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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1권/4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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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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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한 시에 영민과 유경을 태운 연락선은 부산항을 떠났다.

때는 一九四二[일구사이]년 정월, 미일전쟁이 일어난지 一[일]주년 남짓한 무렵이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선 안에는 경관의 눈이 무섭게 회번득 거리고 있던 판이라, 시국이 긴박해짐을 따라 여객들을 단속하는 그들의 충혈된 눈초리는 한층 더 무섭게 번쩍이었다.

「승객 여러분, 이 배는 지금 부산항을 떠나서 일로 목적지인 하관을 향하여 달리고 있읍니다. 그러나 과연 이 배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런지 어떨런지는 감히 예측할 바가 없읍니다. 그러나 어떠한 사태가 돌발 하더라도 승객 여러분은 침착과 질서있는 행동을 취하여 주십시요.」

흰 까운을 입은 사무원이 그렇게 외치면서 돌아간다.

조선해협(朝鮮海峽)에 적군의 잠수함이 출몰한다는 기사가 신문지상에서 떠돌고 있을 무렵이다.

연락선은 위험하니 二[이]등을 타자는 유경의 의견을 구태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사람들은 「콜크」로 만든 구명기(救命器)를 하나씩 몸에 동여매고 있었으나 영민과 유경은 그럴 생각도 없이 사람들 틈에끼어 가지런히 누웠다.

승객들은 일종의 헤아릴 수 없는 공포에 모두들 어두운 얼굴을 지었건만 영민과 유경은 어쩐지 죽는다는 것이 조금도 무섭지 않는다. 도리어 그 죽음이 두 사람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리고 비장하게 장식할 것만 같았다.

「유경씨, 무섭지 않읍니까?」

「아뇨.」

영민은 머리를 돌려 유경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가슴 위에 손을 가지런히 얹어놓고 피곤한 듯이 두 눈을 고즈란히 감은채

「영민씬?……」

하고, 앵무새 처럼 반문을 한다.

「죽는다는 것이 이처럼 무섭지 않을 리가 있을까요?」

영민도 반듯이 누워 눈을 감고 대답을 한다. 유경이의 털요로 아랫 동아리를 같이 덮은 두 사람이었다.

유경은 대답이 없다. 쿡 꺼질것 같은 한숨을 가만히 짓는다. 행복스러운 한숨이었다. 발동기 소리가 요란히 고막을 울린다. 그 리드미칼한 동요가 피곤한 유경의 몸을 상쾌히 흔들어 주는 것이 무척 좋았다. 준혁 오빠를 생각한다. 미안해 진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미안해질 하등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오늘의 행복을 유경으로 하여금 마음놓고 즐기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경은 오늘의 행복 가운데 자기 자신을 마음껏 적시면 그만이다.

「주무셔요?」

「아니요.」

「왜 안 주무셔요?」

「유경씬 왜 안 주무시나요?」

「잠들어 버리는게 아까워요.」

「………」

영민은 대답이 없다.

「곤하심 어서 주무세요.」

「아까워서 못 자시는 잠을 나 혼자 자서야 되겠어요?」

거기서 두 사람의 대화는 또 끊어졌다.

한참 있다가 또 유경은

「지금 무얼 생각하세요?」

「이것 저것……이런 것 저런 것을……」

「무얼 그리 많이 생각 할께 있어요? 난 한 가지 밖에 생각 하는게 없는데……」

「그게 뭔데요?」

「흐흥……」

눈을 감은 채 유경은 가만이 웃으며

「그림자!」

「그림자라뇨?」

「행복의 그림자!」

「행복의 그림자라구요?」

그렇다. 영민은 유경에게 있어서 행복의 그림자 일른지 몰랐고 유경은 영민에게 있어서 역시 행복의 환영(幻影)일른지 몰랐다. 그리고 그 행복의 그림자를 위하여 유경은 준혁 오빠를 버렸고 영민은 부모를 버렸다. 설사 행복이라고 믿었던 그것이 불행과 절망을 가져 올지라도 젊은이들의 생리는 그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것이 오직 젊은이들이 걷는 단 하나의 길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사랑은 그리 긴 역사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작년 여름 친구의 소개로 오 유경을 알게 되었을 때, 영민은 자기 자신을 무척 경계하였다.

그것은 다른 여인과 정을 통하지 않겠다고 아버지에게 맹세한 때문은 아니다.

한두 번 유경을 만나는 동안에 영민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희미하게 그리고 있던 한 사람의 아름다운 여인을 유경이에게서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기의 그 발견이 경솔하고 헛된 것이 아님을 재발견 할때까지 영민은 무척 조심성스럽게 유경을 대비하였던 것이다.

영민은 자기 어머니나 또는 운옥에게서 발견하지 못하던 가장 중요한 것을 유경이에게서 발견하였다. 그것은 감정의 자연스러운 노출이며 정확한 표현이었다. 어머니와 운옥에게는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는데 아름다움이 있었건만 영민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채 그 세계에서 뛰쳐 나왔다.

그 탄력성을 잃은 세계에서 뛰쳐 나오는 길에 영민은 분이를 ── 아니 기생으로 변한 춘심을 차에서 만났다. 조용하고 어른다운 운옥의 감정 세계만을 보아 오던 영민의 눈에는 춘심의 호화로운 모습과 감정이 너무나 황홀하였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였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영민이 요구하는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작열된 춘심의 뜨거운 정열에서 간신이 몸을 피하였던 것이다. 춘심의 너무 지나친, 과장된, 부자연한 감정의 노출이 도리어 영민의 영혼을 부여잡지 못하고 놓아 주었던 것이다.

작년 가을 어떤 날, 유경이가 학교 기숙사에서 영민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에 이러한 한 마디가 있었다.

「나는 아직 영민씨에게서 허위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영민씨가 제게서 허위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처럼……」

그것은 실로 대담한 한 마디였다. 상대편이 자기에게서 허위를 발견하지 못했을 께라는 단언을 이처럼 자신있게 한 오 유경을 영민은 정말 탐탁하게 생각하였다. 거기 대한 영민의 회답의 한 구절은 또 이러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아마 나는 오 유경이라는 한 사람의 여인에게 나의 정신적, 육체적인 모든 것을 바칠런지도 모르겠읍니다. 원컨대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읍니다.」

연애는 인간수업(人間修業)에 있어서 인생이 부닥치는 맨 처음의 도장(道場)이다. 연애를 어떻게 하였느냐? 그것은 그 사람의 이력서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한 대목인 동시에 그 사람을 품평(品評)하는 가장 적절한 시금석(試金石)이다. 유경도 그렇게 생각하고 영민도 그렇게 생각되었다.

풍랑이 차츰차츰 거세지는 것 같다. 기선의 동요가 점점 심해진다. 둥그런 들창으로 내다 보이는 바깥은 캄캄하고 처참하다. 무시무시하게 큰 파도가 들창에 무섭게 부딪친다. 사람의 몸둥이가 이리 딩굴고 저리 딩군다.

아까부터 입을 악물고 눈을 꼭 감고있던 유경이가 발딱 몸을 일으키었다.

「유경씨, 괴롭읍니까?」

영민도 따라 일어 났다.

「네, 나 토할것 같애요. 나 『토일렛』에 갔다 올테야요.」

「아, 그럼 여기 타구가 있는데 여기다 토하세요.」

「아뇨. 나 갔다 올테야요.」

유경은 비틀거리면서 사람들 틈으로 걸어나간다.

신발이 너저분 하니 흩어져 있는 좁고 긴 복도를 유경은 두 손으로 입을 꽉 막고 허둥지둥 「토일렛」으로 들어가자 대리석 댓돌에 놀라 서기가 바쁘게 손을 뗐다. 창자를 속속들이 긁어 내는 것같은 혹독한 고통과 함께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먹은 것들을 죄다 토해 놓았다.

뱃멀미가 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저녁으로 먹은 삼랑진(三浪津) 뱀장어 밥이 나빴는지도 모른다. 맞은편 벽에 이마와 손을 대고 배의 동요로 말미암아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지탕하며

「아이, 이런 꼴을 그이에게 보이지 않은 것만이 다행이지.」

그래서 괴로움을 무릎쓰고 부랴부랴 「토일렛」으로 찾아 온 유경이었건만 그러나 기진맥진하여 배가 흔들리는 대로 이리저리 쓰러지려는 유경의 몸둥이를 뒤에서 부축하며

「어서 죄 토하세요. 그러면 속이 편안해 질테니까.」

그것은 영민의 목소리였다. 그 말에 유경은 호닥닥 놀래며 외쳤다,

「아이, 저리 가세요! 보지 마세요! 더러운 것 보지 마세요!」

「자아, 어서 토하세요.」

영민은 유경의 등을 두서너 번 쳤다.

「보면, 보면 난 싫어!」

유경은 울상을 지으며 돌연 영민의 두 눈을 제 손으로 감기었다.

「눈을 꼭 감고 저리 비키세요!」

처녀로서의 오 유경의 결백성은 그것을 보는 순간, 자기에게로 향하고 있던 영민의 애정이 멀어질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영민은 하는 수없이 세면대로 와서 「알미늄」컵에다 물을 떠 놓고 수건을 적시어 들고 유경을 기다렸다. 이윽고 유경이가 해말쑥하니 핏기를 잃은 얼굴로 세면대 앞으로 걸어왔다.

「좀 어떠세요?」

영민은 근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유경은 그 말에 대답이 없고

「글쎄, 영민씨, 왜 따라 오셨어요?」

유경은 다시 울상을 지으며 어쩔 줄을 모르고 묵묵히 서있는 영민의 손에서 수건과 컵을 받아들고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였다.

「한결 속이 시원해 졌어요.」

유경은 아까 물은 영민의 물음에 그때야 대답을 한다.

영민은 오 유경의 뾰족한 성격의 일면을 오늘 비로소 본 것 같아서 꾸지람을 듣는 어린애처럼 잠자코 서 있다가

「빨리 자리로 돌아 갑시다.」

하고, 유경의 상반신을 부축할 요량으로 손을 내밀었다.

유경은 무심중 그 손을 잡았다. 잡았다가 다음 순간, 그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후닥닥 손을 놓았다. 손을 놓고는 쏜살같이 복도로 뛰어 나갔다.

기선의 동요는 조금도 멎지를 않는다. 쓰러질듯, 쓰러질듯 하면서도 유경의 탄력있는 다리는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자리까지 걸어갔다.

유경은 담요를 머리까지 푹 쓰고 사람들 틈에 누웠다. 아까는 두 사람의 자리가 충분하였는데 돌아와 보니 유경이가 혼자 간신이 누울 정도다. 담요를 뒤집어 쓴 유경의 얼굴이 화끈단다.

「내가 남자의 손을 만진 것이 이번이 두 번째다.」

유경은 마음 속으로 중얼거려 보는 것이다. 저번 날 수술을 받을 때 백포 밑으로 준혁의 손을 마져본 기억이 새로워 진다.

유경은 영민에게 잡혔던 오른 손바닥으로 자기의 상기된 볼편을 어루만져 보았다 코 . 밑에 대고 맡아 보았다. 입술에 대고 맞추어 보았다.

그때 영민이가 자리로 돌아왔다.

조금 전 까지도 자기 자리였던 것이 점점 좁아 들어서 유경의 발 옆으로 조그만 틈사리가 하나 남았을 뿐이다. 영민은 그리로 부비고 들어 가서 쪼구리고 앉았다.

「그냥 괴로워요?」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 쓴 유경은 대답이 없다.

담요가 짧아서 유경의 발이 목까지 들어났다. 살빛갈 「씰크」양말에 씌운 두 개의 발목이 마네킹의 그것 처럼 매끄럽고 이뻤다.

영민의 시선이 자꾸만 그리로 간다. 그 무척 유혹적인 유경의 발을 감출 셈으로 영민은 담요 끝을 발밑으로 잡아당겼다. 그러나 얼굴을 덮은 담요의 윗끝을 유경은 좀처럼 놓아 주지를 않는다. 두 개의 발은 그냥 댕그라니 영민의 눈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영민은 하는 수 없이 유경의 그 매혹적인 발의 유혹을 물리치고자 눈을 감고 쪼그리고 앉은 자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캄캄한 망막 속에 피어 오르는 한송이의 검화(瞼花) ── 그것은 四년 전자기가 고향을 떠날 때 그대로의 운옥의 모습이 었다.

「그는 지금 어디서,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꼬?」

하였다.

「불쌍한 사람이다.」

그렇게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늘 날까지 자기가 취해 온 행동에 대하여 하늘이 부끄럽거나 땅이 부끄럽거나 하는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있다면 그것은 다만 미안한 생각 뿐이다. 운옥에 대해서도 그렇고 배반하고 나온 부모에 대해서도 그랬다.

「아버지는 나를 얼마나 원망할까?」

그것을 생각하면 영민은 뼈가 저렸다.

「지금쯤 아버지께서는 잠 못 이루시는 이 밤을 영원히 떠나 버린 아들을 생각하며 뜬 눈으로 밝히시리!」

영민은 자기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포기해 버리고 운옥을 위하여, 아버지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리라,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만 한다면 운옥이가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아버지께서 얼마나 좋아 하실 것인가!」

그 기쁨 그 좋아하심 가운데서 , 완전히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데 행복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영민은 젊었다. 그보다 좀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행복이 자기의 인생에는 있을 것 같았고 또 한 있어야만 하였다.

「자기 인생의 궤도(軌道)를 자기 자신의 손으로 부설하는 데서 비로소 가치 있는 행복은 찾을 수 있다.」

고, 영민은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인생에 있어서 지금 오 유경이란 하나의 궤도를 발견한 영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자기 자신의 손으로 부설하려는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영민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다. 쪼그리고 앉아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잠이 들었던 영민이가 얼마 동안을 잤었을까, 기선의 동요로 말미암아 후딱 눈을 떴다. 눈을 떠 보니 유경이가 누웠던 자리에 자기가 눕고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유경이가 앉아서 방그레 웃음을 짓는다.

영민은 후닥닥 몸을 일으켰다.