 당신이 죽여 주기만 기다릴 뿐이에요.』

『무어야?』

일복은 소리가 커졌는가 의심하여 다시 문 밖을 내다보고서,

『그런 소리 말고 어서 가!』

일복은 울고 싶도록 섭섭하고 분하였다.

『그러면 너의 마음이 하룻밤 사이에 변하였구나?』

하면서 울크러뜨릴 듯이 양순을 끼어안았다. 양순은 일복의 허리를 안고 몸은 어리광처럼 좌우로 흔들며 기막히는 목소리로,

『아녜요, 아녜요.』

『그러면 어째 그래?』

양순은 한참이나 주저하다가,

『저는 장돌뱅이에게로 가는 수밖에 없어요.』

일복은 양순을 몸에 붙은 거머리나 떼는 것처럼 두 손으로 밀치고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무어야? 장돌뱅이에게로?』

『………』

일복은 양순을 손에서 뿌리치며,

『에 ── 더러운 년! 그러면 여태까지 네가 나를 생각한다는 것이 다 거짓말이었구나. 너의 조 새빨간 입으로 같이 가자 한 것도 다 거짓말이었지?』하자 개가 다시 킹킹 짖는다.

안방에서 잠자던 어미가 개소리에 잠을 깨었다가 건넌방에서 인기척이 있는 것을 듣고서, 『그 누구요?』하고 드러누워서 건넌방을 바라본다. 이 소리를 들은 일복은 얼핏 옆에 놓았던 사냥총을 들고 아무 말 없이 안방 동정만 살피었다.

어미는 그래도 담벼락에 어룽대는 그림자가 이상하므로 옆에서 자는 자기 아들을 깨운다.

『얘, 얘야.』

코를 골고 자던 엄영록이라는 놈이 부스스 돌아누우며 응응 할 뿐이다.

『응, 일어나거라, 일어나.』

그래도 대답이 없다. 어미는 혼자 일어나 건넌방에 누가 왔는가 알려고 가만가만히 마루로 건너간다.

일복은 가슴이 떨리고 손이 떨리고 다리가 떨린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 앞에 선 양순 어미뿐이다. 그리고 그 양순 어미는 여적(女賊)의 괴수나 힘 많은 짐승같이 보이는 동시에 자기의 몸이 지금 당장에 그 여적의 괴수 같고 짐승 같은 양순 어미에게 해를 당할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그는 침착치 못한 마음으로서 최후의 수단으로 자기가 보신용(保身用)으로 가져온 사냥총을 들었다. 그러나 그 총부리는 떨렸다.

『이 짐승 같은 년, 꿈적 말어. 끽 소리만 해 보아라. 그대로 쏠 터이니.』

어미는 「에구머니」한 소리에 그대로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떤다. 일복은 이것을 보고서 아까 그 여적의 괴수나 사나운 짐승을 본 듯한 생각은 어디론지 없어지고 땅에서 꿈지럭거리는 지렁이같이 더러웁고 징그러운 중에도 아무 힘도 없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웬일인지 세계를 정복한 듯한 용기와 자신이 생기었다. 그래서 그가 「꿈적 말어」 소리를 지를 때 자기가 생각지도 못하던 큰 소리가 자기의 폐(肺)와 성대(聲帶)를 과도로 떨리게 하며 나왔다.

안방에서 자던 엄영록이 이 소리에 깨었다. 굴 속에 잠들었던 사자와 같이 그는 툭툭 털고 일어나 문 밖을 내다보더니 한달음에 마루로 뛰어나와, 채 일복은 보지 못하고 어미의 떠는 것을 보고서,

『이게 웬일인고?』

하니까 어미는 그저 덜덜 떨면서 건넌방을 가리키며,

『저, 저』

할 뿐이다.

일복은 또 총을 엄영록에게 들이대며,

『너는 웬 짐승이냐? 이놈! 꿈적 말어. 죽고 싶거든 덤벼라!』

일복은 으레 그놈도 항복하려니 하였다. 그러고서 그 조그마한 여적의 자식쯤이야 그대로 꼼짝 못하리라 하였더니, 일복의 예상은 틀리었다.

엄영록이란 담 크기로 동리에 유명한 놈이다. 그는 태연히 나서더니 한참이나 일복의 눈을 바라보다가 재빠르게 옆에 놓여 있는 방칫돌을 들었다.

양순은 방 한귀퉁이에 서서 일복의 행동만 살핀다.

엄영록은 일복에게로 덤비어든다. 이것을 본 일복은 자기의 손에 그것을 보호할 만한 무기가 있는 것을 알기는 알면서 황망하고도 무서운 생각이 나서 총부리가 떨리기 시작하였다.

『어디 놔 봐라! 놔!』하고 소리를 지른다.

일복은 황급한 가운데 그놈의 팔을 향하여 한방 놓았다. 팔에 들렸던 방칫 돌은 쾅 하고 떨어지며, 떨면서 앉아 있는 어미의 가슴을 눌렀다.

『에구, 사람 살리우』 소리가 나더니, 어미는 그 자리에 자빠졌다. 이것을 당한 엄영록은 붉은 피가 뚝뚝 듣는 팔로 옆에 찼던 장도를 빼어들었다.

그러고서는 자기의 용기와 힘을 다하여 일복에게로 덤벼든다.

일복의 총부리는 떨린다. 그가 사람의 신음하는 소리와 또는 마룻바닥에 떨어져 흐르는 사람의 피를 볼 때 그의 몸이 아니 떨리는 곳이 없고 그의 눈길이 닿는 곳이 떨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자기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입을 벌리고 덤벼드는 엄영록을 볼 때 그는 총을 아니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함부로 자기의 정신을 다 차려 두 방을 놓았으나 밤중에 이슬찬 공기를 울리는 총소리는 다만 담벼락을 뚫고서 지나 나갈 뿐이다.

일복은 엄영록에게 총부리를 잡혔다. 그러고서는 엄영록의 단도 쥔 손이 일복의 허리를 스치더니 일복은 정신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엄영록은 칼을 마루에 내버리는 듯이 휙 던지며,

『흥, 다 무엇이냐? 되지 않은 녀석! 총? 총이 무슨 일이 있어?』

양순은 일복이 넘어지는 것을 보더니 그대로 덤벼들어 얼싸안고서,

『여보세요, 일어나세요』

하면서 일복의 몸을 흔들어 죽은 데서 깨려 한다. 이것을 본 엄영록은,

『흥』

하고 비웃더니,

『얘, 그 정신 없는 짓 좀 하지 마라. 죽었어, 죽어! 죽은 사람을 붙잡고 네가 암만 그러면 무엇 하니?』

양순은 죽었다는 말에 실신이 되도록 놀라,

『에!』

하고서 자기 오라버니 한 번 보고서 일복의 얼굴 한 번 들여다보았다.

『오라버니.』

『왜 그래?』

양순의 눈에서는 애소의 눈물이 떨어지며,

『이이를 다시 살려 주세요.』

『무어야? 허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 주어?』

『네! 살려 주세요. 제가 할 말이 있어요.』

엄영록은 핀잔 주듯이,

『이 어리석은 계집년아! 그따위 생각 말고, 자! 송장이나 치워서 너의 오라비 죄나 벗게 해!』

『오라버니!』

양순은 두 손을 모으고 신명(神明)께 기도나 하는 듯이 자기 오라버니를 처다보면서,

『저이를 죽이지 마시고 나를 죽이셨드면 좋았을 것을…』

할 때 일복은 눈을 떴다. 그는 그때야 자기 옆구리가 아픔을 깨달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이켜 옆을 볼 때 거기에는 양순이가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었다.

그는 몸에 칼을 맞고서도 마음속에도 어서어서 양순을 데리고 도망할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힘을 다하여 벌떡 일어서며,

『가! 어서 가!』

하고 양순의 손을 잡아 끌려 할 때 그의 신경은 교란(攪亂)하여져서 눈에는 남폿불이 보이기도 하고 마당이 보이기도 하고 자빠진 양순 어미가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양순 어미의, 자빠진 늙은 계집의 히들히들한살이 보일 때 그는 눈을 가리고 싶도록 무서웁게 더러웠었다. 그러고서는 죄 묻은 검은 남루(襤褸)를 누가 자기 몸 위에 씌워 주는 것 같아서 그는 몸서리를 치고 벌벌 떨다가 그 어미가 으스스한 신음 소리를 내고서 뒤쳐 누울 때 그는 미친 사람같이 무서운 웃음소리를 내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서는 다섯 손가락을 벌리고서 그 어미를 뜯어먹을 듯이 들여다보다가 다시,

『양순! 가! 어서 가! 날이 밝기 전에!』

하며 연한 양순의 가는 팔을 잡아끈다.

『가! 가!』

양순은 아무 말 없이 일어서서 끄는 대로 끌려간다.

이 꼴을 서서 보고 있던 엄영록이라는 놈이 성큼 한 발자국 나서면서 양순을 홱 뺏으면서,

『어디를 가?』

하고 가로 나선다.

『못 가!』

이 꼴을 당한 일복은 엄영록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엠』

하고 이를 악물며 덤빌 때 그의 전신을 맹화 같은 분노가 사르는 듯하였다.

『안 놓을 터이냐?』

일복은 엄영록의 팔을 잡고 양순을 빼앗으려 할 때 엄영록은 완강한 주먹으로 일복의 가슴을 탁 밀치는 바람에 일복은 그대로 건넌방 구석에 나자빠지자, 머리를 놓여 있던 총대에 맞아 눈앞에 번갯불이 번쩍 하는 것 같고 정신이 없어 온 천지가 팽팽 내돌리며 콧속에서는 쇳내가 난다.

그는 한참 정신을 차리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려 할 때 그의 방바닥을 짚으려는 손이 총부리를 만지게 되었다.

그럴 때 그는 무슨 신통한 도리를 발견한 듯이 속마음에 옳지 하는 생각이 났다. 그러고서 그 총을 들고 일어서려 할 때 귓결에 엄영록이란 놈이 양순의 팔을 끌며,

『가자, 어서 가』

하며, 「어머니를 일으켜야지」하는 소리를 듣고서, 그는 다시 벌컥 분기가 치밀어 올라오며,

『에 이놈아, 어디를 가?』

하고 일어서자, 한 방을 놓은 총소리와 함께 엄영록은 마루끝에서 마당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것을 본 양순은 일복에게로 달려들었다. 그에게는 일복이 자기 오라버니 죽이는 것을 보고서 얼마나 일복이가 무서웠는지 알 수 없으나 그래도 그 무서움을 없이 할 만큼 안전한 피난처는 일복밖에 없었다.

그러나 엄영록이 쓰러지는 것을 본 그 찰나에 일복의 머릿속에는,

『살인!』

이라는 소리가 들려 오며 그는 혼자 속으로,

『인제는 정말 사람을 죽이었는가?』

하면서 덤벼드는 양순도 본체만체 그는 그대로 멀거니 섰다가 엄영록이 자빠진 것을 가까이 와서 들여다보더니,

『에!』

소리를 지르고 그 자리에 기절하다시피 놀라 자빠지더니, 다시 일어서서 고개를 돌이켜 양순을 보더니, 양순의 마음을 위로나 하는 듯이 빙긋 웃을 때 감출 수 없이 일어나오는 무서운 마음은 그 웃음을 살인광이 사람의 피를 보고 웃을 때와 같이 음침하고도 으스스한 웃음을 만들었다. 그래도 일복은 두 눈에 피가 올라와 불 같은 빛이 나는 눈망울로 양순을 보며,

『가야지! 어서 가! 남에게 들키기 전에.』

양순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다가,

『여보세요』

하며 일복을 애연(哀然)하고도 떨리는 목소리로 부를 때,

『어서 가! 어서! 어서.』

일복은 황망히 사면을 둘러보며 재촉을 할 제 그의 다리는 떨리었다.

그러나 양순은,

『저는 갈 수가 없어요』

하며 붙잡으려는 손을 피하여 몸을 이리로 돌이켰다.

『저는 가고 싶어도 할 수가 없거니와…』

하면서 속마음으로 생각하기를, 「저이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지! 그러나 나는 저이를 사랑할 수는 없다. 내가 비록 저이를 잊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저이를 따라 갈 수는 없지. 저이는 자기의 사랑하는 이를 죽게 한 이지? 그리고 우리 오라버니를 죽인 이지?」

한참 있다가 또다시 생각하기를,

「그렇지만 나는 저이 없이는 살 수가 없지」

하고서 일복을 한참 또다시 보더니,

『저는 당신을 따라갈 수는 없어요』

할 때 피묻은 허리를 한 손으로 쥔 일복은,

『무어야? 갈 수가 없어?』

『네! 저를 이 자리에서 저 우리 오라버니처럼 쳐죽여 주세요.』

『안 될 말! 안 될 말이다!』

그는 미친 사람같이 소리를 지르더니,

『어서 가자! 어서 가!』

할 제 양순은 그 옆에 떨어진 일복의 피묻은 칼을 집어 일복을 주며,

『여보세요, 제가 당신을 생각지 않는 것이 아니며 또는 같이 가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따라감보다도 당신의 칼에 죽기를 바랍니다.』

그의 목소리는 비장하였다. 그리고 다시,

『나는 남의 사랑을 빼앗어 자기를 복스럽게 하기는 원치 않어요. 당신을 위하여 죽은 이의 사랑을 빼앗으려 하지는 않어요』

하고는 떨어지는 눈물로써 발등을 적시다가 다시,

『자』

하고 칼을 내밀면서 일복을 향하여,

『당신께서도 무슨 결심이 계시겠지요』

하고서 속적삼을 풀어헤친 양순의 젖가슴은 백옥같이 희다.

일복은 무의식하게 그 칼을 받아들을 때 그에게 모든 것이 절망인 것을 알았다. 그러고서는 그래도 맨 마지막 희망, 즉 양순을 데리고 사랑의 나라로 도망을 갈 줄 알았다가, 오늘에 그 사랑인 양순이가 가기를 거절할 때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엥」 소리를 치고 온몸을 부르르 떨 때에는 모든 비분이 엉키고 덩지가 되어 나중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저주하고 싶은 동시에 그것을 참지 못하여 일어나는 본능적 잔인성이 그의 칼자루를 단단히 쥐게 하고서 절대의 자유로서 그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양순이 자기 팔에 안기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창백한 이마를 어려 덮었고, 다시는 뜨지 않으리라고 결심한 두 눈이 비장하게 감기어 있으며 맺힌 마음으로 악물은 붉은 입술이 하얀 두 이 사이에 을크러지도록 물려 있어 자기의 전 생명을 바치고 있는 양순을 내려다볼 때 그는 자기의 모든 원망을 한꺼번에 몰아다가 한칼 끝에 모아 연약한 양순을 그대로 찌르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눈을 감고 칼을 들어 양순의 가슴을 찌르려 하다가 그는 이런 것을 깨달았다.

누가 남의 칼날에 ? 말없이 자기 생명을 바치는 자이냐? 할 때 그는 모든 희열과 또는 애인에 대한 경건한 감사의 마음이 생기면서 그는 다시 한번 최후를 기다리는 양순을 안았다. 그러고서는 뜨거운 눈물이 떨어지면서,

『참사랑을 알 때에는 그 생(生)의 여유가 찰나를 두고 다투지 않지는 못 하는가?』

그리고는 눈물이 어린 눈으로 자기의 손에 든 칼을 볼 때 멀리서 사람의 기척이 들렸다. 그는 황급한 마음이 다시 나서, 다시 눈을 감고 칼을 들어 양순의 심장을 향하여 힘껏 칼날이 쑥 들어갔을 정도로 찔렀을 때 자기 팔에 안긴 양순은 팔딱 하더니 두 팔 두 다리에 힘을 잃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이키고 감히 바로 양순을 보지를 못할 때 자기 손에 피묻은 것을 보았으나 그래도 양순이 어쩐지 참으로 죽은 것 같지가 않아서 또다시 한번 그의 가슴 정중(正中)을 내리찔렀다. 이번에는 아까와 같이 손이 떨리지 않고 아까와 같이 지긋지긋하지가 않고 아까와 같이 감히 손이 내려가지 않지 않고 한번에 내려갔다. 그의 칼이 양순의 가슴에 박혀 잠깐 바르르 떨 때에는 또 한번 양순이가 몸을 팔딱 하고 목구멍 속으로 연적(硯滴)에 들어가는 물방울 소리 같은 소리를 낼 적이다.

그는 칼을 잡아 빼었다. 흰 옥판(玉板)에 붉은 피를 흘리는 듯이 새어 나온다. 그는 그것을 보고서 그래도 양순이 죽은 것 같지 않아 못 견디겠다.

이왕 죽여 주면 완전히 죽여 주어야지 하는 생각이 나면서 그는 또 칼을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무 지긋지긋함이나 애처로움이나 참기 어려운 잔인성이 조금도 없고 대리석상(代理石像)을 쪼아 내는 석공과 같이 아무 감정도 그는 깨닫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그의 허리를 찔렀을 때 양순은 조금도 팔딱 하지 않고 그대로 곤포(昆布)쪽 같이 일복의 팔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일복은 그제야 양순이 죽은 것을 알은 듯이 마루 위에다 양순의 시체를 놓고서 그래도 연연한 정이 미진한 듯이 그의 팔과 그의 다리를 만져 보았다.

그러자 또 한번 수군수군하는 사람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여태까지 잊었던 공포가 다시 일어나며 이리 허둥 저리 허둥 할 제 그는 혼자,

『살인을 했어! 예끼, 내가 살인을 하다니, 그렇지만 양순을 죽였지!』

중얼거리면서 부엌으로 툇마루로 왔다갔다하더니,

『그렇지! 그래!』

하고서 성냥을 득 긋더니 처마끝과 나무더미에 불을 붙이고서는 미친 사람처럼 집 뒤를 돌았다. 그러자 사람 죽이는 것은 모르고, 달아나는 것만은 개란 놈이 쫓아오며 짖으매 그는 손에 들었던 칼로써 개란 놈의 허구리를 찔러 그대로 쓰러뜨리고 한걸음에 강 다리를 건넜을 때 그 모래톱에 쓰러졌다 그는 다시 . 일어나 물가에 가서 물을 마시고 풍현(風峴 ― 바람뫼)을 올라섰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허리가 끊어지는 듯하다. 땀은 온 전신에 폭포같이 흐른다.

그가 고개 마루턱에 올라서서 뒤를 돌아다보매 멀리 외로이 서 있는 양순의 집에는 불이 붙어 배암 혀 같은 불길이 이 귀통이 저 귀퉁이를 날름날름하고 있다.

이것을 본 일복은 뜯어먹던 미끼의 흐른 피를 입 가장자리에 흘린 짐승처럼 잔인한 웃음을 크게 웃으면서,

『아! 악마의 전당! 요귀의 소굴! 내가 너를 불지른 것이 아니다! 옛날의 소돔이 불에 탄 것 같이 너의 운명이 너를 불에 타게 한 것이다.』

그는 풍현을 넘어섰다. 굼실굼실한 산그림자가 안동읍을 눈앞에 가려 버렸다. 그는 달아나면서도 혼자 중얼거리기를,

『고운사로 가야지! 우일에게로!』

한달음에 송(松)고개를 지나 다랫들(日坪)에 다다랐을 때 그는 다시 엎으러졌다. 그는 개울의 물을 마셔 정신을 차린 후에 다시 노루고개를 넘었다.

토각골을 지날 때는 아무리 흥분된 그일지라도 요귀의 토굴을 지나는 것 같이 머리끝이 으쓱하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적 많고 제일 무서웁기로 유명한 토각골을 지난 그는 토지동(兎枝洞)을 지나갈 제 먼 동리에서 닭이 울기를 시작하였다. 다시 톡갓재를 지날 때에 그는 그곳이 안동과 의성이 북남(北南)으로 경계되는 곳인 줄을 알고서, 자기 고향 의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거기에서 잠깐 다리를 쉬었다. 그는 땅 위에 누워서 하늘의 별을 쳐다보았다. 풀냄새는 사면에서 코가 알싸하도록 나고 축축한 이슬은 홧홧 달아 오르는 상처를 시원하게 식힌다. 그는 누워서 먼 창공에서 반짝이는 작고 큰 별들을 보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며,

『어서 가야지. 어떻든 가고 보아야 한다.』

그는 다시 풀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다시 창공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지 못하리라고 생각지는 못하였다.

그가 다시 힘을 다하여 매기골에 왔을 때에는 멀리서 개가 짖는다. 그는 다시 지동골을 지나 고운사 어귀까지 와서, 안동서 여기가 삼십 리, 겨우 세 시간에 왔다.

그가 여기가 고운사이지 할 때, 여태까지 참았던 신체의 맥이 풀리며 그대로 길바닥에 쓰러졌다. 땀과 피가 섞이어 붉고 누른 물이 온몸을 적시었다.

그는 다시 일어서려 하였다. 그러나 의식은 똑똑하나 일어서지를 못하였다 그래 그는 넘어진 어린아이가 . 일으켜 주기를 기다리는 듯이 한참 고래를 숙이고 엎드렸을 때 때없이 약한 마음이 자기 가슴으로 지나갈 때 그는 우일을 소리쳐 부르고 싶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나무가 우거진 틈으로 절집을 살필 때 옆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서 다시 산 듯이 벌떡 일어나려 하다가 다시 쓰러지려 할 때 그는 허리를 짚고서 꿋꿋이 버티고 섰다. 그리고 비슬비슬 걸어서 물소리를 찾아 물을 먹으러 시냇가로 갔다. 그는 그대로 엎드려 물을 마시었다. 두 모금 세 모금 물을 마신 후에 그는 고개를 들고 다시 일어나 양쪽의 나무가 흥예문을 튼 듯한 너른 길을 얼마인지 걸어와서 층계돌을 모은 데 걸려 넘어져 이마가 깨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 층을 오르려다가 무릎을 벗기었다. 그는 또다시 일어서려 하였으나 일어서지를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몸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고통에 신음을 하다가 다시 번듯이 누웠을 때 그는 생각하였다. 자기의 육체가 자기 의식을 행사치 못하니 아마 이제 나의 생명이 끊어질 시간이 가까웠나 보다. 그러면 나의 벗 우일도 만나 보지도 못하고 이 자리에서 죽나 보다 할 때 암흑 속에서 우는 벌레의 소리들과 샘물의 중앙중앙 흐르는 소리가 바람 밑에서 살락살락하는 나뭇잎의 떠는 소리나 자기 손에 만져지는 가슬가슬한 모래들이나 또는 콧속에 맡히는 수기(水氣)있는 흙 냄새. 멀리서 자기의 임종을 못 하는 듯한 뻐꾸기의 소리. 이 모든 것을 그는 이 몇 찰나 사이에 마지막 듣고 보지나 않는가 하였다.

그는 그것을 생각할 때,

『아니다. 마지막으로라도 우일을 만나야 한다.』

하고서 맨 나중 힘을 다하여 일어섰다. 그러고서 다시 저쪽 가운루가 어두컴컴한 속에 희미하게 보일 때 그는 그쪽을 향하여 달음질하려 하였으나 그의 다리는 힘없이 떨리고 그의 옆구리는 지구를 차고 가는 듯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가 한 다리를 내어놓으려 할 때 바로 자기 눈 앞에는 우일과 정희가 와서 섰다. 일복은,

『아, 우일 군!』

하고서 그의 가슴에 그대로 안기며 다시 옆에서 자기를 무서운 듯해 하는 정희를 보고서,

『아! 정희?』

하고서 꿈이나 아닌가 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비킬 때,

『이게 웬일인가?』

하고 자기의 몸을 잡는 사람은 분명한 우일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의외 일에 그는 꿈이나 아닌가 하고서 두 사람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볼때 정희도 그때야, 알은 듯이,

『아! 일복 씨』

하고서 덤벼들려 하니까 일복은 다시 힘없이 우일의 팔에 힘없이 턱 안기며,

『아! 정희의 환영이다! 환영이다!』

하면서 우일을 쳐다보며,

『우일 군! 정희의 환영! 저기 정희의 환영!』

하고서 아무 소리 없이 우일의 팔에서 실신을 해 버렸다.

이 말을 들은 정희는 일복의 가슴에 엎드러지며,

『일복 씨! 저는 환영이 아니라 정체(正體)입니다. 저는 일복 씨의 아내인 정희입니다!』

우일은 일복을 무릎에 뉘었다. 그리고서 그의 얼굴과 피를 씻으며,

『이게 웬일인가?』

하고서 다시 그의 허리를 만지다가 다시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라면서,

『이 사람아 어디서 칼에 맞었으니 도적을 만났는가?』

하고 십 분이나 넘게 주물렀을 때 일복은 겨우 눈을 떠 우일을 보며 입 속에서 잘 나오지도 않는 소리로,

『여보게 나, 나는 사람을 죽였네!』

우일은,

『응? 무어야?』

하며 사면을 둘러보고서,

『그래 어떻게, 무슨 일로?』

『나는 나의 애인을 죽였다! 그러나 나는 죽지를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가까웠다』

하고서,

『여보게, 나의 가슴을 좀 문질러 주게』

하고서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점점 풀이 죽어지며,

『나의 눈물은 우리 정다운 친구를 마지막으로 작별하는 눈물이다!』

우일의 눈에서도 눈물이 나왔다. 정희는 또다시 일복을 잡으며,

『일복 씨! 저에게 다만 한 마디 말씀이라도 아내라고 불러 주세요!』

할 때 일복은 다시 정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내두르며,

『환영은 언제든지 환영! 죽은 정희의 환영! 죽음을 찰나 앞에 둔 나로서도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못하겠다…』

하고서 우일의 팔에 힘있게 몸을 비틀 때 심장의 고동은 정지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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