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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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없는 길손[편집]

1[편집]

깨끗이 치워진 방안과 아랫목에 깔아 놓은 침구가 무엇보다 먼저 준혁의 눈에 띄어 들어왔다 . 유경에게는 보지 못하던 현실적인 아름다움이다.

운옥은 얼른 몸을 일으켜 준혁과 엇바꾸어 밖으로 나가며

「선생님, 어서 들어 누셔야겠어요. <아스피린> 가져 올까요?」

「아, 운옥씨 잠깐……」

나가려는 운옥을 준혁은 불러 들였다.

「환잘 내버려 두고 어떻게 왔소?」

「네, 저……」

운옥은 눈을 내려뜨고 잠깐동안 망설거리다가

「저 환자가……장 선생이 인제는 파출부가 필요 없다구요. 벌써부터 그런 말을 하시는걸 선생님의 지시도 없고해서 그냥 눌러 있었어요. 그래 오늘은 정말 파출부를 정식으로 해고한다구 ── 그래서 왔어요.」

「그럴 리가 있나? 아직두 좀더 정양을 해야만 될텐데……」

준혁은 운옥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면서

「오늘 신 성호군이 가지 않었어요.」

「오셨어요. 그리고 약소하다고 하시면서 二[이]백 원을 주셨어요.」

「받았어요?」

「아뇨.」

「잘 하셨소.」

준혁은 입김이 가 닿으리 만큼 가까이 다가서며 은근한 목소리로 불렀다.

「운옥씨.」

「네?」

「가서 며칠만 더 시중을 하여 주시요」

「………」

「고달프겠지만……」

「아뇨, 전…… 그러나 선생님이 혼자서 얼마나 불편하시었어요?」

「운옥씨가 없으니 병원안이 텅 비인것 같소. 그러나 특별한 환자니 며칠만 더 돌보아 주시요.」

「네, 선생님이 가라면 가긴 하겠지만……그러나 환자 측에서 자꾸만 ……」

「생각컨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니까 그러는 것 같소만 운옥씨도 아다시피 이편에서 보수를 요구할 경우는 아니니까요. 알겠어요?」

「네 ──」

운옥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약국으로 나왔다.

준혁을 위하여 해열제를 지면서 운옥은 장 일수의 타오르는 듯한 침묵의 정열 가운데서 고달피 지내던 이 며칠 동안을 회상하며 몸을 한번 부르르 떨었다.

그 질식 할것 같은 침묵의 정열에서 간신이 빠져나온 줄 알았던 허 운옥이건만 그리나 , 운옥의 생리는 웃 사람의 말을 거역할 줄을 모른다.

「그런데 선생님을 저처럼 절망 속에 던져 넣은 유경이란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운옥은 유경이란 여자를 한번 보고 싶었다.

운옥은 약을 지어 가지고 나오다가 자기 손가방을 가질러 진찰실로 들어갔다. 아까 준혁이가 엎디어 처방전에다 “Pajk Young Mjn”(백 영민)이란 글자를 쓰던 테이블 위에 손가방은 놓여 있었다.

운옥은 손을 뻗쳐 가방을 들었다. 아니, 들을려 하던 바로 그 순간이다.

운옥은 문득 테이블 위를 들여다 보았다. 잉크 병, 철필통, 재털이, 답배갑, 명함꽃이, 서적, 그리고 백 영민의 이름을 영자로 수없이 써놓은 처방전 ── 이런 것들이 일시에 운옥의 시야에 띄어 들었다. 준혁의 처방전을 읽을 줄 아는 운옥이니「알파벳」을 모를 리는 없다.

그러나 처방전에 그적거린 “Pajk Young Mjn”(백 영민)이라는 글자 보다도 좀더 낯익은 글자가 한 걸음 먼저 운옥의 시선을 붙잡았던 것이니, 그것은 명함꽃이에 꽂쳐있는

「박택 준길(朴澤後吉)」

이라는 네 글자였다.

2[편집]

「── 헌병 보조원 박택 준길?……」

마치 흡반(吸盤) 처럼 운옥의 시선을 무섭게 빨아 들이는 「박택 준길」이라는 네 글자!

그 순간 운옥의 머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낡은 기억의 몇 토막은 ── 뒷탑골 야학원 졸업식장 이었으며 비탄과 절망 속에서 무심중 흘러나온 애국가였으며 태극령 고개에서 은장도를 휘둘러 박 준길을 쓰러뜨리던 무서운 광경이었다.

고독하고 고달프나마 이해 많은 김 준혁 박사 밑에서 비교적 평온하게 지내온 과거 一[일]년 동안의 허 운옥의 생활이 다시금 파괴되려는 순간이다.

잘못하면 또다시 폭풍우가 쏟아져 내리는 거칠은 황야를 정처없이 걷게 될런지도 모르는 아아, 수난(受難)의 여인 허 운옥의 운명이여!

「그러나 이 박택 준길이라는 인물이 바로 그 삼룡이의 아들 박 준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는가?」

운옥에게 있어서 단 일루의 희망은 그것이었다.

「이 이가 대체 무슨 일로 선생님을 찾아 왔을꼬?……환잔가?

그러면서 운옥은 테이블 위에 널려있는 다른 물건에는 눈도 거들떠 볼 여유도 없이 가방을 들고 허둥지둥 진찰실을 나왔다.

아까 약을 질 적엔

「어디 一[일]호실에 들어가서 유경이란 여자를 한번 볼까?」

하던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지금은 운옥으로서는 자기가 一[일]호실 앞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염두에 둘 여유가 없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준혁은 자리에 들지 않고 우두머니 책상 앞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운옥은 찻종지에 물을 딸아 약봉지와 함께 준혁의 앞에 내 놓았다.

「날도 추운데 오늘밤은 여기서 자고 내일 가시요.」

아까는 가래던 준혁이가 이번엔 가지를 말란다.

운옥은 대답 대신 준혁을 쳐다보았다.

「환자 편에서 굳이 사양을 한다면 내일도 갈 필요는 없지요.」

무서운 정신적 허탈(虛脫)에서 준혁을 건져 줄 사람은 운옥 밖에는 없다.

누구가 자기를 부축해 주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은 준혁이었다. 준혁은 운옥을 보내고 싶지 않다.

「선생님, 무슨 맘 편치 않은 일이 계시나요?」

「아니요.」

「헌병대에서 누가 왔었지요? 인제 진찰실엘 들어 갔다가 명함을 봤어요.」

「아 저 애꾸눈이 말이요?」

「애꾸눈이라구요?」

「아까 낮에 신군이 여길 들렸었는데, 하하하…… 신군이 그 애꾸눈이 때문에 고생을 톡톡히 한답니다.」

애꾸눈이? ── 그렇다. 애꾸눈이가 자꾸만 신 성호를 따라 다닌다는 말을 장 일수 한테서도 여러번 들은 운옥이다. 그러면 그 애꾸눈이가 박태 준길이었던가! 그러나 박 준길이가 애꾸눈일 리는 없을 텐데……?

「나이가 많은 이예요?」

「아니, 인제 겨우 스물 대여섯 됐을까 하는 젊은이든데요.」

스물 대여섯이면 ……그렇다. 나이로 따지면 박 준길과 같은 사람인데……

다음 순간, 앗, 그렇다! 독수리처럼 움켜 쥐었던 은장도가 절반이나 폭하고 들어가던 손바닥의 감각이 번개처럼 새로워지는 운옥이었다.

그렇다. 별반 저항도 없이 은장도가 폭하고 들어가던 것이 바루 눈이었다면 필시 외인편 눈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바른편 눈이야요?」

「아니, 외인편 눈이……」

운옥은 치를 부르르 떨었다.

3[편집]

땅개 최 달근의 앞잽이인 애꾸눈이 박 준길 ── 그 박 준길이가 지금은 장 일수의 행적을 더듬노라고 눈이 벌개져 다니지만 그가 만일 오늘 자기가 들어왔던 이 김 준혁 외과에서 허 상진이의 딸운옥을 발견한다면 ── 아아, 무서운 일이다! 언제 어느때 박 준길이가 이 병원 안으로 선뜻 들어 설런지 누가 알랴?……

운옥은 신변에 극도로 위험을 느끼면서 모든 것을 이 믿음직한 김 준혁 박사에게 이야기를 하고 그의 보호를 받을까고도 생각하여 보았으나 그러나 운옥의 입이 무겁다. 김 준혁처럼 입이 무겁다.

「어서 약 잡수시구 푹 주무세요. 전 그럼 청량리로 나가겠어요.」

운옥은 가방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한 시 바삐 이 병원에서 몸을 감출 필요를 느꼈던 때문이다.

「운옥씨!」

준혁은 따라 일어서면서 운옥을 불렀다.

「네? ──」

「내일 가시요.」

「내일 가나 지금 가나 마찬가지야요.」

「내일 가시요.」

그 순간 운옥은 준혁의 얼굴에서 장 일수의 정열을 본 것 같았다. 「나의 건강은 파출부를 필요로 하지 않소」 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정열임을 운옥은 경험으로서 민감하게 깨닫는다.

「괜찮어요 선생님. 어서 주무세요.」

「운옥은 재빠르게 문을 닫으면서

「그럼 다녀 오겠읍니다.」

하고 안방을 나왔다.

나올 때 운옥은 준혁의 얼굴에서 끝없이 흐르는 고독을 발견한 것같았다.

그리고 그 흐르는 듯한 깊은 고독을 위로하여 주고도 싶은 운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운옥에게 있어서는 김 준혁 박사의 고독의 정열도, 장 일수의 침묵의 정열도, 그리고 태극령 고개에서 경험한 박 준길의 야수(野獸)의 정열도 모두가 금단(禁斷)의 과실일 따름이다.

그 뭇 정열은 여인 허 운옥의 인생에 있어서는 하나의 부록(附錄)밖에 안 된다. 오직 백 영민 한 사람만이 영원한 마음의 남편으로서 운옥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운옥은 긴 복도를 걸어 간호원들이 같이 거처하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성탄제 구경을 간 동료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경숙이가 혼자 운옥을 기다리다 못하여 운옥이의 자리를 제 옆에다 깔아 놓고 고스란이 잠이 들었다.

운옥은 살그머니 자기 벼갯모 한 구석을 뜯고 비단 헝겊에 싼 쇠뭉치 같은 것을 꺼내 자기 손가방에 다 깊숙히 넣었다.

「박 준길이!」

그렇다. 그때 만일 허 상진의 단 하나의 유산인 이 권총이 허 운옥의 수중에 있었던들 박 준길은 애꾸눈이를 면 할수 있는 동시에 오늘날 다시 운옥의 앞에 나타나서 운옥의 생활을 협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운옥은 가방을 옆구리에다 꽉 끼고 눈 날리는 밤거리로 나섰다.

동대문행 전차는 아직도 있었다. 그러나 운옥은 전차를 타지 않고 걷기로 작정했다. 걸으면서 운옥은 천천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박 준길의 정열도 무서웠으나 장 일수의 그것도 무서웠다. 가다가 정말 무서워지면 운옥의 발길은 후딱 딴 길로 접어들런지 모른다.

「탑골동에두 눈이 왔을까?……태극령에두 눈이 왔을까?……」

며칠 후에 상경하리라는 영민의 모습을 ── 四[사]년전 그대로의 영민의 모습을 눈 내리는 허공중에 정밀한 화공(畵工)인 양 운옥은 그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