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3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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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악마와 같이[편집]

1[편집]

흉내를 내던 잠이 정말 깜박 들어버린 장 일수와 신 성호였다.

술기운이 춘심이의 사지를 훈훈하게 적시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눈동자가 춘심이의 얼굴을 한층더 어여쁘게 장식한다.

영민은 문득 춘심의 얼굴에서 천국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랑의 천사의 요염에 가까운 정열의 어여쁨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키만 컸던 四[사]년 전에는 모르고 지난 어여쁨이었다.

「속절없는 인생이라지 않아요? 흥, 화류계 여자에겐 순정이 없었던가요?

대학생은 뽐만 내랬나? 이거 왜 그러는 거유?」

춘심은 목이 탄다. 영민의 무릎에 몸을 기댄 채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백 초시 아드님 그처럼 훌륭했던가요? 곰보딱지 삼룡의 딸이 그처럼 보잘 것이 없었던가요? 이거 왜 그러는 거야? 그 누구가 잘나서 대학엘 다니구, 그 누구가 못나서 기생 노릇을 하는 줄 아시유?」

「분이!」

「춘심이래두 그러셔?…… 분인 죽었대두!」

「분이, 오해하면 안됩니다.」

「오핸 또 무슨 오해요? 터놓고 보면 그렇지 뭘 그래요? 그 누구가 못 사니까 못나서 못사는 줄 알구……그 누구가 큰기침을 하구 댕기니까 잘나서 그러는줄 아시유?」

「분이는 왜 그런 말을……」

영민은 무척 당황한다.

「분이는 죽었대두 그러셔? 이런 투정을 단 한 마디라두 해 보구 죽었으믄 분이 두 한이 없지! 가엾은 분이! 가엾은 분이는 아름다운 꿈을 젖가슴 밑에 포옥 안고 죽었다우! 먼 나라로 시집을 갔다우!」

그러다가 벌떡 몸을 일으켜서 이번에는 빤히 영민의 얼굴을 바라보며

「왜 그러는 거야? 대관절 뭣 때문에 그러는 거야?」

「춘심인 술이 좀 취했소. 신군이 춘심일 어떻게나 사모하고 있는지, 춘심인 모를 꺼요. 외로운 신군이요. 위로해 주시오.」

「그래 고것 뿐이요? 아주 우정이 다사롭구료? 대학생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랜나? 외로운 신군만 눈에 보이구 외로운 춘심인 보이질 않아요?」

그러다가 춘심인 그만 식탁에 왈칵 업드려지며 흐흐흐 느껴 운다.

영민은 땀이 난다. 손수건을 꺼내 확확 다는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를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서 유리 들창을 드르르 열었다.

캄캄한 하늘이다. 보오얗게 눈이 내린다. 춘심이의 작열된 정열이 가득 찬 방안에 상쾌한 냉기가 휙 불어 들어 온다.

영민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때, 무릎 위에 놓였던 손수건이 식탁 위에 엎드려 진 춘심이의 손등에 나비처럼 떨어졌다. 춘심이의 손가락이 무심중 그 손수건을 움켜 쥐고 얼굴을 가리우면서 발딱 몸을 일으키어 영민을 따라 들창 가로 걸어 갔다.

그때까지 운옥은 뛰노는 가슴을 간신이 억누르며 요정을 중심으로 미친 듯이 뺑뺑 돌아가고 있었다.

「얼마나 컸을까? 얼마나 변했을까?」

단 한 번 먼 발로라도 그 분을 보고 싶은 맹렬한 충동이 운옥의 온 몸을 폭풍처럼 휩쓸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2층 들창 문이 드르르 열리며 학생복을 입은 백 영민이가 나타나는 순간, 운옥은 총알에 맞은 짐승처럼 후닥닥 놀래며 전선대 뒤에 몸을 감추어 버렸다.

「그이다! 그분이다!」

가슴이 터져 나갈것 같았다. 숨이 막힐것 같았다. 바로 자기 등 뒤에서 요란한 전차의 궤음이 우웅하고 지나가건만 운옥은 영민의 숨소리를 귀에 듣는 것 같았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보오얗게 내리는 눈발 속으로 희미하게 바라보이는 아아, 저 그리운 모습이여!

「어른이다! 어른이 되셨다!」

온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운옥이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바로 그때, 기생인 듯싶은 한 사람의 여인이 나타나면서 영민의 어깨에다 팔을 얹었다.

「………?」

2[편집]

눈 내리는 바깥 어둠과 우뚝 마주 선 영민의 어깨에 기생은 손을 얹었다.

손을 얹고 영민과 나란이 서서 밖을 내다보다가 돌연 얼굴을 영민의 몸에 파묻는다. 우는것 같았다.

운옥은 또 한 번 후닥닥 놀래며 얼핏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돌려 캄캄한 하늘에 수 없이 나부끼는 눈송이를

「하나, 둘, 셋, 넷……」

하고, 세기 시작했다.

보아서는 아니될 것을 운옥이는 본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이 죄를 진 사람처럼 얼굴이 확확 단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시 시선을 이층으로 던졌을 때, 영민은 자기 팔에 파묻친 여인의 두 어깨를 조용히 떠밀며 살그머니 여인의 옆을 떠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 없었으나 한편 한량 없이 기쁜 운옥이었다. 박준길의 정열을 죽음으로서 항거한 운옥이었으며 김 준혁의 정열에서, 그리고 장 일수의 정열에서 역시 살그머니 자기 몸을 피한 운옥이였기 때문에 남편의 그러한 행동이 운옥을 무척 기쁘게 하였다. 믿음직 하였다.

그러나 운옥은 지금 자기 등 뒤에 약 백 미터 ─ 거리에서 애꾸눈이 박 준길이가 땅개 최 달근과 함께 천일관을 향하여 헐레벌떡 걸어오고 있는 줄을 꿈에도 알 길이 없었다. 운옥은 그저 뚫어질 듯이 영민의 자태가 사라진 이층만 쳐다보고 멍하니 섰다.

「아버지 말을 들으면 영민이가 틀림없이 상경했다니까 신 성호와 영민이가 필경 만났을 것입니다.」

박 준길이가 하는 말이다.

「음, 그러니까 장 일수도 십중팔구 왔을 것이라는 말이야.」

최 달근의 대답이다.

전선대 뒤에 서서 멍하니 이층을 바라보고 섰는 운옥과 그런 말을 하면서 걸어오는 박 준길이와의 거리는 불과 二[이], 三[삼]미터 ─ 밖에 더 떨어지지 않았다.

만일 하늘이 수난의 여인 허 운옥의 걸어온 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불과 一[일], 二[이]미터 ─ ( )뒤까지 닥아온 운옥의 악착한 운명을 한 줄기 동( )의 눈물로서 거두어 줌이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 )것이 하늘의 뜻인 동시에 인간의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는 운옥는 그저 영민이가 사라진 들창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어떻거면 한 번 더 그 그리운 모습을 볼 것인가 하였다.

하여튼 오늘 「 밤은 대통령의 손목에다 수갑을 채워야만 한다!」

운옥은 후닥닥 놀래 이층에서 시선을 돌리며

「대통령?……」

대통령이란 장 일수의 별명이 아닌가! 그 어떤 불길한 예감을 등골에 느끼면서 전선대 뒤 컴컴한 골목 안으로 운옥은 얼른 몸을 피했다.

「그러지요. 장 일수가 오기만 했다면야 포대에 든 쥐새끼니까요.」

전투모에 국민복을 입은 두 사람의 사나이가 운옥의 코 앞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헐레벌떡 지나간다. 지나가면서 두 사람은 컴컴한 골목 안에 우두커니 선 운옥을 힐끗힐끗 바라본다.

운옥은 가슴 속이 콩알만 해졌다. 오싹하고 달려드는 몸서림과 함께

「앗!」

하고 그순간, 하마트면 저도 모르게 고함을 칠 번한 운옥이었다.

「준길이가 아닌가? 박 준길이다!」

그렇다 그것은 애꾸눈이 박 준길 임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위험은 지나가 버렸다. 아니, 지나가 버리려던 위험이 그 때 다시금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천일관 현관을 향하여 들어가던 두 사나이 가운데 한 사나이가 유달리 운옥을 힐끗힐끗 돌아다 보다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마침내 발길을 돌려 운옥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오면서

「아, 여보, 여보!」

하고, 운옥을 불렀다.

3[편집]

「운옥이! 운옥이!」

하고, 짐승처럼 대들던 태극령 고개의 그 무섭던 기억이 다시금 운옥의 전 신경을 긁어 쥔다. 아아, 인제 방금 코 앞을 지나 가던 그 지긋지긋한 애꾸눈의 두려움이여!

사나이는 다가 온다.

「아, 큰일 났구나!」

후닥닥 놀래며 행길 밖으로 뛰어 나가려는 운옥이 등 뒤에서

「여보!」

하고, 사나이는 재차 불렀다.

그순간 운옥은 두 서너 걸음 뛰어 나가던 발길을 우뚝 멈추며

「아아, 하늘이여!」

하고, 맘 속으로 하늘을 찾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애국가를 부르고 박 준길의 눈알을 파낸 허 운옥을 하늘은 끝끝내 용서하지 않을 셈인가?

「당신 거기 무엇 하러 서 있소?」

목소리가 뒤통수까지 다가 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준길이의 음성은 아니었다.

운옥은 우선 후우하고 숨을 내 쉬며 돌아섰다.

「저……저……」

〈아아, 뭐라고 대답을 할까?……〉

「저어…저어……저의 집 주인이……」

그러면서 문득 요정 쪽을 바라보니 애꾸눈이 준길이가 전등이 환한 현관 앞에서 드나드는 손님을 유심히 살피고 섰다.

「아, 당신 바가질 긁으러 온 모양이구려? 흐흐흥」

그러면서 최 달근은 운옥의 얼굴을 핥는듯이 들여다 본다.

「아니 저…그런건 아닙니다만……밤낮 집을 비구 요리집에만 파묻쳐서……」

「흐흥, 그러나 당신처럼 꽁무니만 따라 댕긴다구 바깥 양반의 난봉이 쉽사리 멎는건 아니요. 바깥 양반이 오늘 밤 집으로 돌아 가거든 당신두 저기 생 아씨들 처럼 써 ─ 비스를 좀 잘 해 보구려. 히히히……」

그러면서 최 달근은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다시 준길이가 기다리고 있는 현관으로 들어갔다.

「후우!」

운옥은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늘이여, 감사하나이다!」

하늘이 마침내 무심하지는 않았다. 하늘이 끝없이 운옥은 미더워 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운옥은 자기 몸에 절박했던 위험과 똑 같은 위험이 대통령 장 일수의 신변에 절박한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이 일을 어찌 하노?──」

바라다 보니 준길이와 사나이는 잠깐동안 사방을 살피고 섰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이 요릿집 현관으로 선뜻 들어 선다.

「이 일을……이 일을 정말 어쩌면 좋을까?……」

운옥은 발을 동동 굴렀다.

현관을 들어선 두 사나이는 사무실로 들어가서 보이들과 무엇인가를 수군거리고 있는 것이 유리문을 통하여 희미하게 바라다 보인다.

어떻거면 어떻거면 「 …… 장 선생님께 이 절박한 위험을 알릴 수 있을 것인가?」

이층 들창 문은 아까 영민이가 연채로 그냥 있다.

「고함을 칠까? 고함을 쳐서 장 선생을 부를까? ──」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자기를 싫어하는 영민이가 자기의 모양을 들창 밖에 발견한다면 아아, 얼마나 놀랠 것인가?…운옥은 차마 자기의 초라한 자태를 훌륭한 대학생이 된 영민의 호화로운 시선 앞에 내놓기가 무척 무서웠다.

「그러나 하는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