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3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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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장[편집]

1[편집]

그 이튿날 아침 차로 영민은 평양을 떠나 남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군인들을 가득 실은 군용 열차가 자꾸만 자꾸만 북으로 들어 간다. 군 용마(軍用馬)가 화물차 속에서 머리만 밖으로 내밀고 끄떡거리는 것이 우습기도 하였다. 열차 내의 이동 경찰의 눈초리가 요즘에 와서는 더 한층 무섭게 빛났다. 군수 공장 지대를 통과 할 때는 반드시 차창에 커어튼을 내리었다.

사람들은 입이 있으되 말을 하지 못했고, 귀가 있으되 들을 것을 듣지 못했다.

유골(遺骨)이 든 흰 상자를 목에 메인 일인들이 남행열차 안에 많이 보였다. 그들은 상자를 안은 채 부처님처럼 말이 없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한 어수선한 광경을 한편 구석에 고슴도치처럼 쭈구리고 않아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맹장 수술을 하였다는 유경이의 병실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린다.

쌔하얀 드높은 벽이 네모나게 둘러싼 호수처럼 고즈낙한 병실에서 행복을 찾아 헤매는 유경이가 영민은 그리울대로 그리워 지는 것이다.

편지를 쓴 이튿날 「 퇴원한댔으니까, 지금은 병원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며 영민은 유경이의 본을 따라 황야를 쏜살같이 달리고 있는 기차 유리창 수증기 위에 정성껏 써 본 글자는

「오 유경, 오 유경!」

의 여섯 글자였다.

기차가 토성(土城)역에서 멎었을 때, 영민은 혹시 누구가 보지나 않나 하고 얼른 신문지를 구겨서 벅벅 글자를 지워 버렸다.

수증기가 말끔히 지워진 차창 밖에서 영민은 그때 하나의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 야마모도 선생이 아닌가!」

지금 막 떠나려는 봉천행 군용열차가 영민의 차창에서 석자도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스름스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움직이는 차창 밖에 상반신을 내밀고 지금 정종 병으로 병나팔을 불며 내다보는 것은 군조(軍曹)의 군복을 입은 야마모도 선생에 틀림 없었다.

영민은 들창을 열고

「선생님!」

하고 외쳤다.

「오오, 백군이 아닌가?」

야마모도 선생의 얼굴이 번쩍 들리며 놀란다.

「백군, 동경 들어가는 길인가?」

「네……그런데 선생님 갑자기 어떻게……?」

거리가 차츰차츰 멀어진다. 선생은 거의 외치듯이 대답을 한다.

「명예의 초대장을 받은 것이지 뭐긴 뭐야? 하, 하, 핫……」

「그래 어디로 가시나요?」

영민도 커다란 소리로 물었다.

「그것은 소위 ○○ 방면이다! 하하핫……」

그러면서 선생은 귤을 하나 힘껏 영민을 향하여 내던졌다. 그러나 그 귤은 영민의 기차바퀴 속으로 기어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술병을 내졌는 야마모도 선생의 그림자가 조그맣게 구내를 빠져 나가면서 사라졌다.

「선생이 종시 초대장을 받았구나!」

四[사]년 전 선생과 함께 동경역에 내려서 궁성(宮城) 앞을 지나면서 하던 선생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후딱 머리에 떠 올랐다.

2[편집]

동경 역에서 택시로 「오호리」 옆을 지날 무렵에 선생은 돌연 영민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한 이야기가 문득 생각키는 것이다.

「백군, 저걸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가?」

「뭐 말씀입니까?」

영민은 머리를 돌리면서 물었다.

「저기 보이는 저 다리 말이야.」

「아, 저건……저건 이중교(二重橋)가 아냐요?」

국정 교과서나 혹은 잡지 비화(扉畵)에서 너무나 흔히 보아 온 이중교였다.

「그렇다. 저 안엔 이끼따 가미사마(산 귀신)가 있다. 자네, 귀신이 밥 먹구 애 낳구 하는 걸 본 적이 있나?」

「에엣?……」

하고, 영민은 무척 놀라면서 선생의 옆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던가.

아무리 인생관의 변모(變貌)를 일으키었다 하여도 선생의 입으로서 이러한 대담한 한 마디가 튀어 나올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동화(童話)다! 二十[이십]세기의 극채색(極彩色)을 베풀은 한 토막의 어여쁜 동화다. 그 산 귀신이 언제 어느때 나한테 초대장을 보낼지,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 하이!」

하던 야마모도 선생의 호탕한 모습이 지금도 눈 앞에 알알하다.

그때 운전수가 후딱 뒤를 돌아다 보았다.

「운전수, 왜 무엇이 못 마땅해서 그래?」

「아, 아니올시다. 선생님의 말씀이 하두 재미 있어서요.」

「왜 동화 작가 같애?」

「선생님, 소설가 아니세요? 꼭 어디서 한번 뵌 것 같습니다.」

「소설가는 되려다 낙제국을 먹구 이처럼 초라한 동화 작가로 전업(轉業)을 했네.」

「그런데 선생님, 그 산 귀신의 초대장이 어제 나한테 왔답니다.」

「응?……그래 그런 초대장을 받구두 이처럼 일을 할 생각이 나는가?」

「그럼 늙은 어머니 한 분을 누구가 먹여 살립니까?」

「흥, 그러나 자네 운전만은 잘 해 주게. 전선대 떠 받질랑 말게.」

「염려 마십쇼.」

「초대장을 받고도 참석 안 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까?」

「아, 그런 방법이 있읍니까?」

지남철에 쇠부치가 달려 붙듯이 달겨 든다.

「아, 하, 하……거짓 말이야, 거짓 말!」

「아이, 참 선생님두 ──」

그러는데 자동차가 「구단시다」를 지난다.

「백군, 저 언덕 위에 보이는 것이 청국신사(靖國神社)야. 만주 땅 하나론 배가 차지 않아서 중국 땅까지를 먹어 보려는 욕심 많은 산 귀신에게 초대를 받았다가 황천객이 된 귀신들을 모셔둔 곳이라네. 그 귀신들이 ── 이건 진짜 귀신이네. 하두 억울하다고 울고 불고 하는데 국밥이라두 떠놓고 고사라도 지내 주려구 한 것이 소위 청국신사 제(祭)야.」

「하하하……선생님 얘기, 참 재미 있어요.」

하고 운전수는 유쾌하게 웃었으나 영민의 엄숙한 얼굴은 통 웃을 줄을 몰랐다.

인생의 표면만을 보아온 영민은 그 이면에 숨은 또 하나의 인생을 발견하고 놀랐던 것이다.

「인생에는 두 가지의 현실이 있다. 하나는 행동의 현실이요, 하나는 관념의 현실이다.」

영민은 그때 그렇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야마모도 선생이 종시 초대장을 받았구나!」

영민은 야마모도 선생이 사라진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감개무량 하였다.

「그러면 저 야마모도 선생과 결혼을 하였던 나미에는 어찌 되었을꼬?」

영민은 그 순간 선생의 순조롭지 못한 신혼생활의 일단을 문득 회상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