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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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편집]

1[편집]

그날 밤, 영민이가 대통령들과 헤어져 상수리 하숙으로 돌아온 것은 열두 시가 거의 가까왔을 무렵이다.

몸과 마음이 다 함께 흥분했던 끝이라, 목이 몹시 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짜고짜로 부엌으로 들어가 냉수 한 그릇을 벌컥벌컥 마시고야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편지 한 장이 영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아버지의 글씨다.」

먹물이 뚝뚝 흐를 것 같은 낯익은 아버지의 달필이다.

그순간, 영민은 가슴이 덜컥하였다. 공연히 마음이 설레어 견딜 수가 없다. 보지 않아도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영민이 기 때문에 마음을 진정시킬 셈으로 한번 깊이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책상 앞에 가만히 꿇어앉아 눈을 감았다.

「아버지, 그러나 제 마음은 이미 결정 되었습니다.」

조용하면서도 극히 엄숙한 한 마디였다. 영민은 공손히 봉함을 뜯었다.

(전략) .. 그런즉, 졸업식이 끝나거든 곧 집으로 돌아오너라. 동경엘 가더라도 결혼식이나 지내고 가는 것이 도리가 아니뇨. 물론 늙은 부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운옥(雲玉)으로 말하면 어른들 앞에서 뭐라고 감히 말은 없어도 네가 돌아오기를 일일천추로 기다리고 있다. 자식을 생각하는 어버이의 마음이 절대적이라 하지마는 너를 생각하는 운옥의 마음에 비하면 아직도 멀다 하겠다.…… (중략) .. 아버지는 너를 믿는다. 아버지는 너를 요즈음 도회지에서 흔히 보는 경박한 청년들과 똑같이 여기고 싶지는 않노라. 이 아버지도 너의 어머니도 그리고 운옥이도 너를 믿고 있다. 끝끝내 믿고 있다. 자기를 믿는 자를 배반하는 것처럼 더 큰 죄악은 없으리라. 아니다. 너무 지나친 것 같아서 도리어 미안하다. 실은 지나간 겨울 방학에 너는 운옥이에게 너무 냉정한 태도로 대한 사실을 아버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소 지나친 훈계가 된 것을 적지 않게 섭섭히 생각하는 바이다. 엷은 어름장 위를 건느는 것 같이 조심성스러운 마음으로 너를 기다리고 있는 운옥을 하루바삐 돌아 와서 안심 시키도록 선처하기를 바라며…… (후략) ..」

한 팔이나 되는 긴 두루마리를 영민은 공손히 말아 다시 봉투에 넣으면서

「올 것이 마침내 왔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자기가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운옥의 애처러운 모습이 눈앞에 뚜렷이 떠 올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 자기를 믿는 자를 배반하는 것처럼 더 큰 죄악은 없으리라.」

하신, 아버지의 한 마디가 사형 선고처럼 영민의 앞을 캄캄하게 하였다.

아까 교문을 나서면서 품었던 무엇인가 헤아릴 수 없는 그 커다란 희망의 싹이 무참히도 진흙 발로 문질러지는 일 순간을 영민은 느꼈다.

아버지께서 이 일에 참견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고도 못 보신 척, 듣고도 못 들으신 척, 모든것을 지각있는 아들이 선처하기를 믿으시고 바라시던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아버지!」

영민은 마음과 몸을 지탱할 바 없이 그만 책상 위에 엎드려 졌다. 눈물이 스르르 교복 소매를 적신다.

그 눈물 젖은 망막 속에서 오늘의 이 비극의 실마리가 된 지나간 날의 한 토막이 마치 필림처럼 조용히 흘렀다.

2[편집]

백 영민의 고향인 탑골동은 평양 외성서 머턴리(馬灘[마탄]) 나루를 건너면 육로로 三十[삼십] 리 길이다.

근방에 낙랑고분(樂浪古墳)이 허다하게 산재해 있는 탑골동은 태극령(太極嶺)이라는 조그만 고개를 사이에 두고 앞탑골과 뒷탑골로 나누어져 있었다.

옛날 이 고개 위에 태극사(太極寺)라는 절이 있었으나 중간에 화재를 만나 불타버리고 지금은 조그만 삼중탑(三重塔)이 한 기둥 외로히 서 있을 뿐, 퍼렇게 이끼 낀 쓰러진 주춧돌 몇 개가 옛날을 꿈꾸는 듯이 쓸쓸히 남아 있었다.

그 조그만 삼중탑을 가리켜 이 근방에서는 도라지탑이라고 불렀다.

뒷탑골에는 보통학교도 있고 예수교 예배당도 있었으나 三十[삼십] 호가 될락말락한 이 앞탑골에는 한채의 낡은 청기와 집이 눈에 띄일 뿐, 모두가 초라한 초가였다.

그것은 영민이가 열 세 살 되는 해 초가을 어떤 맑은 날 오후였다.

이 청기와 집 주인 백 초시가 오늘따라 정관을 하고 태극령 고개를 뒷탑골로 넘고 있을 때 문득 , 머리를 들고 보니, 바루 고개 마루턱 도라지탑 옆에서 소년 둘이 무섭게 싸우고 있었다. 한 놈은 크고 한 놈은 작았다.

큰놈한테 깔리워 넘어간 작은놈이 아무리 보아도 자기 아들놈 같아서 백초시는 장죽을 꺼꾸로 쥐고 달려가며

「이놈들아!」

고함을 쳤다.

그랬더니 작은놈 배 위에 말타듯이 올라 탔던 큰 놈이 머리를 번쩍 들고 백 초시 영감을 바라보자 벌떡 일어나 저편 솔밭 사이로 도망을 쳤다.

아니나 다를까, 흙을 털며 땅에서 부시시 몸을 일으킨 것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자기 아들 영민이었다.

소년의 손등이 무섭게 터저서 선지피가 뚝뚝 흘렀다. 그러나 백 초시는 본 척만척, 지금 막 솔밭으로 도망을 한 큰 놈의 뒷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니, 저 녀석이 삼룡이의 아들이 아닌가?」

백 초시는 도저이 믿지 못할 무슨 큰 기적이나 눈 앞에 보는것 처럼

「음, 삼룡이 녀석의 아들이 내 아들에게 손을 댄다?」

백 초시는 기가 막혔다.

잘잘못을 따질 필요는 전혀 없었다. 박 삼룡(朴三龍)이의 아들 준길(俊吉)이 가 적어도 백 초시 아들에게 손을 걸었다는 단지 그 사실만이 분하고 원통하였다.

일정한 직업이 없이 산판으로, 놀음판으로 떠돌아 다니던 불량배 박 삼룡이가 도박에 운이 티어 二三[이삼]천 잡았다 할지라도 〈앞탑골 백 초시야 그래두 괄세를 하랴?〉 그렇게 생각을 하고 큰 기침을 하며 다니던 백 초시였다.

그러나 세상은 백 초시의 마음대로 흘러 주지는 않았다. 그것도 해마다 불어 나가는 재산이라면 모르거니와 얼마 되지 않는 전답이 해마다 한 뙈기씩 줄어드는 백 초시의 쇠운(衰運)이었다.

「어서 집으로 내려 가거라. 음 ..」

백 초시는 단 한 마디 그렇게 남겨놓고 괘씸하다는 듯이 다시 뒷짐을 지고 뒷탑골로 넘어 갔다.

「오늘 따라 아버지가 어딜 출입하실까?」

소년은 잠깐 머리를 기울이다가 상처 받은 손등을 움켜잡고 발걸음을 돌렸을 때였다.

바로 도라지탑 뒤에서 열 너덧 살 되어 보이는 계집애가 기웃하고 얼굴을 내밀며 냉큼 뛰어 나왔다.

「글쎄, 우리 오래빈 돼지바우란다!」

준길이의 동생 분이(粉伊)가 목화 바구니를 내던지고 소년의 옆으로 달려 왔다.

유달리 긴 눈썹을 가진 토실토실한 귀여운 소녀였다.

3[편집]

분이는 자기 오빠 준길이가 사라진 솔밭 사이를 도록도록 바라보며

「괘니 글세 그 돼지바우가 남 길 가는 사람보구… 이담엔 맞서지 말아 얘.」

그러다가 분이는 후닥딱 놀래며

「아이구 너 피 나누나! 저걸, 저걸……?」

분이는 영민의 손목을 담뿍 잡았다. 그리고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잠깐 동안도록도록 하다가 갖 빨아 입은 흰 무명 치마자락으로 소년의 손등에서 선지피를 찍어 냈다.

「아, 치마가……」

소년은 놀래어 잡힌 손목을 잡아 댕겼으나 그러나 그때는 벌써 분이의 치마자락에는 잘 익은 석류 모양으로 핏무늬가 선명하게 인박혀 버렸을 때였다.

「이리 와.」

분이는 소년의 손목을 잡아 댕겼다. 잡아 댕기는대로 소년은 묵묵히 탑 앞으로 따라갔다.

도라지탑 앞에 분이의 목화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다람쥐처럼 재빠른 솜씨로 목화송이에서 솜을 박박 뜯어 내는 분이의 토실토실한 옆 얼굴을 소년은 말없이 바라 보았다. 귀여운 얼굴이었다.

「이걸 이렇게 대구……」

솜 뭉치를 만들어 소년의 손등에다 대고, 이번에는 길게 땋아 느린 자기 머리에서 댕기를 풀었다.

「이걸루 이렇게 매구……」

손등을 동여 매느라고 머리를 숙인 분이의 이마가 바로 소년의 코 앞에 있었다 부수수하니 이마를 . 덮은 솜털이 세일 만큼 소년의 눈 앞에 가깝다.

산산히 흐트러진 분이의 머리카락이 태극령 고개를 넘는 저녁 바람 속에서 휙 소년의 얼굴을 덮었다.

그러나 소년은 얼굴을 비끼지 못했다. 얼굴을 돌려 머리카락을 치워버리는 것이 어쩐지 분이의 그 거룩한 친절을 모독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아, 인젠 됐다. 빨리 집으로 가서 담배 가루를 발라.」

분이는 얼굴을 들고 산산히 흐트러진 머리채를 한손으로 휘어감아 쥐었다.

이윽고 집으로 돌아온 영민은 늙은 어머니에게 사연을 쭉 이야기 하였다.

「어쩌면 같은 배에서 나온 아이들인데 그처럼도 다를꼬?」

어머니는 고마와서 옷장을 열었다. 며누리를 맞으려고 장만하여 두었던 옷감을 헤치고 옥양목 치마 한 감과 자주 갑사 댕기 한 감을 끊어 책보에 싸서 아들에게 주면서

「이걸 그 애에게 갖다 주어라.」

영민은 그것을 가지고 다시 태극령 고개로 올라갔다.

도라지탑 앞에서 분이는 두 손으로 턱을 고이고 쪼그리고 앉아서 항상 꿈 속에 그리는 평양이 그 쪽에 있다는 그 먼 하늘밑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분이.」

「응? ..」

「이거 가져.」

「그게 뭐야? ..」

분이는 분주스레 책보를 풀었다.

그순간, 분이의 얼굴이 새침해 졌다. 물건과 영민을 번갈아 쳐다본다. 쳐다보다가 돌연 책보를 휙 하고 영민의 발뿌리에다 내던졌다. 그리고는 솜바구니를 들고 쏜살같이 뒷탑골로 뛰어 내려 갔다.

뒤도 돌아 보지 않고 .. 끝끝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분이의 탄력있는 두 다리가 껑충껑충 언덕 밑으로 뛰어 내려 간다. 흐트러진 머리채가 그 뒤로 오쭐오쭐 춤을 추며 따라간다.

영민은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조그맣게 사라지는 소녀의 뒷모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섰다.

태극령 고개 위에 저녁 노을이 무척 밝다.

4[편집]

영민 소년이 분이의 뒷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고 섰는 바로 그즈음, 뒷탑골 동네 밖까지 다다른 백 초시는 오늘 자기가 정관을 하고 찾아보려 온 허 상진(許尙鎭)이의 집 쓰러져가는 싸리문 밖에 동리 사람들이 오구구 모인 것을 문득 바라보고 거꾸로 쥐었던 장죽을 바로 쥐며 머리를 기웃하였다.

「아니, 그럼 돈두 못 물겠다, 혼사두 못 하겠다, 아, 이거 박 삼룡이의 돈이 이렇게두 맥을 못 추나?…… 흥, 그래두 내가 오늘은 끝장을 보구야 갈 껄.」

삼룡이의 술취한 목소리가 아닌가.

병중에 있는 허 상진이가 남의 사채 때문에 고생을 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삼룡이 녀석의 돈을 쓴 줄은 꿈에도 몰랐던 백 초시였다.

기미(己未)년 만세통에 집을 떠난 허 상진은 만주로, 북지로 근 三十[삼십] 년 동안을 피신해 다니다가 병 있는 몸에 아내까지 여위고 三[삼]년 전 어린 딸 자식 하나를 이끌고 이 탑골을 찾아 표연히 떠돌어 왔다.

뜻 가진 사람의 말로가 태반 그러하거니와 숙환인 위암과 빈곤속에서 어린 딸 운옥을 데리고 누구 한 사람 반겨 맞는 이 없는 이 낯설은 타향에서 오늘날까지 三[삼]년을 연명해 온 허 상진이다.

백 초시는 사람들 어깨 위로 잡초가 무성한 뜰안을 넘겨다 보았다. 컴컴한 방 아랫목에 해골바가지 같은 허 상진이가 누워 있고 열 댓살 되어 보이는 예쁘장한 소녀가 한편 구석에서 그 갸름한 얼굴을 치마 귀로 가리우면서 앉아 운다.

토방 마루에 곰보딱지 삼룡이가 황소처럼 눈을 희번득거리며 쭈구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운다.

「글쎄, 내 아들이 뭐이 부족해서 허 상진이의 사위가 못 되리란 말이야?

보통 학교를 졸업맞구, 내년 봄엔 면소에두 취직이 되겠다…… 하여간에 돈을 물든 그렇지 않으면…… 아무턴 오늘은 끝장을 보구야 갈테요!」

그러나 병상에 누운 허 상진은 한 마디 대답이 없다.

「에헴!」

하고, 그때 백 초시는 사람을 헤치고 뜰 안으로 들어 섰다.

「아, 영감님, 넘어 오십니까?」

삼룡은 꺼불하고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백 초시는 눈도 거들떠 보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 가면서

「백 초시가 이제는 영감님이 됐다? 허허……」

하고 어이가 없는 듯이 웃었다.

「백 선생께서 오늘 웬 일이십니까?」

하면서 허 상진이가 일어 나려는 것을 막고 병인의 머리맡에 놓인 五[오]백 원짜리 돈표 두 장을 힐끈 바라보며 담배를 부쳤다.

「그래 단돈 천 원에 남의 귀한 딸을 데려 가겠어?」

담배를 부치고 난 성냥불이 순식간에 돈표 두 장을 불살러 버렸다.

「아, 아, 아니, 이 영감이 미, 미쳤나?」

그러나 돈표 대신 천여 원 돈이 삼룡의 희번득거리는 얼굴 앞에 내던져 졌다.

「이자두 있을 법하니 어서 가지구 가게!」

하는 수 없이 닭 쫓던 강아지처럼 삼룡이가 사라진 후에

「벌써 찾아 뵐 것을 좀 늦었소. 소문은 일찌기 들었으되 모든 일이 여의치가 못해서…… 보아건대 병환이 중하시오.」

「송구합니다!」

허 상진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보아하니 애기 아이가 대단히 총명하오. 변변치는 못하나마 내 아들 놈니 하나 있으니 며누리를 삼읍세다.」

「황송합니다!」

「그저 불량배인 놀음꾼 삼룡이와 사둔을 맺는 것 보다는 좀 나으리다.」

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운옥을 바라보았다.

그해 늦은 가을, 허 상진은 죽고 천애 고아가 된 허 운옥을 백 초시는 자기 집으로 데려다 길렀다. 그것이 벌써 六[육]년 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