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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1권/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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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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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이 끝난 날 오후 , 교실에서는 졸업생과 선생의 송별을 의미하는 간소한 다과회(茶菓會)가 열리었다.

이 다과회만 끝나면 꿈 많고 감상 많던 즐거운 중학시절에 인제는 완전히 하나의 피어리드(終止符[종지부])를 찍는 셈이다.

다같이 졸업장을 한 장씩 손에 든 그들에게는 재학시절의 우등생, 열등생, 구별이 없이 넓은 희망의 바다로 힘차게 헤엄쳐 나가려는 왕성한 의욕이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그 희망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몰랐다. 그저 자기들의 앞 길에 불안에 찬 그 어떤 커다란, 막연한 희망의 세계가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희망의 바다로!

희망의 바다로!

그러나 그 희망의 바다가 쓰디쓴 하나의 고해(苦海)로 변하는 순간을 그들은 상상하지 못하였다. 아니, 상상할 필요가 없었고 상상할 흥미조차 없었다. 접시 밑에 남은 과자 부스러기를 혀 끝으로 핥아 먹는 왕성한 식욕과 의욕이 있으면 고만이었다.

세 반 합해서 백 명 남짓한 졸업생이었다. 세 사람의 담임선생과, 그리고 다소 이 졸업반과 과거의 인연이 있어 마지 못해 출석한 너더댓 사람의 선생과 .. 극히 간략한 송별회였다. 재학시절에 느끼고 갖고 한 감상담 같은 것, 또는 특히 훈도(薰陶)를 받은 선생에게 감사의 뜻을 자유로히 이야기하며 즐기려는 모임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이 모임의 성질과는 전혀 다른 별다른 방향으로 탈선하는 일이 간간 있기 때문에 지금도 별로 신통치 않는 한 두 학생의 더듬거리는 추억담이 끝나자 담임선생 중의 하나인 박 선생이

「그러면 별로 이렇다 할 감상문도 없는 것 같으니……」

하고 어물어물 회를 끝막으려 했을 때

「선생님!」

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땅개」라는 별명을 가진 학생이었다. 땅개란 선생에게 곧 잘 아첨한다는 뜻이다.

「저는 야마모도 선생께서 하신 말씀을 항상 감명깊게 생각합니다.」

하고 역사를 가르치는 일본인 선생 야마모도를 힐끗 바라보았다. 三十[삼십]이 될락말락한 젊은 교사였다. 광도고사(廣島高師) 출신인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다.

이 야마모도에게 뺨 한 대씩 얻어 맞지 못한 학생이 있다면 그건 정말 바보가 아니면 땅개 혼자 뿐일 것이다.

그때 교실 한 모퉁이에서

「또 야마모도야?」

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이어서 회석에서는

「얘, 집어 쳐라!」

「맛나게 먹은 과자가 꺼꾸로 겨 올라온다.」

여기저기서 야유가 들려 왔다.

그러나 땅개는 그런 것 쯤은 마이동풍이었다.

「……교육이란 한결같지 않다. 아니, 않아야 한다고 하신 말씀 .. 다시 말하면 상대자에 따라 교육의 방법을 달리해야만 된다는 야마모도 선생의 말씀은 저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읍니다. 그것은 단지 교육에 있어서만 아니라,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부터 사회에 나가서 수많은 사람들을 대할 때, 상대자 여하에 따라서 우리의 생활 태도도 달리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땅개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앉았다.

그러나 그때

「땅개, 너는 비굴하다! 왜 마지막까지 말을 못하는가?……아니, 내가 하마!」

하고, 벌떡 몸을 일으킨 학생이 한 사람 있었다.

험악한 공기였다. 다과회는 확실히 탈선 도중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험악한 장면이 때때로 벌어지기 때문에 학생들의 미움을 산 선생은 대개가 무슨 긴급한 용건을 빙자하여 이 다과회를 슬쩍 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마모도 선생에게는 굳은 신념이 있었다. 나이도 젊거니와 완력에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 학생이 누구인지를 깨닫자 야마모도 선생은 어지간히 의외로 생각하였다.

백 영민(白榮民)은 공부도 착실한 우등생일 뿐더러 평시에는 침착하고 어딘가 무척 우울해 보이는 학생이기 때문이었다. 유도부 주장이요 도서부 위원이었다.

「땅개가…… 아니, 최(崔)군이 채 하지 않은 이야기를 내가 하겠읍니다. 그것은 야마모도 선생이 교육의 방법은 한결같지 않다고 하시면서 하는 말씀이, 말로 일러서 들을 놈은 말로 일러서 교육을 시키고 주먹으로 때려서 들을 놈은 주먹으로 때려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하셨읍니다. 이 말을 최 군은 어째선가 빼 먹었습니다만……아니, 빼 먹은 것은 좋습니다. 나는 여기서 야마모도 선생에게 조용히 묻노니, 선생의 논법으로 말하면 지금 이 지리에 모인 졸업생의 태반이 선생의 주먹 맛을 본 학생인데……그러면 우리들의 태반이 주먹이 아니면 교육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말씀이었읍니까? 대답을 해 주시요!」

백 영민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그렇습니다!」

「그렇소!」

「대답을 하시요!」

하고, 학생들이 발을 구르며 떠들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도화선(導火線)에 불을 댕기었다. 五[오]년 동안 가슴속 한구석에 깊이깊이 간직해 두었던 타오르기 쉬운 감정이 백 영민의 한 마디로 말미암아 폭발하려는 순간이다.

이러한 감정의 부채(負債)가 있는 야마모도가 도대체 오늘같은 회석에 참석했다는 것이 첫째로 잘못이었다.

젊은 야마모도의 얼굴에는 일순간 칠면조처럼 복잡한 변화가 떠 올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핏대줄이 지렁이처럼 뻗친 무서운 얼굴로 마즌편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었다.

「그것은 나의…… 나의 확고한 교육 방침이다. 아니 너희들은…… 도대체 나를…… 뭣으로 아느냐?」

격할대로 격한 야마모도 선생은 입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을 안타까와하였다.

「……나는 적어도 너희들의 선생이다.……五[오]년 동안 너희들을 가르친 교사다!」

야마모도 선생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발악을 하듯이 그렇게 고함을 쳤을 때였다.

「노오, 노오!」

하는 극히 한가스러운 목소리가 한편 구석에서 들리었다.

영어 사전을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외인다는데서부터 「콘사이스」라는 별명을 가진 학생이다. 장래에 대 소설가를 꿈꾸는 문학소년…… 어여쁜 용모이나 극히 허약한 체구를 가진 학생이었다.

「노오, 노오? 노오노오란 뭣이냐?……」

영어 폐지론을 극단히 주장하여 영어 교사를 울리게 한 야마모도의 귀에 거슬리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노오 노오란 선생의 말씀을 부인하는 의미의 영어입니다.」

「내가 너희들의 교사란 말이 잘못이란 말이냐?」

「예쓰!」

학생들이

「으와.」

하고, 웃었다.

콘사이스의 이 유모러스한 대답은 확실히 야마모도 선생을 하나의 놀림감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야마모도 선생은 분하다는 것보다도 기가 막혔다. 五[오]년 동안 울라면 우는 흉내를 내고 죽으라면 죽는 흉내까지도 하던 그 너무나 무기력하던 소년들이 오늘날 이처럼 대담하게도 반항의 화살을 던질 줄은 정말 몰랐다.

그때까지도 앉아있던 콘사이스가 입술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교복 소매로 문지르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선생은 언젠가 내가 문학 소년이라는 것을 비웃으면서,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달이 밝으면 어쨌단 말이냐? 소설가란 여자의 엉덩이만 따라다니는 일종의 변태성욕자다, 하였읍니다. 자기의 전문 학과를 전공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다른 사람의 전문 영역을 그처럼 욕설 한다는 것은 교육자로서의 인격을 갖추지 못한 증거라 생각합니다.」

「뭣이? 교육자의 인격을 갖추지 못했다?……」

야마모도 선생은 주먹을 불끈 쥐고 달려가려 하였을 때, 어디선가

「때려라!」

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렇다. 야마모도를 한번 때려 주자!」

하고 학생들은 떠들며 자리에서

「와아」

하고, 일어섰다.

그때 책상을 쾅 치며

「제군, 떠들지 말라!」

하고, 호기있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맨 뒷줄에 앉았던 「대통령」이란 별명을 가진 키가 후리후리한 학생이었다.

「제군의 힘을 빌지 않아도 야마모도 하나쯤 나 혼자서도 넉넉하다. 그러나 제군, 진정해 주기 바란다. 이미 졸업장을 손에 든 우리의 행동은 단지 교내 문제로만 그칠 것이 아니고 하나의 사회문제로서 전개 될 것이 아닌가?……」

대통령은 그렇게 조선 말로서 일동을 진정시켰다.

학생들은 절반은 앉고 절반을 일어선채 대통령을 돌아보았다.

능란한 웅변과 검도 二[이]단의 실력을 가지고 능히 학생들을 제압해 온 대통령은 「로이드」 안경을 콧등으로 밀어 올리며 이번엔 일본 말로

「나는 제군을 대표하여 .. 아니, 땅개 한 사람을 제외한 제군을 대표하여 한 마디 야마모도씨에게 충고하오! 에헴. .. 때는 지금으로부터 五[오]년 전, 우리가 이 학교에 입학한 이튿날이었읍니다. 그때 우리의 담임 선생이던 야마모도씨가 우리들에게 장래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읍니다.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대답을 했읍니다. 그랬더니 야마모도씨는 마치 경관처럼 음험한 눈초리로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불온사상이다, 신국 일본에 대통령이 있을 리 없다 하여, 이것을 곧 사상 문제로 전개시켜 두 주일 동안의 정학처분을 했을 뿐만 아니라 아아, 제군!…」

하고, 책상을 또 쾅 쳤다. 어디서 본을 따 왔는지, 팔장을 턱 끼고 상반신을 뒤로 번쩍 재켰다. 학생들이 킥킥하고 웃었다.

「제군! 제군은 웃느냐? 나는 울었다! 그날 저녁 나의 하숙에는 시꺼먼 안경을 쓴 형사가 한 사람 찾아 와서 가택 수색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물쇠를 채운 나의 책상 설합에서 나온 것은 대통령이 되려는 기밀 문서 대신에 실로 제군, 실로다! 실로 어여쁜 아가씨가 나를 보고 방긋 웃고 있는 한 장의 사진 .. 「샬리·템풀」의 「푸로마이드」였다!」

「하, 하, 하, 핫……」

「하하하핫…… 하하하핫……」

학생들도 웃고 선생들도 웃었다. 야마모도씨도 입을 한번 시무룩하였다.

웃지 않는 것은 땅개 한 사람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